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3화 〉# https://t.me/LinkMoa
“오빠 좋아한 거 알아요?”
나와 다정이가 서 있는 장소에 사람은 별로 없었다. 해변가를 걸으면서 꽤 멀리까지 온 우리는 조용한 파도 소리를 배경으로 마주 보고 서 있었다.
다정이의 고백에 나는 다정이의 모습을 한눈에 담았다.
이미 이벤트를 통해 이렇게 될 것을 알고 있기는 했지만, 알고 있어도, 각오를 다지면서도 부끄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 다정이는 놀랄 만큼 귀여웠다.
다정이는 입술을 삐죽였다.
“치. 역시...... 별로 안 놀라네요.”
“아냐, 놀랐어.”
“거짓말하지 말아요. 이 나쁜 오빠야.”
찰싹!
내 말에 다정이는 나를 손바닥으로 쳤다.
다, 다정이가 폭력이라니?
기싱꿍꼬또로 놀렸을 때 이후로 처음이었다.
“나쁜 오빠?”
“저 다아~ 들었거든요. 언니한테?”
다정이의 눈이 게슴츠레하게 바뀐다.
“오빠 여자친구 있으시다면서요? 여자친구까지 있으면서 언니랑 그, 그런 짓도 하고...... 저한테도 키스하고.”
“......”
“저 그날, 오빠가 키스해줬을 때 얼마나 두근거리고 기분 좋았는지 알아요? 막 날아갈 것 같고 그랬는데.”
다정이는 그날을 회상하듯 말했다.
“오빠가 여행도 데려가 준다고 했고~, 키스까지 받고~, 엄마한테도 허락 받고......”
“응.”
“그런데, 그렇게 기분 좋게 하루하루 지내고 있었는데, 지난주 금요일 날 본 거 있죠. 오빠랑 언니가 키스하는걸.”
한번 말을 시작한 다정이는 입이 풀린 듯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나는 얌전히 다정이의 말을 들었다.
“되게 슬펐어요. 솔직히 그전까지는 저한테도 기회가 있다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런데, 그 장면을 보니까 그런 생각이 와장창 무너지는 거 있죠? 저는 입술만 닿은 키스에 그렇게 좋아했는데, 언니랑 오빠는 그것보다 훨씬 더한 걸 하는구나~ 하고. 아, 본 거는 그 오빠랑 언니랑 분위기가 묘하길래...... 궁금해서 오빠가 언니 데려다주는 거 계속 미행했었어요. 죄송해요.”
“아냐, 괜찮아.”
내가 말하자 다정이의 표정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그럼, 괜찮겠죠~. 사실은 미행하는 것도 다 알고 있었다면서요? 허접하게 미행하는 거 보고 재밌었겠네요.”
다정이가 나를 흘겨보았다.
내가 흠칫하고 몸을 떨자, 이내 다시 베시시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무튼, 그렇게 슬퍼하며 보고 있는데, 되게 예쁜 여자 한 명이 와서 오빠 여자친구의 친구? 라면서 말해줄 게 있다고 하는 거 있죠?”
예화였다.
거기서 내 친구라고 하지 않고, 내 여자친구의 친구라고 한 걸 보면 역시 나에 대한 호감도가 눈에 보이는 듯하다.
“얼떨결에 따라갔는데, 오빠한테는 이미 여자친구도 있고, 방금 본 너희 언니랑은 잠깐 노는 거다! 천진현 저거 아주 나쁜놈이다! 하고...... 너는 그렇게 되지 말아라, 막 그렇게 열성적으로 말하더라고요.”
“......”
“너무 혼란스러웠는데, 사진까지 막 다 보여주더라고요? 와아, 키스만 봤는데 언니랑은 모텔도 가고, 그거 그날이죠? 저랑 언니랑 처음으로 셋이 만난 날.”
“음...... 맞지?”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다정이의 눈매가 더욱더 가늘어진다.
이러다가 실눈 캐 되는 거 아니야?
“그날이 언니가 저랑 오빠 잘되게 도와주겠다고 한 날인데, 와아......”
할 말이 없다.
나는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슬쩍 피했다.
“게다가 보여준 사진이 그것뿐만이 아니었어요. 오빠 여자친구분이랑 같이 찍은 사진도 막 보여줬는데, 와아. 여자친구분은 진짜 말도 안 나오게 예쁘고......”
수정이가 많이 예쁘긴 하지.
암암.
물론, 이 상황에서 굳이 내 생각을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사진까지 다 보고 나니까 믿을 수밖에 없더라고요. 오빠가 여자친구 있는데 언니랑 바람까지 피우고, 저한테 키, 키스도 하고...... 솔직히 그래. 저는 그럴 수 있어요. 제가 오빠한테 여자친구 있냐고 물어본 것도 아니고...... 그런데, 언니랑 바람피운 걸 알면 화가 나야 정상인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알아요?”
“무슨 생각?”
내가 묻자 다정이가 대답했다.
"슬펐어요. 언니도 저 여자친구를 못 이기는데, 나는 더 못 이기겠구나. 여자친구분 얼굴이랑 몸매 보고 나는 상대도 안 되겠구나, 하는 생각부터 들었어요. 웃기죠? 게다가, 저한테 알려준 그 언니분도 너무 예쁘더라고요. 그 언니 앞에 있으니 저는 막 초라해지고...... 아, 오빠 설마 그 언니랑도 바람피운 거 아니죠?"
"절대 아니다, 야."
언젠가는 그렇게 되게 할 거지만.
"하긴, 그런 것 같았어요. 그 언니는 오빠 되게 싫어하는지 막 엄청 욕하던데."
"......"
"이상하게도, 오빠를 막 욕하는데 그게 듣기 싫은 거 있죠? 사실은 그 언니가 다 맞는 말 한건데. 나쁜 오빠야. 그쵸~?"
생긋 웃으며 물어보는 다정이를 보니, 오늘 참 단단히 마음먹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내가 나쁘긴 하지.
"어쨌든 그 언니랑 이야기하면서 내가 오빠를 많이 좋아하는구나, 그런 걸 느꼈어요."
"그 언니랑은 그대로 헤어졌어?"
"네, 그냥 할 말 다 하시더니, 이런 이야기 들려주게 돼서 미안하다고, 막 과자랑 뭐 사주고는 집 앞까지 돌려보내 줬어요."
오......
역시 나를 매우 많이 싫어할 뿐, 착하긴 한가보다.
“그래서 되게 슬퍼한 채로 그냥 바로 집에 갔죠. 언니가 있길래 언니랑 이야기를 했는데......”
“했는데?”
“되게 어떻게 말해야 할지 고민고민을 했는데, 언니는 이미 알고 있더라고요?”
“응.”
다정이한테 키스 장면을 들키기 전. 나는 유정이 누나한테 미리 다 계획을 말해두었다.
다정이한테 우리의 관계를 밝히는 것과, 내게 다른 여자친구가 있다는 것까지도.
애초에 유정이 누나는 가끔 내게 질투 섞인 표정으로 ‘이런 거 많이 해봤지’, ‘얼마나 했어’ 등등을 물어봤었기 때문에, 비교적 쉽게 말을 꺼낼 수 있었다.
과연 다른 여자친구가 있다는 말에 살짝 슬픈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아무래도 처음부터 바람 섹스를 하는 나쁜 남자 느낌으로 접근해서 그런지, 충격은 덜한 모양이었다.
애초에 누나랑 섹스할 때, 누나‘도’ 내 여자친구 하라고 말해둔 적이 있고.
말할 당시에는 호감도가 미약하게 깎였었지만, 몇 번 살을 섞으니 금방 다시 기존의 호감도를 넘어섰다.
다정이의 이벤트에 적혀 있는 키워드들을 보면, 어차피 다 들키도록 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누나에게까지 알려진다는 것이니. 차라리 그 전에 알리자는 생각이었다.
마냥 이벤트만 믿는 것보다는 그 이벤트를 잘 보좌해줄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주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이미 내게 단단히 빠진 누나의 호감도가 크게 깎이리라고도 생각을 안 했고.
물론, 호감도 100을 찍은 다음에 말을 하는 편이 더 좋겠지만, 일주일 안에 호감도 100을 달성하기는 힘들었다.
그렇다면 코인으로 올려야 하는데, 70 이상의 능력치는 기본적으로 능력치 1당 3천, 80대는 4천, 90대는 1당 5천이나 코인을 소모했기 때문에 지출이 컸다.
어쨌든 그렇게 그냥 곧바로 누나에게 알렸고, 미리 누나에게 알려둔 것이 잘 작용해, 다정이의 충격도 꽤 덜어준 듯하다.
“언니는 바람 상대라고 말하니까, 바람 상대가 아니라 자기도 똑같이 오빠 여자친구라고 하더라고요. 혼란스러운 와중에 거기서 또 충격이......”
다정이는 피식 웃었다.
“저도 처음부터 노리고 있었다면서요. 이 바람둥이 오빠야!”
찰싹.
다정이가 또 나를 때렸다.
이거, 내가 다정이를 폭력적으로 만든 것인가?
“아야, 아파.”
“아프기는 뭐가 아파요. 저보다 훨씬 크면서. 게다가 오빠 막 이상한 능력까지 쓸 수 있다면서요. 이런 거 다 막을 수 있는 거 아니에요?”
“앵? 그런 것까지 말해줬어?”
“네, 저 오늘 완전 다 알고 왔거든요오?”
유정이 누나한테 여자친구에 대해 말하는 김에, 그냥 내가 특별한 힘을 가졌다는 것까지 알렸다.
어차피 같이 살도록 하고 그러면 블랙룸이나 여타 스킬들을 쓸 일이 많을 테니까. 특성도 줄 거고.
무엇보다 큰 이유는 누나가 다정이한테 나와 자신의 관계를 알리는 것에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다정이의 공모전이 정말 코앞이라 흔들리면 안 된다는 이유였는데, 반드시 잘 될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주기 위해서는 내게 특별한 힘이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게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물론, 히로인 어플 자체에 관해서는 모른다. 그걸 알고 있는 건 델리아 뿐.
“언니랑은 많이 이야기했어요. 그동안 있었던 일이나, 오빠에 대해서나......”
다정이는 다시 차분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 이야기를 듣고, 분명히 바람둥이 오빠인데, 그럼 오빠도 나를 좋아했던 건가 싶어서 기쁘기도 하고, 기회가 있는 건가 싶기도 하고, 그런데 이런 게 맞는 건가 싶기도 하고......”
다정이는 회상하듯 웃었다.
“그래서, 언니한테 물어봤어요. 언니는 오빠가 막 여자친구 여러 명 사귀는데 괜찮냐고, 그랬더니 뭐라고 하는지 알아요?”
“뭐라고 했는데?”
“오빠랑 그, 그걸 하면 다른 생각은 할 수 없을 정도로 좋데요. 아휴우.”
다정이가 빨개진 얼굴에 부채질했다.
“아무튼, 저는 그래서 집에서 생각을 정리해봤죠.”
“역시 감기 걸렸다는 건 거짓말이었네.”
“왜요! 저는 거짓말 하면 안 돼요?”
“흐. 그런 뜻은 아닌데.”
다정이가 베시시 웃었다.
“그런데 신기하게, 오히려 생각하면 할수록 오빠가 더 좋아지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