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장 화양연화(花樣年華)
긴 행렬이었다. 길가로 몰려나온 백성들은 저마다 공주마마 만세를 외쳤다. 민심을 제대로 읽을 줄 아는 황제로 인해 백성들은 굶주리지 않았고, 억울한 일을 당하지도 않았다. 하여 여느 때보다 황족을 향한 충심이 넘쳐서, 그들은 유일한 공주인 연진의 혼례를 진심으로 축복했다.
늠름한 자태로 말에 오른 서엽은 손을 흔드는 백성을 바라봤다.
“그리 좋으냐?”
작은 창 너머로 서엽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공주는 퉁명스러운 황제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얼굴을 붉혔다. 굳이 대답하지 않아도 알 만큼 그녀는 제 감정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오라버니께서도 귀비마마만 보시면 웃으시잖아요.”
“그거야 당연하지. 사모하는 랑랑인데.”
“소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한 분뿐인 낭군님이신걸요.”
똑 닮은 오누이는 마주 보고 앉아 똑같은 얘기를 되풀이했다. 그것은 점차 하나뿐인 정인에 대한 칭찬으로 이어졌기에, 그들과 함께 마차에 오른 기하는 민망함에 귀 끝까지 벌게져 시선 둘 곳도 제대로 찾지 못했다.
“마마, 배고픕니다.”
귓가에 속삭이는 정연군의 투정만 아니었더라면, 민망함을 이기지 못하고 마차 바깥으로 뛰어내렸을지도 모른다.
“현 상궁이 떡과 유과를 준비했을 텐데?”
“그건 아까아까 다 먹었는걸요.”
정연군은 볼록하게 튀어나온 배 위에 작은 손을 올리고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기하는 겨우내 살이 올라 한층 더 토실토실해진 손으로 제 배를 콕콕 찌르는 정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거 먹어.”
그제까지 서책에 코를 박고 있던 무영군이 비단 보에 싸인 것을 내밀었다. 달콤한 꿀이 흐르는 타래과는 출발 전에 황후께서 직접 내어주신 것이었다. 물론 정연은 마차가 황도를 벗어나기도 전에 전부 먹어치워 존재 자체를 까맣게 잊은 것이기도 했다.
“현님! 타래과 아직도 안 드셨습니까? 타래과 안 좋아하십니까?”
“그걸로 요기하고 마마를 귀찮게 하지 마. 네가 자꾸 배고프다고 칭얼대면 마마께서 곤란하시다.”
“왜요? 왜 마마께서 곤란하십니까? 마마께서는 소제가 먹는 것만 봐도 배부르다고 하셨는데요?”
“적당히 먹어야 배가 부르지, 너처럼 먹는 걸 보고 있다간 기가 질린다.”
따박따박 대거리하는 정연의 머리를 쥐어박으며, 황제는 혀를 끌끌 찼다. 정연군은 아프다며 울상을 했고, 기하는 왜 아이를 때리느냐며 편을 든다. 무영군이 소란에서 벗어나 다시 서책에 코를 박으면, 황제는 기하에게 섭섭하다는 둥, 너는 왜 정연 편만 드느냐는 둥 불만 가득한 말을 쏟아낸다.
모든 것은 익숙한 일상이었다. 공주는 물끄러미 그들을 바라보며 미소했다. 진정한 행복을 되찾고 보니, 새삼스럽게도 그 모습이 몹시도 아름답게만 느껴졌다.
황제는 연신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누이를 떠나보내는 길은 내내 유쾌했다. 그녀는 누구보다 행복해했고, 길령에서 그들과 헤어질 때도 눈물 한 가닥 보이지 않았다. 늦여름에 북성을 찾겠다고 약조한 황제의 말에 놀란 것은 오히려 기하였으니, 연진 공주와 서엽은 모두의 축복 속에 화려한 배에 올랐다.
그들을 배웅하고 돌아서는 길은 잔잔하고 푸른 바람이 부는 늦은 오후였다. 꼬박 하루 반나절을 마차에서 보낸 탓에 온몸이 찌뿌드드했다.
“정연, 천천히 먹어야지요.”
아이의 입술을 닦아주자 양손에 고기를 들고 먹던 황자가 빙긋이 웃는다. 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고운 미소를 짓는 황자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기하는 주위를 돌아봤다. 이곳은 벌써 두 번째인데, 변함없이 북적이는 모양새가 좋았다. 문득 떠오른 지난날을 반추하며 기하는 잠시 숨을 골랐다. 완전히 잊히지 않은 무거운 상처가 가슴에 매달린 추처럼 대롱거렸다.
“아바마, 아차. 아버지 이거 또 먹어도 됩니까?”
“안 된다.”
“왜 안 됩니까? 맛있어서 또 먹고 싶은데요.”
금세 시무룩해진 정연은 제 코만큼 입을 내밀고도 손에 든 고기는 놓지 않았다. 황제는 평소와 달리 다정하게 미소하며 아들을 바라봤다.
“맛있는 게 넘치니 다른 것을 먹도록 해. 다 먹고 저자에 나가자꾸나.”
“저자가 몹니까?”
“물건을 사고파는 거리를 말함이다. 맛있는 것도 있고, 재미난 것도 많으니 구경 가자.”
“야호! 그럼 지금 당장 갑니다!”
“아직 식사가 끝나지 않았으니 천천히 먹고 가면 된다. 여긴 밤늦게까지 볼거리가 많아.”
입이 찢어지게 웃는 정연군을 보며 금룡대가 저마다 웃었다. 저 통통한 황자는 보고 있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신기한 재주를 지녔다.
“말 타고 갑니까? 아니면 마차 타고 갑니까?”
“걸어간다.”
“그러다 다리가 아프면 어찌합니까?”
“어쩌긴, 두 다리 튼튼한 놈들이 지천인데 너 하나 못 안아줄까.”
정연군이 뿌듯하게 웃으며 제 코끝을 스윽 문질렀다. 그제까지 웃고 있던 금룡대가 순식간에 표정을 굳히고 서로를 견제하는 표정에, 기하는 남몰래 웃음을 삼켰다.
“태인도 함께 왔으면 좋았겠습니다.”
“만나면 다투기 바쁘면서 떨어져 있으니 아쉬우냐?”
“그거야 태인이 소자에게 까부니 그런 것입니다. 소자는 현님 말씀도 잘 듣는데, 태인은 그러지 않습니다. 현님만 좋아하고 소자에게 주먹질도 했습니다.”
“저런, 태인을 혼내줘야겠구나.”
“음…, 그렇지만 태인은 아직 아가니까 특별히 용서해주기로 했습니다. 그렇지요, 마마?”
기하는 고개를 끄덕이며 반쯤 식은 차를 한 모금 넘겼다. 비록 황실에서 마시는 것처럼 훌륭하지는 않았으나, 향이 좋아 입가심하기에는 그럭저럭 나쁘지 않았다.
“식사를 다 한 것 같으니 이제 그만 일어나자.”
“현님, 얼른 일어나세요!”
“저자에선 경거망동해서는 아니 된다. 자칫하다가 길을 잃기에 십상이다.”
어쩐지 그 말을 하면서 자신을 짓궂게 바라보는 것만 같은 황제의 시선에 기하는 모르는 척 고개를 돌렸다. 주인장에게 음식값을 치르고 곁으로 다가온 승지가 한 걸음 앞장서며 길을 나섰다.
“우와, 꽃사탕이다! 마마, 마마가 주셨던 꽃사탕입니다.”
후다닥 뛰어가 소리치는 정연군 덕에 아이를 호위하던 금룡대 두엇이 혼비백산하며 길을 가로질렀다. 바다의 비릿한 냄새가 익숙하지 않은지 무영군이 연신 코를 쥐며 불편한 기색을 보였기에, 기하는 내내 아이의 곁에서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날다람쥐처럼 여기저기 뛰어다니는 정연을 바라보면서도, 무영의 손을 꼭 붙잡고 아이들의 이름을 습관처럼 불렀다.
“마마, 이것 보세요. 아, 하세요!”
승지를 졸라 사온 것인지 꽃사탕을 하나하나 입에 넣어주는 정연군의 뺨이 통통했다. 벌써 얼마나 입에 넣은 것인지 말할 때마다 침이 흐를 것 같은 입술을 소매 끝으로 닦아주며, 기하는 아이의 이마를 톡 쳤다.
“단걸 너무 먹으면 이가 상합니다.”
“히히, 맛있어서 그렇습니다. 현님, 아 하세요.”
색이 고운 사탕 두 개를 무작정 무영군의 입에 넣어준 정연이 이번에는 황제에게 다다다 뛰어갔다.
저러다가 넘어지……, 어이쿠. 기어이 넘어진 정연은 아픈 무릎보다 쏟아진 꽃사탕이 먼저인 모양이었다. 보다 못한 승지가 또 사주겠다는 약조를 하고서야 흙 묻은 사탕에서 시선을 거둔 정연의 눈꼬리가 붉었다.
“지금 사줘.”
“나중에 사드리겠습니다.”
“지금 사줘, 지금.”
승지에게 꼭 붙어 옷자락을 붙들고 징징거리는 정연군에 황제는 혀를 끌끌 찼다. 평소 같으면 단박에 큰 소리가 났을 텐데, 궁을 벗어나서인지 기분이 좋아 보이는 그는 말없이 기하의 어깨를 끌어안을 뿐이었다.
“단아.”
예, 마마.
“정연에게 사탕을 사주도록 해. 넉넉히 사서 모두 나눠 먹자.”
예, 다녀오겠습니다.
이제는 제법 멀어진 가게로 뛰어가는 단을 향해 정연이 손을 붕붕 흔들었다. 몸이 날쌔고 타고난 체력이 좋은 단은 서엽이 자리를 비운 동안 기하의 손발이 되기로 했다.
물론 기하에게는 늘 보이지 않은 곳에서 위험을 감시하는 황제의 그림자가 있었고, 누구보다 월등히 뛰어난 궁술 실력만으로도 자객 하나둘 즈음은 어렵지 않게 대처할 수 있었으나, 무조건 호위를 곁에 두라는 황제의 명에 궁여지책으로 내세운 것이 단이었다. 그다지 탐탁지 않아 하던 황제는 단이 아니면 아무도 곁에 두지 않겠다는 기하의 말에 하는 수 없이 허락하고 말았다.
“이것 한 번 맛보십시오.”
고소한 기름 냄새가 후각을 자극했다. 기하는 멀뚱히 서서 단이 오기만을 기다리다가 불현듯 가까워진 목소리에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고개를 돌렸다. 예전 같았다면 기하 역시 여기저기 뛰어다니는 정연처럼 한바탕 저자를 헤집었을 거다.
“생선살을 발라 튀긴 것인데 아주 맛이 좋습니다. 한 번 드셔 보십시오.”
“저녁을 일찌감치 먹어 배가 찼습니다. 미안합니다, 많이 파세요.”
“꼭 팔려고 하는 게 아닙니다, 처음 만든 거라 긴장이 돼서 그러니 맛 좀 보십시오.”
수더분한 사내는 허허 웃으며 잘 튀겨진 음식을 내밀었다. 기름이 잘잘 흐르는 것이 무척 먹음직스러웠다. 배는 차도 워낙에 먹는 것을 좋아하는 기하가 절로 도는 군침을 꿀꺽 삼킨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어떻습니까?”
“맛있습니다. 조금 뜨거운데 간도 좋고 부드럽네요.”
기하는 한입 베어 문 적(炙)을 후후 불어 무영군의 입에 넣어주었다. 아이들만 아니었더라면 굳이 미리 요기하지 않고 여기서 배를 채우는 것이었는데. 아쉽다는 생각에 저도 모르게 자꾸만 입맛을 다시자, 황제의 시선이 느껴진다.
“먹고 싶으면 먹도록 해.”
“아닙니다. 맛은 좋은데 배가 불러서.”
“맛이 좋으면 하나씩 드십시오. 내 오늘 개시인데 맛이 좋다니 아주 기분이 좋습니다!”
주인장이 호탕하게 웃으며 내민 적을 받아 든 기하는 미안한 얼굴로 황제를 바라봤다. 그가 승지를 향해 눈을 까딱하자, 여지없이 그의 뜻을 알아챈 금룡대장의 전낭 주머니가 열렸다.
“개시인데 그렇게 공짜로 막 퍼주는 거 아니오. 얼마요? 우리 도련님께서 맛이 좋다고 하셨으니 만들어진 것만 주시오.”
“어이구, 인심 좋은 나리들. 고맙습니다.”
주인장은 연신 허리를 굽실대며 처음 보는 커다란 나뭇잎에 적을 둘둘 말았다.
“이리하면 잘 식지 않고 잎의 향까지 더해져 맛이 좋습니다. 아차, 그리고 이것은 마음씨 고우신 도련님께 드리는 것이외다.”
몽글몽글 피어오른 것은 정체 모를 꽃이었다. 분홍빛 같기도 했고, 진한 살굿빛 같기도 한 오묘한 색깔의 꽃은 꼭 눈송이를 뭉쳐놓은 것과 같았다. 어찌 보면 커다란 방울 같기도 한 꽃에서 나는 은은한 향기에 저도 모르게 손을 뻗은 기하는 괜히 머쓱한 기분이 들어 어색하게 웃었다.
“웬 꽃입니까?”
“우리 장사꾼들이 귀한 손님께 드리는 감사의 표시랍니다.”
기하는 혹여나 모르는 사내에게 꽃을 받았다고 황제께서 노하시면 어쩌나 하여 그를 슬쩍 곁눈질했다. 다행히 별다른 반응 없는 황제를 향해 꽃을 내밀자, 오히려 핏 하고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는다.
“그대와 잘 어울려.”
“신기한 모양입니다. 황궁에 심어두면 어여쁠 것 같습니다.”
“상선에게 일러두마. 가자.”
단의 손을 잡고 걸어오는 정연에게 손짓하자, 아이는 볼이 터지도록 사탕을 우물거리며 뛰기 시작했다. 제 손을 잡고 걷는 무영군과 스스럼없이 황제의 손을 잡은 정연은 걸음을 맞추며 신기한 물건이 가득한 거리를 걸었다. 아이들은 한없이 들떴고, 해는 금세 졌다.
“무영, 뭘 보고 있습니까?”
아이의 발이 멈춘 것은 고운 비단과 노리개 따위가 가득한 곳이었다. 수많은 여인들이 오간 탓에 뽀얀 분 향이 나는 그곳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황자에게 눈을 맞추자, 쑥스러운 듯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은 무영군이 기하의 손을 끌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양 귀인에게 줄 선물을 보고 있었습니까?”
대답 대신 그저 제 이마를 긁적이기만 하는 무영의 손을 붙잡은 기하는 말없이 아이를 점포 앞으로 이끌었다.
“어서 옵쇼. 뭘 보여드릴까?”
“무영, 어서 골라 보아.”
“아닙니다. 소자는 그저…….”
“어서요. 선물을 마다하는 사람은 없으니 분명 기쁘게 받을 것입니다. 눈여겨본 것이 있습니까?”
환한 불빛에 반사되어 더더욱 반짝이는 물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무영은 화려한 보석이 박힌 나비 모양의 머리 장식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것은 얼마입니까?”
“아이쿠, 우리 꼬마 도련님 안목도 높으시지. 어머니 선물로 딱이지요? 이게 지체 높으신 마님들은 물론이고, 치마를 두른 이들은 전부 탐내는 귀한 것이지요. 이거 딱 하나 남았습니다.”
주인장은 지나치게 수다스러웠다.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황제의 시선에 무영은 쑥스러운 듯 얼른 제 전낭 주머니를 열었다. 저자에 들를지도 모른다는 말에 황후께서 직접 내어주신 비자금이었다. 꽃사탕을 쪽쪽 빨며 슬그머니 다가온 정연이 동그란 눈을 깜박였다.
“현님 그건 몹니까?”
주인장이 말한 값을 치르고 작은 상자에 곱게 싸인 것을 받아 들자마자, 정연이 찰거머리처럼 붙었다. 무영은 귀찮은 기색도 없이 어미에게 줄 머리 장식을 소중하게 갈무리했다. 황제의 그림자가 나서서 제가 보관하겠다고 말했으나, 아이는 고요히 머리를 가로저었다.
“자, 이것은 큰 도련님 것이오.”
주인장이 불쑥 내민 것은 조금 전 가게에서 받은 것과 비슷한 커다란 꽃이었다. 이번에는 은은한 벌꿀 색의 꽃을 저도 모르게 받아 든 기하는 은은하게 밀려오는 꽃향기에 가볍게 눈을 감았다.
“이것은 왜 주십니까?”
“도련님 안목이 뛰어나신 것 같아 드리는 것입니다. 색이 곱지 않습니까?”
“고맙습니다.”
안목이 뛰어난 것과 그게 대체 무슨 상관이라고. 기하는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낯선 사내에게 꽃을 받은 것에 혹여나 황제의 기분이 상했을까 봐 다시 한 번 눈치를 살폈다. 딱히 잘못한 것도 없는데 자꾸만 그의 기분을 살피게 하는 주인장들이 원망스러워지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어째, 평소에는 조그마한 일에도 불같은 투기를 보여주던 그가 지나치게 잠잠했다. 설마 지금쯤 북성을 향해 전력으로 질주하고 있을 연진 공주를 태운 배를 떠올리고 계신 것인가. 괜찮다고 하셔놓고 저렇게 알 수 없는 표정을 내내 짓고 계시다니.
“저, 나리…….”
황제에게 한 걸음 다가간 기하는 그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몇 차례 점포에 들어갈 때마다 유난히 기하에게만 꽃을 내미는 주인장들의 표정은 한결같았다. 이것이 본래 길령 상인들의 오래된 관습인 건가 싶어 주위를 돌아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가게 곳곳에 꽃이 보여도 그것을 직접 들고 다니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잘 어울리는구나.”
황제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기하의 옷깃을 어루만지며 어깨 아래로 늘어뜨린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는 손길은 퍽 기분 좋아 보였다. 뭔가 모를 생각에 잠기려던 차에 짧은 숨을 내지른 기하는 더는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아무렴 어떤가, 이것에 큰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고.
“행복하십시오.”
황제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걷던 기하를 지나치던 여인 둘이 환하게 미소하며 그리 말했다. 진하게 밀려오는 꽃향기에 취할 것만 같아, 가슴에 모아둔 꽃을 조금 아래로 내리는 순간이었다. 갑작스러운 그녀들의 인사에 어리둥절해 바라보니, 여인들은 이미 저만치 멀어지고 있었다.
“어찌 그러느냐?”
“아닙니다. 모르는 사람인데, 인사가 이상한 듯하여…….”
어깨를 나란히 하며 다섯 걸음 앞서 걷는 아이들은 잔뜩 신이 났다. 이번엔 또 무엇을 발견했는지 후다닥 달려가는 정연을 따라 무영이 무어라 소리치며 뛰기 시작했다.
“내내 행복하십시오.”
또다. 곁을 지나치던 한 쌍의 연인이 기하를 향해 그리 인사했다.
“마마! 이것 보세요!”
멀어지는 연인들을 불러 뜻을 물으려던 기하는 우렁찬 정연의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불이 환하게 밝혀진 천막 안으로 들어가 쪼그려 앉은 정연과 무영의 동그란 뒤통수가 보였다.
“무얼 하고 있습니까?”
“이것 보십시오! 물꼬기, 물꼬기가 어여쁩니다!”
커다란 통 안엔 아이의 손바닥보다 작은 물고기가 유유히 헤엄치고 있었다. 주인장은 연신 부채질하며 조그마한 의자에 걸터앉아 아이들을 향해 웃었다. 무영과 정연뿐 아니라 저자 아이들은 모두 그곳에 모인 것만 같았다.
손을 번쩍 든 정연이 제가 해보겠다며 발을 동동 굴렀다. 작은 뜰채로 관상용 물고기를 직접 잡아보는 것인 듯했다.
“나야, 내가 할 꼬야!”
“정연, 그것을 집까지 데려가진 못합니다.”
“그치마안, 이거 너무 예쁜데……. 연못에 놓고 키우고 싶어요.”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모두 죽을 것입니다. 그래도 좋습니까?”
“태인에게 보여주고 싶은데…….”
금세 시무룩해지는 정연이 귀여워 아이의 곁에 무릎을 굽히며 앉으니, 인심 좋은 주인장은 어른 손바닥만 한 뜰채를 내밀었다.
“재미삼아 그냥 낚아 보시오, 작은 도련님.”
“안 대여. 마마가 사면 안 된다고 했어.”
“잡아 보신 후에 다시 놓아주시면 됩니다.”
길령 상인들은 모두 인심이 후했다. 덕분에 금세 풀어진 정연의 표정에 막 고맙다는 인사를 하려 할 때였다.
“내내 행복하십시오. 좋은 날이 계속될 것입니다.”
수염이 덥수룩한 주인장이 내민 꽃은 은은한 푸른색이었다. 기하는 얼결에 그것을 받아 들면서도 쉬이 입술을 열지 못했다. 이상했다. 이것은 분명 이상한 일이었다.
“저기, 이 꽃은…….”
“색이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푸른 꽃은 행복의 의미가 더 깊습니다. 하여 애초에 이것 딱 하나만 들여놓았지요.”
사내는 손에 들린 꽃을 한들한들 움직였다. 기하는 저도 모르게 손을 내밀어 그것을 받아 들고 품 안 가득한 꽃에 얼굴을 묻었다. 아찔할 만큼 깊은 향기가 매혹적으로 빛났다. 모두 다른 색깔의 꽃이 한데 어우러지니 지나치게 화사했다.
“이리 귀여운 도련님들과 함께이니, 내내 행복하시겠습니다.”
행복하십시오. 내내 행복하십시오.
가깝게 지나치는 사람들은 모두 기하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 아는 얼굴 하나 없는 낯선 땅에서 받는 인사에 마음이 시큰 울릴 만큼, 그들은 모두 입을 모아 그의 행복을 빌었다.
“랑랑?”
울 것 같은 얼굴로 꽃다발에 얼굴을 묻은 기하의 어깨를 끌어안은 황제는 그의 귓가에 입술을 대고 나지막한 음성으로 이름을 불렀다.
“어찌 그래?”
“륜…….”
“왜 울 것 같은 표정이냐고 물었다.”
다정한 목소리엔 웃음기가 가득했다. 마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그랬다. 기하는 슬쩍 고개를 들고 황제의 얼굴을 제대로 바라봤다. 만연한 미소처럼, 반짝이는 달빛이 그의 주위를 환하게 빛냈다.
행복이 지나쳤다. 마치 지금 느끼는 이 감정이 제 것이 아닌 것처럼. 그대로 있으면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아, 기하는 천천히 숨을 골랐다.
“그대 설마 우는 것은 아니겠지?”
황제의 장난스러운 목소리만 아니었더라면, 울음을 터트렸을지도 모른다. 애써 씩씩하게 고개를 내저으며 ‘울긴 왜 웁니까?’ 하고 반문하자, 뺨을 쓰다듬는 손길은 다정하기만 하다.
“마마! 마마! 이것 보십시오!”
기하는 우렁찬 정연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가, 놀라서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아이는 품 안 가득 색색의 화려한 꽃을 안고 뒤뚱뒤뚱 뛰었다. 정연뿐만이 아니었다. 만개한 꽃처럼 미소 짓는 무영의 품에도 꽃이 한가득이었다.
“마마, 이거 예쁘지요? 이거 마마 드릴 것입니다. 그리고, 어, 모지? 현님, 아까 승지가 모라고 했지요?”
“그리 연습해놓고 벌써 잊으면 어떡해?”
나름대로 목소리를 낮춰 속삭인다고 해도 아이들의 목청이 워낙 큰 탓에, 기하는 터지는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들고 있기도 버거워 보일 만큼 많은 꽃을 불쑥 내민 무영이 기하를 향해 고개 숙였다.
“내내 행복하십시오.”
“맞아 그거였어! 마마! 내내 핸복하십시오!”
“핸복이 아니라 행복이다.”
몇 번이나 연습했는데 그거 하나 제대로 못 하느냐고 타박하며 정연의 머리를 쥐어박은 무영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기하의 표정에 제 뺨을 긁적이다가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근데 마마는 언제나 핸복하시다고 하셨는데요? 그치요, 아바, 아니 아버지?”
황제의 옷깃을 붙잡고 천연덕스럽게 묻는 정연을 바라보던 기하는 천천히 무릎을 구부렸다. 그래, 행복하다. 아이의 말대로, 지금 이것이 마치 제 몫이 아닌 것 같아 불안할 정도로.
“근데 왜 갑자기 이런 거 합니까? 마마는 꽃도 좋아하시지만, 맛있는 걸 더 좋아하시는데요?”
“마마랑 아버지랑 혼인하시는 거라고 아까 승지가 말했잖아.”
“현님도 참. 마마랑 아버지는 이미 혼인하셨거든요? 현님은 똑똑하시면서 왜 그걸 모르십니까? 아버지랑 마마랑 혼인하셨으니 마마가 원우 마마가 되신 것이 아닙니까?”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어찌 마마가 네 마마냐?”
“마마께서 소제가 제일 어여쁘다고 하셨으니까 원우 마마입니다. 원우 마마께서 하늘나라 가셨으니, 지지난번부터 원우 마마십니다. 그렇지요?”
천연덕스럽게 대꾸하는 볼이 씰룩거릴 때마다 무영은 아우의 볼을 힘껏 꼬집어주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눈도 제대로 못 맞추던 것이 씩씩하게 자란 것은 좋은 일이나, 날이 갈수록 말대꾸가 심해지니 주먹이 바르르 떨릴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아니다! 어찌 마마가 네 마마냐? 마마는 우리 모두의 마마시지.”
“아닙니다! 원우 마마입니다!”
아직 기하에게 건네주지 못한 꽃다발을 바닥에 패대기치기라도 할 기세인 정연에게 다가온 승지는 난처한 표정으로 아이의 앞을 막아섰다. 이러다가 두 형제가 머리채라도 쥐어뜯으며 다툰다면, 황가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행동하라 명했음에도, 이쪽을 힐끔거리는 시선까지 오롯이 막아내기는 어려운데 소란까지 더해진다면 황제께서 야차로 변하실지도 모른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하고 싸워라, 이놈들아. 어찌 나의 랑랑을 두고 네놈들이 다퉈?”
“그것이 아니라!”
“정연, 마마는 너 혼자만의 마마가 아니다. 형님의 어머니이자 네 어머니다.”
“하지만 현님은 어머니가 계시지 않습니까?”
다른 것은 늘 나누려 하면서 이번 일은 고집을 꺾지 않으려는 듯 입을 내민 정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황제는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들놈들이 어찌나 기하를 좋아하는지, 시간이 지날수록 저것들에게 밀리는 느낌이 들어 화가 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지금도 보라지, 이걸 계획하고 준비한 사람이 누구인데 저렇게 아들놈들만 애정 가득한 눈으로 보느냔 말이다.
“정연.”
“예?”
“그동안 나를 어머니라고 생각해서 늘 그렇게 불렀던 것입니까?”
“히잇, 예! 그러니까 마마는 원우 마마입니다!”
“아니라니까!”
저러다 다투고 말지. 뭐라 말할 수 없는 감정이 밀려와 시큰한 눈물이 나올 뻔하였는데, 당장 서로 달려들 듯한 무영과 정연 때문에 기하는 웃음을 터트리고야 말았다.
품 안에 넘치도록 가득한 꽃향기는 달콤하고 매혹적이었다. 코가 얼얼할 정도로 강렬한 향에 취해 자꾸만 아득한 생각이 밀려왔다.
“자, 이리 오세요.”
기하가 품 안의 꽃을 바닥으로 내려두고 양팔을 벌리자마자, 두 아이가 단번에 안겨온다. 그 와중에도 투닥거리는 아이들의 등을 다독이던 손이 잦아들었다. 바보처럼, 자꾸만 눈물이 나려 하는 탓이었다.
“마마랑 아바마마랑 현님이랑 함께 나오니까 정말정말 좋습니다. 영이도 같이 나왔으면 좋았을 텐데. 태인도요. 근데 태인은 너무 어려서 안 된다고 하셨으니까 내년에도 또 오면 안 됩니까?”
“그래요. 내년에도 또 옵시다.”
“그럼 그때까지 만수무강하면 됩니까?”
잔뜩 신이 나서 발을 쾅쾅 구르다가 넘어진 정연은 어쩐 일인지 울지도 않고 씩씩하게 제 무릎을 탈탈 털었다. 혹여나 울음을 터트릴까 봐 놀라서 뛰어온 승지의 손을 붙잡고 ‘나 내년에도 또 올 거다?’ 하고 자랑하는 얼굴이 천연덕스러웠다.
사람들의 시선이 한데 모였다. 기하는 아직 제 품에 안겨있는 무영의 어린 어깨를 다정하게 다독였다. 아이는 쉬이 제 생각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러나 알고 있다. 지금 이 아이가 제게 하고 싶은 수많은 말들을.
“마마.”
아직 상처받은 마음을 오롯이 가지고 있는 아이가 서러울 때도 있었다. 홀로 아득한 상념에 잠겨 있는 아이의 이름을 쉬이 부르지 못한 적도 있었다. 어쩌면 그것은, 영원히 치유될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곁에 계셔주셔서, 너무나 감사합니다. 미천한 소자를 받아주셔서, 소자를 가족으로 받아주셔서…….”
“무영.”
이 아이만 생각하면, 늘 가슴 한구석이 아팠다. 소중한 누군가를 잃는다는 것은 사람으로 태어나 누구나 한 번쯤은 겪어봄 직한 일일 테지만, 아이는 아직 너무도 작고 어렸다. 제 감정을 스스로 제어할 수 없을 만큼 연약했다.
어린 시절, 상처로 얼룩진 마음을 누구에게도 위로받지 못했던 나날을 떠올리며 기하는 빙긋이 미소 지었다. 아마, 이제 서기하는 마음의 상처를 모두 씻어낸 모양이다.
“나의 아들이 되어 주어서, 고맙습니다.”
“…….”
“이렇게 훌륭하게 자라주어, 고맙습니다.”
“…마마, 소자는…….”
“내내 이렇게 함께해 주세요. 우리 함께 행복하게 삽시다.”
결국 울음을 터트린 무영을 보고 달려온 정연은, 제 형의 눈물에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발을 동동 굴렀다. 작은 손으로 연신 얼굴을 쓰다듬으며 울지 말라고 위로하는 모습이 어찌나 다정하던지, 앞으로 아이들의 우애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좋은 날에 울면 아니 된다.”
기하는 황제의 핀잔 섞인 목소리에 그렁그렁하던 눈물을 급하게 닦았다. 말씀을 하셔도 꼭 저렇게 사납게 하신다니까.
“아들놈들만 보고 있으니 부아가 치밀어.”
무슨 농담을 저렇게 서늘한 표정으로 하시는지, 슬그머니 황제의 손을 붙잡은 기하는 그러지 말라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렇게 보니 정연의 말도 안 되는 투정은 황제를 오롯이 닮은 것이구나. 태인의 고집스러움이나, 무영의 진중한 성품 또한. 아들 셋이 퍽 골고루 아버지를 닮았다고 생각하면서 기하는 품으로 갈무리한 꽃의 반을 그에게 내밀었다.
“뭐냐, 이게.”
“함께 행복하셔야지요. 신첩만 홀로 행복하면 되겠습니까?”
“그것은 신부의 행복을 비는 꽃이다. 그대가 행복하면 짐은 그것으로 되었어.”
황제는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기하의 손목을 잡아 등 뒤에서부터 끌어안았다. 기하는 숨이 막힐 정도로 강렬하게 끌어안은 황제 덕에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것이 부끄러워 스르르 고개를 숙였다. 아무렇지 않은 척 태연을 가장하였으나, 이따금 부딪치는 사람들의 시선에 민망해지는 것은 순간이었다.
“저, 폐하. 이것 좀 잠시…….”
“시작해라.”
황제의 한마디에 승지가 손을 들었다. 순간 저자의 모든 이들이 일제히 발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펑. 펑.
“우와! 우와! 현님! 하늘에 꽃이 뜹니다!”
커다란 불꽃이 하늘 위에 그림을 그렸다. 사람들은 저마다 그것을 올려다보며, 이렇게 큰 불꽃을 보다니 올해는 운이 좋다며 즐거워했다.
바닷바람의 비릿하고 짠 내음이 코끝을 찔렀다. 그들의 소란함도, 아찔할 정도로 강렬한 축하 꽃의 향도 아름다운 배경에 불과했다. 지금 제게 의미 있는 것은 신이 난 강아지처럼 뛰어다니는 황자들과 자신을 든든하게 안아주는 황제뿐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불꽃일 거라던 청국 상인 놈 말을 믿는 게 아니었어.”
몇 번 보진 않았지만, 불꽃은 너무도 아름다웠다.
“더 크고 화려하게 하라 분명히 일렀거늘.”
일부러 툴툴거리는 황제의 성정을 아는 터라 기하는 조용히 웃음을 삼켰다. 늘 제게 좋은 것만 해주려는 그 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폐하.”
“어찌 또 폐하야.”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 것일까요?”
사는 것은 늘 외로움이었다. 시리기만 한 겨울이었다. 울지 못했다. 울음이 터지면 쉬이 그칠 수 없을 것 같아서. 그러면 너무 아플 것 같아서. 이제 와 돌이켜보니, 그것을 어찌 견뎠나 싶다. 이렇게 따뜻한데, 이렇게 행복한데. 모든 것이 꿈만 같아서, 혹시나 이것이 꿈이라면 영원히 깨지 않았으면 좋겠다.
“제 몫이 아닌 것만 같습니다. 가끔 겁이 납니다. 너무 세게 쥐고 있다가 그것이 혹여 부서지기라도 하면 어찌해야 할지…….”
“쓸데없는 생각이다.”
“그리 말씀하실 줄 알았습니다. 바보 같지요?”
“그래. 이것은 모두 네 것이야. 어떤 것이라도 네가 원하면 줄 것이다. 짐이 싫어졌다는 것만 아니면 무엇이든 다 들어주마.”
기하는 그저 웃기만 했다. 황제가 하는 말은 꿈조차 꿔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감히 제가 그를 싫어하다니. 너무도 간절해서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조차 없던 꿈이었던 그를, 어떻게 싫어할 수가 있단 말인가.
륜, 그거 아십니까? 이따금 잠에서 깨어, 잠든 륜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을요. 제게 륜은 그런 분입니다. 다른 것은 필요치 않습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신첩이 바라는 것은 딱 하나뿐이었습니다.
“륜의 마음뿐입니다.”
“응?”
“신첩이 바라는 것은, 오직 그것뿐입니다.”
펑. 퍼엉.
화려한 불꽃에 빠져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황자들을 힐끗 쳐다본 황제가 임승지에게 눈짓했다. 황제는 기하를 끌어안았던 팔을 풀고, 그의 손에 깍지를 꼈다. 주변을 호위하던 황제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게 움직이며 그들을 에워쌌다.
“랑랑, 아이들이…….”
“저자의 밤거리는 저 아이들에게 흔한 구경거리가 아니지. 조금 더 보게 해라.”
“하지만…….”
“승지가 함께 있을 테니 걱정할 필요 없어.”
황제는 천천히 걸었다. 적당히 거리를 두고 호위하는 그림자를 곁눈질하던 기하는 팔에 안은 꽃들이 조금씩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이 아쉬워 자꾸만 뒤를 돌아봤다.
“꽃이…….”
“또 사주마.”
일부러 농담처럼 건네는 황제의 말에도 기하는 아쉬움에 뒤를 돌아보았다. 만나는 이들이 제 행복을 빌어주며 건넨 것이었다. 꽃이 떨어진다 하여 행복이 꺾이는 것은 아니었으나, 마음이 그랬다.
사람의 욕심이란 끝이 없는 것이라더니, 이토록 넘치게 행복한데도 아쉬웠다. 멀어지는 저자도, 화려한 불꽃도, 어여쁜 꽃도. 황궁으로 돌아가면 한동안 볼 수 없는 것들이라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궁으로 돌아가면 이곳이 가끔 생각날 것 같습니다.”
“그대는 짐의 생각만 하도록 해.”
짓궂은 황제의 음성을 따라 웃으며 걸으니, 어느덧 객잔 앞에 도착했다. 시끌벅적한 저자가 코앞인데도 사람들이 모두 불꽃놀이를 보러 빠져나간 탓에, 객잔은 무척 고요했다.
“곤하구나.”
“하면 얼른 들어가 쉬세요.”
황제와 손을 잡고 걷는 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그런데 어쩐지 자꾸만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기하는 황제의 눈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겨우 손에 쥔 꽃 서너 송이를 만지작거리기만 했다.
“기하야.”
“예?”
순간 스르르 기하의 손을 놓은 황제가 한쪽 무릎을 꿇고 그를 올려다봤다.
“폐하, 어찌 이러십니까?”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목소리가 제법 컸으나, 기하는 그것조차 자각하지 못했다. 천하의 주인께서 무릎을 꿇고 저를 올려다보는 것이 황송해서 손이 덜덜 떨릴 지경이었다. 그는 놀란 얼굴로 제 손을 붙잡아오는 황제의 팔을 잡아당겼다.
“어서 일어나십시오, 어서요.”
언젠가 저자에서 사서 나눠 낀 가락지를 쓰다듬으며 황제는 기하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기하는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얼굴로 연신 그의 팔을 끌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모든 것이 멈춘 것 같았다. 멀리서 불꽃이 팡팡 터지면 사람들이 함성이 울렸다. 그뿐이었다. 주위는 지나치게 고요했고, 보이지 않게 움직이던 황제의 그림자들과 사정을 아는 모든 이들이 바닥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렸다. 감히 황제보다 높은 위치에서 그를 바라볼 수 없는 탓이었다.
“평생, 그대를 이렇게 바라보겠다.”
울고 싶었다. 민망함과 송구스러움을 뿌옇게 흐려놓을 만큼 그는 멋진 미소를 지어 주었다. 그래서였다. 자꾸만 눈가가 시큰거려 손끝이 저릿했다.
“평생, 이렇게 그대를 아껴주겠다.”
지금도 충분하다. 그는 언제나, 과분할 정도로 넘치는 애정을 주고 있으니까.
“평생, 그대를 외롭게 하지 않겠다.”
“…….”
“그러니 기하야, 나의 신부가 되어다오.”
너를 미워하고, 너를 원망하고, 너를 혼자이게 했던 시간을 모두 지우면, 잊어서는 아니 되는 다른 모든 것들을 덮어야 할 것 같아 차마 그럴 수 없는 마음을 이해해 주어라. 혼자 아팠을 너를 생각하면, 혼자 서러웠을 너를 떠올리면 나는 네게 한없이 죄인이 된다.
기하야, 그런 마음으로 너를 사모하지는 않을 것이다. 고운 마음만 담아, 반짝이는 마음만 담아 네게 줄 것이다.
“대답해야지, 계속 울기만 할 것이냐?”
“예, 륜. 예.”
울며 웃으며 너는 내게 안긴다. 너의 애틋함이, 너의 그리움이, 너의 열정과 너의 진실과 너의 상냥한 마음이, 결국엔 우리 모두를 평온하게 하는구나.
기하야, 나의 랑랑.
황제의 품으로 뛰어든 기하는 손바닥에 꽃물이 들 정도로 손을 그러쥐었다.
익숙하게 자신을 끌어안는 단단한 황제의 어깨에 축복을. 늘 따뜻하게 바라봐주는 다정한 두 눈에 찬사를. 행복만 전해주는 애틋한 입술에 달콤함을. 그대에게 행복을.
“자꾸 울면 아니 된다?”
“륜이 자꾸 울리십니다. 사내는 눈물이 헤퍼서는 아니 된다고…….”
“괜찮다. 그대는 보통 사내가 아니라 하나뿐인 나의 꽃이니, 흠뻑 젖는 것도 나쁘지 않겠구나. 짐은 네 젖은 모습을 꽤 좋아하거든.”
“그만하십시오.”
붉게 달아올라 대꾸도 하지 못하는 기하를 바라보며 황제는 유쾌하게 웃었다. 다정하게 입술을 맞대면 기하의 울음은 금세 잦아든다.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는 그림자와 객잔 안의 백성들을 너그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황제는 벌떡 일어나 기하를 품에 안았다.
“륜, 사람들이 봅니다. 내려주십시오.”
“본래 첫날밤엔 신랑이 이렇게 신부를 안고 신혼 방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들었다만?”
성큼성큼 계단을 밟는 황제의 발소리에도 그림자는 꿈쩍하지 않았다. 얼마나 미리 단단히 주의를 시켰는지, 아무리 황제의 말이라도 그와 떨어지는 법이 없던 그림자가 멀어지자, 이제는 돌이킬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 즐거우십니까?”
“그럼, 즐겁다마다. 그대는 아니 그러냐?”
“신첩은 늘 폐하 곁에 있으면 즐겁습니다. 그림자를 떼어 놓으시는 건 위험하니…….”
“그대, 아이들 곁에 있더니 잔소리가 늘었어. 천방지축으로 날뛰더니 이제는 제법 총비 태도 나고.”
“놀리십니까?”
“그럴 리가. 놀리는 건 젖은 그대를 보고 하는 게 제맛이니 아껴두어야지.”
활짝 열린 문 너머로 화려한 금사와 붉은 천으로 뒤덮인 침상이 보였다. 꽃잎을 늘어놓은 탓에 아찔한 향이 밀려오는 곳으로 한 걸음 발을 내디딘 황제가 기하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기하야.”
“예.”
“이제 달콤한 꽃잠 자자.”
가장 좋은 것만 주겠다. 가장 행복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겠다. 가장 귀한 사람으로, 모두의 애정을 받는 그런 사람으로. 나를 이렇게 만든 것은 너이니, 너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되겠다.
매일매일, 가장 아름답고 찬란한 날을 너에게 선물하겠다.
“예, 륜.”
지금 이 순간이 바로, 내게는 그날이란다.
활짝 열린 창문 사이로 화려한 불꽃이 터졌다.
수환 제국 만세. 황제 폐하 만세. 귀비마마 만세.
백성들의 외침이 아득하게 멀어졌다. 맞닿은 입술 새로 번지는 것은 달콤한 행복, 찬란한 나날이었다.
수환(秀奐)제국의 31대 황제이자, 제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도자로 꼽히는 시영(施領)제는 재위 32년 동안 무수히 많은 업적을 남겼다.
특히 백성을 무척 사랑하여 민생 안전에 만전을 기하면서도 관료들에게도 인색하지 않았던 그는, 가진 자와 그렇지 않은 자들을 고루 보듬을 줄 아는 보기 드문 성군이었다.
타고난 능변가(能辯家)에 세기를 아우를 미남이었던 황제는 알려진 바와 같이 지고지순한 사내였다. 그는 유일한 총비였던 귀비 서 씨를 귀애하며, 평생을 함께했다.
귀인 서 씨는 정이 많고 올곧은 성품으로 백성은 물론 각국의 사신들에게도 황제 못지않은 인기를 누렸는데, 그를 가장 좋아하고 따른 것은 다름 아닌 황제의 세 아들들이었다.
몸이 약해 세상을 먼저 떠난 둘째 시헌군 외에 장자 무영, 삼남 정연, 태자 태인을 손수 키우고 교육하였으며, 평생을 황자들의 따뜻한 부모이자 다정한 스승의 자리에서 보살핌과 가르침을 주던 귀비 서 씨는 시영제의 하야(下野) 이후에야 여유를 찾았다고 한다.
황성 주변, 유난히 복숭아나무가 크게 자란 집의 대문은 언제나 열려 있었다. 그들은 매일같이 찾아오는 아들 내외나 대소신료들을 피해 1년의 팔 할은 오붓하게 여행을 다니며, 평생을 평온하고 행복하게 살았다고 전해진다.
― 화양연화(花樣年華)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