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화 〉# https://t.me/LinkMoa
여름날의 아침, 눈부신 햇살이 커튼에 가로막혀 그 따스함만 전달된다. 강수정은 그런 아침의 기운을 받으며, 두 주먹을 말아쥐었다.
“좋아… 할 수 있다!”
아침 9시.
거울 앞에서 오늘 입을 옷을 결정한 강수정은 싱긋 웃음 지었다.
그녀는 오늘, 천진현에게 고백할 생각이다.
그와 연락처 교환을 하고도 9일.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지만,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그를 향한 마음은 줄어들기는커녕 더욱 부풀어 올랐다.
‘옷은 이거면 됐고… 으음. 그런데 어떻게 고백하지?’
강수정의 고민은 바로 그것이었다. 그냥 바로 사귀자고 말하면 되는 건가? 무언가 선물이라도 준비해야 하는 것인가?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 고백해야 하는가.
전에는 이런 경험이 없어서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아아~. 적어도 고등학교 때 다른 애들의 연애담이라도 많이 귀담아 들어둘걸. 강수정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 당시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어서, 친구들의 수다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었다.
“으응. 예화한테 한번 연락을 해볼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예화는 강수정의 몇 없는 가장 친하고 믿을 만한 친구였다. 흔히 평생 간다는 고등학교 친구 중 한 명이었다.
‘아냐아냐, 스스로 생각하자.’
하지만 강수정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생각해보니까 2주 전에 예화가 집어 놀러 왔을 때, 진현이 이상한 사람이라느니 변태라느니 여러 가지 말들을 했었던 기억이 있다.
아니, 2주 전뿐만이 아니었다. 진현이 이사 온 이후에는, 예화가 놀러 올 때마다 매번 꾸준히 그런 말들을 해왔다.
그런데 갑자기 태도를 바꿔 2주 만에 그에게 고백하고 싶다고 상담한다니, 누가 봐도 이상했다.
으으. 내가 대체 왜 그랬을까. 지금이라도 과거로 돌아가 그런 말을 내뱉는 자신을 한 대 쥐어박고 싶었다.
‘게다가 예화가 도움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강수정은 예화의 얼굴을 떠올렸다. 주변에서 예쁘다 예쁘다 하는 자신보다도 더 예쁜 얼굴.
그러나, 솔직히 예화가 도움이 되는 조언을 해줄지도 의문이었다. 예화는 특이하게도 자신의 연애에 관해서 말했던 적이 한 번도 없었으니까.
관심이 없는 것인가?
아니, 생각해보면 그냥 자신이 연애에 큰 관심이 없는 태도를 취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니 굳이 그런 이야기하지 않았으면 어쩐다. 하기야 그 정도로 예쁘고 몸매도 좋은 예화인데, 남자친구가 없을 리가 없지.
“에잇. 뭐, 그냥 말하면 되겠지.”
고백했다가 차이는 것은 정말로 두려웠지만, 계속 가만히 있다가 언젠가 이 관계가 흐지부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 강수정에게는 더욱 두려웠다.
그리고 솔직히 천진현도 자신한테 관심이 없어 보이지는 않았다.
만약에 관심이 없었다면, 이렇게 매일같이 만나줄 리가 없지 않은가?
심지어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진득한 눈으로 자신의 몸을 훑어봤는데, 그때 당시에는 정말 싫었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자신에게 관심이 있다는 것이니 긍정적인 신호였다.
게다가 먼저 자신에게 연락처를 달라고 꼬신 것도 그였으니까.
[ 이제부터는 우연인 척하지 말고 연락해요. ]
화악.
웃으면서 말했던 그의 얼굴을 떠올리자 절로 얼굴이 붉어졌다. 이제는 호감도가 80이 넘어 제대로 콩깍지가 씌어버린 그녀였다.
‘진짜 어떻게 하지. 아예 집으로 초대를 할까?’
적어도 집안에서 고백하는 것이, 길거리에서 하는 것보다는 훨씬 덜 긴장될 것이다.
근데 그러면 또 무엇을 명분으로 초대를 한단 말인가. 그러고 보니 그녀는 지금까지 천진현의 집에 가 보거나, 역으로 그를 자신의 집에 초대해본 적이 없었다. 이웃이면서.
“아!”
그렇게 생각할 찰나, 갑작스럽게 든 생각에 그녀는 주먹으로 탁, 하고 손바닥을 쳤다. 그러고 보니 그게 있었지!
그녀는 주방을 바라보았다. 마루와 일체형인 좁은 주방이었지만, 나름의 조리도구들이 있었다.
‘이거라면 나름대로 자신이 있어.’
안 그래도 수정은 평소에 진현과 장을 볼 때 그가 구매하는 물품 목록이 약간 걱정됐던 입장이었다.
생각을 마친 강수정은 얼른 휴대폰을 꺼내 진현에게 톡을 보냈다.
[ 나 : 11시 30분 잊지 마! 오늘은 장보러 가자. (^~^) ]
톡을 보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답장이 왔다. 강수정은 메시지를 보고 웃음 지었다.
[ 천진현 : 응. 그래. 이따 보자. ]
벌써부터 그와 만나는 것이 기다려진다.
******
- 철컥
현관문을 열자 좋은 향기로운 여인의 냄새가 풍겨왔다. 그 냄새와 동시에 눈웃음을 짓고 있는 강수정이 보였다.
“안뇽~.”
“어? 기다렸어?”
“아냐, 지금 막 내려왔어.”
내 물음에 그녀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옷차림은 누가 보아도 신경 썼다는 흔적이 느껴졌다.
“옷 잘 어울리네. 예쁘다.”
“그래? 헤헤, 고마워.”
수정의 양 볼이 약간 붉게 물들었다.
‘고백이라…….’
나는 낮에 봤던 키워드를 생각하며 헤실헤실 웃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가슴까지 오는 부드러운 짙은 갈색의 머리칼이 매력적으로 찰랑거린다. 언제나 나와 만날 때는 신경을 쓰는 그녀였지만, 오늘따라 그녀가 더욱 매력적으로 보였다.
키워드에서 말한 고백은 그녀가 내게 고백한다는 것인가, 아니면 내가 그녀에게 고백하라는 것인가.
‘그건 보면 알겠지.’
일단은 기다려보고, 만약 그녀가 끝까지 고백하지 않는다면 내가 그녀에게 고백하면 되는 것이리라.
사실 고백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유정이 누나가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유정이 누나는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
그때로부터 2주밖에 지나지 않았으니, 아마도 계속 편의점 알바를 하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누나와의 마지막 톡도 편의점을 그만둔 다음 날이 끝이었다. 왜 그만뒀냐고 물어봐서 다른 길을 찾는다고 대답하고, 간단한 인사를 나눈 뒤 우리는 서로 톡을 하지 않았다.
히로인 어플을 얻고 가장 먼저 타겟으로 삼았던 누나. 키스만 하긴 했지만, 첫 키스였던 만큼 그 기억은 강렬하게 남아있었다.
그리고 그때는…….
‘내가 유정이 누나의 고백을 거절했었지.’
사탕과 욕망의 물을 효과로 만들어진 한시적인 고백이었다.
그때는 히로인 설정이 가능한지 몰랐기 때문에 그 이후 호감을 유지하기 힘들다고 생각되어 거절했던 것인데, 강수정의 경우는 달랐다.
강수정은 코인을 통해 호감도를 꾸준히 올릴 수 있었고, 인연의 실이 연결된 내 히로인이었다. 고백을 거절할 이유 따위는 없었다.
‘뭐, 그렇다고 평범하게 사귈 생각은 없지만…….’
히로인 어플의 진가를 알게 된 순간부터. 나는 내 인생을 나의 솔직한 욕망대로 살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그중 하나가 바로 하렘! 그녀에게는 미안하지만, 나는 한 명으로 만족할 생각이 없었다.
‘그래도 절대 버리지는 않을게.’
그렇게 생각할 찰나, 강수정이 손을 내 눈동자 앞에 대고 흔들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아니 그냥. 여러 가지.”
나는 살짝 웃고는 현관문을 나와, 계단에서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잠시 내 손을 바라보다가 배시시 웃으며 손을 마주 잡았다.
부드러운 손길이 기분 좋았다.
******
“오늘은 뭘 많이 사네?”
V마트에 도착해서 열심히 물건을 장바구니에 담는 강수정에게 내가 물었다. 그녀는 어깨를 흠칫 떨더니 말했다.
“으, 응. 그게 재료들이 떨어져서…….”
“흐음. 그렇구나.”
나는 속으로 웃으면서 대답했다. 히로인 어플의 이벤트 키워드의 단어 초대. 아마도 그것 때문일 것이다. 누굴 초대할지는 불 보듯 뻔한 이야기이다.
그녀는 채소들과 과일, 고기 등 여러 가지 재료들을 많이 담았다.
으음. 어림잡아 평소보다 2배는 많은 양을 담는 것 같은데… 아니지. 평소에 그녀는 고기를 별로 사지도 않으니까 한 세 배쯤 되려나.
“휴우. 다 담았다~!”
“빠뜨린 건 없어?”
“흐음… 응! 없는 것 같아.”
그녀는 물건으로 가득 찬 장바구니를 잠시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슬쩍 내 손을 잡기까지.
손을 포개면서 볼은 또 빨갛게 물들이는데, 부끄러움을 많이 타면서도 하는 행동은, 이미 완전 사귀는 사이였다.
호감도 60을 넘기고 연락처를 교환한 뒤부터 그녀의 행동은 거침이 없어졌다. 아마도 마음을 열었다는 증거이겠지.
“무거워 보인다. 같이 들어줄까?”
“괜찮아. 이쯤이야 뭘.”
나는 피식 웃고는 그녀와 함께 다른 쪽 코너를 돌았다.
허세가 아니고 진짜로 괜찮았다. 막 깃털같이 가볍다 그런 건 아닌데, 전혀 부담감이 없는 수준. 천리염기공을 꾸준히 익히고 나니 뭔가 몸의 전체적인 힘 자체가 강해졌다. 아직 뭐 초인적인 힘을 낸다거나 하지는 못하지만.
“거기 커플~! 이리 와서 이것 좀 먹어봐 봐.”
냉동 코너를 돌고 있자 냉동 시식 코너의 푸근해 보이는 아주머니 한 명이 우리를 불렀다.
수정은 커플이라는 아주머니의 말에 볼을 또 빨갛게 물들였다. 계속 빨갛게 물들이는데, 사과인가?
“커, 커플이요?”
“그래~. 아주 잘 어울리네. 남자친구가 짐도 들어주고, 잘 만났어.”
“하하. 감사합니다.”
나는 굳이 부정은 하지 않았다. 다만 수정의 손을 조금 더 강하게 잡았는데, 그녀의 몸이 흠칫 하고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맛있게 구워졌으니 한번 먹어봐. 고소할 거야. 안 사가도 되니까.”
“네, 감사합니다.”
사양하지 않고 이쑤시개로 군만두를 한 점 집어 들었다. 맛은 솔직히 뭐, 특별하지 않은 흔한 군만두의 맛이었다.
“처자도 하나 먹어보지?”
“아, 저는 괜찮아요.”
며칠 전에 물어보니 수정은 다이어트를 한다는 것 같았다. 왜 그런 사람이 이렇게 식재료를 많이 사가냐고 굳이 캐묻지는 않을 생각이다.
“맛이 어때?”
“맛있네요. 잘 먹었습니다.”
“하나 더 먹어도 되는데.”
“괜찮습니다.”
내가 맛있다고 하는 탓에 수정이 군만두를 사고 싶어 하는 눈빛이었지만, 나는 그녀의 손을 잡고 빠르게 나왔다.
“이번에는 어디 햄을 먹어볼까~.”
장을 볼 때는 항상 같이 움직였기 때문에, 그녀가 원하는 것들을 모두 담은 뒤에 내가 원하는 것들을 담는 시간을 가졌다.
나는 음료수를 몇 개를 장바구니에 집어넣은 뒤, 바로 가공식품 코너에 도착해 일부러 큰 소리를 크게 내며 스팸을 고르는 척을 했다.
키워드에 스팸이 있었지. 아마 이건 그녀가 나를 집에 초대할 명분이 될 것이다. 내 입장에서는 굳이 명분을 댈 필요가 없지만, 그녀는 쑥스러운 마음이 있겠지.
‘와 눈빛 봐.’
실제로도 그녀는 내 손이 향하는 곳을 불꽃 같은 눈길로 쫓고 있었다.
나는 그렇게 강아지를 훈련시키듯 손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그녀의 눈빛을 즐기다가, 이내 가장 기름기가 좔좔 흐를 것 같은 표지를 가진 스팸을 집었다.
“자, 잠깐…….”
그와 동시에 수정이 내 손을 붙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