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장 부(父)
“볕이 참 좋습니다.”
오랜만에 산뜻한 바람이 불었다. 수라를 받고 뛰놀던 두 황자가 오수에 든 틈에 후원으로 나온 기하와 무영군은 나란히 걸으며 바람을 맞았다.
“예. 그래도 여름엔 해가 쨍쨍해야 곡식이 잘 자라니, 백성들을 위해서는 비가 조금만 왔으면 좋겠습니다.”
이제 곧 장마가 시작될 것이다. 보름에서 한 달여간 쉬지 않고 비를 퍼붓는 제국의 여름은 지나치게 변덕스러웠다. 하여 수도의 백성들은 한 해 농사를 망치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고원이나 길령, 문정에서 백성들에게 풀 구휼미(救恤米)를 실은 장대한 행렬이 이어진다. 선대로부터 이어지는 애민(愛民) 정신은 황제를 향한 백성들의 신망과 충심을 더더욱 두텁게 했다.
“우리 황자가 백성을 생각하는 마음이 깊습니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지 않습니까?”
“당연한 일을 당연하게 하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답니다. 훌륭합니다.”
기하는 고개를 갸웃하는 무영군을 바라보다 소리 내어 웃었다. 순수한 아이는 당연한 일을 어찌 칭찬하느냐는 듯한 표정이었으나, 그는 더 긴 말을 붙이지 않았다.
“새로운 처소는 어떻습니까? 마음에 듭니까?”
“예, 소박하고 아름다워 마음이 편합니다. 어마마마께서도 좋아하시고요. 아, 마마께서 보내주신 것들은 모두 잘 받았습니다. 색이 고와 어마마마께서 무척 좋아하셨습니다.”
“예, 현 상궁에게 들었습니다. 내 직접 가보고 싶었으나 번잡스러움을 보탤 것 같아 자중하였습니다.”
기하는 고운 비단 몇 필을 보내고, 필요한 세간을 아낌없이 채우라 명했다. 그것은 모두 현 상궁의 언질에 의한 것이었다. 아무리 그가 마음을 써도 여인의 섬세함을 따라갈 수는 없어,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었다. 자신은 현 상궁에게 명만 내렸을 뿐 모든 것은 그녀가 알아서 한 일이라서, 무영군의 인사에 어쩐지 민망한 기분이 들었다.
“미리 신경 쓰지 못해 미안합니다.”
“아닙니다. 마마께서 소자와 어마마마를 많이 생각해 주시는 것 잘 알고 있습니다. 아무도 어마마마의 궁을 찾지 않을 때도, 늘 의원을 보내 좋은 약재를 내려주신 것 또한 상궁에게 들어 알고 있습니다.”
거듭된 고마움을 표하는 아이를 마주하자, 어쩐지 부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아이를 보면 늘 마음이 가라앉는다. 한때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을 만큼 미웠던 아이와 나란히 걷고 있는 이 순간은, 때때로 현실감이 없을 때도 있다.
아이는 아이일 뿐이라는, 잘못된 어른으로 인해 까맣게 물든 아이가 안타깝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이따금 원망스러울 때도 있었다. 그래서 미안하다. 오롯이 마음을 내어주지 못하는 옹졸한 자신으로 인해, 눈치 빠른 무영군이 혹여 상처라도 입을까 봐.
“소자의 어리석음으로 마마께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음에도 이리 마음 써주신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왜 그런 말을 합니까. 씻을 수 없는 죄라니요, 당치 않습니다. 그 일은 이미 잊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없던 일이 되지는 않습니다. 죽은 달이가 살아 돌아오지도 않을 테고, 다친 영이의 상처가 씻은 듯 낫지도 않겠지요. 소자와 영빈께서 불충한 마음으로 행했던 일 또한, 마찬가집니다.”
“무영.”
미처 생각지 못했다. 반듯한 장자의 모습을 하고 있는 아이가 이토록 무거운 마음의 짐을 지고 있을 줄이야.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무영군의 말에 기하는 난감한 듯 혀를 씹었다.
“모든 일이 없던 것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대의 말이 맞습니다. 하나, 사람은 누구나 실수하고 깨닫기를 반복합니다. 그러니 더는 그런 생각하지 마세요. 혹여 나의 시선이나 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튀어나온 원망이 그대를 아프게 한다면 그때그때 말해 주세요. 그대를 원망하지 않습니다. 그대를 미워하지도 않습니다. 그대 또한 어여쁘고, 안타깝고, 애틋한 나의 아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무릎을 굽혀 주저앉은 기하는 고개를 떨군 채 서 있는 무영군의 양쪽 손목을 단단하게 붙잡았다. 아이의 얼굴이 뽀얗게 붉어지는 것을 올려다보며, 천천히 손을 뻗어 작은 등을 끌어안고 다독였다.
너무도 작고 여린 어깨 위에 지나치게 무거운 짐을 짊어진 아이가 안타까워서, 저도 모르게 희미한 탄식이 쏟아졌다.
무영군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저 기하가 내민 손을 붙들고, 고요하게 앞을 보고 걸었다. 귀 끝까지 붉게 물들인 아이가 귀여워 기하는 연신 미소하며 천천히 태화당으로 향했다. 걸음이 늦었으나 마음이 조급하지는 않았다. 실로 오랜만의 찾은 고요함을 조금 더 오래 맛보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로.
잔잔하게 바람이 불었다. 먹구름이 드리운 하늘에선 금세 비가 쏟아질 것처럼 축축한 냄새가 밀려왔다. 여름 날씨가 이토록 얄궂다니. 어차피 처소로 돌아갈 시간이기는 한데, 스산하게 부는 바람 소리에 괜히 오붓한 시간을 방해받은 것 같아서 기하는 애먼 하늘을 얄밉게 쳐다봤다.
그때였다, 고요하던 주위가 삽시간에 소란스러워진 것은. 한 무리의 사람들이 부리나케 어디론가 달려가는 것이 보였다. 걸음을 멈추고 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기하가 신경 쓰였는지, 눈치 빠른 현 상궁은 재빨리 상전의 뜻을 알아채고 그들을 불러 세웠다.
“어찌 이리 소란한가. 감히 지엄한 법도를 거스르고 방자하게 뛰어다니는 이유를 물었네.”
근엄한 현 상궁의 물음에 서로 눈치를 살피던 무리 중 하나가 가까스로 입을 열며 납작 엎드렸다.
“소인들은 냉궁(冷宮)에 소속되었사온데, 그곳에 불미스러운 일이 생겨 자경전에 다니러 가는 길이었사옵니다.”
순간 저도 모르게 움찔하며 기하의 손을 움켜쥔 무영군은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폐서인이 된 영빈이 냉궁에 갇힌 지 벌써 한 해가 지났다. 황궁 안에서 그의 이름을 꺼내는 이는 없었다. 그의 존재는 철저하게 지워졌고, 영빈이 머물던 연호당은 사람들의 발길이 끊겨 폐허가 되었다.
겨울을 버티지 못할 것이라던 모두의 예상과는 달리, 영빈은 그럭저럭 살아가고 있었다. 이따금 자신의 상황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듯 악을 쓰며 패악을 떨다 제풀에 지쳐 쓰러지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는 바가 없었다.
“연(延) 씨는 어찌하고 있더냐.”
기하의 고요한 음성에 그들은 저마다 서로의 얼굴만 바라봤다. 폐서인의 사사로운 일은 입 밖으로 꺼내어서는 안 되는 것이 황가의 법도였다.
“괜찮으니 고하라. 문제가 생긴다면 내가 책임지마.”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이른 아침에 자해를 하여 큰일을 치를 뻔하였습니다. 상태가 위중한 것은 아니나, 최근 그런 일이 잦아 황후마마께 직접 보고를 올리고 있었습니다.”
자해라. 그의 성정이라면 충분히 예상 가능한 일이나, 그냥 지나치기엔 마음이 무거웠다. 바쁜 일정 속에서도 출입이 금지되어 있는 냉궁 주변을 이따금 서성인다는 무영군이 곁에 있기에 더더욱 그랬다.
“알았으니 그만 각자 자리로 돌아가도록 해.”
“예, 마마. 하면 소인들은 이만 물러나겠나이다.”
급하게 뒷걸음질하며 물러선 무리가 멀어져갈 때까지, 무영군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고개를 푹 숙이고 무언가 생각에 잠겨 있던 아이의 어깨가 하릴없이 늘어졌다.
괜한 것을 물었다는 자책감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던 기하가 겨우 입을 떼려는 순간이었다. 촉촉하게 젖어가는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무영군의 시선에 그는 무릎을 굽혀 아이를 올려다봤다.
“무영군.”
“이런 말씀을 올려서는 아니 되는 것을 알고 있사온데…….”
“아무래도 안 되겠습니다. 내, 그 사람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었어요. 더는 미룰 수 없는 문제라 지금 당장 냉궁으로 가고 싶은데 미안하지만, 나와 함께 가주겠습니까? 혼자 가기엔 내 조금, 마음이 무거워 그럽니다.”
갑작스러운 기하의 제안에 무영군은 입을 반쯤 벌리고 눈을 깜박였다. 목구멍이 막히고 혀가 굳어 차마 떨어지지 않던 말이었다.
“마마…, 소자는…….”
“부탁합니다. 폐하께서 크게 화내실지도 모르지만, 내가 궁금한 것은 못 참는 성미인 걸 알지 않습니까? 절대로 무영군에게 해가 되는 일은 하지 않겠습니다. 하니, 조금만 시간을 내주세요.”
“마마.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지금 하시는 말씀은…….”
보다 못한 현 상궁이 둘 사이에 끼어들다 입을 다물었다. 절절한 눈으로 무영군을 바라보던 기하의 눈빛이 순식간에 차가워졌다. 그는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으며 더는 입을 열지 말라는 무언의 압력을 보냈다. 한동안 잠잠하던 태화당이 또다시 발칵 뒤집힐 위기에 처했으나, 현 상궁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사람의 온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냉궁에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 궁 주변을 철저하게 지키던 군사들은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황제의 총비와 장자 때문에 혼비백산하며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지엄한 법도를 거스르자니 앞이 캄캄했고, 그렇다고 황제와 황후 다음가는 세력가인 그들을 막을 방도가 떠오르지 않았다. 벌벌 떠는 그들을 겨우 달랜 기하는, 모든 책임은 자신이 지겠다는 장담을 두 번이나 하고서야 냉궁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곳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욱 참담했다. 안으로 발을 들이자마자 찬바람에 손끝이 시렸다. 갖추어진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초라한 궁 안은 말만 그럴싸했지, 죄수들이 생활하는 감옥과 형편이 비슷했다. 점점 느려지는 무영군의 보폭에 발을 맞추며, 기하는 아이가 흔들리지 않도록 어깨를 단단히 붙잡았다.
“무영.”
“예, 마마.”
“괜찮겠습니까? 혹, 마음이 다치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괜찮습니다. 이렇게 마마께서 손도 잡아주시니, 소자는 든든하기만 합니다.”
빙긋이 미소하는 무영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평소에 늘 의연하기만 했던 아이가 덜덜 떠는 모습이 안타까워 몇 번이나 작은 등을 다독였다.
앞서 걷던 궁인이 스산한 길 끝에 자리한 방문을 열었을 때 보인 것은, 차고 딱딱한 바닥에 덩그러니 앉아 눈을 감고 있는 희미한 사내의 그림자였다.
울컥 치밀어 오르는 감정이 어떤 것인지 기하 자신도 알지 못했다. 막연한 분노인지, 미움인지, 그것도 아니면 빛바랜 마음의 끝에 담긴 차디찬 동정인지도 몰랐다.
언제나 오만하게 반짝이던 그의 눈동자가 천천히 열렸다. 허름한 벽에 등을 기댄 채 희미한 숨을 내쉬던 그는 마르고 약해져서 당장에라도 어떻게 될 것만 같았다. 한 발자국, 무영군이 먼저 용기 내 안으로 들어갔다.
황궁 제일가는 미인이라 불렸던 그의 입술은 거칠게 부르트고 갈라져 피딱지가 내려앉아 있었다. 그가 입술을 달싹였다. 소리는 나지 않았으나, 기하는 분명 보았다. 무영, 하고 달싹이다 이내 차디차게 웃고 마는 연 씨의 마른 입술을.
“내가 지금 꿈을 꾸는 거요? 아니면 죽다 살아난 것이 아니라 그냥 죽은 거요? 어찌 귀한 분들이 이 누추한 곳까지 걸음 하시었소?”
힐난이 가득 담긴 조소가 내뱉어졌다. 연 씨는 독살 맞은 혀를 드문드문 굴리며, 서늘한 눈으로 무영군을 바라봤다. 미움과 원망과 분노로 일그러진 눈으로, 내내 아이만 바라봤다.
“조금 마른 것 같습니다.”
“바깥은 여름이라지? 날이 더워 실성이라도 한 거요? 아, 더러운 북성은 냉궁보다 형편이 더 어렵다고 하던데, 예서 오수라도 드시려오?”
키득거리는 연 씨의 비웃음에 보다 못한 현 상궁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서려 했다. 기하는 얼른 손을 들어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냉궁 안으로 들어오기 전, 무슨 일이 있어도 나서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현 상궁은 상전의 지엄한 표정에 꼬리를 내리고 뒤로 물러나며 머리를 숙였다. 만약에 제 상전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저 요망한 혀를 놀리는 연 씨의 머리털을 죄다 뽑아 놓겠다는 흉흉한 다짐을 하면서.
“더는 무모한 짓 하지 마십시오. 그래 봤자 아무도 그댈 알아주지 않을 겁니다.”
“나도 그러려는 참이오. 오시라는 임은 소식도 없으신데, 꼴도 보기 싫은 두 사람이 동시에 나타나다니. 내 지난밤 지은 죄가 크긴 한 모양이오.”
아이는 곧 울음을 터트릴 것처럼 고개를 숙였다. 기하는 물끄러미 아이를 내려다보다 연 씨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깨달았다, 그의 마음을.
마른침을 몇 번이나 삼키며 아이를 바라보는 그 눈이 어찌나 애틋하던지, 저도 모르게 그에게 동정 어린 마음을 가질 뻔했다.
“꿈이라면 당장 깨고 싶으니, 어서 내 눈앞에서 꺼지시오. 보다시피 나는 아직도 잘 살아 있으니까. 그 잘난 동정 따윈 필요 없으니, 어서.”
싸늘한 목소리는 예전과 같았다. 무영군은 천천히 고개를 들고 눈물을 삼켰다. 한없이 다정하고 자애롭던 영빈은 제가 조그마한 잘못을 할 때마다 사납게 다그쳤다.
그런 그가 좋았다. 여느 여염집 아이처럼 호되게 야단치고, 얼마 안 가 미안하다고 품에 안아주던 그가. 그가 하는 일이 나쁜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멈출 수 없었던 까닭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제 손을 그대로 놓아버릴 것 같아서였다.
단지 그뿐이었다. 그가 웃는 모습이 좋았고, 안아주는 품이 좋았고, 나눠주는 체온이 좋았다. 그 누구도 제게 주지 않았던 모든 것이, 너무 좋아서 그랬다. 아무리 후회하고 잘못을 뉘우쳐도 지워지지 않을 일들을, 잊고 싶진 않았다. 그럼 그를 완전히 잊어버려야 하니까.
“내 무슨 말을 하는지 못 알아듣습니까? 이제는 무빈 품에 안겨서 내 말은 들을 필요도 없다는 겁니까? 무영군, 내가!”
“그대는 말을 삼가는 게 좋겠다. 여기는, 죄인인 그대가 함부로 입에 올릴 사람이 없지 않은가.”
지나치게 덤덤한 아이의 음성에 사위가 고요해졌다. 분노도 당황함도 아닌 이상한 표정이 되어버린 연 씨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무영군의 표정이 얼어붙었다.
아이는 그저 오래도록,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언제나 아름답던 그가, 거칠고 질이 낮은 하얀 무명옷을 입고 힘겹게 등을 기대고 앉은 수척한 모습을. 환하게 웃어주던 얼굴을 지우고 메마른 감정으로 뒤범벅된, 파리하게 질린 그를.
“못 본 1년 새에, 무빈이 아주 잘 가르치셨나 봅니다. 장자 대우만 해주면 누구에게든 넙죽 엎드려 비비며 잘 살겠습니다.”
“그대는 말을 삼가라. 내게 뭐라 하는 건 다 참아줄 수 있어. 하나, 폐하와 황자를 모독하는 말은 더 들어줄 수 없으니 그쯤 하고 입을 닫아.”
의연한 무영군을 보는 것조차 마음이 아프다. 비아냥대고 조소하는 연 씨를 두 눈에 담고 있는 아이의 진심 어린 시선이 가슴 아프다. 그러니, 더는 이 아이가 상처받는 일은 없어야 한다. 이제는 이 서러운 비극을 끝내야 할 때가 되지 않았던가.
“내게 함부로 명령하지 마라. 폐하를 독차지했다고 그대가 승리자가 될 줄 아나? 황자들이 그대 품에 있다고 해서 황후 자리라도 오를 수 있다고 착각하나? 천만에. 그대는 절대로 그리될 수 없어. 폐하의 연정도 언젠가는 다른 이에게 갈 것이다. 그대는 그저 더러운 북성의 피를 가진, 반역자의 자식일 뿐이다. 퉷, 더러운 이름을 입에 올렸더니 머리가 다 지끈대는군.”
바닥에 침을 뱉으며 키득거리는 연 씨의 말을 더 들어줄 수는 없었다. 길게 한숨을 내쉰 기하는 무영군의 어깨를 다독이며 아이를 달랬다. 이제 더는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무영군, 그만 돌아갑시다. 그러는 게 좋겠습니다.”
“예, 마마. 소자 역시 그리 생각했습니다.”
괜찮다는 듯 의연하게 미소하는 무영에게서 시선을 거둔 기하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어리석은 사람. 어찌 이리 제 마음을 끝까지 숨기고 모진 말만 하는지.
“마마.”
아이의 부름에 자연스럽게 무영군을 돌아본 기하는 그의 부름이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새삼 놀라며 표정을 굳혔다. 아이는 한 해 사이에 퍽 많이 자랐다. 황제를 지나치게 빼다 닮은 얼굴이 그러했고, 의연함과 큰 배포는 과연 피는 못 속인다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였다. 이제 아홉 살 여름, 아이는 또다시 훌쩍 자랄 것이다.
“딱 한 번, 마마를 원망했던 적이 있습니다. 마마께서 원하시면 아마, 소자는 무슨 일이든 했을 겁니다. 마마께서 원하시는 이 나라의 황제가 되지는 못하더라도 어질고, 현명하고, 바른 이로 훌륭하게 장성하여, 마마와 어마마마를 모시고 살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우습지도 않은 말 하지 마세요. 황태자가 아니 된 그대는, 내게 아무런 의미도 없으니까.”
“예, 그래서 더는 원망하지 못했습니다. 미천한 소자는 마마께서 원하시던 것을 결국 아무것도 해드리지 못하였으니까요.”
아이의 눈시울이 젖어갔다. 겨우 입꼬리를 말아 올린 무영군은 얼굴 가득 환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는 기억조차 나지 않았던 행복했던 그 시절이 너무도 그리워, 절로 웃음이 났다.
“건강히 잘 지내십시오. 아마, 다시는 뵙지 못할 것이니 잘 드시고, 잘 주무시고, 무탈하게 잘 계십시오.”
“지금 날 놀리는 거요? 아무것도 없는 이깟 곳에서 잘 지내라니. 그대는 정말 날이 갈수록 그대 아비를 빼닮았어.”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한 무영군이 입술을 질끈 물었다. 그는 기하의 손을 놓고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가 연 씨를 향해 큰절을 올렸다. 사위가 고요해졌다. 죄인에게 절을 올리는 것은 법도에 어긋나는 일이었으나, 감히 그 누구도 아이를 막아서지 못했다.
“갈 곳 없던 소자를 거두어주시고 키워주신 은혜… 절대로, 절대로 잊지 않겠습니다.”
“보고 있기 괴로우니 어서 가시오. 그대 말대로 다시는 보지 못할 테니…….”
눈가를 손등으로 스윽 문지르며 일어난 아이가 등을 돌렸다.
“무영. 그대도, 잘 지내오.”
천천히 내딛던 발을 멈춘 무영군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는 어떤 얼굴로 제게 마지막 인사를 하였을까.
차마 뒤를 돌아볼 수 없었는지 한동안 우두커니 서 있던 아이는, 이내 걸음을 내디뎠다. 자신의 어깨를 다독이는 기하의 손길이 없었더라면, 아마 버텨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두 사람은 소리 없이 그곳을 걸었다. 차고, 을씨년스러운 바람이 어디선가 불어왔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희미한 발소리가 두 사람을 따를 뿐이었다.
무영군이 먼저 걸음을 멈췄다. 아이는 눈물을 그친 얼굴로 땅만 쳐다보고 있었다. 한 발자국만 더 내디디면 이제 이곳으로 다시는 돌아올 수 없다.
“무영군, 잠깐만 기다려 주겠습니까?”
“어딜 가시려고요?”
“연 씨에게 할 말이 있다고 했지 않습니까. 잠깐이면 됩니다. 그러니 현 상궁과 잠시 이곳에서 기다리십시오.”
“마마, 아니 됩니다. 이곳은 죄인을 유폐한 곳인데 어찌 홀로 움직이려 하십니까.”
“하면, 여기에 황자를 홀로 두고 자네가 나를 따르는 것이 옳은가?”
“하오나…….”
“금세 다녀올 테니 어디 가지 말고 여기 있게. 황자, 절대로 혼자 움직이면 아니 됩니다.”
현 상궁의 만류에도 기하는 꼿꼿한 얼굴로 걸어 나갔다. 그 모습이 지나치게 서늘하여 더는 막아설 수 없음을 인지한 그녀는 긴 한숨을 내쉬다가, 무영군을 바라보곤 머쓱한 미소를 지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의연하게 표정을 굳히던 아이는 이내 눈물을 뚝뚝 흘리다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아 서러움을 쏟아냈다. 부모를 잃은 아이처럼, 어미를 잃은 아이처럼, 꼭 그런 모습이었다.
벌컥 열린 문소리에 엎드려 있던 연 씨가 고개를 들었다. 초연한 얼굴로 날을 세우던 조금 전의 그는 어디로 사라진 것인지 흠뻑 젖은 얼굴이 처연하기만 했다.
“이럴 거면서, 끝까지 아이에게 상처를 준 건가? 대체 그대 진심이 뭔가? 1년이 넘도록 벌을 받고 있으면서 아직도 죄를 뉘우치지 못했어?”
그는 눈물을 지우지 않았다. 얼굴이 흠뻑 젖을 정도로 울고 있던 그는 기하의 어깨 너머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아이는 어디 두고 혼자요.”
“영빈!”
“경비가 삼엄해도 이곳은 귀한 이가 함부로 돌아다닐 곳이 못 되오. 그 아이, 생각보다 겁이 많아. 의연한 척해도 겨우 아홉 살이 아니오.”
눈물로 범벅된 얼굴로, 푹 잠긴 목소리로, 그는 힘없이 중얼거렸다. 서슬 퍼런 빛이 사라진 그는 그 어느 때보다 편안해 보였다. 그것은 다행일까, 아니면 불행의 전조일까.
“내가 아무리 잘해줘도, 무영은 평생 그댈 잊지 못할 거다. 평생 그대 그림자에 짓눌려, 상처 입은 마음에 혼자 마음껏 울지도 못할 거다. 아이가 가엾지도 않나? 불쌍하지도 않아? 얼마나 용기 내 찾아온 것인데, 따뜻한 말 한마디를…….”
“독하고 모질게 살아야지. 그래야 살아지지. 그리워하며 죽어갈 바엔, 미워하고 이를 갈며 살아가는 것이 낫지.”
연 씨를 향해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가려던 기하는 문득 걸음을 멈췄다. 조금 전 그가 뱉어낸 불그스름한 침 자국이 바닥에 점점이 흩어졌다.
그는 모든 것을 잃은 사람처럼 허망하게 웃었다. 벼랑 끝에 내몰려 자칫하면 그대로 절벽 아래로 떨어질 것처럼 위태로운 모습이었다. 손을 내밀어도, 붙잡지 않을 것만 같았다. 서러워 보였고, 외로워 보였다.
“어찌 사람이 이리 매정하오.”
“실컷 이용하다 가차 없이 버릴 생각이었지. 어린 것이 어찌나 영민한지, 어찌나 예쁘게 웃던지. 못된 짓을 시키면 한참 생각하고 눈치를 보다, 싫은 내색 없이 하면서도 덜덜 떠는 배포도 높이 샀었지. …미워했고, 버리려 했고, 나와는 상관없는 아이니까.”
“그대 정말 나쁜 사람이오.”
“그래, 꼭 그렇게 말해주어야 해. 천하에 둘도 없는 악인이니, 온갖 나쁜 짓만 골라 했으니, 마음에 담아둘 필요 없다고 해줘. 너는 너무 어려서, 아무런 선택권이 없었다고. 그저, 나쁜 꿈을 꾼 것이라고. 죄책감을 느낄 이유도, 미안해할 필요도, 생각할 가치조차 없으니 다 잊어버리라고.”
“그렇게 말하면 그 아이가 잊을 것 같소? 지금도 그대 걱정에 잠도 제대로 못 이루는 저 아이가?”
사람이 어찌 이리, 저 조그만 아이의 진심을 몰라줄 수가 있나. 그저 바란 것은 따뜻한 손길뿐이었는데. 이렇게 돌아서면 어떻게 살라고. 평생 지우지 못할 상처를 주고 이제 어떻게 살라고.
“하루에 딱 세 번 생각이란 걸 한다. 저 아이를 처음 보았던 날을. 저 아이가 내가 어미인 줄 알고 날 보고 마마, 하고 웃었던 날을. 여섯 번째 탄일이었던가. 훌륭하게 장성하여, 꼭 내가 바라는 사람이 될 것이라고 다짐하던 날을. 그렇게 딱, 하루 세 번. 그러면 하루가 금세 가.”
이곳의 하루는 길기도 하고, 하염없이 짧기도 하다. 그거 알고 있나? 단 한 번도 나를 돌아봐 주시지 않던 폐하도, 그런 폐하를 내게서 앗아간 그대도, 나를 허수아비로 만들었던 서연도, 나의 욕심을 부추긴 수많은 사람도 아닌, 나는 그저 오롯이 나를 따르고 좋아해 주었던 그 아이만 생각한다.
“왜 그랬소. 그렇게 애틋하면서, 왜.”
“아비니까. 누가 뭐라 해도, 그 아이는 하나뿐인 내 아들이니까.”
“전해지지도 않는 마음으로, 어떻게 살라고.”
뚝 떨어진 눈물이 기하의 얼굴을 적셨다. 가슴이 지끈거려 견딜 수가 없었다.
기하야.
이제는 시간이 너무 흘러 희미해진 음성이, 어디선가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영빈.”
“그 아이, 부디 잘 부탁하오.”
너무 늦게 깨달아서 후회뿐이지만, 그런 마음을 품고 떠나는 지금이 나는…, 퍽 행복하다오.
일찌감치 정무를 마치고 태화당으로 향하던 황제를 맞은 것은 막 처소에서 나오던 정연군이었다. 아바마마, 하고 뒤뚱거리며 뛰어오는 어린 아들을 번쩍 안아 들자 절로 끙 소리가 났다. 이놈은 어째 날이 갈수록 이리 무거워진단 말인가?
“아바마마, 오늘은 전무가 일찍 끝나셨습니까?”
“전무가 아니라 정무가 일찍 끝났지. 벌써 수라를 들었더냐?”
“아닙니다. 소자는 자경전에 가서 아우와 맛난 것을 먹을 겁니다, 히히.”
평소에는 늘어지게 궁둥이를 붙이고 도통 제 처소로 돌아가는 법이 없던 것이, 날도 저물지 않았는데 일찍 서두른다 싶었다. 대체 이 녀석은 언제 철이 들려는지. 먹을 것만 보고 달려드는 것은 애정이 부족한 탓이라는데, 달리 누구 탓을 할 수도 없어 입이 썼다.
“그래. 적당히 먹고, 일찌감치 침수 들어라. 태인과 다투다 소란 피우지 말고, 알았느냐?”
“예, 소자가 아우를 잘 돌볼 것입니다. 한데, 마마랑 현님이랑 기분이 안 좋으십니다. 두 분이 다투셨는지, 마마랑 현님 눈이 빨갛습니다. 말씀도 아니 하시고, 웃지도 않으시고.”
입술을 삐죽 내미는 정연의 엉덩이를 다독이며 아이를 내려놓은 황제는 처소에서 우르르 몰려나오는 이들을 보며 눈가를 찌푸렸다. 저것들은 몰려다니기만 할 뿐, 상전을 제대로 보필조차 하지 않는구나. 오늘은 기필코 저것들을 단단히 단속해야겠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만세 만세 만만세.”
“빈은?”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오수에 드시어…….”
워낙에 잠이 많은 기하였으나, 그것은 아침이 다소 늦는 것뿐이다. 해가 질 이 시각에 오수라니, 혹 몸이 안 좋은 것은 아닌가 하여 급하게 처소 안으로 들어가려던 황제는 장승처럼 우두커니 서 있는 서엽을 보곤 얼굴을 확 찌푸렸다. 꼴 보기 싫은 놈 같으니라고.
“정연,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조심히 돌아가라.”
“예, 아바마마. 소자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통통한 뱃골에 두 손을 다소곳이 올리고 씨익 웃은 정연군은 어디서 배웠는지 뒷짐을 지고 능청스럽게 걷기 시작했다. 체통을 지키라는 보모상궁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아이를 보며 황제는 묵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것이 대체 커서 뭐가 되려고.
“빈이 어디 불편한 것은 아니냐.”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냉궁에 다녀오신 후에 홀로 많이 우셨습니다.”
황제의 뒤를 따르는 현 상궁의 발소리가 잦아들었다. 몇 년을 곁에서 모신 그녀조차 당황할 만큼 기하는 퍽 많이 울었다. 한참을 그리 울더니 퉁퉁 부은 눈으로 웃으며 이제 다 알겠다 말하던 그를 섣불리 위로조차 할 수 없었다.
“무영은, 괜찮아 보이더냐.”
“무영군 저하께서 마마를 많이 위로하셨습니다. 저하께서는 몹시도 의연하셨고…….”
“그랬더냐.”
“예, 폐하.”
차라리 목 놓아 우는 것이 나을 만큼, 서럽고 비통하게 참으시더이다.
차마 마지막 말을 고할 수 없던 현 상궁이 머리를 조아렸다. 어느덧 태화당 가장 안쪽에 자리한 침소에 다다른 황제는 아랫것들을 모두 물리고, 홀로 조용히 안으로 들어갔다. 눅눅한 여름 공기가 풋풋한 꽃 냄새와 한데 섞였다.
어둠이 살포시 내려앉은 침상에는 기하와 무영이 나란히 누워 있었다. 지친 듯 잠든 기하는 아이에게 팔을 내어준 채 소록소록 숨을 내쉬었다. 덥지도 않은지 꼭 붙어 잠든 두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황제는 저도 모르게 힘없이 미소하고 말았다.
“고기는 먹지 않습니까? 너비아니가 맛이 좋습니다.”
그릇 위에 찬을 직접 올려주는 기하를 바라보던 무영군은 연신 입술을 오물거렸다. 종종 태화당에서 수라를 들었으나, 그때마다 정연이나 태인이 함께였기에 기하의 관심이 오롯이 제게 쏟아진 것은 거의 처음이었다.
그것이 어색하기도 하고 쑥스럽기도 해서, 무영은 그가 놓아주는 찬을 말없이 집어 먹었다. 입이 짧아 평소에는 손을 대지 않던 어육부터, 나물이며 조리니까지. 너무 고루 먹었더니 지나치게 배가 불렀다.
“입에 맞지 않는 것은 억지로 먹을 필요 없습니다.”
“모두 맛이 좋습니다.”
“그럼 이것도…….”
“빈.”
보다 못한 황제가 기하를 부르자, 퉁퉁 부은 눈으로 돌아본다. 아이의 그릇은 바닥을 보이는데 도통 줄어들지 않은 제 식기를 힐끗 쳐다보더니, 그제야 민망한 듯 웃는 얼굴에 한숨이 터진다. 눈이 저렇게 될 때까지 울다니, 대체 저 빌어먹을 아랫것들은 뭘 하고 있었단 말인가?
“무영은 알아서 잘 먹으니, 그대나 어서 수라 들어라.”
“예. 폐하께서도 많이 드십시오.”
그 말은 수라를 처음 받을 때도 들었다. 물론 딱 그 말만 하고 오롯이 무영에게로만 박힌 시선 때문에 슬슬 짜증이 나려던 참이었다. 생각을 달리 고쳐먹어 어린 아들들에게는 절대로 투기하지 않으려 했는데, 무심한 정인은 어찌 이런 마음을 몰라준단 말인가.
“그대가 그러고 있으면 무영이 수저를 놓을 수 없지 않아.”
애초에 이리 겸상을 하도록 두지 말았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한 놈이 괜찮아지면 또 다른 놈이 불쑥 치고 올라오고, 제 앞가림도 제대로 못 하는 태인은 툭하면 저 무릎 위에 앉아 내려올 생각조차 하지 않으니, 다정하게 둘만의 시간을 보낸 것이 언제인지 정말로 까마득했다.
“신첩은 다 먹었습니다. 폐하께서도 다 드셨습니까?”
“상을 물리라.”
손을 휘휘 저으며 얼굴을 찌푸리자, 상궁들이 조용히 상을 가지고 나간다. 황제의 말없이 기하와 무영을 응시했다. 둘 다 꼴이 말이 아니었다. 기하는 그렇다 치더라도 울지 않았다던 무영 또한 눈꼬리가 붉었다.
수라를 드는 내내 생각에 잠겨 있었으나, 도무지 결론이 나지 않았다. 허락도 구하지 않고 멋대로 냉궁을 찾은 까닭을 물으며 야단을 쳐야 할지, 상처 입은 마음을 먼저 달래주어야 할지.
“아바마마, 소자는 이제 그만 처소로 돌아가겠사옵니다.”
무영군의 의젓한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황제가 입을 열기 전, 당황함으로 물든 기하는 아이에게 불쑥 손을 내밀었다. 단단하고 투박한 손. 그 손을 바라보던 무영군이 희미하게 볼을 물들이며, 무릎걸음으로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다.
“누가 뭐라는 사람 하나 없는데 어찌 벌써 돌아갑니까. 밤이 깊으면 후원에 나가 달구경 하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무작정 무영을 끌어안은 기하는 다정한 목소리로 연신 속삭였다. 그 모습이 꼭 서운함을 가득 담고 서툴게 투정하는 것만 같아서, 황제는 심드렁한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봤다.
이래서야, 꼭 꿔다놓은 보릿자루 같지 않은가. 명색이 대 수환제국의 주인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금일은 밀린 일이 많습니다. 스승님께서 내어주신 과제도 하지 않아 마음이 바쁩니다. 달구경은 다음에 아우들과 모두 함께하면 되지요.”
“무영은 일정이 너무 바쁩니다. 그러다 탈이라도 나면 어찌합니까.”
“알겠습니다. 걱정하시지 않도록 건강에 신경 쓰겠습니다. 오늘은 두 분이 오붓한 시간을 보내시는 게 좋겠습니다. 늘 아우들 때문에 다정한 시간을 못 보내시지 않으셨니까?”
한층 밝아진 무영군의 목소리에 황제의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누굴 닮아서 저리 의젓하고 생각이 깊은지, 이래서 자식만 보면 마음이 든든하다는 것이렷다.
“무영, 빈은 홀로 있을 네가 걱정돼서 그러는 것이다.”
“어찌 소자가 혼자라 하십니까?”
아이는 울지 않았다. 붉게 부어오른 눈에는 서글픔이 보이지 않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아우들과 달리, 늘 얼굴에 그늘이 있던 아이가 이제야 제 나이로 보였다. 그리고 그것은 퍽 이상한 일이기도 했다.
“소자를 이리 걱정해 주시는 아바마마와 무빈마마께서 계시지 않습니까. 소자만 보면 웃어 주시는 어마마마도 계시고, 소자 일이라면 발 벗고 나서는 든든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날마다 곁에서 귀찮을 정도로 재잘거리는 아우도 있으니 소자는 이제 괜찮습니다, 아바마마.”
더는 혼자라고 생각하지도, 외로움에 울지도 않습니다. 그저, 홀로 남겨질 소자가 걱정되어 모진 말로 스스로 상처 입은 그분이 조금 걱정일 뿐입니다.
“잊지 마라, 시온. 너는 아비의 기쁨이자 자랑이다.”
“예, 아바마마. 그 말씀, 꼭 가슴에 새기겠습니다.”
환하게 미소하는 무영군을 바라보며 기하는 또다시 눈시울을 붉혔다. 찬란한 미소가 너무도 고와, 그럴수록 마음이 짓이겨진 탓이었다.
“그만 울래도.”
“안 웁니다.”
“코는 훌쩍거리면서 울지 않긴. 어디 좀 보자.”
제게서 돌아앉은 기하의 무릎을 잡아당기며 턱을 들어 올리자, 퉁퉁 부은 눈이 황제를 향했다. 그는 저도 모르게 길게 한숨을 내쉬며 혀를 끌끌 찼다.
“사내가 어찌 그리 눈물이 헤프냐? 전에는 생전 울지 않더니, 아주 툭하면 눈물이다.”
“그래서 미우십니까?”
“밉다. 짐의 마음을 얼마나 아프게 하려고 날마다 울어?”
“날마다 울지는 않았습니다.”
입술을 반쯤 내밀고 다시 등을 돌리려는 기하의 볼멘 음성에 황제는 또다시 긴 한숨을 내쉬었다. 바쁜 정무에 얼굴을 마주할 시간도 점점 줄어드는데, 요즘은 그나마도 늘 황자들과 함께였으니 오붓한 시간을 보낸 게 정말로 까마득했다. 오랜만에 일정을 조절하여 겨우 시간을 내었더니 이리 우는 얼굴이나 보여주는 그가 야속하기만 하다.
“그대 요즘 내게 너무 무정한 것 아니냐?”
“무정하신 분은 폐하이십니다.”
“짐이?”
“아무리 바쁘셔도 아버지 노릇은 제대로 하십시오. 황자들이 자라면서 아버지의 따뜻한 정을 가슴 깊이 느껴야 한다고 그리 말씀 올렸는데, 어찌 하루 한 번 수라조차 함께 들지 않으십니까?”
“말이 어찌 그리 튀어. 그렇다고 아비 노릇을 안 한다는 거냐?”
“정연은 아직 어려 철이 없으니 뭘 해도 좋다 합니다. 한데 무영은 아니지 않습니까.”
“오늘 그대 입에선 무영 얘기만 줄줄 나온다. 또 짐을 자식에게 투기나 하는 못난 아비로 만들 셈이야?”
기하를 덥석 끌어안으며 제 무릎 위에 앉힌 황제는 고약한 마음을 짓누르며, 그의 말랑말랑한 뺨을 왁 하고 깨물었다. 아프다고 얼굴을 찌푸리며 뒤로 물러나려는 기하를 놓아주려는 마음 같은 건 애초에 없었다.
“잊지 마라, 서기하. 그대가 아이들을 어여삐 여기는 것은 보기 좋으나, 언제나 그대에겐 짐이 먼저여야 해. 아들놈들한테 그대를 빼앗길 생각 따윈 없으니, 더는 짐이 추해지지 않도록 부탁하마.”
반은 농이고, 반쯤은 진심이었다. 문제는 언제나 기하가 그런 황제의 진심을 대충 흘려듣는다는 것이겠지.
“어찌 대답이 없어?”
그래도 이전까지는 이런 말을 하면 금세 얼굴을 붉히며 ‘신첩에게는 륜뿐입니다.’를 일삼던 기하가 오늘은 어쩐 일인지 아무 말이 없다. 또 무슨 입안의 혀처럼 달곰한 말을 해줄지 내심 기대하던 황제가 막 미소하려는 순간이었다.
“폐하.”
‘륜’도 아니고 오늘은 ‘폐하’다. 하긴, 저 당돌한 정인은 제가 아쉬울 때나 이름을 불러주지. 감히 천자의 이름은 함부로 입에 올리는 것이 아니라면서, 오롯이 단둘만 있을 때도 아끼고 아껴 겨우 불러줄까 말까다.
“물론 폐하께서는 신첩의 정인이시고, 그 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분이시기에 폐하의 아드님들을 마음으로 품는 것이 당연한 책무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습니다.”
서론이 길다, 마음 불안하게.
“시간이 지나다 보니 정연은 누구보다 애틋한 아이고, 무영 또한 본심이 어여쁜 아이라 절로 마음이 갔습니다. 태인군이야 말할 것도 없고요.”
온 마음을 내어줘도 아깝지 않을, 그의 아이들을 마주하면서 단 한순간도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았다고 하면 그건 거짓이다. 바라보고 있으니 애틋해졌고, 그러다 보니 소중해졌다. 끊임없이 위로받고 함께 웃으며 그렇게 살아가니, 이제는 마치 그 아이들이 꼭 제 자식이 된 것 같았다.
“한데, 이제야 알았습니다.”
그저, 그 자체로 빛나는 아이들을 이제야 제대로 품을 수 있게 되었다. 다정한 아버지가 되었다가, 때론 엄한 어머니가 되었다가, 믿음직한 형이 되어 볼까 하다가, 막역한 친우는 어떨까도 생각했다.
이제야 깨달았다. 괴로움에 뒤덮였던 것은 자신이었다. 그리움에 젖어 홀로 아프다고 생각했던 것 또한 자신이었다. 구원받은 것도, 삶이 뒤바뀐 것도, 모두 저 자신이다.
“폐하.”
“또 무슨 말을 하려고. 그대가 그렇게 부르면 겁부터 난다.”
“부족한 신첩을 내치지 않고 곁을 주신 은혜, 마음 깊이 새겼습니다.”
“쓸데없는 소리 마라. 그대가 뭐라 해도, 네게 구원받은 것은 짐이니까.”
심술궂은 황제의 표정에 기하는 비로소 편안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모든 것이 말끔하게 걷히진 않을 것이다. 삶이 그렇듯, 또 어느 순간에 거대한 파란이 들이닥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알고 있다. 외로운 황궁에서, 우리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님을. 그것으로 충분하다. 누구에게나 꽃 피는 봄은, 언젠가는 분명 찾아올 테니까.
<화양연화> 7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