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장 찬란(燦爛)하게
황제는 다정한 손길로 제 품에 안긴 정인의 등을 쓸었다.
“열흘 안에 돌아오마.”
“너무 깁니다.”
“내게서 떨어지기 싫은 네 마음은 잘 안다만―.”
아무렇지 않은 듯 미소하며 양쪽 어깨를 붙잡자, 기하의 젖은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코맹맹이 소리가 난다 했더니, 여지없이 울고 있구나. 갈수록 눈물이 많아지는 정인을 바라보는 마음이 무거웠다.
“왜 또 울고 그래.”
“폐하, 가지 마십시오. 아버님께서 어떤 말을 하시든, 그냥 내버려 두십시오. 군사만 보내십시오.”
서연은 훌륭한 장수였다. 비록 그를 따르는 흑마단이 반의반으로 줄었다고 하나, 오직 서연을 위해 움직이는 최정예 부대가 그를 끝까지 지킬 것이다.
더욱이 문정은 서연이 숱하게 전쟁을 치른 곳이다. 손바닥 들여다보듯 훤히 꿰뚫고 앉아 황제를 부추기는 아비의 모습이 절로 떠올라, 기하는 제 가슴을 탕탕 쳤다.
“기하야.”
“폐하께서 다치실까 저어됩니다.”
“다치지 않겠다.”
“아버님께서, 폐하를 함정에 빠트리면 어찌합니까?”
“영민하게 대처하겠다. 위험한 곳엔 혼자 가지 않겠다.”
다시금 황제의 품으로 안겨들며 기하는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싫습니다. 가지 마세요. 신첩 곁에 있어 주세요. 황자들 곁에, 황궁에 남아 주세요.”
아비의 간악함만을 걱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황제를 믿지 못해서도 아니었다. 혹여라도 서로가 서로에게 검을 겨누게 된다면, 분명 승리하는 것은 정인이 될 것이다. 한데, 그것을 마냥 기뻐할 수 있을까. 다행이라고 치부할 수 있을까.
“서연을 반드시 생포하겠다. 한적한 먼 섬으로 유배를 보내면 되겠지.”
“폐하의 안전이 가장 먼저입니다.”
생각하고 또 생각해도 결국은 그것이다. 혹여나 정인에게 해를 가한다면, 진심으로 아버지를 용서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은 생각만으로도 몸서리쳐지는 너무도 끔찍한 상상이었다.
* * *
푸르스름한 하늘 아래 금룡대의 붉은 기가 휘날렸다. 아직 해도 제대로 뜨지 않은 캄캄한 새벽, 황제의 처소인 수신전 앞은 수많은 인파로 북적였다.
“나오지 않아도 된다 일렀는데.”
“예가 아닙니다.”
온화하게 미소하는 황후는 만삭에 가까운 무거운 몸이 힘겨운 듯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촉촉하게 두 눈을 적신 연진 공주가 그녀를 부축하며 황제를 바라봤다. 할 말이 많아 보이는 표정으로 내내 오라비를 응시하던 공주는 투박한 황제의 손길에 다시금 왈칵 눈물을 쏟아냈다.
“돌아올 때까지, 황자들을 부탁하오. 후께서도 각별히 조심하고.”
“예, 폐하. 이곳은 걱정하지 마시고, 부디 옥체 보존하시옵소서.”
넓은 수신전을 가득 메운 사람들을 휘이 돌아보던 황제는 아직 잠이 덜 깬 황자들을 향해 다가갔다. 몸이 약한 탓에 내내 병석에 누워 있어 파리하게 질린 둘째 황자 시헌군까지 제 어미 품에 안겨 있으니, 그 모습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마음이 든든했다.
“아바마마아…….”
워낙 눈물이 많은 막내다. 예전 같으면 채신머리없이 그게 뭐 하는 짓이냐 타박하였을 텐데, 오늘은 이마저도 기꺼웠다. 제 형의 손을 꼭 붙잡고 서서 입술을 삐죽거리며 눈물을 뚝뚝 흘리는 정연군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황제는 무릎을 굽혀 아이와 눈을 마주했다.
“아비는 승리하러 가는 것이다.”
“예. 흑… 소자는, 아바마마께서 아프실까 봐, 흑…….”
“다치지 않으마.”
“예에. 소자는 걱정하지 않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왈칵 울음을 터트린 정연군이 대성통곡하는 통에 궁인들이 잠시 술렁였다. 어린 정연군은 이제야 겨우 애틋한 정을 나누게 된 아버지와 잠시나마 떨어진다는 사실에 내내 의심을 품고, 밤새 제 형을 괴롭혔다. 끊임없이 쏟아지는 질문에 무영군이 기어이 버럭 화를 냈을 때부터 시무룩하더니, 결국엔 이리 눈물 바람이다.
“빈은.”
익숙하게 황자를 달래는 동복궁 상궁 뒤로 현 상궁의 얼굴이 보였다.
“황공하옵니다, 폐하. 무빈마마께서는 새벽부터 고열이 나시어, 도무지 운신하실 수 없는 까닭으로…….”
주위가 술렁였다. 아무리 황제의 총비라 하나, 그것은 너무도 방자한 일이었다. 더욱이 만삭의 몸으로 황후께서도 찬 이슬을 맞고 계시는데, 출정하시는 황제 폐하의 배웅 길에 나서지 않는다니. 아무래도 무빈께서 너무도 기고만장해지신 것 같다는 소리가 수신전을 잠시간 휩쓸고 지나갔다.
“가지 말라 밤새 울더니 기어이 열이 나는 모양이구나. 현 상궁 그대가 무빈의 마음을 잘 달래주어라. 내 곧 돌아오겠다고, 무탈하겠다고.”
“예, 폐하. 황은이 망극하옵나이다.”
현 상궁을 지나쳐 그대로 말에 오르려던 황제가 문득 발을 멈췄다. 울음이 터진 정연군이 훌쩍이는 소리가 멀리서 났다. 황제는 제 아우의 손을 우직하게 잡고 있던 무영군을 내려다보며 아이의 어깨를 가만히 다독였다.
“다녀오마.”
“무운을 빌겠습니다, 아바마마.”
아이는 자신을 닮은 눈을 하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한없이 차갑기도 하고, 또 어찌 보면 사연이 많아 보이기도 했다. 아이의 것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가라앉은 두 눈을 바라보며, 황제는 무릎을 굽혀 무영군을 가볍게 끌어안았다. 오래전, 정신이 온전치 못한 어미의 부주의로 한쪽 청력을 잃은 아이의 뺨을 쓰다듬다가 오른쪽 귓가에 입술을 가져갔다.
“아비는 너만 믿으마.”
다정하고, 또 다정한 음성이었다. 빙긋이 미소하며 멀어져가는 황제를 바라보던 무영군은 그가 말에 오르자마자 고개를 푹 떨어뜨리고 기어이 울음을 터트렸다.
“폐하, 무운을 비옵니다!”
“무운을 비옵니다!”
“황제 폐하 만세!”
“황제 폐하 만세!”
북소리가 길게 울렸다. 수신전에서부터 출발한 황제의 행렬은 황궁 성문 앞에 대기하고 있던 일만(一萬)의 군사와 합류하자마자 땅을 울리듯 전진했다.
긴 뿔나팔 소리에 잠들었던 도성에 이른 아침이 찾아왔다. 근 1년 만의 황제의 공식적인 출정(出征)이었다.
군대는 빠르게 움직였다. 일만(一萬) 군사 모두가 기병(騎兵)으로, 그들은 꼬박 여섯 시진(時辰)을 쉼 없이 달렸다. 뿌연 먼지바람을 일으키는 황제의 군대가 닿는 곳마다 백성들의 만세 소리가 이어졌다. 모두가 황제의 무운을 바라며 빼곡히 길가로 나와 엎드려 절을 올렸다.
“수상한 움직임은?”
“보이지 않습니다.”
백성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그들은 넓은 초원을 택했다. 도시를 가로지르는 것이 빠른 길이었으나, 그것은 너무도 번잡스러웠다.
물론 초원은 외부의 공격을 받기 십상이라 몇몇 장군들이 반대했으나, 황제의 뜻은 완고했다. 지친 말을 쉬게 할 요량으로 물가에 자리 잡은 이들은 간소하게 허기를 달래며 뻐근한 몸을 이리저리 흔들었다.
“이각(二刻 : 30분) 후에 출발한다. 잠시 휴식을 취하라 해.”
누구보다 빨리 황제가 쉴 임시 막사를 지은 금룡대가 뒤로 물러났다. 목을 축이고 허기를 달래는 군사들을 서늘한 눈으로 바라보던 황제가 막사 안으로 들어가자, 금룡대장 임승지는 자처하며 그 앞을 지켰다.
그림자의 수장인 그가 황제의 곁에서 멀어지는 것에 불만을 품은 이들이 무어라 말을 하려다가, 흉흉한 임승지의 표정에 속절없이 입을 다물었다.
“모두 물러가.”
막사 안, 곳곳에 숨어들었던 그림자 여섯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예민하게 움직여 금세 자취를 감췄다. 임시 막사였으나, 그 안은 볼품없지 않았다. 제국의 황제께서 머무시는 곳이니 당연한 일이었으나, 긴밀하게 움직이는 와중에도 휴식처를 특별하게 신경 쓰라는 지시를 내린 탓이었다.
“이제 그만 그것 좀 벗어라. 갑갑하지 않으냐?”
비죽한 웃음이 매달린 황제의 표정에 홀로 남은 그림자가 드러난 눈매를 가늘게 접었다. 그림자는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다. 황제의 명이 있기 전에는 입을 열지 않는다. 오직 황제만을 위해, 보고 듣고 말하며 움직이는 존재다.
“이리 와.”
황제는 의자에 앉으며 팔을 벌렸다. 잠시 주춤하던 그림자가 황제의 채근에 뚜벅뚜벅 걸어왔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지 않은 곳이 없었다. 드러난 두 눈을 그윽하게 바라보던 황제는 망설이는 몸뚱이를 확 끌어당겨 제 품에 안았다.
“어찌―.”
“쉬잇, 황제의 그림자는 그리 쉽게 입을 열지 않는단다.”
보기 좋게 호선을 그리는 황제의 얼굴엔 장난기가 가득했다. 맨 앞에서 일만의 군사를 거느리며 누구보다 빠르게 전진하던 그는 지친 기색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타고난 장수였다. 황제의 수려한 미안이 가볍게 찌푸려졌다. 더위를 유난히 많이 타 걱정하였더니, 벌써 온몸이 흠뻑 젖지 않았나.
“너 이러다가 탈진이라도 하면 그대로 내 말 위에 태울 것이다.”
“그리하셨다간 관대하신 폐하께선 그림자와 정분이 나셨다는 소문이 돌 것입니다.”
“소문이 무서우랴, 내 빈이 이리 힘들어하는데.”
황제는 솜씨 좋은 손길로 검은 복면을 말끔하게 벗겨냈다. 이각(二刻)이 넘도록 끙끙대며 겨우 한 것인데, 이리 몇 초 만에 흔적도 없이 풀어버리시다니. 기하는 못마땅한 얼굴로 황제를 바라보다, 땀으로 축축해진 제 머리칼을 쓸어 넘기는 손길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놈의 고집은 대체 언제 꺾을 것이야, 응?”
심술궂은 황제의 음성을 못 들은 체하며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비록 땀에 젖어 불쾌한 냄새가 날지언정, 정인은 저를 밀어내지 않을 것이다. 그것마저 어여쁘다 여겨주실 거다.
“이리 덥고 제대로 쉬지 못해 힘든 여정인데…….”
황제는 연신 불만에 찬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함께 가겠다는 소리에 처음에는 펄쩍 뛰면서 안 된다고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어디 서기하의 고집이 보통인가. 부득불 저도 따라나서겠다면서 짐까지 챙기더니, 함께 가지 않으면 당장에 북성으로 가서 겨울이 올 때까지 머물 것이라는 헛소리를 해댔다.
그것이 말이 되느냐고 호통치니, 사사로이는 친정인데 어찌 못 가게 막으시느냐며 볼멘소리로 되려 역정을 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싸움에 먼저 지친 것은 황제였다. 그놈의 똥고집, 도무지 당할 재간이 없다.
“그래도 신첩이 함께하니 좋으시지요?”
“좋기는! 그대 때문에 짐의 가슴이 남아나질 않겠다.”
웃음을 터트리며 연신 뺨에 입을 맞추는 기하를 차마 밀어낼 수 없어 황제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여우 같은 것. 이전에도 느꼈지만, 서기하는 꼬리 아홉 달린 여우가 분명하다.
“아, 너무 덥습니다. 밤이 되면 괜찮아지겠지요? 몸에 물이라도 끼얹었으면 좋겠습니다.”
“당치도 않은 소리 하지 마라. 일만 군사가 천지에 깔렸는데 어딜 벗고 물을 끼얹어? 네가 제정신이냐?”
“어차피 신첩은 지금 폐하의 그림자일 뿐입니다? 신첩의 얼굴을 아는 이 또한 그리 많지 않고…….”
“얼굴 아는 게 뭐가 중요해? 그래서, 그대가 나의 빈이라는 것이 변하기라도 한다는 거냐? 시끄러우니 종알종알 그만 떠들고 어서 입이나 맞춰.”
“싫습니다. 군장(軍長)께서 어찌 전장을 앞두고 색(色)에 집착하십니까?”
“너 계속 그리 얄밉게 종알댈 것이냐?”
이 천방지축을 어찌할지 황제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물론 기하의 궁술이나 검술은 보통의 금룡대와 견주어도 손색없을 정도로 훌륭했다.
그러나 중한 것은 체력이었다. 그간 잦은 병치레를 한 탓에 쉬이 지쳐 금세 열이 오르질 않나. 당장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말을 타고 달려야 하는 것도 걱정인데, 더위도 많이 타면서 저리 온몸을 꽁꽁 싸매는 것도 큰 근심이었다. 그렇다고 태화당에서 와병 중인 것으로 알려진 기하의 얼굴을 만천하에 드러낼 수도 없는 노릇이고.
“신첩이 그리 못 미더우십니까?”
“툭하면 아프다고 끙끙대지 않아?”
“신첩이 말입니까? 언제요? 지난번 머리를 다친 이후로는 몸져누운 적도 없습니다.”
“짐의 정(精)을 받으면 늘 끙끙대지 않느냐? 겨우 두어 번 하고 나면 그대로 드러누워 근처에도 오지 못하게…….”
“어찌 지금 그 얘기가 나옵니까?”
바락 소리를 지르는 기하의 얼굴이 새빨갛게 변했다. 부끄러워하기는. 둘밖에 없으니 딱히 남세스러운 일도 아니거늘, 어찌 저렇게 오리처럼 꽥꽥거린단 말인가. 입 맞추고 싶게.
“어허, 목소리 낮춰야지. 누가 듣고 들어오면 어쩌려고 그래?”
“창피한 줄은 아십니까?”
“창피할 게 뭐냐? 황제가 총비와 운우지정(雲雨之情) 나누는 것은 제국의 기쁨이다. 어찌 그것을 부끄럽게 여겨?”
“이, 이……!”
귀부터 목덜미까지 죄다 붉어진 기하의 허리를 폭 끌어안으며, 황제는 그의 턱가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이제 그만해야겠다. 한마디만 더 했다가는 정말로 토라져 문정에 도착할 때까지 말도 붙이지 않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 기하의 성정상 반드시 그럴 것이다.
“기하야.”
것 보아라, 벌써 삐쳐서 입을 꾹 다물고 있으니.
“어허, 랑랑(郞郞)이 부르는데 어찌 돌아보지도 않아?”
허리를 단단하게 붙잡고 있으니 도망가지는 못하고, 팩 토라진 얼굴을 연신 마주하고 있으려니 또 금세 발끈하는 모습이 어찌나 귀엽던지. 마음속의 무거움을 모두 던지고 마음껏 웃고 싶은 심정이다.
“빈.”
“…….”
“기하야.”
“어찌 자꾸 부르십니까.”
그래도 명색이 황제의 부름을 연신 외면할 수는 없는 탓에, 기하는 볼멘소리로 답하면서 고개는 돌리지 않았다. 그것은 순전히 부끄러움 때문이었지만, 늘 저를 놀리려는 황제가 원망스러운 탓도 컸다.
“지켜야 할 것, 다시 읊어 보아라.”
“또 말입니까?”
“어서.”
어젯밤, 겨우겨우 허락한 후 황제는 몇 가지 조건을 달아 그것을 달달 외게 했다. 머리로만 외우는 것이 아니라, 가슴에 새기라는 황제의 명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까닭은 자신을 향한 그 마음이 너무도 애틋해서였다.
“첫째.”
“홀로 다니지 말 것.”
“그래. 둘째.”
“오직 나의 안전만을 생각할 것.”
“그래, 옳다. 셋째.”
“누구를 위해서도 움직이지 말 것.”
고요히 입술을 움직이던 기하는 고개를 푹 숙였다. 황제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그의 손을 붙잡았다. 그러고는 겨우 다시 눈을 맞춘 기하를 향해 근엄한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끝까지 말해야지.”
“절대로, 위험한 상황에 끼어들지 말 것. …설령, 그가 륜일지라도.”
“잘했다.”
칭찬하며 머리를 쓸어주는 손이 달갑지 않았다. 마지막 구절을 가슴에 새길 때마다 기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수는 없다. 백 번, 천 번을 되새김질해도 아마 몸은 그렇게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황제는 강건한 사내다. 검으로 그를 대적할 자, 세상에 없다고 들었다. 하나, 전장은 수많은 예측을 넘나드는 곳이다. 그런 그가 위험에 빠지는 것을 어찌 두고만 볼 수 있을까.
“이것은 너무도 불공평합니다.”
“뭐가 또.”
“하면, 폐하께서도 신첩이 위험한 상황에 처하면 끼어드시지 않으실 것입니까?”
“그럴 수야 없지.”
단호한 황제의 말에 기하는 어쩐지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정인을 지키고 싶은 사내의 마음은 모두 같은 것이다. 한데, 어찌 그는 되고 자신은 아니 된단 말인가.
“안심해. 그대가 그런 상황에 처할 일은 없을 테니까.”
뺨을 어루만지는 손끝은 지나치게 다정하다. 따뜻하고, 든든했다. 그렇지만 제 눈에 비친 황제는, 온몸을 바쳐 지켜주고 싶은 하나뿐인 정인일 뿐이다.
“그것은 폐하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황제를 덥석 끌어안으며 기하는 그의 단단한 어깨에 제 볼을 비볐다. 시간이 지날수록 불안감이 가중됐다. 드러내지 않은 마음이 그랬다. 그래서 그리 떼를 쓰고 오기를 부려 여기까지 따라나선 것이다.
황제의 무운을 빌며, 어린 황자들과 불안에 떨고 있을 연진 공주, 당장 산고를 겪어도 이상치 않을 황후를 보필하는 것이 제 소임임을 알면서도 그랬다.
“륜은 신첩이 지킬 것입니다.”
“서기하.”
“서기하의 하나뿐인 정인이시니까요.”
그러니 반드시, 반드시.
그들은 문정까지 말을 타고 꼬박 사흘을 달렸다. 새로운 북왕 서진하는 군영(軍營)을 문정의 너른 대지에 잡은 후, 예를 다해 황제를 맞았다. 그들은 쉬거나 배를 채우지도 못하고 쉼 없이 달린 자들답지 않게 몹시도 기백 넘치는 모습이었다. 과연 수년간 전장에서 피를 뒤집어쓰고도 악랄하게 버틴 내공을 지닌 자들다웠다.
“오늘 밤은 여독을 풀고 든든하게 배를 채워라. 단, 축배는 승리 후에 들 것이니 너무 들뜨지 않도록 하라.”
금룡대장 임승지를 필두로 다섯의 장군이 황제를 향해 일제히 머리를 조아렸다. 북쪽에 가까운 문정의 기후는 늦여름이라고 할지라도 아침저녁으론 쌀쌀했다. 넓은 막사 안에는 찬기를 녹일 모닥불이 홧홧하게 타올랐다.
“내일 날이 밝기 전 출정 준비를 모두 마쳐야 할 것이다. 서연은 누구보다 문정의 지리를 잘 알고 있다. 그 수가 적다 하여 만만히 보아서는 아니 될 것이다.”
“예, 폐하.”
“명심해라. 절대로 서연을 죽이지 마라. 반드시 생포하여 짐의 앞으로 데려오도록 해.”
“존명!”
황제는 서늘한 미소를 지으며 장군들을 물렸다. 황제의 등 뒤로 여섯의 그림자와 오른쪽의 임승지, 맞은편의 서진하가 막사 안에 남은 전부였다.
“예까지 직접 행차하실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장인의 초대를 거절할 수야 없지.”
조금 전까지 짓고 있던 쌀쌀한 표정을 거두고 황제는 다정하게 미소 지었다. 서진하는 근심 깊은 눈빛으로 쏟아지는 한숨을 목 안에 눌러 삼켰다. 비록 황제께서 하해와 같은 은혜로 아비의 생포를 명하셨으나, 전장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곳이 아니다. 아비를 생포하려다가 아군이 더 큰 위험에 처할 수도 있다.
“물자는 넉넉한가?”
“예, 폐하께서 내려주신 물자로 굶지 않고 잘 버티고 있습니다.”
“한시라도 빨리 이 전쟁이 끝나야 겨울 날 준비를 할 테니 서두르는 것이 좋겠다.”
“신 또한 같은 생각입니다.”
“올해 추수가 끝나면 북성의 백성들이 겨우내 먹을 곡물을 보낼 것이다. 내년부터는 어찌 겨울을 보낼지 미리 계획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황은이 망극하옵나이다.”
서진하는 진심으로 황제를 향해 머리를 숙였다. 왕실의 주축이 될 이들을 모두 제 사람으로 바꾼다고 해서 민심이 완전히 돌아서는 것은 아니다.
서연은 비록 모진 아비였고 수많은 이들을 죽음으로 내몬 파렴치범이었으나, 북성의 백성들은 끝없이 그를 찬양하고 진심으로 우러러봤다. 그 옛날, 폐허가 된 북성을 재건하고 백성을 모두 거둔 이 역시 서연이었으므로, 그들은 힘들 때마다 그 시절을 떠올리며 참고 인내하였다.
“하면 이제 슬슬 배를 채워볼까? 기름진 음식을 보니 허기가 도는구나.”
차례대로 들어오는 따끈한 음식을 바라보며 황제는 느긋하게 몸을 기대고 앉았다.
“너희도 그리 서 있지 말고 잠시 나가 배를 채우도록 해.”
멀뚱거리며 서 있는 여섯 그림자를 바라보며 황제는 능청스럽게 웃었다. 이곳은 전장이다. 황제는 때때로 그것을 잊은 사람처럼 굴었기에, 그들은 모두 부동자세로 꿈쩍하지 않았다.
“어허, 이것들이 귀가 먹었나. 짐의 명을 거스를 셈이더냐?”
곁에 서서 잔을 채우는 임승지의 술을 단숨에 비워낸 황제는 매끈한 자신의 턱을 쓰다듬으며 차갑게 손질된 서과(西瓜)를 한 입 베어 물었다. 달콤한 육즙이 입안에 흐르자, 참고 있던 갈증이 물밀 듯이 밀려왔다.
“북왕과 함께 수라들 것이니, 금룡대장만 남고 모두 나가도 좋아.”
황제는 다시 너그럽게 웃었다. 망설이던 그림자는 임승지의 눈짓에 하나둘씩 발을 움직였다.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길이었다.
조용히 자리를 물리는 이들을 감흥 없이 바라보던 서진하의 눈이 희미하게 찌푸려졌다. 고상함은 어디에 내팽개쳤는지 시저도 들지 않고 손으로 과일을 집어 먹던 황제가 그림자의 허리를 단번에 끌어안아 자신의 무릎 위에 앉히는 모습 때문이었다.
당황한 그림자가 황제의 품에서 바르작거렸다. 서진하는 황망한 눈을 들어 임승지를 올려다봤으나, 그는 짧게 숨을 내쉬고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것이 몹시도 익숙한 풍경과도 같아 서진하는 숨겨둔 주먹을 그러쥐었다. 모든 것을 다 내어줄 것처럼 그리 달콤하게 굴더니, 사내의 마음이 어찌 이리 갈대와 같단 말인가.
서진하는 저도 모르게 피어오르는 원망의 마음을 간신히 눌러 삭여 다스리려 애썼다. 천하의 주인이신 황제께서 그 누구를 품으신다 하신들, 그것을 막아낼 방도는 없었다.
“거 참, 보는 눈도 많은데 어지간히 좀 하십시오.”
보다 못한 임승지가 다소 불손한 말투로 중얼거렸으나, 황제는 그쪽으론 시선도 주지 않았다. 당황해 움찔거리는 그림자를 끌어안고 그의 마른 어깨를 더듬으며 바라보는 눈빛이 어찌나 열렬하고 애틋한지, 서진하는 당장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디 얼굴 좀 보자.”
나긋나긋한 황제의 음성과 함께 그의 손이 급하게 움직였다. 눈만 겨우 내놓은 그림자는 아예 체념한 듯 그의 손길을 얌전히 기다렸다.
세자빈 외에는 첩도 두지 않은 서진하였기에, 그는 끓어오르는 마음을 애써 누르며 시선을 아래로 두었다. 황제께서 괜히 스무 명의 후궁을 곁에 두신 게 아닐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고 있었더랬지. 하나뿐인 제 아우, 소중하고 또 애틋하게 아껴주신다는 말씀을.
“일단 배를 채우고 씻는 것이 좋겠다. 오늘은 일찍 침수 들자.”
복면을 완벽하게 벗겨내자, 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찰랑거렸다. 대체 얼마나 잘났기에 그림자 주제에 황제의 무릎 위에 앉아 있는 것인지 그 꼴을 봐야겠다며 이를 바드득 갈던 서진하는 목덜미까지 전부 붉게 변한 그, 아니 자신의 하나뿐인 아우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의아함으로 얼룩진 숨을 간신히 내쉬었다. 이게 대체…….
“하나뿐인 정인이 이리 고집불통이라, 짐이 도저히 당해낼 수가 없다. 위험하니 정체를 숨기는 게 좋겠다 했지만, 오랜만에 마주한 형제에게까지 숨길 이유는 없지.”
“기하…….”
“격조하였습니다, 형님.”
“아, 예. 격조하였습니다.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마마.”
“예, 전하. 덕분에 잘 지내었습니다.”
고운 호를 그리며 지어지는 미소에 서진하는 다시금 안심했다. 이제는 그리 쉽게 아우의 이름을 불러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안다. 제국의 주인이신 황제 폐하를 진심으로 믿어야 한다는 것 또한.
“배부터 채우는 것이 좋겠다. 다른 건 다 그럭저럭 견딜 만하였는데, 빈이 도통 먹질 못했어.”
“어릴 때부터 맛있는 것이 아니면 입에 대려고 하지 않으셨지요.”
“그랬던가? 살로 가는 기름진 음식만 좋아하니 큰일이다. 그런데도 도통 살이 붙지 않아 더 큰일이고.”
당황해서인지 얼굴을 붉히는 기하의 허리를 꼭 끌어안은 황제가 그의 콧잔등을 가볍게 문질렀다.
“폐하, 그만 놓아 주십시오.”
“말 안장에 너무 오래 앉아 있어 엉덩이가 아프다고 칭얼대지 않았어? 짐의 무릎도 불편한 것이냐?”
푸흡, 하고 웃음을 삼키는 임승지의 소리가 컸다. 민망함에 더는 달아오를 수 없을 만큼 얼굴을 붉힌 기하는 몸을 기울여 황제의 귓가에 입술을 댔다.
“정녕 이러실 것입니까? 형님 앞에서 저를 계속 망신 주시려고요?”
“짐의 뜻을 그리 곡해하면 쓰나.”
“곡해는 무슨 곡해입니까? 되었으니 좀 놓으십시오. 말씀은 나중에 하시고요.”
“어허, 나의 랑랑께서 단단히 심술이 나신 것 같은데 이를 어쩐다.”
태평한 황제의 음성에 기하는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 그의 가슴을 밀어내며 벌떡 일어나 서진하의 곁에 앉았다. 땀과 먼지가 뒤섞여 꼴이 엉망이었으나, 오랜만에 마주한 형제는 작은 허물을 굳이 들추려 들지 않았다.
어깨를 다독여주는 것으로 반가움을 표현하는 서진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기하는 여러 가지 감정이 뒤섞여 엉망진창인 표정을 애써 감추려 했다. 형제는 반가웠으나, 마주한 이유를 떠올리면 도저히 웃음이 나지 않는 탓이었다.
“어서 요기하십시오.”
“예.”
황제의 못마땅한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기하는 꾸역꾸역 음식을 입에 넣었다. 사흘 내내 도통 먹지 못한 까닭은 순전히 마음이 어지러워서였다. 대놓고 물으시는 황제께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었기에, 괜한 음식 타박을 하였던 것뿐이고.
“천천히 먹어라, 그러다 체할라.”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을 앞으로 스윽 밀어주는 황제를 바라보면서 기하는 애써 웃었다. 가슴 언저리부터 목구멍까지 돌덩이가 내려앉은 것처럼 숨이 꽉꽉 막혔다.
“아얏.”
“어허, 얌전히 있으래도.”
옷깃을 붙잡고 부들부들 떠는 기하의 손끝을 누르자, 시커먼 피가 퐁퐁 솟았다. 상을 물리기도 전에 먹은 것을 전부 게워내고 창백한 얼굴로 푸들푸들 떠는 정인의 모습에, 황제는 흡사 저승사자 같은 표정으로 애꿎은 임승지만 닦달했다.
체기가 있다는 군의의 말에 주위를 물리고 손수 침을 놓으니, 그제야 기하의 얼굴에 핏기가 돌기 시작했다.
“아픕니다.”
힘 있게 등을 두드려주자, 다 죽어가는 얼굴로 끙끙대며 앓는 소리다. 입이나 대충 헹구고 오라 했더니 기어코 땀이 난 몸을 깨끗하게 닦고 들어온 기하에게서 은은한 풀잎 냄새가 났다.
“그러게 어찌 그리 미련을 떨고 먹어? 네가 정연이냐?”
“우리 황자가 어때서요.”
“그대나 정연이나 기름진 것만 보면 눈이 도는 것부터 고쳐야 할 것이야.”
“황자 얘기 그만하십시오. 보고 싶습니다.”
입을 댓 발이나 내밀고 돌아앉은 기하를 보며 황제는 코웃음 쳤다. 울며불며 따라나서겠다고 애원할 땐 언제고, 며칠이나 지났다고 고작 이름 한 번에 표정이 바뀌어? 기가 차고, 어이가 없었다.
“우리 황자들 잘 지내고 있겠지요? 요즘 무영군의 근심이 깊은데 괜히 홀로 마음 쓸까 저어됩니다. 정연군이야 이제 제법…….”
“시끄럽다. 그만 조잘거리고 이리 쳐다봐. 발칙하게 누구에게 등을 돌리고 있는 거냐?”
황제의 볼멘소리에 기하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던 것을 멈추고 슬쩍 몸을 돌렸다. 흉흉한 표정이 몹시도 괴팍해 보여 저도 모르게 슬그머니 뒤로 물러서려다가, 더더욱 일그러지는 황제의 얼굴에 웃음을 매달고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폐하, 신첩 손끝이 찹니다.”
“아직 피가 제대로 돌지 않아서다.”
표정은 여전히 차디차면서 황제는 기하의 손을 덥석 붙잡아 피가 잘 돌도록 주무르기 시작했다. 그의 크고 단단한 손이 손가락 끝부터 팔뚝까지 고루 주무르자, 기하는 더 망설일 것도 없이 황제의 허벅다리에 드러누웠다. 감히 황제의 다리를 베고 태평하게 누운 발칙한 후궁이 역사 속에 또 있을까. 혹여 누가 본다면 경을 칠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기하는 해사한 미소를 지었다.
“홀로 생각하고 걱정하지 말라 일렀거늘, 너 짐을 그리 못 믿느냐?”
“예?”
“입맛 없다고 내내 상을 물리더니, 어째 꾸역꾸역 억지로 입에 넣고 체하기까지 해?”
“그거야…….”
“되었어. 어쭙잖은 변명일랑 할 생각 마라. 짐이 그댈 몰라? 그 작은 머리통에 생각은 적당히 담으라 그렇게 일렀거늘, 어찌 그리 말을 안 들어?”
역시 알고 계셨던가. 오는 내내 일부러 더 밝고 활기차게 말을 쏟아냈는데. 겨우겨우 짜낸 미소를 금세 들키고 말았나 보다.
“알고 계셨습니까?”
“발칙한 것 같으니. 너 이렇게 앓아누우면 혼난다고 했던 거, 벌써 잊었더냐?”
“아직 앓아눕진 않았습니다.”
불만 가득한 목소리를 내는 황제를 올려다보며 기하는 애써 활짝 웃었다. 그래 봐야 제 정인은 달가워하지 않으시겠지만, 어쨌거나 그것이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손끝이 저리고, 가슴은 뛰고, 피곤해도 잠을 잘 수 없었다. 가슴이 불안해서, 마음이 서글퍼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아비가 그리 걱정되느냐?”
“어서 빨리 투항하셨으면 좋겠습니다. 폐하 앞에 무릎을 꿇고, 죄를 빌고, 용서를 구하셨으면 좋겠습니다.”
황제는 식은땀을 흘리는 기하의 이마를 다정하게 쓸었다. 금세 손바닥이 눅눅해질 만큼 머리카락이 젖었다.
“물론, 쉬이 용서받을 수 있는 일은 아니지요. 폐하께서 이리 출정하시었으니, 그 자체가 대역죄입니다.”
쓸쓸한 기하의 음성에 황제는 가볍게 상체를 숙여 그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빙긋이 미소하는 콧잔등과 입술에 다시 한 번 차례차례 입을 맞춰오는 온기에, 기하는 그제야 제대로 된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짐은 그를 벌하러 온 것이 아니다.”
“아버지가 밉습니다.”
기하는 황제의 손가락을 붙잡고 선잠이 든 아이처럼 칭얼거렸다. 황제의 막사가 지나가는 바람에 휩싸였다. 푸른 초원과 넘실대는 강이 차가운 밤바람에 휘저어지는 소리가 퍽 요란했다.
“왜 하필 지금일까요.”
고통스러운 듯 숨을 몰아쉬며 두 눈을 감은 기하의 뺨을 훑으며, 황제는 그의 가슴을 다독였다. 아무리 노력해도 아픈 마음을 다독여주기란 불가능했다.
“처음으로, 태어나길 잘했다고 생각했는데.”
홀로 외롭지도, 아프지도, 슬프지도 않은데.
“어째서, 어째서 지금일까요. 이렇게 행복한데… 이렇게 찬란한데…….”
어째서 씻을 수 없는 죄를, 가슴에 새기라 하실까요.
“기하야.”
황제는 가련하게 떨고 있는 정인을 힘껏 끌어안았다. 반쯤 일으켜진 기하의 몸이 가볍게 떨렸다. 그것은 서글픔으로 뒤덮인 가련한 움직임이었다.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대는 내내 행복할 것이고, 우리는 또한 내내 찬란할 것이야. 그러니 그대, 더는 아프지 마라.”
오래오래 행복하고, 오래오래 미소해라. 아픈 것은 금세 잊고, 슬픔은 내던져라. 그 빚은, 조금 먼 훗날 짐이 질 것이다. 그러니 그대, 그저 내 곁에서 지금처럼 있어만 다오.
밤이 깊어간다. 푸른 달 아래, 고향을 떠올리는 병사들의 숨소리가 고요하게 물든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단 한 가지뿐이다. 부디 내일은 승전고를 울리며 무사히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 * *
둥. 둥. 둥.
빈틈없이 정비되어 늘어선 군영 한가운데로 죄인들이 질질 끌려왔다. 지난밤, 불시에 급습해온 이들의 수는 고작 오백 남짓이었다.
제대로 된 무기도 갖추지 못했고, 가진 것은 그저 분노뿐인 두 눈으로 서진하의 군사만을 골라 상대하는 이들을 제압한 금룡대는 시작도 하지 않은 전쟁이 끝으로 치달음을 느끼며 아쉬움에 혀를 내둘렀다.
“죄인은 고개를 들라.”
무리의 가장 앞에 서 있던 사내는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독사처럼 사나운 눈을 번쩍였다. 서연의 충신이자 최측근인 대장군(大將軍) 이휘감은 부러진 이를 드러내며 실성한 사람처럼 키득거렸다.
서진하는 무감각한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이휘감의 하얀 옷이 붉게 물들고, 신발이 벗겨진 탓에 상처투성이 맨발에선 피가 줄줄 새, 그가 움직일 때마다 희미한 발자국이 새겨졌다.
“아버님을 따르던 군대는 도합 이천이라고 들었다. 나머지는 아버님을 호위하고 있는가.”
“퉤. 왕좌에 눈이 멀어 천륜도 저버린 자의 말은 대답할 가치도 없다.”
이휘감의 입에선 비릿한 핏물이 샜다. 그들은 서연의 최정예 부대라는 칭송도 아까우리만치 허무하게 무릎을 꿇었다. 마치 제 발로 찾아와 제물이 되려는 것처럼, 고작 오백의 수로 이만에 가까운 이들의 한가운데를 뚫고 들어와 검 한 번 제대로 휘두르지 못하고 완전히 포위되었다.
“제 욕심 때문에 나라를 팔아먹은 그대는 하늘이 가만두지 않으실 것이다. 두고두고 천벌을 내릴 것이야!”
“더는 살려둘 가치가 없겠습니다.”
고래고래 소리치며 폭언을 퍼붓는 이휘감을 향해 서진하는 쉬이 입을 열지 않았다. 보다 못한 흑마단장 최장명이 검을 들었으나, 서진하는 손을 들어 그를 저지했다.
이휘감의 말이 완전히 그른 것은 아니라는 생각에 마음은 쉼 없이 휘청거렸다. 그러나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었다. 자신을 믿는 백성들과 북성, 그리고 하나뿐인 아우를 위해서라도.
“아버님은 지금 어디 계시나.”
군더더기 없는 서진하의 물음에 이휘감은 주위를 휘이 둘러보며 비릿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그토록 오래 기다렸던 황제의 모습은 아직 보이지 않았다.
“전쟁이 길어질수록 백성들은 황폐해진다. 그것은 그대가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지 않은가.”
대장군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이휘감은 전쟁을 그리 즐기지 않았다. 아직 약관도 지나지 않은 흑마단의 나이 어린 훈련병조차 피에 굶주려 미쳐 날뛸 때도, 그는 어떻게 하면 효율적으로 전쟁을 끝내고 백성들의 안위를 보살필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하고 행동했다.
물론 그것은 늘 서연의 곁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런 그가, 전쟁을 제대로 시작하기도 전에 서연에게서 따로 떨어져 나왔다는 것이 서진하는 몹시도 의문스러웠다.
“성군인 척하지 마라, 역겨우니까. 그래 봤자 그대는 아비의 목을 치고 스스로 자리에 오르려 하는 패륜아일 뿐이다.”
비죽한 이휘감의 미소에 최장명은 더는 참지 못하고 그에게 달려들었다. 푹, 그의 어깨에 꽂힌 검 아래로 뜨거운 피가 뚝뚝 흐르기 시작했다. 이휘감은 스산하게 웃었다. 파리한 분노가 그의 얼굴 가득 흐리게 번졌다.
붉은 망토를 휘날리며 걸어오는 황제의 존재감은 실로 어마어마했다. 장수들이 쭉 늘어서 있는 막사를 가로지르며 성큼성큼 걷던 황제는 문득 고개를 돌리더니 화려한 미안을 사납게 찌푸렸다.
“꼴이 이게 뭐냐.”
급한 불은 끈 모양이나, 이휘감의 몸에서는 연신 피가 뚝뚝 흘렀다. 천을 여러 겹 덧대어 눌러놓은 상처 부위가 금세 붉게 물들었다.
“쓸데없는 살상은 금하라 이른 것 같은데.”
“송구하옵니다, 폐하.”
망설임 없이 머리를 숙이는 서진하를 바라보던 황제는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등을 돌려 커다란 의자에 털썩 앉았다. 황제의 무심한 눈빛이 꿇어앉은 이휘감을 느릿하게 탐색했다. 그와 그의 등 뒤에 있는 네 명의 수하는 사지가 묶여 개처럼 엎드려 있었으나, 눈빛만은 형형하게 빛났다. 황제는 그 모습에 비로소 환하게 미소했다.
“여전히 서연의 곁에는 충신이 여럿 있군. 그 재능, 조금 더 좋은 곳을 위해 쓴다면 북성은 훨씬 안락하고 평안해질 텐데 말이야.”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황제의 음성은 다정하고 나긋했다. 흡사 자신의 아이를 어를 때처럼, 사려 깊은 목소리였다. 제국을 발아래에 두고, 피를 뒤집어쓴 채 전장을 호령하던 사내가 맞는지 의심될 정도로 그는 몹시 평온한 얼굴이었다.
이휘감은 그런 황제를 보며 바드득 이를 갈았다. 문득 수년 전, 폐비를 쫓아 몸소 북성까지 행차했던 황제의 모습이 떠오른 까닭이었다. 그는 피비린내 나는 미소를 지으며 악귀처럼 날뛰었었다. 새파란 빛을 뿜으며 저주를 퍼붓던 모습은 이제 온데간데없었다. 비단 시간이 많이 흐른 탓만은 아닐 것이다.
“그 충심, 북성을 위해 새 왕에게 돌리는 것이 어떤가.”
“퉤.”
피가 섞인 침을 바닥에 뱉으며 이휘감은 구렁이처럼 사나운 눈을 번뜩였다.
“그대들이 지키려는 것은 북성인가, 사리사욕에 미친 왕인가.”
냉정한 황제의 음성에 이휘감은 기괴한 웃음을 흘리며 어깨를 들썩였다. 그 괴이한 모습이 흡사 미친 사람과 같아, 금룡대는 바짝 긴장한 얼굴로 황제 주위를 단단히 에워쌌다.
“짐의 말이 틀렸나?”
“그분도 사람이오.”
가래가 뒤섞여 거칠어진 이휘감의 목소리가 황제의 미소를 거둬들였다. 그는 마른 숨을 색색 내쉬며 고통스러운 듯 연신 얼굴을 찌푸렸다. 칼에 찔리면서 폐에 바람이 들어갔는지 숨을 내쉴 때마다 고르릉, 하는 괴이한 소리가 났다.
“늘 옳은 일을 할 수는 없소. 늘 나라와 백성만을 위해 살 수는 없소. 그것이 설령 그분의 운명이라 해도, 임금이기 전에 인간이지 않소.”
한때는 그런 주군을 못마땅하게 여겨 명을 어기고 제멋대로 굴던 때도 있었다.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 올라 왕께 검을 들이미는 극악무도한 짓을 저지르기도 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왕은 모든 것을 달관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봤다. 그 표정이 어찌나 서글프던지, 살고 싶어 사는 이가 아닌 것만 같아 어찌 이리 사시느냐고 소리쳤던 때도 있었다.
“그래, 임금이기 전에 인간이 맞지. 두 아들의 아비이고, 한 여인의 지아비였고, 누군가의 아들이었으며, 또 다른 누군가의 형 혹은 아우. 누구나 그러하듯 그 또한 그렇게 살아야 했다.”
적어도 자신을 바라보는, 가장 가까운 이들에게는 상처 주지 말았어야 했다. 훌륭한 임금은 아니더라도, 따뜻한 아버지거나 다정한 부군이기라도 했다면 이토록 모두가 회한에 잠기지는 않았을 거다. 그의 잘못을 애써 숨기고 감추려 발만 구르지는 않았을 테다.
“왕을 이해하는 것은 아닙니다.”
왕은 끝끝내 자신의 손을 붙잡지 않았다. 문정으로 향하면서도 줄곧 제 곁에서 떠날 것을 원했다. 자신을 따르는 것은 막다른 죽음뿐이라며 사납게 일갈하고 냉정하게 돌아섰다.
그는 늘 그렇게 살았다. 악랄하고 치밀하게 모든 것을 계획하면서도, 그 끝에는 늘 허망한 죽음을 그려 넣었다. 당장 죽어도 서럽지 않다 여길 만큼, 삶과 죽음은 종잇장 차이일 뿐이라며 입버릇처럼 말하던 그의 얼굴은 지나치게 태연했다.
“아마 영원히, 왕을 이해하지 않을 것입니다.”
소중한 친우였고, 오직 단 하나의 주군이었다. 정신이 무너져가는 그를 곁에서 지키며 얼마나 숱한 밤을 안타까움에 떨었던가.
그는 철저하게 망가져 갔다. 자신을 내던지고, 손에 닿지도 못할 것을 끊임없이 갈구했다. 그리고 그로 인해, 수많은 사람이 죽어갔다.
“왕을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그를 막지 않았으니, 그것 역시 불충이오. 사는 것이 죄스러워 더는 미련도 없으니, 이제 그만 죽이시오.”
스르르 눈을 감으니 지난날이 덧없이 떠올랐다. 오직 북성을 위해, 왕을 위해 살겠다던 맹세를 지키지도 못하고 이리 허무하게 삶을 무너뜨릴 것이라 그때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어째서였을까.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선량한 백성들의 신음 어린 피눈물을 바라보면서도, 어째서 그는 예전으로 돌아가지 못했을까.
“더럽게 살 바엔 그냥 죽는 것이 낫지.”
힐난에 가득한 황제의 목소리에도 이휘감은 그저 눈을 감을 뿐이었다.
“비겁한 건 서연이나 너희나, 매한가지구나.”
감은 두 눈 위로 황제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서늘한 기척에 의문을 갖기도 전, 이휘감은 자신의 목을 움켜쥔 차디찬 체온에 어깨를 바싹 웅크렸다.
“크헉.”
기도를 짓누르는 압박감에 눈알이 튀어나올 것만 같아 본능적으로 몸을 움찔거렸다.
“잘못을 알면서도 그것을 바꾸려 하지 않고, 도망치듯 죽어버리면 너희를 믿고 악착같이 버티며 살아가는 백성들에겐 뭐라 할 것이냐. 그래, 그럴 바엔 죽어라. 짐승만도 못한 삶을 살고 후회가 무서워 도망치는 거라면, 그냥 이리 죽는 게 낫겠다.”
점점 악력을 더하는 황제의 아귀힘보다 그의 말이 칼날처럼 가슴을 찔렀다. 꺽꺽거리며 숨을 몰아쉬던 이휘감이 허공에 손을 두고 파들파들 떨었다. 희끗희끗거리는 수염은 피로 얼룩진 입술이 달싹일 때마다 나비처럼 춤췄다. 감은 두 눈 사이로 긴 눈물이 처연하게 흘러내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도 감히 황제의 분노와 맞서지 못한 이휘감의 수하들은 머리를 땅에 박고 소리 없는 통곡을 시작했다. 죽음의 냄새가 막사 안을 사납게 헤집었다.
“미련한 것.”
혀를 끌끌 차던 황제는 한계치까지 숨을 참으며 경련하기 시작하는 사내를 사납게 밀어냈다. 시퍼런 멍이 차오르기 시작한 목을 붙잡고 거칠게 기침을 토해내는 그의 곁으로 수하들이 달려들었다. 흥건하게 젖은 두 눈엔 소리 없는 분노와 원망, 짙은 회한이 드리워졌다.
“서연은 어디 있나.”
“흐, 허… 모릅니다.”
서연은 미쳤다, 고작 여인 때문에.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려 수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내몬 악귀 같은 여인 하나 때문에 가족을 등지고, 백성을 버리고, 아버지이기를, 왕이기를 스스로 포기한 그는 악랄하게 미쳐갔다.
“새 왕을 섬기고 네 죄를 씻어라. 서연 그자가 일말의 양심이라도 남아 있다면, 그도 그것을 바랄 테지.”
등을 돌린 황제의 음성이 낮게 드리워졌다. 누군가를 사모하는 마음에 모든 것을 내던진 그를 과연 오롯이 비난할 수 있을까.
서연은 평생 그녀를 위해 살았다. 닿을 수 없었던 인연에 좌절하기는커녕, 자신의 삶에서 그녀를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다.
폐비는 제 손으로 사지를 잘랐다. 떨어진 목은 성문 밖에 걸렸고, 백성들에게 돌팔매질 당해 처참하게 찢긴 육신은 거리의 짐승 밥이 되었다. 피 한 방울, 뼈 한 줌도 묻지 못하게 했다. 그 누구도 그녀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 모습을 서연은 빠짐없이 지켜봤다. 또 한 번 반역을 도모한다면 너희 또한 그리되리라는 일종의 경고일 뿐이었다. 그 겨울은 유난히 추웠고, 그리고―.
“곤하다. 이만 쉬어야겠어.”
황제는 피곤함에 절은 음성으로 일순 휘청거렸다. 가까이 서 있던 임승지가 그를 부축하려 했으나, 황제는 그저 가볍게 손을 저을 뿐이었다. 혹독한 추위와 지독한 고문으로 얼룩졌던 그 겨울을, 제 정인은 어떻게 버텼을까.
“서연을 끝까지 추적해. 한시도 멈추어선 아니 될 것이다.”
발이 빠르고 실력이 출중한 이들이 사방으로 서연을 추적하는 중이었다. 밤이 깊도록, 그들에게선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그를 붙잡아 마주한다면, 기하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차라리 원망하고 미워하는 마음이라도 보인다면 이렇게까지 가슴이 시리지는 않을 텐데.
“옥체 미령하십니까.”
뒤를 따르는 임승지의 목소리에 근심이 묻어났다. 황제는 대답 대신 가만히 손을 들어 더는 따르지 않을 것을 명했다.
“폐하.”
“후회가 돼.”
밤하늘은 유난히 검었다. 별 한 점 보이지 않는 초원에 스산한 바람이 불었다. 태풍이라도 몰려올 것 같은 을씨년스러운 날씨 탓에 불을 피운 주변의 경계가 강화되었다.
“사소한 말 한마디, 행동 하나가 누군가의 삶을 뒤틀어버릴 수 있다는 것을 모르지도 않았을 때인데 말이다.”
외려 너무 잘 알아 탈이었다. 그래서 자유롭게 살고 싶었던 거다. 무거운 책임 따위는 형님께 넘겨버리고, 바람처럼, 구름처럼 그렇게 살고 싶었다. 가진 것이 너무 많아 부리는 만용이라고 누군가는 손가락질했다. 한데 지금은 어떠한가.
“가진 게 많아 다행이라는 생각을 한다. 힘과 권력이 있어, 허수아비 황제가 아니라서 안도하고 있다.”
하나뿐인 정인을 지켜 줄 힘이 있어서, 그를 보호해 줄 권력을 가지고 있어서, 그가 원하는 건 헤어지는 것 외엔 다 해 줄 수 있으니 이 얼마나 다행인지. 이 얼마나 어리석은 마음인지.
“머잖아 서연에게 기별이 올 것이다. 경계를 늦추지 마라.”
“예, 폐하.”
머리를 숙이는 임승지를 힐끗 돌아보며, 황제는 가볍게 눈을 감았다. 황궁으로 향하는 그 길도 이토록 평안하고 고요하면 좋으련만. 기척을 죽이고 막사 안으로 들어가는 황제의 뒷모습을 임승지는 물끄러미 응시할 뿐이었다.
곤한 숨소리에 황제는 걸음을 멈추고 빙긋이 웃었다. 괜찮다고 그리 호언장담하더니 어지간히 피곤했던지 소록소록 고른 숨을 내뱉으며 잠든 기하의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으니, 가슴께가 꽉 막히는 것만 같다. 밤바람이 차가워 기수를 조금 더 끌어 올려주려 몸을 기울이던 황제의 손이 멈췄다. 기척에 잠이 깬 것도 안타까운데, 어찌나 날쌔게 머리맡에 둔 검을 잡고 자세를 잡는지, 금룡대도 울고 갈 민첩함에 혀가 내둘러졌다.
“폐하?”
“그래, 짐이다.”
잠이 덜 깨 몽롱한 눈에 긴장감이 사라진다. 바람처럼 일어나 검을 붙잡을 때는 날쌘 맹수 같더니, 경계가 풀리니 순한 양이 되었다.
“금세 오신다고 해놓고 어찌 이리 늦으셨습니까.”
“얘기가 길어졌다. 푹 자지 않고. 자객이라도 들까 염려하였더냐?”
웃으며 뺨을 어루만져도 기하는 시큰둥한 얼굴이다. 한시도 떨어지지 않으려는 것을 금세 온다고 하고선 억지로 떼어 놓았더니 심술이 난 모양이었다.
“전장이지 않습니까.”
졸린 눈을 비비면서도 꼿꼿하게 허리를 펴고 앉은 기하는 황제에게 손을 내밀어 무거운 갑옷을 직접 손댔다. 딱히 시중들 이를 들인 것도 아니라 기하가 하는 것을 기분 좋게 받으려 했는데, 다른 건 죄다 서툰 기하의 능숙한 손길에 문득 의문이 들었다.
“어찌 이리 능숙해?”
“뭐가 말입니까?”
“다른 시중드는 것은 어색하고 어려워하면서.”
“그야 늘 해왔던 것이니 그렇지요. 금일은 늦었으니 가볍게 닦으시고 침수 드십시오.”
감히 한 나라의 왕자가 누구의 시중을 든단 말인가? 슬그머니 미간을 찌푸리는 황제의 등 뒤에서 기하는 불 위에서 끓고 있는 뜨거운 물에 영견을 적셨다.
“전장에선 신첩 또한 하나의 병졸에 지나지 않았으니까요.”
“뭐야? 그럼 다른 놈들 시중을 그대가 직접 들었다는 것이냐?”
“그럴 때도 있었지요. 첫 출정으로 손이 서툰 졸병이라든지, 늘 함께 출정하였던 서 중랑이라든지, 형님 수발도 들어야 했고요.”
흉흉한 기세로 이를 바드득 가는 황제에게 시선을 주지도 않고 하품만 쩍 하던 기하는 물에 젖은 영견을 들고 겨우 무릎을 폈다.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나는 물에 손을 넣으니 손끝이 붉어진다. 황제는 그것을 못마땅한 얼굴로 바라보다 남은 옷을 훌훌 벗었다.
“이런 건 네가 하지 않아도 된다.”
“신첩이 하지 않으면 누가 합니까?”
“손이 다 데겠어.”
“괜찮습니다. 뒤돌아 보세요.”
잘 짜인 황제의 근육이 움찔거렸다. 기하는 흥미 가득한 눈으로 황제의 벗은 몸을 훑으며 무겁지 않은 손길로 등을 닦았다. 딱히 먼지를 뒤집어썼던 것은 아니었으나, 뜨거운 것이 몸에 닿자 노곤함이 밀려와, 개운하게 잠들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님께서 출정하실 때면, 출정일 아침 수발은 늘 신첩이 들었습니다.”
“그랬더냐.”
“그 시간이 두려우면서도 좋았습니다. 아버님께서 유일하게, 저만을 바라보고 당부하셨거든요.”
어린 아들을 바라보는 냉랭한 시선 속에 감춰졌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다른 이를 향한 그리움이었을까, 미움이었을까. 아니면 원망이었으려나.
“뭐라 하였는데.”
“그냥 사소한 이야기요. 수련을 게을리하지 말고, 형님 곁에서 잘 보필하고, 너무 욕심껏 먹다 탈 나지 말고.”
마지막 얘기를 하면서 기하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그랬던 날도 있었구나. 비록 지금은 너무도 오래되어 뿌옇게 흐려져 바랜 기억이었으나, 여느 무뚝뚝한 아버지처럼 그런 당부를 하며 잘 지내라는 인사를 나누었던 날도 있었다.
“그때가 그리우냐.”
등을 닦던 기하의 손이 멈췄다. 황제는 가만히 숨을 내쉬며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얼마 후, 그는 대답 대신 황제의 허리를 말없이 끌어안는 것을 택했다. 그가 숨을 내쉬고 들이마실 때마다 오르락내리락하는 마른 살결이, 그 단단하고 뜨거운 체온이 위안이 되고 안식을 주었다.
“아니요.”
아버지를 떠올리면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 그때였다. 잘 다녀오시라는 인사를 건넬 때면, 그저 머리를 쓰다듬어주시던 손길이 그립지 않다고 하면 거짓이었다.
“추억은 추억일 때 가장 아름다운 법이지요.”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다. 잊지 않겠지만, 내내 가슴에 담아두겠지만, 단지 그것뿐이다.
“신첩은 지금이 행복합니다. 륜이 곁에 계시니까요.”
황제는 자신의 허리를 감싼 기하의 손등을 가볍게 그러쥐었다. 맞닿은 체온이 유난히 서글펐다. 내내 괜찮다고 자기 최면을 걸면서도, 기하는 겁에 질려 떠는 가련한 짐승과 같았다. 그것을 마주 보고 품어주어야 할지, 아니면 모르는 척 그냥 넘어가야 할지 잠시 망설이는 동안, 선잠 든 아이처럼 자꾸만 등 뒤에서 바르작댔다.
“곤합니다. 이제 그만 침수 드세요.”
“그래, 그러자.”
무거운 마음을 모두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나누려 해도 나뉘지 않는 슬픔은 오롯이 홀로 감내해야 할 독이다. 그저, 그 안에서 최소한의 상처만을 보여주는 것이 자신이 할 일이라는 것을 황제는 잘 알고 있었다.
“이리 온.”
먼저 침상에 누워 팔을 벌리자, 기하는 망설임 없이 황제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여정이 고되었는지, 늘 곁에 있었던 자신이 느낄 정도로 살이 내린 그가 안타까웠다.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자꾸만 마르는구나. 아직 짐의 속을 덜 썩였더냐?”
“황궁에 돌아가면 맛난 음식을 많이 먹을 것입니다.”
“제발 좀 그래라. 또 입맛 없다고 상 물리지 말고. 여름도 다 지났으니 포동포동 살을 찌워.”
뺨을 어루만지는 황제의 손길이 간지러워 기하는 작게 키득거리다 이내 눈을 감았다. 아련히 떠오르는 옛 기억은 잠시 미뤄두기로 했다. 온몸에 노곤한 수마가 기어올라 사지를 뒤트는 것만 같았다.
“기하야.”
“예.”
“내게 와 주어, 고맙다.”
나의 기쁨이 되어 주어 고맙다. 나를 사모해주어 고맙다.
“그대는 나의 기쁨이자, 유일함이니. 평생 이리 짐의 품에 있어라.”
“예, 폐하.”
하면, 지금 이리 몰래 우는 것 정도는 눈감아 줄 것이다. 홀로 가슴 치는 것 또한 모르는 척할 것이다. 네가 다시 웃을 수만 있다면, 네가 다시 행복해진다면, 짐은 무엇이든 할 것이다.
“폐하.”
“응?”
“제국에서는 쌍생은 불길하다는, 그런 말은 믿지 않지요?”
“그런 미신은 믿지 말라 하지 않았어.”
어쩌면 자신은 불온(不穩 : 합당하지 않다)한 삶을 타고 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태어나면서 어미를 잡아먹은 아이. 제 누이의 뼈와 살을 파먹으며 홀로 살아남은 저주받은 아이.
누군가가 손가락질한다 해서 제 삶이 부끄럽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그저 외롭고 고단하여, 계속 그리 살다간, 언젠간 스스로 자멸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적은 있었지마는.
그런 생각을 멈춘 것은 순전히 자신을 품에 안고 있는 정인 때문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어여쁘다는 말도, 오롯이 사모하고 너뿐이라는 말도 태어나 처음 듣는 것이었다. 처음 느끼는 애정이었다.
그러니 견딜 것이다. 가슴이 찢긴다 한들, 그것 또한 지나가면 아무것도 아닐 기억의 조각일 테니. 견디고, 또 견디고, 살아갈 것이다. 어머니와 누이가 주신 이 삶, 행복하게 찬란하게 꽃피울 것이다.
그와,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