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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제일청천(霽日靑天) (49/49)

외전 제일청천(霽日靑天)

시무룩한 얼굴로 터덜터덜 발을 내딛는 어린 왕자의 뒤를 따르는 유모의 표정이 어두웠다. 통통한 살굿빛 뺨이 이따금 씰룩거릴 때마다 그녀의 시름 또한 깊어졌다.

“아기씨, 이제 그만 처소로 돌아가시지요. 날이 저뭅니다.”

“아바마마는 어디에 계셔?”

바람이 찼다. 유모는 혹여 왕자의 뺨이 붉게 변할까 노심초사하며 하릴없이 발을 동동 굴렀다. 유순한 눈매의 왕자는 퍽 고집이 세서, 웬만한 일이 아니고서는 제 뜻을 꺾지 않으려 했다.

“전하께서는 귀빈들과 함께 계시지요.”

“피이, 나도 가고 싶은데…….”

입술을 삐죽거리는 얼굴에 아쉬움이 가득했다. 왕자는 몇 번이나 고개를 주억거리다가 신발 끝으로 바닥을 툭 찼다. 데구루루 굴러간 돌멩이 하나가 벽에 부딪혀 튕겨 나가는 모습에 유모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북성 담장 너머로 기름 냄새가 번졌다. 실로 오랜만에 맡아보는 기름진 음식 냄새에 어린 왕자가 지나치게 흥분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사람을 좋아하는 성정이니 화려한 방문객에 들뜬 것 또한 마찬가지고.

“형님은 언제 오셔?”

“사나흘은 더 걸리신다고 하셨지요. 어서 처소로 가시어요. 밤바람이 찹니다.”

한겨울도 아닌 계절에 밤바람 걱정을 할 정도로 왕자는 약하지 않았다. 모든 북성의 아이들은 실로 강했다. 며칠을 굶어도 쉬이 병이 들지 않았다. 살갗을 에는 찬바람에도 고뿔 한 번 걸리지 않았다. 주름 깊은 어른들은 누울 자리를 보고 발을 뻗는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아이들 스스로 제 운명을 자각한 결과라고 씁쓸하게 혀를 찼다.

“형님이 얼른 오셨으면 좋겠다.”

드넓은 성안에서 어린 왕자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귀한 손님들 때문에 여느 때보다 요란한 밤이었지만, 그 자리에 초대받지 못한 왕자는 종일 무료함을 달래려 여기저기를 기웃거렸다.

“유모, 내일 바람이 불지 않으면 활 쏘러 가도 돼?”

“손님들께서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답답하시더라도 조금만 참으셔요.”

“피이…….”

이내 붉어진 뺨이 씰룩거렸다. 왕자의 발걸음이 터벅터벅 무겁게 변했다. 날은 금세 저물었고, 바람은 그만큼 차가워졌다.

“서엽 형님은 언제 오신댔어?”

“연회가 끝나야 오시지 않겠습니까?”

“이번엔 말썽 안 부릴 건데, 아바마마 너무하셔.”

툭하면 말썽을 부리는 왕자는 성정이 지나치게 천진한 것이 문제였다. 또래 아이들만 보면 눈을 반짝이며 몰려다니기 일쑤였는데, 고지식한 왕께선 그것을 쉽게 묵과하지 않으셨다.

“어어?”

유모 손에 이끌려 처소 쪽으로 발을 옮기던 왕자의 눈이 커다랗게 변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왁자지껄한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바람을 타고 날아오는 모습이 보인 탓이었다.

“우와!”

왕자의 탄성에 웃고 있던 인파가 일순 고개를 돌렸다. 그것이 순수하게 경탄에 찬 것이라 할지라도, 받아들이는 입장에서 어찌 생각할지는 모를 일이었다.

“유모, 저것 봐! 엄청 큰 새야!”

왕은 하나뿐인 막내아들을 관대하게 어르지 않았다. 평소에 제대로 관심을 두지도 않을뿐더러, 따뜻하게 품에 한 번 안아준 적도 없었다. 그래도 왕자는 잘 자랐다. 타고난 천성이 따뜻하여 왕의 애정을 독차지하는 형님을 시기하지도 않았다. 부모에게 받지 못한 애정은 주위에 널린 아랫사람에게 고루 받았다. 하여 모두가 왕자를 좋아하고 애틋해했다.

“아기씨, 목소리를 낮추시어요.”

성안에서 왕자에게 엄한 소리를 할 사람은 오직 왕뿐이었다. 왕은 지금 연회에 참석 중이라 왕자는 굳이 들뜬 기분을 숨기지 않으려 했다. 늙은 유모는 얼른 왕자의 팔을 붙잡고 몸을 낮추었다. 웃고 있던 것을 멈추고 이쪽으로 저벅저벅 걸어오는 인영을 마주한 그녀의 몸이 덜덜 떨렸다.

“어? 황자 저…….”

왕자가 잔뜩 겁먹은 얼굴로 입술을 다물었다. 처음 마주한 자리에서 겁도 없이 이런저런 말을 늘어놓다가, 당황한 왕께서 직접 황자께 사죄한 것이 어제 정오였다. 왕자는 왜 왕께서 그리 놀라셨는지, 어찌 직접 무릎을 꿇고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게 하셨는지, 꼬박 하루를 처소에 갇혀 있다가 귀빈께서 돌아가실 때까지 자중하라는 벌을 받아야 하는지도 몰랐다.

“오, 북성의 왕자로구나? 이름이 기…….”

“기하입니다, 저하.”

황자의 눈매가 시원하게 접혔다. 그의 어깨에 내려앉은 매가 커다란 발톱을 허공에 휙휙 흔들었다. 기하는 멍한 눈으로 새를 올려다보다 웃고 있는 황자와 눈이 마주치자 얼른 고개를 조아렸다.

“왜 이런 곳에 있느냐?”

“이쪽이 소인의 처소로 가는 지름길입니다.”

“연회에선 보이지 않던데?”

“그것이…….”

“북왕께서 어제 몹시 화를 내시던데, 혹 나 때문에 벌을 받기라도 한 거냐?”

“아닙니다.”

경쾌한 황자의 웃음소리에 기하는 괜스레 머리를 긁적였다.

“아바마마께서 벌을 내리신 것은 맞으나, 저하 때문은 아닙니다.”

흐음, 하고 턱을 문지르던 황자가 가볍게 허리를 구부렸다. 순식간에 황자의 얼굴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장난기 가득한 눈동자가 가볍게 파장했다.

기하는 화려한 미색에 넋이 빠져 흐려진 눈으로 황자를 올려다봤다. 순간 황자의 커다란 손이 기하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거짓을 고하지 못하는 곧은 성정이로구나. 네가 말한 대로 충신이 될 재목(材木)임은 분명해.”

얼굴이 열이 퍼졌다. 아무리 성안 이들에게 고루 애정 받고 있다곤 하나, 감히 왕자의 머리를 다정하게 쓸어줄 이는 존재하지 않았다. 왕께서는 다정한 성정이 아니셨고, 어린 왕자를 귀애하는 세자는 1년 중 열 달 이상을 전장에서 보내기에 마주할 기회조차 적었다.

“으음?”

황자의 의문 섞인 탄식과 함께 정수리에 올려졌던 손이 뺨으로 내려왔다.

“열이 나는 것 같은데?”

“아닙니다!”

고개를 갸웃하는 황자의 모습에 발끈한 기하가 소리쳤다. 그 목소리가 어찌나 컸던지 황자는 호탕하게 웃으며 다시 머리를 쓸었다. 따뜻하다.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할 말을 기하는 몇 번이고 주억거렸다.

“활을 잘 쏜다고 들었다.”

“예?”

“북왕께서 그리 말씀하시던데? 전장에 나가 있는 세자보다 그대의 궁술 실력이 월등히 뛰어나다고.”

아버님께서 그리 말씀하셨단 말인가? 저도 모르게 새어 나오는 미소를 기하는 굳이 숨기지 않았다. 칭찬에 인색하신 아버님께서는 이따금 이런 식으로 좋은 말씀을 해주셨다. 괜스레 멋쩍은 기분이 들어 머리를 긁적이면서도 기하는 연신 웃었다. 그 모습이 우스워 황자께서 저를 두고 이상한 놈이라 칭하시더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하면서.

“어떠하냐, 괜찮으면 내일 함께 사냥 가지 않으련?”

“예? 사냥이요?”

“줄곧 성에 있으려니 갑갑하여서, 내일 이 친구들과 몰래 사냥 갈 계획을 잡고 있었거든. 물론 비밀이다.”

한쪽 눈을 찡긋하며 웃는 황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기하가 느릿하게 눈을 깜박였다. 해사하게 빛나는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것은 분명 불경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곳엔 제 잘못을 타박할 다른 상궁들도 없고, 유모는 언제나 제 편이니 괜찮다. 그것보다 사냥? 사냥이라고 했던가?

“싫으냐?”

“싫은 것이 아니오라…….”

분명 기하의 궁술은 훌륭했다. 일찌감치 스승님께서도 궁술 실력만은 어른과 견주어도 뒤처지지 않는다고 하셨고, 무엇보다 기하 스스로도 자신 있는 것이었다. 한데 사냥은 달랐다. 사냥이라―.

“아니면 무어냐?”

황자의 눈에 순수한 의문이 담겼다.

올해로 열세 살이 되었다는 제국의 삼황자께서는 타고난 무장(武將)으로, 지난해에 이미 전장의 선봉에 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고 칭송이 자자했다. 또래보다 훨씬 큰 키에 볕에 그을려 건강해 보이는 얼굴은 곱게 분칠한 여인보다 훨씬 아름다웠다. 모든 것이 이상했다. 보면 볼수록 그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어, 몇 번이나 머릿속이 뿌옇게 흐려졌다.

“사냥은 한 번도 해보지 않았습니다.”

“응? 사냥을 해보지 않았어?”

“예.”

활을 잡고 말을 타는 사내라면 무릇 사냥을 즐긴다. 그것은 비단 황족뿐 아니라 귀족, 혹은 적당히 먹고 사는 일반 백성들에게도 해당되는 얘기였다.

“어째서?”

“땅이 척박하여 짐승이 많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유흥 삼아 짐승을 잡을 만큼 삶이 녹록지 않습니다.”

순간 황자는 말을 잃은 듯 물끄러미 기하를 바라봤다. 삶이 녹록지 않다. 그것이 과연 여덟 살 먹은 왕자의 입에서 나올 말이던가. 허탈한 웃음이 황자의 입술에 머물렀다. 쉬이 웃을 수 없는 까닭은 그런 이야기를 하는 어린 왕자의 표정이 너무도 진지했기 때문이었다.

“한 번도 해보지 않았다니, 그럼 더 재밌겠구나.”

황자는 일부러 장난스럽게 말하며, 눈꼬리를 곱게 접어 웃었다. 그 미소 때문이었을까. 잔뜩 굳어있던 왕자의 입매가 자연스럽게 풀어졌다.

“가보자. 아주 재밌을 테니까.”

마치 환청처럼 들리는 황자의 목소리에 기하는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황자의 입술 끝에 만족스러운 웃음이 걸리고서야 깨달았다. 제 심장이 지나치게 빨리 뛰고 있다는 것을.

이른 새벽, 왕자는 유모의 만류도 뿌리치고 궁을 나섰다. 혹여 왕께서 이 사실을 아신다면 크게 화를 내실 거라며 몇 번이나 기하를 붙잡던 유모는 기어이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그녀는 마음이 약했다. 지나치게 정이 많고 천진하여 왕께 꾸지람을 듣거나 벌을 받아도 늘 웃기만 하는 어린 왕자를 지나치게 애틋해했다.

기하는 그럴 때마다 제법 어른스럽게 그녀를 달랬다. 머리가 희끗희끗하게 센 후로, 그녀의 걱정도 지나치게 많아졌다며 아이답지 않게 웃었다.

물론 그럴 때마다 기하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그녀를 감히 어마마마와 비교할 수는 없지만, 세상의 빛을 본 순간부터 어미처럼 저를 돌보아준 여인이었다.

“어찌 정신을 빼놓고 있어?”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기하는 화들짝 놀라 말고삐를 틀었다. 황자의 표정은 어제와 같이 상쾌했다.

날씨는 쾌청했다. 아마 사시(巳時 : 오전 9시에서 11시 사이)쯤 되었을까. 바람은 적당히 불었고, 구름 한 점 없는 깨끗한 하늘이었다.

황자는 산세가 험한 곳으로 익숙하게 말을 몰았다. 워낙 말을 타기를 즐겼으나 이런 험준한 산은 처음이었기에, 기하는 저도 모르게 잔뜩 굳은 어깨를 길게 늘어뜨렸다.

“저하.”

“사냥터에서 그리 정신을 빼놓고 있다간 화를 당한다. 뒤처지면 떼어놓고 갈 거야.”

장난스러운 황자의 표정에 기하는 겸연쩍게 웃었다. 그는 말에서 풀썩 뛰어내리곤 말 등을 쓰다듬었다. 한참을 달린 말은 지친 기색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몹시도 잘생기고 우아한 말이었다. 주인을 닮아서인가. 저도 모르게 든 생각에 기하는 소리 없이 웃었다.

“자.”

“예?”

“잡아, 발밑이 험하다.”

산은 험준했다. 작은 샘을 차지한 짐승들은 앞다투어 물을 마셨다. 기하에게 손을 내민 황자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망설이는 그의 팔목을 덥석 쥐었다.

“꾸물거릴 시간이 없다.”

황자는 기하의 허리를 잡아채 단번에 끌어안았다. 덕분에 가뿐하게 말에서 내린 기하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것은 부끄러움이었다. 비록 나이가 어리다고는 하나, 여인도 아닌데 안겨서 내려오다니.

“나무를 잘 탄다면서?”

황자가 내민 수통을 받아 든 기하는 머리를 끄덕였다. 사냥을 함께 나온 인원은 생각보다 많았다. 비밀이라고 했으면서, 그를 따르는 수족이 족히 열댓은 되어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제국의 황자이시니 당연한 일인데도, 늘 혼자 다니는 기하는 그 모습이 몹시 낯설고 어색했다.

“이게 좋겠다.”

“예?”

“저 꼭대기까지 올라갈 수 있겠느냐?”

“어렵지는 않으나…….”

혹여 환궁하게 되면 왕께 크게 야단맞을 일이었다. 왕께서는 무엇보다 채신머리없이 구는 걸 싫어하셨다. 기하가 나무에 오르는 이유야 빤했다. 먹을 것이 귀한 북성에선 과일나무야말로 최고의 간식 창고였으니까. 하긴, 몰래 성을 빠져나온 것만으로도 큰 벌을 받을 테니 이깟 나무 타기쯤이야 무겁지도 않은 덤이었다.

“할 수 있겠느냐?”

“예.”

수통을 다시 황자에게 내밀고 기하는 손을 탈탈 털었다. 새벽녘, 유모가 잘 빗겨준 머리카락이 바람에 나풀거렸다. 소매를 걷어붙이고 별다른 망설임 없이 풀쩍 뛰어오르는 기하를 황자는 호기롭게 바라봤다. 아이는 곧잘 나무를 탔고 몇 번 미끄러지는 듯했으나, 머잖아 꼭대기의 아슬아슬한 부근에 올라 숨을 몰아쉬었다. 누군가가 낮게 휘파람을 불었다.

“무엇을 봐야 합니까?”

어린 왕자는 꽤 현명했다. 밑도 끝도 없이 나무에 오르라는 명을 충실하게 수행하더니, 시키지도 않은 것을 물었다.

“흔적을 살펴라.”

“짐승의 흔적 말입니까?”

산은 험준했다. 나무가 빽빽했고, 바위가 많아 인적이 닿지 않았다. 소문에 의하면 굉장히 위험한 짐승이 산다고 했다. 범이라든가, 이리 떼, 곰과 같은 것들 말이다. 아마 토끼나 노루가 많았다면 굶주린 백성들이 진작 이곳에 터를 잡고 짐승을 잡았을 거다.

“고요합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느냐?”

“예,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 하긴, 그렇게 쉽게 흔적을 남길 놈들이 아니지.”

황자는 유쾌하게 말했으나, 보기 드물게 얼굴을 찡그렸다. 기하는 그 모습을 빠짐없이 바라보다가 주위를 둘러봤다. 한 번도 사냥한 적이 없으니, 뭐가 어떻게 다른지 알 길이 없었다. 어떠한 변화를, 어떤 점을 유심히 관찰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 모든 의문을 일일이 말하기엔 황자의 표정에 실망이 가득해서, 쉬이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내려올 수 있겠느냐?”

“예.”

사실 나무에 오르는 것보다 내려오는 것이 어려웠다. 모두가 그 반대라고 했으나 기하는 그랬다. 손바닥에 땀이 났다. 저 멀리 거대한 나무가 휘청거리는 것이 보였다. 단순히 바람 때문일까.

“왜 망설이지? 잘 올라가더니, 내려오는 것은 무리냐?”

황자의 목소리는 유쾌했다. 달리 조롱하는 기색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기하는 부끄러웠다. 자신을 바라보는 수많은 눈동자 때문은 아니었다.

“그게…….”

왕이 기하를 야단치는 데에는 가장 큰 이유가 있었다. 올라가기는 날다람쥐처럼 잘 올라가던 아이가, 내려올 때면 겁을 잔뜩 집어먹어서 누가 아래에서 받아주거나 붙잡아 주어야만 겨우겨우 내려왔다. 그러다가 제가 다치기도 했고, 아니면 받아주던 이가 크게 다쳐 몇 달을 고생했던 적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벌을 받으면서도 기하는 나무에 곧잘 올랐다. 사실 성의 과일나무야 크기가 고만고만해서 적당한 곳에서 눈을 질끈 감고 뛰어내리면 자잘한 생채기가 나는 정도였다.

하지만 이곳은 달랐다. 나무는 지나치게 컸고, 발밑은 아찔했으며, 폭신한 풀밭도 아니었다. 보기만 해도 아찔한 사나운 바위와 날카로운 돌이 사방에 널려 있었다.

기하는 그제야 울고 싶어졌다. 이것은 다 앞뒤 가리지 않고 무조건 덤벼드는 그의 성정 때문이었다. 왕께 늘 회초리를 맞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은 생각하고 해야 하는 일을 기하는 일단 저지르고 봤다. 오늘 사냥터에 나선 것이 첫 번째였고, 믿는 구석 하나 없이 나무에 오른 것이 두 번째였다.

하는 수 없다. 내려오다가 돌밭에 굴러 어딘가 부러지거나 찢어져도 누구를 원망할 수 있으랴. 이곳은 제국의 황자와 그의 부하들뿐이니, 꼴사나운 일을 당해도 그것은 아버님 선에서 끝나겠지.

눈을 꼭 감고 슬금슬금 나무를 타고 내려오는 기하의 손끝이 달달 떨렸다. 무서웠다. 생각하지 않으려고 해도 그랬다. 나무는 왜 이렇게 길고 큰지, 거친 표면에 뺨이 부딪혀 따끔거리기까지 했다.

“으앗.”

아팠다. 피가 나는 것 같다는 생각에 저도 모르게 손에 힘을 푼 기하는 순간 몸이 기우뚱하는 것에 눈을 번쩍 떴다. 몸이 기운다. 옆으로, 아래로, 더 옆으로.

“어어?”

“조심!”

누군가의 외침은 퍽 짧았다. 이제 죽었구나, 하는 생각에 무작정 머리를 감싸고 눈을 질끈 감은 기하는 어딘가에 둔탁하게 부딪쳐 크게 다칠 자신을 떠올렸다.

“으으…….”

고통에 찬 비명이 터졌다. 분명 어딘가 부러졌겠지? 몸이 그렇게 아프지는 않은데, 설마 벌써 기절해서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저하! 괜찮으십니까?”

사내들의 목소리가 가까이서 울렸다. 기하는 실눈을 뜨고 제 머리를 감싸고 있던 팔을 천천히 내렸다. 어어? 지금 이것이 어찌 된 일인지.

“괜찮으냐?”

지금 자신은 제국의 황자 품에 안겨 있었다. 어안이 벙벙해진 기하가 느리게 두 눈을 깜빡였다. 순간 누군가가 팔을 확 붙잡는 바람에 힘의 반동으로 뒤로 밀려난 기하는, 검은 복면을 한 사내들이 넘어진 황자를 정중하게 일으키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들은 몹시도 분개하며 황자의 안위를 살피다가, 사나운 눈으로 기하를 째려봤다. 딸꾹. 저도 모르게 숨을 멈춘 기하는 옷을 탈탈 털며 괜찮다고 말하는 황자를 바라보며 손을 떨었다.

그러니까 지금, 떨어지는 나를 붙잡아 준 것이 다름 아닌 황자 저하이신가. 떨어지는 사람을 받다가 잘못되면 어디 한 군데가 크게 부러질 수도 있으니 절대로 그런 짓은 하면 안 된다고 서엽 형님께서도 몇 번이나 말씀하셨는데.

“놀란 얼굴이다.”

황자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부하가 건네는 검을 받았다. 아마 기하를 받고 넘어지면서 떨어뜨린 모양이었다. 그의 손바닥은 자잘한 생채기에 피가 보였다. 그 모습에 누군가가 호들갑을 떨었고, 황자는 가볍게 혀를 차며 걱정 가득한 손을 물렸다.

“다치지 않았느냐?”

벌써 세 번째였다. 황자는 친절하게도 기하의 안위를 그렇게 세 번이나 물었다. 겁에 질려 덜덜 떨면서 입도 떼지 못하는 그를 빤히 바라보다가, 다시 한 번 머리를 쓸어주는 손길은 무척 친절했다.

“내가 괜한 말을 한 모양이다. 잘 올라가기에 겁이 없는 줄 알았더니.”

다시 웃음을 터트리는 황자의 입술 모양새가 좋았다. 그 모습을 홀린 듯 바라보던 기하는 가볍게 무릎을 굽히고 가까이 얼굴을 들이미는 황자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안 되는 것은 안 된다고 말을 해야지. 다음부턴 그래야 한다?”

“저하…….”

“응?”

“괜찮…으십니까?”

“네 눈에는 내가 괜찮지 않아 보이느냐?”

“그……, 손바닥에 상처가…….”

“괜찮다. 이깟 게 무슨 상처라고. 네가 떨어지는 줄 알고 놀란 가슴이 더 뻐근하고 아프다.”

뺨을 톡톡 두드리는 손가락 끝이 붉었다. 핏방울이 맺힌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기하는 고개를 푹 숙였다. 어마어마한 잘못을 저지른 것만 같아 온몸이 떨렸다.

“그렇게 정신 놓고 있으면 안 돼. 이곳은 사나운 짐승이 많다고 들었지 않으냐?”

“예…….”

그것은 지나는 길에 백성들에게 들은 것이었다. 산이 험준하나 작은 짐승이 없어서인지, 맹수들이 이따금 산 아래 마을로 내려온다고 했다. 농작물을 망치는 것은 예삿일이고 집에서 키우는 닭이나 개, 돼지 따위를 잡아먹거나 사람까지도 물어 죽인다고 하니, 그 피해가 막심했다.

관아에서 수를 쓰려 해도 하도 신출귀몰한 것들이라 쉬이 잡히지 않는다면서 탄식을 늘어놓는 백성의 말을 빠짐없이 전하자, 황자의 표정은 그때부터 서늘하게 변하였다. 하여 이곳으로 정한 것이었다.

기하는 이름도 모르는 산을 둘러보며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유모 말대로, 이 사실을 아바마마께 고하고 비밀 사냥을 파하게 해야 옳은 일이었을까. 혹여 황자께서 무슨 변고라도 당하신다면 북성에 큰일이 닥칠지도 모른다는데.

“내 옆에 잘 붙어 있어. 절대로 한눈팔면 안 된다? 너는 활을 잘 쏜다고 했으니 먼 곳을 주시하도록 해. 가까이 오면 내가 막아줄 테니까.”

기하는 또래보다 몸이 작았다. 날 때부터 그랬다더니, 아무리 먹어도 그랬다. 사실 그것은 북성 아이들 모두 마찬가지였다. 먹을 것이 풍족하지 못한 나라의 아이들이 쑥쑥 자란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자신보다 다섯 살이 많은 황자는 또래보다 훨씬 커서 꼭 관례식을 올린 어른 같았다. 그래서였을까. 황자는 기하를 꼭 아주 어린 아우를 대하듯이 했다.

“아무래도 멀지 않은 곳에 놈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복면을 뒤집어쓴 장신의 남자가 황자에게 조용히 다가와 말했다. 그들은 모두 기이한 모양의 무기를 각각 들고 있었다. 겉모습만 본다면 황자의 근위대가 아니라 산적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흉흉한 모습이었다.

“가자.”

황자는 유쾌하게 웃으며 기하에게 손을 내밀었다. 어쩐지 조금 들뜬 것처럼 보이는 이들의 눈동자는 이채로 반짝였다. 기하는 살짝 망설이다가 황자의 손가락 끝을 붙잡았다. 그는 자신의 오른쪽을 기하에게 내어주고 몸을 낮췄다. 기민하게 움직이던 황자의 호위들은 예리한 표정으로 주위의 기척을 느꼈다.

“맹수를 상대할 때는 딱 한 지점만 노려야 한다. 힘으로 승부를 보려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이야. 너는 아직 작고 어리지만, 좋은 무기가 있으니 밀리지 않을 거다.”

물론, 나는 너를 이곳에 데려온 것을 후회한다만.

마지막 말을 흘리듯 내뱉는 황자의 표정이 어쩐지 서러웠다. 기하는 주먹을 움켜쥐고 활을 단단하게 붙들었다.

“그 지점이 무엇입니까?”

“응?”

예리한 표정으로 주위를 살피던 황자의 시선이 다시 기하를 향했다. 어린아이는 꽤 당돌한 표정이었다. 산세는 지나치게 험준했고, 사냥 경험이 없는 아이는 성안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작고 어려 보였다. 영민하고 천진하여도 어린아이는 어린아이다.

물론 황자는 그 나이에 매년 열리는 사냥 대회에서 곰과 이리를 잡은 경험이 있었다. 모든 것은 자신의 경험에 비유된다. 하여 괜찮을 줄 알았더랬지.

“맹수를 상대해서 이길 수 있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상대가 강할수록 약한 부분을 파고들어야지. 곰은 앞가슴이다, 늑대는 목덜미고.”

황자는 자신의 활통에서 잘 벼른 활을 꺼내 기하에게 내밀었다.

“촉에 맹독이 묻었으니 다루는 데 조심해야 한다. 맹수를 상대할 때는 야비한 수를 쓰는 것도 방법이거든.”

한쪽 눈을 찡긋하며 웃는 황자의 주위로 사내들이 몰려들었다. 그들은 단단한 방어막을 치듯 황자를 호위하며 경계했다.

순간 심상치 않은 바람 소리가 들렸다. 적막을 가로지르는 기이한 기류에, 기하는 저도 모르게 자세를 바로잡고 시위에 손을 올렸다.

크르릉.

푸른 눈을 빛내는 야생의 짐승은 족히 열 마리는 되어 보였다. 그들이 바위 위에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기하는 순수한 의미로 감탄사를 쏟아냈다. 말로만 들었던 맹수를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날렵하고 기민한 움직임의 그것들은 사나운 눈을 빛냈다.

“굶주린 짐승만큼 위험한 것은 없지.”

황자는 호기롭게 중얼거렸다. 능숙하게 화살을 빼서 완전히 존재를 드러낸 짐승을 조준하는 모습이 한 폭의 그림과 같았다.

‘늑대는 목덜미다.’

황자의 가르침을 되새기려는 순간 피융, 하는 소리를 내며 화살이 짐승의 목덜미를 관통했다. 짐승은 괴이한 소리를 내며 바위 아래로 고꾸라졌다. 그러나 무리는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눈앞에서 동료를 잃어도 흔들림 없는 광경에 기하는 마른 침을 삼켰다.

“저하, 숫자가 만만치 않습니다.”

“우리보다 겨우 네댓 마리 많은 것 같은데 만만치 않다니. 헛소리 집어치우고 두당 한 마리 이상씩 잡아라. 남은 짐승이 마을로 내려간다면 있는 대로 분풀이할 테니, 목표는 전멸이다.”

피융, 황자의 화살이 또 다른 짐승의 목덜미를 명중했다. 괴로운 신음을 토해내며 바위 아래로 떨어지는 것을 바라보던 짐승들의 눈이 예리하게 빛났다. 크르릉, 하는 사나운 소리와 함께 짐승들이 하늘을 날았다. 분명 기하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지나치게 굶주려 뼈만 앙상하게 남은 짐승들은 천천히 바위 아래로 발을 굴렀다. 몸을 낮추고 발톱을 드러내고 이를 보이는 짐승의 무리가 가까이 다가오자, 비릿하고 역겨운 냄새가 났다. 기하는 순간 코를 틀어막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참으며 황자처럼 화살을 들었다.

족히 스무 마리는 될 것 같은 이리 떼가 사방에서 날뛰었다. 괴이한 고함을 내지르며 잘 벼른 무기를 휘두르는 이들의 몸짓이 일사불란했다. 그들은 앞다퉈 짐승을 향해 달려들면서도 황자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애썼다.

피융, 핑!

그들의 염려와 달리 황자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열 개의 화살을 순식간에 날렸다. 여섯 마리의 목덜미에 명중했고, 나머지는 아슬아슬하게 빗맞아 짐승에게 치명상을 주지 못했다. 황자는 그것이 몹시 불쾌한 듯 미간을 찌푸리며 검을 꺼내 들었다.

촉에 바른 독이 짐승의 몸을 서서히 마비시켰다. 거대한 짐승은 앞발을 힘없이 휘청거리며 혀를 길게 빼냈다. 이따금 발작하듯 몸을 덜덜 떠는 것들도 보였다. 남은 것은 이제 다섯 마리로, 가장 몸집이 크고 사납게 생긴 대장 놈이 거대한 송곳니를 드러내며 크르릉거렸다.

기하는 긴장감으로 덜덜 떨리는 심장 부위에 제 손을 올렸다. 황자가 제게 건넨 활은 이제 겨우 두어 개 남짓 남아 있었다. 모두 다섯 개의 화살을 던져 말라비틀어진 늑대 한 마리를 겨우 잡고, 대장 늑대와 마주 선 황자를 곁눈질하며 두려움에 덜덜 떨었다.

그것은 단지 이상한 기시감 때문이었다. 절대로 이 작은 전투에서 패배를 경험하지는 않을 거라는 예감이 들면서도, 무거운 두려움이 질척거리며 기하의 발목을 움켜쥐었다.

크하아앙!

순간 등 뒤에서 들리는 사나운 소리에 기하는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날카로운 무언가가 어깨를 스쳐 지난다는 생각이 들 때 즈음, 꾸덕꾸덕한 무언가가 몸 위로 쏟아졌다.

“흐으…….”

구역질이 치밀었다. 기하는 얼굴 위로 쏟아지는 짐승의 피에 연신 헛구역질을 했다.

“일어나.”

만약 자신을 급하게 일으키는 누군가의 손길이 아니었더라면, 제대로 일어나지도 못한 채 볼썽사나운 꼴을 계속 보였을 거다.

황자의 검은 짐승의 배를 예리하게 꿰뚫었다. 무리 중 가장 작은 짐승이 아직 덜 자란 것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힘없이 축 늘어진 짐승은 두어 번 숨을 할딱거리더니 혀를 길게 빼고 눈을 반쯤 감았다.

그제야 알았다. 멍청하게 서 있던 자신을 구한 것이 황자의 검이라는 것을. 그가 아니었더라면 짐승의 제물이 되어 형편없이 나뒹굴고 있는 것은 자신이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그제야 이것이 지독한 현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과녁을 향해 활을 쏘는 것은 살생과는 다름을 알았다.

“경계를 흩트리지 마라.”

황자는 호기롭게 외쳤다. 곳곳에 부상자가 속출했다. 워낙 신출귀몰한 실력으로 짐승을 사지로 밀어 넣는 이들이었으나, 상대는 맹수였다. 이미 싸늘하게 식은 짐승의 수가 만만찮았으니 다행이지, 아니었더라면 꽤 불리한 상황이 될 뻔했다.

황자의 검이 가볍게 포물선을 그렸다. 거대한 짐승이 공중을 날았다. 황자의 주위를 에워쌌던 이들이 춤을 추듯 움직여 짐승의 사방에 섰다. 자연스럽게 황자와 떨어진 기하는 말없이 그들을 바라보다가, 제 얼굴에 달라붙은 피를 슥슥 문질렀다.

사나운 짐승은 이리저리 날뛰었다. 일족을 대부분 잃은 짐승은 쉬이 물러나지 않았다. 그대로 한 발자국만 움직여도 죽음이니, 궁지에 몰린 짐승의 처지가 딱하다는 태평한 생각을 하던 기하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황자는 그림 같은 솜씨로 짐승을 공격했다. 그의 검이 짐승의 앞발을 찔렀다. 짐승이 사납게 그르릉거리며 긴 발톱으로 누군가의 목덜미를 챘다. 과연 우두머리다운 실력이라, 황자의 근위대조차 짐승 가까이 가지 못했다.

와드득. 거대한 발로 누군가의 머리를 휘갈긴 짐승이 푹 쓰러진 이의 어깨를 물었다. 고통에 찬 비명을 삼키는 이를 바라보는 황자의 눈이 잔뜩 찌푸려졌다. 잔인한 광경에 그들은 못이 박힌 듯 쉬이 움직이지 못했다. 그대로 쓰러진 이를 발로 누르며 일어난 짐승의 갈퀴가 사나운 바람에 휘날렸다.

그곳은 온통 피비린내로 가득했다. 피범벅이 된 짐승의 사체 주위에 거대한 피 웅덩이가 생겼다. 기하는 물끄러미 거대한 짐승을 응시했다. 그리고 그 앞에 선 황자를 바라봤다. 그가 제게 건네 준 독화살만 돌려주어도 승산이 있을 텐데. 할 수 있을까. 과연 그처럼 저도…….

“저하!”

짐승은 다시 한 번 하늘로 뛰어올랐다. 그의 거대한 앞발이 황자를 향했다. 이대로 있다가는 큰일이 날지도 모른다. 날쌔게 움직이며 검을 휘두르는 황자는 늠름한 사내의 모습이었으나, 짐승에 비하면 보잘것없이 작았다.

기하는 짐승을 향해 활을 겨눴다.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짐승과 황자, 그리고 그의 근위대가 팽팽하게 서로를 견제했다.

탕!

빗나갔다. 기하는 침착하게 다시 활을 겨눴다. 황자는 춤을 추듯 호를 그리며 짐승의 목덜미를 노렸다. 그래, 지금이다.

탕!

기하가 쏘아 올린 화살은 정확하게 짐승의 오른쪽 눈을 뚫었다. 순간 발버둥 치는 짐승의 목덜미에 황자의 검이 관통했다.

“저하!”

“저하!”

사지를 뒤트는 짐승의 앞발에 맞은 황자가 그대로 넘어졌다. 실로 거대한 힘이었다. 짐승은 괴롭게 소리쳤다. 숨이 꺽꺽 넘어가는 푸른 눈에 붉은 핏줄기가 샜다.

기하는 입을 벌리고 그대로 뒷걸음질 치다가 바닥에 털썩 넘어졌다. 황자의 상태를 살핀 근위대가 그를 부축했다. 다행히 큰 부상은 아니었던지, 그는 긴 숨을 내쉬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피가 튄 그의 얼굴에 알 수 없는 표정이 스쳤다.

근위대는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짧은 사냥의 아쉬움을 달랬다. 부상한 동료를 일으키고 주위를 경계하며 매무새를 가다듬는 모습이 꽤 익숙해 보였다.

기하는 긴 숨을 몰아쉬었다. 순간 저벅저벅 걸어온 발이 제 앞에서 멈췄다. 가까스로 고개를 드니 잔뜩 헝클어진 황자가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그제야 기하는 제 손이 덜덜 떨리고 있음을 알았다. 무서웠다. 혹여 제가 잘못 쏘아 올린 화살이 그에게 해를 가할까 봐. 거대한 짐승이 내뿜는 기가 지나치게 사나워서, 이대로 잘못되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저하…….”

“과연 소문대로 빼어난 실력이다. 함께 전장을 누벼도 되겠어.”

황자의 손은 크고 단단했다. 그를 따라 일어나면서 물끄러미 올려다본 얼굴은 빛에 반사되어 찬란하게 빛났다.

“저하, 괜찮으십니까?”

“네게 물을 말이다만?”

“소인이야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니…….”

황자의 미소가 희미하게 흐려졌다. 그는 천천히 무릎을 굽혀 숨을 거둔 짐승의 거친 털을 쓰다듬었다. 거대한 무리였으니, 산 아래 백성들의 피해와 고통이 실로 어마어마했을 테다.

“이 땅은, 참으로 척박하구나.”

사람은 사람답게, 짐승은 짐승답게. 모두 한데 어우러지는 세상을 황자는 좋아했다. 아마 풍요로운 땅이었다면, 이런 사나운 짐승들이 산 아랫마을로 내려오는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았을 테지. 그들은 그들만의 삶을 꾸리고, 자유롭게 뛰어다니며 그렇게 살았을 것이다.

“환궁하자.”

황자는 능숙하게 말에 올랐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기하는 머리를 슬슬 도리질하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무언가 가슴을 싸하게 했다.

“게으름 부리면 두고 갈 테다.”

환하게 미소하는 황자를 바라보며 기하는 무엇에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두근두근. 가슴이 세차게 요동쳤다.

* * *

“어찌 이리 천방지축으로 날뛰어?”

회초리를 바닥에 패대기친 왕이 사납게 일갈했다. 무릎 위로 걷어 올린 옷자락을 쥔 기하의 손이 달달 떨렸다. 눈물이 찔끔 나오려 했으나, 입술을 악물었다. 몰래 성을 빠져나가는 순간부터 이미 예견한 일이었다.

물론, 왕께서 화를 내시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함께 사냥 나가셨던 황자께서 팔이 부러지셨다는 유모의 말에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그것이 다, 나무에서 떨어지는 저를 붙잡다가 벌어진 일(아마 황자를 호위하던 근위대의 증언이 있었던 것 같다)이라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대들은 대체 뭣들 하는 거냐? 이 어린 것 하나 제대로 보필하지 못하다니, 궁인의 자격이 있는 건가?”

“송구하옵니다, 전하.”

늙은 유모와 어린 나인들이 왕의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그들은 왕자를 제대로 모시지 못했다는 이유로 늘 벌을 받고, 감봉당하기 일쑤였다. 그럼에도 모두 마음이 고와 단 한 번도 불평불만 하지 않고, 오히려 기하를 위로하는 이들이었다.

늘 자신이 생각 없이 벌인 일에 희생당하는 아랫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이번에는 이리될 것을 알고도 그랬다. 그래서 더 미안했다. 그저, 황자 저하를 따라나서고 싶은 욕심 때문이었으니까.

“앞으로 왕자는 열흘간 처소에서 자숙하라. 식사는 하루 한 끼만 허한다.”

“전하! 그것은…….”

어린 왕자는 식탐이 많았다. 좋은 음식으로 매일 배를 채우지는 않았으나, 굶주린 애정을 먹는 것으로 대신했다. 늘 밝고 씩씩하여도 배만 고프면 금세 시무룩해지다 기어이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성안에 없었다.

“성 밖의 백성에겐 하루 한 끼도 감지덕지다! 네가 지나치게 기운이 팔팔하니 그런 말도 안 되는 짓을 하고 다니지! 감히 황자 저하의 옥체를 상하게 하다니, 폐하께서 아량을 베풀지 않으셨다면 너는 그대로 참수감이다!”

기하는 납작 엎드려 잘못을 빌었다. 그것은 순전히 제 잘못이었다. 모든 것은 제 잘못이었다. 왕께서 벌을 내리시지 않으셨다면, 스스로 찾아가 잘못을 비는 것이 옳았다.

“잘못했습니다, 아바마마.”

왕자의 울먹임에도 왕은 좀처럼 화를 누그러뜨리지 않았다. 그가 옷자락을 펄럭이며 일어서자, 눈물이 가득한 시선이 따라붙었다. 왕은 한참 동안 왕자를 내려다봤다. 심약한 얼굴은 보면 볼수록 불편한 기분을 자아냈다.

기하는 사나운 발소리에 머리를 조아렸다. 오랜만에 제 처소를 찾으신 아바마마는 여지없이 화만 내고 가셨다. 야단 칠 일이 있지 않고서는 딱히 처소를 찾으시는 일이 없으시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지만, 그래도 서운했다. 이렇게 조금이라도 아버지를 가까이서 뵐 수 있다는 사실이 어린 왕자의 마음을 잠시나마 들뜨게 했다.

왕의 명령으로 처소에 홀로 갇힌 왕자를 두고 바깥으로 나온 유모는 연신 불안한 기색으로 주위를 살폈다. 어느새 몰려든 군사들이 처소를 빙 에워쌌다. 굳이 이러지 않아도 왕자는 왕의 명을 충실히 따랐다. 굶으라면 굶었고, 나가지 말라면 꼼짝없이 갇혀 지냈다. 그것을 왕께서도 알고 계시거늘, 빼곡하게 처소를 에워싼 군사는 보기만 해도 아찔한 창과 검으로 무장한 이들이었다.

“그대는 왕자를 잘 지키도록 해.”

“예, 전하.”

“혹시 불손한 무리가 처소를 찾거든 지체 없이 알려야 한다.”

“예? 그것이 무슨…….”

왕은 긴 한숨을 내쉬며 처소를 에워싼 이들을 바라봤다. 황자의 부상은 꽤 심각했다. 어의가 덜덜 떨며 증상을 고했을 때, 황자의 수족들이 길길이 날뛸 정도였다.

왕과 막역한 사이인 황제께서도 크게 진노하셨으나, 황자의 만류에 벌을 내리라는 명을 거두셨다 하니 마음이 더욱 불안했다.

황제의 주위에는 충신이 넘쳤다. 그리고 그들 대부분은 북성과 북왕 서연을 좋아하지 않았다. 황제의 적통이자 그의 자랑인 황자께서 한낮 북성의 왕자 때문에 부상하였으니, 사사로이 해를 가할 이들은 사방에 넘쳐났다.

황제께서는 그것을 아시면서도 절대로 그런 일은 없어야 한다고 못 박지 않으셨다. 그만큼 그 불편한 심기가 가늠되었기에, 불안함이 파도처럼 일렁였다.

“황제께서는 닷새 후에 출발하실 것이다. 그때까지 각별하게 기하를 지켜라.”

아이의 얼굴엔 생채기가 가득했다. 눈물을 잔뜩 머금은 표정은 처연하기만 했다. 회초리를 휘두르고도 분이 풀리지 않았다. 미련한 것, 무지한 것. 어쩌자고 뱀과 같은 황가 사람들과 얽히려 드는가. 아무리 막역한 사이라도, 자신에게 해가 되는 이들은 가차 없이 내다 버리는 잔인무도한 자들을!

“잠시라도 방심하지 마라.”

아마 내내 울다 잠들겠지. 이럴 때 진하라도 곁에 있다면 조금 안심이 될 텐데. 먼저 떠난 여인과 지나치게 닮은 얼굴을 다시 들여다볼 자신이 없어진 왕의 발이 점점 빨라졌다. 벗어나자. 얼른 벗어나자. 가슴과 어깨를 짓누르는 고통과 죄책감 따위는 앞날의 걸림돌이 될 뿐이다.

기하는 조그만 몸을 잔뜩 웅크렸다. 이틀이 지났나, 사흘이 지났나. 처소는 지나치게 깜깜했고, 수라 받을 때가 아니면 유모의 얼굴조차 마주하기 어려웠다.

배고픔보다 더한 것은 외로움이었다. 기하는 외로움에 너무도 약했다. 무서웠다. 두려웠다. 내내 울어서 머리가 지끈거렸다.

끼이익.

기하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수라는 이미 한참 전에 먹었는데? 시무룩하던 아이의 얼굴에 기쁨이 서렸다. 북왕은 기하가 잘못을 저지를 때마다 처소 밖으로 나가지 말라는 벌을 내린 후, 이따금 조용히 처소를 찾았다.

물론 그것은 기하가 깊이 잠든 한밤중에 기척도 없이 다녀가시는 것이 전부였지만, 영민한 아이는 그것을 꽤 일찍 알아챘다.

“어…….”

어둠을 가로지르는 그림자는 아버지의 것이 아니었다. 낯선 복면을 한 사내였다. 키가 컸고, 덩치가 아주 좋았다. 순간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서던 기하의 눈에 겁이 질렸다.

“쉿.”

복면인이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그는 입술로 추정되는 곳 위에 손가락을 대고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 이내 옆으로 한 걸음 물러났다.

“어?”

“쉿.”

제 모습을 드러낸 인영이 복면인과 마찬가지로 입술 위에 손가락을 올렸다. 기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어둠에 가려진 인영은 퍽 익숙한 표정으로 한 걸음 가까이 다가왔다.

“…저하?”

“그리 크게 떠들면 바깥의 사람들이 듣고 쫓아올 거다.”

황자는 목소리를 낮추고 기하를 향해 눈을 찡긋했다. 그제야 입을 반쯤 벌고 황자를 바라보던 아이는 작은 손으로 제 입을 틀어막았다. 어떻게 황자께서 이곳에 오신 거지? 아니 그보다 어떻게 소리도 없이…….

“이리 와.”

황자는 작게 속삭였다. 기하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황자가 시키는 대로 쪼르르 다가가 몸을 웅크렸다. 황자는 체통도 잊고,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멀찌감치 떨어진 복면인이 예민하게 주위를 경계했다.

“저하, 팔이……. 소인 때문에…….”

“누가 너 때문이라더냐?”

황자는 작게 웃으며 품 안을 뒤적여 무언가를 꺼냈다. 그제야 기하는 코를 킁킁대며 음식 냄새를 맡았다. 고소하고 달콤한 냄새가 났다.

“먹을 것을 좋아한다 들었는데, 종일 굶는다면서?”

“그… 종일은 아닙니다. 하루 한 끼는 수라를 듭니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죄는 엉뚱한 네가 받는구나. 먹어라. 상궁에게 특별히 명해서 준비한 거니까.”

그것은 처음 보는 음식이었다. 달콤한 꿀 냄새가 흐르는 따끈한 떡에선 김이 모락모락 났다. 기하는 민망함도 잊고 침을 꿀꺽 삼켰다. 허술한 수라는 한창 클 나이인 왕자의 허기를 달래지 못했다.

“허락도 받지 않고 성을 나선 벌은 내가 받아야 옳다. 이렇게 다치지만 않았더라도 말이다. 너는 짐승에게서도 나를 구해주더니, 아바마마의 회초리마저 네 몫으로 돌렸으니 내 은인이다.”

황자의 목소리에 짓궂은 장난이 배어들었다. 기하는 그가 내민 떡을 한입 덥석 물고는 소리 없이 우물거렸다. 맛이 좋았다. 따뜻했다. 그리고 황자께서는…….

“용감한 줄 알았더니 순 울보다?”

“울지 않습니다.”

“눈에 눈물이 가득한데?”

“아닙니다.”

손등으로 눈가를 문지르려던 기하의 손이 멈췄다. 황자는 다정하게 웃으며 기하의 뺨을 자신의 손가락으로 쓸었다.

“내게도 너만 한 아우가 있다. 비록 어머니는 다르지만, 사이가 꽤 좋아. 그 아이는 몸이 약해서 바깥출입을 하지 않아. 아우가 생기면 데리고 다니면서 이것저것 가르치고 싶었다. 널 보니 아우 생각이 났다.”

“제게도 형님이 계시는데…….”

“전장에 나가 있는 세자 말이지?”

기하는 무엄하게 고개만 끄덕였다. 허겁지겁 입에 떡을 집어넣은 탓이었으나, 황자는 다정하게 미소하며 물끄러미 아이를 바라봤다.

“어떤 장군보다 용맹하고 사려 깊다고 들었다. 북성의 미래가 밝다는 말을 아바마마께서 늘 하신다. 나의 형님께서 황좌에 오르시면, 나 또한 형님과 제국을 위해 전장을 누빌 거다. 그때 그와 함께한다면 좋을 거라고 아바마마께서 말씀하셨다.”

난데없는 형제의 칭찬에 기하는 볼을 발갛게 물들였다. 세자인 창현군은 북성의 큰 자랑이었다. 칭찬에 인색한 북왕께서도 늘 창현군만은 기꺼워하시며, 그를 위해 무엇이든 아낌없이 지원하셨다. 때로는 그것이 부럽기도 하고, 못내 서러웠던 적도 있었다. 어린아이는 눈에 보이는 그대로만 믿기 때문이었다.

“한데, 괜찮으냐?”

“무엇이 말입니까?”

“이렇게 종일 갇혀 지낸다고 들었을 때 무척 놀랐다. 너는 아직 열 살도 되지 않았는데, 하루 한 끼만 겨우 먹으며 지낸다지? 그것은 지나치게 가혹한 벌이다.”

“괜찮습니다.”

“듣기로는, 북왕께서 늘 이렇게 벌을 내리신다는데.”

기하는 겸연쩍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것은 어쩐지 부끄러워지는 말이었다. 아바마마의 애정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었다. 제가 주워온 아이도 아니고, 엄연히 왕가의 핏줄이었다.

물론 어마마마께서 저를 낳으시다 변고(變故)를 당하셨으나, 그것은 운이 나쁜 여인들에게 흔히 일어나는 일이었다. 열에 한둘은 아이를 낳다 생을 마감한다. 아이를 살리고 죽음을 택한다. 너무도 비일비재해서,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도 뭣한 그런 서글픈 죽음이었다.

“소인이 늘 사고를 쳐서입니다.”

기하는 바보처럼 실실 웃었다. 황자는 그런 아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조그마한 발목을 손에 쥐었다. 당황함으로 물든 기하의 표정이 꽤 재밌었는데, 일단 확인해야 할 것이 있었다.

“이런.”

아이의 종아리는 시퍼런 멍이 가득했다.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생채기도 남아 있었다. 덕지덕지 무언가를 발라두었으나, 치료한 흔적이 서툴렀다. 이러다간 흉이 질 거다.

“직접 하였느냐?”

“…예.”

“그리 좋은 약재도 아닌 듯한데.”

그래도 명색이 오성의 왕자다. 풍요로운 나라는 아니었으나 북성은 늘 제국에 충성했고, 너그러우신 황제께서는 그런 북성과 서연을 어여삐 여기시어 다른 나라보다 풍족한 지원금을 내리셨다. 북성의 백성 또한 황제가 다스리고 이끌어야 할 이들이라 하셨다. 한데, 이렇게 남루한 삶이라니.

“무슨 죄를 지었기에 왕께 그리 구박받는 거냐?”

황자는 짐짓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적당히 웃음기가 녹아든 말에는 장난이 가득했다. 한데 아이는 웃지 않았다. 아니, 웃지 못한단 표현이 옳았다. 하릴없이 볼을 긁적이다가 고개를 푹 숙이는 표정은 익숙지 않게 어두웠다. 금세 울음을 터트릴 것처럼.

“소인은…….”

‘어미와 누이를 잡아먹은 악귀입니다.’

아이는 차마 그 말을 하지 못했다. 언젠가 술에 취해 흉포하게 날뛰던 왕께서 하신 말씀이었다. 눈물을 펑펑 쏟으며 그의 발에 매달려 잘못했다고 빌어도, 그날의 왕은 가차 없이 자신을 몰아붙였다.

그러고 푸른 달이 사라지기 전, 울다 지쳐 잠든 저를 끌어안고 하염없이 우셨다. 미안하다 말씀하시고, 자신의 죄를 용서하라 하셨다. 그 후로는 단 한 번도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나, 없던 일로 치부할 수는 없었다.

“어마마마께서는 소인을 낳으시다 돌아가셨습니다.”

어색한 분위기 때문이었다. 기하는 비밀이랄 것도 없는 말을 툭 털어놓으며 희미하게 웃었다. 흐음, 짧은 탄식이 황자의 입술 사이로 새었다.

“애석한 일이다.”

“예…….”

“네 모친이 혜비마마의 쌍생이라 들었는데?”

“예, 이모님은 딱 한 번 뵌 적 있습니다.”

“마마께서는 다정한 성정이시다. 이따금 먼저 떠난 동생 얘기를 하시며 눈물지으시지. 하여 어마마마와 친동기간처럼 다정하게 지내신다. 어마마마께서는 환우가 깊으시어, 사사로운 일은 혜비께서 하시거든.”

기하는 새로운 사실을 술술 털어놓는 황자를 보며 눈을 빛냈다. 언젠가 딱 한 번 뵈었던 이모님은 무척 아름답고 다정한 분이셨다. 저를 보고 꼭 안아 주셨고, 서슴없이 무릎 위에 올려도 주셨다. 좋은 얘기를 많이 해주셨는데, 달콤한 분 냄새가 좋아서 금세 그것을 까맣게 잊어버렸다. 역시, 좋으신 분이셨구나.

“네가 많이 외롭겠다.”

“괜찮습니다.”

기하는 스스럼없이 웃었다. 어머니 얘기를 꺼내니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그녀가 그리웠다. 어머니가 계셨더라면, 아바마마께서는 저를 조금 더 다정하게 대해주셨을까. 저를 미워하지 않고, 원망하지 않고, 다정한 아버지가 되어 주셨을까.

“아바마마께 청을 하였으니 곧 근신이 풀릴 거다. 이건 아랫것들에게 말해 잘 바르도록 해. 나 때문에 생긴 상처이니 흉 지면 안 된다. 후에 찾아와 검사할 것이야.”

황자는 기하에게 동그란 통 하나를 내밀었다. 기하는 그것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입술을 삐죽였다. 금세 울음이 새어 나올 것만 같아 가슴이 뻐근해졌다.

“정녕, 다시 오십니까?”

“응?”

“지금, 후에 찾아와 검사하신다고…….”

“사내가 한 입으로 두말하랴? 네가 그러지 않았어? 나와 함께 전장을 누비겠다고. 그것은 입바른 거짓이었느냐?”

“아닙니다!”

기하의 목소리는 지나치게 컸다. 순간 아이의 입을 틀어막은 황자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바깥에서 누군가가 오가는 소리가 났다. 문 앞을 지키던 왕의 병사가 긴 그림자를 드리웠다.

“왕자님.”

기하는 숨을 죽이고 동그란 눈을 천천히 깜빡였다. 저를 꽉 끌어안은 황자 때문에 숨이 막혔다.

“왕자님?”

그는 예리하게 문 쪽을 응시하다가 쉿, 하고 입술을 달싹였다. 한참을 문 앞에서 서성이던 병사는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음을 확인하고는 이내 다시 멀어졌다. 그제야 긴 숨을 내쉰 황자가 기하의 이마를 아프지 않게 툭 쳤다.

“몰래 네 처소에 찾아든 것을 아바마마께서 아시면 나 또한 벌을 받을 거다.”

“송구합니다.”

“정말 못 말리겠다. 이러니 만날 사고를 쳐서 왕께 혼이 나지.”

그런 말을 하면서도 황자는 기하가 밉지 않은 듯 웃었다. 머리를 쓸어주는 손길이 다정했다. 그 모습이 마치 제 형님과 같아서, 기하는 먹는 것도 잊고 황자만 바라봤다.

허튼 맹세가 아니었다. 언젠가 어른이 되면, 멋진 사내로 장성한다면, 꼭 그와 함께 전장을 누비고 싶었다. 그의 충신이 되고, 그의 검이 되고, 우리의 북성과 제국의 백성을 위해 살고 싶었다.

“훌륭하게 잘 자라라.”

“저하…….”

황자는 기하의 머리를 슥슥 어루만졌다. 한참 어린 제 아우에게 하듯, 다정하고 따뜻한 손이었다.

“응?”

북성의 왕자는 어쩐지 자꾸만 눈이 가는, 어딘지 어설프고 모자라 보이나 한없이 순수하고 귀여운 아이였다. 곁에 두면 재밌을 것 같고, 자신을 바라보는 뜨거운 시선도 나름 유쾌했다.

“소인이 불운을 타고났다고 해도, 괜찮습니까?”

딱 하나 걸리는 것은 그것이었다. 아이는 지나치게 자신을 과소평가했다. 무언가 감추고 있는 비밀이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도 마냥 우울하거나 의기소침한 것도 아니었다. 이상하고, 신기하기만 한 꼬마였다.

“무슨 소리냐? 불운을 타고났다니?”

“혹시라도 말입니다. 혹시, 그러니까…….”

쌍생은 불길하다. 북성의 오래된 관습은 그러했다. 쌍생으로 태어난 어머니가 왕비 자리에 오르는 것을 북성의 대신들은 목 놓아 반대했다. 아바마마의 뜻이 워낙에 확고하였고, 남은 것이라고는 껍데기뿐인 왕의 자리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그녀는 왕비의 자리에 오른 지 일곱 해 만에 명을 달리했다.

“혹시 그렇다고 해도, 저하께서는 괜찮으신지…….”

“뜬구름 잡는 소리다. 세상에 불운을 타고난 사람이 어디 있느냐?”

“미신 같은 게 있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이를테면, 쌍생은 불길하다든가…….”

왕자가 쌍생으로 태어난 것을 아는 이들은 많지 않았다. 왕과 세자인 창현군, 기하의 유모와 당시 출산을 관장했던 궁인 몇이 전부였다.

왕은 철저하게 그것을 숨겼다. 기하를 낳고 젖 한 번 물리지 못하고 숨을 거둔 왕비의 곁에는 날 때부터 죽은 목숨이던 아주 작은 어린아이가 함께 묻혔다. 기하와 찍어놓은 듯 닮은, 작은 여아였다.

“그런 미신이 어디 있느냐? 쌍생이 불길하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다.”

황자는 가볍게 혀까지 차면서 심드렁한 반응을 보였다. 기하는 그것이 마냥 신기하고 어색해서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쌍생은 하늘이 내린 복이다. 그 얼마나 신기한 일이냐? 동시에 두 아이가 태어나는 기쁨이라니, 집안의 경사가 아니냐?”

황자는 반쯤 식은 떡을 기하에게 불쑥 내밀었다. 처음 몇 개를 먹을 때는 숨이 넘어갈 듯 굴더니, 이제는 멍한 얼굴로 입도 제대로 벌리지 않았다. 뜬금없는 소리를 곧잘 하는 것은 첫 만남 때부터 느꼈다. 얼굴을 보자마자 제게 보탬이 되는 사람이 되겠다 고(告)했었지.

“세상에 귀하지 않은 생명은 없다. 거리를 떠도는 비렁뱅이(거지를 낮잡아 부르는 말)도 제 자식은 소중하다. 엊그제 우리 손에 죽은 사나운 짐승 또한 마찬가지다.”

황자는 이 작은 아이가 무척 측은했다. 아이는 밝고 어여뻤다. 스스럼없이 감정을 내보이니 숨김이 없었다.

황실엔 늘 제게 잘 보이기 위해 입에 독을 바른 이들만이 득실거렸다. 그들이 진심으로 저를 위하는지 따위도 알 수 없었다. 그들은 황제의 귀한 적통인 자신의 눈에 들어 출세를 앞당기려는 간신배였다. 버릴 수도, 그렇다고 무조건 거둘 수도 없는 양날이 검이었다.

한데 이 아이는 달랐다. 눈빛은 진실 되었고, 입술은 거짓을 모른다. 잘못을 깨끗하게 인정하고, 무지를 숨기지 않는다. 부끄러움을 깨닫고 반성하며, 같은 죄를 짓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이 얼마나 바람직한 아이인가.

“너는 귀한 사람이다.”

아이가 어떤 이유로 고통받는지는 모른다. 아마, 짝을 잃은 아비의 심술에 자존감을 잃었을지도 모르지. 하나 그것은 아이에게 지나치게 가혹한 형벌이었다.

누군들 제 어미와 맞바꾼 삶을 기꺼워하지는 않을 거다. 그렇기에 더 잘 자라서, 더 좋은 사람으로, 더 행복한 삶을 꿈꾸는 것이 옳지 않은가. 어머니가 내어주신 소중한 삶을 불운하게 살아간다면, 어머니는 아마 행복하지 않으실 거다. 가슴을 치면서 우실지도 모를 일이다.

“건강하게 잘 자라라. 그리고 내게 와. 하면, 귀하고 귀한 사람이 되게 해주겠다.”

“…예?”

“나의 검이 되지 않아도 좋다. 너는 반듯하고 심성 고운 아이이니 나의 아우가 되어도 좋고, 나의 친우가 되어도 좋다. 또한, 목숨을 빚졌으니 그 은혜는 갚아야 대장부가 아니냐?”

“그것은 당연한 일이옵고, 그 전에 저하께서 먼저 소인을…….”

“그 역시 당연하다. 하면, 이렇게 조그만 네가 다치는 것을 눈 뜨고 보고만 있으라는 거냐?”

황자의 웃음소리는 쾌활했다. 그는 단단하게 주먹을 그러쥐고 기하에게 내밀었다. 얼떨떨한 기하의 표정이 우스운지 연신 웃음을 참던 황자가 그의 작은 손을 끌어당겼다. 손가락을 하나하나 감아 주먹을 쥐게 하고 제 주먹과 딱 부딪친 후에야 의미 깊은 미소를 지은 황자는, 흐트러진 옷깃을 탈탈 털며 몸을 일으켰다.

“가십니까?”

“가야지. 해가 저물면 불을 밝히러 아랫것들이 들어오지 않느냐?”

“그야 그렇지만…….”

어쩐지 이렇게 헤어지면, 아마 오래도록 그를 못 만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기하는 저도 모르게 황자의 옷깃을 붙잡았다. 그의 곁을 지키던 복면인의 눈가가 사납게 찌푸려졌으나, 기하는 제 손을 거두지 않았다.

“기하야.”

“예…, 저하.”

그의 입에서 불린 제 이름이 낯설었다. 이름이란 그랬다. 그 누구도 살갑게 불러주지 않았기에 더 그랬다. 또다시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잘 지내라. 후에 또 보자.”

“저하…….”

기어이 까만 눈에 눈물이 가득 찼다. 아이는 그제야 겁이 난 얼굴로 한 걸음 더 바싹 다가왔다. 꼭 어미를 잃은 강아지 같아서, 돌아서는 황자의 마음도 편치 못했다.

마음 같아서는 아바마마께 말씀 올려 제국으로 데리고 가고 싶었으나, 북왕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을 거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함께 수라를 들 때마다 그는 왕자의 이야기를 했고 그 끝엔 늘 다정한 미소가 걸렸으니까. 어쩌면, 아이도 그것을 알고 있지 않을까.

“저하…….”

조그마한 창문이 열렸다. 복면인이 먼저 창문 새로 뛰어올랐다. 그는 하늘로 솟아오른 것처럼 가볍게 몸을 놀려 처소의 지붕 위로 올라갔다. 황자는 창문 틈으로 올라가 몸을 잔뜩 웅크리고 다시 한 번 기하를 뒤돌아봤다. 뚝뚝 떨어지는 아이의 눈물이 마음에 걸렸으나, 더 지체했다간 금세 발각되고 말 거다.

“그대의 앞날에 축복을.”

그것은 황가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찬란한 축복이었다. 황자는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오는 기하에게 등을 돌리고 복면인의 뒤를 따라 지붕 위로 날아올랐다.

후다닥, 저를 향해 달려들던 기하는 작은 소란을 일으켰다. 창문 앞에 채 닿기도 전에 넘어진 아이가 울컥 울음을 토해냈다. 그 소리에 안으로 뛰어 들어온 유모와 병사들이 왕자의 상태를 살폈다.

황자의 입술 끝에 화사한 미소가 걸렸다. 그것이 어떤 마음이었는지, 열세 살의 황자는 미처 깨닫지 못했다.

* * *

긴 꿈이었다. 황제는 저릿한 팔을 주무르며 몸을 뒤척이다가 눈을 느리게 깜박였다. 몹시도 오랜 시간 꿈을 꾼 것 같아 주위를 살피니, 바깥이 환했다.

황제는 그제야 제 품에 고이 안겨 소록소록 숨을 내쉬며 잠든 기하를 바라봤다. 얕게 잠투정을 하며 기수를 걷어차는 그의 발을 능숙하게 붙잡으며 허리를 바짝 끌어안는 것은, 의식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몸에 밴 행동이었다.

“으음…….”

괴로운 꿈을 꾸는지, 기하는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뒤척거렸다. 그의 가슴을 다독이며 이마 위에 입을 맞춘 황제는 물끄러미 기하의 얼굴을 내려다봤다.

까맣게 잊어버렸던 기억이었다. 늘 첫 만남을 이야기할 때 서러워하던 기하가 떠올랐다. 정말로 그럴 만했다. 그저 스쳐 지나는 짧은 만남이었을 거라 생각했던 자신의 과오였다. 그 후의 삶이 너무도 긴박하게 돌아가, 그즈음의 기억을 완전히 지워버린 것은 뜻하지 않은 일이었다.

그때도 어여뻤구나. 그때도 애틋했고, 솔직했고, 눈물이 많았어. 겁도 많은 것이 장난기는 어찌나 심한지, 앞뒤 가리지 않고 사고부터 치는 버릇은 여전했다. 바른말은 또박또박 잘하지. 그러면서도 거짓을 고하지 않는다. 배려심이 깊고, 먹을 것을 좋아하니 저와 똑 닮은 황자를 아끼는 마음은 당연하다.

기하야, 내 어찌 너를 잊고 살았더냐. 내 어찌, 너를 기억하지 못했더냐. 이런 내가 서러워, 너는 어찌 견뎠더냐. 삶이 송두리째 흔들린 것은 나뿐이 아니었구나.

“…폐하.”

낮게 잠긴 목소리가 저를 불렀다. 황제는 기하의 손끝을 붙잡아 하나하나 입을 맞췄다. 잠이 가득한 두 눈이 간지럽다고 웃는다. 잠들기 전까지 지독하게 압박했던 몸은 미지근한 열이 맴돌았다. 하나하나 직접 새겨 넣은 순흔을 손가락으로 훑으며, 황제는 짧은 탄성을 내었다.

“간지럽습니다.”

“꿈을 꿨다.”

“흉몽이었습니까?”

“아니.”

황제는 자잘하게 입을 맞추며 의문이 가득 차오른 기하의 시선을 모르는 체했다. 이제 와 기억한다고 하면 또 금세 얄미운 입술을 삐죽일 테지. 그러다 혹여 가슴 아픈 추억을 건드리면 울고 말 테다. 그러니 그만, 모든 것은 비밀로 남겨두자.

“어찌 말씀하시다 마십니까?”

“비밀이다.”

“예?”

황당한 듯 눈썹을 찌푸리는 기하의 입술 위로 황제의 입술이 날아들었다.

어여쁜 아우도 아니고, 친애하는 친우도 아니고, 전장을 함께 누비는 전우도 아니다. 곁을 지켜주고, 부족함을 감싸 안고, 내내 애틋하고, 어여쁨만 주는 평생의 반려이자 정인이다.

“기하야.”

“비밀이라면서 어찌 그리 부르십니까?”

팩 토라진 모습까지 어여뻐, 두 번 다시는 울리기 싫은 하나뿐인 심장이다.

“꽃잠 잘까?”

“잠들기 전까지 내내 하시고선!”

“그래서, 싫으냐?”

“…누가 언제 싫다고 했습니까?”

금세 누그러진 목소리엔 심술이 가득해도, 자신을 미워하거나 물러나지 않는다. 어여쁜 네가 나의 정인이라는 것이, 얼마나 다행이란 말이냐. 부족한 내가 너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은 또 얼마나 다행이냐.

“또 간질이시고 애태우기만 하시면 화낼 것입니다.”

“귀여워서 그런다.”

“두 번만 귀여워하시면 신첩 숨넘어가겠습니다.”

“밝히기는.”

“그래서 싫으십니까?”

“그럴 리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어여쁘지 않은 구석 없는 나의 비인데.”

다정한 입술이 기하의 목덜미에 내려앉았다. 따뜻한 손길 또한 마찬가지였다. 기하는 천천히 다리를 벌려 황제의 허리를 종아리로 감쌌다. 요망한 것이라며 코끝을 잡는 그의 손을 피하자, 자잘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따뜻한 봄이었다.

―화양연화 외전(花樣年華 外傳)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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