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
태의는 제게 떨어지는 날카로운 시선에 몸을 떨며 왕의 손을 살폈다. 손바닥을 가로지르는 상처는 꽤나 깊었다. 어찌하여 이런 상처를 입었는지에 대해서는 궁녀들의 손에 의해 본래대로 돌아가고 있는 방 안의 모습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현재 태의가 궁금한 것은 왕이 어찌하여 이런 상처를 입었냐는 것보다, 공빈과 왕의 관계였다.
태의가 상처를 살피는 내내 왕을 품 안에 안고, 그 표정이 찌푸려질 때마다 따라 얼굴을 굳히고 있는 공빈 백경화, 그 말이다.
‘허 참… 저번에 침놓을 때부터 알아봤지만…….’
유난스럽구나, 유난스러워. 어디 무서워서 치료나 하겠는가.
속으로 혀를 쯧쯧 찬 태의는 왕의 손바닥에 천을 감는 것을 끝으로 물러났다. 방 안 정리를 끝낸 궁녀들마저 물러나자 그제야 방 안에는 둘만 남게 되었다.
백경화는 새하얀 천이 감긴 작은 손바닥을 내려다보며 표정을 흐렸다. 이연이 조심스레 그 손에 잡혀 있던 손을 빼내려 하자, 손목을 잡고 있던 손에 힘을 주어 막은 백경화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다시는, 옥체에 상처 내지 마소서. 소첩 심장이 남아나지 않겠나이다.”
“…별것 아닌 것을.”
“약조하여 주십시오, 전하.”
“…….”
이연은 백경화에게 안긴 채 흘긋, 그를 올려다보며 머뭇거리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다소 표정을 푼 백경화가 천이 감긴 이연의 손을 들어 조심스레 입 맞췄다. 간질간질하고 아릿한 기분에 슬쩍 입술을 깨물었다 놓은 이연이 고개를 숙였다. 물론 달아오른 귀 끝은 숨기지 못했기에, 백경화에게 고스란히 그 쑥스러움을 들키고 말았지만.
그것을 모른 척 설핏 웃은 백경화가 이연을 안고 있는 손에 힘을 주며 고개를 기울였다.
“아프시지는 않으십니까?”
“괜찮으니.”
“…….”
“괜찮다. 그러니 신경 쓰지 마라.”
“…속상합니다. 이 귀한 옥체에 어찌 이런…….”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걱정 어린 말을 음미하듯 이연은 천천히 두 눈을 내리감았다. 손에선 불이 나는 듯 아픈데, 마음만은 따뜻했다. 그래서 그는 희미하게 웃고 말았다.
“어찌하여 웃으시는지요?”
“좋아서.”
“예?”
“그대가 걱정해 주는 게 좋아서.”
“…….”
백경화는 여전히 두 눈을 감은 채 제게 편안히 몸을 기대고 앉아 있는 이연을 내려다보다, 그를 따라 눈을 감았다. 마음이 무거웠다. 기쁜데, 그랬다. 그는 자신의 마음을 숨기듯 이연의 머리에 제 머리를 기댄 채 나지막이 투덜거렸다.
“소첩은 걱정되어 죽겠사온데, 기쁘시오면 어찌하옵니까. 소첩이 가슴 부여잡고 쓰러지면 어쩌시려고요, 전하.”
엄살이 서린 그 말에 이연이 낮게 키득거렸다. 그에 제 입술을 움직여 이연의 것을 살며시 누른 백경화는 어느새 눈을 뜨고 저를 담고 있는 검은 눈을 마주 보며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제 소첩이 전하께 이리 입 맞추어도 되는 것이지요?”
“…….”
이연은 입을 열어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떴던 눈을 다시 감고 백경화의 입술을 받아들였다. 마주 닿은 입술이 휘어지는 것을 느끼며 이연은 슬며시 손을 뻗어 백경화의 목에 감았다.
반쯤 마주 보는 자세에서 가볍게 닿아 있던 그들의 입술 사이로 간간이 짧은 웃음이 흘러나왔다. 가슴이 뿌듯하게 부풀고 달큼하게 뛴다. 처음으로 겪는 감정이 혼란스러울 만도 했지만, 그저 실없이 웃음만 나왔다.
촉, 가볍게 닿았다 떨어지는 입술을 눈으로 좇다 시선을 들어 백경화와 마주한 이연이 다시 눈을 감자, 이번엔 그 눈꺼풀 위로 입술이 내려앉았다. 조심스럽고 상냥한 입술이었다. 때문에 그것이 떨어지고 다시 백경화의 눈을 마주한 이연은 저도 모르게 불쑥 묻고 말았다.
“어찌하여 나인가?”
원하면 세상 그 누구라도 취할 수 있는 이가, 어찌하여 나를 택했는가.
이연이 무엇을 묻고자 함인지 눈치챈 백경화는 말없이 웃었다. 반쯤 넘어간 이연의 몸을 단단히 끌어안고 상처 난 손을 제 손 위에 올린 후 되물었다.
“궁금하시옵니까?”
“물으면 답해 주는 게야?”
“…….”
그러나 열릴 듯하던 백경화의 입은 끝내 열리지 않았다. 잠시 제가 잡고 있던 손을 내려다본 백경화가 고개를 들어 아쉬움 묻어난 눈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는 이연을 향해 말했다.
“전하, 다른 것 먼저 하문하여 주시면 아니 될는지요?”
“…다른 것이라 하면?”
“소첩에 대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기쁠 것이옵니다.”
“…….”
생각지도 못한 말에 잠시 당황으로 눈동자를 굴리던 이연은 여태 제 손을 잡고 있는 백경화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보는 것과 달리 백경화의 손은 거칠었다. 마디가 굵고, 손 곳곳에 굳은살이 박여 보드라운 맛이 없었다. 무예를 익힌 손이란 것을 단번에 알 수 있는 손이다. 그렇지만 이연은 이 손이 싫다 느낀 적 없었다.
잠시 그 손을 내려다보던 이연이 꾹꾹, 백경화의 단단한 손바닥을 누르며 물었다.
“그대, 올해 연치가 어찌 되는가?”
“전하와 딱 열 살 차이가 나옵니다.”
“생각보다…….”
많다─
이연의 뒷말을 찰떡같이 알아들은 백경화는 웃음을 지우지 않은 채 제 품에 안겨 있는 이연의 몸을 흔들었다. 처음 그 사실을 알았을 때 받았던 제 충격에 비할쏘냐.
지난날의 방황을 잠시 떠올렸던 그는 저를 빤히 올려다보는 이연과 시선을 맞췄다.
“나이 많다 구박하셔도 못 물리십니다, 전하.”
“띠를 한 바퀴 안 돈 게 어딘가. 안심하시게.”
“…….”
은근히 속을 찌르는 이연의 말에 백경화가 합- 입을 다물자, 이연이 낮게 웃었다.
“무공은 언제부터 배웠는가?”
“입문은 넷에 하였으나, 깊이 있게 들어선 것은 일곱이 넘어서였사옵니다.”
질문에 답한 백경화는 제 손바닥을 누르는 이연의 손을 한 번 잡았다 놓았다. 이연은 갑작스러운 악력에 놀라 저도 모르게 손을 빼려던 것을 멈추고 두 번째 물음을 던졌다.
“힘들지 않았는가?”
“딱 죽고 싶을 만큼 힘들었지요. 하지만 그때 소첩의 머릿속엔 한 가지 생각밖에 없어 수련을 하지 않을 수도 없었사옵니다.”
“한 가지 생각?”
“…….”
이연의 물음에 잠시 씁쓸하게 웃어 보인 백경화가 조금의 망설임 후 입을 열었다.
“소첩이 열여섯에 백가에 양자로 들어간 것은 알고 계신지요?”
“그것은…….”
알고 있다. 백가의 전 가주가 기재다 하여 백경화를 양자로 들여 후계자로 교육시켰다 하는 것은 이 도성 내 모르는 이가 없었다. 그러나 백가에 입양되기 전, 백경화가 어디서 무얼 하였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몰랐다.
백경화는 저를 올려다보는 말간 두 눈을 바라보며 조심스레 덧붙였다.
“소첩은 고아였사옵니다.”
“……!”
“…언짢으신지요?”
깜짝 놀라는 자신을 내려다보며 백경화가 묻자 이연은 얼른 고개를 내저었다. 그에 안심한 듯 짧은 숨을 내쉰 백경화가 미소 지었다.
“본디 소첩의 아비는 떠돌이 무사로 갖춘 실력이 꽤 출중하여 어느 고관 댁에 잠시 의탁하게 되었는데… 그때 소첩의 어미와 연이 닿았고, 얼마 되지 않아 제가 태어났사옵니다.”
잠시 말을 끊은 백경화는 제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이연의 손을 다시 한번 잡았다 놓았다. 이것을 이연에게 말하게 되는 날이 올 줄은 몰랐으나 백경화는 멈추지 않았다. 어차피 언젠가는 알게 될 일. 그러니 먼저 말하는 것이 낫다.
“태어나서 얼마간은 그 고관 댁에서 자랐습니다. 모자람 없는 생활이었고, 부모에게 모두 사랑받으며 지낸 시간이었사옵니다. 꽤… 행복했던 것 같나이다. …4살 때, 그곳을 떠나기 전까지는요.”
“괴로우면…….”
굳어진 목소리를 느낀 것인지 말문을 막는 이연의 정수리에 입술을 묻고 눈을 감았다 뜬 백경화는 새파랗게 날이 선 눈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그리 어렸는데도 불구하고, 그날의 모든 것이. 그때의 분노가.
“소첩은… 아비와 함께 어미에게 버림받았사옵니다.”
“…?!”
놀라 고개를 들려 바르작거리는 작은 몸을 움직이지 못하게 단단하게 감싸 안은 그는 고개를 내저었다. 독이 서렸을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다. 그 느낌이 정수리를 통해 전해졌는지 곧 이연의 몸이 잠잠해졌다.
“그 길에 아버지는 사살당하였고, 저는 어찌 살아남아 떠돌다 천운으로 아비의 친가에 닿게 되었는데… 후에 알고 보니 어미의 배덕을 눈치채고 아비가 미리 연통을 놓아 두었더이다.”
“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된다!”
“괜찮사옵니다, 전하.”
백경화는 이연의 몸을 안은 채 나직한 한숨을 흘렸다. 지금은 괜찮다 말하지만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눈앞이 빨개지는 때가 있었다. 숨 가쁘게 헐떡이며 배신감과 분노에 몸을 떨던 때도 있었다. 악착같이 무공을 익히고, 악귀 같은 형상으로 어찌 복수할까를 생각하며 머릿속으로 골백번 잔학한 학살을 일삼았다. 그것은 인간이 아니었다. 인간의 가죽을 뒤집어쓰고, 복수로 눈이 뒤집어진 사나운 짐승일 뿐이었다. 자신에게 손대는 모든 것을 집어삼킬 준비를 마친. ─그래, 그랬던 그다.
‘너를 만나기 전까지는.’
“…….”
백경화는 허공을 헤매고 있던 시선을 내려 작은 정수리를 바라보았다. 지금도 작지만 그때는 이보다도 훨씬 작았다. 백경화는 아직도 생생한 그날의 이연을 떠올리며 미소 지었다. 그래, 그를 인간으로 거듭나게 했던 것은 저보다 한참 어린 이 아이였다.
“전하, 저는 복수 때문에 무공을 익혔고 그 때문에 강해졌나이다. 뼈가 부러지고 살이 터져 나가도 멈추지 않고, 나날이 사람에서 멀어지며… 짐승처럼 그리 살아왔습니다.”
“…….”
“전하를 뵙기 전까지는… 그랬사옵니다.”
“…….”
백경화는 아무런 말도 없는 이연을 바라보다 눈치채지 못하게 제 혀를 깨물었다. 너무 솔직하게 털어놓은 걸까. 혹 겁먹은 것은 아닐까 싶어 조바심이 난 백경화가 막 입을 열려던 순간이었다. 꾹, 제 손을 한 번 힘주어 잡은 이연이 슬그머니 백경화의 손에 깍지를 꼈다.
“우리, 참 잘 만났구나.”
“…….”
난데없이 흘러나온 이연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백경화가 입술만 달싹거리고 있자, 웃음기 서린 목소리가 뒤를 잇는다.
백경화의 머리를 내리치는 말이었다.
“내가 허수아비 인형이고, 그대가 짐승이라 하면… 둘 다 사람이 아니니 잘 만났지 않느냐.”
“……!”
“그대와 내가 사람이 아닌 것으로 만나, 서로를 사람으로 만든다면 그것이야말로 인연인 것을.”
“…전하.”
흡, 숨을 들이켰다 내쉰 백경화는 이연을 안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숨이 막히고 거북스러울 만도 하건만 이연은 말없이 제 몸을 감은 백경화의 손을 쓰다듬었다. 더 이상 끌어들일 품이 없다는 것이 한스러워 백경화는 가느다란 목에 머리를 기대었다. 이 가슴을 채우는 충만한 애정을 풀고자 한다면 이연은 감당키 힘들 것이다.
그렇지만 백경화는 오래전부터 제 속에 담아 두고 있던 것을 말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었다.
“저는 전하의 개이옵니다.”
험한 말에 놀라 굳는 작은 몸을 조금 떼어 내어 시선을 마주한 백경화는 말과는 달리 아주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고운 얼굴은 이연에 대한 사랑스러움으로 환하게 만개해 있었다. 그런 자신을 멍하니 올려다보는 이연의 볼을 손등으로, 손가락으로 몇 번이나 쓸며 백경화가 덧붙였다.
“짖으라면 짖고, 물라면 물고, 꼬리 치라면 꼬리 치는…… 그런, 그런 개이옵니다.”
“사람으로 만들자니까 어찌 그런 말을 해.”
“전하의 애정이 고프고, 관심받고 싶어 발치를 맴도는… 그 가시는 길 항상 지키고픈 것이 어찌 사람이랄 수 있겠나이까.”
방금 전엔 내가 사람으로 만들었다 하지 않았느냐?
이연의 눈에 서린 물음에 설핏 미소 지은 백경화가 이연의 볼에 뺨을 부비며 속삭였다.
“그때의 저는 정체 모를 흉한 것이었고, 지금의 저는 전하의 충직한 개이옵니다.”
상처 난 곳 덧나지 않게 싹싹 핥아 드릴 것이고, 누가 되든 전하께 해가 되는 것은 모두 갈가리 물어뜯어 버릴 것이옵니다.
백경화는 이연을 안은 채 속으로 덧붙이며 미소 지었다. 실로 흉흉한 미소였으나, 그를 보지 못한 이연은 머뭇거리다 백경화에게서 얼굴을 떼어 냈다.
“듣기 좋지 않다. 그런 말 마라.”
“그럼 소첩, 무엇이 되오리까?”
이연이 슬며시 손을 뻗어 입을 막는 것을 잡아채어 그 끝에 입 맞춘 백경화는 이연에게 이마를 마주 대었다. 진실로 이연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될 의향이 있다는 몸짓이었다.
이연이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잠시 눈동자를 굴리다, 바로 코앞에 있는 백경화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대는 이미 내 후궁이니, 굳이 무언가가 될 필요 없지 않느냐. 그러니 그냥, 나랑 부부로 살자꾸나.”
“…….”
백경화는 이연의 말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것이야말로 제가 진정 원했던 것이란 것을, 이연의 말을 듣고서야 깨달았기 때문이다.
아아… 이 아이는 어찌하여 이리도 쉽게 그를 들었다 놓았다 하는 것일까. 진정 말 한마디로 저를 낙원으로 밀어 넣는 이다.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이연의 볼에 입 맞추며 백경화가 다소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예, 전하. 그리하겠습니다.
그것은 그가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대답이었다.
깊게 잠이 든 이연을 내려다보며 시간을 죽이던 백경화는 손을 들어 그의 검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손끝에 부드럽게 엉키는 머릿결이 고와서 그는 조금 더 짙게 웃었다. 부부로 살자 하였다. 천하를 얻어도 이보다는 기쁘지 않을 것이다.
그는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잠이 든 이연의 얼굴에 수차례 입 맞추었다. 희열로 가쁘게 뛰는 심장을 달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제 품 안에 들어온 이를 어르길 한참. 문득, 이불자락에 상처가 스쳤는지 찌푸려지는 이연의 표정에 그는 얼굴을 굳히고 말았다.
그래, 내 너무 기뻐 깜빡할 뻔하였구나.
제 혼을 쏙 빼 놓는 이연 덕에 처리해야 할 것이 있음을 잠깐 잊었던 백경화가 몸을 일으켰다.
“계획을 조금 변경한다.”
“하명하십시오.”
허공에 던진 말에 놀랍게도 대답이 돌아왔다. 소리도 없이 백경화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이들은 부복한 채 이어질 명을 기다렸다. 백경화의 최측근이자 호위 중인 군사령들의 우두머리인 여선도 함께였다.
“유란가도 모두 씨몰살 시켜라. 그 시작으로 유란주호, 그치의 멱을 따야겠다.”
잠이 든 이연을 쓰다듬는 손길과 달리 하달되는 명령은 험악하기 그지없다. 오늘 일로 인하여 어느 정도 이 상황을 예상했던 여선은 터져 나올 것 같은 한숨을 삼키며 두 손을 들어 읍했다.
“아무래도 예의를 모르는 치니, 그에 따른 합당한 것이 좋겠지.”
“그리 준비하겠나이다.”
“대비에게 아주 멋진 선물이 되겠구나.”
피식, 웃음을 터트린 백경화가 뒤척이는 이연을 품으로 끌어당기며 등을 토닥였다. 주무소서, 전하. 토닥토닥, 부드럽게 이연을 재운 백경화가 다시 입을 열었다.
“쥐새끼들의 움직임도 더 자세히 살피고, 무엇보다 전하를 지키는 것에 만전을 기하라.”
“하명 받잡겠습니다.”
“이만 물러가거라.”
백경화에게만 닿도록 일제히 복명한 그들은 나타날 때 그러하듯 소리 없이 어둠에 녹아 사라졌다.
제자리로 돌아가던 여선의 시선이 흘깃, 잠들어 있는 이연을 향했다. 백경화의 품에 안겨 깊이 잠든 이연은 세간에서 말하는 어리고 나약하며, 힘없는 왕이 아니었다. 그는 전장에서 악명을 떨치던 이가 저 스스로를 개라 칭하게 만든 유일무이한 자였다. 비록 지금은 묶여 있다 하나 어마어마한 내공을 지닌 무인이 오롯이 마음 쏟는 상대였다. 이연이 청한다면 그 발아래 세상도 갖다 바칠 이가 바로 백경화였다. 당장 백경화의 명에 일어날 사병만 해도 수만이다. 그런 자가 우스운 꼴까지 자처해 가며 곁을 지키는데 어찌 힘없는 왕이란 말인가. 고작 내공만 묶으면 끝인 줄 알고 안심한 이들이 우스울 따름이었다.
그리고 이 사실을 간과한 이들은 훗날 피를 흘리며 후회하게 될 것이다.
아주 처절하게.
* * *
넓은 방 안에 퍼진 다향은 꽤나 강렬했다. 코끝을 자극하는 그것은 씁쓸하기도 했지만 향긋하여 그 깊이를 알 수 있었다. 잔을 들어 향을 음미한 뒤 한 모금 입 안에 머금었다 삼킨 대비의 입가에도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차가 마음에 드신 듯하여 다행입니다.”
“예. 향이 꽤 좋군요.”
소리 나지 않게 잔을 내려놓은 대비가 마주 앉아 있던 유란태진을 향해 웃으며 답했다. 그녀의 오라비이자 유란가의 현 가주이기도 한 그는 대비의 든든한 아군이기도 했다.
잠시간 소소한 대화를 나누던 그들 중 먼저 본론을 꺼낸 것은 대비였다.
“그래, 이리 절 찾아오신 용건이 뭡니까?”
“마마께서도 벌써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만.”
그 말에 대비는 말없이 웃어 보였다. 이미 여인으로서는 한참 진 나이이건만 여전히 미색 뛰어난 그녀의 미소 앞에 잠시 헛기침을 터트린 유란태진이 말을 이었다.
“이번 도총관 임명 건 말입니다. 적임인 자가 하나 있사온데…….”
“예, 말씀하세요.”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그리 운을 띄운 대비가 놓았던 잔을 들어 입가로 가져갔다. 여유롭고 나긋한 대비의 모습에 은근히 말끝을 흐리던 유란태진의 입가에도 미소가 감돌았다.
“여헌태가 어떠하실는지.”
“하지만 그이는 지난번 뇌물 건으로 인하여 파직된 자가 아닙니까.”
“누구나 실수는 한 번쯤 하기 마련 아니겠습니까, 마마.”
“글쎄요.”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린 채 피식, 웃어 보인 대비의 눈앞에 유란태진이 묵직한 함을 내밀었다. 대비의 처져 있던 나머지 한쪽 입꼬리도 곱게 말려 올라갔다.
“그이는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답니까?”
“이건 제가 마마께 바치는 것들이옵니다.”
큰일 나실 말씀 하십니다, 라며 점잖게 웃어 보인 유란태진이었으나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함의 출처는 알 만했다. 이것이 진정 누구의 주머니에서 나온 것인지. 손끝으로 함의 음각된 곳을 쓸던 대비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다음부턴 그이에게 때를 놓치지 말라 이르세요.”
“예, 이번 일로 그자도 정신 똑바로 차렸을 것이옵니다.”
“그러할지는 더 지켜봐야 알겠지요. 본디 머리 검은 짐승이란, 시간이 흐르면 잊기 마련인지라.”
웃으며 답한 대비가 함을 받아 제 옆에 놓았다. 그 묵직함에 더욱 대비의 눈이 빛났다. 한번 내치길 잘하였지.
흡족한 속내와는 달리 치켜뜬 눈매를 누그러뜨리지 않은 채 대비가 덧붙였다.
“오라버니께서 주신 선물은 잘 받았사오나, 그이에게 전하시길 이것으론 도총관은 무리고, 부윤으로 복직이나 시켜 준다 이르세요.”
“하오나 마마…….”
“혹 불평하거들랑 다음에 더 잘하라 이르시던가요.”
“…….”
대비의 말에 유란태진은 속으로 혀를 찼다. 그러나 대비의 말을 반박할 수는 없어, 그는 고개를 숙이며 알겠노라 답했다. 그 모습에 만족스레 웃어 보인 대비가 차를 들어 입을 축였다.
썩 기분이 좋아 보이는 그녀의 미소가 자취를 감춘 것은 유란태진의 뒷말이 있고서였다.
“하온데 마마. 요즘 궁 안에 꽤 재미난 소문이 돌더이다.”
“…….”
움찔, 다기 잔을 들고 있던 대비의 유려한 손끝이 굳었다. 쯧- 낮게 혀까지 찬 대비가 들고 있던 잔을 거칠게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무슨 소문 말입니까?”
“왕이, 주상 전하께서 공빈에게 푹 빠져 지낸다지요.”
“그게 무슨 큰일이라고요.”
별것 아닌 걸로 호들갑이라며 대비가 웃었다. 그 모습에 유란태진의 입가에 미묘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대로 두실 참이십니까?”
“두어야죠. 제가 무슨 힘이 있나요.”
그리 답한 대비가 실로 안타깝다는 듯 어깨를 늘어뜨렸다. 그 모습을 게슴츠레한 눈으로 바라보던 유란태진이 속으로 혀를 차며 고개를 내저었다. 도대체 무슨 속셈인지 알 수가 없다. 아무리 스스로가 자청했다 하나 백경화를 후궁으로 받아들인 것부터 시작해서, 무엇 하나. 능구렁이 수천을 품은 저 간악한 속내에 도대체 무엇을 숨기고 있단 말인가.
“그러다 큰일이라도 터지면 어쩌시려고 그러십니까, 마마.”
“큰일이랄 게 무엇 있습니까. 아무리 총애한다고 한들 중전보다 먼저 회임을 할 것도 아니고. 주상께서도 외로운 궁 안에 정붙일 이가 생겼으니 다행이지 않습니까.”
그 외로움이 달래지는 날, 나란히 흙이불 덮고 잠들겠지만 말입니다.
차를 마시듯 속엣말을 꿀꺽 삼킨 대비가 눈가를 접어 웃었다. 백경화가 가진 능력이 아깝기는 하나, 그 힘으로 그녀를 위협한다면 가차 없이 잘라 내야 한다. 그러니 눈엣가시 같은 것들 같이 묶어 놓는 것이 낫지.
“아무 걱정 마세요. 다음 말은 이미 준비되었지 않습니까.”
“그렇긴 합니다.”
대비의 말에 유란태진의 입가에도 흡족한 미소가 떠올랐다. 무슨 생각인지 긴 수염을 쓸고 있는 그의 눈가에 깊은 주름이 생겼다. 그것을 바라보며 마주 웃어 보인 대비가 남은 차를 입 안에 머금었다.
“그보다 성황제국의 황태자가 계승식을 앞두고 순례에 나선다던데 우리 쪽 준비는 잘되고 있는 겁니까?”
“모자람 없이 준비하고 있으니 아무 염려 마십시오, 마마.”
“그래야지요. 차기 황제가 되실 분이십니다. 만전을 기하세요.”
“예, 마마.”
유란태진의 말에 대비의 미소가 더욱 깊어졌다. 제화국과 달리 성황제국은 황제의 나라다. 강대국의 황태자란 직위는 약소국의 왕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자, 그런 이에겐 무엇을 내밀어야 성총을 받을 수 있으려나.
그 생각에 빠진 대비의 눈동자가 요사스러운 빛을 담고 반짝였다.
* * *
눈가를 간질이는 햇살에 잠겨 있던 이연의 눈꺼풀이 잘게 경련했다. 그것을 바라보며 설핏 미소 지은 백경화가 얼른 손을 뻗어 이연의 눈가에 드리운 햇빛을 가렸다. 그러자 한결 편안해진 표정의 이연이 달게 입술을 오물거린다. 그 모습에 백경화의 미소가 더욱 깊어졌다. 해가 뜬 지 한참이건만 숙면에 빠진 이연은 깨어날 생각을 않았다. 혹 어딘가 아픈가 싶어 마음을 졸였으나, 잠든 표정이 어찌나 평온한지 백경화의 근심을 단번에 날려 버렸다. 그 위력이 얼마나 컸냐 하면, 백경화가 꿈쩍도 하지 않고 앉아 정오가 다 되어 가는 시간까지 홀린 채 지켜볼 정도였다.
누군가 본다면 할 일 없다 혀를 찰 테지만 백경화에겐 행복하기 그지없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슬슬 허기가 질 터인데…….’
깨워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지만 이리 달게 자는데 깨우자니 죄를 짓는 기분이다. 이렇게 마음 놓고 자는 것이 이연에게 얼마 만의 일일까 싶어, 안쓰럽기도 하고.
그래도 굶으면 몸에 좋지 않은데. …재운 채 먹여 줄 방법은 없나?
잠시 백경화가 이런저런 ─바보 같은─ 고민에 빠진 순간, 떠지지 않을 것 같던 이연의 눈꺼풀이 들리고 까만 눈동자가 드러났다. 졸음기 남은 눈으로 깜빡깜빡 몇 번 눈을 감았다 뜬 이연이 손을 들어 눈가를 비볐다.
그 기척에 고민에서 빠져나온 백경화가 이연을 내려다보며 부드럽게 물었다.
“전하, 기침하셨나이까.”
“…….”
“전하?”
대답 없이 저만 멀뚱히 바라보는 이연의 모습에 백경화의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그러자 잠시 백경화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 내린 이연의 표정에 차차 못마땅함이 서렸다.
덜컹, 이연의 표정 하나에 마음이 내려앉은 백경화가 재빨리 제 모습을 머릿속에 그리며 물었다.
“소첩의 어디가 마음에 드시지 않으시는지요, 전하?”
“…그대, 또 꽃단장하였군.”
“꽃…….”
꽃단장……. 백경화는 이연의 말에 어쩐지 머쓱해져서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어여쁘단 말씀이신가? 그러나 그것이 칭찬이 아니었음을 깨달은 것은, 이연이 등을 보이고 팩- 돌아누웠을 때였다. 그것은 완벽한 외면이었다.
쾅! 머릿속에서 폭약 터지는 소리를 들으며 백경화가 조금은 아연한 낯으로 이연의 몸 위에 팔을 둘러 넘겨 짚은 뒤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이미 이연은 머리 위까지 이불을 덮어쓴 뒤였다.
“전하, 소첩의 무엇이 성심을 그르치는지 말씀해 주소서. 바로 고치겠나이다.”
“…….”
“머리 모양이 마음에 드시지 않으시는지요? 아니면 의복 색이 저어하시는 색이옵니까?”
“…….”
“아, 오늘은 살짝 분칠을 하였는데 그 향이 싫으신 게지요? 당장 지우고 오겠습니다!”
더 이상 들어 볼 것도 없다, 백경화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단걸음에 내실을 빠져나가려는 백경화의 치맛단을 꾹, 잡은 이연이 이불 안에서 한숨을 폭 내쉬었다. 그러자 다시 제 위로 팔을 넘겨짚고 얼굴을 보기 위해 고개를 기울이는 백경화의 기척이 느껴졌다. 슬금슬금, 백경화의 손에 의해 내려가는 이불을 굳이 잡지 않은 채 이연은 저를 내려다보는 백경화를 마주 보았다.
“전하, 말씀하여 주소서. 바로 시정하겠나이다.”
“그냥… 그냥 그런 것이니 마음 쓰지 말거라.”
이것도 변명이라고. 어디 가서 거짓말하지 마세요, 전하.
백경화는 이연의 우물거림 섞인 말에 속으로는 웃으면서도 겉으론 우울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 침울한 모습에 결국 이연은 속내를 고백하고 말았다.
“그냥… 나는 갓 일어나 꼬질꼬질한데… 그대만 반짝거리는 것이.”
“소첩 눈엔 전하는 항상 눈부시옵니다. 조만간 소첩 눈이 멀면 전하가 책임지소서.”
쾅쾅쾅! 난데없이 들려온 못 박는 소리에 깜짝 놀란 이연은 백경화의 말을 제대로 음미하지 못했다. 참말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부끄러움과 민망함에 몸을 꼬고 이불 속으로 다시 숨어들었을 터이니 말이다. 이연의 신경을 자극한 소리의 출처는 곧 밝혀졌다.
“여선아, 시끄러우니 머리는 나중에 박거라.”
“응? 여선이 낸 소리인 게야?”
친히 웃으며 밖을 향해 경고한 백경화의 말에 그제야 소리의 정체를 깨달은 이연이 얼떨떨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에 가볍게 소리 내어 웃은 백경화가 대답할 생각은 않고 더욱 고개를 기울였다.
“그런데 소첩은 전하께 어여뻐 보이고 싶어 그러한 것인데 그리 말씀하시오면 섭섭하옵니다.”
“…기뻐 보인다만.”
자신의 말대로 이연을 내려다보고 있는 백경화의 얼굴은 활짝 피어 있었다. 그에 미심쩍은 얼굴로 바라보자 백경화가 더욱 환히 웃으며 이연을 향해 말했다.
“나중에 전하께서도 갓 일어난 소첩에게 어여쁘다 말씀해 주실 때가 얼른 왔으면 좋겠나이다.”
진심을 담아 전해 오는 백경화의 말에 잠시 눈동자를 굴리던 이연이 불쑥 물었다.
“혹, 잠투정이 심하여 머리가 산발이 되느냐?”
“누운 자세 그대로 잠드나이다.”
“베개를 타액으로 적신다든가…….”
“아무리 곤하여도 입 꾹, 다물고 자옵니다.”
“그럼 내일부터 나랑 같이 일어나자꾸나.”
물음에 따박따박 답하면서도 백경화는 결론짓듯 이어진 이연의 말에 제법 놀라고 말았다. 살짝 커진 백경화의 두 눈을 바라보며 이연이 자못 진지하게 덧붙였다.
“머리가 산발이 되고, 입가를 하얗게 침질해 놓아도 참아 주려 했는데… 그것들 모두 아니면 별문제 없구나. 실로 안타깝도다. 더 나쁜 모양새 없느냐?”
“…….”
장난스럽게 반짝이는 이연의 검은색 두 눈을 바라보며 백경화가 달큰한 한숨을 내쉬었다. 단단하게 무장한 그의 가슴이 준 만큼, 아니 그보다 더 돌려주는 이 애정에 사정없이 떨렸다.
그것을 감추듯 부러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은 백경화가 이연을 향해 말했다.
“그리 말씀하시오면 소첩 기강이 해이해져 당장 내일 아침부터 늦장을 부릴지도 모르옵니다.”
“어쩔 수 있느냐. 봐주마.”
“사실 소첩에겐 전하를 꼭 안고 자야 깊이 잠드는 버릇이 있사온데 괜찮으실는지요.”
“잠투정 한번 요란하구나. 그래도 못 해 줄 것 없으니 딴것 한 번 더 말해 보라.”
“그리 잠들면 전하께서 입 맞춰 주시기 전까진 소첩 아니 깰 터인데…….”
“잠꾸러기 후궁을 위해 내 이 입술 못 내어 줄 것도 없지.”
더 없느냐? 말갛게 저를 올려다보는 이연을 마음에 새기듯 눈에 담던 백경화가 살며시 두 눈을 내려 감으며 입술을 내밀었다.
“그럼 전하, 소첩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이 안 가오니 구분 좀 하게 입 좀 맞춰 주시면 아니 될는지요.”
“어쩌면 좋으냐. 그것도 못 해 줄 것 없으니… 큰일이로다.”
촉, 짧게 닿았다 떨어지는 이연의 휘어진 입술을 따라가 한 번 더 머금었다 놓은 백경화가 속삭였다. 전하, 혀를 이렇게 내밀어 보세요. 이렇게? 네, 잘하셨습니다. 덥썩, 위험한 것도 모르고 내민 작은 혀를 쪽쪽 물어 빤 백경화가 놀라 경직된 것을 달래듯 이불에 닿아 있는 이연의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 위로 몸을 지탱하여 엎드리곤 작은 혀를 비비며 감촉을 즐기던 백경화의 입술이 떨어진 것은 한참이 지난 뒤였다.
하아. 깊은숨을 내쉬자 여전히 그 몸 위에서 백경화가 속닥거렸다. 전하, 꿈이 아닌 것을 확인하여 소첩 너무 기쁘옵니다. 명일부터 눈떠도 전하 곁에 꼭 붙어 있으려니 기침하시고 놀라시면 아니 되십니다, 전하.
오냐, 알았느니. 마찬가지로 속닥거림으로 답한 이연이 낮은 웃음을 흘리며 백경화의 품을 파고들었다. 그 기세에 밀려 이연의 옆에 눕고 만 백경화가 조금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만 기침하시어야지요, 수라 거르시면 아니 되십니다.”
“졸립다.”
“그럼 수라 받으시고 주무소서.”
“그놈의 수라 한 끼 걸러도 안 죽는다.”
“그런 말씀 마시옵고…….”
벌써 눈을 감고 있는 이연의 모습에 백경화가 불편치 않게 그 몸을 받치면서도 포기를 모르고 연신 중얼거렸다. 그러자 이연이 눈을 감은 채 손을 들어 백경화의 가슴을 토닥였다.
“너도 자거라.”
“…….”
토닥토닥, 제가 해 주었던 것처럼 잘 자라며 가슴을 두드리는 이연의 손에 결국 백경화는 백기를 들고 말았다. 그는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점차 느려지는 이연의 손길에 몸을 맡긴 채 눈을 감았다. 이리 약해서 어쩌누. 그러면서도 바짝 끌어안은 이연의 이마에 입술을 묻는 백경화의 얼굴엔 미소가 한가득이었다.
두 개의 고른 숨소리가 햇빛 든 방 안을 울리기 시작한 것은 얼마 가지 않아서의 일이다.
* * *
이연의 손바닥에 난 상처의 회복 속도는 무척이나 더뎠다. 꽤 깊이 베인 탓도 있었으나, 가장 큰 이유는 오랜 시간 쌓인 독소 탓에 이연의 자가 치유 능력 자체가 일반인보다 현저히 떨어지기 때문이다. 본디 건강체가 아닌 탓도 있겠지만 정기적으로 복용한 독차가 문제란 것을 알고 있는 백경화는 새삼 대비를 향해 이를 갈았다.
그라면 벌써 말끔히 아물고도 남았을 시간 동안, 백경화는 이연을 극진히 간호했다. 이것 필요하시냐, 저것 드리오리까, 필요한 것 모두 소첩이 해 드리겠다며 백경화는 한시도 그 곁을 떠나지 않았다. 식사 시중도 모두 저가 직접 들면서 이연이 손끝 하나 움직일라치면 생난리를 쳐 댔다. ‘전하, 상처가 덧나십니다!’ 소리치며 아프지 말라 손바닥에 대고 호호- 유난스레 입바람을 불었다. 그쯤 되면 이연도 화가 날 법하건만 외려 간질간질한 입바람에 어깨를 움츠리고 키득이기 바빴다.
“간지러우십니까?”
“간지럽다.”
이연이 손가락 끝을 움칫거리자 또 그것을 입 안에 넣고 아프지 않게 깨문 백경화가 다시 물었다.
“이제 덜 간지러우시지요?”
“더 간지럽구나.”
이연은 백경화에게 손가락을 내어 준 채 더욱 어깨를 들썩였다. 그러자 씨익, 웃어 보인 백경화가 짐짓 엄중한 얼굴로 말했다.
“전하, 간지럽다는 것은 이런 것을 말함이옵니다.”
으응? 이연이 눈으로 되묻는 순간 잡고 있던 그의 작은 손을 놓아준 백경화가 이연의 몸을 답싹 끌어안고 간질이기 시작했다. 불경한 행동이었으나, 정작 그 불경에 대해 문책해야 할 이가 그 손에 자지러지고 있으니 이미 말 다 했다.
그만하라, 눈물까지 머금은 이연이 크게 웃으며 백경화에게서 벗어나고자 몸을 뒤틀었다. 그러나 쉬이 놓아줄 백경화가 아니었다. 벗어나면 벗어나는 만큼, 물러서면 물러서는 만큼 따라가며 이연의 입에서 웃음소리를 뽑아내던 백경화의 입가에도 짙은 미소가 맺혔다.
그리 한참 이리저리 끌어안고 뒤척이다 얼떨결에 이연의 귀 뒤쪽에 백경화의 입술이 닿은 순간이었다.
“……!”
그 순간 발끝까지 타고 흐르는 전율에 대경한 이연이 백경화를 피해 물러서다 병풍에 부닥쳤다. 악! 소리와 동시에, 그들 위로 무너지는 병풍을 확인한 백경화는 놀란 마음 진정시키기도 전에 먼저 몸부터 날렸다.
순식간에 이연의 몸을 덮고 쓰러지는 병풍을 몸으로 받은 백경화는 소란스러운 소리에 궁녀들이 달려 들어올 때까지도 이연의 몸을 살피기 바빴다.
“전하, 괜찮으십니까? 어디 다치신 데는 없으신지요?”
“괘… 괜찮다. 조금 놀라긴 했다만… 그대는 괜찮으냐?”
“소첩은 전하만 무사하시면 아무렇지도 않사옵니다.”
그리 답하면서도 백경화는 이연의 몸이 어디 상한 곳은 없는지 샅샅이 살폈다. 궁녀들이 다시 병풍을 세우고 괜찮으시냐 묻는 것엔 답할 생각도 않고 시간을 들여 이연의 몸을 살핀 그는, 다친 곳이 없는 것을 제 눈으로 확인하고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백경화의 호들갑이 민망하여 진즉에 궁녀들을 밖으로 물린 이연이 말했다.
“괜찮대도 그런다. 나보다 그대가 더 큰일이지 않느냐. 아픈 곳은 없느냐?”
“소첩은 괜찮사옵니다. 심려치 마옵소서.”
제 몸을 살필 때와는 달리 본인의 안위는 건성으로밖에 챙기지 않는 백경화의 모습에 이연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작은 손을 들어 병풍에 부닥친 백경화의 머리를 쓸던 이연의 눈이 게슴츠레해졌다.
“여기 이 뽈록한 것이 혹 같으네만.”
“…아프지 않사옵니다.”
“그러신가.”
콕콕콕, 부러 이연이 뿔뚝하니 일어난 곳을 찌르자 백경화가 설핏 곤혹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나 이제 와서 아프다, 그만하시라 할 수는 없어 그는 얼른 말을 돌렸다.
“그보다 전하, 어찌하여 그리 놀라신 것인지요. 소첩이 상처 난 곳을 건드리기라도 하였나이까?”
“…….”
그러자 이번엔 이연의 낯이 곤혹스럽게 물들 차례였다.
그에 더욱 의아해진 백경화의 눈에 의문이 서리자, 얼른 손을 내린 이연이 시선을 피했다. 어찌 그런 것을 말해. 살짝 달아오른 눈가로 말을 삼키듯 입술을 씹고 있는 이연의 모습을 보고서 백경화가 가만히 물러설 리가 없었다.
“전하, 어찌하여 그러신 것인지요. 소첩 궁금하나이다.”
“별것 아니네.”
“전하~.”
말끝을 끌며 이연을 끌어당겨 안은 백경화가 애교를 피우듯 이연의 얼굴에 쪽쪽 입 맞추기 시작했다. 이리해도 말씀 안 해 주시렵니까? 이리해도? 쪽쪽쪽, 얼굴 곳곳에 내려앉는 백경화의 입술을 곤혹스러워하면서도 이연은 번지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어허~ 그만하지 못할까, 짐짓 엄하게 꾸중해 보았으나 백경화의 입맞춤 세례는 좀처럼 끝나지 않았다. 결국 또 한 번 백경화의 입술이 귀 뒤쪽에 닿고, 자지러진 이연이 한 차례 더 병풍을 넘어뜨린 후에야 백경화가 물러섰다. 쓰러지는 병풍에 또 한 번 머리를 내어 주어 혹을 하나 더 달고도 무엇이 그리 좋은지 백경화는 한참을 소리 죽여 웃었다. 이연이 왜 그런 반응을 하였는지 깨달은 탓이다.
그런 백경화를 이연은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울상을 지은 채 원망스레 바라보았다.
달짝지근하고 평화로운 나날이었다.
그리되니 남는 것은 나날이 말라가는 여선이, 그 하나뿐이었다.
* * *
“전하, 이것 좀 보십시오. 모두 깨끗이 아물었나이다.”
“그렇구나.”
“흉터가 남지 말아야 할 터인데…….”
“그럴 것이다.”
안타깝게 제 손바닥을 내려다보며 그리 운을 떼는 백경화를 향해 이연이 미소 지었다. 기실 흉터 따위야 남으면 어떤가 싶었지만, 저를 소중히 여기는 백경화의 말이 좋았다.
거의 살이 붙어 새살이 돋아난 손바닥에 준비한 약을 살살 펴 바르고 얼른 나아라 호호 입바람을 분 뒤 백경화는 새 천을 꼼꼼히 감았다. 그다음 이어질 그의 행동을 예상한 이연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말끔하게 새 천을 감은 이연의 손바닥에 한 번, 다른 쪽 손바닥에도 한 번 쪽쪽 입 맞춘 백경화가 고개를 들자 기다렸다는 듯이 이연이 얼른 입술을 내밀었다. 그러자 새가 날아들듯 그 위로도 쪽, 백경화의 입술이 내려앉는다.
“소첩이 입 맞출 줄 어찌 아셨사옵니까?”
“항시 그리하지 않았느냐.”
이연의 말대로였다. 그동안 이연의 상처를 봐 온 백경화는 꼭 손바닥에 한 번씩, 마지막으로 이연의 입술에 입 맞추었다. 처음엔 당황하였으나 이쯤 되면 알아서 입 내밀어 줄 때도 되었다. 그러다 문득 깨닫는 것이다. 아아… 좋구나. 행복하구나 하고. 한 사람으로 인해서 이리 가슴이 묵직해질 정도로 행복할 수도 있구나 하고.
그 생각에 이연은 더욱 미소 지었다.
눈매를 좁힌 채 소리 내어 웃는 이연의 모습을 눈에 담으며 백경화도 마주 웃었다.
가슴 뛰게 이 아이가 왜 이리 곱게 웃나.
“전하, 소첩 가슴이 뛰나이다.”
“…….”
제 말을 증명하듯 이연의 두 손을 제 손으로 잡고 가슴에 붙인 백경화가 속삭였다. 전하가 너무 좋아서, 가슴이 요동치나이다.
“…….”
그 말에 눈가를 붉힌 이연이 부끄러운 듯 잠시 시선을 내렸다가, 손을 타고 느껴지는 백경화의 심장 소리에 다시 고개를 들었다.
“멀어서… 잘 들리지 않는다.”
“이리 오소서.”
백경화는 환히 웃으며 이연을 제 가슴 쪽으로 끌어안은 뒤 동그란 정수리에 고개를 묻었다.
“이제 잘 들리시지요?”
“…그래, 그렇구나.”
이연은 그 품에 안긴 채 요란스레 울리는 심장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는 두 눈을 감았다. 손끝이 떨렸다. 가슴이 너무 벅차서 어쩐지 조금 눈물이 날 것도 같아 이연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 비참하게 목숨 연명해 온 선물이 이런 것이라면… 더욱더 비참해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이리 빨리 뛰면 어쩌누. 어디 아픈 건 아니지?”
“안심하소서. 전하 앞에선 이게 정상이옵니다.”
이연은 나른하게 귀를 파고드는 백경화의 속삭임을 바로 지척에서 들으며 두 눈을 내리감았다. 콩닥콩닥 빠르게 뛰는 백경화의 심장 소리에, 점차 제 심장 소리가 겹쳐지는 것을 느끼며.
* * *
이연은 오랜만에 찾은 태근전 침전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지난 8년간 기거해 온 침전인데도 불구하고 너무나 낯설게만 느껴졌다. 공기를 떠도는 싸늘함이 마치 낯선 타인을 배제하는 것만 같아 이연은 잠시 숨을 죽여야만 했다. 언제 무너졌냐는 듯 제 모양을 갖춘 방 안은 그가 떠났을 때와 다름이 없었다. 여전히 넓고, 사치스러우며, 숨 막히는 곳이었다. 열병이 난 그 밤, 후궁전 백경화의 침소에서 눈을 떴을 때 태근전의 축이 무너졌다는 얘기를 듣고도 와 보지 않은 곳이다. 그런 곳을 이연이 오랜만에 걸음 한 이유는 찾을 것이 있어서였다.
“…….”
이연은 움직이지 않는 발을 떼어 한 걸음 더 내실로 들어섰다. 발끝을 타고 흐르는 냉기에 잠시 멈추긴 하였으나, 이연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춥다 느끼는 것은 그의 기분상 문제일 뿐이란 것을 안다. 후궁전에 비할 곳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후궁전에서 느끼는 안락함 따윈 찾아볼 수 없는 곳이 이곳이다.
하지만 언젠가, 그가 다시 돌아와야 할 곳도 바로 여기였다.
‘그 전에 죽어 나자빠질지도 모르지만.’
픽, 헛웃음 터트린 이연이 잘게 진저리 치며 방 한곳에 놓여 있던 작은 함 앞에 섰다.
이쯤이었을 텐데…….
서랍을 열어 그 안에 묵혀 있던 비단 주머니를 꺼낸 이연은 끈을 풀어 안에 들어 있던 것을 손바닥에 부었다.
툭, 꽤 묵직한 소리와 함께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을 살피던 이연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이연은 제 온기를 나눠 주듯 그것을 한번 손안에 쥐었다 풀었다. 어디 상할세라 비단 주머니 안에 조심스럽게 넣고, 그 주머니를 소매에 담은 그는 미련 없이 돌아섰다.
들어갈 때와 달리 단번에 내실을 가로질러 문 앞에 서자, 첫 번째 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차례로 열리는 문들을 지나 밖으로 나온 이연의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온 이는 대기하고 있던 백경화였다.
부득불 따라오겠다던 그는 여선과 후궁전 궁녀들을 뒤에 단 채 제가 들어갔을 때의 모습 그대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시 돌아오지 않으면 어쩌나 전전긍긍하던 그의 모습이 떠올라 이연은 속으로 웃고 말았다.
이 궁 안, 그가 갈 데가 어디 있다고 저리 안달일까.
“전하.”
이연이 모습을 드러내자 언제 얼굴을 굳히고 있었냐는 듯 만개한 꽃처럼 웃어 보인 백경화가 신을 신고 있는 이연에게로 잽싸게 다가섰다.
”내 뭐라 했느냐. 금방 끝난다 하지 않았느냐.”
“한시도 떨어지고 싶지 않은 소첩의 마음도 헤아려 주소서.”
듣는 이도 많건만 부끄러움도 없이 그리 고한 백경화가 방긋이 웃으며 이연의 옆에 섰다. 손이라도 덥석 잡을 줄 알았건만, 그래도 후궁전 밖이라고 나름 내외하는 백경화의 모습에 이연은 속으로 웃었다. 어찌할까. 잡아 줄까, 말까.
미련이 뚝뚝 묻어나는 백경화의 시선이 제 손에 닿아 있다는 것을 모를 리 없는 이연의 입가에 짓궂은 미소가 맺혔다. 그리고 막 무어라 입을 열려던 순간, 그의 시야에 다른 누군가가 잡혔다. 동시에 이연의 입가에 지어져 있던 미소는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다.
마찬가지로 누가 보든 말든, 후궁전 밖이든 말든 날름 손잡을까 말까 고민하고 있던 백경화의 눈동자에 예기가 서렸다. 그 순간 이연의 걸음이 멈추었고, 자연스레 그 뒤를 따르던 무리들의 걸음도 멈추었다.
그런 그들을 향해 다가온 이가 먼저 고개를 숙여 이연을 향해 인사를 건넸다.
“전하, 그동안 강녕하셨는지요?”
“…오랜만이오, 왕비. 무탈하셨는가.”
“예, 전하. 실로 오랜만에 뵙나이다.”
이연을 향해 그리 웃으며 답한 유현왕비의 시선이 흘깃 백경화를 향했다.
저를 보고도 뻣뻣이 고개 들고 서 있는 백경화의 모습에 왕비가 미간을 찌푸리며 탐탁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대는 어찌 나를 보고도 인사 한마디 없는가. 아직 궁중 예법을 익히지 못한 게냐?”
“공빈 백경화가, 왕비마마께 인사 올리옵니다.”
유현왕비의 말에 백경화가 자연스럽게 미소 지으며 절도 있게 고개를 숙였다. 모자람도 더함도 없는 전형적인 인사에 유현왕비의 얼굴이 더욱 굳었으나 이어진 이연의 말엔 급히 입을 다물었다.
“그러는 왕비의 사촌 오라비는 나를 보고도 어찌 한마디 말도 없소이까.”
“…….”
이연의 지적에 유현왕비보다 얼굴을 굳힌 것은 그녀 곁에 서 있던 유란주호였다. 그런 그를 훈계한 것은 유현왕비였다.
“전하의 말씀이 맞습니다. 어서 전하께 인사 올리세요.”
“…소신 유란주호가 주상 전하께 인사 올리옵니다. 천세, 천세, 천천세.”
“그 인사 한번 받기 참으로 힘들구나.”
“송구하옵니다.”
두 손을 들어 읍한 유란주호가 숙였던 허리를 들어 올리자 이연의 말이 이어졌다.
“뭐 하시는가? 공빈에게도 인사 올리지 않고.”
“……!”
“전하!”
짧게 이연을 소리쳐 부른 것은 유현왕비였다. 그러나 이연은 표정의 변화 없이 그녀를 향해 천연덕스럽게 되물었다.
“왜 그러시오. 왕비가 찾던 궁중 예법이 그러한 것을.”
“전하!!”
“…….”
조금 더 커진 유현왕비의 말에도 불구하고 이연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유란주호는 백경화에게도 인사를 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연의 말 중 틀린 것 하나 없었던 탓이다.
“소신 유란주호가 공빈마마께 인사 올리옵니다.”
딱딱하게 굳은 목소리가 정중함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경화의 입가에 지어진 미소는 매우 흡족했다.
답 없이 그저 눈짓으로만 인사를 받은 백경화가 고개를 들고 목도한 것은 표독스럽게 변한 유현왕비의 눈이었다.
“공빈께선 참으로 좋으시겠소. 전하께서 이리 공빈을 위해 주니 말이오.”
“감읍할 따름이옵니다.”
백경화의 대답에 속으로 코웃음 친 유현왕비가 무표정한 얼굴로 힘없이 서 있는 이연을 돌아보았다.
“전하, 태근전의 수리가 끝났사온데 언제까지 공빈의 처소에서 머무실 요량이시옵니까?”
왕비의 말에 몸을 굳힌 것은 이연보다 백경화였다. 이번엔 어디를 무너뜨려야 하나─ 고민도 잠시, 이연이 유현왕비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것은 내 알아서 정할 일이니 왕비는 신경 쓸 필요 없소.”
“전하, 너무 후궁만 총애하시면 나라의 기강이 흔들리는 법이옵니다.”
“그것이라면 걱정할 것 없지 않소?”
나에겐 나라를 흔들 만한 힘이 없으니.
이연의 소리 없는 뒷말을 들은 유현왕비가 혀끝을 깨물었다. 이연은 항상 그랬다. 대비의 말을 한마디 반항 없이 따르며 내내 웃다가도 가끔 돌아보면 저리 자조했다. 그리해선 안 된다. 그는 대비의 인형으로 남아 있어야만 했다.
“전하, 저 또한 전하의 여인이옵니다.”
“…….”
흠칫! 유현왕비의 말에 반응한 것은 백경화였다. 잊고 있었던 무언가를 자각한 이처럼. 불안하게 뛰는 심장을 달래며 이연을 돌아본 백경화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한쪽으로 치켜 올라간 이연의 입술 끝이 유난히도 시리게 느껴졌다.
“글쎄. 어떨는지.”
진득하게 비틀린 이연의 미소는 백경화는 물론 유현왕비와 유란주호, 나아가 거기 있는 모든 궁인들이 처음 보는 것이었다. 그만치 이연의 입가에 지어진 미소는 싸늘했다.
“왕비는 어마마마의 가장 큰 기대주가 아니시오.”
그리 덧붙인 이연은 언제 뒤틀린 비웃음을 지었냐는 듯 유현왕비를 향해 덧붙였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유현왕비가 한 차례 몸을 떨었다가 급히 입을 열려던 때, 이연이 먼저 말했다.
“그러니 총애할 이는 내가 정하겠소.”
“…전하, 후회하실 것입니다.”
유현왕비의 말에 이연은 대답 없이 무심한 걸음으로 그녀를 스쳐 지나갔다.
후회는 항상 했었다. 선택받아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순간부터 지금까지, 끝없이. 그럼에도 죽고 싶지 않아 모른 척 외면했다. 그러니 후회란 이연에게 있어 한 몸과도 같은 존재였다. 바로 지금 이 순간도 후회로 남을 테니.
그렇지만 단 하나, 죽는 날이 오더라도 후회하지 않을 무언가가 있다면, 그것은 지금 잡고 있는 이 손 하나뿐일 것이다.
“전하, 안아 봐도 되겠습니까?”
후궁전에 돌아오고, 이연이 가장 먼저 들은 말은 그것이었다.
안아 봐도 괜찮겠습니까.
그렇기에 이연의 대답은 이미 나와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슬그머니 두 손을 들어 보이자 백경화가 얼른 이연을 안아 들었다. 다리가 뜰 정도로 이연의 몸을 꼭 끌어안은 백경화가 잔뜩 낮아진 목소리로 속삭였다.
“전하, 연모하고 있나이다…….”
“알아.”
그래서 나도 힘이 나. 조용히, 될 수 있는 한 조용히 묻혀 살아야 한다는 걸 아는데, 그대가 수모를 당하니까 내가 치욕을 당하는 것보다도 화가 났어. 그리하면 안 되는데…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나도 모르게.
이연은 미소 지으며 백경화의 등에 팔을 둘러 안고 맹세했다.
“그댄 나처럼 되지 않게 해 줄게. 내가 아무리 힘없고 처량맞더라도… 나를 선택해 준 그대는 그리되지 않게 해 줄 테야. 그댄 나를 지켜 준다 하였지만… 나는 그대가 그대를 지켰으면 좋겠어.”
“그것이… 전하를 지키는 일이옵니까?”
“그래.”
망설임 없이 돌아온 대답에 백경화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러다 이연의 목덜미에 고개를 묻으며 입을 열었다.
“그러면…….”
그리하면…….
“소첩은 둘 모두 지키겠나이다.”
그리하겠나이다. 전하를 지키는 것이 그것이라면, 소첩 먼저 살려 주셔야지요. 전하께서 안온하게 웃고 계시기만 하면, 그것이 이 백경화를 지키는 일이 될 것입니다.
백경화는 속엣말을 삼키며 상석에 이연을 내려놓고는 그 곁에 앉았다. 그럼에도 떨어지지 않은 두 몸은 틈 하나 없이 마주 닿아 있었다.
“그대, 또 심장이 빨리 뛰어.”
“정상이옵니다.”
이연은 그 말에 낮은 웃음을 흘리며 또 한참을 안겨 있었다. 이렇게 둘만 있을 수 있다면 참으로 행복할 텐데… 그럴 수 없다는 것에 가슴이 아렸다.
‘참말로 내가 너를 지켜 줄 수 있으면 좋으련만…….’
이연은 저 하나 보고 모든 것을 버리고 이 지옥으로 걸어 들어온 백경화가 부디 평안하기를 바랐다.
그런 제 자신의 바람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 깨달은 것은 얼마 가지 않아서의 일이다.
* * *
백경화는 차게 식은 머리로 중궁전에 들어섰다. 오수에 잠긴 이연에게 무릎을 내어 주고 머리를 쓰다듬으며 제 나름대로 유희를 즐기고 있던 그에게 난데없는 불청객이 든 건 한 식경 전의 일이었다.
‘왕비마마께오서 찾으신다 합니다.’
후궁전 내실에 발조차 붙이지 못한 중궁전 지밀상궁의 전언은 그러했다. 여선을 통해 이를 전해 들은 백경화는 차게 식은 눈으로 닫힌 문밖을 바라보다 달게 잠든 이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곧 찾아뵙는다 전하여라.’
중궁전 상궁의 얼굴을 보지도 않은 채 그리 답변한 백경화는 잠시 멈췄던 손을 놀려 이연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어찌하여 저를 찾는지는 모르나, 이연이 잠든 사이에 끝낼 참이다.
조심스레 이연의 머리를 솜털로 그득 채운 폭신한 베개에 옮겨 준 뒤 백경화는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옮겼다.
얼마 전 마주쳤던 유현왕비를 생각했을 때, 필시 좋은 일은 아닐 터였다. 그렇다 해서 겁먹을 백경화가 아니었다. 오히려 조금 가소롭기까지 한 것을 숨긴 채 백경화가 문을 지키고 서 있는 상궁을 향해 안에 기별을 넣으라 고갯짓했다. 오만방자한 후궁의 작태에 이를 짓씹던 상궁이 곧 내실 안에 공빈마마 드셨노라 고해 올렸다.
“들라 하라.”
단번에 돌아온 대답에 궁녀들이 문을 열었다. 그 안으로 망설임 없이 들어서던 백경화의 걸음이 멈춘 것은 생각지도 못했던 존재와 마주하고 나서였다.
보료에 앉아 갓 내실로 들어서는 백경화를 맞이한 것은─ 우아하게 찻잔을 기울이고 있던 대비였다.
“어서 오시게, 공빈.”
“…강녕하셨는지요, 마마.”
“이 늙은이야 별 탈 있으려고. 들어오시게.”
“…….”
그대로 서서 잠시 대비를 가라앉은 눈으로 내려다보던 백경화가 마음을 다스리듯 두 눈을 감았다 떴다. 그는 걸음을 옮겨 상석에 앉은 대비를 향해 절을 올렸다. 흐트러짐 하나 없이 정갈하게 절을 올리고 그는 대비의 앞에 마주 앉았다. 그런 백경화를 향해 대비가 날카롭게 일갈했다.
“누가 앉으라 하였다고 그리 털썩 앉누?”
“…….”
대비에게서 시선을 비켜 고개를 숙이고 있던 백경화의 얼굴이 느릿하게 들렸다. 그것을 바라보면서 대비가 온화하게 미소 지으며 덧붙였다.
“왕비에게 듣긴 하였지만 궁중 예법이 아주 엉망이구나. 공빈은 절부터 다시 올려 보거라.”
“…….”
하아- 문득 입 밖을 뚫고 흘러나오는 한숨을 삼키며 백경화는 대비의 말대로 다시 일어서 절을 올렸다. 흔들림 없이 이어지는 몸짓은 물 흐르듯 매끄럽고 단아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대비의 반응은 마찬가지였다.
“다시.”
“…….”
스륵, 백경화는 말없이 일어나 다시 절을 올렸다. 차갑게 가라앉은 아름다운 얼굴에는 어떠한 감정도 떠올라 있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나 퇴짜를 놓고, 맞았을까.
평범한 여인이라면 무릎이 후들거리고 주저앉았을 법한 시간이 지난 뒤에야 앉아도 좋다는 대비의 허락이 떨어졌다.
백경화는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안색으로 대비의 앞에 우아하고도 단아하게 마주 앉았다. 언제 혹독한 인사법을 배웠냐는 듯 그의 얼굴은 여전히 곱고 아리따웠다. 같잖은 괴롭힘도 상대를 봐 가며 해야 하는 법이었다. 그 모습이 얄미운 만도 하건만, 대비는 물론 곁에 앉아 상황을 지켜보던 왕비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비릿한 고소였다. 비록 높은 무위 덕에 그 몸이 괴롭지는 않을 것이나 사내로서의 자존심에 금이 갔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한 탓이다.
그리 말없이 조롱했다. 네가 우습게 보고 들어온 자리가 그러한 것이라고.
“그래, 궁은 지낼 만하신가?”
“…예, 편히 지내고 있사옵니다.”
백경화는 두 눈을 내리깔고 그리 답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대비가 눈을 게슴츠레 떴다가 직접 준비한 차를 따라 건네었다.
“하긴 주상의 마음을 얻었으니 무엇이 두려울꼬.”
“…….”
묘하게 비아냥거리는 대비의 말에 백경화의 눈썹 끝이 치켜 올라갔다가 제자리로 내려왔다. 이 자리가 언짢고 심기 불편하더라도 현재 그의 직분으로는 이 모든 것을 감내해야만 했다. 절로 검을 찾아 헤매려는 손끝을 다잡으며 백경화는 더욱 고개를 조아렸다.
그 모습을 눈에 담은 대비가 후룩,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
“그래, 공빈은 언제까지 주상을 그대의 침전에 붙잡아 두고 있을 셈이오?”
“…전하의 발길을 어찌 소첩 따위가 정하겠나이까.”
그저 원하시니 머무실 뿐이지요. 묘하게 삼켜진 말을 대비는 물론 왕비가 못 알아들을 리 없었다. 허, 이것 봐라. 잔에 닿아 있던 대비의 입술이 비릿하게 뒤틀렸다.
“주상께서 공빈에게만 성총을 내리고 계시면 마땅히 후궁 된 도리로 간언을 올려야지.”
“소인은 아직 전하의 성총을 모두 받지 못하였나이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세월이 아무리 흐르더라도 이연이 주는 총애가 만족스럽지는 않을 것이다. 받아도, 받아도 모자라다 욕심낼 저를 알기에 백경화는 확신했다.
맹랑한 백경화의 대답에 속으로 기가 막힌 웃음을 터트린 대비가 잔을 거칠게 내려놓으며 소리쳤다.
“욕심이 과한 것 아니오, 공빈! 후궁이 그리 과욕을 부려서야 아니 될 일. 투기 또한 칠거지악임을 모르지 않을 터인데.”
“마마, 소인이 전하 한 분만 보고 이 궁에 들었음을 부디 헤아려 주시옵소서.”
백경화는 대비의 질책에도 불구하고 전혀 물러서지 않았다. 그 모습을 잠시 노려보던 대비가 반박했다.
“어떤 이유로든 내궁에 들었으니 내명부의 품계에 따르시게. 어찌 홀로 전하를 독차지하려 하는가. 그대는 후궁이고, 전하의 정비는 여기 유현왕비일세. 더군다나 공빈은 원자 아기씨도 갖지 못할 사내의 몸이 아닌가.”
“…….”
이연을 내놓아라, 그리 말하고 있는 대비의 말에 백경화의 두 눈에 옅은 살기가 흘렀다. 어찌 그 아이를 내놓으랄 수 있는가. 어떻게 가진 마음인데. 그럴 수는 없었다.
백경화는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대비의 눈을 똑바로 마주했다.
“황송하오나 마마, 이것은 소인의 문제라기보다는 전하의 마음을 얻지 못한 왕비마마의 부덕(不德)이 아닐는지요.”
“뭐, 뭐라?!”
“공빈!!”
속을 찌르는 백경화의 말에 조용히 지켜보고만 있던 유현왕비에게서 새된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것은 대비 또한 마찬가지였다. 너무 기가 막히어 순간적으로 할 말을 찾지 못할 정도였다.
“그러한 것을 소인이 어찌 돌릴 수 있단 말이옵니까.”
“그 입 다물지 못할까?!”
쩌렁하니 내질러진 대비의 노성에도 불구하고 백경화는 눈을 똑바로 뜨고는 진심을 다해 덧붙였다.
“소인은 그 누구와도…… 설령 그것이 왕비마마라 하더라도 전하의 성총을 나눌 생각이 없나이다.”
“하……!”
방자하기 짝이 없는 백경화의 대답에 결국 대비의 입에서도 거한 숨이 터져 나왔다. 보자 보자 하니 끝 간 데 없이 기어오르는구나. 새파랗게 날이 선 눈으로 백경화를 노려보던 대비가 밖을 향해 소리쳤다.
“밖에 박 상궁 있는가?!”
“예, 마마.”
“당장 내 침전으로 가서 회초리를 가져오너라!!”
예, 예… 마마. 허겁지겁 답한 박 상궁이 멀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때까지도 대비와 백경화는 서로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그럴수록 대비의 눈에는 새파란 독기가 서렸다. 무겁게 가라앉은 공기가 긴장으로 짓눌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박 상궁이 하명받은 대로 회초리를 들고 들어설 때까지 계속되었다.
박 상궁이 새하얗게 질린 채 건네주는 회초리를 받아 든 대비가 백경화를 향해 물었다.
“지금이라도 말을 물리고 죄를 청하시게, 공빈.”
“소인은 잘못한 것 없사옵니다.”
“실로 오만방자하구나!”
철썩! 가느다란 회초리를 휘둘러 바닥을 한 번 친 대비가 백경화를 향해 일어서 치마를 걷으라 소리쳤다. 그 말대로 행하면서도 백경화는 다가올 매질에 대한 두려움 하나 보이지 않았다. 전장을 헤맨 그다. 검 끝, 창끝 상대로 맞서 살아온 그이니 고작 회초리 따위에 겁먹고 물러설 리가 없었다. 그리고 물러설 수도 없었다.
지금 그가 물러선다면, 이연은 대비의 압박에 못 이겨 태근전으로 돌아가거나 왕비의 침전에 들 것이다. 두 눈 시퍼렇게 뜨고 그 꼴은 볼 수 없는 백경화다.
“참말로 잘못했다 아니 비실 참이오?!”
“후궁 된 도리를 다함이 어찌 잘못된 일이라 하시는지요.”
“한낱 후궁 주제에 못 하는 소리가 없구나.”
철썩! 백경화의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대비의 손에 휘둘러진 회초리가 날카롭게 그의 종아리를 파고들었다. 살이 터지는 소리가 선득하게 방 안을 울렸으나 백경화는 신음 하나 흘리지 않았다.
“내 공빈이 잘못하였다 할 때까지 멈추지 않을 게요.”
“…….”
백경화는 고집스레 입을 다물고 두 눈을 감았다. 그와 동시에 매질이 시작되었다.
철썩, 철썩! 날카로운 소리는 끊임없이 들렸다. 그 소리가 더해질수록 백경화의 종아리엔 가느다란 선혈이 그려졌다. 살이 터지고 피가 흘러 바닥을 적실 정도로 모진 매질은 오랫동안 이어졌다. 그저 지켜만 보던 유현왕비가 새하얗게 질리어 고개를 숙이고 귀를 때리는 소리에 숨을 죽였다. 독하다, 는 말밖에 할 말이 없었다. 독기 그득한 표정으로 회초리를 휘두르는 대비도 그러했지만, 무엇보다 두 눈을 감은 채 신음 하나 흘리지 않는 백경화의 모습에는 진저리가 쳐졌다. 잔뜩 일그러진 얼굴이 분명 고통을 담고 있건만…….
헉, 헉. 도리어 먼저 나가떨어진 것은 회초리를 든 대비였다. 그녀는 체통도 잊고 어깨가 들썩일 정도로 거친 숨을 내쉬며 질린 얼굴로 백경화를 올려다보았다. 고통을 참으려 입술을 깨물고 있는 백경화의 이마에도 식은땀이 맺혀 있었다. 그런데도 신음 하나 안 흘려?
이쯤 되니 대비에게도 오기가 생기기 마련이었다. 까득, 이를 사리문 대비의 두 눈에 형형한 빛이 서리는 것과 동시에 잠시 멈췄던 매질이 다시 이어졌다.
그리고 그 소리는 한참 동안 멈추지 않았다.
이연은 불안한 마음에 몇 번이고 방 안을 서성였다. 같은 자리를 수없이 맴돌며 문을 돌아보길 수차례. 허나 그가 기다리는 존재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가 누구에게 불려 갔는지 알기에 도저히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다디단 오수에서 깨어난 그를 기다린 것은 백경화의 부재였다. 처음으로 마주한 일에 의아해하면서도 그가 잠시 자리를 비운 것뿐이라고 여겼다. 그 예상이 빗나간 것은 해가 지고도 백경화가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였다. 결국 기다리다 지친 이연이 밖을 향해 공빈이 어딜 갔느냐 소리쳐 물었다. 그러다 돌아온 대답에 잠시 숨을 멈춰야만 했다. 중궁전에 부름을 받고 들었다는 말에 정신이 아득해졌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신시(申時)4)에 불려 갔다는 이가 달이 뜰 동안 돌아오지 않는 것이, 필히 사달이 나도 크게 났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대비가 얽혀 있을 것이란 사실은 굳이 깊게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왕비가 홀로 움직였을 리가 없다. 조금 더 자유롭다 싶을 뿐이지, 그녀 또한 대비의 꼭두각시일 뿐이니까.
“…….”
부디 아무 일도 없기를. 이연은 몇 번째인지도 모를 기도를 읊조리며 초조함에 애꿎은 제 손톱만 잘근잘근 씹었다. 지금이라도 중궁전에 가 봐야 하는 게 아닐까. 그리 생각하면서도 쉽사리 걸음을 옮길 수가 없었다.
겁쟁이.
이연은 질끈 두 눈을 감으며 제 손에 얼굴을 묻었다. 한동안 그 상태로 움직임이 없던 그가 돌연 고개를 치켜든 것은 조금의 시간이 흐른 후였다. 그는 두려움으로 떨리는 심장을 달래며 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알고 있다. 자신이 가더라도 백경화를 도울 수는 없을 것이다. 허나 기약 없는 기다림은 더욱 자신을 괴롭게 만들 뿐이다. 그럴 바엔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
밖에서 알림이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짧은 알림과 동시에 문이 열리고 그 사이로 백경화가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백경화의 모습을 확인한 이연에게 찾아온 것은 안도보다 경악이었다. 평소와 달리 흐트러진 머리카락과 백지장 같은 백경화의 안색에 대경한 이연이 그에게 달려갔다. 가까이서 보니 상태가 더욱 말이 아니다. 이마 곳곳에 맺힌 식은땀과 더불어, 얼마나 깨물었는지 입술마저 부르터 핏방울이 맺혀 있었다.
“이, 이게 어찌 된 게야?”
놀라 소리쳐 묻는 이연을 향해 백경화가 힘없이 웃어 보였다.
“별것 아니옵니다. 근심치 마소서.”
이연은 고통이 묻어나는 얼굴로도 저를 안심시키려 웃어 보이는 백경화의 모습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전하…….”
저는 괜찮다, 그러니 신경 쓰지 마시라, 그 부름 하나에 담겨 있는 것은 이연을 위한 거짓말이었다. 괜찮을 리가 없는데. 이 강한 사내가 안색을 흐릴 정도면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일단 자리에 앉으시게.”
이연은 서 있는 것조차 힘들어 보이는 백경화를 먼저 자리로 이끌고자 하였다. 이연이 미약하게 떨리는 그의 손끝을 잡고 막 걸음을 떼려던 찰나. 애써 태연을 가장하고 있던 백경화의 얼굴에 짙은 고통이 서렸다. 이연이 돌아보기 전 얼른 고통을 갈무리한 그는 느릿하게 걸음을 떼었다. 절뚝이려는 것을 느린 걸음으로 감추며.
어렵사리 자리를 잡고 앉은 백경화가 식은땀으로 젖은 얼굴로 애써 웃어 보였다.
“아직 식전이라 들었사옵니다. 허기지시지요? 석반 들이라 하오리까?”
“괜…….”
괜찮으냐. 그 하나를 묻지 못한 이연은 웃고 있는 백경화의 얼굴을 조심스레 쓸었다. 달달 떨리는 손끝에 백경화도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후우… 깊은 한숨을 내쉬며 조심스레 손을 뻗어 이연의 몸을 끌어안은 백경화가 다정히 속삭였다.
“괜찮사옵니다, 전하.”
말하지 않아도 안다. 그리 말하며 걱정하지 말란 듯 안아 주는 그의 품에서 이연은 얼굴을 흐리고 말았다. 무슨 고초를 겪고 왔는지 알 길이 없으니 속만 답답했다.
“내가 찾아갔더라면…….”
“아니, 어떠한 이유로더라도 중궁전으론 걸음 하시지 마소서.”
결코 평범한 후궁의 입에서는 나올 수 없는 청 앞에서도 이연은 그저 하염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오냐, 내 그리하마. 그 대답에 환히 웃은 백경화가 이연의 몸을 더욱 품어 안으며 덧붙였다.
“예, 그리하여 주시옵소서. 절대로 소첩 곁 떠나시면 아니 되십니다.”
그 상황에서 이연이 중궁전으로 찾아왔더라면, 대비 앞에서 차마 저를 찾아왔다 말하지 못해 중전을 보러 왔다 그리 말한다면…….
어쩌면 자신은 지금쯤 피로 온몸을 물들이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백경화의 살벌한 생각을 알 리 없는 이연은 제 시선을 사로잡는 곳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필시 잘못 본 것이 아니라면,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피였다.
“어, 어디 다친 게야?”
백경화가 미처 방비하기도 전이었다. 바르작거리며 백경화의 품에서 빠져나간 이연은 몇 번이고 괜찮다, 아프지 않다, 고하는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
이연은 제 앞에 모습을 드러낸 참혹한 상처에 숨을 멈추고 말았다. 살이 헤집어진 듯한 종아리는 말짱한 곳을 찾기가 힘들었다. 시뻘겋게 달아오른 찰과상이 이연의 눈을 아프게 찔러 왔다.
“어… 어찌해……. 이것을 어찌해…….”
“괜찮사옵니다. 아프지 않으니 근심치 마옵소서.”
“안 아플 리가 없다. 이걸 정녕 어쩐단 말이냐…….”
까만 두 눈이 그렁해지는 것을 바라보며 백경화가 급히 손을 뻗어 그 눈가를 문질렀다. 백경화는 몇 번이고 저는 괜찮다, 이연을 안심시키며 저의 튼실함을 주장했다. 전하, 소첩이 이리 어여뻐 보여도 전장에서 살다시피 하였사옵니다. 이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사옵니다.
부러 농까지 섞어 가며 이연을 달래던 백경화가 두 눈을 감고 이연의 정수리에 고개를 묻었다. 사실 이연에게 말하지 못했지만, 저를 낳아 준 ‘어미’에게도 이리 회초리를 맞아 본 적이 없었다. 대비는 있을까. 배 아파 낳은 ‘자식’을 훈육이란 이유로 매질한 적이.
그 순간 머리를 스친 생각에 피식, 실소한 그가 이연을 품어 안은 손에 힘을 주었을 때였다.
“이래도… 이리 부당함을 당해도 내 곁에 있으려 함이냐?”
“…….”
이건 또 무슨 말인가.
“겨우 요까짓 일에 소첩이 물러날 것 같나이까.”
단호한 백경화의 말에 이연의 속눈썹이 파르르 경련했다. 그 애처롭고 가여운 모습이 백경화의 마음을 소리 없이 두드렸다. 제 아픔에 이리 통탄하는 이가 어여쁘면서도, 속 뒤집는 소리나 하는 것이 야속했다.
“아파서 어찌하누.”
진득한 자책이 실린 이연의 목소리에 백경화가 기울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그를 마주 보았다. 속상함으로 잔뜩 흐려진 이연의 얼굴을 보자 어쩐지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라고 아프지 않은 것은 아닌데, 이연을 보자 마냥 웃음만 났다. 참으로 실없다 자조하면서도 백경화는 입을 열어 말했다.
“매일 아침 전하께오서 약 발라 주시면 금방 나을 것이옵니다. 나흘이면 싹 다 나을 것이라 약조드릴 수 있습니다.”
“또 거짓부렁을…….”
“참말이옵니다.”
“…….”
이연은 속는 셈 치고 허세 가득한 백경화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약쯤이야 얼마든지 발라 줄 수 있으니 부디 백경화의 상처가 빨리 아물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지금 바르자꾸나.”
그리 입을 연 이연이 밖을 향해 소리치자 미리 대기하고 있던 여선이 따뜻한 물에 적신 천과 약을 들고 입실했다. 흘깃, 백경화의 종아리를 확인한 여선의 미간이 미세하게 찌푸려졌다. 전장에서는 저것보다 더 심하게 다치는 경우가 왕왕 있다. 허나 이건 의미가 달랐다.
“…….”
여선이 말없이 바라보고 있자 백경화가 눈짓으로 축객령을 내린다. 그에 여선은 이연에게 약을 건넨 뒤 말없이 방을 나섰다.
이연은 따뜻하게 젖은 천으로 조심스럽게 백경화의 상처를 닦았다. 살이 헤집어진 곳에 닿고 있으니 아플 만도 하건만 백경화는 신음 한번 내뱉지 않는다. 허나 이연은 백경화의 이마에 송골송골 맺히는 식은땀을 놓치지 않았다. 속상한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이연이 불쑥 입을 열었다.
“어찌 종아리를 때려…….”
다 큰 사내의 종아리를, 어찌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나.
“제가 이 정도니 모르긴 몰라도 대비는 며칠간 팔을 들기도 힘들 것입니다. 근육통으로 고생깨나 할 테지요.”
“…그것도 농이라고 하는가.”
기막힌 심정으로 통박을 놓지만 이연도 알고 있다. 그가 속상해하는 자신을 위해 부러 농을 걸었다는 것을.
“그리 말하는 걸 보니 살 만한가 보이. 어렸을 때 종아리 좀 많이 맞아 보셨는가?”
“…….”
“…경화야?”
이연은 제 말에 너무나 씁쓸하게 웃는 백경화의 모습에 놀라 숨을 죽였다. 그러자 이연이 약을 바르기 쉽게 엎드려 있던 백경화가 몸을 굴려 이연의 무릎을 베었다.
“소첩, 종아리를 맞은 건 처음이옵니다.”
“…!”
이연은 제 무릎을 베고 그리 말하는 백경화의 모습에 철렁, 가슴이 내려앉고 말았다. 언젠가 그가 이야기해 주었던 그의 부모와 관련된 비사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연은 제게 기대듯 누운 백경화의 머리카락을 가만가만 쓰다듬어 주었다.
“…찾아볼 생각은, 아니 해 보았느냐?”
“…….”
백경화는 이연의 말에 웃으며 눈을 감았다. 아니 하기는. 한시도 잊은 적조차 없는데.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다정한 손길을 음미하며 백경화가 여상한 목소리로 답했다.
“글쎄요. 어디서 원하던 것, 실컷 누리며 살고 있겠지요.”
냉기가 도는 목소리에 이연은 한기를 느꼈다. 하지만 그는 몸을 떠는 대신 허리를 숙여 제 무릎을 베고 있는 백경화를 안아 주었다. 토닥토닥, 가만히 단단한 등을 두드리며 그의 마음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부디, 이이가 더 이상 아프지 않기를─ 그리 소망했다.
얼마간 그리 안고 토닥였을까. 제 무릎에 슬쩍 머리를 부비는 백경화를 바라보며 이연이 입을 열었다.
“약, 마저 발라야지.”
“약보다 전하의 온기가 더 좋사옵니다.”
“덧나면 어찌하느냐. 얼른 이리 엎드려 보거라.”
걱정 서린 이연의 말에도 백경화는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오히려 슬슬 이연의 몸을 제 곁으로 눕히며 속삭였다.
“나흘이면 나을 것이라 하여도요. 약조할 수 있사옵니다.”
이연은 평소 때와 다름없는 백경화의 모습을 내려다보며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처럼 웃었다. 약조하였다, 안 나으면 혼쭐을 내 줄 것이야. 짐짓 엄하게 이르는 말에도 백경화는 알겠노라 고개를 끄덕이며 이연의 입술을 한 입 베어 물었다.
그리고 나흘 후, 이연은 백경화의 말이 진실이었음을 목도하게 되었다. 실로 짐승에 버금갈 정도로 놀라운 치유력이 아닐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