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3장 연길(涓吉)(7권) (44/49)

43장 연길(涓吉)

“마마, 귀비마마.”

“응?”

“또 조신 것입니까? 그러지 마시고 차라리 오수에 드시라니까요.”

기하는 현 상궁의 잔소리를 대충 흘려들으며 하품을 쩍 했다. 마음 같아선 당장 그러고 싶어도 조금 있으면 황자들이 건너올 시간이었다.

요즘 한창 활 쏘는 재미가 들린 정연군은 보기와 달리 몸이 날쌔서 어찌나 사방팔방 뛰어다니는지, 아이와 시간을 보내면 하루가 금세 지나갔다.

“이건 황후마마께서 직접 관리하셔야 하는 것 아닌가?”

산더미처럼 쌓인 교지를 대충 흘겨보며, 기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황후께서는 다음 해 봄, 황도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천명사로 거처를 옮기시기로 예정되었다. 하여 내명부의 크고 작은 일들이 하나둘씩 기하의 소관으로 넘어오고 있었는데, 골치 아픈 문제가 한둘이 아니라 요즘은 교지 읽는 시간이 몇 배는 늘었다.

“황후마마께서 모두 귀비마마께 일임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복잡하고 어렵다 하여 방치하시면 일이 점점 쌓일 것입니다.”

“차라리 전장에서 검을 휘두르는 것이 낫겠네.”

“폐하께서 들으시면 격노하실 것입니다.”

전장에서는 이렇게 곁에서 줄줄 잔소리할 사람도 없고, 머리 쓰는 것보다는 몸을 쓰는 게 뒤탈도 없고 체질에 맞는데. 놓을 자리도 없이 쌓인 문서를 보자니, 머리도 아프고, 배도 아프고, 잠도 쏟아진다.

“혼인이라도 얼른 마무리되면 좋겠네.”

요즘 가장 신경 쓰이는 일은 코앞으로 다가온 연진 공주와 서엽의 혼인이었다. 내명부의 수장이신 황후께서 직접 주관하셔야 함이 옳으나, 그녀의 건강이 좋지 못해 그것은 오롯이 기하 몫이 되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두 사람의 혼인이니 더더욱 면밀하게 신경 써야 하는데, 제국의 경사는 그 규모가 지나치게 컸다.

“사흘 후면 각국에서 사신들이 도착할 것입니다.”

“각 처소는 준비를 끝냈다지?”

“예. 부족함이 없도록 신경 쓰라 단단히 명을 내렸습니다.”

나라의 중차대한 일이 생기면, 그 틈에 각지에서 사신들이 찾아온다. 말이 좋아 축하 사절단이지, 기회를 잡아 어떻게든 제 나라 이익을 챙기려 드는 시퍼런 속을 가진 이들을 황제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하나뿐인 누이의 혼인을 대충 치를 수는 없는 노릇이라, 요즘 황제 또한 몹시 예민한 상태였다.

무엇보다 그는 혼인한 누이가 3년간 제국을 떠나 북성에서 지내는 것을 몹시 못마땅해 했다. 북성의 법도가 그렇다며 아내 된 도리를 지키겠다는 누이에게 화도 내지 못하고, 틈만 나면 서엽을 불러 달달 볶아대는 통에 기하마저 질린 상태였다.

“우리 귀염둥이들은 언제 오는지 살펴보게.”

“황자 저하들께서 오셔도, 그것은 마저 처리하셔야 합니다.”

한쪽에 쌓인 문서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기하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끙끙 앓는 소리를 냈다. 처음에는 하기 싫어 미뤄두면 밤늦은 시간에 황제께서 이것저것을 직접 봐주시더니, 요즘엔 ‘너 알아서 해라.’라고만 말씀하시니 이렇게 야속할 때가 없었다.

“현 상궁, 나 머리도 아픈 것 같고…….”

“정연군 저하께도 안 통하실 꾀병은 부리지 마십시오.”

냉정한 현 상궁 표정에 기하는 입술만 삐죽거렸다. 냉정하다. 정말 너무하다.

“그래도 이번에 북왕 내외분께서 직접 방문하신다니, 기분이 한결 좋으시지요?”

“응, 그럼. 아, 그럼 나도 이참에 형님 따라 북성 가서 몇 달 지내다 올까.”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말씀을 하십니까?”

“깜짝이야. 왜 갑자기 소리를 지르고 그러나?”

“가시긴 어딜 가십니까? 마마께서 북성에 가시다니요? 행여나 그런 말씀 입에 올리지 마십시오. 폐하께서 아시면 무슨 사달이 나실지 알고…….”

“내가 뭘 안다는 거냐?”

수틀을 쥐고 잔소리를 쏟아내던 현 상궁은 벌컥 열린 문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황제의 목소리에 놀라 바닥에 풀썩 엎드렸다. 설마 지금 다 들으신 것은 아니겠지?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만세, 만세, 만만세.”

“무슨 소릴 했기에 그리 벌벌 떨어? 짐의 흉이라도 봤느냐?”

“이 시각에 어쩐 일이십니까?”

황제에게 얼른 다가가 그의 팔을 붙잡은 기하는 천진하게 웃었다. 황제는 마른 침을 꿀꺽 삼키는 현 상궁을 곁눈질하다, 녹을 듯 웃어주는 기하의 얼굴을 마주 보며 빙긋이 미소했다.

“원우 놈이 활 쏘는 걸 보러 오라고 어제 내내 성화지 않았느냐. 마침 시간이 나서 들렀다. 뭘 하고 있었어?”

“혼인에 관련된 일이 한둘이 아닙니다.”

“또 저녁 내내 머리가 아프다고 엄살을 부리겠구나.”

“엄살이 아닙니다. 정말로 머리가 지끈거려 견딜 수가 없단 말입니다.”

“알았다, 오냐. 어제처럼 목덜미를 주물러 주면 되느냐?”

어느새 저만치 문서를 밀어둔 기하는 흐트러진 황제의 매무새를 단정하게 어루만지며, 그와 함께 처소 밖으로 나섰다.

볕이 좋다. 멀리, 나란히 걸어오던 무영군과 정연군이 황제와 기하를 보고 환하게 웃으며 뛰기 시작했다.

“넘어집니다, 황자. 천천히 오세요.”

꽃 냄새가 넘실대는 따뜻한 바람이 잔잔히 불어온다.

제 형의 손을 놓고 뒤뚱거리며 달려오던 정연군은 불현듯 뭔가가 떠오른 듯, 허리를 바르게 펴고 배 위에 손을 올려 공손히 머리를 숙였다. 그 모습이 어찌나 귀엽던지, 기하는 입을 가리고 애써 웃음을 참았다. 금세 뒤따라온 무영군이 예를 갖추자, 황제의 심드렁한 얼굴에 불만이 가득 찼다.

“정연, 넌 또 무슨 짓거리냐?”

“아바마마, 소자는 금일부터 어질고 바른 황자가 되어 아우에게 귀감이 될 것입니다.”

“너, 귀감이 무슨 뜻인지나 알고서 하는 말이냐?”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꼭 다문 정연군은 눈을 끔뻑거리며, 황제의 등 너머에 선 승지를 힐끗거렸다. 요즘 툭하면 승지와 붙어 다니며 온갖 사고를 치는 정연을 내려다보던 황제는 귀찮은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손가락을 까닥거리며 상선을 불렀다.

그는 몹시도 기민한 몸짓으로 미리 준비해 둔 활을 황자들에게 바쳤다. 제국에서 가장 솜씨 좋은 장인이 오랜 시간에 걸쳐 만든 것으로, 황제께서 특별히 준비하신 것이었다.

“우와! 아바마마, 이거 소자 선물입니까? 현님이랑 소자랑 하나씩 주십니까?”

발을 동동 구르며 금세 천방지축으로 뛰는 정연의 모습에 황제는 ‘그럼 그렇지.’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제법 활을 자유자재로 가지고 논다 하니, 적당한 것을 하사해도 괜찮지 않겠느냐는 청은, 물론 기하가 했던 것이었다.

“아바마마, 성은이 망극합니다! 마마, 이것 보십시오. 소자한테 잘 어울립니까? 멋있지요? 승지 이것 봐라, 아바마마 선물이다? 어때? 나 멋있지?”

“이놈아, 그리 뛰다 걸려서 넘어진다.”

“히히, 아바마마. 소자 멋있습니까?”

토실토실 살만 오른 백돼지가 멋있기는. 기하의 눈짓에 차마 그 말을 꺼내지 못한 황제는 대충 고개를 주억거리며 정연군의 손을 잡았다.

기분이 최고조에 오른 것인지 나풀나풀 움직이는 걸음걸이에는 채신머리가 하나 없다. 조금 전에 뭐라고 했더라. 아우에게 귀감이 되어? 그래도 전에는 귀여운 맛이 있던 놈이 나이 한 살 더 먹더니 말만 늘어서, 하는 말마다 골치가 아플 지경이었다. 아무래도 승지 놈이랑 어울리는 걸 당장에 금해야겠다.

태화당 후원에 임시로 마련된 국궁장엔 오후의 볕이 진하게 녹아들었다. 황자들을 배려해 적당한 거리에 놓인 과녁을 대충 휘둘러 쳐다본 황제는 귀찮음이 역력한 얼굴로 커다란 나무 그늘을 찾았다.

일찌감치 그늘에 자리를 만든 지밀에게 명을 내려 향긋한 냉차를 내오게 했더니, 그제야 제대로 된 휴식을 취하는 것만 같았다.

“시작해 봐라.”

“얼굴 좀 펴세요. 정연이 실망합니다.”

제 몸뚱이만 한 활을 잡고 자세를 취하는 정연군의 뒷모습을 대견하게 바라보면서 기하는 고요하게 속삭였다. 대답 대신 냉차를 내밀자 고개를 저어 사양하는 모습에 어쩐지 심술이 나려 했다. 더위에 지쳐 발밑에 자리 잡은 영의 등을 쓰다듬으며, 황제는 나른함에 잠시 눈을 감았다.

“무영은 어찌 그리 서 있느냐. 아우 곁에 가 서야지.”

기껏 자리를 마련해 두었는데 제 곁으론 오지도 않던 기하가 퉁명스러운 황제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한데 어찌 표정이 그래? 제가 뭘 잘못한 것처럼 다가오는 얼굴엔 불만이 가득했다.

“시온이 며칠 전 수련하다가 손을 다쳤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새 잊으셨습니까?”

“그랬더냐.”

기억이 나는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다.

“정말 어찌 이리 무심하십니까? 검에 베여 하마터면 큰일 날 뻔하지 않았습니까?”

그래, 기억이 나는 듯하다. 오랜만에 조강도 나가지 않고 느긋하게 수라를 받으려는데, 갑자기 고해 온 소식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침소를 뛰쳐나가던 기하의 뒷모습이 떠오르자 절로 이가 갈렸다.

누가 보면 전장에 나가 손이라도 잘린 줄 알았을 거다. 겨우 살갗이 조금 벌어진 것을 가지고 벌벌 떨면서 눈물을 그렁그렁 매다는 기하 때문에, 오히려 무영이 난처해서 어쩔 줄 몰라 했다지.

“사내가 그깟 검에 좀 베이는 게 무슨 대수라고. 이제 몇 년 후면 2~3년은 군영에 몸담아야 하는데, 미리 수련해야지.”

“예? 군영이라니요?”

탕.

제법 힘을 실어 시위를 당기는 정연의 자세가 그럴싸했다. 흐뭇한 얼굴로 아들을 바라보던 황제는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기하의 이상한 표정에 ‘왜?’ 하고 반문했다.

“지금 군영이라고 하셨습니까? 게다가 2~3년이요?”

“제국의 사내는 나이가 차면 모두 군영에 간다. 그대도 다녀와 놓고 뭘 새삼스레 물어?”

“무영군이 보통 사내입니까? 제국의 황자이자, 폐하의 장자입니다. 황자는 본디 장교들과 두어 달 군영을 순방하는 것이 관례입니다.”

“황자라 해서 특혜를 줄 생각은 없다. 짐 또한 황자 시절 군영에서 직접 병사들과 수련하며 전장을 누볐어.”

제국의 사내는 모두 열다섯이 넘으면 군영에서 2~3년을 보냈다. 훌륭하고 강인한 사내로 자라기 위한 과정으로 여겨, 모두가 그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특히 요즘과 같이 평화로운 시절에는 전장을 누비는 것이 아니니, 군영 생활은 딱히 고되지 않다고 보고받았다.

“안 됩니다.”

“뭐가 안 된단 말이야?”

“절대로 황자들은 못 보냅니다. 그곳이 얼마나 험한 곳인데 저 어린 것들을 보냅니까?”

“누가 지금 당장 보낸다고 했더냐? 아직 한참 남은 일을 어찌 벌써 걱정해?”

“안 됩니다. 못 보냅니다. 장가가기 전까지는, 절대로 아무 데도 못 갑니다.”

기하는 난처하게 웃는 무영군을 끌어안으며 보란 듯이 중얼거렸다. 쯧쯧, 혀를 차며 한숨을 내쉬어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시간이 가면 갈수록 황자들에게 지나친 애정을 퍼부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는 말은 아마 이럴 때 쓰이는 거겠지. 정연이야 워낙에 품에 안고 예뻐했다 치자. 아직 정연의 나이 겨우 여섯이니, 어리광 부리는 것도 적당히 귀여워하며 넘어갈 수 있다. 한데, 이제는 훌쩍 자란 무영에게 날이 갈수록 정성을 쏟으니, 보고 있으면 한숨이 나올 정도였다.

“그 얘기는 나중에 하자.”

대답도 하지 않고 무영만 끌어안고 있는 꼴에 부아가 치밀었다. 살랑살랑 웃어줄 때는 언제고, 아들놈들이 오자마자 안색을 바꿔 제게는 눈길도 안 주다니.

“비, 이쪽으로 와서 앉아.”

“우리 정연군이 궁술에 재능 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저놈 재능은 남보다 많이 먹는 데 탁월하지. 짐은 저 나이에 눈 감고도 활을 쐈다.”

심드렁하게 중얼거리며 다리를 쭉 뻗으려는데, 어째 꼬장꼬장한 시선이 날아든다. 애정을 듬뿍 담아 미소를 지어줘도 시원찮거늘, 어찌 하나뿐인 랑랑을 저런 눈으로 쳐다봐?

“현 상궁, 무영군이 앉을 자리를 마련해 주게.”

“예, 마마.”

흉흉한 시선을 내던지면서 한마디도 하지 않는 황제의 옆자리에 앉은 기하는 가만히 턱을 괴고 제 곁에 서 있는 무영군의 등을 바라봤다. 시간이 지날수록 황제와 닮아가는 무영군은 서 있는 뒷모습까지도 그와 똑같았다.

꼭 황제를 그대로 축소해 놓은 듯한 모습에 절로 눈이 가고 어여뻐서, 늘 곁에서 떼어놓고 싶지 않았다. 이제는 제법 환하게 웃을 줄도 알고, 마음속의 이야기를 겨우 털어놓게 됐는데 보내긴 어딜 보낸단 말인가? 몇 년 후, 혼례를 치르면 곁에 두고 싶어도 황궁 밖에서 지내게 되어 자주 못 볼 텐데.

“무영, 냉차를 마시겠습니까?”

“소자는 괜찮사옵니다. 마마께서 더위를 많이 타시니 어서 드십시오.”

“새콤한 게 맛이 좋으니, 함께 나눠 마십시다.”

누가 보면 둘이 사이좋은 부자지간이라고 하겠다. 물론 기하와 무영이 서로 애틋하게 구는 것은 흡족한 일이었으나, 뭐든 지나치면 모자람만 못 하다고 했다. 더욱이 기하는 이따금 홀린 듯 무영을 빤히 쳐다보곤 했는데, 그 시선이란 것에 때론 못 견딜 만큼 속이 쓰렸다.

“폐하?”

표정을 너무 굳히고 있었나 보다. 걱정이 배어든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기하의 얼굴에 황제는 그제야 찌푸렸던 눈가를 폈다. 쓸데없는 생각이 과했다.

“어디 불편하십니까?”

“아니다.”

“올해는 작년보다 날이 더 더운 것 같습니다.”

찻잔을 쥐고 있어 차가워진 손으로 목덜미를 어루만져주는 기하를 마주하자, 옹졸하게 메마르던 마음이 슬그머니 풀어지는 것 같다. 조금 전에 했던 생각은 절대로 입 밖으로 꺼내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며 낭창한 허리를 끌어안자, 자연스럽게 어깨에 머리를 기대오는 그에게선 좋은 향이 났다.

“신첩은 요즘, 매일이 편안하고 행복합니다.”

꿈결에 흘리는 말처럼 기하는 고요히 입술을 달싹였다. 가까이 있는 무영군조차 들을 수 없을 만큼 작은, 겨우 황제에게 들릴 법한 속삭임은 귀를 바짝 기울여야만 뜻을 헤아릴 수 있었다.

“사모하는 랑랑께서 곁에 계시고, 황자들이 저리 어여쁘게 자라고, 백성들은 폐하의 은혜에 풍요롭게 지내니 더는 바랄 것이 없습니다.”

“겨우 그런 것으로 그대의 행복을 말하지 마. 매일매일 그대를 더 기쁘게 해줄 일이 넘치게 많을 테니까.”

“신첩은 이대로도 충분합니다.”

“아니다. 아직 멀었어.”

짓궂은 황제의 대답에 기하는 소리를 죽이며 웃었다.

탕.

경쾌하게 날아간 화살이 과녁 중앙에 박히자, 제자리에서 방방 뛰던 정연군이 신나서 달려온다. 그러다 이내 철퍼덕 넘어지고 마는 아우가 걱정된 무영이 부리나케 뛰는 모습을 바라보며, 황제는 아득하게 웃어 보였다.

돌아보면 보이는 것은 넘치는 행복뿐이다. 하루하루 살아갈 나날이, 매일이 기쁨인 지금이 꿈인 것만 같아서 이제는 정녕 행복하게 웃을 수 있을 것만 같다. 찬란하게 빛나는 태양 아래, 누구보다 뜨겁게 보낼 나날 또한.

* * *

해가 뜨기 전부터 분주하게 움직이던 태화당 상궁 나인들은 준비를 모두 마치고 제자리에 섰다. 기하는, 일찌감치 예복으로 갈아입은 현 상궁이 가지고 온 화려한 옷에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바라봤다.

“마마, 서두르셔야 합니다. 곧 식이 진행될 것입니다.”

쾌청한 날씨에 어울리는 화려한 비단은 금사로 뒤덮여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그래서 문제였다. 신랑 신부는 예법대로 붉은 비단으로 치장하니 그렇다 치더라도, 황금은 황제 부부의 고유색이다. 금사라니, 대체 이런 발칙한 치장을 하고, 어찌 만인의 앞에 설 수 있단 말인가.

그렇잖아도 일부에선 귀비 서 씨가 황제의 총애를 등에 업고 황후를 밀어내어 그 자리에 앉으려 한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고 있다는데, 이런 꼴로 나가면 입방아 찧기 좋아하는 이들의 좋은 먹잇감이 될 것이 빤했다.

“본래 입으려던 옷을 가지고 오게. 이것은 잘 갈무리해서 넣어두고.”

“황제 폐하께서 하사하신 예복입니다.”

“폐하께는 내가 잘 말씀 드리겠네. 지난번 태인군의 초도(初度)에 입었던 예복은 잘 손질해 두었지?”

“금일은 반드시 이 예복을 입고 단장하시라고 폐하께서 명하셨습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어서 채비를 서두르셔야 합니다.”

무슨 언질을 어떻게 들었는지, 현 상궁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목소리를 높이고 화를 내봤자, 그녀의 입장만 난처해질 것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기하는 마른 한숨을 내쉬며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었다. 도대체 폐하께서는 어째서 자꾸 이런 일을 벌이신단 말인가.

“귀비마마.”

“내 어지러워 그러니, 잠시 쉬어야겠네.”

대소신료들과 그들의 가까운 가족, 각국의 사신들까지 모인 자리다. 그런 자리에 이런 옷을 입고 나갈 수는 없다. 이 꼴로 나가면 분명 황후마마께 누가 될 것이다.

“아직 준비가 덜 되었더냐?”

몇 번이나 부탁해도 황제는 기별도 하지 않고 직접 처소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아랫것들 보기 민망하니 제발 그러지 말라고 말해도 못 들은 척하는 황제의 어깨 너머로, 단아한 미소를 지으며 들어서는 황후의 얼굴이 보였다.

“황후마마, 어찌 예까지 납시셨습니까.”

“이제 짐은 보이지도 않더냐? 어찌 황후만 아는 척을 해?”

이럴 때만 얄미운 저 말에 어떻게든 대꾸해주고 싶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으니 원통할 따름이다. 슬쩍 황제를 째려보던 기하는 예를 갖춰 황후를 향해 머리를 숙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대가 쉬이 움직일 것 같지 않아서 내 직접 왔네. 몇 달을 내내 고생하며 준비한 혼인인데, 그대가 참석하지 않으면 분명 공주마마와 서 중랑이 서운해 하지 않겠나.”

“마마, 신첩은 그저…….”

“그대 피부색이 고와 연회복이 무척 잘 어울리겠네. 그렇지 않습니까, 폐하?”

빙긋이 미소하는 황후를 바라보던 기하는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그는 현명한 여인이었고, 다정한 국모였다. 누가 뭐라 해도 부족함 없고, 넘치지도 않는 정숙한 여인이기도 했다.

누구보다 황후 자리에 잘 어울리는 그녀를 부족한 제가 밀어내는 것은 아닐까 하여, 기하는 넘치는 행복 속에서 늘 마음 한끝이 불편했다.

“이것 봐, 짐이 혼자 왔더라면 절대로 이런 표정은 짓지 않았을 거다. 이 옷을 입고는 절대로 혼례식에 참석하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으며 심술을 부려댔겠지. 귀비가 그런 자다. 하니 짐이 늘 질 수밖에 없지.”

“워낙에 성품이 곧아 그런 것이 아닙니까. 보나마나 신첩의 마음이 상할까 저어되어 그러는 것이겠지요.”

“그러니 걱정이 지나치다는 거다. 그깟 것들이 입방아 좀 찧는 게 어떻다고, 그냥 무시하고 흘려들으면 될 것을. 청렴함도 지나치면 화가 된다. 성품이 너무 곧으면 부러진단 말이다.”

이것은 핀잔인지 칭찬인지, 도무지 알 길 없는 황제의 퉁명스러운 말에 곁에 서 있던 임승지는 한숨을 푹푹 내쉬며 열 오른 얼굴을 식혔다. 이럴 때는 아는 척도 하지 않고, 얌전히 장승처럼 서 있는 것이 최선이었다.

괜히 입을 잘못 놀렸다가는 몇 시진이나 기하의 칭찬을 줄줄 들어야 하니까. 듣기 좋은 말도 한두 번이지, 같은 말을 몇 번이나 듣다 보면 절로 한숨이 나와 급기야 황제의 심기를 거스르게 할 거다.

“귀비, 어서 채비하게. 폐하께서 기다리시지 않나.”

“하오니, 마마. 이 옷은 도저히…….”

기하는 화려한 금사가 수놓인 연회복을 손에 쥐며 말끝을 흐렸다. 한 걸음 앞으로 다가온 황제가 가볍게 혀를 차며, 그의 턱을 손가락으로 들어 올렸다.

“그대는 늘 짐의 곁에 설 것이다. 누가 뭐래도 짐의 옆자리는 그대 것이니, 그런 표정 지을 것 없어. 어서 갈아입어라. 더 하면 이 좋은 날에 화를 낼지도 몰라.”

장난스럽게 콧잔등을 찡그리며 뺨을 톡톡 어루만진 황제의 손길이 멀어진다. 가볍게 숨을 참았던 기하는 그제야 입술을 다물고 황제와 황후에게서 등을 돌렸다. 허리까지 길게 늘어뜨린 기하의 검은 머리가 보기 좋게 찰랑거렸다.

“신첩은 바깥에서 기다릴 테니 귀비와 함께 나오십시오, 폐하.”

“괜찮겠소?”

“예. 곧 황자들이 이곳으로 올 테니, 그 편이 좋을 듯합니다.”

“그럼 곧 나갈 테니 그늘서 쉬고 있도록 해.”

“예.”

그녀는 예전보다 한층 편안해 보였다. 늘 가슴속에 담아 두었던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탓이었다. 무탈하게 자라나는 황태자 또한 그녀의 큰 기쁨이었으나, 묻어두었던 그림자를 꺼내 남은 생 동안 마음껏 그리워하며 보낼 기대감에, 처음으로 이곳에서 보낼 시간이 쓸쓸하지 않다고 말했다.

“아직 멀었느냐?”

홀로 처소 안을 서성이던 황제는 부질없이 같은 말을 반복했다. 시간이 촉박한 것은 아니었으나, 해가 뜨기 전부터 기분이 이상했다. 하나뿐인 누이를 먼 곳으로 시집보내는 오라비의 마음이란, 어떤 것으로도 쉬이 표현할 수 없었다.

상처뿐이던 누이가 좋은 배필을 만난 것은 기쁜 일이었으나, 한동안 그녀를 볼 수 없다는 생각을 하자 착잡함이 밀려왔다.

“기하야, 아직 멀었느냐고 묻지…….”

“지나치게 화려해서 신첩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입술을 댓 발이나 내밀고 모습을 드러낸 기하의 얼굴엔 심술이 가득했다. 수려한 목선이 그대로 드러난 옷은 낭창한 기하의 선을 훌륭하게 드러냈다. 제국의 복식도 아닌 것이, 그렇다고 북성의 것도 아닌 것이, 현 상궁 바느질 솜씨가 대단하다 하더니 과연 소문대로였다.

한 올 한 올 화려하게 수놓인 옷깃을 어루만지며 조심스럽게 발을 내딛던 기하는 물끄러미 저를 바라보는 황제의 시선에 얼른 고개를 숙였다.

“그리 이상합니까?”

“어여쁘다.”

“신첩을 위로하실 요량이시라면…….”

“정이가 보면 심술을 부리겠다. 신부보다 더 어여쁘면 어쩌자는 것이냐?”

“폐하 눈에만 그럴 것이니 행여나 그런 말씀 입에 올리지 마십시오. 남세스럽습니다.”

“하긴, 그대는 입는 것보다 벗는 게 훨씬 더 어여쁘다만.”

놀라 붉어진 얼굴로 얼른 손을 들어 황제의 입을 틀어막은 기하는 붉은 입술을 바르르 떨었다. 원망 가득한 시선을 진득하게 받고 있으려니, 이대로 그를 쓰러트리고 싶은 마음이 무럭무럭 샘솟는다.

“정녕 이러실 것입니까?”

“알았다, 알았어.”

그제야 입을 가린 손을 내려놓는 표정은 쉬이 풀어질 줄 몰랐다. 골려주려 한 말이 아닌데도 늘 이런 반응이니, 보고 있으면 지나치게 귀여워 그대로 꼭 품에 안고만 싶었다.

“어여쁘다. 진심이다.”

빙긋이 미소하며 기하에게 손을 내민 황제는 열이 올라 달아오른 그의 이마에 살며시 입을 맞췄다. 반짝거리는 금사보다 훨씬 아름다운 두 눈에 담긴 열기를 못 본 척하며 황제는 그의 귓가에 다시 입을 맞췄다.

“얼른 해가 졌으면 좋겠다.”

“식은 이제 곧 시작입니다.”

황제의 손을 붙잡으며 다른 손으로 옷자락을 들친 기하가 조심스럽게 한 걸음을 내디뎠다. 화려한 예복은 지나치게 무거워 걸음걸음이 조심스럽기만 했다.

“다디단 꽃잠을 자고 싶을 만큼, 그대가 어여뻐서 그래.”

“폐하.”

“연회가 끝나면 이 예복은 짐이 손수 벗겨주마. 초야보다 달콤한 꽃잠을 선물로 주겠다.”

금세 얼굴이 달아오른 기하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처소 문이 활짝 열렸다. 다정하게 미소하는 황후의 곁에서는 푸른 예복을 입고 나란히 서 있는 세 황자가 빛나게 웃고 있었다.

눈부시도록 화창한 날이었다. 햇살이 어찌나 찬란하게 내리쬐는지,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과 더불어 만개한 꽃향기가 밀려오니 이곳이 마치 지상낙원과 같다며 사람들은 입을 모았다. 아름다운 음악이 흘렀다.

정갈하게 늘어선 대소신료와 그들의 가족, 먼 길을 마다치 않고 달려온 사신들을 둘러보며 기하는 저도 모르게 땀이 밴 주먹을 그러쥐었다. 모든 것이 차질 없이 준비되었으니 이제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현 상궁의 언질에도 기하는 쉬이 긴장을 떨쳐내지 못했다.

까다롭고 복잡한 예식 절차에 아이들은 슬슬 지겨워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한참이 지나서야 맞절을 나눈 신랑 신부의 얼굴은 지나치게 상반되었다. 서엽은 당장에라도 쓰러질 듯이 하얗게 질려 긴장 상태였고, 연진 공주는 해사하게 웃으며 행복함을 마음껏 누렸다.

황제는 그것이 못내 불만이었다. 사내놈이 저리 기백 없이 벌벌 떠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당장 며칠 후면 황궁을 떠날 누이가 세상 다 가진 듯 행복하게만 웃는 모습에 섭섭함을 느꼈다.

“폐하.”

귓가에 들리는 기하의 다정한 목소리만 아니었더라면, 당장에 이 혼인을 파하라고 소리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리 용안을 찌푸리고 계시니 마치 화가 나신 것 같습니다.”

“흐음.”

“공주께서 서운해하실 것입니다. 기쁘게 웃어 주십시오.”

그제야 황제는 이따금 이쪽을 힐끔거리는 연진 공주의 시선을 알아챘다. 흉흉한 기세로 서엽을 노려보고 있었더니, 미처 누이의 불안한 시선을 눈치채지 못했다.

황제는 화려한 면사로 얼굴을 가린 연진 공주를 지그시 바라보며 미소했다. 늘 외로움에 허덕이던 누이가 이제는 가장 귀하게 대접받으며 행복한 여인이 되기를 바라면서.

“그대의 노고가 많았어.”

황제는 쑥스러운 듯 미소 짓는 기하의 손을 부드럽게 다독이며 그의 손등을 어루만졌다. 긴장감에 뻣뻣하게 굳은 기하의 옆모습을 응시하면서, 황제는 숨기지 못한 연정의 시선을 진득하게 퍼부었다.

“현님, 이건 언제 끝납니까?”

“쉿, 조용히 해야지.”

“배가 고픕니다. 너무 오래 앉았더니 다리도 아픕니다.”

“조용히 하래도. 네가 소란을 떨면 아바마마와 귀비마마의 체면이 뭐가 되느냐?”

“체면이 몹니까?”

명랑한 정연군의 물음에 무영군의 얼굴이 금세 붉어졌다. 그것은 필시 무지한 아우의 말을 가까이 있는 황족들이 듣기라도 했을까 봐, 민망함에 달아오른 것이었다.

“조용히 하라지 않아? 이따 설명해 줄 것이니 배가 고파도 참고, 다리가 아파도 참아라.”

“현님은 왜 만날 참으라고 하십니까? 너무 참는 것은 좋지 않다고 마마께서도 말씀하셨는데.”

오늘따라 어찌나 대거리가 긴지, 무영군은 바드득 이를 갈며 정연을 쏘아봤다. 제 목소리가 퍽 작은 줄 아는지, 엄중한 예식에 집중하고 있던 이들이 힐끔거리는 걸 알지도 못하나 보다.

“제발 입 좀 다물어라.”

“현님은 왜 소제한테만 그러십니까? 태인에게는 다정하시면서! 아우를 차별하면 나쁜 현님입니다!”

“황자, 그리 큰 소리 내면 아니 됩니다.”

팩 토라져 등을 돌리는 정연군을 허망하게 쳐다보며, 무영은 할 말을 잃은 듯 입술을 뻐끔거렸다. 요즘 툭하면 저리 삐치고 토라지며 화를 내는 정연 때문에 무영은 번번이 제가 하지도 않은 잘못을 빌며 아우를 달래야 했다. 지금도 완전히 제게 등을 돌리고 기하의 무릎 위에 올라앉으며 뭐라고 꿍얼거리는 얄미운 뒤통수가 보인다.

억울한 마음에 씩씩거리는 무영군의 작은 손을 잡아준 것은 황제였다. 그는 근사한 눈웃음을 지으며 가볍게 머리를 가로저었다. 그제야 뾰로통한 표정을 지운 무영군은 양가 어른들께 인사하기 위해 가까이 다가오는 신랑 신부를 보며 아이처럼 밝게 웃었다.

“오라버니.”

“그래.”

나란히 선 두 사람을 바라보며 황제는 기꺼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에 따라 거대한 인파가 덩달아 일어서는 바람에, 몹시도 번잡스러운 형태가 되었다. 황제는 가볍게 손을 저어 그들의 행동을 저지했다. 지금 이 순간은 제국의 황제가 아니라, 시집가는 누이를 축복해주는 오라비가 되고 싶었다.

“잘 살아야 한다, 정아. 가장 귀한 여인이 되어라. 가장 행복한 여인이 되어라.”

공주의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 들었다. 하나 씩씩한 그녀는 끝내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기쁘고 행복한 날이니, 울고 싶지 않았다. 평생, 어깨에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살아야 할 오라비에게 몸이 불편한 제 존재가 얼마나 큰 걸림돌인지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쉬이 투정하지 않았다. 외롭고 무서워도 표현하지 못했다. 한 사내의 지어미가 되어 황궁을 떠나는 이 순간에도, 그녀는 온통 오라비 걱정뿐이었다.

“소녀 걱정은 마십시오. 어질고 현명한 아내가 되어, 행복하게 잘 살겠습니다.”

“그럼. 그래야지. 과연 우리 씩씩한 정이답구나.”

“강녕하셔야 합니다.”

“그래.”

황제는 다정하게 그녀의 작은 등을 다독였다. 날개가 부러져 쉬이 날지 못했던 그녀의 삶 또한 이제는 무지갯빛 행복으로 가득하겠지.

“평생 공주마마를 아껴드리겠습니다.”

“당연히 그래야지. 공주 눈에 근심이 어리면 내가 어찌하는지는 두고 보면 알 것이다.”

심드렁한 황제의 말에 뾰족한 가시가 솟았다. 저도 모르게 숨을 헙 참은 서엽은 땀을 뻘뻘 흘리며 황제가 내민 손을 마주 잡았다. 그 모습이 어찌나 가엾던지 슬그머니 나선 기하가 황제의 소매를 붙잡았다. 그제야 형형한 시선을 거둔 황제는 기하를 돌아보며, 녹아내릴 듯한 미소를 얼굴 가득 그렸다.

연회가 시작되었다. 가장 중앙에 앉은 신랑 신부는 긴장감을 잠시 거두고 허기를 달래는 중이었다. 화사한 음악과 향기로운 술에 취해 덩실덩실 춤을 추는 이들도 보였다.

아름다운 무희들이 노련하게 움직이며 흥을 돋웠고, 맛있는 음식에 혼을 빼앗긴 정연군을 타박하는 무영군의 쓴소리도 간간이 들렸다. 황제는 그 모든 것을 너그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술잔을 기울였다.

일찍이 피로감을 느낀 황후는 먼저 처소로 돌아갔으나, 긴장감으로 녹초가 된 기하는 차마 자리를 뜨지 못한 상태였다. 평소라면 적당히 일어났을 황제는 날이 날인지라 끝까지 자리를 지키려 했다.

물론 오랜만에 일가친척이 모인 자리에서 듣는 기하의 어릴 적 얘기 또한 흥미를 돋우는 것이었다.

“마마께서 어릴 때 얼마나 순하셨습니까?”

“다섯 살 이전까진 그러셨지요. 허구한 날 나무며 성벽을 타고 다니셔서 큰일 날 뻔한 적이 어디 한두 번이었습니까?”

“하여 해마다 팔이며 다리가 부러지셨지요.”

저마다 한마디씩 거드는 친척들 사이에서 기하는 난감한 듯 눈동자를 굴렸다. 북성은 척박한 땅이기에 남은 왕족들은 부쩍 사이가 좋았다. 그들만이 가진 끈끈한 연대감은 혹여 북성을 멀리 떠나 산다 해도, 쉬이 사그라지지 않는 것이었다.

오랜만에 마주한 혈육들은 황제가 들으라는 듯 서엽을 향한 칭찬을 연신 퍼부어 대더니, 슬그머니 기하의 옛일을 꺼내며 저마다 한마디씩 거들기 시작했다.

“굶주린 성 밖 아이들에게 과일을 나눠주려 하신 일이니 누가 탓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 시절은 성안의 이들도 배를 곯던 어려운 시기였음에도, 우리 마마께서 고운 마음으로 정의롭게 행동하신 것인데요.”

점점 농이 짙어지는 사람들 말을 뚝 자른 여인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그들을 돌아봤다. 일찍이 먼 무진국으로 시집가 자주 만날 수 없었던 기하의 하나뿐인 고모는 그를 유난히도 귀애했다.

작지만 물자가 풍부한 무진에서 보내온 식량이 아니었더라면, 북성의 귀족들은 몇 년간 이어지는 가뭄에 혹독한 겨울을 쉬이 보낼 수 없었으리라.

“사람은 본디 뿌리는 대로 거두는 법이 아닙니까? 조카님께서 그토록 고운 심성으로 버티셨으니, 황제 폐하께서도 그 마음을 알아보신 것이지요.”

뾰족하게 날이 선 그녀의 말투에 황제의 표정이 싸늘하게 변했다. 웃고 있었으나, 그녀의 눈에는 분명 황제를 향한 원망이 담겨 있었다.

“고운 비단으로 치장하고, 배부르게 먹고 산다 하여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 편하고 따뜻한 정을 받고 살아야 행복한 것이지요.”

“폐하께서 넘치게 아껴주십니다. 매일매일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고요하게 울리는 기하의 목소리에 언성을 높이던 이들이 일순간 입을 다물었다. 그들은 모두 먼 길을 돌고 돌아 겨우 안정을 찾았다. 절반이 찢겨나간 북성에서 누군가를 잃고 또 누군가를 그리워하며, 차마 꺼내서는 안 될 누군가를 이따금 생각하는 이들의 표정은 말로 쉬이 설명할 수 없는 것이었다.

모두 같은 마음이었다. 긴 세월을 그렇게 버티며 살았고,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며 나아갈 수 있었다. 원망과 미움 대신 희망과 간절함을 담은 마음이 이제야 조금씩 편안해졌다.

“그러셔야지요. 행복하게 사셔야지요.”

한층 누그러진 그녀를 바라보며, 기하는 황제의 단단한 손끝을 붙잡았다. 행복하다. 이제는 혀끝에 습관처럼 걸린 그 말이, 일상처럼 고요히 잦아들었다.

“하미, 하미. 꼬꼬.”

고운 분홍색 옷을 입은 아이가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양손에 먹을 것을 가득 움켜쥐고 방싯거리는 아이의 뒤를 잔뜩 심술 난 정연군이 따랐다.

“하미, 이거.”

“료, 손으로 음식을 먹으면 못쓴다고 하지 않았니? 손이 엉망이 되었구나.”

“하미, 꼬꼬.”

“그거 내 거야.”

잔뜩 화가 난 정연군을 바라보다 그 앞으로 다가간 기하가 무릎을 굽혀 아이와 눈을 맞췄다. 여기저기 널린 게 음식인데, 뭐에 그렇게 화가 난 것인지 정연의 눈가가 붉었다.

“정연, 넌 또 왜 그러느냐. 손님도 많은 자리에서 체통을 지켜야지.”

다소 심기가 불편해진 황제는 괜히 자리에서 일어나 기하의 주위를 서성였다. 감히 겁도 없이 제국의 황제에게 날을 세우는 저 여인을 경계하기 위함이었다. 아무리 그녀가 기하의 하나뿐인 고모라 할지라도 더 쓸데없는 소릴 했다가는 용서치 않으리라 생각하며, 황제는 서늘한 눈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저건 꼬마에게 소자가 준 것인데, 이 꼬마는 현님이 준줄 알고 현님한테만 고맙다고 합니다! 소자가 아껴둔 것을 준 것인데.”

빼앗긴 음식을 아쉬운 듯 바라보며 손을 닦던 아이가 불현듯 고개를 돌렸다. 순간 황제는 입을 반쯤 벌리고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서고야 말았다. 뽀얀 피부에 연분홍 비단이 지나치게 잘 어울리는 아이는 마치…….

“이게 무슨…….”

기하를 보고 까르르 웃으며 달려드는 아이의 가느다란 머리카락이 바람에 나풀거렸다. 기쁘게 아이를 안아 들며 뺨에 입을 맞춘 기하가 황제를 향해 한 걸음 다가왔다.

“료, 폐하께 인사 올릴까?”

설마, 하고 사납게 눈을 부라리며 가빠오는 숨을 참은 황제가 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닮았다. 이건 닮아도 지나치게 닮았다. 어찌 저 작은 아이가 기하와 이리 똑같이 닮을 수 있단 말인가? 혹시나, 아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 한데, 어찌……. 이건 혹시 꿈인가?

“고모님의 손자이자, 신첩에게는 조카가 되는 아이입니다.”

“안너엉? 히힛.”

거침없이 황제에게 손을 뻗는 아이를 품으로 넘겨주면서 기하는 그에게 다가갔다.

“신첩과 너무 닮아 놀라셨습니까?”

“응? 아, 음. 뭐, 닮긴 닮은 것 같다만.”

어느덧 제 품에 안긴 작은 아이에게서는 달고 따뜻한 냄새가 났다. 얼굴 가득 웃음을 매단 기하는 물끄러미 황제를 바라보는 아이의 시선에 소리 내어 웃으며, 그의 귓가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고모님께 들으니 신첩이 어릴 때 하던 행동과 똑같아 볼수록 신기하다고 하시던데, 혹여 이 아이도 폐하를 뵙고 한눈에 반한 것은 아닐까요?”

품에 덥석 붙은 아이의 등을 가볍게 다독여준 황제가 곁에 선 그림자에게 눈짓했다. 그제야 장난 가득한 기하의 표정이 제대로 눈에 들어오자, 황제는 잠시나마 얼빠진 생각으로 가득 찼던 제 머리를 탓하며 표정을 갈무리했다.

아이를 그림자에게 넘기자 까르르 웃으며 다른 친인척에게 팔을 벌린다. 온 집안의 귀여움을 독차지하는지, 서로 아이를 품에 안아보려 다투는 이들에게서 등을 돌린 기하는 황제의 팔을 제 손을 감았다.

“해가 지겠습니다.”

“연회는 밤늦게까지 이어질 거다.”

“곤합니다.”

“오랜만에 마주한 이들과 회포를 푸는 게 낫지 않겠느냐? 북왕과도 정다운 시간을 보내지 못했지 않아.”

“차차 하면 되지요. 당장 내일 떠나실 분들도 아니고요.”

은근히 머리를 기대며 말끝을 흐리는 기하는 퍽 지친 듯 보였다. 피를 나눈 이들 앞에서도 쉬이 내비치지 않았던 진심을 제게만 보이는 것에 마음을 푼 황제는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승지를 향해 눈짓했다. 아무도 모르게 슬그머니 이 자리를 뜰 것이다. 번잡스럽게 시선을 붙잡을 생각 따위는 없다.

“으음.”

기하의 숨소리에 황제는 허겁지겁 입을 맞췄다. 그들이 완전히 침소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차례대로 처소 문이 닫혔다. 해가 떨어진 밤하늘에 팡팡 불꽃이 터졌다. 사람들의 함성이 아득히 들렸다.

초야를 위해 해가 떨어지기 전 자리를 떠야 하는 신랑 신부에게 시선이 닿을 즈음 도망치듯 자리를 뜬 황제와 기하는, 작은 가마에 몸을 숨기고 맛 좋은 술을 나눠 마셨다. 그것이 마치 어린아이들이 하는 술래잡기와도 같아서 괜스레 심장이 두근거리기까지 했다.

목덜미와 얼굴 여기저기에 입을 맞추다 다시 입술로 찾아든 황제의 입맞춤에 기꺼이 답하며, 기하는 흐릿해진 눈으로 그의 품에 매달렸다. 지나치게 화려한 옷은 무겁기도 마찬가지라, 절로 어깨가 아래로 축 늘어졌다.

웃음을 여기저기 흘리며 질척하게 숨을 나누려 드는 황제를 가볍게 밀어내고, 발갛게 물든 볼을 그의 가슴에 문질렀다.

“곤합니다.”

“고생이 많았다. 그대가 아니었다면, 이 혼례는 무사히 치르지 못했을 거야.”

“너무 긴장하고 있었나 봅니다.”

황제의 품으로 쓰러지듯 몸을 뉘이며 기하는 천연덕스럽게 웃었다. 술기운 탓인지 몸이 무거웠다. 까무룩 잠이 들 것만 같은 정신을 간신히 붙잡고 고개를 들자, 진지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황제의 얼굴이 보였다.

그는 몹시 복잡한 표정이었다. 기하는 가만히 손을 들어 황제의 뺨을 어루만졌다. 세상을 호령하는 황제께서, 누이의 혼인에 이토록 복잡해 하시다니. 그 애틋한 마음에 슬그머니 샘이 나려 했다.

“3년 후에 공주께서는 다시 제국으로 오십니다. 가까이 두시고 자주 입궁하라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물끄러미 자신을 바라보는 황제의 시선에 기하는 일부러 뾰족하게 눈을 흘겼다. 조금 전까지 열렬히 입을 맞추던 그는 어색하게 표정을 굳히며 무기력한 얼굴로 제 머리끝만 어루만지고 있었다.

“폐하.”

“잠시, 생각할 것이 있어 그런다.”

길게 늘어뜨린 기하의 머리를 천천히 어루만지며 목덜미에서부터 드러난 어깨를 쓰다듬던 황제의 손이 멈췄다. 그는 고단한 한숨을 내쉬며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기하를 얼른 끌어안았다.

자연스럽게 황제의 무릎 위로 올라앉은 기하는 애처럼 끙끙거리는 그의 등을 말없이 쓸었다. 하나뿐인 누이와 떨어지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나, 그가 이토록 심하게 마음을 쓰니 기분이 미묘해졌다.

북성이 멀기는 하나 마음먹으면 못 가볼 곳도 아니고, 제국만큼 풍요롭지는 않으니 다 같이 사람 사는 곳이다. 하물며 자신은 혼인 이후에 한 번도 북성에 가본 적이 없거늘.

“기하야.”

“예, 폐하.”

“사흘 후, 정이가 북성으로 갈 때 함께 길령까지 가야겠다.”

“그때는 사신들이 모두 황궁에 머물 것인데…….”

“그대와 황자들이 함께 배웅한다. 그리하면 정이도 외롭지 않을 테고, 또한―.”

무언가 말을 꺼내려던 황제가 입술을 다물었다. 저를 빤히 바라보는 기하의 시선에 섭섭함이 배어드는 것을 보며 픽 웃음을 터트린 황제는 그의 입술 위로 다정하게 입을 맞추었다. 말하지 않으려 해도 표정에 전부 드러나니, 이 귀여운 서기하를 어찌해야 좋을지.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차차 알게 될 거다. 그대는 다른 것에 신경 쓰지 말고, 남은 사흘간 북왕 내외와 편히 시간을 보내도록 해.”

수수께끼 같은 황제의 말에 기하는 섣불리 대답할 수 없었다. 모든 것은 그의 뜻대로 될 것이다. 감히 제국에서 황제의 말을 거스를 이는 아무도 없다. 기하는 얌전히 입술을 다물고 스르르 옷고름을 푸는 황제의 손을 붙잡았다.

“곤합니다.”

“하니 짐이 직접 해주려는 것이 아니냐, 응?”

“사내 말은 전부 믿어서는 아니 된다고…….”

“누가 그런 발칙한 소릴 하더냐?”

옷고름을 꼭 붙잡고 말하는 기하가 귀여워, 황제는 가까스로 웃음을 삼키고 물었다. 술기운에 붉어진 볼을 그대로 입에 넣어 꽉 깨물어주고 싶었다. 후궁의 자리에 오른 지가 몇 년인데, 흡사 새색시 같기만 한 기하의 입술에 연신 입을 맞추자, 서서히 힘을 빼며 기대오는 몸이 뜨끈뜨끈했다.

“사내가 색(色)을 밝히는 것은 흉이 아니라 하였는데…….”

“어디서 그런 소리를 듣고 다녀? 응? 누구냐, 감히 나의 비에게 그런 말을 흘리는 자가.”

“신첩은 정숙한 후궁이어야 하온데, 사내의 몸인지라 자꾸 색에 기대하게 되고…….”

“그것은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구나.”

능숙하게 옷고름을 푸는 황제의 손은 거침없었다. 겹겹이 매듭지어진 예복은 고름을 풀어 헤치는 데만도 긴 시간이 소요되었다.

“폐하…….”

“쉿. 초야보다 달콤한 꽃잠을 선물로 준다지 않았어?”

희게 드러난 기하의 어깨에 황제의 입술이 내려앉았다. 달콤한 살결을 입안에 넣고 빨자, 나직한 신음이 새어 나왔다. 처음에만 부끄러워할 뿐이지 몸이 달아오르면 더할 나위 없이 어여쁘게 굴 정인을 떠올리며 기쁘게 입술을 옮기던 황제의 몸이 힘없이 뒤로 밀려났다. 의아함이 머리를 스치기도 전, 황제를 향한 것은 부루퉁한 기하의 시선이었다.

“비? 어찌 그러느냐?”

“어느 계집에게 달콤한 초야를 선물하셨습니까?”

“응?”

멍해진 황제를 사납게 쳐다보던 기하는 그대로 고개를 돌리고 그의 어깨를 밀어냈다. 무거운 예복을 기어코 추스르는 손길이 어찌나 매섭던지, 멍해진 황제는 그저 입술만 뻐끔거려야 했다.

“그것이, 말이 그렇다는 것이지. 본디 초야란…….”

“초야는 잊었습니다. 폐하께서 그러라고 하셨습니다.”

“안다, 알다마다.”

흐트러진 옷고름은 그대로인데, 어찌 이리 야박하게 등을 돌리고 앉았는지. 목덜미까지 붉어진 기하의 어깨를 다정하게 다독이며 눈치를 살핀 황제는 또다시 제 발등을 콱 찍는 지난날의 잘못에 긴 한숨을 내쉬었다.

“기하야.”

“…….”

“랑랑.”

“…….”

“얼굴 좀 보여다오. 내 잘못했다. 실언하였어. 시간이 많이 흘렀어도 그대에겐 상처일진대, 짐이 실없이 농을 했다.”

“그것 때문만은 아닙니다.”

“하면 어찌 이러느냐, 응? 어서 말해보아라. 숨넘어가겠다.”

끝없는 애정을 받는 연진 공주가 부러워서라고는 차마 입을 열 수 없었다. 넘치는 애정을 받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샘이 나서 서운했다는 말을 어찌 할 수 있단 말인가.

분명 그리 말하면 황제께서는 파안대소하며 기꺼워하실 것이다. 더더욱 넘치는 애정으로 저를 보듬어주실 테지. 그러니 말하지 않을 것이다. 과분한 애정에 몸 둘 바를 몰라 하며 속으로는 더한 것을 바라는 못난 후궁이라고 제 입으로 떠드는 바보 같은 짓은, 절대로 절대로 하지 않을 것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