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8화 〉# https://t.me/LinkMoa
“그래서어...... 그시키가 머라고 했는줄 알어어? 으응?”
“뭐라고 했는데요?”
얼마 동안 같이 이야기를 했는지 모르겠다.
테이블 위에는 빈 소주병이 3병 놓여있었고, 한 잔만 따르면 동나는 소주병이 윤유정의 손에 1병 더 들려있었다.
잔에 졸졸졸, 소주를 따른다.
그리고 입속으로 한 번에 털어 넣자, 알싸한 기운이 화악! 하고 올라왔다.
“크흐으......!”
윤유정은 술 냄새가 진동하는 탄성을 내뱉었다.
나 소주 반병만 마셔도 취한다고 했는데.
진현이가 더 많이 마시긴 했는데, 윤유정도 분명 그에 못지않게 마셨다. 적어도 1병 반은 마신 것 같다.
으으.
그래도 아직은 괜찮은 것 같기도 하고?
윤유정은 맞은편의 남자, 진현을 바라보며 말했다.
“뭐라고 했냐고오......? 어차피 지문 늦게 찍잖아요......! 돈도 덜 받는데 지각 좀 할 수 있는 거 아니에요!? 막 이랬다니까아......! 진짜 말이 돼에?”
발음이 꼬꾸라진 줄도 모르고, 윤유정은 이야기를 계속 떠들었다.
진현은 곧장 맞장구를 쳐줬다.
“허얼. 그거 완전 글러 먹은 사람이네요. 정말 힘들었겠어요, 누나.”
“네가 생각해도 그러치이? 히이......”
다 식은 고기 조각을 한 점 입에 넣고 씹는다.
평소에는 힘든 걸 털어놓을 사람이 없었는데, 진현이가 말을 잘 들어주니 윤유정은 그동안 가슴에만 쌓아둔 이야기를 모두 풀어낼 수 있었다.
한 번 물꼬를 틀듯 이야기하자, 힘들었던 일들이 쏟아져나왔다.
과장된 리액션도 있었지만, 그것만으로 좋았다.
그냥 편안하게 말을 꺼낼 상대가 필요했으니까.
“그래도 다음부터는 저랑 일하니까 괜찮을 거예요. 개념 있는 알바들만 잘 선별해서 뽑을게요. 누나가 힘들어할 일도 적을 거예요.”
그러고 보니 앞으로 진현이 가게에서 일하기로 했지.
윤유정은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진현을 바라보았다.
“너어어, 진짜로 시급 2만 원 줄 거야......? 사실은 뻥이지이......! 맞지!?”
“뻥이라뇨. 전혀 아니에요. 가게 잘 되면 누나한테는 추가수당도 드릴게요.”
“피이, 거짓마알......”
식당에서는 시급으로 치면 1만 원 조금 넘게 받고 있고, 편의점에서는 최저시급을 받고 있다. 그래도 요즘은 최저시급이 높아서, 주휴수당까지 합치면 달에 받는 돈이 꽤 됐다.
그런데 여기서 만약 진현이가 제안한 시급 2만 원으로 지금처럼 일한다면?
지금보다 받는 돈이 2배는 더 많아지는 것이다.
“진짜예요. 얼른 오픈하고 계약서도 써드릴게요. 아, 뭣하면 지금 선금으로 좀 드릴까요? 돈?”
“아, 아니이. 아니, 괜찮아. 그런 거 아니야.”
윤유정은 과장되게 고개를 흔들었다.
진현이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다.
윤유정은 다 식은 된장찌개를 한술 떠먹고, 익숙한 움직임으로 술병을 집었다.
“우응?”
뚝뚝.
술을 따르는데, 방울만 몇 방울 나오고 술은 전혀 나오지 않았다.
“아......”
윤유정은 진현을 바라보았다.
“술 없어..... 우리 한 병 더 시키자아.”
“아뇨, 누나. 오늘 그만 마셔요. 지금 너무 취한 것 같은데.”
내가 취했다고!?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진현의 표정에 윤유정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우씨. 안 취했거든......! 아니면, 너어. 빨리 집에 가고 싶은 거야?”
“그런 거 아니라니까요. 하아, 그럼 마지막으로 한 병만 더 마셔요.”
“응! 그럴게에. 히히.”
곧이어 진현이가 소주 한 병을 주문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주머니가 소주를 가져다주었다.
“이번에는 물이나 사이다랑 섞어서 조금씩 마셔요. 아. 그리고 여기 아이스크림 있으니까, 제가 가져올게요. 조금만 쉬고 있어요?”
“어? 으응...... 아라써.”
진현은 일어나더니 곧장 아이스크림을 푸러 갔다.
윤유정은 그런 진현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다가, 얼른 소주병을 따서 소주잔에 술을 채워넣었다.
그리고는 벌컥벌컥 마셨다.
괜히 나만 취한 것 같고!
진현은 너무 멀쩡해 보인다.
오기가 생겨서 새로 딴 소주병에서 벌써 2잔을 비우자 진현이 와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니, 왜 또 먼저 그렇게 마셨어요.”
윤유정은 진현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다른 걸 질문했다.
“그보다 너어......! 나한테 무슨 할 말 있어서 불렀다고 하지 않았어어?”
“할 말이요? 으음. 할 말은 다 했는데......?”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는 진현.
아니 그거 말고.
유정은 답답한 마음에 고개를 저었다.
“그거 말고오, 지금 저녁 먹는 거 말이야. 네가 나한테 무슨 할 말 있다고 해서어, 다정이 떼놓고 왔잖아.”
윤유정의 말에 진현이 아하, 하고 웃었다.
평범한 웃음이었지만, 왜인지 심장이 흠칫 놀랐다.
“몰라요?”
“으응?”
그게 무슨 말이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 진현이 능구렁이 같은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진짜 몰라서 묻는 거냐고요.”
평소와 같은 목소리.
하지만 진현의 목소리에서 유정은 의미 모를 박력을 느꼈다.
진현은 윤유정의 자리에 아이스크림을 놔주었다.
그리고 다시 분위기를 푼 채, 유정에게 편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냥, 이렇게 이야기하고 싶어서 불렀어요. 오늘은 누나 만나려고 나온 건데, 다정이랑만 너무 이야기한 거 같아서요. 누나가 어떻게 지내셨는지도 궁금하고 하고요.”
“아......”
윤유정은 얼굴이 살짝 화끈거림을 느꼈다.
유정은 그 달아오른 뜨거움을 아이스크림으로 제지하기로 했다.
달콤한 맛이 입안에 퍼지니, 텁텁했던 속이 정화되는 느낌이다.
‘그런데 잠깐만......!’
생각해 보니 조금 괘씸하다.
나랑 이야기하고 싶어서 불렀고, 어떻게 지냈는지도 궁금하다고?
“너어, 그러언 애가......! 그럼 지금까지 연락 한 통 없었던 거야아?”
“아하하. 그건 저도 좀 바빴거든요.”
진현이 쓴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윤유정은 갑자기 시무룩해졌다.
“바빴다고......?”
“네.”
“......”
바빴다.
바빴다......
속 편한 변명이었다. 아무리 바빠도 몇 마디 톡 정도는 할 수 있는 거니까. 유정은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끓어오르는 기분을 느꼈다.
이상한 기분이다.
또 아이스크림을 한술 퍼먹는다.
싸구려 아이스크림의 단맛은 묘한 중독성이 있었다.
윤유정은 아이스크림에 아이스크림용 숟가락을 푹 꽂고 진현을 바라보았다.
“그러엄, 그렇게 바쁜놈이이......! 다정이랑은 계속 만났던 거야아?”
윤유정은 진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저게 무슨 표정일까.
약간 놀라는 것 같기도, 당황하는 것 같기도, 웃는 것 같기도. 표정이 분간이 잘 안 갔다.
애초에 머리가 조금 어지럽고, 세상이 살짝 돌았으니까.
유정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한번 말하기 시작한 이상은 멈출 수 없었다. 말에도 관성이라는 게 있었다.
“내가 먼저 알았눈데, 여동생한테나 가버리고오......! 다정이나 더 좋아하고......! 아니 다정이 좋아해도 되긴 하는데에...... 다정이 엄청 착한애라아......”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머릿속에 있는 생각들이 뒤죽박죽 엉켜있었다.
여동생인 다정이가 진현이랑 잘 될 수 있도록 도와주기로 했는데, 그냥 저녁만 먹고 딱 헤어지면 됐는데.
갑자기 마음속 소리가 멋대로 나왔다.
“나랑 키스도 해놓고오, 고백도 거절하고오......! 그런데 몰래 다정이 만나고오...... 너어......! 그으렇게 다정이가 좋아써!? 어어!?”
으아악.
윤유정은 다 말하고 나서 고개를 푹 숙였다.
결국 끝까지 말해버렸다.
생각해 보니 이거 거의 2번 고백한 꼴 아닌가?
윤유정은 지금의 말로 자신이 지금 취해있다는 사실을 어느 정도 인지할 수 있었다. 나는 확실히 취했구나.
꿀꺽......
침을 삼키고 묘하게 흘러가지 않는 시간을 기다린다.
공기가 무겁다. 주변의 소리가 안 들리고 진현이의 숨소리만 들리는 듯했다.
‘왜 아무 말도 안해에......!’
혹시 잠깐만.
진현이가 못 들었나?
내가 지금 말한 건 나만의 상상일 뿐이고, 스스로 그렇게 말하고 싶다는 생각이 환청으로 들린 것인가!?
그렇게 생각하며 힐끗 고개를 올려 진현을 바라보자, 윤유정은 빙그레 웃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아.
아니구나.
“맞아요. 좋았어요.”
“어?”
갑작스러운 진현의 말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다.
“다정이가 얼마나 귀엽고 좋은데요. 말도 잘 듣고, 공부도 열심히 하고......”
진현은 차분한 목소리로 다정이의 장점을 나열했다.
“그림도 열심히 그리고, 얼굴도 예쁘고, 목소리도 좋고......”
“어? 어어......”
긍정을 바라고 내뱉은 말이 아니다.
그런데, 진현이가 긍정한다.
평소에 다정이를 예쁘고 귀엽게 생각하고, 누구보다 좋아하는데도.
진현이가 다정이를 칭찬하자 이상하게 가슴이 아팠다.
잘됐네, 다정아.
이따 돌아가면 진현이가 칭찬 많이 해줬다고 알려줘야겠다......
시무룩.
“그런데.”
“어?”
그렇게 생각할 찰나.
“지금은 누나가 더 좋아요.”
갑자기 진현이가 유정의 옆으로 자리를 바짝 당겨 앉았다.
“히끅.....?”
갑자기 딸꾹질이 나왔다.
뭐, 뭐라고?
내가 지금 잘못 들은 건가......?
지금까지 취해서 몽롱했던 정신이 순식간에 깨는 느낌이다.
마치 냉각수를 얼굴에 퍼부은 느낌.
바로 옆에서 느껴지는 진현의 존재감에 윤유정은 정신을 하나도 못 차리고 있었다.
“자꾸 여동생이랑 비교나 하고, 이렇게 누나만 따로 불러서 술 마신 거 보면 몰라요?”
“어, 어어?”
사각형이 아닌, 불판이 가운데에 있는 원형 테이블.
원통형의 나무 의자였기 때문에, 진현은 윤유정 옆에 바짝 붙어 앉아있는 꼴이었다.
“오늘도 그래요. 계속 다정이랑만 자리를 만들어주고, 일부러 피하고. 영화관에서도 다정이를 가운데에 앉혔잖아요. 생각해 보니 일식집에서 나온 다음부터 그런 것 같은데. 둘이 무슨 이야기 했어요?”
진현이 점점 몸을 가까이했다.
윤유정은 고개를 숙여 시선을 피하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 아무것도......”
“진짜로요?”
“흐끅?”
진현이 윤유정의 어깨를 잡고 끌어안았다.
윤유정은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또다시 딸꾹질했다.
아니.
키스까지 해봤는데, 왜 이러지?
윤유정은 없는 정신을 겨우 붙잡으며 말했다.
“이, 이러지 마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