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62 262화 - 주인공이 공략당함(2)
“몸 풀고 있었어?”
“아, 하린아. 응. 스트레칭 거의 다 했어.”
서둘러서 헬스장으로 내려가자, 먼저 운동복으로 갈아입은 민지아가 몸을 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미안. 나도 빨리 갈아입고 올게.”
주하린은 민지아한테 사과한 다음 곧바로 탈의실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었다.
레깅스에 스포츠브라, 커버업 티셔츠까지.
“후우.”
운동할 때 언제나 걸치는 복장을 한 다음 나와서 민지아와 마찬가지로 몸을 풀고 있자, 그녀가 다가와 궁금하다는 듯 물어왔다.
“근데 하린아, 너 왜 이렇게 늦었어?”
원래의 운동 약속 시간은 오후 4시. 하지만, 주하린이 민지아의 전화를 받은 건 4시 20분.
빠르게 준비를 마치고 헬스장으로 달려왔지만, 옷까지 갈아입은 지금은 약속 시간을 무려 30분이나 오버한 상태였다.
이렇게까지 늦은 건 거의 처음 있는 일이라, 민지아도 궁금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 그게 사실......”
소설 성적이 바닥을 치고 있어서 최고 인기작들을 보다가 늦었다......
으으.
아무리 생각해도 그다지 좋은 변명거리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거짓말을 할 수는 없는 노릇.
하린은 왜 늦었냐고 묻는 민지아의 질문에 성실하게 답할 수밖에 없었다.
“소설? 아......! 너 요번에 쓴다고 한 신작?”
“응. 공모전 한다고 해서 쓴 건데, 반응이 너무 별로네.”
주하린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민지아에게 자신이 소설을 쓴다는 것에 대해서 말을 하지 않고 있었다.
어디까지나 비밀스럽게 쓰고 있던 그녀만의 작은 꿈이었지만, 지아가 하도 끈질기게 앞으로 뭐 할 거냐며 물어보는 바람에 결국 말해주게 되었다.
워낙 오랫동안 사귄 친구니까. 막상 말하고 나니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게 나름 힘이 됐다.
“근데 저번에 그거 저번에 베스트 갔다고 하지 않았어?”
“그렇긴 한데...... 그때랑 지금이랑 순위가 똑같아. 아니, 오히려 떨어졌어. 90위권에서 겨우 놀고 있어서. 아무래도 새로 써야 할 것 같아.”
“흐으음.”
민지아는 주하린의 말에 손으로 턱을 괬다.
그녀는 소설을 아주 많이 보는 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가끔 읽는 편이었다. 재미있는 소설들도 상당히 많아서, 여유시간에 보기에는 정말 좋았다.
특히 하린이 소설을 쓴다는 걸 알게 된 이후에는 그녀가 소설에 대해 꽤 이야기를 많이 해주는 터라, 민지아도 나름대로 소설에 대한 지식은 가지고 있었다.
“에이, 그래도. 나중에 떡상할지도 모르잖아. 뒤늦게 순위가 오르는 소설들도 생각보다 많다면서.”
“그건 그런데, 그것도 추천수나 연독률이 좋은 소설들이 그런 거지. 나는 둘 다 꽝이거든.”
“그래서 벌써 갈아엎게? 요번에 쓴 신작이잖아. 안 아까워?”
“어쩔 수 없어. 더 써도 가망이 없어 보여서.”
자조적으로 말하는 하린에 민지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으휴, 어쩐지 오늘 좀 기분이 안 좋아 보이더라니.”
“그래?”
“얼굴이 체한 사람 같았어. 흐흐, 지금도.”
민지아가 어두운 분위기를 풀기 위해 약간은 키득키득 웃으며 말하자, 주하린이 입술을 살짝 삐죽였다.
괜히 지아의 말에 또 사람들이 적은 댓글들이 생각난 것이다.
‘칫, 개연성이 그렇게 엉망인가......’
나름대로 고심하고 적은 내용들인데......
“하으, 모르겠어.”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아, 주하린은 헬스장 매트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 시간에는 직원용 헬스장에서 운동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사실 하린이 운동하는 시간대라서 다른 직원들이 일부러 피해 주고 있는 거지만, 어쨌든. 하린이 운동할 때면 헬스장을 거의 전세 내듯 사용 가능했다.
드물게 그늘진 표정을 한 하린을 바라보다가 민지아가 물었다.
“참, 근데 너 이번에 쓴 거 인방물 아니야?”
“어? 맞아.”
“혹시 장르가 문제인게......”
민지아의 말에 주하린의 눈가가 가늘어졌다.
“야, 네가 인방물 재밌다며.”
“아, 그렇다고 네가 그걸 쓸 줄은 몰랐지...... 그때는 네가 소설 쓰는 줄도 몰랐으니까. 어쩐지 너 평소 스트리머들 뭐하냐고 많이 물어보더라.”
“윽.”
주하린은 살짝 찔린 가슴을 부여잡고 지금 쓰고 있는 소설을 떠올렸다.
[ 스트리머로 세계 최고! ]
그냥 평범했던 여자 주인공이 스트리머로 대성한다는 아주 단순하고 명쾌한 이야기였다. 주로 개그나 일상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데...... 개연성이 전개가 이상하다는 평이 많았다.
“야, 그럼 차라리 재벌물을 써보는 건...... 으음, 아닌가.”
“재벌물이라니. 내가 뭘 알겠어. 아림 언니면 모를까......”
“쩝, 하긴......”
민지아는 입맛을 다시다 말했다.
“아무튼, 그럼 아예 다른 거 써봐. 뭐, 이세계물이라든가.”
“이세계물? 써봤어.”
“진짜? 어땠는데?”
“40화 선작수 114. 망.”
“으음......”
지금 생각해도 답이 없었다. 현대를 배경으로 너무 인기가 없자 자연스럽게 이세계물에 손을 대봤는데, 현대보다 더 망해버렸다.
이쯤 되면 재능이 없는 건가 싶기도......
“근데 뭐 때문에 망한 거야? 댓글이라든가 뭐 반응이 있을 거 아니야.”
“아...... 개연성이랑 전개가 별로라는데?”
“개연성이랑 전개?”
“응.”
“흐으음.”
민지아는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다가 말했다.
“그럼 아르바이트라도 해보는 게 어때?”
“아르바이트?”
“응. 사회 경험이 다 소설 쓰는 데 도움이 된다잖아. 너 지금까지 아르바이트 같은 거 한 번도 안 해봤지.”
“어? 어......”
주하린의 일상은 단순했다.
공부와 운동의 반복.
뭔가 사회적으로 해본 거라고는 옛날에 진현이, 은주랑 함께 했던 오케스트라 활동 정도?
중, 고등학교로 넘어가서는 정말로 학교에서 공부 집에서 공부만 반복했다. 대학을 다니는 지금도 마찬가지.
그래서 4년에 걸쳐 졸업해야 할 대학을 올해를 끝으로 3년 만에 조기졸업을 확정 지었다. 이제 이번 달만 조금 더 다니면 대학도 끝이었다. 졸업식까지는 좀 남았지만.
그래도 1년을 벌었으니, 부모님이 기회를 준 것이다.
내년에는 너 알아서 해보고, 그 1년 안에 무언가로 성과를 낸다면 앞으로도 네 마음대로 하게 놔두고 딱히 건들지 않겠다고.
그래서 유일한 취미였던 소설로 성공을 꿈꾸고 틈틈이 써보는데, 뭔가 잘 안되는 것이다.
“아르바이트는...... 그냥 소설에만 집중하려고 했는데.”
“야, 하루 종일 책상 위에 앉아 있는다고 뭐가 나오냐. 그리고 자취한다며, 월세 내려면 아르바이트 해야 하는 거 아니야?”
“괜찮아. 그건 지금까지 부모님이 주신 용돈들 좀 모아놨어.”
“오우, 하여간 이래서 금수저는.”
민지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쨌든, 내년에는 조금이라도 알바도 해보고 여행도 가보고 해.”
“여행?”
“응. 여러 곳도 많이 가봐야 영감도 얻고 그러는 거 아니야?”
“근데 알바 하면서 여행을 갈 수 있나?”
주하린이 고개를 갸웃했다. 민지아가 쯧쯔, 하며 말했다.
“굳이 길게 잡고 가는 해외여행 아니더라도 국내 당일치기도 좋지. 아니면 맞아. 네 친구 있잖아. 카페 하는.”
“진현이?”
“응응. 걔한테 부탁해서 그 카페에서 알바하면 막 시프트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거 아니야? 친구 보너스로 시급도 더 많이 주고.”
“......그건 좀 미안한데.”
“에이, 미안할 게 뭐 있어. 아니면 걔한테 뭐 다른 알바 소개해달라 해도 되고. 요즘은 주말 알바 뽑는 곳도 많으니까.”
주하린은 으음, 하고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일단 내년에 뭐라도 한번 해볼게.”
“히히, 잘 생각했어. 사실 스트리머가 제일 편하긴 한데, 너 방송하면 무조건 성공한다니까.”
“그건 좀 체질에 안 맞을 것 같아서...... 아무튼, 고마워.”
주하린이 말하자 민지아가 기분 좋은 웃음을 지었다.
“흐흐, 천하의 하린님이 칭찬해주니 몸 둘 바를 모르겠네.”
하지만 그 말을 끝으로, 하린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럼, 자. 이제 운동 시작하자.”
“어?”
갑작스럽게 바뀐 하린의 태도에 민지아가 당황했다.
그러나 생각할 시간도 없이, 하린의 말이 이어졌다.
“우리 이야기하면서 또 5분 지났잖아. 오늘은 내가 늦어서 미안하니까, 특별히 더 열심히 가르쳐 줄게. 시간도 1시간 추가.”
“어, 그......”
“너 나랑 이 이야기하면서 운동 시간 끝날 때까지 끌려고 했지.”
영 대답이 시원찮은 민지아의 모습에 주하린이 도끼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민지아는 흠칫, 하고 찔린 표정을 지었다.
“......티 났어?”
“엄청.”
“그럼 오늘만 좀 대충 넘어가면......”
어림도 없지.
주하린은 곧장 민지아의 손을 잡고 강제로 일으켰다.
“으아악.”
******
쏴아아아-
“후우, 개운하다.”
헬스장에서 샤워를 마치고 평상복으로 갈아입은 주하린은 곧바로 민지아를 배웅해준 뒤 방으로 돌아와 난방과 선풍기를 동시에 트는 기적의 사치를 보여주었다.
그다음 침대에 몸을 눕혀 양말을 벗고, 바지도 벗고, 팬티도 벗고.
후투둑-
스윽, 스윽-
“후우.”
입고 있는 옷을 다 벗어 제낀 뒤 알몸 바로 위에 돌핀 팬츠와 간단한 티셔츠를 입었다.
주하린은 이러고 있는 게 참 편했다. 겨울이라 추울 법도 하지만, 난방이 워낙 잘 되니까.
선풍기 바람으로 몸에 조금 남아있던 물기도 마저 턴 다음, 곧바로 선풍기를 끄고 이불을 뒤집어썼다.
사실 지금은 소설을 쓰기 딱 좋은 시간이었지만, 딱 30분만 쉬기로 했다.
“그러고 보니 모레였나......”
주하린은 휴대폰으로 일정을 확인했다.
부동산에 가서 계약서에 날인을 마치고, 마지막 남은 보증금 입금해야 하는 날이 모레였다.
진현이의 카페 근처에 있는 빌라의 403호.
주하린은 민지아가 했던 말을 생각했다.
‘아르바이트랑 여행이라......’
솔직히 잘 모르겠다. 그냥 소설을 쓰는 것에 비해 크게 달라질 것 같지는 않지만......
‘해 봐서 나쁠 건 없겠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도장 찍으려면 진현이 카페 근처로 가야 하니까, 한번 진현이한테 말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얼굴도 보고......
‘그러고 보니 오늘 톡을 안 했네.’
원래는 점심 즈음에 톡을 매일같이 보냈는데, 인기 소설들을 보느라 시간이 삭제돼서 오늘은 아직 못 보낸 상태였다.
마침 잘된 일이다.
모레 카페에 깜짝 방문해도 되겠지만, 막상 방문했다가 없으면 또 그러니까. 미리 말해두고 가는 게 좋아 보였다.
주하린은 톡 어플을 켜 곧바로 진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 나 : 모해? ]
[ 나 : 저녁 먹었어? ]
******
[ 도우지코인 1,000,000 매도 완료 ]
“비트코인은 신이고, 나는 무적이다.”
세상은 트렌드를 따라가야 한다고 했었나.
아주, 그러니까 너무나도 맞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행운추적자를 통해 주식으로만 돈을 불리고 있었는데, 하아...... 어찌나 어리석었는지.
‘사아장님~ 어서 오세요!’
며칠 전부터 유독 유정이 누나의 친구, 이신아의 기분이 좋아 보이기는 했다.
단순히 유정이 누나와의 민트초코라떼 매출내기(?)에서 이겨서 그런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하루가 다르도록 헤실헤실 미소가 늘어나는 이유를 그녀에게 물어보니, 무려. 비트코인이 대박이 났다고 한다.
‘어때요? 이 아름다운 상승의 곡선! 보기만 해도 치명적이지 않나요?’
자기가 대박 났다는 걸 저렇게 대놓고 말해도 되나 싶긴 했는데, 아무튼 상승률을 보고 놀란 건 사실이었다.
하루에도 50% ~ 100% 상승하는 코인들이 있으니 행운추적자만 있으면 주식보다도 훨씬 빠르게 돈을 불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대박은 알트에요 사장님!’
물론, 정말 아쉽게도 이신아는 그 말을 끝으로 이틀 뒤, 갑자기 모든 코인들이 떡락했다며 세상 멸망할 것처럼 울상을 지었다.
어쨌든, 그때 이신아가 보여준 하락률과 상승률.
이거면 라스베가스에 가기 전까지 돈을 훨씬 더 많이 불릴지도 라고 생각해서 코인을 시작했는데, 정말 주식보다 불어나는 속도가 훨씬 빨랐다.
지금은 전체적으로 장이 안 좋았지만, 그래도 행운추적자가 보여주는 코인들을 구매하면 그럴 걱정도 없었다.
‘아니, 이 짓 1년만 하면 진짜 세계 최고 부자 되는 거 아니야?’
문득 드는 생각.
그렇게 파멸적인 돈 복사를 하고 있는데.
띠링-
[ 수정이♡ : 우리 곧 도착해! ]
[ 수정이♡ : 올라갈까? ]
수정이로부터 톡이 왔다.
[ 나 : 내가 나갈게, 카페 앞에서 만나자~ ]
[ 수정이♡ : 알았엉, 천천히 내려와~♡ ]
오늘 저녁은 예화, 수정이, 델리아 넷이서 같이 먹기로 했다.
저번에 집에서 델리아랑 같이 TV를 봤는데 젊은 프랑스 혼혈의 요리사가 근처에 레스토랑을 차렸다고 했나. 그래서, 그 식당을 예약해 가기로 했다.
근처까지 왔으니 먼저 내려가 있으면 좋을 것 같다.
적당히 깔끔한 코디 위에 코트를 걸치고 사무실 문을 열었다.
그렇게 나가려고 하는데.
띠링-
[ 주하린 : 모해? ]
[ 주하린 : 저녁 먹었어? ]
‘응?’
하린이한테도 톡이 왔다.
“아, 그러고 보니 오늘 톡이 안 왔었네.”
매일 점심 즈음 선톡을 보내는 하린이였는데, 오늘은 드물게 저녁에 왔다.
다음부터는 안 오면 나도 선톡 좀 하고 해야겠네.
[ 나 : 나 이제 먹으려고. ]
기다리게 하면 미안하니까 곧바로 답장을 입력해 보냈다.
그리고 그렇게 하린이에게 답톡을 보낸 그 순간.
띠링-
[ 정은주 : ( 햄스터가 안녕이라고 인사하는 이모티콘 ) ]
[ 정은주 : 진현아, 혹시 모레 시간 괜찮아?? ]
거의 같은 시각에, 또 한 명의 소꿉친구한테도 메시지가 도착했다.
오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