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3장 악(惡) (34/49)

33장 악(惡)

환궁하는 내내 기하는 시무룩했다. 겨우 하루하고도 반나절, 오랜만에 마주한 형제와 회포를 풀기에는 지나치게 짧은 시간이었다.

그것은 서진하 또한 마찬가지였으니, 떠나야 할 시간을 앞에 둔 형제의 표정이 너무도 참담해서 누구 하나 섣불리 길을 재촉하자는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훗날을 기약하며 서진하는 몇 번이나 기하를 안심시켰다.

또한, 황제이기 전에 제 아우의 정인인 황제에게도 평소보다 오랜 시간 작별의 인사와 함께 몇 가지 다짐까지 받아내었다.

먼저 길을 떠나는 서진하와 흑마단을 바라보던 기하는 기어이 고개를 돌리며 먼저 말에 올랐다. 눈물이 나려는지 연신 하늘을 올려다보는 모습이 측은해서 황제는 몇 번이나 손을 내밀었지만, 의외로 고집이 센 그는 고개만 절레절레 저을 뿐이었다.

꼬박 반나절을 쉬지도 않고 달린 이들이 수도성에 당도했을 때는, 이미 해가 뉘엿뉘엿 질 즈음이었다. 사람들 눈을 피해 마차로 갈아탄 기하는 슬그머니 다시 수면 침을 보이는 황제에게 이유도 묻지 않고 선뜻 제 팔을 내밀었다.

모든 것에는 뜻이 있는 법이라는 말을 느리게 내뱉으며 기하가 완전히 잠들었을 때, 재빠른 마차가 가장 외진 곳에 있는 황궁 성문을 통과하기 시작했다.

무거운 몸을 겨우 뒤척이며 일어나려니, 타는 듯한 갈증이 느껴졌다. 몇 번이나 혀로 입술을 쓸어도 갈증은 해소되지 않았다. 목구멍이 찢어질 듯 아픈 것 같아, 고르지 못한 숨을 내쉬니 작은 소란이 이는 것이 느껴졌다. 천천히 숨을 내쉬던 기하는 눈을 뜨며 입술을 겨우 달싹였다.

“마마, 정신이 드시옵니까?”

꽤 오래 잔 것인지 허리가 뻐근했다. 그보다 놀라서 달려오는 얼굴에 당황함을 느끼는 것이 먼저였으나, 의식이 몽롱하여 미처 그럴 틈도 없었다. 몸이 무거웠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수면 침의 사용이 금지되었다고 들었는데, 인체에 해가 없다 하니 이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지 어째야 할지 도통 모르겠다.

“소인이 보이십니까?”

침소 안은 유난히 많은 사람으로 북적였다. 평소에는 다른 상궁 나인들을 침소 안까지 들이는 법이 없던 현 상궁이었기에, 기하는 제 침소에 이렇게 많은 이들이 있는 것을 처음 보았다.

“일단 목 좀 축이십시오.”

일어나는 것을 도우면서 현 상궁은 꽤 호들갑을 떨었다. 요즘은 아래로 부리는 사람이 많아 권위란 무엇인가를 몸소 보여주고 실천하는 그녀가 오랜만에 옛 모습을 보이는 것 같아서, 기하는 실소를 금치 못했다.

“태의 영감께서 내내 계시다가 잠깐 자리를 비우셨사옵니다.”

현 상궁이 내어주는 미지근한 꿀물을 마시니 조금 살 것 같았다. 같은 꿀물이라도 현 상궁이 타주는 것은 유난히 맛이 좋았다.

“폐하께서도 계속 곁에 계시었사온데, 잠시 급하게 볼 일이 있으시어 자리를 비우셨습니다. 금세 다시 오실 것입니다.”

얼마나 잔 것일까. 반나절? 아니면 하루? 유난히 머리가 무겁고 허리가 결리는 것을 보니, 어쩌면 그보다 더 오래 잔 것 같기도 한데.

“미음을 내오겠습니다. 시장하시지요?”

“정연군은?”

탁하게 가라앉은 음성은 제가 듣기에도 퍽 괴로웠다. 기하는 제 목소리가 꼭 까마귀 같다고 생각하며 자꾸만 감기려 드는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 올렸다. 저를 오롯이 바라보는 현 상궁 표정이 참으로 가관이었다. 온 힘을 다해 농을 늘어놓는 표정이 어찌나 천연덕스러운지, 정말로 제가 중병에 걸려 며칠 만에 깨어난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저하께선 동복궁에 계십니다. 폐하께서, 마마께서 깨어나시기 전까지는 모든 이의 출입을 금하셨습니다.”

“정연군이, 보고 싶은데.”

고물거리는 작은 손과 통통한 뺨, 보기만 해도 애틋해지는 마음이 더해지니 순식간에 간절함이 목구멍까지 솟아오르는 것만 같았다.

“예, 얼른 동복궁에 기별 넣겠습니다. 일단 이 탕제부터 드십시오. 마마께서 깨어나시면 가장 먼저 이것부터 드시라고 했습니다.”

쓴 약은 싫은데. 보기만 해도 쓰게 느껴지는 시커먼 액체를 보며 얼굴을 찡그리던 기하는 무언가 큰 결심이라도 한 듯 코를 틀어막고 그릇을 들었다. 이깟 약쯤이야 얼마든지 먹을 수 있다. 이것을 먹어야 비로소 정연군을 볼 수 있다면 더더욱.

“마마!”

탕약을 완전히 삼키기도 전에 침소 문이 벌컥 열렸다. 그 틈 사이로 후다닥 뛰어오는 어리지만 날쌘 몸뚱이를 바라보던 기하가 두 팔을 활짝 벌렸다.

“흐아아앙, 마마. 마마아!”

침소가 떠나가라 울기 시작하는 정연군을 품으로 끌어당겨 안으며, 기하는 편편한 황자의 등을 어루만졌다. 얼굴을 마주하자마자 서러운 눈물이라니, 그리 울지 말라고 말해도 쉬이 그칠 것 같지가 않다.

“황자.”

아이는 기하의 음성에 움찔 놀라며 눈물 가득한 눈을 깜박였다. 평소보다 훨씬 낮은 음색에 놀란 것인지, 아니면 제 모습 중 어디가 낯설기라도 한 것인지. 눈을 느리게 깜빡이는 황자의 뺨을 쓰다듬으며 빙긋이 웃자, 그제야 심각하게 굳어 있던 얼굴에 미소가 스친다.

“왜 자꾸 웁니까. 사내가 이리 울면 아니 된다고 했지요?”

“흐어어엉, 흑, 마마. 마마, 보고 시퍼써.”

유난히 혀 짧은소리를 내며 안겨드는 뜨거운 체온을 모른 척할 생각은 없었다. 내내 마음을 졸이며 기다렸을, 수척한 얼굴을 마주하니 더더욱 그랬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아이에게 큰 상처를 남긴 것은 아닌가 걱정되어 현 상궁을 바라보니,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머리를 저었다. 괜찮으니 신경 쓰지 말라는 뜻이었다.

그대로 두면 혼절이라도 할 듯 연신 우는 정연군을 겨우 달래며 아이에게 물을 먹이던 기하는 바깥에 무영군이 홀로 기다리고 있다는 현 상궁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무영군이?”

“예, 마마. 정연군 저하와 함께 여러 번 걸음 하셨습니다. 지금도 홀로 바깥에서 시간을 보내고 계십니다.”

“맞아! 현님이랑 같이 와써! 근데 현님은 부끄러우신가 봐. 내가 같이 들어가자고 했는데 괜찮다고 하셨어. 마마, 현님 들어오라고 하면 안 대요?”

“현 상궁, 어서 무영군을 모셔 오게.”

“예, 마마.”

살이 토실토실 오른 엉덩이로 기하의 무릎을 뭉개던 정연군이 활짝 웃었다. 아무리 꾸며낸 일이라지만, 저렇게 늘 무릎 위에 올라 앉아 계시는 정연군을 폐하께서 보시기라도 하면, 당장 경을 치실 텐데. 무영군을 찾아 바깥으로 나오면서도 현 상궁은 찜찜한 표정을 제대로 숨기지 못했다.

“언제까지 그리 계실 것입니까?”

부루퉁한 현 상궁의 목소리에 고개를 땅에 처박고 있던 승지가 애처롭게 눈을 깜박였다. 어찌 된 영문인지, 폐하의 곁에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호위를 해야 할 금룡대장이 줄곧 태화당 문을 지키고 앉아 있는 것을 이해하는 사람은 없었다.

“대장.”

“왈…, 왈왈.”

하물며 먼저 입을 열지 않고 묻는 말에는 계속 저런 개소리나 지껄이는 꼴이, 이 자가 혹여 길령에서 미친개한테 물려 광견병에 걸린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현 상궁은 의심의 눈초리로 승지를 힐끔거리며 옆으로 걸음을 옮겼다.

“소인은 바빠 먼저 갑니다.”

찬바람이 쌩쌩 부는 현 상궁의 치맛자락을 흘겨보며 승지는 혀를 깨물었다. 한마음 한뜻인 상전을 나란히 모시는 처지로 어찌 이리 야박하게 굴 수 있단 말인가! 아무래도 방법이 없다, 역시 무빈마마를 뵙는 수밖에는. 이 서글픈 운명을 스스로 개척해 낼 방도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침소 안엔 기묘한 정적이 맴돌았다. 현 상궁에게 거의 끌려오다시피 들어오기는 했으나, 멀찍이 떨어져 앉아 있는 무영군은 고개조차 제대로 들지 않았다. 안색이 그다지 나빠 보이지는 않았는데, 평소 냉랭하던 눈동자가 순하게 변한 모습을 보니 흐뭇함에 절로 웃음이 났다.

“무영군.”

“예?”

“어찌 그러고 있습니까. 조금 더 가까이 와서 다과를 들지 않고요.”

“괜찮습니다.”

양손에 떡을 쥐고 볼이 터지게 우물거리던 정연군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기하는 정연의 입가에 달콤한 감주를 대어주며 아이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아이가 줄곧 베고 앉은 다리가 저릿했으나, 그것을 내색하며 물리기에는 황자가 너무도 애정에 목말라 있었다.

“정연, 형님께도 떡을 나눠 주어야지요.”

“현님은 떡 안 좋아하는데. 그래서 내가 다 먹는 곤데.”

혹여 제 것을 빼앗길까 슬그머니 손을 뒤로 감추는 정연군의 뺨에 습관처럼 입을 맞추며 웃던 기하의 얼굴에 아차 하는 표정이 스쳤다. 순간 눈이 마주친 무영군의 시선 때문이었다.

고작 여덟 살밖에 되지 않은 아이의 눈이라기에는 지나치게 깊어, 이제 보니 황제 폐하의 어린 시절과 너무도 많이 닮은 모습에 가슴이 시큰했다. 아이의 눈과 가슴에 담겨 있던 적의는 씻은 듯 사라졌다. 흔적조차 찾을 수 없을 만치 깨끗한 두 눈엔, 그저 깊은 외로움과 쓸쓸함만이 가득했다.

“이제, 괜찮으십니까?”

“응?”

“병환이 깊으시다 하여, 모두가 걱정하였습니다.”

“아아, 그래요.”

어쩐지 난처한 듯 웃는 기하를 바라보며 무영군은 다시 머리를 숙였다. 필시 마주 앉아 있기 불편한 저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아이는 괜스레 무릎 위로 올려둔 손으로 옷깃을 그러쥐었다.

“한데, 무영군도 내 걱정을 하였습니까?”

빙긋이 미소하는 기하의 목소리는 더할 나위 없이 다정했다. 눈을 곱게 휘며 웃어주는 얼굴엔 어떠한 것도 담겨 있지 않았다. 제게 잘 보이려는 모습도, 눈에 띄지 않으려 발악하는 얼굴도 아니었다.

순간 무영군은 알 수 없는 안도감을 느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는데, 지나치게 마음이 느슨해졌다.

“정연이 수라도 들지 않고 내내 울었습니다.”

“아우의 걱정을 한 것입니까, 아니면 내 걱정을 했습니까?”

“그것은…….”

어린아이는 순수하다. 지나치게 조숙하여 노련하게 제 감정을 숨기는 데 익숙한 무영군은 허를 찔린 듯한 얼굴로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기하는 그것으로 되었다고 생각했다.

“무영군이 직접 태화당에 걸음 하였다니, 무척 기쁩니다. 그 마음, 고맙게 잘 새기겠습니다.”

“일전에…….”

급하게 말을 잇던 무영군의 표정이 일순 무거워졌다. 제 형님과 기하를 번갈아 바라보며 눈을 말똥말똥 뜨던 정연군은 배불리 떡을 먹어치우고 남은 감주를 호로록 마셨다. 혹여 저러다 또 탈이 날까 봐, 기하는 아이의 등을 다독이며 젖은 영견으로 직접 손을 닦아주었다.

“그간 소자의 무례함이 쉬이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나, 넓으신 마음으로 이해해 주신다면 다시는 그런 우(愚)를 범하지 않겠습니다.”

기하는 아이의 말보다는 그 속에 숨겨진 표정을 살폈다. 그리고 보았다. 이 작은 아이의 어깨에 얹어진 외로움의 조각을.

“마음은 강물과 같지 않아 한 번에 모든 것을 씻어내기란 어려울 것입니다.”

아이의 올곧은 눈이 기하를 향했다. 그것마저 황제와 퍽 닮아서, 기하는 저도 모르게 빙긋이 미소했다.

“지난날을 후회만 하는 것은 서로에게 아무런 득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조금씩 노력하다 보면, 분명 좋아질 테고요.”

“예.”

“그럼 이제 나와 함께, 노력해 보겠습니까?”

기꺼운 마음으로 그리해준다면, 조금만 서로 용기를 내본다면. 온전히는 아니더라도 조금쯤은 외롭지 않게 될지도 모른다. 서로가 서로에게 미약하게나마 힘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막 입술을 떼던 황자의 말문이 막혔다. 거친 소리를 내며 벌컥 열린 문 너머로 흉흉한 기세의 황제가 모습을 드러냈다.

황자들이 벌떡 일어나 예를 갖추려 했다. 물론 굼뜬 아이들의 움직임보다 황제가 조금 더 빨랐다. 그는 아들들의 인사도 제대로 받지 않고 성큼성큼 들어와 말없이 몸을 숙여 기하를 끌어안았다.

“폐하?”

얼떨떨한 얼굴로 황제에게 안긴 기하는 그의 고르지 못한 숨소리만을 오롯이 들었다. 가슴이 답답하다고 느껴질 만큼 깊이 끌어안고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손길이 익숙하면서도, 낯설다는 생각이 들었다. 황제는 분명, 지금 몹시 화가 나 있는 것만 같았다.

“폐…….”

“긴 싸움이 될 것이다. 쉽게 끝나지 않을지도 몰라.”

귓가를 울리는 황제의 목소리엔 사나운 분노가 일렁였다. 그렇게 안긴 채로, 기하는 가만히 손을 들어 황제의 등을 쓰다듬었다. 지금 이 순간, 제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작은 위로였다.

“너는 아무것도 하지 마라. 그냥 내 등 뒤에 있으면 돼.”

“하지만…….”

“쉿,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해.”

“폐하.”

“어서.”

기하는 겨우 마주 본 황제의 뺨을 가만히 쓸었다. 그는 어쩐지 꼭 울 것만 같은 표정이었다. 뭐가 그리 괴로우신지, 뭐가 그렇게 안타까우신지, 무엇 때문에 이토록 화가 나셨는지는 아직 알 수 없으나, 기하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모든 것은 당신의 뜻대로. 당신의 바람대로. 그것이 곧 나의 뜻이니, 애초에 제게 거부할 이유 따윈 없습니다.

* * *

“폐하, 이것은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역모를 일으킨 서연의 아들 서진하를 북왕에 명하시다니, 이는 전례에 없는 일입니다. 역모는 대역죄입니다. 구족(九族 : 고조, 증조, 조부, 부친, 자신, 아들, 손자, 증손, 현손까지의 동종(同宗) 친족을 통틀어 이름)을 멸하고, 서연은 물론 그를 따르는 백성 모두를 벌하셔야 마땅한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폐하! 지나친 관용은 오히려 폐해를 부릅니다. 그 간악한 자들은 폐하의 너그러움을 빌미 삼아 이 같은 죄를 또다시 저질렀습니다. 이는 반드시 척결하여 모든 이들의 본보기가 되어야 합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핏발을 세우며 머리를 조아리는 대신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황제는 나른한 숨을 내쉬며 앞에 놓인 교지를 바닥으로 휙 던졌다.

“죄를 지은 자는 벌에 처한다. 그것은 자명한 일이다. 하면, 제 목숨을 바쳐 충성을 다하는 신하에게는 어찌해야 하나.”

“서진하 또한 제 아비와 더불어 반역을 도모하였습니다.”

“그것을 어찌 그리 자신하지?”

“폐하께서 은밀히 보내신 사신의 목을 잘라 보낸 것은 서진하가 아닙니까?”

붉게 변한 얼굴로 소리치는 표기장군(驃騎將軍) 김혁선을 향해 황제가 미소했다.

“그 일은 짐이 사사로이 움직이며 극비에 부친 것인데, 그대는 어찌 그리 잘 알고 있나?”

크흠, 하는 헛기침으로 답을 대신하는 김혁선을 내려다보던 황제의 눈이 가느다랗게 변했다. 뱀 같은 놈 같으니.

“교활한 혓바닥을 요망하게 놀리면, 그 끝이 어찌 될지 내 직접 보여줘야 할까?”

“폐, 폐하.”

“그대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그것이 아닐 텐데?”

“폐하, 신은 모르는 일입니다. 신은 아무것도 모릅니다.”

“모른다? 무얼 말인가.”

“신은…, 그것이, 신은…….”

“짐의 사신(使臣)을 납치해 직접 목을 잘라 다시 돌려보낸 것을 말함인가? 아니면, 수년간 누군가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며 호시탐탐 짐의 사람들을 조정하려 한 것을 말함인가? 내 오늘, 그대의 뻔뻔한 낯짝을 오래 볼 용의가 있으니 어디 한 번 끝까지 들어보자.”

사시나무 떨듯 몸을 떠는 표기장군의 뒤로 금룡대의 그림자가 다가왔다. 순간적으로 위협을 느낀 김혁선은 눈을 번뜩이며 품 안에 항시 숨기고 있는 단검을 꺼내려 했다. 물론 그보다 훨씬 긴밀하게 움직인 금룡대에게 짓눌려 바닥을 처참하게 나뒹굴어야 했지만.

“대전(大殿)에 단검까지 숨기고 들어온 그대의 말을 내 어디까지 믿어 줄지는 의문이나―.”

황제의 해사한 미소에 김혁선은 바들바들 떨며 구원을 바라는 시선으로 다른 이들을 바라봤다. 늘 자신의 편이라고 아부 떨던 시어사(侍御史) 최영선부터 항상 제 뜻을 들어주던 승상(丞相) 민윤기까지, 모두가 그를 외면하며 고개를 돌렸다.

“새로운 북왕이자 짐의 하나뿐인 총비, 무빈의 형제 서진하에게 수도 경비군 1만 명을 보내, 모반을 꾀하는 서연을 척결하고 백성들을 보호한다. 또한, 황궁 내에서 긴밀하게 움직이는 쥐새끼 같은 간자들을 모두 잡아들일 것이니, 양심에 찔리는 자들이 있다면 미리미리 짐에게 와서 순순히 죄를 고하는 것이 좋을 거다. 지난 4년간 전장에서 하도 피를 보았더니, 이제는 사람 써는 것이 그리 유쾌하지가 않거든.”

황제의 용포가 펄럭였다. 반은 웃고, 반은 떠는 대신들을 향해 일말의 시선도 주지 않고 단 아래로 내려온 그는 일순간 얼굴의 미소를 지웠다.

“선황 폐하와 짐의 형님을 해(害)하고 모반을 꿈꾸던 자들의 잔당부터, 짐의 황권을 뒤흔들려는 발칙하고 사특한 무리를 처결한다.”

황제의 뜻을 따르는 충신들이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탐욕에 찌들어 잘잘못을 구분하지 못한 이들은 그저 온몸을 떨어댈 뿐이었다.

그들 모두 알고 있다. 이토록 해사한 미소를 지으시는 황제께서 얼마나 잔혹하게 전장을 뒤흔드셨는지를.

“준비하라.”

황제의 일갈에 금룡대가 소리도 없이 들어와 그를 에워쌌다.

“사냥을 시작한다.”

황제의 명이 떨어졌다. 피의 밤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황제와 마주 앉은 무영군은 어두운 그의 표정에도 겁먹은 표정을 짓지 않았다. 단정하게 앉아 허리를 반듯하게 펴고, 시선도 흔들리지 않았다. 자신과 지나치게 닮은 어린 아들을 바라보는 황제의 표정이 미묘하게 뒤틀렸다. 정에 굶주린 아이는 사나운 가시를 온몸에 세우고, 유혹하듯 흔드는 검은 손을 덥석 잡아버렸다. 차마 그런 아이를 혼낼 수는 없었다.

“아비의 자리가 탐이 나더냐.”

그제까지 잔잔한 표정으로 일관하던 아이가 놀란 얼굴을 들었다.

“말해 보아. 황좌가 탐이 났더냐.”

“아닙니다. 소자 어찌 감히 아바마마의 자리를 꿈꾸겠습니까.”

지나치게 저를 닮은 아이에게 온정을 베푼 기억은 없다. 머리 한 번 쓸어준 적 없고,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넨 적 없다.

어느 날 불쑥 나타난 아이가 낯선 탓도 있었다. 언제 어떻게 취했는지 제대로 기억조차 나지 않은 미천한 신분의 여인에게서 얻은 아들은 지나치게 정에 굶주려 이리 같은 눈을 빛냈다. 그것이 싫었다. 아들에게 오롯이 애정을 퍼부어줄 수 없는 자신의 삶이 싫었다.

“무영.”

“예, 아바마마.”

“네가 영빈을 친어미보다 애틋하게 따르는 것을 안다.”

“영빈께서 소자를 친자식처럼 아껴주셨습니다.”

부정한 마음을 심어주었더라도 그것은 황제가 할 말이 아니었다. 황제의 장자로 태어났으나,지지 기반이 약한 무영군에게 관심을 두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응당 애정을 주어야 할 어미는 심신이 미약해 아이를 품에 한 번 안아주지도 않았고, 자신 또한 전장을 누비며 시간을 보낸 탓에 아이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관심을 두지 못했다. 아이를 채근할 자격이 없음을 황제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영빈께서 큰 잘못을 하신 것입니까?”

아이는 지나치게 영민했다.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으셨습니까?”

또박또박 말을 이으면서도, 쉽게 제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황제는 그것에 깊은 연민을 느꼈다. 황자 나이, 이제 겨우 여덟 살이다.

“혹, 몰라서 그러신 것은 아니었을까요. 그것이 나쁜 일임을 모르고, 그러시지는 않으셨을까요.”

“그의 손에 수많은 궁인이 죽임을 당했다.”

“…그것은…….”

“정연의 어미 또한, 그 때문에 죽었어.”

놀라 커진 눈이 불안정하게 흔들렸으나, 황제는 멈출 생각이 없었다. 아이의 상처를 드러내놓고 걱정하기엔, 간악한 무리가 지은 죄가 실로 컸다. 그리고 그 꼭대기에 앉아 있는 흑막의 정체를 알게 된 지금, 더 큰일이 벌어지기 전에 싹을 잘라야 했다.

“모반(謀反)의 증거가 있다.”

황자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덜덜 떨었다. 그 죄가 너무도 크고 무거워, 어린 제 머리로 이해하기에는 어려웠으나, 쉽게 용서되지 못하리라는 것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하지만, 영빈께서는… 아바마마를 사모하십니다. 오직 아바마마의 총애만을 바라십니다. 소자 또한 그랬습니다. 소자 또한 아바마마의 정이 그리워 아우를 미워했습니다. 그렇게라도 하면 아바마마께서 소자에게 관심을 두실 것만 같아, 어리석은 마음에 그랬습니다. 혹여, 혹여 영빈께서도…….”

“시온.”

황제의 음성은 차디찼다. 그러나 황자는 붉게 변한 눈을 들며 미소했다. 시온(施溫). 따뜻한 마음을 베풀라는 그 이름이 불린 것은, 처음이었다. 이름을 받고 단 한 번도 불리지 못했었다.

“예, 아바마마.”

“아비가 미안하다.”

“아바마마…….”

“너의 잘못을 알면서도 바로잡지 않은 점. 너를 홀로 두어 간악한 무리가 네게 검은 물을 들이는 것을 묵과하였던 점. 하나뿐인 장자를 홀대하며 제대로 한 번 안아주지 않은 점.”

아이의 두 눈 가득 눈물이 차올랐다. 당장에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 같은 커다란 눈이 흔들리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황제는 아들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한참 동안 그 손을 바라보던 무영군이 무릎으로 기어 황제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다. 이번에는 황제가 먼저였다. 어린 아들의 어깨를 다독이던 손이 힘 있게 아이를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너는 잘못되지 않았다. 그저 잠시, 나쁜 물에 들었을 뿐이야.”

황제의 가슴이 젖어들었다. 소리도 내지 못하고 눈물을 뚝뚝 흘리는 어린 아들의 등을 다정하게 쓸어주며, 황제는 몇 번이나 침음(沈吟 : 근심에 잠겨 신음하다)했다.

“그러니 상처받지 마라. 아파하지 마라.”

“흑, 흐윽…….”

아비가 잘못했다. 아비가 어리석었다. 가슴이 온기로 물드니, 그것을 이제 겨우 깨달았다.

“너는 혼자가 아니다, 시온. 네게는 아비도 있고, 어미도 있고, 아우도 있지 않으냐.”

그러니 그리 겁먹을 것 없다. 또다시 혼자가 되었다는 생각은 하지 않아도 된다. 애정을 퍼부었던 이가 홀연히 네 곁을 떠나는 것은 앞으로 네가 살아가며 견뎌야 할 것 중 하나일 뿐이라고 생각해.

“아바……, 흑. 소자, 소자는…….”

“아비는 너를 믿는다. 그러니, 이제 그만 눈물을 거둬.”

처음 안겨보는 아버지의 품은 지나치게 따뜻했다. 두려움과 서러움이 뒤범벅된 가슴을, 내내 짓누르는 무거움을 잊어버릴 정도로 아이는 울고 또 울었다. 서럽게 울며 아비의 옷깃을 붙잡은 손을 뗄 줄 몰랐다. 그제야 제 나이로 보이는 어린 아들을 다독이며 황제는 무거운 한숨을 거짓말처럼 삼켰다.

* * *

황제의 사병이 태화당을 에워쌌다. 금룡대의 절반은 태화당의 가장 깊은 곳, 기하의 침소 주위에 배치되었다. 명이 있을 때까지는 그 누구도 발을 들이지 말라는 황제의 명령에 가장 먼저 불만을 터트린 것은 다름 아닌 기하였다. 불편한 것이야 참을 수 있었으나, 아직 어린 황자가 겁을 먹는다는 이유였다.

또한 황실에는 보호받아야 할 이들이 넘쳤다. 존귀하신 황후부터 이번 일과 관련 없는 후궁들, 연진 공주를 비롯한 수많은 궁인들은 나약한 여인들이었다. 그런 그들을 뒤로하고 어찌 제가 황제의 그림자에게 비호를 받을 수 있단 말인가.

“거, 좀. 문을 그렇게 딱 막고 있으면 너무 불편하지 않습니까.”

서엽의 핀잔에도 임승지는 꿈쩍하지 않았다. 기하가 불만을 토로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그 누구도 아닌 금룡대의 수장이 어찌 이곳에 있단 말인가.

“좀 비켜 보십시오.”

그것도 종일, 입도 제대로 열지 않고 말이다. 말이 많기로 황궁 내 으뜸가는 임승지다. 그런 그는 서엽의 말을 들은 체도 하지 않고 가슴 위로 팔짱을 낀 채 줄곧 딴청만 했다. 현 상궁의 말로는 바깥에서 애처롭게 개소리를 내며 짖었다던데, 혹여 술에 취해 정신이 나간 것은 아닌가 걱정하였으나 의외로 얼굴은 멀쩡해 보였다.

“마마, 밖에 나가고 시퍼요.”

기하의 옷자락을 붙든 정연군은 연신 보채는 중이었다. 침소 안에 출입할 수 있는 이는 서엽과 임승지, 현 상궁뿐이었고, 평소 늘 입에 달고 살던 주전부리도 없어서인지 정연은 종일 우는 소리를 냈다.

“복숭아 먹고 시푼데.”

통통한 뺨을 잔뜩 부풀리는 황자의 철없음을 타박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저 황자를 안쓰럽게 여기거나 어여쁘게 바라보며 다정하게 달랠 뿐이었다.

“수라 든 지 얼마나 되었다고 또 먹는 타령이냐? 자꾸 먹으면 더 뚱뚱해진다고 하지 않았어?”

서책을 넘기다 말고 톡 쏘아붙이는 무영군의 목소리에 정연군이 발끈했다.

“아닙니다! 마마가 나 이제 조금만 뚠뚠하다고 했습니다? 현님은 아무것도 모르시면서.”

“무빈마마 그만 귀찮게 하고, 이쪽으로 와서 책이라도 봐라.”

“…글씨 다 모릅니다. 그리고 현님이 보시는 책은 재미가 없는데요? 무슨 말인지 모르는데.”

“가르쳐줄 테니 이리 와. 네가 자꾸 귀찮게 하면 마마께서 힘드시다.”

“마마는 내가 좋아서 안 힘들다고 했는데? 그렇죠?”

방긋 웃는 정연군의 머리를 다정하게 쓸어주던 기하의 손이 멈췄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무영군의 표정에 묻어나는 쓸쓸함을 차마 그대로 두고만 볼 수 없는 탓이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다시 서책으로 머리를 돌리는 무영군을 보며, 기하는 어떤 말도 쉬이 건넬 수 없었다.

“피이, 현님은 책만 보시고. 마마, 나가서 놀고 싶습니다.”

“그럼 잠깐 요 앞에서 바람만 쐴까?”

“와아! 예!”

“송구합니다만, 마마. 폐하께서 가능하시다면 침소 밖으로는 나오지 마시라고 하시었지 않습니까.”

“내가 답답하여 그래. 주위에 이렇게 든든한 이들이 천진데 위험할 일이 뭐가 있겠나. 대신에, 황자. 절대로 손을 놓으면 아니 됩니다?”

“예!”

씩씩하게 대답하는 정연군을 흐뭇하게 웃으며 바라보던 기하가 시선을 돌렸다.

“무영군.”

“예, 마마.”

“뭘 하고 있습니까? 같이 나가야지요.”

“아…, 소자는 그냥 여기…….”

“홀로 있으면 위험합니다. 어서 일어나세요.”

책장을 넘기던 손끝이 진작 둔해졌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홀로 멀찌감치 떨어져 앉아 우두커니 서책만 들여다보는 무영군에게 좀체 말 걸 기회가 없었던 탓에, 지금이 아니면 또 금세 어색해질 것이라 본능적으로 느낀 기하는 황자를 향해 바투 다가섰다.

“어서요.”

저도 모르게 불쑥 내민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아이의 얼굴이 금세 붉어졌다.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고 눈만 깜박이는 모습은, 보면 볼수록 황제의 어린 시절을 보는 것 같았다. 물론 제가 처음 보았던 황제의 모습은 무영군보다 조금 더 자란 후였지만.

“…아바마마께서, 마마의 곁에서 떨어지면 안 된다고 하셨긴 한데…….”

“현님! 빨리 손잡아요! 얼른 나가요!”

발을 동동 구르며 성화하는 정연군 때문인지, 어느새 영이까지 신이 나서 주위를 뱅뱅 돌기 시작했다. 고요하던 처소가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그제야 슬그머니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무영군을 향해 기하는 손을 더 내밀었다. 이미 오른손엔 정연군의 작은 손을 쥔 채였다.

“멀리 떨어지지 않는 게 좋겠지요?”

더는 아이의 마음을 시험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조금씩 노력하기로 하였으니 어른인 자신이 먼저 나서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는 생각뿐이었다.

“현니임.”

물끄러미 기하의 손을 바라보던 무영군이 슬그머니 손을 마주 잡았다. 정연군보다는 조금 더 크지만, 아직 한참 작은 손은 생각보다 따뜻했고 부드러웠다.

“소장이 앞장서겠습니다.”

서엽이 먼저 문을 열었다. 아이들의 손을 잡은 기하가 침소 바깥으로 모습을 드러내자, 대기하고 있던 금룡대는 답답하지 않을 정도로 그들을 에워쌌다.

“바깥이 조금은 소란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미처 발을 내딛기도 전, 태화당 앞마당을 가득 메운 인파에 기하는 잠시 걸음을 멈췄다. 황실을 지키는 보병들이 창과 방패로 무장한 채 태화당을 등지고 서 있었고, 그들 앞엔 겁에 질린 사람들이 초조한 얼굴로 마당 안쪽을 기웃거렸다.

“마마시다! 무빈마마시다!”

“무영군 저하! 저하시다!”

“저하! 저하, 저 좀 보십시오! 저하!”

“마마! 마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마마!”

순식간에 몰려드는 인파에 침묵하던 군사들이 창을 바짝 세웠다.

“황궁에 피바람이 인다더니, 이 와중에 마마께 청탁을 넣으려는 자들인가 봅니다.”

“마마, 무섭습니다.”

답지 않게 혀까지 끌끌 차는 서엽의 말을 한 귀로 흘려들으며, 기하는 그들을 향해 등을 돌렸다. 무섭다며 자꾸만 제게 달려드는 정연군을 번쩍 안자, 자연히 무영군의 손이 멀어졌다.

“후원으로 가자. 그곳은 조금 조용할 거야.”

홀로 서 있는 무영군의 손을 다시 힘 있게 붙잡으며 기하는 미소했다. 지금 이 순간, 이 자리에서 가장 마음이 무거울 이는 바로 이 아이일 테니.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손을 잡아주는 것뿐이지만, 말해주고 싶었다. 이제 너는, 더는 혼자가 아니라고.

고요히 눈을 감은 영빈은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앉아있었다.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는 바른 몸가짐은 파리하게 질린 얼굴빛과 어우러져 절로 처연함을 자아냈다.

수발들던 상궁 나인들은 갑자기 들이닥친 금룡대에게 남김없이 끌려갔고, 영빈은 그 후 연호당 가장 깊은 방에 유폐(幽閉)되었다. 종일 물 한 모금 넘기지 못하고 시간을 보내는 동안, 처소 바깥에선 악귀가 흐느끼는 듯한 비명이 이어졌다.

탕.

어둠에 잠식되어 가던 영빈의 의식을 일깨운 것은 한 줌의 빛이었다. 문이 열리고 햇빛이 들이치자 고요히 눈을 감고 앉아 있던 그는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나를 구원해 줄 빛, 내게 단 하나의 빛. 빙긋이 미소하는 영빈을 바라보는 서늘한 얼굴은 차갑고 매서웠으며 분노와 힐난을 담고 있었다.

“폐하.”

늘 화려함으로 치장하던 사내의 파리한 모습에도 황제는 미소 한 번 짓지 않았다. 묻고 싶은 것이 너무도 많았으나, 혀가 굳어버린 듯 입을 열기가 쉽지 않았다. 애초에 영빈에게 마음을 내어준 적은 없으나, 그가 벌인 일들이 낱낱이 세상에 드러나니 차디찬 소름에 진절머리가 나려 했다.

“신첩은 억울합니다. 어찌 신첩을 이리 박대하십니까? 신첩은 누명을 쓴 것입니다. 믿어 주세요.”

“네 너를, 너의 방자함을 용인했던 것은 적어도 네가 스스로 본분을 지킬 줄 아는 자라 여겼기 때문이다.”

긴 시간이었다. 연정은 아니었으나, 수많은 후궁 중 가장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낸 자이기도 했다. 어린 무영군을 제 자식처럼 돌보는 그를 보고 어쩌면 안심했는지도 모른다.

가벼운 술수를 쓰는 것은 황실에 머무는 여인들의 작은 항변이기도 했다. 그것이 옳은 일은 아니었으나, 차마 그 정도로 지독한 자는 아니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묵과했던 것이다. 알면서도 넘어가 주고, 모르는 척 외면했었다.

“무영을 조종해서 네가 얻으려던 것이 무엇이냐.”

“어찌, 그리 말씀하십니까? 조종이라니요? 신첩은 무영군을 제 자식처럼 여겼습니다!”

“누가 제 자식을 사지로 밀어내며 독한 기운을 심는단 말이냐? 그 누가! 제 자식의 목숨을 손에 쥐고 흔들려 해?”

바르르 떨리는 입술을 짓이기며 영빈은 초조하게 손톱을 물어뜯었다. 어디까지 알고 계신 것일까. 확실한 증좌는 모두 없앴다.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모두 죽였고, 남은 이들은 죽을 때까지 입을 열지 않을 자들이다.

“신첩은 억울합니다. 이것은 필시, 신첩과 무영군 사이를 이간질하는 간악한 무리가 꾸민 일입니다. 폐하, 폐하께서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신첩이 얼마나 무영군을 아끼는지, 무영이 신첩을 친어미보다 더 따른다는 것을…….”

“그래서 양 귀인이 무영을 낳자마자 독을 먹이기 시작했더냐. 양 귀인의 혜안을 흐리게 하면, 네가 무영의 친어미가 될 줄 알았어? 아이를 앞세워 네가 얻으려 한 것이 무엇이냐.”

어미 품에 제대로 한 번 안겨보지 못한 아이는 늘 외로움에 굶주렸다. 제 눈에 들기 위해, 가련한 두려움을 벗어나기 위해 그것이 가시인 줄 알면서도 덥석 붙잡아 피범벅이 된 손을 흔들던 어린 아들을 떠올리며 황제는 짧게 신음했다.

“양 귀인은 왜 살려 두었느냐. 정연의 어미처럼 시름시름 앓다 죽게 하면 꼬리가 밟힐까 봐 그런 것이냐? 대체 어디까지 손을 쓸 생각이었느냐. 무빈과 황후까지 손대려 했더냐?”

“죽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엄 재인은 네 독 때문에 죽었어. 자칫했으면 정연군 또한 세상 빛조차 못 볼 뻔하였다.”

“어차피 상관없지 않습니까? 페하께는 이미 무영군이 있습니다. 심약하여 제 어미 품에서 떨어지지도 않는 둘째 황자는 차치하더라도, 장자이신 무영군께 눈길 한 번 주지 않으신 폐하이십니다. 어차피 모자란 그 아이, 폐하께서 바라신 적도 없으시지 않습니까? 그러니 그 많은 후궁에게 매일 직접 약을 내리셨겠지요!”

악다구니를 지르며 거친 숨을 내쉬는 영빈의 눈에 서슬 퍼런 독기가 가득했다. 황제는 짧게 탄식하며 이를 악물었다.

“그 일은, 네가 상관할 바 아니야.”

“폐하께서 총애하시는 무빈이 어찌 되기라도 할까 그리 걱정이십니까? 폐하의 뒤를 이어 황좌에 오를 황후마마의 아기씨가 그리 걱정되십니까? 무빈이 그때, 죽을 뻔하였던 일이 모두 폐하 때문이라면 그 자, 과연 지금처럼 웃으며 폐하께 안길까요?”

“얕은수 쓰지 마라. 짐은 무빈에게 독을 내린 적 없다. 그 약을 바꿔치기한 것이 누구인지, 짐이 모를 것 같으냐?”

“예, 물론 잘 아시겠지요. 하지만 폐하, 믿음은 한 번 금이 가면 쉽게 부서지는 거랍니다. 어찌 되었든, 냉정하신 폐하께서 후궁들에게 그런 일을 벌이신 것을 무빈과 황후께서도 알고 계십니까?”

황제는 몸을 낮췄다. 한쪽 무릎을 세우고 앉아 영빈을 마주한 그의 두 눈에는 지독한 환멸이 담겨 있었다. 가슴이 지끈거려 제대로 숨을 쉴 수가 없다고 영빈은 생각했다. 오롯한 분노, 치가 떨리는 배신감, 환멸, 그 모든 것이 뒤범벅된 눈빛에 심장이 그대로 멈출 것만 같았다.

“네 머리 위에서, 너를 조종하는 자가 그리 말하라 시키더냐? 죽음이 임박하면 내게 잘못을 빌기보다 나의 정인 가슴에 못을 박으라 그리 말하더냐?”

“어찌 폐하께서는 그리 무정하십니까.”

태어나는 순간부터 그의 사람이 되기 위해 길러졌다. 누가 될지도 몰랐고, 얼굴이나 이름은 더더욱 알 수 없었던 그를 처음 본 순간 한눈에 반하였다. 그 누구보다 찬란하게 빛나는 그를, 차마 한 번도 다정하게 이름을 부를 수 없었던 그를.

그를 가질 수만 있다면, 아무것도 필요 없었다. 부귀도, 권세도, 깨끗한 양심 또한. 언젠가 내쳐질 것을 알면서도, 언젠가 제 죄가 세상에 드러난다면 그대로 죽임을 당할 것을 알면서도. 단 한 번도 애정 어린 마음으로 저를 보듬어준 적 없는 사내의 품에 안기면서 얼마나 행복했던가.

“신첩이 폐하와 뭐가 다릅니까? 원하는 것을 얻고자 하여 다른 이의 희생을 강요하는 것이 뭐가 그리 나쁩니까? 무영은 하나뿐인 폐하의 장자입니다. 폐하를 닮은 아이가 폐하의 뒤를 이어 황상의 자리에 오르는 것이 어찌 나쁜 일이라 하십니까? 폐하의 마음을 나눠 가지기 싫어, 그저 폐하의 연정을 바란 것이 신첩의 죄입니까? 그렇다면 폐하께서도 죄인이십니다! 어찌 신첩의 탓만 하십니까?”

“지금이라도 용서를 빌어.”

용서하고 싶지 않다. 용서해서는 아니 된다. 그러나 그것이 긴 시간 동안 무영군을 따뜻하게 보듬어 준 그에 대한 보답이라면…….

“먼저 떠난 엄 재인에게 빌고, 네가 사사로이 죽인 수많은 궁인에게 빌고, 너 때문에 머잖아 세상을 떠나게 될 양 귀인에게도 빌어라. 너의 욕심으로 어미를 잃은 정연에게 빌어라. 자칫, 세상을 검은 물에 들어 살 뻔하였던 무영에게 빌어라. 너로 인해 죽을 뻔했으나, 너를 살려 달라 청한 무빈에게 빌어라. 죄를 씻고 마음을 다스려. 평생 죽은 듯이 살아라. 그리한다면, 목숨만은 살려주마.”

“차라리 신첩더러 자진하라 하십시오.”

죽이지 못해 후회되는 이가 딱 하나 있었다. 늘 꿈꾸었던 정인의 마음을 오롯이 빼앗아간 악귀 같은 사내.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 무지렁이 같은 자가, 찬란하게 빛나는 정인의 애정을 받으며 행복하게 웃는 모습을 어찌 잊을 수 있더냐.

그것은 내 것이었다. 나의 평생 꿈이었고, 소망이었으며, 바라던 일상이었다. 모든 것을 내걸어도 아깝지 않을, 단 하나의 연정이었다.

“길거리 비렁뱅이에게 무릎 꿇고 빌라면 빌 수 있습니다. 무빈이요? 신첩이 왜 그자에게 잘못을 빌어야 합니까? 그자가 뭔데! 어째서 그자에게 용서를 구하란 말입니까! 애초에 내 것을 빼앗아간 것은 그자인데!”

나의 모든 것을 빼앗고, 나를 구렁텅이로 밀어 넣은 것은 그자입니다. 차라리 어여쁜 여인이었더라면, 폐하를 닮은 아이를 낳아주고, 한평생 폐하의 곁에서 만백성의 존경을 받으며 살아갈 고운 여인이었더라면 혹여 이 마음이 허물어졌을지도 모릅니다. 어째서 그는 되고, 신첩은 아니 됩니까. 어째서 그는 폐하의 마음을 차지한 것입니까. 어째서 신첩은 아닙니까? 어째서요. 어째서요.

“짐은 너를 용서하고 싶지 않아.”

“신첩 또한, 폐하를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

뚝뚝 떨어지는 눈물이 영빈의 뺨을 적셨다. 눈을 깜박이지 않고 오롯이 황제를 바라보는 그 눈엔 서글픔만이 가득했다.

“아무리 황제 폐하라 하시어도, 신첩의 마음을 이렇게 조각낼 수는 없습니다.”

바란 것은 단 하나였으니, 그 마음을 거두어 가시려거든 숨을 끊으세요. 폐하와 그가 행복한 모습 같은 건 보고 싶지 않으니, 차라리 그냥 죽이세요.

“하나만 묻겠다.”

“…….”

울지 않을 것이다. 혹여 이것이, 그에게 보일 마지막 모습이라면 가장 어여쁜 모습으로, 가장 애틋한 모습으로, 추억 한 귀퉁이에 곱게 남을 모습으로 남겨지고 싶다.

“네 머리 꼭대기에 올라 너를 조종한 자가, 북성의 서연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느냐.”

“…그, 무슨…….”

“후궁들에게 먹일 독을 네게 주고, 짐의 처소와 너의 전각 곳곳에 짐에게 해로운 수면 향을 피우게 한 것이 서연이라는 것을 네 진정 모르고 있었더냐.”

“말도 안 됩니다. 아닙니다. 아니에요. 그것은 단지 폐하의 심신을 맑게 해주는 것으로 그저, 그저 잠시 환각이 보이는 것은 정을 토하면 무해하다고 했습니다. 아닙니다. 신첩이 어찌, 어찌 폐하를 해하려 하였겠습니까. 신첩은 아닙니다. 그것만은 믿어 주세요. 서연은 모릅니다. 서연은 알지 못합니다. 어찌, 더러운 북성의 왕과 손을 잡았다 하십니까!”

온몸을 덜덜 떨며 고개를 젓는 영빈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황제가 몸을 일으켰다. 금세 제 옷자락을 붙들고 눈물 가득한 얼굴을 들어 올린 영빈이 작게 흐느꼈다.

“폐하, 폐하.”

황제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네게 손을 내밀면 의심조차 하지 않고 네 편이라 생각하는 너의 무지함이, 결국 너를 망쳤구나.”

그대로 바닥에 엎드린 영빈이 끅끅거리는 신음을 삼키며 울부짖었다. 곱게 자른 손톱으로 나무 바닥을 세차게 긁어대자, 금세 피가 송골송골 맺혔다. 영빈은 그저 도리질 쳤다. 그제야 두려움이 화마처럼 덮쳐 제 몸을 갉아먹는 것 같았다.

“반역을 도모한 서연의 사주를 받아 짐을 능멸하고, 황자와 후궁들에게 위해를 가한 영빈을 당장 추국장으로 끌고 가 죄를 자백하게 하라. 이 일에 연루된 모든 이들의 죄목을 명명백백 밝힌다.”

곳곳에 숨어 있던 황제의 그림자가 긴밀하게 움직였다. 검은 복면을 쓰고 소리도 없이 나타난 금룡대를 피해 뒤로 물러나던 영빈이 양쪽 팔을 붙잡히자 악다구니를 지르며 발버둥 쳤다.

“이것 놔라, 이놈들아! 감히 어디에 손을 대는 것이냐? 놔! 놓으란 말이다! 폐하, 신첩은 억울합니다. 역모라니요, 모반이라니요! 신첩은 아무것도 모릅니다. 신첩은 그저 폐하만을 위해 살았습니다!”

억울하다 소리치는 영빈의 입은 황제의 손짓 하나에 그대로 틀어 막혔다. 사지를 짓누르는 금룡대의 거친 손길에 이성을 잃고 날뛰던 그는 추락하는 나비처럼 허물어졌다.

황제는 어느 것 하나 놓치지 않고 무감각한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마음이 무거웠다. 그에게 벌을 내린다고 하더라도 상처는 쉬이 아물지 않을 것이다. 남겨진 이들은 벌어진 상처를 상기하며 이따금 방황할지도 모른다.

“가장 깨끗한 방을 내어주고, 고신(拷訊 : 고문)은 정신을 차린 후에 하겠다. 그리 옮겨.”

“예, 폐하.”

발소리도 나지 않게 몸을 움직이는 황제의 그림자가 사라졌다. 지독한 피로감에 머리를 지그시 누르던 황제가 잠시 비틀거렸다.

황궁 안은 피비린내로 가득했다. 영빈에게 닿아 악행을 저지르는 자의 수는 생각보다 많았다. 대부분 쉽게 죄를 실토하였으나, 그렇지 않은 자들의 교활한 협상안에 금룡대는 고신의 강도를 높여야 했다. 행하는 자와 당하는 자, 모두에게 끔찍한 시간이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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