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화 〉# https://t.me/LinkMoa
- 터벅터벅
내가 계단을 오르기 시작하자, 위에서 나던 발소리가 갑자기 조용해졌다.
시무룩한 표정으로 계단을 올라가던 강수정이, 고양이처럼 귀를 쫑긋 세우는 모습을 상상하니 꽤 재미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빼꼼 내밀어 계단의 밑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와 눈이 마주쳤다.
“어?”
“아, 수정씨. 안녕하세요.”
헬로. 나는 반가운 듯 그녀에게 손을 흔들었다.
하지만, 흔드는 내 손에는 이미 여러 물건이 들어있는 장바구니가 들려있었다.
키워드 엇갈림.
나는 일부러 집에서 장바구니를 피고, 그 안에 어제 그녀와 함께 구매했던 물건들을 넣어둔 상태였다. 마치 이미 장보기를 마친 것처럼.
“네, 진현씨! 안녕하세… 요?”
그녀는 반갑게 인사하다가 내 오른손에 시선이 고정되었다.
“그런데 그 짐은… 장을 이미 보신 건가요?”
그녀의 목소리는 어느새 작아져 있었다. 그 변화무쌍한 표정이 참으로 재밌었다.
현관문 앞에서 기다릴 때는 시무룩한 표정이었다가, 기대감을 안은 표정으로 계단 밑을 빼꼼 바라봤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고는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피어났다.
하지만, 이내 내 손에 들린 장바구니를 보고는 거짓말처럼 표정이 다시 식었다. 마치 자신의 물음을 부정해줬으면 하는 표정. 감정이 참 잘 드러나는 사람이었다.
“네, 봤어요.”
“아… 그렇구나.”
나는 그녀의 물음에 칼같이 대답했다. 그녀는 어색한 목소리로 답했다.
대화는 그렇게 끊겼다. 잠시의 침묵이 찾아왔다. 그녀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아마도 이런 상황은 예상하지 못했겠지.
으음. 조금 짓궂게 굴어볼까.
“그런데, 수정씨는 마트 안 가시나요? 저는 이미 다녀왔는데.”
“네? 아…….”
내가 그녀의 손에 들린 장바구니를 가리키며 말하자, 그녀가 살짝 당황했다.
“이, 이제 가려고요. 지금 막 가려던 참이었어요. 하하…….”
그녀는 어색하게 웃고는 계단을 내려왔다.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눈은 아니었다. 입술도 새끼오리처럼 살짝 튀어나왔고, 어깨도 약간 처진 것이 실망했다는 감정이 그대로 느껴졌다.
나를 피식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다가, 이내 그녀가 내 옆을 지나치려 할 때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거짓말.”
“…네에?”
내가 그녀를 붙잡자, 그녀의 동공이 크게 떠졌다. 어지간히도 놀란 모양이었다.
“왜 거짓말해요. 사실 안 가려고 했으면서.”
그녀의 손목은 살짝 떨리고 있었다.
변신해서 억지로 범할 때 잡았던 손목의 떨림과는 또 다른 떨림이다. 손목이 떨림에 따라 그녀의 눈망울도 떨리고 있었는데,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지 분석하려 여념이 없는 것 같았다.
그녀를 가만히 보니 마치 강아지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내게 으르렁거리는 사나운 고양이 같았는데, 그때의 모습과는 180도 다른 태도였다.
아! 얼굴도 몸매도 더 이뻐져서 너무 꼴리잖아.
오뚝한 콧날과 또렷한 눈매는, 그녀의 매력을 더욱 증폭시켜 주었다. 그녀에게서는 좋은 향기가 났다. 나도 그녀를 계속 범하다 보니까, 이렇게 그녀의 가까이서 냄새만 맡아도 물건에 신호가 갔다.
속으로 애국가를 부르며 물건을 가라앉힌 나는, 장바구니를 열어 그 내용물을 그녀에게 보여줬다.
“사실 이거, 어제 수정씨랑 같이 샀던 물건이에요. 아직 마트는 가지도 않았고요. 그냥 미리 집에서 나와서 밑층에서 수정씨를 계속 보고 있었어요.”
“네, 네에? 그럼 왜 갔다 왔다고......”
“수정씨 마음을 확인해보려고 했죠.”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한 걸음 더 그녀에게 다가가자, 그녀의 몸이 움찔, 하고 떨렸다.
“30분이 되기 전부터 현관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더라고요. 문 앞을 서성이는 게 어찌나 귀엽던지.”
“귀, 귀엽……!?”
“40분이 돼도 안 나오니까, 그냥 집으로 다시 들어가려고 하셨죠? 기껏 이렇게 이쁘게 입었는데.”
상냥한 눈빛으로 그녀의 옷을 바라보자, 그녀의 눈빛이 파르르 떨렸다.
본래 평범하디 평범한 내가, 그녀같이 예쁜 사람한테 이런 말을 하기에는 상당한 담력이 필요했다. 하지만 내 눈으로 호감도를 직접 확인할 수 있으니 자신감이 넘쳤다.
그녀는 그냥 마트에 가는 만큼 막 화려하게 차려입지는 않았지만, 이벤트 가장 첫날 나와 만날 줄 모르고 밖에 나왔던 그녀의 복장과는 달라져 있었다. 티셔츠에 츄리닝 바지는 이제 없다.
“그런데 왜 지금은 간다고 해요. 솔직하게 말해 봐요.”
나는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사실은 그냥 저랑 같이 가고 싶었던 거죠?”
******
‘미, 미쳤어…….’
강수정은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본래 아무것도 없어야 할 그녀의 손목에 남자의 손이 잡혀 있었다.
며칠 전부터 급속도로 호감이 가게 된 남자, 천진현. 남성이 손을 잡으면 불쾌해야 했지만, 그에게는 이상하게도 그런 기분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호감도 60의 힘은 굉장했다.
오히려 이렇게 손이 잡히자, 수정은 자신의 기분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몇 달 전의 첫 만남 때는 그렇게 별로였던 진현이 이제는 좋다. 크게 반할 계기가 있는 건 아니었지만 어떠랴. 그와 함께 있으면 마음이 굉장히 편안하고 좋았다.
“아… 그, 그게…….”
하지만 마음과 말은 별개의 문제였다.
수정은 진현의 시선을 피했다.
저렇게 직설적인 질문을 받자 너무 부끄러웠다. 얼굴이 빨개진 것이 저절로 느껴졌다. 솔직히 말해서 자신도 자신이 왜 이런지 모르겠다.
“그럼 저 싫어요?”
진현이 수정을 보며 이야기했다. 옛날 같았으면 단칼에 네라고 대답할 질문이었지만, 수정은 아니라는 듯 고개를 빠르게 저었다.
“아, 아뇨! 그런 건 절대 아니고…….”
“그럼 솔직하게 대답해 봐요. 왜 그렇게 힘이 없어요. 어제 방송 때는 굉장히 자신감 넘치시던데.”
뭐라고? 방송?
“설마… 제 방송을 보셨어요?”
“네, 당연히 봤죠. 재밌던데요.”
진현이 웃으며 말하자 심장이 뛰는 것이 느껴진다. 재밌다니. 방송에서의 수정은 성격이 꽤 난폭했다. 그가 분명 싫어할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재미있다고 해주니 너무 좋았다.
“저는 방송에서의 수정씨 모습도 좋아요. 그러니까 편하게 말해 주세요. 어때요. 저랑 가고 싶었던 거 맞아요?”
이, 이건 고백인가? 여중, 여고, 방송 테크트리를 탄 수정이었기에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마, 맞아요. 가고 싶었던 거…….”
수정이 마치 개미가 기어가는 듯한 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진현이 환하게 웃었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평범한 얼굴인데, 이상하게 그 모습을 보자 심장이 뛰었다.
“그럼 같이 가요.”
“어, 어디를?”
“어디긴요. 같이 장 보러 가야죠.”
진현이 손목을 잡던 손을 옮겨, 이번에는 손바닥을 마주 잡았다. 수정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앞으로는 이러고 가요. 괜찮죠?”
“네에…….”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그렇게 천천히 둘이서 계단을 내려가던 찰나, 문득 진현이 자신의 휴대폰을 불쑥 내밀었다.
“아. 그리고 연락처도 알려주세요. 다음번에도 제 장난에 안 당하려면 알고 계셔야죠. 이제부터는 우연인 척하지 말고 연락해요.”
수정은 가만히 그의 폰을 받아 자신의 번호를 입력했다. 그녀의 볼에는 홍조가 띄워져 있었다.
******
“후우…….”
가만히 앉아서 명상하길 2시간.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시야도 더 선명하고, 감각이 좋아진 느낌이 들었다. 무엇보다 코가 뻥 뚫린 듯 머리가 시원했다. 천리염기공의 수련을 마친 직후의 이 느낌은 정말 최고였다.
아침 9시.
6시 30분에 일어나 간단하게 씻은 뒤, 바로 천리염기공의 1성 수련을 진행하는 것이 요즈음 내 일과이다. 1시간은 소주천을 통해 기를 모으는 것이고, 남은 1시간은 그 기를 몸 구석구석 전달하면서 기를 자유롭게 움직이는 연습을 진행했다.
처음에는 잘되지 않았는데, 이제는 어느 정도 감을 잡아서 내 의지대로 기가 움직이는 것이 느껴진다.
내공은 흠… 기환단인가. 뭔가 이름은 거창한데 그리 큰 내공이 들어있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하긴, 그러니까 9등급의 책과 함께 공짜로 들어있었겠지.
하지만 그 작은 내공으로도 매일같이 몸이 좋아지는 게 느껴졌다.
강수정을 처음 범한 지 2주가 지났고, 그녀를 처음 범한 다음 날부터 천리염기공을 익히기 시작했으니, 이렇듯 제대로 된 일과를 가지고 기의 수련과 운동을 한 것도 2주가 됐다는 소리이다.
그러나 벌써 체력을 비롯해 몸과 감각이 전체적으로 좋아지고 있었다. 운동의 효과가 빠르게 나타나는 것도, 천리염기공의 효과 중 하나인 것 같았다.
- 띠링
[ 강수정 : 11시 30분 잊지 마! 오늘은 장보러 가자. (^~^) ]
[ 나 : 응. 그래. 이따 보자. ]
톡이 와서 보니까 강수정이었다. 내가 적극적으로 다가가 그녀의 연락처를 받은 지도 8일이 지났다.
그날 이후로 우리는 서로 말을 놓기로 했고, 톡도 주고받으면서 친해졌다. 전까지는 매일 우연을 가장해 장을 보러 갔는데, 이제 장은 일주일에 2~3번만 보고 나머지 날은 그냥 만나서 산책을 하거나 하기도 했다.
그런데 아무래도 오늘은 장을 볼 생각인 모양이다.
◆ 현 상태
- [ 호감도 : 82 ]
- [ 연분도 : 49 ]
- [ 성욕 : 13 ] [ 식욕 : 27 ] [ 피로 : 16 ]
그녀의 호감도는 어느덧 80을 넘었다. 역시 호감도도 오를수록 올리기가 힘든지, 30~40대였을 때는 7~5씩 훅훅 오르던 게, 60 이후로는 1~2씩만 올랐다. 물론, 그것만 해도 큰 발전이지만.
‘이제 슬슬 때가 됐나.’
그렇게 그녀의 호감도를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을 때, 문득 이벤트가 눈에 들어왔다.
◆ 이벤트
[ 대상 : 강수정 ]
[ 시간 및 장소 : 오늘 11:45 AM, V마트 ]
[ 키워드 : 스팸, 초대, 점심, 요리, 고백 ]
“어, 이벤트?”
사실 그녀의 연락처를 받은 이후로는 이벤트가 일어나지 않았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녀와 연락을 통해 약속을 잡기 시작한 이후로 이벤트가 나타나지 않았었다. 그런데 지금 다시 이벤트가 나타났다.
흐음. 그렇다면 이벤트가 나타나는 조건이 무엇일까.
“음?”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문득 이벤트의 키워드에 있는 ‘고백’이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