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2장 행복해져라 (33/49)

32장 행복해져라

오랜만에 단꿈을 꾼 것 같다. 온몸에 푹 감겨 있던 수마를 떨쳐내려 몸을 뒤척이다가, 이제는 익숙하게 자신의 옆에 자리한 체온에 웃으며 눈을 떴다.

유난히 잠이 많아, 겨우 눈을 뜨고 일어나면 언제나 옆자리는 텅 비어 있었다. 밤새 다정하게 안아주시고 함께 잠드시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막상 아침이 되었을 때 혼자라는 것을 깨달으면 마음이 금세 우울해지곤 했다.

물론 현 상궁은 기하가 너무 늦게 일어나는 것이 문제라며, 내일은 꼭 일찍 일어나 황제와 함께 초조반을 드시는 것이 좋겠다는 조언을 거의 날마다 했다. 기하에게는 너무도 어려운 일임을 알면서도.

“폐하.”

반쯤 잠긴 음성이 거칠게 튀어나왔다. 날이 환했다. 이렇게 해가 쨍쨍하게 떠 있는 시각에 제 곁을 지켜주는 황제의 모습은 무척 드문 일이었다.

“잘 잤느냐?”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며 부지런히 손을 움직였다. 혹여 자다가 침을 흘리지는 않았는지, 밤톨만 한 눈곱은 끼지 않았는지, 배를 뒤집고 발길질을 하지 않았는지.

“그래, 잘 자더구나.”

“언제 일어나셨습니까?”

“한 시진쯤 되었다.”

“깨우시지요…….”

기어들어 가는 음성으로 중얼거리며 몸을 일으키려는 기하의 손목을 붙잡은 황제는 그를 품으로 잡아당겼다. 익숙하게 안겨드는 몸짓이 못내 애틋해서 동그란 머리통을 쓰다듬어 주니, 자잘한 웃음이 터져 나온다.

“깨운다고 쉽게 일어나면 서기하가 아니지.”

“그것이…….”

“그나마 요즘엔 발길질은 하지 않으니 짐 또한 곤히 잔다.”

민망함에 달아오른 뺨을 어루만지다 입을 맞추자, 손등을 그러쥐는 체온이 따뜻하다.

“어서 일어나 채비하고 조반 들어야지.”

“예.”

“남은 일정은 창현(昌賢)군과 흑마단도 함께할 것이다.”

“정말입니까?”

놀란 얼굴로 벌떡 일어나는 기하의 표정이 어찌나 삽시간에 밝아지던지, 그 모습이 귀여우면서도 은근히 부아가 치민 황제는 그의 이마를 손끝으로 가볍게 튕겼다.

“짐이 언제 네게 실없는 말을 하더냐?”

“폐하.”

뭘 또 그리 감동에 젖은 눈으로 바라보는지. 덥석 품에 안겨오는 발칙함이 귀여워 등을 다독이니, 더더욱 친근하게 달라붙는 기하에게서 은은한 체향이 났다.

막 침상에서 일어난 탓에 열이 오른 말랑말랑한 살이 맞대어지니, 꽁꽁 감춰두었던 음험한 마음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생각해 보니 벌써 며칠간 제대로 살을 맞댄 일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황제가 씨익 웃었다.

“기하야.”

어차피 옷고름은 반쯤 풀어 헤쳐져 있고, 기왕 늦은 거 조금 늦는다고 해서 감히 불만을 입에 올릴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폐하, 저기…….”

슬그머니 뒤로 물러나는 기하의 난처한 표정에 황제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정녕 지금 뒤로 물러난 이가 서기하가 맞단 말인가?

순한 곰처럼, 또 이따금 영악한 여우처럼 시시각각 변하는 게 그의 특기라고는 해도, 제 손길을 이렇게 밀어낸 적은 없었다. 부끄러움이 많았지만, 저도 사내인지라 색(色)을 마다하지는 않았다. 아무렴, 사내 마음은 다 똑같다며 먼저 달려든 밤도 있지 않은가.

“날이 밝아 부끄러우냐?”

“아니요. 그런 것이 아니오라…….”

눈길을 피하면서도 옷고름을 어설프게 묶는 손을 붙잡자 배시시 웃는 얼굴에 민망함이 담겨 있었다. 그래, 민망한 걸 알면서도 그리 움직이겠다는 것이지?

“형님께서도 기다리고 계실 것이고…….”

“먼저 조반 들라 일렀다.”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아니라?”

“그…, 아무리 신첩이 폐하의 후궁인 것을 모두 알고는 있으나…….”

생전 말을 빙빙 돌려본 적이 없으니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그 모습이 귀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괘씸하기 이를 데 없어, 황제는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기하를 말없이 내려다봤다.

“폐하…….”

“그러니까 네 말은―.”

매끈한 턱을 매만지는 황제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기던 기하는, 덥석 제 팔을 붙잡은 그의 손길에 화들짝 놀라며 몸을 뒤로 뺐다.

“짐이 너를 만지는 것이 싫다는 뜻이렷다?”

“아니, 그런 것이 아니오라…….”

“알았다.”

“폐하, 신첩은…….”

“네 뜻은 잘 알았으니, 일단 나가자. 네 말대로 다들 기다리겠다.”

다급하게 자신의 옷깃을 붙잡는 기하의 손을 밀어낸 황제가 무감각한 표정을 지었다. 아차 하는 듯한 후회의 빛을 내는 기하의 얼굴을 바라보면서도, 황제는 그 표정을 거두지 않았다.

“언짢으십니까? 신첩은 그런 뜻이 아니라…….”

“뭘 하고 있어? 어서 내려가자는데.”

그제야 주섬주섬 일어나 뒤를 돌아서 옷을 갈아입는 기하의 모습에, 황제는 막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애써 참았다. 감히 제 손길을 거부한 정인에게 뿔이 났으니, 실컷 놀려주려는 생각이었다.

“폐하…….”

뭔가 큰 실수를 한 것 같은데, 설마 화나신 건가? 손길 한 번 밀어냈다고? 그건 형님께서 기다리고 계셔서인데, 설마. 설마 아니시겠지?

기하는 불안하고 찝찝한 마음을 다잡으며 머리를 절레절레 젓다가 서두르라는 황제의 채근에 서툰 손으로 옷의 매듭을 묶었다. 엉성하게 묶인 매듭을 보며 황제가 가볍게 혀를 찼다.

“손을 안 타는 곳이 없구나.”

타박하면서도 손길은 지나치게 따뜻했다. 매듭을 다시 푸는 황제의 손길에 기하는 저도 모르게 빙긋이 미소했다. 그래, 조금 기다리시는 것이 예법에 크게 어긋나는 일은 아니…….

“응?”

“왜 그러느냐?”

“다시, 묶으십니까?”

“왜, 마음에 들지 않느냐? 이 옷은 이리 묶어야 하는데?”

천연덕스러운 황제의 표정에 입을 다물고, 멀어지는 정인의 손길에 금세 시무룩해졌다. 세상에 가장 치사한 것이 줬다 뺏는 것이라던데. 사람 마음을 이렇게 들었다 놨다, 오락가락하게 하는 것도 마찬가지인 듯싶다.

“어서 서둘러.”

“…예.”

기하의 시무룩한 음성에도 황제는 먼저 등을 돌렸다. 어째, 마음에 먹구름이 가득 낀 기분이다.

길령은 무엇이든 화려한 것이 특징이었다. 객잔에 몰려든 사람들의 모습이 그러했고, 음식 또한 그랬다. 향신료가 조금 강한 것이 흠이었지만, 유난히 화려한 차림이 신기했던지 기하는 연신 아이처럼 즐거워했다. 상을 두고 자리에 앉을 때, 일부러 자신의 옆이 아닌 서진하의 곁으로 가라는 말에 잠시 시무룩했던 기하의 얼굴에서 금세 아쉬움이 사라지자 황제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조반이 너무 늦었군.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

“이 아이…, 아니, 마마께서 유독 아침잠이 많으시지요.”

황제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었으나, 서진하는 유난히 민망한 표정이었다. 옆자리에 단정하게 앉아 수저를 드는 아우의 모습은 마냥 흐뭇한 것이었으나,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하의 이름만 입에 올려도 사르르 녹던 황제의 표정이 무감각했다.

더욱이 해가 중천인데 이제야 조반을 드는 것이 익숙한 듯하여, 평소 황궁 생활을 어찌 하고 있는지 눈에 빤했다. 설마하니 후궁의 몸으로도 그리 변한 것이 없을 줄이야. 하기야, 제 아우는 전장에 누비고 다닐 때도 유난히 잠이 많아 고생하였었다.

“잠이 많은 것은 건강하다는 증거니 그리 마음 쓸 것 없다. 어서 들자.”

넓은 방 안 가운데 놓인 식탁에 차려진 음식은 대부분 처음 보는 것이었다. 그림자 중 하나가 기미를 본 후에 황제가 숟가락을 들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시무룩한 얼굴이던 기하는 음식을 보자마자 금세 표정을 바꾸고 눈을 반짝였다.

“형님께서는 지금 어디에서 지내십니까?”

음식이 짠 듯하여 급하게 물을 한 모금 삼킨 후에 입을 열자, 서진하는 잠시 젓가락질을 멈췄다. 난처한 듯 보이는 얼굴에 슬쩍 황제를 바라보니, 단정하게 음식을 씹어 삼키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서렸다.

“내 앞이라 말하기 어려우면 차후에 빈과 둘이서 얘기해도 된다.”

“황공하옵니다, 폐하. 하나, 마마께서는 이미 완전히 폐하의 사람이신 듯하니 소신은 입을 다무는 쪽을 택하겠습니다.”

“형님.”

당황한 기하가 서진하의 옷자락을 붙잡았으나, 황제는 오히려 흡족한 듯 미소했다. 아무리 감추려 해도, 망설임 없이 제게로 오던 기하를 떠올리니 절로 웃음이 났다.

“믿음은 한순간에 쌓아지는 것이 아니지. 그대의 마음 이해한다.”

“황공하옵니다, 폐하.”

“그래도 나의 빈은 믿어주도록 해. 비록 그대가 아닌 짐을 선택한 것은 그대에게 몹시 가슴 아픈 일이겠으나 이 아이, 그리 쉽게 마음을 배반하지 않을 테니.”

황제의 애정이 깊다. 말 한마디, 눈빛 하나, 손길 하나에도 알 수 있었다. 서진하는 그저 황제의 말을 가슴에 새기며 미소했다.

민망함에 눈 둘 곳을 찾으며 얼굴을 찡그리는 기하의 표정은 이런 상황에 익숙한 듯 보여서, 더더욱 안심했다. 늘 넘치는 애정을 주시겠다고 하시더니, 그것이 사내의 허세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금일은 둘이서 못다 한 얘기를 나누도록 해. 단, 둘이서 객잔 밖으로 나가는 것은 아니 된다. 함께 있는 방 밖으로 금룡대가 지킬 것이다.”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정다운 시간은 길수록 좋겠지.”

몇 숟가락 뜨지도 않은 황제가 입을 닦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놀란 서진하가 벌떡 일어나자, 손을 휘휘 저으며 그대로 앉으라는 신호를 보낸 황제는 화려한 미소를 지었다.

“폐하, 수라도 제대로 아니 드시고…….”

“시장하면 알아서 먹으마. 어서 앉아 마저 먹도록 해.”

어깨를 두어 번 다독여주던 황제가 방을 나섰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기하의 표정이 유독 시무룩한 것에, 서진하는 의아함이 가득한 얼굴로 아우를 불렀다. 이제는 자신의 하나뿐인 아우가 아니라 황제 폐하의 후궁이 되시는 귀한 몸이니, 함부로 대할 수 없는 탓이었다.

“어찌 그러십니까?”

“아…, 아닙니다. 말씀 편하게 하세요, 형님. 아무도 없지 않습니까.”

“그럴 수야 없지요. 마마와 소신이 이 자리에 있습니다. 보는 눈에 없다 해서 마마께 함부로 대한다면, 어찌 폐하를 바로 뵐 수 있겠습니까.”

서진하는 그런 남자였다. 지나치게 청렴하고 진실 되며 예(禮)와 의(義), 신(信)을 항상 마음에 새기는 사내였다. 모두에게 공정하고 아랫사람에게는 너그러운, 북성의 자랑이었던 왕세자.

비록 가난하고 볼품없는 나라라 손가락질받기도 하였으나 그가 얼마나 북성을 애정 하는지, 백성들이 얼마나 그를 애정 하는지, 기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런 그가 북성을 떠났다. 황제께 칼을 겨누려 했다. 아버지께 등을 돌렸다.

“마음이, 어지럽습니다.”

“마마?”

“소제(素弟)는 외로운 황궁 생활에만 젖어 북성에선 그런 일이 일어나는 줄도 모르고 살았습니다.”

“외로웠습니까?”

“처음에는요. 폐하의 분노가 커서 외롭고 고되었습니다. 폐하께서 전장에 나가 계시는 동안엔 그랬습니다.”

“지금은…….”

“매일 다정하게 안아주시고, 좋은 걸 주시고, 마음을 나눠 주셔서 행복하고 따뜻합니다.”

서진하는 그제야 걱정스러운 표정을 거뒀다. 아우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았다. 딱히 염려하지 않아도, 걱정하지 않아도, 누구보다 행복한 것 같다. 늘 굶주려 있던 조그마한 아이가 넘치는 애정을 받으니, 더할 나위 없이 환하게 웃는구나.

그래, 다른 것은 중요하지 않다. 이 아이가 행복하다는데, 그 행복을 지켜 주시겠다는데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형님.”

“예, 마마.”

“아버님께서는, 폐하를 믿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 때문에 신 또한 먼 길을 굽이굽이 돌아야 했습니다. 그 말씀 하나로, 매해 수천의 백성이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굶어 죽고, 용병으로 살다 먼 타국에서 허망하게 죽기도 했습니다. 더는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아니 됩니다.”

“무엇 때문에, 그리하셨을까요.”

쓸쓸해진 것은 목소리뿐만이 아니었다. 이제는 훌쩍 자란 아우의 깊어진 눈매에, 서진하는 마른 숨을 내쉬며 안타까움으로 젖은 눅눅한 손을 내밀었다.

“신이 가장 분노했던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서진하의 단단한 손을 붙잡으며 기하는 머리를 가만히 내저었다. 왜였을까. 묻고 싶었다, 아버님께.

“백성들의 목숨값, 폐하께서 내리신 지원금. 그 모든 것이 과연 어디로 갔을까요.”

서연은 청렴한 자였다. 나라가 가난한 탓도 있었지만, 본인 또한 사치를 즐기지 않았다. 기름진 것을 입에 대어본 적도 없고, 그나마 좋은 것은 먼저 떠난 유일한 왕비와 자식들에게 나눠주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는 이였다. 천성이 무뚝뚝하고 자식들에게는 엄해도, 그 마음을 모르는 천치는 궁중에 없었다.

“어마마마께서 어찌 돌아가셨는지 아십니까?”

“저를 살리시기 위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를 겨우 짜낸 기하가 고개를 푹 숙였다. 어머니의 그림자 앞에서 기하는 늘 죄인 취급을 받았다. 탄일을 축하받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제가 태어난 기쁜 날이 아니라, 어머니께서 떠나신 슬픈 날로 기억되니 북성의 백성 또한 먼저 떠난 왕비를 기리며 고요하고 쓸쓸하게 보내는 날이었다.

진하 또한 기억나지도 않는 어머니를 기리며, 홀로 방 안에 갇혀 태어난 죄를 가슴에 새겨야만 했던 어린 아우를 기억한다.

“너 때문이 아니다. 네가 쌍생으로 태어난 탓도 아니다. 그것이 어찌 너의 탓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쌍생은 불길하다 했다. 하여, 어머님께서 먼저 떠나신 거라고 생각했다. 쌍생은 불길하니, 어머님과 이모님이 그리 허망하게 가신 거라 했다.

빛나는 것은 시기를 받아, 아무 죄 없는 분들이 먼저 떠난 것이라고 그리 말씀하셨다. 아버지께서는 왜 그런 말씀을 하셨던 것일까.

“본디 여인들은 배 속에 아이가 있을 땐 잘 먹고, 잘 자고, 좋은 것만 보고 살아야 한다더라.”

“…….”

“그땐 너무 가난하였다. 그나마 좋은 것은 내게 전부 다 주셨지. 한 나라의 지어미인 어마마마께서 제대로 드시지도 못하고 늘 굶주리셨다는 것을 누가 믿겠느냐.”

모든 것이 까맣게 변했어도, 그것은 잊지 않을 것이다. 너를 부탁하던 어머니의 앙상하게 마른 손, 온기라고는 없는 딱딱하고 무딘 손끝. 그 손을 붙잡으며 내가 얼마나 울었는지, 한 번도 말한 적은 없지마는.

“너 때문이 아니다.”

뚝 떨어지는 눈물이 손등 위를 적셨다. 사소한 잘못으로 아버님께 회초리를 맞으면 형님께서는 늘 그렇게 말씀해주셨다. 너 때문이 아니다. 네 잘못이 아니다.

“너는 당연히 축복받으며 태어났어야 한다.”

어린 시절엔 미처 알지 못했다, 그것이 당연하다는 것을. 세상 그 누구도, 태어난 것에 손가락질받을 이유는 없다는 것을. 그저, 어머니를 빼앗아 간 아우가 미웠던 순간이 있었다. 저 아이만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어머니께서 자신의 목숨을 저 아이보다 소중하게 생각하셨더라면…….

“아주 어릴 때는 네가 미웠던 적도 있었다.”

조그마한 아이가 와앙, 울음을 터트리는 것이 신기해서 뭣도 모르고 웃었다. 허망하게 눈을 감으시는 어머니를 붙잡고 소리도 내지 못하고 울 때, 저를 보며 방긋거리는 아우를 얼마나 미워했던가.

그러다, 모두가 미워하는 아이가 가여워졌다. 손을 처음 잡아준 것은 단순히 그 이유 때문이었다. 말도 느리고 걸음도 느리고 모두가 외면하는 아이가 너무도 서러워 보여서. 떠나시기 전, 어머니께서 남기신 말씀 때문만은 아니었다.

“잠시뿐이었다. 어머님께서 너를 꼭 지켜야 한다고, 너를 아끼고 보살펴줘야 한다고 하신 말씀 때문만은 아니었다. 나를 보며 웃는 네가 어여쁘고, 나만을 따르는 네가, 내 하나뿐인 아우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기억조차 나지 않는 어린 시절부터, 제게 손을 내밀어 주는 이는 오직 형님뿐이었다. 북성이 좋고, 아버지가 좋았지만, 가장 좋은 것은 형님이었다. 고집을 부려가며 전장에 나갔던 이유 또한, 형님과 떨어지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런 형님의 말씀을 처음 거역한 것이 제국으로 오는 것이었고, 그런 형님께 처음 등을 돌린 것이 바로 어제, 제 목에 칼을 겨누면서까지 황제의 품으로 가기 위함이었다.

“내가 바라는 것은 오직 너의 행복뿐이다. 그러니 기하야, 너는 네 길을 가도록 해. 너는 이제 제국의 사람이고, 폐하의 정인이니, 북성의 일은 모두 잊어라.”

“하지만, 하지만 형님…….”

“행복하다 하였으니, 이제 나도 안심하마.”

벌을 받아 마땅한 사람은 벌을 받고, 구원받아 마땅한 사람은 구원받으면 된다. 모든 것은 자연의 이치로, 태어난 그대로, 조금 더 행복을 찾아서.

그러니 기하야, 내 아우야. 너는 이제, 행복해져라.

객잔을 송두리째 빌린 후, 황제는 금룡대와 흑마단을 향해 특별히 자유 시간을 허락했다. 물론 지엄한 명이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좀체 객잔 밖으로 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늦은 오후까지 형제간의 다정한 시간을 보내던 두 사람은, 황제의 부름에 아쉬운 마음을 접어야 했다.

“마마, 그러지 마시고 이것 좀 드셔 보십시오.”

객잔 밖을 나가는 대신, 그들은 거나하게 차려진 상 앞에 앉았다. 온갖 화려하고 진귀한 음식은 임승지가 제 부하들을 위해 특별히 마련한 것이었다.

응당 자신을 부를 것이라 예상했던 기하는 아쉬운 마음을 접고 황제에게로 향했으나, 정인은 딱딱한 표정으로 서진하를 불러 안으로 들어갔다. 차마 그 뒤를 따를 수는 없었기에 장승처럼 서 있는 기하를 아래층으로 데려온 것이 임승지였다.

“생각 없습니다.”

“지금이 아니면 이 싱싱한 해산물을 언제 먹어본답니까? 어서 드셔 보십시오. 향신료가 풍미를 더합니다.”

자유 시간을 준다고는 했지마는, 황제께서 딱히 술을 마셔도 된다는 말씀은 하지 않으셨던 것 같은데. 어느새 슬그머니 상 위에 술병을 올려둔 승지는 싱글거리며 젓가락을 쥐게 했다.

“어이, 거기. 그렇게 장승처럼 서 있지 말고 이리들 와서 앉으시게. 같이 먹자고.”

“됐소이다. 신경 쓰지 마시오.”

“음침한 사내들이 그리 서 있는데 어찌 신경이 안 쓰이나? 주군들께서는 긴히 나눌 말씀이 있으시다지 않은가. 기다리는 동안 허기라도 채우라고.”

신나게 고기를 뜯던 금룡대가 슬금슬금 일어나 한쪽으로 몸을 움직였다. 딱히 그들이 무언가를 먹는 모습은 보지 못했다. 북성 살림이 곤궁하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는 일이고, 최정예 부대라고 알려진 흑마단 장수라고 해도 사정은 녹록지 않은 듯했다.

“아, 뭣들 하고 있어? 와서 앉으라는데.”

“그래, 다들 와서 요기하도록 해. 내일이면 먼 길 떠나야 할 텐데, 배라도 든든히 채워야지.”

보다 못한 기하가 한마디 거들자, 그제야 사내들 사이에 있던 최장명이 성큼성큼 걸어와 자리를 잡았다. 거구의 사내는 족히 두 사람 몫의 자리를 차지했다. 오랜만에 마주 앉은 최장명을 향해 빙긋이 미소하자, 험악한 사내의 얼굴에 얼떨떨한 표정이 스친다.

“장명은 여전하네.”

“왕자님께서는 조금 마르신 것 같습니다.”

“왕자님이 아니라 마마라고 몇 번이나 말하나?”

“내게는 영원한 왕자님이오.”

투박한 음성은 조금도 굽힐 뜻이 없어 보였다. 그런 최장명의 고집을 잘 알고 있는 기하는 기분 좋게 웃으며, 임승지가 채워놓은 술잔을 망설임 없이 들었다. 기분이 좋았다.

물론 마음 한구석은 여전히 꿉꿉하고 찝찌름했지만, 이들과 함께 술잔을 기울일 수 있다는 사실이 마치 꿈만 같았다.

“장가는 갔나?”

대답도 하지 못하고 기하가 내민 술잔을 받아 드는 최장명의 귓가가 조금 붉어진 듯도 하다. 수염이 덥수룩한 사내의 그런 얼굴에 놀란 것인지, 임승지는 가볍게 휘파람을 불며 막 나온 따끈한 음식을 그의 앞으로 밀었다.

“아무리 바빠도 장가는 가야지. 자네 어머니 소원이잖나.”

“언젠간 가겠지요. 달리 급한 것은 아닙니다.”

“딱 보기에도 무척 급해 보이는데, 너무 태평한 것 아니오?”

“남 일에 신경 쓰지 마오.”

임승지의 핀잔에 최장명이 눈을 부라렸다. 기하가 웃음을 터트린 것은 그즈음이었다. 타고난 생김 때문에 어릴 때부터 늘 저런 놀림을 받았었다. 아주 어릴 때는 그 말에 속상해 울기도 했던 최장명을 떠올리며, 기하는 임승지의 잔에 술을 채웠다.

“아니 이 양반이 걱정을 해줘도 지랄이야?”

“누가 댁더러 걱정해 달라고 했소?”

“그 얼굴로 퍽도 장가가겠네! 한 살이라도 더 먹기 전에 얼른 가서 자식을 봐야 어머니께 효도하지!”

“내 나이가 뭐가 어떻다고? 왜 쓸데없는 참견이오? 그렇게 할 일이 없소? 사내가 입이 어찌나 가벼운지, 그래서 어디 폐하 보필을 제대로 하겠소?”

“뭐, 이 자식아?”

“이 자식이라니! 왜 자꾸 반말에 욕지거리요?”

급기야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 최장명과 임승지는 당장에라도 엉겨 붙을 듯 씩씩거리며 먼저 멱살을 잡으려 했다. 옹기종기 모여 신나게 음식을 먹던 금룡대와 흑마단이 엉거주춤 일어난 것은 그즈음이었다.

“그만해. 뭣들 하는 거야? 아랫사람 보기에 부끄럽지도 않은가?”

한숨을 내쉬듯 중얼거리는 기하의 말에도 그들은 팽팽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당장 앉지 못해?”

“송구합니다, 저하.”

“송구합니다, 마마.”

흉흉한 시선은 거둘 생각도 하지 않고 말만 그렇게 하는 두 사내를 어찌할지 몰라, 기하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따뜻한 음식을 입에 넣던 이들은 체기가 도는 것 같은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입안에 씹지도 못한 음식을 몰래 우물거리다, 눈이 마주치자 놀라서 그대로 꿀꺽 삼켜버리는 모습에 마음이 짠했다.

“한두 살 먹은 애도 아니고, 뭐 하는 짓들인가?”

“소장이 잘못했습니다, 마마. 노여움 푸십시오.”

“장명, 그대 또한 잘한 것 없다. 임 대장 말에 다른 뜻은 없어.”

“예, 저하.”

“거, 미안하오. 한참 연배도 높은 것 같은데, 내 너무 무례했소.”

수더분하게 말하며 화해의 손을 내미는 임승지가 활짝 웃으려 할 때였다. 어디선가 킥킥거리는 웃음이 새어 들었다. 그 소리에 발끈한 최장명이 다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검집을 집어 들었다.

제 부하들을 향해 돌아서는 그의 흉흉한 기세에 놀란 승지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기하를 쳐다봤다. 난처한 듯 어색하게 웃는 기하를 보고서야, 임승지는 제가 어느 부분에서 실수한 것인지를 반추했다. 딱히, 잘못한 건 없는 것 같은데?

“이 미친놈들아, 뭘 했다고 킥킥거려? 음식에 독이라도 발라서 처먹었더냐?”

고래고래 소리치는 최장명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금룡대마저 고개를 갸웃했다.

“장명, 어디 가려고?”

“측간(廁間)에 갑니다.”

귓불을 붉게 물들이고 고개도 제대로 들지 못한 최장명이 쏜살같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소장이 무슨 큰 실수를 했습니까? 대체 저치가 왜 저럽니까?”

“뭐, 그게 임 대장 잘못은 아닌 것 같지만…….”

난처한 듯 미소하는 기하의 모습에 임승지는 제 볼을 긁적였다.

“장명이 생각보다 어리거든.”

“예? 어려요? 얼마나 말입니까?”

“나보다 두 살?”

“예? 그럼 올해 겨우 스물다섯이란 말씀입니까? 저 얼굴이요?”

“아니. 두 살 많은 게 아니라, 두 살 어리다고요.”

할 말을 잃은 임승지가 입을 쩍 벌렸다. 저 거구의 사내가? 저 흉악한 얼굴이? 저 덥수룩한 수염은 어쩌고! 스물하나? 스물하나?

“장명이 그 얼굴 보면 불같이 화낼 테니까, 얼른 표정 수습하세요. 자네들도.”

대장이나 부하나, 어쩜 그리 똑같은 표정을 하고 있는지. 짐짓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음식을 먹고 있는 흑마단의 숨죽인 웃음소리까지 더해져, 객잔 안은 유난히 따뜻한 공기로 가득했다.

황제는 무섭도록 차가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한참을 말없이 생각에 잠겨 있던 그가 술잔을 들었다. 타는 듯한 갈증에 절로 숨이 가빠졌다.

“그깟 시답지 않은 소문은 누가 만든 것이냐.”

“몇몇 제후국에선 아주 오랫동안 전해지는 얘기입니다.”

쌍생은 불길하다. 하여, 노비가 쌍생을 잉태하면 아이는 물론 그 어미 아비까지 사지를 찢고 시체를 불태운다. 양반가에서 쌍생이 태어나면, 그중 한 아이만을 살린다. 물론 처음부터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그와 관계된 모든 이들의 입을 막는다.

왕실의 쌍생은 매우 드문 일이었다. 그리고 두 아이 모두, 무사히 태어나고 자란 것은 이례적인 일이기도 했다.

“폐비가 그런 간계를 꾸민 것도, 그 말을 빌어 하는 이들이 태반입니다. 본디, 살아서는 아니 되는 자가 살았으니, 나라를 뒤흔드는 악행을 저지른 것이라고요.”

“하면, 기하의 쌍생…, 그 아이는…….”

“죽은 채로 태어났다고 들었습니다. 아주 작은, 여자아이라고 했습니다.”

하늘이 도우신 거라고 사람들은 말했다. 불온의 씨앗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했다. 모든 것은 비밀에 부쳐졌다. 기하 또한 자랄 때까지 저의 반쪽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아버님께서는 소신과 마마께 엄격하셨습니다. 늘 전장에 나가 계셨기에, 함께하는 시간 또한 그리 많지 않았으나 다정하게 품에 한 번 안아주신 적도 없습니다.”

늘 아버지의 등을 보고 자랐다. 그래도 한때는 어머님께 넘치는 애정을 받고 자랐던 자신과는 달리, 기하는 그것을 못내 서러워했다.

유난히 눈물이 많았던 아이는, 홀로 후원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말라비틀어진 개 한 마리에게 제 애정을 쏟아부었다. 온기가 그리울 땐 그 작은 짐승을 끌어안고, 혹여 아버님께 야단이라도 맞은 날엔 부러 더 밝게 웃으며 후원을 뛰어놀았다.

전장에 처음 출정하던 새벽, 퉁퉁 부은 눈으로 달려와 가지 말라 떼쓰던 어린 아우를 기억한다. 아이는 늘 외로웠다.

“매해 초여름 즈음, 제국에선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아마 여덟 살쯤 되었을 거다, 처음으로 제국의 손님을 맞이한 것은. 화려하고, 아름답고, 기품 넘치는 무리보다 만연한 웃음으로 그들을 맞는 아버님의 얼굴이 더 낯설었다.

“그들은 짧게는 보름, 길게는 한 달 정도를 보내다 갔습니다. 달리 하는 일도 없었고, 궁 안을 산책하거나 처소에 틀어박혀 있다 가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국빈 대접을 하였으나, 신 또한 가까이 본 적은 없었습니다. 그들이 누구인지, 왜 북성을 찾았는지도 아버님께서는 말씀해주시지 않으셨으니까요.”

아버님께서 그렇게 다정하게 웃어주실 수 있는 분인지 몰랐다. 몇 달간 시찰하고 돌아온 제게 어린 아우는 입을 댓 발이나 내밀며 속상한 마음을 털어놓았다.

그전까진 관심조차 주지 않던 그들을 향해 조그마한 의문이 피어올랐다. 그들은 누구일까. 그리고 그 해답을 찾기까지는 꽤 긴 시간이 흘러야 했다.

“그들이 마지막으로 북성을 찾은 날은 유난히 비가 요란하게 쏟아지는 날이었습니다. 십여 년간 북성을 드나들었던 이의 곁을 지키는 이는, 폐비였습니다. 어머니와 똑 닮은 얼굴이라,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녀는 몹시 지친 얼굴로, 겁에 질린 제 아들을 끌어안고 있었습니다.”

역모를 일으킨 이들이 곤궁한 행색으로 그 먼 북성까지 찾아들었을 때, 서진하는 자신들의 운명을 예감했다. 그는 제 아비에게 그들을 절대로 받아주어서는 안 된다고 간청하다 처소에 갇혔다. 지금도 기억한다, 이성을 상실한 아버님의 얼굴을.

“지금 그대가 하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나.”

“예, 폐하.”

“내가 그대와 북성을 살린 것은 선황 폐하의 약조 때문만은 아니었다. 단지, 인간적인 연민에 이끌려 정의롭지 못한 일을 도운 것에 대한 분노였을 뿐이었다. 그래서 너희가 미웠고, 그래서 너희를 살려주었다. 하나, 단순히 폐비와 그의 아들을 숨긴 것이 아닌―.”

황제는 잠시 말을 멈췄다. 지금 이 순간, 가장 간절한 것은 제 곁을 지켜주는 정인의 온기였다.

“북성이 그 역모에 가담하였다는 것이 진실이라면―.”

다른 것은 필요치 않다. 다른 것은 어찌 되어도 좋다. 그저 그 아이를 제 곁에 오래오래 둘 수만 있다면.

“서연과 북성을 어찌 처결해야 할지, 다시 생각해야 할 문제다.”

“벌을 받는 것이 두려워, 진실을 감추겠습니까.”

“내겐 그 아이가 필요하다. 그러니 어설픈 거짓으로 짐의 마음을 떠보려 하는 것이라면, 여기서 멈추는 것이 좋아.”

“신에게는 지켜야 할 백성이 있습니다. 가족이 있습니다. 아우가 있습니다. 진실을 모두 알게 된 지금, 어찌 폐하께 거짓을 아뢰오리까.”

모든 것을 깨끗하게 털어놓고, 벌을 받고, 잘못을 빌고, 행복을 바라는 것이 현명한 일이 아닙니까. 그래야 나의 백성들에게, 나의 아우에게, 나의 하나뿐인 아들에게도 떳떳한 사내가 되지 않겠습니까.

“폐하.”

“…….”

“신의 아비를 벌하시고, 신을 벌하셔도 좋습니다. 벌을 내리신다면 명예롭게 받겠습니다. 하나, 아우는 살려주십시오. 그 아이는, 단 한순간도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옳은 일을 위해, 비난과 지탄을 모두 감내했습니다. 하니, 그 아이만은 벌하지 마십시오.”

“네가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없다. 옳은 일은 무엇이고, 비난과 지탄은 다 뭐냐.”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다. 하지만 잊고 싶은 순간이기도 했다. 피비린내 나는 그날을 떠올리면 남는 것은 허무함뿐이었다. 그 일로 모든 것이 엉망이 되었다. 가족의 죽음과 자신의 뒤바뀐 운명을 상기할수록, 가슴에 남는 것은 시커먼 잿더미뿐이었다.

그러나 그 아이를 만났다. 하나뿐인 정인을 찾았다. 평생 함께하고 싶은 이를 곁에 두었다. 이제야 비로소 악몽을 꾸지 않고, 조금은 따뜻한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었다.

“마마께서, 말씀 올리지 않으셨습니까?”

“뭘.”

“…폐하께서 북성을 치시던 날을 기억하십니까?”

북성 왕실의 반이 잿더미가 된 날을 기억하지 못할 리 없다. 비가 퍼붓지 않았더라면, 모두가 화염에 타들어 가 흔적조차 남지 않았을 밤이었다.

지금에 돌이켜보니 참으로 끔찍한 밤이다. 하마터면 기하를 만나 보지 못할 뻔하지 않았던가.

“재건된 북성의 요새는, 외부에서는 절대로 치고 들어올 수 없는 구조입니다.”

“그래, 그렇다고 들었다.”

“폐하께서는 어찌 북성을 치셨습니까?”

“전방을 차단하고, 후방에 있는 비밀 통로를 폭파하였다.”

“하면, 왕실의 적통 핏줄만이 알고 있는 그 비밀 통로를 어찌 아셨습니까?”

“그것은 나의 정보원이…….”

“그 비밀 통로는 북성의 장수들도 알지 못합니다.”

황제의 표정이 오묘하게 변했다. 그는 생각을 멈춘 듯 서진하를 빤히 바라보며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폐하께서 폐비와 그의 아들에게 벌을 내리시고 귀환하신 후, 북성에는 피바람이 일었습니다.”

매일 고문이 이어졌다. 피비린내 나는 살육의 현장은 전장에서 오랜 시간 지내온 서진하조차 견디기 괴로운 시간이었다.

“마마께서는 아니, 신의 아우는 모든 것을 빼앗겼습니다.”

황제의 표정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서진하는 침착하게 황제를 응시했다. 그러다 이내 머리를 숙이고 지난날의 괴로움을 상기하며 숨을 골랐다.

“…상시에게 전서응을 띄운 이가 있다고 들었다.”

“폐하께서 아버님께 충성의 맹세로 기하를 내어 놓으라 명하시지 않으셨더라면, 아마 그 아이, 더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겠지요.”

뿌옇게 차오른 기억을 헤집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상시 영감의 전언을 그대로 행한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었다. 그 후, 분노가 채 사그라지기도 전에 상시의 청을 들어주려 하였을 땐 어찌했던가. 차일피일 미루며, 북성에 명을 내리지 않으려 애를 쓰지 않았던가.

왜 하필 그런 청을 하였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 계속되는 상시의 알현 요청도 거절했다. 마지못해 그의 청을 수락하고 사신을 보내기도 전 전서응을 띄우라 명하던 기분을 끌어올리자,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 같았다.

“기하는, 그때…….”

“모질게 고문당했습니다. 먹지도, 잠들지도 못하고, 춥고 어두운 지하 감옥에 갇혀 썩어가는 시체들과 함께 지냈습니다. 열병을 얻어 그대로 두면 얼마 못 가 죽을 거라 했습니다.”

왕자의 자리를 박탈당하고, 하루아침에 죄인 취급을 받는 아우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지독하게 끔찍했던 그날들을 떠올리며, 서진하는 잠시 회한에 젖었다.

살았으니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살다 보니 욕심이 났다. 미움받는 자리에 올라 사람들의 멸시를 견디기보다는, 그저 따뜻하고 다정한 사람과 소박하지만 행복하게 사는 것은 어떨까 하는 생각도 했다. 아우를 먼 나라로 빼돌려 마음 편히 살 수 있게 할까 하는 고민도 했다.

“그 아이는 늘, 제국을 꿈꿨습니다. 궁핍하고 차가운 북성이 싫어서가 아니라, 오직 폐하를 그리는 마음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폐하, 그 아이… 꼭 행복하게 해주십시오.”

‘제대로 된 애정을 받지도 못했던 아이는, 지나치게 다정하고 따뜻하여 늘 주변 사람을 행복하게 했습니다. 넘어져도 제대로 울지 못하고, 아파도 아프다고 말도 못 하고, 괜찮다는 말만 입에 달고 살았던 아이가 죽어가는 몸으로 아프다고 울었습니다. 그러면서 꼭 한 번, 꼭 다시 한 번 폐하를 뵐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이제 더는 아프지 않고, 폐하의 곁으로 갈 수 있다고 전했을 때 그 아이, 처음으로 서럽게 울며 웃었습니다.’

“그리 살았더냐.”

“…….”

“나의 빈이, 나의 기하가 그렇게…, 아프게 살았더냐.”

“다시 물으면 그 또한 행복했노라, 그리 말할 아이입니다.”

그런 네게 나는 어찌했더냐. 그런 너에게, 나는 뭐라 했더냐. 기하야, 이 죄를 어찌 씻어야 할까. 너에게 나는, 뭐라고 용서를 빌어야 할까. 응? 말해 보아라. 괜찮다고만 하지 말고, 행복하다고만 하지 말고. 기하야.

* * *

“어서 오세요, 태자.”

환하게 미소하는 영빈을 향해 다가오던 무영군이 발을 멈췄다. 다정한 손길이 아이의 손을 붙잡았다. 영빈의 처소에서 이따금 보았던 윤 재인이 황자를 향해 머리를 숙이고는 이내 물러났다. 자연스럽게 제 팔에 황자의 손을 걸고 걷기 시작한 영빈은 근래에 보기 드물게 환한 얼굴이었다.

“양 귀인에게 다녀오는 길입니까?”

“예.”

“병세는 어떻습니까? 내, 용무가 바빠 최근에는 미처 찾아가지 못했습니다.”

“늘 똑같으십니다.”

더해지지도 않고, 나아지지도 않는다. 겨우 숨을 내쉬고, 밥을 먹고, 잠을 자나, 말을 하지 않고 이채를 잃은 허망한 눈으로 스치듯 보는 것이 전부다. 살아있되, 살아있는 것이 아닌 상태였다.

“귀인에게 내릴 좋은 약재를 구했습니다.”

“배려 감사합니다.”

“당연한 일인 것을요. 귀인과 나는, 아들을 나눠 가진 사이가 아닙니까?”

그는 사내의 몸으로, 자신의 어미가 되어주겠다고 서슴없이 말했다. 그때엔 그저 이 온기가 따뜻하다고만 여겼다. 저를 위해 무엇이든 해주는 그가, 다정하게 어루만지는 손길이, 함께하는 시간이 너무도 좋아서, 그가 웃을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하는 착한 아들이 되고 싶었다.

“황궁 분위기가 흉흉합니다.”

“예, 그런 것 같습니다.”

“무빈이 자리를 털고 일어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어린 아우는 날마다 떼를 쓰고 울었다. 아예 목이 쉬도록 울어 동복궁은 매일 전쟁을 치르는 중이었다. 먹지도, 제대로 잠들지도 않는 정연군을 달래다가 지친 궁녀들이 제게 찾아오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폐하께서 상심이 크실 것입니다.”

정사도 뒤로하고 무빈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는 황제를 두고 대신들은 입방아를 찧었다. 황제께서 총비에게 눈이 멀어 모든 것을 내팽개치신다면, 나라가 바로 설 수 없다며 연일 상소문이 올라왔다.

태화당은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 것 같았다. 눈물조차 말라버린 궁녀들이 파리하게 질린 얼굴로 시간마다 온갖 탕제를 달이는 냄새가 진동했다.

“이 기회를 잘 붙잡아야 합니다, 태자. 상심하실 아바마마 곁에서 든든한 모습을 보이셔야지요.”

다짐에 또 다짐을 요구하는 영빈의 목소리가 불편했다.

“마마.”

눈에 익은 궁녀 하나가 영빈을 불렀다. 감히 황자와의 오붓한 시간을 방해하는 것을 결코 용서치 않는 영빈의 싸늘한 눈빛에도 불구하고, 궁녀는 단호한 얼굴로 다가와 그의 귓가에 무언가를 속삭였다.

“제대로 준비한 것이냐?”

“예.”

“그래, 그렇다면 정성 들여 마무리하라 일러라.”

기쁘게 미소하는 영빈에게 머리를 조아린 궁녀가 뒤로 물러나며 미소했다. 어쩐지 그들의 서늘한 표정이 마음에 걸린 황자가 영빈을 올려다봤지만, 그는 애초에 무영군에게 무슨 말이든 아꼈다.

“요즘 정연군과 유난히 자주 어울린다고 들었습니다.”

“아우가 도통 울음을 그치지 않아서요.”

“저런, 정연군께서는 대체 언제 철이 들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태자께서는 그 나이 때, 학자들과 강론을 펼치지 않았습니까.”

“아우가 아직 어리고 미숙하여 그럴 것입니다. 차차 좋아지겠지요.”

“태자께서는 정이 깊어 탈입니다. 내 누차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런 비천한 황자와 태자는 갈 길이 다르다고요. 정을 주어 뭐합니까. 나이가 차면 황궁 밖으로 나가 살 처지인데요.”

냉정한 영빈의 음성에 무영군은 걸음을 멈췄다. 비천한 황자, 나이가 차면 황궁 밖으로 나가 살 처지. 그것은 어쩌면 정연이 아니라 제가 겪게 될 일이 아닐까.

모친의 신분으로만 치자면 귀족도 아닌 제 처지가 가장 우습잖은가. 게다가 황태자로 봉해져 장차 황위를 이어받을 이가 아니라면, 머리를 올리기 전 황궁을 떠나야 하는 것이 옳다.

예전에는 당연하게 여겼던 일들이 어찌 이렇게 불편하게 느껴질까. 마치 제 것이 아닌 작은 옷을 훔쳐 억지로 입은 것처럼 불편하고 답답했다.

“태어날 아우는 걱정하지 마세요.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그대를 황태자의 자리에 올릴 것입니다.”

해사한 영빈의 미소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무영군은 씁쓸하게 웃었다. 예전에는 저 웃음이 마냥 좋았다. 그가 하는 말은 모두 들어주고 싶었고, 그의 바람은 모두 이뤄주고 싶었다. 그가 기쁘게 웃는다면 못할 일이 없었다.

외로운 궁에서 자신에게 손을 내밀어 주었던 유일한 사람, 자신의 행복을 바란다면서 웃어주는 따뜻한 사람. 그런 줄로만 알았다. 그래서 지금, 마음이 더 아프다.

“과연 그것이 제 자리가 맞을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무슨 약한 소리를 하는 겁니까! 정연군과 어울리더니 그 아둔함이 옮기라도 했습니까? 이제 다 되었습니다. 약해지면 안 돼요.”

어깨를 붙잡고 단호하게 외치는 영빈을 향해 무영군은 힘없이 미소했다.

“아바마마께 힘이 되어 드리는 겁니다. 든든한 장자로서 당연한 일입니다. 나는, 폐하의 곁에서 평생 태자의 힘이 될 것입니다. 우리 세 식구, 분명 행복할 겁니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직 조금 남아 있지만요.

독을 가진 꽃은 유난히 화려하고 아름답다고 했던가. 영빈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무영군이 그에게 머리를 숙였다. 몸이 고단했다. 며칠째 제대로 밤잠을 이루지 못한 탓이었다.

태의를 부르겠다며 호들갑 떠는 영빈의 손을 물리며, 무영군은 힘없이 처소를 향해 걸었다. 예전에는 미처 몰랐다. 처소로 가는 이 길이, 이토록 아름다운지를.

늘 앞만 보고 빠르게 걸어갔으니 날씨가 어떤지, 어떤 나무가 있는지, 무슨 꽃이 피었는지 미처 알지 못했다. 조금 천천히 걸으며 주위를 둘러보니 달콤한 냄새를 풍기는 과일나무와 향긋한 꽃 냄새, 무리 지어 다니는 물고기 떼가 평화롭고 아름다워 보였다.

“동복궁으로 가겠다.”

평화롭게 살면 좋겠다. 아우와 함께 활을 쏘고, 아바마마와 마주 앉아 다과를 들고, 스승님과 강론을 하고, 그렇게 살았으면 좋겠다.

“전하, 연무장(演武場)으로 가실 시각입니다.”

“정연에게 할 말이 있어. 잠시면 된다.”

수발드는 이들의 시선이 불편해지기 시작한 순간부터 느꼈다. 영빈의 손발이 되는 이들이 제 두 눈을 전부 가리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 또한 안다.

그저 바라는 것은, 지금의 이 위태로운 평화가 조금은 느리게 움직이는 것뿐. 오직 그것뿐이다.

얼굴이 핼쑥해진 정연군은 무영군을 보자마자 벌떡 일어나 두 팔을 벌렸다. 몇 번 응석을 받아주었더니 이제는 얼굴만 보면 자연스레 손을 뻗는 아우가 예전처럼 밉지만은 않았다.

“밥 잘 먹고 있으랬더니.”

“현님…….”

“왜 또 울고 있어? 그리 울면 등신이라고 했지?”

“마마가아, 마마 보고 시푼데에…….”

“무빈께서는 금방 일어나실 거다. 한데 네 그 꼴을 보고 속상해하시면 그때는 어쩌냐?”

“정말입니까? 마마께서 일어나십니까?”

“그럼 언제까지 누워 계신단 말이냐? 이제 일어나실 때도 되었지.”

철저히 비밀에 부쳐진 무빈의 상태에, 궁 안에선 말이 많았다. 사경을 헤매고 있다느니, 이미 숨을 다한 것이 아니냐느니, 태화당은 이미 울음바다라느니.

“사내는 눈물이 헤프면 아니 된다 하지 않았어.”

“안 웁니다. 아우도 현님처럼 씩씩합니다.”

얼마나 울었던지 뽀얗던 얼굴이 거칠거칠해졌다. 얼굴을 닦아 주려다가 괜히 생채기가 날 것 같아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무영군은 멀찍이서 몸을 잔뜩 웅크린 채 저를 경계하고 있는 짐승 한 마리와 눈이 마주쳤다.

“저것은 왜 여기 있느냐?”

“영입니다! 아우 친굽니다! 현님! 영이 때리면 안 댑니다! 아바마마께 혼납니다!”

“안다.”

아바마마께 혼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제 잘못으로 눈까지 먼, 겁에 질린 짐승에게 해코지할 생각은 없단 말이다. 그저, 미안해서 쳐다보게 되는 것이다. 이제 와 후회한다고 해서 다친 눈이 나아지리라는 법은 없으니, 미안하다는 말조차 꺼낼 수 없어 그러는 것이다.

“날이 더우니 저 녀석에게도 시원한 걸 내어주고 기운 차리고 있어라.”

“현님, 어디 가요? 나랑 가치 놀지이…….”

“너도 만날 놀지 말고 글씨 연습 좀 하거라. 몇 달 뒤엔 어엿한 형님이 될 텐데, 글자도 몰라서야 되겠느냐? 아우 이름 정도는 쓸 수 있어야지.”

“내 이름은 쓸 수 있는데?”

두 눈을 깜빡깜빡하는 폼이 칭찬을 바라고 하는 말 같다. 둥글둥글한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무영군은 대답 대신 아우의 머리 위로 손을 척 올렸다. 순간 움찔하는 모양새에, 제가 뭘 하려 했다고 겁을 먹는 것이냐며 화가 나려 했지만, 지나온 잘못을 알기에 얌전히 입을 다물고 투박하게 정수리를 쓰다듬었다.

“현님, 공부 다 하시고 또 오세요? 네?”

“그래.”

“야호! 그럼 이따가 같이 물꼬기 보러 가요?”

“그래, 밥 먹고 한숨 자고 있어. 또 울지 말고.”

“예!”

빙긋이 웃는 얼굴을 돌아보았다. 늘 저만 보면 덜덜 떨며 울면서도, 멀찍이서 몰래 바라보던 시선을 기억한다. 그것을 기억한다. 그 마음을, 영원히 잊지 않을 것이다.

쓰린 마음과 미안함, 벅찬 가슴을 어찌할 줄 모르던 황제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표정 하나하나에 묻어 나오는 기하를 향한 절절한 연정에, 서진하는 남몰래 감춰두었던 미소를 고요히 머금었다. 아우의 안위를, 더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기하…….”

아래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미처 밟기도 전, 시끌벅적한 소리에 이끌려 시선을 돌린 황제의 얼굴이 일순 딱딱하게 변했다. 차마 아까워 저도 마음껏 보듬지 못했던 정인의 무릎을 베고 누운 승지 놈은 술에 취한 얼굴로 드르렁드르렁 코까지 요란하게 골고 있었다.

군기가 죄 빠진 금룡대는 하나같이 쓸개 빠진 놈들처럼 웃고 있었고, 승지에게 무릎을 내어준 채 최장명과 마주앉은 기하는 마작에 빠져 황제가 부르는 소리도 듣지 못하는 것 같았다.

“안 돼! 그리 움직이면 안 돼. 안 돼, 방금 것 무효야.”

“그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이미 놓았습니다. 물리는 것 없습니다.”

“안 돼. 싫어. 물러. 응? 물러어.”

저게 대체 어디서 혀 짧은소리를 내고 앉아 있는 것인가. 피가 거꾸로 솟는 것만 같은 충동을 가까스로 누르자, 어느새 다가온 서진하가 난처한 듯 웃으며 무엄하게도 황제의 팔을 붙잡았다.

“저, 폐하. 아이들이 마음 놓여 한잔한 것 같으니 너무 노여워하지 마시옵소서.”

“경은 지금, 저 꼴을 보고도 그 말이 나오나.”

무릎을 내어주고, 다른 사내의 팔을 붙들며 같잖은 애교를 부리는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다. 그래, 백번 양보해서, 술에 취해 그렇다 치자.

한데, 어째 툭하면 옷고름은 다 풀어 헤치고 저렇게 방싯거리느냐는 거다. 오늘 아침만 해도, 제게는 그 잘난 속살 한 번 보여주지 않고 뒤로 뺀 게 누군데?

“장며엉, 치사하다? 응? 너 진짜 이러기냐?”

아예 양손으로 팔을 붙들고 흔들어대는 통에 그의 무릎에 머리를 대고 누워 있던 임승지가 바닥에 얼굴을 처박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신경도 쓰지 않고 최장명에게 무릎걸음으로 기어간 기하는, 웃는 얼굴로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금룡대와 흑마단의 얼굴이 하나둘씩 흙빛으로 변하는 것을 미처 눈치채지 못한 듯싶었다.

“저, 왕자님…….”

술에 취하지 않은 최장명은 단번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려다, 기하를 모질게 뿌리칠 수 없어 엉거주춤 허리를 굽혔다.

“안 물러줄 거야? 응?”

“왕자님, 저기, 그러니까…….”

“아, 왜! 너 우리 형님한테 이른다?”

장명에겐 그것이 최고의 협박임을 어린 기하는 잘 알고 있었다. 생전 남에게 떼를 쓰거나 어리광 부리는 법이 없던 어린 서기하는 유일한 또래 친구인 최장명이나 사촌 형님인 서엽, 그리고 하나뿐인 제 형님에게만 어린아이처럼 굴었다.

이것은 본디 몸이 기억하고 있는 그때의 사소한 습관이었다. 물론, 황제께서는 절대로 이 사소한 습관을 이해하실 것 같지 않지만.

“왕자님, 이것부터 좀 놓으십시오.”

“그럼 우리 륜한테 일러준다?”

도저히 못 볼 꼴을 본 사람처럼 당장 기하에게 달려가려던 황제의 발이 멈췄다. 천연덕스러운 머리통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그 얼굴은 또 얼마나 귀여울지 상상이 되어, 꼬부라진 제 이름에 마음이 금세 사그라졌다.

“륜한테 이르면, 너 혼나.”

“예, 예, 알겠습니다. 알겠으니, 이것 좀…….”

황제가 최장명을 향해 손짓했다. 더는 아무 말을 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급기야 붙잡고 있던 손을 툭 떨어트리며 바닥에 주저앉은 기하를 본능적으로 붙잡던 최장명의 얼굴에 아차 하는 후회의 빛이 서렸다. 흉흉한 기세로 저를 내려다보는 황제의 위세에 눌려,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륜이 얼마나 간악하고 무서운 자기에?”

고요한 음성이었다. 고개를 갸웃하던 기하가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주위 사물이 흐릿해진 탓인지, 변별력이 떨어진 듯한 얼굴로 한참 동안 최장명을 바라보던 기하는 빙긋이 미소하며 제 두 뺨을 손으로 감쌌다.

“안 무서워.”

“무섭지 않아?”

한 걸음 더 가까이 기하에게 다가간 황제의 음성이 봄기운에 눈이 녹듯 달콤해졌다. 여전히 등을 돌린 채 최장명을 바라보는 기하의 시선에 황제는 가벼운 질투를 느꼈다. 시선 하나, 말 한마디에도 질투를 느끼는 사내의 마음이 얼마나 옹졸한지에 대한 책망은 잠시 넣어두기로 했다.

“다정하고, 따뜻하고, 멋있고 또…….”

“또?”

“잘생기셨……, 응?”

등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잠시 뒤를 돌아보던 기하가 고개를 갸웃했다. 술이 올라 눈앞이 흐려져도 이 익숙함은 도저히 모를 수가 없었다.

“륜?”

“어서 일어나, 바닥이 차다.”

배시시 웃으며 양팔을 뻗는 기하를 향해 황제는 망설임 없이 무릎을 굽혔다. 단번에 그를 붙잡아 일으켜 품으로 끌어당기니, 그 모습을 황망하게 바라보던 이들이 눈 둘 곳을 찾았다. 오직 흐뭇하게 웃는 것은 서진하뿐이었다.

“웬 술을 이리도 많이 마셨어?”

“마작을 했는데, 질 때마다 한 잔씩 마셔서어. 임 대장이 재밌다고…….”

비틀거리며 제 품으로 안겨드는 기하를 다독이며, 황제는 사나운 눈으로 바닥에서 뒹구는 승지를 째려봤다. 도대체 믿을 구석이라곤 한 군데도 없는 발칙한 놈이었다. 잘 지키고 있으라 했더니, 겁도 없이 술을 먹여? 게다가 제가 먼저 곯아떨어져서 무릎까지 베고 누워 있어? 저놈을 그냥 콱.

“마누라 없는 사람 살겠느냐고!”

눈을 감은 채 허공에 발길질하며 버럭 소리치는 승지의 입을 급하게 틀어막은 금룡대 하나가 민망한 듯 황제를 향해 머리를 조아렸다.

“그, 대장께서 몹시 취하시어…….”

“웁, 웁! 나도 장가갈 것이 웁! 색시 얻어서 지긋지긋한 황궁 생활 청산 우웁! 웁! 우우웁!”

혀를 끌끌 차는 황제의 서늘한 시선에 금룡대는 너나 할 것 없이 승지의 사지를 붙들었다. 그냥 두었다간 술이 깨기도 전에 이 세상 하직할 것만 같으니, 마냥 두고 볼 수 없는 탓이었다. 그나마 폐하께서 기분이 좋으셨기에 다행이지, 아니었더라면 정말 잔혹한 밤이 될 뻔했다.

“폐하…, 곤합니다. 자고 싶습니다.”

“그래, 그래. 늦었으니 올라가는 것이 좋겠다.”

“목마릅니다.”

“그래, 올라가서 물도 주마.”

“덥습니다.”

“안 돼. 안 된다, 지금은. 올라가서 벗겨주마. 그러니 조금만 참아.”

덥다며 칭얼거리는 모습은 못내 귀여웠으나, 다른 놈들 앞에서 속살을 보이는 것은 절대로 허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키득키득 웃는 발칙한 놈들을 향해 눈을 부라리니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며 머리를 숙이는 파렴치한 자들에게 내릴 벌을 떠올리다, 기하를 끌어안은 황제가 이를 바드득 갈았다.

“어서 정리하고 일찍 자도록 해. 개가 된 저놈은 여기 그대로 두어라.”

“한밤중이 되면 바닷바람이 차게 불 것입니다.”

“입이 돌아가건, 고뿔에 걸려 앓아눕건, 술만 들어가면 짐승이 되는 놈에게는 살아 있는 것도 사치다.”

싸늘한 황제의 음성에 금룡대는 측은한 눈으로 임승지를 쳐다봤다. 지엄하신 황명이니 감히 거스를 수도 없고, 바닥은 지나치게 딱딱하고, 열어놓은 문 사이로 바람이 슬슬 불어오는 것이 오늘 밤은 꽤 춥겠다는 생각을 하며 황명을 받들었다. 여차하다간 저희도 모진 바닷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긴긴밤을 보내야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잠든 정인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은 황제에게 있어 가장 평온하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발그스름하게 열이 오른 뺨을 쓰다듬고 머리를 귀 뒤로 넘겨주던 황제는 어젯밤을 떠올리며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마냥 귀엽게 굴더니, 종래에는 눈물을 터트리는 기하를 말리기란 역부족이었다. 제 품을 벗어나 서진하에게 안겨 집에 가고 싶다고 엉엉 울던 모습이 어찌나 가슴을 싸하게 했는지, 그 뒤로 잠을 제대로 이루지도 못했다.

“음…….”

가볍게 뒤척거리던 기하가 거짓말처럼 눈을 떴다. 느리게 눈꺼풀을 깜빡거리는 얼굴을 다정하게 어루만지자, 배시시 웃는 얼굴엔 이제 당황함이나 놀람 따위는 없었다.

“폐하.”

낮게 잠긴 음성이 저를 부를 때면 가슴이 간질간질하다. 오직 이런 목소리로 저를 불러줄 이는 세상천지 서기하뿐이다.

“이것 좀 마셔.”

“무엇입니까?”

“꿀물이다. 속 쓰리지 않아?”

그제야 지난밤이 떠올랐는지 눈가를 살짝 찌푸리던 기하가 겸연쩍게 웃으며 꿀물 담긴 그릇을 받아들었다. 달고 시원한 물이 혀에 감기니, 마치 가뭄 때문에 쩍쩍 갈라진 논바닥이 해갈되는 것 같다.

“천천히 마셔. 그러다 탈 나겠다.”

입가를 손등으로 쓱 문지르고 나서야 제 매무새가 흐트러지지 않았는지 살피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황제는 기하의 양쪽 손목을 가볍게 붙잡았다.

“기하야.”

“예?”

무슨 말을 하려고 저렇게 망설이시는 것인지, 평소답지 않은 황제의 태도에 기하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저 손등을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시선을 떨어트린 황제는 한참 후에야 얼굴을 들고 그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쓸어 넘겼다.

“집에 그리 가고 싶었느냐?”

영문을 모르겠다는 기하의 표정에, 황제가 가벼이 미소했다. 서진하의 품에 안겨 펑펑 울던 것이 겨우 떠올랐는지, 당황함으로 물든 얼굴을 보니 웃음이 나려 했다.

“창피합니다.”

“뭐가.”

“그리 추태 부리고 우는 걸 보셨으면 얼른 말리셨어야죠. 앞으로 형님을 어떻게 뵙습니까?”

“뭐가 추태냐. 그리워 그런 것인데.”

집을 떠나온 지 너무 오래되었다. 그래, 그럴 수 있을 것이다. 아무리 설움당하고, 힘든 시간을 보냈어도 나고 자란 곳이다. 더욱이 그리 애틋해 하는 제 피붙이가 있는 곳이니 그리울 수밖에.

머리는 그렇게 이해하면서도 내내 불안했다. 혹여 그리움에 젖은 기하가 제집으로 돌려보내 달라 청하면 어쩌나. 안 된다고 하여 마음의 병을 얻기라도 하면 어쩌나. 그땐, 어떡해야 하나.

“…그리 가고 싶더냐?”

“그냥, 좀 생각이 났습니다. 폐하와 이리 함께 있는 것은 좋은데 그립고, 보고 싶고, 어서 돌아가고 싶고…….”

마음을 아프게 하는 말을 잘도 한다. 못된 것. 매정한 것.

“안 돼.”

의아해하는 기하를 품으로 덥석 끌어안으며, 황제는 단호하게 일갈했다. 안 된다. 절대 안 돼. 죽어도 그렇게는 못 한다. 다른 건 다 들어줄 수 있다. 심장을 꺼내달라고 한다면, 그것도 해줄 수 있다. 이별하는 것은 아니 된다. 멀어지는 것은 아니 된다.

“폐하?”

“안 된다. 절대 입 밖으로 꺼내지 마. 눈물로 사정해도 들어주지 않을 것이야.”

“폐하, 어찌 이러십니까.”

“너야말로 왜 이러는 거냐! 아무리 술에 취해 본심이 드러났다고 해도, 짐에게 너무한 것 아니냐?”

“설마, 신첩이 지금 집에 가고 싶다고 해서 화나신 것입니까?”

달리 화가 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서운한 마음이 들었을 뿐이다. 그것을 화가 났다고 표현하는 것은 어폐가 있었으나, 사소한 것에 시시비비를 가리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지금은 그보다 훨씬 중요한 일이 있지 않은가.

“어찌 그런 얼굴로 봐?”

영락없이 속 좁은 사내를 책망하는 표정이다. 뭐라 해도 넘어가지 않을 거다. 이따금, 기하의 당돌한 도발에 제가 홀라당 넘어가는 것을 황제 역시 알고 있었다. 물론 그것은 어디까지나 알면서도 속아 넘어가 주는 것이었다. 적당히 장단을 맞춰주는 일 또한 소소한 즐거움이었다.

하나, 이것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이다. 언제나 마음속에 불안을 담고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기가 차서 그렇습니다.”

“뭐야?”

“신첩이 뭐라고 했다고, 그것 가지고 타박이십니까?”

“타박이 아니라 짐은 그저…….”

저리 말하는 기하에게 서운한 것은 옹졸한 사내라고 손가락질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황제는 말을 이으려다 말고 긴 한숨으로 답을 대신했다.

금세 아니라고 웃어준다면 마음이 찝찝하더라도 참고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막상 이리 나오니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혹시 입을 잘못 열어, 서진하를 따라나선다고 하면 정말로 큰일이지 않은가.

“그저, 서운해서 그랬다.”

“서운하실 것도 많습니다.”

말은 퉁명스럽게 하면서도 입은 웃고 있다. 그것에 묘한 안도감을 느끼며 황제는 다시 기하의 손가락을 붙잡았다. 손가락 하나하나에 깍지를 끼고 절대로 쉽게 빼내지 못하게 힘을 주자, 아팠는지 눈썹을 찡그리면서도 손을 뺄 생각은 하지 않는다.

“폐하께서는 환궁하기 싫으십니까?”

“싫다.”

“신첩도 폐하와 이렇게 함께 있는 것이 좋습니다. 하지만, 궁에는 폐하와 신첩을 기다리는 아이들이 있지 않습니까. 폐하의 부재에 노심초사하고 있을 이들도요.”

“그것은―.”

“신첩은 얼른 집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우리 정연군이 밥은 잘 먹고 있는지, 잠은 잘 자는지. 현 상궁 홀로 다른 이들을 상대하며 곤란하진 않을지. 더위 탓에 통 먹지 못하고 있을 영이도 보고 싶고요.”

스르르 손을 내려놓는 황제의 얼굴 가득 의문이 서렸다. 기하는 그제야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폐하, 어찌 그러십니까?”

“너, 그러니까 어제 가고 싶다고 한 곳이 북성이 아니라…….”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까? 신첩의 집은 북성이 아니라 황궁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폐하이십니다.”

그제야 황제의 얼굴이 밝아지는 것에 의아함을 느끼던 기하는 불현듯 웃음을 터트렸다. 설마 취중에 한 말을 가슴에 담아두고 계셨던 것인가. 어째 용안이 평소보다 흐리다 하였더니, 그런 부질없는 걱정으로 밤잠을 설치셨구나.

“그래, 네 말이 모두 옳다. 네 집은 황궁인데, 짐이 어리석었다. 네 마음도 몰라주고, 정말 무정한 지아비다.”

천하의 황제 폐하께서도 이렇게 당황하시는구나. 그 모습이 몹시 즐겁고 새로워서 기하는 스스로 황제의 품으로 안겨들었다. 놀라서 잠시 움찔하던 그가 단단한 손으로 등을 쓰다듬으며 다독여주는 손길이 너무도 익숙하여서, 이제는 이 손길만으로도 마음이 읽히는 것 같다.

“기하야.”

지난날을 돌이켜보면 볼수록 후회뿐이었다. 후회하고 또 후회해도, 무엇으로 그 마음을 갚아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왜 그러십니까. 또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다정한 목소리는 꼭 어린 정연군을 달래는 것만 같다. 황제는 말없이 기하의 뺨을 쓰다듬었다. 물끄러미 바라본 눈동자 가득 제 모습이 담겨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이렇게 벅차오른다.

“폐하?”

“왜, 말하지 않았느냐.”

“무엇을 말입니까?”

“폐비와 환을 잡을 수 있게 도운 이가 너라는 것을, 어찌 말하지 않았더냐.”

억지임을 안다. 설령 기하가 그 말을 전했다고 해도, 그것을 고맙게 여기거나 어여쁘게 생각지는 않았을 것이다. 삐뚤어진 마음은 더욱 그에게 모질게 말하고, 더없이 커진 미움만이 날카로운 화살이 되어 그의 마음을 후벼 팠을 거다.

그래도 한 번쯤 말해 주었더라면. 스치듯 지나는 말이라도, 적어도 그것으로 인해 죽을 고비를 겨우 넘겨야 했던 끔찍한 나날을 조금이라도 먼저 알았더라면.

“그것이 중한 일입니까?”

천연덕스럽게 대꾸하는 기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황제는 가벼이 그 뺨을 쓸었다. 손가락을 붙잡은 것은 기하가 먼저였다. 빙긋이 미소하며 황제의 단단한 손으로 제 뺨을 문지르는 얼굴이 온화하게 빛났다.

“지금 짐에게는 중요한 일이다. 그 일로 인해, 네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담담한 음성이었다. 아무런 감정이 깃들지 않은, 서운한 내색조차 하나 없는, 지나치게 평온한 얼굴이었다.

“형님께서 처소에 갇히지 않으셨다면, 신첩보다 먼저 그리하셨을 것입니다. 의(義)를 행하는 것은 군자의 도리입니다. 사사로운 감정에 휩싸이지 않는 것 또한 그렇습니다. 스승님께 그리 배웠고, 아버님께 그리 가르침 받았습니다. 당연한 일을 한 것이니, 굳이 그 일을 꺼낼 이유 또한 없었습니다.”

“하지만, 너는 그 일로 인해 서연에게…….”

단정한 기하의 입매가 잠시 굳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그는 또다시 의연한 얼굴로 미소하며 황제를 마주했다. 부끄러움이나 당황함이 깃들지 않은 발간 얼굴에, 황제는 울컥 밀려드는 서러움을 느꼈다. 이 아이는 대체 얼마나 오래, 모든 것을 괜찮다고 여기며 버텼을까.

“옳은 일이었으나, 아버님을 배반한 일이기도 했습니다. 북성에 해가 되고, 백성들이 몰살당할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운이 좋아 목숨을 건졌으나, 만천하에 드러난 아버님의 치부를, 그 크나큰 분노를, 자식 된 도리로 어찌 거부하겠습니까. 의(義)와 충(忠)과 효(孝)는 다릅니다. 하나, 그것을 모두 지켜야 하는 것이 옳은 일이니 그 또한 당연한 일입니다.”

“우문현답(愚問賢答)이로다.”

빙긋이 미소하는 황제를 따라 기하는 말갛게 웃었다. 단 한 번도 그때의 일을 후회한 적은 없었다. 악다구니를 지르며 끌려가는 이모님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죄인의 몸이 되어 모진 고문을 받으시던 아버님을 마주하면서, 싸늘하게 퍼부어지던 저주를 들으면서도 후회하지 않았다.

“정의를 위해 혈족에게 등을 돌리는 것은 몹시 어려운 일이다.”

황제는 말없이 기하의 옷깃을 들춰 그의 몸에 난 상처를 살폈다. 그저 철없이 전장을 휘젓고 다니다가 난 상처인 줄로만 알았다. 그것이 그리 뼈아픈 기억의 조각이었더라면, 그런 줄 알고 있었더라면.

“기하야.”

“예, 폐하.”

“사모(思慕)한다. 마음 깊이, 오직 그대뿐이다. 그러니 그대, 앞으로는 절대 아프지 마라. 설령 그것이 짐 때문이라 하더라도, 그러지 마라. 좋은 것만 보고, 좋은 생각만 하고, 좋은 것만 먹고, 행복하기만 해라. 짐이 그렇게 할 것이다.”

“다른 것은 바라지 않습니다.”

그저 곁에만 있어 주신다면. 이렇게 잡은 손, 놓지 않으신다면 그걸로 충분합니다.

마음은 늘 하나뿐이었다. 가지고 싶었던 것 또한 그랬다. 혼자일 때는 그렇게 애달프더니, 단 하루만이라도 정인의 마음을 얻으면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만 같더니 사람이 어찌 이리 간사한 것인지. 하루가 이틀이 되고, 사흘은 닷새가 되고. 살면서 욕심이 나고, 살아 보니 더 행복해지고 싶었다.

욕심내고 싶다.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고 싶다.

“사모(思慕)합니다, 륜.”

아주 오래전부터, 그리고 그보다 훨씬 더 오래……. 륜의 곁에서 사모하고 사모 받으며 살고 싶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