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화 〉# https://t.me/LinkMoa
“저어… 진현씨는 보통 어디로 장 보러 가시나요?”
빌라 입구에서 강수정이 물었다.
“V마트로 가려고요. 여기서 가깝기도 하고 크니까요. 혹시 수정씨는 다른 곳으로 가시나요?”
“아~ 아뇨! 저도 V마트로 가려고 생각했어요.”
역시 키워드가 편하기는 했다. 그녀의 의중이 딱 반영되어 있었다.
집 근처에는 나름 큰 마트가 3개 있었는데, V마트는 그 마트들 중 가장 큰 마트였다. 집에서 대략 5~6분 정도의 가까운 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몇 번인가 들른 적이 있었다.
나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약간 펑퍼짐한 티를 입고 있었다. 그런데도 불과하고 그녀는 자신의 풍만한 가슴을 과시하고 있었다. 그녀를 바라보자 자연스럽게 내 아래에 깔려서 신음을 부르짖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진짜 기분 좋았지.’
상상만 해도 아랫도리가 부풀어 오를 것만 같았다.
“진현 씨?”
내가 그녀를 바라보고 있자 그녀가 물었다. 나는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아. 그냥 힘들어 보여서요. 많이 힘드세요?”
“…조금 힘들긴 하네요. 죄송해요.”
“아니에요. 부담가지지 마세요. 제가 언제 이런 미인과 같이 걸어 보겠어요.”
“미, 미인… 네, 고마워요.”
그녀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면서도 기분이 나쁘지는 않은지, 얼굴에는 약간의 미소가 떠올랐다.
그녀는 지금 내 팔을 붙잡는 형태로 길거리를 걷고 있었다. 팔짱을 낀 건 아니었지만, 굉장히 가까운 거리였다.
아무래도 걸을 때마다 하복부에 통증이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그녀 스스로도 걸을 수는 있겠지만, 충분히 이해가 갔다.
“이제 다 왔네요. 뭘 살지 말만 하면 제가 담을게요.”
“아, 아뇨. 그렇게까지 해주실 필요는 없는데…….”
“괜찮아요. 저를 정글러다 생각하고 편안하게 부려주세요.”
“푸흡.”
그녀가 레전드 리그를 좋아한다고 생각해 농을 던졌는데, 생각보다 반응이 좋았다.
나와 그녀는 그렇게 간단한 잡담을 주고받으며 장을 보았다.
그녀는 우유, 계란, 고기, 채소, 쌀 등의 물건들을 장바구니에 담았고, 나는 햇반과 계란, 스팸, 음료수, 과자 등을 담았다. 정말 전형적인 자취생의 픽이었다.
그녀는 내 장바구니를 흘끗 보더니 말했다.
“으음… 평소에도 이렇게 장을 보러 오시나요?”
“아뇨. 사실은 이번이 처음이에요. 원래는 매일 배달음식을 시켜 먹었는데, 이제 아르바이트를 그만둬서 당분간 간단히만 먹으면서 돈을 좀 아끼려고요.”
“아하. 아르바이트라면… 그 편의점이요?”
그러고 보니 그녀에게 말한 적이 있었다.
‘으…….’
그때를 생각하면 얼굴이 확 붉어진다. 내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을 때 그쪽 때문에 일부러 야간 아르바이트로 옮겼다고 그녀에게 가서 소리쳤었나. 하아… 몇 달 전의 일이지만 그때는 서로 흥분해서 언성을 높였었다.
“네. 야간 일을 계속하니까 생체리듬이 망가지더라고요. 그래서 그냥 다른 일을 좀 알아보려고요.”
“잘 생각하셨네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면서 계속 내 장바구니를 흘끗거렸다.
‘뭐지? 뭔가 말 하고 싶은 것 같은데…….’
하지만 그녀는 입을 열지 않았고, 우리는 계산을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나는 그녀와 나의 짐을 모두를 들었다.
“배달시켜도 되는데…….”
그녀가 내 모습을 보며 말했다. 확실히 3만원 이상을 구매하면 배달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 물건을 늦게 받잖아요. 필요 없는 박스도 생기고… 어차피 5분 거리인데 사양하지 마세요.”
“네에…….”
‘무겁긴 무겁군.’
쌀 3kg이 포함되어 있어서 그런지 2개를 다 드는 건 약간 무거웠다.
‘그 천리염기공이라는 걸 익히면, 이걸 공기처럼 가볍게 들을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나와 그녀는 빌라 앞에 도착해 있었다.
나는 그녀의 사양을 만류하고, 일부러 한층 더 올라가 그녀의 현관문 앞에 물건을 내려주었다.
“여기요.”
“네, 고마워요.”
“들어가셔서 푹 쉬세요. 그리고 이건 피로 회복에 좋은 음료수라고 하니까 한 번 드셔보세요.”
“아…….”
내가 구매한 음료 중 하나를 꺼내 그녀의 손에 쥐여주자 그녀가 놀란 토끼 눈을 하였다. 그러다가 미소를 지었다.
“진현씨는… 친절하신 분이네요. 솔직히 몰랐는데, 다시 봤어요.”
그녀가 약간 부끄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친절이라.
친절이라는 단어와 나는 마치 N극과 S극과 같은 상극이었다. 다만, 겉으로는 언제나 친절을 연기할 수는 있었다.
나는 그녀의 칭찬에 쑥스럽다는 듯 웃었다.
“평범한 거죠. 그동안 제가 너무 개념이 없었던 것뿐이에요. 앞으로는 잘 지내봐요. 수정씨.”
“…네, 물론이죠.”
‘됐다.’
그녀와 훈훈하게 인사를 마치고 집으로 들어온 나는, 바로 히로인 어플을 실행했다.
[ 이벤트를 완료하셨습니다. ]
[ 보상으로 100코인이 지급됩니다. ( 보유 코인 : 2117 ) ]
메시지를 지우고 바로 그녀의 상태를 체크했다.
◆ 현 상태
- [ 호감도 : 37 ]
- [ 연분도 : 16 ]
- [ 성욕 : 30 ] [ 식욕 : 69 ] [ 피로 : 71 ]
“오.”
대박사건.
한 번의 이벤트로 12였던 연분도가 4 올라 16이 되었고, 호감도는 30에서 37로 껑충 뛰었다.
‘한 자릿수 호감도를 1을 올리는데 드는 게 5코인, 10대 호감도 1을 올리는데 필요한 게 10코인, 20대 호감도를 1을 올리는 게 20코인이었으니까......’
아마 30대는 호감도 1당 40코인이 아닐까 생각되었다. 만약에 그렇다면, 이번 한 번으로 280코인을 번 셈이었다.
‘앞으로 이벤트는 있을 때마다 해 줘야겠어.’
그렇게 이벤트로 호감도와 연분도를 올리고, 다시 코인으로 호감도를 올릴 수 있게 된다면, 추가로 코인을 이용해 호감도를 더 올리면 되었다.
‘오늘은… 더 없네.’
혹시나 해서 이벤트를 확인해 보았는데, 오늘 더 남은 이벤트가 없었다.
그렇다면 지금 해야 할 것은?
‘지금 당장 코인으로 호감도를 못 올린다고 해서, 코인을 안 모으겠다는 건 아니지.’
코인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다.
아무리 그녀가 힘들어한다고 해도, 그녀를 소환해서 범하는 것은 매일 할 생각이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쉬게 둘까.’
이제 막 12시가 되었으니까, 한 4시쯤에 그녀를 소환하면 될 것이다.
‘그럼 그동안 뭘하지… 아!’
나머지 다른 일일 퀘스트들을 할까 생각을 했지만, 문득 아침에 상자에서 나온 ‘천리염기공’이 생각났다.
******
“뭘까......”
강수정은 진현에게 받은 음료수를 손으로 굴리며 생각했다.
진현과의 본래 관계를 한 단어로 정리하면 ‘원수’라고 할 수 있다. 얼굴만 보아도 약간의 짜증이 밀려오는 사람. 별로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사람.
그런데, 오늘은 특이하게 편안함마저 느껴졌다. 우연히 얼굴을 마주쳤을 때 든 감정은 짜증이 아닌 반가움이었다.
특히 그의 팔을 잡고 걸은 것은 굉장한 일이었다. 바로 그제까지만 해도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게다가 그렇게 친절했다니…….”
혹시 편의점 일을 하다가 물건을 떨어뜨려 머리라도 맞은 것이 아닐까?
그의 상태가 이상했다.
예화와 함께 붉은 실 때문에 내려갔을 때만 하더라도, 자신에게 쉽게 짜증 내는 평소의 그였다. 그랬는데 오늘은 마치 다른 사람과 같았다.
특히 처음에 같이 가지 않겠냐고 했을 때는 정말로 놀랐다.
짐도 들어주고, 마지막에는 자신을 생각해서 음료수까지 내주었다. 별것 아닌 행동일 수 있었지만, 마음이 따뜻해지는 기분이었다.
어제 정체불명의 남자에게 강간당하고 집에서 눈을 떴을 때. 이 모든 게 꿈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눈물이 펑펑 나왔다.
처음을 빼앗겼다는 것이 죽도록 싫었고, 그 와중에 자신이 쾌감을 느꼈다는 사실도 너무 싫었다. 게다가 쾌감도 당할 당시에만 느껴졌고, 집에서는 줄곧 심한 통증이 이어졌다.
어렸을 때부터 커다란 가슴과 몸매 때문에 남자들의 음흉한 시선을 받았었던 그녀는, 솔직히 그다지 남자를 좋아하지 않았다. 자신을 훑는 그 시선이 싫었다.
바깥 활동을 딱히 선호하지 않고, 사교성 또한 뛰어나지는 않았다. 그렇게 보이지는 않지만 약간 내성적인 성향이 있었기 때문에, 정말 친한 친구 앞에서만 본 모습이 드러났다.
여중, 여고를 나오고 그녀는 친구의 조언에 따라 개인방송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조금 어색했고,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남자들이 대부분인 방송이라 거부감도 들었지만, 주변의 시선이 느껴지지 않으니 그래도 괜찮아졌다. 그냥 혼자서 게임을 하고 떠들기만 하면 되는 거니까, 나름대로 잘 해낼 수 있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채팅에서 성희롱 발언이 꾸준히 나왔기에, 여전히 남성에게 그다지 좋은 감정이 들지는 않았다.
‘하지만…….’
하지만, 심심할 때 로맨스 판타지와 같은 소설을 읽는 그녀의 입장에서는 그래도 어딘가에 자신을 생각해 주는 운명의 사람이 있을 거라고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언젠가 자신도 운명적인 만남을 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그런 믿음도, 어제 강간을 당하면서 와장창 무너졌었다.
억제로 빼앗긴 처음.
우악스러운 손길.
남자는 다 짐승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그렇게 와장창 무너졌다고 생각했는데…….
‘천진현인가.’
아무래도 그 생각도, 아직은 조금 보류해 봐도 괜찮을 것 같았다.
사랑 같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적어도 호감이 갔다. 이런 감정만 해도 그녀에겐 처음이었다.
“내일 똑같은 시간에 나가면… 혹시 있을까?”
누가 매일매일 꼬박 장을 보러 가겠냐만, 그녀는 내일도 같은 시각에 한 번 나가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는 그에게 받은 음료를 홀짝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