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장 형제(兄弟)
얼굴 위로 피어오른 웃음을 애써 지우며 발걸음을 재촉하는 뒤로 발소리가 따라붙는다. 시끄럽고 어지러운 저자는 이제 막 집이나 객잔으로 돌아가려는 인파로 유난히 붐볐다.
그래도 용케 체면 따위 던지시고 잘 따라오신다고 생각하며, 기하는 그나마 인파가 적은 좁은 길로 몸을 돌렸다. 조금 돌더라도 이쪽으로 가는 편이 훨씬 수월하겠다는 생각을 할 즈음이었다.
“읏.”
사납게 어깨를 그러쥐는 손길이 낯설었다. 자신의 정인은 이런 식으로 저를 대하는 분이 아니었다. 어깨를 붙잡자마자 입을 틀어막는 우악스러운 손길에 놀란 기하는 잠시 숨을 멈추고 사납게 몸부림쳤다.
“쉿, 잠시 멈추십시오.”
낮고 투박한 음성이 귓가에서 들렸다. 그의 힘이 어찌나 센지, 몸부림을 치면 칠수록 점점 더 옥죄어 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어느새 눈까지 가려져 땅에 발을 질질 끌며 기하는 침착하게 생각을 가다듬었다. 단순한 납치인가? 아니면 원한 관계에 의한 것인가? 그것도 아니면 폐하께 누가 될 만한 이들인가?
“해를 끼치지 않을 것입니다. 잠시만……, 윽!”
사내가 말을 하느라 잠시 경계가 느슨해진 틈을 타, 기하는 온 힘을 쥐어짜 그를 밀어냈다. 사정을 봐주지 않고 주먹을 내리꽂으려 했지만, 거구의 사내는 제법 날쌔게 그것을 피했다.
그제야 복면을 뒤집어쓴 사내와 마주 서게 된 기하는 주위를 곁눈질하며 빠져나갈 공간을 찾았다. 등 뒤는 막혀 있었고, 양옆으로 난 길은 너무도 좁고 어두웠다. 사내의 뒤로 그와 비슷한 차림의 일행 서넛이 완벽하게 길을 막았다. 앞을 뚫고 도망갈 수는 도저히 없을 것 같았다.
“목적이 뭐냐.”
“해를 끼치지 않을 것입니다. 그저 조용히 저희를 따르시기만 하십시오.”
“누군지도 모르는 너희를 이유도 없이 따르라니, 내가 그렇게 멍청해 보이나?”
그들은 아주 짧은 순간 서로에게 눈짓했다. 아마 사방을 에워싸 어떻게든 붙잡으려는 것일 테다. 그들의 수는 모두 다섯으로 한눈에 보아도 보통 사내들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마냥 멍청하게 붙잡힐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조용히 따라 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뻔뻔하게 납치하려 했던 이들의 부탁이라. 온몸을 무장하고 있는 주제에 검을 꺼내지도 않는다. 혈혈단신 맨몸뚱이인 자신을 지나치게 의식하고 있다. 그들은 분명, 서기하의 존재를 알고 있다.
“누가 보냈지?”
“시간이 없습니다.”
“주절주절 떠드는 걸 보니, 달리 그런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씨익 웃으며 기하는 살짝 몸을 낮췄다. 손에 알맞게 잡힌 돌은 그리 훌륭한 무기는 아니었지만, 충분히 시선을 끌 수 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수련을 조금 더 열심히 할 것을. 근래에 제대로 수련하지 않았더니 확실히 몸이 무거웠다. 만약을 대비해 품 안에 남겨둔 단검은 아껴두기로 했다.
“더 이상 오지 말고 멈춰라.”
시간을 조금 더 끌어야 한다. 시간만 끈다면 어떻게든 그가 찾으러 올 것이다. 그때까지만, 딱 그때까지만.
“왕자님.”
사내들을 향해 납작한 돌을 표창 던지듯 던지려던 기하의 손이 허공에서 멈칫했다. 실로 오랜만에 듣는 호칭에 잠시 홀리기라도 한 듯한 기분이었다.
“정말로 시간이 없습니다. 황제에게 발각되기 전에…….”
사내가 우직한 음성으로 중얼거리는 것을 의아하게 바라보던 기하의 눈빛이 서늘하게 흔들렸다. 그의 뒤로 다가오는 익숙한 얼굴 때문이었다.
잘못 본 거라고 생각했는데, 역시나 그가 맞다. 형님의 오른팔이었던 흑마단 최장명. 다른 이들과 달리 복면을 벗고 다가오는 최장명은 사나운 눈매와 뺨의 긴 흉터를 훈장처럼 여기는 사내였다.
“그대가 어떻게…….”
“황제 일행이 지척에 있습니다. 몸을 낮추셔야 합니다.”
“알아듣지도 못할 말을 툭툭 내던지는 고약한 버릇은 여전하네.”
“지체할 시간이 없습니다.”
점점 더 가깝게 다가오는 이들을 향해 경계심을 띄우는 기하의 표정이 묘했다. 요란했던 저자의 풍경이 사그라졌다. 상인들이 천막을 거두고, 술주정뱅이의 노랫소리만이 간간이 들리는 거리는 어두웠다. 거구의 사내가 연신 주위를 둘러보았고, 최장명은 특유의 뻔뻔한 얼굴로 기하를 향해 머리를 숙였다.
“세자 저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형님께서?”
반가운 소리였지만, 쉽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들을 믿어도 되는 것일까. 형님께선 대체 어쩌자고 이런 명을 내리신 것일까. 그것보다, 어떻게 알고 저를 찾아오셨을까. 무엇보다 말도 없이 사라지면 황제께서 걱정하실 텐데.
“저하.”
“미안하지만, 이대로는 갈 수 없다. 내가 머무는 객잔으로 찾아오도록 해.”
“황제의 아가리에 저하를 밀어 넣으려 하심입니까.”
“못 본 새에 그대 입이 많이 거칠어졌군.”
“저하께서야말로 못 뵌 사이에 북성과 왕세자 저하를 완전히 잊으신 것 같습니다.”
팽팽한 두 사람의 시선이 교묘하게 뒤틀어졌다. 어느새 기하를 완전히 에워싼 이들이 검을 뽑아 들었다. 순순히 길을 터줄 생각은 애초에 없는 것 같고, 이대로 돌파하기엔 자신의 맹점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세자 저하께서 왕자님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저희와 함께 돌아가시지요.”
“형님께 전해. 나 또한 형님을 어서 빨리 뵙고 싶다고. 사정이 좋지 않다는 것은 들어서 알고 있다. 이렇게 무작정 나를 데려가는 것은, 상황을 더 악화시킬 뿐이야.”
“어찌 스스로 볼모가 되려 하십니까! 저하를 모시기 위해 이천 리를 달려왔습니다. 시각이 촉박합니다.”
차랑. 그들이 검이 기하를 향했다.
“반드시 저하를 모셔오라는 분부가 있었습니다. 불충함을 용서하십시오.”
한 걸음 다가서는 최장명을 향해 기하는 품 안의 단검을 뽑아 들었다. 그것이 그에게 충분한 위협이 되지는 못할지언정, 잠시나마 발을 멈추게 할 수는 있을 거다.
“가까이 오지 마라.”
최장명의 검집이 날아들었다. 차마 검을 뽑을 수는 없었던지 투박하게 날아든 검집의 위력은 실로 대단했다. 타앙, 소리와 함께 그것을 막아선 기하는 힘의 반동에 짧게 뒷걸음질 쳤다. 겨우 한 뼘이나 됨직한 단검으로 최장명의 힘을 받아내기란 역부족이었다.
“그만.”
바람 소리와 함께 낮고 근엄한 음성이 들렸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기하를 향해, 최장명의 검집이 길게 호선을 그렸다. 뒤늦게 그것을 발견한 기하는 그대로 휘청거리며 꼴사납게 바닥으로 널브러졌다.
정확한 순간을 노리고 들어온 최장명은 기하에게 닿지도 않은 검집을 거둬들이며 자신의 주군을 향해 머리를 숙였다.
“형님…….”
다섯 해가 지났다. 마차를 타기 전 돌아보았던 얼굴엔 침착한 분노가 녹아 있었다. 그 얼굴을 기억한다. 그 목소리를 기억한다.
“형…….”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뚜벅뚜벅 걸어온 서진하는 최장명에게 다가가 그의 뺨을 사정없이 내리쳤다. 그 서늘한 분노에 입을 여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입술이 터진 최장명은 꿈쩍도 하지 않고 서진하의 다음 처분을 기다릴 뿐이었다. 혹시나 그자가 형님을 배반하고 저를 붙잡으려던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했던 기하의 불안은 일순간 사라졌다.
“감히 누구에게 손을 대.”
“송구합니다.”
흙먼지를 뒤집어쓴 기하는 몸을 일으킬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저 물끄러미 서진하를 올려다봤다. 마치 꿈인 것도 같았고, 그의 냉랭한 얼굴이 꼭 다른 사람 같기도 했다. 5년이란 시간 동안 그는 너무도 많이 변했다. 늘 다정다감하게 머리를 쓸어주시던 형님이 아니었던가.
“기하야.”
낮고 힘 있는 음성은 나이가 들수록 아버지와 닮아갔다. 지나치게 냉정했던 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라, 기하는 자신을 부르는 그에게 쉽게 손을 내밀지 못했다. 뚜벅뚜벅 걸어오는 서진하를 따라 시선을 옮기다가 그를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자리를 옮기는 것이 좋겠다.”
“형님, 저는…….”
“쉿, 얘기는 가면서 하자. 시간이 없어. 곧, 황제가 들이닥칠 것이다.”
직접 기하를 일으키고 옷을 털어주는 손길은 예전처럼 다정했다. 이전보다 훨씬 단단해진 손가락, 더 깊어진 눈빛과 담담한 음성, 모든 것이 맞다. 늘 그리워했던, 보고 싶었던 하나뿐인 형제다.
“저는 갈 수 없습니다.”
한 걸음 뒤로 물러선 기하의 목소리에 서진하의 얼굴이 굳어졌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하는 표정에 기하는 짧게 숨을 몰아쉬었다. 꿈에서조차 기대하지 않았던 해후(邂逅)를 즐길 시간 따윈 없었다.
황제께 반기를 든 그들은 지나치게 위험했다. 설령 황제께서 너그럽게 이해하신다 해도, 그들이 어떤 마음인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마주침은 피해야 했다.
“저는 잘 지냅니다. 하니, 제 걱정은 마세요. 묻고 싶은 것과 하고 싶은 얘기가 많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 됩니다. 가세요, 형님. 곧 폐하께서 오실 것입니다.”
“나는 너를 데려간다.”
“형님.”
“너를 이대로 두고 가지는 않을 것이다.”
서진하의 확고한 음성에 기하는 잠시 말을 멈췄다.
“저를 데려가셔서, 어쩌시려고요?”
설마 저를 빌미 삼아 황제께 뭔가 거래를 제안한다든가, 그런 것은 아니겠지. 아무리 저를 아끼고 누구보다 다정한 형님이시더라도, 그는 북성의 왕세자다. 다음 대에 왕이 될 사람이고, 아버지보다 훨씬 더 북성을 아끼고 백성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그래,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널 안전한 곳에 둘 것이다. 그러니 안심하고 나와 함께 가자. 네 형수와 조카도 기다리고 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기하야, 위험하지 않다. 넌 다른 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아니요. 그분을 홀로 두고 갈 수 없습니다. 그러니 형님, 폐하께서 오시기 전에 어서…….”
요란한 먼지바람이 일었다. 순간 서진하의 얼굴에 짙은 낭패감이 드리워졌다. 그것은 기하 또한 마찬가지였다. 최장명이 호기롭게 그들 앞을 가로막았으나, 무장한 금룡대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황제의 표정은 심상치 않았다.
“폐하…….”
“이리 와.”
황제가 손을 내밀었다. 기하의 앞을 막아선 흑마단과 서진하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것처럼, 그는 오롯이 기하만을 바라봤다. 슬그머니 눈치를 살피던 기하는 조심스럽게 한 걸음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 순간, 서진하가 그의 앞을 막아섰고 황제의 얼굴이 사납게 꿈틀거렸다.
“빈에게 손대지 않는다면, 지금 이 일은 없던 것으로 하겠다.”
“두 번 다시는, 이 아이를 위험에 빠트리지 않을 겁니다.”
“위험?”
황제가 가볍게 코웃음 치며 한 걸음 앞으로 다가왔다. 그 대단한 기백에 눌린 흑마단이 움찔 놀라는 사이, 황제의 검이 뽑혔다.
“그대가 내 빈의 하나뿐인 형제라 봐주는 것이다. 하나, 나의 인내심이 그리 깊지 못해.”
“하나뿐인 아우가 불구덩이로 걸어 들어가는 것을 보는 것은, 한 번으로 족합니다.”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는 어디로 날아갈지 모른다. 황제와 마찬가지로 검을 뽑아 든 서진하를 뒤에서 바라보던 기하는 초조하게 주위를 살폈다. 표정이 변한 금룡대나 화가 잔뜩 나 있는 황제를 막아서기란 불가능해 보였다.
그렇다고 흑마단이 쉽사리 물러날 것 같지도 않았다. 무모하지만, 어쩔 수 없다. 서로를 향한 칼날을 잠재울 수만 있다면.
“마마!”
“왕자님!”
서진하의 왼쪽을 지키던 흑마단의 팔을 비튼 기하는 그가 움찔하는 사이에 빙 돌아 사내의 팔로 제 목을 스스로 감쌌다. 서엽에게 선물하려 했던 단검은 저자에서 고른 것치고는 날이 잘 서 있었다.
“기하야!”
“물러서십시오, 형님.”
아마 제 형제는 저를 버리지 않을 것이다. 단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으니, 이제 와 새삼 그를 의심할 이유도 없다. 그리고 그것은, 제 정인 또한 마찬가지다.
“왕자님, 어찌 이러십니까.”
“잠자코 있으면 돼. 누구도 다치지 않을 것이다.”
사내의 손이 떨렸다. 자칫했다간 칼날이 그대로 기하의 목을 파고들 것이다. 그는 침착하게 숨을 고르면서 기하의 꼭두각시 노릇을 충실히 이행했다.
“길을 트세요. 저는 폐하께 갑니다.”
“너, 어찌 이런…….”
“폐하, 약속하십시오. 제가 폐하께 무사히 가면, 누구도 벌하지 않으시겠다고요.”
기하의 당돌한 제안에 황제는 쉬이 대답하지 못했다. 간신히 죽이고 있던 분노가 치렁치렁하게 차오르는 것이 보인다. 아마 돌아가게 되면, 이렇게 무턱대고 움직인 것에 크게 혼이 나겠지. 그렇다 해도 지금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폐하.”
“약속한다. 그러니 그대, 그 검부터 치워.”
황제의 수려한 미안이 찌푸려졌다. 기하는 그저 말갛게 웃으며 한 걸음 발을 내디뎠다. 덜덜 떠는 흑마단의 팔을 단단하게 붙잡으며, 서서히 뒤로 물러서는 서진하의 눈을 바라봤다. 안타까움과 절망으로 일그러진 형제의 얼굴에 웃음이 날 것 같기도 했고, 눈물이 날 것 같기도 했다.
“기하…….”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다가서는 서진하를 향해 기하는 단호하게 머리를 저었다. 그 때문에 목에 닿은 검날이 살갗을 파고들었다. 깊은 상처는 아니었으나 날카로운 검이 피부를 쓸자, 붉은 핏줄기가 그 끝을 타고 흘렀다. 황제와 서진하가 그 모습에 발끈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쉽게 움직이지 못했다.
기하는 천천히, 아주 느린 걸음으로 황제에게 향했다. 혹여나 저의 잘못으로 기하가 잘못되기라도 할까 봐, 흑마단은 손에 힘을 있는 대로 빼고 충실한 꼭두각시 노릇을 했다.
긴 시간이었다. 모두가 그렇게 느꼈다. 서진하에게 완전히 등을 보인 기하는 조금 더 빠르게 황제를 향해 걸었다. 어느새 느슨하게 풀린 사내의 손을 물리치고, 제게 팔을 벌린 황제의 품으로 뛰어들어 안기는 아우의 모습에 그는 망연자실하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탁. 타악.
황제의 금룡대가 흑마단을 향해 활을 겨누었다. 숱한 전쟁에 이골이 난 흑마단은 두려워하는 기색 하나 없이 검을 단단하게 부여잡으며 눈을 빛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향해 겨눈 화살과 검이 당장에라도 날아들 것만 같은 순간이었다. 황제와 서진하가 동시에 손을 들었다.
“약속을 지킨다.”
“폐하!”
피부가 상한 것뿐이었으나 황제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 기하의 드러난 목덜미를 손가락으로 쓸었다. 겨우 차가 식을 정도의 짧은 순간이었다. 제 눈앞에서 감쪽같이 사라진 정인을 찾는 그 시간 동안 피가 차게 얼어붙는 것만 같아 눈앞이 아찔했다. 이제 됐다. 이렇게 무사히 품으로 돌아왔으니, 이제 그만 되었다.
“검을 거둬라.”
“저하.”
“나의 아우가 저기에 있다. 저 아이에게 검을 겨눌 수는 없다.”
주위가 완전히 어두워졌다. 시끌시끌했던 거리의 소음이 잦아들었다. 삽시간에 찾아든 무거운 침묵을 먼저 깨트린 것은 검을 제자리에 집어넣은 임승지였다.
“객잔으로 갑시다.”
“미친 거냐.”
“미친 것은 감히 마마를 납치하려 했던 자네들이지. 환한 곳에 가서 얘기합시다. 어차피 날 밝으면 만나기로 한 것 아니었소? 시간 좀 당긴다고 해서 달라질 게 뭐요.”
최장명의 사나움에도 임승지는 전혀 거리낌 없이 웃으며 삐딱하게 섰다. 황제를 보필하는 금룡대의 수장이라기엔 지나치게 불량스러워, 최장명은 임승지를 향해 이를 바드득 갈았다.
“나의 빈 또한 원할 테니 그렇게 한다. 한 시진 뒤에 객잔으로 찾아와라. 약속 시각을 당긴다.”
황제는 다른 쪽으론 시선조차 주지 않고 오직 기하만 바라봤다. 제 옷깃으로 그의 목덜미를 닦으며 뒤를 돌아본 황제가 비릿한 웃음을 내지었다.
“감히 겁도 없이 나의 빈을 납치하려 한 죄는, 그때 가서 물으마.”
“폐하.”
약속이 다르다. 혹여나 제 형제가 위험에 처할까 봐 황제의 옷깃을 붙잡고 낮은 음성으로 속삭이는 기하의 눈동자가 힘없이 흔들렸다.
“너는 객잔에 가서 보자.”
“폐하, 저기…….”
“입 다물고 얌전히 따라와.”
기하는 사납게 으르렁거리는 황제의 눈빛에 절로 고개를 숙이며 슬쩍 뒤를 돌아봤다. 망연자실한 얼굴로 서 있는 서진하를 바라보니, 그제야 민망함에 미소가 지어졌다. 형님, 입술을 방긋거려 그를 불렀다. 괜찮다. 괜찮을 것이다. 모든 것은 전부, 이전처럼 편안해질 것이다.
객잔으로 향하는 내내 황제는 말이 없었다. 좁은 길을 돌고 돌아 객잔 앞에 설 때까지, 기하는 황제의 손에 팔목을 붙잡혀 그의 빠른 걸음에 몇 번이나 넘어질 뻔한 고비를 가까스로 넘겼다.
“너희는 각자 자리로 돌아가 서진하를 맞을 준비를 해라. 빈을 놓친 죄는 내일 묻겠다.”
머리를 숙이는 임승지를 향해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인 기하가 다시 황제의 손에 이끌렸다. 오래된 나무가 삐거덕거리는 계단을 밟고 올라가는 상전의 뒷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보며 승지는 제 목을 벅벅 긁었다.
“대장, 저희 내일 죽는 것입니까?”
“마마를 찾지 못하면 죽인다고 하셨지 않습니까? 마마를 찾았는데 설마 죽이실까요?”
“시끄럽다, 이놈들아. 어서 돌아가 자리나 잘 지켜.”
긴 밤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륜, 저기…….”
방문을 닫으며 기하의 손을 확 뿌리치는 황제의 사나운 손짓이 살벌했다. 힘의 반동으로 그대로 침상 쪽으로 넘어진 기하는 얼른 몸을 일으켜 반듯하게 허리를 펴고 단정하게 앉았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으니 머리가 절로 아래로 내려갔다.
“너, 대체…….”
숨을 몇 번이나 멈췄다가 말을 내뱉는 황제의 손이 바르르 떨렸다. ‘참을 인(忍)’ 자를 가슴에 새기며 몇 번이나 말을 멈추고 숨을 내쉬는 황제의 처분을 기다리는 내내 마음과 머리가 어지러웠다.
“…잘못했습니다.”
“잘못인 줄은 알고 있는 것이냐?”
“예.”
“잘못인 줄 알면서!”
버럭 소리치다 가까스로 눈을 감고 숨을 고르는 황제를 물끄러미 올려다보던 기하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이토록 화를 내는 그의 모습이 생경했다.
이제는 기억조차 희미한 예전에도 그저 비웃거나 가슴에 상처 되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툭툭 할 뿐이었지, 이렇게 소리치고 화를 삭이는 모습은 익숙하지 않았다.
“폐하…….”
“왜 네 멋대로 그런 짓을 해!”
“잘못…….”
“죽으려 했더냐?”
“아닙니다!”
“아니면! 어찌 스스로 볼모가 돼?”
“그것은…….”
“어찌 네 목에 칼을 겨눠! 그것도 짐의 눈앞에서!”
믿었기에 그랬다. 그를 믿고, 하나뿐인 형님을 믿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나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가 않았다. 어찌 되었든, 그들을 위한다는 미명 아래 제가 한 행동은 못된 장난이 분명했다.
“서기하.”
기하의 양팔을 단단하게 붙잡는 황제의 두 눈 가득 분노가 서렸다. 기하는 그제야 자신의 잘못을 절감했다. 그의 마음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한 탓이었다.
“약속해라. 다시는, 다시는 그러지 마라.”
“예.”
“짐 또한, 다시는 너를 위험에 빠트리지 않을 것이니. 반드시 너를 지킬 것이니, 다시는―.”
“예, 폐하.”
긴 한숨과 함께 황제의 손이 툭 떨어졌다. 기력을 전부 소진한 사람처럼 창백해진 황제를 바라보던 기하는 말없이 그의 목에 매달리듯 팔을 둘렀다.
“죄송합니다.”
“눈앞이 새카매졌다.”
“형님께서 오해하고 계시어, 쉽게 믿지 않으실 것 같았습니다.”
숨소리가 거칠었다. 세차게 뛰는 심장의 울림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기하는 망설이다 황제의 가슴 위로 손바닥을 댔다.
“그저, 륜께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밖에는 나지 않아서 그랬습니다.”
“…….”
“용서해 주세요.”
넘치는 애틋함을 그대로 두고 황제는 기하를 끌어안았다. 귓가에 달콤한 웃음이 번졌다. 나락으로 떨어질 것만 같았던 그 순간의 초조함이 다시금 떠올랐지만, 이제는 괜찮다. 이제는 곁에 있다. 이렇게, 곁에 있다.
여덟 명의 금룡대와 여섯의 흑마단은 팽팽한 시선으로 서로를 마주했다. 일렬로 늘어선 그들의 쏟아내는 기가 어찌나 강렬한지, 황제의 곁에 앉아 있던 기하는 짧게 신음을 흘리며 머리를 짚었다. 그간 기가 약해지긴 한 모양이다.
“마마.”
“왕자님.”
사내들이 일제히 기하를 걱정스럽게 바라봤다. 그의 곁에 선 황제와 맞은편에 서 있던 서진하 역시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의 시선이 제게 향하자 괜스레 머쓱해진 기하는 눈 둘 곳을 찾았다.
“마마께서 황제 폐하의 후궁에 봉해지신 지가 벌써 다섯 해인데, 흑마단은 어찌하여 호칭도 제대로 부르지 않는가.”
“볼모나 다름없는 황궁 생활 중, 언제 다시 북성으로 돌아오실지 모르시지 않습니까. 북성의 뜨거운 피가 어디로 사라지는 것도 아니니, 존경과 신망을 담아 영원히 저희의 왕자님으로 모실 것입니다.”
“누구 마음대로 그따위 말을 입에 담는 것이냐? 황실에서 가장 귀한 분이시다. 볼모라니?”
험악한 인상의 최장명은 버럭 소리치는 임승지를 한심한 눈으로 쳐다봤다. 명색이 황제 폐하를 곁에서 모시는 금룡대장이라는 자가 가볍기가 새털만큼이나 가벼웠다. 당장에 검을 빼들 듯 조급하게 구는 임승지를 향해 최장명이 짧게 혀를 찼다.
“어디서 감히 혀를 차? 그거 확 뽑아내 줄까?”
“천박하기가 이를 데 없군그래. 황제 폐하를 곁에서 모신다고 그대가 황제라도 되는 줄 아시오?”
“뭐야?”
생각을 잘못했다. 검이 아니라 주먹이나 발이 먼저 날아들 것만 같다. 당장에 소매부터 걷어붙이는 임승지를 양쪽에서 붙든 금룡대가 난처한 표정으로 그를 진정시켰다. 무심한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고 계시는 황제 폐하의 시선을 눈치채야만 멈출 셈인지, 승지는 살 오른 닭을 잡으려는 살쾡이처럼 요란하게 눈을 빛냈다.
“다 떠들었느냐.”
“폐하, 저자의 방자함을 꾸짖을 수 있게 윤허하여 주십시오.”
“짐이 지금 네 재롱에 놀아날 기분이 아니다.”
아마 다정하게 손을 잡아주는 기하만 아니었더라면, 당장에 욕지거리하며 승지를 걷어찼을지도 모른다. 명색이 금룡대장이라는 놈이 채신머리없이 구는 꼴에 혀가 절로 차였다.
“모두 물러나도록 해.”
“그것은 아니 될 말씀입니다, 폐하. 명을 거두어주시옵소서.”
임승지의 단호한 말에도 황제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간절한 승지의 눈빛에 기하는 가만히 머리를 가로저었다.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에 마주한 피붙이조차 믿지 못하는 실정이라니, 입이 쓰고 가슴이 쓰라려 서러움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이곳에 짐에게 위해를 가할 자가 있더냐.”
“폐하.”
“나의 빈과 그의 하나뿐인 형제다. 지난날의 회포를 모두 풀기에는 밤이 짧으니, 어서 물러나.”
“폐하, 하지만―.”
“폐하의 말씀이 모두 맞습니다. 장명, 아이들을 모두 물려라.”
“예, 주군.”
순순히 물러나는 최장명과 그의 수하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임승지가 황제와 기하를 향해 머리를 숙였다. 황궁 밖에서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황제의 곁에서 멀어지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다.
불시에 들이닥칠 위험에 대비하기 위해 겨우 문 하나만을 사이에 두고 정렬하는 금룡대의 움직임이 유난히 부산스러웠다. 마치, 황제와 마주하고 있는 서진하를 향해 우리는 모두 여기 있다는 소리를 대신하는 것만 같았다.
짧은 침묵이 세 사람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을 만들었다. 황제의 손을 붙잡고 그의 눈치를 살피던 기하가 슬그머니 의자를 뒤로 밀며 일어났다.
이래도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마음이 먼저 움직이니 더는 지체할 생각을 할 수도 없었다. 황제의 손을 밀어내며 기하는 단번에 서진하의 앞으로 향했다. 때마침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기다렸다는 듯 양팔을 넓게 벌렸다.
어린 시절, 언제나 저 품에 안겼었다. 아무도 자신을 돌아봐 주지 않을 때도, 그 누구도 따뜻하게 보듬어 주지 않을 때도, 사람의 온기가 그리워 밤잠을 이루지 못할 때도 늘 한결같이, 다정하게 보듬어 주었었던 품.
“형님.”
이제는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되어버린 형제의 품은 이전처럼 따뜻하기만 했다. 그저 말없이 등을 다독여주는 커다란 손. 늘 괜찮다고 위로해주던 따뜻한 손. 그립고, 그립고, 또 그리웠던, 나의 형님.
“잘 지냈구나.”
“예, 소제는 잘 지냈습니다.”
“건강해 보여 다행이다. 내내 걱정하였다. 어디, 얼굴 좀 보자.”
뺨을 어루만지다 이내 어깨를 다독여주는 손은 투박하기만 했다. 아버지를 빼닮은 서진하와 어머니를 닮은 기하가 유일하게 닮은 것은 못생긴 손뿐이었다. 주먹과 주먹이 맞닿았다. 빙긋이 웃으며 어릴 때처럼 주먹을 맞대자, 이제는 완전히 흐려진 옛 기억에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형제간의 정다운 시간을 방해하는 것 같아 미안하지만, 회포는 차차 푸는 것이 어떤가.”
날카롭기만 했던 서진하의 눈빛이 유순하게 변했다. 황제는 그의 변화에 희미하게 웃으며 기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리워했던 형제를 만나 기뻐하는 모습은 보기 좋으나, 아무리 형제지간이라 하더라도 다른 사내의 품에 안겨 있는 정인을 보려니 괜한 심술이 나려 했다.
“빈.”
황제의 손을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더욱이, 이제 완전히 오해를 푼 것 같은 황제와 서진하의 부드러운 표정을 보니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그가 내민 손을 맞잡으며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기하는 웃으며 서진하를 바라봤다. 형제의 떨떠름한 표정이 재밌었다. 어릴 때부터 그는, 뭔가 마음에 들지 않은 일이 있을 때면 꼭 저런 표정을 지었다.
“기하와 함께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기다리다 난데없이 아우를 보니, 혹 폐하께서 아우를 빌미 삼으실까 조바심이 났습니다.”
“내 아무리 애틋하게 아껴준다 한들, 나고 자란 고향과 가족이 그립지 않을 수는 없겠지. 잠시나마 그대와 시간을 보내게 해주고 싶었다. 아무리 먼 곳에 있어도 충분히 오갈 거리이나, 지금은 그럴 수 있는 형편도 아니지 않나.”
손가락 마디 하나하나를 섬세하게 쓰다듬어 주는 황제의 손길에도 기하는 굳어진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따뜻하고 다정하지만, 뼈가 숨어 있는 말이었다.
서진하 역시 굳은 얼굴을 숨기지 않았다. 아우를 만난 것은 분명 기쁘고 좋은 일이었으나, 앞으로 나아갈 길이 캄캄했다.
“다정하신 배려에 크게 감동했습니다.”
“그래. 그래서, 그대는 아우의 안위나 마음 따위는 생각하지 않고 어디까지 일을 벌일 셈인가.”
황제는 한 치도 물러나려 하지 않았다. 본디 그는 서서히 사냥감의 목을 죄는 방법을 즐겼다. 시간을 두고 오래오래, 상대의 몸부림치는 모습을 음미하는 것이 그의 방법이었다. 그런데 자꾸만 조바심이 났다.
“나는 나의 빈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할 생각이다. 베갯머리송사라도 원한다면 들어줄 생각이었어. 물론, 나의 정인은 그런 기교도 없다. 원하면 들어준다고 했더니, 선입견을 두지 않고 그저 현명한 판단을 내려달라고만 부탁했다.”
욕심에 눈이 멀어 수많은 백성을 거리로 내모는 너희와는 다르다. 신의도 충심도 저버리고, 오직 빛나는 것만 욕심내는 너희와는 다르다. 나의 하나뿐인 서기하는 그런 너희를 오롯이 이해하지도 못하고, 그 잘못을 용서해 달라고 빌지도 못했다. 가슴이 찢기는 고통을 홀로 떠안고 매일매일 초조하게 살고 있다. 그런 너희를, 내가 어찌해야 할까.
“소신은, 몇 달 전 북성을 떠났습니다.”
“그래, 그렇다고 들었다.”
“소신을 따르는 자들이, 아직 절반 넘게 북성에 남아 있습니다.”
묵묵히 서진하의 얘기를 듣던 황제의 표정이 오묘하게 변했다. 서진하가 북성을 떠난 것은 익히 알고 있었다. 북성의 실권을 잡은 것이 서진하라고 했다. 아직 왕권을 물려받지 않았음에도, 그는 마치 왕처럼 행동하며 북왕 서연을 뒤흔들고 있다고 했다.
황제의 뜻을 꺾은 것은 서진하였다. 사신의 목을 잘라 돌려보낸 것 또한 서진하다.
“북성에선,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나.”
“북성은 이미 오래전, 갈기갈기 찢겼습니다. 폐하.”
참담하게 변한 서진하의 표정에 기하의 손끝이 바르르 떨렸다. 황제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정인의 손을 단단하게 붙잡았다. 더는, 이 아이가 상처받는 일은 없어야 한다.
그곳이 썩어가기 시작한 것은 여러 해 전입니다. 아니, 어쩌면 아주 오래전. 그러니까 도저히 가늠할 수도 없을 정도로 오래된 일일지도 모릅니다. 북성은 서서히 메말라 갔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는 이들이 거리에 넘쳐나기도 했습니다.
북성의 자랑이던 강한 군대는 모두 떠돌이 장사치가 되었습니다. 겉으로는 흑마단 소속이라 했지만, 실상은 그저 용병에 불과했습니다. 누군가의 시체를 치우고, 또 누군가의 목을 자르고, 다른 누군가의 비밀을 묻으면서 버러지처럼 살았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백성들은 제 아들이, 남편이, 혹은 아버지가 개 같은 죽음을 맞아도 그저 왕을 위해 싸웠다며 자랑스러워했습니다.
혹독한 겨울이 오면 누군가는 죽고, 또 누군가는 겨우겨우 삽니다. 지긋지긋한 가난이 이제는 너무도 익숙해졌지요. 왕족으로 태어나 가장 귀하게 자란 소신조차 늘 배고픔에 허덕였습니다.
한데, 세상을 둘러보니 의문이 들었습니다. 어째서 나의 백성들은 그토록 가난에 절어 살고 있는가. 어째서 폐하께서는, 아무 죄 없는 폐하의 백성이 거리에서 죽어가도록 내버려 두시는가.
그리고 알았습니다. 너무 늦었지만, 이제야 겨우 알게 되었습니다.
“기하야.”
덜덜 떨리는 손을 붙잡은 황제는 창백하게 질린 기하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서진하의 참담한 얼굴을 마주하려니, 저도 모르게 바짝 긴장한 것 같았다. 그 모습이 가엽고 안타까워 괜찮다는 의미를 담아 웃었지만, 기하의 표정은 쉬이 변하지 않았다.
“밤이 늦었다. 곤할 테니 먼저 들어가는 것이 좋겠다. 정다운 시간은 내일도 있으니 염려 마라.”
“하지만…….”
“짐도 곧 나서마.”
머릿속에 차오른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도저히 제 머리로는 제대로 된 생각을 유추할 수 없었다. 묻고 싶은 것과 궁금한 일들이 너무도 많았으나, 완곡하게 돌려 말한 황제의 명을 거역할 방법은 없었다.
“하면, 신첩은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형님, 평안한 밤 되십시오.”
“그래. 잘 자고, 내일 보자꾸나.”
기하의 얼굴엔 아쉬움이 가득했다. 아마 얼굴을 맞대고 못다 한 이야기를 밤새 풀고 싶겠지.
술을 한잔 기울여도 좋고, 좋아하는 음식을 잔뜩 사다 먹여도 좋을 것 같다. 혈색이 나쁘지는 않지만, 그래도 예전보다 부쩍 마른 아우의 안부조차 제대로 묻지 못했다. 미안하다는 말, 괜찮다는 말, 아무 걱정 하지 말라는 그 말 또한.
“기하가 생각보다,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생각을 어찌 하였길래.”
“외면받고 핍박받고, 홀로 외롭게 지내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한때는 그랬던 적도 있었다.”
황제의 의연한 음성에 서진하는 표정을 딱딱하게 굳혔다. 입궁하던 순간부터 날아든 몇 통의 서찰에서는 늘 잘 지낸다는 말뿐이었다. 잘 지낸다, 생전 거짓을 입에 올리는 법이 없던 아우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거짓 고백이었다.
“미워서 외면했다. 미처 관심조차 주지 못했던 날이 길어. 그때만 생각하면 눈앞이 하얗게 흐려진다. 홀로 외롭게, 괴물이 득실거리는 그곳에서 지냈을 생각을 하니.”
조금 더 빨리 알아채지 못했던 마음과 조금 더 빨리 바라보지 못했던 시간. 되돌릴 수 없는 기나긴 세월의 틈에서 홀로 상처받고, 스스로 치유하며 지낼 수밖에 없었던 그 긴 시간을 어떻게 보상해야 할까.
“저 아이만 생각하면, 마음이 시리다.”
시큰거리고 아팠다. 태어나 단 한 번도, 이렇게 심장이 욱신거렸던 적이 없었다. 그런 마음을 가져본 적도 없었다. 낯설기만 한 이 마음을 어찌해야 할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기하가 우는 일은, 만들지 않을 생각이다.”
“…….”
“그대도 도와야 할 것이다.”
“신이 무엇을 해야 합니까.”
“북성을 살릴 것이다. 서연을 버리지 않을 것이다. 기하가 원한다면, 여생을 편히 보낼 수 있게 하겠다.”
황제는 선선히 말했다. 태연히 자신을 바라보던 서연의 비웃음 가득한 얼굴이 아직도 선명했다. 다시는, 다시는 그의 얼굴을 보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죽는 날까지 그를 저주하고, 살아 있는 것이 고통스럽게 하겠다고 생각했다.
분노는 차게 식어 이성을 짓눌렀다. 모멸감으로 벌벌 떠는 그의 아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 또한 했다.
그리고 곧, 잊었다. 잊을 수밖에 없었던 시간을 핑계 삼아, 그것보다 더 중한 일을 빌미 삼아, 까맣게 지워버리고 하얗게 덜어냈다.
“아버님께서는 이미 소신을 내치셨습니다. 북성은 곧, 폐하께 반기를 들 것입니다. 죽을 각오로 덤비고 물어뜯으려 할 것입니다.”
“그대가 왕이 되라. 왕이 되어, 그대의 나라와 그대의 백성 그리고, 그대의 아비를 살려.”
“무엇이 옳은 일인지 소신은 모르겠습니다. 아버님께서 진정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어째서 일을 이렇게까지 만드셨는지. 누구를 위해, 그리하셨는지.”
거리엔 온통 부랑아뿐입니다. 죽은 어미의 품을 파고들며 젖을 달라 우는 아이의 울음소리가 한 집 걸러 들립니다.
먹을 것이 없어 누군가의 것을 훔치고, 죽을 때까지 맞아가면서도 입에 넣은 음식을 뱉지 않는 어린아이도 보았습니다.
그들은 어찌해서 그렇게 살아야 합니까. 그런 그들의 삶을 어떻게 보상해야 합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은 그저 운명이려니 순응하고 사는 어리석음을 어찌 탓해야 합니까.
“폐하.”
서진하의 두 눈이 축축하게 젖었다.
“소신의 아비를 용서하지 마십시오. 죄를 벌하시고, 죄를 씻게 하십시오. 아무것도 알지 못했던, 무기력한 소신을 벌해 주십시오. 북성 또한, 폐하의 나라임을. 북성의 백성 또한, 폐하의 백성임을 잊지 말아 주십시오. 저희를 벌하시고, 그들을 살려 주십시오.”
“그대를 죽이면, 죽은 백성들이 살아오기라도 한다더냐.”
죽은 자는 죽은 자이고, 산 자는 살아야 한다. 벌을 받을 자는 받으면 되고, 용서는 남겨진 이들의 몫이다. 죽음으로 가려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끝까지 살아남아 그대의 백성을 지켜라. 나 또한 끝까지 버티며, 나의 백성과 나의 나라와 나의 정인을 지킬 것이다. 그러니 그대 또한, 외롭지 않을 것이야.”
지켜야 할 것이 많은 사내는, 외로울 틈조차 없는 법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