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5장 난(難) (36/49)

35장 난(難)

황후는 부푼 배를 감싸 쥐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실로 오랜만에 마주하는 그녀의 얼굴이 유난히 창백한 것에 마음 쓰인 황제가 미간을 찌푸렸다.

아침나절에 문안 인사차 왔다는 황자들은 아직 자경전에 머물고 있었다. 나란히 앉아 있는 아이들을 힐끗 돌아보던 황제는 점점 더 무거워지는 머리에 가벼운 탄식을 내뱉었다.

“폐하, 용안이 흐리십니다. 혹, 옥체 미령하십니까?”

“아니오. 신경 쓸 일이 있어 그러니 괘념치 마시오. 내 자주 걸음 해야 하는데 미안하오.”

“아닙니다. 수라도 제대로 들지 못하실 정도로 바쁘신 것을 알고 있으니 신경 쓰지 마셔요. 폐하께서 내려주신 귀한 음식으로 배를 채우고 편히 쉬고 있으니, 신첩은 심신 모두 편안합니다.”

“다행이오. 그대 몸이 약하니, 그것이 늘 걱정이야.”

황제는 빙긋이 미소하는 여인의 배를 물끄러미 응시하며 미소했다. 여인의 부푼 배를 이리 가까이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황자 무영은 태어난 줄도 몰랐었고, 정연을 회임했을 때는 전장에 나가 있었다. 몸이 약한 둘째 시헌 또한 마찬가지였고.

“금방이라도 나올 것 같군.”

“아바마마, 소자도 이제 현님됩니다.”

얌전히 앉아 있던 정연군이 그새를 참지 못하고 히죽거렸다.

“어른들께서 말씀 나누실 때는 버릇없이 끼어드는 것 아니야.”

보다 못한 무영군이 조용히 다그쳤으나, 정연은 입술을 삐죽거렸다. 지나치게 통통했던 뺨에 살이 내리니 적당히 보기 좋을 정도로 귀여웠다.

황후는 그런 황자들을 바라보며 다정하게 미소했다. 특별히 곁에 두고 애정을 쏟아 붓지 못했던 것이 미안할 만큼, 황자들은 제대로 장성했다.

“현님은 나만 미워합니다.”

심술궂게 변한 정연군의 표정에 무영군의 얼굴이 오묘하게 변했다. 기어이 귀 끝까지 붉게 물들인 무영군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황후는 무표정한 황제를 다시 응시했다.

“한데, 무빈은…….”

“몸이 좋지 않은 모양이오. 후에 조용히 들르겠다더군.”

“어디가 미령한 것입니까? 무빈이 유난히 여름을 많이 탄다고 들었습니다. 북성의 일로 마음이 크게 상하였을 텐데, 걱정입니다.”

“황후께서는 다른 걱정하지 말고 몸을 잘 추스르도록 하오. 그대 몸과 아이가 가장 중요하니까.”

사려 깊은 황제의 말에도 황후는 쉽게 웃을 수 없었다. 그래서 표정이 좋지 않으셨던 것이로구나. 그렇다면 괜히 오시라 청하였던 것이 아닌가. 오늘에야말로 미루던 말을 꺼내려 하던 참인데, 아무래도 때가 좋지 않은 것 같다.

“너희도 너무 오래 있는 것이 아니냐. 너희가 계속 이리 있으면 황후께서 편히 쉬지 못하신다.”

“그냥 두십시오. 오랜만에 황자들과 있으니 신첩도 기분이 좋습니다. 우리 황자들께서 아우를 이토록 기다려주시니 얼마나 기특하고 대견한지.”

눈을 빛내는 정연군과 그 곁에서 우두커니 앉아 자리를 지키는 무영군의 표정이 상반되었다. 정연군은 순수하게 아우를 기다리는 듯했고, 무영군은 무언가 긴장한 것도 같았다.

황제는 물끄러미 아이들을 바라보다 손을 뻗었다. 가까이 오라는 황제의 손짓에 황자들은 쭈뼛거리며 무릎으로 기어 조금씩 앞으로 다가왔다.

“동생이 태어나면 너희가 잘 보살펴야 한다.”

히죽 웃는 정연군을 먼저 끌어당겨 제 무릎에 앉힌 황제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황제를 올려다보던 어린 황자는 난생처음 아버지의 무릎에 앉은 것이 신기하고 좋은지, 방싯거리며 그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통통하고 작은 손을 감싸 쥐며 황제가 다정하게 웃었다. 좋은 아비가 되어 주지도 못했는데, 이렇게 마음 따뜻하고 건강하게 자라준 아이들을 보니 그저 기특했다.

“무영, 이리 더 가까이 와라.”

아버지의 무릎에 올라앉은 아우를 부러운 듯 바라보던 무영군이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조금씩 무릎걸음으로 가까이 다가가, 정연군에게 했던 것처럼 손을 뻗는 황제에게 안겼다. 반대쪽 무릎을 내어주는 황제의 앞에서 얼어붙은 무영군의 어깨가 움찔움찔했다.

“너는 지금도 잘하고 있으니, 그대로만 하면 된다. 더 좋은 사람이 될 필요는 없어. 딱 지금이 좋다.”

“아바마마…….”

“아비는 바빠서 이만 일어나야겠다. 너희도 이제 그만 일어나도록 해. 승지가 태화당까지 함께 갈 것이다.”

황제의 품에 폭 파묻힌 정연군이 콧잔등을 찡그렸다. 이 달콤한 시간을 조금 더 오래 보내고 싶은 탓이었다. 그제까지 빳빳하게 몸을 펴고 있던 무영군은 황제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얼굴에 홧홧한 열기가 올라 허둥거리는 모습은 평소 의젓하고 늠름한 무영군의 모습과는 판이하였다.

“후에 다시 올 테니, 할 얘기는 다음에 합시다.”

“예, 폐하. 신첩도 그것이 더 좋을 듯합니다.”

마음이 다른 곳에 있으신 분에게 괜히 그 얘기를 꺼낸다면 분명 화부터 내실 테니, 차후에 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에 황후 역시 동의했다.

물론 애타게 소식을 기다리고 있을 이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었으나, 섣불리 나섰다가 일을 더 크게 그르칠 수도 있으니 말이다.

“가자.”

아이들의 손을 붙잡으며 황제가 일어섰다. 몸을 일으키려는 황후를 향해 쉬라는 말을 전하면서도, 황제는 웃지 못했다. 맥없이 돌아서던 기하의 뒷모습이 연신 눈에 아른거리는 탓이었다.

“정연.”

“예?”

“태화당에 가면 빈을 귀찮게 하지 말고, 곁에서 살갑게 있어야 한다.”

“살갑게요?”

“그래. 괜히 형님 말에 대거리하다가 소란 일으키지 말고.”

“히히, 그러면 이따가 저녁에 또 안아주십니까?”

“뭐?”

“아까요. 아바마마께서 이렇게 무릎에 앉혀주셨지 않습니까? 그거 또 해주십니까? 현님하고 소자하고.”

“그래, 그러마.”

그것이 그리 좋았던가. 겨우 무릎 한 번 내어준 것뿐인데 어찌나 해사하게 웃는지, 미안함과 안타까움에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근데 아우가 태어나면 어쩌지요? 아바마마 무릎은 두 개뿐인데, 그러면 누가……. 아! 현님이 양보하면 됩니다. 현님은 현님이니까 현님이 양보하세요.”

“그런 게 어디 있느냐? 왜 내가 양보해?”

“왜요! 현님이니까 아우들에게 양보해야지. 그래야 훌륭한 현님이죠!”

“아바마마께서 대거리하지 말라고 금방 말씀하셨는데, 그새 잊었어? 이 멍청아.”

“멍충이 아닙니다! 아바마마! 현님이 자꾸 소자더러 멍충이라고 합니다!”

바락바락 소리치다 발길질까지 하려는 두 황자를 멀찌감치 떨어뜨린 황제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것들이 정말 오냐오냐 귀엽다고 해주었더니. 대체 이것들을 어찌 믿고 태화당에 보내 기하의 기분을 풀게 한단 말인가.

“무영, 어찌 아우에게 그런 말을 해.”

“그렇지만, 정연이 자꾸 대듭니다.”

“정연, 형님 말씀을 잘 따라야지.”

“현님이 자꾸 소자를 구박합니다! 그럼 나쁜 현님 아닙니까? 소자는 좋은 현님 될 겁니다!”

“알았다. 알았으니, 이제 그만 다투고 어서 태화당으로 가라.”

씩씩거리며 볼을 부풀리는 정연군과 잔뜩 화가 나 입을 꾹 다문 무영군을 보고 있으려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아들놈들이나 정인이나 어찌 이리 마음을 어지럽게 하는지, 눈앞이 뿌옇게 흐려지는 것만 같아 황제는 낮은 신음을 흘렸다.

설마, 이런 것이 또 태어나지는 않겠지. 힐끗 자경전을 돌아보던 황제가 머리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후다닥 뛰어오는 황자를 받쳐 안은 기하가 미소했다. 두 팔을 벌리고 그대로 달려오는 모습이 어찌나 귀여운지, 통통한 뺨에 연신 입을 맞추면서 제 목에 매달린 아이의 등을 어루만졌다.

“마마아.”

“그리 뛰다 넘어지면 어쩌려고요.”

“마마, 아바마마가 무릎에 앉혀주셨습니다. 소자랑 현님이랑 양쪽에 앉혀 놓으시곤 아우가 태어나면 잘해주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당. 히힛. 황후마마는 배가 이마안큼 부르셨어요. 곧 아우가 태어납니다.”

묵직한 황자를 토닥이며 눈을 돌리자, 의젓하게 걸어오는 무영군이 보였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머리를 숙이는 황자에게 미소하자, 이내 가까이 다가오면서 슬쩍 주위를 살핀다.

“다녀왔습니다.”

“수라는 들었습니까?”

“예. 마마께서도 수라 드시었습니까?”

“응, 먹었어요.”

무영군의 무뚝뚝한 얼굴에도 슬그머니 미소가 맴돌았다. 자꾸만 체면을 차리려 해도 아이는 아이인지라 드러나는 감정을 오롯이 숨기기는 어려운 모양이었다.

커다란 나무 아래서 낮잠 자던 영이 귀를 움찔거리다가 벌떡 일어났다. 그 모습이 반가운 정연군은 기하의 품에서 벗어나자마자 영을 향해 뒤뚱거리며 달려갔다. 저러다가 넘어지고 말지. 기하의 걱정이 떨어지기 무섭게 철퍼덕 넘어진 정연군이 끙, 하고 움찔거렸다.

“소자가 가보겠습니다.”

기하가 움직이기도 전에 무영군은 급히 아우에게로 향했다. 울먹거리는 정연군의 손을 붙잡고 무릎을 털어주면서도 짐짓 엄한 소리로 체통 없이 그리 뛰어다니면 아니 된다는 둥, 사내로 태어나 눈물이 헤퍼서도 아니 된다는 둥, 귀가 얼얼할 정도로 잔소리를 해대는 무영군 때문에 정연은 씰룩거리던 콧잔등을 이내 찡그리고는 팩하니 뒤돌아 다시 영에게 달려갔다.

“무영군 저하의 잔소리가 가히 현 상궁과 견주겠습니다.”

슬그머니 뒷짐 지며 다가온 승지는 며칠 사이 얼굴 살이 쑥 빠졌다. 한동안 태화당을 지키며 뭐라고 물어도 이상한 개소리나 왈왈대는 통에, 드디어 폐하께서 방자한 임승지를 내치셨다는 소문이 황궁을 흉흉하게 맴돌았다.

물론 그의 보직에 변화가 생긴 것은 아니었으나, 여전히 임승지는 황제보다는 태화당이나 자경전 등의 후궁전을 돌아다니기 일쑤였다.

“어찌 홀로 나와 계십니까? 서 중랑은요?”

비록 보이지 않는 근거리에서 황제의 그림자가 기하를 호위하고 있다고는 해도, 이리 홀로 후원을 돌아다니는 것은 아니 될 일이었다. 서연이 조종하는 배후가 완전히 드러나지 않았다. 영빈을 둘러싸고 있는, 서남성왕 연태진의 충복들이 기하에게 이를 갈고 있음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아직 끼니도 때우지 않았다고 해서, 요기라도 하라고 들여보냈습니다.”

“그래도 이리 홀로 다니시면 아니 됩니다. 태화당이라도 마마의 안전을 완전히 입증할 수는 없습니다.”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기하는 웃는 낯이 아니었다. 특유의 생기발랄함도 찾아볼 수 없고, 뛰노는 아이들을 바라보는 눈이 낮게 드리워져 있었다.

한동안 그러시다가 겨우 기운을 차리신 듯싶었는데, 상선 영감의 말이 사실인 것 같다. 생전 안 하시던 부부싸움까지 하시다니, 마마께서 아직 마음이 무거우신가 보다.

“마마께서 이해하십시오. 폐하께서 후궁만 많이 두셨다 뿐이지, 어디 제대로 된 연정을 품어 보셨어야지요. 정인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건 연정을 처음 품는 사내라면 무릇 그렇지 않습니까.”

하하하. 승지 특유의 화통한 웃음소리에 기하는 그저 미소 지을 뿐이었다.

“내 속이 좁아 그럽니다. 별것 아닌 일인데, 괜히 발끈해서 폐하의 성심을 어지럽혔습니다.”

“에이, 마마께서 혹여나 그러셨겠습니까? 폐하께서 워낙 성정이 불같으시니 그렇지요. 그래도 잘 좀 봐 주십시오. 말씀은 그리 하셔도 마마 걱정에 내내 시무룩하십니다.”

“그랬습니까.”

“오죽하면 자경전에서 담소 나누고 계신 황자 저하들을 부르시어, 마마 기분 좀 풀어드리라고 당부까지 하셨겠습니까.”

원래 충신이란 그렇다. 주군을 위해서라면 이 정도 거짓을 보태는 것은 천연덕스럽게 해야 한다. 사실 아예 없는 말을 지어서 한 것도 아니었다. 폐하께서 분명 황자 저하들께 이런저런 당부를 하신 것은 사실이니까.

“거, 우리 폐하께서 유난히 마마께 예민하신 거 아시지 않습니까. 폐하께서는 종일 찌그러진 대신들 얼굴만 보고 계셔야 하는데, 서 중랑이 줄곧 마마 곁에 붙어 있으니 그게 꼴 보기 싫어 그러시는 겁니다.”

기하의 표정이 오묘하게 변하는 것을 보며 승지는 흐뭇하게 웃었다. 설마 모르셨던 것인가? 아니, 모르고 계셨다고 해도 알고 보면 기분 좋은 일이 아닌가? 대체 한숨은 왜 쉬시는 거지?

“마마, 어찌 그러십니까?”

“아닙니다. 임 대장 말처럼 그런 소소한 이유라면 좋을 텐데 말입니다.”

힘없이 웃는 기하의 표정이 낯설었다.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허공을 응시하는 모습이 너무도 쓸쓸해 보여, 승지는 하마터면 겁도 없이 그의 몸에 손을 댈 뻔했다.

찰나의 생각에 깜짝 놀라며 제 혀를 씹은 승지가 벌벌 떨었다. 미친 것이다! 하마터면 폐하께 손모가지를 뎅강 잘릴 뻔하였다!

괜히 머쓱해진 승지가 주위를 살폈다. 멀리 이쪽을 기웃거리던 나인 하나가 넙죽 절을 하더니 무영군에게 다가서는 것이 보였다.

눈을 가늘게 뜨며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승지는 황자들을 향해 걸어가는 기하의 뒤를 따랐다. 아무리 후원이라고는 해도, 이렇게 그를 홀로 두는 것은 마음이 불안했다. 적어도 서엽이 요기하고 나올 때까지만이라도 함께 있어야지 싶은 마음에 막 고개를 드는 순간이었다.

“너는 누구지?”

“아…, 소인은 자경전의 은복이라고 합니다.”

“한데, 무영군께는 무슨 일로 찾아왔느냐.”

“황후마마께옵서 따로 하실 말씀이 있다 하시어 긴히 무영군 저하를 찾아계시옵니다.”

“마마, 소자 잠시 자경전에 다녀오겠습니다.”

기하는 물끄러미 황자를 내려다보았다. 멀찌감치 떨어져 풀밭을 구르는 영의 배를 살살 만지며 까르르 웃는 정연군의 웃음소리가 후원을 울렸다.

“황자께서 조금 전, 자경전에서 막 오시는 길이 아니더냐.”

“소인은 그저, 저하를 모셔 오라는 명을 받았을 뿐입니다.”

아이의 눈매는 단정했다. 방긋 미소 짓는 얼굴을 황자도 익히 알고 있는지 나인을 따라나서는 표정엔 조금의 의심도 깃들지 않았다. 그것은 순전히 기하의 기우였다.

“아니, 잠시 그냥 있는 게 좋겠습니다, 황자.”

“예? 하지만…….”

“아무리 황후마마의 부름을 받았다고는 하나, 홀로 황자를 보낼 수는 없어요. 더욱이, 마마께서 지금 이런 시기에 나인만 덩그러니 보내시지는 않으셨을 겁니다.”

순간 기하의 눈이 사납게 일렁였다.

“그렇지 않으냐?”

허리를 구부리고 있던 나인이 순간 재빠르게 몸을 움직였다. 황자를 향하는 빛나는 단검은 서슬 퍼런 빛을 내고 있었다.

놀라서 그대로 굳은 무영군을 뒤에서 붙잡은 나인은, 여인답지 않은 민첩함으로 아이의 목에 칼을 겨누었다. 잘 손질된 검날이 무영군을 향했다.

“저하!”

검을 빼 든 승지가 빠르게 몸을 움직였다.

“마마, 뒤로 물러서십…….”

승지의 손을 뿌리치며 기하는 그대로 손을 뻗었다. 해볼 테면 어디 해보라는 식으로 웃으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서는 나인의 칼날이 황자의 목 안쪽을 파고들었다.

더는 망설일 시간도, 여유도 없었다. 그것을 그대로 붙잡은 기하는 힘의 반동을 이용해 나인의 팔을 뒤로 꺾으며 그녀를 황자에게서 떨어뜨렸다.

민첩하고 패기 넘쳤으나, 그녀 역시 한낮 나인일 뿐이었다. 손목이 뒤틀린 채로, 자신보다 큰 기하의 힘을 버틸 방도는 없었다.

“마마!”

“황자를 보호해.”

숨어 있던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의 검과 활이 모두 나인을 향했다. 멀리 떨어져 있던 정연군이 놀라 울음을 터트렸고, 소란에 모습을 드러낸 현 상궁이 치맛자락을 붙들며 달려왔다.

승지는 침착하게 주위를 경계하며 밀려난 무영군을 감싸 안았다. 조금만 늦었더라면, 아마 칼날이 그대로 무영군의 목을 관통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배후가 누구냐.”

“헉, 큭…….”

“길게 묻지 않겠다. 제대로 대답하지 않는다면 이대로 죽이겠다. 배후가 누구야. 누가 감히 황자를 해하려 한 것이냐.”

바닥에 머리를 처박힌 채 뒤틀린 팔을 바들바들 떨던 나인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이게 다 무슨 일입니까? 아이고, 마마, 이 피 좀…….”

“현 상궁, 뒤로 물러서.”

나인을 짓누르는 기하의 음성이 스산했다. 칼날이 깊게 파고들었는지 손이 엉망이 되었음에도, 그는 상처에 대해 내색조차 하지 않았다.

“다시 한 번 묻겠다. 누구냐. 너도, 북성의 간자더냐.”

“더러운 북성을 어찌 입에 올리는 것이요? 배신자의 최후는 뻔하지! 저를 키워준 영빈마마의 온정도 나 몰라라 하고, 마마께서 얼마나 기다리시는데 예서 저리 시시덕거린단 말이오? 짐승만도 못한 것을 거둬주었더니 은혜를 갚지는 못할망정, 아악!”

살기 어린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나인의 머리를 검집으로 내리친 기하가 몸을 일으켰다. 바닥에 축 늘어진 나인을 빙 둘러싼 그림자가 그녀를 향해 검을 겨누었다.

“데리고 가서 배후를 밝혀. 그리고 절대, 살려주지 마라. 죽기를 각오하고 감히 황자를 해하려 했으니, 그 죄 죽어 마땅하지.”

냉랭한 기하의 음성에 금룡대는 머리를 숙였다. 한쪽으로 물러나 있던 승지가 그의 앞에 섰다. 상처가 꽤 깊은지 피가 흘러 옷깃을 축축하게 적시는데도, 기하는 그림자에게 끌려가는 나인만 응시했다.

“마마, 괜찮으십니까.”

“아아― 나는 괜찮은데, 황자는.”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기하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멀리 떨어져 있던 정연군은 서엽의 품에 안겨 서럽게 우는 중이었고, 창백해진 무영군은 당황한 듯 손을 덜덜 떨었다. 고운 살결에 생채기가 났다. 아이의 목에 맺힌 핏방울을 응시하던 기하가 무영군을 향해 걸었다.

“황자, 많이 놀랐습니까?”

“…마마, 피가…….”

“아, 이건 별거 아닙니다. 그것보다 상처가 난 것 같은데 어디 좀 봅시다. 많이 아픕니까?”

겨우 가느다란 핏줄기가 보일 뿐이었다. 한데도 무릎을 굽히고 앉아 무영군과 눈을 맞춘 기하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아이의 상처를 어루만졌다.

“감히 황자를 해하려 한 자는 살려두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겁먹을 필요 없어요. 그 아이가 한 말도 신경 쓰지 마세요. 아시겠습니까?”

“예…, 예. 한데, 마마, 상처가…….”

“응, 이건 치료하면 금세 낫습니다. 나는 어른이니까 괜찮습니다.”

빙긋이 미소하면서 무릎을 털고 일어난 기하는 황자에게 성한 손을 내밀었다. 피가 제법 많이 나서 손가락 끝을 타고 뚝뚝 흘렀다. 가볍게 주먹을 쥐자 느껴지는 싸한 통증에 기하는 아미를 찌푸렸다. 걱정스럽게 달라붙는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이깟 상처쯤, 사실은 아무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것보다 혹, 영빈이 황자에게 악한 마음을 품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저어되었다. 어찌해야 하나. 더는 아이가 상처받지 않아야 할 텐데. 이 노릇을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그만 들어갑시다. 어서 상처를 치료해야지요.”

아이의 손을 잡았다. 벌겋게 변한 눈을 애써 돌리며 무영군은 침을 꼴깍 삼켰다. 아무리 의젓해도 황자 나이 겨우 여덟이다. 제 목에 칼이 겨누어지는 아찔한 순간을 한동안은 잊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보다는 그녀가 퍼부은 못된 말이 가슴에 박혔을지도 모를 일이다.

“마마, 아프시지요?”

기하는 울먹거리는 정연군의 뺨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프지 않습니다.”

“피가 이마안큼 났는데요?”

“하나도 안 아픕니다.”

깨끗한 천을 칭칭 동여매는 태의의 표정이 좋지 못했다. 치료하면서도 연신 문을 힐끔거리는 태의를 바라보는 승지 역시 같은 마음이었다. 당장 저 문을 박차고  야차(夜叉 : 사나운 귀신) 같은 모습으로 들어오실 황제를 기다리는 마음은 지옥으로 끌려가는 것만큼이나 고되었다.

“현님은요? 현님은 아프십니까?”

“형님은 당연히 아프시지요.”

“왜요? 마마는 안 아프다고 하셨는데, 현님은 마마보다 쪼끔 다치셨는데요?”

“목은 손보다 더 중요한 곳이니까요.”

“아하! 근데 현님은 울지도 않으시고, 현님 멋있습니다!”

“그렇지요? 무영군이 놀랐을 텐데 울지도 않으니 얼마나 대견한지 모릅니다.”

정연군에게 하는 것처럼 뺨을 쓸어주려고 손을 뻗던 기하는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무영군의 시선에 머쓱하게 웃으며 그것을 거두었다. 조금 친해졌다고 생각해도 아직 무영군과는 거리감이 있었다.

“저는 이다음에 커서 현님처럼 멋있는 사내가 될 겁니다. 그래서 아바마마처럼 마마한테 시집갈 것입니다.”

또랑또랑한 정연군의 음성에 기하는 그만 웃음을 터트렸다. 도대체 이 아이의 머릿속에 이런 말을 넣어준 것이 누구란 말인가.

“시집이요? 장가간다고 해야지요, 황자.”

“아! 장가. 소자는 마마한테 장가갈 것입니다. 소자가 아바마마보다 훠얼씬 잘해드릴 것입니다. 그때는 소자가 마마를 지킬 겁니다. 키도 이마안큼 크고.”

“넌 뚱뚱해서 안 돼.”

부루퉁한 무영군의 음성에 신나서 떠들던 정연군은 입을 꽉 다물고 벌떡 일어나 발을 쾅쾅 굴렀다.

“현님 나쁩니다! 아우한테 뚠뚠하다고 하면 나쁜 현님이라고 황후마마께서도 말씀하셨는데! 고모님한테 이를 겁니다!”

“뚱뚱한 걸 뚱뚱하다고 하는 데 뭐가 나쁘다는 거냐? 그러니까 얼른 살이나 빼라고. 그리고 마마는 이미 아바마마와 혼례를 올리시었는데, 네가 감히 어찌 마마께 장가를 들어? 너 그거 패륜이다.”

“패륜이 몹니까?”

“부모님께 죄를 짓는 것이다. 너는 아바마마와 마마께 죄를 짓고 싶으냐?”

“마마가 좋아서 장가드는 것인데, 그게 왜 죄가 됩니까? 왜요? 나는 마마께 장가들 것인데요!”

또다시 울먹이는 황자를 바라보며, 기하는 소리도 내지 못하고 웃었다. 나란히 앉은 두 황자의 모습이 어찌나 귀엽던지, 내내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던 덩어리가 쑥 내려가는 것만 같았다.

“그만들 하세요. 무영군, 자꾸 아우를 놀리면 못씁니다. 아우는 아직 어려 형님의 말을 곧이곧대로 듣지 않습니까.”

“원우가 멍청해서 그러는 것 아닙니까.”

“어허, 왜 자꾸 아우더러 그런 소릴 하십니까. 또 그리 말하면 그땐 정말 야단맞을 겁니다?”

입술을 꾹 다무는 무영군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기하는 아이의 목덜미를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상처가 깊지 않아 다행이었다. 혹여나 검에 독이라도 묻었으면 어쩌나 했는데, 그렇게 철두철미하게 준비한 것은 아닌 듯해 그것 역시 다행이었다.

“믿을 만한 사람이 아니면 따라나서지 마세요. 가까이하지도 말고요. 아시겠습니까?”

“예, 마마. 소자가 잘못했습니다.”

“아닙니다. 어찌 그것이 무영군의 잘못입니까. 미처 제대로 막지 못해서 벌어진 일이니, 그것은 나의 잘못입니다. 그러니 그 아이가 함부로 내뱉은 말은 마음에 담지 마세요.”

금세 우울해지는 아이를 바라보다 기하는 용기 내 무영군의 머리를 쓸었다. 축 늘어진 어깨가 안쓰러웠다. 그늘진 얼굴이 안타까웠다. 내색하진 않지만, 영빈의 부재로 아이가 얼마나 불안해하는지 기하는 알고 있었다.

“예. 그리고… 감사합니다.”

“그런 인사는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어른이 아이를 보호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대는 폐하의 하나뿐인 장자이고, 황자들의 큰 형님이 아닙니까. 하니, 가장 귀애하고 소중하게 보호받아야 함이 마땅합니다. 그러니 그런 표정 짓지 마세요.”

아이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 입술을 방끗거리던 무영군이 막 소리를 내려던 순간이었다.

쾅.

문이 부서질 듯 열리며 숨을 격하게 몰아쉬는 황제가 들어섰다. 그 표정이 어찌나 사납고 무서웠던지, 기하는 마치 처음 입궁해서 그를 마주하던 초야 때와 같다고 생각했다. 그때는 짐승의 피를 뒤집어쓰셨지. 한데 어찌, 그때보다 지금이 더 피 냄새가 짙은 것 같다.

“폐…….”

모두가 그대로 얼어붙었다. 숨도 제대로 쉬지 않고 그대로 들어온 황제는 기하의 양쪽 어깨를 붙잡고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너 정녕, 미쳤느냐?”

이를 악문 그의 입술 새로 흩어지는 목소리가 어찌나 차디찬지, 기하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물끄러미 그를 응시했다. 그는 몹시도 괴로운 듯 숨조차 크게 쉬지 못했다. 그가 움켜쥔 양쪽 팔이 저릿해 눈물이 핑 돌 지경이었다.

“대체 왜 이리 네 멋대로 굴어!”

쩌렁쩌렁 울리는 황제의 음성에 잔뜩 겁먹은 정연군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감히 황제께 대적할 수는 없으나, 여차하면 달려들어 기하를 지키려는 심산이었다. 물론 그것은 예민한 현 상궁에 의해 저지되었고, 아이는 발버둥 치다 그대로 그녀의 품에 안겨 침소 바깥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폐하, 일단 고정하시고…….”

“내가 지금 고정하게 생겼나? 응? 짐이 미쳐 날뛰는 걸 보고 싶은 게냐?”

“폐하.”

“겁도 없이! 네가 아직도 전장이나 구르는 북성의 왕자냐? 그깟 상처 하나쯤 훈장처럼 매달고 다닐 북성의 총아냐?”

천으로 칭칭 감은 손에선 또다시 피가 스멀스멀 나왔다. 상처가 어지간히 깊다고 했다. 맨손으로 검을 붙잡고 죄인을 제압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황제는 사납게 씨근덕거리다 곁에 앉아 있는 무영군을 사납게 돌아봤다. 그 시선에 아이는 움찔 떨었다.

“아바마마, 소자가 잘못…….”

“감히, 황자의 옥체에 손을 댄 그 발칙한 년은 어찌했더냐.”

히끅. 황자는 제 목을 어루만지는 황제의 손길에 놀라 숨을 멈췄다. 당연히 불같이 화를 내시고 경을 치시리라 생각했는데, 그 누구도 제게 잘못했다 탓하지 않았다.

“무영.”

“예, 아바마마.”

“많이 놀랐겠다. 크게 동요하지 않고 잘 버텼다 들었다. 잘했다.”

“아…….”

“네게 해를 가한 자는 아비가 처리하마. 두 번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마. 그러니 놀랄 필요도, 겁낼 필요도 없다. 알겠느냐.”

“예, 아바마마. 한데, 소자보다는 마마께서…….”

다시 기하를 돌아보는 황제의 눈이 낮게 드리워졌다. 그는 겨우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종일 괴롭히던 두통에 머리가 그대로 조각조각 나는 것만 같았다.

승지의 눈짓에 무영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칠게 숨을 내쉬는 황제의 옥체가 힘없이 허물어졌다. 놀란 기하가 그의 어깨를 붙잡자, 창백해진 얼굴이 마주해 온다.

“폐하.”

“내가 너를, 대체 어찌해야 좋으냐.”

그대로 기하를 끌어안은 황제는 눈을 질끈 감았다. 대전 회의가 끝난 후 들은 소식에 눈앞이 하얗게 흐려졌다. 태화당까지 오는 길에 몇 번이나 넘어질 뻔했는지 모른다.

당장에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것들에 대한 처결을 내리지도 못하고 달려왔다. 내내 마음을 짓누르던 얼굴을 마주하니, 견딜 수가 없었다.

“차라리 내 가슴을 찢어라.”

“폐하…….”

“그게 낫겠다. 차라리 그게 낫겠어.”

상처 입고 피 흘리는 너를 보느니, 차라리 그편이 나을 것 같다. 너를 대체 어찌해야 좋으냐. 응? 어서 내게 말해 보아.

기하는 그저 물끄러미 황제를 바라봤다. 사납게 일렁이는 눈동자가 오롯이 자신을 향하는 것에, 가슴이 시큰거렸다.

손바닥의 상처가 깊어 봤자다. 이보다 더한 상처도 아무렇지 않게 이겨냈었다. 몸이 아픈 것은 견딜 수 있다. 시간이 흐르면 상처는 아문다. 흉터가 남더라도 더는 아프지 않다.

기하가 지금 걱정하는 것은 오직 무영군의 마음이었다. 마음에 얹어진 상처는 쉽게 낫지 않을 테다.

“폐하, 신첩은 아무렇지 않습니다. 신첩보다는 무영군이…….”

“누가 무영을 걱정하지 않는다 했더냐? 왜 대체 네 몸을 함부로 해!”

“그런 것이 아닙니다. 어쩔 수 없이 긴박한 상황이었습니다. 무조건 화부터 내지 마시고…….”

황제가 몸을 일으켰다. 그의 움직임을 따라 용포가 가볍게 펄럭였다. 의문스러운 눈으로 황제를 올려다보던 기하는 눈가를 가느다랗게 찌푸렸다. 황제는 무표정한 얼굴로 검을 빼어 들었다. 스릉. 유난히 서늘한 울림에 의문을 갖기도 전, 그는 왼쪽 손바닥을 펴고 지체 없이 검을 움직였다.

“폐하!”

붉디붉어 검게 보이는 피가 황제의 손바닥을 축축하게 적셨다. 그대로 황제에게 뛰어간 기하는 살점이 벌어진 그의 손을 붙잡았다.

“어찌 이러십니다!”

퐁퐁 솟아난 피가 그대로 바닥을 적셨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상처를 누르는데도, 황제는 눈썹 한 번 움직이지 않았다.

“대체, 왜…….”

“찢어진 마음에 비한다면 이깟 상처쯤은 아무것도 아니다.”

“폐하…….”

“이제 알겠느냐, 짐의 마음이 어떤지?”

상처가 깊었다. 그 짧은 순간에 힘 조절도 제대로 하지 않았는지, 칼날이 제대로 박혀 들어갔다. 기하는 바들바들 떨리는 입술을 즈려 물고, 제 옷깃으로 황제의 상처를 지그시 눌렀다.

“너무하십니다.”

기어이 눈물이 툭 터져 나왔다. 쓸데없이 마음이 약해진 탓이다. 씩씩하게 지내려 해도 자꾸만 마음이 흐려진 탓이다.

“어찌 이리 잔인하십니까. 어찌 이리 모질게 구십니까.”

“잔인한 것은 너다. 짐의 마음을 얼마나 찢어 놓으려는 것이냐, 응? 이 무정한 정인아.”

뺨을 어루만지는 손길에 기하는 두 눈을 감았다. 감은 눈 사이로 뚝뚝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는 황제의 품에 안겨들자, 낮은 한숨 소리와 함께 등을 다독이는 체온이 느껴졌다.

“기하야.”

“흡, 흐윽……. 마음이 무거워 죽겠습니다. 눈앞이 캄캄해서 무섭습니다. 한데, 어찌 폐하까지 이러십니까.”

“안다. 아비의 일로 네 마음이 얼마나 무거울지. 영빈 때문에 상처받은 무영군을 걱정하는 마음 또한 알고 있다.”

“아시는 분이! 그리 잘 아시는 분이 이러십니까? 어찌하실 것입니까. 용체를 이리 상하게 하시면…….”

화려한 금사로 수놓아진 옷자락을 붙잡으며 기하는 울음을 삼켰다. 붉게 변한 코끝을 그의 목덜미에 비비자, 황제의 따끈한 체온이 느껴졌다.

“너는 너 자신을 조금 더 소중히 여기는 법을 배워야 해.”

눈물로 얼룩진 얼굴이 보기 좋지 않았다. 울릴 생각까지는 없었는데, 이놈의 욱하는 성질머리 때문에 괜히 가슴에 상처만 하나 더 심어준 것은 아닐까.

“짐의 어깨엔 수많은 이들의 안위가 달려 있다. 그런 내게, 가장 소중한 이는 바로 너다. 네가 이리 상처 입고 너 자신을 소홀히 대한다면, 수백만 제국민이 평안한들 내게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상처 부위를 어루만지는 기하의 손길이 조심스러웠다. 황제는 피에 젖은 손을 물리며 기하를 다정하게 끌어안았다.

“무영을 구하려다 그리했다는 말은 들었다.”

“더는 아이들이 위험에 처하는 것은 싫습니다. 어찌 아직도 그런 자들이 궁에 남아 있습니까?”

“기하야.”

“신첩에겐 그럴 자격이 없다는 것을 압니다. 죄를 지은 아비를 두었으니 사태가 마무리될 때까지 자중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폐하, 아이들이 위험합니다. 신첩이 지금 폐하께 무리한 부탁을 드리는 것입니까?”

나약한 아이들이 언제 어떻게 화를 입을지 모른다. 민가의 아이들도 아닌, 제국의 황자들에게 닥친 위기는 황실과 맞서려는 자들의 긴밀한 움직임 때문이었다.

그들은 끝까지 발악하는 중이었고, 그런 이들을 모두 쓸어 담아야 함이 옳다. 한데 어찌 황제께서는 도통 움직이지 않으시려 하시는지.

“사소한 끈이 닿은 자들을 모두 벌하고 죽이다간, 황궁에 남아 있는 자들이 없을 것이다.”

“오늘 같은 일이 또 벌어지지 않으리라는 법이 있습니까?”

“그들 모두가 충정(忠情 : 충성스럽고 참된 정)을 바치진 않는다. 살기 위해 그리했던 이들도 분명 있고, 욕심에 눈이 멀어 잠시 이성을 상실했을 수도 있다.”

“그들을 모두 용서하실 것입니까? 침묵하고 지켜보실 것입니까? 언제까지요?”

“본보기는 하나면 된다. 겁이 많은 자들은 힘 있는 자에게 몰려들 것이다.”

물끄러미 황제를 바라보던 기하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복잡하고 어지러운 일이었다. 제가 나설 일은 아니었으나, 무영군의 목에 검을 겨누던 그 모습이 머릿속을 내내 어지럽혔다.

“나쁘셨습니다. 이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가슴을 찢으라 하시더니, 신첩 가슴은 남아나는 줄 아십니까?”

“그래, 짐이 잘못했다.”

부질없이 젖어드는 눈가를 닦아주며 황제는 가볍게 미소했다. 서러움에 일렁이는 눈동자, 축축하게 젖어든 얼굴, 바르르 떨리는 손끝 하나까지. 모두 다 안타깝고 아플 뿐이었다.

“다시는 이런 짓 하지 않으마.”

“폐하…….”

마음이 물러진 탓이다. 이리 쉽게 눈물을 보이는 것도, 서러움이 툭 터지는 이유도 모두 그 때문이다.

“쉬잇, 그만 울어라.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잠도 못 자면서 이리 울면 탈 난다.”

다정한 음성 때문이다. 마음이 금세 녹진녹진해져 다른 것은 모두 잊고 싶다.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기억도, 가슴을 지끈거리게 하는 아픔도, 내내 마음을 불안하게 하는 그 모든 것을 잊고 이전처럼 행복하게 그렇게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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