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3화 〉# https://t.me/LinkMoa
“아우우...... 어지러워라.”
은주는 호텔 복도 벽에 손바닥을 대며 몸을 비틀거렸다.
오랜만에 여행에 왔다고 잘 마시지도 않는 술을 엄청나게 퍼마셨다.
뭐, 평소에도 가끔 지나랑 놀 때는 조금 마시기는 하는데......
‘아휴, 걔는 너무 술꾼이야.’
솔직히 자신도 술이 약한 편은 아닌데, 지나랑 마실 때면 항상 정신이 나갈 때까지 마셔댔다. 그녀가 그렇게 분위기를 주도하니까.
편견 없이 대해주는 인싸 스타일은 원래 술을 원래 잘 마시는 건가?
아무튼.
‘이제 졸업도 진짜 얼마 안 남았구나......’
새삼 감회가 새로웠다.
그동안 무엇하나 돌아보지 않고 오로지, 오로지 음악만 바라보며 달려왔다.
정말로 열심히 해왔다고 가슴에 손을 얹고 자부할 수 있을 정도였다.
손가락에 굳은살이 꽉 배길 때까지 바이올린을 연주했고, 음 하나하나가 살아있다는 평가를 들을 때까지 손가락에 바늘을 세우듯 피아노를 쳤다.
다른 악기들도 두루두루 손을 댔다.
그래도 버틸 수 있었던 건, 그냥 악기를 연주하는 것 자체가 즐거웠기 때문이리라.
‘설마 초등학교 때 잠깐 했던 청소년 오케스트라가 이렇게까지 커질 줄은 몰랐는데.’
은주는 낮게 미소 지었다.
초등학교 고학년 시절.
소꿉친구였던 하린이 그리고 진현이랑 같이 잠깐 청소년 오케스트라에 들어갔던 적이 있었다.
꽤 커다란 규모의 오케스트라였다.
1악단과 2악단.
그리고 처음으로 오케스트라를 시작하는 사람들을 위한 3악단까지 존재하는 대형 악단이었다.
합주의 재미를 알려주기 위해, 처음 3악단에 들어간 사람은 다 같이 반짝반짝 작은 별을 오케스트라 버전으로 연주하게 되는데, 은주는 그때 전율과 함께 꿈을 발견했다.
나는 음악이구나 하고.
‘둘은 잘 지내려나......?’
한국으로 돌아가면 딱히 어울릴 친구가 별로 없었다.
여기서 친해진 예슬이는 대학교 졸업까지 아직 1년 더 해외에 남아있어야 했고, 지나는 미국인인 만큼 당연히 미국에서 꿈을 이룰 것이다.
자신만 한국에 귀국하는 꼴.
해외에 남아 악단에 들어갈까, 작곡가를 할까 아니면 프로듀싱을 할까.
여러 방면으로도 생각해봤는데, 설마 그냥 취미로 시작한 미튜브가 그렇게까지 잘 될 줄은 몰랐다.
미튜브에 올인하고, 개인 공연을 다니면서 살아도 괜찮겠다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때문에, 은주는 한국으로의 귀국을 결심했다.
‘뭐, 아직 몇 달 더 남았지만.’
게다가 사실대로 고하자면, 여기서도 진정한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건 지나랑 예슬이 두 명뿐이었다.
‘한국에 가면 하린이부터 만나기로 했지.’
진현이와는 연락이 없었지만, 그래도 하린이와는 연락을 꽤 자주 했다.
작년에는 그녀가 직접 자신을 만나러 해외에 날아와 주기도 했다.
어렸을 때는 진짜 자주 놀았는데......
하린이를 직접 만난 지도 이제 슬슬 1년이 넘어갔다. 톡이야 며칠 전에 또 나눴지만.
‘진현이도 만나보고 싶네.’
솔직히 사촌인 진현이는 초등학교 이후로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어릴 적에 굉장히 친하게 지냈다는 그런 그리운 느낌 자체는 가슴 깊이 남아있었다.
하지만 애초에 초등학교 시절이고, 지금 막상 얼굴을 보면 서먹서먹할 수도 있었다.
그래도 몇 안 되는 친구니까.
만나는 게 기다려졌다.
‘엄마한테 번호 좀 달라고 해야겠다.’
진현이와는 해외로 유학 간 다음, 자연스럽게 연락이 끊긴 상태였다. 지금까지 자신도, 진현이도 서로 연락 한 통 안 하는 사이였다.
너무 갑작스럽게 만나면 좀 그러니까.
이제 몇 달 안 남았으니, 슬슬 졸업해서 한국에 간다고 연락을 해두면 좋을 것이다.
솔직히 중간에 몇 번 인가 연락을 해볼까 생각도 했지만, 그냥 그만두었다.
왜냐하면, 진현이의 소문이 그랬으니까.
진현이와는 사촌 사이였기 때문에 부모님을 통해 간간이 소식이 들려왔다. 그런데, 고등학교 때부터 진현이에 대한 소식이 굉장히 안 좋았다.
뭐, 놀기만 하고~, 미래는 생각도 안 한다고 했나?
그러면서 너는 열심히 해서 다행이라는 둥, 같은 나이인데 이렇게 다르다는 둥, 부모님은 진현이를 깎아내리며 자신을 칭찬하는 경우가 많았다.
동갑의 사촌이다.
비교되는 게 당연하긴 하다만...... 그래서 연락할 마음이 잘 들지 않았다. 혹여 진현이가 그걸 별로 원치 않을 수도 있으니까.
자신이 부끄러울 때는 남에게 자신을 보여주기 싫다.
그건 은주도 잘 알고 있었다. 아무리 열심히 연습해도 실력이 늘지 않고, 오히려 제자리걸음을 하거나 뒤처질 때.
그럴 때는 그냥 어디론가 숨고 싶었다.
진현이도 내가 연락하는 게 부담이겠지, 그렇게 생각해 가끔 생각이 나도 아무 연락도 안 한 채 그냥 그런대로 살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둘 다 어엿한 성인이 됐으니까.
진현이도 군대를 갔다 왔다고 한다.
“일단 뭐......”
연락은 여행 끝나고 하고, 이번 여행부터 잘 즐기자.
그렇게 생각한 은주는 엘리베이터 쪽으로 갔다.
여러 대의 엘리베이터가 즐비한 공간 안에 직원이 서 있었다. 저 사람한테 샴페인 자판기가 어디 있는지 물어보자.
“몇 층으로 가실 예정입니까?”
“저기, 샴페인 자판기가 어디 있죠......?”
“아. 샴페인 자판기라면 10층 엔터테이닝 플로어에 있습니다. 10층에서 내려 곧장 왼쪽으로 쭉 가면 자판기코너가 존재합니다. 잡아드릴까요?”
“아, 네. 부탁드려요.”
직원이 엘리베이터를 잡아주고, 은주는 10층으로 향했다.
곧 12시가 되는 밤인데도, 삐가뻔쩍한 분위기를 풍기는 엔터테이닝 플로어에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대부분이 그룹을 지어 오락이나 인도어 스포츠를 즐기고 있었다.
11층까지 통으로 이어져 있었기 때문에, 상당히 넓은 엔터테이닝 플로어에는 즐거운 분위기가 만연했다.
‘나는 술만 사가면 되겠지?’
지나나 예슬이를 굳이 여기에 부를 필요는 없을 듯했다.
그냥 샴페인과 과자 몇 개만 사 가자고 생각한 은주는, 곧장 자판기코너로 향했다.
그때였다.
“와, 여기 봐. 보드게임도 많이 있는데?”
“그러게. 다 빌릴 수 있나 봐. 돈도 안 드나 봐. 우리 오늘은 방에 가져가서 이거나 할까?”
“응. 재밌겠다. 히히.”
“근데 조식 먹으려면 빨리 일어나야 할 텐데, 6시 반에 일어나야 7시에 밥 먹고 놀러 갈 수 있어.”
“괜찮아, 괜찮아. 그리고 비행기에서 몇 시간 자서 별로 안 졸려.”
여자와 남자가 말하는 소리였다.
그냥 여자와 남자가 대화하는 거라면 아무런 특별할 것도 없지만, 은주는 둘의 대화에 귀를 쫑긋 세울 수밖에 없었다.
‘한국어?’
그리운 언어다.
미국에서 살다 보면 한국 사람이 놀러 오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그때마다 되게 반가운 기분이 들었다.
은주는 슬금슬금 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걸어갔다.
목소리가 들려오는 쪽은 때마침 가려던 자판기코너.
은주는 목소리의 주인공을 바라보았다.
‘와아......’
자판기코너 옆에는 보드게임을 빌려 갈 수 있는 코너도 존재했다.
거기에는 남자 1명과 여자 2명이 보드게임을 구경하며 서 있었다.
은주는 숨이 멎을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다.
‘너무 예쁜데......?’
엄청나게 예쁘다. 진짜로.
솔직히 말해 자신도 외모로는 꽤 괜찮은 편이라고 자부하고 있었는데, 자신감이 뭉텅이로 깎이며 절로 고개가 수그러드는 미모였다.
특히, 금발의 여성.
그녀의 미모는 그야말로 압도적이었다. 갈색 머리의 여자도 예쁘지만, 금발을 한 여성은 무슨 여신이 강림한 듯했다.
‘대박.’
작년에 놀러온 하린이를 보고, 살면서 그녀보다 예쁜 여자는 못 볼거라고 생각했는데 크나큰 오산이었다.
갈색 머리의 여자는 남자의 팔에 매달리듯 애교를 부리고 있었고, 금발 여성은 그런 둘에게서 한 걸음 떨어져 마치 사랑에 빠진 것처럼 남자를 부드러운 눈길로 쫓고 있었다.
‘부자인가......?’
은주는 남자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상당히 잘생겼다.
‘흐음...... 어디서 본 것 같기도 한데......?’
하지만 아무리 잘생겼다고 해도, 어떻게 두 명과 동시에 저럴까.
솔직히 양다리를 걸치는 사람은 좀 봤는데, 저렇게 두 명과 함께 애정 어린 시선을 주고받는 건 처음 봤다.
“?”
그런데, 시선을 눈치챘는지 문득 금발의 여성이 은주 쪽을 바라보았다.
둘은 눈을 마주쳤다.
“......!”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눈빛.
기본적으로는 그저 상냥한 눈빛이지만, 그 눈빛을 마주한 은주의 몸속에서 무언가 본능적인 공포감이 느껴졌다.
은주는 후다닥 코너에서 멀어져, 엘리베이터를 타고 다시 호텔 방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