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0화 〉# https://t.me/LinkMoa
보스턴으로 여행 온 이튿날 오후.
화창한 햇살이 비추는 해변 근처 카페의 테이블에 델리아와 강수정이 마주 앉아 있었다.
메뉴는 델리아와 강수정이 가장 좋아하는 생크림 가득한 커피와 초코칩 쿠키.
달콤 쌉싸름한 맛을 즐기고 미소가 피어올라 있어야 할 둘의 얼굴에는 왜인지 그림자가 드리워있었다.
정확히는 델리아의 표정이 심히 좋지 않아 보였다.
은은한 긴장감이 감도는 와중, 강수정이 걱정스럽게 입을 열었다.
“......리아, 괜찮아?”
“괜찮아요. 언니.”
“아니, 전혀 안 괜찮아 보이는데......”
“......”
강수정의 말에 델리아가 속으로 입술을 삐죽였다.
‘맞아. 전혀 안 괜찮아요.’
분명 여행을 오기 전까지, 델리아는 커다란 기대감에 가슴이 부풀어 있었다.
아니, 적어도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여행을 오기 전부터, 진현님은 여행 가서는 자신을 꼭 공략해주겠다는 뉘앙스를 풍겼다. 심지어 수정이 언니한테도 슬쩍 언질을 듣기까지 했다.
델리아는 자신만의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대체 언제쯤 진현님이 내게 키스해 줄까.
대체 언제쯤 진현님이 나를 안아줄까.
행복한 상상을 하며 진현님과 여행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오늘 그 상상이 와르르 무너졌다.
“하아. 좋다. 역시 수정이 입보지가 최고야.”
“아움, 쪼옥, 쭙...... 그렇게 칭찬해도, 쪼옥. 밖에서는 안 해줄 거거든?”
그래.
솔직히 그럴 수 있다. 이제는 익숙하기까지 했다.
수정이 언니는 진현님의 히로인이니까.
그것도 가장 첫 번째.
진현님이 가장 정을 많이 준 존재이고, 서로 눈만 맞았다 하면 키스를 나눴다. 이번 여행에서도 자신보다 먼저 야한 짓을 할 거라는 건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가슴이 부글부글 끓기 시작한 건 다음부터였다.
“하이~ 전 지나에요. 만나서 반가워요.”
“네, 안녕하세요.”
“저희 같이 놀아도 되죠? 히.”
갑자기 불청객이 한 명 끼어들었다.
오늘 아침, 호텔 레스토랑에서 식사할 때부터 진현님을 노골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꽤 거슬렸던 여자였다.
그런데, 설마 해변까지 쫓아와서 이렇게 들이댈 줄이야.
‘분명 거절해주시겠지?’
델리아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도 셋이서 온 여행이다.
진현님이 아무리 앞으로도 히로인을 계속 늘리고, 시스템 등급을 올려 끝까지 성장할 존재라고 해도, 이번 여행에서는 분명 우리에게 집중해주리라고 믿었다.
게다가 어차피 지금은 남은 일반 히로인 자리도 없을 테니까-.
“오. 그럼요. 환영해요. 뭐하고 놀까요?”
“와우. 쿨하시네요. 흐음~. 저 공 있는데, 비치발리볼 어때요?”
분명 거절해달라고 신호를 보냈는데......!
진현님은 분명 자신의 눈빛을 보고도, 승낙한 것이다.
그만큼 저 여자가 매력적인 것인가?
나보다 더?
델리아는 가슴이 아파옴을 느꼈다.
진현님은 새로 합류한 여자랑 아주 쿵짝을 맞춰 놀았다.
“와우! 나이스 서브~.”
“지나, 비치발리볼 되게 잘하네요?”
“히. 저 운동 못 하게 생겼어요?”
“전혀요. 복근도 되게 탄탄하고.”
“그 탄탄한 복근, 한번 만져볼래요?”
지나는 틈만 났다 하면 진현님과의 스킨쉽을 시도했다.
일부러 맨살이 다 보이는 수영복을 입고, 가슴이나 배를 터치하게 하거나 진현님의 복근이나 등을 은근슬쩍 만졌다.
진현님은 저런 건강미 넘치는 미인을 좋아하는 것인가?
델리아의 몸매도 완벽에 가깝지만, 저렇게 탄탄하기보다는 약간 말랑말랑하게 생겼다.
분명 진현님은 자신 같은 몸을 더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와아! 이겼어요.”
“지나 덕분이네요.”
팀은 자신과 수정이 언니, 진현님과 도둑고양이년으로 2:2였다.
진심만 낸다면 그냥 이길 수 있지만, 이걸 이겨야 하나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는 와중에 승부가 끝나버렸다.
애초에 진현님과 지나의 스킨쉽이 신경 쓰여 집중이 안 됐다.
“아, 너무 재미있었어요. 감사의 의미로 점심은 제가 쏠까 하는데 어때요? 맛있는 곳 알거든요. 같이 먹어요.”
비치발리볼을 즐기고, 10시 30분이 넘어서 오픈한 요트 대여점에서 요트까지 빌려 타고난 다음, 점심시간이 되어 지나가 말했다.
혹시 여기서는 거절해주지 않을까 싶었지만.
“물론이죠. 기대되네요.”
“진짜 맛있어요~. 어서 가요!”
어림도 없지.
진현님은 그런 거 없이 계속 지나와 함께 딱 붙어서 점심까지 해결했다.
심지어 그냥 점심이 아니라, 고량주를 듬뿍 동원한 술판이라는 또 다른 이름의 점심이었다.
“진현은 운동 뭐 해요? 몸 되게 좋아 보이는데.”
“그냥 아침마다 스트레칭 조금만 하고 있어요.”
“에이~. 거짓말.”
저 도둑고양이 같은 여자가 가장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은, 진현님을 그다지 좋아하지도 않아 보인다는 것이다.
그냥 딱 유혹할 대상 정도로 생각하고 있음이 분명한데, 진현님은 바보같이 거기에 좋아라하며 실실 웃고 있었다.
뭐, 계속해서 진현님을 칭찬하며 바디 터치를 계속하니까 넘어가는 것도 머리로는 이해가 간다만, 마음은 아니었다.
“와. 진현 술 되게 쌔네요?”
“흐. 뭘요.”
“하아. 저는 벌써 취할 것 같은데......”
아무래도 처음에는 우리 셋을 모두 취하게 만든 다음, 홀로 정신이 멀쩡한 상태에서 진현님을 유혹할 생각인 듯했지만......
진현님이 생각 외로 술에 너무 강한 탓에 작전을 바꾼 지나는 도리어 자신이 취한 척을 했다.
“딸꾹, 진현 저어...... 호텔 방까지만 조홈 데려다줄 수 있나요?”
“그럴까요?”
“아 그건 제가......”
“델리아? 그쪽은 저 부축하려면 힘들 텐데에, 진현이 키가 크잖아요......”
“......”
지나는 적당한 명분으로 진현의 부축을 받았다.
“그리고 어차피 금방인데에, 두 분은 여기 카페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그렇게 말하는 지나는 아무라 봐도 혀만 대충 꼬고, 눈빛은 살아있는 상태였다. 호텔에 둘이 가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뻔한 일이었다.
솔직히 그냥 따라가면 됐지만.
“그래. 여기서 쉬고 있어.”
진현님이 그렇게 말한 바람에 그냥 카페에서 커피만 홀짝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50분이 넘게 흘렀다.
휴대폰으로 톡을 보낼 수도 없었다. 포켓 와이파이는 진현님이 가지고 있으니까.
“델리아. 이제 5분만 있으면 1시간이야.”
“네......”
“진현이 너무하다 그치? 저 여자도 그 붉은 실을 꽂을 생각인가?”
“그건 아닌 것 같긴 하지만......”
어차피 일반 히로인의 자리는 없다.
“그렇다 해도 여행 와서 이게 뭐야. 우리도 호텔 가봐야 하는 거 아니야?”
입술을 삐죽이며 말하는 수정이 언니에 델리아는 공감했다.
자신에게 인격을 부여한 태초의 목소리.
진현을 제일로 생각하고, 그의 말을 무조건 따르고 그를 위해 살 것.
하지만 진현님에게 해를 끼치지 못한다면서, 자신에게 이렇게 인격이 있는 건 오히려 모순일 것이다.
델리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응?”
“저 좀 갔다 올게요. 언니.”
“아! 응. 잘 생각했어. 어서 다녀와.”
델리아는 얼른 뛰어서 골목으로 들어간 다음 투명화 마법과 비행 마법을 사용해 순식간에 호텔에 도착했다.
그리고 근처에서 다시 마법을 해제한 뒤, 호텔 정문에 들어가 아주 넓게 기감을 펼쳤다.
델리아는 곧바로 진현을 감지했다. 그리고 역시나, 기감으로 느낀 진현님은 누군가와 몸을 겹친 채 리드미컬하게 허리를 움직이고 있었다.
델리아는 이를 아득 물었다.
“7층......”
진현님과 수정이 언니, 자신이 머무는 방은 13층이었다.
그렇다면 저 방은 지나라는 여자가 머무는 방일 것이다.
[ 7층입니다. ]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델리아는 기감으로 감지한 곳을 향해 걸었다. 그리고, 마침내 한 호텔 문 앞에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