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장 위(爲)
볕이 좋다. 겨울에도 따뜻한 제국은 봄이 일찍 찾아왔고, 여름은 더더욱 빨랐다. 지금쯤이면 북성은 겨우 얼음이 녹을 시기인데, 제국은 완연한 여름이다. 소매 끝을 반쯤 걷어 올린 기하는 커다란 부채를 살랑살랑 흔들며 서책을 넘겼다.
“지루하지 않으냐?”
문득 고개를 들어 올린 말간 얼굴을 향해 미소 짓자,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인다.
지루하지 않습니다. 무척 재밌습니다.
단정한 손끝이 움직이는 것을 눈으로 읽으며, 기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올해로 열아홉이 되는 단은 또래 사내아이들보다 훨씬 마르고 작았다. 그것은 전부 한창 성장할 나이에 못 먹고 못 자며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긴 탓이었다.
황제의 은혜로 목숨을 건진, 북성의 비밀 통신병이었던 아이는 우연히 기하의 눈에 띈 후 태화당에서 허드렛일을 도우며 밥값을 하는 중이었다. 피붙이라곤 하나뿐인 아비는 술과 노름에 빠져 아이를 내내 구박하다 열 살 되던 해에 통신병으로 팔아버렸고, 그 후로는 그저 목숨이 붙어 있기에 사는 것뿐이었다.
“기특하다. 나는 글공부가 너무 싫어서 늘 게으름을 부리다 스승님께 혼났거든.”
빙긋이 미소하는 기하를 따라 웃으며 단은 얼른 서책으로 눈을 돌렸다. 조금 있으면 상전께서 낮것을 드실 시간이고, 잠시나마 고요했던 태화당은 금세 시끌벅적해질 것이다.
때때로 바쁜 정무를 뒤로하고 불쑥 찾아드는 황제는 물론이고, 늘 소란스러운 황자들과 갖은 아부를 하러 찾아오는 후궁들도 더러 있었다.
“아, 이것 좀 먹어봐라. 네게 주려고 남겨 두었는데, 깜빡 잊었어.”
부스럭거리며 무언가를 꺼내는 기하를 물끄러미 바라보자, 켜켜이 쌓아 올린 타래과가 보였다. 그것은 본디 황실에서도 귀하신 분들만 입에 댈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런 음식을 함부로 먹을 수는 없었기에, 단은 그저 침만 꼴깍 삼키며 기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요즘 정연군이 부쩍 주전부리를 입에 대려고 하지 않아. 어디서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모르겠다만, 먹지 않으려고 애쓰는데 도와주어야 할 것 아니냐. 자, 어서 먹어 봐. 정연이 남겨서가 아니라 널 주려고 따로 챙겨두었다. 양이 많으니 먹고 남으면 처소로 가져가도 된다.”
하지만 마마, 이것은 너무도 귀한 것이고.
“본래 좋은 것은 나누는 법이란다. 어서 먹어라.”
단은 기하가 내미는 타래과를 받아 입에 넣으며 상념에 잠겼다. 8년 동안 소년병으로 생활하면서 인간보다 못한 대우를 숱하게 받았다. 그래서 삶은 모두 그런 것인 줄로만 알았다.
언제 죽더라도 이상하지 않은 삶, 당장 죽어 없어져도 그 누구도 슬퍼하지 않는 삶. 그런 삶만 살다 보니 1년째 이곳에 머물면서도, 이런 따뜻함은 제 것이 아닌 것처럼 어색하기만 했다.
달콤한 타래과가 입안에 착 달라붙었다. 비참한 삶이었음에도 단은 타래과의 맛을 알고 있었다. 제 목덜미에 직접 글자를 새겨 넣으시던, 소년병으로 마지막 임부를 부여받았던 그 깊은 밤. 왕께서는 자애로운 얼굴로 애틋하게 미소하시며, 다디단 타래과 하나를 내미셨다. 그때 왕께서 무어라 하셨던가. 잘 부탁한다고 하셨던 것도 같고, 미안하다고 말씀하셨던 것 같기도 하다.
그 말을 상전께 고해 올렸을 때, 그는 퍽 많이 우셨다. 너무 울어 혹여 혼절이라도 하시는 것은 아닐까 걱정되던 차에 모습을 드러내신 황제께서 달래주지 않으셨더라면, 아마 그날 밤 태화당은 한바탕 큰 소란에 휩싸일 뻔했다.
“현 상궁.”
“예, 마마.”
“시원한 화차 좀 내오겠나?”
“예, 서과 화차로 준비하겠사옵니다.”
다람쥐처럼 입안에 타래과를 밀어 넣던 단이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분명 먹다가 목이 멜까 저를 배려한 상전의 마음에 몸 둘 바를 몰라 하며 손사래를 치자, 내가 먹고 싶어 그런다는 말에 코끝이 찡해졌다.
“마마, 연진 공주님께서 걸음 하셨습니다.”
“어서 모시게.”
서책을 덮으며 자리에서 일어나던 기하는 허겁지겁 입안의 음식을 삼키는 단을 가련하게 바라보다, 상궁과 함께 안으로 들어오는 연진 공주를 향해 환하게 미소했다.
“오셨습니까.”
“예. 며칠 뵙지 못한 것 같아서 문후 여쭈러 왔습니다. 단이도 와 있었구나?”
배꽃처럼 화사하게 미소하는 공주를 향해 넙죽 절을 올린 단이 난처한 얼굴로 머리를 조아렸다. 감히 하늘 같으신 분들과 마주하고 있으려니, 민망함에 몸이 덜덜 떨렸다.
그나마 하루의 반나절을 함께하는 기하는 나은 편이었다. 이따금 들르시는 황제 폐하나 연진 공주, 황자들을 마주할 때마다 오금이 저려 지은 죄도 없는데 손이 떨렸다. 기하는 그럴 때마다 몹시 안타까운 표정으로 괜찮다고 위로했는데, 단에게는 그마저도 황송할 따름이었다.
마마, 소인은 이만 물러나겠사옵니다.
“응? 지금 단이가 뭐라고 하는 것입니까?”
“이만 물러나겠다고 합니다.”
“다과를 들고 있었던 것 아닙니까? 괜찮다. 너와 무빈마마의 시간을 방해한 것은 나이니 물러날 필요 없어. 거기 앉아 어서 마저 먹어라.”
현 상궁이 지체 없이 내온 시원한 화차를 단에게 내밀며 연진 공주는 빙긋이 웃었다. 공주는 본래 쾌활하고 다정한 성격으로, 요즘 부쩍 기하와 시간을 보냈다. 물론 그 시간 중 절반은 아직도 혼례를 허락하지 않은 황제에 대한 투정이었는데, 시간이 지나면 흐려질 것이라 예상한 공주와 서엽의 감정은 나날이 기름칠한 나무처럼 활활 타오르기만 했다.
“오라버니께서는 걸음 하신다는 말씀 없으셨지요?”
“언제 기별하시고 오시는 분입니까. 시간 나시면 연통도 없이 불쑥 오시는 것을요.”
“흥, 어찌 황제 폐하께서 예의가 그리 없으십니까? 총비의 처소에 기별도 아니 하시고 걸음 하시다니, 남들이 들으면 흉볼 것입니다.”
입술을 댓 발이나 내미는 연진 공주의 투정에 기하는 그저 소리 없이 웃었다. 다른 여인들과 달리 매무새를 가다듬을 것도 아니니 기하는 그 점을 크게 불편하게 생각하지 않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공주께서는 몹시도 불만이신가 보다.
이렇게 함께 시간을 보낼 때 불쑥 찾아온 황제에게 왕왕 방해를 받아서인지, 그녀의 불만은 날이 갈수록 커져만 갔다.
“금일은 폐하께서 오시면 다시 한 번 말씀 올릴 테니, 너무 서운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아닙니다. 오라버니께서는 소녀가 처녀 귀신으로 늙어 죽어야 깨달으실 것입니다.”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폐하께서 마마를 얼마나 애틋하게 여기시는지 아시면서요.”
“남성의 왕자는 족제비처럼 생겼습니다! 어찌 그런 자에게 소녀를 시집보내려 하신단 말씀입니까? 소녀에게는 훌륭한 정인도 있는데요!”
기어이 왈칵 눈물을 터트리는 연진 공주를 바라보며, 기하는 한숨을 터트렸다. 여인의 눈물엔 도무지 적응되지 않는다. 서럽게도 우는 공주의 등을 다독이며, 눈치를 살피고 있는 단에게 나가도 좋다고 눈짓했다.
한동안 잠잠하다 했는데, 황제께서는 기어이 공주를 이리 매일 울리신다. 도저히 지켜볼 수만은 없고, 오늘은 정말로 결판을 지어야겠다.
말이 나와서 말이지, 그깟 족제비처럼 생긴 왕자보다 서엽이 못한 게 뭔가? 인물이 부족해, 출신이 부족해, 그것도 아니면 성정이 사납길 해?
“공주, 그만 우세요. 그러다가 고운 얼굴 망가지겠습니다. 조금 있으면 무영군의 수련이 끝나서 서 중랑이 돌아올 텐데, 계속 그리 우실 것입니까?”
“흑…, 서 중랑께서요?”
“눈물을 거두십시오. 금일은 함께 낮것을 들면서 얘기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후원에 나무 그늘이 시원하니, 산책도 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기하는 그제야 울음을 그치는 공주를 흐뭇하게 바라보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바람이 잔잔하게 분다. 싱그러운 풀 냄새가 가득 묻어나는 여름 바람은 아직 제 기온을 모두 잃지 않았다.
현 상궁을 향해 수라를 준비하라 이르고 차가운 물에 적신 영견을 공주에게 내미니, 그녀는 금세 얼굴을 붉히며 부끄러운 마음을 조곤조곤 말한다.
황궁의 시간은 지나치게 빨랐다. 아이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쑥쑥 자랐고, 외로움과 괴로움은 어느덧 희미해졌다. 끊임없이 찾아드는 사람들로 태화당은 늘 소란스러웠다. 북적이는 인파에 미처 혼곤(昏困)함을 느낄 새도 없었다.
그렇게 한 해가 지났다. 이제 한 달 하고도 보름 후면 황태자의 첫 탄신연이 열린다. 이제는 가슴에 묻어버린, 아버지의 첫 기일이기도 했다.
“태자의 탄신연회가 끝나면 준비를 시작할 수 있도록 황후마마께 말씀 올려보겠습니다.”
“황후마마께서는 태인(太仁)군의 축하 연회만 끝나면 황실의 공식적인 행사는 주관하지 않으시겠다고 하셨는걸요.”
“그래도 공주마마의 혼례는 다르지요. 황후마마와 의논하여 신첩이 신경 쓰겠으니 너무 상심치 마십시오.”
다정한 기하의 위로에 연진 공주는 또다시 눈물을 글썽였다.
황실엔 많은 이들이 있었으나, 그들은 모두 황제의 하나뿐인 누이인 공주를 불편해하고 어려워만 했다. 어릴 적 부모님을 여의고 오롯이 황제 하나만을 믿고 의지하는 공주에게는, 그저 자신에게 잘 보이려고 입바른 말만 하는 이들뿐이었다.
그나마 다정한 황후마저 안 계셨더라면, 황제께서 전장에 나가 계시는 동안 외로움에 바싹 말라 죽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그녀에게도 다정한 정인이 생겼다. 귀여운 조카님들도 제법 의젓하게 그녀를 위해주었고, 가슴속 응어리로 미워했던 기하는 뜻하지 않은 선물과 같은 존재였다.
그가 하나뿐인 아버지를 가슴에 묻던 날, 공주는 참으로 많이 울었다. 슬픔을 제대로 내보이지 못하는 그가 가여워서, 서러운 그의 운명이 안타까워서, 그를 미워하고 못나게 굴었던 시간이 부끄럽고 미안해서.
“어찌 또 눈물을 보이려고 하십니까.”
“아닙니다. 울지 않습니다. 소녀가 자꾸 눈물지으면 서 중랑께서도 마음 쓰실 테니, 지금 일은 모르는 척해 주세요.”
“예. 그리하겠습니다.”
저리도 어여쁘게 좋아하는데, 황제께서는 어찌 이렇게 고집을 부리시는지.
“마마!”
문이 벌컥 열리면서 우렁찬 음성이 들렸다. 눈물을 닦으려던 연진 공주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자, 씩씩하게 달려오던 정연군이 아차차 하며 양손을 배 위에 올리고는 사뿐사뿐 걷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우스웠던지, 기하는 활짝 웃으며 정연군을 향해 양팔을 벌렸다.
“어서 오세요, 정연.”
“마마께 인사 올립니다. 고모님께도 인사 올립니다.”
뒤이어 따라 들어오는 무영군의 얼굴에 심술이 가득했다. 이제 막 아장아장 걷기 시작한 황태자를 따라 들어오던 영이 녀석은 이미 기하의 무릎을 차지하고 있는 정연군을 향해 작게 으르렁거렸다.
“소자 무영, 인사 올립니다. 화창한 오훕니다, 마마. 고모님.”
“수련은 잘하시었습니까? 날이 더워 고생했지요?”
“스승님께서 잘 가르쳐 주시어 시간 가는 줄도 몰랐습니다. 고모님, 스승님께서는 후원 정자에서 쉬고 계십니다.”
지난가을부터 서엽에게 궁술을 배우는 무영군의 또랑또랑한 언질에 연진 공주는 슬쩍 얼굴을 붉혔다. 아직 정식으로 혼례 약조를 하지 않은 공주가 함부로 사내를 만나는 것은 법도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더욱이 그들의 혼인을 황제께서 가로막고 계시니, 나란히 서 있기만 해도 훈훈함이 밀려오는 두 선남선녀를 드러내놓고 응원하는 이들은 궁 안에 얼마 없었다.
“왜? 고모님께서도 현님처럼 궁술 배우십니까?”
고개를 갸웃하는 정연군의 천진난만한 물음에 연진 공주는 더더욱 얼굴을 붉혔다.
“너는 시끄러우니 조용히 해. 아우의 손을 잡고 가다 혼자서 뛰는 법이 어디 있느냐? 현 상궁이 고하지도 않았는데 벌컥 문을 열고 들어와? 대체 예법은 어디다 집어 던졌어? 어린 아우가 뭘 보고 배우겠느냐?”
“태인군은 아직 말도 못 합니다! 현님은 괜히 그러셔.”
“뭐야? 너 당장 마마 무릎에서 내려오지 못해?”
“싫습니다? 마마 무릎 한쪽은 아우 것입니다. 현님은 넘보지 마세요.”
주먹을 쥐고 으르렁거리는 무영군을 못 본 척하며 고개를 돌린 정연군은 기하의 목을 덥석 끌어안았다.
“마망.”
까르르 웃으며 아장아장 걸어오던 아이는 슬그머니 제 손을 놓는 무영군을 슬쩍 돌아보며 다시 손을 내밀었다. 유난히 무영군을 따르고 좋아하는 황태자 때문에, 정연군은 부쩍 심술을 부리는 중이었다.
“하면 소녀는 잠시 다녀올 곳이 있어서…….”
“예, 다녀오십시오.”
정연군은 어쩐지 조급해 보이는 공주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엉금엉금 기어 기하에게 다가오는 황태자를 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처음에는 아우가 생겼다며 자경전 문턱이 닳도록 왔다 갔다 하더니, 황실 식구들의 관심이 모두 어린 황태자에게로 향하자 어지간히 심술을 부리는 정연군은 여지없이 미운 다섯 살이었다.
“신우(信友) 너는 저쪽으로 가라! 마마 무릎은 현님 것이야!”
버럭 역정을 내는 정연군의 호통 소리가 어찌나 늠름하던지, 간단한 다과를 들여오려던 현 상궁마저 터지는 미소를 겨우 숨겼다. 말은 그렇게 해놓고 기하의 목을 꼭 끌어안은 정연군에게서는 형님의 늠름함 따위는 도무지 찾아볼 수 없었다.
“아부? 마망?”
고개를 갸웃하면서 손가락을 입에 넣던 황태자는 씩씩거리는 정연군의 사나움에 놀랐는지 금세 울먹거리며 무영군의 품에 안겼다. 그 모습이 정연군의 심정을 더더욱 상하게 한다는 것을, 어린아이는 꿈에도 모를 듯하다.
“황자, 어린 아우에게 그리 소리 지르면 아니 됩니다.”
“핏. 마마도 소자보다 태인군이 예쁩니까? 태인군이 더 좋으세요?”
“그런 말이 어디 있습니까? 무영군 형님과 정연군과 태인군 모두 어여쁜 황자인데요.”
“싫습니다! 태인군은 어마마마도 계시는데. 마마는 소자 마마입니다. 현님도 나쁩니다. 태인군만 어여쁘다 하고, 태인군만 안아주시고…….”
“그거야 너는 너무 뚱뚱해서 못 안아준다니까?”
“살 뺐습니다! 아우는 이제 안 뚠뚠한데요? 현님이 나쁩니다. 현님 밉습니다.”
울먹이는 정연군을 멍하게 쳐다보며 무영군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제 무릎을 차지하고 앉아 까르르 웃음을 터트리던 태인군이 문득 고개를 틀었다.
무, 하고 달싹거리던 작은 입술에 침 범벅을 하고 그대로 무영군의 볼에 쪽 하고 입을 맞췄다. 그 모습에 정연이 더욱 바르르 떤 것은 눈 뜨고 보지 않아도 뻔한 일이었다.
“뭐가 이리 시끄러우냐?”
“아부?”
“아바마마!”
벌컥 열린 문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황제는 다정하게 마주 앉아 있는 이들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유독 여름을 심하게 타는 기하는 끼니를 거르기 일쑤였는데, 그 때문인지 황자들은 돌아가면서 태화당을 찾았다. 어린 정연군이야 그저 기하가 좋아 그리한 것일 테지만, 생각 깊은 무영군은 귀한 제 휴식 시간을 쪼개어 태화당에서 시간을 보낸다 하니, 어린 아들의 효심에 내심 마음이 뿌듯했다.
“오셨습니까.”
요즘도 통 잠을 이루지 못한 기하는 며칠 사이에 살이 내려 수척해 보였다. 떡하니 무릎을 차지하고 앉아 있던 정연군이 벌떡 일어나 뛰어오자 번쩍 안아 든 황제는 제 형에게 안겨 배시시 웃는 황태자를 흐뭇하게 바라봤다.
“또 이리 몰려와 무빈을 귀찮게 하느냐?”
“귀찮게 하지 않았습니다? 마마는 저희만 보면 즐거우시다고 하셨어요.”
“끼니때가 되었으면 얼른 수라를 들이라 해야지. 정연 넌 또 어디서 실컷 주전부리했나 보구나.”
“헙.”
작은 손으로 제 입을 틀어막은 정연군은 동그란 눈을 데구루루 굴렸다.
“일부러 굶지 않아도 돼. 굶으면 키가 안 자란다.”
“현님이 자꾸 소자더러 뚠뚠하다고 하십니다.”
“음, 그건 그른 말은 아니다만.”
“아바마마 밉습니다! 현님도 밉습니다! 소자는 마마만 좋습니다.”
팩하니 토라져 다시 기하에게로 뛰어가 안긴 정연군이 끝내 우는 소릴 늘어놓았다. 그 모습이 어찌나 귀여운지 황제는 터지는 웃음을 가까스로 참으며 작게 헛기침했다. 기하의 눈초리가 은근히 싸늘해졌다. 아마 여기서 더 하면 크게 화를 내겠지.
“정연, 마음 상해 하지 마세요. 아바마마와 형님께서 농을 하신 것입니다.”
“흑…, 소자는 마마만 좋아합니다. 현님은 태인군만 예뻐하시고, 아바마마도 태인군만 안아주시고.”
“아닙니다. 어찌 그리 생각합니까? 무영군에게는 태인군, 정연군, 시헌군까지 모두 어여쁜 아우입니다. 그렇지요, 무영?”
눈꼬리를 곱게 휘며 웃는 기하의 미소가 어쩐지 평소와 달랐다. 무영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다가 예, 하고 대답했다.
“거보세요. 아바마마께서도 마찬가지시랍니다. 아바마마께서는 우리 황자들을 모두 귀히 여기십니다.”
“난 아니다.”
어느새 자리에 털썩 주저앉은 황제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기껏 정무에 바쁜 시간을 쪼개 얼굴을 보러 왔더니, 제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황자들만 다독이는 기하가 못내 미운 탓이었다.
“폐하,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이를 꽉 문 기하의 얼굴엔 다정한 미소가 녹아들었다.
“짐은 언제나 그대뿐이지 않으냐? 이 망아지 같은 놈들이야 조금 크면 제 색시 치마폭에 쌓여 아비는 안중에도 없을 텐데, 황제가 되어 자식들에게 거짓을 말할 순 없지. 암, 그렇고말고.”
“그럼 아바마마는 소자가 미우십니까? 마마만 좋아하시고요?”
어찌 말이 그리 튀는 것인지, 절반만 제대로 알아듣고 절반은 제멋대로 골라 들은 정연군이 기어이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리며 눈에 눈물을 매달았다.
“정연, 그것이 아닙니다. 아바마마께서는 농을…….”
“어허, 사내놈이 어찌 눈물이 그리 헤퍼? 두 살도 아니 된 네 아우도 그리 울진 않겠다.”
“아바마마 밉습니다! 아바마마 싫습니다!”
와앙, 울음을 터트리는 정연군을 달래며 기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늘 그러한 태화당의 작은 소란에 수라를 들이던 상궁 나인들의 얼굴엔 자그마한 미소가 번졌다.
한참을 울던 정연군을 겨우 달래자마자, 이번에는 태인군이 울음을 터트렸다. 무영군이 스승인 태부(太傅) 이성광이 기다리고 있다는 말에, 인사도 없이 발길을 재촉한 탓이었다. 잠시 유모의 품에 안겨 있다가 주위를 둘러보던 태인군은 제 형이 보이지 않음을 깨닫자마자 태화당이 떠나가라 울어댔다.
잠시 정연군과 후원을 거닐던 기하가 태인군의 울음소리에 놀라 한달음에 달려올 정도로, 평소 순하기만 한 아이는 무영군에게 지나치게 집착했다. 휴식을 취할 겸 태화당을 찾았던 황제는 결국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쫓기듯 금룡전으로 향해야 했다.
“어서 가십시오.”
“허, 것 참. 알았대도. 그댄 그리 짐을 보내고 싶으냐? 응?”
“상선 영감이 초조해 합니다. 대신들이 기다린다지 않습니까. 어서 가십시오.”
“신하가 왕을 기다리는 것은 당연하다.”
하도 울어 뺨이 불그레 물든 태인군을 품에 안은 기하는 초조함에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상선을 향해 민망한 듯 웃었다.
“자, 태인군. 아바마마께 잘 다녀오시라고 인사하세요.”
아이의 손을 잡고 살살 흔들어주자 끼하아, 하고 웃는 천진한 미소가 애틋하다. 멀리, 영과 뛰노는 정연군을 힐끗 돌아보던 황제는 차마 떨어지지 않은 발길을 돌리며 착잡하게 입맛을 다셨다.
“잘 다녀오십시오, 륜.”
여우 같은 것. 마음이 상할까 일부러 저렇게 애틋하게 이름을 불러주다니. 그 이름 한 번이면 마음이 사르르 녹는다는 걸 대체 어느 주둥이가 흘렸는지, 야속한 정인은 제가 불리할 때만 저렇게 이름을 불러주었다.
기하와 입 한 번 제대로 맞추지 못하고 그대로 태화당을 나서는 황제의 걸음걸음마다 심술이 가득했다. 그 곁의 상선이나 뒤를 따르던 승지는 혹여 제게 불똥이 뛸까 애써 황제의 눈을 피했다.
황실의 평온과 안녕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황제의 심기가 중요한데 그것의 8할이 무빈과 연관되니, 상선은 태화당 궁녀들에게 뇌물이라도 바쳐 상전의 기분을 가늠해야 하는가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했다. 물론, 성정이 대쪽 같은 무빈이 그것을 안다면 당장에 경을 칠 일이지만.
“다들 모여 무슨 짓거리를 하기에 서두르라는 거냐?”
사나운 황제의 표정에 상선은 겸연쩍은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조아렸다. 딱히 무슨 짓거리를 꾸민다기보다, 지금은 엄연히 국사를 논해야 할 시간이다. 제국의 안위를 어깨에 짊어지신 황제께서 한량처럼 시간을 보내실 수는 없는 법이 아닌가.
“쓸데없는 소릴 하는 놈은 입을 찢어줄 것이다.”
입꼬리를 한껏 끌어 올려 웃는 황제의 두 눈이 서늘하게 빛났다.
“폐하,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대신들이 머리를 조아렸다. 처음에는 황제의 냉랭한 표정에 서로 입 열기를 꺼리던 이들은 자신들의 뜻이 한데로 모이자 앞다투어 목소리를 높였다.
그런 그들을 어이없이 쳐다보던 황제는 나른한 얼굴로 비스듬히 몸을 기댔다. 네놈들이 어디까지 지껄이나 보자, 하는 그의 표정을 미처 읽지 못한 몇몇 대신들이 목에 핏발을 세우며 절절한 사연을 늘어놓았다.
“비록 황태자 전하를 비롯한 네 분의 황자 저하께서 계시오나, 황실의 안녕과 제국의 번영을 위해서는 자손을 더 보셔야 합니다. 폐하께서는 이리도 강건하시옵고, 또한 열네 분의 후궁께서는 충분히 건강한 아기씨를 생산하실 수 있사옵니다.”
“자식을 많이 보는 것이 황실의 안녕을 위한 일이라?”
“그러하옵니다, 폐하.”
“내게는 이미 아들이 넷이나 있다. 황실의 안녕? 그 많던 나의 형제가 황실을 위해 무슨 일을 벌였는지, 그대들은 벌써 잊었나? 스스로 황좌에 오르려 했던―.”
차마 이름을 입에 올리기 싫었던지, 황제는 검은 눈썹을 잘게 찌푸리며 입술을 다물었다. 대신들은 뜬금없이 튀어나온 반역자의 존재에 몸을 낮추며 부들부들 떨었다.
그들은 단지 자신들이 줄을 대고 있는 후궁의 미래를 위해 작은 도모를 했던 것뿐이었다. 영빈과 연관된 이들이 모두 내쳐진 이후, 황실에는 열넷의 후궁이 남았다.
그중 오직 한 사람만을, 그것도 불모의 몸인 사내에게 푹 빠져 있는 황제는 도통 다른 처소를 찾지 않았다. 황제에게 외면받은 후궁들이 매일 눈물로 밤을 지새우는 것은 불 보듯 뻔했다.
“그대들이 보기에는 아들 넷이 부족하냐? 적통인 황태자는 황위에 오를 것이다. 몸이 약한 시헌군은 차치하더라도 무영의 어미는 제구실을 하지 못하고, 정연은 그럴 어미조차 없으니 형제의 난 따위는 꿈도 꾸지 않을 것이다. 짐은 더는 자식을 볼 생각이 없다. 먹고 자고 싸기만 하고 시끄럽게 빽빽 우는 것은 질색이거든.”
“폐하, 어찌 그리 말씀하십니까. 아기씨는 황실의 미래입니다.”
“그대가 보기에, 지금 황자들에겐 미래가 보이지 않더냐?”
“그런 것이 아니옵고…….”
“시끄럽다. 아들을 넷이나 낳아줬으면 황송해 할 것이지, 짐이 종마라도 되느냐? 황실의 번영? 쓸데없는 분란만 늘리는 것이 무슨 번영이란 말이냐? 거기 붙어서 버러지처럼 피나 빨아 처먹는 너희 같은 것들 때문에 황실이 휘청거릴 것이다. 다시 한 번 이 일을 입에 올리는 자가 있다면, 장차 황위를 흔들 생각 따위나 하는 그 머리통을 조각조각 내서 내 직접 들여다봐 주마.”
차마 입에 올릴 수도 없을 말을 거리낌 없이 내뱉는 황제의 반응에 대신들은 고개를 숙인 채 서로 눈치만 살폈다.
“대사농(大司農)이 친히 상소문(上疏文)을 올렸다 하던데, 무슨 내용일지 무척 궁금하군. 상서(尙書)는 읽으라.”
심드렁한 황제의 목소리에 대사농이 움찔했다. 상소문은 딱히 대사농만 올린 것이 아니었다. 뜻이 맞는 이들이 모두 함께 올린 상소문을 어찌 저렇게 콕 집어 가리키시는지, 현 분위기로 보아서 절대로 좋은 말을 들을 수 없으리라는 직감에 사지가 떨렸다.
“저, 폐하. 그것은 소신을 비롯한 문무대관들이 뜻을 모아서…….”
“뭘 하고 있어? 그 문무대관의 뜻이 무엇인지 궁금하다지 않느냐.”
“그러나 그것은 그리 시급한 사안은 아니옵고, 그저…….”
“그대 어찌 이리 말이 많으냐. 상서, 뭐 하고 있느냐. 입이 붙었느냐, 혀가 잘렸느냐?”
낯빛이 푸르스름해지는 대사농의 표정에 황제파 대신들이 코웃음을 삼켰다. 영빈의 아비인 서남성왕 연태진이 뒤를 봐주던 대사농은 겨우겨우 화를 피하고 납작 엎드려 사는 중이었다.
서남성왕은 크게 세를 잃고 오성의 다른 왕들에게 배척당하고 있으니, 아들 하나 잘못 키운 죄라고 하기엔 지나치다는 말과 더 큰 벌을 받아야 한다는 의견이 아직도 분분했다.
“황제 폐하의 은혜는 제국의 하늘 끝에 닿아…….”
“빤한 말을 입에 올려서 무엇해. 자르고 본론만 말하라.”
상서는 황제의 싸늘한 반응에 다시 교지를 붙잡고 목을 가다듬었다.
“본디 내명부는 황실의 기둥이며, 이를 단단히 받치고 계시는 황후마마를 보필하는 후궁의 지위는 무척이나 중요하다고 사료됩니다. 더욱이 황후마마의 다음으로, 귀비(貴妃)란 본디 대를 이을 황자 아기씨를 생산하는 것이 첫 번째의 도리이며, 황실에 혁혁한 공을 세워야 합니다. 비록 무빈께서는 단정한 성품과 청렴함으로 그 자리에 오르시는 것에 부족함이 없으시나, 무릇 연정이란 스쳐 지나가는 것인데 너무 성급한 결단을 내리시는 것은 아닐까 저어됩니다. 더욱이, 북왕 서진하는 폐하의 든든한 장수이나 그의 부친인 서연…….”
탁,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날아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그제까지 머리를 조아리며 눈치를 살피던 대사농은 나 죽었소, 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차디찬 침묵이 금룡전을 가라앉혔다. 상서는 조용히 뒤로 물러섰으며, 황제파 대신들조차 함부로 입을 열지 못했다.
“오냐오냐하니 머리끝까지 기어오르는구나. 뭐? 연정이란 스쳐 지나가는 것이라?”
물론 사내의 연정이란 구름 곁을 지나는 바람과 같다고 여기는 대신들조차 고개를 흔들 만큼, 황제께서 무빈을 향해 내비치시는 마음은 실로 절절했다.
모두가 쉬쉬하고, 이제는 완전히 없던 일이 되어버린 서연의 일만 보더라도 그러하지 않은가. 그른 것을 바로잡지 못해 안달인 어린 유생들이 서연의 일을 꼬집으며 무빈을 폐서인해야 한다는 주청을 올렸을 때, 황제께서 얼마나 불같이 화를 내시었는지를 떠올린 그들은 폭풍우에 갇힌 나비처럼 옴짝달싹하지 못했다.
“더는 나의 장인이 거론되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그리 말했거늘, 짐의 인내심을 시험하는 것이냐? 아니면, 장인이 그리워 추억에 잠기려는 것이냐? 그리 그가 애틋하거든 내 친히 그 옆에 묫자리를 만들어주마. 어떠냐, 당장에라도 자리를 만들라 명할까?”
“폐하. 대사농이 그런 뜻으로 상소문을 올린 것이 아닐 테니, 너무 곡해하지 마시옵소서. 신들은 다정하신 무빈마마께서 응당 귀비(貴妃) 자리에 오르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황후마마께서 그리 결정하시고 폐하께 주청 드린 일을, 감히 어느 누가 삿된 마음을 품고 반대에 나서겠습니까?”
황제파의 수장 격인 상국(相國) 김정열의 힘 있는 말에 반대파는 눈을 희번덕거렸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누구 하나 잔뜩 성이 난 황제를 향해 제 뜻을 말하지 못했다.
“더욱이 무빈마마께서는 지난 문정대전에서 부상하신 폐하를 직접 치료하시다 큰일을 당할 뻔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지아비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아깝지 않게 여길 이들은 생각보다 많지 않습니다. 응당, 그 자리는 무빈마마의 것이지요. 모두 그리 생각할 것입니다. 아니 그렇습니까? 대감들.”
그제야 황제의 야차 같던 표정이 느슨해졌다. 그는 자신의 매끈한 턱을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나른하게 웃었다. 그 모습이 마치 배부른 맹수의 너그러움과 같이 느껴져서, 반대파 대신들은 마른 침을 꼴깍 삼켰다.
“그대들 뜻이 그러하다니, 황태자의 탄신연 이후 무빈의 품계를 다시 내리도록 하겠다. 황후가 무척 기뻐하겠군. 힘없는 황후라 그대들이 뜻에 반하지는 않을지 내내 근심하였거든.”
물론 그것은 황후의 뜻이었고, 황제 또한 바라는 바였으나 정작 기하는 단호하게 거절하며 뜻을 물리기를 바랐다. 모든 것은 그 빌어먹을 법도 때문이었다. 틀에 얽매인 법도, 당장 삶아 먹어도 아무도 무어라 탓할 수 없는 지리멸렬한 법도 말이다.
“다음은 뭐냐.”
한층 누그러진 황제의 목소리에 상서는 재빨리 다음 교지를 확인하며 입을 열었다.
* * *
종일 뛰어놀다 오수에 든 정연군과 태인군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기하는 서책을 넘기다 작게 하품했다. 한낮의 열기가 너무도 뜨거워 도무지 바깥으로 나가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지금쯤 북성은 백성들이 그나마 가장 살기 편한 시기일 텐데. 이제는 먹고사는 일이 그전처럼 고되지 않다고는 하나, 그것을 제 눈으로 본 바는 아니라서 늘 마음이 쓰였다.
“마마, 어찌 그러십니까? 무슨 걱정거리라도 있으십니까?”
“아니네. 나른하여 다른 생각이 들었어.”
“잠시 오수 드시겠습니까?”
“늦잠을 자서 그런지 잠은 오지 않아.”
태화당은 이전보다 더 활기찬 듯 보였으나, 내부는 고요하기 이를 데 없었다. 문정대전 이후 상전께서 유난히 말수가 줄어든 탓이었다.
그나마 몸이 약한 황후 대신 기하가 황태자를 맡아 키우기 시작하지 않았더라면, 태화당은 진작 고요한 침묵 속에 빠졌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여름이 아직 한창인데 벌써 이리 기력을 잃으시면 어찌합니까. 드시고 싶으신 것은 없으십니까?”
“되었네. 그래도 매끼 잘 챙겨 먹지 않나? 날이 더워 그러니 나는 염려 말고 황자들이나 더 신경 쓰게.”
“황자 아기씨들이 얼마나 강녕하신지 아시지 않습니까? 정연군 저하께서는 매번 수라를 한 그릇 반이나 비우시는걸요.”
“잘 먹어야 잘 크지. 먹는 것은 복된 일이네. 정연군은 그게 귀엽지 않나?”
부쩍 키가 자란 정연군을 바라보는 기하의 눈이 따뜻하게 변했다. 축축한 땀을 내는 머리를 쓸어주자, 먹는 꿈을 꾸는 것인지 쩝쩝거리며 입맛을 다시는 모습이 무척 귀여웠다.
“한데, 요즘 무영군 표정이 좋지 않은 것 같네. 무슨 일이 있다던가?”
“그저 상심이 크신 까닭이지요.”
“상심이라니?”
아이의 머리를 쓸어주던 기하가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상심이라. 나이는 어리지만, 속은 지나치게 깊은 무영군이 상심할 일이라면 빤했다. 지병을 앓고 있는 모후에 관한 일이거나, 연호당에 갇혀 홀로 보내고 있을 영빈의 일일 테지.
“이번엔 또 무슨 일이라던가.”
“귀인마마의 병세가 날로 악화되시어, 저하께서 근심이 크신 듯합니다.”
“어느 정도인데?”
“최근에는 저하조차 알아보지 못하신다고 하십니다. 종종 이상한 말씀도 하시고요.”
귀인 양 씨의 병환은 너무도 깊어 이제는 손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했다. 그녀가 가진 병은 몸을 허하게 만들고 자아를 상실하게 하는 것이라 했는데, 아주 오랜 시간 서서히 죽음에 이른다고 들었다.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도 무영군은 울지 않았다. 너무도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현실을 받아들이려 했다. 걱정하는 이들에게 외려 하늘의 뜻이 그러하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않느냐고 반문할 정도였다.
“그 정도로 나빠졌단 말인가.”
“예. 건형당 박 상궁 말이, 저하께서 몹시 상심하셨다 합니다. 또한…….”
“황제 폐하 드십니다.”
갑작스러운 상선의 목소리에 후다닥 몸을 일으킨 현 상궁이 허리를 반쯤 숙였다. 문이 열리자마자 모습을 드러낸 황제의 곁에는 시무룩한 얼굴의 무영군이 함께였다. 그들을 반가이 맞으려던 기하가 어리둥절해 할 만큼 아이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오셨습니까, 폐하.”
“조용하다 했더니, 망아지들이 자고 있었구나.”
“예. 종일 뛰어놀더니 지쳤나 봅니다. 오수가 길면 밤잠에 들기 어려워 막 깨우려던 참이었습니다.”
“그냥 두어라, 곤해 보이는데. 무영, 앉아라. 앉아서 마저 얘기하도록 해.”
어쩐지 퉁명스러운 황제의 태도에 무영군은 잔뜩 기가 죽은 얼굴로 기하를 바라봤다. 근래에는 아이들에게 딱히 큰 소리를 내지 않던 황제였기에 기하는 더더욱 지금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예전의 무영군이 어찌했건 간에, 아이는 달라졌다. 지나치게 바른길로만 가려 했고, 아우들의 귀감이 되려 노력하는 모습이 안쓰러울 정도로 나이답지 않은 성숙함이 내내 마음 쓰였다.
“현 상궁, 다과를 내오게.”
“예, 마마.”
기하는 빠르게 침소를 나서는 현 상궁을 바라보던 시선을 돌려 무영군의 손목을 잡아당겼다. 순순히 제 곁으로 다가와 자리 잡는 아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황제를 향해 가볍게 눈짓했다. 제발 표정 좀 풀어달라는 뜻이었지만, 어쩐지 오늘은 그것이 통하지 않는 듯했다.
“다시 얘기해 봐. 뭐라 했느냐?”
근엄한 황제의 채근에 무영군은 조용히 입술을 달싹였다. 아이의 긴 속눈썹이 숨을 내쉬듯 깜박였다. 아이는 답지 않게 지나치게 긴장하며 붉은 입술을 몇 번이나 곱씹었다.
“무영.”
“어마마마를 모시고 사가(私家 : 일반 백성들이 사는 집)로 나가고 싶습니다.”
표정과는 달리 담담한 무영군의 대답에 놀란 것은 기하였다. 본디 황실의 아이들은 자신이 원하지 않더라도 혼례를 올리거나, 관례식(冠禮式 : 성인식)을 치르면 사가로 나가는 것이 관례(慣例 :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던 관습)였다.
그러나 현 황제의 후궁이 그의 아들과 함께 사가로 나가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었다. 큰 죄를 지어 폐서인이 되는 것도 아닌데, 어찌 지아비를 멀쩡히 둔 여인이 어린 아들을 데리고 황실을 벗어날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보호뿐 아니라 감시의 의미에서도 벗어난 일이다. 황태자인 태인군은 무영군에 비해 지나치게 어렸다. 사람 일은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 간신배들이 사사로이 무영군에게 접촉해 허무한 꿈을 심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네게 그리하라 주청한 이가 누구냐.”
“폐하.”
황제의 뜻을 단번에 파악한 기하가 조급히 그의 말을 끊었다. 그러나 영민한 무영은 이미 본뜻을 헤아린 듯했다. 아이는 서러움을 눌러 삼키듯 천천히 말을 이었다. 지나치게 태연한 얼굴은 그래서 더 안타까웠다.
“어마마마께서는 이제 더 이상 소자의 이름을 불러주시지 않습니다.”
비록 영빈을 어미처럼 따르며 한동안 양 귀인을 제대로 찾지도 않았으나, 그녀는 자신을 낳아준 이였다.
“소자를 기억하지 못하시기 때문입니다.”
언젠가는 그녀가 제 곁을 떠나리란 것을, 어린 무영은 알고 있었다. 아무런 힘이 없는 그녀는 허수아비처럼 처소에 틀어박혀 방긋방긋 웃기만 했다. 그래도 좋았다. 그녀가 흐린 음성으로 시온, 하고 불러줄 때마다 쑥스러워 내색하진 못했어도 애틋하고 기뻤다.
“황궁은 너무도 답답합니다. 어마마마께는 언제나 소자뿐이었으니, 남은 생은 편안히 모시고 싶습니다.”
“그것은 아니 된다.”
“아바마마.”
“아니 될 이유는 누구보다 네가 더 잘 알고 있을 거다.”
황제의 냉랭한 음성에 무영군은 하릴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눈물이 나려 했으나 이를 악물고 참았다. 사내는 눈물이 헤퍼서는 아니 된다는 가르침은, 황제에게서 처음 배운 것이었다.
물끄러미 아이를 바라보던 기하는 덜덜 떨리는 작은 손을 붙잡았다. 아이는 끝까지 울지 않았다. 그 모습이 너무도 가엾고 안타까워 황제를 바라보자, 그 역시 같은 생각을 하는지 두 눈이 낮게 드리워졌다.
“시온.”
“예, 아바마마.”
“네가 누구냐.”
“소자는…….”
“어서 말하라.”
그제야 고개를 든 아이의 눈동자엔 습기가 가득했다.
“대 수환제국(秀奐帝國)의 31대 황제 폐하의 장자입니다.”
“네가 여염집 아이들과 같으냐?”
“같지 않습니다.”
“네게 자유가 있더냐?”
“권리와 의무만을 배웠습니다.”
또박또박 답하는 무영군은 울음을 참으려는 듯 입술을 꾹 물었다. 가볍게 입술을 떠는 모양새가 가여워, 기하는 참담한 심정으로 고요히 한숨을 삼켰다.
“너는 사사로이 아비의 아들이나, 제국의 황자다. 이 나라에는 황태자가 있고 너는 그럴 뜻이 없다 해도, 자신의 욕심을 위해 네게 달려드는 삿된 무리가 분명 있을 거다.”
“예, 스승님께서도 그리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무리를 가까이하지 않아야 함을 소자 또한 잘 알고 있습니다.”
“너는 아직 너무 어리다. 아비는 네가 정쟁(政爭 : 정치적인 싸움)의 희생양이 되는 걸 원치 않는다. 아비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겠느냐?”
습기 찬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어린 아들을 황제는 물끄러미 응시했다. 아이는 울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이 조각나 아플 텐데도 내색하지 않았다. 그것이 너무도 기특하면서도 마음이 쓰렸다.
“이리 오너라.”
무영군을 향해 팔을 벌린 황제는 곧장 제 품으로 안겨드는 아들의 작은 몸을 다정하게 다독였다. 처음에는 관심조차 두지 않았던 아이는 어느덧 훌쩍 자라 자신의 삶을 스스로 돌아볼 줄 알게 되었다.
그렇다 해도 아이는 아이다. 이렇게 작은 아이가 제 눈에서 벗어난다는 생각을 하니, 몹시도 마음이 씁쓸해졌다.
“너는 아비가 지켜줄 것이다. 네 말대로 황궁은 답답한 곳이니, 당분간은 수업을 줄이고 어미와 함께 시간을 보내도록 해. 네가 곁에 있어 준다면, 네 어미는 어디든 좋아할 것이다. 궁을 옮겨주마. 어미와 함께 연수(姸秀)궁에서 지내도록 해.”
태화당보다 더 깊은 곳에 있는 연수궁은 작은 숲과 호수가 절경을 이루는, 황실에서 가장 아름답고 작은 궁이었다. 그곳이라면 사람들의 발길도 자주 닿지 않으니, 충분히 한적한 생활을 즐길 수 있을 거다.
“예, 아바마마.”
너무도 일찍 철든 아들이 황제는 내내 마음 쓰였다. 무영군의 머리를 다정하게 쓸어주는 황제의 커다란 손이 점점 애틋해졌다.
“왜 그렇게 보는 것이냐?”
“기특하십니다.”
“뭐야?”
어린 아들놈 보듯 흐뭇하게 쳐다보고 있어 혹시나 했더니, 뭐라? 기특해?
“감히 지아비에게 그런 말을 하는 발칙한 후궁을 내 어찌해야 해? 응?”
기하를 덥석 끌어안아 제 무릎 위에 올린 황제는 그의 단아한 콧등을 가볍게 톡 쳤다. 노여움을 띠는 듯한 말투였으나, 절절한 애정이 녹아 있었기에 기하는 스스럼없이 황제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훌륭한 아버지십니다. 훌륭한 황제이시고, 훌륭한 랑랑이십니다.”
“그걸 이제 알았더냐?”
“륜이 자랑스럽습니다.”
어느덧 웃음기를 거둔 기하의 고백에 황제는 가벼이 그의 등을 다독였다. 그는 마치 파도 위를 걷는 것만 같았다. 정신없는 아이들 때문에 늘 웃고는 있었지만, 이따금 홀로 깊은 사색에 잠길 때면 더없는 공허함이 그를 쓸쓸하게 했다.
황제는 그럴 때마다 겁이 났다. 온 마음을 다해 애정을 퍼부어도 밑바닥이 깨진 항아리처럼 콸콸 새어 나가, 종래엔 남은 것이 아무것도 없듯 텅 빈 가슴으로 혼자 울까 봐.
“기하야.”
“예.”
“태자의 탄신연이 지나면 함께 온천이라도 다녀오겠느냐?”
“날이 이리 더운데, 온천하다가 살이 익겠습니다.”
“하면, 어디 저자 구경이라도 다녀올까?”
“폐하.”
“왜, 다른 게 하고 싶으냐? 말해 보라. 그대가 원한다면 얼마든 일정을 조절해 보마.”
그제야 얼굴을 보여주는 야속한 정인을 바라보며 황제는 부드럽게 미소했다. 수척해진 두 뺨이, 그런데도 불긋한 어여쁜 얼굴이 안타깝기만 하다.
“마음 같아선 함께 북성에 다니러 가고 싶은데, 올해엔 그대도 알다시피 태자의 초도(初度 : 왕자녀의 돌)를 치러야 하니 내년에는 꼭 함께 다녀오자꾸나. 아마 그즈음이면, 북성과 황도를 잇는 길이 잘 닦였을 것이다.”
황제는 전쟁이 끝나자마자 북성과 황도를 잇는 길을 닦으라고 명했다. 그것은 실로 거대한 공사였고, 어마어마한 인력과 예산이 투입된 것이었다.
일부 대신들이 터무니없는 예산에 있는 대로 반발하고 나섰으나, 황제는 그 독살 맞은 혀로 자신에게 반하는 무리를 갈가리 찢어놓았다.
그런 마음이 고마웠다. 감히 그 성심을 어찌 다 헤아릴 수 있을까. 하늘처럼 높고 바다처럼 깊은 마음이 혹시나 흐려지실까 봐 겁이 날 정도였으니, 서기하는 어지간히 욕심쟁이다.
“신첩은 이제 괜찮습니다.”
“누가 그대더러 뭐라 했느냐? 그저 짐이 북성에 가보고 싶어 그런다. 그대가 나고 자란 곳이고, 그곳도 짐이 보살필 나라이니 응당 관심을 둘밖에.”
“때때로 아버님이 생각나는 것은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시무룩해지는 기하의 얼굴에 황제는 얼른 표정을 바꿨다. 일부러 더 환하게 웃고 능글맞은 얼굴로 그를 빤히 들여다보며 때때로 입을 맞췄다. 그러다 보면 금세 웃고 마는 기하가 오늘은 어쩐지 더더욱 힘이 없어진다.
“잊을 수는 없습니다. 아니, 잊어서는 안 되지 않습니까. 아버님의 죄를, 원망을, 미움을, 그리움을, 어찌 다 잊겠습니까.”
서글프게 달싹이는 그의 두 눈에 어느새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기하 역시 울지 않는다. 우는 법을 잊어버린 것이 아니라, 우는 것보다는 웃는 것에 더 익숙해져서라고 언젠가 그는 스치듯 말했다.
“잊지 않습니다. 하지만 매일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언젠가는 흐려지겠지요. 설령 그렇다곤 해도, 늘 마음에 새길 것입니다. 그러니 폐하, 너무 마음 쓰지 마십시오.”
황제가 해줄 수 있는 일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의 마음이 얼마나 깊은 물에 잠식되었는지, 가늠할 수조차 없다.
서진하는 끝끝내 아비의 부탁을 외면하지 못했다. 그는 철저하게 입을 다물고, 홀로 죽어간 서연의 그림자 위에 자신의 의지를 덧씌웠다. 기하에게는 오히려 그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지금도 이렇게 견딜 수 없을 만큼 힘들어하는데, 아마 모든 진실을 알게 된다면 스스로 일어설 수 없을지도 모른다.
황제는 자신의 이기심을 탓했다. 누가 뭐라 해도 가장 소중한 것은 서기하다. 그러니, 진실 따위는 저 바다 깊은 곳에 묻어두어도 좋다. 언젠가 시간이 많이 흐른 뒤에, 원망 어린 한탄을 들어도 좋다. 지금 그가 웃을 수만 있다면, 조금 더 편안해질 수만 있다면.
“그것보다 어서 공주마마와 서 중랑의 혼인이나 윤허해주십시오.”
“말이 어찌 그리 튀어?”
“어찌 황실의 경사를 막으십니까? 공주께서 매일 우시는 게 가엾지도 않으십니까?”
그리 어여뻐하는 누이가 매일 우는데도 황제는 옴짝달싹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당장 서엽을 황실 밖으로 내친 것도 아니다. 이것은 신종 고문의 일종이던가. 모두가 바라는 일은 어찌 이리 태산같이 가로막고 계시는지, 이러다가 조만간 큰 사달이 나지 않을까 싶다.
“서 중랑이 그리 마음에 안 차시면 차라리 북성으로 보내십시오. 바라지 못할 이를 마음에 품고 사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아십니까?”
어쩐지 그 말에 가시가 박힌 것 같아 황제는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며 딴청했다. 확실히 기하의 말대로 서 중랑이 어디 빠지거나 모난 구석이 있는 사내는 아니었다. 출신 성분이야 고귀한 공주에 비해 떨어지는 것이지 제후국 왕족이라면 누구나 탐내는 가문이 아니던가. 사람이 지나치게 태평한 것도 어찌 보면 장점이다. 공주와 혼인하면 모든 정치적인 활동이 단절되니, 그편이 훨씬 나을지도 모른다. 생김도 나쁘지 않고, 수년간 전투의 선봉에 서서 용맹함을 떨쳤으니 체력 또한 빠지지 않을 것이고. 다만, 이러니저러니 해도 마음에 차지 않는 이유를 뾰족하게 찾을 수 없는 게 가장 큰 흠이리라.
“어찌 또 그리 원망스럽게 쳐다보느냐?”
“폐하께서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십니다.”
“모르긴 뭘 몰라? 그래서, 너는 또 서엽 그놈 때문에 하나뿐인 랑랑에게 그리 눈을 사납게 뜨고 원망하는 것이냐?”
“신첩이 언제 눈을 사납게 떴습니까? 폐하야말로 너무하십니다. 서엽이 북성의 사내라서 마음에 차지 않는다고 속 시원히 말씀하시면 모두가 그리 알고 따를 것입니다.”
“짐이 언제 북성의 사내라서 마음에 차지 않는다 했어?”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단 말씀입니까?”
그게 바로 문제란 거다. 이렇게 가까이, 버젓이 제 무릎 위에 앉아서 깜찍한 표정을 짓진 못할망정 서엽 얘기만 나오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드니 제국의 충신이라도 마음에 들 리가 없다.
“폐하.”
“망할 놈 같으니라고. 네가 이리 두둔하니 그놈이 꼴 보기 싫은 거다. 그런 주제에 감히 누구를 넘봐? 덩치만 곰같이 큰 놈이 뭐가 좋다고 정이도 그대도 그리 그놈을 감싸고도는 것이냐? 너 말해 보아라. 짐이냐, 서엽 그놈이냐? 응? 그러고 보니 전에도 저자에서 서엽 그놈 선물만 샀었지?”
“그건 분명 폐하의 것이라고 말씀 올렸습니다?”
“어디서 태연하게 발뺌이야?”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거짓말을 늘어놓는 기하를 지그시 바라보며 황제는 바르르 떨었다.
“그때도 말씀 올리지 않았습니까? 폐하께 드릴 것이라고요.”
“그건 분명 서엽의 것이었다. 그대는 분명 짐과 서엽 그놈이 물에 빠지면―.”
“지난번에도 말씀 올렸습니다. 신첩은 헤엄치지 못한다고요.”
“이잇!”
“설령 그렇더라도, 당연히 폐하를 위해 움직일 겁니다.”
그것은 오롯한 진심이었다. 기하는 까만 눈을 들어 황제를 바라보며 미소했다. 헤엄치지 못하고 그대로 물에 가라앉는다 해도, 자신은 분명 황제를 위해 움직일 것이다. 필시 머리보다 몸이 먼저 움직이겠지. 눈에 빤히 보이는 결과를 두어도 분명 그럴 것이다.
“그러니 신첩이 물에 꼬르륵 잠기는 것을 보고 싶지 않으시거든, 그런 무서운 말씀은 거두어 주십시오.”
어느덧 나긋해진 기하를 바라보며 황제는 크흠, 하고 헛기침을 내뱉었다. 어찌 이리 둘만 있으면 어린아이처럼 한없이 유치해지는지, 저 자신도 때때로 이해할 수 없을 만큼의 치졸함이 바닥을 드러내는 것만 같다. 그러나 황제는 일각도 지나지 않아 그런 감정은 까맣게 잊을 만큼 뻔뻔한 심성의 소유자였다.
“설령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그댄 아무것도 하지 말고 얌전히 기다려야 해. 짐은 헤엄을 아주 잘 친다. 강 깊은 곳까지 몇 번이고 들어가 본 적도 있다. 하니, 걱정할 필요 없어.”
태연 자적한 황제의 말에 기하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다. 어떤 의문을 품지도 않고, 어떤 생각을 더하지도 않는다. 그저 말하는 대로 듣고, 보이는 대로 믿고, 생각할 뿐이다.
“서 중랑은 심성이 곧고 강직한 자입니다. 아마, 평생 공주마마를 사모하고 위해드릴 것입니다. 무엇보다 공주께서 그리 좋아하시지 않습니까.”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 정이가 더 좋아하지 않느냐?”
“서 중랑도 공주마마를 많이 사모합니다. 그러니 온갖 눈총을 다 받으면서 끝까지 이리 황궁에 발을 붙이고 있지요. 아마 그렇지 않았더라면 진작 숙부님의 부름을 받고 북성으로 돌아갔을 것입니다.”
“그건 아니 돼. 그가 가면 그대가 너무 외롭지 않느냐.”
불쑥 튀어나온 진심에 기하는 황제를 지그시 바라보며 빙긋이 미소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엔 아주 작은 심술일 뿐이라는 것을 기하는 알고 있었다. 얼마 전에는 은밀히 관상감(觀象監 : 천문학, 지리학 등의 사무를 맡아보던 관청) 관원(官員)을 따로 불러 내년 봄, 길일(吉日)을 확인하신 것 또한 은밀히 들었으니까.
“어찌 그리 웃어?”
“그래서 관상감 관원이 길일은 언제라고 말씀 올렸습니까?”
“황실에 믿을 것들이 아무도 없구나. 어찌 황제인 짐보다 그대가 더 황실 소식에 밝으냐?”
“신첩이 너무 걱정하였더니, 상선이 은밀히 알려주었습니다. 하니, 그를 탓하지 마십시오.”
기하의 다정함에도 황제는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그의 태도를 발칙하다고 여기면서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리 재잘재잘 떠들며 웃으니 마치 예전으로 돌아간 것만 같아서, 황제는 오랜만에 편안하게 웃으며 머리를 비워냈다.
“그대를 믿고 혼인을 승낙하는 것이다.”
“공주께서 무척 기뻐하실 것입니다.”
“정인을 얻는 기쁨이야, 이루 말할 것 없지. 그대가 내게 유일한 기쁨인 것처럼.”
기하는 달콤하게 맞닿아 오는 황제의 입술을 느끼며 가만히 눈을 감았다. 뜨겁게 파고드는 말캉한 살덩이는 언제나 그렇듯 정염(情炎)이 넘친다. 타오르는 온정(溫情), 애틋한 손길, 어느 것 하나 마음에 차지 않은 것이 없다.
그는 늘 이렇게 제게 새 삶을 준다. 상처로 얼룩진 마음을 풍요롭게 해주고, 굶주린 애정에 허덕거리는 가슴을 꽉꽉 눌러 채워준다. 그러니 그를 위해 살 것이다. 평생 그와 함께 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