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9화 〉# https://t.me/LinkMoa
“하아아......”
집에 돌아온 예화는 오늘만 몇 번째 내쉰 지 모르는 한숨을 내쉬었다.
침대의 푹신함을 느끼며 몸을 비스듬하게 눕혔다.
결국에는 밥만 먹고 헤어졌다.
국룰인 디저트도 먹지 않은 채 말이다.
‘원래는 이럴 게 아니었는데.’
자신이 맛난 맛집에서 밥을 사주고, 만화 이야기도 잔뜩 하고, 카페도 소개해주고 다 할 생각이었는데.
그다음 카페에서 진현과 마주치면 자신이 단골 한 명 늘렸다고 고마워하라는 듯 말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드래곤과 나의 작가가 윤다정이라니.
“으.”
진짜 실화인가.
예화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작업이나 하자......”
이럴 때는 역시 일이나 하는 게 최고다.
옷은 그대로 입고 핸드백에 노트북만 더 챙긴 예화는 그대로 집에서 나와 스튜디오로 향했다.
터벅터벅.
길을 걷고 한 건물 안으로 들어가 계단을 올라간다.
“저, 저기......”
“?”
스튜디오 건물 안쪽 계단을 올라가는 도중 누군가의 목소리가 그녀를 불러세웠다.
뒤를 돌아보니 무슨 어벙하게 생긴 한 남자가 머리를 긁적이고 있었다.
“혹시 저, 번호 좀 주실 수 있, 나요......?”
아.
예화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 그리고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몸을 돌렸다.
“저 남자친구 있어요.”
“아, 그, 그런가요...... 네. 아하하.”
남자는 혼자 머쓱 웃더니 도망치듯 건물 밖으로 나갔다.
예화는 쯧, 하고 혀를 찼다.
농담이 아니라 일주일에 두세 번은 무조건 받는 질문이 아닌가 싶었다. 모르는 사람한테서.
철컥.
스튜디오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다.
새로운 장비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러고 보니 토요일 날 진현이 저 장비들을 들여놓는 걸 도와줬었지. 괜찮다고 하는데도 그냥 번쩍 들더니 혼자서 장비를 옮겨주었었다.
장비를 나르던 그의 팔뚝의 핏줄이 선명했다.
“......”
맞아. 차라리 번호도 물어볼 거면 좀 당당하게 자신감 넘치게 물어보든가. 저런 태도는 안 하느니만 못했다.
예화는 노트북을 세팅하고 작업을 시작했다.
“아, 집중 안 돼......”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의자에 등을 깊숙이 기댄 채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게 되었다.
진짜 왜 이러냐아.
오늘따라 영 집중이 안 된다.
작업을 시작한 지 2시간 만에 집중력이 고갈된 느낌.
아직 새 장비의 사용법이 익숙하지 않다는 변명은 통하지 않았다.
분명 어제는 새 장비들로 평소보다도 훨씬 더 집중할 수 있었으니까.
“후우. 카페나 갈까.”
예화는 대충 스튜디오 작업을 마무리하고, 노트북과 헤드폰만 챙겨 밖으로 나왔다.
딸랑딸랑.
카페에 들어온 순간 마음이 약간 안정되는 느낌이 들었다.
예화는 어디 자리가 없나 찾아본 뒤, 2층에 빈 자리를 발견하고 올라가 작업을 시작했다. 물론, 카페에 왔다고 바로 작업이 잘되지는 않았지만, 그나마 스튜디오보다 좀 나은 정도는 되었다.
‘잠깐 쉬자.’
최근 너무 음료를 많이 마셨기에 예화는 아메리카노 한 잔만 시켜서 쪼옥 빨았다.
어찌저찌 집중을 하기는 했는지 밖은 좀 어두웠다.
카페에 앉아있는 다른 사람들 구경이나 하면서 주변을 둘러볼 찰나, 문득 직원 전용구역에서 진현과 윤다정, 윤유정이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깔깔.
조잘조잘.
둘은 진현에게 착 달라붙어서 즐거운 듯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둘 모두 컨디션이 굉장히 좋아 보였다.
‘아.’
얼마 전에 수정이와 진현이 저 안에서 그렇고 그런 짓을 하는 걸 본 입장에서, 예화는 가슴이 살짝 쑤시는 느낌을 받았다.
“......”
설마 하고 생각하던 와중에 윤다정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살짝 놀란 표정을 짓더니 이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까딱여 인사했다.
윤유정과도 눈을 마주쳤지만, 그녀는 자신을 그냥 카페에 많이 들리는 손님이라고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인사는 오가지 않았다.
진현은 아무래도 둘을 바래다주는 것 같다.
집중력이 더 흐트러진다.
예화는 다시 노트북을 바라보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밤이 되었다.
******
철컥.
딸랑딸랑.
쏴아아아아-.
“......아니.”
하늘을 바라본 예화는 그대로 굳었다.
투두둑, 투둑.
비가 쏟아져 내린다.
쌀쌀한 바람과 함께 특유의 비 냄새가 코를 간질였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그렇게 맑았는데 갑자기 웬 소나기?
일기예보에서도 비 소식은 없었는데. 그래서 우산도 안 챙겨왔다.
‘끄응.’
편의점에서 새 우산이라도 사서 가야 하나.
횡단보도를 건너 한 30초 정도 뛴다면 여기서 가장 가까운 편의점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동안은 좀 젖겠지만 역시...... 뛰어야겠지.
신호가 바뀌기만을 기다리며 대기하고 있을 때, 갑자기 옆에서 목소리와 함께 커다란 우산이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우산 없어요? 씌워줄까요?”
예화는 옆을 돌아보았다.
목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진현이었다.
비 냄새에 더해 진현의 냄새가 자연스럽게 섞여왔다.
예화는 웃고 있는 그에게 살짝 삐진 투로 말했다. 아닌 게 아니라 목소리가 저절로 그렇게 나왔다.
“......씌워 준다고요?”
“네.”
“진현씨는 우산 어디서 났어요?”
“? 어디서 나긴 제가 샀죠.”
무슨 당연한 걸 묻냐는 그의 표정에 얼굴이 살짝 달아올랐다.
“아니, 그거 말고요. 오늘 비 온다는 소식 없었는데......”
“아~ 가게에 비상용 우산 많아요.”
“아...... 그럼 저 우산 좀 빌려주세요. 쓰고 갔다가 내일 바로 돌려드릴게요.”
자신은 매일매일 카페에 들리는 VIP였다.
이정도는 부탁할 수 있지 않나?
하지만, 진현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싫어요.”
“네? 아니, 왜요.”
예화는 진현을 바라보았다.
“저 안 까먹고 돌려줄 수 있는데, 못 믿어요?”
설마 이렇게까지 신용이 없었을까.
그런데 진현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들려왔다.
“그게 아니라 제가 그냥 예화씨랑 이야기하면서 가고 싶어서. 씌워드릴게요. 어서 가요.”
진현은 그렇게 말하며 반박은 안 받겠다는 듯 걸음을 옮겼다.
“......”
예화는 입을 뻐끔거리다가 말없이 그를 따라갔다.
투두둑, 투둑.
“......”
“왜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이야기하면서 가고 싶다면서.
진현은 자신이 빤히 그의 얼굴을 쳐다볼 때 왜 그러냐고 묻는 것 빼고 별다른 말이 없었다.
집에 도착할 때까지도 아무 말 없이 그냥 걷기만 했다.
몇 분이 지나고 6층의 세련된 빌라가 나타났다. 예화 소유의 건물이었다.
“여기죠?”
“네.”
“휴우. 그럼 전 이만 갈게요.”
진현은 그렇게 말하며 몸을 돌렸다. 약간 젖은 그의 어깨가 보였다.
그때였다.
휴대폰이 울렸다.
‘음?’
액정을 보니 판타지 윤이었다. 아니지. 이제는 연락처를 교환했기에 판타지 윤이 아닌 윤다정의 이름으로 톡이 왔다.
[ 윤다정 : 언니 오늘 죄송해요 ㅜㅜ ]
그녀의 톡은 꽤 장문의 메시지였는데, 대충 갑자기 오빠를 데려와서 미안하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그래도 되게 좋은 사람이다, 미워하지 말아라, 하고 진현을 포장하는 말이 대부분이었다.
“......”
[ 우흡, 아 오빠아...... 헿. ]
[ 오빠 빨리 줘요오 ]
[ 이거 먹고 싶어? 떠다 줄까? ]
문득 또 점심에 둘이 꽁냥거렸던 장면들이 스쳐 지나갔다. 특히 진현이 다정에게 상냥하게 대해주었던 순간들이 생각났다.
예화는 진현을 불러세웠다.
“잠깐......”
“네?”
몇 발자국 떨어져 다시 카페로 향하던 진현이 예화를 돌아보았다.
원래라면 그럴 생각이 없었다.
단지, 진현을 붙잡은 건 거의 무의식적인 무언가였다.
“지, 진현씨 옷도 젖었는데...... 집에 들어와서 좀 말리고 가실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