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화 (10/14)

後日(후일)

남쪽 끝, 파난국에서도 한참 외지의 마을에 보기 힘든 장원이 한 채 들어섰다. 그 돌담이 어찌나 웅장하고 장대한지 마을 사람들은 모두 그 집을 지나칠 때마다 돌아보곤 했다. 도대체 주인이 뉘기에 이 마을에 저런 집을 지었나. 마을 어르신들마저 한 번씩 입을 대는 그곳에 주인이 든 것은 벌써 석 달 전의 일이었다. 언제 왔는지도 모르게 그 안에 든 이들은 어린 이향의 마음을 순식간에 사로잡을 정도로 멋졌다. 이야기 속에서만 들을 것 같은 그들의 모습에 이향은 장원의 일손을 거드는 날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다행히 손끝이 야무지고 섬세한 이향은 제법 일을 잘해서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매번 그 집에 불려 갔다.

그럴 때면 이향은 항상 이상한 아저씨를 만났다. 보고픈 이들은 잘 보이지도 않고, 관심도 없는 아저씨만 자꾸 만나니 절로 입술이 불툭 튀어나올 지경이다. 그 집의 총관이라 밝힌 아저씨는 평소엔 굉장히 무표정하고 차분한데 가끔 무언가를 참듯 한숨을 내쉬거나 멍하니 하늘을 보기 일쑤였다. 어느 날은 혼자 벽에 머리까지 박는 것을 목격하였던 이향은 그 아저씨가 조금 미쳤다고 생각했다. 겉모습만 멀쩡하면 뭐 하누, 속은 텅 비었는데. 쯧쯧.

“…넌 왜 나만 보면 그리 쳐다보는 게야?”

“…제가 무얼요, 어르신.”

마치 천하의 다시없을 무지렁이를 쳐다보듯 바라보는 이향의 시선이, 항상 여선을 꺼림칙하게 만들었다. 내가 저런 어린아이에게까지 동정 그득한 시선을 받아야 하는 것인가. …내가 뭐가 못나서? 안 그래도 요즘 들어 더욱 짙어진 이 집 내외의 애정 행각에 몸이 남아나질 않건만……. 좀 자중하시라, 아랫것들 보기 민망하시지도 않으냐. 목숨 걸고 그리 읍소해 보았으나 돌아오는 것은 맹렬한 비웃음 하나뿐이었다. 네가 아직 장가를 못 가서 그런 게지.

장가갈 수 있게 연애할 시간이라도 주시든가!! 노총각 취급 하는 백경화의 말에 울컥하고 만 여선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억울하고 혈압 돋는 백경화의 말에 홀로 씨근덕거리던 여선은 그 순간 느껴지는 시선에 얼른 정신을 차렸다.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려 보니, 작고 어린 여자아이는 대놓고 여선을 안쓰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정녕 너까지 왜 이러느냐.

‘내가 어린아이 앞에서 뭐 하는 짓인지.’

이게 다 나날이 낯부끄러워지는 주군 탓이라며 묵직한 한숨을 내쉰 여선이 멀찍이 서 있는 이향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래, 주인어른께서 부탁하신 것은 해 왔느냐?”

“예, 어르신.”

“그럼 이리 다오.”

이향을 향해 여선이 손을 내민 순간이었다. 그의 뒤에서 불쑥, 다른 목소리가 섞여 들었다.

“이 아이더냐?”

“……!”

이향은 놀라 고개를 들었다가 마주친 시선에 냅다 고개를 숙인 뒤 여선의 뒤로 몸을 숨겼다. 이향이 동경하는 주인어른께서 거기 서 계셨다. 실타래 같은 검은 머리카락을 풀어 헤친 모습으로 나른하게 서 있는 주인어른은 언제 봐도 참으로 아리따우셨다.

“네가 그리도 음식 솜씨가 좋다지? 내 연 님께서 네가 만든 것이 입에 맞으신 듯하더구나.”

“…그저 조그마한 특기일 뿐이옵니다.”

얘 좀 봐라. 어찌 날 대할 때와 이리 천양지차인가. 여선은 제게는 다소 당당히 굴던 여아가 소곤거리듯 답하는 것에 어이가 없었다. 허나 제 앞에 서 있는 백경화를 돌아본 그는 혀를 차며 고개를 내저었다. 저런 건 어린아이에게 독이었다.

“…네 특기가 내겐 왜 이리 힘든 것이냐.”

“예?”

“아니다. 아무것도.”

이향은 듣지 못했지만 여선은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생각보다 이르게 장원에 자리를 잡게 된 이유는 이연의 체력이 버텨 주지 못한 탓이 컸다. 아무리 백경화가 안고 다니더라도 이연에겐 다소 무리한 행보였던지, 이연은 크게 앓고 말았다. 그에 혼비백산한 백경화는 강산 나들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곤 이 장원에 틀어박혔다. 그러고선 겨울 내내 이연을 알뜰히 살폈다. 여름 때도 문제였지만, 겨울 때도 문제였다. 그렇다고 봄과 가을에 괜찮냐 하면 그건 또 아니라 여선으로선 1년 내내 죽을 맛이었다.

그러다 요즘 조금씩 살이 오르고 키가 크기 시작한 이연의 입맛을 사로잡은 이가 있었으니… 그이가 바로 여선의 뒤에 서 있는 이향이었다. 백경화가 작정하고 먹여야 그나마 좀 많이 먹던 이가 저 알아서 찾아 먹는 그 모든 것이 이향의 손에서 만들어진 것이란 걸 안 백경화의 반응이야 뻔했다. 수시로 이향을 불러들여 음식을 하게 만드는 것도 모자라, 요즘은 그 솜씨를 따라 하겠답시고 주방에 틀어박혀 있는 중이었다.

“그래, 내가 이른 것은 가져왔느냐?”

예, 공손히 답한 이향은 들고 있던 것을 백경화에게 조심스레 내밀었다. 그것을 흘깃, 확인한 백경화가 선뜻 받아 들었다. 항시 모양 좋던 부침이 조금 엉성한 모양새를 자랑하고 있는 것을 확인한 백경화가 만족스레 입을 열었다.

“수고하였다. 삯은 넉넉히 챙겨 줄 터이니… 다음에도 이같이 하도록 하거라.”

여선은 제게 눈짓한 후 급히 돌아서 멀어지는 백경화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쯧쯧, 낮게 혀를 찼다. 안 봐도 훤하다. 또 이연 님에게 제가 만든 것이라 거짓부렁 하러 가는 것일 테지. 그럼 또 이번엔 무슨 수로 이연 님께 이른담…….

머리를 굴리며 여선은 백경화가 떠난 길을 바라보고 있는 이향을 향해 손짓했다.

“따라오너라.”

어찌 됐든 백경화가 명한 대로 두둑한 보수를 챙겨 준 뒤 돌려보낼 생각이었다.

아쉬움을 머금고 시선을 돌린 이향은 고개를 숙인 채 여선의 뒤를 따라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래도 오늘은 운이 좋았다. 이향이 동경하는 두 사람 중 한 사람이라도 보았으니 말이다. 그에 만족하며 여선의 뒤를 따라 걷던 이향의 눈에 멀리 백경화가 보인 것은 정말로 우연이었다. 창 앞에 서 방 안을 향해 곱게 웃은 그는 이향이 준비한 음식을 쑥스럽게 내밀었다. 이향은 그의 모습만으로도 그 안에 누가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이 집 도련님이다. 부드러워 보이지만 써늘한 느낌의 어여쁜 도련님……. 오늘은 아무래도 횡재하는 날임이 분명했다.

백경화는 창밖에 선 채로 이연을 향해 웃으며 들고 있던 꽃전을 들어 보이며 제가 만들었노라 사기를 쳤다. 양심을 팔아먹은 사기에도 불구하고 이연은 맛나 보인다고 웃으며 답하였다. 그러다 무슨 생각을 한 건지 이연이 불쑥 손을 내밀었다.

가느다랗고 늘씬한 팔은 쌓여 있는 눈만치 하얬다. 그 손은 백경화의 얼굴을 스치고, 조금 더 뒤를 향했다. 손이 목표하였던 것은 백경화의 뒤편에 있던 붉은 동백꽃이었다.

부드럽게 그것을 꺾어 든 이연의 손이 곧 백경화의 귀 끝에 닿았다. 붉은색 동백꽃은 그렇게 아름다운 남자의 조화 속에 녹아들었다. 할 일을 끝낸 손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을 잡은 백경화가 그 손에 볼을 묻었다. 애교를 피우듯 몇 번 볼을 부비던 그가 그 손바닥에 입 맞추자 이연이 얼굴을 내밀었다. 잡고 있던 손을 놓는 대신 부드럽게 새하얀 뺨을 쓰다듬은 백경화가 고개를 비틀고 작은 얼굴에 다가갔다. 촉. 두 입술이 부드럽게 맞닿았다.

그 모든 것을 빠짐없이 지켜본 이향은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히고 말았다. 제 얼굴이 불탈 듯 달아오른 것도 모르고 신나 하며 속으로 비명까지 질러 댔다. 심봤다! 터져 나올 것 같은 비명을 참으며 조금 더 눈에 힘을 주던 이향은 그 순간 불쑥, 들리는 몸에 급히 헛바람을 들이켰다.

“어찌 오지 않나 싶었더니…….”

“…….”

“큰일 날 아이로구나.”

잔뜩 낮춘 여선의 말에 고개를 숙이던 이향은 그렇게 대롱대롱 들린 채로 그곳에서 끌려 나오고 말았다. 아쉬운 마음에 뒤돌아본 순간 보인 것은, 훌쩍- 가볍게 창을 넘어가는 주인어른의 모습이었다. 더 보지 않더라도 그들의 입맞춤이 깊어졌다는 것쯤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던 이향은 그 순간 깨달았다.

아아… 이제 곧 봄이구나.

잠시 후, 생각에 잠겼던 이향의 시선이 저를 들고 걸어가고 있는 여선에게 닿았다. 이리저리 면밀히 살피며 자신의 이곳저곳을 뜯어보는 이향의 시선을 모를 리가 없는 여선이 물었다.

“왜 그러느냐?”

“……아니옵니다, 어르신.”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내저은 이향은 폭-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이 불쌍한 영혼은 제가 구제해 주어야겠다- 되뇌며.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