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서(1권) (1/14)

그 남자가 연회장으로 들어서자 모두는 숨을 죽였다. 전신에서 느껴지는 압도적인 패기(覇氣). 딱히 과시하는 것 같지도 않건만 그에게선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강인함이 느껴졌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주위를 평정한 그가 바로 이번 전쟁의 일등 공신이자, 적장의 목을 수차례 베어 넘긴, 이 제화국이 자랑하는 젊은 장군 무제(武帝) 백경화였다.

그러나 무시무시한 명성과 달리 그의 모습은 가히 절세가인이라. 새빨간 피가 온몸을 적시고 있음에도 그 미모는 숨겨지지 않았다. 당당한 팔척장신 몸에 기백을 철갑처럼 두른 백경화는 절도 있게 왕과 그 일가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뒤 두 손을 모아 읍했다. 그 모습이 갓 그림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아름다워, 숨통을 조일 듯한 위압감 속에서도 시선을 떼기가 힘들었다.

연회장의 모든 시선을 받고도 안색 하나 변하지 않은 백경화가 입을 열었다.

“신(臣), 백경화. 칙명을 받들어 국경을 넘은 이란국을 패퇴시키고 귀환하였음을 전하께 아뢰옵니다.”

연회장을 울리는 목소리는 낮았지만 힘이 담겨 있는 미성이었다. 그에 자리하고 있던 몇 여인들이 가슴을 부둥켜 잡았으나 백경화의 관심은 오로지 하나였다. 바로 자신의 앞에 앉아 있는 어린 왕- 이연 말이다.

얼굴을 숙인 채 제 말을 기다리고 있는 백경화를 잠시 내려다보던 어린 왕이 무심한 얼굴로 답했다.

“수고하였다. 내 그대의 공은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들었음이니, 그대 같은 충신이 있어 마음이 든든하구나. 오늘 이 자리는 그대를 위해 마련한 자리이니 맘껏 즐기도록 하라.”

“감읍할 따름이옵니다, 전하. 미처 더러운 피를 지우지 못하고 알현함을 부디 용서하소서.”

왕의 말에 조용히 답한 백경화가 한마디 덧붙이자, 이번엔 왕의 곁에 앉아 있던 미인이 그를 거들었다. 현왕의 유일한 비인 유현왕비였다.

“전장에서 돌아오자마자 부름에 급히 걸음 한 듯하오니, 전하께오서 넓은 아량으로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

어린 왕은 왕비의 말에 잠시 미간을 찌푸리는 듯하였으나, 별말 없이 백경화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그는 되었다. 어찌 내가 그깟 것으로 공신(功臣)인 그대를 벌할까.”

“송구하옵니다, 전하.”

정말로 송구스럽다는 듯 고개를 조아리는 백경화를 바라보던 어린 왕은 아무도 듣지 못할 한숨을 속으로 삼키며 정해진 경로처럼 다음 말을 내뱉었다.

“그보다 내 그대의 이번 공로를 크게 치하할 터이니 원하는 바가 있거든 말해 보거라.”

그리 묻고 있지만 이미 포상은 정해져 있었다. 공을 치하하고, 재물을 내린 뒤 왕비와 대비가 바라는 대로 그를 윤화공주의 부마 삼겠다─ 그리 말하면 될 일이다.

생각지도 못한 이변이 일어난 것은 그때였다.

“전하, 미천한 소신에게 청이 하나 있사옵니다.”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잠시 침묵을 지키던 백경화가 정말로 제 바람을 입에 올린 것이다. 위압감에 짓눌려 있던 회장 안이 순식간에 술렁이고, 무표정하던 왕의 앳된 얼굴에도 차츰 당황이 떠올랐다.

“…그게, 무어냐?”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상황에 왕비와 대비마저 두 눈만 깜빡이고 있자, 왕은 저도 모르게 백경화를 향해 그리 되물었다. 그러자 두 손을 내리고 감히 허락도 없이 고개를 들어 왕의 얼굴을 직면한 백경화가 그 찰나, 미소 지었다. 순식간에 지나간 그 미소에 마주했던 왕마저 제 눈을 의심할 때, 청천벽력 같은 백경화의 청이 연회장을 덮쳤다.

“부디 청하옵건대, 소신을 전하의 후궁 삼아 주시옵소서.”

“……!”

“무, 무슨!!”

누군가의 입에서 새된 비명성이 터지고 경악이 연회장을 물들여도 백경화는 제 말을 물리지 않았다. 아니, 외려 그는 자신을 놀란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왕을 향해 읍소하며 다시 한번 청했다.

“이 미천한 몸 거두시어, 전하의 후궁 삼아 주소서.”

“!!”

“소신, 그것만이 유일한 청이옵나이다.”

급히 숨을 삼키는 어린 왕을 향해 두 번째 쐐기를 날린 백경화가 덧붙였다.

“소신이 바라는 것은 그 하나뿐이옵니다.”

조용하지만, 거대한 파급이 연회장을 휩쓰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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