外傳 1. 初戀(초련)
궁을 가로지르는 걸음엔 숨길 수 없는 흥분이 묻어 있었다. 사내는 넓은 보폭으로 성큼성큼 나아가며 다른 쪽으론 시선 하나 돌리지 않았다. 갓 전쟁터에서 돌아온지라 궁에 어울리는 행색은 아니었으나, 누구도 그의 앞을 가로막지는 못했다. 피칠 된 갑주 차림으로도 그는 누구보다 당당하고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앞길을 막는 자는 이유를 막론하고 단칼에 베어 버릴 기세의 그를 감히 누가 막을 수 있으랴.
그리 제 갈 길만 서두르던 그의 걸음이 일시에 멈추었다. 그를 확인한 내관이 연회장 안을 향해 장중하게 고했다.
“백경화 장군 드십니다!”
그는 알림과 동시에 지체 없이 연회장 안으로 들어섰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단 하나였다. 그것은 횡렬종대로 앉아 있는 권력에 맛 들인 돼지 같은 대신들도 아니고, 온갖 화려함으로 치장한 무희들은 더더욱 아니었으며, 겉멋만 잔뜩 든 금위들도 아니었다.
저 끝,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 놓은 아이가 보였다. 저를 바라보고 있는 시선에 그는 온몸이 희열로 떨리는 것을 느꼈다.
흑백의 세상 속, 유일하게 색채를 띠고 있는 그의 주인─
이것은 그가 그리도 갈망해 마지않던 재회였다.
* * *
최초의 것은 ‘강아지’였다.
“주군?”
돌연 걸음을 멈춘 백경화 탓에 그 뒤를 따르던 여선도 덩달아 멈춰 섰다. 어찌 이러시나, 싶어 잠시간 동태를 살피며 하명을 기다리던 여선은 곧 백경화의 시선이 영 엉뚱한 곳을 헤매고 있음을 깨달았다. 장날의 시전을 지나는 이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었으나, 백경화가 한눈을 파는 것은 처음이라 여선의 얼굴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어렵지 않게 백경화의 시선을 끈 것이 무언지 확인한 여선의 무표정한 얼굴이 차차 굳어 가기 시작한 것은 그다음이었다.
“…….”
정녕 ‘저것’을 보시는 게 맞나……. 몇 번이고 백경화의 시선을 따라 확인하고서도 여선의 의문은 풀리기는커녕 더욱 깊어졌다. 여선이 결국 참지 못하고 막 그를 부르려던 찰나, 백경화의 걸음이 다시 이어졌다. 그러나 본디 가던 길을 갈 것이란 여선의 생각과 달리 백경화가 향한 곳은 방금까지 그의 시선이 머물러 있던 상점 앞이었다.
그의 걸음이 당황스러운 것은 여선만이 아니었다.
꿈뻑꿈뻑 졸며 상점을 지키고 있던 상인은 난데없이 제 위로 진 그림자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가 기겁하고 말았다. 얼굴의 반 이상 가리는 시커먼 개립1)을 쓰고, 마찬가지로 시커먼 천까지 어깨에 두른 사내가 서 있으니 어찌 아니 놀랄까.
상인의 반응이야 관심 밖이었던 백경화는 그 앞에 서서도 한참 진중한 눈으로 제 눈에 들었던 것을 살펴본 뒤 손끝으로 가리켰다.
“이것으로.”
“아, 예. 나으리.”
백경화가 다가온 순간부터 그의 기백에 눌려 인사는커녕 눈치만 보고 있던 상인이 반색하며 그에게 지목당한 녀석을 꺼내 들었다. 백경화는 손길을 거부하기는커녕 뭐가 그리 신나는지 꼬리 치는 그것을 묵묵히 받아 든 뒤 값을 치렀다. 그때서야 정신을 차린 여선이 급히 다가서며 두 손을 내밀었다.
“제가 들겠습니다, 주군.”
“되었다.”
“…….”
여선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내쳐진 손이 민망하기보다는 놀라워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시전을 지나다 걸음을 멈춘 것도 놀라운 일인데, 직접 값까지 치르고 산 것을 제 손으로 들고 가겠다니! 여선은 백경화가 이러는 것을 맹세코 처음 보았다. 아니, 그래 물건쯤이야 살 수 있지. 그래도 저건 좀…….
흘깃, 여선은 백경화의 한 손에 들려 가는 것을 아연한 마음으로 바라보다 어느 순간 ‘그것’과 눈이 마주쳤다. 작고 앙증맞은 꼬리를 무아지경으로 흔들며 분홍빛 혀를 빼물고 헥헥거리는 저것은… 다시 보고 또다시 봐도 ‘강아지’가 맞다.
문제는 강아지가 아니라 저것을 들고 있는 백경화에게 있었다. 강아지를 든 광견 백경화. 다소 무섭기까지 한 그 조합은, 안 어울려도 너무 안 어울렸다.
무엇보다 여선을 경악게 한 것은 지금 강아지가 백경화의 손에 어색하지만 조심스럽게 들려 있다는 점이다. 단 한 번도 백경화의 손에서 저리 소중하게 다뤄지는 무언가를 본 적이 없던 여선으로선 상당한 충격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이쯤 되자 빌어먹을 호기심이란 것이 고개를 쳐들기 마련이다.
“주군, 어찌하여 그런 것을…….”
“…….”
아, 예. 잘못했습니다.
여선은 말없이 노려보는 시선에 얼른 고개를 숙였다. 잠시간 그 위를 냉랭하게 머물던 백경화의 시선이 다시 본래대로 돌아갔다. 여선은 다시 진영(陣營)으로 향하는 등을 말없이 따르며 애써 호기심을 훌훌 털어 냈다. 백경화가 저 강아지로 무엇을 하든, 그가 신경 쓸 바 없는 일이었다.
제 막사로 돌아온 백경화는 그때까지도 들고 있던 것을 원형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강아지는 낯선 곳이 두렵지도 않은지 백경화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여전히 꼬리치기 바빴다. 그 모습을 내려다보던 백경화의 눈에 설핏 한숨이 어린다. 오는 내내 소리 없는 경악으로 물들어 가던 진영을 그라고 모를 리 없었다. 그것이 자신에게 얼마나 어울리지 않는지 또한.
그렇지만 시전을 지나는 길에 그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분명 이 녀석이 맞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유난히도 작은 몸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고 있던 녀석. 어디서나 흔하게 볼 수 있는 미물일 뿐인데 어쩐지 백경화의 시선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러다 눈이 마주치자 이 쪼그만 것이 언제 주눅 들어 있었냐는 듯 짧은 꼬리를 흔들며 애교를 피워 대는 것이 아닌가. 퍽 귀엽긴 하였으나 정작 백경화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그 위로 겹쳐진 한 아이의 얼굴이었다. 저 애교스러운 몸짓을 보고 좋아할지도 모르겠다. 퍼뜩 스친 생각이 그러했다. 그리고 그가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값까지 치르고 꼬물거리는 것을 받아 들고 난 후였다.
그런 자신을 여선도 처음 보았겠지만, 백경화도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저에게 이런 충동적인 면이 있는지도 미처 몰랐다.
“…왜 그랬을까.”
그는 그 자신마저 대답해 줄 수 없는 문제를 한낱 미물에게 물으며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 밤 이후 종종 그 아이가 생각나긴 했다. 피가 들끓어 잠 못 이루는 밤이나 어느 순간 숨이 턱턱 막힐 때. 그럴 때면 마치 구원처럼 그 아이가 떠올랐다. 이 품에 안겼던 작은 몸과 열이 올라 뜨거웠던 체온이. 그를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게 해 줬던 그 아이의 말이.
그런 밤이면 그는 안식을 찾을 수 있었다. 차갑게 식었던 가슴이 한번 품었던 온기를 되새기며 빠르게 진정되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그래서일 것이다. 별 이유도 없이 불쑥 그 아이가 생각나는 것은.
훈련을 할 때도, 휴식을 취할 때도, 가끔 진귀한 것을 먹거나 새로운 것을 발견할 때─ 평온을 가장한 일상생활 중에도 불쑥불쑥 떠올랐다. 몸은 괜찮아졌을까… 키는 좀 자랐을까. 오늘은 무엇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또 울고 있는 건 아니겠지…….
자신과는 어울리지 않는 생각뿐이지만 그만둘 수가 없었다. 넋을 놓고 있다가도 문득 정신을 차려 보면 아이를 생각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제 상태가 어딘가 이상하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어디에서부터 기인한 것인지는 몰랐다. 그저 제 안에 그 아이가 굉장히 특별하게 자리 잡았음만을 은연중 깨달을 뿐.
“…은인(恩人), 인가?”
그나마 가장 가능성이 높은 예시를 입 밖으로 내어 본 백경화는 곧 뭐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슬며시 미간을 찌푸리고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 백경화를 향해 강아지가 제게 관심 좀 가지라는 듯 작게 짖었다.
“마음에 들어 하면 좋으련만.”
그 모습에 깊어지려는 생각을 떨쳐 낸 백경화가 손끝으로 작은 머리통을 쓰다듬었다.
곧, 탄일이라 하였다. 아무리 실권 없는 어린 왕이라 하나, 탄신연이 열릴 터. 그러면 형식상으로나마 값지고 이름난 것만이 진상될 거란 걸 모르지 않는다. 그중, 저가 준비한 이것이 얼마나 보잘것없는 것인지도 알고 있다. 물론 이보다 더 눈에 띄고 좋은 것 준비하지 못할 능력이 없지는 않다. 그렇지만… 이 녀석이라면 그 아이를 웃게 만들어 줄 거란 생각을 떨칠 수가 없음을 어찌하랴.
그의 기억 속엔 절망으로 물들어 울던 모습뿐이라, 그것이 보고 싶었다.
“…어여쁠 테지.”
저도 모르게 그리 속내를 내뱉고 만 백경화는 어쩐지 조금 머쓱해져서 멀뚱하니 저를 바라보고 있는 강아지의 머리를 우악스럽게 쓰다듬고 말았다. 그럼에도 좋다고 손가락에 엉겨드는 것을 상대해 주던 백경화의 얼굴에 설핏 미소가 떠올랐다 사라졌다.
어찌 됐든 선물로 산 것이니 주인의 마음에 들기를 바랄 수밖에.
그런 백경화는 여선을 비롯한 측근들의 입에서 강아지가 ‘비상식량’으로 확정 지어지고 있음을 전혀 알지 못했다.
백경화를 제외한 많은 이들에게 비상식량이라 불리게 된 강아지는 척박한 전쟁터에도 불구하고 어마어마한 적응력을 보였다. 묶어 두지 않았음에도 도망하지 않았고, 사람 가리지 않으며 잘 따라 전쟁으로 지쳐 있던 이들의 심신을 위로해 주었다. 몇 인사들 사이에서 사기가 떨어질 수도 있단 우려의 말이 흘러나오기도 하였으나, 누구도 그 주인인 백경화에게 입을 열지는 못했다.
“그런데 왜 내가 널 돌보고 있을까?”
여선은 강아지에게 밥을 챙겨 주며 진심으로 궁금해 물었다. 네 주인은 따로 있는데, 널 돌보는 건 나로구나. 어쩐지 제 신세가 처량하여 여선은 주둥이를 그릇에 묻고 있는 강아지를 향해 한탄했다. 밥을 챙겨 주는 것만이 아니었다. 무슨 이유로 이 녀석을 샀는지 모르겠지만, 직접 돌보지는 않으면서 이것저것 바라는 것은 참 많았다. 흰색 털이 조금만 누레져도 말없이 저를 바라보는 백경화의 시선에 여선은 숨이 턱, 막혔다. 하다 하다 이제 전쟁터에서 개 목욕까지 시키고 있어야 하는 제 처지라니!
거기다 왠지 앞으로 지금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 같은 예감이 드는 이유는 또 뭐란 말인가.
여선은 최근 들어 자리를 비울 때마다 백경화의 손에 하나씩 들려 오는 정체 모를, 아니 연유 모를 물건들을 떠올리며 슬며시 진저리 쳤다. 도대체 어디에 쓰려고 그런 것을 사 모으고 있는지.
요즘 들어 도통 백경화의 생각을 읽을 수가 없다. 그래도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백경화가 이상 행동을 보이기 시작한 즈음부터 그의 발작 같은 증세가 줄어들었다는 점이다. 악귀 같은 형상으로 제 어미를 찾아 헤매던 그 모습은 등골이 오싹해질 정도로 괴기스러웠다. 가인의 얼굴이 야차로 변하여 피를 보고자 미쳐 날뛰어 댔다. 심한 날은 여선과 수하들이 목숨 걸고 저지해야 했던 날도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백경화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곳은 이 전쟁터인지도 몰랐다.
지금 생각해도 가장 끔찍했던 일은 그가 백가의 양자로 입적한 날의 일이다.
경화─ 애써 묻어 두었던 그 이름이 불리는 순간 백경화의 이성은 그대로 사라졌다. 이성이 사라진 백경화가 그들의 눈앞에서 자취를 감춘 것도 순식간이었다. 그들이 혼비백산하며 가까스로 백경화를 찾아냈을 때, 그는 잔뜩 지치고 초라한 모습으로 궁담 밑에 앉아 여명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이 생전 처음으로 보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채.
“그날 무슨 일이 있었던 게 분명한데…….”
알 수가 있어야 말이지. 그 의문은 백경화가 백가의 양자로 입적하고, 전쟁터를 돌며 공을 세워 대장위까지 오른 지금까지도 여전히 풀리지 않았다.
“다 먹었느냐?”
여선은 난데없이 들려온 백경화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며 뒤돌아보았다. 그러자 무심한 얼굴의 백경화와 언제 다 먹었는지 그 발치에서 꼬리 치고 있는 강아지가 보였다.
백경화는 잔뜩 굳어 있는 여선을 본체만체 무시한 뒤 말없이 강아지를 안아 들고 제 막사로 돌아왔다. 새하얀 털과 발바닥을 젖은 천으로 닦아 낸 뒤에야 그는 강아지를 담요 위에 내려놓았다.
그런 백경화를 잠시 지켜보던 강아지가 곧 입을 쩍 벌려 하품한 뒤 앞발 위로 머리를 내렸다. 얼마 가지 않아 통통한 배가 고르게 오르내리기 시작하자 백경화도 좌선을 한 뒤 명상에 잠겼다.
그렇게 얼마간 깨우친 심득을 되새기며 마음속에 안정을 새기고 있었을까. 그가 감고 있던 눈을 떴을 때, 강아지의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
설마 나간 건가? 평소의 그라면 아무리 작은 움직임이라도 놓칠 리 없지만, 신경 쓰지 않는 이상 명상 중에 전혀 위협이 되지 않을 기척까지 살필 수는 없었다. 이미 밤늦은 시간인데다 무엇보다 이 주변은 전쟁으로 인해 황폐해져 숲에 사는 짐승들의 먹을거리가 부족했다. 아마 그들의 눈에 어린 강아지 같은 건 한 입 거리로밖에 보이지 않으리라.
그 생각에 백경화는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멀리 가진 말았어야 할 텐데. 막사를 나와 보초를 서고 있던 이들의 경례를 무심히 받고 지나치며 백경화는 숲속으로 향했다. 얼마 가지 않아 그는 숲속을 헤매고 있던 강아지를 발견했다. 폴짝폴짝 뛰어다니며 곳곳에 주둥이를 박아 대는 모습이 천진난만하기만 하다. 그만 놀고 돌아가자꾸나, 막 그의 입이 열리려던 찰나였다. 그의 귓가로 눌러 죽인 신음이 들려온 것은.
끙끙 앓는 듯하기도 하고, 무언가를 참는 듯도 한 신음이 백경화의 귀에 달라붙었다. 백경화는 어느새 발치까지 다가온 강아지를 안아 든 뒤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다가갔다. 설마 부상병이라도 있는 건가. 같은 진영의 녀석이라면 의무관에게라도 던져 주어야겠다, 그답지 않게 친절한 생각을 하며 걸음 한 그가 본 것은─ 신세계였다.
일단 그의 예상처럼 부상병은 아니었다. 사지 멀쩡한 데다 저리 아랫도리를 훌렁 깐 채 격렬히 움직이는 모습으로 보아 결코 부상병일 수가 없었다. 그들은 불안한 듯 주위를 살피면서도 멈추지 않고 허리를 들썩였다. 뒤를 내주고 있던 이도 제 것을 쥔 채 거칠게 문지르며 쾌락을 찾고 있는 모습은 강제로 이루어진 교합이 아니란 것을 알려 주고 있었다. 그건 누가 보더라도 합의된 방사(房事)였다.
문제는 둘 다 군사복을 입은 사내라는 점이지만.
“…….”
백경화는 잠시 굳은 채로 그 모습을 지켜보다 제 품에서 꼬물거리는 강아지의 움직임에 정신을 차렸다. 어이없는 웃음을 흘리며 그리 돌아섰다. 그런 그를 더욱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은 숲에서 돌아오는 길에 본 광경이 그들 하나만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멀쩡한 사내들을 군에 묶어 두었으니 욕구 불만이야 모르는 바는 아니었으나, 설마 저런 식으로 해결하고 있을 줄이야.
다소 넋이 나간 얼굴로 제 막사로 돌아온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여선이었다.
“주군. 어디를 다녀오시는 길이시온지요?”
“…이 녀석을 찾으러.”
어느새 품 안에서 잠들어 버린 강아지를 가리킨 백경화는 짧게 답하며 여선을 지나쳐 막사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그 뒤를 따라 들어선 여선이 조금 전 있었던 밀정의 보고를 전한 뒤 편히 쉬시라 고하며 물러서려던 순간이었다.
“…숲에서 희한한 것을 목격하였다. 너도 알고 있었느냐?”
숲? 처음엔 뜬금없이 건네진 물음을 이해하지 못했던 여선의 얼굴에 차차 곤혹스러움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숲이란 단어 하나만으로도 백경화가 목도한 것이 무언지 짐작한 여선은 고개를 조아리며 답했다.
“사내라면 필히 갖고 있을 욕구를 풀 길 없으니… 저들끼리 해결 보는 것이겠지요. 낮의 전투로 인한 흥분도 남아 있을 것이고…….”
“……흔한 일이더냐?”
사내들끼리 저러는 것이.
조금의 뜸과 함께 이어진 백경화의 물음에 여선은 어찌 답해야 하나 잠시 망설였다. 솔직히 저리 주체 못 하고 사람들의 눈을 피해 관계를 맺는 것은 일부일 뿐이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색사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백경화이니만큼 무어라 답해야 할지 망설여졌다.
“그저… 한때이지 않겠나이까. 전투에 문제가 되는 일은 아니오니 주군께서도 모른 척하심이 어떠신지요.”
“…….”
한때라……. 여선의 말을 음미하듯 되새겨 본 백경화가 손짓으로 여선을 내보냈다. 성에 관해서는 그저 교육의 일환으로 배운 것이 다라 사내들끼리 가능할 것이란 생각은 해 보지도 못했다. 그러나 그보다 놀라운 것은 어찌하여 그때 그 아이가 떠올랐는가 하는 점이다.
‘설마 이 몸도 색욕이 생긴 것인가.’
측근들이 걱정할 정도로 색에는 무관심한 것이 바로 그였다. 기능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니 더욱 괴이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어떤 아리따운 여인을 봐도 동하지 않았다. 누군가 그의 몸에 닿는 것만으로도 불쾌하여 참을 수 없을 때도 있었다. 그런데 몸의 일부를 섞는다니…….
“역겹군.”
생각만으로도 속이 뒤집힌다. 순간적으로 그 아이가 떠오른 것도 별 의미는 없을 테지. 아마 충격적인 장면을 봐서 그러할 것이다. 그 생각에 백경화는 여선이 준비해 놓고 간 따뜻한 물로 세안한 뒤 잠자리에 들었다. 내일도 아침부터 전투가 있을 것이다. 이런 쓸데없는 생각을 할 바에야 조금이라도 피로를 풀어 두는 것이 낫다. 하룻밤쯤 새운다 하여 그에게 전혀 무리될 것이 없으나, 계속 엉뚱한 쪽으로 흐르는 생각을 떨치기엔 이만한 것이 없었다.
그러나 다음 날 아침, 백경화는 차라리 안 자느니만 못한 상황을 맞이했다.
묘하게 날이 선 백경화의 기색을 살피며 모두는 숨을 죽였다. 총지휘관까지 있는 장소에서 일개 대장의 눈치를 살펴야 하는 기함할 일이 벌어지고 있었지만 누구도 괴이쩍게 여기지 않았다. 그가 백가의 양자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 가진 실력이 저희보다 훨씬 위임을 간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니, 저이가 왜 저런다지요.’
‘난들 알겠소. 뭐 기분 나쁜 일이라도 있었는지…….’
크흠, 흠. 백경화는 헛기침 소리가 간간이 터져 나오는 공간 속에서 저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있었다.
사실 그는 화가 났다기보다는 얼굴이 굳을 정도로 당황한 상태였다. 단 한 번도 제 감정을 이런 식으로 표한 적 없던 그다. 이렇게 된 것은 지난밤 그의 꿈속에 찾아온 한 존재 때문이었다.
어둠 속에 홀로 서 있던 그를 뒤에서부터 안아 온 가는 팔. 뿌리치며 돌아보자 보이는 것은 그의 특별한 존재였다. 어찌하여 이런 곳에 있나 싶어 처음엔 놀랐고 그다음엔 무척이나 반가웠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보게 되어 가슴이 들뜨다 못해 뜨겁게 달아올랐다. 참을 수 없는 반가움에 절로 입이 벌어졌다.
‘여긴 무슨 일로 왔더냐? 혹 날 보러 왔느냐?’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백경화는 그리 물으며 다가섰다. 그러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아이가 다시 두 손을 뻗어 그의 품에 안겨 왔다. 작고 보드라운 몸이 온몸으로 부딪쳐 오는 것을 받아 안은 순간, 백경화의 심장은 쿵! 소리를 내며 주저앉았다.
어쩐지 손이 떨리는 것을 느끼면서도 그는 조심스레 아이의 등에 손을 둘렀다. 그러자 조금 더 그 체온이 그의 몸에 닿아 온다. 그와 동시에 그는 몸 안에 화끈한 열기가 차오르는 것을 또렷하게 느꼈다.
결국 격정을 참지 못한 백경화는 아플 정도로 아이의 몸을 끌어안았다. 아이는 놀랍게도 그런 백경화를 마주 안았다. 가볍게 그 입술이 자신의 뺨에 닿았을 때 백경화는 숨까지 멈추고 말았다. 아이의 행동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의 손을 제 가슴 깃 사이로 밀어 넣은 아이가 다시 입을 맞춰 왔다.
할짝, 할짝 얼굴이 젖는 감각에 두 눈을 뜨고서야 백경화는 그것이 꿈이란 것을 깨달았다. 제 얼굴을 축축하게 핥고 있는 것이 강아지란 것 또한. 머리가 어지러운 한편 어쩐지 아쉽기도 했다. 기운이 빠져 느릿하게 몸을 일으키려던 그 순간, 그가 목격한 것은 잔뜩 기립한 제 존재를 과시하고 있는 단단한 양물이었다.
쾅!! 거기까지 생각한 백경화는 저도 모르게 탁상을 내리치고 말았다. 탁상은 공력까지 실린 일격을 감당하지 못하고 와르르 무너졌다. 일순 회의실 안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백경화는 누가 붙잡기도 전에 자리에서 일어서 그곳을 나가 버렸다. 일개 대장으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나, 더 놀라운 것은 백경화의 기백에 눌려 누구도 그를 잡을 생각을 하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욕구 불만이십니다.”
군사령 중 하나인 강진의 말에 여선은 끙, 낮게 신음했다. 부정하고 싶은데 어째서인지 그럴 수가 없었다. 지금으로서는 그 외의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한 번도 이런 일이 없으셨지 않은가.”
“좀 늦되신 거겠지요.”
“…….”
사춘기가 늦된 백경화. 그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있는 강진이 여선은 참으로 대단해 보였다. 여선은 심경이 복잡하기도 하고, 머리가 아프기도 하여 관자놀이를 짚은 채 잠시 침묵했다.
“제 생각도 같습니다. 지난밤 마주친 주군의 모습이…….”
가히 짐승과 맞먹는지라.
여선은 조심스레 이어진 수하의 말을 긍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갑자기 자다 말고 일어선 백경화는 그들이 미처 따라나서기 전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다. 혹 그 발작인가 싶어 혼비백산한 그들이 온 숲속을 헤매고 다니다 겨우 그를 발견했을 때… 백경화는 이 엄동설한에 떨어지는 폭포를 맞고 서 있었다. 야밤에 저게 무슨 짓인지 몰라 넋을 놓고 지켜보길 한참.
반 시진이 흐른 뒤에야 폭포에서 걸어 나온 백경화는 잔뜩 젖은 머리카락을 귀찮다는 듯이 쓸어 넘겼다. 그 순간, 달빛에 드러난 백경화의 두 눈이 얼마나 정욕에 젖어 번들거리고 있었는지는… 직접 목도한 자들만이 알 일이다.
일시에 같은 것을 떠올린 그들은 낮게 침음했다. 그게 어디 사람의 눈빛이어야지.
무엇보다 그들을 기함케 하는 것은 백경화의 주위를 떠도는 위험한 공기였다. 풀 길 없는 욕구가 쌓여 갈수록 백경화의 심기도 뒤틀렸고 그로 인해 그의 전신엔 감당키 힘든 살기가 감돌았다. 여기서 문제는 살기만 감돈다는 게 아니었다.
마치 발정기에 접어든 맹수처럼 풍겨 대는 색기는 놀랍게도 살기마저 억눌러 버릴 정도로 짙었다. 백경화를 바라보는 이들의 얼굴이 점점 달아오를수록 그들의 불안도 커져만 갔다.
“…조만간 어느 미친놈 하나가 덮치려 들지 어찌 안단 말입니까.”
“…….”
침음과 함께 흘러나온 말이 우스갯소리가 아니란 점이 여선은 진정으로 눈물겨웠다. 진짜 이대로라면 얼마 가지 않아 두 눈이 먼 어느 미친놈이 백경화를 덮치려 들지도 몰랐다. 그리되면…….
모두 같은 참사를 떠올렸는지 일동은 새하얗게 질린 낯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도대체 언제 어디서 무엇을 보고 저리되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여선은 무언가 짐작 가는 바가 있긴 하였으나 침묵하는 쪽을 택했다. 이쯤 되면 차라리 색사에 지나치게 관심이 없었던 옛 모습이 그리워질 지경이었다.
“그럼, 어찌하면 좋겠느냐.”
여선의 물음에 잠시 눈치를 살피던 군사령들의 대답이야 이미 나와 있는 것과 다름없었다.
또다.
백경화는 익숙한 느낌에 진한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그의 예상이 맞다는 것을 알려 주듯 곧 아이가 어둠 속을 뚫고 다가오기 시작했다. 백경화는 자신을 향해 내밀어지는 두 손을 언제나 그러했듯 뿌리칠 수가 없었다. 꿈속이란 걸 알고 있다. 꿈에서 깨어나고 나면 얼마나 기분이 더러워지는지도.
그렇지만 지금 이 순간 그는 도저히 벗어날 수가 없었다.
작고 보드라운 손이 제 뺨을 쓸고 목을 스쳐 가슴으로 내려가는 것을 방치한 채로 백경화는 아이를 눈에 담았다. 처음 꿈에 나왔을 때보다 조금은 자란 듯 보이나 여전히 그에 비해 작았다. 어이하여 이런 꿈을 꾸는 것일까. 지난번 보았던 광경이 그리도 충격적이었나. 아니면 너무 이 아이 생각만 하여 이런 가당치도 않은 꿈을 꾸는 것인가.
‘아아… 아!’
의지를 상실한 그의 몸이 제멋대로 움직이며 아이의 입에서 신음을 뽑아내자 백경화의 이성도 점차 옅어지기 시작했다. 조금만 더…. 그는 아이의 것을 입 안에 넣고 한참을 맛보았다. 그럴수록 그의 머리카락을 잡고 있던 아이가 자지러졌다.
‘더……!’
아이는 수치도 모르고 다리를 벌리며 백경화를 이끌었다. 그 모습에 백경화는 호흡이 거칠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이연의 선단을 혀로 길게 핥아 올리고 젖기 시작한 끝을 자극했다. 쾌락으로 비틀리는 작은 몸이 너무 어여뻐서 도저히 시선을 뗄 수 없었다. 그와 더불어 그는 눈에 들어온 연한 살굿빛의 탐스러운 열매도 맘껏 희롱했다.
‘하으…! 더… 더……!’
바들바들 작은 새처럼 애처로이 떨면서도 제 손길을 요구하는 것이 기꺼워 백경화는 급히 아이의 뒤를 열고 안으로 파고들었다. 갑작스러운 침입에 입을 벌리고 한동안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던 아이의 입에서 연방 높은 신음이 터져 나오기 시작한 것은 얼마 가지 않아서였다. 진득하게 달라붙는 내벽의 감촉이 아찔하게 백경화의 머릿속을 지배했다. 그는 계속 밀려 나가는 작은 몸을 단단히 틀어잡고 연신 허리를 찧어 댔다.
‘아아! 좋아, 더! 더 세게……!’
어디까지 날 집어삼킬 셈인가. 말도 못 할 유혹의 손짓으로 저를 어디까지 흔들 셈이야!
제길. 아이가 원하는 대로 허리를 움직이면서도 백경화는 욕지거리가 치밀었다. 분명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로 쾌락을 느끼고 있으면서도 그랬다. 도대체 날 이리 괴롭히는 이유가 뭐냔 말이다!
그 순간 백경화의 과격한 허리 짓에 따라 힘없이 흔들리던 아이가 입을 열었다.
‘연모하고 있어.’
‘……!’
머리가 아득해지는 지독한 절정은 현기증과 함께 왔다. 더욱 깊이 파묻기 위해 가는 허벅지를 눌러 벌리고 파고들자 아이가 그의 목에 매달리며 속삭였다.
“나리.”
“……!”
백경화는 생경하게 귀를 파고드는 달짝지근한 목소리에 급히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그의 가슴팍에 매달려 있던 정체 모를 여인이 비명을 터트리며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반쯤 가슴을 드러낸 채 거의 헐벗다시피 한 그녀는 얼른 백경화를 향해 입을 열었다.
“나리, 놀라지 마시옵소서. 오늘 밤 나리를 모시란 명 받잡아 왔…!”
여인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그 순간 마주친 백경화의 시선이 온몸을 난도질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퍼렇게 날이 선 칼날도 저것보단 온기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여인은 제 몸을 스치는 시선을 방치할 수밖에 없었다. 옷이 흐트러지긴 하였으나 그뿐, 백경화는 더한 일이 없다는 것을 말없이 몇 번이고 확인했다.
백경화의 입이 열린 것은 그 모든 확인을 걸친 뒤였다.
“나가거라.”
“나, 나리. 전 명을 받잡아…….”
“나가라는 말이, 안 들리느냐?”
달빛을 받아 음영 진 백경화의 표정을 확인한 여인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옷매무시를 가다듬을 생각도 못 한 채 밖으로 뛰쳐나가 버리는 여인을 노려보던 백경화는 거칠게 자신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저런 여인 하나 들어올 때까지 눈치채지 못하다니… 자신은 어디까지 꿈에 먹혀 있었단 말인가.
“제길.”
낮은 욕설을 터트리던 백경화는 그 순간, 모든 행동을 멈췄다. 한동안 아무런 움직임도 없던 그의 시선이 서서히 제 중심으로 향했고, 곧 그 입에서 실소가 터졌다. 맙소사. 십 대 때도 해 보지 않던 것을 이 나이 들어 하다니……. 축축하게 젖은 옷자락이 뜻하는 바는 단 하나, 몽정의 흔적이었다. 그것을 바라보며 백경화는 한심함에 소리 죽여 한참 웃었다.
헌데 참으로 이상하지. 이리도 불쾌하고 흙바닥을 뒹군 것처럼 언짢은데, 다시 잠들고 싶다니 말이다.
“쓸데없는 짓을 했더구나.”
냉랭하게 떨어진 백경화의 평에 측근들의 어깨가 긴장으로 움츠러들었다. 안 그래도 지난밤, 기녀에게서 보고를 들었다. 잔뜩 겁을 먹은 기녀가 울먹이며 말하길, 잠들어 계시기에 조심스레 애무하며 옷을 벗기려 하니 갑자기 깨어나시어 저를 뿌리치시더라- 하였다. 백경화가 얼마나 흉흉한 낯이었는지는 좀처럼 울음을 그치지 못하던 기녀의 모습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러했기에 이런 백경화의 추궁 또한 미리 각오해 둔 바였다.
“누가 그런 짓을 하라 했더냐.”
“주제넘었습니다.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백경화는 변명 없이 석고대죄 하는 여선들을 잠시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어찌하여 그런 짓을 하였느냐?”
“…그저 주군을 위하는 마음에.”
“나를 위한 것이 여인을 들여보내는 것이더냐?”
픽, 진실로 어이없는 말을 들었다는 듯 백경화의 입매가 사정없이 비틀렸다. 비웃음을 띠고 제정신이냐는 듯 그들을 힐책하는 백경화의 시선에 여선은 재차 고개를 조아렸다.
“요즘 몸이 불편해 보이시어…….”
“…내 몸이, 불편해 보였다?”
여선을 비롯한 이들은 은근히 던져진 백경화의 물음이 송구스러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잠시간 그 모습을 지켜보며 생각에 잠겼던 백경화는 고개를 들어 허공을 주시하다 물었다.
“어디가, 그리 불편해 보이더냐?”
“…양기가 충만하신 것이 괴로우신 듯하여.”
민망함에 여선이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는 것을 지켜보던 백경화의 얼굴에 이채가 서렸다. 지금 여선의 말이 제 상태와 크게 다르지 않은 탓이다.
“여인을 안으면 이 상태가 호전되는 것이냐?”
더 이상 꿈에서 그 아이를 보지 않아도 되는 것인가? 그리 생각하자 절로 뒷말이 따라붙었다.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여인을 안고 싶지는 않구나.”
여선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백경화는 제 말을 번복했다. 설사 진실로 호전되어 더 이상 이 같은 꿈을 꾸지 않게 된다 하더라도, 별로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을 여선은 모르고 있었다.
“내 꿈에 나오는 것은 여인이 아니다.”
여인이 아니라고? 백경화가 태연히 터트린 폭탄이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라 그들은 저도 모르게 숙이고 있던 고개를 번쩍번쩍 쳐들었다. 여인이 아니란 말은, 지금까지 그들이 단단히 착각하였다는 말인가. 그도 아니면─
“그러니 더 이상 여인을 보내지 말거라. 여인은 안아도 풀릴 것 같지 않으니.”
남자구나!!
콰콰쾅! 청천벽력은 그렇게 내리쳤다.
“…….”
백경화의 폭탄선언 후 다시 긴급회의를 소집한 이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심각했다. 도대체 무엇이 잘못되었기에 백경화가 남색을 바라고 있단 말인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럴 낌새를 보이지 않았던지라 그들은 당황스러운 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자신들의 교육, 아니 보필에 무슨 문제가 있었기에 이 같은 상황이 일어났는지.
“혹, 대비에 대한 일 때문에 그러한 것은 아닐는지요.”
여선은 전 무친왕을 배신하고, 친아들까지 버려 가며 권력을 손에 넣은 여인을 떠올리며 고개를 기울였다. 진실로 대비 때문에 여성에 대한 반감이라도 생긴 것일까. 그러나 오랜 시간 고민 끝에 나온 대답은 ‘아니다’였다. 백경화는 평소 여인뿐만 아니라 인간에 대해서도 불신이 깊었다. 그리 티 내진 않았지만 제 몸에 타인이 닿는 것도 꺼림칙해했다. 그러니 백경화가 싫어하는 것은 여인만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그래도 한번 시도는 해 보는 게 좋겠지.”
여인은 들이지 말라 하였지만, 그렇다고 백경화의 상태가 호전된 것은 아니었다. 나날이 백경화를 바라보며 군침을 삼키는 군사들이 늘어나는 것을 알고 있기에 그들의 근심도 더욱 깊어졌다. 하여 그들의 다음 행동은 이미 정해져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어떻게든 위급한 불만 끄고 보자.
그리고 그날 밤, ‘우리들 중 가장 마음에 드시는 이로 고르시라’라는 그들의 말에 백경화는 ‘아무래도 너희들이 단체로 미친 것 같다’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로 인해 그들은 아주 오랜만에 백경화의 주도하에 지옥 특훈을 받아야만 했다.
* * *
전쟁터에서 공방(攻防)은 흔히 있는 일이다. 그날도 그러했다. 서로 눈치를 보듯 몇 차례의 공방 후, 서로 물러설 순간을 재고 있던 그들 중 먼저 입을 연 것은 우화국의 적장이었다. 인생의 절반 이상을 전쟁터에서 보낸 노장은 제 나라가 열세임을 일찍이 눈치챘다. 지금은 대등하게나마 버티고 있지만 곧 패전할 것이란 것 또한. 그러했기에 지금이 중요했다. 떨어진 병사들의 사기를 높이고 우화국의 건재함을 알리기 위해 그는 당당히 소리쳤다.
“제화국에서 꽤 이름난 무신(武臣)이라더니 이름값을 하는구나! 실로 감탄하였도다!”
“…….”
백경화는 말에 올라탄 채 제게 소리치는 우화국 적장을 무심히 지켜보았다. 우화국의 적장이 눈치챘듯 백경화 또한 알고 있다. 이 전쟁의 승리는 제화국의 것이었다. 그러하였기에 그가 무엇을 노리고 저런 극을 펼치는지도 모르지 않는다.
“젊은 나이에 대장위에 앉을 만한 무위를 직접 보지 못하였다면, 그 반반한 얼굴 하나로 그 자리를 차지하였다 착각할 뻔하였지 않은가!”
자신을 모욕하는 말에도 불구하고 백경화는 여전히 아무 반응이 없었다. 그저 늘어져 있던 검을 추어올리며 우화국 적장의 말을 흘려들을 뿐이었다. 오늘은 이쯤 물러설까. 저물어져 가는 노을을 흘깃, 바라본 백경화가 막 손을 들어 후퇴를 선언하려던 순간이었다. 그의 귀로 결코 흘려들을 수 없는 말이 들려왔다.
“내 오늘은 그대에게 경의를 표하며 이만 물러나도록 하마! 그대 덕에 제화국의 어린 왕이 하루 더 그 목숨 연명하겠구나! 그것참 질기기도 하다!”
우뚝, 후퇴를 명하기 위해 올라가던 백경화의 손이 멈춘 것은 그때였다. 고개가 비틀리고, 입술이 휘었다. 웃고 있음에도 묘하게 찌푸려진 낯이 언짢은 심기를 대변하고 있었다. 그다음은 순식간이었다. 언제 늘어져 있었냐는 듯 검을 세워 든 백경화가 우화국 적장을 향해 달려들었다. 언제 다가왔는지조차 가늠할 수 없었다. 우화국 적장은 눈 깜짝할 사이에 거리를 좁히고 제 앞에 나타난 백경화의 모습에 대경하며 반월도를 들어 올렸다.
챙-! 날카로운 쇳소리와 더불어 힘겹게 백경화의 공격을 막아 낸 우화국 적장의 눈에 차차 경악이 서리기 시작했다. 무언가. 이 무시무시한 기압은.
홉떠진 눈으로 저와 검을 맞대고 있는 백경화를 바라보던 그는, 그제야 깨달았다.
자신의 아래라 생각했던 젊은 장수가 결코 그의 아래가 아니었음을.
“지금, 감히 누구를 입에 올렸느냐.”
아니, 오히려 어마어마한 실력을 숨기고 왔음을 말이다.
그리고─
“그 탓에 네 명줄은 여기서 끊기겠구나.”
자신이 결코 건드려서는 안 될 역린을 건드렸음을.
그것은 제 목을 선득하게 가르고 지나가는 광휘와 함께한 깨달음이었다.
“어쩌자고 그러셨습니까.”
여선의 물음에도 백경화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강아지가 물고 늘어지는 붉은 천을 잡아당기며 그 목에 묶을 뿐이었다. 새하얀 털 위로 엉성하게 묶여 가는 나비매듭을 지켜보며 여선은 터져 나올 것 같은 한숨을 겨우 억눌렀다. 제 물음엔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 것인가. 그도 아니면 비상식량보다 못한 취급을 당하고 있는 것인가.
여선은 대답 없는 백경화가 답답하여 제 가슴이라도 내리치고 싶었다. 적어도 우화국 적장의 목은 두세 달 후에 베었어야 했다. 그걸 모를 리 없는 백경화이건만 어찌하여 이런 일을 벌였는지 도무지 짐작할 수 없었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문드러지는 것은 여선의 속이다.
“전…!”
…하, 라는 부름은 끝맺지 못했다. 여선은 볼을 스치고 지나간 무형의 기에 뺨을 베이고서야 제 실수를 깨닫고 대경했다. 용서하시라 급히 고개까지 숙이며 잘못을 빌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다 고개를 돌리던 백경화는 잔뜩 겁을 먹고 꼬리를 만 강아지의 모습에 살살 그 턱을 긁어 주었다.
백경화가 전쟁터를 누비는 이유는 하나였다. 내부에 속하되 그들의 눈에 벗어나기 위해서. 우습게도 항상 피바람 부는 전쟁터야말로 그들의 눈을 속이기 가장 좋은 곳이었다. 그들의 눈 닿지 않는 곳에서, 단숨에 쳐 낼 준비를 차곡차곡 쌓으며 그는 조금씩 대비에게 다가갔다. 이곳에서 큰 공을 세우면 세울수록 좋았다. 그들에게 백경화란 존재를 각인시켜 줄수록 더욱. 그러면 그들은 더욱 그를 욕심낼 것이고, 제 손안에 넣고자 회유할 터이니. 그중엔 필히 대비도 있겠지. 제 욕심 채우고자 부부의 정도, 모자의 정도 내친 그 무정한 여인. 제가 앉은 자리가 얼마나 쉽게 흔들릴 수 있는 자리인지, 얼마나 덧없는 자리인지 친히 보여 줄 것이다. 그러기 위해 이룰 필요가 있는 기반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그를 믿고 안심하는 순간, 그녀가 제게 그러했듯 가장 큰 배신을 선물하리라.
그러나 아직 때가 아님을 안다.
“걱정 말아라. 우화국에서도 곧 새로운 장수를 보내 올 것이니.”
“하오나…….”
“고작 이 정도를 변수라고 떠들어서야 되겠느냐.”
여선은 백경화의 말에 고개를 조아릴 수밖에 없었다. 백경화의 말은 틀리지 않다. 처음 이 계획에 착수할 때부터 최소 10년의 장기전을 예상하지 않았던가. 여선은 새삼 언제 끝날지 모를 계획을 떠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최소 10년의 복수전을 기리는 백경화의 집념이 경탄스러우면서도 두렵고, 또 안타까웠다. 도대체 얼마나 더 자신의 인생을 복수에만 내버리고 있을 셈인가. 그렇게까지 해서 이 복수의 끝을 맞이한다면, 백경화는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모든 근심을 털어 내고 행복해질 수 있을까?
그럴 리가 없다.
어쩌면 이보다 더 불행해질지도 모르지.
“…….”
여선은 점차 회의적으로 치닫는 머릿속을 떨쳐 내듯 급히 입을 열었다.
“궁에 심어 놓은 밀정으로부터의 보고입니다. 내달 있을 왕의 탄신연을 대비가 직접 총괄한다 하옵니다.”
우뚝, 강아지의 목에 빨간 천을 묶고 있던 백경화의 손이 멈춘 것은 그때였다. 잠시 시간이 멈춘 것처럼 정지해 있던 백경화의 시선이 느릿하게 여선을 향했다.
“모든 것이… 그 여자를 위해 준비되겠군.”
말이 총괄이지 주연이 바뀌는 연회가 될 것이다. 가장 높은 자리에 앉아 그 모든 것을 웃으며 지켜볼 대비를 생각하니 속이 뒤틀렸다. 그러다 문득, 제 자리를 빼앗기고 한없이 초라해질 한 아이가 떠올랐다. 제 생일이 대비의 권력을 과시하는 장이 된 모습을 지켜보며 그 아이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왠지 안타까운 마음이 들고, 속상해지고 만 백경화는 고개를 내려 제 손을 핥고 있는 어린 생물을 바라보았다. 충만한 애정을 주지도 않았건만 저를 유난히도 따르는 어린 녀석을 내려다보던 백경화의 입이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열린 것은 그다음이었다.
“내 직접 왕의 탄신연에 참석할 것이다.”
“무슨 말씀을!”
믿기 힘든 말을 들었다는 듯 여선의 얼굴에 경악이 서린다. 백경화는 그것을 모른 척하며 덧붙였다.
“그리 알고 준비하여라.”
전쟁 중에 일개 사병도 아닌 대장이 자리를 비우는 것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짓인지 그가 모를 리 없었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궁으로 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지도. 그러나 이미 입 밖으로 내뱉어진 말을 돌릴 수도, 그러고 싶은 마음도 없었던 백경화는 물러서지 않았다.
더 이상의 반박은 듣지 않겠다는 듯 백경화의 얼굴은 단호했다. 차갑게 가라앉은 두 눈이 여선의 대답을 종용한다. 그에 여선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두 손을 모으고 그 명령을 받드는 것뿐이었다.
최근 백경화의 행동이 수상쩍긴 했다. 복수 하나밖에 모르던 그가 다른 것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기쁜 일이나, 그것이 어디로 흘러갈지는 알 수 없기에 불안함도 적지 않았다. 그런 행동의 이유는 여전히 알지 못하나 한 가지는 확실했다.
백경화가 점점, 이상해지고 있었다.
오랜만에 돌아온 도성은 변방의 전쟁 따위와는 관련이 없다는 듯 여전히 평화로웠다. 권세가에 짓눌려 가난한 자는 더욱 가난해지고, 항시 돈 있고 힘 있는 자들만이 살기 좋은 곳. 그중에서도 단연 으뜸은 궁 안이었다. 시선을 사로잡을 정도로 화려함과 경탄을 뽑아내는 멋스러움의 극치지만 속이 썩어 문드러질 대로 문드러진 곳 또한 바로 이곳, 궁이다.
왕권이 약하면 약할수록 권력에 눈먼 이들의 배만 불려지는 현장 속에서 백경화는 초연한 낯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모처럼 만에 갖춘 성장(盛裝)은 거추장스럽기 짝이 없다. 왕의 탄신연에 참석하기 위한 걸음이기에 다른 날보다 더욱 행색을 갖춘 백경화의 모습은 절로 감탄이 터질 정도였다. 모든 시선이 저를 향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백경화는 손안에 든 선물을 무심히 쓰다듬으며 준비되어 있던 제 자리에 착석했다. 그러자 숨죽인 채 그를 바라보던 이들에게서 소란스러움이 일었다.
백경화다. 백가의 양자이자, 얼마 전 단신으로 적군에 뛰어들어 우화국 적장의 목을 베어 넘겼다는 장수.
그런 이의 외양이 생각했던 것과 천양지차라 한 번 놀라고, 이런 자리에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에 두 번 놀랐다. 전쟁터에 있어야 할 이가 어찌 이곳에 있단 말인가. 혹 웃전의 부름을 받고 자리하였나,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투명한 막이라도 쳐졌는지 누구도 그에게 쉽사리 말을 걸지 못했다. 그렇게 얼마 동안 서로 눈치를 살피며 자리에 앉아 있었을까.
문이 열리고 그 사이로 곱게 꾸민 대비가 들어섰다. 그녀는 우아하지만 당당한 걸음으로 단상에 올라 상석에 착석했다. 그러자 대비를 맞이하기 위해 일어섰던 모두가 그녀를 향해 천세를 누리시라 절을 올렸다. 그것은 백경화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들어서는 순간부터 고개를 숙이고 있던 백경화의 몸은 피가 통하지 않는 것처럼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동요로 흔들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그는 느리게 고개를 들어 단상에 앉은 대비를 바라보았다. 변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는 세월의 흐름이 존재하지만 부드럽고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는 그 얼굴은 그의 기억 속 그대로였다.
그 순간, 백경화는 눈앞이 새하얗게 점멸하는 것을 느꼈다. 으득, 제 눈을 가득 채운 여인의 모습에 이를 사리문 채 그는 급히 고개를 숙였다. 치미는 헛구역질을 삼키며 아득해지는 정신을 다잡고자 노력했다. 절로 피어오르는 살기를 눌러 죽이고 있던 그는 습관적으로 한 존재를 떠올렸다.
이연.
그래, 지금은 그 아이를 만나러 온 것이다. 곧 있으면 다시, 그 아이를 볼 수 있다.
그러나 그의 바람은 이어진 대비의 말에 의해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오늘은 이 나라의 주인 되시는 주상 전하의 탄신일을 맞아 준비한 연회이오만, 안타깝게도 주상 전하께오선 갑작스러운 발병으로 인하여 이 자리에 참석하기 힘들게 되셨소. 실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소이다.”
…뭐라?
대비의 말에 고개를 조아리고 있던 대신들 사이에서도 약간의 소란이 일었다. 그 모습을 차분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지켜보던 대비가 여유로운 미소와 함께 덧붙였다.
“허나, 주상께서 친히 이 자리를 즐겨 달라 하셨으니 근심하지 마시고 맘껏 연회를 즐기다 가시기 바라오.”
대비의 말을 듣고 있던 백경화는 기가 찬 마음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이게 말이나 되는 일이란 말인가. 탄신연을 열어 놓고 정작 그 주인이 빠진 자리라니……. 갑작스럽게 발병하였다 하면 당연 이 자리도 취소되어야 함이 옳다. 그런데도 버젓이 상석에 앉아 연회를 즐기라니.
하! 백경화는 기가 막힌 웃음을 터트리며 통탄했다. 이 나라는 글렀다. 이렇게까지 내부가 썩고 곪았으니 보통의 방법으로는 회생키 힘들 것이다.
“…….”
백경화는 주인이 바뀐 연회를 잠시간 지켜보다 누구도 모르게 그곳을 벗어났다. 그는 좋은 길 놔두고 굳이 후원으로 돌아가며 문득 한숨을 내쉬었다. 대비를 보았을 때보다도 더한 허탈감에 그는 힘없이 걸음을 내디뎠다. 그의 한숨이 깊어질수록 그 손에 들려 있던 바구니 안 강아지의 낑낑거림도 커져 갔다.
“너도 나도 헛걸음하였구나. 오늘 네 주인을 만나긴 힘들 듯해.”
백경화의 말을 알아들었는지 못 알아들었는지 강아지는 고개만 몇 번 갸웃거릴 뿐이었다. 최대한 느린 걸음으로 거닐었건만 벌써 궁문이 보였다. 어찌 이연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던 그의 바람은 그리 끝을 고했다.
궁 밖으로 나가자 대기하고 있던 여선이 그를 맞이했다. 생각보다 이른 백경화의 귀가에 잠시 의아함을 내비치나 싶었던 여선은 그러나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백경화의 표정이 가히 좋지 않았던 탓이다.
백경화는 아무 말도 없이 그들을 대동한 채 백가의 저택으로 돌아왔다. 비록 백가에 입적한 양자 행세를 하고 있긴 하나 그는 유란가 못지않게 백가가 증오스러웠다. 제가 찢어 죽이긴 했으나 과거에 백가의 가주가 한 짓을 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전대 유란 가주의 청에 따라 아무 연유도 묻지 않고 중독되어 있던 무사를 베어 죽였다. 그 아들의 눈앞에서.
독아에 중독되어 내공 하나 제대로 쓰지 못하던 아비는 그리 백가의 가주 손에 유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필요에 따라 백가의 양자 행세를 하고 있기는 하나 제 아비를 직접적으로 죽였던 원수의 집이니 마음 편히 머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내일 새벽 일찍 돌아갈 것이다. 채비해 놓거라.”
“존명.”
여선을 비롯한 군사령들의 부복을 받으면서도 백경화는 뒤 한번 돌아보지 않았다. 넋을 놓고 무의미하게 강아지만 쓰다듬었다. 아이를 볼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던 만큼이나 아쉬움은 컸다. 나아가 마음이 선득하고 스산했다. 통째로 심장이 짓이겨진 듯 허허로웠다.
쿵- 쿠르르!
그 순간 밖에서 천둥소리가 들려왔다. 혹 제 속에서 난 소리인가 싶었던 백경화는 곧이어 들려온 빗소리에 그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오늘 밤은 유독 길 듯싶었다.
쏴아아아-
귓가를 때리는 빗줄기 소리는 짐짓 시원스럽기까지 했다. 백경화는 그 모든 것을 온몸으로 맞으며 궁담을 도약 한 번으로 타 넘었다. 소리도 없이 착지한 그는 잠시 주위의 기색을 살피다 죽립을 고쳐 썼다. 충동적이란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새벽이 될 때까지 잠들지 못하고 한참을 뒤척이던 그는 몸을 일으키지 않을 수 없었다.
어디로 가야 할까. 그는 처음 궁 안을 헤매었을 때의 기억을 애써 떠올리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낑낑- 그때 품 안에서 들려온 소리에 백경화는 시선을 내렸다. 최대한 제 몸으로 가리고 있다 하나 비에 쫄딱 젖은 채로 바들바들 떨고 있는 작은 몸이 퍽 애처로웠다.
이것만 주고 돌아가자. 감히 그 얼굴 볼 생각은 하지도 말고.
그 생각 하나로 그는 언젠가의 기억을 떠올리며 걸음을 내디뎠다. 대충 궁 안의 위치를 파악해 둔 탓인지 생각보다 어렵지 않게 이연이 머물고 있는 태근전을 찾을 수 있었다. 궁 안에서도 가장 삼엄한 경계를 보여야 할 곳은 그저 조용하기만 했다. 거대한 전각은 비에 파묻혀 언뜻 처연해 보였다. 왠지 그 아이를 닮은 것 같아 백경화는 쉽사리 다가서지 못했다.
얼마나 비를 맞으며 그리 서 있었을까.
품 안에 얌전히 있나 싶었던 강아지가 돌연 꼼지락거리기 시작했다. 그에 정신을 차린 백경화가 강아지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용변이라도 볼 것이라 생각했던 그의 예상과 달리 강아지는 짧은 다리로 종종걸음치며 이곳저곳 둘러보기 시작했다. 감히 궁 안을 제집인 양 설치고 다니는 모습이 제법 담대하다. 백경화는 그 모습을 다소 어이없게 지켜보다 곧 그 뒤꽁무니를 따라 걸었다. 그래, 어디 네 맘대로 해 봐라. 그러다 네 주인이라도 만나게 해 주면 고맙고. 허나 강아지를 따라 태근전에 닿아 갈수록 그의 걸음은 점차 느려진다. 그러다 곧 그는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태근전 전각(殿閣)의 툇마루에 힘없이 걸터앉아 있던 인영을 발견한 탓이다.
이 늦은 밤, 어찌하여 잠들어 있지 않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이연을 발견한 순간 쿵! 그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저도 모르게 숨을 죽인 채 이연을 지켜보던 그는 그 순간 귓가로 파고든 희미한 목소리에 잘게 전율했다.
“거기, 누구냐?”
어둔 밤을 가르고 날아든 목소리는 금방 사그라질 듯 힘이 없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강렬하게 백경화의 뇌리를 파고들었다.
백경화는 작은 목소리를 듣고자 더욱 귀를 기울였다. 더, 더 말해 보아라. 그리 애원하며 그는 조심스럽게 이연의 모습을 살폈다.
툇마루에 힘없이 걸터앉아 있는 이연은 그때보다 조금은 키가 큰 듯하나 그때보다는 말랐다. 아팠다 하는 말이 거짓이 아닌지 안색이 영 좋지 못했다. 얼마 전 밀정에 의하면 대군이 역모로 처형되고 한동안 식음을 전폐했다 하였으니 그 탓인가 싶기도 했다.
백경화는 순간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 한 존재에 입 안이 씁쓰레해지는 것을 느꼈다.
연강(軟强).
연약하고 강한,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그의 이부동생.
자신에겐 아비 쪽 핏줄만 존재한다 생각했기에 역모죄로 처형당할 때조차 관심 두지 않은 동생이었다. 연강이 제법 이 아이에게 살뜰했다 하였으니 진정 역모죄를 꾀했을 리는 없고, 그 또한 제 아비와 저같이 비정한 모친에 의해 버려진 것이리라.
듣자 하니 이연에게 유일한 말벗이자 동무라 하였다.
‘이놈의 핏줄은 너에게 비정하거나 다정하거나, 둘 중 하나구나.’
연강과 대면하여 말이라도 나눠 볼 기회가 있었다면, 어쩌면 많은 것이 달라졌을지 모르나 이미 삼도천 건너간 이와 말을 나눌 수는 없는 일이다. 지금은 한 번도 보지 못한 동생보다 눈앞에서 당장 바스라질 것 같은 이 아이가 더 중요했다.
어쩌면 연강이 저승에서 비정한 어미만큼이나 무정한 형이라 욕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어찌하누. 내 눈엔 정말 너밖에 보이지 않는 것을.’
새삼 지독하다 싶어 속으로 혀를 내두른 백경화는 제가 이연의 질문에 답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이연은 무엄하게 제 말에 대답하지 않는 백경화를 바라보다 고개를 기울였다. 검은색 장의와 죽립까지 쓰고 빗속에 서 있는 그가 괴이쩍을 만도 하건만 어쩐지 전혀 두렵지 않았다. 저를 해하러 온 자객이란 의심이 들 법도 하건만 희한한 일이었다.
그에 이연은 발치에서 아치랑거리는 강아지를 한 번 내려다본 뒤 그를 향해 물었다.
“그대, 살아 있는 사람이더냐?”
“…….”
그때도 너는 그러했다. 나를 죽은 자와 착각하여, 그리 물었었지.
백경화는 이연의 물음에 슬며시 입꼬리를 끌어당겨 웃었다. 그는 이제 그 물음에 당당히 답할 수 있었다. 눈앞의 아이가 그럴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다.
“예, 전하.”
“…행색을 보아하니 궁인은 아닌 듯하구나.”
무심히 던져진 이연의 말에 백경화는 그저 고개만 조아렸다. 이연은 그 모습을 아주 잠시 동안 주시했다. 내리는 비를 아랑곳하지 않고 서 있는 사내는 죽립으로 얼굴의 반을 가리어 그 생김을 알 수가 없었다. 허나 이연은 저가 아는 자는 아닐 것이라 확신했다. 누구도 그처럼 저를 경건하고 조심스럽게 대하는 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쏴아아아- 잠시 잊혔던 빗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잠시 비 내리는 까만 밤하늘을 올려다보던 이연은 순간 제 침의를 잡아당기는 느낌에 시선을 내렸다. 그러자 보이는 것은 그의 침의를 물고 늘어진 강아지였다.
대경한 백경화가 그만하라 호통치기도 전, 이연의 손이 제 옷자락을 물고 있는 강아지를 향했다. 쳐 내는 건가, 싶었던 손은 곧 머뭇거리다 작은 머리통 위에 내려앉았다. 어색하게나마 머리통을 쓰다듬자 물고 있던 침의를 놓은 녀석이 그 손에 침질을 해 댄다. 이연은 할짝할짝 앞발로 제 손을 잡고 맛있는 것이라도 먹는 양 핥아 대는 녀석을 가만히 바라보다 옅게 미소 지었다.
잘한다! 그 모습을 놓치지 않은 백경화는 고개를 숙이고 강아지를 응원했다.
“네 것이냐?”
“…그러하옵니다, 전하.”
백경화는 부디 이연이 제 목소리의 떨림을 눈치채지 못하길 바랐다. 까딱 잘못하다가는 말까지 더듬을 판이라 백경화는 어금니를 사리물었다. 그러다 문득 강아지의 용도가 무엇인지 떠올린 그는 이연을 바라보다 천천히 절을 올렸다. 백경화는 젖은 땅에 망설임 없이 머리를 대었다. 난데없는 그의 행동에 이연이 놀라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그렇게 자신의 마음 한 자락 내비쳤다.
“탄일을 진심으로 경하드리옵니다. 부디 뜻하신 바 모두 이루시고, 천세를 누리소서.”
정중하고 경건한 몸가짐이 전하는 바는 한 가지, 진심 섞인 축하였다. 태어나 줘서, 이리 자라 줘서, 살아 줘서 감사하다는 마음이다.
“또한 그것은 전하의 탄신일 선물로 준비한 것이오니 부디 받아 주시옵소서.”
백경화의 말에 강아지를 쓰다듬던 이연의 손이 멎었다. 그러자 강아지가 더 만져 달라 애교를 떨며 끙끙 앓아 댔다. 그 모습을 멀거니 내려다보던 이연의 시선이 흘깃 바닥에 엎드려 있는 백경화를 향한다. 그가 얼마나 진심을 담고 한 말인지는 흔들림 없는 단단한 등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이연은 어쩐지 목이 메고 눈가가 뜨거워져서 잠시 숨을 골라야만 했다.
이연은 동요로 떨리는 손을 겨우 움직여 강아지를 쓰다듬으며 무심을 가장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얼굴이 보이지 않는구나. 이리 가까이 와 보거라.”
“…….”
그 명에 따라 백경화는 조심스레 몸을 일으켜 이연을 향해 무릎걸음으로 다가갔다. 내 얼굴을 기억할까? 알아볼까? 걱정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 기대가 되는 것을 모른 척하며 그는 이연이 앉아 있는 월대 밑까지 다가간 뒤 다시 고개를 조아렸다. 죽립을 벗기를 기다리는 이연의 기색에 백경화는 입술을 깨물었다. 혹 이 아이가 그때의 처참했던 자신의 모습을 기억하면 어쩌나, 걱정이 앞섰다. 그에게 검을 휘두르려 했던, 흉악했던 자신을.
그렇기에 백경화는 잠시 눈동자를 굴리다 말을 돌렸다. 내뱉고 보니 이같이 중요한 것도 없었다.
“옥체는 좀 어떠신지요?”
“…괜찮으니.”
이연의 대답에도 불구하고 백경화는 무엄하게 눈동자를 들어 이연의 안색을 살폈다. 파리하게 질려 있는 안색과 새하얗게 부르튼 입술이 그의 눈을 아프게 찔러 왔다. 욱신, 어쩐지 초췌한 이연의 모습에 가슴이 아파 와 백경화는 미간을 찌푸리고 말았다. 어찌하여 이 아이는 이리 항상 아픈지…….
“전하, 밤바람이 차오니 그런 차림으로 나와 계시는 것은 좋지 않사옵니다.”
“답답하여 잠시 나온 것이다.”
“그럼 상궁을 시켜 겉옷이라도 가져오라 함이 어떠하신지요.”
“…….”
이연에게서 돌아오는 대답이 없자 의아해진 백경화가 고개를 들려던 찰나, 바람보다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럴 이가 있었으면 내 애초부터 이리 나와 있지도 않았을 터다.”
그러고 보니 느껴지는 인기척이 없다. 아무리 밤이 깊었기로서니 이토록이나 고요할 수가 있나. 이것은 방치에 가까웠다. 그제야 그것을 깨달은 백경화는 입술을 깨물었다 놓았다. 불경한 것들! 그의 눈에 새파란 안광이 서린 것은 순식간이었다. 죽립에 가리어 있어 미처 그것을 보지 못한 이연이 덧붙였다.
“허니 내 이것은 받지 않을 셈이다.”
“…어심에 차지 않으시는지요?”
어느새 발치에 엎드려 잠들어 있는 것을 가리키며 하는 이연의 말에 백경화는 가슴이 철렁했다. 하긴 혈통 있는 녀석은 아니니 그의 눈에 찰 리가 없다. 백경화는 제 실수에 통탄하며 얼른 덧붙였다.
“다른 것으로 준비해 드리겠나이다.”
“그런 것이 아니다.”
백경화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렵지 않게 유추한 이연이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나는 잘 키울 자신이 없으니 네가 대신 키워 다오.”
“배변 훈련도 마쳤고 크게 손 가는 아이가 아니오니…….”
큰 보살핌은 궁인들의 손을 거칠 것이니 문제 될 것도 없다. 아이는 그저 귀여워만 하면 될 일이었다. 무엇보다 강아지는 이연이 곁에 두고 웃었으면 하여 산 것이지, 제 손으로 키우려고 산 것이 아니다. 그가 받지 않으면 아무 소용 없었다.
어찌 이연의 마음을 돌릴까 싶어 머리를 굴리던 그는 알지 못했다. 잠든 강아지를 내려다보는 이연의 표정이 어떠한지. 그가 어떤 마음으로 그것을 거부하고 있는지를.
“이 궁에… 내 곁에 두어 무탈한 것은 없노라.”
“…….”
“그러니 그대가 다시 가져가.”
백경화는 가져가라 하면서도 잠든 녀석을 떼어 놓지 못하는 이연의 모습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깟 개 하나 키우는 것이 뭐 힘든 일이라고 저런 얼굴이란 말인가. 그럼에도 백경화는 무력함에 이를 사리물었다. 너의 그런 얼굴을 보려고 준비한 것이 아니었다.
갈가리 찢기는 백경화의 마음도 모르고 이연은 데려가라던 말과는 달리 졸고 있는 강아지를 연신 쓰다듬었다. 어쩐지 그 모습이 지쳐 보여 백경화는 또 속이 상했다. 왜 그리 처연해 보이느냐. 왜 그리 슬퍼 보여. 무엇이 널 그리도 괴롭게 만드느냐.
세상에 홀로 버티고 서 있는 듯한 이연의 모습이 안타까워 가슴이 저렸다. 백경화는 제게 다 털어놓아 보아라, 안고 속삭이고 싶은 것을 필사적으로 억누르며 입을 열었다.
“전하, 그러하시오면 아주 잠시만 이 녀석을 맡아 주시지 않으시렵니까? 제가 지금 잠시 다녀올 곳이 있나이다.”
그때까지만이라도 그 녀석 보고 웃고 계소서.
이연은 백경화의 청이 마음으로 파고드는 느낌에 생경한 심정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가 무슨 심정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 눈치챘기 때문이다. 이이는 왜 이다지도 자신에게 다정할까. 평소라면 말하지 않았을 속내가 줄줄이 흘러나왔던 것도 그래서였다. 낯선 이 사내가 너무나 제게 다정하여서. 이런들 제가 그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하지만 이연은 그것을 굳이 입 밖으로 꺼내어 다정한 사내를 물리고 싶지 않았다. 그저 네 이름이 무어냐, 묻기 위해 입술을 달싹였다.
그때 제 이야기를 하는 걸 알았는지 잠들었던 녀석이 깨어나 그를 올려다보지 않았다면 필히 그리하였을 것이다.
저 잠든 사이에도 예뻐한 것을 아는지 강아지는 이연의 품을 파고들어 다시 눈을 감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백경화가 조심스레 몸을 일으켰다. 점차 파리하게 질려 가는 이연의 안색이 걱정된 탓이다. 두터운 표의(表衣)라도 하나 가져와야지 안 되겠다.
그는 잠시 자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전혀 예상치 못했다.
그가 돌아왔을 때, 방금까지 살아 움직이던 강아지는 싸늘한 주검이 되어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놀란 마음 한편 이연이 걱정스러워 백경화가 급히 그를 향해 다가서려는 순간이었다.
“오지 말거라.”
“……!”
“…오지 마.”
반쯤 넋이 나간 얼굴로 그리 속삭여 봤자 백경화의 걸음을 멈추기는 힘들었다. 그러나 불쑥, 저를 향해 두 손을 내미는 이연의 모습엔 그는 더 이상 다가가지 못하고 걸음을 멈춰야만 했다.
“…미안하네. 잠시조차 지키지 못했으니 어쩐다지.”
“전하, 도대체 무슨 일이…….”
“…….”
이연은 백경화의 물음에 답하지 않았다. 그저 까맣게 죽은 눈으로 강아지를 내려다보다 두 눈을 내리감았을 뿐이다. 그래, 내 처지가 이렇다. 이리 덧없고 허망하다. 이연은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작은 영혼이 떠나는 것을 지켜보며 숨죽여 울었다. 저 같아서, 그리 울었다.
“내가 말했지 않아. 내 곁에 있어 무탈한 것 없노라고.”
그래도 하룻밤쯤은 괜찮을 줄 알았다. 작은 강아지 하나, 잠시 눈 붙일 품 안 정도는 내어 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것은 그의 오만이었다. 제 목숨 하나 겨우 연명하는 주제에 무엇을 책임질까.
“그러니 그대도 오지 마라. 어이하여 날 이리 살갑게 대하는지 모르겠으나, 그대에게도 좋을 것 없음이야.”
이연은 입고 있던 옷을 하나 벗어 조심스럽지만 떨리는 손길로 강아지를 감쌌다. 그것을 무작정 백경화에게 넘기며 사죄했다.
“부디 그 아이 가는 길 잘 지켜봐 줘.”
“전하!”
이연이 건네는 것을 받아 들면서도 백경화는 필사적으로 입을 열어 그를 불렀다. 어찌하여 이리되었는지는 더 이상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구원이, 그의 특별한 존재가 그에게서 등을 돌리고 있었다. 제게서 멀어지고 있었다.
“전하, 이 일에 괘념치 마소서. 이 아이 명이 여기까지였을 뿐이옵나이다.”
“그렇다면 내 명도 오늘까지였겠구나.”
“…무슨?”
“내가 먹으려던 것을 주었다.”
쉽사리 이연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던 백경화의 눈이 차차 부릅떠졌다. 그는 저도 모르게 이연의 팔을 낚아채어 그의 안색을 살폈다. 어디 상한 곳은 없나 세세히 살피던 그는 안색이 말도 못 하게 창백하긴 하나 상한 곳 없는 이연의 모습에 안도했다.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무릎을 꿇고 앉은 백경화는 제 손이 사정없이 떨리는 것을 느끼며 속삭였다. 아아- 천지신명이시여, 감사하나이다! 이리 허망하게 잃지 않게 해 주시어……. 이연이 제 눈앞에서 사라질 수도 있었다는 생각에 그는 생전 처음으로 신을 향해 감사의 말을 전했다.
“내가… 무얼 그리 잘못했지?”
“전하.”
“모두 나보고 죽으라, 죽으라 하는구나.”
바닥을 바라보며 허탈하게 웃던 이연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내 잠시 잃는 것의 허망함을 잊고 있었구나.”
무엇이 되었든 다음엔 쉽게 곁을 내어 주지 않을 것이다…. 이어진 목소리는 너무나 작고 희미하여 금방이라도 바스러질 것만 같았다. 그리고 어째선지 백경화는 덜컹! 가슴이 내려앉고 말았다. 그러지 마라! 매달리고 애원하고 싶은 이유를 백경화는 알 수 없었다. 왜 자신이 이연에게 내쳐졌단 느낌을 받는지도. 그것이 어찌하여 저를 이리도 절망스럽게 하는지도 몰랐다. 그저 울지 않기 위해 한없이 떨면서도 두 눈에 힘을 주고 버티고 있는 이연이 그의 눈과 가슴에 선명하게 자리 잡는 것을 느낄 뿐이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이연의 볼을 쓰다듬었다. 미처 무엄함을 따지기도 전에 그 위로 떨어져 내리는 빗물을 눈물처럼 닦으며 속삭였다.
“전하, 오늘 일은 잊으소서. 이것은 모두 꿈이옵나이다.”
“…….”
“전하께오선 아무것도 잘못한 것 없나이다. 아니, 오히려 사람 하나를…… 길을 잃고 헤매던 사람 하나를 살린 적이 있으시옵니다.”
“…나는 그런 적 없다.”
“있으시옵니다.”
이연은 다분히 자신의 말을 부정하는 사내를 멀거니 바라보았다. 그러다 점차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참으려 애써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 네 말대로 그러하다면…… 나는 도대체 누가 구해 주는 것이냐?”
“…….”
“말 마라. 덧없을 뿐인 것을.”
이연의 처연한 말은 백경화의 심장을 짓이겨 놓았다. 아득한 감각에 이연을 붙잡고 있던 백경화의 손이 사정없이 떨렸다. 생각보다 먼저 입이 움직인 것은 그때였다.
“제가… 제가, 지켜 드릴 것이옵니다.”
그래, 그는 그럴 수 있었다. 자신을 구원해 준 이 작은 아이, 그가 지켜 주면 되는 일이었다.
백경화는 큰 깨달음을 얻은 이 마냥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이연을 바라보았다. 제 말을 들었는지 듣지 못했는지 넋을 잃은 표정으로 눈물만 흘리는 이연에게선 대답이 없었다. 그런 이연을, 그는 조심스럽게 제 품으로 끌어안았다. 그동안 꾸었던 꿈은 은연중 그의 바람을 보여 주었음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얼어붙었던 제 심장이 이리 활화산보다 뜨거울 순 없다.
조금 더 일찍 깨달았으면 좋았을걸.
이연의 목에 얼굴을 묻은 백경화는 격정으로 어깨를 떨었다. 이제야 알겠다. 이렇게 늦게 깨달았다. 왜 그다지도 이 아이가 생각나는지, 그리 연연해했는지.
연모한다.
자신은 이 아이를.
이 몸 안에 이 아이가 싹을 틔웠다.
“다시, 다시 찾아올 것입니다. 제대로 된 모습으로, 전하의 앞에 나설 것입니다.”
다시는 네가 이리 울지 않게 해 줄 것이다. 나는 그리할 것이야.
백경화는 점차 열꽃을 피우며 늘어지는 작은 몸을 품어 안고 일어섰다. 그러니 아주 조금만 더 버텨 다오. 내가 당당히 네 앞에 나설 수 있을 그때까지만.
* * *
“…….”
백경화는 상념에서 깨어나듯 한차례 눈을 깜빡였다. 가슴이 시큰거리고 저린 것을 느끼며 그는 상석에 앉아 있는 이연을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백경화는 저를 바라보는 이연의 시선에 남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애써 긴장을 숨기며 이연의 앞에 당도한 그는 무릎을 꿇고 앉아 두 손을 들어 읍했다.
“신(臣), 백경화. 칙명을 받들어 국경을 넘은 이란국을 패퇴시키고 귀환하였음을 전하께 아뢰옵니다.”
백경화는 부디 제 목소리가 떨리지 않기를 바라며 이연을 눈에 담았다. 그는, 이연의 곁에 머물 것이다. 아프면 간호해 주고, 슬퍼하면 달래 주고, 울고 있으면 안아 주리라. 저 아이가 웃으면 함께 웃고 바라는 것이 있으면 모두 그 손에 이루어 주리라.
가장 가까운 곳에서, 그리할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바라는 청이 있으면 말해 보란 이연의 말에 아주 오래전부터 준비해 왔던 바람을 입에 담을 수 있었다. 그날, 죽은 강아지를 위해 돌무덤을 만들며 생각했던 일이다.
“…그게, 무어냐?”
약간의 당황을 담고 돌아온 이연의 물음에 백경화는 고개를 들어 이연을 마주 보았다.
그는 이연의 눈을 마주한 채 간절히 청했다.
“부디 청하옵건대, 소신을 전하의 후궁 삼아 주시옵소서.”
아이야, 많이 기다렸느냐? 내 늦어 화가 난 것은 아닐 테지.
그래도 이 청만은 들어주길 바란다.
백경화는 제 말에 점차 경악으로 물들어 가는 대전은 아랑곳없이 오롯이 이연만을 주시했다. 그렇게 이연의 입이 열리길 기다렸다. 그가 허한다면, 그러기만 한다면 그는 이연이 숨이 막혀 할 정도로 이 마음을 퍼부어 줄 생각이었다. 제 생각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은 백경화는 두 눈을 내리감고 다시 한번 간청했다.
“이 미천한 몸 거두시어, 전하의 후궁 삼아 주소서. 소신, 그것만이 유일한 청이옵나이다.”
그 말을 내뱉고서야 백경화는 깨달았다.
아아- 이것은 그의 첫사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