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3화 〉# https://t.me/LinkMoa
‘흐음, 여기는 그래. 이렇게......’
딱-
“아.”
세련된 느낌의 스튜디오 안.
헤드폰을 낀 채 콧노래를 흥얼거리던 예화는 움직임을 멈추고 눈살을 찌푸렸다.
또, 또 이런다.
오늘만 대체 몇 번째인지, 연주하고 있던 건반은 이번에도 입력한 음을 인식하지 못하고 삑 소리만 냈다.
“아이씨. 왜이래 진짜아.”
이놈의 마스터키보드!
꽤 괜찮다는 평이 많아 구매했건만, 요즘은 상태가 영 아니었다. 좀 버벅거린다 싶더니 이제는 아주 맛이 가버릴 지경.
“......으. 테블릿으로 해야 하나.”
작업을 마무리할 때는 노트북으로 하는 편이지만, 평소에는 건반형 미디 컨트롤러를 주로 사용하는 그녀였다.
손에 익기도 하고.
이대로 몇 분 정도 방치를 해두면 다시 정상적으로 돌아가기는 했지만, 매번 삑 날 때마다 그만한 시간을 기다려 줄 만큼 예화의 인내심은 깊지 못했다.
“미디 컨트롤러도 하나 새로 사야겠네...... 하아.”
한숨을 내쉰 예화는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그냥 지금부터 바로 카페에 가서 작업해야겠다.
컨트롤러를 비롯한 여타 기기들이 없다면, 그냥 카페에 가서 작업하는 편이 작업 효율이 더 잘 나왔다.
“......디퓨저는 대체 언제 주는 거야.”
이제는 카페 하면 곧바로 진현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가 준 디퓨저가 있을 때는 작업이 참 잘 됐는데, 냄새도 좋고.
‘아니야......! 의지하지 말자.’
괜히 입술을 삐죽인 예화였지만, 그녀는 금방 표정을 고쳐먹고 고개를 저었다.
같이 놀이공원을 갔다 온 이후로 예화는 진현을 조금 피하고 있었다.
카페에 다니는 순간 피하는 게 아니라 생각할 수는 있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고! 그와 되도록 눈을 마주치지 않도록 하고 있었다.
사실 커다란 이유는 없고, 그냥 키스한 것 때문에 묘하게 의식이 되었다.
게다가 수정이랑 톡을 할 때마다도 항상 조마조마하다.
[ 강수정 : ㅋㅋㅋ 나 어제 도네 50만 원 받음!! ꉂꉂ(ᵔᗜᵔ*) 진짜로 대박 ㅇㅈ? ㅋㅋ ]
[ 강수정 : ( 사진 ) ]
[ 강수정 : ( 사진 ) ]
[ 강수정 : 담에 맛난거 사줄겡 ㅋㅋ ]
“휴.”
다행스럽게도 아직 놀이공원에서 키스한 것에 대한 이야기를 수정이에게는 하지 않은 모양인지, 그녀가 보내는 톡의 내용은 평소와 다를 바가 없었다.
뭐, 도네 50만 원 받은 걸 자랑하는데, 왜 모니터 옆에 남친인 진현과 함께 V를 그리고 찍은 사진까지 보내는지는 모르겠다만......
“......즐거워 보이네.”
수정이의 미소는 세상 행복해 보였다.
진현도.
적당한 이모티콘을 섞어 답변하고 짐을 챙겨 스튜디오를 나서려고 했다.
노트북을 접으려던 도중, 갑작스럽게 생각이 났다.
“아, 맞다!”
서둘러 아이디를 입력하여 메일함을 확인했다.
메일함에는 익명의 사람으로부터의 메일이 도착해 있었다.
[ 보낸 사람 : HJC5021 ]
평소 작곡가 커뮤니티와 같은 곳에서 의견을 교류하기도 하지만,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큰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음악의 분석적 요소를 많이 강조하는 커뮤니티인데, 영감의 비중이 훨씬 큰 그녀의 경우에는 흐르는 데로 작곡하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기기 조작법 같은 것들이나 꿀팁들은 많이 배웠지만.
그러나, 예화는 작곡가가 아닌 일반 사람이 느끼는 감상이 궁금할 때가 많았다.
수정이를 비롯한 친구들에게 감상을 물어보면 항상 좋다는 말뿐, 댓글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엄마나 아빠한테 감상을 요구하면 꽤 자세하게 말해주기는 했지만, 그래도 갈증이 났다. 애초에 부모님은 더 좋게 듣는 경향이 있으니까.
그런데, 이틀 전에 팬이라며 메일을 보내온 사람이 있었다.
메일을 주고받는데, 감상이 정말로 자세했다.
자신의 곡들을 정말 좋아한다는 게 느껴졌고 피드백 같은 것도 해주는데, 의견을 반영해 보니 곡이 좀 더 다채로워지는 느낌도 들었다.
‘누굴까.’
메일을 다 확인한 예화의 얼굴에 미소가 지어졌다. 내용을 곱씹으며 노트북을 쌌다.
이번에도 의견이 있었기에 그대로 한번 해보자는 생각을 하며, 예화는 카페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
싱어송라이터 진수아.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인 싱어송스타에서 우승을 차지하고, 그대로 데뷔.
앨범을 낼 때마다 차트 상위권을 차지하는 인기 가수인 진수아는 예화가 좋아하는 몇몇 음악계 종사자들 중 한 명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녀가 직접 작사 작곡한 곡들이 워낙 좋기도 하고, 가끔 가사가 없는 노래도 작곡해 내보이는 사람이기 때문.
무엇보다 그녀가 낸 곡들에는 피아노와 바이올린, 첼로를 베이스로 한 감미로운 곡들이 주류를 차지해 딱 예화가 좋아하는 스타일이었다.
그런 그녀의 팬미팅 겸 강연회가 내일인 11월 10일 토요일 날 열린다.
크게 하는 건 아니고, 뷔페 하나를 빌려서 하는 작은 팬미팅 겸 강연회.
당연히 경쟁률은 상당히 빡빡했지만, 예화는 어떻게든 참여권을 얻을 수 있었다.
“못 간다고?”
“응. 진짜로 미안......”
“아니 괜찮은데, 요즘 많이 바빠? 조금만 더 일찍 말해주지.”
“어제 할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좀 경황이 없었어. 미안해. 내일부터 월요일까지 장례식이야......”
“아......”
저녁.
카페에서 나와 집으로 걸어가던 예화는 탄식을 흘렸다.
내일 무슨 옷을 입고 갈까 고민하던 찰나, 같이 가기로 한 친구로부터 전화가 와 받았더니 뜻밖의 소식이 들려온 것이다.
갑작스럽긴 하지만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면 정말 어쩔 수 없다. 예화는 위로의 말을 건네고 조심스럽게 통화를 종료했다.
“음...... 그럼 누구랑 같이 가지.”
예화는 작게 중얼거리며 생각했다.
강연회는 참여자 1명당 사람 1명을 추가로 데려갈 수 있었다.
본래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음악을 꽤 좋아하는 고등학교 동창 친구와 같이 가려고 했는데, 안타깝게도 할아버지가 돌아가셔서 못 가게 되었다.
곧바로 수정이의 생각이 나서 연락을 넣을까 싶었지만, 문득 이번 주말에 추가방송을 한다는 그녀의 톡이 생각났다.
“으음.”
그럼 이것도 못 쓰게 되는데......
예화는 톡을 켜서 아빠와의 톡 방에 들어갔다.
얼마 전에 보내준 뮤지컬 티켓이 눈에 띄었다.
[ 아빠 : { 뮤지컬, ‘캣라이프’ 티켓 2매 ( R석 ) } ]
이 또한 마찬가지로 내일 있는 뮤지컬이었다.
진수아의 팬미팅 겸 강연회는 점심에 열린다.
뮤지컬은 때마침 같은 날, 근처의 저녁 시간대에 열렸기 때문에, 예화는 강연회, 쇼핑, 뮤지컬 순으로 주말을 알차게 보낼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 계획이 깨져 버렸다. 깨졌다기보다는 같이 갈 사람이 없어졌다는 게 옳으리라.
‘이거 티켓 비싼건데.’
톡을 올리니 며칠 전 월요일 날 주고받은 톡이 보였다.
[ 나 : 앞으로도 남는 티켓 있으면 주라. ]
[ 아빠 : 잼썼나봐? ]
[ 나 : ㅇㅇ ]
[ 아빠 : 수정이랑 갔다 왔어? ]
[ 나 : 아, 응. ]
[ 아빠 : ㅇㅋ 담에도 줄게 ]
진현과 놀이공원을 갔다 온 뒤, 꽤 즐거웠어서 앞으로도 주에 1번 정도는 어디를 나가는 게 좋다고 생각해 아빠에게 보낸 톡이었다.
솔직히 그렇게 티켓이 솟아날 일은 없는데, 이번에 보내준 뮤지컬 티켓을 보면 그냥 아빠가 직접 사서 준 것 같았다.
R석이라 1장에 10만 원이 넘는다. 팬미팅 겸 강연회도 그를 뛰어넘는 가치가 있고.
“끄응.”
어디 같이 갈 사람 없나 톡에 등록된 사람들의 프로필을 내려보는데, 예화는 새삼 친구가 별로 없구나 하는 걸 느꼈다.
가끔 만나는 동창 친구는 있어도, 갑자기 이런 곳에 초대할 만한 친구는 몇 명 없었다.
떠올려 보자면 한 5명 정도.
그런데, 대부분 많이 바빴다.
‘혼자 가야 하나. 좀 아깝긴 한데......’
순간적으로 진현의 얼굴도 반짝하고 떠올랐지만, 예화는 금세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아니야.’
응.
“그래도 진현은 아니지.”
어차피 그는 음악에 별로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냥 혼자 가자.
혼밥도 익숙하게 했기 때문에, 딱히 어색할 건 없었다.
그렇게 잠시 멈췄던 발걸음을 다시 옮길 찰나,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가 아닌데요?”
“흐앟? 아, 깜짝이야.”
뒤를 돌아보니 진현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예화는 미약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진현은 웃는 표정이었다.
“뭐 보고 있었어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닌데 제 이름은 왜 불러요.”
“아, 그게 그냥......”
계속해서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려다가, 예화 이내 흘끗 진현을 바라보았다.
어차피 이런 건 관심 없어 할 사람 같긴 한데.
그냥 한번 말이나 해볼까.
“사실......”
대충 표가 남는데 같이 갈 사람이 없다고 이야기를 했다. 이야기를 들은 진현은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와. 설마 예화씨가 먼저 저한테 데이트 신청할 줄은 몰랐는데.”
“그런 거 아니거든요.”
눈을 흘기자 진현이 다시 웃으며 물었다.
“내일 몇 시에 하는데요?”
“강연회는 11시 반이요. 뮤지컬은......”
“그럼 아침 10시 반쯤에 만나면 되겠네요. 어떻게, 카페에서 만날까요?”
“네?”
“같이 갈 사람 없다면서요. 저랑 가요.”
예화는 너무 흔쾌히 성사된 약속에 살짝 어안이 벙벙했다.
******
철컥.
“설마 태워주실 줄은 몰랐는데.”
“저번에는 진현씨가 태워주셨으니까요......”
예화를 의외라는 눈으로 바라보자, 그녀가 시선을 살짝 피하며 말했다.
과연 어제 발생한 이벤트를 사일런스 필드까지 켜며 예화를 쫓아간 보람이 있었다.
약속시간인 10시 반이 되기 전까지 카페에 죽치고 앉아있자, 10분 정도 일찍 예화에게서 도착했다는 톡이 왔다.
아래에 내려와 보니, 이번에는 예화가 직접 차를 끌고 온 걸 볼 수 있었다.
“오, 차 되게 좋은데요.”
“아, 이거 제 차 아니에요. 아빠 차 잠시 빌려 타는 거예요.”
그러고 보니 저번에 수정이도 그렇게 말했지. 솔직히 그게 그거긴 했다.
“출발할게요.”
“네.”
예화는 출발한다는 말과 함께 차를 움직였다.
보통 차를 얻어타면 창밖이나 휴대폰에 시선이 가기 마련인데, 예화가 운전하니 계속 운전석에 시선이 간다.
‘......음.’
미녀를 데리고 타는 것도 좋지만, 이렇게 얻어 타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