EP.263 263화 - 주인공이 공략당함(3)
“으흥흥~.”
새로 구매한 밝은색 계열의 니트.
“예쁘다.”
전신거울 앞에서 몸을 이리저리 돌려 가며 자신의 모습을 감상한 정은주는 해맑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요즈음 올리고 있는 피아노 커버 영상들은 모조리 대박이 났고, 버클리 음악대학의 졸업까지도 확정을 지었다.
그 기념으로 정은주는 요번에 그녀의 친구 예슬이, 지나와 함께 쇼핑에 나서서 통 크게 비싼 옷들을 질렀다.
거의 한 70만 원 가까이 나갔지 아마.
그래도 다행스러운 점은, 사용한 돈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옷들이 나름 잘 맞았다는 것이다.
“히이, 이대로 입고 나가자.”
신발은 부츠, 목은 가벼운 남색 목도리로 둘러준다.
오늘이 하필이면 상당히 추운 날이라, 바깥 온도는 영하를 가리키고 있었다. 은주는 장갑을 끼고, 곱디고운 손으로 커다란 캐리어를 끌었다.
“후아, 이제 진짜로 끝인가......”
방에서 나와 굳건히 닫힌 기숙사의 문을 바라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굿바이 기숙사, 굿바이 친구들......
처음 유학을 시작할 때만 해도 이런 순간이 오기까지 정말로 까마득한 세월이 흘러야 할 것만 같았지만, 막상 지내보니 그저 눈 깜짝할 세였다.
“으, 괜히 눈물 나려고 하네.”
은주는 고개를 휙휙 젓고, 서둘러 기숙사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계속 바라보고 있으니 뭔가 짠한 게 올라왔다.
그녀는 오늘을 마지막으로 미국, 보스턴을 떠난다.
원래 은주는 한두 달 정도를 더 미국에서 생활하면서, 버클리 음악대학 졸업식까지 깔끔하게 마친 다음에 한국에 복귀하려고 했다.
남는 시간 동안은 지나나 예슬이랑 좀 놀러 다니기도 하고, 학교 그랜드 피아노를 빌려 커버 영상도 더 찍고......
그래서 하린이한테는 처음에 2월 정도에 합류할 거라고 했었다.
그런데, 예슬이가 여러 가지로 바빠지고, 지나도 해야 할 일들이 생겨나면서 마지막 몇 개월을 함께 장식할 친구들이 사라졌다.
뭐, 외국에서 나름대로 오랜 시간 동안 지내며 연락처에 저장된 친구들은 많았지만...... 딱히 같이 놀만할 정도로 친한 애들은 둘이 끝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마침 부모님에게 연락이 온 것이다.
‘그냥 와.’
‘응?’
‘그냥 한국 오라고. 어휴우, 내 딸 얼굴 좀 보자.’
유학을 오랫동안 다니면서 부모님 얼굴도 자주 못 뵌건 사실이었다. 요번에 하린이랑 같이 자취를 시작하게 되면 또 뵐 기회가 적어지겠지.
그래서 정은주는 12월 한 달은 부모님 집에서 지내기로 하고, 곧장 1월부터 하린이와 같이 자취를 하기로 결정하게 되면서 오늘로 귀국 날짜를 잡았다.
‘가을학기는 어차피 다 끝났으니까.’
졸업을 위한 학점은 전부 채웠다.
원래 미국에서는 대부분의 학생이 6월 정도에 봄학기가 끝나고 졸업식을 진행하지만, 은주는 필수가 아닌 여름학기까지 모조리 수강해 빠르게 학점을 채워 내년 5~6월이 아닌 요번 겨울 졸업식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졸업식까지는 아직 1달도 넘게 남아있었지만, 그냥 한국으로 돌아갔다가 졸업식 때만 잠깐 미국에 들리기로 했다.
정 뭐하면 참가 자체를 안 해도 되고 말이다.
“은주야아......”
“아, 예슬아.”
터벅터벅 걸어서 기숙사 밖으로 나가자, 미국에 와서 사귄 그녀의 친구 신예슬이 살짝 글썽거리는 눈으로 은주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막 새벽 6시가 되는 이른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정말 고맙게도 마지막을 마중하러 나와준 것이다.
“연락 자주 해에...... 알았지?”
“당연하지. 너야말로 바쁘다고 톡 너무 안 보지 말고.”
“무슨 소리야. 내가 언제 안 봤다구.”
“오호라. 굳이 전적을 파헤쳐야만 인정을 하시겠다, 이건가?”
“아하하...... 앞으로는 매일매일 잘 확인할게.”
신예슬.
대학교에 들어와서 사귀게 된 또 다른 한국인 친구 예슬이는 뭔가 소심하면서도 순진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언뜻 보면 잘 안 어울릴 것만 같은 조합이지만, 예슬이는 자신과 지나와 함께 셋이서 정말 잘 어울려 다녔다.
자신이야 이제 학기를 다 끝마쳐 한국으로 돌아가지만, 예슬이는 1년 더 남아서 공부하다가 한국으로 오기로 했다.
‘석박사라니...... 진심인가.’
모든 대학원 학생들이 공통으로 하는 말이 있다.
대학원은 지옥이다! 절대 선택해서는 안 될 곳이다!
그런데, 예슬이는 그 험난한 길을 직접 걸으려고 하고 있었다.
그래서 사실은 그녀가 내년에 꼭 한국에 돌아온다는 법도 없었다. 예슬이는 아직 한국 대학원을 갈지 미국 쪽 대학원을 갈지 고민 중이라고 했으니까.
‘으음, 부디 무사하길. 아디오스.’
뭐, 다 본인 선택이다.
만약 미국 대학원을 간다고 하면 정말 오랜 시간 동안 떨어지게 되겠지.
그래도 요즘은 워낙 메신저 기능이 발달해 있으니까. 친한 친구와 물리적으로 멀어지는 게 아쉽기는 했지만, 자주 연락하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 도착해서 연락할게.”
“으응, 잘가아......”
예슬이와 가볍게 걸으며 마저 마지막 인사를 나눈 다음, 정은주는 대학 근처를 지나다니는 공항버스에 탑승했다.
보스턴 로건 국제공항행.
얼마 걸리지 않아 은주는 공항에 도착했고, 여러가지 탑승수속을 마치고 공항 게이트 안으로 들어갔다.
도착 예정지는 ICN, 인천 국제공항.
뻥 뚫려 있는 유리창 밖의 풍경을 바라보며, 정은주는 감상에 젖었다.
지나는 부모님을 뵈러 간 상태라 마지막 마중을 못 나왔지만, 그래도 그제인가 예슬이랑 셋이서 같이 술 파티를 벌이며 여러 가지로 즐겁게 놀았다.
사실은 좀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긴 했다.
‘또 진현이 타령하면 큰일날라......’
어우.
정은주는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진현이에 대한 지나의 사랑은 아주 지독했다.
몇 번 만나지도 않았는데 생각날 때마다 이야기를 자주 꺼내곤 했다. 그중에는 특히나 상스러운 말들이 아주 많았다.
세계 최강의 좆이니, 사상 최고의 자지 천재니 뭐니......
지나가 하는 말들은 정말 들어도들어도 민망하기만 했다.
이 정도 찬양이면 저번처럼 그냥 즉석해서 비행기 표를 끊어버리고 같이 한국행 비행기에 탑승할지도 모를 일.
‘그럼 안 되지......’
외국에서 오랜 시간 있었지만, 정은주의 생각은 역시 확고했다.
육체적인 사랑보다는 정신적인 사랑!
물론, 다른 사람들이 나누는 육체적 사랑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다만, 적어도 정은주 자신은 쾌감보다는 정신적 교감을 더 중요히 여겼다.
그런 의미에서 그녀가 보스턴에 놀러 온 진현이를 우연히 마주했을 때는 상당히 충격이었다.
[ 아, 죄송합니다. 이 호텔 방에서 묵는 분들이신가요? ]
여자 두 명이랑 같이 놀러 온 것도 모자라, 지나랑 섹스를 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하던 그 모습......!
분명 같이 놀러 온 여자친구가 있을 텐데도, 진현이의 행동은 거침없었다.
물론, 지나가 진현이한테 먼저 꼬리치고 유혹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이 놀러 온 여자친구랑 한 방에서 섹스를 하고 지나를 기절시킬 줄 정은주는 꿈에도 몰랐다.
옛날의 순둥순둥했던 진현이를 기억하고 있던 정은주에게, 그때의 기억은 충격 그 자체였다.
아직도 호텔 방 문을 열고 들어갔는데, 기절해있던 지나와 아주 예쁜 얼굴의 다른 금발 여자. 진현이의 자지가 덜렁거리며 흔들리던 모습은 정은주의 기억 속에 깊이 박혀 있었다.
최근에 한국에 들러 카페에서 하린이랑 같이 진현이를 봤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진현이는 옛날과는 정말로 달라진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더니......’
키랑 외모 분위기부터 정말로 딴판으로 변해 있었다.
물론, 진현이가 변한 게 딱히 안 좋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여전히 진현이를 봤을 때 옛날 생각도 나고, 이전의 그 모습이 살짝 보이기도 했다.
게다가, 진현이는 하린이를 제외하면 지금 한국에 있는 거의 유일한 친구니까.
애초에 자신과는 사촌 관계이기도 하고.
아무래도 심심하거나 좀 외롭다 싶으면 자주 만나지 않을까?
너무 오랜만에 봐서 살짝 서먹할 수 있지만, 몇 번 만나다 보면 금방 친해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 궁금하기도 했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길래 저렇게 변한 것인지.
진현이가 정말 지나처럼 육체적인 관계로만 여자들을 만나는 걸까?
은주는 지나를 워낙 오랫동안 봐온 터라, 그녀가 멸망으로 이끈 커플이 아주 많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육체적인 관계로만 이성을 대한다면 분명 안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으, 아니. 오지랖인가......?’
어쨌든, 정은주는 게이트에서 잠시 대기하다가 비행기에 탑승했다.
[ 승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도 우리 아시아항공을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비행기는...... ]
안내 방송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비행기는 이륙하고 하늘을 날았다.
15시간에 걸친 비행 끝에 한국에 도착하면, 우선은 부모님 집에서 묵은 다음에 8일 날 진현이와 하린이를 만나기로 했다.
아까 공항버스에서 둘과 톡을 나눴다.
원래 8일은 하린이 혼자 계약서를 작성하러 가는 날이었지만, 미리 한국에 귀국하게 되어 은주 또한 그 자리에 합류하기로 했다.
저번에 카페 진현이를 보기는 했지만, 그때는 지나도 있었고, 하린이의 친구인 민지아도 있었으니까.
오랜만에 셋이서 만나면 좋을 것 같았다. 옛날처럼.
“흐아암......”
졸리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니 은주는 졸음이 쏟아져 내림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오늘 일찍 나온다고 잠을 못 자기도 했지.
‘조금 잘까......?’
정은주는 잠시 창밖을 바라보다가 그대로 눈을 감았다.
쌔액, 쌔액-
그녀는 오랜만에 옛날 꿈을 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