一
제화국의 현왕은 올해 갓 성인이 된, 채 소년의 느낌을 지우지 못한 어린 군주였다. 휘는 ‘이연(李演)’, 자는 ‘주언(株偃)’으로 즉위한 지 8년, 관례를 치르고 혼례를 올린 지 4년. 그럼에도 왕은 대비에게 대리청정을 맡긴 채 정사에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약한 몸을 핑계 삼아 조례는 물론, 상소문 하나 읽지 않은 채 침전에 틀어박히는 생활 일색. 그럼에도 누구 하나 왕의 행동에 입을 대지 않았다. 왕실 어른인 대비마저 문안 한번 제대로 여쭙지 않는 왕의 행동을 허허로이 웃으며 용인하니, 또 누가 있어 왕의 행동을 타박할 수 있으랴.
그만큼 왕은 고립되어 있었다. 넓디넓은 궁 안, 오로지 그 혼자.
“콜록! 콜록…!”
밭은기침을 터트리며 소년은 눈을 떴다. 목구멍이 따끔거리고 머리가 어질한 것을 보니 어젯밤부터 보이던 고뿔기가 드디어 도진 것이 분명했다. 옅은 한숨을 내쉬며 소년은 머리맡에 놓여 있던 자리끼1)를 들고 천천히 들이켰다. 그러나 그 순간 터진 기침에 소년은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한 채 연신 몸을 떨었다. 이쯤 되면 상궁 하나 들 법하건만, 굳게 닫힌 문은 미동도 없었다.
“후…….”
겨우 진정된 속을 다스리며 잔숨을 내쉰 소년은 흐릿해진 시야를 들어 방 안을 살폈다. 적막하고 고요한 방 안에는 온기 하나 없다. 사치스럽게 꾸며진 방 안, 어둠으로 물든 사각지에서 자신을 노려보는 시선들만이 느껴질 뿐.
혼자 살아남은 배반자를 향한 살의. 너도 어서 이곳으로 오란 듯 보이지 않는 아귀들의 손이 당장에라도 소년의 목을 조를 것만 같았다.
“…….”
콜록… 소년은 밭은기침을 터트리며 들고 있던 그릇을 놓고 다시 이부자리로 파고들었다. 제 체온으로 덮여 있던 것이 고새 식어 찬기가 흘렀지만 소년은 아랑곳없이 그곳에 몸을 묻고 두 눈을 감았다.
어찌 됐든, 오늘도 소년은 살아남은 것이다.
* * *
“연회, 말씀입니까?”
어린 왕- 이연은 지나가듯 제게 던져진 말에 맛도 느껴지지 않는 차를 마시던 것을 멈추고, 온화한 낯의 대비를 향해 되물었다. 그러자 미소 띤 얼굴로 남은 차를 마저 비운 대비가 답했다.
“예, 연회라 하였습니다.”
“갑자기 왜 연회를…….”
이연은 떨어지지 않는 입을 겨우 움직여 아무것도 모르는 양 두 눈을 깜빡였다. 그리하자 모자란 것들 보듯 잠시 눈살을 찌푸리던 대비가 낮게 혀를 차며 입을 열었다.
“내 방금 말했지 않아요. 북쪽 국경을 넘은 이란국을 패퇴시키는 것에 큰 공을 세운 이가 있노라고. 그자를 치하하기 위한 연회임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주상.”
“…그자라 하심은.”
이연의 말에 입꼬리를 길게 끌어 올린 대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백가의 백경화 장군 말입니다.”
“…….”
이연은 그리 말하며 더욱 깊게 미소 짓는 대비를 바라보다 제 손에 들린 찻잔으로 시선을 내렸다. 분명 대비의 말은 크게 틀린 바가 없다. 하지만 이란국을 물리친 것에 대한 승리 연회라면 모를까, 그 하나를 위한 연회란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분명 또 다른 속내가 있을 터.
거기까지 생각한 이연은 잔을 내려다보던 시선을 들어 대비를 마주한 채 미소 지었다.
“뜻대로 하소서, 어마마마.”
“그리할 것입니다, 주상.”
“…….”
흡족함을 담은 미소와 함께 돌아온 대답이 묵직하게 어깨 위로 내려앉았지만 이연은 웃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본디 그녀에게 있어 그의 가치는 이 정도였다. 말 잘 듣는 인형. 제 뜻대로 움직여 줄, 허수아비 왕.
이연이 그리 속없이 웃고 있자, 드디어 대비가 은근한 어조로 속내를 비쳐 왔다.
“사실 내 그를 사위 삼으려 하니, 주상께서 좀 나서 주지 않으시렵니까?”
“누구와 짝지어 주고 싶으신지요?”
선뜻 돌아온 물음에 잠시 눈을 내리감았다 뜬 대비가 답했다.
“윤화공주 말이에요. 올해 열여덟이 되었으니 그 아이의 배필로 딱이지 않습니까.”
배필은 무슨.
성정이 잔학하고 포악하여 대비의 입김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데려가지 않으려 하는 것이 윤화공주다.
그녀도 처음부터 그리 모질었던 것은 아니었다. 단지 아들이 아니라는 이유 하나로 돌아보지 않는 모정을 갈구하다 크고 작은 말썽을 부리던 성격이 그대로 굳어지고 말았다. 그러다 제 외모를 보며 대비가 값을 매기듯 평한 ‘공주는 참 어여쁘니 후에 제국으로 시집갈 수도 있을 것입니다.’란 말에 기본 소양을 쌓는 것보다 외모 가꾸기에만 신경을 썼다. 허니 지금의 윤화공주가 있기까지는 대비의 탓이 제일 컸다. 그런 그녀라도 외모는 대비를 닮아 가히 발군이라, 대비가 자신의 장기짝으로 이용하려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이로 곧 권력의 중심에 설 사내를 낚으려 함을 어찌 모르겠는가. 듣기론 윤화공주가 백경화 장군을 한 번 보고 마음에 품었다 하니 금상첨화였겠지.
여기까지 생각한 이연은 부드럽게 웃으며 대비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모든 것은 어마마마의 말씀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리 말하며 순응하듯 바닥으로 눈을 내리까는 이연을 대비는 만족스럽게 바라보며 웃었다. 마치 천상의 자리에 앉아 있는 것처럼 오만하기 짝이 없는 미소였다.
그리고 이연은, 그것이 틀리지 않은 사실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연회는 승전보를 울리고 백경화가 귀환한 날에 바로 열렸다. 미리 통보를 받고 모든 준비를 마친 이들은 먼저 연회장에 자리를 잡고 주인공이 등장하길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왕과 왕비, 대비 또한 마찬가지였기에 이미 연회는 시작되었다고 봐도 무방했다. 희희낙락 웃으며 제 권력을 과시하는 그 무리들 사이에서 이연은 제 앞에 놓인 상을 조금씩 비우며 무료함을 달랬다. 곁에 앉아 있는 왕비에게서 풍겨 오는 사향도 거북스럽고, 앞다투어 대비에게 잘 보이려 꼬리 치는 대신들의 모습도 역겨웠다. 그러나 그중 가장 크게 신경 쓰이는 이는 온화한 미소를 띤 채 윤화공주를 곁에 앉히고 단 아래를 살피고 있는 대비였다.
선왕의 후비로 들어와 왕자 하나와 공주 셋을 낳을 정도로 지극한 사랑을 받았던 대비는 본 나이에 비해 훨씬 젊은 미모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등에 업고 승승장구한 것은 바로 그녀의 친가, 유란가(家)였다. 선왕의 총애를 등에 업고 차츰 권력을 쥔 그녀와 그녀의 가문은 이제 모든 정권의 중심에 서 있었다. 궁 안 곳곳이 유란가의 사람으로 채워져 세를 불리니, 대비의 권력은 무소불위와도 같았다. 그런 틈 속에서 말단 후궁의 태를 빌려 태어난 이연이 왕위에 앉을 수 있었던 이유는 단 하나였다.
바로 유약함. 언제 죽어 나자빠지더라도 의심 하나 사지 않을 나약한 이라서.
“…….”
피식, 저도 모르게 비웃음을 터트리고 만 이연은 손을 뻗어 술잔을 들고 단숨에 비워 냈다. 홧홧한 불길이 목을 타고 넘어가는 선명한 감각에 잠시 미간을 찌푸렸던 이연은 곧 저를 흘깃대는 왕비의 시선에 답하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 왕비는 무어라 말할 것처럼 입술을 몇 번 달싹였으나 곧 이연을 외면하듯 고개를 돌렸다. 그제야 이연은 억지로 짓고 있던 미소를 거둘 수 있었다. 그래, 틀린 말 하나 없다. 이연이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약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면 어떤가. 결국 마지막까지 살아남았고, 왕위에 올라 삶을 연명하고 있는 것도 그였으며, 그 대단한 유란가의 여식을 왕비로 맞이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니 새삼 비참해할 필요 없지…….”
제 귀에마저 들리지 않을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린 이연이 막 고개를 든 찰나였다.
문밖, 드디어 기다리던 이의 입회 알림이 들려왔다.
남자는 당당하고, 아름다웠다. 연회장에 어울리지 않는 행색─ 피에 젖은 갑주 차림 그대로 연회장 중심을 가로지르는 걸음 또한 망설임이 없었다. 그 모습을 연회장 안 모두가 숨을 죽이고 지켜보았다. 방금까지 저가 가장 잘났다 앞다투어 떠들던 대신들도 입을 다물고 이빨 빠진 호랑이 노릇을 하였고, 치기와 허세로 가득 차 있던 호위들도 몸을 굳히며 잔뜩 긴장했다.
그것은 곁에 앉아 있던 왕비와 대비 또한 마찬가지라 어린 왕은 슬며시 삐져나올 것 같은 미소를 얼른 감췄다. 그러다 도리어 속이 쓰려서 이연은 조금 씁쓸하고 시기 담긴 얼굴로 제게 다가오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아야만 했다.
수많은 시선 속에도 불구하고 태연한 낯으로 왕의 앞에 시립한 남자는 그 무엇에도 신경 쓰지 않은 채 오로지, 왕- 이연만을 향해 부복한 뒤 입을 열었다.
“신(臣), 백경화. 칙명을 받들어 국경을 넘은 이란국을 패퇴시키고 귀환하였음을 전하께 아뢰옵니다.”
깊이 있는 목소리가 묵직하게 연회장을 울렸다. 숨길 수 없는 경애의 목소리가 오로지 이연만을 향한다. 놀랍도록 정중하고 경건한 모습에 잠시 놀라 몇 번 입술을 달싹이던 이연은 그 순간 제게 닿아 오는 대비의 시선에 얼른 얼굴을 굳혔다. 지금 이연이 신경 써야 하는 것은 생전 처음 받아 보는 신하의 충의보다 자신의 안위였다. 가식적인 웃음과 거짓으로 꾸며진 이곳에서 믿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자신 하나뿐이니까.
그러니 이연은 제가 맡은 역할을 충실히 해내야만 했다.
“…수고하였다. 내 그대의 공은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들었음이니, 그대 같은 충신이 있어 마음이 든든하구나. 오늘 이 자리는 그대를 위해 마련한 자리이니 맘껏 즐기도록 하라.”
“감읍할 따름이옵니다, 전하. 미처 더러운 피를 지우지 못하고 알현함을 부디 용서하소서.”
“전장에서 돌아오자마자 부름에 급히 걸음 한 듯하오니, 전하께오서 넓은 아량으로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귀를 파고드는 목소리에 섞인 진심에 이연은 저도 모르게 신경 쓰지 마라 답하려던 것을 곁에 앉아 있던 왕비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문득 울컥, 무언가가 속에서 치솟았지만 이연은 언제나 그러했듯 그것을 털어 내며 백경화를 치하할 뿐이다. 그러다 문득,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아름다운 남자가 하필이면 윤화공주의 것이 된다니. 지금 이 자리, 나아가 궁 안 누구보다도 가장 강인하고 아름다운 남자가 누군가의 손에 떨어진다고 생각하니─ 아까워 미칠 것 같았다.
지금 이곳에서 오로지 윤화공주만이 눈을 빛내며 이연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그 모습에 잠시 한숨을 삼킨 이연이 정해진 수순대로 입을 열었다.
“그보다 내 그대의 이번 공로를 크게 치하할 터이니 원하는 바가 있거든 말해 보거라.”
“전하, 미천한 소신에게 청이 하나 있사옵니다.”
“…!”
이연은 백경화의 말에 잠시지만 숨결을 흐트러트리고 말았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되돌아온 말이 퍽 당황스러웠던 탓이다. 설마 정말로 청할 줄도 몰랐거니와 이렇게 된다면 대비가 바라던 것을 포상으로 내릴 수 없게 된다. 지금까지 묵묵히 지켜보고 있던 대비의 표정마저 언뜻 굳는 것을 확인한 이연은 저도 모르게 되묻고 말았다.
“…그게, 무어냐?”
그 순간, 부복한 자세로 고개를 조아리고 있던 백경화가 얼굴을 들고 이연을 직시했다. 시선이 마주치고 백경화의 얼굴에 미소가 스친 찰나, 이연은 제 귀로 닿아 온 백경화의 청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부디 청하옵건대, 소신을 전하의 후궁 삼아 주시옵소서.”
뭐?
혹 제가 잘못 들었나 싶어 사태를 파악하기 위해 숨을 죽이고 있던 이연은 점차 술렁임이 번져 가는 연회장의 모습을 보고서야 결코 혼자만의 착각이 아니란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깨닫는 것과 이해하는 것은 달랐다. 도저히 믿기지 않는 이 사태에 이연의 정신이 점차 멀어지려는 그때, 쐐기를 박듯 백경화의 목소리가 다시 한번 연회장을 가로질렀다.
“이 미천한 몸 거두시어, 전하의 후궁 삼아 주소서. 소신, 그것만이 유일한 청이옵나이다.”
하나같이 화려하게 치장하고 잘난 듯 스스로를 뽐내고 있던 이들을 순식간에 뜨악한 침묵에 빠뜨린 백경화는, 누가 보더라도 진정한 연회의 주인공이었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사내 후궁이라니요!!”
“그렇습니다, 전하!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이것은 왕실을 기만하고 욕되게 하는 짓입니다!”
목소리를 높이고 소리치는 대신들을 바라보면서도 이연은 그들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멍멍한 귀로 이명만이 들려올 뿐, 무엇 하나 제대로 된 단어로 들리지 않았다. 그저 보이는 것은 이 모든 상황을 만들어 놓고도 태연한 낯으로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백경화였다.
얼마나 그렇게 반쯤 넋이 나간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을까. 이연은 백경화와 시선을 맞춘 채 멍청히 눈만 깜빡이다 슬며시 고개를 숙이고 웃는 그의 모습에 흠칫 정신을 차렸다. 무겁게 입을 닫고 관망만 하고 있던 백경화의 입이 열린 것은 바로 그 직후였다.
“전하, 소신 무엄하나마 한 말씀 올려도 되겠사옵니까?”
“…말하라.”
“소신, 비록 몸 쓰는 것밖에 할 줄 모르는 무지한 이라 하나 전하께서 제게 내려 주신 것을 거두어 가시지는 않으리라 생각하옵니다. 소신은 금은보화도, 높은 지위도 바라지 않사옵니다. 그저 가장 가까운 곳에서 전하를 모시는 것만이 제 유일한 바람임을 부디 헤아려 주시옵소서.”
“……그러한 것이라면 굳이 후궁이 아니라도 되지 않는가.”
“소신이 바라는 것은 하나뿐이옵니다.”
먼저 바라는 것을 말해 보라 한 것은 분명히 이연이었다. 하지만 그 말은 준비한 것을 내리기 위한 포석임을 여기 있는 모두가 알고 있다. 그런데 지금 백경화는 그 말을 걸고넘어지며 오로지 바라는 상은 그것 하나니 들어 달라 생짜를 부리고 있는 것이다.
이연은 입술을 깨물며 백경화를 바라보다 주먹 쥔 손으로 시선을 내렸다. 도대체 이이가 무엇을 바라고 제게 이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멀리 변두리에 나가 전쟁만 치르던 자라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제 신세를 몰라 이러는 것일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던 이연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민 것은 의외의 인물, 대비였다.
“그 말이 맞습니다, 주상. 어찌 천하의 주인 된 자가 한 입으로 두말을 하겠습니까.”
백경화를 빼면 그중 가장 태연한 낯으로 상황을 지켜보던 대비가 부드럽게 웃더니 저를 놀란 눈으로 바라보는 이들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하나하나 눈에 담다 마지막으로 백경화에게 시선을 고정한 대비가 그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런데 장군, 그대는 어찌 사내 된 몸으로 주상의 후궁이 되고자 하오. 내 원하면 다른 어여쁜 왕족 아기와 연 맺어 줄 터이니 말을 거두심이 어떻소?”
“황공하옵게도 대비마마, 제가 모시고 싶은 분은 오직 전하 한 분뿐이오니 그 명 거두어 주시옵소서.”
백경화는 들어주는 듯하면서도 회유하려는 대비의 말을 단숨에 거절한 뒤 재차 강조했다.
“미천한 이 몸이 진정으로 모시고 싶은 이는 전하 단 한 분뿐이시옵니다.”
“…그렇다면, 내 더 이상 말하지 않으리다.”
이연은 못마땅함으로 눈매를 좁히면서도 미소 지은 채 한발 물러서는 대비를 불안한 기색으로 흘깃거렸다. 혹 이것으로 대비의 눈 밖에 나기라도 하면……. 흠칫, 그는 제 생각에 몸을 사리며 숨죽인 채 대비와 백경화를 주시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대비였다.
“그런데 이걸 어쩌나. 장군은 주상을 모시기엔 적합하지 않은 몸이 아니오.”
“이미 사내로 태어난 것을 바꿀 수는 없으나, 성심을 다하여 전하를 보필할 것임을 천지신명께 맹세하옵니다.”
“그것 말고 장군에겐 더 큰 문제가 있지 않소.”
갑작스러운 대비의 말을 이해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것은 백경화 또한 마찬가지라 청산유수와도 같이 대비의 말에 답하던 그의 입이 다물렸다. 그러자 소매로 제 입가를 가린 대비가 말을 이었다.
“그대는 무공을 아는 자라, 검을 들지 않고도 주상을 해할 수 있는 몸. 그런 자를 어찌 후궁전에 들여 주상과 같은 침소를 쓰게 한단 말이오.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오.”
술렁, 대비의 말에 그제야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대신들의 입가에도 회심의 미소가 맺혔다. 그렇다. 어찌 무공을 익힌 자를 주상과 동침시키랴. 모두는 대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백경화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고개를 숙인 채 백경화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마치 이어질 대비의 말을 기다리기라도 하듯.
그 고집스러운 모습에 눈을 가느다랗게 뜬 대비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을 이었다.
“아무리 그대가 맹약한다 한들 그는 있을 수 없는 일. 하지만 혹- 그대가 무공을 폐한다면 내 흔쾌히 그대를 며느리 삼으리다.”
흡! 이연은 대비의 말에 급히 숨을 들이켰다. 이 같은 반응을 보인 것은 그만이 아니었다. 대신들 모두 안색이 질린 채 대비를 바라보고 있었다. 잔인하다. 어찌 무인에게 스스로 무공을 폐하라 할 수 있단 말인가. 이연은 이 지지부진한 싸움이 대비의 승리로 끝날 것임을 예감했다.
그 예감이 보기 좋게 빗나간 것은, 백경화가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대비를 향해 답했을 때였다.
“그리하겠나이다, 대비마마.”
잔잔한 목소리는 흔들림 하나 없었고, 안색 하나 흐려지지 않은 얼굴은 평온하기만 했다. 심지어 매끄럽게 휘어진 입술 선은 곱기만 하다. 마치 이 모든 것을 예견이라도 한 듯 태연했다.
놀랍게도 그는, 웃고 있었던 것이다.
* * *
밤은 깊고, 어두웠다. 달조차 숨어 버린 듯 어둠이 내려앉은 곳은 바람 스치는 소리마저 들려올 정도로 고요했다. 그 지나친 고요함이 숨기지 못한 긴장감을 말해 주는 듯하여 이연은 설핏 미간을 찌푸리고 말았다. 부러 끈 등불이 무엇을 말함인지 모르지 않는 탓이다. 최소한의 인원만을 남겨 둔 채 모든 발길을 물리고, 남은 자들마저 최대한 조심스러운 몸가짐을 유지하며 조용히 자리를 지켰다. 이 모든 것이 후궁전 안, 가장 긴장하고 있을 누군가를 위한 배려임을 어찌 모르리.
이 밤의 고요함은 오로지 그 하나만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
픽, 내관이 비춰 주는 희미한 등불에 의지하여 걸음을 내딛던 이연의 입가에 비소가 서렸다. 이게 무슨 짓인가. 진정 우습지도 않다. 그리 박대하더니 그 대단한 법도는 다 챙길 요량인가 보지.
막 씻은 탓인지 몸을 타고 전해져 오는 공기가 유난히 싸늘했다. 그러나 이연은 평소라면 치를 떨었을 한기에도 불구하고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
‘비록 사내라 하나 후궁으로 들였으니 초야는 치러야 하지 않겠습니까, 주상.’
이연은 오늘 나누었던 대비와의 대화를 떠올리며 이를 악물었다. 그 또한 첩지를 받은 백경화가 입궁하였다는 소식을 접한 후였다. 웬일로 그의 침소로 직접 걸음 한 대비는 자리에 앉자마자 그리 입을 열었다. 어쩔 수 없이 들인 후궁이라 하나 법도는 따르라고.
‘어마마마… 그 무슨 해괴한 말씀이시옵니까?’
‘아무리 해괴하다 하여도, 궁의 법도가 그러한 것을요. 이제 그는 정식 첩지를 받은 주상의 빈(嬪)이 아닙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