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옥오지애(屋烏之愛) 하(下) (48/49)

외전 옥오지애(屋烏之愛) 하(下)

북성에서의 아침은 늘 번잡스러웠다. 따뜻한 침상에서 뭉그적거리며 게으름을 부리는 기하를 일으켜 수라를 함께 들라 치면, 잠이 덜 깬 얼굴로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는 망아지 같은 황자들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

혼비백산하여 뛰어 들어와 머리를 조아리는 현 상궁을 탓하기도 이제는 지쳤다. 그것이 어찌 그녀의 잘못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밤새 제게 안겨 무거운 몸으로도 황자 놈들을 뿌리치지 못하는 기하의 탓이자, 아들놈들을 저 꼴로 낳은 제 탓이지.

“금일은 비의 몸이 무거우니 썩 내려앉아.”

“왜 몸이 무거우십니까? 마마, 마마께서도 소자처럼 뚠뚠해지셨습니까?”

“아니야! 우리 마마 날씬해! 형님만 뚱뚱해!”

“이놈이! 현님한테 버릇없이 굴지 말라고 했지!”

당장에라도 서로 머리채를 잡고 싸울 것 같은 정연과 태인을 떼어놓은 황제가 사납게 눈을 부라렸다. 그제야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낑낑거리며 기하의 품으로 들어가려는 아이들을 저 멀리 떼어놓은 황제는 혼자 우두커니 서 있는 무영을 손짓하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곳에 있을 때는 아침마다 문안 오지 않아도 된다고 하지 않았더냐.”

“송구하옵니다, 아바마마. 아우들의 고집을 꺾지 못한 소자를 꾸짖어 주십시오.”

“그것이 어찌 네 탓이냐.”

장자는 언제나 듬직했다. 나이답지 않은 우직함이 때론 안타까울 정도였다. 그래도 친우들과 함께할 때면 제 또래처럼 웃고 장난을 친다 하니, 그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까.

“마마, 이따가 낮에 료하와 맛있는 거 먹을 겁니다.”

“료하와?”

“예! 료하가 무진에서 가지고 온 달고 맛난 주전부리를 이만큼 준다고 했습니다.”

“료하 시러. 못생겨써.”

입을 쭉 내밀고 심술궂은 표정을 짓는 태인군을 무릎 위로 올리며 기하는 고개를 갸웃했다. 넘치는 애정을 받고 자란 탓에 생전 누구를 미워하는 법이 없던 황태자의 저런 표정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태인, 료하가 싫습니까?”

“응! 마마는 료하 좋아?”

“어찌 싫습니까? 료하는 황자들을 무척 좋아하던데요.”

“료하가 형님 뺏어갔어. 나는 형님이랑만 놀 꼬야. 료하 시러.”

“어차피 오늘은 활을 쏘기로 했으니 태인 너는 데리고 가지 않을 것이야.”

혀를 날름 내미는 정연을 향해 씩씩거리던 태인군은 억울한 얼굴로 기하를 쳐다봤다. 아마 제 편을 들어달라는 뜻일 테지.

“활을 쏜다고?”

“예! 료하가 활을 잘 쏜다고 해서 현님이랑 소자랑 함께 궁술을 할 것입니다. 아바마마께서도 구경 오십시오!”

“그 귀여운 것은 재주까지 비를 닮았구나.”

황제는 커다란 의자에 느긋하게 기대앉아 다리 위로 기어 올라온 태인의 볼을 살살 흔들었다. 잔뜩 심술 난 표정이 무척 우스웠으나, 여기서 놀리기라도 하면 저것은 분명 울음을 터트릴 테고 그러면 기하가 화를 낼 테지.

“태인.”

“예, 아바마마?”

“료하는 비와 닮았는데, 료하가 못났다고 할 테냐?”

“아닙니다! 료하는 못생겼고, 우리 마마는 제일 예쁩니다.”

아직 나이가 어려 제 형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것에 마음이 상하였는지, 아니면 불쑥 나타난 아이에게 형제를 빼앗긴 것이 속상했는지 태인은 계속 심술을 부렸다. 황제의 손길도 마다하고 수라를 들 때마저 입을 내밀고 뚱하니 앉아 있더니, 보다 못한 무영군이 직접 음식을 입에 넣어주자 그제야 방싯거리며 황자에게 매달렸다.

사소한 일상이었다. 그러나 어떤 것보다 귀한 시간이기도 했다. 북성에서의 달콤한 휴가는 어느덧 막바지였다. 이제 환궁하면 또 한동안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보내야겠지.

“머리가 많이 자랐어.”

눈이 퍼붓기 전에 바깥바람을 쐬고 오겠다며 황자들이 뛰어나간 후에야 황제는 기하와 오붓하게 마주했다. 겨울이 깊어지기 전 환궁해야 했기에, 기하는 요즘 부쩍 시무룩했다.

“며칠 더 머무를까?”

“정무가 밀렸다고 들었습니다.”

“그대가 원하면 며칠 더 머물러도 좋다.”

“싫습니다. 홀로 환궁하시려고요?”

솜씨 좋게 틀어 올린 머리카락 끝을 화려한 장신구로 고정하자, 수려하게 뻗은 목덜미가 드러났다. 어차피 바깥에 나갈 때는 속살이 보이지 않게 칭칭 휘감을 테니 상관없겠지. 단아한 목덜미에 입을 맞추자, 간지럽다고 웃으며 가슴에 기대오는 체온이 따뜻했다.

“그래도 괜찮겠느냐?”

“폐하와 떨어져 있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장난스럽게 입을 맞추는 황제를 바라보자 눈동자가 그윽해진다. 어젯밤 내내 자신을 괴롭히던 그의 관능적인 모습을 떠올린 기하는 저도 모르게 붉어진 뺨을 얼른 가렸다.

“나의 비께서 또 무슨 생각을 하시기에 얼굴이 붉어지실까?”

“놀리지 마십시오.”

슬그머니 어깨를 어루만지는 황제의 손에는 분명한 정염이 녹아 있었다. 기하는 슬쩍 고개를 돌려 황제의 입술 위에 입을 맞대었다. 기껏 틀어 올린 머리카락이 금세 어깨 아래로 나풀거리며 떨어졌다.

장신구가 침상 아래로 데굴데굴 굴러가는 모습을 곁눈질하며 천천히 눈을 감으려던 기하는 바깥에서 들려오는 아이의 울음소리에 놀라 벌떡 일어났다. 순간 황제의 입에서 가파른 한숨이 새어 나왔다. 이 망아지 같은 놈들!

“그냥 둬라.”

“태인이 웁니다.”

황제는 기하와 단둘이 있는 시간을 방해받는 것을 무척 싫어했다. 불같은 그의 성정을 잘 아는 지밀상궁이나 현 상궁은 두 사람의 오붓한 시간을 철통같이 지키려 했기에, 불쑥불쑥 찾아드는 황자들은 열에 일곱 번은 시무룩하게 돌아서야 했다. 물론 아침처럼 문안 인사를 핑계 삼아 무턱대고 들어오는 일이 남은 세 번에 해당했다.

울음이 터진 태자를 달래는 것은 무영이나 기하의 몫이었다. 기하는 한 번 울음이 터지면 목이 쉴 때까지 좀체 그치지 않는 태인의 눈물에 유난히 약했다.

“바깥에 무슨 일인가.”

“황공하옵니다, 마마. 태자 전하께옵서…….”

“마마!”

얼마나 울었는지 열이 올라 붉어진 얼굴로 뛰어 들어오는 황태자의 꼴이 가관이었다. 울어서 엉망이 된 얼굴은 그렇다 치고, 머리는 산발에 옷은 축축했다. 이러다가 고뿔이라도 걸리면 어쩌려고.

“마마아, 흐어어엉.”

무작정 품에 안기는 태자를 다독이던 기하의 표정이 일순간 굳었다. 지금 이게, 잘못 본 것인가?

“태자?”

“마마아, 나 아포. 여기 아포.”

아이의 오른쪽 뺨에 긴 생채기가 났다. 엉덩이 부분이 흠뻑 젖은 의복엔 흙먼지가 가득했다. 뒤늦게 따라 들어온 정연군은 멀쩡해 보였다. 달리 둘이 다툰 것 같지는 않아 연신 아이를 살피니, 등 뒤에서 황제의 한숨 소리가 들렸다.

“태자, 누가 이랬습니까?”

“흐어엉, 어어엉.”

“말씀해 보세요. 누가 감히 태자께 상처를 입혔습니까?”

뽀얀 피부에 남은 생채기는 자칫 흉이 될 것 같았다. 초조하게 입술을 씹은 기하는 슬그머니 곁으로 다가오는 정연의 뺨을 쓰다듬었다.

“정연.”

“예, 마마.”

“아우가 어찌 이리된 것입니까?”

정연군은 유순해 보이는 눈을 느리게 깜박이다 불쑥 황제를 돌아봤다. 조잘조잘 떠드는 것이 특기인 정연은 늘 말이 많다며 황제에게 면박당하기 일쑤였다. 절로 눈치를 살피는 아이에게 괜찮다 말하는 기하의 표정은 좀체 풀어지지 않았다.

“아우는 료하와 다투었습니다.”

무언가를 한참 생각하던 정연은 제 볼을 긁적이며 겨우 말을 뱉었다. 좀처럼 보기 힘든 기하의 굳은 얼굴에 지레 겁을 먹은 까닭이었다.

한없이 자애롭고 따뜻한 기하는 때때로 황자들을 엄하게 교육했는데, 그럴 때면 아바마마보다 훨씬 무서워 마치 호랑이 같다며 너 나 할 것 없이 울음을 터트렸다.

“료하가 태자의 얼굴을 할퀴었습니까?”

정연군은 물끄러미 태인군을 바라보다가, 크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아이답지 않은 능청스러움은 황제에게서 고스란히 물려받은 것이었다. 그럴 때마다 기하는 무척 귀엽다는 듯 정연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도 통하지 않는 듯했다.

“정연, 어찌된 일인지 말씀해 보세요.”

“태인이 먼저 료하를 때리고 밀었습니다.”

“아니야! 내가 안 그래써!”

버럭 소리치는 황태자는 퍽 당당한 표정이었다. 아이는 아이였다. 누구에게나 넘치는 애정을 받은 아이는 조금의 움츠림도 없었다. 정연은 심술궂은 얼굴로 아우를 바라보다, 통통한 손가락을 쭉 뻗어 흔들며 혀를 끌끌 찼다. 그 모습이 어찌나 능청스러운지, 황제는 소리 없이 웃으며 나른하게 몸을 기댔다.

“그랬잖느냐? 네가 먼저 료하에게 화살을 던지고, 머리카락도 잡아당겼지?”

“현 상궁.”

“예, 마마.”

“지금 당장 그 아이를 데려오게.”

황제는 가만히 무릎을 구부려 태자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통통한 뺨에 긴 상흔이 남았으나, 약을 잘 바르면 금세 괜찮아질 것이다. 황제가 걱정되는 것은 울고 있는 태자의 상처가 아니었다. 아이들이야 자라면서 이깟 상처 한둘쯤은 훈장처럼 여기지 않나. 한데 어찌 기하의 표정이 저리 사납단 말인가.

“비, 아이를 불러 어찌하려고?”

“어찌하긴요? 보십시오. 태자의 얼굴에 상흔이라니요. 이것을 그냥 두고 보라는 것입니까?”

“아이들끼리 놀다 그런 것이다.”

“태자가 보통 아이와 같습니까?”

“비.”

황제는 슬쩍 미간을 찌푸렸다. 기하는 본디 누구에게나 관대했다. 자신이 부리는 노비까지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일전엔 황자들이 잘못 던진 검에 노비가 베일까 봐 직접 몸으로 막아 상처를 입기도 하지 않았던가.

그런 그가 유일하게 공명하지 못한 구석이 있었으니, 바로 황제 자신과 황자들의 문제 앞에서였다. 황제는 그것이 못내 불안했다.

“압니다. 어느 아이든 귀함과 천함 없이 부모에게는 가장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요. 하나, 한 번이 어렵지, 두 번 세 번은 쉽습니다. 말하기 좋아하는 자들은 분명 이것을 두고 내내 입방아를 찧을 것입니다.”

기하는 젖은 영견으로 태자의 얼굴을 문질러 닦아주며 우는 아이를 다독이다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 있는 정연을 제 무릎 위에 앉혔다.

“마마, 화나셨습니까?”

“예, 기분이 상하였습니다.”

“아우가 다쳐서요?”

“예. 정연이 다치더라도 똑같이 화가 날 것입니다. 하니, 절대로 다치시면 아니 됩니다. 아시겠습니까?”

“마마는 우리를 너무 좋아하신다니까, 히힛. 근데에 료하는…….”

“형님 미워!”

무작정 정연군의 옷깃을 잡으며 빽 소리 지른 태자가 다시 울음을 터트렸다. 황제는 한 걸음 물러나 심드렁한 얼굴로 그들을 바라볼 뿐이었다.

어차피 황자들의 교육 문제는 자신보다는 기하가 더 잘 알아서 하니 지금까지 크게 신경 쓸 일이 없었는데, 그 조그만 아이가 야단이라도 맞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무영은 어디 있습니까?”

“현님은 다녀올 곳이 있으시다며 소자더러 먼저 가라고만 했습니다. 아까 현님이 무섭게 화내고 료하를 밀었습니다. 태인은 현님하고 울지 않기로 약속했는데 약속을 어겼습니다.”

“아니야! 안 울었어!”

빽 소리 지르는 태자를 쳐다보던 황제가 혀를 끌끌 찼다. 이것들이 대체 언제 커서 철이 들꼬. 툭하면 엉겨 붙어 싸움질을 하질 않나, 그러다 울며 매달리질 않나. 분명 혼이 날 것을 알고 미리 선수 치는 것이 빤히 보이는데, 기하는 어찌 저리 황자들에게만 무른지.

“귀비마마, 무영군 저하와 령 부인 드셔계시옵니다.”

“모시게.”

기하는 평소보다 딱딱한 목소리로 대답하고, 태인군의 상처를 한 번 더 어루만졌다. 두 눈을 말똥말똥 깜박이던 정연은 안으로 들어와 예를 갖추는 무영에게 후다닥 뛰어가다가, 사나운 표정의 령 부인을 마주하고는 놀라서 뒤로 물러섰다.

기하의 고모 되는 령 부인은 본 적 없는 사나운 표정으로 겨우 예를 갖췄다. 황제는 여전히 심드렁한 표정으로 그녀를 외면하다가, 령 부인의 품에 안긴 아이를 바라봤다. 잔뜩 겁먹은 아이는 젖은 눈을 하고 조그만 몸을 움츠렸다. 그 모습이 퍽 측은하여 가볍게 혀를 차자, 그녀는 더더욱 아이를 품 안으로 당겨 안았다.

“령 부인께서는 예를 갖추십시오.”

그녀를 보다 못한 지밀상궁이 엄하게 꾸짖자, 품에 안겨 있던 아이가 빼꼼 머리를 내밀었다.

“송구하옵니다. 손자 아이가 홀로 서 있을 수 없어 안고 있는 것이니, 부디 너그러이 관용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차가운 바람이 쌩쌩 부는 듯했다. 표정을 굳히고 서 있는 령 부인의 기세에 황자들이 어리둥절해 하는 사이, 기하가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료하를 불렀습니다만, 고모님께서 함께 계시었습니까.”

“귀비마마, 어찌 이러실 수가 있으십니까?”

기하는 대답 대신 고요한 시선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연배에 비해 젊고 기품 넘치는 그녀는 늘 애틋한 눈으로 기하를 바라봤다. 그것이 어찌나 다정하고 따뜻한지, 처음 보는 사람조차 기하를 향한 그녀의 진심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한데 지금은 달랐다. 그녀는 퍽 억울한 눈으로 사납게 두 눈을 내리깔았다. 감히 황족을 향해 억울함을 내보일 순 없으니 최대한 자중하는 듯했으나, 분노로 얼룩진 감정을 숨기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목숨보다 귀애한다는 손자를 단단히 끌어안으며, 그녀는 숨을 몰아쉬었다.

“어찌 이 어린 것에게 이토록 가혹한 벌을 내리십니까?”

기하는 그제야 그녀의 품에 안긴 아이에게 시선을 건넸다. 작은 머리통이 움찔하다가 고개를 드니, 처연한 얼굴이 드러났다.

황제는 저도 모르게 혀를 찼다. 아이는 가련하게도 떨고 있었다. 벌겋게 부은 눈을 숨기고 꾸역꾸역 울음을 참았다. 아이의 왼쪽 뺨에는 손자국과 긴 상흔이 남아 있었다. 누군가가 대차게 할퀴고 무언가에 맞은 듯했다.

“벌이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종아리가 터지도록 회초리 찜질을 당하였습니다. 소인이 막지 않았더라면 아마 한동안은 운신조차 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아이의 다리를 덮은 치맛단이 붉게 젖어 있었다. 소리 없이 자리에서 일어난 황제가 아이의 앞으로 다가왔다. 억울함에 목소리를 높이던 령 부인은 황제가 가까이 다가오자 말을 멈추고 머리를 조아렸다.

“김 상궁.”

“예, 귀비마마.”

“어찌 된 일인가.”

“익히 아시는 대로입니다. 감히 황태자 전하의 옥체에 상흔을 남긴 죄를 쉬이 간과할 수 없는 것이 황실의 지엄한 법도입니다. 이것은 작은 본보기이니, 마마께서는 죄의 진상을 낱낱이 밝히시어 벌을 내리심이 마땅한 줄 아옵니다.”

황태자의 보모상궁인 김 상궁의 칼날 같은 말에, 령 부인의 얼굴엔 잔뜩 열이 올랐다. 무섭다고 울음을 터트리는 어린아이에게 가차 없이 회초리를 휘두르던 그녀를 당장에라도 쥐어뜯고 싶은 표정이었다.

“태자에게 해를 가하려 한 연유를 고하십시오.”

“마마, 이것은 아이들 간의 사소한 일이었습니다. 료하의 얼굴이 보이지 않으십니까? 태자 전하께옵서도 료하에게 손찌검을 하시었습니다. 어찌 모든 것이 이 아이의 탓이라고 하십니까?”

그녀는 퍽 억울한 듯 기하를 향해 한 걸음 다가갔다. 순간 누군가의 검집이 그녀를 향했다. 기척을 지우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기하를 비호하는 황제의 그림자였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복면으로 무장한 이들의 난데없는 등장에 잔뜩 겁을 집어먹은 아이가 소리도 없이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렇다면 그것이, 태자의 탓이라는 것입니까?”

령 부인은 그림자의 손짓에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머리를 조아렸다. 겁에 질려 덜덜 떠는 어린 손자의 체온이 느껴지니, 손끝으로 피가 죄다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무지한 어린아이가 행한 일입니다. 하나, 어찌 이 어린아이에게 이토록 가혹하실 수가 있습니까? 소인이 이 아이를 얼마나 애지중지 키우는지 아시면서 어찌 이러실 수가 있습니까? 몸이 약해 툭하면 앓아눕는 아이에게 회초리 찜질이라니요.”

“고모님.”

억울한 듯 목소리를 높이던 령 부인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제 품에 안긴 아이를 끌어안았다. 아이는 제대로 울지도 못하고, 열이 오른 몸을 벌벌 떨기만 했다. 종아리를 타고 떨어진 핏자국이 그녀의 팔을 축축하게 적셨다.

“태인군이 료하와 같습니까?”

“…그것이 무슨 말씀이십니까?”

“장차 제국의 주인이 될 태자와 료하의 위치가 같은지 물었습니다.”

물끄러미 아이를 쳐다보던 황제조차 의아함을 느낄 정도로 기하는 평소와 다른 표정으로 령 부인을 다그쳤다. 고요한 분노가 녹아든 목소리에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어찌, 어찌 그리 말씀하십니까.”

“마음을 나눌 수 있는 벗이라도 신분의 차이는 엄연히 존재합니다. 어디 감히, 황태자의 옥체에 손을 댄단 말입니까.”

그녀는 품에 안은 손자의 귀를 당장에라도 틀어막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으며 분노를 삭였다. 애석하게도 조카의 말에 반박할 말이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평생을 귀애한 조카라 너무 쉽게 생각한 것일지도 모른다. 자신의 피붙이이기 전에 제국의 주인이신 황제 폐하의 총비이자, 황태자를 제 자식처럼 키운 그의 분노를.

“아이들끼리 다툼이니 그쯤 하도록 해. 이 조그만 아이가 무슨 나쁜 뜻이 있어 태인에게 손을 댔을까.”

황제는 가볍게 미소하며 령 부인의 품에 안긴 료하의 뺨을 어루만졌다. 열이 오르는지 따끈따끈해진 뺨을 쓸자 화들짝 놀라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눈물에 흥건하게 젖은 눈으로 붉은 입술을 달싹이는 모습이 퍽 처연했다.

“미천한 아이가 무지하여 벌인 일이니, 너그러이 용서해 주십시오.”

령 부인은 현명한 여인이었다. 그녀는 사내만큼 배포가 크고, 옳고 그른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런 그녀의 이성을 흐리는 것은 오직 몸이 약한 손자뿐이었다. 아들에게도 엄격하던 그녀의 내리사랑은 실로 대단하여 북성의 왕족에게는 이미 익숙한 것이었다.

“피범벅이 되도록 회초리 찜질을 당하는 모습에 소인이 잠시 이성을 잃었으니, 벌을 내리신다면 마땅히 받겠습니다.”

그녀는 그제야 아이를 품에서 내려놓고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아이는 당장에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얼굴로 제 할머니를 따라 바닥에 엎드렸다. 아이의 작은 몸이 바닥에 닿자, 령 부인이 움찔했다. 그녀의 얼굴 가득 여러 가지 감정이 교차했다.

기하는 물끄러미 두 사람을 내려다보다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란히 선 세 황자는 무거운 분위기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고모님께서는 잠시 물러나십시오.”

기하의 명에 놀란 것은 아이였다. 어른도 견디기 힘든 상처를 입고도 울지 않던 료하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령 부인을 쳐다봤다. 저를 두고 가지 말라는 듯, 겁에 질린 얼굴이 안쓰러웠다.

기하는 조용히 일어나 엎드려서 떨고 있는 아이의 앞으로 걸어갔다. 눈치 빠른 령 부인은 기하의 눈짓에 하는 수 없이 자리에서 물러났다. 순간적으로 차오른 서러운 감정에 마음이 상한 것은, 팔이 안으로 굽어 벌어진 일이었다. 그리고 그뿐이다. 기하의 성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 걱정은 덜어 두어도 될 것이다.

“하미…….”

기어이 울음을 터트린 료하가 작은 손으로 제 두 눈을 가렸다. 늘 다정하게 웃어주던 기하마저 무서운 표정을 하고 있으니 겁이 나서 심장이 달달 떨렸다. 매를 맞아 벌어진 상처에서 피가 새는 것도 잊을 만큼, 그것은 거대한 공포였다. 어깨를 들썩이면서도 차마 입으로 소리를 내뱉지 못하는 아이는 그만큼 현명하고 속이 깊었다.

“료하.”

한층 가라앉은 기하의 목소리에 안타까움이 배어들었다. 아이는 대답조차 하지 못하고 떨었다. 기하가 작은 몸을 일으키고 흐트러진 옷자락을 정리해 줄 즈음엔, 눈물에 젖어 얼굴이 엉망이었다.

“많이 놀랐구나.”

조그마한 입술은 쉬이 벌어지지 않았다. 숨을 꾹꾹 눌러 참으며 울음을 삼키는 모습은 나이답지 않게 의젓했다. 제 잘못으로 인해 할머니가 잘못되기라도 할까 봐 지나치게 겁을 먹은 모습이 안쓰러웠다.

“네 잘못이 무엇인지 알겠느냐?”

아이는 꾸역꾸역 서러움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생채기가 길게 난 얼굴을 쓰다듬으며 기하는 희미하게 미소했다.

“그럼 되었다. 태인, 이리 가까이 오세요.”

어린 황태자는 의기양양한 얼굴로 걸어오다 기하의 손을 붙잡았다. 상처가 깊은지 료하의 옷자락을 타고 피가 뚝뚝 흘렀다.

“태인, 료하에게…….”

“소인이 잘못했습니다, 태자 전하.”

아이의 목소리는 무거웠다. 눈물이 가득해서 당장에라도 울음이 더해질 것 같았다.

“귀비마마, 소인이 잘못하였습니다. 소인이 벌을 받을 것이니 할머니는 용서해 주십시오.”

툭 터진 눈물은 그칠 줄 몰랐다. 아이는 연신 손등으로 제 눈을 문지르며 울음을 삼켰다. 고개조차 쉬이 들지 못하는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곁으로 다가온 정연이 아이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울지 마. 아바마마께서 괜찮다고 하시잖아? 그렇지요, 아바마마?”

“그래, 괜찮다.”

“마마, 소자가 료하를 처소에 데려다 주겠습니다. 그래도 되지요?”

정연군의 유쾌한 웃음소리가 무거운 적막을 가로질렀다. 기하가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아이의 손을 붙잡은 정연군이 씩씩하게 종알거렸다. 황제는 커다란 의자에 기대고 앉아 턱을 받치고 가만히 그 모습을 바라봤다. 늘 형과 아우에게 치여 투정만 부리는 줄 알았더니, 제법 의젓하게 자란 아들을 보자 괜스레 뿌듯함이 밀려왔다.

“가자.”

아이는 황제와 기하를 향해 허리를 숙여 예를 갖췄다. 평소와 달리 꾸물거리는 것이 싫었는지 정연군이 연신 재촉했지만, 굼뜬 다리는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현님, 현님은 같이 안 가십니까?”

천연덕스러운 정연군의 표정에도 무영군은 쉬이 표정을 풀지 않았다. 그것은 료하 또한 마찬가지였기에, 입을 뚱하게 내민 정연은 아이의 팔을 붙잡고 일부러 더 방싯거렸다. 절뚝거리는 아이에게 연신 장난치며 유쾌하게 떠드는 정연군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그제까지 아무 말 없이 문 쪽만 바라보던 기하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시선을 옮겼다.

“태자.”

어린 황태자는 금세 시무룩한 얼굴로 기하를 바라봤다. 아이는 영민하고 눈치가 빨랐다. 기하는 좋은 부모이자 스승이었고, 아이가 가장 좋아하면서도 유일하게 무서워하는 존재였다.

“나 잘못 안 했는데……. 료하가 나 때렸는데.”

“사람은 본디 귀함과 천함이 없습니다. 신분을 막론하고, 부모에겐 모두 목숨보다 귀한 존재이지요.”

“우응…….”

기하는 황태자의 양손을 단단하게 붙잡았다. 야단맞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황태자는 당장 울음을 터트릴 것만 같은 얼굴로 기하를 바라봤다. 이렇게 습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면, 기하는 금세 무른 표정으로 작은 몸을 끌어안았다. 종종 있는 일이었다.

이번에도 그렇게 쉽게 넘어갈 것이라 예상했던 아이는 도통 바뀌지 않는 기하의 표정에 시무룩하게 어깨를 늘어뜨렸다.

“태자는 훗날 아바마마의 뒤를 이어 황제의 자리에 오를 것입니다. 만백성의 어버이이자, 가장 빛나는 자리에서 모두의 존경과 신망을 받을 것입니다.”

그것은 늘 기하가 아이에게 하는 말이었다. 주문을 걸듯, 진심을 담아 바라고 또 바라는 것이기도 했다.

“그것은 너무도 외롭고, 무거운 자리랍니다. 찬란하게 빛나서 그 누구도 가까이할 수 없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황제는 소리 없이 웃었다. 황제의 자리가 갖는 지나친 무거움을 걱정하는 그 마음이 어여뻐서, 따뜻해서, 어쩐지 푹 가라앉은 어깨가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료하는 태자의 백성이 될 테니, 그 아이에게 머리를 숙이지 않아도 됩니다.”

태자는 말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다정하고 따뜻한 그의 말에 담긴 진심을 스스로 깨우치기엔, 아이는 아직 어렸다.

“아직도 료하가 싫고 밉습니까?”

“내가아, 아까 료하 때려서어…….”

아이의 목소리가 기어들어 갔다. 기하는 그제야 다정하게 미소했다. 황태자는 고집이 셌지만, 아무에게나 못되게 굴지는 않았다. 물론 자애로우신 황후마마의 성정을 닮았다면, 전혀 걱정하지 않아도 될 일이었다.

“세상 누구도 태자에게 잘못을 말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지금은 아바마마도 계시고 형님들도 있으나, 태자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면 더더욱 그러하겠지요.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군주는 백성의 신망을 얻지 못합니다. 친우를 가까이 둘 수 없습니다. 충신을 바라지도 못합니다. 태자는 그래도 좋습니까?”

“아니야아. 아니에요.”

시무룩한 표정으로 볼을 긁적이는 태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기하는 아이를 따뜻하게 품에 안았다.

“믿고 의지할 친우조차 없는 군주를 존경할 백성은 세상에 없습니다.”

“우웅…….”

등을 다독이는 기하의 손길에 그제야 웃음을 찾은 황태자는 그의 말을 완벽하게 이해하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그래도 상관없다. 언젠가는 머리에 새기고, 가슴에 새기며, 그것을 자연스럽게 행할 날이 오리라고 기하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또한, 백성이 없는 군주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아바마마처럼 백성을 아껴주라고 마마가 그랬는데.”

“우리 태자는 분명 아바마마처럼 성군이 될 것입니다.”

눈동자를 도로록 굴리는 태자를 기하의 품에서 떼어낸 황제가 손을 휘휘 내저었다. 이렇게 떼어놓지 않으면 도통 떨어질 줄 모르는 망아지 같은 놈들이 오늘따라 무척 끈질겼다.

“이제 조용히 나가서 잘못을 반성하고, 친우에게 용서를 구하고 오도록 해라.”

볼을 긁적이며 눈치를 살피는 황태자를 기하에게서 완전히 떼어낸 황제가 턱짓으로 상궁들을 불렀다. 제 잘못을 인지하면서도 누군가에게 쉬이 손을 내밀지 못하는 고집 센 아들놈을 받아주는 것은 언제나 기하의 몫이니, 일이 더 커지기 전에 적당히 잘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오늘은 종일 그의 곁에 서지도 못할지 모른다.

“마마아.”

“어찌 비를 쳐다봐? 썩 나가지 못하겠느냐?”

퉁명스러운 황제의 축객령에 잔뜩 기가 죽은 태자에게 손을 내민 것은 무영이었다. 그제야 생긋 웃은 태인군은 제 형의 손을 잡고는 남은 손을 흔들었다. 버릇이 없다는 황제의 핀잔에도, 아이의 미소는 쉬이 사그라지지 않았다.

“어찌 그래.”

머리가 아픈 듯 미간을 찌푸리던 기하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말을 빙빙 돌려 잘못을 인지하게 한 방법이 옳은 것인지 사실 잘 모르겠다. 무엇보다, 상처 입은 아이의 표정이 자꾸만 떠올라 마음이 시렸다. 후에 따로 불러 잘 달래주면 되겠지, 하는 생각을 하다가도 그랬다.

“머리가 아픈 게냐?”

“아닙니다.”

“그대는 가끔 보면 지나치게 냉정하다. 어찌 고 조그마한 아이가 피를 철철 흘리는데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을 수가 있어?”

그것은 딱히 타박하는 말이 아니었다. 마음이 불편한 기하에게는 날카로운 정으로 가슴을 콱콱 치는 것만 같았으나, 황제에게 다른 뜻은 없었다.

“신첩의 식견이 좁아 그랬습니다. 하여, 지금 후회 중입니다.”

“그 상황에서 다른 방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래도 아랫사람인데, 그 앞에서 황태자의 체면을 구길 수는 없지.”

황제는 유난히 료하를 어여삐 여겼다. 그다지 건강하지 않아 여기저기로 요양을 다니는 사내아이를 며느리로 들이고 싶다는 말을 대수롭지 않게 할 만큼, 딱 그만큼.

황제의 모든 말은 쉬이 간과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는 한 번 한 약속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키려 했다. 물론, 령 부인이 귀하디귀한 손자를 황자의 짝으로 내어줄지가 의문이지만.

“태인은 아직 어리다. 그대는 그것부터 인정해야 해.”

“신첩의 욕심이 지나치다는 말씀을 돌려서 하시는 것입니까?”

“그것도 그른 말은 아니다. 그 어린 게 뭘 알겠느냐? 당장 정연만 해도 말귀를 못 알아먹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닌데.”

“그래도 정연이 눈치가 빠릅니다. 아까도 보십시오. 직접 료하를 데리고…….”

“알았다, 알았어. 다 알아먹었으니 망아지 놈들 얘기는 이제 그만해.”

슬슬 샘이 나려 하니까. 황제는 능구렁이처럼 웃으며 기하의 귓가에 마지막 말을 속삭였다. 덤으로 그의 말랑말랑한 귓불을 깨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륜의 자리가 너무도 무거워, 때로는 겁이 납니다.”

기하를 등 뒤에서 끌어안고 그의 어깨에 뺨을 문지르며, 황제는 스르르 눈을 감았다. 자신도 한때는 그렇게 생각했던 순간이 있었다. 너무도 무거워, 당장 벗어 던지고 멀리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에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하던 날이 숱했다.

그러다 차츰 익숙해졌고, 그러다 금세 일상이 되었다. 그러나 완전히 그 무거움을 걷어내지는 않았다. 제 어깨 위에 내려앉은 수천만의 백성을 황제는 내내 생각하고 떠올렸다. 역사에 길이 남을 성군이 되지는 못해도, 적어도 그 시대 백성들에게 손가락질 받는 왕이 되고 싶진 않았다.

“그 자리를 태인이, 또 그 아이의 아이가, 계속 그렇게 짐을 짊어져야 할 테니…….”

“짐은 아니다. 무겁지 않아.”

“진심이십니까?”

허리를 꽉 끌어안은 황제의 손을 밀어내지 못한 채로 기하는 간신히 몸을 틀었다. 그러나 워낙 황제가 단단히 자신을 붙잡고 있었기에, 쉽사리 움직일 수 없었다. 겨우 곁눈질해 그의 머리카락을 훔쳐보던 기하는 황제를 향해 장난치듯 체중을 실었다. 옆구리를 슬금슬금 간질이는 그를 향한 작은 복수였다.

“그럼, 진심이다마다.”

기하가 보기에 황제는 타고난 성군이었다. 그를 향한 백성의 신망과 칭송은 줄을 이었다. 황제는 누구보다 백성을 아끼고, 신하들에게 존경받는 군주였다. 좋은 아버지였고, 다정한 황제였다.

“황제가 아니 되었다면, 그대를 만나지 못했을 테니까.”

자신의 운명대로 황제의 자리에 오른 형님을 보필하며 생을 보냈다면, 절대로 기하는 자신의 사람이 되지 못했을 거다. 그에게 삶을 배우지도 못했을 테고, 이토록 절절한 애정을 꿈꾸지도 않았을 거다.

“황제가 되었으니 그대를 만나고, 나의 비로 삼고, 곁에 둘 수 있지 않아? 짐에게 이보다 더 큰 보상은 없으니, 평생 백성을 위해 헌신해야지.”

그것은 꽤 장난스러운 말이었는데도, 기하는 쉽게 웃을 수 없었다. 가슴이 뜨겁게 넘실거렸다. 눈가가 시큰해졌다. 겨울바람이 지나치게 찬 탓인가. 그리움에 허덕이며 누군가를 떠올리던 공간에 자리해서인가.

북성의 겨울이 이전처럼 춥기만 한 것도 아니었는데, 기하는 때때로 가슴을 문지르며 쏟아지는 눈물을 애써 참아야만 했다.

“참으로 다행입니다.”

이렇게 그를 다시 만나, 한마음이 닿고, 평생 곁을 채울 수 있다는 것은 기적에 가까웠다. 그의 말이 모두 옳다. 무거운 짐을 어깨에 짊어지고 평생을 살아도 아마 우리는 행복할 거다. 때로는 아프고, 때로는 고되고, 때로는 서러울지라도, 우리는 평생 행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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