四
백경화의 상처가 경이로운 속도로 아물고 얼마 지나지 않은 날이었다. 그날도 백경화의 심장 소리를 자장가 삼아 반쯤 졸고 있던 이연은 평소와 달리 저를 흔드는 조심스러운 손길을 느끼며 눈을 떴다.
“전하, 잠시만 일어나 보소서.”
“왜 그러느냐?”
졸음이 묻어난 목소리로 그리 물으며 백경화에게 기대고 있던 몸을 일으킨 이연이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그를 내려다보고 있던 백경화가 다소 흥분한 기색으로 밖을 향해 그것을 들이라 명했다. 난데없는 말에 무슨 일인가, 눈을 똥그랗게 뜬 이연이 불안하게 눈을 굴렸다. 설마 또 먹을거리인가…….
그러나 여선이 두 손으로 받치고 들여온 것은 널찍한 고급 상자였다. 두 개의 상자를 백경화의 앞에 정중히 내려놓은 뒤 그는 한 발 물러났다.
그러자 백경화가 이연을 향해 상자 하나를 내밀었다.
“무어냐?”
물음에도 불구하고 그저 말없이 얼른 열어 보라 독촉하는 것에 이연은 고개를 기울였다. 이번엔 또 무언가. 그동안 숱하게 많은 것을 받아 왔지만 백경화가 이리 긴장한 것은 처음 본다.
도대체 무엇이기에 이리 긴장하나, 궁금하기도 하고 조금 두렵기도 하여 이연은 얼떨떨한 낯으로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그러자 보이는 것은 연한 살굿빛의 도포 한 벌이었다.
옅은 감탄사를 터트리며 손끝으로 도포를 쓰다듬은 이연은 그 부드러운 질감에 또 한 번 감탄했다.
“곱구나.”
후우… 이연의 말에 백경화는 진심으로 안도했다. 유독 유난스러운 반응에 이연의 눈에 의아함이 서린다. 그러자 백경화가 슬쩍 웃으며 밝히기를.
“사실 제가 지었사옵니다.”
뭐라고? 진실로 그렇게 소리칠 뻔한 이연의 눈이 제 손에 들린 옷을 향했다. 누가 보더라도 장인이 한 땀 한 땀 놓은 바느질이라, 그것을 바라보는 이연의 얼굴에 잔뜩 경악이 서린 찰나였다.
묵묵히 돌하르방 ─특히 구멍 송송 난─ 노릇 하던 여선이 입을 열었다.
“침방나인이 한 땀 한 땀 정성을 다해 지었나이다.”
“…….”
“…….”
“…….”
“…….”
분위기 파악도 못 하고 초를 치는 여선을 향해 살벌하게 이를 갈던 백경화가 저를 게슴츠레한 눈으로 바라보는 이연의 모습에 낮게 헛기침을 터트렸다. 점수 좀 따려 했더니.
“크흠. 비록 바느질은 침방에서 했으나… 치수는 제가 재었나이다. 그러니 나름 합작이옵니다, 전하.”
“…….”
나름 합작.
조잡하기까지 한 변명에 이연의 눈빛이 더욱 냉랭해지자 백경화가 슬쩍 시선을 외면한다.
전하, 감히 거짓부렁 하는 후궁 좀 혼꾸멍내 주십시오. 무표정한 얼굴로 여선은 열렬히 이연을 응원했다.
그러나 이연은 한숨 한 번으로 너무나 쉽게 백경화를 용서했다. 말도 안 되는 말을 믿은 제 잘못이 크다.
쉽게 풀린 이연의 분위기를 눈치챈 백경화가 절망하는 여선과 달리 잽싸게 눈웃음쳤다. 그 애교 그득한 모습에 피식 웃음을 터트린 이연은 시선을 돌려 백경화의 앞에 놓여 있는 또 다른 상자를 바라보았다.
애초에 여선이 들고 온 상자는 두 개였다.
“그런데 그것은 무어냐.”
“이것은…….”
이연의 물음에 말끝을 흐린 백경화가 더욱 눈가를 휘며 이연의 앞에서 상자를 열었다. 상자 안에 든 것은 이연의 손에 들린 것과 같은 색의 치마였다.
이연은 치마란 것에 한 번 놀라고, 그것이 백경화의 것이란 것에 두 번 놀랐다.
“웬 것이냐?”
“천이 많이 남기에…….”
“…….”
암만 많이 남더라도 열세 폭 치마를 지을 정도면, 그건 애초에 작정하고 준비하였다는 말밖에 되지 않는다. 백경화의 목적이 무언지는 제 손과 백경화의 앞에 놓인 옷들의 색깔만 보아도 쉬이 알 수 있다.
“한 쌍 같구나.”
“…….”
이연의 말에 백경화가 곱게 웃었다. 기실 같은 도포를 지어 입고 싶었으나 작금의 신분으로써는 걸칠 수 없는 것이었다. 때문에 썩 마음에 드는 형태의 의복은 아니었으나, 애초의 의도대로 이연과 한 쌍의 옷을 갖게 되었으니 그는 그만 만족하기로 했다.
“어찌 마음에 드시는지요?”
“…….”
이 남자가 무슨 말을 듣고 싶어 이러는지 모를 리 없는 이연은 기대를 담고 저를 바라보고 있는 백경화의 눈을 마주한 채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더욱 곱게 피는 백경화의 미소를 따라, 이연도 애꿎은 옷자락을 쓰다듬으며 슬그머니 웃었다.
백경화는 그런 이연을 내려다보며 슬쩍 손을 뻗어 옷자락을 만지고 있는 작은 손을 덮었다.
“다음에 나들이 가시거들랑 입어 주시지 않으시렵니까?”
“남들 보기 민망할 터인데… 그대는 괜찮은 게야?”
너도 입어라, 하는 말에 백경화가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소첩은 행복할 것이옵니다.”
“그럼… 그리하자꾸나.”
고작 그런 것으로 그대가 행복하다면.
배시시, 떠오른 이연의 미소가 너무나 예뻐 백경화는 저도 모르게 넋을 잃고 바라보다 그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막 그 입술이 뽀얀 빛깔의 뺨에 닿으려는 찰나, 잊고 있던 여선이 제 존재를 강력히 주장했다.
“크흠, 크흐흐흠!”
“…….”
깜짝 놀라 물러서는 이연을 놓치고 만 백경화가 흘깃, 여선을 못마땅하게 돌아보았다. 너 아직도 거기 있었느냐? 있었습니다. 그럼 그만 나가지? 저 나가면 뭐 하시려고요? 뭘 하든 내 맘이다. 썩 꺼져라, 이놈아. 싫사옵니다.
백경화는 목숨을 내놓고 항거 중인 여선을 기가 찬 심정으로 바라보며 이연이 못 보는 틈틈이 눈을 부라렸다. 그러나 지난날 온갖 비위 다 상한 여선은 쉬이 물러서지 않았다. 이리되었으니 여기 죽치고 앉아 연애질 방해나 하렵니다. 허!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온 여선의 모습에 백경화가 기막혀하며 막 발길질하려던 찰나였다.
두 사내에게서 튀는 불길을 알 리 없는 이연이 제 옷 한 번, 백경화의 옷을 한 번 쓰다듬다 불쑥 말했다.
“그런데 나만 항상 이리 받아서 어쩐다지.”
“예, 예?”
“…그대, 뭐 하시는가?”
그답지 않게 놀람을 담고 되물어 오는 백경화를 향한 이연의 눈에 의아함이 서린다. 그러자 잽싸게 치마 아래에서 뻗어져 나가던 다리를 갈무리한 백경화가 곧게 앉으며 답했다.
“잠시 나들이 날짜를 꼽고 있었나이다.”
아무렇지도 않게 거짓부렁을 지껄인 백경화가 얼른 덧붙였다.
“그보다 전하, 소첩이 드리는 것이 어심에 차지 않으시는지요.”
“그런 것이 아니라, 항상 받기만 하니 미안해서 그러네.”
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없어, 고운 패물 하나 주지 못하는 것이 마음에 걸려 그리 말하자 백경화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웃는다.
“소첩이 많이 준비했사오니, 전하께서는 받으시기만 하소서.”
“…그러면 그대만 손해지 않은가. 받는 것 없이 주기만 하니.”
시무룩하게 잠긴 이연의 얼굴을 두 손으로 잡고 제게 고정한 백경화가 웃으며 반박했다.
“본디 선물이란 것은 기쁨을 보고자 하는 것이온데 전하께선 받는 기쁨을 누리시고, 소첩은 드리는 기쁨을 누리니 손해날 것이 무에 있나이까.”
“…….”
곱게 웃으며 그리 말하는 백경화에게 이연은 할 말이 있는 듯 몇 번 입술을 달싹였다. 그에게도 받는 기쁨을 누리게 하고픈 제 마음을 투정 부리듯 말할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이연은 제 소맷부리에 잠들어 있는 것을 손으로 쓸며 백경화를 돌아보았다. 어쩐지 가슴이 뛰었다. 그것을 숨기지 못한 채, 이연은 저를 바라보고 있는 어여쁜 후궁을 향해 조금 흥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대, 나도 줄 것이…….”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연의 말은 마저 이어지지 못했다.
문밖에서 고하는 목소리가 있었던 탓이다.
“전하, 마마, 대비전 지밀상궁 박 상궁이 알현을 청하옵니다.”
“…!”
흠칫! 이연은 저도 모르게 몸을 사렸다. 그러나 그도 잠시, 그는 소맷부리를 매만지던 손을 거두고 밖을 향해 명했다.
“들라 하라.”
문이 열리고 박 상궁이 고개를 숙인 채 안으로 들어 보료에 앉아 있는 이연을 향해 절을 올렸다. 이연은 그 모습을 무심한 눈으로 바라보며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이번엔 또 무슨 일로 이리 찾으시나.
“대비마마께오서 전하께서 찾아뵙기를 청하셨나이다.”
“…….”
거기까지는 이연의 생각과 다름이 없었다. 문제는 다음이었다.
“경하드리옵니다, 전하!”
난데없는 축하의 말에 이연의 미간에 주름이 패기도 전, 박 상궁의 말이 이어졌다.
“왕비마마께오서 회임을 하셨나이다!”
그것은 정말로 예상 밖의 소식이었다.
“홍복입니다. 장하십니다, 왕비.”
즐거이 웃으며 왕비를 치하한 대비의 얼굴은 밝았다. 그녀는 진심으로 왕손의 존재에 온몸으로 기뻐하고 있었다. 그에 얼굴을 붉힌 왕비가 쑥스럽게 물든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황공하옵니다.”
“앞으로 언행에 더욱 신경 쓰세요. 소중한 아기씨가 잘 자랄 수 있게 먹을 것, 입을 것은 물론 몸을 보하는 약재도 꼬박꼬박 챙겨 드시고요, 왕비.”
“그리하겠나이다, 마마.”
“…….”
내내 밝게 웃으며 대화를 이어 가는 두 여인 사이에서 이연은 내도록 침묵만 지켰다. 여기서 그가 할 수 있는 말이 무엇 있겠는가. 그저 꼭두각시처럼 웃으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허나 어찌 된 일인지 그럴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오히려 신경 쓰이는 것은 후궁전을 나서기 전 보인 백경화의 얼굴이었다.
다소 흥분이 서린 박 상궁의 말에 이연은 가슴을 짓누를 정도의 지독한 답답증을 느꼈다. 결국 이리되는가. 허탈함 사이로 비집고 나오는 비소를 갈무리한 이연이 대비전에 들기 위해 몸을 일으킨 순간 다급하게 제 손을 잡아 오는 손이 있었다.
놀라 돌아보자 새하얗게 질린 낯의 백경화가 보였다. 할 말이 있는 듯 이연을 잡은 손에 힘을 주던 백경화는 그러나 곧 손을 물리고 다녀오시라 고개 숙여 인사했다. 그 이상한 모습에 걱정이 되었으나 대비의 명을 거스를 수는 없는 노릇이라 이연은 걸음을 멈출 수 없었다. 얼른 다녀올 셈으로 든 대비전이었지만, 생각보다 대화는 길어지고 있었다.
“주상, 주상도 드디어 아버지가 되시는군요. 이 어미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부드럽게 웃으며 그리 입을 연 대비를 향해 이연은 고개 숙여 짧게 미소 지었다. 웃는 둥 마는 둥 한 이연의 미소에도 불구하고 대비의 미소는 좀처럼 가실 줄 몰랐다.
“주상도 기쁘시지요?”
“…당연한 것을요, 어마마마.”
“그러셔야지요.”
“…….”
이연은 살을 찌르는 대비의 말에 속으로 조소했다. 언제까지 이 희극에 놀아나야 하나, 생각하면서도 언제나 그랬듯 그는 주어진 자리에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미 정해진 미래라 하더라도 그것을 앞당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 더 살고 싶었다. 조금이라도 더…….
‘너와 함께…….’
이연은 백경화의 얼굴을 떠올리며 두 눈을 내리감았다.
그러니 속이 뒤틀리고 뒤집어져도 참아야지.
“전하께오선 기쁘지 않으신지요?”
“…….”
대비전을 물러 나와 함께 복도를 걷던 중, 먼저 입을 연 것은 유현왕비였다. 방금 전까지 곱게 물든 얼굴로 대비의 충언을 새겨들으며 고개를 끄덕이던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이연을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은 무감했다. 그것은 이연 또한 마찬가지였다.
“기쁘오. 아이가 생기는데 어찌 기쁘지 않겠소.”
“그러시면 조금 더 신경을 써 주시옵소서.”
“…내 관심을 바라는 말로 들리오.”
“…….”
틀리지 않았다는 것인지 유현왕비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이연은 가만히 눈을 내리감은 그녀의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 코끝을 울려 짧게 웃었다. 방금까지 대비 앞에서 희극에 어울려 주었으면 되었지, 더 무엇을 바란단 말인가. 무엇보다 저의 명줄을 앞당기는 존재의 등장에 어찌 그가 마음 편하게 웃을 수 있으랴.
그러했기에 이연은 살짝 비틀린 얼굴로 유현왕비를 향해 축하의 말을 건네었다.
“축하하오. 꼭 원자를 낳길 바라오.”
“…….”
유현왕비는 비소가 섞인 이연의 얼굴을 바라보며 떨리는 손끝을 감추듯 당의 아래로 두 손을 맞잡았다. 각오한 바였으나, 저를 바라보는 이연의 시선에 속이 쓰라려 왔다. 어찌 되었든 어린 나이에 시집와 같이 자라 온 부군이었다. 정이, 안 들래야 안 들 수가 없었다.
쓰린 속을 달래듯 유현왕비가 감사하다 입을 열려는 찰나, 이연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아 참. 내 한 가지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소.”
“…말씀하시옵소서.”
“대비… 어마마마 같은 어미는 되지 마시오.”
“……!”
숨까지 멈춘 채 저를 바라보는 유현왕비를 향해 이연은 진심을 담아 부탁했다. 대비 같은 어미는 되지 마시라. 친아들마저 제게 반기를 들었다 내치는 그런… 잔악한 어미는 되지 마시라… 진실로 그리 애원했다.
머리를 내리치는 충격에 몸을 떨고 있는 유현왕비를 가만히 바라보던 이연은 그리 혼자 돌아섰다. 그 내딛는 걸음이 유난히도 시리고, 무겁게 느껴지는 것은 비단 착각만은 아닐 터였다.
* * *
이연이 떠나고 남은 방 안은 싸늘한 침묵이 내려앉아 있었다. 은은한 살기마저 흐르는 방 안에서 여선은 숨을 죽인 채 백경화의 눈치를 살폈다. 이리될 줄 알았으면 장난스럽게 나가라 할 때 나갈 것을. 아니 이연이 나갈 때 따라나설 것을.
여선은 그리 후회하며 정좌하고 앉아 차갑게 굳은 얼굴로 생각에 잠긴 백경화를 바라보았다.
“…주군.”
“…물러가라.”
“…….”
“물러가라지 않느냐.”
이를 악문 채 흘러나온 목소리에 여선은 몸을 굳혔다. 꿀꺽, 그는 마른침을 삼킨 뒤 최대한 조심스러운 몸짓으로 백경화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게 주의하며 방 밖으로 물러섰다. 긴장을 숨기지 못하고 손바닥이 식은땀으로 축축했다. 맙소사. 어찌 잊고 있었을까. 백경화가 어떠한 자였는지…….
큰일 났구나 싶어 마음이 초조해진 여선이 문밖에서 막 한숨을 내쉰 순간이었다.
멀리서 이곳을 향해 다가오는 이연의 모습이 보였다. 최소한의 궁인들만을 대동한 채 다가오는 그의 얼굴이 말도 못 할 정도로 지친 기색이라, 여선은 낮게 혀를 차고 말았다. 부둥켜안고 염장 질러 대던 때가 조금 그리워지다니 미칠 노릇이다.
“고하라.”
문 앞에 서서 명하는 이연의 모습을 살피던 여선이 망설이다 답했다.
“전하, 지금은 공빈마마께서 몸이 좋지 못하시어…….”
“어디 아픈 게냐?”
“…….”
질투로 눈이 멀기 직전이옵지요, 라고 답할 수 없는 여선은 평소의 무표정한 얼굴 대신 곤혹스러운 기색을 내비치며 허리를 숙였다. 그 모습에 이연의 얼굴이 더욱 흐려졌다.
“고하라.”
“…….”
다시 한번 귓가에 내려앉은 이연의 명에 여선은 한숨을 삼키며 긴장한 낯으로 서 있는 상궁을 향해 눈짓했다.
“마마, 주상 전하께서 드셨사옵니다.”
여선의 눈짓을 받고 얼른 고해 올린 상궁의 얼굴에 차차 당혹감이 서렸다. 안에서 그 어떤 답도 들려오지 않은 탓이다.
여선은 물론, 대기하고 있던 궁인들의 얼굴에도 차차 당혹감이 서리기 시작했다. 이 민망하고 돌연한 사태를 어찌 수습해야 하나 감조차 잡지 못한 채 모두는 고개를 숙이고 이연의 기색만 살폈다. 결국 상궁이 다시 한번 안을 향해 고해 올렸을 때였다.
드디어 안에서 기별이 돌아왔다.
“오늘은 얼굴이 못나 뵐 수 없으니, 다른 침전에서 침수 드시라 전하여라. 내일 아침 일찍 찾아뵙겠노라고.”
“……!”
백경화의 대답에 모두는 너무 놀라 예법도 잊고 벌떡벌떡 고개를 쳐들었다. 여선마저 경악 어린 눈으로 문을 한 번, 이연을 한 번 돌아보며 짧게 헛숨을 들이켰다.
“…….”
이연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후궁의 거부에 역정을 낼 만도 하건만 그저 묵묵히 닫힌 문만 바라보고 서 있었다. 그에 더욱 안절부절못하게 된 것은 여선과 궁인들이었다. 이걸 어찌하나… 그들이 우왕좌왕 서로 눈치만 살피고 있을 때, 자신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조차 모를 것이 분명한 이연이 입을 열었다.
지친 듯 두 눈을 내리감고 깊이 한숨을 내쉬며, 당장 흩어져 사라질 것 같은 목소리로─
“…경화야…….”
“……!”
이번에도 여선을 비롯한 궁인들은 얼른 허리를 숙이며 놀란 숨을 삼켰다. 경화야. 그 애틋한 부름이 법도를 잊은 채 제 하나뿐인 후궁을 향하고 있었다. 소리도 없이 얼굴을 적시고 있는 눈물의 존재도 모르고.
“경화야…….”
다시 한번 그 부름이 이어졌을 때, 여선은 안에서 들려오는 다급한 발걸음 소리에 속으로 실소했다. 그러면 그렇지. 제까짓 게 버텨 봤자다.
그리고 그의 예상대로 굳게 닫혀 있던 내실의 문이 다급하게 열렸다. 궁녀들이 모두 넋 놓고 있으니 문을 연 이는 하나뿐이었다.
반쯤 열린 문 앞에 선 채 백경화는 괴로운 듯 일그러진 표정으로 말했다.
“어찌… 그리 부르십니까. 오늘은 소첩이…….”
그러나 백경화의 말은 다 이어지지 못했다. 숙어진 이연의 고개를 내려다보던 그의 눈이 그제야 바닥으로 뚝뚝 떨어지는 물기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급히 숨을 삼킨 백경화는 손을 뻗어 이연의 얼굴을 조심스레 들어 올렸다. 그러자 눈에 들어온 것은 눈물로 뒤범벅된 작은 얼굴이었다. 어찌나 섧게 우는지 흥건하게 젖은 얼굴이 백경화의 심장을 내리쳤다.
“전하…! 어찌 이리 우십니까? 대비전에서 무슨 일 있으셨사옵니까?”
“…….”
운다고? 백경화의 말에 멍한 머릿속으로 손을 들어 제 눈가를 훔친 이연은 그제야 놀랐다. 아, 내가 울고 있었구나. 왜 그럴까. 그러나 깊이 생각해 볼 것도 없었다. 오늘은 다른 침전에 드시라, 명백한 거부 앞에 그 말은 날카로운 것이 되어 이연의 너덜너덜한 가슴을 할퀴었다. 굳게 닫힌 문이 백경화의 마음 같아서 두려워졌다. 이대로 영영 열리지 않으면 어쩌나… 싶어 그 이름만 부를 수밖에 없었다.
“전하… 울지 마소서.”
“…….”
제 말이 있고서야 울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이연의 앞에서 백경화는 스스로를 매질했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것인가. 어떻게 흉한 생각에 빠져 이연을 외면할 수 있었단 말인가. 미쳤다. 미친놈이다.
으득, 백경화는 이를 갈며 이연을 조심스럽게 안아 들고 내실로 들어섰다. 여선이 재빠르게 문을 닫는 것을 확인한 그는 이연을 안고 보료에 가 앉았다.
“전하, 소첩이 잘못하였나이다. 울지 마소서.”
“…….”
백경화의 사죄에도 불구하고 이연의 눈물은 쉬이 멈추지 않았다. 흐느낌 하나 없이 둑이 터진 것처럼 주룩주룩 흘러내리는 눈물이 애가 타서, 백경화는 고개 숙여 그 눈물을 삼켰다. 울지 마소서. 소첩 심장이 아프나이다.
“소첩이 죽을죄를 지었나이다……. 못나게 투기하여 그런 것이오니 그만 옥루를 거두어 주소서.”
“…….”
이연이 눈을 깜빡여 눈물을 한번 털어 낸 것은 백경화의 말이 있고서였다. 투기란 말이, 이연의 귀를 사로잡았다.
그 모습에 조금 마음을 쓸어내린 백경화가 얼른 손바닥으로 이연의 눈물을 훔치며 덧붙였다.
“예, 소첩이 투기하였나이다. 전하께…… 소첩 말고 다른 안곁이 있다는 것에. 그 안곁이… 전하의 아기씨를 가졌다는 말에… 못나게 투기하였습니다.”
“…….”
깜빡깜빡, 백경화의 말에 이연은 두어 번 더 눈을 깜빡였다. 눈물로 얼룩져 흐릿하던 시야에 점차 씁쓸하게 일그러진 백경화의 얼굴이 잡혔다. 그 얼굴은 분명 그의 말대로였다. 질투에 사로잡혀 쓰린 속을 고스란히 내비치고 있었다.
그가 싫어져 문을 열어 주지 않은 것이 아니다.
그에 이연은 가볍게 가슴을 쓸어내렸다. 백경화가 어찌 그런 반응을 보였는지 깨달은 그는 머뭇거리며 손을 뻗어 속상함이 묻어나는 백경화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투기할 필요 없느니.”
“…그것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하옵니다.”
“…….”
백경화는 이연의 말을 들으며 다시 까맣게 타들어 가는 속에 미간을 찌푸렸다. 왕비가 회임을 하였다. 그 말은 곧 이연의 아이가 태어난다는 말이었다. 당연하다. 부부 사이에 아이가 태어나는 것은 자연의 이치이니. 저와 달리… 사내인 저와 달리. 그보다 이연이 왕비를 품었다는 생각에 머리가 돌 것 같았다. 아무 생각 없었는데… 이연에게 왕비가 있고 설사 그 외의 후궁이 있었다 하더라도 별생각이 없었는데. 그것이 유현왕비를 만나고서부터 흉악하게 백경화의 안에 똬리를 틀고 앉았다. 저 말고 이연의 곁에 ─저보다 더─ 당당히 있을 수 있는 왕비의 존재에 살심이 일었다. 이연의 안곁은 저만이 아니었다. 그것에 우습게도 충격을 받았다. 그러다 왕비의 회임 소식에 불안해졌다. 다시 그 부드러운 품으로 돌아간다 하면 어쩌나… 그러면 어찌하나.
회임한 여인을 상대로 차마 하기 힘든 잔악한 생각까지 해 가며, 흉악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투기하였다.
이게 다 배가 불러서 그렇다. 이연이 저를 받아 주기만 해도 좋겠다던 그 간절함이 이루어지니, 이제 더 큰 욕심을 부리는 것이다. 이연의 곁에 저만 있기를 바라고 마는 것이다.
“…못난 얼굴, 보지 마옵소서.”
저를 빤히 올려다보는 이연의 눈을 손으로 가리며 백경화는 그 위로 제 얼굴을 묻었다. 그런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고운 것만 보이고 싶었다. 그런데 그것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고작 이런 일로 이리 일그러지는 본성을 감출 수가 없었다.
“투기할 필요 없다 하였지 않느냐.”
“…….”
이연은 제 눈을 가리고 있는 백경화의 손을 떼어 내며 시선을 피하듯 멀어지는 그의 얼굴을 잡았다. 잘난 사내의 얼굴이 말이 아니었다. 백경화가 보기 흉하다 저를 들이지 않으려 했던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그런데 그것이 저를 온전히 가지지 못한다는 생각에 그리된 것이라 들으니… 이상하게 마음이 술렁거렸다.
이연은 악귀처럼 질리어 있는 백경화의 얼굴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그 입에 입 맞추었다. 짧게 닿았다 떨어지는 입맞춤은 몇 번이고 반복되었다. 슬쩍 입술을 벌려 백경화의 다물린 아랫입술을 빨았다 놓은 이연이 백경화의 얼굴을 잡아 가까이에 붙였다.
“내 좋은 것 알려 줄 터이니, 더 이상 쓸데없는 투기 하지 마라.”
이연은 그리 속삭이며 의아하게 저를 올려다보는 백경화의 긴 속눈썹에 시선을 고정한 채 그의 귓가에 입술을 바짝 붙였다. 움찔, 가까운 접촉에 반응하는 백경화의 모습에 미소 지은 이연이 혹 누가 들을세라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내 아이가 아니다.”
“……!”
벌떡 들리어 멀어지는 얼굴을 아쉬운 마음으로 놓아주며, 이연은 부릅뜬 눈으로 저를 내려다보는 백경화를 향해 미소 지었다. 그 모습에 진심을 읽은 백경화의 두 눈이 사정없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러니 투기할 가치도 없단다.”
“무슨…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나는 한 번도 왕비를 품은 적이 없으니… 내 아이일 리가 없지.”
백경화는 이연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왕비가, 왕의 여자가 가진 아이가 이연의, 왕의 아이가 아니라니.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일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아이의 아버지는 누구인가.
저를 내려다보는 백경화의 혼란 가득한 눈에 설핏 웃은 이연은 진정하란 듯 백경화의 얼굴을, 머리카락을 길게 쓰다듬었다.
“그대도 보았지 않느냐. 나와 같이.”
“…….”
보았다고?
더욱더 알 수 없는 이연의 말에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기었던 백경화의 머릿속에 번뜩 무언가가 스치고 지나갔다. 이연과 처음으로 나섰던 산책길. 그곳에서 마주쳤던 두 인영.
방사 중이던 궁녀와 유란주호가.
“……!”
제 생각에 기가 막혀 헛웃음을 터트리던 백경화는 긍정하듯 웃고 있는 이연의 모습에 그 웃음을 거두어야만 했다. 그러자 유난히도 놀라 굳어 있던 그날의 이연이 떠오른다.
새하얗게 질리어, 이게 무슨 짓이냐 훈계하던 이연의 모습이. 그날 저를 내치려 하였던 이연의 모습이.
“…….”
그에 백경화는 입가를 일그러뜨리며 눈을 감았다. 이연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처음 봤을 때부터 유란주호와 몸을 섞던 이가 유현왕비였다는 것을. 알고서, 그를 궁에서 내보내려 하였던 것이다.
곧 이런 일이 벌어질 줄 알고서.
마음이 처참했다. 그때 두 눈으로 정비의 부정(不正)을 목도하며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
그 생각에 백경화는 숨구멍이 막히는 것 같았다.
그의 반응에 놀란 것은 그를 올려다보고 있던 이연이었다.
툭, 툭, 제 얼굴로 떨어지는 눈물에 두 눈을 홉뜨며 이연이 물었다.
“그대… 우는 것이야?”
백경화는 답이 없었다. 그저 참담하게 뒤집어진 제 속을 다스리기에도 벅찼다. 얼마나 속이 상하고 치욕스러울까. 그 수모를 홀로 다 삭히며 얼마나 애가 탔을까. 이 작은 몸으로… 그리 살아왔을 것이라 생각하니 속이 뒤집혔다. 그것도 모르고, 병신 같은 자신은 무엇 했는가. 전쟁터나 날뛰며 풀 곳 없는 복수심에 눈이 멀어 학살이나 일삼았다. 조금 더 빨리 올 것을. 이것저것 재어 보지 말고… 그냥 달려올 것을.
후회와 안타까움과, 그리고 은밀한 환희로 뒤범벅된 마음에 백경화의 눈물은 더욱 굵어졌다. 그랬다. 그간 이연이 겪어 온 일을 되새기면 이리 애달프고 화가 치미는데, 왕비의 배 속에 있는 씨가 이연의 것이 아니란 사실 하나에 또 기뻐한다.
이 얼마나 그악한 놈인가.
“전하… 기뻐하는 소첩을 용서하지 마옵소서.”
“기뻐하라 한 말인데… 이리 우니 속상하다.”
이연의 대답에 백경화는 더욱 고개 숙여 울었다.
투둑 투두둑. 제 얼굴 위로 떨어지는 굵은 물방울의 감촉에 이연은 입술을 깨물었다. 제 아픔에 아파하면서도 기뻐하는 강한 사내의 눈물이 이연의 몸을 적시고 있었다. 메말라 있던 제 마음에 뿌리는 단비였다.
“…그대, 기쁘면 웃어야지. 이리 울면 어찌하누. 그런데 날 위해 울어 준다 하니─ 좋긴 좋구나.”
“전하…….”
“그런 그대에게 나는 줄 것이 아무것도 없어…….”
한탄같이 흘러나온 이연의 말에 백경화가 고개를 내저었다. 이연은 그 내젓는 고개를 다잡고 아름다운 얼굴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을 받으며 입술을 끌어 웃었다. 그대로 백경화의 입술에 제 입술을 가져다 댄 그는 그 입 속에 마음을 풀었다.
“내가 가진 게 나밖에 없구나. 그러니 그대, 나를 가져라.”
내 가진 것 없어, 줄 것이 아무것도 없어 속상하여 그러니… 그리하라.
“나를… 품어 줘. 그리하여라, 경화야…….”
“전하……!”
나를 위해 이리 울어 주는 그대에게 그것밖에 줄 것이 없어 미안해.
덧붙인 속상한 마음에 백경화는 더 이상 무엇도 생각지 않고 그 입술을 덮었다. 자신에겐 이연이 세상 다시없을 귀한 존재라는 것을 알려 주듯이.
이리 내가 너를 원한다며 탐욕스럽게 이연의 입술을 집어삼켰다.
불빛 하나 켜지 않은 방안은 무척 어두웠으나, 창을 통해 들어온 달빛이 밝아 형체를 보는 것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달빛으로 은은하게 물든 그 방 안에서 이연과 백경화는 한 치의 틈도 없이 완벽히 밀착된 상태였다. 그리고 틈 없이 맞물려 있는 것은 그들의 몸뿐만이 아니었다. 애초에 태어나길 한 몸처럼 그러했다는 듯, 진하게 엉켜 있는 것은 두 개의 붉은 혀였다. 이연의 입 속을 점령하고 있던 백경화의 혀가 유려하게 움직이며 작은 혀를 휘어 감았다.
이연의 혓바닥을 문대며 질척하게 놀아난 그것은 치아를 건들고, 입천장을 핥아 올렸다. 입이 다물릴 새도 없이 계속해서 파고들기만 하니 미처 삼키지 못한 타액이 이연의 턱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것을 혀를 내밀어 길게 핥아 먹은 백경화의 입술이 다시 이연의 얼굴 위로 쏟아져 내렸다. 입술 닿는 곳 모든 것에 화인 같은 입맞춤을 남겼다.
“하아… 하아…….”
“후우…….”
거칠어진 호흡을 이으면서도, 둘의 얼굴은 한시도 떨어질 줄 몰랐다. 뽀얀 볼을 살며시 빨았다 놓고, 관자놀이에 제 이마를 비비며 친애를 비친 백경화의 입술이 다시 이연의 입을 틀어막았다. 춉춉, 야릇하게 젖은 소리가 울리고 미끈하게 젖은 두 혀가 농밀하게 치덕거렸다. 둘은 굶주린 짐승처럼 누구의 것인지 모를 타액을 목구멍으로 꿀꺽꿀꺽 받아 삼켰다.
그리 한참 작은 몸을 바짝 끌어안고 이연의 입술을 탐하던 백경화의 손이 미끄러지듯 움직이기 시작했다. 잔뜩 구겨지고 흐트러진 이연의 옷자락을 하나둘씩 헤쳐 나간 그 손은 곧 매끄러운 살결에 닿았다. 놀라지 말라 위로하듯 몇 번 부드럽게 이연의 피부를 쓸던 백경화의 손이 곧 가느다란 목덜미에 닿았다. 살아 있음을 증명하듯 그의 손을 타고 전해지는 떨림이 퍽 사랑스럽다. 잠시간 이연의 맥박을 느끼던 백경화의 손이 곧 올라갔던 길을 되짚어 느릿하게 내려왔다. 결코 부드럽다 할 수 없는 손바닥이 진득하게 몸 위를 스치는 것에, 이연의 입에서 짙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 한숨을 받아 마시듯 짧게 입 맞춘 백경화는 이연의 옷고름을 향해 손을 뻗었다. 잠시 쓰다듬듯 그 위를 노닐던 손은 두 입술이 다시 마주친 순간, 거침없이 그 끝을 잡아당겼다. 단정하게 묶여 있던 옷고름이 풀리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스륵, 부드럽게 어깨선을 스치며 내려가는 옷자락 소리가 유난히도 크게 들렸다. 그에 긴장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던 작은 몸이 잘게 경련했다. 그 떨림을 느낀 듯 옷자락을 벗기던 백경화의 손이 멈추었다.
“멈추지 말아.”
“…….”
옷자락을 잡고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백경화의 손을 잡아당기며 이연이 내리감았던 눈을 떴다.
“멈추지 마.”
“…전하.”
무리하시지 마시라, 다정하게 웃으며 그리 소리 없는 걱정을 전한 백경화가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그만큼 다가간 이연이 슥- 손을 뻗어 백경화의 옷고름을 잡았다. 그러나 이연이 미처 그것을 풀기 전에 백경화의 손이 저지하듯 그 위를 덮어 왔다.
“전하, 떨고 계십니다.”
“신경 쓰지 마라.”
“어찌 신경이 쓰이지 않겠사옵니까.”
부드럽게 타이르듯 어르며 백경화가 저를 붙잡고 있는 이연의 손을 두 손으로 잡고 입술을 묻었다. 정중하기까지 한 그 모습에 잠시 시선을 빼앗겼던 이연이 재차 옷고름을 잡으려 하자, 주춤 몸을 뒤로 물린 백경화가 곤혹스럽게 웃었다.
“전하, 무리하시지 마소서.”
“…그대, 사실은 내게 동하지 않는 게지?”
생각지도 못한 이연의 물음에 백경화의 고개가 단번에 들렸다. 그러자 보이는 것은 조금 기운이 빠진 이연의 얼굴이다.
그 표정에 백경화는 순간적으로나마 말을 잃고 말았다. 정녕 모르는가. 이리 떨면서 겁 없이 도발하는 모습이 그의 이성을 점차 좀먹고 있음을.
날아가기 직전인 이성을 겨우 다잡은 백경화가 입을 열었다.
“전하, 아직은 때가 아닌 듯하오니…….”
“내가 떨어서 그러한 것이냐?”
“…….”
묻고 있는 와중에도 이연의 잔떨림은 멈추지 않았다. 파들파들, 연약함을 드러낸 어린 짐승처럼 한없이 떠는 마른 어깨를 바라보며 백경화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끊기기 직전인 그의 이성을 다잡고 있는 것은, 이연의 그 두려움이었다.
백경화의 눈에 서린 고뇌를 쉬이 읽어 내린 이연이 눈을 휘며 웃어 보였다.
“그럼 네가 떨지 않게 만들어 주면 될 것 아니냐.”
전하, 신음처럼 흘러나온 백경화의 부름에도 불구하고 이연의 미소는 사라지지 않았다.
“많이 아플 것을 아니까 두렵다. 그러니 더더욱 그대가 다정하게 안아 줘.”
“…!”
백경화는 이연의 말이 이어질수록 짧게 숨을 내쉬었다. 이연을 처음 만난 이래 그 어떤 경우에도 흔들린 적 없던 그의 심기가 어지럽게 얽히기 시작했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스스로 위험 속으로 걸어 들어간 이연은 유혹을 멈추지 않았다.
“나는 지금 그대가 너무나 갖고 싶어.”
“전하, 더 이상은…….”
위험하오니 아무 말씀도 마옵소서.
이연은 저지하듯 제 입술에 닿아온 백경화의 손끝이 떨리는 것을 느끼며 가느다랗게 미소 지었다. 눈가를 접고, 입술 끝을 끌어 올려 천진한 미소를 지어 보인 이연이 제 입술에 닿은 백경화의 손끝에 살짝 입 맞추었다. 입맞춤이라기보다는 스침에 가까운 것이었지만, 아슬아슬하게 이어지던 백경화의 이성을 끊어 내기엔 충분했다.
파랗게 불꽃이 일기 시작하는 백경화의 두 눈을 똑바로 직시하며 이연이 속삭였다.
“그대의 익애(溺愛)로 내 안을 채워 다오.”
그 순간, 백경화는 다잡고 있던 이성을 미련 없이 놓아 버렸다. 이런 말까지 듣고 참을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이젠, 무슨 소리를 하더라도 못 멈춘다.
이연은 모두 당신이 자초한 일이라 말하는 백경화의 두 눈을 바라보며 웃었다. 그것이 제가 바라는 것이라 말하며.
조심스레 이연을 눕힌 후 그 위로 타고 오른 백경화의 손은 평소완 달리 꽤나 다급했다. 이연의 옷을 단번에 벗겨 내고, 제 옷자락까지 단번에 벗어 던져 순식간에 알몸을 드러낸 백경화는 고개를 숙였다. 이연의 턱을 살짝 깨물었다 떨어진 그의 입술이 느릿하게 목선을 지분거렸다.
잠시간 드러난 백경화의 나신에 놀라 굳어 있던 이연은 느릿하게 손을 뻗었다. 여인의 옷자락 밑에 숨겨져 있던 군신(軍神)의 몸이 눈앞에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날렵한 근육들로 짜인 몸엔 슬프게도 몇 가지 깊은 흉터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제일 큰 것은 옆구리에 길게 베인 흔적과 쇄골 근처의 자상이었다. 목숨까지도 위태로웠을 법한 흉터 앞에 이연은 숨을 죽였다.
이연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흉터를 손끝으로 쓸자 설핏 웃음을 터트린 백경화가 입을 열었다.
“무인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상처이옵니다. 흔한 것이오니 맘에 두지 마소서.”
“…….”
백경화의 말에도 불구하고 이연은 좀처럼 표정을 풀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말에 더욱 표정이 흐려진 이연이 시선을 피하자, 백경화가 얼른 이연의 고개를 돌려 제게 고정했다.
“가진 실력이 부족했을 때의 일이옵니다. 이제 누구도 이 몸에 손끝 하나 대지 못하게 할 터이니 마음 푸소서.”
“…그리 해. 이제 이런 것 몸에 달지 마라.”
“예, 전하.”
이연은 제 이마에 깊숙이 입술을 묻고 답하는 백경화를 느끼며 두 눈을 내리감았다. 현재 백경화가 비약을 먹어 내공이 묶인 처지란 것을 모르는 바 아니다. 그것을 먹기 전의 백경화라면 모를까, 현재의 백경화로서는 지키기 힘든 약속이란 것 또한. 그러나 이연은 굳이 백경화의 말에 반박하지 않았다. 그저 정말로 그 약속이 지켜지기를 간절하게 바랄 뿐.
씁쓸한 제 미소를 감추듯, 이연은 손을 뻗어 백경화의 머리채를 만졌다. 그 중간, 틀어 올린 머리를 곱게 고정하고 있던 비녀를 잡아 빼자 흑단 같은 머리카락이 폭포수처럼 흘러내렸다. 그에 설핏 웃어 보인 이연은 제 미소에 응하듯 더욱 붙어 오는 백경화의 등으로 팔을 둘렀다. 단단한 근육들이 제 손안에서 꿈틀거리는 것이 성적 긴장감 때문이란 것을 깨닫자 이연은 또 웃고 말았다.
“하아… 그대를 만나고… 웃음이 많아져서 큰일이다.”
“소첩에겐 광영이옵니다.”
이연의 여린 목가에 끊임없이 제 흔적을 남기고 있던 백경화의 입에서 젖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간지러우면서도 목덜미가 써늘해지는 감각에 한 번 몸을 떤 이연이 점차 아래로 내려가는 백경화의 얼굴에 짙은 한숨을 흘렸다.
긴장으로 움푹 팬 쇄골 깊이 낙인을 새기고, 마른 어깨를 혀끝으로 한 번 쓴 뒤 살짝 깨물었다 놓은 백경화는 제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이연의 숨결에 귀를 기울였다. 그는 그 숨에 괴로움이 섞이지는 않는지 신경 쓰며 놀고 있던 손을 들어 아까부터 제 시선을 사로잡던 자그마한 유실을 어루만졌다. 히익, 뽈록하게 솟은 것이 여간 귀여워 손끝으로 몇 번 문지르자 이연의 입에서 괴상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에 웃음이 터질 뻔한 백경화는 그것을 감추듯 제 손길에 더욱 단단해지는 젖꼭지를 집어삼켰다.
한입에 삼켜져 쪽쪽 빨리는 제 유실의 느낌이 괴이하여 이연은 울상 지은 채로 고개를 숙여 가슴에 매달려 있는 백경화를 바라보았다. 이연은 무엇이 그리 맛난지 달게도 빨아 대는 백경화의 모습에 뒤틀리는 몸을 억누르며 두 손으로 제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자 보지 않고도 어찌 그리 잘 아는지 대번에 올라온 백경화의 손이 입을 틀어막고 있는 이연의 손을 떼어 냈다. 그 순간을 노린 듯, 백경화는 입 안에서 굴리고 있던 작은 유실을 혀로 눌러 문지르다 살짝 이로 깨물었다.
“읏……!”
찌르르, 몸을 타고 흐르는 전율에 진저리 치며 이연은 고개를 비틀었다. 어찌하여 이런 느낌이 드는가 놀랄 틈새도 없이, 그는 이제 다른 쪽을 향해 달려드는 백경화의 모습에 낮게 흐느끼고 말았다. 하으… 연신 괴상한 소리를 내뱉는 제 입을 틀어막으려 해도 백경화에게 잡힌 손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쪼옵, 젖은 소리를 내며 드디어 백경화가 입 안에서 동글동글하게 굴리던 것을 뱉어 내었다. 어찌나 진탕하게 물어 댔는지 그 사이로 타액이 길게 늘어졌다. 그에 민망하여 이연이 두 눈을 질끈 감자, 낮은 웃음을 흘린 백경화는 제 입술로 다시 자그마한 것을 삼켰다가 길게 한 번 핥았다. 다시 한번 등을 타고 흐르는 전율에 몸을 떤 이연은 그제야 위로 들리는 백경화의 고개에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시작인데 벌써부터 이러면 어쩌누. 이래 놓고 나를 도발하였나……. 감당을 못하는 이연의 모습이 어이가 없는 한편 귀엽기도 하여 백경화는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할딱이는 입술에 입 맞추었다. 반들거리는 두 입술이 부벼지다, 백경화의 것이 윗입술, 아랫입술 한 번씩 빤 뒤 벌어진 틈을 막았다. 움츠려져 있는 작은 혀를 휘어 감고 이리저리 비벼 대던 백경화의 혀가 빠져나간 것은 한참을 노닐고 난 뒤였다.
“하아… 하아……!”
백경화는 헐떡이느라 떨림마저 잊은 작은 몸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이연의 손을 잡아끌어 짧게 입 맞춘 뒤, 바르작거리다 세워진 두 무릎에도 입 맞추었다. 백경화는 이를 세워 깨물기도 하던 이연의 손을 놓아준 뒤, 손을 뻗어 자그마한 발을 매만졌다. 상처는 물론 굳은살조차 잘 느껴지지 않는 이연의 발바닥을 동그랗게 쓴 그의 손이 느릿하게 움직였다. 그 손끝은 이연의 종아리를 스친 뒤, 무릎 뒤쪽을 지나 날씬한 허벅지에 닿았다. 과장 조금 보태면 한 손에 잡힐 것 같이 마른 허벅지에 낮게 혀를 찬 백경화는 그나마 살집이 있는 부분을 주무르다 불안한 눈으로 저를 바라보는 이연의 눈과 시선을 맞춘 후 생긋, 웃었다.
그 미소가 어찌 더 불길한지.
이연의 불길한 예감이 맞아 든 것은 바로 다음이었다.
“……!”
시선을 맞춘 채 고개를 내린 백경화는 입술을 움직여 이연의 밋밋한 숲 위를 배회했다. 그 주위를 맴돌던 입술이 조심스레 벌어진 것은 얼마 가지 않아서였다. 그 입 안으로 한입에 삼켜지는 제 것에 파득! 몸을 떤 이연은 짧은 비명을 내질렀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이연이 정신을 차리기도 전, 단숨에 이연의 것을 삼킨 백경화가 입술을 오므리며 단단하게 일어서는 것을 조였다.
“하악!”
급히 터져 나오는 이연의 신음 소리에 백경화는 파들파들거리는 작은 몸을 굳게 다잡고 입술을 오므린 상태에서 천천히 고개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삼켜졌다 뱉어지고, 다시 느릿하게 삼켜졌다 뱉어지기를 몇 차례… 점차 뿌옇게 흐려지는 시야와 더불어 머릿속을 스치는 짜릿함에 몸을 떨던 이연의 입에서 결국 흐느낌이 터져 나오고 말았다.
흐흑… 그 소리에도 불구하고 백경화는 멈추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이연의 양 허벅지를 잡아 잔뜩 벌리게 만든 뒤 더욱 고갯짓에 박차를 가했다. 부러 입 안에 타액을 모아 질척이게 만든 뒤 혀끝으로 요도 부분을 들쑤셔 댔다.
“흐윽… 그, 그만……!”
츕츕, 쯔읍! 젖은 소리가 방 안을 울릴수록 이연의 얼굴도 빨갛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백경화가 색사에 물드는 그 얼굴을 직시한 채 요사스럽게 미소 지은 순간… 허리를 띄운 이연의 몸이 굳으며 작은 입이 벌어지고 소리 없는 교성을 내질렀다.
투두둑- 제 입속에 쏟아진 것을 손끝에 뱉은 백경화는 입술 끝에 묻은 것을 혀로 핥아 먹었다. 갈증 난 짐승처럼 입 안에 남아 있던 것마저 삼킨 백경화는 고개를 내려 잘게 떨고 있는 이연을 내려다보았다. 넋이 나간 이처럼 붉어진 입술로 헐떡이며 눈물을 매달고 저를 바라보는 이연의 모습에 백경화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전하…….”
“흐읏…….”
백경화는 울음과도 같은 신음을 들으며 몸을 다시 이연의 위로 겹쳤다. 그는 쾌락에 젖은 이연의 눈가를 혀를 내밀어 핥은 뒤 손에 뱉었던 씨물을 이연의 회음 부분에 문질러 댔다. 파르르, 갓 절정에 달했던 작은 몸이 여리게 떨리는 것을 바라보며 입맛을 다신 백경화가 고개를 움직여 이연의 귀 끝을 깨물었다. 츕… 젖은 소리와 더불어 흠칫, 이연의 몸이 굳었다. 그 순간 회음 부분을 문지르던 백경화의 젖은 손가락이 조금 더 은밀한 곳으로 향했다.
후우- 백경화는 이연의 귓가로 숨을 불어넣으며 질척하게 젖은 손으로 이연의 회음부와 다시 단단해지기 시작하는 성기를 주물렀다. 백경화가 조금 더 고개를 내려, 타액으로 젖은 혀로 이연의 작은 귀를 진득하게 핥으며 뒤쪽 연한 살부분에 이를 세운 순간… 이연은 새된 비명을 지르며 정액을 토했다.
흐으으… 흐… 백경화는 놀라 울음을 터트리는 작은 몸을 다독이며 어쩔 수 없다는 듯 웃고 말았다. 열 오른 머릿속을 식히려 노력하며 토닥토닥, 이연의 가슴을 도닥인 그가 속삭였다.
“많이 놀라셨나이까?”
그러나 물음에 돌아오는 것은 옅은 흐느낌뿐이다. 그에 더욱 곤혹스러워지고 만 백경화는 최대한 하반신이 닿지 않게 조심하면서도, 이연의 상체를 안고 다독였다. 쉬이… 괜찮습니다. 잘하셨나이다, 전하.
놀란 마음 진정시키기 위해 온몸으로 백경화의 품을 파고들던 이연은 그 순간, 제 배를 스치는 뜨거운 것에 움직임을 멈췄다. 그는 더불어 낮게 들려온 백경화의 숨죽인 신음 소리에 새하얗게 변했던 머릿속이 차차 개는 것을 느꼈다.
보지 마소서. 백경화는 이연이 붙였던 몸을 떼어 내며 고개를 아래로 내리려 하자, 얼른 그 몸을 다잡고 말했다. 그러자 잠시 멈칫한 이연이 더욱 그 품으로 파고들며 떨어져 있던 하체를 마주 붙였다. 제가 뱉어 낸 것으로 인해 치덕이는 곳에 정확하게 와 닿는 백경화의 양물에, 잠시 굳은 듯 움직임을 보이지 않던 이연의 다리가 천천히 백경화의 다리에 감겨들었다. 그러자 더욱 맞붙은 하체에서 뜨거운 열기가 치솟아 올라왔다.
“그대… 터질 것 같아.”
제 것에 닿은 양물이 점점 더 커지는 것에 부르르 몸을 떤 이연은 백경화의 다리에 감은 다리에 더욱 힘을 주었다. 그러자 얼른 이연을 보료에 똑바로 눕힌 백경화가 그 위에 자신의 몸을 누른 채 느릿하게 허리 짓을 하기 시작했다. 끄적거리는 소리가 울리고, 그 소리가 울릴수록 신음도 점차 커졌다. 이연은 툭툭 제 것을 찌르는 불기둥을 느끼며 입을 벌려 제 입을 채우는 백경화의 혀를 반가이 맞아들였다. 어느새 앞은 물론, 백경화가 쓸던 회음 부분마저 잔뜩 젖어 들었다. 뚝뚝, 엉덩이 골을 타고 이불 위로 떨어지는 액체의 느낌에 눈가를 붉힌 이연이 입술을 깨물자 백경화가 얼른 그 입술을 다시 삼켰다. 그러면서도 착실히 손을 내려 이연의 비문을 중지로 꾹 누른 백경화가 옅은 신음을 흘렸다. 생각했던 것보다 좁았다. 여길 어찌 연담.
“전하… 잠시만 눈을 감아 주소서.”
“으응?”
백경화의 혀 놀림에 홀려 있던 이연은 멍하니 되물었으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 순간 단숨에 몸이 훌떡 뒤집혔다. 놀라 비명도 지르기 전, 꾹- 비문을 누르는 손길이 거세지는 것이 느껴졌다. 번들거리는 애액을 펴 바르는 백경화의 손길에 이연은 몸이 뒤집힌 채로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엎드려 누워 허리만 살짝 들린 채 치부를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 수치스러울 만도 하건만, 백경화의 손길에 정신을 빼앗겨 버린 이연은 긴장을 숨기지 못하고 꿀꺽, 마른침만 삼켰다. 그 순간, 손가락 하나가 이연의 몸속을 파고들었다.
“…!”
잔뜩 젖어 있어 그런지 생각보다 아픔은 덜했으나, 두 번째 손가락이 파고들 땐 저도 모르게 이불을 잡고 있던 손에 힘을 주고 말았다.
“하읏…….”
“…….”
백경화는 고통스러운 듯 잔뜩 웅크려진 등을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너무 빡빡했다. 이대로 밀어 넣었다가는 이연이 상처를 입을 것이다. 어찌해야 하나, 잠시 고민에 잠겼던 백경화는 순간 떠오른 생각에 얼른 고개를 숙였다.
“……!”
이연은 뒤에서 느껴지는 백경화의 숨결과 농밀하게 안을 파고드는 젖은 혀끝에 이를 사리물며 허리를 떨었다. 이것이 저를 위한 배려란 것을 알기에, 이연은 터질 것 같은 비명을 속으로 삭이고 점차 개수가 늘어나는 손가락을 받아들이고자 노력했다. 속이 답답하고, 어지럼증이 느껴졌다. 그럼에도 이연은 멈추라 말하지 않았다. 점차 출입 속도가 빨라지는 손가락에만 집중하며 옅게 신음했다.
그러다 제 안을 채우고 있던 백경화의 손가락이 한 번에 빠져나가고, 제 허리를 잡아끄는 손길에 이연은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어느새 뒤집었는지 백경화를 마주 보고 있었다. 이연은 가슴을 들썩이며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백경화는 이연의 다리 사이로 자리 잡으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본디 뒤로 해야 더 편하다 하였으나…. 주춤거리며 그리 입을 여는 백경화를 향해 이연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마주 보는 게 더 좋다. 그러자 그 눈가에 입술을 묻은 백경화가 서서히 이연의 안으로 파고들었다. 손가락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질감과 부피에 이연은 백경화에게 더욱 매달렸다. 백경화는 그 얼굴에 입술을 부비며 느리지만 물러섬 없이 움직였다.
아프다… 배가 찢어질 것 같았다.
그러나 이연은 백경화의 얼굴에 떠오른 쾌락을 지켜보며 고통을 참아 냈다. 마침내 백경화의 양물을 모두 삼킨 그는 숨을 고르며 헐떡였다. 뜨거운 꼬챙이에 몸이 꿰뚫린 것 같았다. 그리 한참 헐떡이며 불편한 속을 달래고 있던 이연은 가만히 저를 내려다보고 있는 백경화와 눈이 마주치고서야 깨달았다.
자신을 위해 백경화가 참고 있다는 것을.
그 숨 막히는 배려가 어쩐지 너무나 행복하게 느껴져 이연은 아픈 와중에도 환히 웃을 수 있었다.
“괜찮다. 움직여도 돼.”
“조금만… 더…….”
백경화는 말과 달리 허리를 움칫거리면서도 이연이 익숙해지기를 기다렸다. 그것에 더욱 용기가 난 이연은 백경화의 허리에 힘없이 늘어져 있던 제 다리를 감았다.
“어서.”
“…….”
재촉이 있고서야, 백경화는 이연의 정수리에 입 맞춘 뒤 아주 천천히 자신을 빼내었다가 넣었다. 그는 제 모양을 새기듯 저를 감싸는 점막의 감촉을 생생히 느끼며 그리 움직였다. 허리를 뒤로 물렸다가 밀어 넣기를 반복하며 백경화는 이연의 표정을 살피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최대한 조심스럽게 움직인다 하나, 고통스럽지 않은 것은 아닌지 이연의 찌푸려진 표정은 펴질 줄 몰랐다. 그럼에도 저를 받아 주려 노력하는 모습이 너무나 고와서… 백경화는 점차 빨라지려는 허리 짓을 최대한 억눌렀다. 그러나 그도 곧 한계에 부딪혀, 그는 이연의 몸을 끌어안고 점차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쯔걱, 쯔걱. 끈적이는 소리와 더불어, 접붙이는 음란한 소리가 탁한 신음과 어우러졌다. 이연은 거대한 사내의 몸에 짓눌린 채 아랫도리를 들락거리는 감각에 허덕였다.
크윽. 낮은 신음을 흘린 백경화는 더욱 거칠게 허리를 움직였다. 그는 이연의 작은 구멍을 짓이겨 버릴 듯 거세게 박아 대기 시작했다. 눈앞에서 할딱이는 작은 입술도 게걸스럽게 먹어 치웠다. 그렇게 고통인지 쾌락인지 모를 비명을 내지르며 제 등에 손톱을 세우는 이를 사납게 몰아세웠다.
미칠 것 같았다. 빳빳하게 일어선 양물이 내벽에 미친 듯이 비벼졌다. 잔뜩 젖어 거대한 양물을 날름날름 삼키는 구멍은 수축을 반복하며 백경화를 절벽으로 내몰았다.
조금 더. 조금 더!
이곳에 남아 있는 것은 교미에 허덕이는 짐승이었다. 작은 엉덩이를 제게 바짝 붙인 뒤 잘게 쳐올리며, 백경화는 끊임없이 신음했다. 그것은 이연 또한 마찬가지라 백경화의 것이 어느 곳을 스칠 때마다 진저리 치며 정액을 토해 냈다. 움찔움찔 조여드는 내벽의 느낌에 반원을 그리며 크게 박아 대던 백경화의 움직임이 점차 절정을 향해 치달았다. 잠시 후, 짜부라트릴 듯 세게 조여드는 내벽 깊숙이 양물을 묻고 씨물을 뱉어 낸 백경화가 이연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허리를 쳐올려 마지막 한 방울까지 내벽 깊이 토한 그는 거칠어진 신음을 정리하지도 않은 채 흐느끼고 있는 이연에게 입 맞추었다. 잠깐의 시간이 흐른 뒤. 멈췄던 허리 짓이 다시 시작되고 사그라졌던 신음이 다시 방 안을 울렸다. 모든 이성이 사라진 그들은 그리 깊은 물속에 잠겨 들었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익애(溺愛)였다.
거친 숨을 내쉬며 늘어진 작은 몸을 끌어안은 백경화는 벌어진 이연의 다리 사이로 제 다리를 밀어 넣었다. 그러자 작게 흐느낀 이연이 곤혹스레 고개를 내저었다. 더 이상 무리란 고갯짓에 낮은 웃음을 흘린 백경화가 땀으로 젖은 작은 이마를 쓸어 주며 말했다.
“찝찝하시지요? 씻어 드리오리까?”
“…귀찮다.”
정말로 만사가 다 귀찮다는 듯, 잔뜩 쉬고 갈라진 목소리로 그리 답한 이연은 무거운 눈만 깜빡였다. 그에 잘게 몸을 떨며 웃어 보인 백경화가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듯 이연의 몸을 더욱 끌어안았다.
이연은 그의 품 안에서 가장 편한 자리를 잡고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본래 이리 힘든 것이냐? 정신이 하나도 없구나…….”
“그러게 말이옵니다.”
이성을 내던진 것은 이연보다 자신이 더했던지라, 백경화의 미소가 조금 애매하게 변했다. 잠시 몽롱한 머릿속으로 백경화의 말을 되새겨 보던 이연의 고개가 갸웃거렸다. 어째 대답이 시원치 않다.
그것을 느꼈는지 백경화가 낮은 웃음을 흘리며 답했다.
“사실 소첩도 처음이었사옵니다.”
놀란 눈으로 백경화를 바라보던 이연의 두 눈이 게슴츠레해진 것은 얼마 가지 않아서였다.
“어찌하여 소첩을 그런 눈으로 보시는 것인지요?”
“또 거짓부렁 하는 게지?”
침방나인이 지은 옷을 저가 지었다는 것처럼. 그리 의심쩍은 시선으로 바라보자 잠시 제 잘못을 상기한 백경화였으나, 그는 곧 억울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사실 이번엔 참으로 억울하기도 하였다.
“이번엔 사실이옵니다, 전하.”
“…….”
“…참말이옵니다.”
“……진짜?”
예, 하고 고개 끄덕이는 백경화를 바라보던 이연은 저도 모르게 벌떡 몸을 일으키며 소리치고 말았다.
“거짓말!”
아고고, 제 상태도 잊고 몸을 일으켰다 신음하면서도, 이연은 물러서지 않았다. 날카로운 눈초리로 노려보던 이연은 백경화가 억울하다 호소하자 버럭 소리쳤다.
“처음이라기엔 너무 능숙하지 않느냐!”
말 그대로 좀 능숙한 솜씨였는가. 그 손에 까무러치기 일보 직전까지 갔던 이연은 가슴을 두드리며 백경화를 노려보았다. 그러자 언제 억울했냐는 듯 눈을 빛내며 백경화가 이연을 향해 물었다.
“기분, 좋으셨는지요?”
“…마, 말 돌리지 말고……! 내 말에 대답이나 하거라!”
백경화는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다그치는 이연을 바라보며 미소 띤 얼굴로 그를 당겨 눕혔다.
“본디 색사에 관심이 없기도 했거니와…… 언젠가 전하를 모시게 될 몸인데 어찌 함부로 다른 이와 정을 나누겠나이까.”
색사라기보다는 타인에게 관심이 없었다. 그러니 몸을 섞고 싶다는 마음도 당연 들지 않았다. 그러나 어느 날부터는 한 사람 외엔 누구에게도 닿고 싶지 않았다.
저를 눕히고 이불을 끌어 덮어 주는 백경화를 멍하니 올려다보며, 이연은 입술을 달싹였다.
“그런데 어찌 그리… 능숙해…….”
그의 물음에 잠시 손을 멈춘 백경화가 의미를 알 수 없는 눈으로 이연을 내려다보다가 답했다.
“제가 있던 곳이 전장이었지 않습니까.”
눈동냥을 좀…….
말끝을 흐리며 백경화가 그리 답하자, 빤히 그를 올려다보던 이연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게 무슨 상관이냐?”
모를 줄 알았다. 큭큭, 숨죽인 웃음을 터트린 백경화는 왜 웃는지 모르겠다는 듯 말똥말똥한 눈으로 저를 올려다보는 이연의 몸을 끌어안았다. 그리 한참 웃고 있던 그는 이연의 등을 토닥이며 덧붙였다.
“전하 외엔 몸 붙이고 싶은 이가 없었나이다.”
“…….”
한 손으로 고개를 짚은 채 저를 내려다보는 백경화의 시선에, 이연은 입술을 다물었다. 괜히 두둥실 기분이 좋아져서 그는 이불을 눈 밑까지 끌어당겼다가 다정하게 끌어 내리는 백경화의 손길에 입술을 오물거렸다. 정말로 내가 처음인가. 계속해서 그리 묻고 싶었으나, 그리고 제가 원하는 대로 답해 줄 이란 것을 알지만, 이연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저 잠들려는 듯 두 눈을 내리감는 백경화를 눈 속에 담다가 돌연 자리에서 일어섰을 뿐이다.
“전하?”
“잠시만… 별것 아니다.”
널브러져 있던 옷가지 중 자신의 것을 찾아 뒤적이던 이연이 본래의 자리로 돌아와 누웠다. 그러자 몸을 일으켰던 백경화도 다시 자리를 잡고 누웠다. 팔을 내밀어 그 위로 이연의 머리를 뉜 백경화는 두 눈을 내리감았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이연은 등을 돌리고 누워 제 앞에 펼쳐져 있는 백경화의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잠이 오지 않으십니까?”
“졸립다.”
“그럼 손잡고 주무시렵니까?”
“…그래.”
“이리해 드리면 될는지요.”
꼭, 제 손을 덮고 있는 작은 손을 힘주어 잡아 준 백경화가 이연의 뒤에서 웃었다. 그 웃음이 생생히 느껴져서 이연은 백경화의 웃음이 그치고도 한참 굳은 듯 움직일 줄 몰랐다. 작은 손이 꼼지락거리며 백경화의 손을 매만지기 시작한 것은 그 후였다.
손가락 마디를 조몰락조몰락, 한참 꼼지락거리는 이연을 느끼며 눈을 감고 미소 짓고 있던 백경화는 순간, 제 무명지5)에 느껴지는 질감에 두 눈을 번쩍 떴다.
숨조차 멈춘 채 백경화는 이연이 만지작거리던 손을 흘깃 바라보았다. 그 손에 딸려 올라와 있는 작은 손과, 눈 감기 전까지 보이지 않던 옥가락지의 존재에 두 눈을 홉떴다.
“내 어머니가 남겨 주신 유일한 유품이다. 그대가 내게 해 준 것에 비하면 턱없이 모자란 것이지만… 온전하게 가진 것 중 유일한 내 것이야.”
“…전하.”
살며시 떨리는 백경화의 목소리를 들으며 이연이 말했다.
“네게 주마.”
백경화의 손에 매달려 있던 손을 거두고 몸을 돌려 누운 이연이 말간 눈을 깜빡였다. 투박하기까지 한 옥가락지이지만, 그가 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그래서 더욱 백경화에게 주고 싶었다.
“줄게, 경화야.”
방긋이 웃으며 그리 말하는 이연을 백경화는 한동안 눈에 담았다. 그러다 옥가락지가 끼워진 손으로 이연의 머리를 감싸 당겨 제 목덜미에 묻었다. 그 이마에 입 맞춘 백경화가 잔뜩 부푼 가슴으로 긴 숨을 내쉬며 맹세했다.
“평생, 귀하게 여기겠사옵니다.”
“그대가 평생 귀하게 여겨야 할 것은… 나여야지.”
매달리듯 백경화의 어깨를 다잡은 이연이 장난스럽게 답했다. 당연한 말씀을요. 이마에 닿은 백경화의 입술이 달싹이는 것을 느끼며 이연이 덧붙였다.
“그럼 나 다음으로 귀하게 여겨 다오.”
백경화의 대답은 이연의 입술에 내려앉았다.
* * *
유란주호는 귀를 즐겁게 해 주는 풍악 소리와 제 곁에 앉아 아양을 떠는 기녀들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끊임없이 웃었다. 잔이 넘치도록 따라 주는 술을 목구멍으로 넘기고, 기녀가 애교 있게 입 안에 넣어 주는 안주도 날름날름 받아먹었다. 이리 흥겹고 즐거울 수 없었다. 낮에 들은 희소식을 떠올린 그는 기녀의 어깨에 고개를 묻고 소리 죽여 웃었다. 현재 그의 교만은 하늘에 닿아 있었다. 아니, 그가 하늘이었다. 다음 왕이 바로 그의 씨주머니에서 태어나지 않는가 말이다.
크큭, 그 생각에 기녀의 어깨를 끌어안고 있던 유란주호가 괴상한 웃음을 터트렸다. 목을 끄는 웃음이 거슬릴 법도 하건만, 기녀들은 눈웃음치며 더욱 그에게 몸을 붙이고 풍만한 젖가슴을 비비며 유혹했다. 그에 터트릴 듯 그 가슴을 움켜쥔 유란주호가 속삭였다.
“왜? 네년도 내 씨를 품고 싶으냐?”
“그리 해 주시면 이 천녀(賤女) 광영이옵니다, 나리.”
당연 그러하여야지. 유란주호는 제 말에 답하며 웃는 기녀를 흡족하게 바라보았다. 연신 저속한 농을 치며 기녀들을 희롱했다. 그렇게 밤새 흥청망청 마시고 진탕 허리를 놀리며 난리를 치다, 새벽이 되어서야 기절하다시피 잠들었다. 나신으로 널브러진 채 잠든 그는 미처 깨닫지 못했다. 어느 순간부터 그를 차가운 눈으로 내려다보는 인영들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그 밤, 유란주호는 제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전혀 알지 못했다.
질질질- 거대한 자루를 성의 없이 끌며 주인 앞으로 다가간 이들이 일제히 부복했다. 그럼에도 돌아보지 않은 인영은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타들어 가는 모닥불을 부지깽이로 뒤적일 뿐이었다. 그에 가만히 그 곁에 서 있던 이가 눈짓을 보내자, 자루를 끌고 온 이들이 급히 묶여 있던 끈을 풀고 그것을 밀어뜨렸다.
다소 거친 소리와 함께 그들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벌거벗은 채로 재갈이 물려 있는 유란주호였다.
“으… 으!”
재갈이 물린 탓에 신음조차 제대로 내지 못하는 유란주호가 급히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자는 도중 봉변을 당한 것을 알려 주기라도 하듯, 그의 눈엔 당황과 두려움이 한가득이었다.
봉두난발 상태로 이리저리 고개를 돌려 보던 그의 시선이 멎은 곳은 여전히 그에겐 시선 하나 주지 않은 채 무심하게 모닥불만 뒤적이고 있는 사내의 등이었다. 세 마리의 검은 개를 옆에 둔 그자가 사내들의 우두머리란 것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어찌하여 제게 이런 짓을 벌이는지는, 도저히 그 뒷모습만으론 알 수가 없었다.
그러자 마치 그의 마음을 읽은 것처럼 불씨만 뒤적이던 인영이 느릿하게 그를 돌아보았다. 빨갛게 불빛이 번지는 얼굴을 확인한 유란주호의 두 눈이 경악으로 잔뜩 벌어졌다.
“흐읍! 흡!! 읍!!”
“풀어 주거라. 그게 덜 시끄럽겠구나.”
경악을 담고 저를 바라보는 유란주호의 두 눈을 직시한 채 피식 비웃어 보인 백경화가 다시 고개를 돌려 불씨를 뒤적이기 시작했다. 꺼질 기미도 없이 활활 타오르는 불꽃이 강렬함에도 백경화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그 뒷모습을 향해 재갈이 풀린 유란주호가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이, 이게 무슨 짓이냐!!”
“말이 짧군.”
돌아보지도 않은 채 태연한 목소리로 백경화가 그리 말을 흘리자, 여기까지 유란주호를 끌고 왔던 이가 말없이 손을 들어 올렸다. 컹컹! 사납게 개 짖는 소리에 뒤이어진 것은 날카롭게 울리는 마찰음이었다.
짜악! 휙 소리와 함께 돌아간 뺨이 금세 달아올랐다. 사내로서 주먹도 아닌 따귀를 맞았다는 것에 분개한 유란주호가 무어라 소리치기도 전, 다시 한번 손이 휘둘러졌다. 짜악! 짜악! 짜악! 소리는 계속해서 울렸다. 그 손이 멈춘 것은 유란주호의 두 볼이 새빨갛게 달아오르고 입가를 붉은 피로 축축하게 적시고 난 뒤였다.
두 볼이 떨어져 나갈 듯 아찔한 감각에 잠시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유란주호가 소리쳤다.
“이… 이러고도… 무, 무사할 줄……!”
불분명한 발음으로도 그리 쏘아붙이는 유란주호의 행태에 불씨만 뒤적거리던 백경화가 드디어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유란주호가 원한 반응이 아니었다.
잘게 어깨를 떨며 웃음을 터트린 백경화가 그를 돌아보며 말했다.
“지금 네가 신경 써야 할 건 그런 게 아닐 텐데?”
“…나, 날 건드리면… 네 놈도 무사하진 못해.”
겁을 주기라도 하듯 그리 입을 여는 유란주호의 말에 백경화의 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상황 파악을 못해도 저리 못해서야. 하긴 이 정도 돼야 나도 즐겁지. 픽, 한쪽 입가를 비틀어 비웃은 백경화는 그제야 느릿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유란주호가 백경화의 전신을 본 것은 그때였다. 현재 그의 앞에 서 있는 것은 어린 왕을 위해 여인처럼 입성한 사내 후궁이 아니라, 단단한 몸에 검은색 무복을 걸치고 위용을 뽐내고 있는 무신(武神)이었다.
그 순간, 유란주호의 머릿속에 백경화의 명성이 빠르게 지나갔다. 전장의 악귀라 불리며 손속에 인정 하나 두지 않는다는 장군의 악명이.
‘아니야. 저놈은 이제 내공이 묶인 천한 사내 첩일 뿐이야…….’
애써 그리 위안하면서도 유란주호는 두려움을 숨기지 못했다.
순식간에 안색이 질린 유란주호의 앞에 느린 걸음으로 다가간 백경화가 미소 지었다.
“사실 오늘은 피를 보고 싶지 않았지만… 귀한 것을 받았으니 그 보답을 해야지 않을까 싶어서 말이다.”
‘귀한 것’이란 말을 내뱉을 때 유독 백경화의 눈이 다정한 빛을 띠었으나, 유란주호는 그 의미를 알지 못했다. 그저 백경화의 손에 들리어 일정한 간격으로 탁, 탁, 바닥을 치는 부지깽이가 유독 불안할 뿐이었다.
유란주호의 긴장을 느낀 듯 바닥을 치던 것을 멈춘 백경화가 미소를 거두었다. 싸늘하게 뒤틀린 아름다운 얼굴 위로 차차, 흉악한 악귀가 서리기 시작했다.
“그런 의미로 기대해도 좋아.”
살의로 번들거리는 두 눈을 고고하게 빛내며 백경화가 다시 미소 지었다.
“사실 나도 내가 널 어떻게 할지, 무척 기대되거든.”
말 그대로 백경화는 유란주호가 이연의 앞에서 주제도 모르고 나대던 그때부터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 감히 이연을 향해 더러운 혓바닥을 놀릴 때부터. 살가죽 하나하나 벗겨 내어 소금 통에 넣고 절여 버릴까. 그도 아니면 그 입을 찢고, 머리 가죽을 벗겨 낼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미소 짓던 백경화는 곧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반드시 무슨 일이 있어도 하리라 마음먹었던 한 가지.
그 생각에 백경화는 손을 뻗어 유란주호의 머리카락을 틀어잡고 비틀었다. 낮은 신음을 흘리는 유란주호의 얼굴을 내려다보는 백경화의 낯은 매우 써늘했다. 언뜻 귀기마저 느껴져, 보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렸다.
“제일 먼저 이 혓바닥부터 잘라 내야겠지.”
“……!”
머리카락이 뽑힐 정도의 압력에 절로 신음을 흘리던 유란주호는 그 순간 바로 코앞에 드리운 백경화의 얼굴에 숨을 죽였다. 마치 거대하고 흉악한 짐승을 마주한 듯한 공포였다.
죽는다!
순간적으로 처참하게 육시당한 제 모습을 머릿속에 떠올린 유란주호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고 제 머리채를 잡고 있는 백경화의 손을 뿌리쳤다. 썩어도 준치라고, 어릴 때부터 익혀 온 무공에 기대어 도주를 갈망했던 그는 곧 그것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시도였는지 깨달았다. 백경화에게서 한 발 물러서기도 전, 뻗어 온 하얀 손에 목이 붙잡혔기 때문이다. 단단히 틀어잡은 손이 숨구멍까지 막을 듯 우악스러웠지만 그보다 유란주호를 경악게 만든 것은 따로 있었다. 도주하려던 자신을 순식간에 낚아채던 그 손!
그것은 도저히 내공을 잃은 무인이 낼 수 있는 속도가 아니었다.
“내, 내공을 잃은 게……!”
컥, 목이 졸린 와중에도 제 놀라움을 드러내는 유란주호를 내려다보며 백경화가 비웃었다. 착각도 유분수지. 제 가진 실력이 어떠한지도 모르나.
“너 하나 상대하는 건 지금 상태로도 충분하다.”
어쭙잖은 실력을 비웃는 백경화의 말에도 불구하고 유란주호는 수치보다 절망을 느꼈다. 바닥을 치던 도주 확률이 아예 사라졌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까마득한 공포가 되어 그를 몰아붙였다.
그런 그의 목을 짓누른 채, 백경화가 무심한 낯으로 그 죄에 대해 물었다.
“이 혀로 내 하늘을 기만하고 모욕했었지. 기억하느냐?”
“……!”
싸늘하게 내질러진 백경화의 말에 그때까지 묵묵히 자리만 지키고 있던 자들이 움직였다. 유란주호의 몸과 얼굴을 틀어잡고 결박한 뒤, 그 입을 벌려 거친 손길로 움츠러져 있던 혀를 잡아 뺐다.
“흐, 흐극!”
단단한 손아귀에 잡힌 혓바닥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유란주호가 짐승처럼 울부짖자 미소 지은 백경화는 그의 눈앞에서 한껏 달구어진 부지깽이를 흔들어 보였다. 두려움을 담은 눈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쇠끝에 머무는 것을 바라보며 그가 덧붙였다.
“그러니 이것은 그 벌이다, 어리석은 것아.”
치이이이익!
길게 내뽑아진 혀 위로 잔뜩 달구어진 부지깽이를 짓누르는 백경화의 표정은 한 치의 변화도 없었다. 단단히 틀어 잡혀 있음에도 고통으로 몸부림치며 경기를 일으키는 유란주호를 싸늘히 내려다보던 그는 익어 가는 혓바닥을 주시했다. 뜨거운 쇠가 정확하게 혓바닥 중앙을 파고들어 가는 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백경화가 말했다.
“네 말본새만큼이나 질긴 혓바닥이구나.”
“흐극! 그그극!”
끄르륵, 혀가 잡힌 채로 침을 질질 흘리며 두 눈을 까뒤집은 유란주호가 곧 숨이 넘어갈 듯 할딱였다. 그 순간 다행인지 불행인지, 뚜둑- 소리와 함께 부지깽이가 정확하게 혓바닥을 관통했다. 백경화가 그대로 힘을 줘 부지깽이를 바닥에 박아 넣자, 너덜너덜하던 유란주호의 혀가 그대로 찢어졌다. 유란주호는 고통으로 바닥에 주저앉으며 입을 부여잡고 비명을 내질렀다.
유란주호는 눈물을 줄줄 흘리며 초점조차 잡히지 않는 눈으로 부지깽이를 바라보았다. 바닥에 박힌 부지깽이의 옆에 피투성이의 살 조각이 쓰레기처럼 버려져 있었다. 처참한 광경이었다.
“흐으… 흐으……!”
짐승 같네. 백경화는 처참한 울음을 흘리며 몸을 떠는 유란주호를 그리 평했다. 그러다 문득 떠올랐다는 듯 부지깽이의 끝을 잡고 누른 그가 덧붙였다.
“그러고 보니 아랫도리의 지조도 없는 놈이었지.”
“……!”
고통으로 까무러칠 와중에도 백경화가 하고자 하는 말이 무언지 깨달은 유란주호의 안색이 파리하게 질렸다. 갓 무덤을 파헤치고 나왔다 한들 이렇게 창백할 수는 없을 터였다. 그러나 그것만으론 새파랗게 날이 선 악귀를 물리칠 수는 없었다.
“개보다 못한 것은 떼 버리는 게 낫지.”
귀청을 때리는 백경화의 말을 이해하기도 전에, 식욕을 자극하는 고기 냄새가 풍겨 왔다. 그에 조용히 시립해 있던 개들이 일제히 크게 짖기 시작했다. 컹컹컹! 금방이라도 달려들 듯 이를 드러내며 맹렬히 짖는 것에 모골이 송연해진 자는 바로 유란주호였다.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백경화의 말과 난데없이 등장한 고기가 불길한 기운을 풍기며 그를 덮쳐 왔다.
“그러니 개먹이로 딱이다.”
그리 말한 백경화가 발로 유란주호의 몸을 뒤집었다. 입을 두 손으로 막고 있던 유란주호는 그 발길질에 힘없이 나뒹굴었다. 발로 목을 지그시 누르는 백경화 때문에 움직일 수가 없었다. 끄르륵! 고통의 비명은 피가 넘어가는 소리와 함께 입 안으로 삼켜졌다.
백경화는 저를 두려운 눈으로 바라보는 유란주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들고 있던 것을 유란주호의 가랑이 사이로 부었다. 번들거리는 기름과 고기가 벌거벗은 유란주호의 가랑이 사이로 고이는 것을 확인한 백경화가 명령했다.
“먹어.”
단조롭게 흘러나온 목소리는 고기 냄새를 맡고부터 흥분을 감추지 못하던 개들에게 향했다. 그 명령에 세 마리의 검은 개들은 이를 드러낸 채 유란주호를 향해 일제히 달려들었다.
“끄…! 끄윽!”
순식간에 제 가랑이 사이로 입을 벌리고 파고드는 개들의 모습은 차라리 공포에 가까웠다. 개들이 날카로운 이로 흘러내린 고기를 씹어 먹기 시작하자, 유란주호의 살 또한 같이 파먹혔다. 단단한 이가 살을 파고드는 감각에 유란주호가 참지 못하고 몸을 비틀었으나 그럴수록 목을 짓누르는 백경화의 발힘만 더해 갈 뿐이다. 까딱 잘못했다가는 그대로 목뼈가 부러질 것이다.
비명을 내지르는 유란주호를 바라보던 백경화가 여유로운 동작으로 바닥에 꽂혀 있던 부지깽이를 뽑아 들었다. 뒤이어 유란주호를 향해 다가간 백경화는 망설임 없이 그것을 휘둘렀다.
“끄어어억!!”
푹! 살이 짓이겨지는 소리와 함께, 허벅지가 꿰뚫린 유란주호가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그 모습을 표정 하나 흩트리지 않은 채 내려다보던 백경화가 불쑥 말했다.
“지금이라도 주상 전하에 대한 경배의 말을 올린다면, 내 그만 용서해 주도록 하마.”
“……!”
침과 피, 눈물과 콧물로 범벅 된 유란주호의 눈이 번쩍 뜨였다. 진심일까? 살 수도 있다는 희망에 가득 찬 유란주호는 백경화를 올려다보며 열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순간적으로 자신의 처지를 잊고 있던 것이다.
그것을 되새겨 준 것은 짐짓, 안타깝다는 듯 표정을 흐린 백경화였다.
“아, 말을 못 하지.”
“……!”
“어쩔 수 없군.”
마저 끝내 볼까. 심드렁하니 뒤이어진 백경화의 말에 유란주호의 두 눈이 까맣게 죽었다. 끔찍한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이 진정 죽음뿐이란 것을 깨달은 자의 얼굴이 절망을 담고 일그러졌다.
추하게 일그러진 얼굴을 무감각하게 내려다보던 백경화가 눈짓하자, 여선이 남은 고기를 마저 유란주호의 사타구니 위에 부었다. 그러자 잠시 물러섰던 개들이 다시 입을 벌리고 유란주호를 향해 달려들었다.
고기와 더불어 잔뜩 쪼그라져 붙어 있던 유란주호의 양물이 사납게 뜯겨 나가기 시작했다. 끄그그극! 끄극! 어느새 다른 사내들에게 손발이 붙잡힌 채로 유란주호는 그렇게 생으로 제 양물이 개에게 뜯어 먹히는 고통을 느껴야만 했다. 그는 멀어지는 정신으로 백경화가 입바람으로 개 한 마리를 불러들이는 것을 보았다. 발끝으로 먹이를 가리키듯 잘린 제 혓바닥을 가리키는 모습도.
유란주호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개의 입 안으로 날름- 사라지는 제 혓바닥이었다.
유현왕비는 계속해서 신경을 자극하는 어떠한 것에 떠지지 않는 눈을 힘겹게 떴다. 그 순간, 그녀는 코끝을 자극하는 비릿하고 고약한 냄새에 헛구역질을 하며 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이 역겨운 내는 도대체 무어란 말인가?
우욱, 유현왕비는 헛구역질을 하며 상궁을 부르기 위해 고개를 들다 시야에 잡힌 무언가에 말을 삼켜야만 했다.
내실 문 앞에 매달려 힘없이 흔들거리는 무엇. 등골이 써늘해지는 한기와 더불어 불안함이 차올랐다. 조금씩 위로 시선을 들어 보던 유현왕비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온 것은 그다음이었다.
“꺄아아아악!!”
귀곡성을 담은 유현왕비의 비명에, 밖에서 대기 중이던 궁인들이 무슨 일이시냐 여쭈며 달려 들어왔다. 그러나 그들도 곧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것에 자지러지며 넘어가고 말았으니.
졸도하며 넘어가는 그들의 시야에 잡힌 것은 새까맣게 탄 사람의 시체였다. 양손과 양발이 중간부터 사라진 채로, 목이 매달려 흔들리고 있던 것은 바로 유란주호의 시체였다. 새까맣게 타 재가 되기 일보 직전인 몸과 달리 그 얼굴은 사람의 형상 그대로였던 것이다.
두 눈을 부릅뜨고 힘없이 꺾인 고개가 정확히 유현왕비를 향해 있었다.
“…!!”
“마… 마마……!”
그 눈과 눈이 마주친 유현왕비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혼절하고 말았다. 대경한 상궁이 떨리는 손길로 뒤로 넘어가는 왕비의 몸을 급히 받아 안았다. 그러나 귀한 몸 받아 냈다 안심하기도 전, 그녀의 시야를 채운 것은 새하얀 적삼 사이로 붉게 물들기 시작한 왕비의 치맛단이었다.
하혈이었다.
촤아아-
백경화의 손길을 따라 물소리가 울렸다. 목간통에 들어앉아 따뜻한 물로 근육을 풀고 있던 그는 목을 기대며 긴 숨을 내쉬었다. 방금 들은 보고가 조금 언짢았던 탓에, 고운 미간은 살짝 찌푸려진 채다.
“유산은 면했다라…….”
“예.”
“…….”
아깝구나, 아까워.
여선의 대답을 들은 백경화는 못마땅함에 쯧, 낮게 혀를 찼다. 그 집안 핏줄 아니랄까 봐 질기기도 하구나. 물에 젖은 긴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던 그는 곧 제 시야에 잡힌 것에 언제 짜증 냈냐는 듯 여상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뭐, 기회는 아직 많으니까.”
벌을 줄 때는 잠시 그 손에서 자취를 감추었던 것이, 깨끗하게 씻은 손가락엔 다시 고이 자리해 있었다.
그 위에 어디 흠난 곳 없나 세심히 살피던 백경화가 조금 전보다 확실하게 풀어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쉽긴 하다만, 문제 될 일은 아니지.”
“…….”
한껏 부드러워진 낯으로 제 약지에 끼워진 옥가락지를 바라보며 미소 짓는 백경화를, 차마 더 이상은 볼 수 없어 여선을 비롯한 군사령들은 급히 고개를 숙였다. 도저히 방금까지 사람 하나를 도살(盜殺)한 이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유란주호의 명줄을 끊은 자는 분명 그가 맞았다. 사지를 끊어 내며 내가 먹은 비약이 무공을 쓰면 이러한 고통을 준다 하는데 어떠하냐, 참을 만하냐 묻는 모습에는 여선마저 진저리 치고 말았다.
새삼 그 잔인함에 고개를 내젓던 여선을 향해 백경화가 물었다.
“그들은 어디까지 왔다더냐?”
“곧 도성에 당도할 것이라 하였습니다.”
“그래. 생각보다 늦었군.”
여선에게 묻고, 답하면서도 백경화의 시선은 제 약지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그리 좋으시냐, 비아냥거리고 싶은 것을 여선은 필사적으로 참았다. 저렇게 티가 나게 온몸으로 좋아하고 있는데 비아냥이 귀에 들어오기나 할까.
“이번 일로 대비 쪽도 좀 더 경계하겠지. 변수에 주의하라.”
“알겠습니다.”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든 것은 본인이면서, 그 뒷감당은 저희더러 하라는 상관의 뒤통수를 잠시 노려보던 여선이 고개를 조아렸다. 제 상관에겐 뒤에도 눈이 있음을 잊지 않았기 때문이다.
촤아아- 곧 물보라를 일으키며 몸을 일으키는 백경화의 모습에 여선은 흠칫, 몸을 사리고 말았다. 헉, 혹시 노려본 거 들켰나 싶어 마음을 졸이고 있자, 젖은 적삼 위로 직접 새 옷을 걸쳐 입은 백경화가 그를 돌아본다. 그러다 여선은 깨달았다. 백경화가 무엇을 원하는지.
유독 많이 움직이는 백경화의 왼손을 바라보며 여선은 속으로 울먹이고 말았다. 부러 저희들 눈앞에서 여러 번 흔들고 있는 반지를 어찌 모를 수 있겠는가……!
이쯤 되면 백경화가 원하는 한마디를 아니 해 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옥가락지가, 참… 잘 어울리십니다, 주군.”
“그러하냐.”
화악- 밝아진 백경화의 두 뺨 위로 홍조가 떠올랐다. 그것이 뜨거운 물에 오래 있었던 탓인지, 아니면 모종의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절대로 알고 싶지 않았기에 군사령들은 가만히 고개만 끄덕였다. 옥가락지가 참으로 예쁩니다. 주군을 위해 태어난 것 같사옵니다. 등등등. 앞다투어 아부가 쏟아졌다.
“전하께서 내게 주신 것이다.”
“경하드리옵니다.”
그런 것을 정표(情表)라 한다지요. 축하드리옵니다, 주군.
귀에 듣기 좋은 말을 흘려 주면서도 그들은 속으로 끝없이 한탄했다. 백경화의 변화에 이젠 충격을 넘어 공포로 몸이 떨릴 지경이다. 어찌 저보다 한참 어린 소년에게 빠져 헤어 나올 줄을 모른단 말인가.
누구는 소싯적 연애 한번 못 해 본 줄 아십니까. 그리 티 내고, 자랑하고 싶어서 어쩌십니까.
무엇보다 옥가락지 하나에 그리 홀랑 넘어가다니 너무 쉽잖습니까!!
막말로 얼마나 자랑하고 싶으면 저희들 앞에서 이러고 있냔 말이다. 어이코, 내 속이 내 속이 아니다. 답답한 마음에 여선이 가슴만 치고 있자, 뒤쪽에서 은근한 항의가 들려온다.
그래도 대장은 티라도 맘껏 내실 수 있지 않습니까. 저흰 아주 그냥 죽겠습니다.
“…….”
여선은 제게 말없이 전해지는 수하들의 불만에 차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래도 제 처지가 저들에 비해 낫긴 하구나… 항시 기척을 숨기고 은밀히 숨어 호위를 하여야 하는 그들은 티는커녕, 숨소리 하나도 조심해야 한다. 허니 기함을 토하는 백경화의 기행에도 뜨악한 감정을 내비치지 못하니 어련할까.
여선은 그들을 보며 스스로를 위로할 수 있었다.
이런 것도 위안이랍시고 하고 있는 자신의 팔자가 새삼 기구하고 서글프다. 뒤늦은 연애에 빠져 팔불출처럼 자랑질 삼매경인 상사가 조금은 밉기도 부럽기도 한, 그런 밤이었다.
2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