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장 만남과 이별
해가 진 황실은 여느 때보다 환한 불을 밝히며 그곳의 주인을 맞을 준비로 어수선했다. 승리를 거머쥔 황제의 금룡대가 백성들의 환호를 받으며 마침내 황실 담을 넘어서자, 미리 대기하고 있던 수백의 관료와 궁인들이 바닥에 납작 엎드려 절을 올렸다.
황제는 자신을 향한 만세 소리에도 무감각한 얼굴로 그들 사이를 무심하게 지나갔다. 곱게 단장한 후궁들이 나붓이 절을 올리는 모습에는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황후의 상태는 어떠냐.”
“아직 그대로이십니다.”
미간을 찌푸리며 짧게 혀를 차던 황제가 문득 발을 멈췄다. 당연히 제 뒤를 따를 것이라 생각한 기하는 말에서 내린 후, 그 자리에 못 박힌 것처럼 서 있었다. 피곤함이 역력하게 녹아든 얼굴이 너무도 안쓰러워 당장에 품에 안고 싶었으나, 이곳은 보는 눈이 지나치게 많았다.
대체 뭘 한다고 오밤중에 이리들 몰려나왔는지, 소란 떨지 말고 당장 퇴궐하라는 사나운 소리가 목구멍까지 치솟을 즈음이었다. 눈에 띄게 창백해진 기하가 잠시 휘청거리는 통에, 무어라 사납게 뒷말하던 대신들이 저마다 헛기침을 해댔다.
“빈, 어찌 이러냐. 많이 어지러우냐?”
“신첩은 괜찮으니, 어서 산실청(産室廳)으로 가십시오.”
“함께 가야지. 어차피 태화당으로 가는 길이 아니냐. 얼굴이 창백하다. 걷지 못하겠으면 짐이 안아서 갈까?”
“정말로 괜찮습니다.”
괜찮다면서 어찌 이렇게 주변 눈치를 보는 것인가? 대체 황제의 하나뿐인 총비에게 누가 감히 눈치를 준단 말인가? 저 밥버러지나 다름없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놈들이 이제는 황제의 총비에게 눈총 주는 것이 가소로워, 황제는 코웃음을 치며 사납게 일갈했다.
“그대들은 뭘 대단히 할 게 있다고 이 시간까지 퇴궐하지 않고 자리를 지키고 있는 거냐?”
“폐하께서 무사히 환궁하시는 경사스러운 날이 아닙니까. 더욱이 금일은 더할 나위 없이 큰 경사가 기다리고 있으니, 어찌 감히 신들이 먼저 퇴궐하겠나이까.”
“그대들이 있으면 황후 배 속 아이가 걸어서 나오기라도 한단 말이냐? 번잡스럽게 모여 서서 빈을 훔쳐보는 파렴치한 짓은 집어치우고 썩 물러나.”
당황함으로 물든 기하의 표정이 어찌나 애틋한지, 당장에라도 끌어안고 입 맞추고 싶은 것을 가까스로 참은 황제는 다정하게 그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또 저희끼리 수군대는 못난 것들을 사납게 쳐다보자, 그제야 저마다 딴청 하며 입을 다무는 꼴이 가관이었다. 저 밥버러지들.
“빈, 어서 가자. 이러다 그대 크게 앓아눕겠다.”
“폐하, 신첩은…….”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면 피로가 풀릴 것이야. 모이면 쓸데없이 머리통만 굴려대는 저놈들은 신경 쓰지 마라. 그대가 왜 저런 것들을 신경 써. 그럴 필요 없다. 저들이 하는 말은 모두 배가 처 불러서 지껄이는 헛소리니 마음에 담을 필요 없다.”
백성들의 열렬한 환호에 예정보다 한참 늦은 황제 일행을 기다리면서 저녁을 그대로 보낸 대신들은 들리지 않게 이를 바드득 갈았다. 남총 하나를 옆에 낀 황제 폐하의 혜안이 너무도 흐트러지셨다며 수군거리던 대제학은, 흉흉한 기세로 황제 뒤에 서서 목을 내리긋는 시늉을 하는 임승지와 눈이 마주치자 슬그머니 입을 다물었다.
“누구도 빈에 대해 함부로 떠들면 나의 그림자가 직접 찾아갈 것이다. 다들 혓바닥 간수, 잘해야 할 것이야.”
황제의 서늘한 일갈에 그들은 고개조차 쉬이 들지 못하고 점점 멀어지는 일행을 눈으로만 좇았다. 황제의 출정 이후 두문불출하던 무빈 서기하는, 많은 이들의 예상대로 전장까지 직접 따라나선 것이었다.
제 아비가 역모를 일으켜 황제 폐하께서 친히 출정하셨다면 얌전히 처소에 처박혀 처분을 기다리고 있어야지, 거기가 어디라고 따라나선단 말인가? 그런데도 민망함을 모르는 저 뻔뻔한 태도라니.
분노에 바르르 떠는 것은 비단 대신들만이 아니었다. 치마폭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로 주먹을 움켜쥔 후궁들은 고운 입술을 사납게 물어뜯으며 멀어지는 황제와 기하를 노려봤다. 연정과 질투, 괴로움이 담긴 그녀들의 눈은 오랫동안 사납게 휘청거렸다.
곧장 산실청으로 향한 황제는 그때까지 기하의 손을 놓지 않았다. 아무리 후궁의 위치에 있으나 전장에서 막 돌아온, 그것도 사내의 몸으로 산실청에 들어갈 수 없었던 기하는 난처한 얼굴로 슬그머니 황제의 손을 밀어냈다.
“어찌 그래?”
의문으로 물든 황제는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이었다. 정녕 그가 몰라서 그러는 것인지 아니면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뜻인지 도무지 가늠할 수 없었기에, 기하는 민망한 듯 웃으며 가만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법도가 아닙니다.”
“너 지금 짐 앞에서 법도 운운하는 것이냐?”
기하의 콧잔등을 가볍게 툭 치는 황제의 붉은 망토가 바람에 나부꼈다. 찌는 듯한 더위는 저녁 바람에 잠잠해져 푸른 풀 냄새와 익숙한 흙냄새가 그리움을 물씬 자아냈다. 기하는 산실청 현판을 올려다보고서야 비로소 제가 황궁에 당도한 것을 실감했다.
“사내의 몸으로 산실이 차려진 안으로는 들어갈 수 없습니다. 신첩은 여기 있겠습니다.”
“하면 그대는 태화당으로 가는 게 좋겠어. 긴 여정에 피로했을 테니, 돌아가 쉬고 있어라.”
습관처럼 뺨을 어루만지는 황제의 온기는 언제나처럼 다정하고 따뜻했다. 그 손길이 멀어지는 것은 원치 않는다, 그가 오롯이 자신만의 사람이 되어줄 수 없음을 알면서도. 기하는 철없는 바람을 목구멍 안쪽으로 눌러 삼키며 쓰게 웃었다.
“예, 폐하. 하면 신첩은 이만…….”
“가자.”
“예? 어딜…….”
“어디긴 어디야, 그대 처소로 가야지. 가서 망아지 같은 것들 얼굴도 보면서 기다려야겠다. 산실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그대뿐이 아니지 않으냐. 너희는 황후께서 불편함이 없도록 각별히 신경 써야 한다.”
황제의 지엄한 황명에 상궁 나인들은 고요히 읍했다.
산실청에서 그리 멀지 않은 태화당으로 향하는 길 내내 기하는 말을 잇지 못했다. 이것은 분명 세간의 입에 오르내릴 일이 분명했다. 못된 후궁이 황제 폐하의 혜안을 흩트린다며 한동안 입방아에 오르내리겠지.
그래도 상관없다. 지금은, 그저 이렇게 그를 욕심 내고 싶다.
“마마!”
불을 환하게 밝힌 태화당 뜰을 서성이던 정연군의 목소리가 단박에 밝아졌다. 우다다 달려오던 정연군은 그러다 넘어진다는 보모상궁의 만류가 채 끝나기도 전에 요란하게 나자빠졌다. 놀란 기하가 아이에게 달려가려 하자, 당연히 울음을 터트릴 것이라 예상했던 정연군이 벌떡 일어나 다시 뛰어오기 시작했다.
“마마! 마마아.”
기하는 품 안으로 풀썩 뛰어든 아이의 무게 때문에 휘청거리면서도 환하게 웃으며 황자의 등을 다독였다. 이내 코를 훌쩍거리며 가슴팍을 붙잡는 정연군에, 황제가 미간을 찌푸린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마마! 왜 이제 오십니까!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소자가 얼마나 걱정했는데요! 현님이랑 날마다 여기서 마마 기다렸습니다.”
“미안합니다, 황자. 잘 지냈습니까? 식사는 거르지 않았고요?”
“마마 보고 싶어서 다섯 번이나 울었습니다.”
기어이 우는 소리를 내는 정연군 뒤로 다가온 태화당 궁인들은 황제와 기하를 향해 나붓이 절을 올렸다. 무리의 가장 앞에 서 있던 무영군의 얼굴은 며칠 새 퍽 마른 듯했다.
“아바마마, 승전을 감축드리옵니다. 응당 승전하시어 무사히 환궁하실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잘 지냈느냐?”
“예, 소자들은 무탈하게 잘 지냈사옵니다. 무빈마마께서도 이리 무사히 돌아오셔서 다행입니다. 아우가 무척 걱정하였습니다.”
의젓한 무영군의 모습에 황제는 흐뭇하게 웃으며 아이의 어깨를 가볍게 다독였다. 자식을 보고 있으면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르다는 말이 있다더니, 그것은 이런 기분을 뜻하는 것이었을까. 못 본 사이에 부쩍 자란 것 같은 무영군을 보니 마음이 든든해서, 절로 웃음이 샜다.
“이 망아지 같은 놈, 너는 아비는 보이지도 않는 거냐? 어찌 빈의 품에만 그리 찰싹 붙어 있어?”
기어이 정연군의 머리를 쥐어박은 황제가 혀를 끌끌 찼다. 그럴수록 악착같이 기하의 품에 매달려 얼굴조차 들지 않는 정연군의 고집에, 보모상궁은 민망하여 허리도 제대로 펴지 못했다.
“뭣들 하고 있느냐, 상전을 안으로 모시지 않고. 빈이 몹시 곤할 테니 온욕 후에 따뜻한 음식을 내와라.”
“예, 폐하. 이미 준비해 두었으니 안으로 들어가시면 되옵니다.”
종일 상전을 맞을 준비에 박차를 가하던 현 상궁이 읍하자, 황제는 정연군을 품에 안은 기하의 등을 다독였다. 기하는 제 품에서 꼼지락대는 정연군에게서 나는 뽀얀 살 냄새를 맡으며 그제야 비로소 제대로 미소 지었다.
피로 해소에 좋다는 약재 푼 물에 온욕을 하고, 정성 들여 차려낸 상을 받은 기하는 쉬이 수저를 들지 못했다. 피에 절은 갑옷을 벗어 던지고 평소의 차림새로 돌아온 황제 또한 한결같은 모습이신데, 마음 한구석에 무거운 추를 매단 것만 같았다.
황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겨우 두어 숟가락을 떴지만, 도저히 입맛이 돌지 않았다. 근심 어린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현 상궁 시선이 느껴져 한술이라도 더 뜨려고 했으나, 깔깔한 입안은 모래를 씹는 것만 같았다.
“여정이 길어 입맛이 돌지 않나 보구나.”
“마마, 꼬기 맛있는데.”
“이것은 물리고 가벼운 죽을 드심이 어떠십니까?”
무영군까지 한마디 거들자, 현 상궁이 당장에 움직이려는 것이 보였다. 기하는 조용히 그녀를 불러, 되었으니 상을 물리라고만 명했다. 밤도 늦었고, 몸이 노곤해져서 당장에라도 깊은 수마에 빠질 것만 같은 상태였다.
“신첩은…….”
“폐하, 산실청에서 급한 전갈이 왔사옵니다.”
문밖에 있던 상선의 목소리에, 황제는 입을 열다가 멈추고 열린 문을 돌아봤다. 그것은 내내 기하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던 두 황자 또한 마찬가지였다.
“뭐냐.”
황제의 불퉁한 음성에 상선은 그제야 허리를 굽히며 환하게 웃었다.
“경하(敬賀)드리옵니다, 폐하. 황후마마께서 조금 전 황자 아기씨를 순산(順産)하시었다는 전갈이 왔사옵니다.”
“와아! 아우다!”
앉은 자리에서 펄쩍 뛰며 일어난 정연군이 방방 뛰며 상선의 옷자락을 덥석 붙잡았다.
“상선! 나 현님 된 고야? 황후마마께서 아우 낳아주신 거야?”
“예, 저하. 저하께서 형님이 되셨사옵니다. 감축(感祝)드리옵니다.”
답지 않게 함박웃음을 매단 상선의 말에, 황자는 다시 한 번 그 자리에서 폴짝폴짝 뛰었다.
“황후의 상태는 어떠하냐.”
“많이 지치신 듯하오나, 큰 이상은 없다고 하옵니다.”
“그래, 다행이구나.”
“폐하, 어서 산실청으로 가셔야지요. 가셔서 고생하시었을 마마께 힘이 되어 주십시오.”
황제는 철저하게 표정을 숨겼다. 그러나 기하는 알고 있었다. 그의 무감각한 얼굴 뒤에 잔잔히 파동 하는 미소를.
“경하드리옵니다, 폐하.”
“경하드리옵니다, 폐하.”
고요히 일어나 허리를 굽히는 기하를 따라 태화당 상궁 나인들이 모두 발아래 엎드리며 황제께 예를 올렸다. 이는 실로 황실의 큰 기쁨이자, 제국의 경사였다. 그제야 황제는 만개한 꽃과 같은 미소를 지으며, 제게 절을 올리는 기하의 어깨를 다정하게 끌어안았다.
“다정한 황후를 닮거나, 어여쁜 그대를 닮은 딸이었더라면 더 좋았을 걸 그랬다.”
“그런 농은 거두시고, 어서 가십시오. 마마께서 서운해 하시겠습니다.”
“짐이 빈과 잠시라도 떨어지고 싶지 않아 그러한데, 산실청에 함께 다녀오겠느냐?”
“하나, 그것은 법도에…….”
“내 당장 그 망할 법도를 죄다 뜯어고쳐야 함께 가주겠느냐?”
손등으로 기하의 뺨을 훑으며 황제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기하는 웃으며 그저 가만히 머리를 저었다. 황제는 쓸데없는 고집이나 오기를 부리는 성정이 아니었다. 그것을 모르지 않았기에, 그저 못 이기는 척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이 기쁜 순간에조차 자신을 먼저 생각해주는 그 마음이 고마워서, 도저히 그를 밀어낼 자신이 없었다.
황제가 다시 산실청으로 향할 때는, 기하와 두 황자도 함께였다. 이미 소식을 듣고 달려온 후궁들이 산실청 앞뜰에 늘어서 있다가, 황제 일행을 보고는 머리를 조아렸다.
요즘 들어 부쩍 제게 친근하게 대하는, 몇몇 익숙한 얼굴의 후궁들을 향해 손을 흔들던 정연군은 ‘나도 이제 현님이 됩니다!’ 하고 산실청이 떠나가도록 소리를 치다, 기어이 황제에게 시끄럽다며 타박을 당했다.
“신첩은 이곳에 있겠으니 다녀오십시오.”
“그럼 잠시 들어가 황자와 황후를 보고 올 테니, 그대는 여기서 조금만 기다려.”
“예, 폐하.”
기하의 어깨를 다독이며 발걸음을 재촉하는 황제의 뒤로 정연군과 무영군이 따랐다. 정연군은 연신 뒤를 돌아보며 후궁 무리 중 가장 앞쪽에 서 있는 기하를 향해 연신 손을 흔들며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이 귀여워 빙긋이 미소하면서도, 금세 식어버린 온기에 서글픈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어찌 저리 낯이 두껍담? 피는 못 속인다더니,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역심(逆心 : 반역을 꾀하는 마음)을 품은 몸이 어찌 아직 살아 있단 말입니까?”
“쉿, 아직 듣는 귀가 있는데 함부로 떠들어서 되겠나?”
“어차피 자애로우신 황후마마께서 황태자 전하를 순산하시었는데, 저깟 사내야 이제 끈 떨어진 연이 아니겠습니까?”
“그래도 입을 조심해야지. 폐하의 성심이 아직 저치에게 닿아 있지 않은가?”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선 기하는 등 뒤에서 수군대는 그녀들의 말을 한 귀로 흘려들었다. 무시할 수도, 그렇다고 대꾸할 수도 없는 말은 차디찬 칼날로 변해 가슴을 찔렀다. 그래도 반박할 수는 없었다.
그녀들이 하는 말은 모두 옳다. 아무리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린다고 해도 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더러운 피, 그들은 제 어머니의 피가 더럽다고 했다.
“마마님들께서는 금룡대 그림자를 직접 보고 싶으십니까?”
임승지의 능글거리는 말투에 속닥거리던 후궁들이 고개를 돌렸다. 그는 황제를 모시는 금룡대의 수장이자, 그림자의 우두머리다. 황제와 합궁할 때마다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쳐다보던 임승지와 눈이 마주친 적이 한두 번씩은 있었으니, 그녀들로서는 그를 마주할 때마다 묘한 불편함과 민망한 기억이 함께 떠올랐다.
“그것이 무슨 말씀입니까?”
“폐하께서 감히 무빈마마를 함부로 입에 올리는 자들은 직접 그림자를 보내시겠다고 하명하시었는데, 어찌 두어 시진도 지나지 않아 그것을 잊으셨단 말입니까? 재색(才色 : 여인의 재주와 아름다운 용모)이 뛰어나지 않아 총애받지 못하면 눈치라도 있어야지, 저리 아둔해서 후궁 자리나 제대로 지킬는지……, 쯧.”
“임 대장!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요? 아무리 총애 잃은 후궁이라 하나, 우리는 엄연히 폐하의 여인인데 어찌 이리 무례하오?”
바락 소리치는 그녀들을 향해 승지는 기가 막힌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매끈한 턱을 손끝으로 문질렀다. 저 세상모르고 날뛰는 어린 여인들의 꼴을 보고 있으려니 속이 터질 것 같다.
“총애를 잃어요? 아니 언제 총애를 받으셨다고 그걸 잃습니까, 잃길? 설마 소장과 그림자가 모두 지켜보는 가운데 합궁 두어 번 하였다고 그것을 총애라 여기는 것은 아니시겠지요? 아, 혹시 그림자 중에 마음이 동한 아이들이 있으십니까? 그렇다면 방법이 잘못되었습니다. 그런 일이 있을 때는 소장에게 직접 말씀하셔야 적적한 궁 생활에 도움을 드릴 것이 아닙니까? 뭐, 소장의 부하들에게도 여인 보는 눈과 취향이라는 게 있어 그게 가능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능글거리며 웃기만 하는 임승지를 향해 기어이 바락 소리를 지르던 후궁의 입을 다른 여인이 막았다. 이곳은 황후가 머무는 산실청이고, 금일은 황후께서 황제 폐하의 적자를 생산(生産)하신 날이 아니던가.
“임 대장.”
“예, 마마. 하문하시옵소서.”
보다 못한 기하가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며 임승지를 불렀다. 바들바들 떨며 임승지를 죽일 듯이 노려보던 후궁들은 무표정한 기하를 향해 이를 갈며 속으로 저주를 퍼부었다.
“더는 소란을 떨지 마세요. 이곳은 산실청입니다.”
“예, 마마. 명심하겠나이다.”
“그대들은 당장 황후마마를 알현할 수 없음이니, 그만 처소로 돌아가도록 해. 이리 몰려와 소란을 떤다면 폐하께서 크게 역정 내실 것 같으니까.”
누구도 쉬이 입을 열지 못했다. 고운 얼굴을 잔뜩 찌푸린 여인들은 저마다 옷자락을 움켜쥐고 서로 눈치만 보다가 예도 제대로 올리지 않고, 황급히 각자의 처소를 향해 움직였다.
여전히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로 서 있던 기하는 그저 두 눈을 아래로 내리깔고 그녀들이 움직이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한바탕 소란스럽던 산실청 뜰은 삽시간에 찾아든 적막으로 바람 부는 소리만이 간간이 들렸다.
밤이 깊었다. 유난히 환한 달과 별이 황실의 경사를 축복하는 것만 같았다.
“폐하.”
어의녀에게 진맥 받던 황후는 가련하게 몸을 떨며 황제를 바라봤다. 그녀는 수척해진 얼굴로 지친 듯 누워 있던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황제는 손을 내밀어 그것을 저어했다.
“고생했소. 무엇보다 그대가 이리 무탈하여 정말로 다행이오.”
“승전하신 폐하를 이리 누워 뵙는 무례를 용서하시어요.”
“그런 생각은 하지 말고, 어디 불편한 곳은 없소?”
“예, 폐하.”
“황후마마, 경하드리옵니다!”
“고맙소.”
씩씩한 정연군을 바라보며 미소하던 황후는 조그만 목소리로 경하드립니다, 하고 중얼거리는 무영군에게 손을 내밀었다.
힘이 약해 늘 먼 곳에서 무영군을 바라보기만 했던 그녀는 유난히 아이에게 마음이 쓰였다. 자신의 아들을 끊임없이 경계하였던 이 어린아이가 마냥 밉지만은 않았다. 믿고 의지하던 영빈에게 버림받은 것이나 진배없다 생각하면, 그저 가엾고 안타까웠다. 지금 이 아이는 얼마나 불안할까. 그리 생각하니 절로 손이 갔다.
“말 안 듣는 아우가 더 늘어 우리 무영군이 머리가 아프진 않겠지요?”
미소하는 황후를 향해 무영군은 희미하게 웃었다. 그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던 황제가 주위를 둘러봤다.
“황자는?”
“이쪽에 계십니다, 폐하.”
“어디 보자.”
일찌감치 황자의 유모로 낙점된 최 상궁이 고운 수가 놓인 포로 단단하게 싸인 아이를 황제의 품으로 건넸다. 아직 태열이 가시지 않은 아이는 너무도 작았다. 꼭 감긴 눈과 작은 코, 분홍빛 입술은 사내아이라기보단 계집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너무도 어여쁜 아기씨이십니다. 황자 저하십니다, 폐하.”
아이를 품에 안고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황제가 희미하게 미소했다. 작구나. 연약하고, 희미했다. 이렇게 품 안에 있음에도 무게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라니, 놀란 가슴이 벌벌 떨릴 정도였다.
“소자도 볼 것입니다! 소자도요!”
“쉿. 그리 떠들면 아우가 놀라지 않느냐.”
무영의 타박에도 정연은 연신 발을 동동 구르며 황제의 옷자락을 잡고 흔들었다. 다정하게 아이의 뺨을 손가락 끝으로 살짝 누른 황제는 찬찬히 아들의 모습을 눈 안에 담았다.
“네가 우리 막내로구나. 자주 찾아오지도 않은 무정한 아비라 목소리를 듣고 혹여 놀라진 않겠지?”
소록소록 잠든 아이의 얼굴을 황자들에게 향하게 했다. 그제야 황자들은 놀라움 가득한 얼굴로 쭈뼛거리며 웃었다.
“아우야, 현님이야. 내가 현님이야, 아우야.”
“그리 크게 말하면 아우가 놀란다니까?”
“현님, 아우가 너무 작아요. 소제보다 훨씬 작지요? 네?”
머리를 맞댄 채 손으로 만든 인형만큼 작은 아이를 내려다보는 세 남자를 바라보며, 황후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한때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모습이 아니던가. 저렇게 다정하게 마주 서 있는 아버지와 아들들을 보니,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도 걱정은 없을 것 같다.
“인사하거라, 무영, 정연. 네 아우다. 너희가 지켜줘야 할 어린 아우이니, 앞으로 잘 부탁한다.”
“예, 아바마마.”
“예! 소자가 만날 놀아줄 겁니다! 맛난 것도 나눠 먹고요!”
“그래. 아직은 너무 어리고 약하니 지나친 애정은 잠시 넣어두어라.”
아무리 말해도 지금은 별로 들을 생각 없어 보이는 정연군의 바라보던 황제가 유모의 품으로 아이를 넘겼다.
“상선 밖에 있느냐.”
“예, 폐하. 상선 예 있사옵니다.”
“황후에게 노비 100명과 논 50마지기, 말 다섯 마리, 비단 50필에 금 열 괴, 진주, 비취, 호박, 산호를 각각 내린다. 또한 황후의 친정인 동남성으로 쌀 500섬을 보내 황후의 이름으로 백성들에게 고루 나누어주라 이르고, 오늘 밤 이후부터 열흘간 각 관청으로 백성들을 초청하여 배불리 먹고 마실 수 있게 하라.”
“예, 폐하. 분부 받잡겠사옵니다.”
황제는 몹시 만족스러운 얼굴로 황후를 돌아보다 멀뚱히 서 있는 아들들과 눈을 맞추려 무릎을 굽혔다.
“폐하, 그것은 너무도 과합니다.”
“과하지 않아. 짐이 그동안 그대에게 제대로 신경 쓰지 못했음을 인정하는 미안함의 표시이니, 기쁘게 받아주었으면 좋겠소.”
두 눈을 깜빡이는 동그란 얼굴의 정연군과 어릴 적 제 모습과 지나치게 닮아 신기하기만 한 무영군을 번갈아 바라보던 황제가 품 안으로 아이들을 끌어당겨 안았다.
“아비가 못나, 너희에겐 그리 해주지 못했다.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다. 하나, 너희와 막내는 아비에게 모두 똑같이 소중하고 애틋하다. 아비 말을 이해하겠느냐?”
“예, 아바마마.”
“예! 현님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래? 형님이 무어라 하더냐?”
“아바마마께서는 소자들을 어여삐 여기시니, 큰 잘못을 하지 않는다면 절대로 내치지 않으실 거라고 하셨습니다.”
쉬지도 않고 쫑알거리는 정연을 원망스럽게 바라보던 무영은 부루퉁한 얼굴로 눈썹을 씰룩거렸다.
“무영.”
“예, 아바마마.”
“자식을 내치는 아비는 없다. 너희가 아비에게 무슨 죄를 짓겠느냐. 아프지나 마라. 그것이 부모에게는 가장 큰 불효니라.”
“예, 명심하겠습니다.”
누군가를 만나면서 삶이 뒤바뀌었다. 아이를 품으로 안을 수 있게 되었고, 그렇게 아버지로 거듭났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후회뿐인 삶이다. 어째서 이토록 애틋한 아이들을 진작 바라보지 않았을까. 상처로 가슴이 너덜너덜해진 아이들을 어찌 그리 내버려 두었을까.
그러면서도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이 아이들을, 지금이라도 품을 수 있게 되어서. 영영 놓쳐버리기 전에 따뜻하게 안아주며 아비 노릇을 할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이고, 또 얼마나 안심인지. 그래서 그에게 얼마나 고마운지 말로는 헤아릴 수가 없었다.
“한데, 무빈은 어찌 함께 오지 않았습니까?”
“산실청에 들어올 수 없다더군. 법도가 그러하다던데.”
“하면, 신첩이 다시 자경전으로 거처를 옮기면 가장 먼저 무빈을 볼 것입니다. 폐하, 신첩은 무빈이 걱정입니다.”
“그래. 짐도 그가 걱정이야.”
억지로 웃고 모습이 얼굴을 떠올리기만 해도 마음이 차게 식는다. 바보 같은 것, 어리석은 것. 차라리 원망을 쏟아내고 밉다고 욕할 것이지. 괜찮다면서 제대로 울지도 못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마음이 무너지려 한다.
“상심이 클 테니, 폐하께서 잘 보듬어 주시어요. 무빈의 마음이 깊어, 쉬이 내색조차 하지 않을 겁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감자, 금세 말간 얼굴이 눈앞에 차오른다. 늘 웃게만 해주고 싶었는데, 영영 끊어낼 수 없는 악의 고리는 지나치게 그를 힘들게 했다. 언제쯤 괜찮아지려나. 언제쯤 어여쁘게 웃어주려나.
‘기하야.’
미처 닿지 못한 이름이, 황제의 입술 위로 선선히 맴돌았다.
“마마, 폐하께서 조금 지체하시는 듯하온데, 먼저 태화당으로 돌아가 쉬시는 게 어떻습니까.”
“괜찮습니다. 기다리겠다고 폐하께 약조하지 않았습니까.”
표정 없는 기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임승지는 단정하게 틀어 올린 제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는 지나치게 초연했다. 아비를 잃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음에도 동요하지 않고, 오히려 황제의 치료에만 전념하며 황궁으로 향했다. 그 모습이 안심되면서도 불안했다. 며칠 새 수척해진 얼굴은 금세 쓰러질 듯 퍽 위태로워 보였다.
“대장.”
어디선가 불쑥 나타난 금룡대가 임승지를 불렀다. 목소리를 낮추고 귀엣말을 속삭인 부하는 잘 접힌 종이를 내밀고 그의 명을 기다렸다.
“언제 당도한 것이냐?”
“풀자마자 가져온 것입니다.”
황제께서 친히 길들인 전서응이 조금 전 황궁 담을 넘었다. 승지는 밀려드는 불안감에 사납게 일렁이는 가슴을 짓누르며 천천히 접힌 종이를 펼쳤다. 미처 참지 못한 숨이 그의 입 밖으로 터져 나왔다.
아아, 결국……. 한데, 이 일을 어쩐다.
슬그머니 주위를 돌아보던 승지는 꼿꼿하게 선 채로 앞을 보고 있는 기하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어찌해야 하나. 언젠가는 알게 될 일을, 폐하께서 직접 전달하시려면 괴롭지 않으실까.
“임 대장.”
“예? 아, 예. 예, 마마.”
“내게 할 말이 있습니까?”
기하의 음성은 퍽 고요했다. 평소의 그의 밝은 성정과는 어울리지 않는, 지나치게 낮고 차분한 목소리였다. 밀려드는 어지러운 생각에 제 턱을 쓰다듬던 승지는 큰 결심이라도 한 듯 숨을 내쉬고 그의 앞으로 다가왔다.
어차피 벌어질 일이라면―.
“조금 전, 문정에서 전서응이 날아왔습니다.”
“…….”
“폐하께서 명하시길, 조금도 지체하지 말고 서연의 생사를 확인하라 하시었습니다.”
황제는 서연의 죽음을 입에 담지 않았다. 제 눈앞에서 그가 추락할 때도, 까마득한 절벽 아래로 떨어진 그가 모습을 감춘 후에도, 그저 그의 실종을 안타까워할 뿐이었다.
“서연을 찾았습니다. 황진강 중턱에서, 그의 시신이 떠올랐다고 합니다.”
결국, 그리될 거라고 모두가 예상하지 않았던가. 그래, 그럴 것이라 생각했다.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그 높은 곳에서 떨어져 살아났을 리가 없다. 당연히 예감했다. 설령 살았다 한들, 감히 황제 폐하를 해하려 한 죄를 어찌 달게 받을 수 있을까.
“마마.”
“오늘 밤은, 폐하께 알리지 않는 편이 좋겠습니다.”
담담한, 지나치게 무감각한 기하의 반응에 당황한 임승지는 입술을 제대로 떼지 못했다. 그는 짧게 한숨을 내쉰 채 고개를 떨어뜨렸다.
눈물이나 분노, 혹은 가슴을 내리치는 서글픔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흘리듯 한숨을 쉬고, 입술을 바르르 떨 뿐이었다. 그 모습이 너무도 처연해서 승지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더할 나위 없이 기쁜 날이니, 폐하의 성심을 흩트리지 마세요.”
“예, 명대로 하겠습니다.”
“내 너무 곤해서 그러는데, 금일은 폐하께서 수신전에서 침수 드실 수 있게 권해 주겠습니까?”
“예, 마마. 그리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하면, 나는 이만 처소로 돌아갑니다.”
지체 없이 돌아서는 기하를 붙잡지 못했다. 그는 홀로 조용히 움직이려 들었다. 남아 있는 그림자를 향해 눈짓하자 명을 받은 그들은 재빠르게 기하의 뒤를 따랐다. 갑자기 제 뒤로 달려든 인기척에 잠시 움찔하던 그는, 이제는 익숙해진 풍경에 발을 멈추지도 않았다. 점점 멀어지는 기하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승지는 끝끝내 낮은 탄식을 내질렀다.
“정녕 그리 말했다고?”
“예, 폐하. 무척 곤해 보이시어 그림자를 따르게 했습니다.”
흐음. 황제는 낮은 숨소리를 내며 매끈한 턱을 손끝으로 문질렀다. 황후의 상태는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으나, 하루 하고도 반나절이 넘도록 진통하여 겨우 황자를 생산한 그녀를 홀로 두고 나올 수는 없었다.
더욱이 밤이 깊어지자 황자가 울고 보채기 시작하여, 더더욱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바깥에 홀로 두고 온 기하 생각에 상선을 시켜 안으로 들이라 했을 때, 그는 이미 처소로 돌아갔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다행이라 생각하면서도 미안한 마음에 표정이 굳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도 그렇지, 짐더러 수신전에서 침수 들라 했다니. 혹 마음이 상해 보였더냐?”
“그런 기미는 보이지 않으셨습니다.”
“그래. 하긴, 빈이 그리 옹졸한 성정은 아니……, 한데. 너는 표정이 왜 그따위냐?”
문득 뒤를 돌아보던 황제는 미간을 찌푸리며 승지를 향해 반문했다.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어슬렁거리던 그는 황제와 눈도 제대로 맞추지 못하고 움찔거리며 딴청을 피웠다.
“사실대로 고해. 무슨 수작을 부리는 거냐?”
수신전으로 향하던 발을 멈춘 황제가 승지를 향해 버럭 소리쳤다. 밤이 깊었으나, 황궁 곳곳엔 불을 환하게 밝히고 이른 아침부터 치를 연회 준비에 한창이었다.
분주하게 오가는 불빛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승지는 결국 한숨을 푹 내쉬며 제 머리를 벅벅 긁었다. 아무리 모른 척하려 해도 그 표정이 잊히지 않는 탓이었다.
“임승지.”
“서연의 시신을 찾았습니다. 황진강 중턱에서 그의 시신이 떠올랐다고 합니다.”
황제의 눈썹이 사납게 찌푸려졌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승지를 응시했다.
“무빈마마께, 소장이 고했사옵니다. 마마께서는, 기쁜 날이니 폐하께는 고하지 말라 말씀하시고는 처소로 돌아가셨……!”
숨이 턱 막히는 느낌에 임승지는 눈을 꽉 감았다. 멱살을 잡은 황제의 손이 분노로 떨렸다. 곧이어 발길질을 당하거나 흠씬 두들겨 맞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던 승지는 맥없이 풀리는 힘의 반동 때문에 한 걸음 물러서고야 말았다.
“태화당으로 갈 것이다.”
“하지만, 폐하. 마마께옵서 금일은…….”
“태화당으로 간다.”
귀한 시간을 방해하고 싶지 않은 기특한 마음은 잘 알겠다. 그 어여쁜 마음을 어찌 탓할 수 있을까. 하나, 그렇다고 해도 복잡한 마음에 무너질 그를 혼자 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황제의 긴 행렬이 태화당 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화가 난 듯 성큼성큼 나아가는 황제의 걸음을 미처 따르지 못한 상궁들이 치맛자락을 붙잡고 분주하게 발을 움직였다.
한참을 걸어서야 당도한 태화당은 여느 때와 다르게 불이 모두 꺼진 채 고요함 속에 파묻혀 있었다. 지밀상궁과 상선이 아랫것들에게 눈짓하며 황제의 행차를 알리려 하였을 때, 문이 열리며 현 상궁이 뛰어나와 예를 올렸다.
“송구하옵니다, 폐하. 행차하신다는 전갈을 미리 받지 못하여, 우를 범하였습니다.”
“빈은.”
“산실청에서 돌아오신 후에 곧장 침수 드셨습니다.”
“번잡스러우니 따를 필요 없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계단을 오르는 황제의 모습을 의아하게 바라보던 현 상궁은 고개를 갸웃하며 그의 뒤를 따랐다. 몹시도 곤한 얼굴로 금일은 폐하께서 행차하시지 않을 테니 물러나 쉬라는 상전의 명에, 태화당은 일찌감치 어둠에 잠긴 터였다.
혹여 두 분께서 다투시기라도 하시었나. 분명 이곳을 나가실 때는 그런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으셨는데 이상한 일이라 생각하던 현 상궁은 기하의 침소 앞에서 발을 멈추고 황제를 향해 나붓이 절을 올렸다.
“홀로 들어갈 테니 신경 쓸 것 없다.”
“예, 폐하.”
침소 바깥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마도 어딘가에 숨어 있을 그림자를 신뢰하는 탓인지, 오늘따라 문밖에 나인조차 두지 않은 스산한 풍경에 황제는 입술을 즈려 물었다.
천천히 문이 열렸다. 혹여 홀로 잠들어 있던 기하가 소란에 일어나기라도 할까 봐, 가능한 한 소리를 내지 않고 조용히 안으로 들어오던 황제의 발이 우뚝 멈췄다.
불도 켜지 않은 캄캄한 방 안은, 흐릿한 달빛이 들어와 겨우 사물을 식별할 수 있었다. 침상 한가운데에 우두커니 앉은 채로 제 입을 틀어막고 덜덜 떠는 기하의 그림자에, 황제는 치밀어 오르는 무거운 감정을 꿀꺽 삼켰다. 그는 분명 울고 있었다. 차마 소리도 내지 못했으나, 스스로 가슴을 내리치며 옷자락을 붙잡고 서러운 눈물을 쏟아냈다.
더는 바라볼 수 없어 한달음에 다가가 허물어진 몸뚱이를 끌어안자, 놀라서 버둥거리는 모습이 몹시도 애틋했다. 아프고, 서러웠다.
“나다. 짐이다. 안심해, 괜찮다.”
바보처럼, 어찌 이리 미련하게 혼자 있어. 누가 감히 네게 무슨 말을 한다고 몰래 숨어서 우느냐. 소리라도 낼 것이지, 가슴은 왜 치고 있느냐. 이 어리석은 것, 이 바보 같은 것.
“기하야, 기하야.”
달달 떨리는 손이 그제야 황제의 어깨를 끌어안는다. 눈물에 젖은 뺨을 제 얼굴에 문지르며, 황제는 연신 그의 등과 머리를 쓰다듬었다. 애처롭게도 떤다. 안쓰럽게도 운다.
“어찌 홀로 있어. 짐을 불렀어야지.”
“륜…….”
“그래, 여기 있다. 너의 륜이다.”
“아버님이, 아버님께서…….”
“그래, 들었다. 실컷 울어도 된다. 아프다고 말해도 괜찮다. 아무도 너를 탓하지 않아.”
“가슴이, 찢어질 것 같습니다. 아픕니다. 아파요.”
그제야 서럽게 터지는 울음을 막아서지 않았다. 터지는 눈물을 참지 못하고 기어이 제 가슴을 쥐어뜯는 기하의 손목을 붙잡고 어깨를 다독이던 황제는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정인을 위해 침음(沈吟)하며 품을 내어주어야 했다.
시영(施領)제 6년. 현명하고 자애로우며, 백성들에겐 선망의 대상이었던 북성(北城)의 제후(諸侯) 서연. 그는 두 황제를 성심을 다해 모신 충신이자, 제국의 안위를 위해 크고 작은 전투에 직접 참전해 혁혁한 공을 세우기도 한 위대한 장수였다.
피폐해진 북성의 간신들이 그를 위협해 사지로 내몰자 스스로 볼모가 되어 사특한 무리를 대 초원 문정으로 이끌었고, 잔악한 그들을 모두 전멸케 한 후, 그 또한 장렬한 죽음을 맞이했다.
하나뿐인 총비의 아버지이기도 한 서연의 죽음에 시영(施領)제께서는 몹시 통탄하시며 그의 넋을 기리시니, 북성의 백성은 보름 밤낮을 통곡하며 슬퍼하였더라.
새로운 북왕의 자리에는 서연의 장자이자 세자였던 창현(昌賢)군 서진하가 오르니, 그는 더욱이 백성을 중하게 여기며 민생에 힘쓰고 제국에 충성을 다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