二
그 밤, 이연은 내내 앓았다.
태의를 들여 심신을 다스리는 침을 놓았으나, 이미 단단히 탈이 난 마음은 쉽사리 진정되지 않았다.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숨죽인 흐느낌을 흘리며 몸을 떠는 이연을 지켜보던 백경화의 속도 새까맣게 타들어 갔다.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어 원통하고, 이연을 몰아붙인 대비에게 극심한 분노가 솟았으며, 저의 억울함을 호소하지도 못하고 이리 앓는 이연이 안타까웠다.
“전하…….”
작은 부름에도 돌아오는 것은 희미한 신음뿐이다. 핏기 하나 없이 새하얗던 이연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른 것을 바라보던 백경화는 조심스레 손을 뻗어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힌 이마를 닦아 주었다.
“전하…….”
안타까움이 절절히 묻어나는 목소리로 재차 이연을 불러 보지만, 역시 이번에도 답은 없다. 그저 더더욱 얼굴을 찌푸리며 이부자리를 파고들 뿐이다. 그 모습이 마치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으려는 듯해서 백경화는 또 속이 상하고 말았다.
다시 따뜻한 물에 천을 적셔 이연의 이마며, 볼이며, 목, 손 같은 것을 차례대로 정성스럽게 닦아 주던 백경화는 그 순간, 파르르 떨리는 이연의 눈꺼풀 앞에서 손을 멈췄다. 마치 갓 걸음을 떼는 사슴을 지켜보듯 조마조마한 눈길로 얼굴을 살피던 백경화는 이연의 작은 손을 다잡았다. 제 손에 잡히고도 한참이나 남아도는 작은 손이다. 그 손을 잡고 힘내라는 듯 부드럽게 주물러 준 노력 덕일까.
무겁게 닫혀 있던 이연의 두 눈이 뜨였다.
“전하!”
“…….”
그 애타는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일까.
이연의 시선은 먼 허공을 향할 뿐, 백경화를 돌아보지 않았다. 무엇을 보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다. 그저 무거운 듯 몇 번이고 두 눈을 감았다 뜨기를 반복한 이연의 얼굴이 순식간에 울음으로 물들었다. 지금까지 아픔에 흐느끼면서도 고집스레 흐르지 않던 눈물이 주륵주륵 흘러내리는 것을 백경화는 굳은 채 바라보았다. 그러다 희미해서… 너무 희미하고 낮아서 그가 아니었더라면 듣지 못했을 이연의 중얼거림에 얼굴을 일그러뜨려야만 했다.
살고 싶어… 죽기 싫어요… 어마마마…….
“……!”
제 가슴을 찢어발기는 비정한 소리에 백경화는 잡고 있던 이연의 손을 다소 우악스레 내리눌렀다. 누가 죽게 내버려는 둔다던가! 누가! 이 마음 헤집는 소리가 너무나 무심하고 무정해서 백경화는 이연이 병중이란 것도 잊고 소리칠 뻔했다. 그러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언제 뜨였냐는 듯 다시 까무룩 감긴 이연의 두 눈은 고통과 분노와 살기로 뒤범벅된 백경화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그리고 백경화에게 있어 진정한 의미의 지옥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 * *
이연은 악몽을 꾸었다. 꿈이란 것을 알지만, 현실이었다는 것도 알기에 이연은 미친 듯이 울었다. 소리치고 발악하며, 울고 또 울었다. 눈물은 그때 다 마른 줄 알았건만 그것이 착각이었는지, 악몽 속에서 이연은 끊임없이 오열했다.
그가 아무리 애원하고 빌어도 그 일은 번복되지 않는다. 혹 그 일이 다시 번복된다 하더라도… 이연은 제가 할 일을 알고 있었다.
그는 제게 살려 달라 청하는 이들을 모른 척할 것이다. 귀를 막고 시선을 외면한 채, 그들의 손을 잡아 주지 않을 것이다.
저 하나 살고자…….
너무 살고 싶어서.
으흑흑… 그 순간 이연의 입에서 한 맺힌 울음이 흘렀다. 가증스럽다. 더럽고 극악하다. 그게 자신이다. 자신이 살고 싶어서… 모두… 모두 저버렸다…….
이연은 화끈거리는 두 눈을 감고, 고통스럽게 떨리는 가슴을 부여잡은 채 고개를 숙였다. 입술을 깨물고 목을 타고 올라오는 울음을 최대한 줄여 가며 가슴을 내리쳤다.
원망스럽겠지. 저만 뻔뻔스럽게 살아 목숨 연명하고 있으니, 당연 저주스러울 것이다.
그깟 것 모두 받아 줄 수 있으니, 더 살고 싶다 말하면… 자신은 지옥에 떨어질까. 이렇게 구차하게라도 더 살고 싶다 말하면, 천벌이 내리는 걸까.
─그때, 악몽을 뚫고 다가온 목소리가 있었다.
“그건 전하의 탓이 아닙니다.”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가 언뜻 위협적으로 들릴 법도 했지만, 이연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 자리에 주저앉아 고개를 묻고 울음을 터트렸다. 그러자 조금 더 가까이 다가온 목소리가 부드럽게 귀 끝에 내려앉았다.
“전하의 탓도 아닌 일을 가지고 어찌하여 그리 가슴에 담고 사십니까.”
“…내가 모른 척했다……. 나 살고자… 모두 외면하였다…….”
“잘하시었습니다.”
“…?!”
생각지도 못한 말에 고개를 들자 희뿌연 시선 끝에 누군가가 보였다. 열로 들끓고 몽롱한 머릿속으로 생각해 본들 누군지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저를 단단하게 안아 오는 이 품은 어쩐지 낯익었다.
“잘하셨습니다, 전하. 혹 그때… 전하가 그들의 편을 들어 주었다 하여도 변하는 것은 없었을 것이옵니다.”
“…그…….”
“그 일로 전하가 잘못되었으면…… 그리되었으면…….”
생각만으로도 괴로운 듯 희미하게 떨리는 목소리만큼이나, 이연을 안고 있는 단단한 가슴이 두려움을 품고 떨렸다.
“전하… 살아 주셔서 감읍하나이다.”
“…….”
이연은 저를 안은 팔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끼며 놀란 듯 굳어 있던 몸을 풀었다. 초점 없던 시야가 점차 뚜렷해지고 곧 눈 안 가득 느리게 눈물이 차올랐다. 참아 보기 위해 필사적으로 입술을 깨물고, 미간을 찌푸려 보았으나 소용없었다.
결국 말간 눈물은 다시 열로 달아오른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
자신의 행동이 죄스럽고, 치욕스러웠다. 하지만 한편으론 비참하고, 서러웠다.
아무런 힘도 없이 나약하다는 이유로… 자신이 ‘선택’받았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을 고맙다, 말하는 이가 있었다. 자신의 잘못된 선택을 잘하였다 말하며 품어 안아 주는 가슴이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정말로 간절히 더 살고 싶어졌다.
* * *
몸이 무겁고, 나른하다. 무거운 돌덩이가 온몸을 짓누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이연은 유난히 따끔거리는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가 바로 마주쳐 오는 시선에 조금 놀랐다. 다른 날에 비해 조금 지친 낯이었지만 백경화였다.
잔뜩 부어오른 눈을 똥그랗게 뜨고 바라보는 모습에 웃음이 터질 뻔한 백경화가 애써 목을 가다듬은 뒤 물었다.
“기침하셨나이까?”
“…그대가…….”
왜 여기 있는가?
생각 없이 입을 열었다가, 잔뜩 쉬고 갈라진 제 목소리에 잠시 말을 끊었던 이연은 그 순간 입가에 와 닿는 차가운 것에 저도 모르게 입술을 벌렸다. 그러자 시원한 물이 달게 입 안을 적시며 목으로 넘어갔다.
“아…….”
“밤새 열이 심하시어 소첩이 직접 간호코자 제 침전으로 모셨나이다.”
“…….”
어쩐지 주변이 낯설다 하였다.
그럴 만도 하지. 공빈의 침소에서 잠이 깬 것은 단 한 번뿐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보다 물이나 더 마셨으면 좋겠네…….
흘깃, 눈을 들어 바라보자 계속 보고 있었던지 단번에 이연의 마음을 읽어 낸 백경화가 웃으며 다시 물잔을 기울여 주었다. 사기그릇에 들어 있던 것을 다 비우고서야 입을 뗀 이연이 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제 괜찮으니 내 이만 침전으로 돌아가겠다.”
백경화의 입가에 굉장히 의미심장한 미소가 걸린 것은 그때였다.
“…….”
왜 그리 웃느냐, 라고 묻기도 전에, 침통한 표정으로 백경화가 입을 열었다.
“전하, 사실 어젯밤 폭풍우에 태근전의 기둥 하나가 무너져 침전 벽이 완전히 허물어졌다 하옵니다. 그것도 폭삭, 아주 폭-삭 주저앉았다 하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축이 오래되어 무너진 듯하온데, 거기 계셨더라면 큰일 날 뻔하셨사옵니다. 수리하려면 못해도 달포는 걸린다는데 이를 어찌합니까.”
“…그대, 말과 달리 아주 즐거워 보이는데?”
“…….”
반짝반짝 빛나고 있는 백경화의 두 눈을 바라보며 이연의 고개가 한쪽으로 기울었다. 그러자 잠시 표정을 굳혔다가 푼 백경화가 더욱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저 소첩은, 전하께서 쾌차하신 듯하여 기쁜 마음에…….”
티 나옵니까?
결국 말끝을 흐린 백경화가 큼, 낮게 헛기침을 터트린 뒤 이연을 돌아보았다. 열이 남아 있는 발간 얼굴로 저를 바라보고 있는 이연과 눈이 마주친 백경화는 본의 아니게 불쑥, 제 속내를 내뱉고 말았다.
“태근전 수리가 끝날 때까지 소첩의 침전에서 머무시는 게 어떠하신지요, 전하.”
“…….”
백경화는 대답 없이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생각에 잠기는 이연의 모습에 속으로 침음했다. 너무 조급하게 굴었나. 태근전 무너뜨린 보람도 없이 이대로 다른 침전에 들겠다─ 할까 싶어 더욱 초조해진 백경화가 얼른 입을 열려던 찰나였다.
“그리하마.”
“…!!”
생각 외로 쉽게 돌아온 허락에 백경화가 아무 말도 못 하고 앉아 있자, 파리한 입술 끝으로 조금 웃은 이연이 덧붙였다.
“배가 고프구나.”
“…수, 수라상 들이라 이르겠나이다.”
이연은 처음으로 백경화가 말을 더듬는 것을 보았다. 신기한 마음에 한참 백경화를 지켜보고 있자, 곧 궁녀들이 수라상을 들고 들어왔다.
이연이 제 앞에 놓이는 고소한 냄새의 죽을 내려다보고 있을 때, 있으나 마나 한 기미 상궁이 조심스레 기미를 보았다. 그 후 물러서는 기미 상궁과 더불어 내실에 있던 모든 궁인들을 손짓으로 내보낸 백경화가 이연의 곁에 다가앉았다.
어쩐지 다음 일어날 일이 예상된 이연은 기막힌 심정으로 백경화가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은수저를 들어 죽을 한술 뜬 백경화는 모락모락 김이 나는 그것을 조심스레 입김을 불어 식힌 뒤 이연에게 내밀었다.
말없이 웃음 띤 눈이 얼른 드시라 종용한다.
이번엔 말릴 힘도 없어 바로 어깨에 힘을 빼 버리니 밤새 앓았던 여파로 몸이 늘어졌다. 그러자 내밀고 있던 죽을 뒤로 물린 백경화가 이연의 몸을 제게 기대게 했다. 놀라 퍼덕이는 이연의 몸을 부드럽게 저지하며 백경화가 말했다.
“전하, 아직 몸이 불편하실 터이니 소첩에게 기대어 계소서.”
그리하면 다 해 드리겠다, 그리 속삭인 백경화는 다시 죽을 떠 불어 식힌 뒤 한 손을 아래로 받치고 이연의 입가로 가져갔다. 무엄하다면 무엄하기 그지없는 작태였지만, 이연은 아무런 추궁도 하지 아니하고 쉽게 입을 벌렸다. 그러나 민망함은 숨기지 못한 듯, 죽 한 그릇을 다 비우는 동안 은은하게 달아오른 이연의 귀 끝은 본래대로 돌아오지 않았다.
이연에게 죽을 먹이고, 저도 배를 든든하게 채운 백경화는 이연의 곁에 앉아 그를 간호했다. 점차 나아지고는 있다지만 남은 미열이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기에 백경화는 마음을 놓지 않았다. 그는 부러 이연이 마음 편해할 주제의 대화만 간간이 나누며 안색을 살폈다.
지난밤, 그는 이연의 오열에 가슴이 선득해지는 감각을 맛보았다. 제 살을 저민다 하여도 그보다 고통스럽지는 않을 것이다. 그가 선득한 고통에 몸부림칠 정도로, 이성을 잃은 이연의 울음은 처절했다.
그 통곡으로 이연이 지금까지 무엇을 떠올리며 그 자신을 옭아매고 있었는지 깨달았을 때… 백경화는 진실로 대비의 목을 분질러 버리고 싶었다.
아아- 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지.
그 생각 하나로 당장 대비전으로 뛰쳐나갈 것 같은 몸을 누르고 앉아 백경화는 이연을 품고 달랬다. 진심 한가득 담아, 살아 있어 주어 고맙노라… 그렇게 마음 한 자락 내비쳤다.
“전하, 어디 불편하신 데는 없으신지요?”
“없다.”
“그럼 뭐 필요하신 것은 없으신지요?”
“없다.”
“혹 드시고 싶으신 거나, 소첩에게 바라는 것은…….”
“없다는데도 그러는구나.”
몇 번이고 계속되는 백경화의 물음이 짜증이 날 법도 하건만 이연은 찌푸림 하나 없이 똑같은 대답을 돌렸다. 그에 백경화는 할 말이 있는 듯 몇 번 입술을 달싹였으나 곧 말없이 이연의 이부자리만 살폈다. 토닥토닥, 이부자리 끝자락을 정돈한 뒤 고개를 든 백경화는 고새 눈을 감고 있는 이연의 모습에 웃음 짓고 말았다. 그러나 그 웃음은 얼마 가지 못했다. 밖에서 부러 낸 여선의 기척과 동시에, 반갑지 않은 존재의 방문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전하, 대비전 지밀상궁이 알현을 청하옵나이다.”
“…….”
대비전이란 말이 나오자마자 감겨 있던 이연의 두 눈이 뜨였다. 그와 동시에 몸을 일으키려다 넘어지는 이연을 부축한 백경화가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물리라 하오리까?”
“…들라 하라.”
거칠어진 호흡을 몇 번 다스리던 이연은 밖을 향해 답하며 백경화에게서 몸을 떼어 냈다. 그와 동시에 문이 열리고 대비전 지밀상궁 박 씨가 들었다.
이연과 백경화를 향해 절을 올린 뒤 자리에 앉은 지밀상궁 박 씨는 조용히 고개를 조아리고 이연이 하문하기를 기다렸다.
“그래, 무슨 일로 찾아왔느냐.”
“대비마마께서 챙겨 주시는 약차를 가져왔나이다, 전하.”
“…다오.”
이연의 명에 따라 차가 들린 상을 들고 가까이 다가간 지밀상궁 박 씨가 고개를 조아리며 차를 따르려 하는 것을 백경화가 막았다.
“어찌 기미도 보지 않은 것을 전하께 올리려 함인가?”
제정신이냐, 삐뚜름하니 이어진 백경화의 말에 박 씨에게서 짙은 당황이 묻어나기 시작했다. 그것을 게슴츠레하게 뜬 눈으로 바라보던 백경화의 입가에 냉랭한 비소가 떠올랐다.
“왜 그리 당황하누? 누가 보면 이 차에 독이라도 탄 줄 알겠구나. 그래, 어찌 자네가 한번 맛보겠는가?”
그녀가 당황하며 고개를 들려는 찰나, 이연이 먼저 백경화를 물렸다.
“되었으니 그대는 그만 물러서거라.”
“하오나…….”
“내 항상 마시던 것이니라. …박 상궁, 따르거라.”
“…….”
이연의 말에 지밀상궁 박 씨가 다기에 뜨거운 김이 나는 차를 가득 따랐다. 그것이 조금 식기를 기다린 이연은 찻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마시지 못했다. 손안에서 미끄러지듯 애매하게 어긋난 찻잔이 순식간에 바닥으로 나뒹굴었던 탓이다. 다행히 이연에겐 뜨거운 찻물이 닿지 않았으나, 가까이 앉아 있던 지밀상궁 박 씨에겐 크게 튀고 말았다. 놀라 물러서던 그녀는 당황한 나머지 들고 있던 찻주전자마저 엎질러 버렸다. 순식간에 물바다가 된 바닥과 제 실수에 안색이 질린 박 상궁이 얼른 엎드리며 죄를 청했으나, 이연의 시선은 백경화를 향해 있었다.
“전하, 뜨거운 물에 상하신 곳은 없으십니까?”
“아… 나는 괜찮네만…….”
“다행이옵니다. 소첩이 얼른 새 차를 내어 올 터이니 조금만 기다리소서.”
“…….”
제게 와 닿는 이연의 눈빛이 다른 때와 다르다는 것을 눈치챘으나 백경화는 모른 척 웃으며 궁녀를 불러들여 바닥을 정리하라 이른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박 상궁도 나를 좀 따르시게.”
“어찌하여 그러시온지…….”
“내 물어볼 것이 좀 있어 그러네.”
그럼 조금만 기다리고 계시라, 이연을 향해 청한 백경화가 박 상궁과 함께 퇴실했다. 깨끗하게 바닥을 정리한 궁녀들마저 뒷걸음으로 물러서고 방 안에 혼자 남게 된 이연의 표정은 미묘하게 굳어 있었다.
그는 제 손길을 따라 미끄러지던 찻잔을 떠올려 보다 고개를 기울였다.
찻잔은 정말로, 미끄러진 것일까.
“마마, 소인께 하문하시고자 하심이 무엇인지요.”
저 모습이 정녕 장군이었던 백경화인가.
내실을 빠져나오고도 뒷모습을 보이고 서 있는 백경화의 자태를 바라보며 속으로 혀를 내두르던 박 상궁은 잠시를 참지 못해 무엄하게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러자 그녀를 돌아본 백경화가 무심히 손을 내저으며 답했다.
“아, 별것 아니네. 자네가 내온 차가 무언지 궁금하여서 말이야.”
“대비마마께서 매번 전하께 드리는 약차이옵니다.”
“언제부터 드신 겐가?”
“즉위하셨을 때부터 쭉 드셔 왔나이다.”
“…….”
박 상궁의 말에 백경화의 고운 아미가 살짝 치켜 올라갔다. 당연했다. 그 대비가, 이연에게 얼른 나으라며 귀한 약재를 내렸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 주기는 어땠는가?”
“…그것은 왜 물으시온지…….”
“이제부터 내가 직접 챙겨 드리고 싶어서 그러네.”
잠시 의심스러운 눈으로 백경화를 바라보던 박 상궁은 아무 사심 없다는 듯 꾸며 낸 아름다운 미소에 깜빡 속아 넘어가고 말았다.
“달에 한 번씩 드셨나이다.”
“…그래?”
어느새 박 상궁을 따르던 대비전 소속 궁녀가 새로 찻상을 내오자 백경화가 그것을 받아 들었다.
“이것은 내가 전하께 드릴 터이니, 그대는 이만 대비전으로 돌아가시게. 내 그대를 봐서 대비마마껜 오늘 자네의 실수는 말하지 않을 테니.”
“…마마, 그것은…….”
망설임이 섞인 박 상궁의 거부에도 불구하고 백경화는 문 앞을 막고 서서 말없이 웃고 있을 뿐이었다. 그 웃음에 어째 등골이 서늘해지고 만 박 상궁은 살짝 질린 낯으로 물러섰다.
“그, 그럼 소인은 이만 물러가겠사옵니다.”
“조심히 가시게. 대비마마께도 감사드린다 꼭 전해 주시고.”
편히 작별까지 고한 백경화가 물러 나가는 박 상궁을 향해 조용히 덧붙였다.
“내 이 은혜는 반드시 갚아 드리겠다고 말일세.”
그녀가 이 말을 들었든 듣지 못했든 백경화에겐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그는 들고 있던 찻잔을 여선에게 건네었다. 그러곤 여선이 준비한 새 찻상을 받아 들었지만, 그는 바로 내실로 들어서지 않았다.
돌연, 그 입술 사이로 한 줄기 선혈이 흘러내렸다.
“주군!!”
쿨럭, 밭은기침과 함께 한 움큼 핏덩이를 뱉어 낸 백경화의 안색은 말이 아니었다. 밀랍처럼 새하얗게 질린 안색이 창백하기 그지없다.
“주군, 내상이……!”
“조용히 하거라.”
붉은 옷이라 다행이군. 이야기가 들리지 않는 곳에서 대기 중이던 후궁전 궁녀 하나가 눈치 빠르게 다가와 젖은 천을 건네었다. 그걸로 입가를 닦아 낸 백경화가 제 옷자락을 내려다보며 쯧 낮게 혀를 찼다. 태평하기 그지없는 백경화의 모습에 속이 타는 것은 애먼 여선이었다.
“주군, 아직 내공을 사용하시면 아니 되십니다!”
“안다.”
“그런데 어찌하여!”
“……마시려 하시지 않느냐.”
독이 든 차를. 너무나 태연하게.
“내 그 꼴은 못 보지.”
“…주군.”
답답하다는 듯 제 가슴을 두드린 여선이 재차 잔소리를 퍼부을 기세라 백경화는 손을 들어 막으며 말했다.
“그만 되었다. 소란 떨 것 없느니.”
피를 한 움큼 토하고도 당혹 한번 하지 않은 백경화가 찻상에 놓여 있는 찻주전자의 뚜껑을 연 뒤, 한 손으로 들고 몇 번 부드럽게 휘저었다. 팔목의 움직임에 따라 주전자 안에서 회오리치는 향 좋은 차를 바라보던 여선이 백경화를 향해 물었다.
“주군, 뭐 하시는 겁니까?”
“내 지켜보니 뜨거운 것을 잘 못 드시는 것 같더구나. 그나저나 그 혓바닥은 언제쯤 되어야 제 역할을 제대로 할는지. 쯧쯧.”
“…혹시 팔불출이란 말 아시는지요, 공.빈.마.마.”
“시끄럽다. 그만 떠들고 넌 네 자리나 지키고 있거라.”
까닥까닥, 손가락질하는 백경화의 모습에 한숨을 삼키며 여선이 돌아섰다. 정말이지 어린 왕과 관련하여서는 죽어라 말도 안 듣지.
백경화는 여선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적당히 식은 차를 들고 내실로 걸음 하였다.
기실 이번 일로 크게 상심한 것은 여선보다 백경화, 바로 그 자신이었다. 그저 찻잔과 주전자를 기로 슬쩍 쳐 냈었을 뿐이건만.
“겨우 이 정도에…….”
내상을 입은 속이 진탕 뒤집혔지만, 백경화는 태연한 낯으로 이연을 향해 다가갔다. 그가 나갈 때와 마찬가지로 같은 자리에 앉아 있는 이연은 무언가 고민에 잠긴 모습이었다. 필히 손안에서 미끄러진 찻잔에 대한 고민이겠지. 백경화는 그 고민을 해결해 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전하, 새 차를 내어 왔나이다.”
“…….”
백경화가 부드럽게 웃으며 건네주는 찻잔을 받아 든 이연은, 순간 스친 그의 손끝에 잘게 몸을 떨었다. 그 손이 유난히도 차게 식어 있었던 탓이다.
흠칫, 그제야 백경화의 얼굴을 제대로 살펴본 이연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슬며시 벌리고 말았다. 창백했다. 백경화의 안색은 그 말 말고는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그대… 안색이 가히 좋지 않구나.”
“아, 약간 체기가 있사온데… 곧 괜찮아질 것이옵니다.”
“…….”
그리 말하며 손에 들린 잔 위로 단아하게 차까지 따라 준 백경화가 어서 드시라, 손짓했다. 이연은 그 손끝을 살며시 잡았다 놓았다.
“손도 얼음장 같건만… 정녕 괜찮은 것이냐?”
“…….”
생각지도 못한 이연의 접촉에 잠시 놀란 듯 눈을 크게 떠 보였던 백경화가 기회를 놓칠세라 엄살을 피우듯 답했다.
“사실 전하, 체기가 단단히 들었는지 속이 너무 차나이다. 전하께서 손잡아 주시면 괜찮아질 듯하온……!”
“이리하면 되는가?”
“…….”
백경화는 생전 처음으로 말문이 막히는 것이 어떠한 것인지 몸소 체험하는 중이었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작은 손이 그의 손을 잡아 왔기 때문이다.
피가 제대로 돌지 않아 차게 식은 손을 제 작은 손으로 잡은 이연은 그 차가움에 놀란 듯하더니 부지런히 제 체온을 나눠 주었다. 저보다 훨씬 큰 손을 두 손으로 잡고 꾹꾹 지압하듯 힘을 줘 보기도 하고, 얼른 따뜻해지라 쓰다듬기도 하였다.
“…….”
백경화는 꽤 열심히 움직이는 손길을 느끼며 가만히 미소 지었다. 그래, 내 이 손을 위해서라면 무언들 못 하고, 무언들 못 참을까.
그는 뭐든지 다 할 수 있었다.
그에겐, 이 어린 왕만 있으면 된다.
그리 생각한 백경화는 제 손을 쥐고 있는 이연의 손을 끌어 입가로 가져가 그 위로 입술을 묻었다.
아직 미열이 남아 있는 탓인지, 아니면 본디 가진 체온이 이러한 것인지 작고 마른 손은 정말로 따뜻했다.
* * *
이연이 후궁전 침소, 정확히는 공빈의 침전에서 머문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퍼졌다. 항간에서는 어찌 왕이 한낱 후궁전에 기거할 수 있느냐며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말이 나돌았으나, 대비가 이를 묵인하자 그런 말도 얼마 가지 않아 사라졌다. 그 속내야 어떠할지 알 수 없으나 그로 인해 이연의 후궁전 생활은 무탈하게 이어질 수 있었다.
마음이 불안할 법도 하건만, 놀랍게도 후궁전에서의 생활은 이연에게 있어 너무나 평화로운 것이었다. 망령에도 시달리지 않고, 연유 모를 한기도 느껴지지 않는 생활. 그것은 호화롭고 사치스러울 뿐인 태근전에서는 결코 누릴 수 없던 시간이었다.
실로 오랜만에 느껴 보는 조용하고 마음 편한 나날에 언제나 날 서 있던 이연의 신경마저 누그러졌다.
마음이 편하니 이연의 얼굴에도 조금씩 생기가 돌았다. 언제나 반 이상 비우지 못했던 수라도 조금씩 먹는 양이 늘고, 때마다 백경화가 챙겨 주는 간식들도 그의 배를 끊임없이 채우니 앙상하게 말랐던 이연의 몸에도 달팽이 속도로나마 살이 붙었다. 핏기 하나 없이 새하얗기만 하던 이연의 얼굴에 차차 붉은 홍조가 돌기 시작하니, 그를 지켜보던 백경화의 마음에도 살살 봄바람이 불어왔다. 그즈음, 이연에게는 한 가지 의문이 생겼다.
그가 후궁전에서 의식주를 해결한 것도 보름 남짓. 결코 적은 시간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이연은 아직까지 단 한 번도 백경화의 흐트러진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치장을 푼 모습은 물론, 잠이 든 모습까지!
후궁전에서 서로 다른 침전을 사용하면 모를까, 거의 하루 종일 붙어 있다시피 하고, 잠까지 한방에서 자는데 그게 가능한 일이란 말인가.
그리하여 며칠의 고민 후, 이연은 직접 물었다.
“그대, 잠은 자는가?”
“…물론이옵니다, 전하.”
백경화는 뜬금없이 던져진 물음에 놀란 듯 살짝 눈을 크게 떠 보였다가 곧, 부드럽게 웃으며 하문에 답했다. 그러나 그 답이란 것이 이연의 마음에 찰 리가 없었다.
“언제 자는가?”
“전하께서 침수 드시면 바로 잠드나이다.”
“…그럼 언제 일어나는가?”
“전하께서 기침하시기 전에 일어나나이다.”
“…….”
장난하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으나, 이연은 낮은 한숨과 함께 그것을 삼켰다. 장난같이 들리나 어찌 들으면 우문현답이긴 하다.
그래, 그러하니 저가 못 본 것도 당연하지. 하지만 왜?
“흠…….”
“어찌 그러하시온지 감히 여쭈어도 될는지요?”
“…….”
이연은 머리카락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모습으로 다정히 묻는 백경화를 잠시 주시하다 고개를 내저었다. 어쩐지 제 물음에 제대로 된 대답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던 탓이다. 지금까지 백경화의 태도로 보자면 믿기지 않는 일이지만, 이연의 예감은 그리 말하고 있었다. 아무리 물어본들 백경화에게서 솔직한 대답을 들을 순 없을 거라고.
“아니, 별것 아니네.”
“…그러하시옵니까.”
이연의 대답에 그러하시냐며 가볍게 응대하는 백경화의 얼굴에 언뜻 안도가 서린다. 아무래도 오늘 밤부터는 옆 이부자리에 눕는 시늉이라도 해야 할 듯싶었다. 솔직히 이연이 알아도 별 상관은 없지만 알리고 싶지 않은 것이 그의 본심이라, 백경화는 얼른 말을 돌렸다.
“그보다 맛나지요, 전하?”
“…배부르네. 나중에 먹으면 아니 되나?”
“그래도 조금 더 드소서. 식으면 맛이 못하나이다.”
“…….”
진짜 먹을 것에 무슨 억하심정이 있기에 이리 못 먹여 안달인가.
이연은 흘깃, 눈동자를 굴려 소반 위에 놓인 것을 내려다보았다. 하얀 사기그릇 안에는 달콤한 꿀로 잔뜩 절인 가래떡이 몽글몽글 김을 뿜으며 소담히 담겨 있었다. 백경화가 그리 부지런히 집어 먹였는데도 불구하고 그릇 안에는 아직도 절반이나 남아 있었다.
“…배부르네.”
“그럼 요것 하나만 더 드소서.”
숫제 울상 지을 듯한 이연의 웅얼거림에 속으로 웃은 백경화는 가장 작은 것을 집어 그릇에 묻은 꿀을 잔뜩 발라 이연의 입가로 내밀었다. 그러자 또 주는 건 거부하는 법 없는 이연이 입을 벌려 날름 그것을 받아먹는다. 이제 받아먹는 것도 제법 익숙해진 모양이다.
아이구, 이쁜 것.
백경화는 우물우물 떡을 씹어 삼키는 이연의 모습을 지켜보다, 혹 목이 멜까 미리 준비해 두었던 차를 그에게 얼른 건네었다. 오래 방치된 탓인지 꽤나 식어 있어 삼키기엔 모자람이 없는 온도다.
그가 건네준 차까지 비운 이연은 부른 배를 살며시 문지르며 백경화를 돌아보았다. 그런 저를 흐뭇하게 바라보며 젖은 천으로 입가까지 닦아 주는 백경화를 보고 있자니, 이연은 어째 잊고 있던 민망함이 되살아났다.
이미 죽고 없는 제 어미도 이리 살뜰히 챙겨 준 적이 없었다. 침방나인으로 지내다 어찌 선왕의 눈에 들어 승은을 입었으나, 그 총애는 몇 달을 채 가지 못했다. 그사이, 행인지 불행인지 저를 가져 그나마 말단 후궁 자리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 때문에 어미는 저를 꽤 아끼었으나, 애정을 준 적은 없었다.
그러한데 백경화는 스스로 청득한 후궁의 신분으로, 그를 낳아 준 친어미도 하지 않은 행동을 서슴지 않으며 저를 귀애했다.
“…그대… 좀, 많이 이상해.”
“그런 말씀 하시오면, 소첩 상처받사옵니다.”
“그……! 그런 의미가 아니라…….”
그런 의미가 아니란 것을, 백경화가 어찌 모를까.
쑥스러움이 잔뜩 묻어난 얼굴로 힘겹게 건넨 말인데, 괴이쩍다는 뜻일 리가 없었다.
백경화는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조심스레 이연의 손을 잡고 그 손도 닦아 주었다. 꿀떡엔 손가락 하나 대지 않은, 깨끗한 손이란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그럼 어이하여 그런 말씀 하시나이까?”
“…창창한 앞길 놔두고 자처하여 이 후궁전에 든 것도 이상하고, 내게 이리… 이리 다정하게 대하는 것도 이상하다.”
“전하 곁에 있고 싶다 하였지 않사옵니까. 그런 전하께오서 곁에 머무는 것을 허락해 주셨으니, 성심을 그르치지 않는다면 소첩은 계속하여 이리하고 싶나이다.”
“…그것이 이상하다는 게야.”
누구도, 그런 걸 바란 이는 없으니까.
이름 없는 후궁의 자식일 때도, 이름뿐인 왕의 자리에 오른 지금도.
다시 저를 채우는 자조와 조소에 이연은 생각을 털어 내듯 백경화에게 잡혀 있던 손을 빼내었다. 그 손을 말없이 놓아준 백경화가 자리를 정리하는 것을 잠시 지켜보던 이연은 조용히 두 눈을 내리감았다. 그래서 그는 백경화가 어떤 눈으로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지 끝내 알지 못했다. 그 씁쓸하지만, 애정 가득한 미소를 말이다.
오후 나절부터 이어지던 침묵은 잠자리에 들 때까지 계속해서 이어졌다. 이른 시간, 목욕하고 이부자리에 파고든 이연은 다른 날과 다른 백경화의 모습에 조금 놀라고 말았다. 그가 처음으로 이연 앞에 제 적삼 차림을 보인 것이다. 목욕 후, 언제나 꽂고 있던 비녀와 뒤꽂이도 빼내어 실타래 같은 긴 머리카락도 풀어 내린 채였다.
이연이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 그의 이부자리를 토닥이고 있던 백경화가 설핏 웃으며 입가에 손을 대곤 장난스러운 교태를 부렸다.
“그리 보시면, 소첩 부끄럽사옵니다.”
순간, 밖에서 여선이 휘청이는 기척이 느껴졌으나 백경화는 신경 쓰지 않았다. 제 이런 모습에 이연의 마음이 조금 풀린다면 그건 그거대로 될 일. 수하의 당황스러움이야 충분히 무시할 수 있는 일이다.
“웬일로 같이 침수 들려는가?”
“전하께오서 소첩의 걱정을 해 주시니, 암만 부끄럽더라도 어이하오리까. 단정치 못한 소첩을 부디 못났다 하시지 마소서.”
“…별걱정을 다 한다.”
기가 막힌 심정으로 진심을 토하자 낮은 웃음을 흘린 백경화가 다시 이연의 이부자리를 정리해 주기 시작했다. 목까지 이불을 끌어 올려 주고, 어디 찬바람 드는 데 없나 단단히 살핀 그는 이연의 것과 나란히 펼쳐져 있는 제 이부자리로 파고들었다.
“그럼 전하, 편히 주무소서.”
“…….”
그대도, 라는 말은 한참 뒤에야 들려왔다.
자리에 들고도 한참 뒤척이던 이연이 잠이 든 것은 꽤나 시간이 지난 후였다. 그의 숨소리가 낮고 고르게 흐르는 것을 확인한 백경화는 혹 이연이 깰세라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는 이연이 잠이 든 것을 확인한 뒤에야 살금살금 이연 쪽으로 다가간 뒤,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던 제 이부자리를 자못 맹렬한 기세로 잡아당겼다. 흥, 이 거리가 뭐람. 강이라도 흐르겠다. 조만간 이것들 모두 손보든지 해야지, 원.
못마땅함에 속으로 혀를 차며 후궁전 상궁을 비롯한 궁녀들 교육을 다짐한 백경화는 이연의 이부자리 옆에 자신의 것을 바짝 붙인 뒤에야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래, 이 정도는 돼야지.
기실, 이부자리가 두 개란 것부터 마음에 깊은 골이 났으나 그것을 티 낼 수는 없는 노릇이라 이연이 후궁전에 침수 들고 난 다음부터 밤마다 몰래 행해 오던 일과였다.
빈 공간 없이 붙어 있는 이부자리를 확인한 백경화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그새 흐트러진 이연의 이불을 도닥인 뒤 다시 제 자리에 파고들었다.
얼마간 얌전히 누워 있나 싶었던 백경화의 손이 슬금슬금 움직인 것은 나머지 일과를 마저 끝내기 위해서였다. 덮고 있던 이불 밖으로 소리 없이 빠져나간 손은 밤손님처럼 조심스럽고 은밀하게 이연의 이불 안으로 사라졌다. 한참을 꼬물거리던 손이 조용해진 것은 목표물을 발견하고 난 뒤였다.
제 손안에 잡히는 작고 보드라운 손을 몇 번 손가락으로 쓰다듬은 백경화의 눈이 느릿하게 감겼으나, 그는 얼마 가지 못했다.
“…….”
쌕쌕거리는 숨소리가 청력 좋은 백경화의 귀를 끊임없이 괴롭힌 탓이다. 이럴 때는 보지 말아야 함을 아는데도 절로 고개가 이연을 향해 돌아갔다. 손을 잡혔다는 것도 모르고 세상모르게 잠든 이연의 얼굴은 깨어 있을 때와 달리 그 어떤 근심도 없이 평온하다. 그 깨끗하고 말간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던 백경화는 곧 거한 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음에 품은 이가 바로 곁에 누워 있는데 어느 사내가 태평하게 잠이 들까. 만약 그럴 수 있다면 그건 필히 사내로서 문제가 있는 놈이다.
한방에서 잠드는 건 좋긴 한데… 이건 생고문이 따로 없으니.
자리에 앉아 몇 번 심호흡을 하던 백경화는 이연의 뒤척거림에 얼른 제 자리에 다시 누웠다. 손도 재빨리 놓았다가, 다시 이연이 깊이 잠들자 언제 놓았냐는 듯 되잡았다. …장수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란 걸 본의 아니게 증명하며 백경화는 감기지 않는 눈을 억지로 감았다. 그러나 바로 지척에서 들려오는 이연의 숨소리가 귀를 어지럽히고 그의 마음을 요동케 하니 오늘 밤도 쉬이 잠을 청하긴 힘들 듯 보였다.
백경화의 잠 못 이루는 밤은 그렇게 또 하루가 지나가고 있었다.
“……!”
번쩍! 소리가 날 정도로 일시에 눈을 뜬 백경화는 잠시 그 상태로 숨을 고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새벽빛으로 물든 방 안은 어두웠으나, 그는 조심스럽게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그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이연에게 다가가 그 이마 위로 흐른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넘겨 주는 것이었다. 그 후에야 조심스레 자리에서 일어선 그는 간밤 붙여 놓았던 이부자리도 발로 찍- 벌려 놓은 뒤 소리 없이 내실 밖으로 나섰다. 그 모든 것이 이연의 잠을 방해하지 않으려는 조심스럽고 배려 가득한 몸짓이었다.
탁. 문이 닫히고 어둠만이 내려앉은 방 안에서 얼마 지나지 않아 이불에 파묻혀 있던 작은 몸이 움직였다는 것을, 그는 알지 못했다.
백경화는 내실을 나서자마자 대기하고 있던 궁녀를 대동한 채 맞은편 작은 내실로 몸을 옮긴 뒤 치장을 시작했다. 미리 데워 놓은 쌀뜨물과 백봉령 가루를 섞은 물로 소세 후, 면경(面鏡)을 바라보며 밤새 자라난 수염을 직접 정리했다. 사실 백경화가 새벽부터 이 난리를 피우는 것은 이 이유 하나가 가장 컸다. 여인의 모습으로 입성했다 한들 사내인 것은 변함이 없으니, 아무리 체모가 적은 편이라 해도 수염은 나기 마련이다. 제가 사내란 것을 모르는 이 없다 하나, 그것을 이연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것이 백경화의 마음이었다. 안 그래도 남자 후궁이라 정붙이기 힘들 텐데 더 정붙이기 어려운 요소를 굳이 보일 필요는 없으니.
백경화가 한숨을 삼키며 면도칼을 내려놓자 그 곁에서 대기하고 있던 궁녀들이 얼른 그 앞에 미안수와 면약을 놓았다. 백경화는 그것을 차례대로 얼굴에 토닥토닥, 어느 한 곳 빠질세라 꼼꼼히 발랐다. 그 모든 것을 곁에서 지켜보는 궁녀들 사이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본디 모든 것은 그녀들의 손에 의해 이루어져야 할 일이건만 입궁한 첫날부터 그는 모두 스스로 해 왔다. 궁녀들이 민망하고 어색하여 저희들이 해 드리겠다 아무리 고해도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본디 사람 손 닿는 걸 좋아하지 않으니 괘념치 말라며 아랫것들의 송구스러움은 모르는 척했다. 그럼에도 궁녀들이 다 좌불안석이자 그는 낮게 혀를 차며 너희만 입 다물면 아무도 모르지 않느냐, 하고 짐짓 어깃장까지 놓았다. 어찌 감히 왕의 후궁이 저 모든 걸 스스로 하게 두랴. 하지만 그녀들은 같은 말 두 번 하지 못하게 단단히 못을 박는 백경화의 행동에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그녀들이 아예 손 놓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백경화라도 착복과 머리 손질까지 혼자 해내는 것은 무리였던지라 궁녀들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백경화가 가장 기본적인 것을 끝내자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궁녀들이 각각 옷을 들고 차례대로 그에게 입히기 시작했다. 하나하나 옷자락이 갖춰지고 끝으로 남색 치마와 붉은색 당의를 걸치자 화안(花顔)이 더욱 빛을 발했다.
“마마, 조갑(爪甲)3) 정리를 해 드리겠나이다.”
“…….”
그 말에 두 손을 한 짝씩 궁녀에게 맡기자 다른 궁녀가 참빗을 들고 백경화의 흑단 같은 머리카락을 매만지기 시작했다.
“오늘은 다 올리지 말고 조금 내려 보거라.”
“예, 마마.”
어젯밤 침수 들기 전 이연의 반응을 떠올린 백경화가 참견하자 한 올도 흐르지 않게 머리카락을 틀어 올리던 궁녀의 손이 바빠졌다. 긴 머리채 끝만 땋아 말아 올린 뒤 두 개의 비녀를 꽂고 나머지는 어깨선을 따라 앞으로 모아 내린 궁녀가 그 위에 동백기름을 발랐다. 비슷하게 손톱 정리도 끝마쳤는지 백경화를 둘러싸고 있던 궁녀들이 조심스럽게 뒤로 물러났다.
백경화는 어디 모난 데는 없는지 면경에 비친 자신을 한 차례 훑어보았다. 본디 여기에 색조 화장을 더 해야 하나, 그래 봤자 돌아오는 건 거부감뿐이다. 그냥 여인처럼 마냥 곱기만 하면 모를까, 누가 보더라도 사내란 걸 알 수 있다는 게 문제였다.
“…생기려면 그냥 여인처럼 생기던가.”
괜히 이도 저도 아닌 제 얼굴을 타박하며 백경화가 혀를 차자, 지켜보던 여선의 입에선 한숨이 절로 나왔다. 사내로서 저 정도까지 어울린다는 것도 엄청난 일이란 걸 아는지 모르는지… 아니, 오히려 매번 볼 때마다 감탄하게 만드는 외양이라 소름이 돋을 지경인데 그걸 두고 저리 입방정을 떨고 앉았으니, 궁녀들의 손이 ─분노로─ 부들부들 떨리는 것도 당연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궁녀가 건네주는 백단향낭을 소매 부림에 넣은 백경화가 여선을 돌아보며 물었다.
“어여쁘냐?”
“…제가 진정 혀를 깨물어야겠습니까, 주… 마마.”
농담도 못 하겠네.
여선의 대답에 혀를 찬 백경화가 피식 웃으며 문 쪽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슬슬 이연이 일어날 시간이라 돌아갈 참이었다.
열린 문 앞에 이연 본인이 서 있지 않았다면 말이다.
“……!”
도대체 언제? 백경화는 생각지도 못한 그 등장에 대경하여 그대로 굳어 버렸다.
갓 일어난 차림으로 문 앞에 서서 저를 빤히 바라보는 그의 모습에 굳어 아무 말도 못 하던 백경화는 잠시 후 이연의 얼굴이 자신을 외면하듯 다른 쪽으로 돌아가는 것에 두 눈을 홉뜨고 말았다. 역시 이런 모습을 보인 것이 좋지 못한 것일까?
어렵게 붙인 정마저 이 하나로 떨어질까 백경화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어찌 되었든 무슨 변명이라도 하기 위해 이연을 향해 다가가려던 백경화는 곧, 자신의 생각이 완전히 틀렸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문 쪽으로 고개를 돌린 이연이 곧 장지문을 잡더니 어깨를 떨기 시작한 것이다. 부들부들, 간헐적으로 떨리는 그 작은 어깨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분명했다.
그 애처로운 떨림을 바라보던 백경화가 잠시 제 이마를 쓸었다가 자포자기가 서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전하, 크게 웃으셔도 됩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이연의 입술을 뚫고 낮은 웃음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으응? 참말 웃는가?
이연의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온 낯선 소리에, 그 방 안에 있던 모든 이들이 놀라고 말았다. 단 한 번도 이연이 소리 내어 웃는 것을 보지 못했던 이들의 너무나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런 그들의 반응과는 상관없이 이연의 숨죽인 웃음소리는 한참 동안 작은 방 안을 떠돌았다.
“그대, 그래서… 그것 때문에….”
말하는 중간중간에도 숨기지 못한 웃음이 흘렀다. 백경화는 그것을 여전히 신기한 마음 반, 기꺼운 마음 반으로 지켜보다 제게 따라붙는 시선에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아뿔싸! 그는 너무나 쉽게 이연의 말에 긍정해 버린 제 실수를 뒤늦게 탄식했으나,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이연의 말간- 웃음기가 가시지 않는 눈과 시선을 맞추는 것이 전부였다.
“정말로 치장 때문에… 크흠! 그리 새벽같이 일어나는 게야?”
“…예, 전하.”
부들부들. 잠시 백경화에게서 돌아앉은 이연은 또 한 차례 몸을 떨었다. 저 잘난 사내가 어찌하여 그동안 잠든 모습을 보이지 않았나 싶었더니… 실로 기가 막히면서도 어이없는 진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무엇보다 너무 웃겨서 이연은 돌아앉아 배를 잡고 또 한참 웃었다.
작게 귓속을 파고드는 웃음소리에 백경화는 그답지 않게 조금 넋을 놓고 말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즉 들키는 건데…….
그런 생각에 빠져 백경화는 이연의 물음에 또 실언을 내뱉고 말았다.
“그대는 치장하지 않아도 충분히 예쁘지 않은가?”
“그보다는 면도를…….”
“음?”
“……!”
뜨헉! 너무나 기탄없이 흘러나온 진심에 백경화는 급히 제 입을 틀어막았으나 이미 이연은 들을 말 다 들은 뒤다.
면도라… 이연은 아주 이상한 말을 들었다는 듯한 표정으로 참담한 표정의 백경화를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눈앞의 이는 무척 아름다운 자이긴 했으나, 누구보다도 강하고 단단한 사내였다. 항상 꽃 같은 후궁의 모습만 보다 보니 잠시 잊고 말았다.
잠시 고민하던 이연은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고개를 숙인, 누가 봐도 좌절하고 있는 행색인 백경화의 곁으로 다가갔다. 아주 느리고 머뭇거림이 섞인 움직임이었지만, 백경화는 고개를 묻은 그 상태로 바짝 긴장하여 굳고 말았다. 마치 제 행동 하나에 다가오던 어린 짐승이 놀라 도망가기라도 할까 봐 조심스러운 모습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처음으로 이연쪽에서 제게 다가오고 있지 않은가.
“만져 봐도 되는가?”
“…예?”
무엇을… 이란 질문을 내뱉을 틈도 없이 이연의 손이 그의 턱 끝에 닿았다. 손끝으로 무언가를 살피듯 섬세하게 백경화의 턱을 쓰다듬던 이연이 미간을 찌푸렸다.
“안 느껴지는데…….”
“이미 면도를 끝낸지라.”
“아, 그런가?”
당황을 숨기지 못한 채 답한 백경화는 이연의 눈에서 진한 아쉬움을 읽었다.
이연은 저와 백경화의 턱을 번갈아 만졌다가 다시 백경화의 턱을 쓸어 올리며 ‘조금은 까끌한 것 같기도 하고?’라며 고개를 갸웃거린다. 이 같은 상황은 단 한 번도 생각지 못했기에 백경화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포기를 모르는 듯 조금 더 백경화의 턱을 쓰다듬던 작은 손이 점차 백경화의 뺨을 더듬어 갔다. 그 입에서 감탄인지 한탄인지 모를 소리가 홀연히 터져 나온 것은 조금 시간이 지난 뒤였다.
“…사내로구나.”
“……!”
설마 돌고 돌아 제 걱정과 맞아떨어지는 것일까 싶어 조금 몸을 굳혔던 백경화에게, 이어진 이연의 말은 놀라운 것이었다.
“아깝구나. 이리 잘난 사내인데…….”
“…….”
마치 제 일처럼 씁쓸하게 한탄한 이연의 손이 막 떨어져 나가려는 찰나, 그 위로 제 손을 덮어 누른 백경화가 부드럽게 입술을 휘어 웃는다.
“오늘은 날이 좋을 듯한데… 수라 받으시고 산책이라도 나가심이 어떠하실는지요.”
“…….”
“소첩이 모시겠나이다.”
잡힌 손을 빼지도 못하고 백경화의 청에 몇 번 입술만 달싹이던 이연은 이어진 백경화의 말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건 정말로 너무나 자연스럽게 나온 대답이었다. 백경화는 이연의 대답에 크게 기뻐하며 미소 지었다.
그랬기에 그는 그 산책에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을지 전혀 예상치 못했다.
미리 얘기했던 대로 조반을 든 후, 따르는 궁인들마저 물린 채 그들은 인적 없는 후원을 둘이서 걸었다. 날이 풀린 지도 한참이라 따뜻한 햇살이 고이 관리된 후원을 눈부시게 비추고 있었다. 그 광경을 바라보며 이연은 조금 들뜬 마음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상할 정도로 인적이 드물었는데, 그것이 무엇보다 이연의 마음을 흡족게 했다.
“그대, 이곳은 어찌 안 겐가?”
“소첩이 워낙 조용한 곳을 좋아하여 김 상궁에게 물어보았나이다.”
“그래? 나도 마음에 드는구나.”
“전하의 어심에도 드신다 하니 소첩 기쁘기 그지없사옵니다.”
빈말만은 아닌지 백경화의 얼굴에 짙은 미소가 맺혔다. 잠시 그 미소를 주시하던 이연은 조금 더 걸음을 서둘러 백경화를 앞질러 갔다. 그는 작은 연못에 난 돌계단을 건너며 손끝에 닿는 모든 것을 쓸어 보았다. 부드럽게 손끝을 스치는 그 모든 것이 못내 사랑스러웠다.
갓 새장을 나온 새처럼 주변을 눈에 담으며 조금씩 앞서 걷는 이연의 뒤를 백경화는 조용히 뒤따랐다. 그만의 시간을 방해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저를 아예 잊고 풍경에 빠져든다면 심술이라도 나련만, 저가 잘 따라오나 간간이 곁눈질로 돌아보는 모습은 그저 귀여울 뿐이었다.
그나저나 이깟 후원을 걸으면서도 저리 좋아하니, 명소에 데리고 가면 비명이라도 지르겠다.
‘흠… 동파호(同派湖)가 여기서 사흘거리던가.’
그쯤이라면 못 갈 것도 없는데.
잠시 팔짱을 끼고 서서 어찌 월담을 해 볼까 계획을 짜던 백경화는 순간 들려온 인기척에 귀를 기울였다. 설마 사람이 있는 건가?
안색을 굳힌 채 주변을 살피던 백경화는 제법 멀리 떨어진 이연의 뒤를 급히 쫓았다. 감히 어느 뉘가 왕의 걸음을 막을 수 있으랴마는, 어린아이 홀로 냇가에 내어놓은 듯한 심정을 어찌할 수 없는 백경화다.
“전하, 소첩만 두고 가실 참이십니까.”
“그대 걸음이 느린 게야.”
“그리하시오면 소첩이 걸음을 빨리하겠나이다.”
“그대 걸음은 내가 쫓지 못할 터인데.”
조금 미간을 찌푸리고 진심으로 걱정을 담아 말하는 이연의 대답에 낮게 웃음을 흘린 백경화가 그 손을 잡으며 말했다.
“그리하면 소첩이 업어 드리면 되지요.”
“…….”
꼭, 잡은 손에 힘을 주며 생긋 웃어 보인 그는 가만히 이연의 걸음이 이어지기를 기다렸다. 그러자 잠시 잡힌 손을 꼬물거리던 이연이 멈췄던 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물론 잡힌 손은 빼지 않은 채다.
변한 것은 그 하나뿐인데 후원의 풍경이 더욱 신비롭고, 몽환적으로 다가왔다. 어쩐지 조금 가슴도 빨리 뛰는 것 같아서 삐죽 심술이 돋은 이연은 백경화를 향해 이죽거렸다.
“그대, 뭇 여인들 많이 울렸겠어.”
“이리 손잡아 준 여인은 없사오니, 괘념치 마옵소서.”
그런데 백경화의 생각과 달리 이연은 입을 더욱 삐죽거렸다.
“그 말은 울린 여인은 있다는 건가?”
“…….”
“그만 손 놓자꾸나.”
백경화가 아무런 대답을 않자, 그리 일축한 이연이 손을 흔들었다. 그러나 백경화는 오랜만에 사람 피부에 달라붙은 거머리처럼 진득하게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그리 한참 이연은 백경화의 손에 잡힌 제 손을 털어도 보고 이리저리 휘둘러도 보았다. 허나 백경화는 손을 놓기는커녕 숨을 헐떡이고 있는 이연을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내려다볼 뿐이었다. 그를 바라보는 이연의 눈동자가 절로 날카로워졌다. 그럴수록 속이 타는 것은 백경화 쪽이었다. 아니, 그가 울리려고 울렸나… 그네들이 우는 걸 어쩌란 말인가.
“저는 싫다 한 것뿐이온데…….”
“…….”
“싫은데…, 받아 줄 수는 없지 않사옵니까.”
“그건 그렇지.”
싫은데 받아 주는 건 더 나쁘지.
그렇지요, 전하?
이연의 대답에 구명줄 발견한 이처럼 백경화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무엇 때문에 이러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이연의 마음이 풀린 듯하여 다행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그러신가… 뒤늦게 찾아든 의문에 백경화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가 뒤늦게 무언가를 깨달았을 땐 이미 이연의 마음을 확인할 기회는 저만치 날아간 뒤였다. 그는 통탄스러움에 제 가슴만 쳤다. 이로써 백경화 또한 어쩔 도리 없는 연애 초보자란 게 밝혀졌다. 암만 내숭 떨고, 여우 꼬리 흔들어도 어쩔 수 없는 경험의 차는 있기 마련인 것이다.
그리 또 마음 맞아 손잡고 걷던 그들은 더욱 후원 안쪽으로 들어섰다. 수풀로 우거진 곳으로 들어설수록 어둑해지는 시야에 이연은 걸음을 멈추었다. 백경화도 그만 돌아가자 입을 열려던 차였다.
“하읏…!”
“하…!”
야릇한 소리가 그들의 귀에 들려왔다.
이것이 무슨 소리인가, 는 굳이 알려 할 필요도 없었다. 나뭇잎 그림자에 가리어졌다 하나 반쯤 드러난 인영이 뻔히 눈앞에 보였으니까.
궁녀 차림의 여인과 관복을 차려입은 남자가 뱀처럼 얽히어 있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궁에 있는 모든 여인은 왕의 여자다. 한낱 궁녀라 하나 관직에 오른 이가 범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닌 것이다.
놀라 숨조차 멈춘 듯한 이연의 두 눈을 급히 가린 백경화가 부러 옆에 있던 나무를 후려쳤다.
파삭- 나뭇잎 부서지는 소리에 한창 방사 중이던 이들이 급히 떨어지고, 궁녀는 사색이 된 채 이쪽을 살필 틈도 없이 허겁지겁 벗어 놓았던 쓰개치마를 쓰고 멀리 도망하였다. 걸리면 목이 잘릴 일이니 당연한 수순이라지만… 놀라운 것은 남자 쪽이었다.
흐트러진 차림을 정리할 생각도 없는 듯 태연하게 소리가 난 쪽으로 시선을 돌린 남자가 씨익, 웃는 것이다.
“이것 참… 한참 좋을 때 누가 방해하나 하였더니, 뜻밖의 귀하신 분들을 뵙게 되는군요.”
“…….”
건들거리는 걸음으로 오히려 그들에게 다가오기까지 한 그는 이연과 백경화를 한 번씩 돌아보며 물었다.
“두 분이서 사이좋게 산책이라도 나오셨는지요?”
무엄하게도 왕을 보고도 인사 한마디 없는 남자의 작태에 꿈틀, 미간을 찌푸린 백경화는 그제야 이연의 상태가 이상함을 눈치챘다. 눈을 가린 손을 떼어 냈으나 이연은 심히 충격받은 이처럼 두 눈을 부릅뜬 채 거친 숨만 이어 갈 뿐이었다.
“이런… 어린 전하께서 많이 놀라셨나 봅니다.”
비아냥 섞인 어조에 백경화는 더 이상 참지 못했다.
“전하께 예부터 올리지 못할까!”
공력이 실리지 않았음에도 쩌렁하니 후원을 울리는 백경화의 엄명에 남자가 놀란 듯 주춤 물러섰다. 그러다 겁을 먹고 물러선 제 행태에 도리어 발끈하듯 한 발 나서며 히죽거렸다.
“공빈마마께오선 입궁하신 지 얼마 되지 않아 잘 모르시나 본데, 궁에서는 보고도 못 본 척, 들어도 듣지 못한 척해야 하는 게 꽤나 많사옵니다. 이것도 그중 하나입지요.”
“궁의 법도를 그리 잘 아는 놈이 전하를 뵙고도 입을 다물고 있단 말이더냐.”
“아아, 그건 제가 잘못하였으니 이제라도 인사 올리겠습니다.”
백경화의 말에 그리 입을 연 남자가 정확히 이연을 바라보며 두 손을 들어 읍했다.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전하. 이 처남이 전하께 인사 올리나이다.”
그 모습 어디에도 왕에 대한 경의는 존재하지 않았다.
생각지도 못했던 남자의 정체에 백경화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비빈이라고 해 봤자 정비인 유현왕비와 후궁인 공빈 백경화가 다인 이연에게 있어 처가라 할 수 있는 곳은 단 하나뿐이었다. 현 유현왕비와 관련된 유란가의 핏줄들. 그중에서도 처남이라 칭할 수 있는 자는 현 유란가 가주의 아들들이었다. 딸자식이 없는 관계로 유란가 가주는 동생의 금지옥엽을 간택(揀擇)에 내보냈고, 대비의 입김에 그녀는 당연한 수순으로 왕비가 되었다.
그러니까 지금 눈앞의 이 남자는 왕비에게 있어 사촌 오라비가 된다는 말이다.
‘그 잘난 유란가의 핏줄이라…….’
백경화는 새삼스러운 시선으로 눈앞의 청년을 훑어 내렸다. 외견만으론 어디에 내놓아도 뒤떨어지지 않을 것 같긴 하다만, 오만에 찌든 품행을 보니 역시나 그 피가 어디 가랴 싶었다. 대놓고 궁녀와 놀아나는 것도 모자라, 왕을 대하는 저 꼬락서니 좀 보라지. 기가 막힌다.
누구에게 저딴 불손한 시선을 보내는가 말이다. 주제도 모르고, 감히.
‘두 눈을 찢어 줄까. 그리하면 다신 저딴 눈으로 보지 못할 터인데.’
살벌한 생각만큼이나 백경화의 얼굴에도 요요하지만, 서슬 퍼런 미소가 피어난 찰나.
굳은 듯 얼어 있던 이연의 입에서 질책의 말이 흘러나왔다.
“이게… 무슨 짓인가.”
그러나 그것은 질책이라기보다는 한탄과도 닮아 있었다. 당장에 쓰러질 것 같은 안색으로 그는 그리 자신의 아연함을 드러냈다.
그 모습에 잠시 두 눈을 똥그랗게 떠 보였던 남자- 유란주호가 씨익 웃으며 답했다.
“저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전하. 농익은 꽃이 저 좀 따 달라 매달리는데 어찌 사내 된 도리로 모른 척하겠나이까. 사내란 자고로 유혹에 약한 법. 그러니 뚝뚝 흐르는 꿀물을 따먹을 수밖에요.”
“…….”
아무 말도 못 한 채, 더욱 하얗게 질리는 이연을 향해 유란주호가 덧붙였다.
“속에 꿀물이 꽉 찬 것이 한두 해 굶은 것이 아니더이다. 하긴 품어 주셔야 할 주상께서 내내 모른 척이시니 애가 꽤 탔겠지요.”
“…!”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저질스러운 농이라 듣고 있는 이연의 얼굴에도 점차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하얗고 어린 얼굴 가득 떠오른 것은 명백한 분노였다. 그러나 유란주호는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더욱 도발했다.
“덕분에 저만 아주 찰지고 맛나게 잘 먹었나이다, 전하.”
“무엄하다! 그 입 다물지 못할까!”
“이런… 공빈마마의 귀를 미천한 소신이 더럽혔나 봅니다. 용서하소서.”
유란주호의 대답에도 불구하고 백경화의 얼굴은 더욱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이연을 무시하고 부러 제게만 사과를 건넨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가 눈치챈 것을 이연이 모를 리가 없었다.
방금 전보다 더욱 질린 이연의 얼굴에 아득, 이를 간 백경화가 사나운 눈으로 유란주호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그 핏줄이라 할 때부터 알아봤지만, 저리 뻔뻔하고 안하무인일 수가 없다.
그렇기에 제 수명을 저 알아서 앞당기는 게지.
흠칫! 유란주호는 저를 향해 쏘아 들어오는 무형의 살기에 한 차례 몸을 떨었다. 바로 그 곁에 있는 이연은 솜털 하나 건드리지 않은 채 유란주호만을 향한 살기는 무시무시했다. 순식간에 그의 호흡을 억압하고, 주변의 모든 공기를 지배한다. 더 무서운 것은 이것이 공력 하나 실리지 않은 오롯한 살의, 그 하나로 이루어 낸 결과란 점이다. 비록 대성하지는 못했으나 그 또한 무인이라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모르지 않는다. 그렇기에 유란주호는 더욱 질투에 눈이 멀었다. 자신이 갖지 못한 힘을 쥐고 있는 눈앞의 사내에게!
‘그래 봤자 지금 너는 우스운 꼴의 첩년일 뿐이지!!’
그러나 여기서 백경화를 도발할 수는 없었다. 점점 살을 파고들 정도로 짙어지는 살기가 위험 수위임을 알리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더 했다가는 지금 그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영상이 실제가 될지도 모를 일.
그는 이만 물러나기로 하였다.
‘그렇다고 꽁지 빠진 새처럼 도망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유란주호는 이연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무슨 연유에서인지 저 백경화가 그 대단하디대단한 무공까지 버려 가며 택한 놈이었다. 게다가 방금도 이연에게 함부로 대한다고 저리 진노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그 속을 조금 더 뒤집어 주어야지.
입술을 비틀어 올린 유란주호가 곧바로 이연을 향해 입을 열었다.
“전하, 오늘 이 소신이 지은 대죄는 부디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다시는 이런 일 없게 하겠나이다.”
“…….”
“하해와 같은 아량으로 선처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
저를 향해 허리를 숙이는 유란주호를 바라보던 이연의 시선이 흘깃, 백경화를 향한다. 또 이이가 무언가를 했구나. 절로 알게 되는 사실에 이연은 쓴 입맛을 다시며 눈에 힘을 주었다.
처음 두 남녀가 엉켜 방사를 벌이는 것을 보았을 때의 충격이 잊히지 않는다.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그러다 분노하였고, 또 그러다… 슬퍼졌다.
무서워졌다.
지금 진심 하나 보태지 않은 거짓 사과를 들으면서도, 머리가 새하얘질 정도로 분노에 떨면서도 이를 용서한다 말해야 하는 자신의 신세에 목이 메었다. 죽을 때까지 이러할까. 이리 살아야 하나.
그러다 문득 이연은 저를 향해 비소했다.
새삼 무슨 소린가. 이렇게라도 살고 싶어 선택했던 것이 바로 저였는데.
그만 되었다 답하려던 이연은 이어진 유란주호의 말에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리고 부디 청하옵건대, 대비마마께는 비밀로 하여 주옵소서.”
일을 쳐 놓고, 대비는 또 무서운 겐가. 그렇게 생각했다.
다음 말이 없었다면.
“전하께 들킨 것을 알면 제가 대비마마께 크게 경을 칠 것이옵니다.”
“…!!”
흡, 이연은 급히 숨을 들이켰다. 그보단 못하였지만 백경화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지금 유란주호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그만큼 위력적이었다.
“지금 그 말은…….”
“이런… 소인이 또 큰 우를 범했나이다!”
“…….”
비틀- 이연은 다리에 힘이 풀려 휘청이고 말았다. 넘어지지 않게 받쳐 주는 손이 있었으나 이연은 돌아볼 수 없었다. 외려 그 손을 뿌리치고 멀리 도망하고 싶은 심정이다.
대비도 알고 있다. 유란주호가 궁의 여자를 건드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것도 모자라 눈감아 주고, 허하고 있다는 말이었다.
이것은 완벽한 ‘경시(輕視)’였다.
수치스러웠다. 백경화의 앞에서 이리 농락당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 모습을 모자람 하나 없이 잘난 사내에게 보이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수치스러웠다.
“…전하, 공기가 차온데 이만 침전으로 돌아가심이 어떠하신지요?”
“…….”
힘없이 늘어진 이연의 어깨가 너무 지쳐 보여서, 백경화는 부러 더욱 다정한 목소리로 청했다. 뒤이어 그는 이연의 속을, 그 탓에 제 속까지 진창 뒤집어 놓은 유란주호를 싸늘하게 내려다본 뒤 눈빛으로 축객령을 내렸다. 움찔, 당장에 심장을 파고들 것 같은 창 같은 시선에 몸을 사리며 유란주호는 조용히 뒷걸음질 쳐 물러났다.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백경화는 이연의 앞에 무릎을 접어 앉으며 두 손을 잡았다. 고운 치마가 흙바닥에 지저분해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는 당장 흩어져 사라질 것만 같은 이연을 향해 밝게 물었다.
“전하, 곤하시오면 소첩이 침전까지 업어 드리오리까?”
“…되었다.”
“전하…….”
“괜찮으니… 곧, 그리될 것이다.”
지금은 아무리 아프고, 상처받은 자존심이 슬프더라도… 곧 괜찮아질 것이다.
“항상…… 항상 그랬으니까…….”
“…….”
속에서 무언가가 울컥 치달아 올라와도, 지금만 참으면 괜찮아진다. 항상 나는 이랬으니.
그 처연한 말에 백경화는 가슴이 사무쳐서 애써 끌어 올리고 있던 입꼬리를 내려뜨리고 말았다. 그는 무릎을 접어 앉은 그대로, 잡고 있던 이연의 두 손을 끌어 제 눈가를 덮었다. 그리곤 부드러운 농을 걸듯 다정하게 속삭였다.
“전하, 지금 소첩은 눈이 가리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나이다. 어수가 참으로 따스하여 계속 이러고 있고 싶사옵니다.”
대답 없는 이연을 대신해 그는 끊임없이 속삭였다.
“아, 소첩이 아까 나오기 전 김 상궁에게 감자를 쪄 놓으라 전하였는데 지금쯤 맛나게 익었겠지요?”
“……또 먹으란 말이냐.”
“한 수저만 뜨소서. 소첩이 뜨겁지 않게 불어 식혀 드리겠나이다.”
“…….”
“이러고 있으니 전하… 세상에 전하와 소첩, 단둘뿐인 것 같사옵니다.”
“…….”
“그리되면 소첩 참으로 행복하여 몸 둘 바를 모를 터인데…….”
참말로 그리되면 좋을 텐데.
백경화는 속엣말로 중얼거리며 제 눈을 덮고 있는 손바닥이 약하게 떨리고 있는 것을 모른 척했다. 긴 속눈썹을 내리감고, 작은 손바닥으로 눈을 가린 채 그는 계속해서 속삭였다. 전하, 이러고 있으니 벌써 밤이 된 것 같사옵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보름이온데 밤에 소첩과 함께 달구경 아니 하실는지요. 전하 곁에서 소첩 소원 빌고 싶사옵니다. 본디 소원은 비밀이온데… 나중에 소첩 소원이 이루어지거들랑 전하께 고해 드리겠나이다.
백경화는 그리 한참을 이연의 손을 덮은 채 속닥거렸다.
제 얼굴 위로 떨어지는 물기를 가슴으로 받아 담으며.
조용하고 깊숙이, 살생부 명단에 유란주호 이름자를 써넣은 백경화는 새빨간 눈의 이연을 데리고 후궁전으로 돌아왔다. 어찌 나갈 때보다 안색이 더 나빠진 이연의 모습에 무슨 일이 있었구나, 하고 어렵지 않게 유추한 후궁전 궁인들은 조금 더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사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무주공산 후궁전에 배치되었을 때 인생 끝났다, 한탄하던 이들은 상전 모시는 것도 어느 정도 게을리하였다. 그러던 중 한 궁녀가 궁 밖으로 내쫓기는 사건이 일어났다. 공빈의 사라졌던 금가락지가 그 방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끝내 치도곤을 당하고 퇴출당한 궁녀가 간간이 대비전 명령을 받고 공빈의 일거수일투족을 고해바쳤다는 것을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거의 반병신이 되어 출궁당하는 궁녀를 바라보던 공빈의 싸늘한 시선에 그들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말았다. 그 궁녀가 주장하던 누명이 누구에 의해 이루어졌는지, 그 순간 모두가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공빈이 결코 만만한 자가 아니란 것을 뼛속 깊이 새겼다.
그 후 공빈을 대하는 태도도 자연스럽게 변했다. 시중드는 것에 모자람이 없어지고, 웃전을 모시는 것에도 경건함이 담겼다. 정신 차려 보니 그들은 어느새 그런 마음으로 이연의 시중을 들고 있었다.
백경화가 무엇을 보고 궁에 들었는지는, 그 곁에서 조금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그는, 왕을 원했다.
작고 작은, 아무런 힘도 없이 이리저리 휘둘러지는 어린 왕을.
그리고 눈치 빠른 자들은 곧 이 궁 안에 피바람이 몰아닥칠 것이란 사실을 예감했다.
“잠시만… 나 혼자 있게 해 다오.”
“전하…….”
“잠시면 된다.”
“…….”
백경화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를 돌아본 이연이 못을 박듯 일축했다.
“들어오지 말거라.”
탁- 눈앞에서 닫히는 문을 백경화는 황망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아직 마음을 다스리지 못한 것일까.
‘하긴 쉬이 다스려질 만한 일도 아니지.’
그네들 하는 짓이 그리 망측한데, 그 모든 모욕을 지난 세월 동안 오롯이 홀로 감수해야 했던 그 심정이 오죽할까. 백경화는 그동안 혼자 속앓이했을 이연이 애달프고 아련해서 수차례 제 가슴을 치며 이를 갈았다. 그런 개같은 만남이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다면, 산책 따위 나가지 않는 거였다. 그냥 침전에서 둘이서만…….
거기까지 생각한 백경화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왜 그것들 때문에 이연이 바깥나들이를 못 해야 한단 말인가.
‘미리 더러운 것들은 얼씬도 못 하게 길을 치워 놓았어야 했는데.’
짧게 혀를 차며 반성한 백경화는 살생부 명단에 새겨진 유란주호의 이름을 진하게 덧칠했다.
어찌 죽여 주어야 할까. 가죽을 벗겨 육시를 할까. 아니면 양물을 잘라 그 입에 처넣을까.
그동안 숨죽이고 있던 잔악한 본성이 제 안에서 꿈틀거리는 것을 선연히 느끼며 백경화는 미소 지었다. 실로 모골이 송연해질 정도로 써늘한 미소였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오래가지 못했다.
와장창! 챙그랑!
닫힌 문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백경화는 번뜩 고개를 들었다. 잘못 들은 것이 아니다. 굳게 닫힌 문 안에선 끊임없이 무언가 부서지고 깨지는 소리가 났다.
“……!”
방 안엔 이연뿐이니 소리의 주체야 말해 입만 아플 뿐이지만 백경화는 걱정을 숨기지 못하고 문 앞을 미친 듯이 서성거렸다. 들어오지 말라 하였으니 그 명을 어기고 들어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고 계속 밖에서 이러고 있자니 속이 문드러졌다.
다행히도 백경화의 고민은 오래가지 않아 끝났다.
“읏……!”
“전하!!”
작게 앓는 소리에 더 이상의 생각이고 뭐고, 몸이 먼저 움직였다. 망설임 없이 문을 열고 안으로 달려 들어간 백경화는 방 안의 참상엔 시선 하나 주지 않은 채 이연의 안색만을 살폈다. 그 참상의 주범일 게 확실한 이연의 헐떡이는 작은 등을 바라보며 안절부절못할 뿐.
“전하, 어디 다치셨는지요. 태의를……!”
“…내가… 헉… 들어오지 말랬잖……느냐…. 후우…!”
“하오나!”
어디를 다친 건가 싶어, 백경화는 이연의 모습을 빠르게 훑었다. 그런 그의 시선에 이연의 손바닥이 들어왔다. 방금 전까지 그의 눈을 덮고 있던 작은 손이 피로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전장에서 홀로 적군과 마주쳐도 느끼지 못했던 공포를 느낀 백경화는 잽싸게 그 손을 잡아 눈앞에 들어 올렸다. 무엇에 긁혔는지 반 이상 찢어져 속살을 보이고 있는 손바닥에 그의 시야가 하얗게 점멸했다.
“전하! 어서 치료를……!”
“내버려 두거라. 이깟 것으로 죽겠느냐.”
“전하!!!”
“…….”
숨넘어갈 듯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이연은 무거운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백경화를 눈에 담았다. 다친 건 저이건만, 아프다 우는 것은 그가 하고 있다. 그 모습에 마음을 정하듯 괴롭게 눈을 질끈 감았다 뜬 이연이 말했다.
“난… 앞으로도 이리 살 것이다. 돌멩이보다 못한 취급 받으며… 이리저리 치이며… 이리 살 것이다.”
“전하… 지혈하겠나이다. 잠시… 잠시만 고통스러우시더라도 참으소서.”
이연의 말을 듣는 건지 마는 건지, 백경화는 제 치맛자락을 찢어 이연의 손에 감기 시작했다. 천을 쥐고 감는 그의 강한 손이, 그 다정한 손이 떨리는 것을 지켜보며 이연이 말을 이었다.
“그렇게라도 살고 싶었다. 이 자존심이 다 헤집어지더라도… 그리 살려 했다.”
“전하… 피가 멈추지 않습니다. 제발, 손에 힘을 푸소서……!”
“…….”
애절하게 제게 청하는 백경화는 진실로 이연의 눈에 아리따워 보였다. 그렇기에 이연은 웃으며 생각하고 있던 바를 말할 수 있었다.
“그러니 너는 이만 이 궁을 나가거라.”
우뚝, 백경화의 손이 멈췄다.
굳은 듯, 혹은 시간이 멈춘 듯 움직이지 않던 백경화가 고개를 들어 이연을 마주 본 것은 조금 뒤의 일이었다.
“…전하?”
“대비께 청한다면 다시 복권할 수 있을 것이다.”
“…어찌하여…… 그런 말씀 마옵소서.”
정말로 못 들을 말을 들었다는 듯, 새하얗게 질린 백경화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이연이 계속해서 말했다.
“나는… 이 궁이 지긋지긋하다. 될 수 있다면 범부(凡夫)가 되고 싶었으나… 그리할 수 없을 게야. 하지만 그대는 아직 늦지 않았음이야.”
“전하… 소첩이 무엇을 잘못하여서 그러시는지요……?”
“그럴 리가…….”
백경화가 잘못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렇기에 이연은 진심을 담아 말했다.
“그대는 내게 과분하다.”
“…그, 그렇지 않사옵니다. 그런 말씀 마옵소서.”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것을… 어찌 그대만 몰라.”
모르더라도 상관없었다. 그가 눈 감고, 귀 닫으면… 그리해서 곁에 있을 수 있다면 그리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백경화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어린 왕은 잔인했다.
“그대가 먹은 비약에 대한 해독제도 대비께서 가지고 계실 것이야. 그것만 먹으면 조금의 시간이 걸리더라도 그대의 무공은 모두 본래대로 돌아오겠지.”
“전하… 필요 없나이다. 그저 곁에만…….”
곁에만 있게 해 달라, 백경화는 그리 매달렸다. 이제 더 큰 것 바라지 않겠다며, 내치지만 말아 달라 하였다. 그러나 이연은 그럴 수가 없었다. 오늘 일로 깨달았다. 대비는 슬슬, 그를 버리려 하고 있었다.
버리는 것이 궁에서 내치는 것만으로도 끝난다면 그도 백경화의 곁에 있고 싶었다. 든든하고 따뜻한 그 품 안에서 평화롭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이 아니니까. 필요 없다고 버리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니까.
그는, 곧 죽을 것이다.
죽게 될 것이다. 그리되면, 늦는다. 백경화도 무사하지는 못할 것이다. 제게 이리 살갑게 대하는 백경화를, 대비가 살려 둘 리가 없었다.
두 눈을 감았다 뜬 이연은 흔들리고 있는 백경화의 두 눈을 똑바로 직시하며 덧붙였다.
“명일 내가 직접 대비께 고할 것이다. 그대 비록 폐서인의 몸이 될 것이나, 그것은 시간이 해결해 줄 터. 그러면 그대는 원래의 삶을 살아.”
“싫습니다.”
다분히 내질러진 거부의 말인데도 이연은 싫지 않았다. 오히려 심장 한편이 주체할 수 없이 떨렸다. 그는 터질 듯 뛰는 심장을 달래며 백경화에게서 한 걸음 물러섰다.
움찔, 백경화의 손끝이 잘게 경련했다.
그것을 보았음에도 이연은 고개를 돌리고, 마지막 말을 내뱉었다.
“내 오늘은 다른 침전에서 침수 들 터이니… 궁 안에서 마지막 밤, 편히 보내…….”
“싫다 하지 않습니까, 전하.”
이연은 말을 끝맺지 못했다. 제 앞으로 뻗어 나온 손이 돌연 이연의 고개를 잡아 돌린 탓이다.
이연의 입술에 백경화의 것이 닿아 온 것은 그 직후였다.
삼키듯 이연의 입술을 덮은 그것은 조금은 거칠게 이연의 입술을 벌리고 안으로 파고들었다. 갑작스러운 사태에 반항하는 것도 잊은 채 입술을 내어 주고 만 이연은, 자신의 입 안을 제 것처럼 휩쓸고 다니는 백경화의 혀를 멍하니 방치했다. 깊은 입맞춤이었다. 숨을 먹고, 호흡을 흩트리는… 그야말로 불꽃 같은…….
“그대, 이게…….”
“…….”
이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떨어졌던 입술이 다시 찾아 들었다. 그러나 방금 전, 화인(火印)을 새기는 것같이 뜨겁던 입맞춤은 어딜 가고 부드럽게 이연의 입술 위로 내려앉은 백경화의 입술은 말 못 하는 짐승이 애정을 갈구하듯 애틋하기만 했다.
그때, 이연의 멍한 머릿속으로 백경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연모(戀慕)하나이다.”
바르르, 이연은 닿아 있는 입술이 떨리는 감촉을 느끼며 눈가에 맺혀 있던 것을 홀연히 흘리고 말았다.
…알아…….
알고 있어…….
그도 바보가 아니었다. 사내가, 무엇 하나 모자란 것 없는 사내가 제게 이리 대하는 바를, 그 이유를 모를 리가 없다.
한 번도 사랑받지 못했다 해서, 어찌 사랑받는 그 감각을 모를까.
그때, 다시 한번 백경화의 고백이 들려왔다.
“은애하고 있습니다, 전하…….”
이 마음 깊이… 저의 모든 것이 전하를 향해 있나이다.
귓가를 파고드는 달콤한 목소리에 이연은 고개를 내저었다. 안 된다. 죽을 자리 봐 둔 자신이 아니던가. 백경화까지 끌어들일 수는 없었다.
처절하게까지 느껴지는 거부에 손을 뻗어 이연을 끌어안은 백경화는 고개 숙인 채 진지하게 고백했다.
“연모하나이다. 오랜 시간… 전하만 보았습니다. 무엄하게도 전하를 이 가슴에 품고 살아왔나이다…. 받아 달란 말, 감히 하지 않사오니… 그저 곁에만 있게 해 주십시오.”
“…놓아라…….”
“전하… 제발…….”
숫제 애원조인 백경화의 말을 듣는 이연의 가슴도 저릿하게 아렸다. 그러지 마라. 그대처럼 완벽한 이가 그럴 필요 없다. 그리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연은 그 손을 물리고 돌아서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한 걸음 멀어질 때마다 이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당장 울음이라도 터트릴 것 같은 그 얼굴을 미처 보지 못한 백경화가 바닥에 미끄러지듯 주저앉으며 간청했다.
“정 아니 되겠다 하시면, 간절히 청하옵나이다.”
그대로 두 손을 모으고 이마를 박은 백경화는 피 토하는 심정으로 고했다.
“가시기 전 이 목 치고 가소서.”
“……!”
놀라 멈추는 이연을 향해, 백경화가 다시 한번 청했다.
“마지막으로 이 숨, 전하께서 거두어 주소서.”
“…그만하라!”
“…….”
그의 말에도 불구하고 백경화는 엎드린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제 맘을 몰라도 너무 몰라주는 답답한 모습에 이연은 제 가슴을 두드리다 소리쳤다.
“내게 이러지 마라. 정녕 내 마음 몰라 이러는 것 아니지 않느냐!”
“…….”
“그러니 그만하라.”
더 이상 아프게 하지 마라─ 그리 속삭인 이연이 다시 돌아서려 하자, 백경화가 먼저 선수를 쳤다.
“이리 죽으나, 저리 죽으나 같다면… 전하의 곁에서 죽겠나이다.”
“…그런 말 마라…….”
힘없이 돌아온 이연의 말에 백경화는 그제야 엎드려 있던 몸을 느릿하게 들어 올렸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주르륵 흘러내리는 그의 모습은 상황도 잊고 빠져들 정도로 아리따웠다.
“제 한 몸 지키고자 하였으면, 처음부터 이 자리를 달라 청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전하야말로 어찌… 어찌 이 미천한 마음을 그리 몰라주십니까.”
진득한 한숨을 내쉰 백경화가 흥분한 속을 다스리듯 몇 번 호흡한 뒤 조심스레 두 손을 뻗었다.
“저에겐… 전하만 계시면 됩니다.”
“…나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다. 천하의 자리라 하나… 단 하나 가진 목숨마저 위태롭다.”
네게 줄 것도 없다, 작게 따라붙은 말에 백경화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맺혔다. 그 하나가 제게 얼마나 큰지, 얼마만큼이나 욕심나는 것인지 어떻게 전해 줘야 할까.
“소첩이 지켜 드릴 것이옵니다. 그것을 증명해 보일 수 있는 기회를… 전하, 부디…….”
“…….”
안 된다.
…안 된다…….
……정말 안 될까?
저 손 잡으면, 정말 아니 되는 걸까.
망설임으로 흔들리는 이연의 모습에 백경화는 애가 탔다. 잡지 않으면 어쩌나. 그럼… 그럼 모두 죽이고 나도 죽을까. 오장육부가 끊겨도 대비의 목을 잘라 그에게 주고… 그리 죽을까.
결국 다가오지 않는 이연의 모습에 백경화의 마음이 까맣게 죽어 갈 때… 돌연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울음에 묻혀, 너무나 약한 목소리였지만, 백경화에겐 쩌렁하니 울리는 그 말이.
또렷하게 들려왔다.
“그대가… 오라… 나는, 미안해서 갈 수 없으니… 그대가 와… 죽을 자리, 그대가 들어와.”
순식간이었다. 빠르게 몸을 일으켜 이연에게 다가간 백경화의 두 손이 이연을 감싸 안았다. 언제 괴롭게 내려졌냐는 듯, 순식간에 제가 품을 존재를 찾아 안아 들었다.
“전하……! 전하…….”
“후회하지 마라… 나는, 분명 놓아주려 하였음을.”
“전하……!”
백경화는 혹 놓칠세라 단단히 끌어안은 이연의 얼굴에 제 볼과 이마를 끊임없이 부비며 입술에 닿는 이연의 모든 것에 입 맞췄다. 이연의 눈가에 닿은 그의 입술이 진득하게 눈물을 핥았다.
끊임없이 제 입술을 적시는 그 눈물을, 하염없이 받아 마셨다.
다디단 무언가를 삼키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