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0장 랑랑(郞郞)(5권) (31/49)

30장 랑랑(郞郞)

짧게 자른 손톱이 나무 탁자를 일정한 속도로 두드렸다. 깊은 생각에 잠긴 영빈은 무척 심각해 보였다. 처음 소식을 접했을 때는 긴가민가하던 것이, 황궁 안에 소문이 파다하게 번지자 생각이 많아졌다.

“무빈의 상태가 위중하다고?”

“예, 저하.”

평소 영빈과 가깝게 지내는 윤 재인은 유난히 해사한 미소를 머금고 주위를 슬쩍 돌아봤다. 아무리 이곳이 영빈의 처소이나,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였다.

“저하께서 직접 보셨다지요? 무빈께서 취영루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지시는 모습을요.”

차를 한 모금 들이켠 윤 재인은 손부채질까지 하며 달아오른 얼굴의 열을 식혔다. 오늘은 유난히 날이 화창했다. 이른 시간부터 푹푹 찌는 듯한 더위에 기운이 빠졌다.

“그 후에 바로 태의 영감이 진맥하였사온데, 아직 원인도 밝히지 못한다 합니다. 무빈마마께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시어 태화당은 지금 난리랍니다. 폐하께서는 정무도 아니 보시고 마마 곁을 지키고 계시온데, 명이 있을 때까지는 그 누구라도 출입을 삼가라 하셨답니다.”

“혹여 돌림병이면 어쩌시려고 곁을 지키시는 게야. 무영군, 이리 있어서는 아니 됩니다. 혹여 무빈 그자가 폐하께 병을 옮기기라도 한다면, 그때는 돌이킬 수 없습니다.”

“태의의 말에 의하면 그런 증상은 보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런 증상이 따로 있다던가?”

영빈의 날카로운 음성에 윤 재인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된 듯 입을 다물었다. 무빈의 병세에 가장 기뻐할 것이라 여겼던 영빈이건만, 그는 의외로 내내 곁을 지키는 황제를 걱정하느라 밤새 한숨도 잠들지 못했다고 했다.

“평소 별다른 병세가 없지 않았던가.”

분명 며칠 전에 본 그의 혈색은 지나치게 좋았다. 깊은 걱정이 있는 사람처럼 이따금 생각에 잠기기는 하였으나, 태의가 궁으로 와 상처를 볼 때까지 굳이 곁을 지키던 얼굴이 떠올랐다.

뭐라고 했더라. 이번엔 저의 잘못이 아니라고 하였던가. 아우를 지키는 마음에 탄복했다고 했던가. 아마 둘 다였던 것 같다. 몇 번이나 망설이는 듯하다가 손을 내밀어 등을 다독였다. 비록 영빈처럼 고운 손은 아니었으나, 다정하고 따뜻한 손길이었다.

“전에 한 번 크게 앓으셨던 적이 있지 않습니까? 거의 사경을 헤매다가 겨우 깨어나셨지요, 아마?”

황궁 안에서는 늘 크고 작은 일이 일어난다. 그것이 불과 몇 달 전인데, 모두가 까맣게 잊고 있던 기억을 들추자 저마다 잠들어 있던 기억이 떠오른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내내 토혈까지 하셨다지 않았습니까?”

“그래, 그랬었지. 그땐 무빈 그자가 영락없이 죽을 줄로만 알았어.”

그때 그대로 죽었어야 했는데.

혼잣말하듯 중얼거리는 영빈의 목소리에 윤 재인이 예? 하고 반문했다. 아니라고 고개를 젓는 그의 눈빛이 흉흉했다. 살기 가득한 두 눈에 드리워진 그림자를 보고 있으려니 가슴이 답답해, 무영군은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고 말았다.

“무영군?”

“소자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벌써요? 수라를 같이 드십시다. 오랜만이지 않습니까.”

자신을 이렇게 반가이 맞아준 영빈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그간 몇 번을 찾아도 번번이 저를 돌려보냈던 영빈을 마주하자, 이상하게도 낯설고 무거운 기분에 내내 속이 불편했다.

“아닙니다. 처소로 돌아가 할 일이 있습니다.”

“그렇습니까. 하면, 저녁 수라를 같이 드십시다. 무영군이 좋아하는 것으로 준비할 테니, 늦지 않게 오세요.”

“예, 마마.”

다정하게 웃으며 손을 붙잡아주는 영빈의 미소는 여느 때보다 상냥하고 따뜻했다. 그저 저 웃음만으로 마냥 기쁘고 행복해하던 시절이 분명 있었지.

한데, 오늘은 마치 가슴에 얼음이 얼어붙은 것만 같았다. 마음이 식으니 어깨와 등도 추웠다. 그가 다정하게 잡아준 손끝이 차디차게 식어갔다.

처소로 돌아가던 무영군의 발길이 멈춘 것은 아이의 울음소리 때문이었다. 어찌나 서럽게 우는지 담을 넘어선 울음소리에 얼굴을 찌푸린 그는 발을 돌려 동복궁 안으로 들어갔다.

“대체 이게 무슨 꼴이냐.”

그 작은 아이 하나 제대로 어르지 못한 탓에 황자의 꼴은 엉망이었다. 흙바닥에 그대로 드러누워 발까지 구르며 서럽게 우는 모습은 저자의 비렁뱅이만도 못했다. 아마 아바마마께서 이 꼴을 보셨더라면 경을 치시기도 전에 뒷목을 잡고 휘청거리셨을 것이라 생각하며, 무영군은 정연군의 발치로 가서 아이의 다리를 툭툭 찼다.

“일어나라.”

“흐어어어엉, 으아아아앙.”

“일어나라 했다!”

“현님……, 흐윽, 흐어엉.”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꺼이꺼이 우는 아우를 무영군은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얼굴은 벌겋게 열이 올랐고, 얼마나 울었는지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흙먼지를 뒤집어쓴 꼴이 꾀죄죄한데, 어찌나 난동을 부렸는지 곁에 있는 내관과 상궁 또한 꼴이 말이 아니었다.

“어찌 이러고 있어!”

“흐어어엉.”

“썩 대답하지 못해?”

“마마가아, 마마가 아프신데. 아바마마가아, 오지 말라고. 흐어엉, 마마, 마마…….”

평소 겁이 많고 울음 또한 많은 정연군의 성정은 잘 알고 있으나, 이리 앞뒤 가리지 않고 울음을 터트리는 아이는 아니었다. 아마 저를 늘 품어주는 무빈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소식에 어지간히 놀랐을 테지.

경박한 것들 같으니라고. 대체 저 아이가 뭘 할 수 있다고 벌써 입을 놀린 것인가. 아무리 벽에도 보는 눈과 듣는 귀가 있는 황궁이라지만, 해야 할 말과 하지 않아야 할 말을 구분조차 못 하는 천치들만 가득하다니.

“그렇다고 이렇게 발라당 드러누워 있어? 황자란 것이 체통도 잊었더냐? 네가 이러면 아바마마 체통을 깎아 먹는 것이라고 몇 번이나 말했어? 얼른 일어나지 못해?”

여전히 입으로는 울음을 쏟아내면서 정연군은 엉거주춤 몸을 일으켰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흙먼지를 뒤집어쓴 꼴이 가관도 아니었다. 눈물 때문에 구정물이 줄줄 흐르는 얼굴을 보며 못 볼 꼴을 본 듯 눈살을 찌푸리던 무영군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태의 영감이 무빈마마를 잘 보필하고 있다. 그러니 너는 다른 이들에게 폐 끼치지 말고 얌전히 있어.”

“그치마안, 마마, 보고, 흑, 시푼데.”

“사내는 참을 줄도 알아야 한다고 배우지 않았더냐? 뚝 그치지 못해? 네가 이렇게 자꾸 울기나 하니, 다들 너를 얕잡아보는 것이 아니냐?”

소매를 잡아당겨 제 손목 아래로 내린 무영군은 엉망이 된 정연군의 얼굴을 슥슥 닦았다. 금세 시커멓게 변한 옷자락을 들춰 구정물이 흐르는 얼굴을 닦아주자, 그렇잖아도 퉁퉁한 얼굴이 더더욱 엉망이 되었다.

“너희는 정연군 보필을 어떻게 하는 거냐?”

“송구하옵니다, 저하.”

“어서 깨끗하게 씻기고, 부기가 가라앉게 찜질이라도 해줘라. 그렇잖아도 못생긴 얼굴 퉁퉁 부어 눈 뜨고 볼 수가 없다.”

“예, 저하.”

“현님…….”

잔뜩 풀이 죽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제 옷자락을 붙잡는 정연군의 작은 손을 내려다본 무영군이 걸음을 멈췄다. 혹여 이전처럼 주먹이나 발길질이 날아올까, 겁에 질려 덜덜 떨면서도 도통 손을 놓지 않는 아우를 가볍게 뿌리친 무영군은 그대로 정연의 등을 확 떠밀었다.

“현님?”

“…….”

“현님도 같이 가요?”

“얼른 들어가, 이 멍청아.”

투박한 무영군의 음성에 정연은 그제야 활짝 웃었다.

* * *

몸이 무겁다. 타는 듯한 갈증에 작게 앓는 소리를 내자 달콤한 과즙이 입안으로 들어왔다. 조금만 더, 더. 멈추지 않고 몇 번이고 다시 들어오는 달콤한 물맛에 한결 개운한 기분으로 눈을 뜨자마자 보인 것은 눈에 익지 않은 좁고 낮은 천장과 흔들리는 몸뚱이였다.

“폐하?”

목이 따끔거려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푹 잠긴 목을 몇 번 가다듬자, 자신에게 무릎을 내어준 채 우두커니 앉아 창밖을 바라보던 황제의 시선이 닿아온다.

“정신이 들었느냐?”

“여긴 어디……, 아니 그보다, 어찌 된 일입니까?”

기억이 잘려나간 것처럼 까맣게 단절된 순간을 떠올리자 머리가 무거워지는 것 같았다. 마차의 덜컹거림에 잠시 울렁증을 느껴 말을 멈추자, 등을 토닥여주는 황제의 느긋한 손길에 혼자만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길령으로 가는 길이다.”

“길령이라니요? 황궁을 떠난 것입니까?”

“그래.”

“한데, 어찌…….”

도저히 제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어째서 갑자기 정신을 잃었고, 눈을 뜬 순간 마차 안이란 말인가. 분명 취영루로 향하던 시각은 해가 뉘엿뉘엿 기울 즈음이었는데, 창문 너머로 휙휙 지나가는 바깥 풍경을 보니 해가 중천이었다.

“폐하.”

“중한 일이 있어 잠시 길령에 다녀오는 것뿐이야.”

“…….”

“너와 함께 가고 싶어 얕은수를 썼다.”

태평하게 말을 잇는 황제를 바라보던 기하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렸다. 얕은수? 함께 가고 싶어서?

“대체 무슨 생각이십니까? 어찌 신첩에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미리 말하면, 그대의 그 어설픈 실력으로 내 장단에 맞장구는 칠 수 있었겠느냐?”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설마, 신첩에게 수면 침을 쓰셨습니까?”

“들켰느냐?”

“폐하! 그것은 폐하께서 직접 그 폐해를 문제 삼아 금하신 물건이 아닙니까?”

“인체에 해가 되지 않고 그대를 안전하게 옮길 방법은 그것뿐이었다.”

이것이 도대체 어느 나라 법도란 말인가. 다른 사람도 아닌 황제께서, 거래 금지한 물품을 직접 사용하시다니.

“불편한데도 잘 자더구나. 그리 곤하였더냐?”

뒷목을 살살 어루만져주는 황제의 손길을 느끼며, 기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이유를 도무지 모르겠다.

“나의 빈이 잔뜩 골이 났구나. 어디 보자, 고운 얼굴이 어찌 이리 일그러졌어?”

“갑자기 눈앞이 흐려져 얼마나 놀랐는지 아십니까?”

“그래, 짐 또한 놀랐다.”

“예?”

“짐이 직접 수면 침을 꽂았는데도, 내 품에 풀썩 쓰러지는 그댈 보니 가슴이 덜컥 내려앉지 뭐냐.”

툭하면 저렇게 가슴을 간질이는 말로 사람을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하는 재주를 지니셨다.

“네가 옆에서 재잘재잘 떠들지 않으니 가는 길이 내내 지루하였어.”

“신첩이 언제 재잘재잘 떠들었습니까.”

“이리 종달새처럼 귀엽게 지저귀지 않느냐. 이제야 나의 빈이로구나.”

기하는 얌전히 앉아 제 뺨을 어루만지는 황제의 손길을 받았다. 다정하게 입 맞추고 익숙하게 어깨를 끌어안는 손길에, 자세를 낮추고 황제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지금쯤 황궁이 발칵 뒤집혔을 것이다.”

무언가 재미있는 구경거리라도 있는 것처럼, 황제의 얼굴 위로 의미 모를 웃음이 넘실거렸다.

“예?”

“네 병이 위중하다고 소문을 크게 부풀렸거든.”

“어찌 그런…….”

“사냥을 하려거든, 미끼를 던져 짐승을 한곳으로 모아야지.”

매끈한 턱을 그러쥐며 빙긋이 미소 짓는 황제의 표정이 지나치게 유쾌해 보였다. 영문 모를 말만 연신 늘어놓는 황제를 빤히 응시하던 기하는 이내 깊은숨으로 포기를 선언하며, 그의 단단한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기왕 따라 나온 것이니, 연유야 어찌 되었건 제대로 잘 지내다 가면 될 테지.

“또 자려는 것이야?”

“도착하면 깨우십시오.”

또다시 가물가물해지는 기하의 목소리를 들으며 황제는 두 번 다시 수면 침 따위는 쓰지 않겠다고 가슴 깊이 맹세하며 그의 허리를 바짝 끌어안았다.

꼬박 하루를 달려 해가 뉘엿뉘엿 기울 즈음에야 길령에 당도한 이들은 저자에서 가장 호화로운 객잔으로 향했다. 길령은 제법 큰 규모의 항구 도시로, 저자에는 온갖 신기한 물건이 가득했다. 이국적인 분위기의 사람들이 한데 어울려 술잔을 기울이고, 밤이 되면 너나 할 것 없이 모여 춤을 추는 곳이었다.

그곳의 향취에 취해 종종 제 나라로 돌아가는 배를 놓치는 이들이 있었기에, 매 시진마다 뿔나팔 소리가 길게 울리는 것이 길령의 풍습이었다.

“도련님, 음식이 입에 안 맞으십니까?”

넉살 좋게 허허 웃는 임승지마저 오늘따라 밉게 보인다. 완전히 정신을 차리고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남겨진 이들이었는데, 현 상궁을 제외한 누구도 자신의 부재를 알지 못한다고 했다. 궁을 비우는 시간은 총 닷새. 그 긴 시간 동안 애태우고 있을 아이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입맛이 없습니다.”

“향신료가 너무 강하시면 소금구이를 해오라 이를까요?”

“괜찮습니다. 나는 신경 쓰지 말고 어서 드세요.”

왁자지껄한 주점 안은 사람들이 흥에 취해 떠드는 소리로 가득했다. 맛 좋은 술과 기름진 안주는 늘 보아오던 것들과 달랐다. 평소대로라면 호기심으로 눈을 반짝이며 이것저것 덥석덥석 입에 물어 금룡대를 당황하게 했을 기하는 일찌감치 수저를 내려놓고 심드렁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아직 마음이 덜 풀어졌더냐?”

기하는 다정하게 미소하는 황제를 곁눈질하며 대답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 물론 황제와 이렇게 오붓하게 저자를 돌아다니는 것은 쉽게 얻을 수 있는 행운이 아니었다. 그가 이따금 맛보여준 자유가 얼마나 달콤한지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 마십시오.”

손가락으로 뺨을 꾹꾹 누르는 황제의 짓궂은 장난에 기하는 얼굴을 찌푸리며 그의 손을 밀어냈다. 아랫사람들 보기에 민망하지도 않은지, 계속 이런 장난이나 치시고. 다들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허겁지겁 음식을 입에 밀어 넣고 있는 것은 신경도 쓰지 않으신다.

“폐…….”

습관처럼 그를 부르려다 입을 다문 기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리, 잠깐 저 좀 보십시오.”

“응? 벌써? 아직 침소로 올라가기엔 너무 이른 시간 아니냐?”

먼저 돌아서 걸어가다 발을 멈추고 싸늘하게 뒤를 돌아보는 기하의 얼굴에도, 황제는 싱글싱글 웃기만 했다. 저렇게 좋으실까. 저도 모르게 혀까지 끌끌 차며 혼잣말하던 임승지가 놀라며 제 입을 틀어막았다. 이렇게 시끄러운데 귀가 어찌나 밝으신지. 그 짧은 순간에 매와 같은 눈으로 돌아보시는 황제 폐하께 엉덩이를 걷어차이지 않으려면 얌전히 몸을 낮춰야 한다.

“대장.”

“어?”

“나리 올라가셨습니다. 그만 고개 드십시오.”

크흠, 하고 헛기침한 임승지는 요즘 장안에서 유행하는 모양으로 깎은 수염을 손등으로 슥슥 문질렀다.

“뭣들하고 있어? 한 잔해, 어? 딱 한 잔씩들만 해라.”

“근무 중입니다.”

“안다, 이놈아. 너무 고지식하게 굴지 마라. 그런다고 나리께서 알아주시느냐?”

“대장께서 매일 이렇게 근무 시간에 몰래 술 드시는 건 나리께서도 아십니다.”

“뭐야? 어떻게! 언제부터?”

“술 취하셔서 몇 번이나 나리께 주사를 부리셨지 않습니까.”

하늘이 까맸다. 아니다, 밤이니 당연히 까맣구나. 하늘이 노랬다. 주사라니, 주사라니. 이 망할 놈의 입, 이 망할 놈의 술!

“농 아니냐?”

“비싼 음식으로 배 채우고 농은 왜 합니까.”

“정녕 나, 나, 나리께, 내, 내가, 주, 주사를…….”

“한 번만 더 부리시면 입을 찢으신다고 하셨습니다.”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직접 찢으실 거다. 분명 그러고도 남으실 분이지. 목 끝까지 돋아난 소름을 문지르며 승지는 벌벌 떨리는 손으로 제 앞에 놓인 술잔을 뒤집어엎었다.

“양생아, 내 또다시 술을 먹고 주사를 부리면 임승지가 아니라 개다, 개.”

“예?”

“그때는 날, 이 개놈아 하고 불러라. 대장 취급할 필요도 없다.”

임승지의 결의에 찬 얼굴을 바라보는 금룡대의 눈빛에 측은함이 서렸다. 벌써 취하신 것 같은데, 은근히 약한 주량부터 제대로 파악하시는 게 먼저이지 않을까 싶다.

“정말 이러시깁니까?”

“어허, 왜 토라져 그러느냐?”

“남세스러워 그럽니다. 보는 눈이 그리 많은데, 아랫사람 앞에서 한량처럼 굴지 마십시오.”

“그게 뭐가 어때서? 내가 내 정인과 이리 정답게 마주 앉아 있는 것이 기분 좋아 그러는데, 뭐가 잘못됐느냐?”

“폐하.”

“궁은 잠시 잊으라 하지 않았어? 그리 조바심 낸다고 시간이 빨리 간다더냐? 다들 잘 지낼 것이다.”

“폐하의 뜻을 모르겠습니다. 어째서 제게는 언질도 주지 않으십니까? 제가 그리 못 미더우십니까?”

“네가 내 등 뒤에서 검을 겨누고 서 있다 한들, 내 마음은 끄떡없다.”

저렇게 늘 달콤한 말로 대충 얼버무리려 드시는 것이 요즘 너무 수상쩍단 말이다.

“그만큼 너를 믿는단 소리다.”

안다. 그것은 눈빛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이 아닌가. 그의 마음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다만, 지금은 이렇게 한가로이 시간을 보낼 때가 아닌 것만 같아 마음이 무거웠다.

“자, 자. 걱정은 그만 거두고. 더 늦기 전에 바람이나 쐬고 오자.”

“싫습니다.”

“어허, 예까지 와서 이럴 것이냐? 어서 일어나. 네가 좋아하는 꽃사탕 잔뜩 사주마.”

누가 꽃사탕 따위에 넘어갈 줄 아나. 뚱하게 내민 입을 넣을 줄도 모르고 바닥만 내려다보고 있던 기하의 몸이 일순간 붕 하고 허공에 떴다.

“뭐 하시는 것입니까? 당장 내려 주십시오.”

“이리 골내고 있다가 달이 저물겠다. 토라진 모습도 귀엽다만, 내일부턴 바쁠 테니 오늘 실컷 구경해야 한단 말이다.”

“내려 주세요. 사람들이 봅니다.”

활짝 문을 열고 아래로 걸어 내려가는 황제의 발걸음이 유난히 가벼웠다. 기하가 아무리 보통 사내보다 마른 체형이라도 여인과는 달랐다. 그런데도 아무렇지 않게 그를 번쩍 안아 들고 나타난 황제의 모습에 금룡대는 저마다 다른 의미로 입을 쩍 벌렸다.

“나리, 뭐 하십니까?”

“저자 구경 간다.”

“예? 아니, 그것보다 도련님은 어찌 그리 안으시고……. 도련님 어디 불편하십니까?”

더할 나위 없이 얼굴을 붉힌 기하는 참다못해 황제의 품에 그대로 제 모습을 숨겼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쉽게 놓아주지 않을 것 같은 황제의 얼굴 가득 장난기가 서렸다.

“이건 어떠냐?”

잘 틀어 올린 기하의 머리에 화려한 비녀를 꽂아주는 황제의 표정이 생경했다. 마치 처음 저자에 나온 아이처럼 한없이 들뜬 모습에 금룡대는 저마다 헛기침을 해대며 주위를 살폈다.

화려한 등이 줄지어 늘어진 아래로, 저마다 신기한 물건과 처음 보는 음식을 늘어놓은 상인들이 목소리를 높이며 호객하는 밤거리는 황성의 대낮보다 훨씬 요란했다.

“도련님께서 단아하셔서, 화려한 것도 아주 잘 어울리십니다요.”

“그렇지? 인물이 훤하니 어울리지 않는 것이 없다. 어떠냐, 이것도 살까?”

가격도 묻지 않고 손에 쥔 것이 벌써 몇 개째인가. 한숨을 푹 내쉰 기하는 제 머리에 꽂힌 화려한 비녀를 쑥 뽑아 도로 제자리에 내려놓았다.

어울리기는. 이것은 나이 지긋한 사대부 여인들에게나 어울릴 법한 것이 아닌가. 무조건 보석이 많이 박혀 있으면 좋다고 생각하시니…….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하다고 생각했던 폐하께서도 모자란 부분이 있으시구나.

“저는 되었으니, 그만 가십시오.”

“되긴 뭘 돼? 아직 아무것도 고르지 않아 놓고. 원우 놈 줄 꽃사탕만 잔뜩 사지 않았느냐?”

“그것이면 되었다니까요. 이런 비녀는 거추장스러워서 잘 꽂지도 않는 걸 모르십니까?”

“있으면 하지, 못할 게 뭐냐? 내가 사주고 싶어 그렇다는데.”

“없어서 못 합니까? 지난번에 내려주신 패물(佩物)도 잔뜩 있습니다. 어서 오세요, 어서요.”

황제의 손을 붙잡고 힘을 써도 꿈쩍을 하지 않는다. 버티고 서 있는 힘이 어찌나 센지, 순간 부아가 치민 기하는 황제의 손을 놓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황자에게 누가 고집이 세다고 했던가?

“안 산다고 하지 않습니까.”

“사준다는데 왜 안 산다는 것이냐?”

“필요가 없으니까요.”

“먹을 걸 사줘도 싫다, 입을 걸 사줘도 싫다, 패물도 싫다.”

“배부를 만큼 먹었고, 좋은 옷은 넘치도록 많습니다. 패물은 번거로워서 하지도 않지 않습니까.”

황제는 그것이 늘 불만이었다. 하나뿐인 정인은 늘 원하는 것이 없다고 말한다. 고민에 고민을 하다가 주면, 고맙다는 말만 하고 생전 하고 있는 것을 못 봤다.

귀한 폐물(幣物)은 처소 한쪽에 잘 넣어둘 뿐이고, 좋은 옷감을 내려도 새 옷 지어 입을 생각도 하지 않는다. 홍진에서 들여온 최고급 비단을 내렸더니 솜씨 좋은 현 상궁은 제 주인 것도 아닌, 황자 옷이나 만들어 올리질 않나.

뭘 줘도 좋아하는 기색도 없고, 몸에 두르는 것도 못 봤다. 수수하게 하고 다니는 것이 불만이 아니었다. 제가 준 것 하나 몸에 걸치지 않는 모습이, 불안해서 그렇다.

“비녀가 못마땅하시면 이건 어떻습니까?”

상인은 계속되는 기하의 거절에도 넉살 좋게 웃으며 무언가를 내밀었다. 그만 되었다는데도 어지간히 뚝심 좋은 사내라는 생각을 하면서 입을 열려던 기하가 문득 말을 멈췄다.

이번에 그가 내민 것은 화려하지도, 그렇다고 아주 소박하지도 않은 한 쌍의 가락지였다. 여인의 것이라기엔 조금 투박했지만, 옥가락지처럼 과하거나 화려하지는 않았다.

“서역에서 들여온 것입니다. 금으로 만든 가락지입니다. 정인이 한 쌍을 나눠 끼면 백년해로한다는 설이 있습니다.”

“그저 갖다 붙인 말 아닙니까?”

이번에도 거절의 말을 내뱉으려던 기하는 반짝거리는 가락지를 연신 곁눈질했다. 색이 고왔다. 반짝임도 마음에 들었다. 무엇보다, 백년해로한다는 그 말이 가슴에 남았다. 그저 장사치의 입바른 말인 줄은 알지만, 어쨌거나.

“이것으로 하자.”

황제는 기하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주인장의 손에서 금가락지 한 쌍을 덥석 집어 들었다.

“끼워 보십시오. 이것이 딱 하나 들여온 것인데, 어쩐지 잘 맞으실 것 같습니다.”

“하나씩 나눠 끼면 된다고?”

“예, 손이 고우시니 잘 어울리실 것 같습니다.”

“남의 랑랑(郞郞 : 동성 혼인, 혹은 교제 시 자신의 배우자나 연인을 친근하게 부르는 말) 손은 왜 훔쳐보느냐?”

퉁명스럽게 말하면서도 황제의 표정은 유난히 즐거워 보였다. 손에 맞지 않으면 어쩌려고 덜컥 사겠다고 하시는 것인지. 아니, 그것보다 지금 방금…….

“손 내보아라.”

“아아, 저…….”

“어서? 어디 보자.”

조금 작은 것 같은데, 억지로 욱여넣으니 또 그런대로 들어간다. 손이 못나서 모양은 별로였지만, 반짝이는 것이 제법 어여뻤다. 절로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간신히 참으며 기하는 슬그머니 남은 손으로 가락지를 만지작거렸다.

“자.”

“예?”

“뭐 하고 있어, 끼워줘야지.”

얼른, 하고 손을 불쑥 내미는 황제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기하는 한참을 망설이다 가락지를 그의 손에 넣었다. 아, 역시 작다. 겨우 두 마디가 들어간 모양새가 이상해서 얼른 다시 빼내려는데, 황제는 보기 좋게 웃으며 그대로 주먹을 그러쥐었다.

“빼십시오.”

“돌아가서 치수에 맞게 하면 된다. 어떠냐, 어울리느냐?”

“예, 나리. 잘 어울리십니다!”

입을 모아 잘 어울린다고 외치는 금룡대 보기가 부끄러워, 기하는 아예 황제를 향해 몸을 돌리고 원망스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저자에 모여든 사람들이 모두 저희만 쳐다보는 것만 같아 낯이 화끈거렸다. 더는 그 자리에 있을 수는 없다는 생각을 하며 다른 곳을 두리번거리던 기하의 발이 일순간 멈췄다.

“어딜 또 혼자 가려고?”

“어…….”

“이보오, 랑랑.”

또 시작된 랑랑 소리에 기하는 그대로 황제의 입을 틀어막았다. 가락지값을 치르고 뒤따라온 금룡대는 두 사람의 투닥거림에 눈 둘 곳을 찾지 못하고 괜히 주위 점포를 두리번거렸다.

“왜 그러느냐?”

“그 소리 좀, 안 하시면 아니 됩니까?”

“뭐, 무슨 소리?”

“그…, 랑랑 말입니다.”

제국에서 동성혼이 권장되지는 않으나, 대다수 왕족이나 귀족, 혹은 양반가에서는 남자 첩을 예사로 두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그들을 보통의 첩(妾)처럼 드러내거나 하지는 않았기에, 사내가 다른 이들이 보는 앞에서 제 정인을 랑랑(郞郞)이라고 부르는 것은 몹시 드문 일이었다.

“까다롭기도 하지. 부끄러워 그러느냐?”

“예.”

“응? 진심이냐?”

“부끄러워서 개미굴이라도 보이면 숨고 싶을 지경이니, 그만하십시오.”

연신 허리를 지분대는 손도 그만 좀 거두시고, 능글능글 웃으시며 틈만 나면 입을 맞추려 드시는 것도 그만하시고, 불시에 귀가 녹아들 것 같은 달곰한 말씀도 멈추시고.

“알았다. 더 하면 화낼 테니, 그만하마. 대신에―.”

“왜 또 뭐가 붙습니까? 그냥 너그럽게 알았다, 한 말씀만 하시면 아니 됩니까?”

“모처럼 이리 바깥바람 쐬러 나왔는데, 그냥 지내면 너무 심심하지 않으냐.”

또다시 슬그머니 어깨를 감싸 안는 황제의 손을 대충 밀어내며 기하는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렇지, 잘못 본 것이겠지. 사람들이 많으니 대충 비슷한 사람을 본 것이겠지.

“뭘 그리 찾아?”

“아닙니다.”

“뭔데 그래.”

“어…….”

차마 누군가를 본 것 같아 그런다는 말을 꺼낼 수가 없어 대충 눈에 띄는 점포 앞에 섰더니, 황제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색색들이 휘장(揮帳 : 커튼)을 둘러친 다른 점포와는 달리, 그곳은 대충 버티고 서 있을 만한 손바닥만 한 공간에 잘 벼른 도끼나 단검, 활 따위가 가득한 무기고와 비슷한 모습이었다. 그래도 어디 먼 나라에서 들여온 것인지 무늬가 제법 화려하고, 모양이 특이했다.

“여긴 뭐 하려고?”

“선물, 하려고 합니다.”

“선물?”

이것은 그저 장식이나 할 법한 것들이었다. 호신용으로도 쓸 수 없고, 이제 막 무공을 배우기 시작하는 어린아이나 여인들이 들고 다니기에 딱 맞아 보이는 것인데 선물은 무슨.

“손장난이나 하면 딱 맞겠구나.”

“이것은 무영에게 잘 어울릴 것 같습니다.”

어느새 무릎을 굽혀 주저앉은 기하는 단검을 하나하나 살피다가 호랑이 발자국이 새겨진 검집을 들었다.

“그놈 뭐가 어여쁘다고?”

“정연의 것만 사지 않았습니까. 귀한 것은 아니니 받아주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이건 그냥 주고받는 재미니까요. 이거 얼맙니까?”

“정녕 사려고?”

“예. 그리고 이것도 함께 주십시오.”

이번에는 그보다 조금 더 큰 검이었다. 황자가 들기에는 무거워 보이고, 투박한 모양은 멋이라고는 하나 없었다. 검집도 시커멓기만 할 뿐,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건 너무 투박하지 않으냐?”

검은 자고로 손에 잘 맞아야 한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것이 최고다. 아직 제대로 들어보지는 않았지만, 어쩐지 저것은 자신과 어울리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직접 값을 치르는 기하를 툭툭 치자, 깎아달라는 말 한마디 없이 제값을 다 주고 일어나 금룡대에게 넘긴다.

“깎아달라고 하지 그랬느냐. 저자는 그런 맛인데.”

“선물할 것이라 그리하지 않았습니다. 무영에게는 나리께서 사신 걸로 하십시오.”

“그대가 산 것을 왜 내가 샀다고 해?”

“제가 샀다고 하면 받지 않을 것 같아서요.”

“그리 못된 아이는 아니다. 혹여라도 그런 짓을 한다면 이번에는 종아리가 터지게 맞아야지.”

“아들이라고 편드십니까?”

“사실이 그런 걸 무슨 편을 들어? 잔말 말고, 내 선물이나 내놓아라.”

“예?”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라는 표정이라니. 바로 코앞에서 사놓고 저런 깜찍한 표정을 짓는 기하가 귀여워서 황제는 그의 머리를 슥슥 매만졌다. 시치미 떼도 소용없다, 그냥 바로 눈치챘단 말이다.

“또 남세스러워 그러느냐? 괜찮다.”

“아니, 저기, 그게…….”

“뭘 그렇게 뜸을 들여. 비록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나, 네 성의를 봐서 이곳에 있는 동안이라도 잘 들고 다닐 터이니 어서 내놓아.”

눈치 빠른 금룡대는 조금 전 기하가 맡긴 검을 다시 들고 나타나 그것을 불쑥 내밀었다. 당황으로 얼룩진 기하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제발 그냥 아무 소리 말고 어서 빨리 이것을 황제 폐하께 드리십시오, 하고 애원하는 금룡대의 표정이 사뭇 진지했다.

“아… 이것은 그러니까…….”

난처함으로 얼룩진 기하의 표정에, 그제야 황제의 얼굴에서 웃음이 싹 가셨다.

“누구 것이냐?”

“아, 폐, 폐, 아니 나리의 것입니다. 당연히, 당연히 나리의 것이지요. 제가 모르는 척 나중에 드리려고 했던…….”

“누구 것이냐고.”

“…….”

“갑자기 꿀 먹은 벙어리가 되시었나, 나의 랑랑께서? 응?”

“나리…….”

“대체 어느 놈한테 주려고 고민도 없이 덥석 검을 집어 들어? 왜, 보자마자 딱 그자의 얼굴이 떠오르더냐? 거기 그자 이름이라도 쓰여 있더냐?”

사람들이 쳐다보기 시작했다. 이건 흡사, 칠거지악(七去之惡)을 저버리고 바람난 부인을 붙잡은 남편 같지 않은가. 그렇게 큰 소리로 말씀하실 것은 없으신데. 아니 무엇보다, 딱히 잘못한 것도 없는데 이렇게 몰아붙이시는 게 너무도 억울했다.

“누구냐. 승지 저놈이냐?”

“아닙니다! 제가 어찌 저런 것을 받습니다! 꿈도 안 꿉니다!”

“너한테 안 물어봤다, 이놈아.”

괜히 버럭 대꾸했다가 엉덩이만 걷어차인 승지가 볼품없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그렇잖아도 알딸딸하게 취기가 오른 몸은 힘없이 나자빠져, 하마터면 얼굴을 그대로 처박을 뻔했다.

“하면, 백돼지한테 줄 것이냐?”

“좋은 이름 두고 왜 또 이러십니까.”

“아니지, 젓가락질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놈이 검이라니. 그 몸으로 잘도 휘두르겠다. 오호라, 하면 서엽 그 망할 놈 것이로구나? 그렇지?”

여기서 서엽의 것이 맞다고 해야 하는 것일까. 잠깐 그런 생각을 하던 기하는 황제의 등 뒤에 서서 세차게 고개를 젓고 있는 금룡대를 바라보고는 결심을 굳혔다. 일단은 이 상황을 무사히 넘어가고, 나중 일은 나중에 생각하는 것이 옳겠다.

“나리 것이라니까요.”

“이깟 게 나랑 어울린다고 지금 그런 헛소리를 하는 거냐? 바른대로 말하지 못해?”

“지금 이깟 것이라고 하셨습니까?”

차가워진 기하의 목소리에 금룡대가 움찔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억지웃음을 지으며 황제의 빗나간 비위를 맞추려 애쓰던 기하의 목소리는 한겨울 눈발처럼 차갑기 그지없었다. 순간 임승지가 기하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척 들어 올렸지만, 다행히 황제는 그것을 보지 못한 듯했다.

“마음에 들지 않으시면 그냥 싫다고 하시지, 사람 마음을 이리 무시하셔도 됩니까?”

“…아니, 기하야. 저기, 그러니까 그게…….”

“됐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으신다니, 그냥 버리겠습니다.”

“아니! 아니. 내 언제 마음에 들지 않는다 했느냐. 나는 그저, 그러니까…….”

“나리의 마음은 잘 알았습니다. 이래서 함부로 선물 같은 건 하는 것이 아닌데. 미천한 식견으로 나리께 어울리지도 않는 것을 불쑥 내밀었으니, 용서하여 주십시오. 밤이 늦었으니 그만 객잔으로 돌아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쌩하니 돌아서는 기하를 잡기엔 이미 늦었다. 그제야 저의 불찰을 깨달은 황제가 머리를 벅벅 긁으며 서둘러 정인의 뒤를 따랐다. 기하야, 하는 황제의 음성이 몹시도 애달파서, 안도의 한숨을 내쉰 금룡대는 웃음을 참으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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