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9화 〉# https://t.me/LinkMoa
“음흠흠~. 흥흐흥~ 흐흥~.”
일요일 아침.
한껏 미소를 지은 채 스튜디오에 도착한 예화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행복.
요즘 예화는 너무나도 행복했다. 요즘이라고 해야 할까, 정확히는 3일 전부터 그랬다.
목요일 날 점심.
천진현과 우연히 길가에서 마주쳤을 때는 참으로 운도 없는 날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얼굴만 보면 믿을 수 없는 바람의 현장과 소중한 친구 수정이의 상처만 떠오르니까.
하지만, 그를 만난 것은 오히려 엄청난 행운이었다.
나쁜 놈인 건 여전히 맞지만, 그날 그를 만난 것이 좋았냐~ 나빴냐~로만 따지자면 단연 ‘좋았다’라고 할 수 있었다.
그가 준 디퓨저는 상상 이상의 성능을 발휘했다.
덕분에 예화의 작곡 작업에는 커다란 진전이 있었다.
막혀있던 영감도 팍팍 떠오르고, 작업의 속도도 엄청나게 올라갔다. 마음이 편안한 건 덤이었다. 작업을 마치더라도 피로가 별로 쌓이지 않았다.
최근에는 좋아하는 만화의 BGM 의뢰까지 받아 꼭 좋은 결과물을 전해주고 싶었는데, 그것도 생각 이상의 결과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행복한 감정이 피어오른다.
예화는 노트북을 세팅한 뒤, 수건에 감싸 핸드백 안에 소중히 넣어둔 디퓨저를 뺐다.
“아......”
감싼 수건을 치우자마자, 은은한 향기가 코를 찔러왔다.
킁킁.
멀리서만 맡아도 황홀한 냄새.
예화는 디퓨저에 코를 박고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스읍.
“하아아......”
뇌가 맑아지는 것만 같은 느낌이다.
눈앞의 안개가 걷힌다.
여전히 냄새를 맡을 때마다 천진현의 얼굴이 떠올랐지만, 이 향기는 그의 얼굴을 제외하고서라도 그 자체에 너무 커다란 끌림이 있었다.
자꾸만 맡고 싶었다.
계속해서 맡고 싶었다.
“좋아. 후우~, 오늘도 집중하자.”
스스로 잡은 기간. 작곡에 도전하는 기간.
그 안에 유의미한 성과를 내고 싶었는데, 이대로라면 가능할 것만 같았다.
타닥.
타다닥.
딸깍딸깍.
헤드폰을 끼고 여러 방면으로 작업을 진행했다. 눈동자에는 흔들림이 없으며, 집중력은 무너지지 않는다.
은은한 향기와 함께하는 예화의 작업은 그야말로 거침이 없었다.
- 삐비빅! 삐비빅!
“아.”
알림과 함께 정신을 차린 예화는 노트북 오른쪽 아래에 나타난 시간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오후 12시 30분.
어느덧 점심시간이 다가온 것이다.
한치의 시간도 낭비하지 않고 집중했다는 것에 뿌듯함을 느낀 예화는 다시 디퓨저를 들어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킁킁. 스읍.
“후아아......”
향기가 뇌에 차오르고, 만족스럽게 미소를 지은 예화는 스튜디오의 문을 닫고 근처를 산책을 나섰다.
으음.
뭘 먹을까아~.
머릿속으로 노래를 흥얼거리며 산책하는 예화의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안 그래도 얼굴에서 빛이 나는 그녀가 웃음까지 지으니 거리를 지나가던 사내들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그녀를 향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길가에서 광역 어그로를 끌며, 예화는 일식집 안으로 들어갔다.
회덮밥!
오늘은 회덮밥이 땡긴다!
회덮밥 하나에 초밥 2개, 튀김까지 낭낭하게 배를 채운 예화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스튜디오에 돌아왔다.
당연하게도, 올 때 편의점에서 적당한 이온 음료를 구매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아, 루나 프이린 너무 귀엽다아......”
잠시 쉬며 만화를 본 예화는, 흐뭇한 미소를 잃지 않은 채 다시 헤드폰을 쓰고 집중했다.
곁에 천진현이 선물해 준 디퓨저를 놓는 것은 필수였다.
“후. 잘해보자.”
저녁 6시 30분에 알람을 맞춰놓았다.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이 향기.
향기와 함께 손가락을 놀린 예화는 그렇게 모니터에 눈을 고정했다. 뛰어난 집중력으로 작업을 진행했다.
하지만.
“어......?”
왜일까.
크게 집중이 되지 않았다.
마음의 안정이 사라졌고, 행복감이 낮아졌다.
영감이 떠오르는 빈도도 훨씬 줄어들었다.
“뭐지......?”
예화는 고개를 갸웃하며, 다시 집중하려고 노력했다.
어느 정도 집중은 됐지만, 이전과의 괴리감이 너무나도 컸다.
부족하다.
무언가가 부족하다.
너무나도 부족하다.
그렇게 생각할 찰나, 문득 예화는 코를 킁킁거리며 스튜디오의 냄새를 맡았다.
“어......”
다시 한번.
킁킁.
“아.”
착각이 아니었다.
요 3일 동안. 예화의 스튜디오는 온통 천진현의 냄새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예화는 노트북 옆에 있는 디퓨저를 집어 들었다.
스읍.
코를 박고, 디퓨저에서 나오는 향을 깊게 빨아들인다.
“......”
그러나, 디퓨저에서는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았다.
[ 효과 지속 시간 3일. ]
문득 상자를 깠을 때 보았던 문구가 떠올랐다.
3일이 지났다.
더이상 디퓨저에서 향기가 나지 않았다.
천진현의 냄새가 없었다.
예화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
“음...... 그냥 식물 모형 같은데? 이게 디퓨저라고?”
“진짜 향기가 났어.”
“거 신기하네. 그 친구한테 받았다고 했지?”
“응, 천진현이 줬어.”
수요일 오후.
마엘소프트 사장실에는 두 명의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사장실의 권위적인 책상을 앞에 두고 앉아있는 사람은 장예화의 아버지인 장찬규, 손님용 소파에는 장예화가 앉아서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역시, 아빠도 모르나.’
예화는 속으로 아쉬움을 토로했다.
솔직히 말해서, 그녀도 짐작하기는 했다. 아버지가 알 리가 없다는 것을.
아빠가 아무리 성공하고 존경할만한 인물이라고는 해도, 애초에 디퓨저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아닌 걸 어떡해.
사회에 대한 정보량과 디퓨저를 아는 건 다르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엄마도 그랬다.
애초에 부모님 두 분 모두 그런 쪽에 관심이 별로 없으니, 디퓨저나 뭐 샴푸 이런 건 다 자신이 추천해준 제품을 사용하고 있었다.
예화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한숨에 맞춰 장찬규가 입을 열었다.
“이거 냄새가 그렇게 좋았어?”
“어? 으, 으응. 엄청......”
순간적으로 천진현의 얼굴이 떠올라, 마치 천진현이 그렇게 좋았냐는 물음으로도 들린 예화는 발음을 멈칫하며 답했다.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은 장찬규는 고개를 끄덕였다.
“음. 뭐, 일단은 나도 친구들한테 물어볼게. 솔직히 난 잘 모르겠다.”
“응. 알았어. 고마워. 그럼 나 이제 가볼게.”
“그래. 조심히 다니고, 너도 좀 돌아다니면서 사람도 자주 만나고 그래라.”
치잇.
또, 또 그 소리.
요즈음 안 하나 싶었는데, 역시 기회를 노리고 있던 것이었다. 예화는 입술을 삐죽이며 아빠에게 답했다.
안 그래도 왜인지 요즘은 진심으로 살짝 외로움이 느껴졌다.
“우씨. 알았어.”
“맨날 말로만 알았지.”
“그럼 몰랐어! 됐지?”
“어휴, 하여간 고집은......”
한숨을 내쉰 장찬규는 딸아이를 바라보았다.
솔직히 그렇게 연애 이야기를 꺼내긴 했지만 장찬규도 그닥 큰 걱정은 하지 않았다. 딸은 객관적으로 봐도 누구나 탐낼 만할 여자아이니까.
솔직히 엄한 남자한테 걸려 안 좋은 경험을 하는 것보다는 저런 철벽이 안심될 때도 있었다. 뭐, 연애도 해보는 게 좋긴 하겠다만......
다 때가 있겠지.
“암튼. 나 진짜로 간다. 그리고! 내 연애 이야기하기 전에 아빠도 선크림부터 발라. 캄보디아 가서 아주 피부 다 태워 왔네.”
“너는 어쩌면 애엄마랑 똑같은 얘기를 하냐.”
“얘기를 해도 해도 안 들으니까 그렇지. 선크림 저번에 선물해준 거 어쨌어.”
“발라도 이런다 발라도.”
딸아이의 잔소리도 매섭다. 장찬규는 얼른 화제를 돌렸다.
“딸, 뭐 이따 점심 사줄까?”
“괜~찮~아~.”
“기념품 선물은 가져가라.”
“아, 맞다. 땡큐.”
장예화는 그렇게 선물 가방을 가지고 사무실을 나갔다. 장찬규는 나가는 딸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얘가 향수 때문에 찾아올 줄은 몰랐는데.”
아, 향수가 아니라 디퓨저라고 했나. 아무튼, 그거나 저거나.
일단 단톡방에나 올려보지 뭐.
장찬규는 그렇게 생각하며 회사 톡이나 속해 있는 단톡방에 사진을 올렸다.
그런데, 솔직히 말해서 알 것 같은 사람이 있지는 않았다.
******
“하아......”
자동차에 올라타 시동을 건다.
기껏 직접 물건을 보여주기 위해 차로 30분 가까이 걸리는 아빠의 사무실까지 찾아왔는데, 역시나 수확은 없었다.
“으. 나 뭐하냐 진짜.”
일요일 날 디퓨저의 향기가 끝난 이후로, 장예화의 머릿속은 뒤죽박죽 그 자체였다.
어떻게 보면 그냥 원래대로 돌아온 것뿐이다.
원래는 디퓨저 없이도 잘 작업해오던 그녀였다.
하지만 한번 맛본 그 압도적인 집중력과 안정감, 행복, 영감, 등등...... 그리고 무엇보다 그 향기.
그 치명적인 향기를 더 맡고 싶었다.
하룻밤을 자고 나면 잊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오히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욱 향기에 대한 갈망은 커져만 갔다.
디퓨저에 코를 아무리 깊게 박고 숨을 크게 들이쉬어도, 이전까지 났던 향은 거짓말처럼 사라져있었다.
또 향을 맡고 싶다.
더 집중하고 싶다.
장예화는 가지고 있는 이 식물 모형을 통해, 이게 대체 어디 회사의 어떤 제품인지 찾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봐도 없었다.
‘없다고?’
그래.
그냥 없었다.
인터넷은 물론 지인들에게 물어봐도 아는 이는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
오죽하면 가지도 않는 커뮤니티 사이트에 회원가입을 하고 온갖 갤러리를 돌면서 물어봤을까.
그러나 전부 헛수고에 불과했다.
“진짜로 직접 물어봐야 되나......”
솔직히 말해서 아주 간단한 방법이 있었다.
천진현.
아마도, 그 냄새를 향수로 쓰는 남자.
자신에게 디퓨저를 선물해준 장본인인 그 남자에게 이게 어디 제품인지 물어보면 확실하게 알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 저 집에 디퓨저 많은데. ]
[ 나중에 가서 더 달라고나 하지 말아요. 그거 되게 귀한 거니까. ]
[ 하, 안 그래요. ]
“아, 진짜아......”
예화는 머리를 붙잡았다.
그렇게 말했는데 어떻게 물어봐!
달라는 게 아니라 제품명만 물어보는 것도 좀 그랬다.
자신이 그를 대한 태도가 여간 까칠한 게 아니었으니까. 그렇게 사람 취급을 안 해놓고 이제와서 디퓨저의 성능이 좋으니 그걸 물어본다?
내로남불도 그런 내로남불이 없었다.
“하아.”
장예화는 또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수정이도 좀 그렇고......”
수정이는 천진현과 같이 산다. 수정이한테 물어본다면 알 확률이 높기는 하겠지만, 아직 그녀와는 화해가 제대로 된 상태가 아니었다.
그 분위기 속에서 디퓨저 이야기를 꺼내기도 그랬다.
그래서 자력으로 알아내려고 했는데, 실패한 것이다.
삐빅-
철컥-
차고에 차를 주차하고 문을 닫았다.
위로 보이는 6층짜리 빌라는 전부 장예화의 소유였다.
남 부러울 정도의 건물을 가지고 평생 걱정 없이 살 만한 예화였으나, 지금은 디퓨저 하나 때문에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주차를 마친 예화는 차고를 닫고 스튜디오를 향해 걸었다.
스튜디오 안에 들어가 노트북을 세팅하고 습관처럼 디퓨저를 옆에 놓았다.
향기는 풍겨오지 않는다.
갈증과 아쉬움을 느끼며 예화는 작업을 시작했다.
1시간, 2시간......
나름대로 집중을 했지만, 이전과 같은 홀린 듯 작업할 집중력은 나오지 않는다. 약간 피로함도 느껴졌으며, 영감도 막혔다.
예화는 디퓨저를 집어 들었다.
스읍.
그러나, 식물 모형의 디퓨저에 코를 깊게 박고 크게 숨을 들이쉬어도, 이제는 일말의 향도 느껴지지 않는다.
“후우.”
아쉬움에 입맛을 다신 예화는 가방을 싸기 시작했다.
노트북을 넣고, 디퓨저를 넣는다.
‘역시 안 되겠다.’
예화는 가방을 들고 스튜디오를 나섰다.
그녀의 발걸음은 카페 델리아를 향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