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장 덫
왕은 밀실에 틀어박혀 종일 미동도 하지 않았다. 하루 수십 마리의 전서구가 성으로 날아들었다. 짐승들이 가지고 온 소식은 모두 앞이 캄캄해지는 것으로, 작전에 패했다는 것뿐이었다.
황제를 너무 얕잡아 본 것이 문제였다. 다른 사(四)성의 왕들이 지나치게 황제에게 충성하는 것 또한 큰 문제였다. 믿었던 서남성왕 연태진은 지나치게 겁이 많고, 담이 약한 자였다.
그의 보물 같은 막내아들 연홍민의 첩지가 거두어지고 폐궁에 갇혔다는 소문이 삽시간에 제국을 뒤덮은 후, 연태진은 겁에 질려 벌벌 떨며 두문불출한다고 했다. 그 얼마나 한심한 자인가. 실없는 소리만 지껄일 줄 아는 자다. 그리 이용 가치가 없을 줄 알았더라면, 진작 손을 써둘 것을 그랬다.
오직 왕만이 들어갈 수 있는 밀실에는 선왕의 유폐와 왕실의 귀한 보물이 감춰져 있었다. 들어가는 방법을 아는 것 또한 왕뿐이었기에, 그곳은 서연이 유일하게 안식을 취할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밀실 한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던 서연은 대대로 왕에게 내려오는 보검을 손끝으로 쓸다,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여인의 초상화 앞에 섰다.
삶이 이토록 무의미하다 느낀 적이 또 있었을까. 가지지 못한 괴로움에 헐떡이고, 그리움에 젖어 살다, 이내 그 끝이 피와 복수로 물들었을 때도 이런 허무함을 예상치 못한 것은 아니었다. 삶의 끝이 닿을 땐, 미련 없이 뒤돌아 가겠노라고 얼마나 숱하게 다짐했던가.
“그대 곁으로 갈 날이, 머지않았어.”
화려한 미색의 여인은 우아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분홍 꽃비가 내리던 날, 처음 만난 그날 이후 단 한순간도 마음에서 걷어내지 않았던 하나뿐인 정인은 내내 곱고 아름다웠다.
마음은 두고 간다 하며 홀연히 황제 곁으로 시집가던 그날도, 세상에서 가장 빛나는 자리에 올라 화사하게 미소 짓던 그날도, 괴로운 숨을 헐떡이며 복수해 달라고 처연하게 울던 그날도. 차마 눈도 제대로 감지 못하고 들짐승의 먹이가 되어가던 가련한 그 순간마저도!
평생 그녀를 위해 살고 싶었다. 체념하듯 살아가며 나날이 메말라가는 가슴에 피멍이 들었을 때 내밀어지던 검은 유혹은 얼마나 달콤했던가. 그녀를 위해 살고 싶었다. 어진 왕도, 다정한 아버지의 자리도 중요하지 않았다.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절망과 슬픔은 제 추악한 본성을 있는 대로 끌어올렸더랬다.
“그대의 말이 맞아. 그대를 갖기엔 내가, 너무도 힘이 없고 나약해.”
연정으로 세상을 살 수는 없다고 했다. 가장 귀한 여인이 되고 싶다던 그녀의 꿈을 이뤄주기에, 자신은 가진 것이 없었다. 가난하고 황폐한 성의 주인이 될 남자의 아내로 평생을 살기엔, 그녀는 너무도 찬란히 빛났으니까.
“그대의 선택이 옳았다. 나는 끝끝내, 그대의 마지막 청조차 들어주지 못한 무기력한 사내다.”
서연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물끄러미 그녀를 올려보다 이내 돌아서던 그의 발이 잠시 멈췄다. 지금 돌아서면, 어쩐지 다시는 이곳에 들어올 수 없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무거운 밀실의 문이 천천히 열렸다. 종일 밖에 서 있던 이들이 반색하며 서연을 맞았다.
“전하, 서남성의 연태성이 두문불출합니다. 아무래도 서남성왕에게 덜미를 잡힌 것이 아닌가 사료됩니다.”
“어차피 조만간 버릴 패였다. 신경 쓰지 마라.”
“황궁에 들인 자들에게도 소식이 없습니다.”
“황제가 모든 것을 알았으니 가만히 있진 않겠지. 태화당은 어쩌고 있다더냐.”
“황제의 사병들로 에워싸 접근이 불가하다고 합니다.”
그 아이는 지나치게 솔직하고 밝은 성정이었다. 또한 그른 것을 보고 참지 못하는 것은 제 어미를 쏙 빼닮았다. 심성이 곱고 정숙했던 여인, 욕심 많은 제 언니에게 치이면서도 늘 웃었던 여인. 제게는 한없이 과분했던 그 여인을 자꾸만 떠오르게 하는 아이가 미웠다.
“세자께서 황제가 내린 병사들과 합류해 이곳으로 향하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세자빈과 세손의 거처는 알아냈더냐.”
“길령 끝자락에 있는 작은 마을에 몸을 숨겼다는 소식을 듣고 뒤를 쫓았사온데, 어찌 된 일인지 흔적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아비에게 칼을 겨누면서 제 식솔들은 끔찍하게 챙기는군.”
칼날 같은 서연의 음성에 뒤를 따르던 대장군(大將軍) 이휘감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평생 그를 위해 싸우고 살아왔던 이휘감조차 왕의 뜻을 온전히 이해하기란 어려웠다. 어째서 황제를 향해 칼을 겨누었는지, 어찌하여 둘밖에 없는 아들을 모두 버리려 하셨는지.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전하. 성을 버리고 몸을 피하시는 게 어떨는지요.”
왕에게 남은 병사의 수는 고작해야 사천 남짓이었다. 그마저도 제국 곳곳에 뿔뿔이 흩어져, 성을 지키는 것은 천여 명이 될까 말까였다. 힘없는 백성이 더는 왕을 위해 싸울 것 같지도 않았다.
더욱이 어느 순간부터는 왕보다 더 백성을 아끼고 위하기로 소문난 세자가 아니던가. 그가 이끄는 군대는 오직 북성의 백성을 위해 싸웠다. 싸우지 않을 때는 그들을 구휼하기 위해 발 벗고 나섰다. 무너진 집을 다시 짓고, 거리에 쌓인 시체를 손수 묻었다.
의도치 않은 소문의 파장은 생각보다 훨씬 빨랐다. 그것을 덮으려 더한 소문을 내도, 백성들의 신망은 더없이 깊어져만 갔다.
“세자께서는 누구보다 북성의 상황을 잘 알고 계십니다. 사방에서 황제의 군대가 밀려오고 있습니다.”
“아비를 배신하고 제 등에 날개를 달아주려는 황제의 꾐에 넘어간 미련한 것을 더는 세자라 부르지 마라.”
어째서 왕께서는 이토록 변하시었나. 오직 나라와 백성만을 위하시던 왕이 아니셨나. 때때로 사무치는 고독에 홀로 지내시던 시간이 길었지마는, 그것은 먼저 떠나신 왕비마마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 아니었던가. 선황께 충정을 바치고 오직 백성의 임금이셨던 왕께서, 자애롭고 다정하셨던 왕께서, 어찌 이리 다른 분이 되셨던가.
“문정으로 간다.”
사람의 마음은 무릇 변하기 마련이다. 모든 것을 내어주겠다고 다짐했던 이들이 흔적도 없이 제 마음을 감추는 것을 서연은 내내 보았다.
가진 것 없는 자에게 허리를 굽힐 줄 아는 사람은 세상에 없다. 가진 것 없는 사내가 지킬 수 있는 것 또한 아무것도 없다. 황제가 제 것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오직 그가 가진 권력과 힘 때문이다.
그런 빛나는 자리를 꿈꾸며 살아왔던 여인을 어찌 미련하다 할 수 있나. 누가 감히 그녀를 욕할 수 있단 말인가.
“문정으로 가서, 진하를 직접 볼 것이다.”
“하지만 전하, 문정의 강이 범람하고 있습니다. 현재 군사들의 수로 그들을 강에 처박기에는 역부족입니다.”
“문정으로 간다.”
문정으로 가서, 마지막을 보겠다. 내 모든 것을 잃어도, 그 끝을 보겠다. 그녀가 가장 좋아했던 곳이니라. 꽁꽁 얼어붙은 강을 내려다보며, 그녀가 얼마나 해사하게 웃었는지 이제는 기억이 너무도 흐릿해. 아무리 떠올리려 해도 떠오르지 않는다.
“따르지 않을 자들은, 모두 두고 간다.”
“전하!”
“전세는 이미 기울었다. 살고자 하는 이들이 분명 있겠지. 도망치는 이들을 붙잡지 마라. 동요하는 이들을 설득하지 마라. 그들 모두 그들의 삶을 살게 해라.”
“어찌 이러십니까! 저들은 모두 전하를 위해 싸울 것입니다. 전하의 뜻이 무엇이건, 전하를 위해 살고자 하는 이들입니다! 어찌 저들을 버리려 하십니까.”
“그것이 내 뜻이라 전해. 전쟁은 이제 지긋지긋하다. 평생 칼을 들고 싸웠으나,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어. 그들의 평온이, 짐이 바라는 바다.”
그리고 그것이, 짐이 유일하게 그들에게 해줄 수 있는 마지막 선물이니. 살고자 하는 자, 모두 살아라. 더는 살 의미조차 없는 나를 따른다면, 죽음밖에 더 남겠느냐.
빙긋이 미소하는 서연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대장군이 머리를 숙였다. 한평생 무언가를 허망하게 쫓으며 사셨던 왕의 쓸쓸한 뒷모습을 더는 볼 수 없는 탓이었다.
* * *
기하의 무표정한 얼굴에 현 상궁은 초조하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시커멓게 타들어 간 바닥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그의 표정이 하도 서늘해, 숨조차 크게 쉴 수 없었다.
“현 상궁.”
“예, 마마.”
“자네는 나가서, 황자들 곁에 있어.”
“마마.”
“금룡대장에게 황자들 곁에 그 누구도 가까이하지 말라 이르게.”
“예, 마마.”
“내 곁에는 서엽이 있으니 걱정하지 말고. 자네 또한 몸조심하게.”
무덤덤하게 입술만 움직이는 기하의 표정에 현 상궁은 어쩔 수 없이 머리를 조아렸다. 발길을 채근하면서 방 가운데에 무릎을 꿇고 앉은 연금을 쏘아보는 그녀의 시선이 흉흉했다.
“천하의 못된 것 같으니라고.”
연금의 곁을 지나치며 현 상궁은 싸늘하게 중얼거렸다. 아마 기하의 명이 떨어지지 않았더라면, 당장 저 요망한 노비 년을 붙잡아 온몸을 할퀴어도 성이 풀릴 것 같지 않았다.
현 상궁이 문을 닫고 나가자, 방 안은 적막이 흘렀다. 숨소리도 제대로 들리지 않을 정도였으나, 붙잡힌 아이는 의연한 얼굴로 마지막을 기다렸다. 마치 제 죽음을 예견하기라도 한 것처럼 평온한 표정에, 기하는 착잡하게 입술을 열었다.
“연금아.”
“예, 마마.”
“내 너를, 좋은 아이라 믿었다.”
아이의 눈이 변했다는 것을 느낀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태화당에 외부인을 들이지 않던 그 순간부터 아이의 표정이 지나치게 초연해졌다는 것을 느끼며, 내내 마음을 감추었다.
제게 북왕의 서찰을 건넨 후로, 아이는 늘 기하의 눈치를 살폈다. 혹여 그 행동으로 인해 자신의 목숨과 딸린 식솔들이 어찌 되기라도 할까 봐 눈만 마주쳐도 벌벌 떠는 모습이 안 되어, 그 누구에게도 마음을 얘기한 적이 없었다.
“어린 네가, 늙은 부모와 아픈 동생을 먹여 살리려 스스로 입궁했다는 것을 듣고 몹시 기특해 했다.”
황실 노비는 신분이 자유로운 양인 출신이 대부분이었다. 가난하여 배운 것이 없고, 당장 돈이 필요한 이들 중 평생 황궁에서 살 품행 바른 아이들을 일정하게 뽑았다.
기하가 입궁하던 해에 들어왔다던 연금은 유난히 겁이 많고 몸집이 작아, 사소한 심부름조차 잘하지 못했다. 같이 들어온 소현이 빠릿빠릿하고 영리해 어여쁨을 받는 것과 비교돼, 더더욱 야단맞는 일이 잦았다.
기하가 그런 연금을 더욱 애틋하고 가엾게 생각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그런 아이였기에, 작은 변화를 눈치채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물론, 이렇게 큰일을 직접 하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왜 그랬는지, 말해 줄 수 있겠니?”
“그리해야만, 가족이 편안하게 살 수 있다 했습니다.”
아이는 의연하게 말했다. 눈물이 많아 작은 꾸지람만 들어도 툭하면 울음을 터트리던 아이의 눈에는 깊은 절망만이 있었다. 절망, 오직 그것뿐이었다. 후회나 탄식, 두려움조차 없었다.
“내가 죽어야, 네 가족이 편하게 살 수 있다?”
“…마마께 그리하면, 더는 늙으신 부모님 고생하지 않으시고 아픈 동생도 살 수 있다 했습니다. 마마께서는 큰 죄를 지으시어 죗값을 받으시는 것뿐이니, 마음 쓰지 말라 했습니다.”
아이의 작은 손이 미약하게 떨렸다. 기하는 깊은숨을 내쉬며 어지러운 머리를 짚었다. 아이가 내어온 탕약을 미련 없이 걷어냈을 때, 까맣게 타들어 가는 바닥을 내려다보며 어떤 생각을 했던가.
“내가 죽으면, 너는 어찌 될 거라 생각했느냐.”
“…….”
“너 또한, 무사하지 못할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한 것이냐?”
“노비는 어차피, 죽을 것이라 했습니다.”
아이의 눈에서 눈물이 툭 떨어졌다.
“마마께서 화를 당하시면 노비는 그 자리에서 죽거나 고문을 당할 것입니다. 하지만 마마께서 무사하시다 해도 노비는 죽을 거라 했습니다. 어차피 죽을 것이라면, 노비의 가족이라도 평온해지는 것이 옳은 일이 아닙니까? 노비의 잘못이 없다곤 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제게는 선택의 길이 없었습니다.”
“아니, 네게는 그 두 길 외에 다른 길도 충분히 있었다. 나를 죽이고 네가 죽으면, 네 가족은 행복하게 살 수 있다더냐? 나를 죽이지 못하고 네가 죽으면, 네 가족은 어찌 살라고 그랬느냐? 그러니, 다른 이를 탓하지 마. 선택을 한 것은 너다. 모두가 너와 같은 선택을 하진 않았을 거다.”
이마를 짚으며 눈을 감은 기하의 곁으로 가까이 다가온 서엽이 그의 팔을 붙잡았다. 서엽의 손을 밀어내면서도, 기하는 좀체 거칠어진 숨을 제대로 쉬지 못했다. 머리가 무거웠다. 가슴이 답답했다.
어찌 아버지께서는 끝끝내 이리도 잔혹한 일을 하셨단 말인가. 어째서 직접 주신 생을 거두어 가려 하신단 말인가. 어째서, 어째서.
“마마, 침소로 돌아가 쉬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자칫했으면 그대로 목숨을 잃을 뻔한 끔찍한 광경을 곁에서 지켜본 서엽조차 가슴이 진정되지 않았다.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몇 년을 기하의 곁에 숨어 지내고 있던 아이의 본모습을 보고 나니, 끔찍함에 손발이 저릿할 정도였다.
“황후께서 옥체 미령하시어, 폐하께서는 잠시 자경전에 들렀다 오신다고 하셨습니다. 아직 일을 고하지 않았으니, 잠시 쉬시는 것이…….”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후텁지근한 열기와 함께 뜨끈한 바람이 밀려 들어왔다. 지체 없이 성큼성큼 걸어 들어오는 황제의 노기 띤 얼굴을 바라본 기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폐하.”
“이것이냐?”
황제의 표정이 어찌나 차가웠던지, 서엽은 예를 갖추는 것도 잊고 그저 기하에게서 한 걸음 물러나 머리를 숙였다. 그 순간 황제가 검을 빼 들었다. 스릉, 하는 날카로운 소리에 놀란 기하가 황제의 손목을 붙잡았다.
“폐하.”
“그대는 물러서. 이것의 오장 육부를 도려내 까마귀밥이 되게 할 테다.”
완곡한 표정으로 황제의 눈을 바라보면서 기하는 가만히 머리를 저었다. 아이는 분명 벌을 받을 것이다. 죽기를 각오하고 벌인 일이니, 아무리 제가 선처한다 한들 황제께서 용인하지 않으실 거다.
그렇다 해도 이런 식은 싫었다. 늘 가까이하고 어여쁘게 여기던 아이가 제 눈앞에서 사지가 찢겨 죽임당하는 것을 보는 것은 원치 않았다.
“황후마마께서 미령하시다면서요. 자경전에 황군을 조금 더 배치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연진 공주께서도 자경전에 계시니, 그리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가벼이 미소하는 기하의 어깨를 한 손으로 끌어안으며 황제는 긴 숨을 내쉬었다. 그림자에게 이야기를 전해 듣는 순간, 눈앞이 하얗게 흐려져 쉬이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감히 그런 발칙한 일을 저지른 것이 다름 아닌 태화당 노비였다는 말에 화가 나서 도저히 그대로 있을 수 없었다. 저리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내내 기하의 곁에 있던 아이가 간자였다니. 그것을 미처 헤아리지 못하고 바깥 단속만 하였으니, 제 무지함에 하마터면 큰일을 당할 뻔하지 않았던가.
“내 곁에서 떨어지지 마라. 그러는 게 좋겠다.”
황제의 검이 연금을 향했다. 가볍게 손으로 쳐낸 검이 그대로 날아가 연금의 왼쪽 어깨에 푹 박혔다. 이렇다 할 비명조차 내지 못하고 그대로 상체를 구부린 아이의 몸에서 뜨거운 피가 콸콸 쏟아지기 시작했다.
“저것을 끌고 가 입을 열게 해라.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무슨 사주를 받았는지, 그간 숨겨둔 것들을 낱낱이 고하게 해. 그런 후에 죽인다.”
자비는 베풀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이 아이를 아프게 하는 자는 누구라도, 반드시 죄를 묻고 죗값을 받게 할 것이다. 죄가 죄를 키우고, 미움이 미움을 더 크게 만들어도 그렇게 할 것이다.
그림자에게 질질 끌려 나가는 연금의 뒤로 핏자국이 늘어졌다. 그것을 허망하게 바라보는 기하의 머리를 감싸 안은 황제는 지그시 눈을 감으며 그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어서, 전부 끝났으면 좋겠습니다.”
그러지 않으려 했는데, 마음이 벌써 지친 것 같다. 차라리 말을 타고 칼을 휘두르며 적진을 향해 달려드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
보이지 않는 적을 헤아리며, 매일매일 공기를 타고 흐르는 피 냄새를 맡고, 누군가의 죽음을 목도하며 누군가의 비명을 듣는 것은 괴롭고 또 괴로웠다. 언제쯤이면 이 보이지 않는 싸움이 끝이 날까.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고, 얼마나 많은 사람이 사라져야 평화가 찾아올까.
“곧 끝날 것이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이, 제 힘으론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이 이토록 끔찍하다는 것을 미처 몰랐다.
“곧 끝나, 그렇게 하겠다. 그러니 기하야.”
“예, 폐하.”
“조금만 더 버텨보자.”
“예.”
그것은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일이었을까. 그것은 대체, 누구의 잘못으로 기인한 일일까. 어디서부터 바로잡아야, 모두가 편안해질까.
태화당은 불안한 분위기에 휩싸였다. 주인인 기하가 도통 웃으려 하지 않으니, 삽시간에 무거운 적막이 사람들을 짓눌렀다. 노비인 연금이 소리도 없이 사라진 후, 그 아이와 가깝게 지냈다는 이유만으로 소현은 금룡대에게 불려 가 오랜 시간 조사를 받았다.
후에 그것을 알아차린 기하가 직접 금룡대로 가서 두려움에 입조차 제대로 열지 못하는 소현을 찾았을 때, 아이의 얼굴은 이미 생채기로 엉망이었다. 불같이 화내는 기하가 낯설어 현 상궁조차 차마 어찌하지 못하며 조용히 그 밤을 보냈다.
“마마.”
침상 한가운데 우두커니 앉아 있던 기하가 고개를 들었다. 언제나 생기 가득하던 얼굴이 퍼석하게 말라비틀어진 것이 안타까워, 그녀는 무릎을 굽혀 몸을 낮췄다.
“종일 이리 계실 것입니까?”
어제도 종일 이렇게 시간을 보냈다. 오죽하면 정연군마저 이런 기하가 낯설어 차마 안아달란 소리도 하지 못하고 그의 곁에서만 뱅뱅 돌다 기어이 울음을 터트렸겠는가.
“아무것도 드시지 않고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시니, 점점 더 마음이 복잡해지시지요. 수라 생각이 없으시면 맛좋은 과실이라도 내올까요?”
“아니.”
가만히 있어도 등에 땀이 주르르 흘렀다. 생각건대, 제국의 여름은 못 견딜 정도로 고되었다. 지금은 여름의 중간이었고, 밤이 되어도 눅눅한 바람조차 불지 않았다. 입맛은 뚝 떨어진 지 오래고, 황제께서 내리신 얼음조차 배앓이를 한다는 이유로 정해진 양밖에 먹을 수 없었다.
현 상궁이 유난이었다. 입궁한 이후, 여름은 늘 이렇게 허망하게 보내었는데 유난히 곁에서 눈치를 살피려 드는 그녀를 이해할 수 없었다. 몸과 마음이 무거워 대답조차 쉽지 않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
“욕탕에 시원한 물을 받아주게.”
“빈속으로 욕탕에 들어가시었다가 행여 기력을 잃으시면 어찌하시려고요.”
평소보다 한층 다정한 그녀의 목소리에 잠시 눈을 깜박였다. 그녀의 걱정이 모두 자신을 위한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현 상궁이 원하는 답은 입에서 쉬이 나오지 않았다. 그저 눈만 내리깐 채 입술을 몇 번 달싹이던 기하가 힘없이 미소했다.
“자네가 곁에서 지켜주면 되지.”
“그것은 당연한 일이고요. 달콤한 화차를 내어오겠습니다. 탕에 앉으시어 그것이라도 조금 드시겠다고 약조해 주십시오.”
단호한 그녀의 말에 기하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기쁜 듯 웃으며 서둘러 움직이는 현 상궁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기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요즘 그는, 자신이 얼마나 무기력한 사람인지를 느끼고 있었다. 하는 일이라곤 태화당에 틀어박혀 현 상궁이 내어주는 음식을 먹거나, 가벼운 산책을 하는 것뿐이었다.
황궁의 분위기가 더없이 무거워져, 마치 황제께서 처음 제위에 오르시던 그때와 같다는 말이 나돌았으나, 태화당에서 두문불출하고 있는 기하는 그것조차 체감할 길이 없었다.
북성은 어떨까. 혹, 벌써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은 아닐까. 끝끝내 자신을 죽이려 했던 아버지께서는 지금쯤 무엇을 하고 계실까.
“너무 찬물은 좋지 않아 시원할 정도로만 준비하라고 했습니다.”
손을 붙잡아주는 현 상궁을 바라보던 기하는 가볍게 머리를 끄덕였다. 넓은 탕 안에 앉으니 어깨 바로 아래까지 잠긴 몸이 하릴없이 휘청거렸다. 그녀가 내어주는 그릇을 받아 들자, 달콤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떡도 조금 내왔으니, 시장하시면 말씀하셔요.”
“응.”
“머리 손질을 하겠습니다.”
손을 걷어붙이며 다가오는 그녀에게 되었다는 말을 하기엔 이미 늦은 것 같다. 말랑거리는 복숭아를 한 입 베어 물자, 달콤한 육즙이 입안에 감겼다. 제 뒤로 다가와 길게 늘어뜨린 머리카락을 조몰락거리는 현 상궁 손길에 기하는 나른하게 눈을 감았다.
“곤하십니까?”
“응.”
“날이 너무 더워 그렇습니다. 금일 저녁에는 침상 아래에 얼음을 조금 넣을까요?”
“아니네. 폐하께선 더위를 타지 않으시니 그냥 두어.”
“마마께서 이리 주무시지도 못하고, 드시지도 못하시니 폐하께서 심려가 크십니다.”
“잠자리가 차면 황자들에게도 좋지 않으니 괜찮아.”
황제께서는 황자들의 궁에도 호위병을 늘리시겠다고 하셨지만, 기하는 한사코 아이들을 처소로 보내지 않으려 했다. 벌써 수많은 궁인이 문초를 받고 사라졌으나, 잔당의 뿌리가 깨끗하게 도려내진 것은 아니었다.
더더군다나 영빈의 일로 무영군은 눈에 띄게 말수가 줄었다. 그런 아이를 홀로 두는 일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더라도 곁에 두고 싶었다. 아이가 혼자라는 생각을 하도록, 그런 두려움에 홀로 울게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현 상궁.”
“예, 마마.”
“연금이의 부모와 동생이 어찌 사는지, 알아봐 줄 수 있나?”
“마마.”
“폐하께서 아셨으니, 혹 그 아이 가족이 고신을 받거나 죄를 함께 뒤집어쓰지 않았을까 싶어.”
“신경 쓰지 마십시오. 마마께서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될 일입니다.”
“물론…….”
입이 쓰다. 깔깔한 혀가 제멋대로 움직이다 잠시 둔하게 움직임을 멈췄다. 머리가 지끈거리고 가슴이 무거웠다. 눈을 감으면 제 앞에서 해사하게 웃던 아이가 떠오른다. 머리를 조아리며 죄를 고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피를 흘리며 금룡대 손에 끌려가면서도 눈물만 뚝뚝 흘리던 얼굴이 떠오른다.
“그 아이를 용서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가족에게는 죄가 없지.”
“어찌 죄가 없다 하십니까? 마마께 해를 가하려 한 죄가 얼마나 큰지 아시지 않습니까.”
“그럼 내 아버지의 죄는 어찌하겠나. 폐하께 반역을, 그것도 두 번씩이나 저지른 아버지의 아들인 나와 형님은 진즉 죽어 마땅하지 않은가.”
낮게 잠긴 기하의 목소리에 현 상궁은 빗질하던 손을 잠시 멈췄다. 줄곧, 그런 생각을 하고 계시었던가.
“그 아이, 제가 죽어서라도 부모와 동생을 저버리지 않으려 했어. 그런데 일이 틀어진다면 무척 원통할 거란 생각이 들었네. 그것이 옳은 일이 아님을 알면서도 피를 나눈 가족을 위해 한 일이라면, 그 누가 잘못했다고 손가락질할 수 있겠나.”
나는 그러지 못했다. 그러면서, 그것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아버지를 배신하고, 북성을 배신하고, 백성들이 영문도 모르고 참혹하게 죽어갈지도 모르는데도, 그것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정의로운 일이니 괜찮다고 생각했다.
아버지의 분노를, 대신들의 싸늘한 눈길을, 퍼부어지는 폭언과 고신을 받으면서도 나는 정의로우니 괜찮다고 위안 삼았다. 혹여 그대로 눈을 감아도, 숨이 끊어져도, 언젠가는 그분께서 나의 정의로움을 알아 주실지도 모를 일이라고 자위하면서 괜찮다고 여겼다.
너무 어려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끝끝내 나를 돌아봐 주시지 않는 아버님을 향한, 반항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이제 와 생각해 보니 그렇다.
“알아는 보겠으나, 기대는 하지 마십시오.”
“응.”
“기운을 좀 차리셔야지요.”
“그래야지.”
“폐하께서 걱정하십니다. 금일도 몇 번이나 상선 영감이 다녀가셨습니다.”
“그랬나.”
“예. 수라는 잘 드시었는지, 오수는 드시었는지, 매번 묻고 가셨습니다.”
불안한 기운에도 황제께서는 중심을 바로 잡고 계셨다. 대신들은 이 틈을 비집고 황제의 혜안을 흐트러뜨리려 하는 발칙한 짓도 서슴지 않았는데, 그것은 번번이 묵살된다 들었다.
그간 조용히 세력을 키우던 황제의 충신들이 조용히 움직이며 일을 처리하는 능력에 반대파는 숨소리도 크게 내지 못하고 있다며 현 상궁이 자랑스럽게 말했는데, 기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그것에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그저, 머리가 무거운 탓이라고 치부해도 마음이 먹먹해졌다.
“마마.”
“응?”
물끄러미 수면을 바라보던 기하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기하의 등 뒤에서 물러선 현 상궁은 멀찌감치 서 있는 황제를 향해 나붓이 절을 올리며 미소 지었다.
“소인은 물러나 있을 테니, 필요하시면 부르십시오.”
“아…….”
이렇게 앉아서 황제를 맞는 것은 분명 예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흠뻑 젖은 몸으로 벌떡 일어날 수도 없어 난감한 기색을 띠는 기하에게 다가온 황제는 허리를 굽히며 얼굴을 바싹 들이댔다.
“나의 빈께서 어찌 이리 당황하시었나.”
빙긋이 미소하는 다정한 목소리를 들으니, 무거웠던 마음이 슬그머니 뭉그러진다.
“오셨으면 부르시지, 어찌 예까지 직접 걸음 하셨습니까.”
“그대의 휴식을 방해할 수는 없지. 종일 아무것도 하지 않다가 겨우 움직이셨다 하니,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팔 수밖에 없지 않나.”
다정한 손길이 기하의 뺨을 쓸었다. 혹여 용포가 물에 젖을까 싶어 그의 옷자락을 쥐니, 황제의 눈이 고운 호를 그렸다.
“밤새 잠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더니,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들었어.”
“별것 아닙니다.”
“짐을 애태워 죽일 작정이더냐?”
“그런 것이…….”
“제국의 여름을 견디기 힘들어한다고 들었다. 하면 방법을 찾아야지, 여름이 다 갈 때까지 종일 이러고 있다가 탈이라도 나면 어찌하려 그래.”
“지금까지 잘 견뎠습니다. 신첩을 너무 연약하게 보시는 것 아닙니까? 그 정도는…….”
“기하야.”
얼굴에서 웃음을 거둔 황제의 표정이 무거웠다. 그의 다정한 손길이 느껴지자, 이상하게도 울컥 울음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몇 번, 입술을 물고 바르르 떨던 기하가 끝끝내 머리를 숙였다.
“그대가 어떤 마음일지, 사실은 제대로 가늠하지 못하겠다. 그대 마음을 헤아릴 수만 있다면 좋을 텐데, 짐이 무지하여 무엇부터 해야 할지 도통 모르겠구나.”
“폐하의 은혜가 얼마나 과분한지, 잘 알고 있습니다.”
“아니다, 틀렸어.”
그제야 고개를 든 기하는 황제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소매 끝이 젖어가는데도, 그는 기하를 어루만지는 손을 거두지 않았다.
“은혜(恩惠)가 아니라 사모(思慕)다. 또한, 그것은 과분하지 않다. 짐의 마음이 그대에게 있으니, 짐이 그대를 위해 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
“그대가 너무 앓으니, 그것이 걱정이다. 짐의 욕심일 테지. 그래도 그대가, 어서 이전처럼 기운을 차리고 웃어줬으면 좋겠다. 잘 자고, 잘 먹고, 바른말도 톡톡하고. 응?”
“폐하, 신첩은…….”
“자책하지 마라, 기하야. 네 탓이 아니니 그럴 필요 없다.”
너는 정의를 위해 그리했고, 네 정의가 네 나라를 살렸다. 그리고 짐 또한, 너로 인해 다시 살게 되었다. 너는 수많은 북성의 백성을 살렸고, 황폐한 황궁에 온기를 불어넣었고, 무지한 짐의 마음을 처음으로 제대로 뛰게 했다.
온정 한 번 제대로 받아본 적 없는 어린 황자를 품에 안아주기까지 했으니 은혜를 갚아야 할 이는 네가 아니라 짐이다. 그러니 기하야, 조금만 앓아라. 조금만 아프고, 더는 울지 마라.
* * *
“오랜만에 날씨가 좋습니다.”
그것은 말 그대로 서엽 식의 반어법이었다. 우중충한 하늘은 당장에 비가 퍼부을 것처럼 시커멓게 변해 음산한 기운마저 감돌았는데, 그 때문에 햇볕이 들지 않아 기온이 내려가 조금 살 만했다.
서엽 또한 만만치 않게 더위를 타는 북성의 사내였기에, 무장한 채로 종일 태화당 주변을 경계하는 것은 몇 날 며칠 쉬지도 않고 전장을 구르는 일보다 더 힘겹게 느껴졌다.
“형님 요즘 얼굴 보기가 왜 그리 힘듭니까?”
툭 튀어나온 기하의 불만에, 서엽은 답지 않게 움찔 떨며 어색하게 고개를 돌렸다. 제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건 기하나 서엽이나 매한가지였으나, 그의 그런 반응은 젖을 나눠 먹고 자란 기하마저도 신기하게 여길 정도였다. 그러니까 그것은 마치, 첫정을 나누었던 여인에 대해 캐물었을 때의 얼굴과도 같은데.
“형님?”
“무,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요? 괜히 트집 잡지 마십시오. 소장이 한가한 몸인 줄 아십니까?”
“그러니까, 내 호위를 맡아야 하는 서 중랑께서 어찌 종일 얼굴도 보이지 않고 어딜 다니느냐고 묻지 않습니까.”
“거 뭐, 그런 걸 물으시고 그러십니까?”
“궁금한 게 당연하잖습니까? 형님이 그러니까 수상합니다. 생각해 보니 벌써 이게 몇 달이나 된 것 같은데요? 처음엔 수련하느라 그러는 줄 알았는데, 요즘은 연무장에도 통 들르지 않는다면서요?”
말을 꺼내고 보니 이상한 일이었다. 태화당 밖으로는 도무지 나갈 생각을 하지 않던 서엽이 아니던가. 워낙 감정에 무딘 사내였기에, 제 마음을 드러내는 법이 없었으나, 서엽도 엄연한 북성의 백성이다. 그것도 왕제(王弟 : 왕의 동생)의 아들로 자부심이 넘치는 왕족이 아니던가.
그런 그가 북성을 멸시하는 제국 황실에서 어떤 마음으로 버티고 있는지, 기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말로는 황후마마께 은혜를 갚기 위해 부름을 받고 왔다고 했으나, 이렇게 제국에 터를 잡은 것은 오직 저 때문이리라. 그런데 미처, 서엽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다. 북성의 일로 마음이 무거운 것은 자신만이 아닐 텐데.
“형님 마음도 무거운 거 압니다.”
“뭐, 뭘 말입니까.”
“숙부님께서는 형님의 편에 계신다고 하니, 너무 걱정 하지 마세요.”
“걱정은 누가 합니까. 아버님이야말로 소장보다 짱짱하게 오래 사실 테니, 마마께서도 그런 걱정은 마십시오.”
부루퉁해진 서엽의 표정에 기하는 작게 미소했다.
“미안합니다.”
“왜 이러십니까?”
“그간 내가 미처 형님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마음이 무거운 것은 나뿐이 아닐 텐데.”
“소장은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하니, 심려치 마십시오. 소장이 마마처럼 어린애도 아니고.”
“뭐라고요?”
“그렇지 않습니까? 어릴 때도 툭하면 삐치셔서, 소장이 그것 때문에 어머니께 얼마나 호되게 야단맞았는지 아십니까? 날이면 날마다 종아리가 터지게 맞았습니다.”
“그거야 형님이 날마다 날 괴롭혔으니까 그렇지요.”
삐죽해진 기하의 표정에 서엽은 일부러 불퉁한 표정을 지으며 기억을 반추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기하는 옛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 함께 뛰놀던 어린 시절은, 달콤한 꿀을 퍼먹는 것처럼 행복하기만 했으니까.
“마마께서 늘 제 뒤만 졸졸 따라다니며 귀찮게 하셨으니 그랬지요.”
“진하 형님하고만 놀았잖습니까. 나만 따돌리고.”
“마마께선 너무 어리셨으니까요.”
진검을 들고 연습이라도 할라치면 귀신같이 알아채고 따라붙던 어린 기하를 떠올리며, 서엽은 일부러 퉁명스럽게 중얼거렸다. 하나뿐인 동생을 몹시도 귀애하면서도 그럴 때마다 냉정하게 돌아서던 왕세자 대신, 서엽은 늘 끝까지 남아 징징거리는 기하를 달래야 했다.
종래에는 심술 난 아이가 울음을 터트려 난처해졌던 일이 한두 번이던가. 물론 너무도 어렸던 마마께서는 중요한 부분을 제멋대로 잊으신 것 같지만.
“두 황자께서는 어릴 적 마마와 꼭 닮으셨습니다.”
“응? 나와?”
“정연군 저하처럼 마마께서도 툭하면 울지 않으셨습니까? 심약하셔서.”
“내가 언제요?”
“그러셨습니다. 식탐은 또 어찌나 많으신지, 음식을 욕심내다가 배앓이한 것이 어디 한두 번입니까?”
“그거야, 숙부님 댁에 가면 맛있는 게 많으니까 그랬지요.”
제 잘못은 하나도 없다는 듯 기하는 당당하게 말했다. 사실 그랬다. 외로운 어린아이의 낙이라고는 먹는 것이 유일했는데, 왕실이라고 해도 주전부리할 것은 도통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하루 네 끼 수라가 전부였는데, 어찌 보면 아직 어린 왕자를 배려하지 못한 탓이 컸다.
“어린 것이 어찌나 바른말만 툭툭 하는지. 무영군 저하께서 대거리하시는 건 새 발의 핍니다.”
“안 그랬습니다.”
“안 그랬다고 딱 잡아떼시는 것까지 판박이십니다.”
미간을 찌푸리며 눈을 굴리는 기하를 곁눈질하며, 서엽은 슬그머니 웃었다. 그래도 며칠 전보다는 기운을 차린 그를 보니 안심이었다. 다리를 길게 뻗고 앉아 검을 손질하는 서엽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기하는 그의 옆에 가만히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현 상궁이 본다면 분명 체통을 잃지 마시라는 둥, 의복이 더러워진다는 둥 잔소리를 다다다다 쏘아대며 달려올 것이다.
“그러다 현 상궁이 보면 놀라 거품 뭅니다.”
역시 서엽도 같은 생각인가 보다. 하긴, 현 상궁 잔소리가 좀 무섭긴 하지.
“우리 형님도, 얼른 장가가셔야 할 텐데.”
순간 검을 잡던 서엽의 손이 삐끗했다. 그 미묘한 변화를 눈치채지 못한 기하는 제 무릎 위로 팔을 괴어 가만히 턱을 받쳤다.
“폐하께 말씀드려 좋은 처자를 구해 달라고 할까요?”
“거, 뭐, 그, 신경 쓰지 마십시오! 지금 그럴 때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긴 한데, 당장은 아니고. 어쨌거나 신경 쓰지 않을 수가 없잖습니까. 내게 형님은 젖형제 이상이라고요.”
자신의 본심을 아무렇지 않게 툭툭 내뱉는 기하의 성정은 익히 알고 있었다. 그래도 이건 너무 반칙 아닌가. 해도 없는데 금세 달아오른 얼굴의 열기는 대체 무슨 핑계를 댄단 말인가.
“장가는 아니지만, 어쨌거나 혼인을 해보니 그래요. 마음이 무겁고 아파도, 내게는 폐하와 지켜야 할 아이들이 있으니까 마냥 마음을 놓을 수가 없어요.”
“다 그리 사는 것이지요. 다행이지 않습니까. 소장 또한 마마 걱정을 조금 덜게 되었고요.”
“고맙습니다.”
“뭘 또 새삼스럽게 이러십니까. 낯간지럽습니다.”
“항상 고맙게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얼른 형님도 혼인하세요. 아우가 좋은 처자 구해 보겠습니다.”
“그러지 마십시오!”
버럭 소리를 치는 서엽의 귀 끝까지 열기로 물들었다. 갑작스러운 그의 고함에 눈을 느리게 깜박이던 기하는 고개를 갸웃했다. 설마…….
“아직, 그녀를 잊지 못하고 있습니까?”
북성을 떠나 기녀가 되었다는 그녀를 떠올리며 기하는 무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혹여나 그의 상처를 헤집을까 걱정되는 마음 때문이었다.
눈도 제대로 맞추지 못하며 초조하게 제 손으로 턱을 문지르던 기하는 스르르 일어서는 서엽을 따라 벌떡 몸을 일으키며 놀란 눈을 깜박였다.
“다 잊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역시, 잊지 못했구나. 하긴, 첫정이 무서운 법이다. 마음을 나누었던 그녀는 부모 없는 가난한 양민이라는 이유로 서엽의 곁을 떠나야 했다.
어린 동생을 데리고 살던, 어여쁘고 다정하던 그녀를 떠올리자 마음이 눅눅해졌다. 서엽은 자책하고 있을까. 자신 때문에 그녀의 삶이 망가졌다고, 정을 나누지 않았더라면 그녀 또한 북성에서 평범하게 살았으리라 생각하면서.
“혹시 예하를 찾고 싶은 거라면…….”
“별소릴 다 하십니다. 할 일 없으시면 활촉이나 손질하십시오. 종일 그리 처소에만 있지 마시고, 아침저녁으로 활이라도 쏘십시오. 마음을 가다듬을 땐 그만한 것도 없다 하시면서 어찌 그리 점점 게을러지십니까?”
퉁명스러운 서엽의 말에 기하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당황하면 말이 많아지는 서엽의 버릇은 알고 있었다. 역시나, 그녀 때문이구나. 순간 안쓰러운 마음이 들어 기하는 얼른 서엽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뭐! 뭐하십니까, 지금! 어찌 이러시는 것입니까?”
“형님 마음 잘 알았습니다.”
“그, 당장, 당장 떨어지십시오! 폐하께서 보시기라도 하시면 소장을……, 헉.”
하마터면 들고 있던 검을 그대로 떨어뜨릴 뻔했다. 저 멀리서 음산하게 웃으며 다가서는 황제 일행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서엽은 입을 쩍 벌렸다. 하필, 어찌, 왜 이런 순간에.
“걱정하지 마세요. 내 힘써 볼게요.”
마마께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시는 게, 소장을 위한 길인 것 같으니.
“일단 이것부터 놓으십시오…….”
소장은 이제, 정말 폐하께 죽었습니다.
썩어 들어가는 황제의 얼굴을 보면서도 기하는 해사하게 웃었다. 황제의 행렬이 제게 다가옴을 느끼자마자 돌아서 한달음에 달려가는 기하를 바라보며, 서엽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언제나 그랬지. 천진한 아우님께서는 지나치게 마음을 내어 주시어 종종 다른 이들을 곤란케 하셨다. 물론, 본인은 전혀 모르고 계시지만.
“폐하.”
“잠시 시간이 나 들른 참이다.”
다정하게 기하의 얼굴을 어루만지던 황제는 그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서엽을 향해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살벌하던지, 절로 머리를 조아린 서엽은 하릴없이 손끝을 덜덜 떨었다.
“나의 빈께서는 서 중랑과 뭘 하고 계시었나.”
“이런저런 얘길 하는 중이었습니다. 폐하, 수라는 드시었습니까?”
“그래, 먹었다. 그대도 조금이나마 들었다지?”
“예. 신첩은 이제 괜찮으니 시간마다 상선 영감을 보내시는 것은 그만두십시오. 바쁘신 분인데 어찌 자꾸 태화당까지 오가게 하십니까.”
“상선은 짐의 눈이 아니냐. 내 직접 오갈 수 없으니 그것은 당연하다.”
찬찬히 웃으면서 기하를 바라보는 눈은 다정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 모습에 졸인 가슴을 간신히 펴려던 서엽은 문득 자신을 돌아보는 황제의 눈길에 바싹 마른 입술을 혀끝으로 축였다. 눈빛이 어찌나 사나운지 그대로 녹아 없어진다 해도 이상할 것이 없을 지경이었다.
“한시도 눈을 떼지 말고 빈을 지키라 붙여 두었더니, 하는 것 없이 빈둥거리며 시간만 축내는구나.”
유난히 싸늘한 황제의 목소리에 기하는 고개를 갸웃했다.
“폐하?”
“아무리 그대가 빈의 사촌이라 해도 그것은 그것이고. 감히! 잇…….”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 주먹을 바르르 떨던 황제가 고개를 팩 돌렸다. 절절 끓은 분노라고 하기에는 지나쳤으나, 황제는 하고 싶은 말을 겨우 삼키며 이까지 바드득 갈았다.
혹여 서엽이 무슨 큰 잘못을 저지른 것일까. 아니면 황제께서 괜히 저러시는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서엽이 딱히 죄를 지은 것 같지는 않은데.
“어찌 그러십니까?”
옷자락을 붙잡으며 고개를 갸웃하는 기하의 천연덕스러운 얼굴을 바라보며 황제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무정한 정인 같으니라고. 조금 전 제 눈앞에서 다른 사내를 품에 안고 다독이던 것을 보였으면서도 이리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라니. 그것도 하필, 저 파렴치한 서엽 놈이라니!
안 되겠다. 아무리 생각해도 서엽 저놈은 안 되겠어. 급한 일만 마무리된다면 당장에 북성의 서진하 옆으로 던져버려야겠다.
“자경전에 들러야겠다.”
“황후마마께요?”
기하는 황제를 따라 걸으며 고개를 끄덕이다, 이내 입을 다물었다. 해가 뜨기도 전에 침소를 나가시고, 밤이 깊어서야 겨우 돌아와 눈만 붙이시는 것이 요즘 황제의 일상이었다. 수라를 함께 들기는커녕, 이리 짧은 담소라도 나눌 수 있는 것을 감사히 여길 지경이었다.
그래서인가. 겨우 얼굴을 마주했는데, 다시 가신다고 하니 마음이 섭섭했다.
“산달이 가까워지니 자주 들여다보는 것이 도리가 아니더냐.”
“예.”
걸음이 느려진다. 황제의 말에 그른 것은 하나 없었으나, 심기가 불편해지는 것이 사실이었다. 자애로우신 황후마마를 닮은, 아니 폐하를 닮은 적자(嫡子)의 탄생은 황궁에 거대한 변화를 일으킬 것이다.
자식이 어여쁘면 사내의 마음은 금세 돌아선다고 하던데. 예전에야 황자들에게 제대로 마음을 주지 못하셨으나, 요즘은 제법 다정한 아버지가 아니신가. 그런 황제께서 성별을 불문하고 다음 대의 황위를 물려주시겠다고 공헌하신 아기씨이니, 얼마나 애틋하실까.
“뭘 하고 있어?”
어느새 발을 멈춘 기하를 돌아보며 황제가 반문했다. 마음은 늘 움직이는 것이라 하셨지. 그 마음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변하는 것이 어디 사람 뜻대로 되는 일이던가. 그런 치졸한 마음을 가져서는 아니 된다고 수없이 되뇌면서, 기하는 아랫입술을 질끈 물었다.
“나의 빈께서 또 무슨 생각을 하시길래 표정이 이리 어두우실까.”
“아닙니다. 날이 꿉꿉하여 그럽니다. 어서 가십시오.”
“그 작은 머리에 쓸데없는 생각을 가득 채우면 화낼 것이다.”
다정하게 붙잡아 주는 체온은 변함없이 따뜻했다. 더운 것은 질색인데, 황제의 체온은 쉬이 물릴 수 없었다. 아니, 붙잡을 수만 있다면 늘 곁에서 함께하고 싶다.
“어서 가자.”
“신첩도 함께요?”
“시간이 얼마 없어. 마음 같아서는 내내 네 곁에만 있고 싶다만, 그럴 수 없으니 조금만 이해해다오.”
뺨을 툭 건드리는 손길에 기하는 그저 머리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두 황자도 자경전에 문안 인사 드리러 간다 하고 아직 돌아오지 않았지.
“빈은 내 직접 모셔갈 테니, 너희는 아무도 따르지 말고 태화당을 지켜라.”
앞마당에 주르르 늘어서 대기하고 있던 현 상궁과 그를 뒤따르던 서엽이 머리를 조아렸다.
“따로 명할 때까지는 절대로 수상한 자들이 없는지 각별히 신경 쓰도록.”
“예, 폐하.”
“현 상궁, 다녀오겠네.”
“예, 마마. 조심해서 다녀오십시오.”
머리꼭지를 보이는 서엽을 한동안 싸늘한 눈으로 응시하던 황제가 빠르게 등을 돌렸다. 어김없이 기하를 한 손으로 끌어안으며 발길을 재촉하는 얼굴은 꿀을 바른 듯 달콤하고도 다정했다.
“기하야.”
“예?”
“아무래도 그대 곁에 호위를 두엇쯤 더 붙이는 것이 좋겠다.”
“신첩은 괜찮습니다. 늘 태화당 안에만 있으니 딱히 위험하지도 않습니다. 서엽도 있고요.”
“서엽 저자는 믿을 만한지 도통 의문이다.”
어쩐지 심드렁해진 황제의 표정에 기하는 걸음을 멈추고 눈을 깜박였다. 뭔가 불편해 보이시는 얼굴인데, 이건 단지 기분 탓인가?
“혹, 서엽을 의심하시는 것입니까?”
말씀이 없으신 것을 보아하니 무슨 일이 있으시구나. 설마. 설마, 아닐 거다. 다른 이도 아니고 서엽이라니, 이건 말도 안 되는 우스운 소리다.
서엽은 친형제 버금가는 정을 나눈 사촌이다. 하나뿐인 젖형제고, 얼마 없는 친우이기도 했다. 맛있는 것이 있으면 말없이 나눠주고, 혹여 제가 말도 안 되는 투정을 부리면 늘 달래고 어르던 것도 서엽이었다. 수년간 전장을 함께 누비며, 자라는 동안 잠시도 떨어진 적 없는 사이다.
그런 그가 제게 악한 짓을 하리라 생각하시는 것인가. 이것은 모함이다.
“폐하.”
“…….”
“다른 어떤 사람을 의심한다고 하셔도 서엽은 아닙니다. 그는 신첩에게 해를 끼칠 자가 아닙니다. 누군가 그런 말을 하는 이가 있다면 그 사람을 의심하십시오.”
“그대는 아주, 서엽 저자를 깊이 신뢰하는 것 같은데.”
“당연한 것 아닙니까? 그는 제 형님과 같습니다. 비록 사촌이기는 하나, 엄연히 피를 나눈 사이가 아닙니까?”
“피를 나눈 것이 무어. 그게 무슨 대수라고 그러는 거냐.”
황제의 음성이 자못 딱딱해졌다. 눈썹을 꿈틀하는 것은 그의 심기가 불편해졌다는 증거였다. 기하는 황제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었다. 의심은 의심을 낳는 법이다. 화는 화를 부른다고 했다.
“네게 해를 끼칠지 아닐지는 내가 판단한다. 너, 짐이 그렇게 무능해 보이느냐? 짐이 네게 실없는 소리나 지껄일 위인으로 보여?”
“신첩에게 해를 끼칠지 아닐지는 신첩이 판단합니다. 서엽은 아닙니다. 폐하께서 아무리 그리 말씀하셔도 서엽은 아니에요. 어찌 서엽을 의심하십니까?”
“너 지금, 내게 서엽 편을 드는 것이냐?”
“편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 유치한 말씀 좀 하지 마십시오.”
“뭐?”
아차, 하는 후회의 빛이 기하의 얼굴에 스쳤다. 황제의 딱딱해진 표정에 기하는 잠시 제 잘못을 뉘우쳤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어쨌거나 서엽을 의심하는 것은 황제의 잘못이었다. 서엽이 누군데. 제 형제나 다름없는 이를 어찌 이리 대놓고 의심하실 수 있단 말인가.
“이 일은 나중에 다시 얘기하자. 시간이 없으니 더는 지체 말고 자경전으로 가야 해.”
손목을 확 붙잡는 황제의 말투는 더할 나위 없이 서늘했다. 기하는 그 자리에서 꿈쩍하지 않았다. 자신의 팔을 이끄는 황제의 힘에 그대로 넘어질 뻔했으나, 잠시 몸을 휘청거리다가 이내 꼿꼿하게 허리를 폈다.
황제의 눈썹이 다시 한 번 꿈틀했다. 정말로 시간이 별로 없는 탓인지 곁에 서 있던 상선 영감이 초조하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빈. 지체할 시간이 없다고 했다.”
“송구하지만, 먼저 가십시오. 신첩은 후에, 따로 마마를 찾아뵙겠습니다.”
“빈.”
이를 악무는 황제의 입술 사이로 나지막한 한숨이 새어 나왔다. 황제에게서 한 걸음 뒤로 물러선 기하는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었다. 두 사람의 분위기가 난데없이 흉흉해지자, 상선 영감을 비롯한 지밀상궁의 표정 또한 난감하게 변했다.
“너 지금, 짐이 서엽에게 한소리 했다고 이러는 것이냐.”
“…….”
“네가 믿고 의지해야 할 이가 누구냐. 서엽이냐? 피를 나누어서? 짐이 이런 말을 하는 데는 다 그럴 만한 사정이 있음인데, 너는 누가 뭐라 해도 짐의 말을 따라야 하는 것이 아니냐?”
“제대로 설명도 안 해주시면서 어찌 무조건 따르라 하십니까? 서엽은 신첩의 친우입니다. 형제입니다. 어찌 그런 서엽이 신첩에게 해를 가한다 하십니까? 대체 누굽니까? 누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로 폐하의 혜안을 흩트리는 것입니까?”
이를 바드득 가는 황제를 응시하면서 기하는 시선을 떨어뜨리지 않았다. 섭섭하고 서운했다. 단지 그것만으로는 표현되지 않는 감정이 사정없이 휘몰아쳤다.
황제께서 서엽을 마땅치 않게 여기시는 것은 알고 있었다. 워낙에 우직하고 말수도 적은 자라서 그 뜻을 헤아려주시지 않는 것일까. 북성과 닿지 않을 때, 제게 유일하게 안식을 주었던 이라는 것을 아시지 않나. 제가 얼마나 서엽을 믿고 의지하는지 전부 다 아시지 않나.
“그래. 네 말대로, 빈은 후에 따로 황후를 찾는 것이 좋겠다.”
“예. 하면 신첩은 그만 들어가겠습니다. 살펴 가십시오.”
황제께서 이토록 참아주시는 것을 감사히 여겨야 함이 옳다. 제아무리 섭섭한 마음 때문이라도 감히 황제께 언성을 높이고 먼저 돌아서다니. 발칙한 후궁이라고 경을 치셔도 할 말이 없는데, 끝까지 이리 참아주시다니. 이 얼마나 다정하고 사려 깊으신 처사던가.
피식, 조소를 뱉어내며 기하는 먼저 등을 돌렸다. 저벅저벅 걸어 나가는 등 뒤로 따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렇게 먼저 돌아선 주제에, 그가 잡아주기를 바라는 못된 마음을 어서 버려야 한다.
마음이 지친 탓인데, 그래서 무거운 탓인데. 차마 그것을 알아달라고 하기가 버겁다. 서럽고, 아프다. 마음은 늘 변하기 마련이라지. 시간이 지나면, 어찌 될지 모르는 것이 사람 마음이라지. 혹여 폐하께서 먼저 지치시면 어쩌나. 칼을 뽑아 들고 달려드는 아버지와 같다며, 언제 배신할지 모르는 후궁 따위는 곁에 둘 필요 없다고 내치시면 어쩌나.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서기하. 어쩌자고 그런 생각을 해.”
스스로 힐난하며 기하는 그대로 무릎을 굽혀 주저앉았다. 사방을 경계하고 서 있던 이들이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놀란 현 상궁이 호들갑을 떨며 기하를 부르자, 뒤따르는 궁녀들 또한 치맛자락을 움켜쥐고 뛰어온다.
울고 싶다. 마음이 물러져 그대로 흐물흐물 녹아버린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