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장 여명(黎明)
고잔의 밤은 빨리 찾아왔다. 그들은 비가 그친 초원 끝자락에 서서 뜨겁게 불어오는 모래바람을 맞았다. 문정과 고잔이 맞닿은 절벽 아래에서는 거대한 폭포가 우렁찬 소리를 내며, 어디서 흘러왔는지 모를 물을 쏟아내고 있었다.
멀리, 황제의 정찰병이 그를 향해 말을 몰았다. 사방이 고요함 속에 파묻혀, 불과 언덕 하나 아래에서 전쟁이 나고 있음을 느낄 수도 없었다.
“말씀하신 대로 폭포 근처에 누군가가 매복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믐달이 뜬 밤하늘은 먹구름이 가득했다. 이곳으로 향하는 짧은 시간 동안 황제 일행은 두 차례나 습격을 받았고, 그때마다 훌륭하게 적들을 찌르고 베었다.
악에 받친 자들이 내는 괴이한 소리가 나중에는 너무도 시끄러워, 단단한 갑옷에 피가 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은 황제는 직접 검을 들어 그들의 머리를 하나하나 베었다. 덕분에 그의 하얀 얼굴과 단단한 손, 그리고 갑옷 여기저기에 더운 피가 스며들었다.
그것은 완전무장한 그림자들 또한 마찬가지라, 그들은 그제야 제법 전쟁다운 전쟁의 그림이 그려지는 것 같다며 비릿한 피 냄새를 즐겼다.
“폐하?”
황제는 말에서 풀썩 뛰어내려 뚜벅뚜벅 걷기 시작했다. 당황한 금룡대가 그의 뒤를 따르려 했으나, 황제가 손을 들어 저지하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발만 동동 굴렀다.
“그림자만 따르라.”
그림자라고 해봤자 고작 여섯이 전부였다. 그들은 민첩하게 황제의 뒤를 따르면서, 멀뚱히 자신들을 바라보는 금룡대를 아쉬운 눈으로 돌아봤다.
“명을 할 때까진 누구도 나서지 마라.”
그림자는 본디 말이 없다. 황제가 특별히 명을 내리지 않는 이상, 그들은 재빨리 움직이며 황제의 수족 노릇을 할 뿐이었다.
승지가 곁에 있었더라면, 말도 안 되는 짓을 저질러서라도 황제의 신변을 보호하려 했을 것이다. 물론 그것은, 목숨이 아홉 개라고 불리는 임승지의 특권 아닌 특권이었고.
먼저 발을 멈춘 것은 황제의 그림자였다. 그들은 폭포가 흐르는 언덕 아래 바위 귀퉁이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누군가의 그림자를 발견하고는 저마다 무기를 손에 쥐었다. 황제가 손을 들자, 그림자는 몸을 낮췄다.
천천히 바닥으로 가라앉는 그들을 만족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던 황제는 폭포 쪽으로 등을 돌린 채 앉아 있는 서연의 뒷모습에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못 본 새에 부쩍 말라, 볼품없는 노인의 모습이었다. 구부정한 등과 왜소한 뒷모습이 그를 서글프게 보이게 했다.
저벅저벅, 그를 향해 걸어가는 내내 불편함으로 가득 찬 심장이 지끈거렸다. 사실 황제는 지나친 관대함으로 가까스로 살인적인 기운을 억누르는 중이었다.
상대는 서연이다. 자신의 가족, 더 나아가 제국의 주인이신 아바마마와 어마마마, 분명 뛰어난 성군이 되셨을 형님까지 몰살한 간악한 폐비를 도왔던 남자. 그런 주제에 선황의 약속을 빌미 삼아 홀로 살아남았던 파렴치한 남자. 열 번이고 백 번이고, 갈기갈기 찢어 죽여도 시원찮은 남자. 그것이 서연이다. 북성의 주인이었던, 하나뿐인 정인의 아버지.
“격조하였습니다, 폐하.”
서연은 등을 돌린 채로 자그맣게 중얼거렸다. 쏟아지는 폭포에 가려진 목소리는 전보다 힘이 없고 소리가 작았으나, 그는 전혀 신경 쓰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는 늘 태연했고, 황제는 그것이 못내 못마땅했다. 이래서는 그때와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마지막으로 남기는 전언이 꽤 마음에 들어서 직접 오긴 했는데, 함정이라면 너무 빤히 보이는 수이니 조금 더 분발하도록 해.”
“소신이 어찌 폐하를 상대로 함정을 파겠습니까.”
“그대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지.”
“그거야 승산이 있는 쪽일 때나 그렇지요.”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서연의 얼굴은 형편없었다. 움푹 팬 두 눈은 붉은 핏발이 서 있었고, 종일 비에 맞은 것인지 더러워진 옷자락은 사막의 찬바람에 펄럭였다. 꽤 차고 매운바람이었기에, 그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이가 시렸다.
“묻고 싶은 것이 있어 왔다.”
서연은 불경스럽게 황제의 앞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그를 무심한 눈으로 올려다봤다. 전에는 자세히 보지 않아 몰랐었는데, 이렇게 얼굴을 마주하고 있으니 자꾸만 저 언덕 끝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기하 생각이 났다.
“소신은 달리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덤덤한 서연의 음성에도 황제는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그가 평범한 황자이던 시절, 생각해보면 황제는 서연을 무척 좋아했었다. 기꺼운 의도로는 딱 한 번이었지만, 처음 방문한 북성은 굉장히 인상적이었기에 서연은 훌륭한 성군일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는 자애로운 왕이었으며, 백성들에게 두터운 신망을 받고 있었으니까.
“짐은 그대를 살려줄 생각이야.”
“소신은 목숨을 구걸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것은 그대가 정할 일이 아니다. 그대의 죄를 용서하는 것도, 그대의 목숨을 쥐고 흔드는 것도 짐이다. 그러니 허튼 수는 그냥 넣어둬.”
마음은 금세 변한다. 관용이 지나치면 결국 원망만 남을 뿐이다. 그것이 커지면 방종이 되고, 그 끝에 남겨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들은 모두 한순간에 소중한 것을 잃었다. 그리고 또, 잃을 것이다.
“달이 참 밝습니다, 폐하.”
서연은 빙긋이 웃었다. 웃는 모습이 누군가를 떠올리게 해서, 황제는 쉬이 입을 열지 못했다. 하늘은 더욱 컴컴해졌다. 이제는 달빛이 너무도 흐려 먼 곳은 잘 보이지 않았다.
서연은 거짓을 고하는 중이었다. 그는 사력을 다해 마지막 힘을 쥐어짜내려는 사람 같았다. 황제의 두 눈이 낮게 드리워졌다. 사나운 바람이 두 사람 사이를 매섭게 훑었다.
황제의 자리는 늘 고독한 것이다. 태어날 때부터 고귀한 황족으로 자라온 그가 뜻하지 않게 황위를 물려받았을 때도 기쁘지 않았던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다. 나라도, 백성도, 혈육도, 정인도. 누구 하나 애틋하지 않은 것이 없다.
삶은 매일이 선택이고, 그 선택으로 인해 누군가는 불행에 빠지기도 한다. 삶이 통째로 뒤틀리기도 한다. 그런 삶을 살아가며 행복을 바란다면, 그것은 지나친 처우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그 아이를 만나기 전에는.
“그대는 이미 충분히 부끄러운 아비가 아니냐. 파렴치한 왕이고, 몰상식한 군주다. 그러니 어울리지 않는 짓은 집어치워.”
“이제 와 목숨을 구걸한들 달라지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서연은 꼭 죽은 사람처럼 창백한 낯빛으로 희미하게 웃었다. 손을 뻗으면 금세 사그라질 뿌연 안개 같아, 황제는 물끄러미 그를 바라봤다.
“뜻하지 않게 부모를 잃는 것이 어떤 심정인지, 그대는 알고 있나.”
“폐하께서 그리 뜨거운 심장을 가진 분이신 줄은 소신도 미처 알지 못했습니다.”
서연은 즐거운 이야기라도 꺼내는 것처럼 해사하게 웃으며 천천히 제 턱을 쓰다듬었다. 바람이 불었다. 잦아들 줄 모르는 폭포 소리에 그의 말소리가 희미해졌다. 달빛은 더욱 짙어졌으나, 그만큼 먹구름이 가득했다. 밤하늘은 검었다. 마치, 아무리 들여다봐도 속내를 알 수 없는 서연의 마음처럼.
“사려 깊고 다정한 아이지요. 애정에 굶주린 가련한 아이고요. 미련하게 고집이 센 아이이기도 합니다.”
“그대가 유일하게 잘한 일이기도 하지. 내 빈을 내게 보낸 일 말이다.”
황제는 진심이었다. 서연의 간악무도한 죄는 씻을 수 없는 것이나, 더없는 아량을 베풀어 조용하고 소박하게 여생을 보내게 할 셈이었다. 하나뿐인 정인을 보내주었으니, 평생 외로움 속에 허덕이다 죽었을지도 모를 제 삶을 구원해주었으니, 그것은 용서가 아니라 보은(報恩)이라 생각했다.
“그 아이는 태양처럼 빛나니, 언젠간 폐하께서 마음을 내어 주실 거라고 생각했지요.”
어느 곳에 있어도 찬란하게 제 빛을 뿜을 줄 아는 아이였다. 정신이 아득하게 번지던 나날 중, 문득 돌아보면 아이는 빛을 내어주지 않아도 타고난 밝음으로 주위의 애정을 독차지했다.
제 눈에 들기 위해 피나게 수련하며, 정작 눈앞으로 와서는 수줍게 웃기만 하던 어린 아들에게 한 가장 큰 칭찬은 그저 머리를 쓸어주는 것뿐이었다.
“때가 되면 그 아이를 앞세워 폐하께 위해를 가하리라 생각했지요. 혹여 폐하께서 그 아이에게 마음 한 톨 내어주지 않으신다면, 그 아이 자체를 검으로 삼으리라 그리 계획했습니다.”
서연은 긴 한숨처럼 혼자서 중얼거렸다. 그 표정이 퍽 아득해 보여, 황제는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한 채 우두커니 서서 바람 소리에 섞인 그의 음성에 귀를 기울였다.
“모두 부질없는 일이었습니다. 그 아이 성정을 그리 잘 알면서, 너무 쉽게 생각한 소신의 불찰이었습니다.”
그 아이는 죽은 제 어미를 꼭 빼닮아 곱고 고운 마음에, 신(臣)에게 물려받은 것이라고는 대쪽 같은 고집뿐이었습니다. 눈길을 주기는커녕 온갖 모진 말로 가슴을 헤집어도, 늘 웃기만 하는 아이지 않습니까. 미움을 받을 줄 알면서도, 옳은 일이 아니라면 꺾을 줄 모르는 기백을 가진 아이지 않습니까. 그런 아이를 어찌 다시 바로 볼 수 있단 말입니까.
“서연.”
“하문하소서.”
“죽지 마라. 그대가 지은 죄, 평생 속죄하면서 살라. 속죄한다고 없어질 죄도 아니니, 그냥 숨만 쉬고 살아라. 더는 그대 아들들에게, 기하의 가슴에 비수를 꽂지 마라.”
“폐하.”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간 서연의 눈동자가 선하게 빛났다. 처음 북성을 찾아가 마주했던 따뜻한 눈빛, 그것이었다. 황제는 문득 이상한 기시감을 느끼며 두 눈을 가늘게 떴다.
“그대 혹시…….”
“정신이 온전히 붙어 있을 때, 여기서 멈추게 해주십시오.”
가장 두려운 것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더러운 모습으로 생을 끝내는 것이었다. 비록 따뜻한 애정을 주진 못했으나, 세상 어디에 내놓아도 자랑스러울 두 아들을 기억하고 싶었다.
평온한 죽음 따윈 바라지 않는다. 삶을 이리 엉망진창으로 만든 그녀를 원망할 생각도 없다. 일생, 모든 것을 다 주어도 아깝지 않다고 여긴 여인은 오직 그녀뿐이었으니 후회는 없다. 마음이 쉬이 접히는 것이 아니라… 삶이 이토록 어리석음뿐이라……. 그저 미안하고 또 미안한 사람들을 기억하며 떠나고 싶다.
“폐하.”
“나약한 소리 집어치워라. 그 정도도 싸워서 이기지 못할 사내였나? 지금 이 꼴이 뭐냐. 천하의 서연이 어찌 이딴 비루한 꼴로 죽음을 생각해?”
“평생, 그 아이에게는 비밀로 해주십시오.”
“그런 청은 그대가 직접 하라. 찾아가 잘못을 빌어. 용서를 구해.”
“정신이 나간 파렴치한 아비는 끝끝내 용서를 구하지 않았으니, 죽음으로 갚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태연한 서연의 얼굴이 달빛에 비쳤다. 시커먼 먹구름이 사그라진 하늘엔 별이 총총히 떠 어찌나 어여쁘던지. 황제는 손에 쥔 검집을 곧추 잡았다. 여차하면 그대로 서연에게 상처라도 입힐 셈이었다.
“한때는, 평생 마음에만 담아 두었던 정인을 데리고 간 선황을 원망했습니다. 사지가 찢긴 그녀를 품에 안고, 매일 분노에 떨었지요. 그러다 이내 정신이 들면 그녀의 악행이 떠올라, 하늘 아래 눈을 제대로 뜰 수도 없었습니다.”
매일 반복이었지요. 북성이 온통 피로 물들면 그 죄가 씻길까 싶다가도, 신의 어리석음을 그 무엇으로도 씻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지요. 그것의 연속이었습니다. 분노하고, 비탄에 잠기고, 원망하고, 수치스러워하기를 반복할 뿐이었지요. 신은 이제 지쳤습니다, 폐하. 더는 내일의 태양이 뜨지 않기를 바랍니다.
“모든 것이 없던 일이 되지는 않을 테지요. 아마 그 아이는, 신을 용서할 것입니다. 홀로 괴로워하다 결국 먼저 찾아와 손을 잡아줄 것입니다. 시간이 흐르면, 그렇게 잊힐 것입니다. 모두가 평온하고, 어쩌면 신 또한 여생을 평온하고 즐겁게 살아갈지도 모릅니다.”
신이 그럴 자격이 있습니까? 아니 되지요. 그리 살면 아니 되지요. 사람인지라, 신 또한 사람인지라 자꾸 욕심이 나지만, 그러면 아니 되지요.
서연은 푸른 달빛을 받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폭포수가 잦아든다는 착각이 들 만큼 사위는 고요했다. 그는 물끄러미 황제를 바라보다 빙긋이 미소했다.
“폐하.”
“짐은 그대의 죽음을 바라지 않아. 그것은 나의 빈 또한 마찬가지다. 더는 그 아이를 아프게 하지 마. 평생 씻지 못할 죄책감을 마음에 품고 살게 하지 마라.”
서연이 검을 빼 들었다. 순식간에 팽팽한 긴장감이 그들을 에워쌌다. 황제는 여전히 그의 눈빛을 읽을 수 없었다. 다만 그가 마찬가지로 검을 빼 들자 챙, 하는 소리가 바람을 타고 너울너울 번졌다.
서연은 지나치게 지쳤으나, 훌륭한 장수였다. 앙상하게 마른 얼굴이라 할지라도 그는 여전히 강한 눈을 빛내고 있었다. 그것은 황제가 처음 서연을 마주했을 때 보았던 눈빛이기도 했고, 당장 달려가 품에 안아주고 싶은 기하와 닮은 눈이기도 했다.
“부디, 그 아이를 잘 부탁드립니다. 가장 빛나는 제국을 발아래 두시어, 오래오래 강녕하시옵소서.”
“서연.”
서연의 검이 황제를 향했다. 허공을 향해 검을 길게 그어 내린 서연은 능숙하게 방어 자세를 취하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의 발끝이 폭포 아래로 향했다. 아차 하는 순간, 그대로 저 깊은 물속으로 처박힐지도 모른다. 황제는 마른 숨을 삼키며 두 눈을 사정없이 일그러뜨렸다.
“돌아와라.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마.”
환하게 미소하는 서연의 얼굴은 몹시도 편안해 보였다. 그는 더 이상 피로 얼룩지지도, 희뿌연 검은 그림자에 가려지지도 않았다. 어깨 위로 짊어진 무거운 짐을 벗어던지고, 사무치는 외로움마저 덜어내니 그대로 훨훨 날아도 이상하지 않을 표정이었다.
“폐하의 치세 아래, 만백성의 평온이 함께하길.”
“서연!”
“만세 만세 만만세. 폐하의 성은(聖恩) 아래, 신은 이제 편히 갑니다.”
서연은 황제를 향해 절을 올리듯 머리를 숙였다. 그의 검이 넘실넘실 춤을 추며 황제를 향했다. 평온하게 웃고 있는 얼굴이 어찌나 아련한지, 황제는 제게 달려드는 검을 막아낼 생각도 하지 못하고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안 돼, 멈추어라!”
탕!
바람을 가르며 날아온 화살은 정확하게 서연을 향해 쏘아졌다. 황제를 향해 달려들던 서연은 정작 눈앞에서 검을 거두며 뒷걸음질했으나, 한 번 쏘아 올린 화살을 거두어들일 수는 없었다.
탕!
거두어들인 검에 스스로 상처 입은 서연이 비틀거렸다. 먼저 날아든 화살이 서연의 왼쪽 어깨에 푹 찔렸다. 두 번째 것은 아슬아슬하게 그의 귓불을 피해 갔으나, 서연은 폭풍우를 만난 나비처럼 힘없이 비틀거리며 후들거리는 무릎을 어찌하지 못했다.
황제의 검이 그대로 땅에 꽂혔다. 그의 붉은 망토가 펄럭이며 절벽 아래로 사그라지는 서연을 향했다. 갑작스러운 황제의 움직임에 서연을 향해 쏟아지던 화살 중 하나가 그의 오른쪽 어깨에 박혔다. 괴이한 고함을 내지르며 활을 거두어들인 그림자가 바람처럼 황제를 향해 달려들었다.
“서연!”
그림자가 달려갔을 때, 황제는 제 어깨에 화살이 박힌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절벽 아래로 팔을 뻗어 시커먼 인영을 붙잡고 있었다. 그의 팔에 대롱대롱 매달린 서연을 발견한 그림자가 황제를 양쪽에서 붙잡았다.
“폐하!”
“폐하, 괜찮으십니까?”
“폐하!”
황제의 붉은 망토가 짙게 물들어갔다. 거대한 폭포가 물보라를 일으키는 탓에 사방으로 물이 튀었다. 황제의 손에 매달린 서연은 온몸을 축 늘어뜨렸다. 그림자가 연거푸 쏘아 올린 화살이 그의 피부를 뚫어 검붉은 피가 줄줄 새었다.
“서연, 서연!”
푸들푸들 떨리는 눈꺼풀을 겨우 들어 올린 서연이 잔잔하게 미소했다. 그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 겨우 붙잡고 있던 검을 다시 들었다. 그림자가 움찔했으나 황제는 그들을 향해 움직이지 말라며 사납게 일갈했다.
푸르게 빛나는 장검의 검날을 손에 쥔 서연은 도통 자신을 놓을 생각을 하지 않는 황제를 지그시 바라봤다. 공기의 흐름이 그대로 멎은 것처럼, 뿌연 물보라에 갇힌 서연의 모습이 마치 환영과도 같아서 황제는 어금니를 으드득 물었다.
“폐하.”
거칠게 갈라진 서연의 음성에 황제는 입술을 떨었다. 일부러 몸을 축 늘어뜨린 사내의 무게를 한 손으로 감당하기란, 제아무리 타고난 무골인 황제조차 버거운 것이었다. 황제가 힘을 줄 때마다 어깨에 꽂힌 화살 사이로 검붉은 피가 콸콸 쏟아졌다.
“내내 평온(平穩)하소서.”
서연의 검이 제 손목을 향했다. 당장에라도 자신을 향해 검과 화살을 날릴 만발의 준비를 하는 그림자를 하나씩 돌아보며, 서연은 끝내 황제에게서 거둔 시선을 다시 마주하지 않으려 했다. 그의 날카로운 검이 빠르게 호를 그리며 제 손을 향해 달려들었다.
“서연!”
갑작스러운 힘의 반동에 황제가 움찔하는 사이, 곁에 있던 그림자가 그의 몸을 단단히 붙잡았다. 끝없이 긴 폭포 아래로 추락하는 서연의 표정이 어땠는지는 보이지 않았다.
“폐하, 위험합니다.”
“상처가 벌어졌습니다. 폐하, 고정하십시오!”
“당장 폭포를 수색하라. 그가 떠내려가기 전에 그를 구해, 어서!”
“폭포 아래는 수심이 깊습니다. 밤이 깊어 당장 수색은 불가능합니다.”
아직 붙잡고 있는 손은 온기로 가득했다. 드문드문 피가 묻은, 굳은살이 박인 단단한 손. 그것을 허망하게 바라보며 황제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밤이 깊었다. 서연을 그대로 꿀꺽 삼킨 폭포 아래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 평온한 물보라가 차올랐다. 황제의 상처에 어쩔 줄 몰라 하는 그림자의 등 뒤로 희미한 새벽빛이 스며들었다. 찬란한 여명(黎明)이었다.
* * *
“네놈들이 정녕 미친 것이냐?”
일렬로 늘어선 그림자를 걷어차며 임승지는 길길이 날뛰었다. 그가 손에 들고 있던 검집이 그림자의 어깨를 사정없이 내리쳤다. 도통 흥분하는 법이 없는 임승지의 모습에, 그들은 오늘이 자신들의 제삿날이라고 생각하며 질끈 눈을 감았다.
“폐하의 화살받이가 되어도 모자랄 판에, 감히 폐하께 활을 쏘아? 네놈들이 그러고도 살아남기를 바라는 거냐? 어찌 아직 살아 있느냐! 당장 저 폭포에 처박혀 죽을 것이지!”
차마 고개를 들지도 못하는 그림자를 향해 기어이 검을 빼 드는 임승지를 보며, 황제는 혀를 끌끌 차며 한숨을 내쉬었다. 상처 치료에 여념 없는 군의의 조심스러운 손길마저 짜증스러웠다.
“시끄럽다. 네놈 때문에 더 정신없으니 그만 떠들어.”
“혈이 낭자하시니 어지러우신 것은 당연합니다. 소장 탓이 아닙니다.”
임승지는 단단히 심술 난 음성으로 부루퉁하게 답하며 다시 그림자를 향해 이를 갈았다. 갈아 마셔도 시원찮을 놈들이라는 둥, 육시(戮屍 : 이미 죽은 사람의 시체에 다시 목을 베는 형벌)를 하고 구족을 멸할 놈들이라는 둥 온갖 무시무시한 욕을 서슴지 않는 임승지를 향해 기어이 무언가를 퍽 집어 던진 황제는 지친 얼굴로 이를 갈았다.
“아직 기운이 남아도십니까?”
“시끄럽다지 않아? 그만 떠들고 어서 보고나 해라. 어찌 되고 있어? 벌써 한 시진이 지났는데, 왜 아직 소식이 없느냐?”
위험하다는 주위의 만류에도 황제는 기어이 폭포를 수색하라는 명을 내렸다. 말이 쉬워 수색이지, 폭포가 얼마나 깊은지를 익히 들어 알고 있는 이들은 차마 그 안으로 들어갈 엄두도 내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더욱이 며칠째 내린 비로 인해 수심이 더 깊어졌으니, 들어가지 못하는 부하들을 어찌할 수 없는 장수들은 서로 눈치만 살폈다.
“아직 소식이 없으면 결과야 빤한 것이 아닙니까? 애초에 무리라 고하지 않았습니까? 그만 체념하십시오. 감히 끝까지 폐하의 용체를 상하게 한 죄인을 어찌 그리 찾으십니까?”
임승지는 이를 바드득 갈아대며 사납게 말을 씹어 뱉었다. 그는 황제를 끝까지 따르지 못한 것을 내내 후회하는 중이었다.
전장에서 보내기를 수년, 황제도 사람인지라 자잘한 상처를 입기는 했으나 이렇게 화살이 깊이 박히는 부상은 처음이었다. 더욱이 사나운 적장도 아닌, 황제의 그림자에게 입은 상처라니 실로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어, 당장에 저것들을 폭포 아래로 처박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는 중이었다.
혹여 서연이 기사회생으로 살아난다면 제가 친히 그 사지를 찢으리라 생각하면서 이를 갈자, 또다시 무언가가 휙 날아와 승지의 머리에 부딪혔다.
“이놈아, 이 좀 그만 갈아라. 소름 끼친다.”
“어찌 소장에게 화풀이하십니까? 서연은 죽어도 못 찾습니다. 혹시 살아 있다면 폐하께 감쪽같이 눈속임하고 뒤로 무슨 수를 꾸밀지 압니까? 말이 나왔으니 말입니다. 아무리 서연이 무빈마마의 아비라도, 폐하께 반기를 든 역적입니다. 북왕이 바뀌었다 한들, 추문은 쉬이 사그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차라리 서연이 죽는 것이 새로운 북왕이나 무빈마마를 위해서나 훨씬 나은 일 아닙니까?”
승지의 말은 모두 옳았다. 딱히 반박할 말도 아니었다. 다만, 이치를 따지기 전에 마음이 이끄는 대로 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평생 마음에 짐을 두고 살아가야 할 기하 생각에 욕심을 부린 것이 맞다. 그것이 잘못인가? 단 한 번, 두고두고 후회하더라도 그리하고 싶었던 욕심이 잘못이던가?
“무슨 일이 있어도 서연을 찾아. 혹, 그가 죽었다면 시체라도 찾아야 할 것이다.”
“시체라면 이미 있지 않습니까.”
낭자한 피를 뒤집어쓴 잘린 손목을 대충 눈으로 훑으며, 승지가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 황제는 벗은 등을 치료하는 군의의 손길에 작게 신음하며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었다.
“너, 입을 조심해. 빈의 앞에서 그딴 말을 지껄이면 용서하지 않을 테니.”
“폐하께서 아무리 노여워하셔도 소장의 생각은 같습니다. 길 가는 금룡대 아무나 잡고 하문해 보십시오. 모두 소장과 같은 마음일 것입니다. 서연 그자가 살아 돌아온다면 당장에 목을 잘라 성문 밖에 내걸고 말 것입니다.”
“어허, 그래도 이것이! 너 정녕 계속 그리 떠들고…….”
버럭 역정을 내던 황제의 찌푸린 얼굴이 그대로 굳었다. 아무리 임시 막사라 한들, 금룡대가 수백이나 깔린 이곳에 황제의 천막을 덜컥 열어젖히고 안으로 들어올 이는 오직 하나뿐이었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들어오던 발을 멈추고 얼굴을 찡그리는 기하를 바라보며, 황제는 고요하게 미소했다. 늘 단정하게 빗어 어깨 아래로 늘어뜨리던 머리를 한데 올려 묶은 수려한 목선이 어여쁘다고 생각하며, 그를 향해 손을 뻗은 황제의 입술이 달콤하게 달싹였다.
“빈.”
혹여 다 들었으려나. 전부 들었다면 마음 아파도 내색하지 않을 텐데, 이 일을 어쩐다.
“다들 그만 나가라.”
상처 부위를 단단하게 묶은 군의가 먼저 물러나자, 그림자가 재빠르게 뒷걸음질했다. 차마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우두커니 서서 그들을 바라보는 기하의 곁을 지나치던 승지가 불편한 얼굴로 머리를 숙였다. 황제는 기어이 쯧, 하고 혀를 찼으나 기하는 그것의 의미를 알아차리지 못한 표정으로 주춤거리기만 했다.
“언제까지 그리 서 있을 것이냐. 이리 온.”
얼굴 가득 두려움이 깔린 기하의 표정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를 향해 손을 뻗은 황제는 다시 한 번 미소했다. 괜찮다는 듯, 이제 다 끝났다는 듯,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기하야.”
주춤거리는 다리가 후들거리는 것이 보였다. 무엇을 해도 늘 씩씩하던 서기하가 고작 자신의 작은 상처로 저리 놀라다니. 그것이 어여쁘고 기특해서 황제는 양팔을 활짝 벌려 뜨거운 가슴을 내밀었다.
아직이다. 아직 끝나지 않았어. 그러니 그런 표정 지을 것 없다. 그러니, 지금 너는 그저 다정하게 안아주기만 하면 돼. 그러면 괜찮아질 것이다. 그럴 것이야.
부들부들 떨리는 기하의 손끝을 바로 잡아 입을 맞춘 황제는 물끄러미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어두운 표정엔 웃음기 하나 없어, 짙은 먹구름이 드리워진 것처럼 먹먹하기만 했다.
“약조를 어기셨습니다.”
어깨를 매만지는 기하의 손길은 무척 조심스러웠다. 가련하게 떨고 있는 손길이 어찌나 차디찬지, 평소의 체온을 잃어버린 그가 혹여 아프진 않은지 이마를 짚자, 힘없이 눈이 감긴다.
“다치지 않고 무사히 다녀오신다고 하셨지 않습니까.”
“다치지 않았어. 이깟 상처는 아무렇지 않다. 너, 짐을 그리 약골로 보았느냐?”
실없는 소리를 해도 기하는 웃지 않았다. 상처 입은 연약한 짐승처럼 푸들푸들 떠는 모습이라니. 아무리 입매에 미소를 덧그려도 표정 변화가 없는 기하의 어깨를 끌어안은 황제는 가만히 그의 등을 다독였다. 차라리 울어버린다면, 마음이 편할지도 모르겠다.
“기하야.”
어떤 말을 꺼내야 할까. 어떤 말로 위로할 수 있을까. 혹여 원망하지 않을까. 털끝만 한 미움이 싹트진 않았을까. 가슴에 진 응어리를, 평생 잊지 못할 아픔을 어떻게 씻어줘야 할까.
“…이제, 전부 끝난 것이겠지요.”
“그래.”
“이제는,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겠습니다.”
황제의 너른 가슴은 늘 그렇듯 따뜻했다. 잔잔하게 파동 하는 그의 심장 소리에 눈을 감으며, 기하는 손끝으로 황제의 상처를 어루만졌다. 그의 등 너머로 덩그러니 놓인, 잘린 손목에 겨우겨우 눈을 감았다.
“서연은…….”
“아버지께서 하신 일은 모두 들었습니다. 폐하를 원망하지 않습니다. 감히 그럴 수는 없지요.”
담담한, 그래서 더 슬픈 기하의 목소리에 황제는 말을 잇지 못했다. 겨우 마주 본 그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서렸다. 황제는 피에 물들어 색이 바랜 손가락으로 기하의 흰 뺨을 쓰다듬었다.
“지쳤구나.”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는, 퍼석하게 마른 얼굴에 낯선 감정이 드리워졌다. 그것은 아무리 몸과 마음을 나눈 사이라 할지라도, 완전히 이해하기엔 버거운 감정이었다.
황제는 굳이 그것을 나누려 들지 않았다. 그를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아픔은 더 무디게 잘려나가 기하를 괴롭게 할지도 모를 일이니까. 지금은 그저, 그에게 시간을 줘야 한다.
“돌아가자.”
“예, 폐하.”
어지러운 마음은 비록 깨끗하게 잊힐 수 없겠지만, 돌아가자. 돌아가서 함께 나누고, 또 나누다 보면 언젠가는 희미해지지 않겠느냐.
* * *
황제를 둘러싼 금룡대는 형형한 기세를 내뿜으며 말을 몰았다. 황제의 옥체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마차를 준비한 이들은, 문정으로 향할 때보다 훨씬 느린 속도로 드넓은 초원을 가로질렀다.
그들은 가는 길에 뿌려진 흑마단의 시체를 직접 수습하여 죽은 자를 예우했다. 일찌감치 항복하여 다시 북성으로 귀속된 장수들은, 그대로 두면 흔적도 없이 썩어 없어지거나 들짐승의 밥이 될 처지에 놓였던 시커먼 시체를 수습하라고 명한 황제를 향해 은혜의 절을 올리며 그 마음을 가슴에 새겼다. 푸른 문정의 초원처럼, 모든 것은 순탄하게 흐르는 것만 같았다.
거대한 인원이 한꺼번에 움직이는 탓에 밤낮으로 이동할 수 없었기에, 그들은 밤이면 넓은 곳을 찾아 휴식을 취했다. 전쟁에서 승리하기는 하였으나 휘황찬란한 전리품도 없었고, 승리에 도취하여 섣부른 짓을 하는 이들 또한 없었다.
황제의 초청을 받아 함께 수도성으로 향하는 새로운 북왕과 장수들은 내내 엄중한 얼굴로 끝내 찾지 못한 서연을 생각하는 듯했다. 그런 그들에게 조그마한 혼란이 찾아든 것은 수도성과 문정의 딱 중간 지점인 진평에 다다랐을 때였다.
“빈? 짐이 보이느냐? 대체 빈이 왜 이러는 것이냐?”
입맛이 없다며 저녁 수라도 들지 않고 일찌감치 잠들었던 기하는 깊은 밤 불현듯 식은땀을 흘리며 혼곤한 열에 지쳐 축 늘어지고야 말았다.
“맥이 불안정하지 않으냐? 어찌 이리 열이 올라?”
군의는 섣불리 입을 열지 못하고 기하의 맥을 짚은 채 가만히 눈을 감았다. 입이 바싹 마른 황제가 아무리 호통치고 야단해도 한동안 꿈쩍하지 않던 그는, 소식을 듣고 몰려온 사람들의 서늘한 시선에 겨우겨우 입술을 열었다.
“폐하,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군의는 나이는 어리나 수년간 전장에서 지낸 자답게 담이 크고 거침없는 성정이었다. 그런 그가 지나치게 말을 아끼는 모습에 황제는 열이 올라 끙끙거리는 기하를 곁눈질하며 주먹을 그러쥐었다.
“고(告)하라.”
“이것은 필시, 독에 의한 증상으로…….”
“뭐라? 너 지금 독이라 했느냐?”
“예. 미천한 소신의 의견으로는 맥이 흐리며 불안정하고, 사지의 뒤틀림이 있으며, 신열이 끓고 손발은 지나치게 찬 것이 연(燃)독에 의한 증상이라 생각되옵니다.”
황제는 군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옆에 놓인 물건을 잡히는 대로 바닥에 패대기쳤다. 아무리 눌러 삼켜도 싸늘한 분노는 사그라지지 않을 것만 같았다. 독이라니, 대체 독이라니?
“폐하, 고정하십시오.”
보다 못한 임승지가 황제의 앞을 가로막았다. 지금 소란을 떨어봤자 달라지는 것은 없다. 겁먹은 군의가 신력을 발휘해 당장 기하를 낫게 할 수 있을 리도 없고, 이미 생긴 병이 없어지지도 않을 것이다.
더욱이 황제는 아직 부상 중이었다. 상처는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 없는 상태였다. 더위가 한풀 꺾였다고는 해도 아직 한낮엔 가축도 나자빠질 정도로 혹독한 태양이 내리쬐고 있으니, 자칫하다가 상처가 곪기라도 한다면 큰일이었다.
“어제까지 멀쩡하던 빈이 갑자기 어디서 독에 당한단 말이냐? 아직도 쓸어내지 못한 간자가 남아 있더냐? 너희는 대체 무얼 하고 있었기에 빈이 저 지경이 되도록 보고만 있었더냐?”
제국 내에 있는 독은 자그마치 수천 가지나 된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 수를 몇 가지 헤아리지도 못할 정도였다. 때에 따라서는 아주 오랜 시간 아무런 변화가 없다가, 어느 날 쓰러져 급사할 수도 있는 기이한 종류도 많았다.
황제는 지독한 불안감에 휩싸였다. 저들을 탓할 것이 아니다. 그가 이렇게 되는 동안 자신은 대체 무얼 하고 있었단 말인가.
“연(燃)독은 인체에 치명적인 것이 아닙니다. 외려 상처를 낫게 하는 좋은 치료제입니다.”
순식간에 자괴감에 빠졌던 황제의 귀를 번쩍 뜨이게 하는 말이었다. 그는 지나치게 안도하며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끙끙대는 기하의 손목을 붙잡았다. 차다. 맞닿은 손끝이 시릴 정도로, 차가웠다. 그 느낌이 싫어 황제는 기하를 품으로 바짝 끌어당겨 안았다. 자신의 체온을 나누어주면 그가 금세 눈을 뜰 것만 같았다.
“하면, 마마의 증상은 일시적이라는 건가.”
“예. 연(燃)독은 주원료가 패랭이꽃이고, 이는 소염에 탁월한 효과가 있습니다. 다만 인체에 해가 없는 것이라도 독으로 분류되는 것은 결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폐하께서 밤마다 신열이 있으시어 괴로워하시는 것 때문에 연(燃)독을 직접 만드신 것 같사온데, 효과를 극대화하시려고 돌로 짓이기지 않으시고 직접 입에 넣어 잘게 씹으신 것 같사옵니다. 마마의 구순(口脣 : 입술)이 지나치게 푸른 것이 그 증거입니다.”
임승지의 얼굴이 단번에 구겨졌다. 이 얼마나 지고지순한 연정이란 말인가. 사모하는 이를 위해 스스로 위험에 처할 수도 있음을 알면서도 직접 독을 사용하다니.
마마께서 깨어나시면 또 지긋지긋한 연애소설이 쓰일 것이다. 그러면 폐하께서는 눈이 마주칠 때마다, 무빈이 얼마나 현명하고 용감하며 애정까지 완벽한지에 대해 끊임없이 찬사를 쏟아내시겠지.
“네 말이 틀림없느냐? 정녕 빈에게 아무 문제 없다는 것이냐?”
“예. 일시적인 증상이시니, 계속 그리 손발을 주물러 주시면 피가 잘 돌아 금세 일어나실 것입니다. 다만 한동안은 쉬이 피로감을 느끼실 터이니, 환궁하시어 푹 쉬실 수 있게 하십시오.”
“그래. 그래, 알았다. 수고했다.”
눈에 보일 정도로 지나치게 안도하며 마른 숨을 내쉰 황제는 가련하게도 떨었다. 황제는 자신을 에워싼 핏줄을 모두 잃은 후부터 독에 지나치게 민감했다. 하마터면 그가 알고 있는 가장 끔찍한 방법으로 다시 한 번 소중한 이를 잃을 뻔했다는 생각이 차오른 것인지, 몇 번이나 숨을 몰아쉬며 손을 덜덜 떨었다.
“미련한 것. 이깟 상처가 뭐라고 겁도 없이 이런 짓을 해. 아무리 짐의 심장이 네 것이라 해도 이리해서는 아니 된다, 응?”
식은땀이 흐르는 기하의 단정한 이마에 연신 입을 맞추며 황제는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지옥 저 밑바닥에서 순식간에 천국으로 날아오른 황제의 얼굴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임승지가 군의를 향해 그만 물러나라 눈짓했다. 이 막사 안에 그 누가 있더라도 그들에겐 무의미할 것이다.
“하면 신들은 이만 물러나겠사옵니다, 폐하.”
열이 올라 붉게 물든 기하의 뺨을 손으로 훑으며 황제는 그에게서 시선조차 떼지 않았다. 씁쓸한 입맛을 다시며 조용히 주위를 물린 임승지가 마지막으로 막사를 나서며 주변을 돌아봤다. 사위는 고요하였고, 여기저기 걸어둔 횃불에 어두운 진평 초원은 대낮처럼 환하게 빛났다.
“으응…….”
손끝이 저릴 정도로 기하의 손을 붙잡고 있던 황제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깜빡 잠들었던 황제는 재빨리 정신을 수습하고, 낮게 신음하는 그의 뺨을 손바닥으로 쓸었다. 어젯밤보다는 한결 나아진 열기에 안도하며 습관처럼 손을 주무르자, 무겁게만 느껴지던 눈꺼풀이 바르르 떨린다.
“빈, 정신이 드느냐?”
느리게 눈을 깜박이는 기하의 손을 붙든 황제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군의를 비롯한 모두가 괜찮다고 입을 모아 말했지만, 황제는 끝내 고집을 꺾지 않고 수라도 거른 채 꿈쩍하지 않았다.
“어찌 웃어, 응? 뭘 잘했다고 웃는 거냐? 너 짐이 얼마나 놀랐는지 아느냐?”
힘없이 웃기만 하는 기하가 얄미워 연신 타박하면서도, 황제는 습관처럼 자잘하게 입을 맞췄다. 기하는 그럴 때마다 작은 웃음을 터트리더니 푹 가라앉은 목소리로 륜, 하고 황제를 불렀다.
“나의 빈은 어찌 이리 짐에게 모진 것인지 모르겠다. 어찌 이래. 어찌 이럴 수가 있느냐. 누가 너더러 짐을 치료하라고 했더냐?”
“폐하.”
“그래, 이 발칙한 정인아. 무엇을 줄까, 응?”
“막사 안이 아닌 것 같습니다.”
“감각이 굳지는 않은 모양이구나. 마차 안이다. 계속 지체하고 있을 수는 없어 출발하였다. 왜, 어지러우냐?”
이곳이 막사가 아니라 마차 안이라면, 이리 누워 있어야 할 이는 자신이 아니라 황제였다. 몸이 무겁고 머리가 어지러웠으나 단지 그뿐이었다. 환자를 눈앞에, 그것도 제국의 주인이신 황제 폐하를 앞에 두고 이렇게 호화롭게 마차에 누워 환궁할 정도로 자신은 형편없지 않았다.
황제의 옥체가 아무리 강녕하다고 하나, 그는 상처를 입었다. 어깨를 관통하지 않고 그대로 깊숙하게 박힌 화살은 살과 근육, 뼈를 뚫어 자칫했으면 영영 팔을 못 쓸 뻔하지 않았던가. 더욱이 밤마다 신열이 올라 수면도 제대로 취하지 못했던 황제를 떠올리며 기하는 불쑥 몸을 일으켰다.
“폐하, 이쪽으로 누우십시오.”
“병이 난 것은 그대다. 그러니 좀 더 누워 있도록 해. 늦어도 내일 오전에는 수도에 입성할 것이다.”
“그렇습니까.”
기수는 포근하고 따뜻했다. 땀이 절절 날 정도로 혹독한 여름인데 포근하고 따뜻하다니. 어리석은 생각을 조용히 갈무리하며 가슴 위로 기수를 끌어 올린 기하가 힘없이 웃었다.
“군의가 치료에 전념하고 있는데, 어찌 그런 짓을 해? 고작 신열로 짐이 어찌 될까 그랬더냐?”
“신첩 또한 고작 신열일 뿐입니다.”
“어허.”
“폐하께선 늘 강녕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신첩도 지켜주시지요.”
희미하게 미소하는 기하의 얼굴이 수척했다. 고작 신열이라니. 밤새 그리 끙끙 앓으며 괴로운 숨을 토한 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냐. 차마 물을 수 없는 그 말을 목 안으로 삼킨 황제는 기하의 앞으로 달콤한 꿀물을 내밀었다.
“오늘 밤은 따로 나가 객잔에서 묵을 것이다. 자그마한 저자도 있다니 해 지기 전에 함께 돌아볼까?”
“그러면 너무 번잡스럽지 않겠습니까?”
“내 빈이 원한다는데 번잡스러운 게 다 무어냐. 입맛도 없을 테니 그대 좋아하는 꼬치구이나 먹을까?”
부러 다정하게 웃으며 이것저것 권하는 황제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기하는 마른입을 달콤한 물로 축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다, 눈을 떴을 때 그가 곁에 있어줘서. 끔찍한 흉몽 끝에 보인 것이 이토록 잔인하리만치 눈부신 행복이라서. 과연 제가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라는 의문이 들 때마다 그가 고개를 끄덕여 주어서.
“하동엔 귀한 식재료가 많다. 온천이 아주 유명한데, 금일은 그대 상태가 좋지 않으니 그건 다음으로 미루자꾸나.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온천물에 몸을 담그는 것이 꽤 운치 있다.”
“예, 폐하.”
“기운이 없어 그런가, 어찌 이리 고분고분해?”
이마를 맞댄 채 속삭이던 황제가 먼저 입술을 내밀었다. 꿀물에 젖어 달콤한 기하의 입술은 건조하게 갈라져, 혀끝으로 건드릴 때마다 버석거림이 느껴졌다.
“우리 랑랑께서 뭘 해야 웃어주실까, 응?”
“랑랑만 곁에 계시면 됩니다.”
코끝을 부딪치며 미소 짓는 황제를 따라 기하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뿐이다. 그가 곁에 있으니, 다른 것은 필요치 않다. 아프지 않다. 슬프지 않다. 괜찮다. 괜찮다. 괜찮다.
“폐하, 소장 임승집니다. 급히 보고드릴 것이 있사옵니다.”
마차 바깥에서 들리는 임승지의 목소리에 다시 입을 맞추려 고개를 틀던 황제의 얼굴이 사납게 구겨졌다. 주위를 돌아보니 한창 달리던 마차가 어느새 멈추었다.
그리 넓지 않은 침상 위에 볼썽사납게 흐트러져 있는 것이 부끄러워, 기하는 얼른 매무새를 가다듬고 황제의 소매 끝을 붙잡았다.
“승지 저것을 그냥 문정에 떨어뜨려 놓고 와야 했어. 도무지 눈치가 없지 않으냐?”
“그러지 마십시오. 급한 용무겠지요. 어서 안으로 들이십시오.”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혀를 끌끌 찬 황제는 기하를 눈으로 훑으며 다정하게 뺨을 쓸었다. 그의 커다란 손이 뺨에서 목덜미로, 그리고 다시 옷깃 안으로 들어오려는 것에 화들짝 놀란 기하가 얼굴을 붉히며 문 쪽을 바라보자, 황제는 파안대소하며 어깨를 끌어안았다.
“들어오너라.”
분명 일부러 저런 것이라는 생각에 잔뜩 억울한 마음이 들어 항변하려던 기하는 이내 입술을 다물었다. 마차 문이 열리자마자 모습을 드러낸 임승지는 두 사람을 향해 꾸벅 머리를 숙이며 예를 갖추고는 잘 접힌 서찰을 황제에게 내밀었다.
“뭐냐.”
“지체 없이 환궁하셔야 할 듯합니다.”
황제는 사납게 얼굴을 구기며 임승지가 내민 서찰을 낚아챘다. 분명 금일은 느긋하게 객잔에서 머물며 기하의 마음을 달래주려 계획했는데, 난데없이 헛소리를 지껄이는 승지의 표정이 자못 심각했다.
“예정된 일정이 있으시나, 폐하께서 환궁하신다면 황후마마께서도 안심하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조용히 서찰을 확인하고 반쯤 구겨 그것을 승지에게 넘긴 황제가 낮은 숨을 내쉬었다.
“어찌할까요.”
“잠시 나가 있어라.”
손을 휘휘 저으며 기하의 곁으로 다가가는 황제를 향해 예를 갖춘 임승지는 곧장 모습을 감추었다. 짧은 침묵이 마차 안에 맴돌았다. 혹시나 하는 불안감에 황제의 손을 붙잡은 기하는 그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봤다.
“폐하?”
“큰일은 아니다.”
“어찌 그러십니까? 혹, 신첩이 알아서는 아니 되는 일입니까?”
“그럴 일은 세상에 없다. 음, 그저 좀 복잡하여서 그렇다.”
황제의 잘생긴 눈썹이 사납게 꿈틀거리자, 기하는 희미하게 미소했다. 그는 때때로 깊은 상념에 잠기었는데, 그것은 황제가 무언가를 결정할 때의 사소한 습관 같은 것이었다.
“황후의 진통이 시작되었다는구나.”
“예? 벌써요?”
산달이 가까워졌으나 아직 예정된 날짜가 있었다. 물론 그것은 간혹 있는 일이었으나, 몸이 약한 황후에게 좋은 징조는 아니었다.
“그래. 한데 그리 좋은 상태는 아닌 모양이야.”
“한데 어찌 망설이시는 것입니까? 이리 계실 것이 아니라 말을 가져오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대와 약조하지 않았나. 금일 저녁은…….”
“폐하, 지금 그것이 문제입니까?”
“그대 마음이 무거워 보여, 조금이라도 기쁘게 해주고 싶어 그래.”
그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은 그 마음만으로도 충분했다.
“나중에요. 급한 일이 없을 때, 언제든지 가자고 하시면 따르겠습니다. 지금은 환궁하시는 것이 먼저입니다. 환궁하시어, 황후마마의 힘이 되어 주셔야지요.”
곁을 지켜주는 것이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기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비록 자신의 정인을 다른 사람과 나눠야 하는 것은 기꺼운 일이 아니나, 황제를 오롯이 독식할 수는 없다는 것은 이미 인정한 바였다.
“황실의 큰 경사입니다. 제국의 경사이기도 하고요. 어서 가십시오. 신첩도 따르겠습니다.”
“그대는 아직 그리 무리하면 안 된다.”
“따를 것입니다. 무리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니, 혼자 남으라는 말씀은 거두어 주십시오.”
웃고 있어도 때때로 마음은 시렸다. 괜찮다고 생각되다가도 불현듯 눈물이 터질 것 같았다. 그러나 그의 앞에서 그리할 수는 없었기에, 이를 악물고 참고 있다. 마음이 시커멓게 타들어가도 내색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혼자는 싫다. 누군가와 그를 나누어 가질 수밖에 없다고 해도, 혼자는 싫다. 적어도 지금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