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옥오지애(屋烏之愛) 상(上)
북성의 가을은 제국의 초겨울보다 바람이 찼다. 해가 지면 살갗을 에는 바람이 불어와 바깥출입이 어려웠다. 하여 북성을 찾은 황자들은 밤마다 머리를 맞대고 앉아 기하의 눈치만 살펴야 했다.
황제 일가의 북성 나들이는 이번이 세 번째였다. 무더운 여름에 북성을 찾아 보름간 자유롭고 시원하게 보낸 탓에 황자들의 기대는 나날이 커졌는데, 올해는 여러 가지 문제로 황제와 기하가 황궁을 비울 수 없어 일정에 차질을 빚었다.
말로는 괜찮다고 하였으나 날이 갈수록 시무룩해지는 기하를 보다 못한 황제가 그들을 먼저 북성으로 보냈으나, 고향을 찾은 기쁨보다 정인과 떨어져 지내는 며칠의 외로움이 컸는지 그는 무척 쓸쓸해했다.
“마마, 바깥에 나가도 됩니까?”
“해가 져서 찬바람이 불 텐데요? 그러다 고뿔 걸립니다.”
“소자는 씩씩해서 괜찮습니다!”
“정연과 형님은 괜찮을지 모르나, 태인은 아직 어리지 않습니까.”
“하지만…….”
정연은 유난히 바깥 놀이를 좋아했다. 한여름에도 땀을 뻘뻘 흘리며 황궁을 휘젓고 다니는 정연 때문에 권 상궁의 흰머리가 는다는 말이 나돌 지경이니, 어린 태인군까지 대동하고 사고 치는 황자를 막을 도리는 없었다.
“저, 마마. 속히 나가보셔야 할 것 같사옵니다.”
“지금?”
“예. 황제 폐하께서 조금 전 북성에 도착하셨다고 합니다.”
“폐하께서? 지금 말인가?”
“예. 북왕께서 급하게 보내온 전갈이옵니다.”
황제는 일정상 도저히 휴가를 함께 보낼 수 없을 거라 했다. 괜찮다는데도 부득불 우겨 기하와 황자 셋을 함께 보내면서 미안해하던 모습이 아직 눈에 선한데.
“현 상궁, 아바마마 오셨어? 지금?”
“예, 저하.”
“우와! 아바마마, 아바마마.”
제자리에서 방방 뛰는 정연군과 태인군을 붙잡으며 무영군은 엄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밤이 늦었으니 더는 소란을 떨지 말라는 무영의 들리지 않는 엄포에도 아우들은 해사한 미소를 감추지 않았다.
“어서 가봐야겠다.”
“마마, 일단 채비하시지요. 바람이 찹니다.”
그대로 처소를 뛰어나갈 기세인 기하를 붙잡은 현 상궁이 그의 어깨 위로 두툼한 겉옷을 걸쳤다. 황제께서 직접 사냥한 여우 다섯 마리의 털로 만든 옷은 지나치게 화사했으며, 딱 그만큼 따뜻하기도 했다.
“마마, 나도 가. 나도 아바마마…….”
“태인, 아직 고뿔이 낫지 않아서 열이 나면 아니 됩니다. 형님들과 잠시 여기 있도록 해요.”
“핏, 아바마마 만날 꼰데. 그럼 형님도 가디 마.”
고사리 같은 손으로 무영의 손을 꼭 붙잡은 태인이 생긋 웃었다. 일찌감치 문 앞에 서서 기하를 따라나설 기세인 제게는 시선도 주지 않는 태인이 얄미웠던지, 정연은 괜히 아우의 주위를 어슬렁거렸다.
형제 중 막내이자 장차 황제의 뒤를 이을 황태자 태인은 제 큰형을 지나치게 좋아했고, 정연과는 매일 몰려다니며 사고 치다 다투기 일쑤였다.
“아바마마께서 오셨으니 나가서 인사 올려야 자식 된 도리지? 태인 너는 그것도 모르느냐? 제 말이 맞지요, 현님?”
“현님이 아니라 형님입니다. 정연 형님은 바보야, 그치 마마?”
“바보 아니다! 태인 너야말로 못된 아우다! 아바마마께 일러 줄 것이야!”
혀를 날름 내미는 태인이 약 올랐던지 그대로 주먹을 쥐며 달려드는 정연을 막아선 것은 무영이었다. 아우들은 늘 시끄럽게 뛰어다녔다. 조용히 서책을 보고 있던 무영은 짙은 눈썹을 찌푸리며 조그마한 태인의 팔을 붙잡았다.
“태인, 정연에게 까불지 말라고 했지?”
“핏, 형님 미워.”
“정연, 너는 아우와 다투지 말라고 몇 번을 말했어?”
“태인이 자꾸 까불어서 야단친 것입니다.”
금세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얼굴로 기하의 옷자락을 붙잡은 태인을 째려보며, 정연은 태평하게 말했다. 타고난 성정이 여유가 넘치고 뭐든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정연은 자랄수록 황제의 능글맞음을 닮아갔다.
“마마, 가치 가. 형님 싫어, 마마랑 같이 갈래.”
기하는 옷자락을 붙잡고 우는 소리를 내는 태인의 손을 차마 밀어낼 수 없어 무릎을 굽혀 아이를 품에 안았다. 몇 번을 다시 생각해도 바깥 공기는 지나치게 찼다. 그는 추운 날씨 탓에 고뿔에 걸려 한참을 고생한 태인의 뺨을 쓰다듬으며 다정하게 미소했다.
“그러다가 우리 태자 또 아프면 아니 되지요. 금세 다녀올 테니, 기다리고 있어요.”
“싫어, 싫어, 같이 갈래.”
아이는 모자람 없이 자랐다. 황제의 적통으로 모두의 애정을 듬뿍 받아 꽃처럼 피어났다. 언젠가는 황궁을 떠나 조용히 살 예정인 황후는 아이를 위해 적당히 거리를 유지했고, 그럴수록 태자는 기하를 어미처럼 따랐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넘치는 애정을 받고 자란 태자가 다른 황자들과 달리 조금 버릇없다는 소리가 종종 들렸지만, 아직 어리니 그대로 두라는 황제의 너그러움에 기하 역시 예쁘고 좋은 것만 주리라 생각했다.
“우리 태자가 또 열이 나서 아프면 어떻다고 했지요?”
“마마 마음이 아프다고 했어. 아바마마 마음도 아프고, 형님들도 아프다고.”
“그러니 형님들과 여기서 기다리는 겁니다?”
통통한 아이의 뺨을 쓰다듬으며 미소한 기하는 허리를 반듯하게 폈다. 마음이 조급했다. 찬바람이 휭휭 부는 소리에 문이 흔들렸다. 어찌 말씀도 없이 한밤중에 당도하셨는지. 혹여 제 꼴이 엉망일까 봐 허둥지둥하면서도 황자들 앞이라 내색도 못 한 기하는 연신 머리카락만 추어올렸다.
“응, 알았어요. 요기서 기다려야지.”
금세 얼굴에 웃음을 매달고 무영군의 무릎에 올라앉은 태인군이 천연덕스럽게 중얼거렸다. 기하를 향해 손을 흔드는 모습이 몹시 귀여워, 한마디 하려던 무영군조차 아우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황제 폐하 드십니다!”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차례대로 문이 열렸다. 상궁 나인들이 다급하게 몸을 움직여 바닥에 엎드렸고, 놀란 황자들이 우르르 뛰어나가자, 멍하니 서 있던 기하를 향해 현 상궁이 채근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그는 가장 열렬하게 반기는 정연군을 번쩍 품에 안으며 안으로 들어오는 황제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머리를 숙였다.
“이놈들, 밤이 이리 깊었는데 어찌 침수 들지 않고 아직 이러고 있느냐?”
“아바마마께서 오신다고 해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황자들 중 가장 씩씩한 정연군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황제는 호기롭게 웃었다.
“원우, 너는 못 본 새에 살이 더 붙었구나.”
“소자 홀쭉해지지 않았습니까? 북성에는 고기가 별로 없어서 밥을 조금만 먹었는데요?”
“거짓말. 형님 한 그릇 가득 먹었잖아.”
무영군의 손을 꼭 붙잡은 막내 태인이 새침하게 대꾸했다. 정연군은 그런 태인의 말을 들은 체도 하지 않고 황제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아바마마, 보고 싶었습니다.”
“오냐, 아비도 그랬다. 물론 아비는 비가 가장 그리웠다만.”
“맞습니다. 마마도 그래서 매일매일 아바마마 생각만 하시느라고 수라도 조금만 드시고, 잘 안 웃으시고, 잠도 조금만 주무셨습니다.”
“정연.”
귀가 붉어진 기하가 그만하라는 듯 머리를 가로젓자, 정연은 환하게 웃으면서 황제의 귓가에 무어라 속삭였다. 종달새처럼 지저귀는 정연의 등을 다독이던 황제가 다른 두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기하를 향해 팔을 벌렸다.
평소 아들들 앞에서도 스스럼없이 하는 애정 표현에 이제는 익숙해지긴 하였으나, 이곳은 황궁이 아닌 북성이었다. 아무런 연통도 없이 불쑥 들이닥친 황제 때문에 혼비백산한 북왕 내외를 비롯한 왕실 종친들이 바깥에 줄줄이 늘어서 있었다.
“폐하.”
“뭐 하고 있어? 어서 와 안기지 않고.”
“보는 눈이 많습니다.”
그제야 황제는 뒤를 돌아 우두커니 서 있는 북왕 내외를 바라봤다. 그 뒤로 늘어서 있는 이들을 향해 얼굴을 찌푸리니, 그들은 혹여나 황제의 심기가 상하였을까 봐 덜덜 떨며 머리를 조아렸다.
“밤이 늦었으니 그만 물러나라고 했을 텐데 어찌 예까지 따라 들어와?”
“폐하.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이곳은 폐하께서 머무시기에 너무도 소박한 처소이니 부디 조금 더 넓고 따뜻한 곳으로 거처를 옮기심이 좋을 듯합니다.”
그것은 북성을 찾을 때마다 북왕 서진하가 하는 말이었다. 황제는 매끄러운 턱을 손끝으로 쓰다듬으며 주위를 둘러봤다. 과연 그의 말대로 이곳은 좁고, 다소 추운 감이 있었다. 그래도 황제는 이곳이 좋았다. 너무도 소박하여 쓸쓸함이 느껴질 정도였으나, 기하가 나고 자라 혼례를 올리기 전까지 생활한 곳이 아니던가.
“비가 이곳을 좋아한다. 불편하지 않으니 그만 물러가도록 해.”
“송구하옵니다. 이곳을 찾아 계실 줄 알면서도 미리 신경 쓰지 못한 소신의 불찰을 용서하십시오.”
북성의 살림은 이전보다 훨씬 나아졌으나, 서진하는 사치를 즐기는 자가 아니었다. 그는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고 무너진 기강을 바로잡는 것에 사력을 다했다.
하여 이제 북성의 백성은 겨울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찬바람에 피부가 얼어붙을지언정 따뜻하게 몸을 뉘일 보금자리가 있었고, 호화롭진 않았으나 매끼 굶지 않고 배를 채울 수도 있었다. 그들의 충심은 더더욱 높아졌고, 북성은 더할 나위 없이 풍요로워졌다. 무엇보다 마음이 그랬다.
“신경 쓸 필요 없다지 않아. 비가 생활하던 곳이다. 내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곳이니 그대들은 그만 물러나도록 해. 쉬지 않고 달려왔더니 곤하다.”
그들은 그제야 인사를 올리며 뒷걸음질 쳐 물러났다. 찬바람이 잦아들자마자 황제는 기하의 허리를 덥석 끌어안았다. 긴 숨을 들이쉬며 눈을 감으니 그리움이 뭉텅뭉텅 솟아났다.
“어찌 기별도 없이 이리 오십니까.”
“좋으면서 그런다.”
“쉬지도 않으시고 오셨습니까?”
“꼬박 사흘을 달렸지. 금룡대 놈들은 죄다 나자빠졌다. 그것들 체력이 형편없어졌어.”
황제는 다정하게 속삭였다. 도통 떨어질 줄 모르는 두 사람을 빤히 바라보는 세 황자의 시선에 기하는 겸연쩍게 웃었다. 그러면서도 차마 황제를 밀어낼 수가 없어 슬그머니 그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그리웠다. 겨우 며칠 떨어져 있음에도 갑갑증이 일어 참을 수 없을 만치.
“너희는 그만 처소로 가거라.”
“소자들은 계속 여기서 지냈는데요?”
커다란 눈을 말똥말똥 뜨고 대꾸하는 정연의 말에 황제는 사정없이 미간을 찌푸리며 뒤를 돌아봤다.
“뭐야?”
“마마께서 홀로 계시면 외로우실 것 같아 여기서 지냈습니다. 따로 처소는 없습니다.”
“현 상궁.”
“당장 태자 전하와 무영군, 정연군 저하들께서 머무실 처소를 준비하라 이르겠습니다.”
눈치 빠른 현 상궁의 말에 태인군이 입을 삐죽하게 내밀었다. 늘 무영의 품에서 떨어지기 싫어하는 태인이었으나, 아이는 기하의 품에서 잠드는 걸 좋아했다. 혹여 무서운 꿈을 꾸면 유모의 품에서도 쉬이 잠들지 못할 만큼, 늘 기하를 찾았다.
“태인, 오늘은 아비도 양보 못 하니 조용히 물러나라.”
“아바마마 미오.”
“미워도 어쩔 수 없다. 자, 어서 현 상궁을 따라나서도록 해.”
공손히 절을 올리며 예를 갖추는 무영과 정연을 바라보던 태인이 핏 하고 고개를 돌렸다. 당장에라도 기하의 품에 안겨 엉엉 울음을 터트릴 것처럼 붉어진 얼굴이 무척 귀여웠다. 아마 유모의 품에서 잠들 때까지 투정 부리다가 내일 아침엔 두 눈이 퉁퉁 부어 오겠지.
“아바마마, 마마, 편히 침수 드시옵소서.”
“오냐.”
“아바마마, 마마. 뜨거운 밤 보내십시오!”
우렁찬 정연군의 외침에 당황한 현 상궁이 아이의 입을 틀어막았다. 실로 놀라울 정도로 빠른 움직임이었으나 기하의 얼굴은 당황함으로 물들었고, 황제는 흥미로운 눈으로 입술로 호를 그렸다.
“현 상궁! 숨 막혀!”
“저하, 체통을 지키십시오.”
안절부절못하며 황제의 눈치를 살피던 그녀는 놀라서 입만 벌리고 두 눈을 끔벅거리는 기하를 향해 머리를 조아렸다.
“그 당돌한 인사는 분명 승지놈한테 배운 것이렷다?”
“건강한 사내들에게 하는 좋은 인사라고 승지가 그랬습니다?”
“폐하, 저하께는 소인이 따로 잘…….”
쯧쯧, 혀를 차면서도 불쾌한 기색은 보이지 않은 황제가 손을 휘휘 저었다. 귀찮으니 어서어서 나가라는 뜻이었다. 눈치 빠른 무영군이 양손에 아우들을 붙잡았다. 당장에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태인군을 달래며, 시끄럽게 떠드는 정연을 타박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마마, 바바아.”
기어이 눈꼬리에 눈물을 매다는 태인을 번쩍 안은 무영군이 먼저 등을 돌렸다. 또 아우만 안아준다면서 저도 안아달라고 투정부리기 시작한 정연은 커다란 덩치로 제 형에게 매달렸다. 현 상궁이 아이들의 뒤를 따르자, 조용히 처소 문이 닫혔다. 그제야 찾아든 침묵에 기하는 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디 보자, 우리 기하.”
“황자들을 저리 보내시면 어찌합니까.”
“내일 아침에도 볼 텐데 무슨 상관이냐. 밤도 늦었는데 언제까지 저것들을 끼고 있을 셈이냐?”
퉁명스러운 불만에도 기하는 굳은 얼굴을 펼 줄 몰랐다. 아직 밤바람이 찬데, 무턱대고 황자들을 바깥으로 쫓아낸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서였다.
“짐이 언제 올 줄 알고 저것들을 끼고 있어?”
“이번엔 바쁘셨지 않습니까. 환궁할 때까지 못 오실 줄 알았습니다.”
“그대 얼굴이 아른거려서 도무지 집중할 수가 있어야지.”
연신 입을 맞추면서 뺨을 쓰다듬는 황제의 손끝에서 마른 바람 냄새가 났다. 기하는 물끄러미 그를 올려다보다가 얼른 황제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리웠습니다.”
황제의 웃음소리가 귓가에 아른거렸다. 오랜만에 찾은 북성에서 마음껏 기쁨을 누릴 수 없을 만큼, 기하는 내내 우울했다. 당장에라도 문을 벌컥 열고 그가 나타날 것만 같아서, 애꿎은 문만 쳐다보고 있던 것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말로만 그럴 테냐?”
“설마요.”
“그럼 어서 입부터 맞춰보아.”
천연덕스럽게 중얼거리며 눈을 감는 황제를 바라보던 기하는 조심스럽게 그의 뺨을 쓸었다. 피부가 차가웠다. 유난히 추위에 약한 그의 얼어붙은 얼굴을 쓰다듬으면서 기하는 연신 도톰한 입술 위로 입을 맞췄다.
“목욕 시중을 들겠습니다. 따뜻한 물로 씻으셔야 여독이 풀릴 것입니다.”
“그대와 함께라면 기꺼이.”
기하는 황제를 밉지 않게 흘겨보며 천천히 그의 옷깃을 열었다.
현 상궁은 지나치게 치밀하고 눈치가 빠른 여인이었다. 가늘고 길게 사는 것을 삶의 목표로 삼았던 그녀는 타고난 영민함과 뜨거운 충심으로, 천자(天子)께 인정받는 최고의 권력자로 발돋움했다.
무엇보다 황제는 그녀의 타고난 짐승 같은 감각을 높이 샀다. 주인이 무엇을 원하는지, 주인보다 앞서 알아채고 준비하는 그녀는, 어느 부분에선 다소 둔한 기하에게 안성맞춤인 수족이었다.
반쯤 흐려진 눈으로 정신없이 입술을 섞던 기하는 뜨거운 김이 폴폴 솟는 목욕통을 의아한 눈으로 바라봤다. 대체 언제 이런 것이 침소 안에 들어왔던 거지? 분명 조금 전까지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는데, 누가 이런…….
“폐하, 이것이…….”
침상 위의 기수는 폭신하고 따뜻했으나, 황자들과 모두 함께 지내기에는 다소 좁았다. 그 위에 쓰러지듯 누워 정신없이 황제의 입술을 탐하며, 그의 온몸을 어루만지던 기억은 나는데.
“자, 일어나라.”
그 짧은 순간에 욕탕 가득 더운물을 채우고 은은한 향이 나는 꽃잎까지 띄운 현 상궁의 기지를 높이 사며, 황제는 축축해진 입술을 혀로 쓸었다. 소리 없이 들어온 아랫것들을 본다면 입맞춤부터 멈출 것이라 예상했고, 지금 기하의 표정이 딱 그랬다. 그 순간 눈을 가리고 온몸을 끌어안아 입맞춤을 퍼부었으니 다행이지.
“물이 식겠어.”
황제의 몸은 언제 봐도 근사했다. 다소 마른 듯 보이기도 했으나, 그는 타고난 무골이었다. 넓은 어깨와 탄탄한 가슴, 잘 짜인 근육이 보기 좋게 어우러졌다. 키가 크니 팔다리가 길었고, 허벅지는 돌덩이처럼 단단했다.
마지막 남은 고의를 스스럼없이 벗은 황제에게서 눈을 돌린 기하는, 열 오른 얼굴을 식히며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벌써 다리가 풀렸느냐? 안아줄까?”
“아닙니다. 스스로 가겠습니다.”
조금 전까지 그가 퍼붓는 입맞춤을 받아 젖어있던 입술이 삽시간에 말라버렸다. 황제는 명백히 드러난 욕구를 굳이 숨기려 하지 않았다. 황궁의 것과는 비교조차 민망한, 그러나 두 사람이 들어가도 그다지 좁다고 느껴지지 않을 욕탕 안으로 들어간 그는 기하를 향해 손을 뻗으며 그림 같은 달콤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거기에 비하면 제 몸뚱이는 참으로 보잘것없다고 기하는 생각했다. 사실, 전장을 누비던 예전에는 이렇지 않았던 것 같은데 지금은 근육은 죄다 소실했고, 예전보다 살도 오른 것 같다. 매일 아이들과 씨름하며 기력을 써도, 맛 좋은 음식과 편안한 삶에 어느덧 안주하게 된 탓이었다.
그래도 가을까지는 무영군과 정연군이 수련할 때마다 함께 시간을 보내기도 해서 몸이 가벼웠는데, 찬바람이 부니 황자들을 단속한다는 미명 아래 절로 게으름뱅이가 되었다. 어쩐지 부끄럽고, 민망해서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기분이었다.
“어찌 표정이 그래?”
“앞으론 폐하께서 기침하실 때 일어나야겠습니다.”
“응? 누가 뭐라더냐?”
먼저 자리를 잡고 앉은 황제는 옆으로 오는 기하의 손목을 가볍게 그러쥐고 스스럼없이 제 무릎 위에 앉혔다. 드러난 어깨에 입을 맞추고 더운물을 적셔주는 황제의 배려에 민망함이 스르르 녹으려 한다.
“살이 늘었습니다. 나날이 게을러지니 분명 게으른 후궁이라고 황궁에 소문이 파다할 테고요.”
“짐은 지금이 딱 좋다만? 그전에는 너무 말라, 그댈 안을 때마다 뼈가 부딪…….”
“농은 거두십시오.”
황급히 황제의 입을 틀어막으며 그의 목을 끌어안자, 온몸을 간질이는 황홀한 냄새가 났다. 기하는 유난히 황제의 체향을 좋아했다. 그것은 바람 냄새 같기도 했고, 새벽녘 고요하게 내리는 눈꽃 냄새 같기도 했다. 향기에도 감정이 깃든다면, 다정하고 따뜻하고 포근하면서도 때때로 뜨거울 거라고 생각한다. 하여, 매번 이렇게 이성을 잃고, 겁도 없이 황제께 먼저 덤벼드는 발칙한 후궁이 되었지 않나.
“폐하께 좋은 냄새가 납니다.”
“늘 그 말이구나. 짐은 네 향기가 더 좋은데?”
기하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고 연한 살을 잘근거리는 황제의 손길에 장난기가 잔뜩 묻어났다. 물론 그것은 잠시뿐이었다. 언제 곧 사나운 짐승처럼 돌변할지 모르는 황제에게 몸을 맡긴 채, 기하는 점점 고양되는 감각에 어깨를 바르르 떨었다.
“추우냐?”
기하는 대답 대신 머리를 가로저었다. 황제의 손이 도톰하게 솟은 유두를 꼬집었다. 살짝살짝 자극을 가할 때마다 기하는 흠칫거렸다.
황제는 목 안으로 웃음을 삼키며 그런 기하의 반응을 즐겼다. 처음에는 어떻게든 버티려 안간힘을 쓰다가, 그대로 입에 넣고 혀를 굴리면 그때부터는 흐느끼며 애원하는 모습이 과히 볼 만했다.
황자들과 함께 기하를 북성으로 보내기 전날 밤에 새겨두었던 순흔이 흐려졌다. 자신만 볼 수 있는 곳에 제 흔적을 남기는 것을 좋아하는 황제는 빗장뼈 아래에 입을 맞췄다. 달짝지근한 입맞춤은 점점 농염하게 변해, 혀를 써서 핥고 빨다 따끔할 정도로 이를 세우기도 했다.
제 흔적을 만족스럽게 바라보며 미소를 흘리는 황제를 기하는 홀린 눈으로 내려다봤다. 그의 손가락은 여전히 유두를 희롱하고 있었고, 완전히 존재를 드러낸 옥경이 맨살 위를 스쳤다.
“륜.”
황제의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났다. 둔해 빠진 서기하가 이럴 때는 꼬리 아홉 달린 요망한 여우가 된다. 무지하고 어린 사슴 같던 연인이 나날이 요염해지는 것은 황제에게는 큰 기쁨이었다. 제가 가르치는 하나하나를 모두 습득하고 더한 기쁨을 주니,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오롯이 둘만 존재할 때 불러주는 그 이름부터가 지나치게 달콤했다.
“정무가 바쁘신 줄 알면서도, 내내 서운했습니다. 홀로 북성에 와 있으니 꼭 소박맞은 기분이 들지 뭡니까?”
“누가 감히 그댈 소박 놓아?”
찰박찰박, 물길에 손이 감긴다. 기하는 반쯤 발기한 황제의 옥경을 손에 쥐었다. 한 손에 제대로 잡히지 않은 존재감은 가끔 겁이 날 정도였다. 황제께서 지나치게 강건하시어, 적당한 유희로 미리 준비하지 않으면 격통에 시달리면서 힘든 것은 자신이었다. 당연한 이치를 뒤늦게 깨달은 기하는 황제에게 다른 기쁨을 선사하는 법을 배웠다.
“밉다고 소박 놓으시면 귀신이 되어서 쫓아다닐 것입니다.”
아이 같은 투정에 황제는 소리 내 웃었다. 물은 청각을 예민하게 한다. 반면 감각은 둔화시킨다. 그의 손이 주는 쾌감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는 것에 불만을 느낀 황제의 눈썹이 꿈틀했다.
“추우십니까?”
기하는 따뜻한 물에 젖은 커다란 영견을 황제의 어깨 위로 둘렀다. 그를 스스럼없이 일으켜 욕탕 끝에 걸터앉게 하고 그 앞에 서니, 비로소 황제의 두 눈에 짜증이 사라졌다.
황제는 퍽 알기 쉬운 사내였다. 감정이 이토록 잘 드러나는 사람은 세상에 또 없을 거다. 물론 그 누구도 기하의 그런 주장을 이해하지 못했다.
“앞으로 어디든 혼자서는 다니고 싶지 않습니다.”
“그것은 짐 또한 바라는 바다.”
황제의 입술 위로 가볍게 입을 맞추고 그의 다리 사이에 자리 잡은 기하는 탄탄한 가슴에 뺨을 문질렀다. 짐승이 주인에게 교태를 부리는 듯한 모습에, 황제는 나른하게 웃으며 기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단단한 가슴 위로 몇 번이나 입을 맞추고 혀를 내밀어 배꼽 주위를 핥는 기하의 목덜미로 황제의 손바닥이 내려앉았다. 황제는 연신 기하의 뺨과 목선을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물에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릴 때마다 그는 꽤 요염하게 웃으며 붉은 혀를 내밀었다. 완전하게 발기한 옥경을 쓰다듬는 손바닥의 감촉도 꽤 근사했다.
모양이 예쁜 귀두부터 힘줄이 중간 중간 불거진 기둥을 훑는 손은, 언제 힘을 주고 또 언제 다시 힘을 빼야 할지를 잘 알고 있었다. 황제는 그 모든 것을 만족스럽게 바라보고 즐겼다. 부끄러워하면서도 시키면 곧잘 하는 기하는, 그럴 때 보면 영락없는 사내였다. 색을 즐길 줄도 알았고, 절대로 물러나지도 않았다.
쪽.
기하의 입술 사이로 요란한 소리가 났다. 황제의 허벅지 안쪽을 물고 핥던 그는 젖은 입술로 두툼한 성기 끝을 문질렀다. 아직 입술을 완전히 열지 않아 입을 맞추듯 연신 촘촘하게 기둥을 문지르니, 황제는 단전 아래로 몰려든 열기에 허리를 들썩였다. 그것은 익숙하게 알고 있는 쾌감을 위한 준비였다.
“기하…….”
이름을 완전히 부르지 못한 황제의 입술 사이로 나지막한 신음이 샜다. 기하는 물에 흠뻑 젖은 그의 음모를 더듬으며 귀두를 빨았다. 혀를 동그랗게 말아 귀두 끝을 문지르다가 입술을 오므리고 혀끝을 세워 구석구석 핥았다.
옥경을 모두 입안에 삼키는 것은 아무리 해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처음에는 지나치게 무리하다가 긴장감과 구역감에 숨도 못 쉴 만큼 기침을 쏟아냈음은 물론, 하마터면 황제의 옥경을 그대로 물 뻔했다.
다디단 사탕을 핥는 것처럼 물고 빠는 행위가 처음에는 어색했으나, 이제는 제법 즐길 줄 알게 되었다. 정성을 다해 혀를 쓰면 머리카락을 살살 문지르던 황제의 손이 이따금 힘이 들어가 움찔거리는 것 또한, 큰 즐거움이었다. 기하는 그럴 때마다 백치처럼 웃었다.
손으로 만지고 입으로 핥고 살결에 문지를 때마다 명백하게 느껴지는 쾌락의 증거가 좋았다. 그가 이토록 자신을 원하고 있다는, 사소한 진실. 그것은 황제 앞에서 철저하게 숨기고 있던 사내의 지배욕을 꿈틀거리게 했다.
춥, 츄읍.
뺨을 더듬는 황제의 손가락을 따라 기하의 시선이 들렸다. 어느덧 적당히 식은 물이 피부의 열기를 식혔다. 황제는 물에 젖어 쪼글쪼글해진 기하의 손가락 하나하나에 입을 맞추며 짓궂게 웃었다. 이제 그만해도 좋다는 뜻이었다.
황제는 기하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그의 어깨 위로 두툼한 영견을 둘렀다. 열기가 녹아내린 살갗에 한기가 내려앉아 자잘한 소름이 돋았다.
“이리 와.”
부드러운 영견의 촉감이 좋았다. 기하는 황제의 품에 익숙하게 안기며 가볍게 눈을 감았다. 어깨를 감싸 안는 체온이 따뜻해서 노곤함이 느껴졌다.
“춥지 않으십니까?”
“확실히 북성은 제국보다 춥구나.”
기하의 가슴에 붙은 꽃잎을 떼어내며, 황제는 이마 위로 다정하게 입을 맞췄다. 꼼꼼하게 젖은 몸을 닦아주는 손을 붙잡자, 자잘한 상처에 순흔이 새겨진다.
보잘것없는 비루한 몸이라고 생각했다. 상처로 얼룩져 보기 흉한 곳도 있었다. 황제는 기하가 그렇게 말할 때마다, 아프게 코를 쥐고 흔들었다.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 없으니 그런 말은 입에 담지 말라는 엄포도 잊지 않았다.
“흣…….”
황제는 기하의 온몸을 물고 핥았다. 그가 특히 좋아하는 목덜미부터 찌르고, 베이고, 새살이 돋아난 상처 부위와 손길이 쉬이 닿지 않아 예민한 피부 위에 수도 없이 입을 맞췄다.
살집이 없는 허리를 뒤에서부터 끌어안고 입을 맞추면, 간지러움을 이기지 못한 기하가 몸을 뒤틀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때만큼은 다정한 황제조차 자비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악랄한 군주처럼 기하를 몰아붙였다. 그가 도망가면 갈수록 온 힘으로 내리누르고, 찔끔찔끔 액이 흐르는 성기를 여린 살갗에 문지르며 낮은 신음을 내기도 했다.
“아, 폐하, 흣, 아니, 거긴……, 싫…….”
기하는 침상 위로 엎드려 황제의 손길대로 움직여야 했다. 젖은 몸을 다정하게 닦아주던 황제는 진작 사나운 짐승으로 변했다.
그는 열이 올라 끄떡거리는 기하의 성기를 손에 쥐고 느긋하게 앞뒤로 문지르고 흔들었다. 조금 더 강렬한 쾌감을 바라는 기하가 눈가에 눈물을 매달고 보챌 때까지 특유의 미소를 지으며 마음껏 제 욕심을 채웠다.
희고 탄력이 좋은 엉덩이는 황제가 특히 좋아하는 부분이었다. 그래도 사내라고 꽤 탄탄한 허벅지에서 이어지는 엉덩이를 양손으로 잡고 벌리면, 그제까지 당당하게 색(色)을 탐하던 기하는 당장에 기절할 듯 버둥거렸다. 매번 해도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은지 싫다고 버둥거리는 모습이 꽤 귀여웠다.
황제는 잠시도 지체하지 않고 밀부에 혀를 갖다 댔다. 물론, 저항하는 기하의 허리를 아래로 누르고 엉덩이를 높이 쳐들게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황제의 말이라면 당장 독약이라도 입에 털어 넣을 것처럼 구는 기하마저도 싫다고 반항하고, 도망치고, 온몸으로 거부하는 자세였다. 그것은 곧 밀려올 지독한 쾌감을 향한 반사적 경계라고 해도 좋았다.
“흐, 흐응, 아, 흣, 폐, 흐응……, 륜.”
여리고 부드러운 살갗을 혀로 쓸던 황제는 본격적으로 밀부를 꼼꼼하게 더듬었다. 한 손으로 사이를 벌리고, 남은 손으로는 기하의 성기를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신음을 꽉꽉 눌러 삼키던 기하가 절로 엉덩이를 들썩이고 스스로 성기를 두 손에 쥘 때까지, 황제는 최대한 느긋하게 그것을 즐겼다. 말갛게 웃을 줄만 알던 아이가 어느새 색을 알고, 쾌락에 익숙해지는 것은 무척 기꺼운 일이었다.
“륜, 아, 아아, 거기, 흣.”
반응을 보자면 기하는 이 지나친 쾌락을 더 기꺼워했다. 또한 그것은 본격적으로 하나가 되기 위한 일종의 과정이기도 했다. 기하의 밀부가 축축하게 젖어 들수록 부드럽게 삽입되어 평소보다 더 오래 정을 나눌 수 있었으니, 그것은 모두 황제의 작은 즐거움이었다.
“흐으, 읏, 조금, 으흥…….”
아이가 우는 듯한 소리를 내면 그때가 바로 한계였다. 도톰한 베개에 얼굴을 묻고 허리를 잘게 떨던 기하는 손을 더듬어 제 성기를 붙잡았다. 이미 질척한 액을 토해내는 성기를 몇 번만 흔들어도 금세 사정하고 말 그의 손을 붙잡는 것은, 황제의 당연한 의무였다.
뾰족하게 혀를 세워 밀부 주위를 자극하던 황제는 향이 거의 없는 향유 병을 찾아 그것은 제 손에 쏟았다. 넘치도록 흐르는 향유에 젖은 손으로 비문 주위를 문지르면, 그것은 또 다른 자극이 되어 기하를 울게 했다.
머리카락만큼 부드러운 음모를 쓰다듬고 비문 주위를 어루만지다가 손가락 하나를 밀어 넣으면, 예전과는 달리 제법 수월하게 몸이 열린다.
그때부터는 속전속결이었다. 적당히 풀어진 몸은 황제의 손가락 두어 개쯤은 아무렇지 않게 집어삼켰다. 그 모습이 참으로 곰살맞다고 농을 하면 얼굴이 잔뜩 붉어진 기하가 팩하고 토라지니, 그때는 가능한 한 말을 삼켜야 했다. 그러다 어느 지점에 손이 닿으면 허리를 뒤틀고 허벅지를 달달 떠는 모습이 참으로 절경이었다.
기하는 두 손을 뒤로 짚고 다리를 활짝 벌린 채로 곧 들이닥칠 황제의 옥경을 내려다봤다. 흉흉하게 끄떡거리는 모양새에 침까지 꼴깍 삼켰다. 그것은 곧 들이닥칠 약간의 고통과 지독한 쾌감을 향한 갈증이었다.
황제는 기하의 한쪽 무릎을 붙잡고 그의 밀부에 성기를 갖다 댔다. 짧은 순간 움찔하던 기하가 입을 반쯤 벌렸다. 빠듯한 공간을 가르고 들어오는 열락의 순간을 그는 꽤 좋아했다. 철저하게 준비를 하고 즐거움을 주어도, 그 순간은 늘 그랬다. 혹여 겁 많은 서기하가 아프다며 도망치지는 않을까, 황제는 딱 그 순간만큼은 걱정하며 그의 눈치를 살폈다.
“읏.”
뿌리까지 단번에 들어가는 것은 황제에게도 꽤 힘든 일이었음에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응, 으, 륜, 흐…….”
어쩌면 움직일 여력은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작 그 순간에 용감해지는 것은 기하였다. 아랫배가 황제의 것으로 가득 찼다는 것이 느껴지면, 딱 그만큼 심장이 부풀어 오르는 것 같았다.
기하는 손을 내밀어 황제의 어깨를 덥석 끌어안았다. 그러고 자신이 좋아하는 황제의 냄새를 마음껏 맡았다. 그의 배에 제 성기를 문지르며 허리를 들썩이면, 더는 참지 못한 황제가 비로소 흉포하게 날뛰었다.
처음엔 밑이 빠질 듯한 감각뿐이었다. 때로는 지나치게 흥분하여 피를 볼 때도 있었다. 그래도 그 끝은 지나치게 달콤했다. 너무도 달콤해서 손가락, 발가락 끝까지 설탕물에 절여진 것만 같았다. 너무 좋아서 눈물이 흐르고, 허벅지를 달달 경련하며, 종아리가 당겨 근육이 뒤틀어지는 느낌도 왔다.
심장이 그대로 멈추어버릴 만큼, 좋았다. 황제가 제 온몸을 끌어안고, 움직이며, 신음하고, 입 맞추는 그 모든 것들이 좋았다. 좋다고밖에 다른 것으로는 설명되지 않았다. 쉰 목소리로 조금 더를 외치는 저를 애틋하게 바라봐주는 그 시선조차 오롯이 제 것이라고 생각하면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만 같았다.
기하의 발목을 붙잡아 자신의 어깨 위로 올린 황제는 제법 거칠게 허리를 움직였다. 황궁에서 혼자 지내는 밤은 너무도 길고 외로웠다. 몇 번인가 기하를 생각하며 스스로 위로를 하려 해도 짜증만 늘 뿐이었다.
황제의 눈이 가늘게 뜨였다. 엉망으로 흐트러져, 힘을 줄 때마다 몸이 들썩이는 기하의 모습은 지나치게 색스러웠다. 먼저 한 차례 토정한 그는 제 손으로 성기를 움직이며 달뜬 음성을 내뱉었다. 발가락 끝이 움찔거릴 때마다 기하의 입에서는 긴 신음이 쏟아졌다.
어여뻤다. 지나치게 애틋했다. 이토록 강렬한 쾌감은, 그를 만나기 전에는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것이었다.
“흐, 흐, 으으, 륜, 류, 읏.”
“읏, 흣, 기하야, 이리…….”
살을 치대는 소리가 과격하게 울렸다. 그대로 기하의 몸에 체중을 실은 황제는 찰팍 소리가 날 정도로 깊이 허리를 쳐올렸다. 소리를 지르느라 식어버린 혀가 허겁지겁 맞물렸다. 조갈 난 사람처럼 황제의 혀를 삼키며, 기하는 붙잡히지 않은 한쪽 다리를 그의 허리에 감았다.
혀뿌리가 뽑힐 것처럼 깊은 입맞춤과 온몸을 바짝 웅크리게 하는 감각이 전신을 맴돌았다. 황제는 두어 번 더 추삽질을 했다. 입맞춤은 다디달았다. 그리 하면 조갈이 해소되기라도 하는 듯, 그들은 성급하게 입술을 섞고 혀를 문질렀다.
황제가 자잘하게 허리를 움직일 때마다 그가 파정한 정액이 밀부 사이로 흘러내렸다. 찌꺽거리는 음란한 소리가 귀를 자극했다. 피부가 뜨거웠다. 흐려진 두 눈에도 선명히 보이는 서로의 표정은 육욕(肉慾)을 자극하기 충분했다.
황제는 천천히 성기를 빼다가 다시 밀어 넣기를 반복했다. 완전히 풀어진 기하의 밀부는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자신이 사정할 때와 비슷하게 배 위로 사정한 기하의 성기를 붙잡고 두어 번 흔들자, 말랑거리던 것이 조금씩 단단해진다.
“조금만 쉬고요.”
하지 말라는 소리는 안 한다. 하룻밤에도 몇 번씩 계속되는 정사는 이제 익숙해졌으나, 몸은 고되었다. 기하는 마른 숨을 내쉬며 황제의 목덜미에 입술을 비볐다. 코를 푹 파묻고 그의 냄새를 마음껏 마셨다. 그의 냄새가 짙을수록 자신도 모르게 발기하게 된다는 기하의 솔직한 고백 이후, 황제는 그 순간을 꽤 즐길 수 있게 되었다.
“다리를 벌려 봐.”
멀지 않은 곳에 욕탕이 있었으나, 물은 이미 식었을 거다. 지금 이 상태로 아랫것들을 불러 물을 데우게 하면, 아마 북성을 떠날 때까지 기하는 눈도 마주치지 않을 테지.
“잠시만…….”
“정을 오래 담고 있으면 배앓이를 한다지 않았어?”
“그렇다고 바로 빼는 것은 싫습니다.”
어쩐지 토라진 것 같은 기하의 목소리에 황제는 자잘한 웃음을 흘렸다. 기하는 이따금 말도 안 되는 투정을 부리곤 했는데, 제가 사내로 태어난 것이 이럴 때면 아쉽다는 말도 스스럼없이 했다. 정말이지 기특하면서도 얄미운 총비다.
“기하야.”
땀에 젖은 목덜미에 입을 맞추니 익숙하게 안겨오는 몸짓이 애틋했다. 사모하고, 사모한다. 마르지 않은 고백은 쉬이 멈출 줄 몰랐다.
“예, 륜.”
“사모한다, 나의 비.”
이번에는 조금 더 수월하게 밀부를 가르고 들어오는 살덩이가 온몸을 저릿하게 했다.
“사모합니다, 랑랑.”
우리는 늘 함께일 것이다. 늘 서로를 애태우고, 간절하게 바라며, 마음을 다해 사모할 것이다. 뜨겁고 뜨거운 긴긴밤이 지나고, 찬 이슬이 내려 스산한 새벽이 잠시 머문다 해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이내 곧 해가 뜨고 날이 밝을지니, 우리의 삶은 늘 찬란하고 따뜻할 것이다.
지금 곁에 있는, 뜨거운 이 체온처럼.
* * *
다정하게 손을 잡은 황제와 기하는 나란히 후원을 거닐었다. 기하가 태어나던 해에 심었다는 사과나무 주위에는 아직 푸릇푸릇한 꽃이 옹기종기 피어 있었다.
“아직 곤하더냐?”
느리게 하품하던 기하가 겸연쩍게 웃었다. 눈물이 대롱대롱 매달린 눈꼬리를 쓸어주자 머쓱했던지, 슬그머니 시선을 돌리며 딴청 하는 모습이 몹시 귀여웠다.
“곤하면 더 자도 된다.”
“게으른 후궁이라 흉볼 것입니다.”
“흉이 될 게 뭐가 있어? 이곳에 일하러 왔더냐? 느긋하게 휴식을 즐기러 온 것인데, 피곤하면 쉬어야지. 아니 그래?”
“아닙니다.”
말은 아니라 했지만, 하품이 연신 나왔다. 사실 온몸 여기저기 아프지 않은 데가 없었다. 물을 가득 머금은 무거운 비단처럼 자꾸만 아래로 쳐지는 어깨를 제 주먹으로 툭툭 치니, 커다란 손이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는다.
“여긴 벌써 겨울이구나.”
“예. 겨울이 일찍 찾아오지요.”
“추우냐?”
“견딜 만합니다.”
해가 중천에 걸려서야 겨우 일어난 기하는 초조반을 뜨는 둥 마는 둥 하고 처소를 나섰다. 종일 침상에 누워 있으면 민망한 소문이 돌 테고, 황제와 나란히 걷는 것은 퍽 오랜만이라 여유를 마음껏 즐기고 싶었다.
“코끝이 붉어. 그러다 고뿔 걸리겠다.”
황제는 늘 기하의 걱정이었다. 수라는 잘 받았는지, 잠은 잘 잤는지, 근심은 없는지, 혹여 아들놈들이 속을 상하게 하지는 않는지, 혹여 파렴치한 것들이 달라붙어 그를 곤란하게 하지는 않는지. 종일 사람을 붙여 불편함이 없는지 확인하면서도 늘 묻곤 했다. 정말로 괜찮은지, 많이 행복한지.
“응?”
“어찌 그러십니까?”
“저 아이 말이다.”
황제가 응시하는 곳을 바라보니 연분홍 치맛자락을 손에 쥐고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어린아이가 보였다. 기하는 그 모습에 빙긋이 미소하며 아이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간신히 아이의 손을 붙잡고 있던 상궁이 머리를 조아렸다. 아이는 신이 나서 치맛자락을 붙들고는, 조그마한 발로 잘도 뛰어왔다.
“비 마마!”
생긋 웃는 얼굴이 어여뻤다. 곱게 땋은 머리를 늘어뜨리고 눈이 휘어지도록 웃는 아이에게 손을 내밀자, 망설이는 기색도 없이 얼른 작은 손으로 붙잡아 온다.
“료, 폐하께 인사 올려야지?”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만세 만세 만만세.”
오랜만에 조우한 아이는 아주 작았다. 키도 작았고, 몸집도 아주 조그마했다. 듣기로는 태어날 때부터 몸이 약해 잔병치레가 잦다더니, 그 때문인 듯했다.
“일어나도 좋다.”
“황공하옵니다, 폐하.”
기하를 꼭 닮은 얼굴로 생긋 웃는 아이를 가만히 들여다보던 황제가 미소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황제 앞에서는 이유도 없이 덜덜 떠는데, 이 발칙한 꼬마 아가씨는 겁도 없는 모양이었다. 어찌 이리 잘 웃는지, 지나치게 어여뻐서 저도 모르게 손이 갔다.
“부쩍 자랐구나.”
“예, 키가 한 뼘이나 자랐습니다.”
황제가 아이를 본 것이 두 해 전이었으나, 겉모습은 그때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하루가 멀다 하고 쑥쑥 자라는 황자들을 떠올린 황제는 자신도 모르게 눈썹을 찌푸리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무엇이든 잘 먹어야 한다. 그래야 더더욱 어여쁘게 자라지.”
“예, 폐하.”
다소곳하게 대답하는 모습이 몹시 흡족했다. 황제는 천천히 턱을 쓰다듬으며 아이를 응시했다. 보면 볼수록 기하와 닮은 것에, 자꾸 없던 정이 생기려고 했다. 비록 무진의 왕족은 아니나 귀족 정도면 신분도 나쁘지 않고, 무엇보다 구김살 없는 성격이 척 보기에 마음에 들었다.
“료, 얼굴이 붉다. 바람이 차니 안으로 들어가 몸 좀 녹이자꾸나.”
“하지만 상궁이 폐하와 비 마마의 오붓한 시간을 방해해서는 아니 된다고 하였습니다.”
“괜찮다. 너를 이대로 보냈다가 고뿔이라도 걸리면 고모님을 뵐 면목이 없어. 폐하께서도 허락하실 테니 어서 들어가자.”
희고 작은 손을 붙잡으며 제 몸으로 바람을 막아선 기하는 황제를 향해 가볍게 눈을 찡긋했다. 둘만의 오붓한 시간을 방해받은 황제는 탐탁지 않은 눈으로 아이를 바라보다, 저를 올려다보는 까만 눈에 서늘한 시선을 거두고야 말았다.
이토록 닮은 얼굴이라니. 작고 어린 기하가 웃는다. 고사리 같은 손을 내밀고 뽀얀 미소를 짓는다. 아아, 황제는 그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탄식하며 아이의 손을 붙잡았다.
양손으로 찻잔을 들고 후후 불어 마시는 입술이 어여뻤다. 길게 드리워진 속눈썹은 숨을 내쉴 때마다 깜빡였고, 붉어진 뺨은 통통하게 살이 올라 당장 입을 맞추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기하의 무릎을 차지하고 앉은 아이는 이따금 고개를 들어 그를 향해 무어라 종알거렸다. 기하는 그럴 때마다 간식으로 내온 떡을 아이 입에 넣어주며 두런두런 말을 이었다.
“잠깐 이리 와 보겠느냐?”
커다란 눈이 느리게 깜박인다. 아이가 물끄러미 자신을 보고만 있자, 황제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곰실거리는 손으로 잡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고 아장아장 걷는 폼이, 여덟 살이라고는 믿기지가 않았다. 이제 네 살이 되는 태인보다 한 뼘이나 클까 싶은 아이는 살아 움직이는 작은 인형 같았다.
“료, 그러면 아니 돼.”
그것은 아이를 지나치게 귀애한 어른들이 들인 습관인 듯했다. 아무렇지 않게 황제에게 다가가 그대로 무릎에 앉으려는 아이를 막아선 기하는 단호하게 머리를 저었다. 감히 황제의 무릎에 먼저 기어오르다니, 죄를 묻는다면 크게 화를 당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괜찮다. 자, 이쪽으로 앉거라.”
황제는 스스럼없이 자신의 무릎을 내어줬다. 아마 몇 해 전의 그였다면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겠으나, 이제는 황자들에게 익숙해진 탓에 어린아이와 함께인 모습이 퍽 잘 어울렸다.
“늘 웃는 얼굴이구나.”
“항상 좋은 것을 생각하고 웃어야 복이 온다고 배웠습니다.”
“그래, 옳은 얘기다. 잘 배웠구나. 이대로 어여쁘게 자라라. 건강하게만 자란다면 짐의 며느리로 삼을 테니.”
황제의 만연한 미소에 아이는 물끄러미 그를 응시했다. 고개를 갸웃하다가 기하를 바라보고 이내 시무룩해지는 표정에 의아함을 갖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짐의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냐?”
아이는 무엄하게도 입술을 꾹 다물고 고개만 가로저었다. 황제는 너그러운 표정으로 아이의 작은 머리통을 쓰다듬었다. 아이를 한 번, 그리고 기하를 한 번. 아무리 보아도 똑 닮은 모습이라 신기하고 애틋했다.
“아니면 혹, 이미 정혼자라도 있느냐?”
“폐하.”
보다 못한 기하가 황제를 부르며 눈짓했다. 시무룩하게 변한 아이의 얼굴에선 좀처럼 웃음기가 보이지 않았다. 기하는 아이의 손을 잡으며 말랑말랑한 뺨을 쓰다듬었다. 그의 이끌림에 일어선 아이는 황제를 향해 예를 갖추고 영민하게 물러났다. 일일이 말하지 않아도 공기의 흐름을 읽다니, 보면 볼수록 마음에 찼다.
“어찌 그리 보내? 저 아이, 무슨 사연이라도 있는 것이냐?”
“폐하, 료하는 사내아이입니다.”
“뭐?”
황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아이는 기하를 꼭 닮아 어여뻤다. 방긋방긋 웃는 얼굴이 그랬고, 사과처럼 붉은 뺨과 흰 피부, 앵두같이 앙증맞은 입술이 그랬다.
무엇보다 아이는 계집애처럼 머리를 길게 땋아 늘어뜨렸고, 여아의 복식을 하지 않았던가. 무진의 풍습이 원래 저렇던가? 아무리 기억을 반추해도 그 나라 사내아이들이 여아처럼 치마를 입는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다.
“고모님의 뜻입니다. 북성의 오래된 미신이기도 하고요.”
몸이 약한 아이를 열 살이 되는 해까지 다른 성별로 키우면 장수한다는 것은, 이제는 북성에서도 거의 사라진 미신이었다. 황제는 그제야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다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무언가가 아쉬웠다. 분명 저 아이, 좋은 기(氣)를 타고나지 않았던가.
“사내라 해서 황자에게 시집오지 못할 이유는 없지.”
자손이야 첩을 들여 보면 되는 일이다. 황제는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중얼거리며, 냉큼 기하의 무릎에 머리를 대고 누웠다. 겸연쩍은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그의 뺨을 어루만지자, 금세 웃고 마는 입술이 어여뻤다. 아이의 마음이 상한 것 같은데, 그것은 후에 풀어주면 될 일이지. 무엇보다 지금은 다른 생각이 먼저였다.
“기하야.”
“예, 폐하.”
“짐은 말이다…….”
기하의 손은 뭉툭하고 딱딱했다. 다른 후궁들처럼 곱지 못했다. 황제는 그것이 좋았다. 전장을 누비며 백성을 비호하던 손이었고, 지금은 철부지 황자들과 어울리느라 더더욱 엉망이 된 손이었으니, 애틋하고 또 애틋할 뿐이었다.
기하는 이따금 그것이 신경 쓰이는지, 제 등 뒤로 손을 감추고 보여주지 않으려 할 때도 있었다. 그 마음마저 어여뻐서 더할 수 없을 만큼 애정을 퍼부어주고 싶었다.
“그대에게 늘 고맙고 미안하다.”
“또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요. 그리 말씀 꺼내실 때마다 겁이 납니다.”
“그대는 짐의 하나뿐인 정인이고, 평생을 함께할 반려이고―.”
“륜.”
기하는 평소 성정답지 않게 말을 빙빙 돌리는 황제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그가 이토록 뜸을 들이는 말이 대체 무엇일까.
“말씀해 보십시오.”
“짐은 그대를 닮은 아이가 보고 싶다.”
“예? 그게 무슨…….”
“생각해 보니 기쁜 일이겠다. 그대를 닮은 아이가 태어나면 세상 그 어떤 이보다 귀하게 키울 것이다.”
“폐하.”
“짐의 아이로 키울 것이야. 그러니 그대는 아무 걱정하지 마라.”
“폐하.”
지금 이게 무슨 말인가? 자신을 닮은 아이? 황제의 아이로 키워?
스르르 몸을 일으킨 황제가 손을 내밀었다. 기하는 단번에 그 손을 밀어내며 아랫입술을 질끈 물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그의 말이 머릿속을 복잡하게 부유했다.
“신첩더러 지금, 여인을 취해 아이를 보라는 말씀이십니까?”
“역정 내지 마라.”
“폐하께서 아버지가 되시겠다고요?”
“비.”
“신첩이 언제 그런 것을 바랐습니까?”
황제는 그저 물끄러미 기하를 응시했다. 기꺼워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으나, 이토록 화를 내리라고도 예상하지 못했기에 어떤 말부터 꺼내야 할지 선뜻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무엇보다 기하의 저런 냉랭한 표정은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것이었기에, 황제는 하릴없이 입술만 벙끗거렸다.
“어찌 다른 이를 안으라고 하십니까? 어찌 다른 이와 아이를 보라고 하십니까? 폐하께서는 그런 아이를 품으실 수 있으십니까? 어떻게요?”
“진정해라.”
“신첩을 위해서라는 말씀은 거두십시오. 어찌 그것이 신첩을 위해서입니까? 무영과 정연, 태인은 모두 신첩의 자식입니다. 아이들이 훗날 장성하여 그 마음이 변한다고 해도, 마음으로 키운 신첩의 자식이란 말입니다. 한데 무슨 자식이 또 필요합니까?”
그것은 서러움이었다. 자신의 진심을 알아주지 않은 황제를 향한 억울함이었다. 사람들은 사내로 태어나 자손을 보지 못하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겼다. 기하는 그런 이들의 마음조차 이해하지 못하니, 그가 아직 세상 물정을 몰라 가능한 일이라는 말도 심심찮게 나돌았다. 다른 사람이 뭐라 하건 황제는 제 마음을 이해해주리라 생각했는데, 그것은 실로 충격이었다.
“기하야.”
“어찌 그리 모진 말씀을 하십니까?”
“그대를 닮은 아이를 보니 욕심이 생겨 그랬다. 너를 위해서라면 그 정도는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 것이야. 다른 뜻은 없다.”
“놓으십시오.”
사납게 손을 뿌리치고 등을 돌리는 기하의 목소리는 냉랭했다. 서러움이 가득 담겨 차고 아팠다. 황제는 마른 입술을 혀로 쓸며 주먹을 그러쥐었다. 생각이 짧았던 것일까. 그를 위한다고 한 일이 외려 독이 된 것일까.
“비.”
“더는 폐하께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신첩의 무례를 용서하시고, 지금은 돌아가 주십시오.”
“마음이 많이 상했더냐. 짐의 뜻은 그것이 아니라…….”
“알고 있습니다. 폐하께서는 늘 신첩을 위하시니 그 뜻을 어찌 곡해하겠습니까. 더는 못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이니 이해해 주십시오. 현 상궁.”
목소리를 높여 현 상궁을 찾는 기하의 표정은 여전히 굳어 있었다. 황제는 물끄러미 기하를 바라보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오는 현 상궁을 향해 가볍게 눈짓했다. 평소와 지나치게 다른 두 사람의 분위기에도, 그녀는 한결같은 표정으로 나붓이 머리를 조아렸다.
“연진 공주께 연통을 넣게. 내가 뵙고 싶다고 전해.”
“예, 마마. 속히 전령을 띄우겠나이다.”
“폐하께서 쉬셔야 하니 황자들에게 가겠네. 자네는 여기 남아 주위를 정리하도록 해. 단아, 가자.”
열린 문 사이로 얼굴을 내밀고 있던 단이 소리 없이 다가와 기하의 뒤에 섰다.
“다녀오겠습니다, 폐하.”
가볍게 머리를 숙이며 예를 갖춘 기하는 황제가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몸을 돌렸다. 임승지를 비롯한 그림자와 기하를 따르던 단의 얼굴에 영문 모를 의아함이 번졌다. 냉랭한 기하의 표정과 어딘가가 불편해 보이는 황제의 얼굴이 대비되었다.
조용히 자리를 뜨는 기하를 바라보는 황제의 표정은 퍽 처연했다. 서로 눈치를 보며 들리지 않는 눈싸움을 해대던 이들 중 억지로 떠밀려 나온 승지가 슬금슬금 안으로 발을 디뎠다.
“저, 폐하…….”
“뭐냐.”
“날이 좋은데 가까운 곳으로 사냥이라도…….”
“눈이 퍼부을 것 같은데 날이 좋긴 뭐가 좋아? 사냥하다 눈에 파묻혀 죽기라도 하라는 거냐?”
“소장은 그저…….”
“시끄럽다. 눈치라고는 개똥만도 없어서 너를 어디다 써?”
조금 전까지만 해도 처연한 얼굴로 정인의 뒷모습을 응시하시던 황제께서 다시 야차가 되셨다. 승지는 멋쩍은 표정으로 물러나며, 현 상궁의 비난 가득한 시선에 몸을 떨었다. 조금 전에 등 떠민 놈들 전부 가만 두지 않겠다.
기하는 한껏 우울한 얼굴로 어깨를 늘어뜨렸다. 연통을 넣었으나, 공주께서 성안으로 행차하시기 위해선 시간이 걸릴 거다. 그나마 회임 중인 공주의 건강이 좋아야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기하는 한숨을 푹푹 내쉬며 억울함이 가득한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겨울바람이 찼다.
톡톡.
귀 끝이 얼어붙어 몸을 잔뜩 웅크리는데, 손길이 느껴졌다. 순간 저도 모르게 사납게 표정을 굳힌 기하가 휙 뒤돌아봤다. 한 발자국 뒤에 물러서 있던 단은 형형한 기하의 표정에 놀라 얼른 손을 거두고 머리를 조아렸다.
송구합니다, 마마.
“네게 화난 것 아니니 겁먹을 것 없어.”
바람이 찹니다. 안으로 드시어 바람을 피하십시오.
단의 손짓은 빠르고 정확했다. 기하는 물끄러미 단을 바라보다가 무겁게 굳어져 있던 얼굴을 풀었다.
“단아.”
예, 마마.
“마음이 깊어 그런 것은 아는 데 말이다. 그래도 옹졸한 마음에 오롯이 이해되지 않으니, 그것은 나의 부족함 때문이겠지?”
소인이 무지하여 마마의 깊은 뜻을 이해할 수 없으니, 용서하여 주십시오.
단은 솔직하고 정직한 아이였다. 독을 바른 세 치 혀처럼 달콤하게 굴지 않았다. 모르는 것을 아는 체하지 않았다. 꾸밈없이 단정한 아이를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해졌다.
“폐하의 애정이 과분하시니, 기꺼운 투정이라고 생각해도 좋겠다.”
폐하께서는 정말로 마마를 많이 사모하시는 것 같습니다.
‘사모’라는 단어를 손으로 그리면서 단은 희미하게 웃었다. 아이의 볼이 조금 붉어진 것도 같았다. 죽음으로 향한 길밖에 모르던 아이는 많이 웃고, 때론 울고, 누군가를 그리워하기도 하며 점점 사람답게 변했다. 아직은 완전히 여물지 않은 상처를 품에 안으면서도, 때때로 다정한 시선을 건네기도 했다. 착하고 현명한 아이였다. 그래서 아이가 가진 상처가 가끔은 지나치게 아팠다.
소인은 ‘사모’의 뜻을 잘 모르오나, 많이 귀하고 어여쁘고 바라만 보고 있어도 좋은 것이라고 배웠습니다.
“누구에게?”
음…….
아이는 답지 않게 망설이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 모습이 못내 귀여워서, 기하는 질문을 멈추고 머리를 쓸어 넘겼다. 순간 가까이 다가온 단이 기하의 어깨 위로 두툼한 털옷을 둘러주었다. 급히 나오느라 미처 챙기지 못한 온기를 느끼자, 그제야 몸이 잔뜩 얼었음을 깨달았다.
고뿔에 걸리면, 폐하께서 화를 내실 텐데.
굶어 죽어가는 어미가 배를 곯는 아이를 위해 제 살을 먹이는 것을 본 적 있습니다.
“…….”
어느 노인은 늦게 얻은 손자가 귀해 상투를 쥐고 흔드는데도 허허 웃는 것을 보았습니다.
단의 눈동자가 아득하게 변했다. 상처뿐인 아이에게도 가슴을 울릴 만한 따뜻한 시간은 분명 존재할 거다.
물이 불어난 강에 빠진 여인을 구하기 위해 망설이지 않고 뛰어드는 사내도 보았습니다.
기하는 물끄러미 단을 응시하며 그의 말을 하나하나 새겼다.
모두 다르겠지만, 그것 또한 ‘사모’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모두 따뜻하고, 행복한 눈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 나의 욕심 때문이다. 그렇게 애정을 받고 있으면서, 더 알아주지 않으신다며 투정하는 거겠지. 철없이 말이다.”
그래도 되는 것 아닙니까?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빤히 바라보는 단의 얼굴에는 무수히 많은 질문이 담겨 있었다. 기하는 천천히 아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어쩐지 수줍은 듯 보이는 단의 표정을 유심히 관찰하던 기하는 천천히 무릎을 굽혀 주저앉았다. 멀리 숨어 있던 그림자가 놀라서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지만, 기하는 쉬이 움직이지 않았다. 부끄럽고 창피해서. 그러면서도 야속하고 속상해서.
사모하는 이에게는 그래도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마마, 너무 속상해하지 마십시오. 소인은 아무것도 모르오나, 분명 그리 들었습니다.
환하게 웃는 단을 바라보며, 기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머리가 아찔할 정도로 아팠다. 온몸이 무거워 그대로 주저앉고 싶어졌다.
투정하여도 등을 돌리지 말라고 했다. 아무리 화가 나도 홀로 두지 말자고 했다. 그렇게 먼저 청해놓고 약조를 어긴 것은, 바보 같은 서기하다.
말도 안 되는 일을 행하려 하시는 정인을 혼자 두다니, 그의 말대로 모질기만 한 랑랑이다.
마마, 바람이 찹니다.
“그래, 춥구나.”
바람에 휘말린 기하의 목소리가 쓸쓸했다. 몸을 잔뜩 웅크리고 그 사이로 얼굴을 묻은 기하는 연거푸 한숨을 내쉬며 바보 같은 자신을 책망했다.
싫다, 결론은 그것이었다. 이런 생각을 홀로 하는 자신이, 말도 안 되는 제안을 하는 황제의 모습이, 상처가 될 것을 알면서도 이렇게 무기력하게 보내는 시간까지도.
“어질지 못한 후궁이라 그런다.”
예?
“폐하께서 다른 여인을 품에 안으시는 것을 상상하면 먹던 것이 전부 얹히는 기분이다. 한데, 폐하께서는 아니신가 보다. 그렇게 생각하니 화가 나고, 억울하고, 분하다. 그러니 얼마나 모자라? 명색이 후궁이란 것이…….”
소인이라도 그럴 것 같습니다. 물론, 안으시는 것을 상상해본 적은 없습니다만……. 그냥, 그냥 그럴 것 같다는 생각…….
얼굴을 붉게 물들이는 단을 빤히 바라보던 기하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바짝 얼어붙어 죽음만을 고하던 아이가 어느덧 퍽 따뜻해졌다. 그런가. 당연한가. 그렇다면 지금 이 마음을 그대로 고해도 되는 것일까. 정말 그런가.
“예?”
술잔을 받던 손을 멈춘 북왕 서진하는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이다가, 아차 하는 듯한 표정으로 머리를 조아렸다. 황제는 그의 잔을 마저 채우며 심드렁한 표정으로 먼 곳을 응시했다. 따끈한 김이 오르는 술을 들고 있던 서진하가 콧등을 문질렀다.
사색에 잠긴 황제는 더할 나위 없이 찬란하게 빛났다. 몹시도 고고한 모습에 차마 말을 붙이기가 어려워 도무지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짐의 생각이 잘못되었나.”
“실은, 신 또한 잠시 복잡한 생각이 얽혀 폐하의 크신 뜻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할 뻔하였습니다.”
“짐은 비가 가엾고 안타깝다. 가장 좋은 것만 주겠다고 약조하였는데, 정작 비에게 줄 수 있는 게 없어. 쉬이 생각한 문제는 아니다. 다만…….”
무어라 정의하기 어려운 감정이었다. 그래도 기하는 이해해줄 줄 알았다. 욕심이 지나친 탓일까. 정녕 그런 것일까.
“다른 이를 품으라는 말을 듣고 어찌 마음 편할 수가 있겠나. 어불성설이었다. 지나친 욕심이고, 실언이었다. 다시 생각해 보니 끔찍해서 견딜 수가 없지 뭔가.”
서진하는 고요히 웃으며 황제의 잔을 다시 채웠다. 하나뿐인 아우는 이토록 귀한 애정을 받으며 살고 있구나. 늘 애정에 굶주리고 목말라 하던 아이가 이리도 뜨거운 연정을 받고 있구나. 다행이다, 정말로 다행이야.
“기하가 그리 화를 내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기분이 많이 상한 것인지 눈길도 주지 않는데, 어찌해야 하지?”
“고집이 세서 그렇습니다. 홀로 생각해보다 곧 마음을 풀 것이니 너무 상심치 마십시오.”
황제는 긴 한숨을 내쉬며 연죽을 입에 물었다. 기하가 싫다고 해서 한동안 입에 대지 않았던 것이었다. 연죽의 매운 연기가 금세 피어오르자, 황제의 근심도 깊어졌다.
“말썽만 피우는 황자들 추스르는 걸 볼 때마다 마음이 좋지 못했다.”
그랬다. 자식들이 어여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아이들에게 시달리는 기하를 볼 때마다 마음이 복잡했다. 그가 황자들을 어여뻐하면 할수록 마음은 더 그랬다.
자신이라면 아마 그리하지 못했을 것이다. 타고난 모성을 지닌 여인들조차 쉬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하나도 아니고 셋이나 되는 아이들에게 부족함 없는 애정을 퍼붓기 위해 그가 얼마나 노력하고 있을지, 눈에 빤히 보였다.
“마마를 향한 폐하의 성심을 어찌 모를 수 있겠습니까.”
황제의 말이 느릿해졌다. 따끈하게 데운 독한 술이 온몸을 돌고 돌아 사고를 느리게 했다. 그는 연신 말없이 술잔을 기울였다.
북왕 서진하는 묵묵히 황제의 잔을 채웠다. 그는 퍽 괴로워 보였으나, 하나뿐인 아우를 생각하는 마음이 보여 흐뭇함이 절로 앞섰다. 감히 신하 된 자로서 만연한 미소를 지을 수는 없었기에 보다 현명한 방법을 떠올리고는, 은밀히 상궁을 불러 무언가를 지시했다.
“폐하, 밤이 깊었습니다. 이만 침수 드시지요.”
“저녁 내내 비가 시선도 주지 않더란 말이다. 토라진 모습이 귀엽다 하였는데, 그리 무서울 줄은 몰랐지. 불러도 대답도 않고, 눈도 마주치지 않고. 어찌 내게 이럴 수 있느냐?”
서진하는 겸연쩍은 얼굴로 그저 머리를 조아렸다. 황제는 연거푸 한숨을 내쉬며 스스로 잔을 채웠다. 느리게 숨을 내쉬며 눈을 깜빡이는 미형의 얼굴 가득 근심이 서렸다.
“정말 무심한 정인이 아니더냐? 기하는 다 어여쁜데 이따금 그렇게 냉정한 구석이 있다. 가끔 그것이 어찌나 서운한지…….”
“무엇이 그리도 서운하십니까?”
툭 터지는 퉁명스러운 목소리에 황제는 부스스 고개를 들었다. 술기운이 돌아 눈앞이 어지러워 두어 번 깜박이자, 딱딱하게 굳은 얼굴이 보였다.
북왕도 참 비를 많이 닮았군. 하긴, 형제지간이니 닮은 것이 당연하지. 그런데 북왕이 이리 어여뻤던가? 이는 마치, 꼭.
“폐하께서 이리 취하실 때까지 형님께선 대체 뭘 하셨습니까?”
냉랭한 기하의 책망에 황제는 흐린 눈을 깜박였다.
“비.”
그저 물끄러미 바라만 보는 기하의 표정이 서러웠다. 황제는 무력감을 느끼며 기하를 향해 뻗은 손을 금세 거두었다.
“폐하, 일어나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한층 누그러진 목소리에 퍼뜩 고개를 든 황제가 기하를 향해 거뒀던 손을 다시 내밀었다. 어디선가 소리 없이 다가온 그림자가 그의 곁에 서자, 기하는 손을 들어 그들을 물렸다.
“내가 하겠다.”
“마마, 저희가 모시겠습니다.”
“내가 모시겠다. 폐하, 신첩을 붙잡으십시오.”
“기하야.”
“예, 폐하.”
황제를 끌어안자 독한 술 냄새가 났다. 그는 휘청거림 없이 곧게 일어서자마자, 온몸으로 기하를 폭 끌어안았다. 그림자는 그 모습이 익숙한 듯 반사적으로 몸을 돌려 주위의 시선을 차단했다.
“무정한 나의 비구나.”
두 눈을 감은 채 중얼거리는 황제의 목소리가 혼곤해졌다.
“어찌 신첩더러 무정하다 하십니까. 무정하신 분은 신첩이 아니라 폐하이십니다.”
가까스로 어깨를 밀어내며 한 걸음 내딛자마자 크게 휘청거리는 황제의 허리를 붙잡으며, 기하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겉보기와 달리 많이 취하신 것 같다. 아무래도 이 상태로 처소로 돌아가는 것은 무리 같으니…….
“임 대장.”
“예, 마마. 소장이 모시겠나이다.”
기세 좋게 나선 임승지가 황제의 앞에 엎드렸다. 눈썹을 찌푸린 황제가 등을 걷어차려고 다리를 뻗자, 요령 좋게 그것을 피하고 다리를 붙잡아 업은 임승지는 머리채를 붙잡는 악력에 이를 악물었다.
“이 망할 놈아, 당장 내려놓지 못하겠느냐?”
“폐하, 그리 움직이시면 떨어지십니다.”
“너, 감히 짐을 비에게서 떼어 놓으려고 하는 거냐? 발칙한 놈 같으니!”
문밖까지 따라 나온 북왕에게 눈인사를 건넨 기하가 황제의 등을 단단하게 붙잡았다. 북성의 사내들이 즐겨 마시는 분주(汾酒)는 평범한 맛과 달리 무척 독해 순식간에 취기가 도는 것을 모르셨을 테지.
사납게 몸부림치는 황제를 붙잡으며, 승지는 숨을 헉헉 내쉬었다. 마음 같아서는 실수인 척 그대로 자빠지기라도 했으면 좋으련만, 그랬다가는 성질 나쁜 황제께 몇 달을 시달릴지도 모른다. 아니 그전에, 가끔 지나치게 냉정하신 귀비마마께 보복당할지도 모르지.
“폐, 헉헉, 하. 그만 좀 움직이십시오. 그러다가 떨어지시겠습니다.”
목덜미를 부여잡은 악력이 어찌나 센지, 숨을 컥컥 몰아쉬던 승지는 종래엔 눈물까지 찔끔 흘려야 했다. 고요히 그의 뒤를 따르던 단이가 눈을 곱게 휘어 웃어주지만 않았더라면, 체면이고 뭐고 내던지고 짜증을 옴팡 부렸을 텐데.
“폐하.”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고 가까스로 침소 안으로 들어오자, 홧홧한 열기에 땀이 쭉 났다. 승지는 숨을 몰아쉬며 다리를 구부렸다. 그 틈에 황제를 붙잡은 기하는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가 부드럽게 그의 손을 붙잡았다.
“폐하, 이쪽으로 누우십시오.”
“기하야, 비.”
“예, 신첩 여기 있습니다.”
이만 물러가도 좋다는 눈짓을 하는 기하에게 머리를 꾸벅 숙인 승지는 흐르는 땀을 손등으로 문질렀다. 그에게 고맙다고 입술을 달싹이자, 얼굴을 벅벅 문지르면서 단을 곁눈질하며 웃는 모습에 웃음이 났다.
“하면, 소장은 물러나겠습니다.”
“고생했습니다. 단이도 그만 들어가 쉬어라.”
예, 마마. 편히 쉬십시오.
멀찌감치 떨어져 서 있던 두 사람이 나란히 침소를 나서자, 기하는 그것을 빤히 바라보다 황제의 따끈한 뺨에 손바닥을 올렸다.
“현 상궁, 따뜻한 물에 적신 영견을 만들어 오게.”
“예, 마마.”
황제는 침상에 걸터앉아 기하의 어깨에 이마를 기대고 도롱도롱 숨을 내쉬었다. 눈을 지그시 감은 상태에서도 옷깃을 잡은 손은 꿈쩍하지를 않는다.
“어찌 이리 취하셨습니까.”
“무정한 그대가 짐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짐의 마음도 몰라주지 않더냐. 속이 상하여서 마셨다. 종일 웃어주지도 않는 비를 보니 가슴이 어찌나 답답하던지.”
가슴을 붙잡고 옷깃이 우그러지도록 주먹을 쥔 황제는 괴로운 듯 연신 씨근덕댔다. 잘생긴 눈썹이 찌푸려지는 모습에 기하는 짧은 한숨을 내쉬며 그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안다. 다 알고 있다. 어찌 제가 정인의 마음을 모를 수 있단 말인가.
“어찌 폐하의 성심을 모를 수 있겠습니까.”
은혜가 너무 깊어 그랬다. 속이 상하여 그랬다. 그의 애정에 보답할 길이 없어서 그랬다. 속 좁게 굴면 혹여 정인께서 미워하실 수도 있겠다 싶으면서도, 어쩔 수 없이 그랬다.
“륜.”
흐트러진 그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졌다. 이렇게 마주 보고 있음에도 이따금 현실이 믿어지지 않을 때가 있다. 혹여 긴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토록 행복하게 살아도 되는 걸까. 넘치는 애정이 제 것은 맞을까.
“언제나 말씀드렸지요. 신첩은 륜만 곁에 계시면 된다고요.”
황제의 눈이 기하를 향했다. 깊고 깊은 애정이 넘실거리는 다정한 시선이었다. 기하는 스스럼없이 자신의 뺨을 어루만지는 그의 손을 붙잡았다.
“신첩에게는 언제나 륜뿐입니다. 그것이 너무 큰 욕심인 것은 알고 있으나, 마음을 무를 수는 없습니다. 하니, 이대로 곁에만 계셔 주십시오.”
“내게도 언제나 그대뿐이다.”
그제야 웃는다. 눈꼬리를 곱게 휘며 짓는 환한 미소가 어여뻐서, 황제는 그대로 기하를 끌어안았다. 온종일 졸이던 마음이 그제야 편안해진다. 황제는 무른 숨을 내쉬면서 기하의 등을 다독였다.
“기하야.”
“너무하셨습니다. 어찌, 다른 이를 안으라 하십니까.”
드문드문 말을 잇는 기하의 목소리 가득 투정이 깃들었다. 황제는 호기롭게 웃으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언제나 저를 먼저 생각하고 걱정하는 기하는, 쉬이 투정하지 않았다. 혹여 신경 쓰일 일은 만들지 않으려 하고, 때론 지나치게 제 마음을 숨길 때도 있었다. 황제는 그것이 못내 마음 쓰였다.
“그것이 그리 화가 났더냐.”
“신첩이 옹졸해 그렇습니다. 하나만 알고 둘은 모릅니다. 폐하의 성심도 헤아리지 않을 것입니다. 못났다 하셔도 어쩔 수 없습니다.”
“안다. 알다마다.”
작은 오해가 닿고 쌓여 마음이 멀어진다면 살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깊고 깊은 마음이 점점 식어간다면, 버텨내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평생 한 여인만을 그리워하던 아버지를 떠올렸다. 끝이 없는 길인 줄 알면서도 외롭고 쓸쓸하게 걸어가던 영빈의 마지막을 떠올렸다. 혼자 남은 고독을 생각했다.
그러다 이내 머리를 저었다. 어쩌면 자신은 그들보다 더 악랄하고 교활하게 변할지도 모른다는 아찔한 생각이 머리를 채웠다.
“짐의 생각이 짧았다. 그런 말을 하고 내내 후회했다. 못난 지아비다. 그렇지?”
“다시는, 다시는 그런 말씀은 하지 마십시오.”
“우리 기하가 진정 마음이 상했구나.”
“또 그런 말씀하시면 사흘 밤낮을 물도 마시지 않고 대성통곡할 것입니다.”
뚱한 목소리에 황제는 파안대소하며 기하를 끌어안았다. 기껏 생각해낸 겁박이 그것이라니, 과연 서기하다웠다.
“그건 아니 되지. 그러다 귀한 나의 비의 옥체라도 상하면 짐이 무척 화가 날 것 같으니, 그것은 삼가야겠다.”
“폐하께서 잘하시면 됩니다.”
동그란 머리를 쓰다듬으며 황제는 흐뭇하게 눈꼬리를 접었다. 뭉근하게 열이 올라 까무룩 잠이 들 것만 같았다. 마주 본 얼굴이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다. 오롯이 저에게 내어주는 시선이 너무도 익숙해서 고마운 줄 몰랐다.
그리고 알았다. 자신은 단 한순간도, 타인에게 서기하를 내어줄 수 없다는 것을.
“그럼, 잘해야지. 잘해야 하고말고.”
그 마음만은 소중하게 품어야겠다. 모든 것을 내어주어도 좋다는 그 마음 하나만.
“륜.”
“응?”
“손 치우십시오.”
단호한 기하의 목소리에 황제는 천연덕스럽게 자는 척 눈을 감았다. 기하는 슬금슬금 옷을 들추는 황제의 손을 밀어내다가 기어이 웃음을 터트렸다.
“륜.”
입술 사이로 그의 이름이 잦아든다. 미처 그를 밀어내기도 전, 익숙하게 벌어지는 입술 새를 가르고 들어와 절로 반응하는 혀를 맞대면 목울대를 바르르 떠는 습관에 웃음이 새었다.
그의 말대로다. 넘치는 행복을 붙잡고 있으면서 욕심이 과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서로의 곁을 채워주는 존재만으로 행복하니, 더는 욕심 내지 않으련다.
푸른 밤이 하얗게 셀 때까지, 검은 머리가 아침 빛처럼 희어질 때까지, 우리는 내내 행복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