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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장 그래도 꽃은 핀다 (37/49)

36장 그래도 꽃은 핀다

“뭐라고?”

난처한 듯 머리를 조아리는 현 상궁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기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입맛이 없다며 종일 음식에 입도 대지 않고 시간을 보낸 탓인지, 그는 금세 휘청거리며 머리를 짚었다.

“마마.”

팔을 붙잡는 현 상궁을 밀어내며 기하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종일 곁에서 떠들던 정연군이 영과 함께 후원에 나갔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또 겁 많은 황자가 눈물을 그렁그렁할 뻔했다.

“정녕 폐하께서 그러셨다고?”

“예. 마마를 제대로 호위하지 못한 죄를 물으시며, 당분간 처소에서 자숙하라 명하셨습니다. 또한, 마마의 호위는 여덟의 그림자가 할 것이니 불편하시더라도 참으셔야 합니다.”

어젯밤까지는 분명 아무 말씀도 없으셨다. 그 일과 관련해서는 절대로 그 누구에게도 벌을 내리지 않으시겠다고 약속하시곤, 어찌 이러실 수가 있단 말인가.

“서엽이 무슨 잘못이 있는데?”

“폐하의 판단은 다르실 수 있지요. 서 중랑은 마마의 호위가 아닙니까. 마마께서 크게 상처 입으셨으니, 책임을 다하지 못한 서 중랑을 벌하신다고 하셔도 폐하를 탓하실 수는 없습니다.”

“자네는 지금 누구 편인가?”

답지 않게 짜증이 가득한 기하의 말투에도 현 상궁은 머리만 조아릴 뿐이었다. 속이 터질 것 같고, 가슴이 답답했다. 이 와중에 서엽마저 곁에 없으면 대체 누구와 마음 터놓고 얘길 할 수 있단 말인가.

“폐하께선 지금 어디 계시지?”

“대전에 계십니다. 어젯밤 내내 추국장에서 죄인들의 고문이 이어진 탓에 황실 분위기가 무척 어수선합니다. 폐하께서도 심기가 불편하시고요.”

“그러니 알아서 몸 사리라고?”

퉁명스러운 기하의 음성에 현 상궁은 다소곳하게 머리를 조아렸다. 상전은 날씨가 더워 평소보다 예민했으나, 그의 속내에 다른 뜻이 없음은 익히 잘 알고 있다.

“무영군은.”

“수업 중이시지요.”

“오늘은 무예 수업을 받는 날이 아닌가? 날이 이리 더운데 무리하다가 상처에 염증이라도 생기면 어쩌려고?”

“염증은 무슨 염증입니까? 마마야말로 치료 잘 받으셔야 합니다. 태의 영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혹여 흉이라도 남으면 어쩌시려고 이러십니까?”

“손에 상처 하나 더해진다고…….”

“마마.”

흉흉해진 현 상궁 표정에 기하는 삐죽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천으로 칭칭 감긴 손은 아프지는 않았으나 불편했다.

“알았어. 알았으니까 그만 쳐다보게. 현 상궁 무서워서 말도 못 하겠네.”

아이처럼 토라진 기하의 표정에 현 상궁은 다시 나긋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붙잡아 일으켰다.

“어서 채비하십시오. 자경전에 문후 여쭈러 가시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응.”

황후를 찾아뵌 지 너무 오래되어 그리하겠다고는 했는데, 역시나 이 꼴로 가면 마음 약하신 마마께서 몹시 놀라실 테지. 그렇다고 손을 당장 숨길 수도 없는 노릇이고.

게으름 부리지 말고 진작 찾아뵐 것을 그랬다는 후회에 움직임이 둔해졌다. 머리카락을 빗겨주고 매무새를 가다듬어 주는 현 상궁 손길에 이리저리 몸을 움직이면서 기하는 한숨을 푹 쉬었다.

“어서 오시게, 무빈.”

기하는 수발 상궁의 부축을 받으며 기대고 있던 몸을 일으키는 황후에게 절을 올리며, 저도 모르게 굳어지는 표정에 민망한 미소를 지었다. 여인의 부푼 배를 처음 보는 것은 아니었으나, 정인의 아이가 곧 태어난다고 생각하니 저도 모르게 마음이 씁쓸해진 탓이었다.

“그간 자주 찾아뵙지 못해 송구합니다.”

“아니네. 마음이 많이 어지러웠을 텐데, 건강은 좀 어떤가? 손은 괜찮은가? 무영군을 지키다 크게 다쳤다 하여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네.”

“사소한 상처인데 괜히 놀라시게 했습니다.”

머쓱하게 웃으며 옷 아래로 슬그머니 손을 감추는 기하의 모습에 황후는 예의 따뜻한 미소로 화답했다.

“여러모로 어지러운 와중에 미안하네. 무빈을 만나 꼭 해야 할 청이 있어서…….”

답지 않게 말을 흐리는 황후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기하는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 그것은 순전히 자신의 기우였다. 자식을 품은 어미의 마음이 어떤지는 잘 모른다. 하나, 세상 모든 어머니가 자식을 위해서 얼마나 애틋해지는지는 알고 있다. 혹여 출산을 앞둔 황후께서도 그러신 것은 아닐까. 앞으로 태어날 귀한 아기씨의 미래를 위해, 자신의 존재가 불편해지신 것은 아닐까.

“무빈.”

“예, 마마.”

“나는 폐하께, 그리고 이 위대한 제국에 너무도 부족한 사람임을 잘 알고 있네.”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승하(昇遐)하신 황태자 전하께서 내게 청혼하셨을 때도, 그런 연유로 마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어.”

그때 나는, 너무도 어리고 미숙하여 마음이 곧 접힐 줄 알았다네. 어릴 때부터 여인은 모든 것을 참고 인내하며 고통을 감수해야 하는 존재라 배웠지. 그래서 잊고 살았네. 지우면 지워질 것이라 여겼어. 모든 것을 이해하고 받아주신 폐하께 죄를 짓는 것임을 알면서도 그리했다네.

“시간이 지나고 나니, 점점 더 후회가 돼.”

“…….”

“미안하네, 무빈. 나는 이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인데, 이런 나로 인해 그대의 마음이 늘 무겁다는 것을 알고 있네.”

“마마, 신첩은 그저…….”

차마 아니라는 말은 하지 못했다. 그것은 거짓이었으니까. 황후는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듯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열 달 가까이 아이를 품고 있으니, 그래도 나의 아이라는 생각에 애틋해지네. 그저 건강하게, 무탈하게, 잘 자라만 준다면 이제 바랄 것이 없어.”

“예, 당연히 그러셔야죠. 장차 황위를 이을 귀한 아기씨가 아닙니까.”

“그것은 차후에 정할 일이라고 폐하께도 말씀드렸네. 황제의 자리가 그리 쉽게 얻어지는 것은 아니니까.”

숨이 가쁜 듯 잠시 말을 멈추는 황후를 보호하는 수발 상궁의 얼굴이 어두웠다. 아직 완전히 달을 채운 것은 아니었으나, 그녀의 배는 유난히 크게 부풀었다.

타고난 체질이 약한 탓에 아이에게 기를 빼앗겨 힘든 것은 당연한 일인 데다, 올해는 유독 더위가 기승을 부렸다. 정말로 지독한 여름이었다.

“아이가 어느 정도 자라면 태자 전하께서 잠들어 계신 송악산에 거처를 마련할 생각이네.”

“…예?”

“폐하께서 황좌에 오르신 후, 내게 약조해 주신 일이라네. 물론, 폐하께 도리는 다하고 싶었네만…….”

희미하게 미소하는 여인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도무지 그녀의 말뜻을 이해할 수 없었다. 송악산에 거처를 마련한다? 아이가 어느 정도 자라면? 태자 전하의 곁?

“마마,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무정한 어미라 욕할지도 모르지. 이 아이가 민가에서 태어난 여염집 아이였다면, 나 또한 생각을 달리했을 테고.”

“아이에게는 어머니가 필요합니다. 더욱이 황궁은, 이곳은…….”

“지나치게 쓸쓸하고, 외로운 곳이지.”

외로움이 외로움을 낳고, 쓸쓸함이 고독이 되어 그렇게 메말라 가는 곳이다. 웃고 있는 사람 그 누구도 진정한 행복을 찾지 못해 방황하다, 그렇게 평생 홀로 살아가는 곳이 아름답고 찬란한 황궁이다.

드높은 황궁 벽을 넘지 못한 그리움은 모든 이의 마음을 병들게 했다.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고 등 뒤에 서슴없이 칼을 꽂으며, 내가 살아가기 위해 남을 짓밟아야 하는 부조리한 세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곳엔 꽃이 핀다. 바람이 분다. 사람이 웃고, 이내 운다.

“그대에게 이런 큰 짐을 남겨주어 미안하네. 아버님의 일로 마음이 불편할 텐데.”

“신첩은, 이 일을 어찌…….”

“성정이 메마르던 무영군이 아니었나. 비록 영빈의 일로 마음에 큰 상처를 입었으나, 무영군 또한 언젠가는 정연군처럼 활짝 웃을 수 있을 테지. 정연군은 황실의 기쁨이라네. 어찌나 귀여운지 보고 있으면 절로 웃음이 나. 그 모든 것은 무빈의 공이야. 그대가, 폐하를 향한 그대 마음이 모두를 바꾸었으니까.”

찬바람 쌩쌩 부는 겨울 같던 폐하의 가슴에 봄이 찾아왔다네.

“마마.”

“자, 이 일은 급한 것이 아니니 차후에 하도록 하지. 내 진정으로 청할 일은 이것이 아니라네.”

눈을 곱게 접으며 미소하는 황후의 표정에 기하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렇게 중요하고 무거운 말씀을 하시고는 다른 얘기가 더 남으셨다는 것인가?

“예?”

“폐하를 설득해 주시게.”

“그게 무슨…….”

어리둥절해 입을 다시 열던 기하는 때마침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다가 급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한동안 얼굴을 볼 수 없었던 연진 공주의 난데없는 등장에 놀란 탓이었다.

상궁의 손을 붙잡고 다리를 절뚝거리며 걸어 들어오는 공주의 고고한 얼굴에 기하는 가볍게 숨을 몰아쉬었다. 자신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공주이니, 폐하께서 태화당에서 검상(劍傷)을 당하셨다는 소문을 따지러 온 것일지도 모른다.

“어서 오세요, 공주.”

“마마, 늦어서 송구합니다.”

불편한 몸임에도 공주는 무릎을 굽히며 황후를 향해 예를 올렸다. 곧장 기하의 옆으로 다가온 그녀에게서 달콤한 향기가 났다. 황제와 꼭 빼닮은 눈매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먼저 고개를 돌린 기하는 난감한 표정을 지우고 황후를 향해 머리를 숙였다.

“마마, 하면 신첩은 먼저…….”

“잠시 함께 나눌 얘기가 있으니 앉으시게.”

함께 나눌 얘기가 무엇이란 말인가. 공주께서는 저만 보면 사나운 고양이처럼 달려드시는데. 북성의 일로 심기가 단단히 틀어지셨음은 자명한 사실 아닌가. 저도 모르게 가느다랗게 한숨을 내쉰 기하는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오랜만입니다, 무빈.”

“예, 공주마마.”

고운 입술이 벌어졌다. 저 입에서 당장 쏟아질 말을 아무렇지 않게 들을 자신이 없다. 마음이 많이 지쳤다. 벌써 명치가 꽉 막힌 것 같고, 머리가 지끈거린다.

“북성의 일로―.”

기하는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그녀의 입에서 나온 북성이라는 주제는 듣지 않아도 빤한 것이 아니던가.

“무빈의 상심이 크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예?”

“너무 상심하진 마세요. 오라버니께서 현명하게 잘 해결하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이것은 무슨 경우던가. 지금 공주께서, 다른 일도 아닌 북성의 일로 다친 제 마음을 위로하려 하심인가?

“예. 그것이야 그렇겠지만…….”

얼떨떨한 기하의 반응에 황후는 빙긋이 웃으며 새초롬하게 눈을 내리깔고 있는 연진 공주의 손을 잡았다.

“무빈.”

“예, 마마.”

“우리 공주께서 마음에 드는 정인을 찾으시었답니다.”

“예? 아…, 그러셨습니까. 경하(敬賀)드립니다.”

얼굴을 붉히며 자그맣게 미소하는 공주의 얼굴을 멍한 눈으로 바라보던 기하는 다시 한 번 고개를 갸웃했다. 저런 표정으로 웃는 공주는 처음 보았다. 워낙 아름다웠으나, 저만 보면 찬바람이 쌩쌩 불어 제대로 웃는 모습은 한 번도 본 적 없던 탓에,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던 기하는 다치지 않는 손을 붙잡는 황후의 온기에 겨우 시선을 돌렸다.

“공주께서는 훌륭한 아내가 되실 것입니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가? 어째서 황후께서는 저와 공주의 손을 나란히 붙잡고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인가. 설마, 설마하니……. 설마, 그럴 리가.

“공주께서 어렵사리 용기를 내어 폐하께 청을 올렸으나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펄쩍 뛰셨다지 뭡니까.”

그냥 당연히 안 될 말이다. 안 되고말고. 이런 일이 법도에 있다던가? 이 무슨 해괴한 일인가!

“그대는 공주를 어찌 생각합니까?”

“어찌 생각하다니요. 그것이 무슨 말씀입니다. 신첩이 어찌 그런…….”

“무빈께서 나를 곱지 않게 본다 해도 할 말은 없으나, 그것은 지난날에 대한 마음의 상처이니 이해해주길 바랍니다. 오라버니를 통하여 그대가 지금까지 제국을 위해, 그리고 정의를 위해 한 일을 전부 듣고 오해를 풀었습니다. 지난날의 과오는 사과하겠습니다. 정말로 미안합니다.”

기하는 머리를 숙이고 단정하게 말하는 공주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얼떨떨한 표정으로 입술만 달싹였다. 딱히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지금 이 상황에 무슨 말을 어찌할 수 있단 말인가.

“무빈. 우리 공주께서 참으로 어여쁘시지 않습니까?”

빙긋이 미소하는 황후의 표정에 기하는 입술만 벌벌 떨었다. 설마 제국에는 그런 법도가 있던가? 그래서 저렇게 아무렇지 않게 웃으시는 것일까?

“마마, 이것은 좀… 제가 이해를 할 수가 없습니다. 제국의 법도를 완전히 숙지하지 못하여 그러는데…….”

“법도요? 그런 것은 걱정하지 마세요. 전혀 아무 문제가 없답니다. 무빈께서 모르고 계시는 줄 알았더니, 다 알고 계셨나 봅니다.”

황후는 다정하게 미소했고, 공주는 얼굴을 붉혔다. 기하는 머리가 핑핑 도는 것만 같은 착각에, 입도 제대로 열지 못하고 두 여인을 번갈아 바라봤다. 분명 폐하께서 아니 된다고 하실 테지만, 지금 이 상황 자체가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고맙습니다, 무빈.”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지 않은가. 그런 법도가 있다 한들, 받아들일 성싶으냐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제 마음이 아니던가? 그렇잖아도 복잡하고 어지러운 마당에.

“공주께서는 든든한 아군을 얻으셨으니 앞으로 무빈께 더욱 잘해야 할 것입니다.”

“예, 마마.”

“마마, 아뢰옵기 민망하오나 신첩은…….”

“이럴 게 아니라 서 중랑을 함께 불러 다과라도 드는 것이 어떤가?”

서 중랑이라는 말에 공주는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혔다. 황후는 그런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며 화사하게 웃었다. 기하가 고개를 갸웃한 건 그 때문이었다. 난데없이 서엽은 왜…….

“보면 볼수록 잘 어울리는 한 쌍이 아닌가? 서 중랑 심지 곧은 것은 두말할 것도 없고. 그렇지 않은가, 무빈?”

황후의 기분 좋은 웃음소리에 연진 공주는 부끄러운 듯 연신 제 뺨을 어루만지며 볼을 붉혔다. 그제야 눈을 도르르 굴리며 기하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그러니까 지금 이게, 서엽과 연진 공주의 혼담…….

“무빈?”

“예?”

“어찌 그러나. 혹 어디 미령한 것인가?”

“아닙니다, 아니에요. 신첩은 신경 쓰지 마십시오.”

잘났다, 서기하. 떡 줄 사람은 생각지도 않는데 김칫국이나 한 사발 마셨구나. 부끄러워서 당장에 고개를 처박고 숨고 싶을 지경인데, 두 사람은 다정하게 손을 붙잡고 미소만 짓고 있다. 부끄럽다. 아, 부끄러워.

다정하고 따뜻한 시간을 보내고 태화당으로 돌아오는 기하의 발걸음이 무거웠다. 현 상궁은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한숨을 폭폭 내쉬는 그를 의문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다가, 뒤를 따르는 그림자에게 눈짓해 한 걸음 뒤로 물러서게 했다.

“마마.”

“응?”

천으로 칭칭 감은 손에서 땀이 나는 것 같다. 더위 때문에 상처가 곪지 않도록 각별히 유념해야 한다는 태의 영감 잔소리가 문득 떠올랐다. 취영루 위에서 잔잔한 호수를 내려다보고 있으니, 시원하게 등목이라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령하신 것은 아니신 것 같은데, 혹 공주마마께서 무슨 언짢은 말씀이라도 하셨습니까?”

“아니야.”

아무리 생각하고 다시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대체 서엽은 언제 연진 공주와 달콤한 연애에 빠진 거지? 처음에는 공주 혼자만의 애틋한 마음인 줄 알았는데, 황후께서는 두 사람이 열렬하게 서로를 원하고 있다고 하시지 않으셨나.

어째 바깥출입이 잦아지는 것 같더라니, 설마 그것이 전부 공주와 밀회를 즐기는 것이었단 말이야? 그것도 모르고 날마다 타박하시는 폐하께 편드는 말을 서슴지 않았던 지난날이 떠올랐다.

근데 폐하께서 이미 알고 계시다고? 그런데도 서엽에게 근신 처분을 내리셨다, 이것이지?

“서엽은 지금 어디 있지?”

“처소에서 자숙하고 있겠지요.”

“자숙은 뭘 잘못했다고 자숙이야?”

“마마, 그리 말씀하시면 아니 됩니다. 폐하께서 명령하신 일입니다.”

“서엽에게 갈 것이네. 할 말이 있어.”

성큼성큼 걸어 나가는 기하의 뒷모습을 황망하게 바라보던 현 상궁이 정신을 차린 듯 화들짝 놀라 치맛단을 붙잡았다. 마마, 하고 따라붙는 현 상궁의 만류에도 기하는 발을 멈추지 않았다.

“지금 서책이 눈에 들어옵니까?”

그다지 호화스럽지는 않았으나 갖출 것은 다 갖춘 처소는 서엽의 성정과 꼭 닮아 있었다. 기하는 앉을 틈도 없이 바닥에 쌓인 서책이라든지, 곳곳에 놓인 검과 각종 무기를 눈으로 훑으며 서엽을 내려다봤다. 그제야 급하게 몸을 일으킨 서엽이 그를 향해 머리 숙였다.

“예까지 어쩐 일이십니까? 무슨 일이 있습니까?”

기하가 서엽의 거처를 찾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아무리 사촌 간이라고는 하나, 황제의 후궁이 다른 사내의 처소에 들락거리는 일은 보기 좋지 않은 탓이었다. 특히나 서엽은 따로 부르지 않아도 늘 기하의 곁에 있었으니, 굳이 직접 처소를 찾을 일이 없기도 했고.

“방이 이게 뭡니까? 더러워서 앉을 곳도 없네.”

유난히 날이 서고 뾰족한 기하의 목소리에 서엽은 괜히 헛기침하며 주섬주섬 자리를 치웠다. 심기가 불편하신 것인지, 마치 그 표정이 저를 못 잡아먹어 안달이신 황제 폐하의 그것과 비슷해서 머쓱한 기분이 들었다. 부부는 닮는다고 하더니, 어째 좋은 것도 아닌데 금세 배우셨담.

“이쪽으로 앉으십시오.”

“모두 나가 있어.”

“마마, 그것은 법도에 어긋나는…….”

“됐어, 잔소리 그만. 그럼 모두 귀 막고 멀찌감치 떨어져 서 있도록 해.”

흉흉한 기하의 표정에 더는 반박하지 못한 현 상궁이 먼저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양손으로 귀를 막았다. 그제야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던 그림자가 그녀와 같은 모양새로 돌아서는 것을 확인한 기하는 서엽이 내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서책에서 나온 먼지가 폴폴 날렸다. 볕이 잘 드는 탓에 방 안은 지나치게 더웠다. 어쩐지 눅눅한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하고.

“차라도 한 잔…….”

“왜 내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왜 내게만 비밀로 한 겁니까? 나만 모르게 뭘 할 셈이었어요?”

이제 자신에게는 사모하는 정인과 귀여운 아이들, 든든한 현 상궁과 자애로운 황후마마까지 곁에 있다. 그렇다고 외롭지 않다면 거짓이겠으나, 늘 제 일에 관심을 두고 마음을 나눌 사람들이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서엽은 어떤가. 가족과 떨어져, 황실에 아는 이 하나 없이 오직 제 곁만 지키고 있지 않았던가.

“마마, 소장은…….”

“내가 형님 혼인 문제를 다른 사람에게 들어야 합니까? 형님 마음에 누가 있다는 것을 왜 나만 모르고 있었습니까?”

서엽은 난감한 듯 웃었다. 기하는 익숙한 그의 표정에 입술을 다물고 주먹을 그러쥐었다. 세상살이가 다 그렇지. 제 일이 가장 중하고, 자신밖에 모르고, 남의 일은 모든 것이 안정된 후에나 관심을 두게 된다. 그래도 그렇지. 서엽이 제게 어떤 사람인가. 친형제나 다름없는, 그를.

“때가 되면 말씀 올리려 하였습니다. 지금은 상황이 나쁘지 않습니까. 급한 일도 아니고요.”

“공주께서는 형님 때문에 애가 타서 숨이 넘어가려고 하십니다.”

퉁명스러운 기하의 말에 서엽은 민망한 듯 고개를 떨어뜨렸다. 워낙에 당차고 성미 급하신 공주가 아니신가. 마음을 먼저 고백한 것도 공주였고, 민망하여 자꾸 외면하는 저를 끝까지 붙잡은 것도 그녀였다.

감히 바라볼 수 없는 처지라는 생각에 일부러 피할 때는 황후마마까지 동원하였더랬다. 그런 그녀의 화사한 얼굴을 떠올리며, 서엽은 민망함에 턱수염을 어루만졌다.

“상상도 못 했습니다. 물론 공주께서 북성에 상처가 깊으셔서 그런 것이지, 형님이 공주마마 상대로 부족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기죽을 필요 없습니다. 형님이 뭐가 모자랍니까? 이만하면 훌륭한 신랑감이지.”

북성에서도 서엽은 최고의 신랑감이었다. 대부분의 사내는 신분을 막론하고, 열여덟 전후로 장가를 든다. 그런 서엽에게 혼담이 수도 없이 들어온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그는 마음속에 묻어둔 첫정 생각에 부모님 뜻을 거슬러 쫓겨나듯 북성을 떠나야 했으니, 장가갈 때가 조금 늦은 편이었다.

“솔직히, 공주마마와 혼인은 언감생심 꿈도 꾸지 않습니다.”

“왜요? 형님도 공주마마 좋아한다면서요? 공주께서 착각하신 것입니까?”

“폐하 말씀이 모두 옳습니다. 제가 감히 넘볼 수 있는…….”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립니까? 그 일이라면 신경 쓰지 마세요. 물론 지금 당장은 어렵습니다. 황실 분위기도 그렇고, 북성의 일도 그렇고. 또, 숙부님께 정식으로 허락을 얻어야지요. 부모님 허락도 받지 않고 장가들 생각은 하지 마세요.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폐하께는 내가 말씀드릴 테니.”

기하는 어쩐지 쑥스러워하는 것만 같은 서엽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심드렁하게 웃었다. 저렇게 고지식한 사내를 천하의 연진 공주께서 애가 타게 좋아하신다니. 칼바람이 쌩쌩 부는 얼음 꽃과 같은 공주마마를 어찌 봄눈 녹이듯 녹였을까. 새삼 서엽이 대단해 보였다.

“어찌 그리 보십니까?”

“우리 형님이 대체 어떤 어여쁨으로 공주마마를 봄눈 녹이듯 녹이셨는지 궁금하여서요.”

“별소릴 다 하십니다. 누추한 곳에 이리 계시지 말고 얼른 처소로 가십시오. 근신 중인데 마마께서 이리 와 계시는 것을 폐하께서 아시면 소장은 큰일 납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형님 혼인,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성사시킬 테니까.”

환하게 미소한 기하는 자신만 믿으라는 듯 제 어깨를 툭툭 쳤다. 원래 자신 없는 일에는 나서지도 않으시는 성정이시니, 그의 미소를 보는 것만으로도 든든했다. 무엇보다, 저렇게 해사하게 웃으시는 얼굴은 근래 들어 드문 일이라, 서엽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마마께서 폐하를 꽉 잡고 계시다는 풍문은 이제 정녕 사실이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 소문이 있습니까?”

“황궁이야 늘 무료한 자들이 지어내는 소문이 넘치는 곳 아닙니까.”

기하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손을 불쑥 내밀어 서엽의 크고 투박한 손등을 어루만졌다.

“형님은 나만 믿어요.”

“그러다가 폐하께서 진노하시면 어찌합니다. 소장은 괜찮으니 무리하지 마십시오.”

“걱정하지 마세요. 정 안 되면 베갯머리송사라도 할 테니까.”

“무, 뭐, 대체 그런 말씀은 어디에서 배우신 것입니까?”

입을 쩍 벌리며 경악하는 서엽의 표정이 하도 우스워 기하는 배를 잡고 웃었다. 청량하게 퍼지는 기하의 웃음소리에 그제까지 귀를 막고 서 있던 현 상궁과 그림자들이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연유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저렇게 웃으시니 그것으로 되었다고 생각하면서.

나란히 앉아 서책을 읽고 있는 황자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기하는 제 손에 들린 수틀에 다시 울상을 지었다. 한동안 잠잠하더니, 또다시 수를 놓으라고 강요하는 현 상궁 때문에 절로 한숨이 나왔다.

“아…, 손이 저린 것 같아. 상처가 곪으려나…….”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슬쩍 현 상궁 눈치를 살피던 기하는 쥐고 있던 바늘을 천에 푹 찔러 넣었다. 아무리 연습해도 실력은 나아지지 않고, 그렇잖아도 천을 동여매 무거운 손으로 수틀을 잡고 있으려니, 괜히 상처가 간지러운 것만 같다.

“조금 전에 살펴본 바로는 잘 아물고 있었으니, 걱정하지 마시고 얼른 하십시오.”

“태의 영감이 푹 쉬어야 한다고 했는데.”

“볕이 뜨거운 낮에 일없이 돌아다니시는 것을 삼가라는 말씀이었지 않습니까.”

작정하고 대거리하는 현 상궁에게는 도저히 당할 재간이 없었다. 시무룩해진 기하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모양의 수틀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하릴없이 닫힌 문을 힐끔거렸다. 오늘따라 황제께서도 늦으신다. 이제 슬슬 황자들이 잠들 시간인데, 오늘도 아들들과 다정한 말씀 한 번 나누지 못하시고 하루가 가려나.

“정연, 서책 보라니까 왜 졸고 있느냐?”

“빈자떡이 마시떠.”

“정연, 정연!”

꾸벅꾸벅 조는 아우를 흔들어 깨우며 얼굴을 찌푸리는 무영군의 표정이 서늘하다. 저런 표정을 지을 때마다 황제와 어찌나 똑 닮았는지, 기하는 고요하게 미소 지으며 슬그머니 상을 뒤로 밀었다.

“빈자떡! 내 꼬야!”

눈을 번쩍 뜨며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아우를 바라보며, 무영군은 혀를 끌끌 찼다. 배가 터지도록 저녁 수라를 받아놓고 또 먹는 타령이라니.

“마마아, 내 빈자떡…….”

“꿈을 꿨습니까?”

“힝…, 현님이 다 드셨어요?”

“안 먹었어. 나는 빈자떡 좋아하지 않는다. 서책 보라니까 그새 졸고 있느냐? 창피한 줄 알아라.”

“잠이 오는데 어떻게 잠을 참습니까? 일찍 자야 키가 쑤쑤 큰다고 했어요.”

“쑥쑥이겠지.”

다시 서책에 코를 파묻으며 중얼거리는 무영군의 냉랭한 목소리에, 정연군은 잔뜩 심통 난 얼굴로 벌떡 일어나 기하의 품으로 도도도도 달려갔다.

하암, 기하는 눈에 눈물까지 매달고 연신 하품을 하면서 안겨드는 황자의 체온을 마주하며, 말없이 아이의 가슴을 다독였다. 순한 성정답게 정연군은 잠도 무척 잘 잤다. 잠투정 한 번 하는 법 없이 이렇게 안아주기만 하면 갓 태어난 아이처럼 새근새근 잠드는 얼굴이 어찌나 천진한지, 바라보기만 해도 절로 웃음이 나왔다.

“무영군, 밤이 깊었으니 이만 물리고 자리에 눕도록 하세요.”

“아바마마께서는 정무가 바쁘십니까?”

진중하고 의젓한 무영군을 마주하면서 기하는 쉬이 입을 열지 못했다. 황제께서 최근 시간을 가장 많이 할애하시는 것이 죄인들의 추국이었다. 추국장 바닥이 죄인들의 뜨거운 피로 식을 줄을 모른다는 말이 돌 만큼, 황제께서는 전에 없는 강도로 죄를 다스리셨다.

그 소문이 어찌나 빠르게 퍼졌는지, 벌써 오성 주변의 약소국에서는 이번 기회에 황제의 눈에 들려 온갖 정보와 진귀한 진상품이 줄을 이었다.

“그러신가 봅니다. 폐하께 말씀 올릴 일이라도 있습니까?”

황자는 대답 대신 고개를 저었다. 그럴 때마다 아이의 표정은 여지없이 어두워졌다. 그것이 가엾기도 하고 안타까워서, 기하는 잠든 정연군을 보모상궁의 손에 넘겨주고 시무룩하게 앉아 있는 무영군의 작은 손을 붙잡았다.

아이는 검을 제대로 쓰기 시작하면서 손가락 사이사이에 굳은살이 올라온 상태였다. 혹여 무리하다가 상처를 입지 않을까 저어되는 마음에 현 상궁을 시켜 가져온 연고를 직접 발라주면서 기하는 생각을 가다듬었다. 아이의 걱정이 눈에 띄게 보였다.

“황자.”

“예.”

“굳은살이 된다고 해서 상처가 아프지 않은 것은 아니랍니다.”

말뜻이 어려웠던지 무영군은 입을 열지 않았다. 솜씨가 좋지 않은 탓에 덕지덕지 발라진 연고를 제 손등으로 문지르며 기하는 민망한 듯 웃었다.

“정을 끊어내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지요.”

“그저, 어찌 지내고 계시는지 궁금할 뿐입니다. 다른 뜻은 없습니다.”

그 누구도 영빈의 이름을 입에 올리거나 그의 안위를 궁금해 하지 않았다. 철저하게 금기하라는 명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제 목숨이 귀한 사람들은 수년간 가장 찬란하게 빛나던 그가 나락으로 떨어지자마자 등을 돌렸다.

“그리 궁금하면, 한 번 보러 갈까요?”

번쩍 고개를 드는 아이의 얼굴에 여러 가지 감정이 뒤섞였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그 감정 뒤에 숨겨진 두려움이었다.

아이는 진즉 그로 인해 상처받았다. 자신에게 쏟아내는 감정이 오롯한 애정이 아님을 알면서도 그 손을 물리치지 못했다. 그것은 차마 어찌할 수 없는 정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면서도, 제게 유일하게 내밀어진 손을 뿌리칠 만큼 아이는 용감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깨끗한 폐궁에서 홀로 보내고 있다 들었습니다.”

“그렇습니까.”

“황자께서 폐하께 그리 청하지 않았습니까. 폐하께선 약조하셨고요.”

“하지만…….”

간과하기엔 영빈의 죄가 너무 컸다. 그대로 용서하기엔, 그 죄가 너무도 무거웠다. 그렇다고 외면할 수도 없었고, 바라만 보기엔 마음 한구석이 늘 무겁고 찝찝했다.

“자, 밤이 늦었으니 오늘은 이만 침수 들도록 해요.”

“예, 마마. 하면 소자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그래요. 푹 자고 내일 봅시다.”

절을 올리는 황자를 바라보는 기하의 두 눈에 다정한 미소가 떠올랐다. 분위기가 완전히 잡힐 때까지 아이들을 태화당에 데리고 있겠다고 청한 탓에, 기하의 침소 바로 옆방에 황자들의 거처가 마련되었다.

크고 넓은 침상이 있는데 굳이 침소를 따로 내어주어야 하느냐는 기하의 물음에 황제가 펄쩍 뛰었던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이부자리를 정리하는 현 상궁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기하는 콧잔등을 찡그렸다. 보기만 해도 지긋지긋한 수틀 같으니라고. 저걸 당장에 내다 버려야 현 상궁의 이루지 못할 꿈이 사그라질까. 마음이 어지러우니 수라도 놓으며 시간을 보내라는데, 이걸 붙잡고 있으려니 머리가 더 지끈거렸다.

“나 이것 좀 안 하면 안 되나?”

진심으로 우는 소리를 내는데도, 현 상궁은 표정 변화 없이 등 뒤로 걸어와 머리카락을 빗겨주었다. 이제 제법 자란 머리가 허리 아래로 치렁치렁하게 내려오자 몹시도 거추장스러워, 당장에 잘라내고 싶은 마음이었다. 북성의 사내들은 대부분 머리를 길게 늘어뜨리는데, 길게라고 해 봐야 귀밑 아래거나 기껏해야 날개뼈 정도였다.

제국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머리카락을 유난히 길게 길러 집집마다 그것을 관리하는 노비들이 따로 있을 정도라고 했다.

“폐하의 머리띠에 용 자수를 놓으신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거야 현 상궁이 억지로 하라고 한 거잖나.”

“예전보다 훨씬 나아지셨지 않습니까. 조금만 인내하고 해보십시오. 분명 언젠가는 용을 놓으실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언제가 대체 언제냐고. 물론 처음 바늘을 잡았을 때 열 손가락을 죄다 찔려 도저히 수를 놓을 수 없었던 것에 비하면, 이건 정말 일취월장한 수준이었다.

“폐하께서는 그깟 자수 놓지 않아도 된다고 하시었어.”

“그렇다면 하는 수 없지요. 폐하께서 크고 작은 전장에 나가실 때마다, 다른 후궁께서 올리신 머리띠를 하고 나가실 수밖에요.”

“뭐?”

생각하려니 기분이 확 나빠졌다. 물론 황후마마께서 올리신 것까지는 어찌 말할 수 없겠지만, 다른 후궁이 정성스럽게 수놓은 머리띠를 하신 폐하라니. 상상만으로도 기분이 나빠진 탓에 수틀을 매섭게 노려보던 기하는 드르륵 열리는 문소리에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오늘은 최대한 일찍 왔더니, 어찌 표정이 그래? 짐이 반갑지 않더냐?”

“아닙니다.”

현 상궁에게 눈짓해 수틀을 치우고 황제가 용포 벗는 것을 직접 도운 기하는 슬쩍 그의 팔을 붙잡으며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고단하십니까?”

“그래, 고단하다.”

“수라는 드셨습니까?”

“대충 요기하였지. 그대는 잘 챙겨 먹었나?”

“예. 황자들과 함께 먹었습니다.”

“그래, 잘했다. 우리 빈께서는 종일 뭘 하고 계시었나.”

어깨를 감싸 안아주는 황제에게서 낯선 냄새가 났다. 그것이 주로 죄인을 고문할 때 피비린내를 가리기 위해 피워 놓는 향냄새라는 깨달은 기하는 가볍게 눈을 감으며 고단한 하루를 보냈을 정인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기하야.”

“예, 폐하.”

“문정으로 갈 것이다.”

“예? 문정이요?”

북성과 서남성 사이에 자리한 문정은 유난히 초원이 넓고 산세 또한 험하며, 큰 강이 있어 주로 외적들을 토벌할 때에 유인하는 땅으로 쓰이곤 했다.

“서연이 문정에 있다.”

“…하지만…….”

“서연은 이미 북성을 버렸다. 또한, 짐에게 할 말이 많은 듯하다.”

빙긋이 미소하는 황제를 올려다보던 기하는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됩니다. 가지 마세요. 폐하께서 거길 왜 가십니까. 다른 이를 보내십시오.”

“문정까지 꼬박 사흘이다. 내일 이른 새벽에 출정할 것이다.”

“싫습니다. 아니 됩니다. 어찌 갑자기 이러십니까?”

마음이 불안했다. 그렇게 지키려 했던 북성을 저버리고 도망친 곳이 문정이라니. 숱한 전쟁을 치른 그곳에서 대체 무엇을 하려고 감히 황제를 불러들인단 말인가.

“형님이 북성을 찾으셨다니 되지 않았습니까. 따르는 이들도 많지 않다고 들었습니다. 가지 마십시오. 아니 됩니다.”

“위험하지 않다. 그리고, 서연을 만나 꼭 물어볼 말이 있다.”

“그럼 불러들이세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생포하라고 하십시오!”

아버지가 밉다. 아버지가 원망스럽다. 내내 참아왔던 마음이 용암처럼 터져버렸다. 그리웠다. 보고 싶었다. 애정에 굶주렸고, 그의 시선을 좇았다. 돌아오는 것은 싸늘한 표정뿐이라 해도, 어쩌다 한 번 머리를 쓸어주는 차디찬 손뿐이라고 해도, 그런 아버지가 좋았다.

그런 마음을 끝끝내 외면하고 갈가리 찢은 것 또한 아버지가 아닌가. 백성을 버리고, 자식을 버리고, 이제는 북성마저 완전히 버린 아버지를 어찌 보고 용서해야 한단 말인가.

그럴 바엔 마주치지 않는 것이 낫겠다. 이미 돌아가셨다고 생각하는 것이 낫겠다. 무섭다. 겁이 난다. 다시 마주하게 되면, 그를 이해하고 온전히 받아들이게 될까 봐, 그게 가장 두렵다.

<화양연화> 6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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