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8화 〉# https://t.me/LinkMoa
부유한 가정에서 자란 예화는 무언가를 가지지 못한다는 느낌을 별로 받아본 적이 없었다.
원하는 것이 있으면 쉽게 손에 넣을 수 있었으니까.
남들이 어렵다고 하는 공부도 조금만 노력하면 성적이 따라주었고, 가지고 싶은 물건이야 부모님이 다 마련해 주었다.
시간이 지나고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뒤에는, 아버지가 할아버지의 재산 중 일부를 자신이 증여받을 수 있도록 조치해주었다.
어린 나이에 건물 2채를 지닌 건물주까지 된 것은 그 덕분이었다.
통장에는 돈이 차곡차곡 늘어갔고, 당연히 취미생활을 즐기는 것에도 한 치의 막힘이 없었다.
꿈꾸고 있는 작곡에서는 좀 애를 먹고 있긴 하지만...... 이 또한 남들에 비하면 매우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것이었다.
실제로 토요일 날 새로운 음악 장비를 마련하기 위해 쓴 돈만 해도 천만 원이 넘어갔지만, 큰 부담이 되지는 않았으니.
작곡 환경을 마련하는 데도 막힘이 없었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아, 오빠아! 그건 아니죠! 그거 말고요오.”
“그럼 뭐, 이거어? 흐흫. 뿌린다? 응?”
“아냐, 아냐에요오. 아 진짷. 안 돼요. 악!”
진현과 윤다정.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들은 예화의 눈살은 자연스럽게 찌부러졌다.
‘참나.’
저게 대체 뭐 하는 건지.
뷔페형 레스토랑에 와서 점심을 먹는데, 둘은 별것도 아닌 빙수의 토핑 문제로 아주 티격태격 사랑 다툼이나 하고 있었다.
“......”
사람들도 많은데.
다른 사람들이 안 좋은 눈으로 보는 것도 모르나?
“......치.”
빙글빙글.
홀로 쓸쓸히 테이블에 앉아 아이스크림 코너를 바라보던 예화는 숟가락으로 애꿎은 커피만 계속해서 저었다.
아침, 저녁으로 식단관리를 하는 예화에게 있어서 점심시간은 그야말로 행복이 넘쳐흐르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정말 오랜만에 그다지 행복하지 않은 점심시간인 것 같았다.
“오빠 빨리 줘요오.”
“어허어, 아몬드도 잔뜩 뿌리면 맛있는 법이야.”
진현을 바라보자 그는 웃는 얼굴로 빙수 두 개를 번쩍 들고 테이블로 향하고 있었다.
윤다정은 그의 옆에 꼭 붙어서 빙수를 낚아채려고 하고 있었다.
물론, 키 차이 때문에 윤다정이 아무리 팔을 뻗어봐야 진현에게는 닿지 않았다.
‘음......’
둘은 키 차이가 꽤 많이 났다.
남녀의 가장 이상적인 키 차이는 15cm 정도라고 하는데...... 거의 25cm는 나지 않을까?
예화는 자신과 진현의 키 차이를 가늠해 보았다.
이전에도 가늠해 본 적이 있었는데, 역시 자신이라면 딱 15cm 정도 차이 나는 것 같았다.
“이익. 아몬드만 뿌리니까 그렇죠! 젤리나 좀 얹어주지.”
“쓰읍. 이렇게 먹어야 머리도 좋아져.”
“아흫, 저 이미 머리 좋거든요오.”
후식을 가져오면서 둘은 찰싹 붙어있었다.
‘하.’
서로 웃으며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니 너무나도 친근해 보였다.
저렇게 가까이 있으면 진현 냄새가 많이 날 텐데.
토요일까지만 해도 자신이 차지했던 자리를 지금은 다정이 완전히 꿰차고 있었다. 뭔가 기분이 이상했다.
‘차라리 편하게 있으라고 하지 말 걸 그랬나.’
입술을 삐죽인 예화는 또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 분위기는 이렇지 않았다.
약속 장소인 지하철역 2번 출구 앞.
윤다정, 진현과 마주친 직후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겨울을 연상케 할 정도였다.
“저어...... 혹시 언니가......? 그, 메, 멜로냥 언니예요?”
조심스럽게 물어보는 다정의 질문에는 예화 또한 살짝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었다.
입은 옷을 보고 설마 했는데 정말로 카페에 매일 들리는 윤다정이라는 여자 고등학생이 ‘드래곤과 나’를 그린 작가였다니.
우연도 이런 우연이 없었다.
그녀는 진현의 양다리 상대였다.
“아......”
고개를 끄덕이자 윤다정은 굉장히 눈치를 보는 얼굴로 진현과 자신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몰래 톡으로 불편하냐고 막 물어보기도 했다.
그야 그럴 것이다.
진현을 짝사랑하는 것으로 보이는 그녀에게 진현이 다른 여자친구가 있다고 한 건 자신이었다.
거기에 그녀의 언니인 윤유정과 진현이 키스한 사진을 보여주며, 나쁜 사람이라고 욕을 하기도 했으니까.
윤다정의 입장에서는 상황이 상당히 혼란스러울 것이다.
그녀는 아직 자신이 진현을 싫어하는 줄 알고 있었다.
예화는 곧바로 괜찮다고 답하며, 편하게 있으라고 했다.
솔직히 말해서 걱정되는 건 다른 곳에 있었다.
‘혹시......’
예화는 진현을 힐끗 바라보았다.
최근 진현은 자신에게 관심이 있는 듯했으니까.
혹시나.
대놓고 양다리를 걸치는 그의 특성상 어쩌면 윤다정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작업을 치지 않을까.
그 때문에 윤다정이 상처받으면 어쩌지.
그런 생각.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예화는 그 생각이 안일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진짜.’
아예 헛짚었다.
애초에 처음 봤을 때. 진현이 다정과 아주 다정하게 깍지를 낀 것을 보고 눈치를 챘어야 했는데.
“야. 뭘 또 묻히고 먹냐.”
“우흡, 아 오빠아...... 헿.”
진현은 그냥 윤다정만 바라보았다.
윤다정의 얼굴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는 아주 꿀이 떨어졌다.
“이거 먹고 싶어? 떠다 줄까?”
“네에. 어디 있었어요?”
“저기 튀김 코너 옆에 있던데.”
“좋아용!”
둘은 완전한 연인 그 자체였다. 자신은 그냥 들러리가 된 기분.
같이 놀이공원을 가서 손을 잡거나, 쇼핑하고 뮤지컬을 본 게 거짓말인 것 같았다.
‘게다가 윤다정도......’
예화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니, 처음에는 그렇게 눈치를 봤으면서.
옆에 다른 사람이 있으면 좀 자제해야 하는 거 아닌가? 편하게 있으라고 했다고 진짜 편하게 있네.
되게 착한 아이인 줄 알았는데, 꼭 그런 것만도 아닌-.
입술을 삐죽이고 있을 때, 뒤늦게 테이블에 빙수 두 개를 놓은 진현이 물었다.
“예화씨도 빙수 하나 만들어 줄까요?”
예화는 진현과 눈을 마주치다가 살짝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 이제 와서? 자신은 아주 뒷전이었다.
“됐어요. 제가 직접 뜰게요.”
그녀도 모르게 나온 삐진 투의 목소리였다.
예화 자신도 놀랐을 찰나, 편하게 있던 윤다정이 또다시 눈치를 보는 표정을 지었다.
빠르게 테이블을 벗어나자 윤다정이 진현의 옷깃을 꾹꾹 늘렸다.
“오, 오빠아. 역시 언니가 오빠 싫어하는 건......”
“에이, 아니야.”
“아까도 엄청 노려봤단 말이에요......!”
다른 의미로 노려본 거지만.
예화는 한숨을 내쉬었다.
빙수를 푼 그녀는 괜히 아몬드 토핑만 잔뜩 해서 테이블로 가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