外傳 2. 蜜月旅行(밀월여행)
살랑대는 미풍에 꽃향기가 묻어났다. 언제 매서웠냐는 듯 한껏 풀린 날씨가 마음을 어루만지듯 따뜻하기만 했다. 내리쬐는 햇볕 속에서 구애의 몸짓을 보이며 짝을 찾아 헤매는 태동 또한 생명력에 가득 젖어 있었다.
겨우내 움츠려져 있던 것들이 다시 생동하기 시작하는 계절─ 때는 바야흐로 봄이었다.
작은 마을에서 유독 눈에 띄는 한 장원 돌담 앞에 한 사내가 서 있었다. 다소 수상쩍기까지 한 차림의 사내는 죽립을 고쳐 썼다. 설마 이런 곳에 박혀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아니, 전혀 듣도 보도 못한 생경한 지명을 들었을 때부터 어느 정도 예상은 하였지만, 이토록이나 시골 깊숙이 박혀 있을 줄은 몰랐다는 말이 옳았다. 이러니까 그렇게 찾아 헤맬 땐 못 찾았지. 그래도 그때가 좋았는데…….
쯧, 낮게 혀를 찬 사내는 제 언짢은 표정을 감추기라도 하듯 죽립을 더욱 내려 썼다. 명령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이곳까지 걸음 하긴 하였으나 더 이상은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이라도 발길을 돌리고 싶지만, 주인의 명에 불복할 순 없는 노릇. 사내는 결국 손을 들어 굳게 닫힌 장원 문을 두드릴 수밖에 없었다.
탕탕탕! 불편한 속내만큼 문을 두드리는 소리도 거칠기 그지없었다. 좀처럼 돌아오지 않는 기별에 사내의 심기가 더욱 뒤틀리려는 찰나,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열렸다.
“누구십니까?”
좀처럼 보기 힘든 손님의 방문에 문을 연 하인에게서 조심스러운 기색이 느껴졌다. 더군다나 문 앞에 장승처럼 버티고 선 자의 기세가 자못 살벌하여 절로 마른침이 넘어갈 정도다.
“주인을 뵙고 싶다 전하여라.”
시커먼 죽립으로 얼굴의 절반 이상을 가리고 그리 건넨 사내의 말에 하인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행색이나 분위기로 봐서 그가 상대할 수 있는 자가 아니었다. 총관 나리라도 불러올 생각에 돌아서려던 그는, 곧 뒤쪽에서 걸어오고 있는 여선의 모습에 반색했다.
하인의 앞에 서 있는 사내의 모습에 잠시 걸음을 멈춘다 싶었던 여선이 미간을 찌푸린 채 그들을 향해 다가왔다. 딱 보아도 단순한 손님이 아닐 듯한데, 백경화에게 받은 언질이 없었기에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뉘신지요?”
“오랜만이로군.”
예정 없던 방문자를 꺼리는 기색으로 던져진 여선의 물음엔 경계심이 가득했다. 그러나 사내는 슬쩍 죽립을 들어 얼굴을 보이며 아는 체를 해 왔다. 낯익은 얼굴의 등장에 놀란 것은 여선 쪽이었다.
“위문 님!”
“그래, 날세. 잘 지냈느냐?”
“그, 그렇긴 하온데…….”
생각지도 못했던 위문의 등장이 꽤 당황스러웠는지 여선은 쉽사리 말을 잇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위문이 이곳은 어찌 알고 왔으며, 알더라도 이곳까지 온 이유를 알 수가 없었던 탓이다. 그가 백경화와 친하기라도 했다면 이해라도 하련만… 둘 사이는 꽤 넓은 강이 존재하지 않았던가.
“언제까지 여기 세워 둘 참이냐?”
그 말이 있고서야 정신을 차린 여선이 어서 들어오시라며 몸을 비켰다. 그에 가벼운 몸짓으로 장원 안으로 들어선 위문이 그제야 쓰고 있던 죽립을 벗었다.
“주군께 아뢰겠으니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알았다.”
그리 말하며 멀어지는 여선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위문이 고개를 돌려 장원 안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밖에서 보았던 대로 장원은 꽤나 웅장했다. 과하지 않게 꾸며진 정원은 소담하고 연꽃과 잉어들이 머무는 연못은 운치 있었으며, 언뜻 보면 투박해 보이는 사택마저도 얼마나 정성을 들였는지는 사래 끝에 붙여 놓은 귀면와(鬼面瓦)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살아 움직일 듯한 도깨비의 모습으로 보아 장인의 손끝을 걸쳤음이 분명했다. 그리 넓지는 않지만 깨끗하게 쓸린 마당과 더불어 먼지 한 톨 쌓여 있지 않은 섬돌 또한 주인이 얼마나 애착을 가지고 장원을 관리하고 있는지 알게 해 주었다.
도성에 마련되어 있던 별저보다야 크기 면에서는 한참 모자라지만, 정성스러운 손길이 한가득 묻어나는 이곳이 평온하고 정감 있어 보인다는 것만은 부정치 못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누구에 의해 만들어지고, 관리되는지 알고 있는 위문으로서는 다소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백경화가…….’
설마 그 미친개가 고작 이 작은 장원에 만족하고 몸을 누일 줄이야. 사람 앞일은 아무도 모른다더니, 정말 그 말대로다.
새삼스러운 마음으로 혀를 내두르고 있던 위문은 어느새 다가온 여선이 따라오란 대로 걸음을 옮겼다. 마을의 규모에 비해 크다지만 왕부는커녕 귀족들의 저택에 비해서도 터무니없이 작고 아담한 장원은, 얼마 가지 않아 백경화가 머물고 있는 처소를 눈앞에 드러냈다.
“주군, 모셔 왔나이다.”
기별을 알리며 여선이 먼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위문은 별말 없이 그 뒤를 따랐다.
방 안은 밖과 마찬가지로 모자람 없이 꾸며져 있었다. 화려한 맛은 없지만, 정갈하고 기품 있었다. 배치된 먹빛의 가구들 또한 사치스럽지는 않았으나 그 문양 하나하나가 심상치 않았다. 그 모든 것이 방 주인 된 자의 인품을 드높이기에 적합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위문의 시선을 끈 것은 보료 위에 앉아 저를 맞이하는 이였다.
갈까마귀처럼 까맣고 긴 머리를 하나로 묶어 내린 채 편하고 가벼운 차림으로 웃고 있는 화용월태(花容月態)─ 허나 몸에 두른 기백만은 맹수 못지않은 백경화, 그 말이다.
3년 만의 재회였다.
그러나 그들에게 반가움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게 누구신가. 성황제국 황태자님의 그림자 무사께서 이곳까지 어인 일이신가?”
“…저도 오고 싶어 온 것 아닙니다.”
“그러할 테지. 일단 앉거라.”
위문의 대답에 픽, 가볍게 웃음을 터트린 백경화가 턱짓으로 제 맞은편을 가리켰다. 위문이 제 앞에 앉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백경화가 여선을 향해 차를 내오라 명했다.
명을 받은 여선이 물러나는 것을 확인한 위문이 백경화를 향해 물었다.
“어째서 차를 저이에게 내오라 하시는지요?”
“일손이 부족하니 어쩔 수 없지.”
“시중들 이가 부족한 겁니까?”
백경화의 말이 너무 의외의 것이라 위문은 저도 모르게 조금 언성을 높이고 말았다. 눈앞에 있는 이의 신분으로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던 탓이다. 그가 누구더란 말이냐! 아무리 타국에 있다 한들 ─현재 실종 처리된 상태라 하더라도─ 무려 성황제국 친왕이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위문을 허탈하게 만들기엔 충분했다.
“이 집이 어떤 집인데 사람을 함부로 들이겠느냐. 번잡한 것보단 부족한 것이 낫다.”
“…….”
그 말은 지금… 이 집에 사람을 들이는 게 싫다는 뜻이렷다? 기가 막히고 허탈하여 위문은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아니, 이제 3년이 넘어가면 식을 때도 되지 않았는가. 그런 그를 흘깃, 바라본 백경화가 무심히 덧붙였다.
“그리고 불쑥 손님이 찾아오지 않는다면 여선이 차를 내올 일도 없지 않겠는가.”
“…….”
너 왜 왔누?
백경화가 돌려 말하고자 함이 무언지 위문이 모를 리가 없다. 친왕 자리 박차고 나갈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환영받지 못할 것이라 생각은 했지만 이리 박대받을 줄은 몰랐다.
위문은 선명히 귓가를 스치는 백경화의 소리 없는 타박에 겨우 한숨을 참으며 본론을 꺼내었다.
슥, 품 안에 집어넣었다 뺀 위문의 손에는 두툼하게 비단으로 봉한 서찰이 들려 있었다.
“무현 님의 전갈을 가져왔나이다.”
“그래, …때가 되었는가.”
백경화는 위문이 단상 위로 내미는 것을 집어 들며 조용히 뇌까렸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백경화의 두 눈에 예기가 서렸다가 사라졌다. 위문은 제가 보는 앞에서 밀봉을 풀고 서찰을 읽어 내려가는 백경화의 모습을 바라보다 고개를 숙였다. 본디 정식으로 내려진 칙서라면 백경화는 두 손으로 공손히 서찰을 받은 뒤 무현이 있는 쪽을 향해 절을 올려야만 했다. 허나 그는 단 한 번도 그런 절차를 거친 적이 없었다. 이번이 밀명이어서만은 아니었다. 백경화는 그들에게 무례하진 않았으나 공경을 보이지도 않았다.
그래서 처음, 이연을 대하는 백경화의 행동에 놀랐다. 그를 대하는 몸짓에서 흐르는 것은 공경만이 아니었다. 숨기지 못한 애정과 혹 어디 마음 상해 할까 조심스러워하는 기색이 온몸으로 전해졌다. 하여, 위문은 이연이 참으로 대단해 보였다. 아직도 백경화라 하면 치를 떠는 황족들에게 그 모습을 보여 주고 싶을 만큼.
‘광견도 주인은 따른다는 건가…….’
참으로 다행이지 않은가- 위문은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백경화가 서찰을 다 읽길 기다렸다.
그때, 방문이 열렸다.
여선이 차를 내온 것인가 싶었던 마음은 이어진 백경화의 반응에 흔적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감히 성황제국 황위에 오를 이가 직접 쓴 서찰을 집어 던지다시피 한 백경화가 대경하며 문 쪽을 향해 달려갔던 것이다.
위문은 단숨에 열린 문으로 달려가는 백경화의 모습에 깊이 생각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백경화가 등으로 가리고 있는 이가 누군지 말이다. 빈손으로 따라 들어온 여선의 난처함 그득한 얼굴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이어진 백경화의 말은 그런 위문의 생각을 확신으로 만들어 주었다.
“어찌하여 이런 것을 직접 들고 오시나이까?”
“어차피 이곳으로 오던 길이지 않았느냐. 내 손 좀 거들었느니.”
“허나…! …이리 주시옵소서, 제가 들겠나이다.”
“되었다. 자리에 앉기나 하거라.”
백경화의 걱정스러운 목소리만 듣는다면 무슨 쌀 한 가마 든 줄 알겠다. 아니, 진짜 그렇다 하더라도 사내가 그 정도는 들 수 있는 거지… 고작 다상 하나에 저리 호들갑을 떠는 백경화의 행동에 위문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 순간, 백경화가 돌아서고 그가 가리고 있던 존재가 위문의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는 백경화가 무현의 서찰을 집어 던질 때보다 더 놀라고 말았다.
“오랜만일세, 그동안 잘 지내셨는가?”
위문은 너무나 놀란 나머지 이연의 말에 답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만치 그는 지금 제 눈앞에 서 있는 존재의 변화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런 그를 아랑곳하지 않고 이연은 차마 다상을 뺏지 못해 쩔쩔매는 백경화를 옆에 단 채 직접 다상을 들고 자리로 향했다.
조심스럽게 다상을 내려놓고 보료 위에 착석한 이연이 저를 놀란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위문을 향해 부드럽게 미소 지어 보였다.
“3년 만이던가? 무탈한 듯하여, 다행일세.”
“…….”
“얼마 전 들여온 황국차(黃菊茶)인데 꽤 괜찮아. 어서 드셔 보시게.”
…이게 누군가.
위문은 제 눈앞에 있는 이연을 다시 찬찬히 훑어보기 시작했다. 분명 그 생김은 이연이 맞다. 그러나 그가 알던 어린 왕- 이연은 아니었다. 항시 창백하게 질리어 있던 안색에 생기가 돌아서만은 아니었다. 3년 전과 달리 무심한 듯 차게 굳어 있던 표정은 부드럽게 풀려 있고, 몸짓은 여유로워 보였다. 긴 머리 타래를 느슨하게 땋고, 성장이 아닌 백경화와 마찬가지로 편한 차림의 그는 어딘가 한 꺼풀 벗겨진 느낌이었다. 마치 억지로 다물려 있던 꽃잎이 만개한 것처럼─ 그것은 경이로운 감동을 선사했다. 거기다 키도 그때보다 석 치 넘게 큰 듯하고, 살도 더 붙었다.
진정 이 고운 청년이, 이연이 맞단 말인가?
그에 위문은 제가 이연의 말을 몇 번이나 삼켰는지, 백경화가 저를 어떤 눈으로 노려보고 있는지 미처 깨닫지 못했다. 그를 깨운 것은 위문의 시선에 곤혹스러운 듯, 그럼에도 미소를 지우지 않은 이연이었다.
“내가 그리 많이 변했는가?”
헛! 위문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곤 얼른 고개를 숙였다.
“소, 송구하옵니다. 부디 용서하소서.”
“괜찮네. 기실 이해 못 할 바가 아닌지라… 나도 가끔 놀라곤 하는걸.”
이연은 위문의 말에 작게 손을 내저으며 농처럼 그리 덧붙였다. 그러나 진심이었다. 이연은 가끔 면경에 비친 제 모습이 낯설어 한참 들여다보곤 했다.
“허나 그리 쳐다보면 민망하니 그만 보시게.”
“송구하옵니다.”
“그리 존대하지 않아도 괜찮네. 그대도 아시다시피 난 더 이상…….”
왕이 아니다.
이연은 그 말을 삼키며 빙그레 미소 지었다. 티 하나 없이 맑은 미소에 위문이 잠시 놀란 순간이었다. 부드럽게 이연의 얼굴을 제게 돌리는 손길이 있었다. 백경화였다.
“다른 이를 향해 그리 어여쁘게 웃지 마소서.”
누가 훔쳐 갈까 불안하나이다. 다정하게 제 귓가를 파고드는 백경화의 투정에 이연의 미소가 더욱 깊어졌다. 위문을 향했을 때보다 배는 더 고운 미소였다.
“그대를 찾아온 객(客)이 아니더냐. 잘 모셔야지.”
“곧 돌아갈 인사이오니, 신경 쓰지 마옵소서.”
소곤소곤, 둘은 위문을 앞에 두고도 밀담(密談)을 주고받는 것에 망설임이 없다. 바짝 붙은 얼굴이 떨어질 줄을 모르고 속닥거리는 모습이 어찌나 눈꼴신지. 위문은 이연을 보며 느꼈던 감동이 단숨에 날아가는 것을 느꼈다. 내가 저 꼴을 보러 이 먼 곳까지 걸음 한 게 아닌데.
속이 진창 상한 위문은 제 앞에 놓여 있던 차를 단숨에 비웠다. 그러자 대기하고 있던 여선이 비워진 잔을 채워 준다. 그런 때에도 백경화와 이연의 속닥거림은 계속 이어졌다.
한마디로 염장 지르는 소리였다.
“그래도 그대에게… 아니, 우리에게 많은 도움 준 이가 아니냐. 그런 이를 박대할 수는 없지 않누.”
“본래 저이 일이 그러하오니 괘념치 마소서.”
“그래도 독까지 마신 이인데…….”
“계속 그리 말씀하시오면, 저 투기할 것이나이다.”
“별것에 다 투기하는구나. 거기다 세상에 투기한다 예고하는 이가 어디 있느냐?”
말뜻만 보면 참 못났다, 한심해하는 것인데 백경화를 바라보고 있는 이연의 눈은 봄날처럼 따뜻하기만 하다. 그것을 모를 리 없는 백경화의 투정은 더욱 대담해졌다.
“내 연 님의 관심이 저 말고 딴 곳 향하는 것 보고 싶지 않나이다. 이 고운 눈엔 저만 담아 주소서.”
“나는 항상, 그대만 보고 있느니. 그런데 그대 투기하는 것 보고 싶어 지금은 객에 신경 좀 써야겠다.”
키득키득, 놀리듯 이어진 그 말에 백경화의 얼굴에도 차차 미소가 떠올랐다. 정 그리하시겠다면 제게도 생각이 다 있습니다. 짐짓 엄하게 그리 운을 뗀 백경화가 두 손을 뻗어 이연을 품 안에 가두었다. 안 그래도 붙어 있던 몸이 틈 하나 없이 밀착한다. 이리 있으면 다른 이 보더라도 못 따라가실 터이니 어디 실컷, 손님맞이 해 보소서. 오냐. 내 못 할 것 없느니. 좀 더 힘주지 그러느냐?
“…….”
주르르륵- 위문은 옷이 젖는 것을 느끼고서야 제가 입 안에 머금고 있던 차를 뱉어 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에게 시급한 것은 젖은 옷을 터는 것보다 소름 오른 팔을 긁어 대는 일이었다.
봉변이다! 봉변이야! 한참 손톱까지 세워 가며 팔을 긁어 대던 위문은 저 대신 바닥의 물기를 훔치는 여선의 행동에 퍼뜩 놀라 고개를 들었다.
지난날 피골이 상접했던 여선의 모습을 떠올렸던 그로서는 당연한 반응이었다. 저가 이러한데 3년이나 시달린 여선은 못해도 피쯤은 토하고 있겠구나. 걱정스럽고 안타까운 마음에 여선을 돌아본 위문은, 허나 웬 자비와 인자함으로 무장한 보살님 한 분과 대면했다.
여선은 괴로워하기는커녕 득도한 것처럼 평온한 표정으로 바닥에 쏟아진 차를 닦고, 시선이 마주친 위문을 향해 웃어 보이기까지 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초연했냐 하면, 어디 신경 하나가 망가진 게 아닌가 의심이 갈 정도였다.
다, 지나갈 것입니다.
사람 하나 망가지는 거 순식간이라더니. 저건 멀쩡한 게 아니었다.
들릴 리 없는 여선의 마음의 소리마저 듣고 만 위문은 다짐했다. 하루라도 빨리 이곳을 벗어나겠다고.
도대체 얼마나 패악을 떨어 댔으면 이이가 이렇게까지 해탈한단 말인가!
새삼 무섬증이 인 위문이 바닥을 굴러다니고 있던 잔을 주워 탁자에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저 좀 봐 달라는 나름의 시위였다.
그 시위가 효과가 있었는지 보는 이들의 눈꼴을 시리게 만들다 못해 염장을 질러 대고 있던 한 쌍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그나마 염치가 있던 이연의 얼굴이 머쓱함에 붉게 달아오르며 위문의 시선을 슬쩍 피했다.
허나 백경화가 달리 백경화겠는가.
“아직 게 있었느냐?”
위문의 허파를 뒤집어 놓는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은 백경화가 방해꾼 보듯 엄중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다 덧붙였다.
“구경 다 했으면 이만 물러가지?”
아직 방문 용건을 한마디도 내뱉지 못한 위문은 기가 막힌 나머지 헛웃음만 몇 번 토하다 이를 사리물었다. 누군들 여기 앉아 눈꼴 사나운 광경을 지켜보고 싶을까.
“네. 구경할 만하옵니다. 마지막에 뵈었을 때 울어서 퉁퉁 부은 얼굴이셨던지라 이리 신수가 훤해진 걸 보니 그때의 기억이 거짓인가 싶습니다.”
움찔, 순간 위문이 언제의 이야기를 언급하고 있는지 깨달은 백경화의 미간이 잘게 움츠러들었다. 이놈이 미쳤나. 지금 그 이야기가 여기서 왜 나와.
“헛소리 그만하지.”
“헛소리라 하시면 제가 섭섭하옵니다. 그때 지켜본 이들이 한둘도 아닌데. 국장(國葬) 때 눈물을 보이는 것은 기본 소양 중 하나인데 무엇을 그리 부끄러워하십니까.”
그것이 가짜 장례라면 좀 많이 부끄럽기는 할 테지만.
“…닥치거라.”
이연은 백경화의 이 가는 소리를 배경으로 위문의 이야기를 곰곰이 되새기다 곧 짧은 감탄사를 토했다. 아, 저와 백경화가 제화국을 떠나던 그때의 얘기구나.
빨간 토끼 눈의 백경화를 어렵지 않게 떠올린 이연이 그를 돌아보며 눈으로 물었다. 그리 많이 울었느냐?
“……그래도 국장인데 어찌 눈물 한번 보이지 않을 수 있겠나이까.”
지난날 성황제국 그 어떤 장례에서도 눈물은커녕 무심한 낯만 유지하여 슬픈 상주들을 더욱 구슬프게 만들었던 백경화를 기억하고 있는 위문과 여선으로서는 코웃음 칠 소리였다.
“예. 눈물을 보이셨지요. 어찌나 구슬프게 우시는지… 정말로 지아비를 잃은 후궁마마가 따로 없었사옵니다.”
눈물 콧물 쏙 빼며 울던 모습이 딱 그 짝이었다. 문제는 그날의 참석자가 왕의 붕어 소식에 몸져누운 공빈 백경화가 아닌, 지기인 성황제국 무친왕 백경화였다는 점이다.
사실을 아는 인사들이 빈 관을 잡고 오열하는 백경화를 아연하게 바라보다 고개를 내저은 것은 비밀도 아니었다.
위문은 그날의 백경화를 이리 정의했다.
“지랄도 풍년이었지요.”
신랄하기 짝이 없는 평에 일순 말문이 막힌 백경화가 곧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저놈이 미친 듯하니 잠시 나가서 둘만의 대화를 좀 하는 게 낫겠다. 피식, 웃음을 흘린 백경화가 사납게 이를 드러내려는 순간이었다.
백경화는 제 얼굴에 닿아오는 뜨거운 시선을 차마 무시하지 못하고 머뭇머뭇 입술만 달싹이다 곧 진득한 한숨을 내쉬었다.
“……눈물이 절로 나는 것을 어찌하오리까.”
백경화는 말없이 저를 바라보는 이연의 시선에 다 포기하고 진심을 토해 냈다. 거짓이란 걸 알지만 홀로 이연을 떠나보내고 남았다 생각하니 그리 서글플 수가 없었다. 가짜 장례를 치르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음에도 빈 관을 앞에 두고 앉아 있으니 점차 눈앞이 캄캄하고 심장을 도려낸 듯 고통스러웠다. 그 선득하고 말 못 할 슬픔에 저도 모르게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 그런데 눈물이 눈물을 부르는 건지… 눈물은 좀처럼 그치지 않고 그럴수록 더욱 서럽고 서글프고 외롭고 아파서, 결국 백경화는 오열을 터트리고 말았다. 솔직히 과하게 몰입하였음을 부정할 순 없으니 한 가지는 확실했다.
“허니 결코 저보다 먼저 가시어서는 아니 되십니다.”
이연은 백경화의 단호한 말에 어색하게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저 또한 백경화를 보내고 멀쩡할 자신은 없었다. 더구나 골골하는 자신과 달리 기골 장대한 백경화가 더욱 장수할 것이 분명하여 대답할 말도 없었다. 참으로 다행한 일이었다.
그 기색을 읽었는지 잠시 눈 끝을 뾰쪽하게 올렸다 내린 백경화가 덧붙였다.
“어찌 됐든 홀로 그 외로운 길 가시게 할 생각 없으니 오래오래 함께하게 건강하셔야 하옵니다.”
“…….”
살아도 함께. 죽어도 함께.
백경화의 말에 이연은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내 더욱 건강에 신경 쓰마.”
“장하십니다.”
이연의 대답에 반색한 백경화가 이참에 몸보신 제대로 시킬 생각으로 머릿속을 바삐 굴리기 시작했다. 얼마 전 좋은 녹용이 들어왔다 하였는데 그거랑 산삼을 좀 달여 먹여야겠다. 좋지 못한 일로 탕약에 거부감을 보이는 이연이니 이참에 이것저것 좀 챙겨 먹일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그럴수록 더욱 짜게 식어 가는 인사가 하나 있었으니.
“…….”
난 백경화의 흉을 보고자 하였는데, 왜 또 저리 붙어 염장질일꼬.
위문은 기가 막힌 심정으로 또 저는 무시하고 속닥속닥거리는 둘을 바라보아야만 했다.
그를 더욱 슬프게 하는 것은, 동지였던 여선이 허허로운 낯으로 ‘그래도 오늘은 남들 보는 앞에서 입술 박치기는 아니하시니 참으로 음전합니다.’라고 떠들고 있다는 점이었다.
아무래도 볼일이 끝나는 대로 빨리 이곳을 떠야겠다, 위문은 다시 한번 다짐했다.
* * *
촤아악-
이연은 물소리와 함께 다가온 손에 감고 있던 눈을 뜨고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가볍게 그 위로 입술이 내려앉는다. 촉, 물에 젖은 입술이 닿았다 떨어지는 소리가 선명했다. 그 소리가 낯간지러워 이연이 잘게 어깨를 움츠리자 이번에는 그 어깨 위로 입술이 닿아 왔다. 매끄럽게 미끄러진 입술은 어깨선과 목가를 한참 지분거리고서야 떨어졌다.
“흐음…….”
결국 이연의 입에서 신음을 뽑아내고서야 물러선 백경화가 미소 지은 채 이연의 손을 잡고는 조심스레 젖은 천을 문질렀다. 매끄럽게 손끝을 스치는 천은 그의 마음을 담은 듯 부드럽기만 하다.
목간통에 뜨거운 물을 채우고 나란히 앉아 이연의 목욕 시중을 들던 백경화가 입을 연 것은 그다음이었다.
“성황제국에 다녀와야 할 것 같나이다.”
“얼마나 걸릴 것 같으냐?”
“석 달은 걸릴 것이옵니다.”
“그렇구나.”
백경화는 제 말에도 얼굴 표정 하나 변하지 않는 이연의 모습에 움찔, 손길을 멈추고 말았다. 그동안 못 본다는데 이 아이는 왜 이리 담담하누. 언뜻 속상하고 섭섭하려는 순간, 이연의 말이 이어졌다.
“성황제국은 처음 가 보는데, 도성에도 볼 것이 많겠지?”
“…물론이옵니다.”
같이 가실 참이냐? 백경화는 그리 묻지 않았다. 혹 이연이 마음을 돌릴세라 성황제국의 도성이 얼마나 휘황찬란한지, 볼거리가 얼마나 많은지, 어디 어디가 유명하다며 저도 한번 가 보지 못한 곳에 대해 열과 성을 다해 토했다.
“그리 볼 것이 많다니 참으로 기대되는구나.”
“저도 기대되나이다.”
백경화는 낮게 웃으며 이연의 정수리에 얼굴을 묻었다 뗐다. 안 그래도 이연을 놓고 가야 한단 생각에 어찌 중간에 엎어져 볼까 고민하던 백경화의 고뇌가 씻은 듯이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이곳에 머무르는 동안 이연의 몸도 어느 정도 회복되었고, 체력도 늘렸으니 이 행보가 고달프긴 할 터이나 지난번처럼 쓰러지지는 않으리라.
튼튼한 가마를 하나 구해야겠다. 바닥은 폭신한 금침(衾枕)으로 깔고, 창은 넓게 만들어 바깥 구경 쉽게 하고, 휘장을 쳐 내부가 보이지 않게 만들어야지. 햇빛 들지 않게 차양도 치고 가는 길 내내 불편치 않게 모실 수 있도록. 경로에 명소가 있으면 들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아, 옥리지(玉裏池)에 매화가 그리도 곱게 피었다던데 잠시 들렀다 가면 되겠구나.
순식간에 여정의 본래 목적을 탈바꿈시키며 백경화가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다.
“도화… 무현 황태자가 즉위하는 것이냐?”
이런저런 계획을 짜던 백경화는 이연의 물음에 얼른 입을 열어 답했다.
“예, 그뿐만이 아니오라 국혼도 함께 있을 듯하옵니다.”
“국혼? 혼인하는 게야?”
“예, 꽤 늦은 축이지요.”
놀란 듯 살짝 커진 이연의 두 눈이 귀여워 백경화는 웃음을 흘리며 그 눈가에 입 맞췄다. 그뿐만 아니라 이연의 몸을 닦던 손도 점차 불손해지기 시작한다.
“성황제국의 경사로… 음…….”
“축제도 크게 열릴 것이옵니다. 같이 구경해 주시지 않겠나이까?”
“하아… 그대가 바란다면.”
감읍하나이다. 백경화는 살짝 달아오른 이연의 귀 끝을 깨물며 감사의 뜻을 전했다. 그와 동시에 뒤에서부터 뻗어 온 백경화의 손이 이연의 허리를 스쳐 지나 다물려 있던 허벅지로 향한다. 첨벙, 놀라 퍼덕이는 이연의 거친 움직임에 물결이 쳤다.
연한 허벅지 안쪽 피부를 스치는 손가락에 저도 모르게 크게 반응하고 만 이연은 짙은 한숨을 흘렸다. 등 뒤로 닿은 백경화의 것이 단단하게 일어선 것을 느낀 탓이다. 몸을 닦아 줄 때부터 불안하다 싶더라니…….
“겨, 경화야…….”
“예, 말씀하소서. 듣고 있나이다.”
저는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다는 듯, 돌아온 백경화의 대답은 태연했다. 그러나 그 손은 더욱 농밀해져 있었다. 어느새 젖은 천을 목간통 밖에 집어 던진 백경화는 두 손으로 이연의 가슴과 사타구니를 농락하며 이연의 귀를 길게 핥아 올렸다.
흐읏! 가장 민감한 부분을 직접적으로 애무하는 것에 이연은 전율했다. 백경화는 순간 움츠러드는 이연의 몸을 제게 기대게 한 뒤 재차 작은 귀를 핥았다. 귓바퀴를 따라 혀를 덧그리고, 이를 세워 잘근잘근 씹어 가며 애무했다.
“하으…….”
파르르, 백경화는 떨리는 작은 몸을 놓아줄 생각을 하지 않은 채 물 위로 드러난 못 하나 없는 이연의 무릎을 손바닥으로 문지르듯 쓰다듬었다. 그 손은 슬그머니 물속으로 사라지더니 곧 반쯤 일어선 이연의 것을 조심스레 잡아 왔다. 손가락 끝으로 한 차례 훑어 내리다가 귀여운 아이를 쓰다듬듯 가볍게 끝을 매만졌다. 그 손길이 더욱 집요해질수록 이연의 몸도 크게 경련했다. 그에 따라 잔잔하던 물결도 요동치기 시작한다.
이연은 곧 숨을 멈추고 길게 파정했다. 절정의 신음은 백경화의 입에 틀어 막혔다. 어느새 돌려진 몸도 모른 채 백경화와 질척하게 혀를 섞던 이연은 곧 제 다리를 벌려 오는 손에 흠칫, 몸을 사렸다. 백경화는 부드럽게 이연의 하문을 문지르더니 기어이 손가락 하나를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의 손에 몸이 열리는 감각을 느끼며 이연은 짧게 신음했다. 긴 손가락이 쑥- 안으로 파고들고 내벽을 문지르는 감각에 절로 허리가 떨렸다. 내벽 주름을 풀어 주기라도 하듯 진득하게 비벼 대는 통에 결국 이연은 다시 신음을 내뱉어야만 했다.
툭, 이연은 목간통에 머리를 기대며 제게 몸을 실어 오는 백경화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목욕에 방해되지 않게 비녀로 틀어 올리고 있던 머리카락이 반쯤 흘러내린 백경화의 모습이 참으로 요요(姚姚)하다. 온통 젖은 채로 제 욕망을 드러내는 그는 이연의 이성을 송두리째 빼앗을 만큼 매혹적이었다. 수치를 잊은 이연은 백경화의 목에 두 손을 감고, 그의 허리가 더 들어올 수 있도록 다리를 벌렸다. 툭, 묵직하게 일어선 것이 비문에 닿아 왔다. 곧 다가올 쾌락을 기대하듯 벌어진 다리가 물속에서 잘게 떨렸다. 백경화의 양물이 수축을 반복하고 있던 이연의 비문을 벌리고 들어선 것은 그때였다.
퍽! 단숨에 치고 올라오는 것에 이연의 고개가 꺾이듯 젖혔다. 이연은 저도 모르게 손톱을 세우고 백경화의 어깨에 매달렸다.
“하… 하앗… 읏! 경화… 경화야!”
“하아… 연아… 내 고운 연이.”
“으읏! 읏! 하으!”
퍽, 퍽, 백경화의 허리 짓에 따라 물결이 춤을 춘다. 물결은 들썩이는 추삽질에 따라 더더욱 거칠어졌다. 백경화는 이연이 느끼는 곳을 집중적으로 공략하며 물밖에 던져진 금어(金魚)처럼 뻐끔거리는 입술을 한입에 삼켰다. 도망갈세라 작은 머리를 두 손으로 틀어잡고 작은 혀를 유감없이 희롱했다. 미친 듯이 혀를 비비다가 깊게 밀어 넣고 진퇴를 반복하기도 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이연의 안을 드나드는 것은 멈추지 않았다.
좀 더 깊게 이어지기 위해 물 밖에서 들썩이고 있던 이연의 허벅지를 더욱 잡아 벌렸다. 그는 바라던 대로 이연의 안에 제 양물을 더욱 깊숙이 파묻었다. 찰지게 그의 것을 감아 오는 내벽은 잔뜩 젖어 더 들어오라 벌름거리고 있었다. 쑥쑥, 백경화는 이연의 엉덩이를 손자국이 날 정도로 잡아 쥐고 불뚝하니 성이 난 제 양물을 그 안으로 욱여넣었다. 양물을 묻은 백경화의 젖은 등이 쾌락으로 떨리는 것이 호롱불 아래 비쳤다. 불빛에 반들거리는 등 근육이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거렸다.
“흐으… 아, 경화야……!”
“연아……!”
백경화의 거친 움직임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던 비녀가 떨어져 나가고, 그의 긴 머리채가 폭포수처럼 이연을 덮쳐 왔다. 젖은 머리가 부드럽게 나신으로 엉켜 들었다. 이연은 접붙은 상태로 뭉근하게 허리를 돌리며 안을 휘젓는 백경화의 행동에 작게 도리질 쳤다. 언제 허리가 들썩일 정도로 찔러 댔냐는 듯 안에서 내벽을 치대는 몸짓에 미칠 것만 같았다. 간지럽기도 하고 발끝이 오므라질 정도로 야릇하기도 했다. 이연은 목뒤로 달리는 소름에 울먹이며 더욱 백경화에게 매달렸다.
“큿!”
이연의 손톱이 길게 제 어깻죽지를 그어 내리는 순간, 백경화의 입에서 탁한 신음이 터져 나왔다. 고통스러워서가 아니었다. 제 양물을 물고 있는 이연의 내벽이 잔뜩 수축하며 그를 조였기 때문이다.
이연의 눈이 홉떠진 것은 그다음이었다. 제 안에 있던 것이 더욱 크게 부푸는 것이 느껴졌다. 배가 짜부라질 듯했다.
“앗! 흐으으!”
“하아… 윽! 연아.”
이연은 열어 달라는 듯 제 입술을 쪼는 입맞춤에 결국 백경화를 받아들이고 말았다. 치덕치덕, 타액으로 흥건한 입 안에서 붉은 혀가 엉키는 것과 동시에 백경화의 허리 짓이 다시 거칠어졌다. 그의 허리가 들썩일수록 철렁이던 물이 결국 밖으로 튀었다. 그러나 그것엔 관심도 주지 않은 채 백경화는 이연의 안을 범했다.
극락에 든 이처럼 백경화는 정신을 놓고 한참 이연의 안을 맛보았다. 한참 박아 대던 그가 과도한 쾌락에 몸부림치고 있는 이연의 몸을 일으킨 것은 그다음이었다. 단숨에 이연을 제 위로 이끈 백경화는 그 순간 제 눈앞에 나타난 탐스러운 유실을 잘근 깨물었다. 혀로 할짝거리다가 뽈록하게 솟은 선을 따라 덧그리던 백경화는 그 순간 제게 온몸으로 매달려 오는 이연의 몸을 끌어안았다.
그들은 그리 한참 위아래로 박자를 맞춰 방아를 찧어 댔다. 그 후 찾아온 사정의 여운은 지독했다.
백경화는 순간적으로 시야가 점멸하는 것을 느끼며 제 쪽으로 늘어지는 이연을 받아 안았다.
이연은 지친 얼굴 곳곳에 내려앉는 입술을 끝으로 정신을 놓고 말았다.
지독한 어둠 속이었다. 익숙한 듯하면서도 낯선 곳에 서서 그는 잔뜩 미간을 찌푸렸다. 불길함을 머금은 어둠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깨달았다. 꿈이란 것을. 곧 그 어둠이 저를 짓누르며 지독한 악몽을 선사할 것이란 것도.
‘용서… 못 해…….’
바닥에서부터 기어 올라온 어떠한 것이 그의 어깨에 매달리며 귓가에 속삭였다.
‘더럽고, 잔악한 것.’
끔찍하게 뒤틀린 형상으로 그의 죄악을 낱낱이 드러내기 시작했다. 제 어미를 죽이고, 그 피를 덮어쓴 채 언제까지 행복할 것 같으냐……. 원통하도다.
‘내 원귀(寃鬼)가 되어서라도 너를 증오할 것이니라!’
얼굴 바로 옆에 붙어 증오를 드러내는 존재가 속삭였다.
‘그 손으로 만지는 아이도 함께 지옥에 떨어지리니!’
“……!”
그는 낮은 신음을 흘리며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귀기 서린 안광으로 주위를 살피던 그의 시선이 제 옆에 잠들어 있는 존재를 향한다. 어디 탈 난 곳 없는지 세세히 살피고 나서야 잔뜩 들어가 있던 어깨의 힘을 뺄 수 있었다. 사위는 쥐 죽은 듯 고요했다. 날이 밝으려면 아직 한참 먼 듯 보였다.
그러나 다시 누운 그는 방안이 온통 빛으로 물들 때까지 결국 잠들지 못했다.
이연은 볕 잘 드는 툇마루에 앉아 백경화에게 손을 내맡긴 채 반쯤 졸고 있었다. 그런 이연의 손끝을 잡고 백경화는 작은 교도(交刀)로 조심스레 손톱을 깎아 주는 중이었다. 혹 어디 상할세라 안력까지 높여 온 집중을 다해 작은 손톱 끝을 정리하는 백경화의 손길이 참으로 애틋했다. 깨끗하게 정리가 끝난 손톱의 매끄러운 표면을 몇 번이고 쓰다듬다 다음 손가락으로 교도를 옮겨가길 수차례. 드디어 마지막 손톱까지 정리한 백경화가 교도를 놓고 이연의 손끝에 후후- 입바람을 불었다.
이연은 한참 꾸벅이며 졸다 간지럽게 손끝을 스치는 입바람을 느끼고서야 고개를 들었다.
“…다 끝난 게야?”
“아직 발톱이 남았사옵니다.”
“그건 내가 하마.”
“제가 해 드릴 것이옵니다.”
손톱을 자를 때와 마찬가지로 다시 한번 서로 하겠다 작은 승강이질이 오갔다. 하지만 이번에도 이연은 백경화를 꺾지 못하고 폭 한숨만 내쉬었다. 패배 시인이었다. 기실 매번 이리 실랑이하지만 정작 이연이 백경화를 이긴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고로 이연은 궁을 벗어나고서도 단 한 번도 제 조갑을 스스로 정리하여 본 적이 없었다.
“나도 이 정도는 할 수 있음이야.”
“그저 제가 해 드리고 싶어 그러하나이다. 부디 제 소소한 취미를 빼앗지 말아 주소서.”
“…별게 다 취미구나.”
이게 즐겁느냐? 백경화는 말없이 눈으로 물어 오는 물음에 이연의 발바닥을 간질이며 답했다.
“매우 즐겁나이다.”
진실로 그러하다는 듯 이연을 바라보는 백경화의 두 눈이 작게 반짝였다. 그 모습에 이연은 옜다, 맘대로 하라며 제 발을 백경화에게 내맡기고 말았다. 저가 좋아서 하겠다는데 어쩌누. 하고픈 대로 하게 두어야지.
그래도 미안한 마음 금할 길이 없어 이연은 투덜거리듯 불쑥 입을 열었다.
“시중드는 이가 있었다면 그대가 이런 일 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그네들이 없어 어디가 불편하신지요?”
백경화는 이연의 말에 다소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최소한의 종자만 들였기에 특별히 부릴 일이 없을 때 그들의 곁을 지키는 것은 여선이 유일했다. 혹 그것이 생활하는 데 불편했나 싶어 백경화는 순간 마음이 철렁했다.
다행스럽게도 이연에게서 돌아온 반응은 그것이 아님을 말해 주고 있었다.
“이리 그대가 다 해 주는데 불편할 게 무어 있느냐? 단지 그대가 이런 일을 하는 것 보고 싶지 않아 그러지.”
“그런 것이라면 신경 쓰지 마소서. 제 임께 드리는 모든 것은 다 제 손을 거쳤으면 좋겠나이다.”
그리 말하며 빙그레 웃는 백경화를 눈에 담던 이연은 제 무릎에 턱을 괴었다. 토각토각, 이연은 백경화의 손에 의해 정리되는 발톱을 잠시 내려다보다 슬며시 손을 뻗었다. 아래로 깔린 길고 풍성한 백경화의 눈썹이 마치 그를 유혹하는 듯했다.
“그래도 언제까지 이리 그대에게 맡길 수는 없는 노릇인데.”
“이리 평생 살고 싶다 하오면 들어주실는지요?”
백경화는 제 볼을 감싸는 작은 손바닥에 얼굴을 부비며 잔잔히 되물었다. 그에 이연이 어깨를 떨며 웃다가 답했다. 누구 소원이라고 못 들어줄까.
그 대답에 만족한 백경화는 고개를 돌려 제 볼에 닿아 있던 손바닥에 입술을 묻었다. 제 스스로 콧등을 갖다 댄 사나운 짐승처럼 그르릉, 목을 울리던 백경화가 이연을 향해 진심을 토해 낸 것은 그 후였다.
“제가 장원에 사람을 들이지 않는 이유를, 진정 모르시나이까?”
그들이 네 곁에 머무는 게 싫어 그러하다.
이연은 제 눈을 똑바로 직시한 채 입을 여는 백경화를 바라보다 엄지로 그의 눈가를 쓸며 답했다. 알지. 내 정인이 얼마나 투기심 많고, 독점욕 많은지… 나 또한 그러한데 어찌 그걸 몰라.
그리 속삭여 주자 백경화의 두 눈에 서렸던 사나움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이연은 두 손을 뻗어 백경화의 얼굴을 잡고 짧게 입 맞춘 뒤 말했다.
“그럼 나도 해 주마.”
순간 이연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 백경화는 제 손에서 교도를 뺏어 가려는 몸짓에 얼른 그것을 물렸다.
“어찌 그 귀한 손에……!”
“내겐 네 손도 귀하느니. 어찌 항상 나만 받겠느냐?”
내 오늘에야말로 깎아 주고 말리라! 그러니 얼른 이리 내놓거라, 백경화는 눈앞에서 살랑대는 이연의 손을 잡아 내리며 속으로 한숨지었다. 이 아이가 또 시작이구나, 그는 한탄하다 곧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제 손은 정리할 것 없나이다.”
백경화는 보란 듯 이연의 눈앞에 제 손을 쫙 펼쳐 보이고는 빙그레 웃었다. 이연의 얼굴에 언뜻 못마땅함이 서렸다.
“어찌 항상 그리 깨끗해? 혹시 맨날 나 모르게 깎는가?”
“그럴 리가요. 때마침 정리할 시기여서 어제 깎았나이다.”
“…….”
백경화는 살짝 부푼 이연의 볼 끝을 찌르며 속으로 웃었다. 사실 이연의 말대로였다. 그는 항상 이연의 조갑을 정리하기 전에 제 것부터 깨끗하게 다듬었다. 제가 해 주고픈 마음만큼 이연의 마음도 그러하다는 것은 상당히 기꺼우나, 굳이 그 작은 손에 제 것을 맡길 생각은 없다. 좋은 것만 들려 줘도 아쉬운데 어찌 이런 일을 하게 만들까.
그럼에도 그는 속상해하는 이연을 향해 거짓 약조를 입에 담았다.
“다음에 꼭 해 주소서.”
“…어찌 그 말은 매번 듣는 듯하구나.”
당연히 이연은 속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별말 없이 다시 백경화의 손에 제 발을 맡겼다. 그것마저 말끔하게 다듬은 백경화는 자리를 정리한 뒤 다시 이연을 품에 끌어안으며 말했다.
“이제 이리 있지 않으면 품 안이 너무 허전하나이다. 어찌하면 좋으리까?”
짐짓 걱정스럽다는 듯 울상을 짓고 있으나, 그는 호선을 그리고 있는 입매를 숨기지 못했다.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이연이 낮게 웃음을 흘리며 백경화의 등에 두 손을 둘렀다.
“어찌하긴 어찌하누. 이리 있으면 될 일이지.”
“종일 이러고 있으실 수 있겠나이까?”
“못 할 것 없지.”
그 대답에 백경화가 이연의 몸을 더욱 부둥켜안았다. 참으로 큰일 날 소리를 하는구나. 정말 제가 놓아주지 않으면 어쩌려고.
“그리해도 괜찮대도.”
그럴 리가 없는데 마치 제 속을 들여다본 듯 툭- 튀어나온 이연의 말에 백경화는 순간적으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런 그를 흘깃, 올려다본 이연이 덧붙였다.
“안 놓아줘도 괜찮다.”
“그럼 중반(中飯) 들 때까지만.”
이리 안고 있겠나이다. 백경화는 그리 속삭이며 이연을 제게 더욱 바짝 당겨 안은 뒤, 고개를 숙여 이연의 코끝을, 차례로 입술을 할짝였다. 다디단 당과(糖菓)를 핥아 먹는 것처럼 아리따운 얼굴에 황홀경이 서린다. 간지러움에 몸을 움츠리던 이연의 입에서 곧 가느다란 웃음보가 터졌다.
그 웃음을 입 안으로 받아 삼키고 있던 백경화의 행동이 멎은 것은 여선이 부러 낸 기척을 읽고서였다. 한 팔로 이연을 끌어안고 말랑한 볼을 쓰다듬고 있던 백경화는 곧 곤혹스럽게 웃으며 이연을 풀어 주었다.
“여장(旅裝)을 꾸리는 데 문제가 있는 듯하니, 잠시 다녀오겠나이다.”
이연은 가타부타 말없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답했다. 백경화는 그런 이연을 안아 들고 내실로 향했다. 그는 폭신한 보료 위에 이연을 내려놓으며 덧붙였다.
“예서 잠시만 기다리소서.”
“알았느니. 다녀오거라.”
“심심하시더라도 밖에 나가시면 아니 되십니다.”
“…알았대도.”
“위험해 보이는 것엔 손 하나 대지 마시구요.”
“……경화야, 여기 방 안이다.”
이연은 유난을 떨어 대는 백경화를 향해 일침을 놓고 얼른 가라며 직접 그 등을 떠밀었다. 얼른 나가야 얼른 돌아올 것 아니냐, 백경화는 그 말을 듣고서야 걸음을 옮겼다.
밖으로 나온 백경화는 대기하고 있던 여선을 향해 앞서라 턱짓한 뒤 그 뒤를 따랐다.
손님용으로 지어진 별당에 들어서는 그들을 맞이한 것은 위문이었다.
“무슨 일이더냐?”
한참 좋을 때 방해받은 백경화는 상한 심기를 숨기지도 않은 채 위문을 향해 톡 쏘아붙이며 착석했다. 위문은 잠시 백경화를 내려다보다 얼른 입을 열었다.
“일정을 조금 더 서둘러 주실 수는 없으신지요? 지금 준비하는 것들로만 해도 나흘은 걸릴 것입니다.”
“그것도 최대한 앞당긴 일정이다. 모자람 없이 모시려면 보름은 더 준비하여야 하는 것을.”
백경화는 탁자 중간에 놓여 있는 차를 직접 따라 마시며 목을 축인 뒤 아연한 낯의 위문을 향해 답했다. 얼핏 아쉬움까지 서린 그 대답에 위문은 가슴이 답답해져 옴을 느꼈다. 백경화 홀로 간다면 그런 준비 따위 필요도 없는 일이다.
그런 위문의 생각을 읽기라도 하듯, 백경화는 한껏 비틀린 입매를 숨기지 않은 채 물었다.
“내가, 저 아이를 두고, 오가는 데 ‘석 달’이 걸리는, 그 거리를 홀로, 갈 것 같으냐? 사흘도 아니고 ‘석 달’이나?”
“그럴 리가 없지요.”
백경화의 ‘석 달’이 강조된 물음에 위문 대신 답한 것은 여선이었다. 더불어 그는 모든 걸 초탈한 표정으로 고개까지 주억였다. 절대로 그럴 리가 없으시지요. 나흘이면 꽤 짧은 편입니다.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고. 위문은 잠시 백경화의 뒤에 시립해 있는 여선을 노려보다 고개를 돌렸다. 기실 백경화를 데려오기 전 여선은 위문을 향해 몇 번이나 말했다. 차라리 이연 님을 납치해서 튀시는 게 더 빠르실 것입니다, 라고. …물론 목숨은 장담 못 한다는 말도 함께.
암만 저들의 염장질에 익숙해졌다 하더라도 어찌 저리 태연자약할 수 있단 말인가.
‘때깔만 번지르르해져서는…….’
속으로 짧게 혀를 찬 위문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문지르다 고개를 들었다.
“그리 붙어 있고도 아직도 부족하신 겝니까?”
기가 막힌 심정으로, 그는 그리 되물었다. 여기서 머문 게 이제 고작 이틀인데… 그가 느끼는 소감은 단 하나였다. 집에 가고 싶었다. 간절하게 그냥 다 팽개치고 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이다.
그를 향해 돌아온 백경화의 대답은 그의 그런 소망을 더욱 절실하게 만들었다.
“누가 심장을 떼어 놓고 다닌다더냐.”
“……예, 그건 그냥 됐습니다.”
위문은 여상하게 돌아온 백경화의 대답에 급히 말을 돌렸다. 이 이상 들어 봤자 제 귀만 썩을 뿐이다. 정말이지 다 엎고 떠나고 싶은 마음뿐이지만, 옅게 남은 이성은 그를 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모든 것을 포기한 위문은 이마를 짚은 채 짧게 신음했다.
“이 속도라면 즉위식에 맞추기 힘드나이다.”
“어차피 눈에 띄는 곳에서 보지도 못할 것인데, 마음으로 축하해 주면 될 일이지 꼭 날에 맞출 필요 무에 있겠느냐. 아우님 또한 고작 그런 일에 마음 상해 할 이도 아니고.”
위문은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시느냐, 따지려던 것을 필사적으로 억눌렀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좋은 날 함께 자리를 빛내 주어야 하는 것이 이치이건만. 직접 서찰까지 보낸 무현에 대한 예의가 없어도 이리 없을 수가 있나.
누가 보더라도 꾹꾹 불만을 내리누르고 있는 위문의 모습을 지켜보던 백경화는 잠시 입맛을 다시다 낮게 혀를 찼다. 어디 농담도 못 하겠다. 어째 제 주위엔 꽉 막힌 인사들뿐인고.
“가마를 끌 이들이 어디 보통 이들이냐. 경공을 펼치면 네 예상보다 배는 빨리 도착할 테니 그리 걱정하지 말거라.”
생각지도 못한 백경화의 말에 위문의 얼굴이 펴지며 그 위로 깨달음이 스쳤다. 그러고 보니 그렇다. 현재 백경화를 ─정확히는 이연을─ 호위하고 있는 이들은 여선만이 아니었다. 열둘의 군사령을 떠올린 위문은 혀로 입술을 축인 뒤 조심스럽게 물었다.
“모두 다 남아 있나이까?”
“왜? 데려가고 싶으냐?”
“…….”
위문은 피식, 비소와 함께 돌아온 비아냥거림에도 불구하고 아니라 답하지 못했다. 탐이 나지 않는다면 거짓이다. 백경화를 따르는 그들의 실력이야 이미 보증되어 있는 것이고, 그 충성심 또한 대단한 것이었다. 이제 친왕의 신분도 아니고, 딱히 위험한 일도 하지 않는 그에게 군사령들이 절실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이 절실한 것은 항상 암적(癌的)과 다투고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무현이었다.
백경화는 두 눈에 욕심을 담고서도 그렇다 답하지 못하는 위문을 바라보다 짧게 웃음을 터트렸다.
“데려가거라.”
“……!”
무현은 이번에야말로 경악하고 말았다. 놀란 것은 비단 그만이 아니었다. 있는 듯 없는 듯 자리를 지키고 있던 여선 또한 놀라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한 채 백경화를 돌아보았다. 순간 흔들리는 기척으로 보아 별당을 호위하고 있던 군사령들에게서도 동요가 일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중 태연한 것은 오로지 백경화, 그 하나였다.
“이번 성황제국에 도착하게 되면 모두 무현 황태자에게 양도하마. 나야 이제 앞으로도 이리 살 터인데 무에 필요 있으려고. 그네들도 뜻을 펼치려면 무현 태자 곁에 있는 것이 좋을 터.”
“주군…….”
백경화는 당황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여선의 부름에 답하지 않았다. 이제 와 하는 말이지만 오래전부터 염두에 두고 있던 일이다. 이제 저는 이연과 녹음(綠陰)에 묻혀 오순도순 평화로이 살 텐데 굳이 그네들이 곁에 머물 필요는 없었다. 모두 어렵사리 그 자리에까지 올랐으니, 무현의 곁에서 쓰이다 보면 언젠가 더 높은 관직에 앉는 날도 올 것이다.
“물리시기 없으십니다.”
“오냐. 허나 그들이 원하지 않으면 나도 어쩔 수 없음이야.”
“은혜에 진심으로 감읍하나이다.”
위문은 진심을 다해 백경화에게 고개를 조아렸다. 아직 확정된 일은 아니나 그것만으로도 위문의 마음은 든든했다. 항상 인재가 모자라는 것이 황제의 곁이라, 무현의 그림자 호위인 그로서는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러나 그 감동은 아쉽게도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허면 이것으로 궁금증은 모두 풀린 것이겠지?”
“…….”
그렇다, 하면 당장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 나가 버릴 것 같은 백경화의 모습에 위문은 싸하게 식고 말았다. 그가 어찌해서 저리 서둘러 돌아가려 하는지, 단 이틀 만에 깨우쳤기 때문이다. 이제 고작 한 식경이 지난 것 같은데 얼마나 떨어져 있었다고 저리 유난인가, 말도 못 하게 어이가 없다.
“아예 업고 다니지 그러십니까?”
“허락만 한다면 그리 못 할 것도 없지.”
“……아직까지도 그리 좋으십니까?”
대답을 듣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물음을 굳이 던진 것은, 이연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백경화가 너무나 너그럽게 미소 짓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에 위문의 의문은 더욱 깊어졌다. 그들이 이곳에 머문 지도 벌써 햇수로 3년이다. 보통의 부부라면 벌써 권태기를 맞이했을 만큼의 시간이 지난 것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질려 하기는커녕 누가 보더라도 서로를 귀애(貴愛)하며, 사랑에 빠진 모습으로 더 붙어 있지 못해 안달이었다.
백경화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질려 하는 위문의 얼굴을 한 차례 눈으로 훑어 내린 후 제 턱을 쓸며 반문했다.
“우문을 하는구나. 세상 어느 뉘가 숨 쉬는 걸 질려 한단 말이냐?”
저가 이연을 사모하는 것은 그러했다. 숨 쉬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럽고, 거스를 수 없는 진리였다. 이연은 그의 시계(視界)를 이루고 있는 틀이었고, 거룩한 그만의 신이었다. 그 모든 것을 백경화는 숨길 마음이 없었다. 만물에게 고할 수도 있었다.
자신은 빠져나올 수 없는 수렁 같은 열병을 앓고 있노라고.
“그런데… 그걸 그대가 내게 묻는 겐가?”
“…….”
“내 알기론 그대의 순애보 또한 만만치 않은데, 말이야.”
“무슨 말씀 하시는지 모르겠나이다.”
위문은 놀리듯 이어지는 백경화의 말을 단번에 잘라 내고 제 앞에 놓여 있던 차를 한 모금 머금었다. 괜히 들쑤셔 본전도 못 찾은 기분이다. 위문은 행복에 겨운 백경화의 모습에 불쑥 심술이 나, 방금 전 느꼈던 고마움을 저 멀리 내던졌다. 그런데 이대로 당하자니 배알이 꼴려, 말로 이기지 못할 것을 알면서는 그는 입을 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도 전 누구처럼 무턱대고 후궁 자처할 배짱은 없나이다.”
잊고 있던 과거를 거론하는 위문의 말에 움찔, 잔을 들고 있던 백경화의 손끝이 떨렸다. 눈을 치떠 위문을 바라본 백경화의 미소가 위험스럽게 변하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다.
“그 정도 배짱도 없어서야 어디 천자(天子)를 유혹할 수 있겠느냐?”
“어디 그게 배짱 하나로 될 일이나이까. 그러고 보니 당의 차림이 제법 잘 어울리셨는데 말입니다.”
“내가 좀 어여쁘긴 했지.”
“…….”
대놓고 비꼬는데도 받아들이는 백경화는 뻔뻔하기만 했다. 그러나 그것은 위문 또한 인정하는 바라 잠시 받아칠 말을 찾지 못했다. 그만큼 완벽한 사내가 여장에 위화감이 없었다는 게 오히려 더 끔찍한 일이지만, 어울렸다는 것만큼은 부정키 힘들었던 탓이다.
말문이 막혀 아무런 말도 못 하고 있는 위문을 향해 도리어 한술 더 뜬 것은 백경화였다.
“지금도 하라면 못 할 것 없느니.”
물론 이연이 보고 싶다 했을 때의 이야기였다. 백경화 역시 딱히 그런 취미가 있는 것은 아니라 저 스스로 나서서 하고 싶은 맘은 없다. 어디까지나 위문을 놀리기 위한 일환이었을 뿐이었다. 그때까지 그는 자신의 말이 곧 현실로 다가올 것이란 것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했기에 그는 자신의 말에 괴로워하는 위문의 모습을 즐거이 관람할 수 있었다. 은근 놀리는 재미가 있는 위문이다. 그 얌전한 도화마저 때때로 한 번씩 찔러 댈 정도니 말 다 했다.
‘그 도화가 국혼이라…….’
그러다 문득 떠오른 생각에 그는 웃던 것을 멈추고 얼굴을 굳혔다. 방금 전 그의 머릿속을 치고 지나간 생각에 저 스스로 충격받은 탓이었다.
“하아!”
백경화의 입을 타고 탄식의 한숨이 흘러나온 것은 그다음이었다. 충격에 이어 돌아온 것은 뼈 시린 자책과 후회였다. 맙소사, 어떻게 이 생각을 못 했지? 정신이 빠져도 이리 빠져서야. 안타까움에 몸을 뒤틀며 한참 후회를 곱씹던 그의 머릿속을 채우고 있는 것은 하나였다.
“왜 그러십니까?”
뜬금없이 시작된 탄식에 답답함을 느끼던 위문이 결국 참다못해 그리 물었을 때도, 백경화는 제 손에 고개를 묻고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온몸에서 풍기는 절망감에 위문과 여선이 서로 눈빛을 주고받으며 묻기를 한참.
진득한 아쉬움을 담은 백경화의 한탄 소리가 들려왔다.
“왕비 자리 한번 앉고 오는 것인데!”
“…….”
“…….”
…분명 내가 잘못 들은 것일 터야.
백경화의 탄식을 들은 일동은 그리 부정했다. 내 귀가 잘못된 게 분명하다고.
하지만 뒤이어진 백경화의 한탄 소리는 너무나 생생하기만 했다.
“그리했으면 나도 정실(正室)이 될 수 있었지 않으냐! 암만 후궁이 총애를 받더라도 첩실인 것을!”
“…….”
“…….”
그만해라, 좀.
자신을 향한 아니꼬운 눈빛을 아는지 모르는지 자괴감에 빠진 그는 연신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당당히 정비 될 수 있는 기회였는데 이걸 놓치다니…… 이 일을 어찌할꼬. 혼례식도 다시 치렀으면 되었을걸. ……나도 국혼 치를 수 있었는데. 이 일을 아쉬워서 어찌하나. 경악하다 못해 넋이 나간 그들을 아는지 모르는지 백경화의 넋두리는 한참 동안 이어졌다.
아니 저가 남자란 건 생각도 안 하는 건가? 이연의 위신은? 역사에 어찌 기록될지 두렵지도 않아? 따지고 싶은 것은 많았으나 그렇다고 아랑곳할 그가 아님을 알기에, 그들은 하고픈 말을 꿀꺽 삼켰다. 괜히 한마디 해 봤자 미운털밖에 더 박히랴.
실로 기절초풍할 탄식이다.
그리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백경화는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전서를 띄우고 오겠다는 위문의 말도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생각하면 할수록 아깝고 억장이 무너질 것 같아 백경화는 제 머리털이라도 잡아 뽑고 싶은 심정이었다.
“누가 귀띔이라도 해 줬으면 참 좋았을…….”
딸꾹!
그 순간, 백경화는 제 귀를 자극하는 애역(呃疫)2) 소리에 하던 말을 멈췄다. 이건 무슨 소리냐. 소리가 난 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새하얗게 질리어 제 입을 틀어막고 있는 여선이 보인다.
설마……. 백경화는 머릿속을 채운 의심에 저와 시선을 맞추지 못하고 있는 그를 향해 미심쩍게 되물었다.
“생각했더냐?”
돌아온 대답은 격했다.
“그, 그, 그렇지, 않……. 저, 저, 전혀, 새, 생각, 생각도…… 끄읍!”
생각했구나.
딸꾹! 마지막을 장식한 애역 소리가 모든 걸 말해 주고 있었다. 망했다. 여선은 점차 스산해지는 백경화의 두 눈을 차마 마주하지 못한 채 슬며시 고개를 돌렸다.
난 이제 죽었구나, 그러게 누가 그리 유별나고 아니꼽게 행동하랬더냔 말이다. 어느 정도였으면 저 알아서 간언하였을 텐데.
“네, 이……!”
“어르신, 안에 계신지요? 이향이옵니다.”
질끈, 두 눈을 감고 머리 위로 떨어질 불호령만을 기다리던 여선은 그 순간 들려온 목소리에 반색했다. 생각이고 뭐시고 간에 일단 살고 보자는 마음에 ‘나가마! 기다려라! 꼭, 기다려라!’를 수십 번 외친 뒤 그는 밖으로 튀어 나갔다. 후일은 나중에 기약하고팠다.
“하!”
백경화는 꽁지 빠진 새처럼 후다닥 튀어 버린 여선의 행태에 허망한 웃음만 연신 터트렸다. 그러다 후다닥거리는 기척이 여선 하나만이 아니란 것을 감지한 백경화의 시선이 천장을 향한다. 잘못 느낀 것이 아니었다. 방금까지 그를 호위하던 군사령들의 기척이 사라진 것이다. 어찌하여?
의문은 곧 풀렸다.
그들 모두가, 한통속이었다.
쿵! 분노를 참지 못한 백경화의 기운이 폭발한 것은 그다음이었다.
“무, 무슨 일 있으신지요?”
새하얗게 질린 채 밖으로 튀어나온 여선의 손에 고대로 들려 별당과 멀리 떨어지게 된 이향은 얼떨떨한 낯으로 그리 물었다. 그러나 여선은 대답도 하지 못한 채 꽤 멀어진 별당의 기척만 살피기 바빴다.
“어르신?”
“그, 그래……. 오늘은 어인 일로 찾아왔느냐?”
“금일, 저녁상을 차리라는 명을 받았사옵니다.”
그러고 보니 백경화가 곧 길을 떠날 이연을 위해 든든하게 먹여야겠다 언질을 하였더랬지. 덕분에 목숨 연명하였지만, 음식 준비하기도 바쁜 이 와중에 자신은 어이 불렀나 알 수가 없어 여선은 말없이 이향을 내려다보았다. 그 시선에 새초롬히 얼굴을 붉힌 이향이 답했다.
“별건 아니옵고, 기미 좀 봐 주십사…….”
“또?”
“…싫으시면 다른 이에게 부탁하겠사옵니다.”
“아니, 싫다는 게 아니라…….”
여선은 왜 항상 굳이 저를 찾아와 맛을 봐 달라는 건지 알 수가 없어 잠시 침묵했다. 한 가지 더 이상한 건 제가 맛본 것들은 이연의 상에 오른 적이 없다는 점이다. 주면 주는 대로 생각 없이 배부르게 먹을 만큼 참 맛났는데 어이하여 매번 이연의 상에서 빼는 것인지 도통 모를 일이었다.
이번에야말로 이유를 좀 물어야겠다 싶어, 말문을 열려던 여선은 그 순간 별당 쪽에서 폭사하는 무형의 기에 다시 냅다 이향을 안고 튀었다. 그의 머릿속에 이향이 나이 찬 처자라는 사실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현재 그에게 중요한 것은 이 거리에서도 느껴지는 백경화의 분노였다.
큰일 났다. 저 상태로 봐서는 오늘 하루 눈에 띄지 않는 게 상책이다.
저에게 안긴 이향의 얼굴이 익어 가고 있음을 알지 못한 여선은 자못 우울하고 심각한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하룻밤 묵을 만한 곳을 소개해 줄 수 있느냐?”
아무래도 오늘밤 피신 좀 해야 할 듯싶구나. 먼 곳을 바라보며 다소 우울하게 던져진 여선의 말에, 이향은 얼른 저희 집에 빈방이 하나 있는데 원하시면 머무시라 답했다.
“정녕 그리해도 되겠느냐? 참으로 고맙구나.”
여선의 고운 때깔의 일등공로자- 이향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수줍은 행동과 달리 이향의 속에서는 꽃바람이 일었다. 앗싸, 땡잡았다.
이향은 속으로 희희낙락하며 흘깃, 여선을 올려다보았다. 여전히 별당 쪽 기색을 살피고 있는 그의 모습에 가슴이 두방망이질 치기 시작했다. 그것을 티 내지 않기 위해 잠시 속으로 심호흡한 이향이 입을 열었다.
“그럼 예서 조금만 기다리소서. 음식 준비는 모두 끝났사오니 정리만 하고 오겠나이다.”
“오냐. 내 예서 꼼짝도 하지 않고 있으마.”
돌아다니다 백경화의 눈에 띄어 경을 치느니 여기서 망부석이라도 되겠다. 여선은 그런 마음으로 저를 올려다보는 이향을 향해 고개를 주억였다.
이향은 여선에게 곱게 인사한 뒤 부엌 쪽으로 총총 사라졌다. 잠시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여선은 진득한 한숨을 내쉬었다. 하필 그때 딸꾹질이 터질 것이 뭐람. 쓸데없이 진솔해서 피를 보게 생겼구나. 이연과 관련된 일이니 백경화의 화가 쉽사리 풀릴 리도 없고, 한동안 고달플 것이 틀림없다.
“하아, 내 팔자야.”
절로 팔자 소리가 나오는 인생사에 그는 고개를 내젓고 말았다. 그냥 이번 참에 무현 황태자 쪽으로 옮길까. 불쑥 든 생각에 여선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장난처럼 한 생각이긴 하지만, 고민이 아니 될 수 없는 일이다. 그도 뜻이 있고, 그 뜻을 이루고자 어려운 무관 시험을 치르고 지금 이곳에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천재 소리 들으며 어린 나이에 급제하여 무친왕을 보필하였다 하나, 그 모든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백경화의 말대로 이곳에 남는다는 것은 그 모든 것을 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허나 쉽사리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 것도 사실이었다.
얼마나 혼자만의 생각에 잠겨 있었을까.
“어르신?”
“아, 언제 왔느냐?”
불쑥 들려온 이향의 부름이 있고서야 그는 상념에서 깨어날 수 있었다. 의아하게 저를 올려다보는 이향을 향해 웃어 보인 여선이 물었다.
“다 끝났느냐?”
끄덕끄덕, 가볍게 돌아온 고갯짓에 여선은 이향을 향해 앞장서라 말했다. 말없이 장원을 벗어나 걷기를 한참. 이향이 여선을 향해 물었다.
“혹 오늘 저녁으로 드시고 싶으신 게 있으신지요? 준비하겠나이다.”
“네가 해 준 건 모두 맛나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갑작스럽게 신세 지는 것도 민폐일 터인데 먹을 것까지 신경 쓰이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여선은 춘풍 부는 여인의 마음도 짐작하지 못한 채 여상하게 답하며 이향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향은 어린아이 대하듯 제 머리를 쓰다듬고 멀어지는 여선의 손을 잠시 노려보다 고개를 숙였다.
이이는 아직도 제가 어린아이인 줄 아나 보다. 언제쯤 되어야 저를 여자로 봐 주려나. 속상하고 우울하여 이향은 입술을 삐죽였다. 여선이 제집에 머무른다는 흥분도 점차 가셨다.
“집안 어른께 미리 언질을 주지 않아도 괜찮으려나.”
“괜찮사옵니다. 나리께서 머무신다 하시면 부모님도 기뻐하실 것이옵니다.”
여선은 이향의 대답에도 불구하고 잠시 가던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흘깃, 이향까지 한 번 내려다본 여선은 제 생각이 짧았음을 깨달았다.
“이것 참. 내가 큰일 낼 뻔하였구나. 연치 찬 여인 집에 머물 생각을 하다니.”
백경화의 분노가 그만치 두렵긴 하였지. 여선은 속으로 혀를 차며 말갛게 저를 올려다보고 있는 이향을 향해 사죄했다.
“오늘은 내 알아서 다른 곳에 머물 터이니 넌 이만 돌아가거라.”
“…저희 집에 머무셔도 되옵니다.”
“큰일 날 소리 하는구나. 그러다 소문이라도 나면 어찌하려고.”
혼기 찬 여인 집에 여선이 머물렀다는 소문이 이 자그마한 마을에 얼마나 빨리 퍼질 것이냐. 당장 그날로 혼인날 잡았다는 말이 나돌 것이 뻔했다. 말이야 바른말로 저야 사내이니 괜찮다 치지만 이 아이 앞길은 어찌한단 말인가.
그 생각에 여선은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이향은 말없이 여선을 올려다보며 몇 번 입술을 달싹이다 입을 열었다.
“……그리되면 나리께서 책임져 주시면 되지 않사옵니까?”
“뭐라? 어린것이 못 하는 말이 없구나.”
여선은 이향의 당돌한 말에 짧게 웃음을 터트렸다. 내 짐작은 하였다지만 참 맹랑한 여아로다.
“너와 내 나이 차가 몇인데 그런 말을 하느냐.”
“…여인과 사내인데 무엇이 문제입니까?”
내 보니 사내와 사내더라도 별문제 없는 것이 연심(戀心)이더이다. 이향은 짧게 덧붙이며 빤히 여선을 올려다보았다. 그 눈동자에 서린 진심에 여선은 퍽 당황하고 말았다. 설마 이 아이가 제게 그런 마음을 품었을 줄은 정녕 몰랐다.
“이향아, 아직 네가 어려 제대로 된 사내를 못 만나 이러는 것이다. 조금만 기다리면 네게 어울리는 사내가 나타날 터이니…….”
“제대로 된 사내는 무엇이며 제게 어울리는 사내는 또 무엇입니까? 설사 그런 사내가 있으면 무엇하나이까. 제가 여생을 함께하고픈 사내는 나리인 것을요.”
“…….”
여선은 둑이 터지듯 흘러나오는 이향의 고백에 잠시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숨 막힐 듯한 정열(情熱)이 순식간에 그를 덮쳐 왔다.
“……미안하구나.”
“무어가 미안하십니까? 그냥 고개만 끄덕이시면 되나이다.”
“이번에 떠나게 되면,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
지나칠 정도로 솔직한 여선의 대답에 이향의 표정이 멍해졌다. 방금 저가 들은 말이 무언가 고뇌하던 이향의 표정이 차차 일그러졌다. 퍽! 퍽! 난데없는 주먹질이 이어지기 시작한 것은 그다음이었다.
“이향아!”
“내가 그동안 해 먹인 게 얼만데! 곱게 살찌워 놨더니 딴 데로 간다고? 참으로 무정하십니다!”
퍽퍽! 두 주먹 꽉 쥐고 휘두르는 것이 어찌나 가열한지 여선은 때리면 때리는 대로 맞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무공으로 다져진 육신인데도 그 아픔에 여선은 악악! 속으로 비명만 질러 댔다.
“헉… 헉……!”
이향은 그리 여선을 때려 대더니 체력이 다했는지 한동안 숨만 할딱였다. 그러고도 한동안 여선을 노려보던 이향이 말없이 돌아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여선은 말을 잃고 멍하니 그 뒷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점차 멀어지던 이향이 다시 몸을 돌려 달려온 것은 얼마 가지 않아서였다.
맹렬한 기세로 저를 향해 달려온 이향이 제 멱살을 쥐는 것에 여선은 저도 모르게 움찔, 방어 자세를 취하고 말았다. 두 손을 들어 머리 위로 교차시키고 있던 그는 순간 제 입술에 닿아 온 말캉한 감각에 눈을 홉뜨고 말았다.
이가 빡! 소리가 날 정도로 부닥친 입술에서 홧홧한 통증이 밀어닥친 것은 바로 그 직후였다.
“악!”
“큭!”
부닥쳤던 만큼이나 재빨리 떨어진 둘은 제 입술만 붙잡고 끙끙 앓았다. 살다 살다 이리 저돌적인 입맞춤은 처음 받아 본다. 여선은 아픈 와중에도 어이가 없어 터지려는 웃음을 필사적으로 억눌렀다. 차마 부어터진 입술을 붙잡고 훌쩍이고 있는 이향 앞에서 웃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괜찮으냐?”
“…아프옵니다.”
“그러게 웬 난리냐. 어디 좀 보자꾸나.”
쯧, 여선은 낮게 혀를 차며 입술을 가리고 있는 이향의 두 손을 떼어 냈다. 찢어져 핏기가 맺힌 입술에 절로 한숨이 터졌다.
“잠시 그대로 있거라.”
여선은 품 안을 뒤지다 마땅한 게 나오지 않자 제 소맷자락으로 이향의 입술을 훔쳐 주었다. 그러는 동안 이향의 훌쩍임은 이제 울음으로 변해 있었다.
“흐엉… 무정하십니다.”
“그래, 그래. 코도 풀고.”
“킁!! 이리 가심 십 리도 못 가서 발병 나실 거여요…….”
“알았대도 그런다. 도대체 이 무모함은 어디서 나오는 겐지.”
여선은 어이없게 터지려는 웃음을 애써 억누르고 이향을 살폈다. 다행히 크게 흉이 지지는 않을 것 같았다. 이쯤에서 손을 물리려니 애처럼 울고 있는 이향의 얼굴이 여선의 시선을 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이제 마음은 좀 진정이 되었느냐?”
훌쩍, 이향은 여선의 물음에도 가타부타 말없이 코만 훌쩍였다. 어쩌다 이리되었나, 자책감이 들다가도 새삼 여선에게 부아가 치밀었다. 무심하고 무정한 사내! 어찌 여심을 몰라도 이리 몰라!
“진정 이것이 마지막이라면, 입 맞춰 주셔요.”
“…….”
“안 맞춰 주시면 가시는 길 쫓아갈 것이옵니다.”
이향은 눈물 콧물 뒤범벅된 얼굴로 짐짓 어깃장을 놓았다. 풋! 그 순간 귓가에 들려온 웃음소리에 그녀는 의아하게 고개를 들었다. 지금 웃으신 거 아니시지요? 그럼 참말 제가 비참해질 것 같다, 그녀가 그리 입을 열려던 찰나였다.
싸락눈이 내려앉듯 이향의 입술 위로 닿아 온 보드라운 느낌 하나. 방금 전의 것과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한 입맞춤이었다.
“이럴 땐 눈을 감는 게다.”
여선은 두 눈 말똥말똥 뜨고 저를 바라보는 이향을 향해 그리 타박했다. 이 어린것을 데리고 내가 무얼 하나 싶었다.
“이제 되었느냐?”
이제 만족하느냐, 그리 물었건만 이게 웬일인가. 흐어엉, 이향의 울음소리가 더욱 서럽게 이어지기 시작했다.
“입까지 맞춰 줄 정도로 제가 따라가는 것이 싫으시옵니까?”
사실 안 맞춰 줄 줄 알았다. 그래서 오늘 당장 짐 싸 들고 따라갈 생각까지 했던 이향은 이거 먹고 떨어지란 듯한 여선의 입맞춤에 숫제 통곡이 터지고 말았다. 서러워도 이리 서러울 수가.
엉엉 소리 내어 우는 그 모습에 여선은… 터지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큭큭, 어깨까지 떨며 웃어도 이미 이향은 듣지 못했다. 아니, 설마 여선이 웃고 있으랴 싶었다.
“크흠! 그만 울어라. 그러다 눈 붓는다. 해 달라는 것 해 주었는데 울긴 왜 우는 게야.”
“어르신, 미워요.”
…넌 이 와중에 나한테 ‘어르신’이란 말이 나오누. 뭐 이런 게 다 있나. 여선은 기가 막힌 심정으로 이향을 바라보다 폭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삐약삐약 울어 대는 이향을 겨우 얼러 집으로 데려다주었다. 가지 마시라 옷자락 잡아 대는 손을 떼어 낸다고 애 좀 먹었다.
혼을 쏙 빼앗긴 이처럼 한참 넋을 놓고 서 있던 그는 순간 화끈거리는 느낌에 입술을 매만졌다. 그러다 돌연 벽을 짚고 돌아선 뒤─ 미친 듯 웃었다.
그는 미친놈처럼 벽에 기댄 채 한참을 웃었다. 태어나 이리 웃긴 것은 처음이다. 어쩐지 제 인생 저당 잡히는 소리가 저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듯도 하였다. 이쯤 되면 인정할 수밖에.
“설마 병아리한테 물릴 줄이야…….”
저걸 어찌 키우나. 허탈하게 흘러나온 목소리엔 숨기지 못할 즐거움이 스며 있었다.
역시 사람 인생은 한 치 앞도 모르는 법이었다.
성황제국으로 향하는 여정은 순탄했다. 사실 순탄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감히 누가 곧 즉위할 성황제국 황제의 그림자 호위와 무친왕 직속 군사령들, 더군다나 살아 있는 무신(武神)으로 추앙받는 백경화가 타고 있는 가마를 해코지할 수 있겠는가.
산적을 만났어도 가마 안에 탄 이연 모르게 모든 것이 해결되고도 남을 저력들이었다. 그러나 실상 그들의 마음은 그리 편하지 못했다. 완벽을 가장한 무리 속에서 문제는 따로 존재하고 있었다.
이연은 넓게 트인 창을 통해 빠르게 바뀌는 배경을 바라보다 흘깃, 등 돌리고 누워 있는 백경화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마치 토라진 아이처럼 팔짱을 끼고 누워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그 모습이 시위라도 하는 것 같다.
“자느냐?”
“……아니옵니다.”
“그럼 나 좀 보아.”
“…….”
놀랍게도 백경화는 이연의 부탁이 있고서도 쉽사리 돌아보지 않았다. 허나 이연이 몇 번 소맷부리를 잡고 흔들자 매가리 없이 몸을 일으켜 앉는다. 비록 시선은 바닥을 향하고 있다지만, 반항도 일다경을 못 가는 백경화의 모습에 실소가 터질 뻔한 것을 참으며 이연이 물었다.
“내게 화났느냐?”
언제 바닥을 향했냐는 듯, 벌떡 들린 백경화의 두 눈이 이연을 직시하며 강력하게 부정했다. 말도 되지 않는다. 어찌 이 고운 아이에게 제가 화를 낼까!
숫제 고개까지 내저을 기세라 이연의 얼굴에 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그제야 이연이 저를 놀린 것을 깨달은 백경화가 몇 번 입술만 달싹이다 어쩔 수 없다는 듯 같이 웃고 만다.
“이리 오소서.”
그리 말하며 백경화는 당과로 어린아이를 꾀듯 달콤하게 웃었다. 그런 백경화의 품 안으로 파고들며 이연이 고개를 비볐다. 그런 이연을 온몸으로 끌어안고서야 백경화는 숨이 트이는 것처럼 크게 어깨를 들썩였다.
“아까 그 일은 신경 쓰지 마소서.”
“하지만 그건 나도 잘못하였어. 그리 말하지는 말았어야 하는데.”
“아니옵니다.”
신경 쓰지 말라 하니 도리어 의기소침해지는 이연을 품에 안은 채 백경화가 아이를 어르는 것처럼 몇 번 몸을 들썩였다. 이연의 앞에서 보이지 말았어야 할 행동을 한 제가 나빴다. 그는 중반을 들기 위해 잠시 머물렀던 객잔에서의 일을 떠올리며 속으로 한숨지었다. 이미 지난 일이고 제 죄가 가장 큼을 알기에 백경화는 할 말이 없었다. 그럼에도 여선만 보면 부아가 치밀었다.
으득- 저도 모르게 백경화가 이를 갈자, 그 입술을 부드럽게 쓸어 저지한 이연이 물었다.
“도대체 무슨 일인 게야?”
여선에게 그리 살갑지는 않았지만, 쓸데없이 트집 잡지도 않았던 그가 아니던가. 필히 둘 사이에 저가 모르는 일이 있었음인데 백경화는 속 시원히 말해 주지 않았다.
“그냥… 너무 속상하여 그러하나이다.”
“…무슨 일로 그러누?”
이연은 제 물음에 또 입을 다물고 마는 백경화가 답답하면서도 우울해 보이는 그 모습에 더 이상 묻지 못했다. 그저 손을 뻗어 백경화의 단단한 등을 쓸며 위로할 수밖에.
“우리 경화가 이리 속상해서 어쩐다. 내가 무얼 해 주면 마음을 풀려나.”
“정말… 정말 많이 속상하나이다. 다시없을 기회였는데…….”
“오냐, 오냐. 무언지 몰라도 여선이 참 나빴다.”
어찌 우리 경화 속을 이리 썩이나, 괜히 여선까지 들먹이며 이연은 열심히 백경화를 위로했다. 그리고 슬며시 덧붙이는 것이다. 그래도 밥 먹을 땐 개도 안 건드린다는데… 그이도 우리 때문에 고생 많은데, 우리 착한 경화가 그만 용서하여라.
“제가 여선을 용서하오면 무얼 해 주시렵니까?”
“으음… 왜 여선을 용서하는데 내가 뭘 어찌해 주어야 하는고?”
“그럼 용서 안 하렵니다.”
남자는 나이가 들면 애가 된다는 말을 온몸으로 증명하며 백경화가 고개를 팩- 돌렸다. 그 고개를 다시 제 쪽으로 돌린 이연이 다정하게 속삭였다.
“그래, 내가 무얼 해 주면 우리 경화 화가 풀리려나… 말만 하려무나. 내 다 들어주마.”
“갖고 싶은 것이 있사옵니다.”
“무언고?”
갖고 싶은 것이야 저보다 더 잘 구할 능력 있는 사내가 그리 말하니 이연의 얼굴에 절로 의아함이 떠오른다.
이제 하다 하다 수하까지 들먹여 가며 원하는 바를 조르는 그의 모습이 아무렇지도 않은지 어서 말해 보라 눈으로 재촉하는 이연의 얼굴은 말갛기만 하다. 백경화는 거기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나날이 사랑스럽고, 그의 넋을 앗아 간다. 만약 그때 이 아이를 만나지 못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때때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자신은 천운의 소유자가 아닐까 하는. 무수히 버려져도 결국 구원받을 운명의─ 그렇기에 그는 진심으로 갖고 싶었다.
“응? 어서 말해 보아라.”
이연은 간절함이 담긴 백경화의 눈빛에 그것이 무언지 듣지도 않은 채 다 내어 주리라 다짐했다. 무엇이 아깝고, 무엇을 아끼랴. 이미 그의 모든 것이 백경화의 것인데.
바라는 것을 말하기도 전부터 긍정의 대답을 들은 백경화의 두 눈에 잔잔한 파문이 일었다.
말 없는 백경화를 향해 이연이 재촉하려던 순간.
순식간에 입술이 닿았다 떨어지고, 백경화의 바람이 이연의 입술에 내려앉았다.
“너의 내세(來世).”
“……!”
“다시 한번 나와 이리 만나 연모를 나눌 것이라는 너의 약조.”
이번 생만으로는 부족하니, 부디 너의 다음도 나에게 다오. 나는 진실로 그것이 탐나고, 갈망하노니. 이연은 두 눈을 감고 이마를 붙여 오는 백경화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왜 항상 이 사내의 욕심은 저를 눈물짓게 만들까. 슬프지 않은데, 아니 오히려 다음 생까지 함께하자는 게 너무 기쁘고 감사한데─ 그런데 눈물이 났다.
백경화는 그 눈물을 손으로 훔치며 다소 초조감이 서린 목소리로 되물었다.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왜 그게 갖고 싶은 게야?”
초라하게 잠긴 목소리가 부끄러울 틈도 없었다. 울먹이는 목소리도 숨기지 못했다. 그저 백경화의 대답만이 중요했다. 가슴 깃을 쥐며 그리 묻는 이연의 모습이 애달파서, 백경화는 진심을 토해 내듯 고했다.
“이 생 하나로는 부족하니까.”
사모하는 마음이 너무 깊고 커서 이 생 하나로는 감당키 힘드니까. 끝맺지 못할 연정이 내세로, 그리고 다음 내세로… 끝없이 이어지길 바란다. 과한 욕심을 부리고 있다는 것쯤은 그도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포기할 마음이라면 애초부터 욕심내지도 않았을 것이다.
“대답을…….”
어서, 고개를…….
백경화는 애타는 마음으로 이연을 향해 애원했다. 어서 제게 수억만의 밤을, 미래를 주겠다 답하라 매달렸다.
“내가 그것을 주면, 그대 어찌할 것인데?”
“그 생 내내 은애하며 살겠나이다.”
생이 더해질수록 쌓아 온 마음으로 위하고, 바라며, 감사하며, 그리 계속 연모하겠나이다.
연모하겠나이다……. 이연은 재차 마음을 두드리는 소리에 제 스스로 눈물을 닦아 낸 뒤 고개를 들었다.
우린 왜 이렇게 절실할까. 항상 같이 있는데 왜 이다지도 목마르지. 왜 매번 더 빠지게 만들어.
“한눈팔지 않겠노라 약조하면 내 주도록 하마.”
오만한 대답에도 불구하고 백경화의 두 눈이 기쁨을 담고 춤추며, 녹아내렸다. 애초에 이연이 바라는 약조 같은 건 그에게 별문제가 안 된다는 듯 이연을 품어 안고 몇 번이고 소중히 하겠노라 답했다.
이연은 그 품에 안겨 두 눈을 감았다. 백경화의 옷자락을 잡고 있는 손은 마치 놓지 않으려는 듯 잔뜩 힘이 들어가 있었다.
그래, 주마. 네 바라는 것 모두 들어주마. 그러니 제발 가져가 다오. 내세의 내가 어디 있든, 무얼 하든, 어느 곳을 헤매고 있든─ 반드시 네 곁으로 데려가 다오.
“예, 그리하겠나이다.”
마치 제 생각을 읽기라도 하듯 단호하게 돌아온 대답에 이연은 시야가 흐려짐을 느꼈다. 지난 고통의 세월이 지금 이 순간을 위해 존재했던 것이라면, 훗날 다시 고통을 감내하여야만 이이를 가질 수 있다면─ 그리하겠다. 그리할 것이다.
애절한 바람은 그들의 위로 소리 없이 내려앉았다.
성황제국 황도(皇都)로 들어서자마자 다소 느슨하던 여선과 군사령들의 경계가 삼엄해졌다.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가고 주변을 살피는 눈동자에도 예기가 서렸다. 장원에 있을 때는 좀처럼 보기 힘든 변화를 신기한 마음으로 지켜보던 이연은 그 순간 불쑥 제 앞으로 내밀어진 손에 얼른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보이는 것은 조금은 낯설기도 하지만 익숙한 차림의 백경화였다. 실로 오랜만에 보는 모습에 여태까지 쭉 함께하고 있었음에도 이연은 새삼 다시 한번 시선을 빼앗기고 말았다.
“객잔으로 옮길 것입니다. 제가 모셔도 될는지요?”
백경화는 그리 말하며 멍하니 저를 올려다보는 이연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보들보들하고 따스하고 사랑스러운 것을 보듯 백경화의 눈에 온기가 서렸다.
“안아 모시리까?”
백경화는 여전히 홀린 듯 자신을 올려다보는 이연을 향해 장난스레 그리 물었다. 다행히 진심이 섞인 그 말에 정신을 차린 이연이 얼른 백경화의 손을 잡고 가마에서 걸어 나왔다. 사람 많은 시전을 지나면서 저를 안고 다니겠다는 것이 그에게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쯤은 안다. 또한 자신이 고개를 끄덕이면 기꺼워하며 그리할 것이란 것 또한.
허나 애꿎은 시선을 받고픈 마음이 없는 이연이 짧게 거절했다.
“그 모습으로는 참아 주시게.”
“…….”
순간 백경화는 말을 잃고 말았다. 잠시 제 모습을 잊고 있던 그는 속에서부터 우러나오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이를 으득 갈았다. 이게 다 저놈 탓이다.
백경화는 멀거니 서서 시침을 똑 떼고 있는 위문을 잠시간 노려보다 방금 전의 대화를 다시 떠올렸다.
위문과 여선의 부름에 가마에서 내린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청천벽력과도 같은 말이었다.
‘변장을 하셔야 할 듯합니다.’
‘그리하마.’
도성에 저를 아는 이가 한둘이 아니니 당연히 개립 정도는 써 줄 요량이었다. 그러나 선선히 그리하겠다 고개를 끄덕인 백경화에게 내밀어진 것은 너무나 뜻밖의 것이었다. 익숙하지만 결코 적응은 할 수 없는 그것.
‘……이게 무어냐?’
‘보시는 대로입니다.’
‘내 그냥 한번 물어보는 것이다. ……네 눈엔 이게 무엇으로 보이누?’
‘왜 그리 쓸데없… 당연한 것을 물어보시는지요. 저고리와 치마- 덤으로 너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