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5화 〉# https://t.me/LinkMoa
새벽 6시.
“으응...... 아.”
미약한 신음을 흘린 윤나은은 몸을 부스럭거리며 잠에서 깨어났다.
좁은 방.
창문을 통해 밖을 바라보자, 아직 살짝 어두운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그런 밖의 풍경과 달리, 그녀의 몸과 정신은 굉장히 상쾌했다.
“끄흐응......”
부스럭-
자리에서 일어나 이부자리를 정리한 윤나은은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고 화장실로 향했다.
요즘 들어 그녀는 하루하루 컨디션이 놀랍도록 좋아지는 느낌을 받고 있었다.
아니, 좋아진다는 말로도 부족했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하루가 지날 때마다 몸이 힘들어하는 게 실시간으로 느껴졌지만, 요즘은 정반대였다.
하루가 지날 때마다 머리 회전이 다시 빨라지고, 몸은 가벼워지고, 정신도 맑아졌다.
화장실의 거울을 보니 젊었을 적 자신의 얼굴이 보인다. 피부도 되게 깨끗해지고, 몇 년 전부터 생겨났던 주름도 다시 사라졌다.
“진짜로 무슨 일이지......”
윤나은은 자신의 얼굴을 매만졌다.
일하고 있는 국밥집 직원 아주머니들에게 맨날 젊어진다, 회춘한다, 소리를 농담처럼 듣고 있기는 했지만, 이제는 그게 농담이 아니라 정말이라는 것이 크게 실감이 났다.
화장실에서 세수해 얼굴을 깨끗이 씻은 윤나은은 다시 한번 거울을 보며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생긋-
오랜만에 스스로 거울을 보며 환한 미소 지었다.
굉장히 예쁘고 화사한 미소가 거울 속 자신을 통해 나왔다.
‘내, 내가 참. 뭐 하는 거람......’
순간적으로 나이에 맞지 않는 행동이라는 것을 파악한 윤나은은 살짝 빨개진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얼른 수건으로 물기를 닦은 다음 다시 화장실에서 나왔다.
털썩-
삐빅-
거실의 소파에 앉아 언제나처럼 TV를 켰다.
[ 내가 너 좋아한다고! 사랑하는 데에...... 나이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 몰라? ]
과연 새벽답게 무슨 이상한 드라마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윤나은은 드라마를 보며 피식피식 웃었다.
본래라면 이렇게 일찍 일어나도 얼마 안 가 출근 준비를 하고 집에서 나와야 했지만, 휴가 기간인 지금은 전혀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 심리적 편안함이 굉장히 좋았다.
‘하긴, 그동안 너무 일만 하긴 했어......’
새벽같이 일어나 출근하고, 밤이 되어서야 퇴근하고.
사람들이 잘해주기는 하지만, 거의 매일같이 12시간이 넘는 노동을 하는데, 몸과 정신이 지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비록 추가수당도 주고 주말에 쉬기는 해도, 가끔은 쉬는 날에도 출근을 요구할 때도 있었다.
주말의 이틀만으로는 지친 심신을 달래기 참 어려웠다.
무엇보다 사랑스러운 딸들에게 별걸 못 해줬다는 심리적 스트레스도 한몫했다.
그러한 생활을 거의 20년 넘게 해왔으니, 이제는 좀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요즘은 참 다행이야.’
몸도 마음도 지치고 참 어려웠는데, 요즘은 사정이 굉장히 나아졌다.
자신의 컨디션이 좋아지고 있는 것은 물론, 무엇보다 딸 둘이 너무 잘 되고 있었다.
그동안 고생한 걸 보답받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맏이인 유정이는 이제 카페 매니저를 하면서 자신보다도 훨씬 많은 월급을 받고 있었고, 다정이의 만화는 공모전을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천진현이라는 카페 사장이 있었다.
유정이를 채용해 월급을 많이 주는 것도 그였고, 다정이가 편안하고 좋은 환경에서 만화를 그릴 수 있도록 도와준 것도 그였다.
이야기를 들어보면 만화에 들어간 BGM도 그의 인맥으로 어떻게 연결해 줬다고 하는데, 정말로 안 고마울 수가 없었다.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해보니, 사람이 참 어른스럽고 바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충분히 믿고 딸 둘의 일상을 맡길 수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문제가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끼이익-
“우웅, 하아암......”
“유정아, 다정아. 일어났니?”
“흐아암...... 아, 엄마. 엄마도 잘 잤어?”
“그럼, 잘 잤지. 오늘 일찍 일어났네?”
딸 둘이 동시에 일어나서 하품하며 방에서 나왔다.
어쩜 저렇게 예쁘게 자랐을까.
“응. 이따 점심때 나가야 해서, 미리 만화 좀 그려놓으려고.”
“나도 다정이랑 같이 나가. 그 전에 할 일 좀 해놓게.”
두 딸의 말에 윤나은이 물었다.
“오늘도 그 사장님 만나러 가는 거야?”
“웅.”
“응!”
자신의 물음에 동시에 고개를 끄덕이며 답하는 딸 둘.
‘역시......’
윤나은은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복잡한 감정을 삼켰다.
문제라고 함은 바로, 아무리 생각해도 두 딸이 그 카페의 사장님을 동시에 좋아한다는 것이었다.
딸 둘과 평소에 이야기할 때도, 영화관 데이트를 할 때도 느꼈지만, 이젠 정말 확실했다.
물론, 직접 그 사장님을 본 입장으로 딸이 그와 사귀는 걸 말릴 이유는 전혀 없었다.
오히려 환영할 만한 일이었지만...... 그것도 한 명일 때의 이야기지 두 명이 되면 좀 복잡해졌다.
처음에는 둘이 경쟁하듯 한 남자를 좋아한다는 사실에,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생각이 좀 달라졌다.
기껏 최근 들어 더욱 사이가 좋아진 유정이와 다정이인데, 이게 사랑싸움으로 번지면 한 번에 사이가 틀어질 수 있었겠다는 걱정.
그뿐이랴.
차라리 둘 다 거절당한다면 서로를 보듬어 줄 수라도 있지, 만약에 그가 한쪽에 붙는다면 유정이나 다정이 둘 중 한 명은 크게 상처받고 좌절할지도 몰랐다.
다행스럽게도 자신의 딸 둘이 아직 순진해서 진도가 크게 나간 것 같지는 않았다.
지금까지 고생하느라 남자친구를 사귈 겨를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훗날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윤나은은 살짝 불안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게 둘을 걱정하고 있을 찰나, 먼저 세수와 양치를 하고 나온 다정이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엄마 있잖아.”
“응, 딸. 왜에?”
“오늘 엄마도 같이 나갈래?”
“같이?”
갑작스러운 딸의 제안에 윤나은은 고개를 갸웃했다.
“너 그 사장 오빠 만나러 간다며.”
“웅, 맞아. 히히.”
“내가 같이 가면 방해되는 거 아니야?”
딱 봐도 오늘은 뭐 그림 그리러 가는 게 아니라 데이트하러 가는 거였다.
분명 어제도 그랬지.
토요일이라 유정이는 카페 출근하는 날도 아닌데, 다정이와 유정이 둘이 같이 나가서 같은 시간에 돌아왔다.
“에이, 방해라니! 전혀 아니야. 그리고 엄마 저번에 진현이 오빠 데려오면 맛있는 거 사준다며. 그거어, 오늘로 하자!”
“으음...... 그래도 너무 갑작스러운데, 내가 가면 그 오빠가 곤란해하지 않을까?”
“아냐, 괜찮아. 오빠도 엄마랑 좀 더 이야기해보고 싶다고 했어.”
나랑 이야기해보고 싶다고 했다고?
“그 오빠가?”
“어, 어? 으응. 아, 아무튼! 엄마가 와도 괜찮아. 전혀 상관없어.”
“그런가......?”
“아, 정 그러면 내가 오빠한테 미리 한번 전화해 볼게. 어때?”
“아, 그래. 그게 좋겠다.”
아무래도 딸들의 데이트를 방해하는 것 같아서 거절하려고 했는데, 다정이의 주장은 확고했다.
고개를 끄덕이자 다정이가 곧바로 휴대폰을 꺼내더니 1번을 꾸욱 누르고 전화를 걸었다.
“아, 오빠아! 네, 헤헤. 잘 잤어요. 그게 오늘......”
통화음이 울린 지 얼마 되지 않는데도 상대는 곧바로 전화를 받았다.
다정이는 콧소리를 잔뜩 섞은 목소리로 통화를 했다. 이야기하는 내내 참 행복해 보이는 미소가 그녀의 얼굴에서 가시지를 않았다.
아직 본론을 꺼내지도 않았는데, 다정이는 근 15분가량을 웃고 떠들며 이야기했다.
‘진짜 엄청 좋아하나 보네.’
통화가 길어지자 엄마, 잠깐만? 하고 방에 들어갔는데, 방 안에 들어가도 통화하는 소리가 조금씩 들려왔다.
“야야, 나도 좀 바꿔주라. 응?”
“언니도? 웅, 그럴까? 히이, 잠깐만. 오빠아! 언니가 바꿔 달래요. 네네. 응, 여기.”
“아, 고마워.”
중간에 유정이까지 통화에 참여했는데, 당연히 또한 통화하는 목소리가 참 즐거워 보였다.
그렇게나 좋을까.
윤나은은 거실에서 딸들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살포시 미소 지었다.
그녀는 딸 둘이 즐거워하는 목소리만 들어도 좋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문득 거실에서 혼자 TV를 보는 자신의 모습이 상기되면서, 살짝 외로움이 느껴졌다.
‘아.’
갑자기 왜......
윤나은은 갑작스럽게 몰려온 외로운 감정을 고개를 도리질 치며 털어냈다.
어쩌면 일만 하다가 휴가를 받아서 그런 걸까.
이전에는 외로움을 느낄 시간도 없이 바쁘게 살았지만, 지금은 휴가 기간이라 그런 걸지도 몰랐다.
어제도 자신은 하루종일 집에 있었는데, 딸 둘만 데이트하러 온종일 나갔다 들어와서 그런 걸지도......
‘아냐, 생각하지 말자.’
윤나은은 고개를 저었다.
자신에게는 사랑스러운 딸 둘만 있어도 외롭지 않았다.
하지만......
‘나중에 딸들이 결혼하고 애도 낳으면?’
언제까지나 딸들이 자신의 곁에 있을 수는 없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에 골인하고, 딸들도 가정을 차리게 될 날이 오리라.
그렇게 되면 당연히 자신과는 떨어지게 될 것이다.
그럼 그때 자신은 정말 혼자가 되는 것이 아닌가.
‘아.’
문득 든 생각에 가슴이 아파질 찰나, 다정이가 갑작스럽게 문을 벌컥, 하고 열었다.
“엄마아!”
살짝 놀란 마음에 다정이를 바라보자, 다정이가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오빠가 엄마도 같이 와도 상관없데!”
“어? 어어, 그러니......?”
“웅!”
“몇 시에 만나기로 했는데?”
“11시 반! 카페 앞에서 만나기로 했어. 헤헤.”
싱글벙글 웃고 있는 다정이.
윤나은은 그런 딸을 바라보며, 다시 애써 외로움에 대한 고민을 싹 지워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