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서(書)
북왕이 귀환했다. 서쪽 오랑캐를 척결하라는 황제 폐하의 명을 받들어 왕세자와 함께 출정한 지 꼬박 두 달만이었다.
스산한 바람이 불던 북성은 한겨울에 접어들었다. 올해도 흉년이 심해 굶어 죽는 백성들이 넘쳐났다. 그나마 황제께서 북왕의 공을 크게 치하하시며 내린 곡식이 아니었다면, 백성 절반이 굶어 죽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황제의 사자가 한겨울에 북성을 찾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본디 온화한 기후에 길들었던 제국민이나 다른 제후국 백성들은 혹독한 북성 추위를 견디지 못했다.
아무리 따뜻하게 불을 넣어도 심한 고뿔에 걸려 앓아눕다가, 운이 없으면 폐병을 얻어 세상을 떠나기도 했다. 어디 그뿐이랴. 동상에라도 걸리면 손발을 잘라내야 하니, 그 누가 기꺼워할 수 있을까.
“태자 전하, 바람이 찹니다. 어서 안으로 드십시오.”
올해로 열네 살이 된 황태자 신은 다정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말로만 듣던 것과 북성의 겨울을 눈으로 보는 것은 큰 차이가 있었다. 성안으로 들어오는 길에 얼어 죽은 백성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사나운 바람이 눈보라와 함께 몰아쳤다. 가만히 서 있으면 사내들의 수염에 서리가 내렸다. 손발이 굳는 것도 삽시간이었다.
지독한 계절이라 생각하며 황태자는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륜을 떼어놓고 온 것은 정말로 잘한 일이었다. 아직 열 살밖에 되지 않은 륜이 견디기란 너무도 혹독한 추위였다.
“성대한 연회는 필요 없습니다. 모두 고단할 테니, 배를 채우고 몸을 녹이게 하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황명으로 황태자와 함께 사자로 따라나선 태부 이상열은 덜덜 떨며 머리를 조아렸다. 북왕 서연은 민망함에 몸 둘 바를 몰라 하며 황태자를 안으로 안내했다. 비상용으로 준비해둔 마른 장작을 아끼지 말라 일렀으니, 연회장과 귀빈들의 처소는 제법 훈훈할 거다.
“아바마마.”
귀빈을 따라 연회장으로 향하던 서연이 걸음을 멈췄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서서 빼꼼 얼굴을 내민 어린아이의 모습에 태부는 미간을 찌푸렸다. 잠시라도 지체하는 것이 몹시 불만족스러운지, 그는 마른 몸을 잔뜩 웅크리고 황태자에게 최대한 바람이 덜 가도록 아랫것들에게 지시했다.
“태자 전하, 먼저 들어가시지요.”
황태자는 불편한 기색도 없이 늠름하게 어깨를 펴고 걸었다. 태부가 뱀 같은 눈을 번뜩이며 북왕을 힐난했다. 서연이 자신에게 가까이 오려는 왕세자 진하에게 눈짓하자, 영민한 아이는 금세 황태자의 뒤를 따랐다. 제 아우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만큼 귀애하는 아이인지라, 드문드문 뒤를 돌아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어찌 여기 있는 거냐.”
“송구하옵니다, 전하. 왕자 아기씨께서 전하를 꼭 환송하고 싶다 하시어…….”
아이는 또래보다 몸집이 작았다. 먹을 것만 보면 침을 흘리며 사족을 못 쓰는데도 그랬다. 먹은 것이 다 어디로 가는지, 통통한 뺨 이외에는 몸이 바싹 말랐다. 그래도 지금껏 혹독한 추위에도 크게 앓아눕지 않은 것을 유모는 자랑스럽게 여겼다.
북성은 가난한 제후국이다. 토지의 질이 나빠 곡식은 잘 자라지 못했고, 사내들이 대부분 용병으로 차출되어 아이들의 수는 점차 줄어들었다. 그나마도 열 살을 넘기지 못하고 배고픔과 추위에 굶어 죽는 이들이 태반이었다.
여인 또한 마찬가지였다. 잘 먹지 못한 산모는 아이를 낳을 힘이 없어 명을 달리했다. 모두가 그것을 안타까워했으나, 섣불리 자신의 것을 나눠주지는 못했다. 생사가 걸린 일이었기에 누구도 그것을 비난하지 않았다.
“아바마마, 승전을 감축드립니다.”
유모가 가르쳐 준 것일까. 아이는 또박또박 말을 이으며 말갛게 웃었다. 하얗던 두 뺨이 차게 얼어붙어 입술까지 푸르게 변했는데도, 떨거나 망설이는 기색은 없었다. 작은 몸을 덜덜 떨면서도 아이는 늘 용감했다.
“날이 차다. 함부로 돌아다니지 말고 유모와 처소로 돌아가.”
금세 기가 죽는 아이를 서연은 모른 척했다. 아마 왕세자가 곁에 있었다면 그런 아우를 잘 다독였을 거다.
“…예에.”
아이는 죽은 어미를 닮았다. 늘 선하게 웃어주던 여인,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다정하게 위로해주던 여인. 마음을 제대로 준 적 없어 한없이 미안하면서도, 냉정할 수밖에 없었던 그 여인을 말이다. 아이의 까만 눈은 그녀와 같았다. 서연은 그 시선이 못내 불편했다.
“아바마마, 소자도 형님 따라서…….”
“아니 된다.”
입술을 삐죽 내미는 아이의 볼이 붉게 얼어붙었다. 열이 나는지, 얼굴이며 목덜미가 유난히 붉었다. 아이의 등 뒤에 선 유모가 초조함에 발을 동동 굴렀다. 또 눈치 없이 굴다가 왕에게 불호령을 맞을까 두려워 하는 듯했다.
“예법도 제대로 익히지 못했는데 어딜 따라 들어와. 네 처소로 돌아가 얌전히 있어.”
싸늘한 서연의 명령에 아이는 금세 고개를 푹 숙였다. 작은 어깨가 힘없이 웅크려졌다. 눈물이 많은 아이는 금세 서러움에 울상을 할 거다.
그러나 그의 앞에서는 울지 않는다. 언젠가 쉬이 눈물을 보였다가, 사내가 눈물이 그리 헤퍼서 되겠느냐며 회초리를 맞은 후부터는 이를 악물고 참는 것이 보였다.
“왕자를 데리고 가라.”
“예, 전하.”
철딱서니 없는 것.
가볍게 혀를 차며 서연은 그렇게 말했다. 아이는 지나치게 천진했고, 아직 어려 사리분별이 어두웠다. 북성에서 쉬이 있을 수 없는 연회에 참석하려는 뜻은 오직 하나일 것이다.
유모가 왕자의 손을 붙잡았다. 왕께 예를 갖추고 돌아서는 그녀의 머리 위로 세찬 바람이 휘날렸다. 자칫 바람에 아이가 넘어질까 봐 무릎을 굽히고 양손을 내밀었지만, 조그마한 머리통은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연신 뒤를 돌아보려는 작은 몸뚱이는 거센 바람에 몇 번이나 휘청거렸다. 서연은 걸음을 재촉하며 멀어져가는 아이를 힐끔거렸다.
“에취.”
“그것 보십시오. 고뿔에 걸릴지도 모른다고 말씀드렸지요?”
따뜻하게 데운 물을 내밀었지만, 기하는 고개를 저었다. 축 늘어진 작은 몸뚱이는 힘을 잃었다. 두 눈을 느리게 깜박거리던 왕자는 낑낑거리면서 침상 위로 올라갔다. 바깥에서 들리는 바람 부는 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아마 오늘 밤엔 거대한 눈보라가 몰아칠 것이다.
“아바마마는 왜 나를 미워하셔?”
“미워하시다니요. 이렇게 어여쁘신 아기씨를 어찌 미워하신단 말씀입니까.”
“아니야. 아바마마는 나를 미워하셔. 무섭게 쳐다보시고, 무섭게 말씀하시고, 무섭게 화내셔.”
금세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기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유모는 아이의 몸 위로 두툼한 기수를 드리웠다. 왕자가 덮기에는 다소 무거운 기수를 어깨까지 끌어 올리자, 커다란 두 눈에 금세 눈물이 차오른다.
“전하의 성정이 워낙 무뚝뚝하시잖습니까. 다 아시면서 그러세요.”
“내가 살고 어마마마께서 돌아가셔서 그런 거지?”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누굽니까? 감히 누가 그런 말을 하였습니까?”
“다 그래.”
왕자의 조막만 한 손이 기수 끝을 붙잡았다. 온몸을 짓누르는 것만 같은 묵직함에도 기하는 투정하지 않았다. 그저 마음이 서러운 탓이었다.
“말씀해 보십시오. 소인이 가만두지 않을 것입니다. 감히 어디서 그런 말도 안 되는 말을 합니까? 전하께 고할 것입니다. 전하께서도 용서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유모오, 무서워.”
“그런 말은 마음에 담지 마셔요. 시장하시지요? 얼른 수라 올리겠습니다. 수라간에 직접 다녀올 테니 잠시만 기다리셔요. 우리 왕자 아기씨 좋아하시는 맛난 음식 많이 가져오겠습니다.”
“…응.”
스르르 눈을 감는 왕자의 이부자리를 정돈하고 일어선 그녀는 사나운 표정으로 궁인들을 불러 모았다. 함부로 입을 놀리는 못된 것들에게 엄한 충고를 늘어놓으며, 또다시 그런 말을 입에 올리면 전하께서 용서하지 않으실 거라 일렀지만, 그 누구도 그녀의 말을 진심으로 새기지 않았다.
“북성의 추위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독합니다.”
찻잔을 기울이는 황태자의 표정은 퍽 개운했다. 본디 식재료가 풍족하지 않은 탓에, 북성의 궁인들은 좋은 재료를 가지고도 깊은 맛을 내지 못했다.
소탈하게 내어진 깔끔하기만 한 음식을 내려다보며 태부가 짓던 표정이란 실소를 자아내게 했다. 그나마 황태자가 나서지 않았더라면, 황제 폐하의 사자를 무시하는 처사냐며 노호(怒號 : 성내어 소리를 지름, 또는 그 소리)를 내질렀을 거다.
“태자 전하께 그저 민망할 따름입니다.”
“하늘이 뜻인 것을요. 다만, 백성들의 고통이 느껴져 그것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태자는 고요한 표정으로 장기 말을 옮겼다. 소탈한 연회는 승리를 자축하는 술 한 잔과 허기진 배를 채우는 것으로 끝이 났다. 황제보다 더 소탈한 성정의 태자는 남은 음식을 성 밖의 굶주린 백성에게 나눠주라 명했고, 일찍이 상을 물리고 서연과 마주 앉아 장기 두기를 청했다.
“사실 이해되지 않는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하문하십시오.”
“아바마마께서 북성을 외면하신 것도 아닌데, 어째서 해마다 형편이 이리도 곤궁한 것입니까?”
황태자 신의 눈은 진솔했고, 흔들림이 없었다. 딱히 조롱이나 힐난이 담긴 것도 아니었다. 그는 오로지 백성의 안위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좋은 징조였다. 현 황제께서도 성군이시니, 대를 이어 역사에 길이 남을 만백성의 어버이로 기록될 것이다.
“먹을 것이 없으니 백성은 바깥으로 돕니다. 사내들이 모두 변방에 나가 있어, 아이가 귀합니다. 자연히 국력은 쇠하였지요.”
“그것을 알면서도―.”
“당장 먹고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랍니다. 보십시오, 전하. 이렇게 세찬 눈보라가 몰아치는 겨울은 이제 겨우 시작입니다. 이런 눈보라가 석 달 열흘은 더 갈 것입니다. 척박하게 얼어붙은 이 땅엔, 꽃이 피지 않습니다.”
꽃이 피지 않는다. 그것은 곧 시들어 없어질 운명이라는 것인가.
“그렇다고 해서 백성을 버릴 수는 없습니다. 이 땅을 버릴 수는 없습니다. 북성은 북성의 방식으로 버텨냅니다. 그러니, 너무 그렇게 안타까운 듯이 보지 마십시오. 나름의 행복이 이곳에도 있답니다.”
어린아이는 돌아올 아비를 기다립니다. 어미는 먹을 것이 생기면 좋아할 아이 생각에 웃습니다. 노모가 자식을 위해 밭을 일구고, 죽어가는 이웃을 위해 울어줄 줄 아는 이들이 아직도 성 밖에 남아 있습니다. 차디찬 겨울이 지나면 언젠가 또, 봄이 오지 않겠습니까? 비록 척박하게 얼어붙어 꽃이 피지 않는다 해도, 그것이 우리의 봄이랍니다.
유모는 초조하게 눈을 굴렸다. 한시가 아쉬운데, 문 앞을 지키는 상선은 꿈쩍하지 않았다. 그녀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일각이 지났는데도 왕께서는 이렇다 할 답을 주지 않으셨다.
“상선 영감, 한 번만 더 고해 주십시오.”
“전하께서는 황태자 전하와 함께 계시네.”
“하지만 왕자 아기씨께서…….”
그녀는 냉랭한 상선의 표정에 할 말을 잃고 망연자실하며 눈물을 찍었다. 어찌도 이리 무정하실 수 있단 말인가. 명색이 이 나라의 왕자가 아니신가. 한데 어찌 이리도 홀대하실 수 있음인지, 기가 막혀 숨이 거칠어졌다.
“아기씨의 신열이 도통 잡히지 않는단 말입니다.”
“연치 어리시니 고뿔이실 테지. 환약이나 잘 드시게 하고 찜질해 드리면 금세 일어나실 걸세. 얼마 전에도 신열로 며칠 앓으셨지 않은가?”
“그걸 아시고도 이리 말씀하십니까?!”
“아니, 이 사람이. 지금 어느 안전이라고 목소리를 높이나? 혹여 황태자 전하께서 들으시면 어쩌려고 이래? 전하께서 아시면 불호령을 내리실 테니, 어서 처소로 돌아가게.”
상선은 혀를 끌끌 차며 손을 휘저었다. 유모는 입술을 달달 떨며 기어이 눈물을 보였다. 열에 들떠 헛소리까지 하는 왕자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북성에서는 본디 의원이 귀했다. 그들은 수많은 전장을 돌면서 병사를 치료해야 했기에, 한밤중 성안에 남은 이들은 왕을 위한 자들뿐이었다. 왕의 명령 없이는 움직이지 않는 이들이었고, 특히나 오늘은 귀빈을 위해 대기 중이라 왕자의 상태를 볼 사람이 없었다.
“전하께 꼭 말씀 올려 주십시오.”
“알았다지 않나? 어서 가서 왕자 저하 수발이나 잘 들게.”
손을 휘휘 젓는 상선의 표정이 심드렁했다. 이럴 때 세자 저하라도 곁에 계시면 좋을 텐데. 유모는 서러움에 차오른 눈물을 연신 닦으며 치맛단을 붙잡고 처소로 뛰었다. 딱히 그녀의 뒤를 따르는 이는 없었다.
관심받지 못하는 왕자의 처소에는 배정된 식솔이 적었다. 열 명 남짓한 아이 중 번을 서야 할 아이들이 겨우 왕자의 곁을 지키고 있을 것이다.
몇 번이나 넘어질 뻔한 것을 가까스로 넘긴 유모는, 턱 아래까지 차오른 숨을 꼴깍 삼키며 처소로 돌아왔다. 어느새 발목이 푹 빠질 정도로 쌓인 눈 때문에 치마 끝이 축축하게 젖었다.
“아기씨는?”
“조금 전부터는 연신 우십니다. 어찌 됐습니다, 마마? 의원은요? 전하께는 고하셨습니까?”
아이들 중 가장 믿음직한 궁인이 재차 물었지만, 그녀는 고개만 저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망연자실한 표정을 보면서 그녀는 서러움을 눌러 삼켰다. 단숨에 침소 안으로 들어가니 침상 주위를 빙 둘러싸고 서 있는 아이들이 보였다.
“아기씨, 왕자 아기씨.”
열을 내리는 약을 달여 올리라 했는데, 그것을 전부 게웠는지 기수가 엉망이었다. 왕자는 울어서 부은 눈을 제대로 뜨지도 못하고, 끙끙 앓는 소리만 냈다. 온통 붉어진 얼굴에 열꽃이 피었다. 색색 내쉬는 소리조차 퍽 괴로워 보였다.
“탕약은?”
“반도 넘기지 못하셨습니다. 내내 우시니 열이 더 오르십니다. 어찌합니까? 이러다 우리 아기씨…….”
“시끄럽다. 어찌 그런 해괴한 소릴 입에 담아?”
“하오나, 아이들에게 신열은 큰일이 아닙니까. 더욱이 지난번 앓아누우신 후, 아직 제대로 회복조차 되지 않으셨는데…….”
기어이 눈물을 보이는 궁녀를 탓할 마음은 없었다. 유모는 끙끙 앓는 기하의 이마 위로 젖은 영견을 올렸다. 차디찬 물이 피부에 닿는 것이 싫었는지, 아이는 눈가를 찡그리며 금세 울음을 터트렸다.
“전하께서는 정말 너무하십니다. 그리 찬바람에 떨며 기다리셨는데, 어찌 그렇게 아기씨를 내치십니까? 아기씨께서 오늘을 얼마나 기다리셨습니까. 매일 전하와 세자 저하의 승전만 기원하셨는데.”
아이는 늘 외로움에 허덕였다. 항상 냉랭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왕을 내내 눈으로 좇으면서 말갛게 웃었다. 위안이 되는 것은 그런 아우를 살뜰하게 챙기는 세자였다. 누구보다 왕자를 아끼는 세자가 아니었더라면, 천덕꾸러기 왕자는 자신의 존재조차 제대로 알리지 못하고 외로움에 메말라갔을 거다.
“난영이 너는 탕약이나 다시 달여 오너라.”
서러움에 울먹이던 궁인이 눈물을 슥 닦으면서 머리를 꾸벅 숙였다. 끙끙 앓는 왕자의 젖은 이마를 쓸어주니 눈꼬리를 따라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아기씨, 정신 좀 차려보셔요. 일어나시면 아기씨 좋아하시는 타래과를 올리겠습니다. 그러니, 어서 눈 좀 뜨셔요.”
유모의 눅눅한 부름을 기하는 듣지 못하는 것 같았다. ‘마마, 바바.’ 열에 부르튼 입술만 겨우 달싹이며 끙끙거리는 작은 몸뚱이가 한없이 처연했다.
바람이 잦아든 성은 눈에 싸여 고요하게 젖어 들었다. 황태자 일행을 처소로 안내하고 겨우 휴식을 찾은 북왕은 수족을 물리고 홀로 사색에 잠겼다. 무거운 피로감이 전신을 짓누르자, 지독한 두통과 이명이 습관처럼 뒤따랐다.
서연은 붓을 들어 천천히 글씨를 써내려갔다. 흐트러지지 않는 자세로 옷깃을 붙잡고 써내려간 글자는 반듯하고 정갈했다.
이번에도 진하가 큰 공을 세웠소. 승전을 기뻐하기보다, 죽어간 병사들을 보고 마음 아파했소. 마음이 너무 깊어, 혹여 큰 상처를 받을까 그것이 가끔 걱정되오.
잠시 붓을 멈춘 서연은 지끈거리는 머리에 눈을 감고 손끝을 떨었다. 나날이 깊어지는 통증은 이렇듯 고통스럽게 그의 삶을 갉아먹었다. 그는 천천히 숨을 내쉬며 희미하게 눈을 떴다.
밤이 깊도록 곁을 지켜주던 여인은 늘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 이따금 소리 내어 웃으며, 아무렇지 않게 왕의 연정을 꺼내 보이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왕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며 회한에 잠기는 것뿐이었다.
오랜만에 기하를 보았소. 그 아이, 그대와 퍽 많이 닮아서 볼 때마다 괴로워. 그대에게만 보이는 진심이니, 우습다고 하지 마오. 제대로 한 번 안아주지도 못했는데, 그래도 아비라고 물끄러미 바라보는 게 꽤 귀엽다오. 그대가 있었다면, 밝고 어여쁘게 자랐겠지.
콜록. 서연은 탁한 기침을 쏟으며 긴 숨을 내쉬었다. 머리가 지끈거려 눈을 제대로 뜰 수조차 없었다. 찬바람이 쏟아지는 한복판에 아이를 홀로 두고 온 것이 마음 쓰였다. 유모가 살뜰하게 보살피니, 기름진 수라를 받고 잘 잠들었겠지.
모두가 잠든 깊은 밤이면 이따금 기하의 처소에 들렀다. 아이는 그럴 때마다 색색 깊은 숨을 내쉬며 배를 걷고 잠들어 있었다. 때로는 무서운 꿈을 꾸는지 울먹거리며 잠투정하기도 했다. 작은 가슴을 토닥여주면 금세 다시 잠드는 순한 성정이 기특했다.
풀어내지 못한 온정을 거두고 또 거두어도, 그것은 고스란히 되살아났다. 한없이 어여쁘다가도 이내 미워지고 마는, 그녀를 닮은 아이는 꼬물꼬물 잘도 자랐다.
기하의 잘못이 아닌 걸 알면서도, 옹졸하게 아이를 박대하니 나는 참 못난 아비요. 그대에겐 늘 미안해서, 마음을 다해 아껴주고 싶었다오. 그대는 아마 알고 있겠지. 말하지 않아도, 늘 내 마음을 먼저 알아차린 그대가 아니오. 그대가 그렇게 먼저 떠날 줄 알았더라면, 내 그것을 조금이라도 알아챘더라면.
서연의 붓이 멈췄다. 눈가를 찌르는 듯한 통증에 구역질이 치밀었다. 물론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소록소록 눈 내리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고요하던 침소 바깥이 지나치게 소란스러웠다. 서연은 천천히 일어나 고요하게 걸었다. 문 앞으로 다가가자 누군가와 실랑이하는 상선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 글쎄, 안 된다니까 그러네. 어서 돌아가게. 전하께서 침수 드셨는데 어찌 이리 무례한가?”
목소리를 낮추며 누군가를 꾸짖는 상선의 목소리 끝에 여인의 울음소리가 젖어 들었다. 서연은 투박한 표정으로 문을 열고 기이한 광경을 응시했다. 화들짝 놀란 상선이 허리를 숙이며 여인의 앞을 막아섰다. 왕자의 유모는 반쯤 실성한 사람처럼 눈물을 닦으며 상선의 옷깃을 붙잡았다.
“전하, 아무 일도 아니옵니다. 소란을 떨어 송구하옵니다.”
“기하의 유모가 아니냐.”
북성의 둘째 왕자에겐 군호(君號 : 임금이 왕자, 종친, 훈신을 군(君)으로 봉할 때 내리던 칭호)가 없다. 아명(兒名 : 아이 때의 이름) 또한 없다.
아이는 그림처럼 살 것이다. 가능한 한, 이 척박한 땅에서 멀리멀리 벗어나 바람처럼 구름처럼 살 것이다. 어느 날 북성에서 불현듯 사라지더라도 아무도 찾지 않게, 그렇게 살 것이다. 그러니 아무것도 필요 없다. 그저 어여쁜 이름 하나면 된다.
“무슨 일이냐.”
“전하,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순간 사나워진 서연의 표정에 그녀는 참았던 설움을 터트렸다. 눈에 젖어 얼어붙은 어깨가 가련하게 떨렸다.
“왕자에게 무슨 일이 있는 거냐.”
“…흐윽.”
“무슨 일이냐고 묻지 않아! 기하는. 어째서 이 늦은 밤에 아이 곁을 지키지 않고 여기 와 있느냐 물었다.”
“왕자 아기씨의 열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몇 번이고 울다 혼절하셨습니다. 이러다가 아기씨께서 잘못되실까 저어되어…….”
“전하!”
말도 없이 뛰기 시작하는 왕에 궁인들이 혼비백산했다. 그는 이렇다 할 명도 내리지 않고, 무작정 처소를 나와 왕자의 궁으로 향했다. 발이 푹푹 빠지도록 내리는 눈이 시야를 가렸다. 얇은 침의 차림이라 왕의 어깨가 금세 젖어 들었다.
어둠과 고요로 물들었던 북성이 삽시간에 소란해졌다. 왕이 가는 길마다 불을 밝히니 전쟁이라도 난 것처럼 궁인들이 혼비백산했다. 유모는 몇 번이나 눈길에 미끄러졌으나, 금세 일어나 앞장서서 뛰었다. 차갑게 얼어붙은 뺨 위로 금세 눈물이 떨어졌다.
“어떻게 된 거냐.”
아이는 서럽게 울었다. 생전 저렇게 우는 법이 없었는데, 목이 터지게 울고 또 울었다. 젖은 영견으로 왕자의 몸을 닦던 궁인들이 손을 벌벌 떨었다. 발이 꽁꽁 얼어 제대로 걷지 못하던 유모는 기어코 왕의 발치에 넘어졌다.
“의원은 어디 있느냐.”
왕의 분노가 차갑게 내려앉았다. 처소 궁인들은 그제야 눈물을 터트리며 머리를 조아렸다. 아무리 기다려도 소식 없던 왕께서 직접 행차하시니, 적어도 의원에게 왕자를 보일 수 있으리란 희망이 생겼다.
“어째서 의원이 보이지 않는 거냐.”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의원은 전하께서 명령하셔야만…….”
“왕자가 잘못되어도 그딴 말을 지껄일 거냐!”
왕의 고함이 사납게 메아리쳤다. 상선은 움찔거리며 그제야 문 옆에 대기하고 있던 이들에게 눈짓해 왕의 뜻을 전했다. 그들이 발 빠르게 움직이는 소리와 함께 다시금 침묵이 내려앉았다. 소리 죽여 훌쩍이는 궁인의 눈물에 왕은 뜨거운 눈가를 문지르며 씨근덕댔다.
“어디서 감히 눈물을 보여! 왕자가 잘못되기라도 했느냐? 입 다물지 못해?”
아이가 다시 울기 시작했다. 괴로운 숨소리가 들렸다. 왕은 저도 모르게 흠칫 떨며 왕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 탕약을 토해낸 자국을 보자, 명치가 지끈거렸다.
“언제부터냐.”
“…….”
“언제부터 이리 앓았느냐.”
“황태자 전하와 장기를 두시기 시작하신 후에, 유모상궁이 찾아왔었나이다.”
아무도 들이지 말라 이른 것은 왕 자신이었다. 황태자와의 독대가 끝난 후에 한동안 홀로 시간을 보낸 것 또한.
손끝이 덜덜 떨려 주먹을 그러쥐었다. 왕은 물끄러미 아이를 바라보면서 쉬이 손을 내밀지 못했다. 이렇게 괴로워하는 아들을 품에 안을 자격은, 애초에 서연에겐 없었다.
모두가 부산하게 움직였다. 궁의의 지시대로 움직이는 이들 속에서 서연은 우두커니 서서 왕자를 바라보았다. 커다란 목욕통이 침소 안으로 들어왔다. 차가운 물을 퍼 나르는 궁인들은 추위에 온몸을 떨었다.
아이는 울 기운도 없는지 연신 흐느끼기만 했다.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 흐느끼던 아이는 몸을 축 늘어뜨리며 눈물만 연신 흘렸다.
“어서 저하를…….”
궁의는 적당히 식은 물로 열을 식히라 했다. 한여름이었다면 시원하다고 느낄 정도의 온도는 손끝만 넣어도 오싹한 한기가 밀려들었다.
“어서 하십시오. 이대로 두면 저하께 정말 큰일이…….”
“이리 다오.”
왕은 유모의 품에 안긴 왕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 울고 있는 아이의 몸이 축 늘어졌다. 목소리가 갈라져 듣기에도 괴로울 정도였다. 유모는 두려움에 떨면서도 왕의 명을 거역할 수 없어 기하를 그의 품에 안겼다. 머잖아 첨벙 소리를 내며 왕자를 물에 처박을 거라 예상했던 유모의 눈이 삽시간에 커졌다.
“전하! 옥체 상하실까 저어되옵니다!”
상선의 소란에도 왕은 묵묵히 욕통(浴桶) 안으로 들어갔다. 아이를 품에 단단히 안고 그대로 앉으니 자지러지는 울음소리가 고막을 파고들었다. 살갗을 에는 듯한 한기에 왕자가 발버둥 쳤다. 왕은 아이를 단단히 붙잡고 커다란 손으로 기하의 뺨을 쓰다듬었다.
아가.
차마 안타까워 부를 수조차 없던 이름이다. 입가에 맴돌면 가슴이 무너져 괴로운 이름이다. 아니 된다. 이렇게 너 또한 잃을 수 없다, 아가.
“기하야, 울지 마라. 착하지.”
아이를 무릎에 앉히고 뺨을 더듬었다. 정수리에 물을 끼얹으니 감겼던 눈이 바르르 떨렸다. 모두가 한 발 물러나 왕을 바라봤다. 차디차게 굳어진 왕의 손은 흔들림 없이 아들을 단단히 끌어안았다.
“바바…….”
아무것도 모르던 아이는 말간 눈으로 그렇게 웃었다. 바바, 하고 부르던 젖내 나는 작은 몸뚱이를 몰래 끌어안으며 울기도 하고, 웃기도 했다. 작은 손이 꼼질거리며 서연의 뺨을 어루만졌다. 울어서 부은 눈을 겨우 반쯤 뜨고, 아이는 또 말갛게 그렇게 웃었다. 그녀를 닮은, 어여쁜 미소였다.
“바바……. 바바…….”
불덩이처럼 뜨거웠던 작은 몸뚱이는 서서히 안정을 찾았다. 이러다 이내 한기가 돌면 크게 괴로워할 거라는 궁의의 말을 떠올리며 서연은 눈을 질끈 감았다.
“바바……. 우는 거, 시러.”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서연의 뺨을 문지르던 아이는 색색 숨을 몰아쉬었다. 고통스러운 숨소리가 가슴을 사납게 짓눌렀다.
“기하야, 아비가 보이느냐? 기하야.”
축 늘어지는 아이의 작은 몸을 꽉 끌어안은 서연은 마른 숨을 내쉬며 온몸을 덜덜 떨었다. 그것은 거대한 상실감이었다. 또다시, 준비도 하지 않고 잃을 수는 없다.
“아비가 잘못했다. 아비가 미안하다. 눈 좀 떠보련, 아가야.”
아이는 추위에 떨지 않았다. 저를 끌어안은 아비의 뜨거운 품 안에서 소록소록 숨을 내쉬었다. 물에 불어 쪼글쪼글해진 손가락 끝으로, 연신 아비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 * *
“형님!”
우다다 뛰어오던 기하는 문득 뒤를 돌아보는 서연의 모습에 놀라 걸음을 멈추다 그대로 고꾸라졌다. 뒤따라오던 유모와 상궁들이 혼비백산하는 사이, 어느새 코앞으로 달려온 진하가 기하의 몸을 일으켰다.
“괜찮으냐? 어찌 뛰어와. 어디 보자, 어디 다친 데는 없느냐?”
“히히. 형님 오셨다고 하셔서……, 콜록.”
작은 몸이 흔들릴 정도로 마른기침을 쏟아내는 아이는 한 계절 사이 몰라보게 핼쑥해졌다. 하얗고 통통하던 볼살이 빠져 당장에라도 넘어질 듯 가냘픈 모습에, 진하는 연신 미간을 찌푸리며 속상함을 드러냈다. 무릎을 탈탈 털어주는 손끝엔 손상함이 가득 담겼다.
“어찌 이리 말랐어. 내내 걱정하였다. 어디 보자, 내 아우. 키가 하나도 자라지 않았잖느냐? 뭘 제대로 먹긴 한 거냐?”
“꼬박꼬박 수라도 잘 들고, 탕약도 잘 먹습니다. 약이 쓰지만, 아바마마께서 꼭꼭 잘 먹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기하는 습관처럼 진하의 팔에 매달려 말갛게 웃었다. 두 눈을 어여쁘게 접으면서 웃는 얼굴을 보니 입안이 까슬까슬했다. 진하는 아우의 작은 손을 꽉 붙잡고 천천히 걸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저희를 바라보는 아버지의 시선이 느껴졌다.
“또 넘어졌느냐?”
무뚝뚝한 왕의 목소리에 기하는 저도 모르게 머리를 끄덕였다. 왕은 가볍게 혀를 찼다. 예전처럼 별다른 타박을 하지 않아도, 기하는 그 작은 반응에 금세 움츠러들었다. 입술을 삐죽하게 내미는 아우의 모습이 안타까워 진하는 연신 기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옷이 엉망이다.”
흙이 묻어 엉망이 된 무릎은 연신 털어도 얼룩이 지워지지 않을 것 같다. 낮것을 들 때가 되었는데, 이 꼴로는 절대로 함께 수라를 들 수 없을 테지. 오랜만에 마주한 진하의 손을 놓기 싫어 연신 꼬물거려도 곧 차가운 명이 떨어질 거다.
“왜 그래?”
아무 말 없이 우두커니 서서 생각에 잠긴 기하가 이상하다고 느낀 진하는 무릎을 굽히고 아우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까만 눈이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모습에 입이 바싹 마르는 것 같았다.
왕은 한 걸음, 아들들에게 다가섰다. 늘 늠름한 진하가 바짝 얼어붙은 모습에 하릴없이 웃음이 나려 했다. 그는 천천히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아, 몽롱한 기하의 시선과 마주했다. 그제야 화들짝 놀라며 정신을 차리는 아이는 제 형에게 도움을 청하듯 반듯한 눈썹을 씰룩였다.
아이의 볼은 열 때문에 붉었다. 궁의의 말로 예전보다 자주 고뿔에 걸릴 것이라 했다. 그나마 건강체로 타고나 위험한 고비를 넘긴 것 같다는 잔혹했던 밤의 이야기를 떠올리며, 왕은 물끄러미 어린 아들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또 열이 나느냐?”
“아니옵니다.”
“한데 왜 힘없이 픽픽 쓰러져. 사내대장부가 씩씩해야지.”
“…송구합니다.”
“송구하라고 하는 말이 아니다.”
“아바…….”
잔뜩 기가 죽은 기하의 무릎을 그대로 끌어안은 왕이 으챠, 하고 몸을 일으켰다. 보기에도 말라 보인다 했더니, 앙상하게 마른 몸의 무게는 상상을 초월했다. 이러니 그렇게 픽픽 넘어지기나 하지.
“아직 바람이 차다. 어서 들어가 함께 수라 들자꾸나. 세자가 시장하겠다.”
놀라서 굳은 것인지 기하는 말이 없었다. 동그란 눈으로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이내 생긋 웃고는 얼른 품에 매달리는 모습이 우스웠다. 목덜미를 단단하게 안으며 작은 손을 꼼질거리니 여간 간지러운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왕은 그것을 물리지 않았다. 열이 펄펄 끓어 끙끙거리며 앓는 소리를 내던 끔찍했던 밤이 떠오르니, 도저히 아이를 품에서 떼어놓을 수가 없었다.
“아바마마, 맛있는 것 먹어요?”
“그래.”
“소자도요?”
“그래.”
“히히, 두 개 먹어도 돼요?”
“그래.”
아이는 보드랍고 따끈따끈했다. 왕은 스르르 지어지는 미소를 애써 숨기지 않았다. 호기로운 표정으로 제 곁에 선 큰아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한쪽 손을 내밀어 진하의 손을 잡고, 남은 손으로 기하의 작은 몸을 단단히 받쳐 안은 왕의 발걸음은 평소보다 조금 들떠 보였다.
진하가 돌아온 후, 기하는 부쩍 잘 먹고 잘 지낸다오. 얼마 사이에 키가 한 치(약 3.03cm)나 자랐다오. 갑자기 자란 탓에 밤이면 무릎이 아프다며 잠을 잘 이루지 못한다는데, 그래서인지 낮잠이 늘었소. 엊그제는 몰래 떡을 먹다가 목에 걸려 큰일 날 뻔하였는데도 잘못한 게 없다면서 어찌나 대거리하던지, 눈물이 쏙 날 만큼 야단쳤더니 또 밤새 울었다오. 아마 그대가 보았더라면 다정하게 타일렀을 텐데, 놀라서 화를 내니 그것이 역효과였던 모양이오. 오늘은 진하와 함께 궁술을 하였는데, 그 실력이 너무도 출중하여 모두가 감탄하였다오. 아무래도 그쪽에 재능이 있는 것 같아, 좋은 선생을 수배해 놓으라고 일렀소. 올여름에는 진하의 배필(配匹)을 찾을까 하오. 기왕이면 진하 마음에 드는 아이가 좋을 듯하여 뜻을 물었더니, 도통 말을 하려 하지 않소. 부끄러워 그러는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지는 차차 물어보고 성급하지 않게 결정하려고 하오. 이런 일에는 자신이 없어, 내심 걱정이 된다오. 두 아이는 잘 지내오. 무탈하게, 그렇게 지내오. 내, 그대 곁으로 가 지난날의 무심함을 용서 빌 때까지 지금처럼 이렇게 잘 지낸다면 참 좋겠는데, 지금 이 평온이 얼마나 지속될지는 모르겠소. 오늘따라 그대가 참 그립소. 그대, 잘 지내오?
서연은 손끝에 쥔 붓을 가볍게 내려놓으며 눈을 감았다.
환하게 밝아진 시야 너머로 아련하게 웃는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의 손짓에 천천히 발을 내딛자,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어린 아들들이 보였다. 나란히 걷는 네 사람 위로 꽃비가 내렸다. 산들산들 불어오는 바람을 쫓아 기하가 먼저 달려가고, 그 뒤를 진하가 따랐다. 아이들에게 조심하라 이르는 그녀의 얼굴 가득 미소가 만개했다.
그것은 난생처음 느껴보는 평온이었다. 따뜻하고, 그리워서, 불현듯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자신을 부르는 아이들의 목소리와 다정한 아내의 웃음소리, 함께 걷는 그 길이 너무도 아름다워 줄곧 그 시간 속에 머물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