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9화 〉# https://t.me/LinkMoa
“뭐가 이러지 마에요. 누나가 말해놓고.”
진현이 더욱더 가까워져 왔다. 어깨를 끌어안은 손은 더욱 깊어졌고, 얼굴은 점점 더 가까워져 갔다.
그건 그렇긴 해.
그런데 너무 갑작스럽잖아......!!
윤유정은 자연스럽게 움츠러들었다.
“아, 안 돼는데...... 이러면......”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상황이 되자, 웃고 있는 다정이의 얼굴이 번뜩 생각났다.
그런데 그것도 한순간뿐.
진현이의 얼굴이 더욱 가까워지자, 다정이의 얼굴은 곧바로 눈앞에서 지워졌다.
“여, 여기서는 안 되는데에......!”
윤유정은 본능적으로 눈을 감았다.
‘......?’
그리고.
눈을 감고도 5초가 지났는데도,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어깨를 감쌌던 손의 무게도 느껴지지 않았다.
뭐지?
윤유정은 살포시 눈을 떴다.
진현은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나 주문표를 챙기고 있었다.
주문표를 들고 카운터로 간 진현은 지갑을 꺼내 계산을 마치고 있었다.
이, 이것도 내 환상인가?
방금은 뭐였지?
그렇게 생각하는데, 어느새 계산을 마친 진현이 테이블로 와서 유정을 바라보았다.
“누나도 일어나요. 얼른 가야죠.”
“어, 어딜......?”
“어디긴요.”
그때 지은 진현의 미소는, 윤유정의 뇌리에 깊게 남았다.
“여기서 안 되면, 적절한 장소로 가야죠.”
******
장예화.
무지개처럼 꽃피우라는 의미를 담은 이름을 지닌 예화(霓花)는, 그 이름에 걸맞게 무엇을 해도 꽃이 만개하는 듯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어렸을 적부터 부모님의 충분한 사랑을 받고 자라, 공부는 물론.
피겨 스케이트, 피아노, 바이올린, 플롯, 미술 등등.
해보고 싶은 것이라면 뭐든지 해볼 수 있었고, 성과 또한 거둘 수 있었다.
버릇없게 자라지도 않았다.
예절과 세상의 가치관에 대한 교육은, 예화의 부모님이 누구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으니까.
인생이 쉬웠고, 뭐든지 잘할 수 있었다.
몇 개의 과외만으로 최고의 성적으로 한국 최고의 대학에 붙었다.
뭐, 2년 정도 다니고 휴학을 신청했지만.
뭔가 원하는 게 아니다.
그렇게 느낀 예화는 대학에 나가지 않았다. 얻을 거라고는 명문대를 졸업했다는 졸업장뿐. 그 이상은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대학에서도 몇 친구를 사귀었지만, 결국에 그 속에 숨은 다른 의도가 느껴졌다.
고등학교 시절처럼 그냥 스스럼없이 지낼 수 있는 친구는 없었다. 무엇보다 남자들이 너무 귀찮게 굴기도 하고.
뭐, 그리고 솔직히.
다른 의도가 느껴져도 속아줄 수는 있었다.
자신에게도 이득이 있다면.
그런데 이미 건물 2개를 가진 예화는, 딱히 어설픈 새내기에게서 얻을 게 없었다.
예화는 꿈을 찾기 시작했다.
그렇게 찾은 건 작곡이었다.
온갖 악기를 다뤄온 예화였기에 알맞은 꿈이기도 했다. 아름다운 곡은 인생에 활기를 불어넣어 주니까.
대학에서 배울 수도 있었지만, 그다지 내키지 않았다.
아버지는 흔쾌하게 작곡의 꿈을 허락했다. 이미 가진 바가 많았기 때문에, 어차피 먹고 살 걱정은 없었다.
예화는 도전의 시간으로 3년이라는 기간을 잡았다.
지금은 작곡을 시작한 지 6개월 정도가 되어가는데, 아쉽게도 아직 커다란 수확은 없다.
노래가 너무 좋다며 댓글을 달아주는 사람들, 구독해주는 사람도 많지만.
적어도 케스팅.
커다랗게 놀아야 한다. 유명 웹툰의 BGM으로 쓰이든지 영화, 드라마의 OST 정도는 되어야 예화는 만족할 수 있었다.
아버님의 힘을 빌리고, 인맥을 동원하면 어느 정도 노려볼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나중의 일.
일단은 스스로 실력 자체를 키워야 했기 때문에, 예화는 아버님의 힘을 빌리지 않고 있었다.
“흐음. 이번에도 포인트가 부족해 포인트가.”
고급스러운 헤드폰으로 노래를 듣던 예화는 헤드폰을 벗으며 중얼거렸다.
영감이 떠오르지 않는다.
원하는 곡도 잘 안 나오고, 상업적으로 잘 될 것만 같은 분석 곡을 써 보아도, 결과가 만족스럽지 않았다.
“벌써 8시가 넘었네.”
시계를 확인한 예화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내 작성했던 것들을 저장하고, 스튜디오의 막을 내렸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건 예화의 건강한 습관 중 하나였다. 적어도 11시에 잠들어야 이른 아침을 상쾌하게 맞이할 수 있었다.
오늘은 아쉽지만, 자고 일어나면 내일 무언가가 떠오르겠지.
얼른 집에 가서 운동하고, 쉬고 자자.
요즘은 운동을 마치고 안마의자에 앉아 만화를 읽는 것이 꽤 즐거웠다.
자기 전 30분의 달콤한 휴식시간.
예화는 전용 스튜디오에서 밖으로 나왔다. 골목을 지나 쭈욱, 걸어가면 소유한 건물 중 하나가 나온다.
그 건물의 꼭대기 층에서 예화는 자취하고 있었다.
“으우...... 슬슬 밤은 춥네.”
반 팔 티셔츠를 하나 입고 있었는데, 저녁 시간이 되니 불어오는 바람이 조금 쌀쌀하다.
얇은 티셔츠여서 그런가, 오늘따라 사람들의 시선도 더욱 끈적한 듯했다.
‘쯧......’
속으로 혀를 찬 예화는 밤길을 바라보았다.
‘운동하기 전에 음료나 한 잔 마실까.’
음료는 지방의 적!
하지만, 역으로 생각해 보면 이 달콤한 한잔을 위해서 운동을 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쥬스 전문 판매점이 눈에 들어왔다.
가게를 잠시 바라본 예화는 이내 시선을 거뒀다.
돈을 아끼기보다는, 줄을 기다리기가 싫었다.
사람도 6명이나 있네.
편의점에서 사자 그냥.
그렇게 조금 더 걸어 근처의 편의점 쪽으로 갔는데, 저 멀리서 어디서 본듯한 얼굴이 보였다.
“어......?”
남자가 한 명 있다. 그리고 자신은 그 남자의 얼굴을 알고 있었다.
천진현.
분명 그런 이름을 가진 남자.
수정이의 밑에 층에 사는 수정이의 남자친구였다.
원래는 수정이가 이상한 사람이라고 막 뒷담도 까고 그랬는데, 어느 날을 기점으로 갑자기 뒷담이 뚝 끊기는가 싶더니, 이제는 아주 그냥 사귀는 사이가 됐다고 톡이 날아왔다.
수정이는 틈만 나면 둘이서 염장 지르는 사진을 맛깔나게 보내 남친 자랑을 하는데, 너무 보다 보니까 나도 연애나 할까 하는 생각이 조금 들기도 했다.
뭐, 금방 사라지긴 했지만.
대체 무슨 마법을 부렸길래 수정이를 그렇게까지 빠지게 했을까.
솔직히 궁금증도 들긴 했다. 나중에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한번 나눠보자고 생각하기도 했지.
아버님끼리 친한 걸 제외하고도, 수정이와는 죽이 굉장히 잘 맞았으니까.
수정이는 가장 친한 친구 중 한 명이다.
가끔 쉬는 날에 놀러도 간다.
그런데......
“같이 있는 사람...... 여자지?”
그것도 술에 취해있어 보인다.
수정이의 남친으로 추정되는 사람이 수정이가 아닌 다른 여자의 옆구리를 살짝 끌어 앉고 있었다.
“잘못 본건 아니야......”
확실했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와 인상이 좀 다르지만, 요즘 수정이가 톡으로 보내는 사진에 있는 인상과 똑같았다.
‘설마 바람......?’
아니.
예화는 고개를 저었다. 속단하지는 말자.
술 취한 여자와 같이 있을 수도 있다. 너무 취한 여사친을 집에 바래다주는 걸 수도 있으니까.
둘이 있다는 것부터 의심이 가긴 하지만, 일단 더 멀리서 지켜볼 필요가 있었다.
예화는 음료수도 잊은 채 둘을 미행했다.
‘혹시 모르니 사진도 찍어야지.’
수정이가 보내는 톡을 보면, 남친에게 빠져도 어지간히 빠진 게 아니다.
구두를 이용한 말에는 신뢰성에 한계가 있다.
확실한 증거를 위해 사진을 찍어두자.
예화는 곧바로 휴대폰을 꺼내 들어 무음으로 사진을 찍었다.
그렇게, 중간중간 계속 사진을 찍으며 조용하게 둘을 미행했다.
꺾어지는 골목에서 고개를 빼곰 내밀자, 마침내 두 사람이 향하는 종착지를 볼 수 있었다.
[ 러브인 유 모텔 ]
‘하아......’
한숨이 나온다.
설마, 설마 했는데, 역시나.
‘수정이랑 사귀는데 다른 여자를......!’
예화가 바라보는 가운데에, 진현과 바람녀는 자연스러운 발걸음으로 함께 모텔 속으로 들어갔다.
쓰레기 같은 남자.
곧바로 그런 단어가 떠올랐다.
“어쩌지......”
예화는 오랜만에 뒷골이 땅기는 느낌을 받았다.
수정이가 능구렁이한테 당한 걸까?
이 사실을 알면 수정이가 얼마나 슬퍼할지 짐작이 되어 더욱 머리가 아프다. 그토록 자랑하던 남자친구가 설마 바람이라니.
가슴에 커다란 상처를 입을지도 몰랐다.
‘이래서 사람은 쉽게 믿으면 안 돼.’
아버지에게 교육받고, 지금까지 살면서 든 생각이다.
어떻게 할까......
지금 바로 사진과 함께 본 사실을 고할까. 아니면, 수정이와 만나서 직접 이야기를 할까.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아빠였다.
예화는 곧바로 전화를 받았다.
“어, 아빠.”
“아이구~. 우리 딸, 잘 지냈어?”
“응. 잘 지냈지. 아빠는? 돌아왔나 보네. 어디 안 다쳤지?”
“그러엄~. 여기 좋더라 진짜. 잘 다녀왔어.”
친근한 아빠의 목소리에 예화의 얼굴에 미소가 서렸다.
“어디 갔다고 했지? 옥룡?”
“응, 옥룡설산. 흐으. 중국 밥은 역시 안 맞는데, 산 경치는 최고야.”
“잘됐네. 소리 보니까 공항인 거 같은데. 돌아와서 바로 전화한 거야? 어쩐 일로~.”
“어쩐 일로라니. 딸 목소리 듣고 싶어서 전화했지, 아빠 서운하네.”
“빨리이. 용건부터 말해.”
휴대폰 너머로 아빠가 피식 웃는 소리가 들린다.
“혹시, 이번 화요일 날 시간 좀 돼?”
“화요일......?”
예화는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응. 무슨 일인데?”
“잘됐네. 화요일 날 저기, 수정이 남자친구가 오픈할 카페를 좀 봐준다고 했거든?”
“수정이 남자친구? 천진현?”
“어. 역시 너도 알고 있구나. 분명 그런 이름이었어. 걔가 어디 좋은 자리 있는지 알아보려고 한다는데, 너도 평소에 카페 많이 다니잖아.”
많이 가긴 했다.
노트북을 들고 곡을 검색하거나, 아이디어를 짤 때는 카페에서 3~4시간 정도 죽치고 있을 때도 있으니까.
“걔가 알아보려고 하는 곳이 네가 사는 곳 근처래.”
“아. 그래?”
“응. 그래서 딸 의견도 좀 구할까 해서, 화요일 날 같이 만날 수 있어?”
“응. 상관없어.”
아버지의 말에 예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고, 역시 우리 딸. 고마워. 사랑해~?”
“나도. 근데 아빠, 엄마한테도 좀 그런 말 많이 해봐.”
“너한테 전화하기 전에 3번이나 했다. 너 없을 때 많이 해.”
옆에서 2번이거든요? 하는 소리가 들린다.
예화는 그 따뜻함에 피식 웃었다.
“알았어. 아빠 끊어.”
“응. 그래~ 시간이랑 장소는 문자로 보내줄게.”
뚝.
전화가 끊겼다.
‘천진현......’
장예화는 수정이의 남친이 바람녀와 함께 들어간 모텔을 바라보았다.
‘화요일이라고 했지.’
일단, 수정이한테 바로 전송하는 건 보류로 하자.
장예화는 그대로 발걸음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