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7화 〉# https://t.me/LinkMoa
운수 좋은 날이라.
나는 그 말을 정정할 필요성을 느꼈다.
오늘은 운수가 그냥 좋은 날이 아니라, 매우 좋은 날이었다.
머리칼을 넘기는 장예화.
이거 눈요기 제대로 되네.
갸름한 턱선과 침이 절로 넘어가는 아리따운 쇄골. 잡티 하나 없는 피부.
향수도 대체 뭘 쓰는지, 이렇게까지 수컷을 유혹하는 냄새를 풍길 수 있을까 싶었다. 델리아의 중독적이면서도 포근한 냄새와는 또 다른, 그런 치명적인 향기였다.
“뭐 드실 거에요?”
“저는 투훔바 파스타 런치 세트로 먹을 건데, 예화씨는요?”
때마침 근처에 아웃백 하나가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곧바로 들어와 자리에 앉았다. 평일이었기에 기다리는 사람 없이 바로 입장이 가능했다.
“흐음. 저는 카프레제 런치 세트로.”
카프레제는 그냥 토마토 샐러드인데.
역시 장예화 정도의 몸매가 나오기 위해서는 철저한 관리가 바탕이 되어야 하는 건가.
나도 요즘 먹는 걸 보면 많이 먹기는 하는데, 코인으로 올린 능력치는 어지간한 일이 있으면 내려가지 않는다는 델리아의 은 사실이었다.
아무리 먹어도 몸매와 외모를 비롯한 능력치들은 모두 떨어지지 않고 있었으며, 오히려 체력 능력치는 코인을 투자하지 않았는데도 51이 되어 1이 더 늘어난 상태였다.
“그런데, 오늘은 어쩐 일로 같이 점심 먹자고 했어요?”
종업원을 불러서 주문을 마친 뒤, 나는 예화에게 궁금증을 물었다.
예화가 내게 먼저 밥을 먹자고 제안할 줄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애초에 아직 등급이 모자라 공략을 진행하지 못하는 대상이니까.
나 또한 그녀에게는 지금 크게 신경을 쓰지 않고 있는 상태였는데, 예화 쪽에서 내게 먼저 관심을 준 것이었다.
“그냥. 조금 궁금한 것들이 있어서요.”
내 물음에 장예화는 다소 의미심장한 미소로 대답했다.
“궁금한 것들이요?”
“네, 수정이에 관한 거예요. 둘이 언제부터 만났나~ 뭐, 그런 거? 사귄다면서요.”
아하.
과연 그렇겠지.
예화는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그녀는 수정이의 절친이니만큼 수정이의 연애에 관심이 있는 모양이었다.
“일단 수정이랑 사귄 지는 오늘로 16일째네요.”
“얼마 안 됐네요?”
“네.”
“그리고 지금도 사귀고 있는 거죠?”
“네.”
나는 장예화의 물음에 그대로 답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기본 런치 세트에 포함된 스프와 빵이 나왔다.
“빵과 브로콜리 스프 나왔습니다.”
“아, 네. 감사합니다.”
예화는 곧바로 빵을 썰어서 스프에 찍어 먹었다. 그 움직임 조차 우아했다.
예화는 계속해서 내게 수정이와 관련된 것을 질문했다.
뭐 어떻게 하다가 갑자기 사귀게 되었냐, 고백은 누가 먼저 했냐 등등 이것저것.
수정이네 부모님에게도 한 번 들려주었던 이야기인지라 나는 강간 이야기는 쏙 빼고, 적당히 나와 수정이의 이야기를 적당히 각색해서 들려줄 수 있었다.
분위기는 꽤 괜찮았다.
메인디쉬가 나오기 전까지는.
주문한 투움바 파스타를 한창 먹고 있던 찰나에, 돌연 예화가 진지한 표정을 하며 물었다.
“그런데, 진현씨.”
“네.”
“수정이 정말 좋아하세요?”
“네? 당연하죠.”
나는 이게 갑자기 무슨 질문인가 싶은데, 일단 나는 곧바로 대답했다.
안 좋아할 수가 있을까.
얼굴도 예쁘고, 몸매도 좋고, 밥도 잘 해주고, 섹스도 잘하고, 가슴도 크고, 키스도 잘하고...... 어쩐 일인지 성적인 게 대부분이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장점을 나열하면 수십 개나 될 것이다.
무슨 당연한 걸 묻냐는 내 표정에, 예화가 얼굴을 찡그렸다.
지금까지 계속 사근사근하게 웃는 표정을 지었던 것과는 정반대의 표정이었다.
“좋아한다고요? 수정이를 그냥 이용하려던 게 아니고요?”
“네?”
“참 뻔뻔하시네요.”
뭐지?
갑자기 예화의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애초에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수정이가 예전에는 그쪽 뒷담을 많이 했거든요. 그쪽도 수정이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 보였고, 서로 사이가 그렇게나 안 좋았는데 어떻게 갑자기 사귀게 됐을까......”
예화는 팔짱을 끼고 의자에 몸을 기댔다.
“그쪽이 수정이한테 이용가치를 발견하고 접근한 거겠죠. 고백도, 접근도 그쪽이 먼저 했다고 하니까요. 수정이는 옛날부터 착한 아이였어요. 솔직히 층간 소음 문제는 수정이가 잘못했다고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수정이의 마음을 마음대로 가지고 놀고 이용하면 안 되죠.”
마음을 마음대로 가지고 논다.
순간적으로 히로인 어플이 생각났지만, 이내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애초에 델리아가 히로인 어플의 시스템을 이용할 수 있는 것은 전 세계에 나밖에 없다고 했다.
그렇다면 장예화가 말하는 것은......
“아까부터 무슨 말을 하는지......”
내가 일단 발뺌하자, 장예화는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지금껏 한 번도 보지 못한, 굉장히 공격적인 표정이다.
저 예쁜 얼굴에서도 저런 표정도 다 나오네.
지금까지의 표정과 태도는 그렇다면 다 연기였다는 건가.
“하. 계속 발뺌하시겠다는 거예요? 정말 어이가 없네요.”
한순간에 정색하며, 장예화는 옆에 있던 가방에서 사진을 1장 꺼내 내게 보여주었다.
“이건......”
아니, 유정이 누나잖아?
게다가 달팽이와 풀 마냥 나와 딱 달라붙어 있는 모습이었다.
이날 진짜 술을 많이 마시기는 했나 보다.
사진만 보아도 그 안에서부터 술 냄새가 진동했다. 사진에는, 일요일 날 내가 유정이 누나와 술을 마신 뒤 모텔에 가고 있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대체 이건 어떻게 된 일일까요? 수정이가 아닌 다른 여자랑 이렇게 딱 붙어서 말이죠.”
“그러게요. 신기하네......?”
내 반응에 예화가 피식 웃었다.
“한 장이 아니에요.”
예화는 가방에서 나머지 사진을 한 번에 꺼냈다.
사진은 총 8장.
나와 유정이 누나의 얼굴을 확실히 알 수 있는 사진부터, 같이 모텔 안으로 들어가는 사진까지.
누가 보아도 명백히 내가 다른 술취한 여자를 데리고 모텔에 들어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도록 정확하게 찍혀있었다.
“이건 대체 언제......?”
“집에 가던 도중에 우연히 그쪽이 보였는데, 술 취한 다른 여자랑 같이 있더라고요. 그래서 찍었어요. 설마 바람을 피울 줄은 생각도 못 했는데, 참 다행이죠? 수정이가 그쪽한테 더 놀아나기 전에 발견해서.”
어느덧 호칭이 ‘진현씨’에서 ‘그쪽’으로 바뀌어 있었다.
근데 사진은 인화는 언제 했데.
생각보다 잘 나왔다.
“어떻게 된 건지 빨리 설명해 보세요. 분명히 말했죠? 수정이랑 16일째 사귀고 있다고, 그 입으로 지금도 사귀는 중이라고 말씀하셨잖아요.”
예화는 이번에는 휴대폰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화면에는 녹음중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그쪽이 한 말은 전부 녹음되어 있어요. 이걸로 ‘나는 수정이와 사귄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따위의 변명도 소용없어요. 사진도 전부 백업해 놨고요. 어서 설명해 보세요. 왜 수정이가 아닌 다른 술 취한 여자랑 단둘이 모텔에 들어갔는지.”
장예화는 내 눈을 쳐다보며 말했다.
“간통죄와는 달리 바람법 같은 건 없지만, 그렇다고 바람이 정당한 행위는 아니죠. 설명하지 못하면 지금 곧바로 수정이한테 전화하겠어요. 그리고 수정이네 부모님한테도 말씀드리겠어요.”
나는 다시 사진을 바라보았다.
‘으음......’
아니, 이걸 설마설마 장예화가 봤을 줄이야.
어차피 수정이는 내가 여자를 늘릴 걸 알고 있으니까 딱히 들켰다고 당황할 필요는 없지만, 문제는 부모님들과 장예화였다.
게다가 이건 바람이 아니라 행복하고 평화로운 하렘이라고!!
하지만, 이걸 지금 예화가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지.
모텔에 들어가서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나왔다고 하기에도, 사진에 녹음기까지 준비하는 여자라면 어떻게든 거짓말이라는 걸 알아내지 않을까.
그렇다면 오히려 더 귀찮아질 것이 뻔했다.
일단 수정이와 말을 맞춰야겠네.
수정이한테 알려지는 건 상관없지만, 수정이네 부모님이 알게 된다면 손해가 막심하다.
‘기껏 호감도를 올려놨는데, 이걸 들켜서 코인을 허공에 버릴 수는 없다......!!’
히로인 어플이라는 개사기 시스템이 내 안에 있는 이상, 세상만사 걱정할 게 별로 없기는 하지만, 이득충의 입장에서 코인 손실은 참기 어려웠다.
“일단 잠시 화장실조-.”
콱!
“어딜 가려고요. 지금까지 잘 계시다가아......?”
장예화가 내 손목을 강하게 붙잡았다.
‘얘는 힘도 좋네.’
마음먹고 뿌리친다면 뿌리칠 수 있겠지만, 나는 그냥 얌전히 다시 자리에 앉았다.
“이 자리를 피하려고 한다는 건, 딱히 설명할 말이 없다는 것으로 받아들여도 되겠죠?”
“......”
내가 아무 말도 없자, 예화는 한숨을 쉬더니 쓰레기를 보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하아. 알겠어요. 일단 수정이한테 전화해야겠네요. 혹시라도 모텔에서 아무 일도 없었을 가능성을 생각해 이렇게 물어본 건데, 역시나였나 보네요. 그래도 들통날 거짓말은 안 하는군요.”
그렇게 말하며, 예화는 곧장 수정이한테 전화를 걸었다.
“......”
하지만, 몇 분이 지나도 수정이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예화가 말없이 나를 바라보자, 내가 말했다.
“수정이 오전 시간으로 방송을 옮겨서, 아마 지금 방송하고 있을 거예요.”
“오전 시간이요?”
“네, 아마 4시쯤에 끝날 텐데, 몰랐어요?”
“......흐흠. 저도 다 아는 건 아니라고요. 방송 보는 건 취미가 아니라서.”
예화는 입술을 짓씹더니 말했다.
“이렇게 되면 수정이 부모님한테 먼저 연락하는 수밖에......”
“아니, 그건 좀.”
“그러면, 이 자리는 그냥 그대로 물러나겠다?”
“제 휴대폰으로 걸면 받을 거예요.”
예화는 게슴츠레하게 나를 바라보다가 이내 내게서 휴대폰을 받아 전화를 걸었다.
이번에는 15초가 지나기 전에 수정이가 전화를 받았다.
수정이는 방송 중에 나나 부모님이 아니면 다 무음으로 해둔다고 했다.
“진현아, 무슨일이양~?”
갑작스러운 애교에 예화는 충격적인 표정을 짓다가, 이내 목을 가다듬고 수정이랑 통화했다.
“수정아 나야, 예화.”
예화는 뭐 충격받지 말고 잘 들어, 등의 서론을 말하더니 내가 바람을 피웠다, 증거사진도 있다고 말하며 톡으로 사진을 전송하는 듯했다.
나는 얌전히 예화가 수정이와 통화하는 걸 기다렸다.
그때, 갑자기 머릿속에서 목소리가 울렸다.
『 흐흥~ 진현이랑 요즘에 톡하는 여자가 이렇게 생겼구나아~? 바람이라길래 난 또 예화한테 작업 치는 줄 알았는데, 다른 여자랑 있던 걸 걸린 거였어? 』
‘아.’
그러고 보니 수정이한테 전에 특성으로 [ 사랑의 메신저 ]라는 특성을 준 적이 있었지?
하루에 7번.
1번에 200자 이내의 메시지를 서로 주고받을 수 있는 기능의 특성.
수정이가 메시지를 보내면, 그거에 답변을 보내는 것까지가 1회였다.
처음 특성을 고를 때, 그냥 뭔가 머릿속으로 대화하는 게 낭만 있어 보여서 선택했는데, 이런 식으로 쓰일 줄이야.
나는 곧바로 답변했다.
『 맞아. 수정아아~ 나 지금 매우 난감해. 예화가 너뿐만 아니라 부모님한테도 알린다는데, 그건 막아야 한다 진짜로. 아이러브유 수정!! 사진...... 곤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