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外傳 3. 春來(춘래) (13/14)

外傳 3. 春來(춘래)

유난히 날이 차다 싶더니, 눈이 내리려 그랬나 보다.

백경화는 대전 밖을 나서자마자 보이는 절경에 잠시 숨을 죽였다. 그동안 제법 내렸는지 하얗게 덮인 처마와 조정을 바라보던 그는 곧 길게 입김을 내뿜었다. 어느 순간부터 한서를 잊은 몸은 이 정도 날씨에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지만, 속 안에 든 이 헛헛함은 추위를 느끼기라도 하듯 더욱 선득해졌다.

백경화는 제 숨결 따라 흐트러지는 입김을 바라보다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왕야(王爺).’

백경화는 그 부름이 낯설어, 조금 늦게 반응하고 말았다.

‘왕야?’

‘음.’

낯설다. 분명 짧지 않은 세월 동안 들어 온 호칭임에도 불구하고 그랬다. 백경화는 순간, 그런 생각이 들고 만 자신이 이상했지만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다. 저가 누구에게 어떤 것이든, 무엇이든 상관없는 일인데 호칭 따위야 아무려면 어떠랴.

백경화의 낌새가 이상했던지 지우산(紙雨傘)을 받치려 다가오던 여선의 걸음이 멎었다.

‘어디 불편하신 곳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니.’

뭔가 머릿속이 멍하고 몸이 붕 뜬 느낌이긴 했지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제야 그는 오늘따라 자신의 몸 상태가 조금 이상하다고 느꼈다. 멀고도 긴 출정을 앞두고 딴엔 긴장이라도 한 것일까.

다소 피곤한 낯으로 머리를 쓸어 넘기는 백경화를 바라보던 여선이 조심스러운 낯으로 물었다.

‘폐하께선 어인 일로….’

‘참 쓸데없는 자리를 마련하셨더구나.’

궁 한복판에서 황제를 대상으로 내지르기엔 신랄하다 못해 무엄하기 짝이 없는 말이었으나 백경화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조금 전 황제의 부름을 받잡고 잘하지도 않는 성장을 꾸미고 입궁한 참이었다. 그런 그를 맞이한 것은 황제와 완벽하게 치장한 열 명의 아리따운 규수들이었다. 하나같이 미색 곱고 총기 가득한, 신분 또한 범상치 않은 그네들이 의미하는 바는 한 가지였다. 그건 누가 보더라도 맞선 자리였다. 그리고 백경화는 막 그 자리를 판판이 파투 내고 나온 참이었다.

‘이제 곧 출정하는 놈에게 혼인은 무슨… 마음고생시키려 작정하지 않고서야.’

그분답지 않은 짓을 벌이시는군. 백경화는 기가 막힌 심정을 참지 못하고 그리 혹평했다. 이제 헤어지면 당신 죽기 전엔 보지 못할 거란 예감이라도 느끼셨는가. 그도 아니면 가장 아픈 손가락인 조카에 대한 늦은 애틋함의 발로였던가. 어찌 됐든 백경화로서는 사양하고픈 일이다.

‘혼기가 차시긴 하셨지요.’

아니, 황족으로 치자면 늦은 편이다. 그 또래엔 이미 비빈 두서넛은 기본이고, 빠르면 자식까지 본 이도 더러 있으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허나 백경화는 그 말에 낮게 코웃음 쳤다. 혼인이라니, 자신만큼 그와 어울리지 않는 인사가 또 있을까. 단언컨대 그의 일생엔 결코 없을 일이었다.

그는, 애정을 믿지 않는다. 그것이 얼마나 무정하고 덧없으며 허망한 것인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허니 정략으로 맺어진 동맹 관계이든, 혹은 그 본인이 바라서였든, 관심 한 톨조차 내비치지 않을 이런 지아비 곁에서 그네들의 인생은 얼마나 퍽퍽하고 고단할 것인가. 투기도 암투도 지아비의 애정과 관심이 있어야 가능한 일들이었다. 모두 뒷방 늙은이 신세와 다를 것이 없을 텐데.

‘아서라. 어느 애먼 인생 말아먹으려고.’

‘…….’

냉소 짓는 백경화를 바라보며 지우산을 받치고 있던 여선은 고개를 숙이고 한숨을 삼켰다. 무엇도, 누구도 믿지 않는 차갑고 써늘한 낯이 새삼 안타깝게 다가온 탓이다. 그도 그럴 것이 눈앞의 백경화는 대소 신료는 물론 같은 황족조차 탐내는 혼처였다.

소년과 청년의 경계선 사이에 서 있는 저 늠름한 친왕은, 날고 기는 황족들 사이에서도 단연 발군이었다. 완벽한 자태를 갖춘, 누구나 바라 마지않는 완전무결한 존재. 정작 그 자신은 애정사라면 치를 떨다 못해 인간 불신의 기미까지 보이니 어찌 통탄하지 않을 수 있으랴.

여선은 터질 것 같은 한숨을 삼키며 냉소 짓고 있는 백경화를 향해 답했다. 오늘 이 자리를 마련한 존귀한 존재의 뜻을 전한 것이다.

‘폐하께서 쉬이 물러나시지 않으실 터인데요.’

‘…그 양반이 한 고집 하긴 하지.’

모독죄로 당장 잡혀가고도 남을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읊조린 백경화가 고개를 들어 눈을 쏟아붓고 있는 먹구름을 바라보았다. 첫눈치곤 제법 눈발이 거센 걸 보니, 쉽사리 그칠 것 같지 않았다.

백경화는 제 얼굴 위로 떨어지는 눈 알갱이를 맞으며 생각했다. 가는 길이 조금 고단하긴 할 터이지만, 눈이 소리도 자취도 감춰 줄 것이다. 은밀히 움직이기엔 최적인 날이었다.

이미 준비는 모두 끝났고, 혹 자신이 돌아오지 못할 경우를 대비해 후일까지 모두 도모해 놓았다. 허니 떠나는 걸음이 무거울 필요는 없었다. 그리도 갈망하고 원하던 복수의 첫걸음인데, 무엇을 더 망설일까.

‘출정하기 좋은 날이로군.’

그 읊조림에 답하듯 지우산을 받치고 있던 여선이 부복했다. 어느새 모습을 드러낸 모든 군사령을 뒤로한 채 백경화는 눈 쌓인 월대를 걸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발아래 새하얀 눈이 짓밟히며 흔적을 남겼다. 이것을 시작으로 곧 그가 걷는 모든 곳이 피로 물들게 될 것이다. 죄악으로 온몸을 물들인 그는, 이제 다시는 이 새하얀 절경 위에 오롯이 서 있을 수 없으리라.

하지만 그것이 어떻단 말인가.

어차피 구원은 없는데.

그렇게 그는 스스로를 고독으로 밀어 넣고, 끝없는 절망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때의 그는 아직 구원을 만나지 못했다.

* * *

“…….”

눈을 뜨자 보이는 것은 낯선 천장이었다. 뒤이어 찾아온 것은 머리가 깨질 듯한 고통이었다. 미간을 찌푸리며 저도 모르게 만져 본 후두부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그는 정말로 자신의 머리가 깨졌음을 알았다. 낙마라도 한 건가.

어째서 제 뒤통수가 깨졌는지 유추해 보던 그는 생각하려 할수록 심해지는 고통에 낮게 욕설을 짓씹었다. 누군가 도끼로 후두부를 내리찍은 뒤 비틀어 뽑고 잘게 다지는 듯한 통증이었다. 한참 통증이 잦아지길 기다리고 있을 때, 문밖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백경화는 그 순간 머리통을 쪼아 대는 고통에도 불구하고 재빨리 주위를 훑어 무기가 될 만한 것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나 어째선지 맞지 않는 거리감에 헛손질을 하게 된 탓에 몸이 무너지듯 기울었다. 둔중한 몸은 그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몸이 넘어가는 순간에도 그는 기이하다 못해 괴이한 경험이 못내 신선하기까지 했다. 그는 항상 제 몸을 완벽하게 제어해 왔다. 철이 든 이후로 한 번도 넘어져 본 적 없던 그였으니 당연했다.

제 몸이 제 것이 아닌 감각은 낯설다 못해 신기할 지경이었다.

그래서일까. 뭔가 굉장히 긴 잠을 잔 듯한 느낌이 드는 것도.

“주군…! 깨어나셨군요…!”

익숙한 듯 낯선 목소리였다. 목소리뿐만이 아니었다. 그 모습조차 낯익으면서도 낯설었다.

백경화는 문을 열고 들어선 사내를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분명 아는 존재이긴 했는데 눈을 감기 전 보았던 모습과 달라서 긴가민가한 상태로 제게 다가오는 상대를 바라보았다.

“아직 움직이시면 안 됩니다. 상처가 한 치만 더 깊었어도 정말로 위험하실 뻔하셨습니다.”

“…….”

“크게 불편하신 곳이 있으시면 말씀해 주십시오. 다시 의원을 불러오겠습니다.”

“…….”

“일단 탕약 먼저 가져올 터이니… 주군?”

“…….”

백경화를 부축해 침상에 도로 앉혀 놓은 여선이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낀 것은 얼마 가지 않아서였다. 제 손이 닿자마자 뿌리친 백경화가 제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너무나 조용한 탓이었다.

“…왜 그리 보십니까?”

뭔가 굉장히 낯설고 생소한 것을 본 낯이라, 여선은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 싶어 저도 모르게 손으로 훑어 보았다. 그런 그를 향해 날아든 것은 너무나 생뚱맞은 하문이었다.

“…여선이냐?”

“…….”

이건 또 무슨….

혹 눈에 문제라도 생겼나 싶어 순간적으로 대경할 뻔했으나, 뚜렷한 초점이 그것은 아니라 말하고 있었다. 그럼 저 물음은 어찌 된 일인가, 여선이 의아함을 드러내기도 전이었다.

“……너 왜 이렇게 늙은 게야?”

“…….”

…이틀 밤낮을 간호한 내게 왜 눈뜨자마자 시비실까.

여선은 백경화의 말에 지난 걱정이 너무나 허탈하여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피골이 상접한 걸 가지고 그런 식으로 말하자면 여선도 할 말은 있었다.

“면경 좀 보시죠.”

이틀 꼬박 앓아누운 이보다 그래도 제 처지가 낫지 않겠는가.

‘이 녀석 보게? 언제 이렇게 건방져진 게지?’

백경화는 여선의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가 그 순간 들이닥친 통증에 이를 악물었다. 젠장. 도대체 어디에 뭘 어떻게 처박았길래 머리통이 이렇게까지 아플 수 있지.

순간 솟구친 짜증을 숨기지도 못하고 앓던 백경화가 이마를 짚은 채 물었다. 어찌 됐든 이곳은 적진, 혹은 전장일 텐데 제대로 된 무기 하나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은 퍽 위험한 일이었다.

“그보다 어딨느냐?”

내 검─ 뒷말이 붙기도 전, 여선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당연한 일처럼 태연하게 답했다. 마치 백경화에게 그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는 듯 단정적인 어투였다. 그리고 그것이 사실이기도 했다.

“이연 님이라면 곁방에 잘 모셔 놓았으니 걱정 마십시오. 특별한 외상도 없으시고 놀라 혼절하신 게 다입니다. 고뿔기가 살짝 있으시온데 걱정할 정도는 아니시고 잠시 깨어나셨을 때 심신을 안정시키고 보하는 약을 먹였으니 한동안은 곤하게 주무실 것입니다. 허니 먼저 주군의 몸부터 돌보시지요.”

여선은 이리 말하고 있지만 백경화가 지금 당장 이연을 찾아 나설 것이라 생각했다. 허나 돌아온 반응은 너무나 뜻밖의 것이었다. 이마를 짚은 채 자신의 말을 다 들은 백경화가 예상과는 달리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은 탓이다.

오히려 그는 설핏 찌푸린 낯으로 되묻기까지 했다. 지금 여선이 무슨 말을 하는지, 도통 알아들을 수 없다는 짜증스러움을 숨기지조차 않은 채.

“이연? …그게 누군데?”

“……!!”

그것은 그야말로 청천벽력과도 같은 물음이었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쳐도 유분수지. 여선은 백경화의 앞에 시립한 채 새하얗게 질린 안색으로 마른침을 삼켰다. 옆에 나란히 선 강진과 호무 또한 그와 크게 다를 바가 없는 상태였다. 그만치 이 사태가 너무나 아뜩하고 두려워, 머릿속이 텅 빈 채로 백경화가 던지는 하문에 더듬더듬 답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리고 백경화는 여선의 입을 통해 들은 사실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내가 뭐라고? 누구랑? 뭘 어째?

“혼인? 그것도 사내랑?”

백경화는 어이없이 웃으며 지끈거리는 미간을 손끝으로 문질렀다. 아무리 생각해도 결론은 하나였다.

“하! 네가 단단히 미친 게로군.”

그래, 여선이 미치지 않고서야 제게 그런 답을 할 리가 없었다. 십분 양보해서 저가 기억이 온전치 않다고 하자. 하지만 도저히 이것만은 인정할 수 없었다. 여인이랑 혼인을 했다고 해도 대경할 일인데, 같은 것 달린 사내랑 한 이불 덮고 잔다는 것은 도저히 그의 머리론 용납되지 않는 일이었다.

“농이 지나치다.”

백경화는 낮은 목소리로 으름장을 놓았다. 이 이상 거짓을 고했다가는 가만두지 않겠다는 흉흉한 눈빛에 여선은 그저 고개를 조아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할 수밖에 없었다. 그에 오히려 흠칫 몸을 사린 것은 백경화 쪽이다.

그 진중하고 결백한 모습이 전하고자 하는 바는 명백했다. 이는 한 톨의 거짓도 섞이지 않은 진실이었다. 그에 백경화는 두 눈을 지르감고 터지는 욕설을 겨우 삼켰다. 이십 년 가까운 세월이 통째로 사라진 것도 코가 막히고 기가 막힐 지경이건만… 이 무슨 해괴망측한 일인지. 더한 것은 상대의 신분이었다.

“그것도 제화국의 왕…이라.”

갈수록 가관이로다.

신분으로 따지자면 저 또한 만만치 않으나, 복수하고자 찾아든 나라의 왕과 그리 엮인 연유를 알 수 없으니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 가설을 떠올린 백경화가 희망을 띠고 물었다.

“혹, 황제 폐하의 밀명이라도 있었더냐?”

혹, 제화국 왕에게 접근해서 내부에 파고들라는 엄명이라도 있었던 것이냐. 백경화는 그리 되물었다.

여선은 백경화의 말에 숨은 뜻을 알아듣고는 짧게 침묵했다. 그러니까 백경화의 말은, 저가 미인계(美人計)를 썼냐는 뜻일 텐데.

‘미인계가 있긴 있었는데… 이게 그 미인계냐 하면 또 그건 아니고….’

그저 순진하고 어린 왕 홀리고자 작정하고 아양 떨던 공빈이 있었을 뿐인데, 이건 또 어찌 말하면 좋단 말인가.

여선은 점차 깊어지는 수렁에 신음하며 번민에 빠졌다. 차마 여기 대고 그 스스로 후궁 되기를 자처하였다는 말까진 하지 못한 여선이 백경화의 시선을 최대한 피하며 답했다.

“아니옵니다.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주군께선 이미 5년 전에 일선에서 물러나 평화롭고 안온한… 그래서 너무나 한가한 여생을 보내고 계십니다.”

그런 밀명이었다면 그때 이미 그들의 사이는 끝이 났을 것이다. 허니 오늘날까지 함께 있다는 것은 백경화, 그 자신의 뜻이라는 말이었다.

“이런 미친.”

백경화는 여선이 에둘러 한 말을 어렵지 않게 알아듣고는 끝내 욕설을 내뱉고 말았다. 뭐 이런 우라질 경우가 다 있지?

그 나직한 욕설에 여선은 더욱 몸을 조아렸다. 지금 유추해 보자면, 백경화의 상태는 딱 그때였다. 막 성황제국을 떠났을 때쯤, 화기를 다스리지 못하고 때때로 광기에 빠지던 그때의 백경화. 아직 심기를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던 가장 위험하고 사납던 시절의 그였다. 또한 인간 불신증이 극에 달했을 때이기도 했다.

누구보다 지금의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당연 백경화, 그 자신이었다. 혼란과 분노 그득한 그의 시선이 제 약지로 향했다. 본 적도 없는 옥가락지가 유독 신경을 잡아 끌어서 그는 그것을 거칠게 잡아 빼며 일갈했다.

“그럼 이혼해.”

“헉!!”

그 경악스러운 말에 여선만이 아니라 조용히 숨죽이고 있던 강진과 호무조차 경악성을 토하고 말았다. 저도 모르게 고개를 번쩍 들어 백경화를 바라보자 그 뒤로 본래의 백경화가 악귀 같은 얼굴로 칼춤을 추고 있는 형상이 보였다. 이걸 방치하는 순간, 저 칼끝은 그들을 향할 것이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말려야만 한다!

“주, 주군. 섣부른 판단으로 평생 후회하실 일은 안 하시는 것이….”

“후회는 지금 하고 있지 않느냐.”

“지금은 놀라고 정신이 없으실 터이니 조금 더 여유를 가지고 생각해 보심이 어떠신지요.”

“더 생각해 본다고 해서 달라질 것 같진 않다만.”

“차라리 한동안 별거를 하시는 것도 방법이지 않겠습니까?”

“…….”

백경화는 너 나 할 것 없이 달려들어 저를 뜯어말리는 세 명의 측근들을 바라보며 낮게 혀를 찼다. 이혼만은 어떻게든 말리는 모습에 어쩐지 두통이 더 심해지는 것 같았다. 이 상처도 떨어지는 그놈을 받다가 다쳤다니 어이가 없다 못해 짜증이 났다.

멀쩡한 사내놈이 제 몸 하나 건사할 정도의 무예도 안 익히고 뭘 했기에 저가 이 꼴이 된단 말인가. 생각할수록 한심하고 울화통이 터져서 백경화는 이를 갈았다. 지금의 그는 그때의 자신이 제 일신의 안위 따윈 돌아보지 않은 채 이연의 무사만을 바랐다는 것을 알 리가 없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좋다. 이혼은 잠시 보류하마.”

“…!”

백경화는 제 말에 눈에 띄게 밝아지는 세 명의 측근을 바라보며 가볍게 냉소했다. 이런 반응이라면 퍽 궁금하긴 하다.

“한번 보고 싶긴 하군. 얼마나 대단한 인사일지.”

여선은 다소 비릿한 그 미소를 바라보며 앞날이 심히 걱정되기 시작했다. 허나 모르긴 몰라도 하나 확실한 것이 있다면, 아마 기억이 돌아온 백경화는 그들 셋을 향해 무한히 감사해야 할 것이다.

어쨌든 한시름 놓은 여선이 막 지친 낯으로 어깨에 힘을 뺐을 때였다.

“하나만 묻겠다.”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보였던 백경화가 입을 열었다. 관자놀이를 짚은 채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눈으로 한참 그들을 바라보던 백경화가 손끝으로 제 이마를 몇 번 두드리다 덧붙였다. 여상한 목소리였으나, 그 속뜻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그 여자는 어찌 되었지?”

“!”

여선은 순식간에 흉악해진 백경화의 기운을 느끼며 식은땀을 흘렸다. 백경화가 가리키는 이가 누군지 모를 리 없었다.

백경화의 유일한 삶의 목표였던 존재.

마지막까지 잔악하고 무정했던 그 존재.

여선은 입술을 한 번 깨물었다 놓으며 허리를 깊숙이 숙여 부복했다. 과연 지금의 백경화는 이 일을 감당할 수 있을까. 하지만 속일 수도, 회피할 수도 없는 문제였다.

잠시 숨을 죽인 여선이 차분한 목소리로 고했다.

“주군께선 5년 전에 이미 과업을 이루셨습니다.”

“…!”

백경화는 여선의 말에 아득한 기분을 맛보았다. 그것은 절망과도, 환희와도 닮았으나 끝내 공허함만 남았다.

그는 이번에야말로 인생을 송두리째 도둑맞고 말았다.

그것은 말 못 할 상실감이었다.

* * *

여선은 제 말에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이를 차마 마주 보지 못하고 고개를 조아렸다. 지금 저가 들은 말이 무언지 머릿속으로 되새기고 있을 이는 제 혼란을 숨기지 못하고 연신 두 눈을 깜빡였다. 그러다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기라도 하듯 곧 호흡을 가다듬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의연한 반응이지만 여선은 터지는 한숨을 삼키지 못했다. 이이가 감당해야 할 몫을 생각하니 절로 안타까운 마음이 북받쳤다.

백경화가 그리 온몸 바쳐 구한 이는, 몸이야 상처 하나 없이 멀쩡할지 모르나 낙하할 때의 충격과 함께 한겨울 엄동설한에 강에 빠진 데다가, 무엇보다 저를 구하다 머리가 깨져 피 칠갑을 한 백경화를 보곤 대경하여 까무러쳤다. 이제야 겨우 몸을 추스르고 놀란 마음을 다스렸을 이를 향해 이 같은 말을 전해야 하는 그 또한 마음 편할 리가 없었다.

“한동안 머무실 곳을 준비해 놓았사오니 그리로 걸음 하시지요.”

“…….”

“마음 불편하시더라도 이것이 두 분을 위한 일이옵니다.”

여선의 청에도 불구하고 상대는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그에 여선이 나직한 목소리로 그 이름을 불러 재촉했다.

“이연 님.”

이연, 백경화가 잊은 존재는 여선의 재촉에 그제야 흐리게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

“경화는 어떻더냐?”

“…주군께선 얼추 다 회복하셨으니 근심치 마시고….”

“네 말대로라면 마음이 많이 상하였다는 뜻일 텐데, 어찌 걱정하지 않을 수 있겠니.”

“…….”

여선은 이연의 말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의 말대로였다. 백경화는 지금 반쯤 이성을 잃고 미쳐 날뛰고 있었다. 겨눈 칼끝이 길을 잃었으니, 그 마음도 따라 방향을 잃고 이리저리 헤매었다. 언제 터질지 모를 활화산이 독기를 품고 먹잇감을 찾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흉포한 발톱 아래 갈기갈기 찢기는 것이, 이연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리되면 훗날 주군께선 스스로를 용납지 못할 것이옵니다.”

“무섭구나.”

여선은 그 두려움이 제 안위가 아니라, 정말로 일이 잘못되어 백경화를 상처 입히게 될 것을 두려워한 말이란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어찌 이들은 이토록이나 서로밖에 생각하지 못할까.

이연은 여선의 다소 질린 낯을 바라보며 조금 웃고 말았다. 이연이라고 아무 걱정이 안 들 리가 없었다. 하지만 이것이 누구로 인해 빚어진 일인지 모르지 않는다.

여선은 그 미소를 바라보며 속으로 낮게 혀를 찼다. 이연이 저리 웃을 수 있는 것은 열여섯의 백경화를 몰라서 그렇다. 그때의 그는 함부로 다가설 수도, 곁을 내어 주지도 않던 존재였다. 들끓는 복수심과 증오심을 주체하지 못하고 나날이 사람에서 멀어지던 때, 가장 사납고 가장 흉포하며 뒤틀린 짐승처럼 절제되지 못한 광포함으로 오로지 복수만을 꿈꾸던 존재는 매우 위험했다. 그런 것과 이연을 붙여 놓는다? 나중에 기억이 돌아왔을 때 백경화를 생각해서라도 떨어뜨리는 게 둘을 위한 길이었다.

이연도 여선의 말을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었다. 지금 백경화는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니까, 거기다 중심을 잃고 방황하는, 가장 위험한 시기라니까 떨어져 있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허면 언제까지?

백경화의 기억이, 언제 돌아올 줄 알고.

“기억이 돌아오지 않으면 평생 이리 지내야 하는 것이냐?”

“!”

그것이 죽음과 무엇이 다르지.

이연은 속으로 그리 되물었다. 그것이 정말로 자신을 위한 길이 될까. 천만에.

그리고 무엇보다 정말로 그것이 백경화를 위한 길인지, 이연은 묻고 싶었다.

“여선아, 지금 내가 정말로 물러서면… 경화에게 도움이 되겠느냐?”

“…!”

여선은 그 차분한 목소리에 주먹을 다잡았다. 확답할 수가 없었던 탓이다. 지금의 백경화라면, 복수의 대상을 잃어버린 그 시절의 백경화라면…… 삶의 미련이란 게 없었다. 오로지 복수 하나만을 바라고 살아온 그는, 애초에 복수를 이루고 나면 더 살고자 할 의지도 없었던 이다. 그걸 모를 리 없었다. 성황제국을 떠날 때 신변 정리를 한 게 바로 백경화가 아니던가. 그는 애초에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그래서…….

결국 여선은 무너지듯 읊조렸다.

“도와… 도와주십시오…. 주군을… 부디…… 이연 님.”

그를 구할 수 있는 것은 당신뿐이다.

여선은 이연을 향해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유일한 희망이 그뿐이라서. 여선이 잡을 수 있는 동아줄이 그 하나뿐이라서.

그래서 이연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혹 일이 잘못된다 하더라도 함께 지옥문을 넘으면 그뿐, 허니 아무것도 걱정할 것이 없었다.

죽을까.

백경화는 멍한 머리로 생각했다. 기억이 없다지만, 자신은 평생의 숙원을 이루었는데 더 이상 살아 무엇 할까. 누군가 가슴을 한 움큼 베어 간 것처럼 허망하고 공허하여 그 어떤 의욕도 나지 않았다. 손끝 하나 움직이지 않고 제자리에 얼마나 늘어져 있었을까. 그러다 어느 순간 머리끝까지 솟구치는 화증을 참지 못하고 손에 닿는 모든 것을 파괴했다.

숙원을 이루었다고? 그 여인의 마지막이 어땠는지, 어찌 눈을 감았는지 무엇도 알지 못하면서 다 이루었다고? 아무 기억도 나지 않는데 무엇을 다 이루었는가!

그는 분노를, 가슴을 헤집어 대는 울분을 도저히 다스릴 수가 없었다. 격한 숨을 토하다가도 숨이 막혀서 제 가슴을 사정없이 두드렸다. 아팠다. 아픈데, 아픈 줄을 몰랐다. 슬픈데, 왜 슬픈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다시 제자리에 주저앉아 하염없이 울었다. 손톱이 다 상하도록 바닥을 긁으며 한참 울부짖던 그는 또 생각했다.

염원을 이루었는데, 왜 자신은 아직 살아 있지.

더 이상 살아갈 의미가 없는데.

“…….”

피와 눈물로 얼룩진 얼굴로 그는 숙이고 있던 허리를 세웠다. 넋이 나간 얼굴로 주위를 바라보다 손에 잡히는 것 중 가장 날카로운 것을 찾아 들었다. 언제 깨어졌는지 모를 사기그릇의 파편이었다. 제법 날카로운 것이 목을 긋기엔 충분했다. 그 생각 하나로 막 그것을 다잡았을 때였다.

“그러지 마라.”

“…!!”

“그러지 마, 제발….”

파편을 억세게 다잡은 손위로 새하얀 손이 겹쳐졌다. 까맣게 물든 머릿속으로 울음 섞인 목소리가 귀를 파고들자 백경화는 본능적으로 그 손을 쳐 내고 가느다란 목을 잡아 우악스레 바닥으로 짓눌렀다. 유약한 몸뚱이는 치명적인 곳이 잡혔음에도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반항이 없었다.

백경화는 뿌옇게 흐린 시야로 제 일을 방해하는 자를 없애고자 하였다. 이 가느다란 목은 그의 가벼운 손짓 한 번으로도 간단히 부러질 것이다. 손끝에 전해지는 맥박을 느끼며 몸속 깊은 곳에서부터 기이한 잔혹성과 함께 전율이 퍼졌다. 짜릿할 정도의 만족감이었다.

저도 모르게 만족스레 웃던 백경화가 다음 순간 고개를 기울였다. 억압받고 있는 치의 맥이 이다지도 평온할 수 있냐는 의문을 느낀 것과 동시에 툭툭, 미간을 타고 흘러내린 피가 턱 끝에서 떨어졌다. 아무래도 온갖 난리를 치다 머리 쪽 상처가 터진 성싶었다.

그것이 성가셔 미간을 찌푸리자 쥐 죽은 듯 눌려 있던 이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위협이라곤 터럭 하나만치도 느껴지지 않는 느릿한 손길로, 턱 끝에 맺힌 피를 훔치고 얼굴을 적신 피를 닦아 냈다. 무척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백경화는 놀랍게도 타인, 그것도 적인지 모를 이의 손길이 얼굴에 닿고 있음에도 아무런 행동도 할 수 없었다. 그 손길이 역하지 않은 탓이다.

숨을 죽이고 눈을 한 차례 감았다 뜬 백경화는, 그제야 뚜렷해진 시야로 상대를 눈에 담았다. 마침내 그 온화하고 부드러운 눈과 시선이 마주쳤을 때, 방금 전의 잔혹한 만족감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전율이 등허리를 타고 흘렀다.

그 생경하고도 황홀한 감각은 차라리 공포에 가까웠다.

“…!”

그는 숨조차 멈춘 채 제 밑에 깔린 이의 모습을 눈으로 더듬었다. 다소 창백한 낯이지만 겁에 질렸거나 몸을 움츠린 기색은 하나도 없이 평온한 얼굴이다. 백경화는 그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건 뭐지? 짙게 안개가 낀 머릿속으로도 의문을 느꼈다. 이 경이로운 존재는 뭘까. 신기하고도 낯설어 저도 모르게 냄새를 맡듯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마주친 보드라운 눈동자에 웃음이 스친다.

어…… 다소 당황한 소리가 백경화의 입속에서 머물다 흩어졌다. 언뜻 숨이 막혔다. 그건 고통에서 오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것은…….

그 순간 백경화의 얼굴에 선연한 공포심이 떠올랐다. 어떤 미지의 것을 조우한 짐승의 낯이었다. 그를 어찌 받아들였는지 지켜보던 이의 얼굴에도 미소가 사라지고 차차 안타까움과 괴로움이 떠올랐다.

“그리 힘들면…….”

눈이 마주쳤다.

백경화는 귓속을 파고드는 목소리에 온 신경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볼을 쓰다듬는 손길이 닿은 곳부터 생경한 감각이 퍼져 간다. 닿은 곳의 살갗이 따끔따끔하고, 왜인지 모르게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리 숨조차 쉬기 힘들 정도로 괴로우면…….”

소곤소곤, 다정한 목소리가 위로를 품고 백경화의 마음을 다독였다. 허나, 그 속에 담긴 말은 위로가 아니었다. 그보다도 깊은 공명(共鳴)이었다.

“그러하면… 같이 갈까?”

“!”

아까부터 속도를 높여 가던 심장이 무섭도록 뛰기 시작했다. 그것은 저 몸속 깊은 곳에서부터 위험을 알리는 경고 소리였다. 어쩌면 그의 인생에 새로운 축이 쌓이는 소리인지도 몰랐다.

제 인생의 우선순위가 뒤바뀌는 것을 예감이라도 하였던가.

그에 백경화는 상대의 목을 짓누르던 손을 뿌리치듯 놓고 뒤로 물러섰다.

“읏!”

“…!”

그 순간 들려온 신음 소리에 백경화는 저도 모르게 흠칫, 몸을 사리며 그를 돌아보았다. 혹 제 손에 상처라도 입은 것일까 싶어, 다소 초조하고 놀란 마음을 숨기지 못했다. 그런 그의 시야로 들어온 것은, 새하얀 목깃에 붉게 번지는 핏자국이다. 놀란 마음으로 자세히 살피자 옷깃보다도 새하얗고 가느다란 목에 난 상처가 보였다. 뚜렷한 손자국과 더불어 깨어진 사기 파편에 찍힌 흔적이다. 덜컹, 어째선지 심장이 내려앉았다.

백경화는 눈을 찌르는 듯한 상처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전신에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차게 식은 몸으로 생각했다.

안 된다.

어떤 이유로든, 무슨 일이 있든, 저이만은 결코, 상처 입혀서는 안 돼.

그것은 기억조차 손대지 못할 그의 가장 내밀한 곳에 새겨진 역린이었다.

백경화는 차마 그 상처에 손도 대지 못하고 벌떡 몸을 일으켰다. 손발이 동요를 숨기지 못하고 사정없이 떨렸다.

“밖에… 누구…! 여선아!!”

거칠고 새된 부름에 이제나저제나 대기하고 있던 여선이 급히 문을 열고 달려 들어왔다. 상황을 살피듯 잠시 방 안을 주시하던 여선은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이연과, 급히 몸을 물리는 백경화를 바라보며 움직임을 멈추어야만 했다. 생각했던 만큼 최악의 상황은 아니지만, 이해도 되지 않는 상황인 탓이다.

…왜 백경화가 이연을 더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일까.

여차하면 몸으로 백경화를 막아설 생각으로 대기하고 있던 강진과 호무도 입구에서 엉거주춤한 자세로 멈춰 선 게 느껴졌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그들이 서로 시선을 주고받으며 한참을 굳어 움직이지 못하자, 백경화가 버럭 노성을 내질렀다.

“얼른 치료하지 않고 뭣들 하는 것이냐!”

그제야 정신이 든 여선이 이연에게 다가섰다. 잠시 이연의 상처를 살핀 여선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연의 목에 난 상처를 발견하고 놀라긴 했지만 ─평소라면 정말 생각조차 불가능한 일이지만─ 현재 백경화의 상태를 생각해 본다면 무척이나 양호한 수준이란 건 부정하기 힘들었다.

‘막말로 모가지를 꺾지 않은 게 어디람.’

허나 속내야 어쨌든 여선은 강진이 눈치 빠르게 가져온 약통을 받아 들고 이연의 상처를 살폈다. 잠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백경화가 내실을 빠져나갔다. 등 뒤에 닿는 시선을 애써 무시하고 무의식적으로 발걸음을 옮기기를 한참─

눈앞에 인공 연못이 보이자 그는 망설이지 않고 그 얼음장 같은 물로 얼굴을 연거푸 씻어 냈다. 정신이 번쩍 들 정도의 냉수마찰에도 불구하고 상황 파악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머리를 아무리 굴려도 모르겠다. 그저 생각나는 것이라곤 저를 바라보는 다정한 얼굴과 부드럽게 뺨을 쓸던 손길, 그리고 함께 죽어 주겠다는 밀어였다.

“!!”

순식간에 머릿속이 뜨거워져서 그는 상처에 아랑곳없이 아예 머리를 연못 물에 담가 버렸다.

그렇게 머릿속이 식기를 바라며 몇 번이고 같은 짓을 반복하였을까. 한참 연못에 번지는 핏물을 멍하니 지켜보다가 어느 순간 깨달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숨통을 틀어막고 좀먹던 고통이 사라졌다는 것을. 그악스럽게 그를 물고 늘어지던 말 못 할 갈증과 애환이 사그라졌음을 말이다.

그리고 그 자리를 다른 것이 대신하여 채우고 있음을, 그렇게 깨닫고 만다.

그와 동시에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빗물에 젖어 있던 나약하고 유약하던 어린 생명 하나. 저를 사자(死者)와 착각하였으나, 오히려 그를 살게 만들었던─

“…!”

섬광 같은 기억과 동시에, 멀리 동이 트는 것이 보였다. 밝아 오는 여명 속에서, 백경화는 새로운 아침을 맞았다. 그는 그 이름이 무언지 알고 있었다.

기적이었다.

‘대면하겠다.’

그리 말한 백경화는 반 시진의 목욕 재개를 마친 뒤 한 시진 동안 옷을 골랐다. 옷이 왜 하나같이 볼품없지? 살림이 퍽 궁색한 것이냐? 누가 보더라도 촌구석에서 보기 힘든 화려한 의복들 앞에서 백경화는 못마땅함을 숨기지 못하고 투덜거렸다. 열여섯 그의 기준은 무친왕 시절이었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하지만 그때의 그가 의복에 신경 썼냐 하면, 전혀 아니올시다였기에 여선이 할 수 있는 대답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사이 백경화는 연유 모를 붉은 대례복에 한참 시선을 주는 중이었다. 왜 여인의 혼례복이 제 옷장에 있는 것인지 의아해하는 낯이었으나 다행스럽게도 입 밖으로 내어 묻지는 않았다. 그렇게 한참 옷을 고르고 착복한 뒤 그답지 않게 머리도 정리한 백경화가 저를 미심쩍게 바라보는 여선을 향해 변명같이 덧붙였다.

‘흠, 지난밤 내 꼴이 아주 형편없었으니 체면을 생각해서라도 좀 더 신경 써야지. 굳이 마지막 모습이 봉두난발일 필요는 없지 않겠느냐.’

사실 간밤의 백경화가 상거지 꼴이긴 했다. 여선은 부정치 못하고 고개를 조아렸다.

하여 현재.

백경화는 친왕 시절, 황제의 주선 자리에 속아 갔을 때나 했을 법한 모양새로 정자에 앉아 이연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지난밤 난장 속 인물과 같은 사람이라곤 생각하기 힘들 정도의 미태를 자랑하며. 서늘한 낯이지만 화려하기 짝이 없는 치장이 그를 더욱 아름답게 빚어 놓았다. 그야말로 누구를 홀리기로 마음먹은 태가 역력했으나 정작 그 본인은 모르는 눈치였다.

실상 냉랭한 낯을 유지하고 있는 미인의 머릿속은 복잡하기 그지없었다.

정말로 그 아이일까.

제 기억 속에 존재하는 그 어리고 유약하던, 그렇지만 저를 절망 속에서 건져 올렸던 그 구원자일까. 맞다 하더라도 어찌하여 그 아이와 이런 식으로 엮였단 말인가.

‘혼인이라니… 부부라니… 이 무슨 해괴한…….’

복수가 빠진 머릿속엔 같은 고민이 끝없이 돌고 돌았다. 해답을 찾을 수 없으니 속이 답답했다. 기억을 잊기 전의 자신은 정말 미친 건지도 몰랐다.

단 하나, 확실한 게 있다면 그것도 오늘로 끝이란 점이다.

백경화는 설령 정말로 기억 속 그 어린 구원자가 간밤 마주한 존재라 하더라도 흔들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이 관계는 말도 되지 않는다. 무슨 이유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자신이 기억을 잃은 것은 관계를 바로잡으라고 하늘이 내려 준 기회일지도 몰랐다. 어쨌든 그 아이와의 사이가 연정은 아닐 테니까.

연모의 감정? 그딴 게 자신에게 있을 리가 없었다.

연정이란 이기심과 욕심 앞에서 언제든 내버릴 수 있는 미개하고 쓸모없는 감정일 뿐이다. 저가 그런 감정에 빠져 혼인하였다고는 결코 생각지 않았다. 보은이라면 모를까. 간밤, 저답지 않은 반응을 보인 것은 그래서였을 것이다. 뜻하지 못한 인사와의 재회에 놀라고 기쁜 마음에.

사박, 그때 발걸음 소리가 생각에 잠겨 있던 백경화를 깨웠다. 느릿하고 차분한, 마치 그 본인의 성정을 띤 듯한 걸음 소리였다.

그에 대한 백경화의 첫 감상은 하나였다.

‘역시 무인은 아니군.’

몸이 약하다더니 그 나이 먹도록 스스로를 지킬 무공 하나 익히지 않았다니… 한심한 기색을 숨기지 못한 백경화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을 때였다.

찬 공기를 가르고 다정한 부름이 들려왔다.

“경화야.”

“!”

쿵! 그것은 무슨 소리였을까. 차마 떨치지 못한 이름을 다정히 불리었기 때문인지, 그렇지 않으면 누군가가 심장을 송두리째 앗아 가는 소리였는지 알 수 없었다. 그도 아니면 둘 모두였을까.

그 아연하고 선뜩한 감각이 전신에 내리꽂힌다 싶은 순간, 누군가 정자 계단을 올랐고 이어 눈이 마주쳤다.

다갈색의 온후한 그 눈과.

화아악- 백경화의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

“경화야?”

백경화의 반응에 오히려 놀란 것은 이연 쪽이었다. 사람의 얼굴이 저토록 붉어질 수 있다니, 저 정도면 오히려 몸에 이상이 있는 건 아닌지 걱정스러울 정도였다.

“괜찮으냐?”

“잠, 잠시…! 크흠! 잠시만!”

“왜 그러는 게야?”

오, 오, 오지 마…!!

백경화는 걱정스러운 낯으로 제게 다가오는 이연의 모습에 정말로 그리 소리칠 뻔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꼴사납게 그 말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는 것이고, 불행인 것은 볼썽사납게 뒷걸음질로 물러섰다는 것이다.

두근두근두근두근. 쿵쿵쿵쿵!

심장 뛰는 소리가 점차 빨라지더니 마침내 그것은 백경화가 도저히 다스릴 수 없는 속도로 널을 뛰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조화인지 모르겠다. 뇌가 새빨갛게 익어 가는 느낌이 아득했다.

그리고 마침내 걱정스러운 이연이 손을 뻗어 그 볼을 쓸었을 때, 백경화는 이를 악물어야만 했다.

화마에 찍히기라도 하듯 닿은 손에 뻘겋게 타오르는 것만 같았다. 숨이 막혔다. 더 이상은 이곳에 있기 힘들었다. 흘깃 백경화의 시선이 정자 난간을 향했다. 차마 이연이 있는 계단을 내려갈 엄두가 나지 않은 탓이다. 하지만 백경화는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당장 난간을 넘어가려는 몸을 억누르고 이연을 돌아보았다. 이야기. 그래, 이야기를 해야 했다. 끝내자는 이야기를.

…이연의 얼굴을 보고서는 도저히 그 말이 나오지 않았다. 마치 아교를 잔뜩 발라 놓은 것처럼 입이 붙어 버린 듯했다.

“…일단 차부터.”

백경화는 짐짓 평안을 가장한 채 이연을 정자 중앙에 놓여 있던 상으로 이끌었다. 비록 그 얼굴은 여전히 달아오른 채고, 목소리도 떨리는 상태였지만.

“…….”

이연은 말없이 백경화가 손으로 가리킨 자리에 앉았다. 백경화의 맞은편 자리였는데 이연은 그 자리가 매우 낯설었다. 항상 백경화의 옆자리에 틈 하나 없이 붙어 앉아 있었기에 마주 보는 자리가 어색했던 탓이다. 거기서 이연은 눈앞의 백경화가 정말로 기억을 잃었다는 게 실감 났다. 순간적인 공포가 전신을 뒤흔들었지만 필사적으로 참아 냈다.

여기서 그가 흔들려서는 안 될 말이다. 여선의 말에 따르면 이 자리가 마련된 것도 놀라운 일이라 하지 않는가. 애써 동요를 눌러 죽인 이연은 웃으며 몸은 괜찮은지 물을 생각이었다. 고개를 들자마자 백경화와 눈이 마주치지 않았다면, 분명 그럴 생각이었다.

“…!”

백경화는 이연을 훔쳐보다가 마주친 눈동자에 저도 모르게 홱 소리가 날 정도로 시선을 피해 버렸다. 제 행태에 외려 제가 놀란 백경화는 이를 악물고 속으로 욕을 퍼부었다. 자신이 왜 이러는지 정말 알 수 없었다.

간밤, 이연을 처음 보았던 그때부터 그의 온 신경이, 세포 하나하나가 눈앞의 존재를 향하고 있었다. 허망과 절망으로 물들어 무력함에 맥을 못 추던 때가 있었나 싶을 정도로, 열렬하게. 지금 그는 이 변화 속도를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더욱 환장할 일은, 그럼에도 다시 시선이 향한다는 것이다. 그때까지도 저를 바라보고 있었는지, 단번에 마주치는 다갈색의 눈동자에 놀라 또다시 팩 고개를 돌려 버리고 말았지만.

그때 나직한 웃음소리가 백경화의 귀를 사로잡았다.

백경화는 귀 끝을 간질이는 웃음소리에 홀린 듯 이연을 돌아보았다. 웃고 있었다. 방금까지, 조금은 어둡게 가라앉아 있던 낯이 너무나 부드럽게 웃는다.

백경화는 그 모습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달아오른 얼굴을 슬며시 내린 채 눈동자만 굴려 연신 이연을 훔쳐보기 바빴다. 이는 열여섯의 백경화에겐 결코 있을 수 없는 행동이었다. 어느 황족에게도, 심지어 성황제국 황제 앞에서도 보이지 않던 조심스러움이다.

이연의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여선은 기이한 표정으로 백경화의 손짓에 따라 차를 들고 다가섰다.

아침부터 백경화가 하는 꼴을 지켜보고 있던 그는, 순간적으로 백경화의 기억이 돌아왔나 싶었다. 하지만 묘하게 삐걱거리는 백경화의 모습이 기억을 잊기 전과도 달라서 그건 아니라고 판명했다.

그렇다면 지금 백경화는 열여섯의 그라는 것인데, 다시 한번 말하자면 그때의 백경화는 인간에 대한 관심은커녕 불신을 넘어 혐오증마저 보이고 있었다. 안하무인이었고 관심사는 오로지 복수, 그 하나뿐으로 흔히 하는 첫사랑의 열병 또한 앓아 본 적이 없었다. 저토록 제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동요한 적도 없고, 긴장한 모습을 남 앞에 보인 적도 없었다. 심지어 기억을 잊기 전의 백경화도 이연 앞에서 홍조를 띄운 정도지, 저 정도로 터질 것처럼 얼굴을 붉힌 적은 없었다! 저 모습은 정말로 홍안의 풋풋한, 그래, 마치 첫사랑에 빠진 풋내기 같지 않은가.

그러다 문득 여선은 깨달았다. 그 또한 사랑에 빠진 열여섯의 백경화를 알지 못한다는 것을 말이다. 연정에 빠지면 백경화가 그 상대를 어찌 대하는지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그가 아는 백경화의 연정은 언제 시작됐는지 모른 채로 다져진 완성형이라면, 현재의 백경화는 한참 진행형이란 뜻이었다. 그 순간 여선의 등허리를 타고 소름이 일었다. 그동안 볼 꼴 못 볼 꼴 봐 가며 익숙해진 자신이지만, 어쩌면 더한 무언가가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든 탓이다.

여선은 뭔가 알 듯 말 듯, 감이 올락 말락 한 표정을 지은 채 습관대로 이연의 찻잔에 먼저 차를 따랐다. 데운 찻잔에 가득 따라진 차가 수증기를 뿜었다. 그리고 막 여선이 백경화의 찻잔에 차를 따르기 위해 주전자를 기울였을 때, 본래의 얼굴색으로 돌아온 백경화가 몇 번 목을 가다듬은 뒤 이연을 향해 말했다.

“크흠, 그러니까… 부인.”

“큽…!”

그 나직한 부름에 이연은 여선이 따라 준 차를 마시다가 사레가 걸리고 말았다. 콜록, 콜록… 뭐, 뭐라고? 소매로 급히 입가를 훔치며 이연이 마주 앉은 백경화를 바라보았다. 반쯤 내리깐 눈으로 탁자에 올려진 제 손등을 바라보는 표정은 다소 써늘하기 짝이 없으나, 은은하게 달아오른 귀 끝마저 숨기지는 못했다. 무표정 속에 은근한 쑥스러움이 깔린 낯이 어여쁘기 짝이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황망함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여선은, 백경화의 잔에 차를 따라 주다 때아닌 봉변을 당한 그는, 찻잔이 넘쳐흐르는지도 모르고 굳은 채 백경화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넘친다.”

줄줄줄. 백경화는 찻물이 넘치다 못해 제 손까지 적시고 있는데도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여선을 향해 낮게 혀를 찼다. 어느새 차는 탁자 아래까지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때까지도 아연함을 숨기지 못하고 있는 여선을 향해 부러 뻔뻔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왜? 뭐? 혼인했다며.

이연은 그런 백경화를 바라보다 곤혹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 근데 어쩌지. 틀렸는데.

“음… 우리 사이에 굳이 그런 걸 나누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냐마는.”

굳이 나눠 보자면.

“부인은 네 쪽이란다.”

“…???”

자신이 내뱉은 호칭에 은은한 부끄러움을 담고 있던 백경화의 얼굴에 무수한 물음표가 떠올랐다.

뭐라고? 제가 들은 말을 순간적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굳어 있던 백경화의 얼굴에 차차 어이없는 웃음이 떠올랐다.

“누가 부인이라고?”

이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주전자를 내려놓은 여선이 손가락으로 정확하게 백경화를 가리켰다. 잠시 그 손가락을 어이없게 바라보던 백경화가 입 모양만으로 수많은 욕을 뇌까렸다.

“장난하느냐?”

이게 어디서 손가락질이지? 꺾어 주랴?

백경화는 기가 막힌 심경으로 으득, 이를 갈며 말했다.

“내가 지금 기억이 온전치 못하다고 날 속이려는 것 같은데….”

거짓도 어느 정도여야 속아 주는 척이라도 하지. 백경화는 픽, 비웃었다. 그런데 그를 바라보는 여선은 물론이고 심지어 이연마저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그에 백경화의 표정이 차츰 굳어 가기 시작했다. 불길했다. 설마… 자신이 그 정도로 미쳤으려고.

하! 어처구니없는 심정을 숨기지 못하고 백경화가 얼굴을 굳히며 일갈했다.

“어디 증거 가져와 봐라.”

그 전에는 어림도 없다는 기색이 제법 사나웠다.

그래서 여선은, 정말로 가져왔다.

“…….”

백경화는 여선이 내민 목각판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떨리는 동공이 몇 번이고 제 손에 들린 것을 읽고 또 읽었다. 몇 자 적히지 않은 그것은, 너무나 명백한 증거라 백경화는 숨이 다 막힐 지경이다.

증거를 가져오란 말에 마치 기다렸다는 듯 여선이 날아가다시피 가져온 것은, …호적이었다. 그것도 성황제국 황제 직인까지 찍힌.

이보다 완벽한 공증이 또 어디 있으랴. 무엇보다 부인란에 떡하니 쓰여 있는 제 이름자는 누가 보더라도 그의 필체였다. 일필휘지, 쓰인 획마다 기쁨과 즐거움이 잔뜩 묻어나는 것이 그의 착각만은 아닐 터였다. 백경화는 빼도 박도 못할 정도로 완벽한 증좌 앞에 무릎 꿇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기억을 잃기 전의 저를 매우 욕했다. 정녕 미친놈이다. 내 알고는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미친놈이지 않고서야 어찌 이리 체통 없고, 염치없이 굴 수 있지. 그리 질색하던 혼인을 했으면 정상적이기라도 하던가. 이건 뭐 따져 볼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주군께선 혼인식까지 치르신 어엿한 귀부인이시옵니다. 대례복이 참 잘 어울리셨지요.”

“…!”

백경화는 그제야 제 옷장에 고이고이 모시고 있던 붉은색 혼례복의 정체를 깨달았다. 왜 그런 게 제 옷장에 있나 했더니 제가 입었던 혼례복인 것이다. 이런 우라질! 10년 뒤의 그는 정말 미치기라도 한 것일까? 도대체 무슨 일을 겪으면 사람이 이렇게까지 망가질 수 있는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호적을 받으신 날 매우 기뻐하시며 가보 삼겠다 하셨지요. 호적을요.”

그런 그를 향해 여선이 쐐기를 박듯 덧붙였다. 무척 즐거워 보였다.

호적을 가보… 연신 그 말을 되뇌던 백경화는 확신했다. 저는 미친놈임이 분명하다고.

이런 게 있었구나. 이연은 처음 보는 제 호적을 놀람 반, 신기함 반으로 바라보다 으득으득 이 가는 소리에 백경화를 돌아보았다. 이마를 짚은 채 연신 이를 가는 백경화를 지켜보던 이연이 흠, 낮게 침음했다. 잠시 눈동자를 굴리며 고민하는 기색이더니 곧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럼 내가 그리 불러 볼까.”

무엇을?

머릿속으로 기억을 잊기 전의 주책맞은 놈을 매우 패 대고 있던 백경화가 의아한 얼굴로 이연을 돌아보았다.

“부인.”

“…….”

미친… 그 다정한 부름에 백경화는 들고 있던 호적마저 떨어뜨리며 나직하게 욕설을 내뱉었다. 역정이 나기는커녕 전신에 홧홧한 열기가 돌고 몸이 배배 꼬였다. 또다시 얼굴에 피가 몰리는 것이 느껴졌다. 당장 터진다 해도 하등 이상할 것 없을 정도로 붉으리라. 그리고 그쯤 되면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리 기분이 둥둥 뜰 정도로 좋다면, 부인 소리 듣는 것쯤 할 만하다고. 그래, 미친 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닐지도 몰랐다.

부인, 저를 향해 수줍게 미소 짓는 모습을 홀린 듯 바라보던 백경화는 불현듯 정신을 차렸다. 쿵쿵쿵! 심장 뛰는 소리가 제 귀까지 들리는 것 같았다. 이번에야말로 정말 참을 수가 없어진 그는, 한참 전의 생각을 현실로 만들었다.

난간을 넘어 도주한 것이다.

“…….”

“…….”

순식간에 정자 난간을 넘어 사라진 백경화의 모습을 황망하게 쫓던 둘은 한동안 침묵을 지켜야만 했다. 그러니까 이게 무슨 상황이냐면… 그 백경화가 도주했다. 그것도 난간을 넘어서. 새빨개진 얼굴로. 너무 부끄러워서.

허, 여선이 기막힌 소리를 흘렸을 때 이연은 한참 굳어 있다가 제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도주한 백경화에게 상심했나 싶어 여선이 얼른 입을 열어 위로하려던 찰나였다. 부들부들,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들뜬 이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귀여워….”

에잇, 염병할.

저도 모르게 진심으로 욕을 뇌까리고 만 여선은 질색한 낯으로 이연을 내려다보다 고개를 내저었다. 이런 걸 두고 염병 첨병이라고 하나 보다.

그때 백경화의 기세에 조금 떨어진 곳에서 대기하고 있던 강진과 호무가 놀라 달려왔다. 그 걱정스러운 낯을 보고 있자니 새삼 상전들 연애 놀음에 이리저리 치이는 자신들의 신세가 안타까웠다. 여선이 할 수 있는 말은 하나뿐이었다.

“걱정할 필요 없겠다.”

내가 다시 저들 일에 걱정을 하면, 내 손으로 장을 지지겠다.

다소 안심이 서린 말이긴 했으나 무엇보다 진절머리 난 기색이 역력했다.

기억을 잃었더라도, 백경화는 역시 백경화였던 것이다.

역시 죽자.

백경화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밤하늘에 떠 있는 달을 보며 생각했다. 벌써 몇 시진째 반복된 생각이었다. 낮의 그 추태를 생각하면, 역시 죽어야 한다. 쥐구멍에 이 몸이 들어갈 리 없으니 접시 물에 코라도 박을까. 아니, 그냥 가만히만 있어도 수치심에 온몸이 불타 죽을 것 같았다. 그럼 사인은 괴사(愧死)6)로 남겠지.

“하! 볼만하겠군.”

한참 자학을 해 대던 그는 제가 달아나던 순간 짓던 이연의 표정을 떠올리고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왜 그랬을까. 정말 저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그리고 그는 여전히 답을 알 수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자학하고 의아해하고 한숨 쉬기를 반복했을까.

곧 굉장히 지치고 황폐한 낯으로 늘어져 둥근 달을 올려다보다 문득 무언가를 떠올린 백경화가 품 안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그런 그의 손끝에 걸려 모습을 드러낸 것은 달만큼이나 둥근 옥가락지였다. 다소 투박하고 밋밋한, 흔하디흔한 옥가락지-

그건 잠잘 때를 제외하곤 항시 백경화의 왼손 약지에 자리해 있던 것이기도 했다.

솔직히 무친왕의 시점으로 보자면 한없이 초라한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 물건인지는 흠집 하나 없는 모습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얼마나 애지중지 아껴 왔는지도.

“…….”

백경화는 그것을 손가락으로 굴려 보다가 손을 들어 달빛에 비추어 보았다. 달빛 아래 은은하게 빛나는 모양새가 마냥 곱고 아리따워서- 그는 홀린 것처럼 허전함을 느끼고 있던 제 약지에 끼우고 말았다. 다른 손가락에 비해 조금은 가늘고, 흰 줄이 그어져 있던 그 손가락에. 가락지는 제자리를 찾은 듯 딱 맞았다.

그런 그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이연의 왼손 약지에 끼워져 있던 같은 모양의 가락지였다.

그것을 조금 복잡한 심경으로 바라보고 있던 백경화는 멀지 않은 곳에서 난 인기척에 고개를 돌려 흘깃 내려 보았다. 지금 그는 뜨겁게 달아올라 식을 줄 모르는 머리도 식힐 겸 찬 바람을 쐬기 위해 후원 소나무 위에 드러누운 채였다. 체통 없는 모습이라 누군가에게 들키면 퍽 곤혹스러운 상황일 텐데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낯으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사실 그는 여기서 더 부끄러워질 일도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심드렁한 표정으로 상대를 확인한 백경화의 얼굴이 곧 당황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이연이었다.

피풍의를 걸친 이연이 등을 들고 입김을 뿜으며 그에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가 있는 나무 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중이었다.

벌떡! 저가 앉아 있는 곳이 어딘지도 잊어버린 백경화는 급히 몸을 일으키다 균형이 흐트러져 미끄러지고 말았다. 나무 아래로 떨어지는 꼴불견이야 벌어지지 않았지만, 이연의 발치로 나무에 쌓여 있던 눈이 후두둑 떨어졌다.

자연스레 이연의 고개가 위를 향했다. 그리고 백경화와 눈이 마주쳤다.

“…거기서 뭘 하는 게야?”

“……달구경을.”

굳이 거기서?

백경화는 제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이연을 바라보다 얼른 말을 돌렸다.

“그러는 그대야말로 이 시각에 무슨 일로?”

“……산책을 좀.”

굳이 이 시각에?

이번엔 백경화의 얼굴이 황당하게 물들었다. 그러자 퍽 난감한 미소를 지어 보인 이연이 덧붙였다.

“잠이 오지 않아서….”

그 말은 사실이었다. 따뜻한 방 안, 두터운 금침을 덮고 있어도 항시 곁에서 온기를 나누어 주던 존재가 없으니 곁이 썰렁하고 마음이 허전하여 잠이 들 수가 없었다. 한참 이리 뒤척이고 저리 뒤척여 보았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찾아온 것은 외로움이라… 결국 몸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내내 붙어 있던 이의 부재는 그렇게나 선명했다. 앓았던 시간을 빼자면 고작 하루일 뿐인데. 그 짧은 시간조차 혼자 있을 수 없다니 저 스스로도 어이없고 민망했다. 그런 중에 백경화를 마주쳤으니… 뭔가 속이 들킨 듯하여 얼굴이 화끈거렸다.

백경화는 새하얀 절경에 피어난 은은한 다홍빛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무슨 생각 중일까. 순간적으로 그 머릿속 생각을 알고 싶어 몸이 달았지만, 곧 그는 상념에서 깨어나야만 했다. 콜록, 낮은 기침 소리가 들려온 탓이다.

백경화는 놀라 나무에서 뛰어내려 소리도 없이 이연의 앞에 섰다. 그리고 제가 걸치고 있던 장의를 벗어 이연의 몸 위로 걸쳐 주었다. 물 흐르듯이 일어난 일은 생각도 하기 전에 몸이 행한 것이었다. 목까지 꼼꼼하게 여며 준 뒤에야 백경화는 제 행동을 깨닫고 아연해지고 말았다. 훈련된 개도 이보다 빠릿하진 않겠다. 그나마 이연이 너무나 익숙하게 받아들여서 백경화는 제 민망함을 감출 수 있었다.

“고뿔이 나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들었는데, 옷차림이 너무 가벼운 게 아니오.”

“나보다야 그대가 큰일이었지. …몸은 좀 괜찮은 게냐?”

괜찮을 리가 있나. 저 때문에 기억을 잃었는데.

이연은 제 물음이 얼마나 염치없는 것인지 깨닫고는 입술을 사리물며 고개를 숙였다.

백경화는 설핏 가라앉는 이연의 얼굴을 바라보며 낮게 혀를 찼다. 그러고 보니 눈앞의 이이를 구하려다가 이 꼴이 났다 하였지. 약한 것 좀 구하다 보면 다치고 기억도 잃고 할 수도 있는 거지, 뭐 그런 걸로 저런 표정을 지어. 무공도 모른다고 통박을 놓던 자신은 잊은 건지, 백경화는 기적의 논리를 펼치며 답했다.

“별걸 다 신경 쓰는군. 날 걱정할 틈에 그 약해 빠진 몸뚱어리나 더 챙기는 게 나을 텐데.”

“…….”

타박하듯 돌아온 대답이, 원래의 백경화라면 생각지도 못할 정도로 퉁명스럽고 거칠었다. 이연은 그 생경한 대답에 퍽 당황하였으나 머뭇거리는 기색으로 그가 걸쳐 준 장의의 목깃을 더욱 여며 주는 손길엔 웃고 말았다. 비록 말은 거칠어도 그 속에 든 뜻만은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새삼, 제가 알지 못하던 때의 백경화를 보고 있다는 것이 와닿았다. 열여섯의 백경화. 지금의 저보다도 한참이나 어린. 음, 위기감이 좀 가시고 나니 신선한걸. 역시 귀엽기도 하고.

이연은 미소 지으며 권했다.

“그대만 괜찮다면, 잠시 함께 산책이라도 할…까?”

“…….”

백경화는 대답하지 않았다. 기억을 잃기 전이라면 이연의 말에 냉큼 답하며 손부터 잡았을 텐데 그는 말없이 돌아섰다. 그저 이연의 손에 들려 있던 등불을 뺏어 앞서 걸어갈 뿐이었다. 가타부타 말 없이 앞서 걷는 그 등을 바라보던 이연은 조심스레 제 앞길을 비추는 불빛에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제가 알지 못하는 그. 하지만 결국엔 제가 아는 이가 될 백경화.

두근두근. 심장이 기분 좋게 울렸다. 남모르게 초조함과 불안함으로 소란스럽던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든든한 버팀목이 선 것처럼, 무엇도 걱정할 것 없다는 것처럼.

침묵뿐인 산책길이었지만, 어색함은 없다. 곁에 서 있는 인기척이 묘하게 설레고 심장을 간질였다. 마치 갓 연심에 빠진 듯 낯간지럽고 부끄럽기도 했다.

백경화는 곁에서 걷는 인기척이 어찌하여 제 기분을 좋게 만드는지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지 않았다. 그저 밤새 쌓인 새 눈밭 위로 새겨지는 두 개의 발자국만이 무척 기껍다 여길 뿐. 흘깃, 눈을 들어 저들이 걸어온 자취를 쫓고 있자 어쩐지 성황제국을 떠나던 그날이 떠올랐다. 다시는 밟지 못하리라 여겼던 그 눈부시도록 새하얀 절경. 하지만 자신은 어느새 그 설경 위에 땅을 딛고 자연스럽게 녹아 있었다. 그것도 혼자가 아닌 둘로. 그에 언뜻 코끝이 시큰해지고 마음이 술렁였다.

허나 묘한 공기가 떠돌던 밤 산책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찬 공기가 아무래도 아직 다 낫지 못한 이연에겐 무리였던 탓이다. 콜록, 콜록. 연이어 터진 기침 소리에 백경화는 앞서 걷던 걸음을 침전 쪽으로 돌렸다. 하지만 그들은 문 앞에서 한동안 움직이지를 못했다. 헤어지기 아쉬움에 서로 눈치만 보며 머뭇거리길 한참.

“음. 내가 침전까지 데려다줄까? 그대에겐, 등이 없잖아.”

얼씨구. 백경화는 이연의 말이 같잖게 느껴졌다. 그의 무위는 어둠 따위에 시야가 가려질 수준이 아니었다. 거기다 그리 코를 훌쩍이면서 누가 누굴 데려다준단 말인가. 그것도 바로 옆 건물에 있는 침전에.

하지만 백경화는 제 속내와 상관없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바로 옆이니, 그 정도쯤은 괜찮겠지.

그리고 그들은 또 얼마간 걸었다. 이번엔 백경화가 머무는 임시 거처 앞에서 그들은 또 같은 짓을 반복했다. 서로 눈치를 살피며 너 먼저 가라 투닥거리다가 큼, 낮게 목을 울린 백경화가 말했다.

“옷을, 큼. 옷을 돌려받아야 하니 내가 다시 데려다주겠소.”

날이 차서 옷을 돌려주기는 힘들 테니 그 앞까지 함께 가겠다. 그리 덧붙인 백경화가 변명하듯 말을 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옷이라.”

오늘 처음 입어 본 옷이지만, 무슨 상관이람.

그 같잖은 말에 이번엔 이연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해서 그들은 왔던 길을 또다시 함께 걸었다. 밤공기는 차가웠으나 그들 사이로는 훈훈하다 못해 뜨끈한 열기가 피어올랐다. 걸음은 처음보다 느려져 있었다. 허나 길은 왜 이리도 짧고, 시간은 왜 그리 쏜살같이 흐르는지.

백경화는 침전 앞에서 이연이 느린 손길로 건네준 제 장의를 쥐어짜듯 잡으며 몇 번 입술만 달싹였다. 들어가 보아라. 이만 들여보내어 쉬게 해 주어야 하는 걸 아는데, 아쉬움에 그 말이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이연이었다.

“음. 옷을 빌려준 보답으로… 차 한잔 대접해 주고 싶은데, 들어왔다 가겠느냐?”

백경화는 그 말에 입술을 사리물며 제 장의를 쥐고 있는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그러지 않으면 왠지 환호성이라도 내지를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 야심한 시간에 차를 권하는 이연도 웃기지만 좋다고 냉큼 고개를 끄덕이는 저는, 역시 좀 미친 것 같았다. 왜 이리 눈이 가고 마음이 소란스러울까… 어찌하여 이토록이나 헤어짐이 아쉬워 우습지도 않은 짓을 벌이고 있는지.

기막힌 심정을 달래며 이연의 뒤를 따라 방 안으로 들어선 백경화는 눈에 보이는 내실의 모습에 기이한 익숙함을 느꼈다. 화려한 멋은 없지만 단아하고 정갈한 내실의 모습이, 그 훈기가 무척 낯익었던 것이다. 한눈에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저가 지내던 침전이었다. 아니, 이연과 그가 함께 지내던─

“!”

그 자각에 흠칫 몸을 굳혔던 그의 시야에, 금침이 다소 흐트러진 침상이 눈에 들어온 것은 필수 불가결한 일이었다. 목이 마르고 갈증이 일었다. 그러고 보니 그들이 ‘정상적인 부부’였다면 같은 침전을 썼을 것이다. 같은 방에서 일어나고 소반을 먹고, 가끔은 주전부리와 차를 마시며 사소한 일에도 시시덕거리다 저 침상에 누워 함께 잠들었으리라. 그러다 한 번씩은 체온도 나누었겠지.

…맙소사!

백경화는 순간 든 생각에 경악하며 파드득 몸을 떨었다. 타인이 몸에 닿는 것 따윈 딱 질색인데, 어째선지 그 생각만으로 배 속 깊숙이 자리한 심지에 불이 붙은 느낌이었다. 뜨겁고 성마른 열기였다.

더 이상 생각하지 말자.

백경화는 긴장을 숨기고 다상에 앉아 화로대에 물이 든 주전자를 올리고 있는 이연을 돌아보았다. 잘못된 판단이었다.

불빛에 아른아른 비치는 몸이 백경화의 호흡을 흩트렸다. 백경화의 손이 순식간에 식은땀으로 축축해지고 속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씨발. 도저히 저가 왜 이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도 뭐, 부부 사이엔 당연한 일…이니까.’

아무도 듣지 못하는 제 생각임에도 불구하고 백경화는 열심히 변명했다.

‘그래도 아직 병상에서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하는데 너무 이르긴 하지. 동침은 조금 더 시간을 두고 천천히….’

그리 생각하니 어쩐지 좀 아쉬워지는 듯도 했다.

…아 근데 다시 생각해 보면… 정확하게 뭘 어떻게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걸 다 떠나서 저 작고 약한 걸 아래에 깔고 이런 짓 저런 짓 하는 것도 참 못 할 짓처럼 느껴졌다. 내 맘대로 하는 것도 좀, 미안한 느낌이랄까.

‘아, 그래서 내가 ‘부인’인가?’

“!!”

흡! 백경화는 불현듯 찾아온 깨달음에 급하게 숨을 삼켰다. 그러곤 조심스럽게 차통을 열어 냄새를 맡고 있는 이연을 훔쳐보았다. 호롱불 밑에 비친 몸 선이 유달리 가늘고 약해 보여서 백경화는 침음할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정말로 자신이 ‘부인’일지도 모르겠다고, 백경화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뭔가 아찔한데.

그렇게 백경화의 오해가 깊어지고 있을 때였다.

“들게.”

백경화는 때마침 이연이 제 앞에 놓아 주는 찻잔을 낚아채다시피 하며 단숨에 털어 냈다. 제법 뜨거웠으나 조금 이성을 차리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맛이.’

…이게 무슨 맛이지.

백경화는 단 한 번도 저가 차에 까다롭다 생각한 적은 없었다. 전장에선 빗물, 심할 경우엔 흙탕물로 목을 축이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허니 불평은 없었지만… 신기하긴 했다. 어떻게 이렇게 못 우릴 수 있나 싶어서. 이건 획기적이다 못해 차원을 달리하는 맛이 아닌가.

떫고 시고 아릿했다.

놀랍게도 그랬다.

“…….”

흘깃, 고개를 들어 이연을 살피자 저가 우린 차를 한 모금 마신 이연의 표정도 만만치 않았다. 순간 찡그려졌던 얼굴이 차차 당황스럽게 물들더니 슬쩍 백경화의 눈치를 보다… 종내엔 붉게 달아올랐다. 차 한 잔 제대로 우리지 못하면서 대접 운운한 것이 부끄러운 듯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목도한 백경화는, 입 안에 머금고 있던 그 떫고 시고 아릿한 차가 달게 변하는 것을 느꼈다.

…이젠 미쳤다는 말로도 제 상태는 표현하기가 어려웠다.

“다시 끓여 줄게.”

“괜히 찻잎 낭비하지 말지? 이건 다시 끓인다고 해서 나아질 실력이 아니야.”

“…….”

이연은 민망함에 찻잔을 두 손으로 잡고는 고개를 숙였다. 항시 끓여 준 차만 마셨으니 어느 찻잎을 써야 하는지, 양은 어느 정도인지 가늠이 되지 않은 게 문제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무리 백경화가 손도 못 대게 했어도 좀 익혀 놓는 건데….

슬며시 제 입술을 물었다 놓은 이연이 조금 의기소침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시지 말아라.”

“왜?”

“…맛이 없잖느냐.”

“그래. 맛이 없군.”

평소 백경화는 이연이 해 주는 어떤 것이라도 기뻐하며 좋아해 줬다. 이리 진솔하게 답하는 백경화는 분명 이연에게 낯선 존재였다. 분명 그랬지만, 이연은 마음이 상하지 않았다.

말투와 달리 차를 마시는 백경화의 표정이 너무나 부드러웠기 때문이다.

“맛은 없지만, 그대가 날 위해 끓여 준 차잖아.”

그 말대로 못하는 솜씨로 평소 하지 않은 일을 한 것이다. 그와 헤어지는 게 아쉬워서. 그를 붙잡아 두기 위해. 조금 더 함께 있고파서.

그것만으로도 이 차의 맛은 충분했다.

하지만.

“다음엔 내가 끓이지.”

여전히 맛은 드럽게 없었다.

이연은 백경화의 말에 웃으며 어깨를 떨었다. 사실, 그가 느끼기에도 맛이 없다 못해 희한하긴 하였다. 그런 이연을 흔흔한 낯으로 바라보던 백경화의 시선이 이연의 목가에 닿은 것은 그때였다. 희미한 손자국이 그의 눈을 찌를 듯 강렬했다. 보이지 않지만, 목덜미에는 사기그릇 조각에 찔린 흔적 또한 고스란히 남아 있을 터였다.

그 목에 난 상처가 누구로 인한 것인지 떠올린 백경화는 표정을 굳히고 찻잔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목은 좀 어떤, …내가, 그땐….”

“경화야.”

더듬더듬, 정확하게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이 생각나는 대로 말을 내뱉고 있던 백경화는 그 순간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흠칫 정신을 차렸다. 이연은, 백경화에게 그 일을 신경 쓰지 말라 말하지 않았다. 그저 웃으며 권했을 뿐이다.

“차 좀 더 줄까?”

부드럽고 온화한 미소였다. 세상 다시없을 유약하고 보드라워 보이는 그 미소는, 사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이의 미소일지도 몰랐다. 도저히 기억 속 울고 있던 아이와 동일 인물이라곤 생각지도 못할 정도로. 부드럽고 유약한 외양과는 달리 내면은 어떤 일에도 흠집조차 나지 않을 듯 단단하기만 했다.

어쩌면 눈앞의 이 여린 이가, 저보다 훨씬 강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자 물음은 머리를 거치지 않고 바로 튀어나왔다.

“어떻게… 그리 태연할 수 있지? 어떻게…….”

그리 강할 수 있어.

만약 자신이 정인이었다 한다면, 기억을 잃고 변화한 것이 두려울 법도 할 텐데. 그 눈 어디에도 불안은 보이지 않았다.

경의를 담은 그 물음에 두 눈을 크게 떠 보였던 이연이 낮은 웃음을 흘렸다. 산도 무너뜨릴 수 있는 무인의 입에서 나온 말이 생뚱맞아서 한참 웃었다. 자신이 강하다 느꼈다면 그건 분명 그의 덕이었다. 지난 세월 동안 이리저리 흔들릴 줄만 알던 저를 단단히 잡고 받쳐 주며, 보듬어 준 존재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연은 백경화의 왼손 약지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분명 낮에까지만 해도 보이지 않던 것이 그 손에 자리하고 있는 것을 보았는데, 무엇이 두렵고 불안할까.

그를 그리 만들어 준 것은 단 한 번도 의심치 못할 정도로 연모의 감정을 퍼부어 준 백경화, 바로 그였다.

“네가 그리 만들고 있지 않아.”

그때도, 지금도.

백경화는 곧고 흔들림 없는 미소를 눈앞에 둔 채, 생각했다. 사람은, 몇 번이고 같은 일을 반복한다 하였다. 알면서도 피해 가지 못하고, 결국엔 그 수렁에 빠지고 만다고.

그렇다면, 같은 사람에게 몇 번씩 빠지는 것도 가능한 일일까.

─가능한 일이리라.

그렇지 않고서야 이 모든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백경화는 손을 들어 제 눈가를 가렸다. 왜 계속 눈이 가고, 신경 쓰였는지 이제는 알 것 같았다. 왜 저답지 않게 당황하고 헤매었는지,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동요하였는지. 인생의 절반이 통째로 사라진 혼란조차 그 앞에선 아무런 맥도 추지 못했는지, 알 것 같았다. 저에겐 없다고 그토록 부정하였던 감정에 너무나 쉽게 함락되었기 때문이다. 격정으로 가슴이 들썩이는 것을 참지 못하고, 그렇게 시인했다.

자신은, 첫눈에 사랑에 빠졌노라고.

같은 상대에게 또다시 속수무책으로 마음을 주었노라고.

그는 그렇게 첫 연정을 주었던 이에게, 다시 한번 제 첫 마음을 바쳤다.

* * *

백경화가 백가의 양자로 입적한 뒤 세 번째인가 네 번째 전선에 나섰을 때의 일이었다. 국경은 언제나 크고 작은 분쟁이 있는 곳이고, 백경화는 백가의 이름을 걸고 항상 최전선에서 제화국을 위해 싸웠다.

그날도 다름없는 날이었다. 아침부터 시작된 백병전은 오후가 훌쩍 넘어간 시간까지 이어졌다. 창과 칼이 오가고, 수많은 피가 흩뿌려지고서야 겨우 전선을 지켜 낸 병사들이 부상병과 시체들을 치우고 피죽으로 허기를 달래고 있을 때, 파발이 도착했다.

제화국에 새로운 왕이 즉위했다.

병석에 누워 오늘, 내일 하던 왕의 승하 후 보름 만의 일이었다. 기실 누가 왕이 되든 백경화는 관심이 없었다. 어차피 제 손으로 무너뜨릴 나라의 왕이 누가 되든 무슨 상관이랴. 하지만 피비린내 진동하는 전장에서 새 왕의 이름을 들은 백경화의 표정이 기이하게 물들었다.

이연, 그것이 있는지도 몰랐던 말단 후궁 소생인 새 왕의 이름이었다. 대비가 된 그 여인이, 스스로 낳은 적장자를 밀어내고 올려놓은 왕은 놀랍게도 백경화가 아는 자였다.

저를 어둠 속에서 건져 올렸던 그 아이가 왕이 된 것이다.

어미의 죽음 앞에 서글프게 울고 있던 아이를 떠올리자, 조금 가슴이 아픈 듯도 했다. 허수아비 왕이 될 것이란 건 안 봐도 훤했으나, 그래도 조금은 마음이 기꺼웠다. 왕이 되었다면 이리저리 치이지는 않겠지. 못해도 즐길 것 즐기고 하고픈 것 다 하며 살 수 있겠지. 그래서 그는 궁이 있는 방향으로 일제히 절을 올리는 병사들 사이에서 진심을 다해 무릎을 꿇고 경배했다.

* * *

백경화는 슬며시 눈을 찌르는 아침 햇살에 미간을 찌푸렸다. 언제 해가 저리 중천에 떴을까. 그럼에도 이 시각까지 깨지 않고 잠든 것이 신기했다. 꿈을 꾼 것 같긴 한데 잘 생각이 나지 않아서 한동안 눈뜬 상태로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던 그가 고개를 돌렸다. 으음, 낮은 신음과 함께 인기척을 느낀 탓이다. 백경화는 바로 지척에서 느껴지는 기척에 놀랐다가 그다음 품 안으로 파고드는 몸엔 잔뜩 굳고 말았다.

그렇게 한참 어색한 동작으로 굳어 제 품 안에 얼굴을 묻고 잠든 이연을 내려다보았다. 하나하나, 얼굴을 이리저리 뜯어보던 그의 입가에 서서히 미소가 떠올랐다. 이제야 무슨 꿈을 꿨는지 생각났다. 꿈속의 흔적과 조금 다르긴 하지만, 분명 그가 맞았다. 이연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어색하지만 조심스러운 손길로 넘겨 준 그의 입술이 달싹였다.

“전하.”

그 조용하고도 떨림 가득한 부름을 들은 이는, 아무도 없었다.

“너는 왜 혼인하지 않았느냐?”

“…….”

백경화와 함께 시전을 걷던 여선은 난데없이 날아온 질문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왜 혼인하지 않았냐고? 혼기가 지나도록 실컷 부려 먹은 이가 누군데 이제 와서. 그리고 얼마 전까지 혼인이라면 칠색 팔색 하던 이가 이리 은근하게 자랑하는 투로 말하면 배알이 꼴리지 않겠느냔 말이다. 현재 제 상황을 빗대어 본 여선의 입가에 삐딱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백경화와 이연의 곁에서 볼 꼴 못 볼 꼴 다 보았어도 한숨지을지언정 화는 내지 않았던 그의 속이 상한 것이다.

“흠. 너와 혼인하겠다 한 여인이 없었나 보지?”

그 막말에 결국 여선은 분노를 터트렸다. 현재 그의 가장 큰 지뢰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단연 이것이었다.

“없긴 왜 없습니까! 2년간 기다린 여인이 있습니다!”

“근데 왜 안 해?”

백경화는, 기억을 잃은 백경화는, 열여섯의 백경화는, 어떤 의미로 눈치가 없었다. 아니,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의 그는 더욱이 남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다. 하여, 그는 뒤를 따르던 강진의 눈짓에도 불구하고 볏짚에 불을 지펴 댔다.

“내가 해 보니 말이다. 음, 혼인이란 게 그리 나쁘지 않아. 그러니 너도 얼른 하거라.”

…혼인 싫다고 노발대발해 대며 이혼을 부르짖던 이는 어디의 누구였던가.

여선은 백경화의 말에 기가 막혀서 저도 모르게 코웃음 치고 말았다. 저라고 뭐, 안 하고 싶어서 안 하고 있겠는가. 상황만 된다면 지금이라도 당장 성대하게 혼인식 치르고 마음고생한 정인 마음을 달래 주고 싶었다. 하지만 혼인은 혼자 해? 그렇다고 둘만 해? 아니었다.

“…허락을 받아야 하지요.”

…그렇다.

여선만 낚아 올리면 다 될 줄 알았던 이향마저 놓친 부분이 있었으니, 바로 그녀 부모님의 허락이었다. 여선의 나이를 들은 이향의 부친은, 신분 차이고 재산이고 다 떠나서 그 본인과 몇 차이 나지 않는 것에 대로하며 ‘이 혼인 결사반대!’를 외치고 있는 것이다….

내 나이가 어때서…라고 말하기엔, 사실 너무 파렴치한 것이 사실이라 여선이 할 수 있는 것은 당장 가출할 기세인 이향을 달래고 어르며 그녀의 부친 마음을 돌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눈에 흙이 들어가도 결코 안 된다는 부친의 말에, 그 눈에 딸이 흙을 뿌리는 불효를 도저히 두고 볼 수만은 없었기에.

…그게 벌써 2년이었다.

“…너도 고생이, 많구나.”

“…….”

그런 걸로 측은해하지 말라고.

사실 그의 인생사 고생의 8할이 눈앞에 있는 존재로 인한 것이지만, 마음고생으로 치자면 이쪽이 더한 것도 사실이라 여선은 한숨을 내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다소 한심하게 보이는 그 꼬락서니를 조금쯤은 가엽게 여기면서도 백경화는 그리 큰 신경은 쓰지 않았다. 사실 그는 제 코가 석 자라, 남 연애사에 깊이 관여할 상태가 아니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목하 첫사랑의 열병에 시달리는 중이었다. 그 상대가 혼인하여 부부로 엮인 존재란 것이 퍽 우습기는 하였으나, 참으로 다행스럽기도 했다. 그가 그동안 그리 무시하고 괄시했던 연정이란 놈은 실로 굉장한 것이라서 그의 기분을 하루에도 수십 번 오르락내리락하며 광란케 만들었다.

감정을 깨닫고 시인한 이후로 어둡고 질척하던 그의 삶이 하루하루 달라졌다. 놀랍게도 세상이 아름다워 보였다. 햇빛에 비치는 먼지마저 반짝반짝 빛이 났고, 평소라면 치를 떨었을 연가가 그렇게 귀에 착착 달라붙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사람 마음먹기에 따라 이리도 쉽게 세상이 바뀔 수 있는지… 놀라운 일이었다.

그는 그렇게 첫사랑의 열병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는 중이었다.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속도로 이연에게 빠져들고 있었고, 연심은 나날이 깊어만 갔다.

그럴수록 깨닫는다.

이연이 그런 그를 받아 주는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라고.

만약, 이연이 저를 받아 주기 전이었다면─ 혹은 거부했다면 어땠을까. 조금의 여유도, 노련함도 없는 열여섯의 백경화는 아마 갖지 못해 초조해하고 분노하다가 끝내는 자멸했으리라. 제 더럽고 흉악한 본성을 세월의 흐름에 따라 숨길 줄 알게 된 뒤에야 이연에게 접근한 것은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지금도 봐라. 잠시 외출한 이연을 기다리지 못하고 찾아 나선 이 꼬락서니를.

그 생각에 백경화는 스스로를 비웃고 말았다.

그 웃음에 곁에서 걷던 이들이 흘깃 눈동자만 굴려 백경화를 살폈다. 비소지만 기분이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다 백경화의 시선이 한 곳을 향하자 그곳을 살핀 여선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강아지였다. 갓 태어난 그것들을 바구니에 넣고 팔고 있던 것을 바라보며 고민하는 백경화를 살피던 여선이 혀를 내둘렀다.

기억을 잃어도, 사람의 본질이란 변하지 않는 법이었다.

백경화는 이연에게 잘 보이고자 몸단장을 하고, 외모를 가꾸었다. 문제는 그의 기준이 무친왕 시절에 머물러 있어 치장이 제법 과하다는 것이었지만 이연이 어여뻐하니 백경화는 정도를 몰랐고, 그를 말릴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수순대로 백경화는 이연에게 선물 공세를 퍼부었다. 계기는 사소했다.

백경화의 침전 가까운 곳 복숭아나무에 꽃이 폈다. 계절을 잊고 핀 꽃이었다.

지난 며칠 봄 같은 날씨에 이르게 핀 그 꽃에서 백경화는 시선을 떼지 못했다. 붉은빛 도는 하얀 꽃망울이 누군가를 연상시켰기 때문이다.

…가져다주면, 좋아할까?

무심코 떠오른 생각에, 몸은 그보다도 빠르게 움직였다. 그리고 그의 생각대로 이연은, 작달막한 꽃가지를 선물받은 이연은 너무나 환하게 웃었다. 처음, 후궁으로 입궁한 백경화가 제 침전에 찾아와 건네었던 꽃이 떠올라서, 그립고도 애틋한 마음을 담아.

그 모습을 홀린 듯 멍한 낯으로 바라보던 백경화는 그때부터 온갖 좋은 것 진귀한 것 생기면 가장 먼저 이연에게 가져다주었다. 기억을 잃은 백경화는 기억을 잃기 전의 백경화와 하는 짓이 똑같았다.

잠시 강아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던 백경화가 돌연 고개를 내저었다. 저것이 잘 자라 주면 좋겠지만 혹 중간에 쥐약이라도 잘못 먹고 죽는다면 이연의 상심은 어마어마할 것이다. 그건 ‘또’ 지켜보기 힘든 일이 될 것이라 백경화는 고이 마음을 접었다.

‘그보다 이이는 도대체 어딜 나간 것일까.’

아침나절부터 보이지 않아 찾아보니, 몇 없는 하인이 아뢰길 누군가의 방문을 받고 호무와 함께 외출을 하였단다. 그 말을 전해 들은 여선은 대경할 수밖에 없었다. 이연이 누군가의 방문을 받은 것도 놀랍고, 그 방문자를 따라나선 것도 놀라웠지만 가장 놀라운 것은 여선이나 백경화를 거치지 않고 이연에게 방문자를 안내한 이가 그 집 안에 있었다는 점이다. 이는 안 그래도 사람 들이기를 꺼리는 백경화가 대로할 일인지라 여선은 조만간 대대적인 물갈이가 일어날 것이란 걸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었다.

이 시골 촌구석에 무슨 위험이야 있겠냐마는 백경화는 이연을 찾아 나섰다. 방 안에 홀로 두는 것조차 노심초사한 그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거기다 얼마 전엔 누각에서 떨어진 일도 있지 않았던가.

‘그런데 어쩌다 떨어진 것일까? 발이라도 헛디뎠나?’

평소 성정으로 보아 경솔한 행동은 하지 않았을 텐데 참으로 희한한 일이다. 모르긴 몰라도 이연은 절벽과 상극임이 분명했다. 이렇게 떨어져 그의 간담을 서늘케 한 일이 벌써 ‘두 번째’이지 않은가.

‘다음부턴 높은 곳엔 얼씬도 못 하게 해야지, 안 되겠어.’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연이 호무와 함께 나섰다는 것 정도였다. 하지만 이연이 동행으로 선택한 것이 제가 아니란 것에 울적한 마음이 드는 걸 보니, 정말로 저는 이연에게 미쳐 있음이 분명하다.

자신에게 실소하던 그의 시야로 어느 집에 둘린 금줄이 보였다. 사이사이 숯과 고추가 달린 걸 보니 아이가 태어났다는 뜻이다. 불쑥 백경화의 입이 열렸다.

“그러고 보니 이진 황녀가 아들을 낳았댔지.”

음? 순간 백경화는 제가 중얼거린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누가 아들을 낳았다고? 이진 황녀? 그 되바라진 황녀님? 제게 광견이란 별칭을 간 크게 지어 준 그 황녀님의 나이라면 아직 열을 못 넘었는데 무슨 아들을 낳았단 말인가. 어, 그런데 축하 선물로 혈통 좋은 망아지를 보내려 했던 것 같은 이 기억은 또 뭐지.

점점 머릿속이 한차례 폭우를 만난 것처럼 범람하며 뒤죽박죽 엉키고 시야가 빙빙 돌기 시작했다. 그 어지럼증에 백경화가 미간을 막 찌푸렸을 때였다.

“그만 돌아가시는 게 어떠십니까? 이러다 길이라도 엇갈리면 더 지체될 텐데요.”

마을을 한 바퀴 돈 여선이 제안했다. 객잔조차 두어 개가 다인 작은 마을이었다. 여행객조차 흔하지 않은 마을을 한 바퀴 도는 것엔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그리고 이런 곳에서 이연이 갈 곳이란 한정적이고, 이때까지도 만나지 못했다는 것은 길이 엇갈렸다고 보는 것이 옳았다.

겨우 현기증을 가라앉힌 백경화가 여선의 말에 동조하며 막 고개를 끄덕이려던 찰나였다. 엇, 옆에서 걷고 있던 강진에게서 작은 탄성이 터졌다. 꽤 당혹스러운 소리였다.

그에 시선을 돌려 강진이 바라보고 있는 곳을 확인한 백경화의 얼굴에 기쁨이 떠올랐다가 서서히 표정이 사라졌다.

작은 돌다리 밑, 그곳에 이연이 있었다. 분명 그 하나만 보았다면 백경화의 표정이 바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놀랍게도 이연은 혼자가 아니었다.

한 올의 흐트러짐 없이 곱게 땋은 머리를 늘어트린 뒤태가 곧고 우아했다. 이 마을에선 찾아보기 힘든 기품이었다. 암만 못해도 귀한 집 규수의 모습이었고, 그를 증명하듯 여인의 몇 발자국 뒤로는 시비들로 보이는 여인들이 서넛 서 있었다.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주변에 여인을 호위하는 자들의 기척도 여럿 느껴졌다. 그리고 이연의 뒤로는 호무가 몇 발자국 떨어진 채 호위하고 있는 중이었다.

차갑게 식은 머리로도 주변을 훑은 백경화가 입을 열었다.

“…저 여인은 누구지?”

고저 없는 백경화의 물음에 여선과 강진은 아무 답도 할 수 없었다. 그들이라고 저 뒤태의 주인이 누군지 알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백경화는 당황을 숨기지 못하는 두 사람을 흘깃 확인한 뒤 다시 이연을 바라보았다. 이연은 그가 기억하는 한도에서 가장 서글퍼 보이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다른 이가 본다면 큰 차이를 느끼지 못할 무표정이지만 백경화의 눈에는 훤히 보였다. 눈앞의 여인이 안타깝고 애처로워 어쩔 줄 몰라 하는 눈빛이다. 그건 결코 하등 관계없는 타인을 바라보는 눈이랄 수가 없었다.

어느 누가 봐도 밀회 장면이었다.

욱신, 백경화의 심장이 고통을 호소하며 쪼그라들었다. 손발이 떨리고 정신이 아득해지는 듯도 했다. 그것은 마치,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를 수도 없이 괴롭히던 새까만 절망과도 닮아서- 백경화의 숨이 멈춘 순간이었다.

이연을 향해 조금씩 언성을 높이던 여인이 손을 들고 이연의 뺨을 후려쳤다.

“?!!”

흐어어억! 놀라다 못해 경악을 담은 탄성이 누구의 입에서인지 모르게 동시다발적으로 튀어나왔다. 그러나 여인은 그것으로 멈추지 않았다. 뺨을 후려친 손으로 이연의 가슴팍을 밀치며 연신 노성을 터트렸다. 그리고 호무는 어째선지 아무런 제지도 하지 않고 그 뒤에서 발만 둥둥 굴리고 있었다. 맞은 이연보다도 새하얗게 질린 낯이 퍽 볼만했다.

그 모든 상황을 넋이 나가 바라보던 여선과 강진의 고개가 느리게 백경화를 향해 돌아갔다. …그곳엔, 악귀의 형상을 한 백경화가 서 있었다. 차갑게 식은 얼굴에 표정이라곤 없고, 검은 눈에선 분노의 불꽃이 일렁였다.

다시 한번 여인의 손이 이연의 뺨을 향할 때, 백경화는 더 이상 참지 못했다.

이연이 제게 전언을 전해 준 이를 따라나선 것은, 애초에 이 일이 그가 하인을 통해 은밀히 부탁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가 누각에서 추락한 날. 자신은 물에 빠져 앓아눕고, 그를 구하던 백경화가 심하게 다치고 기억을 잃어 얼마간 잊고 있었던 존재.

그 존재를 상기했을 땐,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만나야만 했다. 여선에게 부탁해 볼까 하였으나 그리하면 백경화의 귀에도 들어갈 것이 자명하여 그는 하인에게 물었다. 혹시 최근 마을에 들어온 무리가 있느냐고. 그리고 얼마간의 시간과 돈을 들여 드디어 그 존재와 접선할 수 있었다.

한 차례 눈을 감았다 뜬 이연은 제 앞에 서 있는 이를 조금은 아연한 낯으로 바라보아야만 했다. 마지막으로 그녀를 보았을 때가 언제였던가. 그때의 일을 상기한 이연은 순간적인 죄책감을 숨기지 못하고 얼굴을 흐려야만 했다.

그의 입을 비집고 잊었던 존재가 흘러나왔다.

“윤화공주.”

“신수가 너무 훤하여 착각하였나 싶었건만, 그건 아니로군요. 참으로 잘 지내셨나 봅니다.”

저와는 달리, 참 잘도 지냈나 보다.

윤화공주는 비틀리는 입매를 어찌하지 못하고 눈앞에 서 있는 사내, 이연을 바라보았다. 정말로 많이 변했다. 정말로 이 존재가 매일 숨죽이고 죽음 앞에 떨던 그 나약해 빠진 인사가 맞을까. 처음엔 잘못 보았다 생각했다.

하지만, 그 곁엔 결코 잘못 볼 수 없는 남자가 붙어 있었다. 세월이 무색할 정도로 여전히 정답고 다정한 낯으로 이연을 살뜰히 살피는 백경화를 본 순간, 놀라움과 경악은 순식간에 증오심으로 변했다. 저는 지옥 불에 집어 던져 놓고 어찌 저들은 저토록 잘 살 수 있단 말인가. 어찌 그리 행복하게 웃을 수 있어!

“죽었다 하였는데 이리 버젓이 제 눈앞에 서 계시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지 않습니까.”

하여 밀어 보았지 뭐예요. 죽은 자가 살아 있으니, 죽여 버려야 마땅하였기에.

누각에 홀로 서 있는 이연을 보았을 때 그녀는 충동을 참지 못했고, 참고 싶지도 않았다. 정신을 차렸을 때 그녀에게 떠밀린 이연은 누각 아래로 추락하는 중이었다. 그 와중에 이연과 시선이 마주친 그녀는 희열인지 두려움인지 모를 감정으로 몸을 떨어야만 했다. 덜덜 떨리는 손을 다잡고 지켜보고 있던 그녀가 마지막으로 보았던 장면은 떨어지는 이연을 향해 몸을 날리던 백경화였다.

“왜 이다지도 목숨 줄이 질기십니까. 가장 먼저 죽을 줄 알았는데…… 결국 다 죽고 당신과 저만 살아남았군요.”

“…….”

이연은 폐부를 찌르는 윤화공주의 말을 묵묵히 받아들였다. 이 여인이 어찌하여 이 한적한 마을에 와 있는지, 그 이유를 들었을 때 미안하고도 죄스러워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세요. 저를 이 꼴로 만든 것은 당신들이지 않습니까.”

이리 저를 비참하게 내몬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당신들이다. 그녀의 삶을 짓밟고 기만과 희롱 속에 살게 만든 것 또한.

현재 제화국, 아니 연화국은 바람 앞 등불 신세였다. 언제 짓밟히고 꺼져 어둠 속으로 사라질지 모르는. 이연이 죽음을 위장하여 사라진 후, 있는지도 몰랐던 종친들이 제 피의 정당성을 내세우며 왕위를 차지하고자 아귀다툼을 벌였다. 하루가 멀다 하고 피바람을 일으키니 어찌 나라가 멀쩡할 수 있겠는가. 성황제국에서도 그 틈을 파고들어 간섭을 시작하니 제왕학 따위 배우지 못한 그녀라도 알 수 있었다. 곧 연화국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것이다.

그것이 누구로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르지 않는다.

“당신 때문에!!”

그녀는 비명을 내지르듯 소리쳤다.

“너 하나 살고자…! 모두 죽이고, 나라도 팔아먹었지 않아!!”

그녀는 격정을 참지 못하고 저를 안타까이 바라보는 이연을 향해 손을 휘둘렀다. 이연은 피하지 않았다. …피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그녀의 분노도, 질책도 모두 정당한 것이기에.

“매국노! 네 목숨 하나가 무어 그리 값어치 있다고 그리 싹 다 죽이고 혼자 살아 있단 말이냐…!”

윤화공주는 이를 사리물고 이연의 가슴을 마구잡이로 때려 댔다. 그렇게 해서라도 제 울분을 풀고자 하였지만, 묵묵히 제 폭언을 감당하는 이연을 바라보니 더욱 제 처지가 실감 났다.

그녀는, 팔려 가는 중이었다.

왕위에 눈이 먼 종친들의 눈에, 선대 왕의 나이 찬 누이는 없느니만 못한 존재였다. 그녀는 그렇게 궁에 자리 잡고 있는 것조차 눈엣가시 같은, 처치 곤란한 천덕꾸러기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들은 그 골칫덩어리를 파난국 늙은 왕의 후궁 자리로 내몰았다. 역풍을 피해 간 명망 있는 집안에선 그녀를 감당하기 어려워하고, 타국에선 서서히 패망의 기운이 감도는 일국의 공주를 데려가길 꺼렸다. 그나마 평생 주색을 밝히던 파난국의 왕만이 후궁으로 받아들이겠다 답해 왔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종친들은 지참금 두둑하게 받아 챙길 요량으로, 미색이 뛰어나다는 소문을 듣고 평소 그녀를 탐내던 늙은이에게 윤화공주를 팔아넘긴 것이다.

그녀는 그렇게 제 나라, 제집에서 쫓겨나다시피 하며 혼삿길에 올랐다. 고작 열서넛의 궁녀와 서넛의 호위만을 단 채로.

서럽고 비참한 길이었다. 허나 더 비참한 일은 파난국의 변두리, 이 작은 마을에 도착하고서 일어났다.

마중이 오기로 하였건만, 근 한 달이 다 되도록 아무도 오지 않았던 것이다. 마치 그녀의 존재를 잊기라도 한 것처럼.

처음엔 좋았다. 이대로 오지 않으면 늙은 왕의 후궁 따위 되지 않고, 제 나라로 돌아갈 수 있을 줄 알고.

착각이었다.

종친들은 윤화공주가 돌아오길 원하지 않았다. 받은 지참금을 돌려줘야 할까 싶어, 이미 파난국으로 시집을 간 몸이니 더는 연화국의 사람이 아니라 하였다.

망연한 낯으로 배신감과 비참함에 치를 떨던 중, 유일하게 그녀를 원했던 파난국의 늙은 왕이 노환으로 죽었다. 이제 파난국에서 그녀를 맞이하러 올지조차 알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만 것이다. 혹 맞이하러 온다 한들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지아비를 잃고, 뒷배조차 없는 그녀는 타국의 후궁 뒷방에 앉아 평생 독수공방하며 모두에게 잊힌 채 홀로 쓸쓸히 죽어 나가겠지. 그렇다고 제 나라로 돌아갈 수도 없는 처지이니 미래가 참으로 각박했다.

참담한 현실 속에 우연히 본 이연과 백경화의 모습은, 그 안온하고 행복한 모습은 그녀의 증오심에 불을 지피기엔 충분했다.

“그냥 죽어 버리지…!”

그냥 너 하나만 사라졌다면, 이 모든 게 이렇게까지 되지 않았을 텐데.

저가 이토록이나 비참해지는 일도 없었을 텐데…!

“너도, 백경화… 그놈도 다! 그냥 죽어 버리지…!”

“공주.”

이연이 반응한 것은 그때였다. 묵묵히 그녀의 모든 원망과 질책을 감내하던 이연이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그 모든 감정이 당연하듯이, 백경화의 기나긴 고통과 절망을 안다면 어찌 그를 탓할 수 있을까.

“그대가 날 원망하는 것이 당연하듯이, 그이가 한 모든 행동도 정당한 것이었소. 허니 그이를 탓하는 것은 그만두시오.”

“…!”

윤화공주는 이연의 말에 이를 사리물고 다시 손을 치켜들었다. 그러나 그 손은 휘둘러지기 전 누군가에 의해 막히고 말았다.

“이 어여쁜 손이 잘리고 싶지 않다면 간수를 잘하는 것이 좋을 텐데.”

“!!”

뇌리에 박힐 정도의 차갑고 냉혹한 목소리였다. 놀라 고개를 들자 보이는 것은 그녀의 손을 잡고 있는 백경화였다. 언제 다가왔는지도 몰랐던 공주의 호위들이 허겁지겁 공주의 앞을 막아섰으나 백경화를 막아서기엔 역부족이었다. 윤화공주를 내려다보는 백경화의 얼굴에 잔학한 미소가 맺힌 찰나.

이연이 그 앞을 막아섰다.

“경화야…!”

“!”

다급함이 서린 그 부름 하나로 몸이 묶인 듯 백경화는 움직이지 못했다. 그도 모자라 이연은 몇 번이고 고개를 내저었다. 안 된다. 자칫 잘못했다간 겨우 잠들어 있는 백경화의 죄책감을 건드리고 말 것이다.

백경화의 감정이 비치지 않는 눈이 제 앞을 막아선 이연을 한 차례 훑었다. 그중 유난히 그의 시선을 오랫동안 잡아 끈 것은 붉게 손자국이 남은 이연의 뺨이었다. 꿈틀, 표정 없던 백경화의 표정에 사납고 흉포한 기운이 서리기 시작했다. 허나 백경화는 이연의 단호한 표정에 심호흡하며 물러서는 것을 택했다.

백경화의 아름답지만 사나운 얼굴을 굳은 듯 바라보고 있던 윤화공주는 누구보다 똑똑히 그 표정의 변화를 목도했다. 당장 그녀의 손목을 부러뜨릴 듯했던 악력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유순하고 말 잘 듣는 개처럼 변한 백경화가 순순히 물러섰다. 그 모습에 새삼 서러움이 밀려들었다.

듣자 하니 백경화는, 한때 호감을 갖기도 하였던 저 사내는 그녀와 어미가 같은 오라버니라 하였다. 그런데도 저 남자는 제 어미를 사지로 내몰고, 저는 신경 한 톨 쓰지 않고 오로지 이연만을 위했다.

울컥, 목구멍이 따갑고 눈가가 뜨거워졌다. 하지만 그녀는 입술을 깨물고 치마에 주름이 질 때까지 다잡으며 눈물을 참아 냈다. 그녀는 떠밀리듯 연화국을 떠났을 때도, 파난국에서도 연화국에서도 그녀를 내몰 때도 울지 않았다. 그런데 다른 누구도 아니고 이들 앞에서 어찌 눈물을 보일 수 있겠는가.

그 고집스러운 얼굴을 바라보며 이연은 문득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다 이리되었나. 생각해 보면 지금 이 서글프고 한스러운 상황에 그들의 잘못이 있긴 한 것일까. 이연은 한 번 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대의 말이 옳아. 나는, 나 살고자 그리하였음이야.”

내 일신의 안전과 바람을 위하여… 어찌 될지 훤히 알면서도 그리 모든 것 내다 버리고 돌아섰다. 이는 그의 죄악이오, 명백한 그의 죄업이 될 것이다. 왕이 나라를, 백민을 버리고 돌아섰으니 이 얼마나 큰 죄인가. 그것이 실상 허수아비 왕이라 하나 나라를 팔고 배반한 것은 누구도 부정치 못할 사실이다. 이로 인하여 내세에 어떤 참혹하고 가혹한 응보를 받더라도 저는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그 덕에 백경화와 여생을 보낼 수 있다 하면 저는 몇 번이고 같은 일을 반복할 것이다.

“허니 거기에 휩쓸린 그대의 분노는 정당하고, 증오 또한 당연한 일이라오.”

하지만 모두는 알고 있다.

정말 나라를 망친 것이 이연, 그 하나일까.

근본부터, 그 뿌리부터 나라를 망친 것이 진정 누군지 모르지 않는다. 어차피 속까지 문드러진 제화국은 이연, 그가 아니었더라도 얼마 가지 못했을 것이다. 이는 말하고 있는 이연도, 듣고 있는 윤화공주도, 나아가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연은 안 그래도 벼랑 끝까지 내몰린 안타깝고 애처로운 이를 향하여 굳이 입 밖으로 그 말을 내뱉진 않았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바들바들, 여전히 고집스러운 얼굴이지만 윤화공주의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리기 시작했다. 새하얗게 질린 안색이 보기 안쓰러울 정도였다.

그를 바라보며 이연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누이.”

“…!”

윤화공주는 이연의 입에서 흘러나온 그 말에 무언가 깨달은 것처럼 흠칫 한 차례 몸을 떨었다. 그것은 이연에게서 처음 들어 보는 다정한 목소리였다. 아니, 삭막하고 각박한 그녀의 인생에서 처음 받아 보는 염려였고, 참된 온정(溫情)이었다.

“누이, 나는 누이가 옛적의 나 같은 삶을 살길 원하지 않아.”

죽느니만 못한, 그 모질고 팍팍한 삶을 살길 바라지 않는다. 그것이 얼마나 사람을 피 말리게 하는지 모르지 않기 때문이다.

“나처럼 아무나 휘두르게 두지 마시오. …포기하지 말아.”

그때의 그는 벗어나는 걸 포기했다. 저를 짓누르는 존재가 두렵고 무서워서, 그리하였다. 그럼에도 죽는 것은 두려워서 어떻게든 살려고 아등바등하였다. 그리하여 결국, 백경화를 만났다.

“이제 누이도 누이의 삶을 사시오.”

누구에 의해, 필요에 따라 주어지고 버려지는 그런 삶 말고.

“그리하면 언젠가 누이 또한 만날지도 모르지.”

죽음의 공포마저, 가장 우선시했던 제 목숨마저 하찮게 느끼게 만들어 주는 찬란한 존재를 말이다.

하! 묵묵히 이연의 말을 듣던 윤화공주의 입술이 비틀렸다.

“지금 나보고 도망이라도 하라는 말이십니까?”

“…….”

“그렇다면 어디로 가오리까? 도망한 죄인의 몸으로 어찌 살지?”

아서라, 일없다.

윤화공주는 누구보다 저를 알았다. 평범한 필부(匹婦)로 만족할 리 없었고, 주어진 모든 것을 내려놓고 살아갈 자신은 더욱 없었다. 도망하여 목숨만 연명하며 사는 바에 차라리 죽는 게 나았다.

누이… 이연의 입에서 안타까운 목소리가 흘러나오기 전, 백경화가 입을 열었다.

“내 비록 지금은 촌부의 모습이나, 너 하나 숨길 능력 없진 않다.”

“!”

정 없고 날카로우나, 무엇보다 든든한 말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제안에 윤화공주의 두 눈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왜, 왜 이제 와서… 저는 그들의 안중에도 없던 희미한 존재가 아니었던가.

말 없는 그녀에게서 혼란을 읽기라도 했는지 백경화가 무심한 낯으로 덧붙였다.

“내가 그대를 살려 둔 것은, 그대에겐 직접적인 죄가 없기 때문이지 그 외에는 아무런 뜻도 없다.”

그렇다고 이리저리 치이며 남은 평생 체념과 좌절 속에 살길 바란 적도 없었다.

‘누이’. 이연의 입을 통해 흘러나온 그 낯선 호칭은 분명, 백경화에게도 해당하는 말이었다. 관심에서 멀리 밀려나 있던 존재였지만, 부러 절망으로 밀어 넣고 외면할 정도로 미운 존재도 아니었다.

“원하는 바가 있다면 말해 보아라.”

“…나는….”

백경화의 말에 윤화공주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곳에 있는 모두가 그녀를 지켜보았다. 그건 이연 또한 마찬가지였다. 백경화의 말에, 그 안에 자리한 어떤 것을 깨달은 이연의 눈이 동요를 숨기지 못하고 흔들리기 시작했다. 잠시 무언가를 확인하듯 백경화의 얼굴을 살피던 이연의 눈에 서서히 기쁨이 떠올랐을 때.

흔들리던 여인의 표정이 곧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나는, 일국의 공주이니 그 사명을 다할 것이외다. 당신들처럼 도망하지 않아.”

이연은 백경화의 제안을 거절하는 그녀를 안타까이 바라보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고집이라 치부하기엔 그들을 바라보는 윤화공주의 두 눈엔 흔들림이 없었다. 이후,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공주로서 그녀가 감당하겠다는 뜻이다. 그것이 그녀가 선택한 삶이었다. 그리고 이연에게 그 선택을 포기하게 만들 권리가 있을 리가 없다. 어쩌면 그녀에겐 이연의 걱정 따윈 처음부터 필요 없었던 것인지도 몰랐다.

“나는 내 어머니를, 나의 나라를 잃게 만든 그대들을 평생 원망할 것이고 미워할 것입니다. 그러니 어쭙잖은 동정도, 호의도 필요치 않아요.”

그리고 그녀의 의무를 지키며 살아갈 것이다. 후에 오늘날의 선택을 후회하게 될 날이 올지도 모르겠지만, 누구도 그녀를 비난할 자격이 없도록.

기실 그녀라고 사리사욕을 위하여 친아들의 목도 치는 대비가 두렵지 않았을 리가 없다. 금침을 뒤집어쓰고 펑펑 울며 어미의 정을 포기하였던 그 밤을 어찌 잊을까. 비정하고 잔혹하던 어미는 제가 저지른 일에 대해 벌을 받은 것이다. 그것을 모르지 않는다. 그런 어미와 가장 닮은 것이 저라…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그리 생각하니 모든 것이 덧없게 느껴졌다. 무엇을 얻고자 이리 아등바등하고 있는지 그 연유를 알지 못하게 되어 버렸다. 발악하며 울부짖더라도 현실은 달라지지 않는데. 사실은 시궁창에 빠질 제 앞날이 두려워 원망할 존재가 필요했던 건지도 몰랐다. 혹은 서로를 찾은 그들이 너무나 부러워 투기하였거나. 저에게는 결코 없을 상대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우리, 다시는 보지 말아요.”

처음부터 그리했어야 했다. 이곳에서 다시 만났을 때 애초에 그냥 스치고 지나갔어야 옳았다. 하지만 이 또한 번뇌를 내려놓았기에 가능한 생각이다. 그래서 윤화공주는 지금, 이곳에서 연을 끊기로 했다.

이연은 냉정하다시피 자르고 돌아서는 윤화공주의 뒷모습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그건 옆에 서 있는 백경화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리 헤어지면 앞으로 평생 볼 일 없을지도 모를 이다. 저보다도 심정 복잡다단할지도 모를 그를 위해, 이연은 속으로 빌고 또 빌었다.

부디 그녀 또한 행복하기를. 가장 불행했던 그들이 행복해졌으니, 그들의 누이 또한 그러하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그로부터 삼 일 뒤, 파난국에서 윤화공주를 맞이하러 사신들이 도착했다. 직접 그녀를 데려가기 위해 걸음 한 것은 새로 즉위한 왕의 다섯째 동생이자 동복아우인 의효(義曉)대군이었다. 스물둘의 이 번듯한 사내는 문무가 출중한 데다가 평소 버드나무같이 유한 성정으로도 유명했다. 유일하게 혼인하지 않았던 그가 왕에게 청하여 선왕의 후궁이 돼야 했었을 윤화공주를 군부인(郡夫人)으로 맞이한 것은 얼마 후의 일이다.

훗날 파난국을 여러 차례 떠들썩하게 만들, 금슬 좋은 부부의 탄생이었다.

“괜찮으십니까?”

윤화공주가 그리 떠난 뒤, 한동안 그녀의 뒷모습을 복잡다단한 표정으로 지켜보던 백경화가 제일 먼저 물은 것은 그것이었다. 이연의 뺨에 남은 손자국에 차마 손조차 대지 못하고 안타까운 표정으로 신음했다. 항시 금이야 옥이야 바라만 보아도 애달픈 이의 얼굴에 이토록이나 큰 흉을 달아 놓다니… 또한 어찌하여 이연이 누각에서 떨어졌는지 알고 나니 뒤늦게 살심이 끓었다. 빠득, 백경화의 입에서 험악한 소리가 들린 것도 동시였다.

“저이가 그리한 것입니까?”

“이미 지나간 일이다. 오죽하면 그리하였겠어….”

백경화가 무엇을 물었는지 어렵지 않게 유추한 이연이 백경화를 달래듯 말했다. 어찌 보면 그들이 감내해야 할 업보이니 이 정도로 넘어간 것을 다행이라 여겨야 하는 건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녀의 심정을 이해 못 할 법도 없는지라 이연이 백경화를 향해 덧붙였다.

“허니 너도 이 일은 그만 마음 접어라, 응?”

“…….”

백경화는 이연의 말에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 맹한 게 또 애먼 데 마음 쓰고 있구나. 그런데 그것이 제 과업으로 인해 벌어진 일이니 제 죄가 제일 큼을 알기에 백경화는 속이 진탕 상하고 말았다.

그 절절하고 안타까운 표정을 바라보며 이연이 미소 지었다.

“괘념치 말아라.”

“어찌 괘념치 않을 수 있겠습니까?”

토닥토닥, 백경화는 제 등을 토닥이며 위안을 건네는 이연의 모습에 심호흡하듯 한 차례 눈을 감았다 떴다. 그렇게 씁쓸하고 쓴 속내를 애써 다독였다. 하지만 충고는 잊지 않았다.

“함부로 다른 이들을 자극하시지 마옵소서. 특히 저 없이 홀로 계실 때에는 더욱. …위험하옵니다.”

그것이 여인이든 아이이든, 가슴속에 칼날을 품은 존재는 위험하다. 겪어 보지 않았던가.

백경화가 하고자 하는 말을 어렵지 않게 알아들은 이연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여 알겠노라 답했다. 백경화가 구해 주지 않았다면, 지금쯤 저는 산 사람이 아닐지도 모를 일이다. 대신 백경화가 기억을 잃었던 것을 떠올린 이연이 조금 생각에 잠겼다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뜻 모를 시선에 의아함을 느낀 백경화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던 이연이 물었다.

“그보다 여긴 어찌 알고 왔느냐?”

“…산책 중이었사옵니다.”

“무슨 산책을 이리 멀리까지 왔어.”

백경화의 대답에 이연은 같잖은 말 집어치우란 타박 대신 소리 없이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산책 끝났으면 함께 돌아갈까?”

“광영이옵니다.”

이연은 잽싸게 제 손을 마주 잡는 크고 넉넉한 손에 또 웃음을 흘렸다. 낯익고도 그리운 반응에 심장이 저릿한 불씨를 틔웠다. 그렇게 얼마간 손을 마주 잡고 걸었을까. 도란도란 정답게 어깨를 마주하고 걸으며 이야기의 꽃을 피우던 그들의 모습이 원앙과도 같았다.

어느새 뉘엿뉘엿 넘어간 석양에 그들의 그림자가 길게 비쳤을 때였다.

“경화야.”

차분한 부름에 백경화가 시선을 마주한다. 이연은 그 시선을 받으며 넌지시 물었다.

“오늘 밤 네 방에 찾아가도 되느냐?”

“…!”

뜻이 명백한 유혹이었다. 놀라 홉떠진 눈으로 이연을 바라보던 백경화가 곧, 느릿하지만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연의 말이 뜻하는 바를 어렵지 않게 짐작하였는지 은은하게 달아오른 귓불이 마치 새색시 같았다.

이연은 그를 무언가 가늠하듯 바라보다 떨리는 한숨을 삼키며 동요를 감췄다. 백경화는 끝까지 윤화공주가 누군지 묻지 않았다. 평소 그의 질투심을 생각하자면, 이연이 낯모르는 여인과 붙어 있는데 그에 대해 가타부타 아무 말도 없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에 백경화의 손을 잡고 있는 이연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해가 지고 밤이 찾아왔을 때, 백경화는 임시로 머물고 있는 제 방 안을 빙글빙글 돌며 번민 중이었다. 그 초조하고 번잡한 낯이 정말로 첫날밤을 맞이한 것처럼 긴장한 모습이라고 착각할 수 있겠으나, 그럴 리가 없었다. 그의 초조는 다른 것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역시 말해야겠지.”

사실 모든 기억이 다 돌아왔다고.

정확히 언제인지는 알 수 없었다. 본디 기억은 조금씩, 시나브로 돌아오고 있었으니. 그리고 오늘 윤화공주의 얼굴을 보고 그녀의 정체를 자연스레 떠올렸을 때, 그는 제 기억이 거의 온전하게 돌아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뒤죽박죽 엉켜 있던 실타래가 어느새 반듯하게 풀려 있었던 것이다.

다소 힘 빠지고 허망한 결과였지만, 어찌 됐든 큰 변고 없이 일이 마무리된 것도 사실이라 마음이 놓였다. 단지 걱정되는 것이 있다면 이연의 반응이었다.

“…지금 모습을 더 어여뻐 여기는 것 같았는데.”

열여섯의 백경화는 감정을 숨기지도 못하고 어수룩한 모습으로 이연에게 들이대기 바빴다. 그리고 이연은 그런 백경화를 아주, 무척, 매우 귀애했다. 정신 상태만이지만 저보다 연하의 정인이 사랑스러워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백경화는 그 애정 충만한 눈빛을 포기하기가 다소, 아니 매우 아쉬웠다. 이연이 주는 애정은 받아도 받아도 부족하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래도 말해야겠지만.”

이 이상 걱정을 끼치는 것도 못 할 짓이지. 쩝,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면서도 백경화는 그리 마음을 먹었다.

그때 약조한 대로 이연이 찾아왔다. 막 씻었는지 하얀 피부가 물기를 머금고 촉촉했다. 백경화가 거기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자, 등 뒤로 문을 닫은 이연이 웃으며 다가왔다. 그 모습을 홀린 듯 바라보던 백경화가 흠칫, 정신을 차리듯 한 차례 몸을 떨었다. 그 전에 분명 말할 것이 있다는 것을 겨우 상기한 탓이다.

“그, 말씀드릴 것이 있…….”

“걱정 말아라, 경화야.”

무, 무슨 걱정?

백경화는 간만에 찾아온 야릇한 분위기에 몸이 먼저 반응하는 것을 참으며 그리 물었다. 그런 그의 어깨를 이연이 느릿하게 쓸었다. 찌르르, 이연의 손이 닿은 부분부터 전류가 흐르는 것을 느낀 백경화의 단단한 등허리가 잘게 경련했다.

“네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고 있다. 아무것도 모를 테니… 오늘 밤은 내게 맡기렴.”

“!”

…조금만 더 있다가 말하자.

흡, 급히 숨을 삼킨 백경화는 언제 다시 올지 모를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백경화는 제 위에 걸터앉아 느릿하게 허리를 움직이는 이연을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쯔걱쯔걱, 이연이 허리를 움직일 때마다 맞물린 접합부에서 음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잔뜩 젖은 내부가 백경화의 것을 천천히 머금었다 뱉기를 수차례. 움찔움찔, 쾌락에 젖은 하얀 몸이 백경화의 위에서 잘게 경련했다.

백경화는 고개를 숙여 아까부터 유혹적이었던 붉은 유실을 입 안에 머금었다. 손으로 가슴을 그러쥐고 혀끝으로 일어선 돌기를 덧그렸다. 침으로 젖어 번들거리는 그것에 입 맞추며 짧게 신음하는 이연을 다잡고 허리를 튕겼다. 하악! 정확히 느끼는 부분을 찔린 이연이 높은 신음을 터트리며 백경화의 목을 바투 끌어안았다.

“내게, 하아… 가르쳐 준다고, 하지 않았어?”

“흣. 흐으…!”

“응? 연아, 그러지 않았니?”

이연은 저를 자극하는 백경화의 말에 파묻고 있던 얼굴을 들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타박하듯 한 차례 백경화의 뺨을 살풋 물었다 놓은 이연이 다시 허리를 놀리기 시작했다. 잔뜩 발기한 것을 머금고 연신 방아를 찧어 댔다. 찌걱찌걱, 젖은 소리가 울릴 때마다 발끝이 저릿저릿했다.

이연은 백경화의 어깨를 다잡으며 연신 허리를 찧고, 문대고 흔들었다. 둥글게 허리를 돌리며 천천히 넣다 빼기를 반복하자 절로 입술이 벌어지고 신음이 튀었다. 백경화의 것이 잔뜩 젖은 몸속 깊이 꽂혔다 나갈 때마다 눈앞에 번개가 번쩍번쩍했다. 미칠 것 같았다.

미칠 것 같은 건 백경화도 마찬가지였다. 오랜만의 방사였다. 그것도 사모하는 임께서 주도하는. 웬만해선 오기 힘든 기회인 것을 알기에 백경화는 최대한 참을 셈이었다.

이연이 원하는 대로 두고 보려 하였으나…. 몽롱한 낯으로 제 어깨를 잡고 허리를 움직이는 이연의 모습이 너무나 관능적이라 이성이 조만간 날아갈 것 같았다. 그리고 그것은 곧 현실이 되었다.

이연이 그의 손을 끌어 액을 찔끔찔끔 토해 내는 자신의 성기를 다잡게 했을 때. 누구의 것인지 모를 체액으로 잔뜩 젖은 허벅지가 야릇하게 떨리는 것을 목도했을 때. 그는 이성 따위 개나 줘 버리기로 했다.

“연아…!”

잔뜩 갈라지고 쉬어 빠진 목소리로 이연을 부른 백경화가 제 손안에 찬 것을 쥐고 흔들었다. 젖은 선단을 손으로 잡고 잘게 쳐올리다가 처음부터 끝까지 느릿하게 훑었다. 파르르, 강렬한 감각을 참지 못하고 이연의 허리가 경련했다. 하악! 목소리도 한층 높아졌다.

백경화는 그런 이연의 입술을 삼키듯 머금었다. 입술을 벌리고 혀를 밀어 넣었다. 잔뜩 움츠린 혀를 찾아 얽고 부비면서도 손을 멈추지 않았다. 빠르게 치대며 이연을 끝없이 자극했다. 그럴수록 백경화의 것을 머금고 있던 내벽이 잔뜩 쪼그라들며 그를 빨아들였다. 마침내 흐으으으, 길게 울며 이연이 토정했을 때, 백경화는 제 위에 앉아 있던 나신을 다잡고 뒤로 눕혔다. 그 반동으로 살짝 들린 새하얀 엉덩이를 벌리듯 잡고는 무릎을 세워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액으로 젖어 번들거리는 검붉은 성기가 난폭하게 이연의 밀부를 드나들었다.

벌어질 대로 벌어져 닫힐 새도 없이 흉흉한 것을 머금는 구멍이 아찔할 정도로 야했다. 쩍쩍, 틈 없이 맞닿은 하체에서 백경화가 움직일 때마다 젖은 소리가 울렸다. 내부를 짓이기다시피 진퇴를 반복하며 자극점을 찔러 대니 파정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이연이 쾌락을 이기지 못하고 몸부림쳤다.

“아, 아! 이, 이상해…! 그, 그만…!”

“하아… 흐윽, 연아!”

백경화는 이성을 놓았다. 몸부림치는 몸을 다잡고 연신 허리를 쳐올렸다. 제 분신을 그 뜨겁고 좁은 곳에 최대한 깊숙이 묻고자 푹푹 찍어 올렸다.

이연은 단단한 것에 사정없이 꿰뚫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몸이 붕붕 뜨는 기분이었다. 막고 있던 둑이 터지듯, 방금 파정한 이연의 성기에서 물이 줄줄 흘렀다. 서다 만 것이 백경화의 거친 몸짓에 따라 흔들리며 사방으로 물을 흩뿌렸다.

아아… 아… 반쯤 넋이 나간 얼굴로 이연은 백경화가 주는 쾌락에 몸을 벌벌 떨었다. 그런데도 백경화는 멈추지 않았다. 사나운 얼굴로 백경화는 연신 신음을 흘리는 이연의 입술을 빨아 먹으며 성기를 박아 넣었다. 그가 찔러 올릴 때마다 내벽이 물로 된 것처럼 출렁였다. 움찔움찔 경련하는 구멍 사이로 제 성기를 한껏 박아 넣은 백경화가 곧 짐승처럼 으르렁거리며 사출하기 시작했다. 아랫도리를 완전히 파묻고 그 뜨거운 내벽 안에 제 정액을 토해 냈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허리를 밀어붙이며 이연의 안에 싸지른 백경화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그야말로 영역 표시를 완벽하게 마무리 지은, 짐승의 얼굴이다.

주욱- 백경화가 파묻고 있던 성기를 빼내자 잔뜩 벌어져 있던 밀부가 개폐를 반복하며 안에 든 것을 밀어냈다. 뭉근한 정액이 잔뜩 부어오른 곳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백경화의 눈빛에 그나마 남아 있던 이성이 사라졌다.

낮게 혀를 찬 백경화가 곧 바르르 떨리는 하얀 몸을 향해 몸을 숙였다. 타액으로 젖어 있는 젖꼭지를 희롱하고 정액인지 물인지 모를 것을 사출한 이연의 것을 쪽쪽 빨며 핥았다. 또다시 주어진 자극에 이연의 몸이 잘게 경련했다. 몽롱한 머리로 겨우 고개를 들자 희뿌연 시야로 백경화가 제 성기를 손으로 추어올리는 것이 보였다. 그에 이연이 고개를 내저었지만, 백경화는 그저 요요하게 웃을 뿐이었다.

이연에겐 불행히도 아직 밤은 끝나지 않은 것이다.

이연은 천천히 제 몸을 스치는 감각에 두 눈을 떴다. 기절이라도 한 걸까. 중간부터 기억이 날아간 이연이 손가락 하나 꿈쩍하지 못한 채로 제 몸을 닦는 손길을 방치했다. 언제 이연을 그리 몰아붙였냐는 듯, 이연의 몸을 닦아 주는 손길은 다정하기 짝이 없었다. 간간이 손끝에 닿는 입술에도 더 이상의 정염은 느껴지지 않았다. 아무래도 오늘의 불길은 잠재운 듯했다.

후우, 조금은 손길에 긴장하고 있던 이연이 긴 한숨을 내쉬며 저를 품어 안고 있는 몸에 온전히 기대었다.

“깨셨습니까?”

그 목소리는 다소 미안한 듯, 민망한 듯했으나 가장 큰 것은 걱정이었다. 그리 몰아붙였으니 미안하지 않으면 사람도 아니지. 하지만 불을 지핀 것 또한 다름 아닌 저라 이연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만 끄덕였다. 제가 판 무덤이니, 누굴 탓하랴.

백경화는 느른하게 늘어진 이연의 몸을 더욱 품 안으로 끌어안으며 귀 끝을 붉혔다. 사실 백경화는 반성 중이었다. 열여섯으로 돌아간 김에 성욕도 십 대가 된 것인지 스스로 제어하지 못하고 날뛴 것이 못내 면구스러웠다. 그 탓에 이연을 잡을 뻔하지 않았던가. 평소 절제해 온 탓에, 저도 이성이 완전히 나가면 이렇게까지 미칠 줄은 몰랐다.

“사실 드릴 말씀이 있사옵니다.”

“…….”

이연은 제 귀밑머리를 쓸어 넘겨 주며 건네어진 백경화의 말에 감고 있던 두 눈을 떴다. 연아… 그 부름이 귀에 이토록이나 단데, 어찌 모를 수 있을까.

“아쉽구나. 반말하는 너도 좋았는데.”

하는 짓이 조금 귀엽기도 했고. 어찌 됐든 자신보다 정신 연령이 어려진 백경화를 볼 수 있었으니, 쉽게 하기 힘든 경험이긴 했다.

백경화는 제 말이 끝나기도 전에 웃으며 돌아온 이연의 대답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아, 그러고 보니… 제가 기억이 돌아온 시점부터 이연에게 경어를 썼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 침음했다. 정말 자신은 본능으로만 이루어진 미물이기라도 한 걸까.

“경화야.”

“예, 말씀하옵소서.”

“…경화야.”

“예, 경청하겠사옵니다.”

“……경화야.”

“…….”

경화야… 부름은 몇 번이고 반복되었다. 부름이 반복될수록 그 목소리에 서리는 물기에 백경화는 말없이 이연의 몸을 바투 끌어안았다. 그제야 그는, 이연이 그동안 애써 불안을 억누르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의연함으로 가장하고 있었지만 이연은 짐짓 걱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기실 그건 백경화를 위해서였다. 분명 기억이 사라진 그가 제일 당황스럽고 무서울 테니까. 이대로 기억이 돌아오지 않아도 괜찮다고, 무슨 일이 있더라도 곁에 있겠다는 스스로에 대한 다짐이기도 했다.

“사실 겁이 났다. 정말 이대로 네 기억이 돌아오지 못할까 봐.”

“무엇이 두려우십니까.”

정말로 영영 기억이 돌아오지 않았다 하더라도 자신은 몇 번이고 반할 텐데.

“보시지 않으셨습니까?”

그가 이연에게 빠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이쯤 되면 그는 이연을 연모하기 위해 태어났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그에 새빨갛게 익은 얼굴을 떠올린 이연이 키득키득 웃으며 어깨를 떨었다. 누가 봐도 이연에게 마음이 있음을 온몸으로 드러내던 백경화는 무척이나 저돌적이었다. 그 풋풋한 연심을 한 몸에 받고 있노라면 절로 불안이 사라졌다. 그러나 원래의 백경화를 그리워하지 않을 수는 없는 일이다.

“내가 욕심 많은 놈이라 그래.”

누군가는 저에게 참 욕심 없다 하였는데, 사실 그는 이토록이나 탐심 많은 놈이었다. 그는 모든 백경화가 탐이 났다. 저를 잊고 새로이 빠져드는 어린 순정도 좋았지만, 농익어 저를 익애하던 백경화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가지고 가져도 네 마음이 항상 욕심나서… 이를 어이하지. 참 큰일이다.”

한숨처럼 흘러나온 이연의 진심에 그를 끌어안고 있던 백경화의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그에겐 다시없을 고백인지도 모르고 쫑알거리는 입술을 한입에 삼키며 이연의 허벅지 사이로 제 다리를 밀어 넣었다.

예민해져 있던 곳을 스치는 단단한 것에 이연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났다. 그 야릇한 소리에 어느새 기립해 있던 백경화의 양물이 더욱 단단해졌다. 급히 손을 내려 겨우 다물린 곳을 벌리는 손길이 다급했다. 퉁퉁 부은 내벽을 조심스럽게 파고든 긴 중지가 아직 물기가 남아 질척한 내부를 꾹꾹 눌러 댔다.

“흐으…….”

“연아, 한 번만 더… 응?”

이연의 목덜미에 이마를 문지르며 백경화가 애원하듯 청했다. 그에 잠시 망설이던 이연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급히 내벽을 넓히던 손을 뺀 백경화가 제 양물을 그 안으로 느릿하게 밀어 넣었다. 이어 이연의 등 위로 타고 오른 백경화는 갈급한 상태와는 반대로 천천히 움직였다.

감질날 정도로 느릿하게 넣고 빼기를 반복하니 오히려 애가 탄 것은 이연 쪽이었다. 느리게 파고들수록 백경화의 성기 모양대로 벌어지던 내벽이 재촉하듯 움찔거렸다. 경화야… 참지 못한 이연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있고서야 백경화는 퍽퍽 소리가 나도록 허리를 움직였다.

이연이 느끼는 곳을 연신 찔러 대자 그를 머금고 있던 내벽이 오물거리며 백경화의 양물을 씹어 댔다. 얼룩덜룩 순흔이 새겨진 하얀 엉덩이 사이로 백경화의 양물이 삼켜졌다 뱉어지기를 반복했다. 아직 이연의 몸 안에 들어 있던 지난 흔적들이 백경화가 드나들 때마다 묻어 나왔다. 백경화는 잔뜩 벌어진 그곳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점차 아득해지는 정신에 입술을 깨물어야만 했다.

이연은 연신 제 안을 파고들어 극점을 찔러 대는 백경화의 성기에 울부짖듯 신음하며 금침을 다잡았다. 퍽퍽! 백경화가 허리를 쳐올릴 때마다 눈앞에 불이 번쩍번쩍 번지길 수차례. 하체가 녹아 흐물거리기 시작했다. 쾌락에 점령당한 아래는 의지를 잃고 앞뒤로 물을 질질 흘려 댔다. 쩍쩍, 찌걱찌걱, 백경화가 움직일 때마다 듣는 것만으로도 야한 접합 소리가 이연의 귀를 자극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백경화의 속도가 도저히 이연이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빨라졌을 때 이연은 높이 신음하며 진저리 쳤다. 그리고 백경화도 잔뜩 젖어 질척이는 이연의 내벽에 몸을 깊이 묻고 사정했다. 양물을 뿌리까지 파묻고 몇 번씩 허리를 추어올리며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이연의 안에 씨물을 흘려보냈다. 길게 사정한 뒤에도 빼지 않고 후희를 즐기듯 느릿하게 파고들던 백경화가 이연의 등 위로 연신 입 맞추며 속삭였다.

“혹, 다음에 또 기억을 잃게 된다면….”

“그런 말 마라….”

이연은 민감해진 귓가에 백경화의 입술이 내려앉자 몸을 움찔거리면서도 백경화의 말을 타박했다. 그에 소리 내어 웃은 백경화가 짓누르듯 이연을 끌어안으며 정정했다.

“그럼 주시기로 한 내세에, 아무런 기억이 남아 있지 않더라도 그때 제가 먼저 구애할 것입니다.”

먼저 알아보고, 네 마음 상할 일 없이 먼저 구애할 것이다. 하여 또 날 욕심내도록 만들어서 은애하고 사모하는 이 마음을 숨 막힐 정도로 퍼부어 주리라.

“지금처럼?”

가만히 듣고 있던 이연이 웃으며 묻자 백경화가 고개를 내저었다.

“지금보다 더.”

“…….”

이 이상 어찌… 싶다가도, 왠지 백경화라면 정말로 그럴 것 같아서 이연은 고개를 돌려 밀어를 속삭이는 입술에 입 맞추었다. 그럼 자신은 기다렸다는 듯 넘어가 주겠다는, 또 다른 약조를 대신해서.

* * *

“아, 기억이 돌아오셨군요. 그것참 경사스럽고 감축드릴 일입니다.”

이연은 여선의 말에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것참 축하한다는 이의 표정이 정말로 썩은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막말로 ‘너네가 기억을 잃고 싸우든 말든, 북을 치고 장구를 치든 말든 더 이상 관여하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는 심정이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이혼 없이 끝나서 참,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이혼? 이연의 얼굴에 놀라움이 스친 순간.

퍽! 여선의 몸이 휘청였다. 그의 오금을 발로 찬 백경화가 당황한 눈으로 이연의 눈치를 살피다 여선을 향해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미친 게냐?”

“이혼하겠다 하셨을 땐 진짜 제가 미친 줄 알긴 하였지요.”

백경화는 다급히 여선의 입을 틀어막았다. 험악한 손길이었지만 여선의 표정은 어째 퍽 만족스러워 보였다. 기억을 잃고서도 염장을 질러 대는 그들 사이에 돌을 던지는 것만큼이나 속 시원한 일이 또 어디 있을까. 누구는 그 좋다는 혼인을 못 해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데. 2년간 (예비) 처가 식구들에게 냉대 아닌 냉대를 받아 온 여선은… 사실 많이 삐뚤어져 있었다.

“뜯어말린다고 저희가 고생을 좀 했었지요. 각방 정도로 합의 본 게 얼마나 다행인지.”

강진과 호무는 백경화를 자극하는 여선이 조금 미쳤다고 생각했지만, 말리지는 않았다. 사실 그들도 같은 마음이었기 때문이다.

“너 진짜, 미친 게냐? 아침부터 뭐 잘못 먹었어?”

“그때의 주군께서 어디 제정신이었습니까? 다 이해하실 터인데 뭐 그리 노심초사십니까?”

어차피 너네 칼로 물 베기잖아.

얘… 눈이 반쯤 돌았는데? 백경화가 노총각의 한이 얼마나 무서운지 새삼 깨닫고 있을 때, 진정한 위기는 그때 찾아왔다.

“흐음… 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혼을 당할 뻔한 게로구나?”

“?!!”

오싹- 백경화는 이연의 목소리를 들은 순간, 뒷골이 써늘하다는 느낌을 생전 처음 받아 보았다.

삐걱삐걱 돌아보자 그곳엔 처음 보는 이연이 서 있었다. 웃고 있는데… 분명 부드럽게 미소 짓고 있는데, 난 왜 이리 무서울꼬. 그건 분명 이연의 눈이 웃고 있지 않기 때문이리라.

백경화는 순식간에 사색이 된 낯으로 급히 변명했다.

“그, 그런 게 아니오라…! 그땐 제가 기억을…!”

“그런 주제에 우리 경화는 내세에서도 단번에 알아보겠다 한 거네.”

거짓말쟁이였네, 우리 경화.

헉! 헛바람 들이켜는 소리가 백경화의 입을 뚫고 흘러나왔다. 백지장처럼 질린 낯에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그러나 이연은 그것으로 끝내지 않았다.

“그래, 그럼 마음 추스를 시간이 필요할 테니… 침전은 한동안 지금처럼 쓰도록 하자꾸나.”

“!!”

난데없이 터진 각방 선언에 백경화는 그대로 굳고 말았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마지막까지 웃어 보인 ─여전히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이연이 돌아섰다. 돌아선 등에서 찬바람이 쌩쌩 불었다.

첫 부부 싸움이 ─부부 싸움이라고 하긴 애매하다만─ 발발되는 순간이었다.

“…….”

“…….”

“…….”

이연이 떠난 곳에서, 한동안 무겁다 못해 질식할 것 같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중 가장 목숨이 위험한 여선이 슬쩍 뒷걸음질로 물러서며 도주를 시도했으나 안타깝게도 무산되고 말았다.

먼저 움직인 백경화가 장식되어 있던 검을 검집째 들고 그를 돌아보았던 것이다.

“내 그동안의 정을 생각해서 아니지, 네 말대로 이혼을 막아 준 답례로 목숨만은 살려 주마.”

“그냥 다 살려 주시지요…. 혼인은 하고 죽고 싶습니다.”

“될 것 같으냐?”

이 상황을 만들어 놓고? 말도 안 되지. 큭, 비릿하게 웃어 보인 백경화가 해답을 내놓았다.

“잊자, 나의 추태를. 너희들 모두가 잊으면 돼.”

그럼 달려가서 이연에게 그들이 착각했다고 뻔뻔스레 밀어붙일 수 있지 않겠는가.

그 생각에 백경화는 사납게 웃으며 검을 치켜들었다. 옛적, 성황제국 황족들을 두드려 대던 미친개의 강림이었다.

“내 겪어 보니, 기억 소실 그깟 거 별거 아닌 것 같더구나. 아주 쉬워.”

그냥 머리를 가볍게, 한 대 맞으면 끝날 일이다.

백경화는 조금 전의 여선보다 눈이 더 돌아 있었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 여선이 주춤주춤 물러서며 반박했다.

“주공 실력에 그걸로 잘못 맞으면 죽습니다.”

“…그럼 더 좋고.”

내 치욕은 그렇게 영원히 묻히겠지.

진짜냐?!

백경화의 말에 대경한 강진과 호무는 깊은 동료애를 발휘하며, 저들은 아무 죄도 없음을 눈빛으로 피력했다. 하지만 그 필사적인 눈빛이 통할 리가 없었다. 사실 백경화는 마음속에 담아 두고 있던 일이 하나 더 있었던 것이다.

“호무, 너도 윤화공주가 때리는데 보고만 있어?”

“헉!”

언젠가 혼날 줄은 알았지만 그것이 지금일 줄 몰랐던 호무의 얼굴이 순식간에 파리해졌다. 그를 지켜보던 강진이 손을 번쩍 들고 반박했다.

“전, 정말로 아무 죄도 없습니다.”

“넌 연좌제다.”

“?!”

제일 억울했다.

그러게 왜 자극해서는! 말리지 않은 저희들이 미친놈이다!

원망 서린 강진과 호무의 눈이 여선을 향했으나 이미 때는 늦은 뒤였다.

으아아악!

이연은 등 뒤에서 들려오는 비명에 흠칫 몸을 사렸다. 아무래도 애들을 잡고 있는 성싶은데… 가서 말려야 하나, 고민하다 고개를 내저었다. 지금 말려 봤자, 여선의 반항심이 풀리지 않는 이상 이 같은 상황은 반복될 것이다.

이연은 등 뒤로 들려오는 비명을 애써 무시하며 멈췄던 걸음을 내디뎠다. 코끝을 스치는 바람이 제법 따뜻했다. 날이 어느새 제법 풀린 것을 보니 곧 봄이 돌아올 것인가 보다. 봄이 오면, 그래… 이향의 집에 여선의 사주단자를 보내어야겠다.

“청혼서가 먼저였던가?”

사주단자가 먼저인가, 청혼서가 먼저인가. 제대로 된 혼인식을 해 본 적이 없으니 알 도리가 있나.

연아. 이연은 몇 걸음 가지 않아 뒤에서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 보았다. 그러자 벌써 주리를 다 틀었는지 어느새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백경화가 보인다. 눈치를 보듯 조심스레 저를 살피는 눈과 시선이 마주치자 아름다운 얼굴에 꽃 같은 미소가 피어났다. 실로 봄꽃 같은 미소였다. 어쩌면 봄은 항상 그의 곁에 머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 생각하며 이연은 제 손을 잡아 오는 그의 봄을 기꺼이 맞잡았다.

계절은 돌고 돌아 다시, 봄이었다.

『후궁담밀월』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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