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장 함(陷)
한 시진 가까이 연호당 앞을 서성이던 일황자 무영이 발길을 돌린 것은 해가 뉘엿뉘엿 기울 즈음이었다. 벌써 여러 날 영빈을 마주하지 못한 일황자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평소 지나치게 몸가짐이 바르던 황자의 발소리라고는 할 수 없을 만큼 무거운 걸음에, 뒤따르던 상궁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표정을 굳혔다. 행여 영빈에게 좋지 않은 소리를 듣거나, 제 뜻대로 일이 풀리지 않을 때 황자가 얼마나 난폭해지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그녀들의 얼굴은 내내 펴질 줄 몰랐다.
“전하, 전하께서 좋아하시는 부꾸미를 준비하라 하였습니다.”
“생각 없다.”
혹여 남들이 들을까 목소리를 한껏 낮추던 상궁은 나무 그늘에 서서 발을 멈춘 황자의 동그란 머리를 내려다보며 아이의 입에서 나올 말을 기다렸다.
“정연은 제 처소에 있다더냐?”
“금일은 예동으로 들어온 도령들과 시간을 보내고 계실 것입니다.”
저보다 한참 어린 정연군은 무영의 좋은 먹잇감이었다. 황궁 어디를 살펴도 또래 아이는 정연뿐이었다. 정연의 위로 재인(才人) 강 씨가 낳은 시헌군이 있었으나, 그 아이는 태어날 때부터 몸이 지나치게 약해, 제 어미 치마폭에 싸여 도통 처소 밖으론 나오지도 않았다.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놈이 예동은 무슨.”
바닥을 발로 툭툭 차던 황자는 자연스럽게 동복궁으로 발걸음을 돌리며 특유의 냉랭한 표정을 지었다. 그 괘씸하고 발칙한 놈. 제까짓 게 아무리 발버둥 쳐도 절대로 내 자리는 넘보지 못한다. 이 황궁 내에 제대로 된 제 사람 하나 없는 미련한 무지렁이 같은 것이 어딜 감히.
멀리 뚱뚱한 그림자가 보였다. 또래보다 키도 덩치도 큰 정연이건만, 예동으로 들인 장수교위(長水校尉) 민영환의 장자와 좌장군(左將軍) 한수열의 늦둥이는 그보다 한 뼘은 더 크고 표정 또한 다부졌다.
보아하니 정연보다 서너 살은 더 많아 보이는 것이, 대충 고른 태가 역력해 보였다. 장수교위는 안면이 없지만, 그래도 좌장군 한수열이라면 따르는 이들도 많고 제국을 향한 충심이 대단한 위인이었다. 그가 애지중지한다는 막내아들이니 미리 친해져서 손해 볼 일은 없을 것이다.
“저하.”
“쉿.”
기다란 나무 막대기로 바닥을 파헤치는 아이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정연의 얼굴이 시무룩했다. 주위를 아무리 보아도 상궁은커녕 나인 하나도 곁에 두지 않다니, 아랫것들 단속을 어찌하는지.
“나도 그거 할 뚜 있는데.”
“저하께서는 체통을 지키셔야 합니다.”
“맞습니다. 저하께서는 저쪽에 계십시오.”
심드렁한 얼굴로 턱짓하는 아이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무료하고 따분한 듯, 고운 옷에 흙이 묻는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땅만 파고 있었다. 손가락 하나를 입에 물고 아이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정연이 입술을 삐죽하게 내밀었다.
“요기서 보면 앙대?”
“안 됩니다. 저쪽만큼 가세요.”
씰룩씰룩, 당장에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처럼 훌쩍이며 황자는 터벅터벅 걸어 그들이 가리킨 정자로 향했다. 그다지 멀지 않은 정자엔 황자와 예동들이 요기할 다과가 준비되어 있었는데, 평소 좋은 것을 잔뜩 먹고 자란 귀한 집 아이들은 떡이며 수정과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것 같았다.
“이고 같이 먹자.”
“저하께서나 많이 드십시오. 저희는 배부릅니다.”
“치…, 같이 먹지. 맛있는데…….”
입에 넣기만 하면 달콤한 꿀이 툭 터지는 꿀떡은 황자가 특히 좋아하는 것이었다.
“이고 같이…….”
“아이참, 왜 자꾸 귀찮게 하십니까?”
벌떡 일어나던 아이를 피하려던 황자는 들고 있던 그릇을 그대로 떨어트렸다. 색색이 고운 떡이 또르르 굴러가 흙과 풀에 엉망이 되었다.
다시 눈물을 참아내는 황자를 향해 당황한 아이들은 입술을 벙끗거렸다. 이전 같았으면 금세 울며 보모상궁을 불렀을 것인데, 그렇지 않으니 잘못이 잘못 같지 않게 되어 버렸다.
“저하께서 귀찮게 하시니 이리된 것 아닙니까?”
“맞습니다. 그러니 저쪽으로 가서 계시라니까요?”
“응…….”
정연군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터덜터덜 걸으며 손등으로 눈물을 훔쳤다. 마마께서 사내는 눈물을 헤프게 보여서는 아니 된다고 하셨다.
“으이그, 저 미련곰퉁이 같은 게. 아버지는 언제 오시는 거야? 빨리 집에 가고 싶은데.”
“목소리가 너무 크다.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듣긴 누가 들어? 아무도 없는데. 야, 우리 술래잡기 하자고 하고 저놈 어디 가둘까?”
“그러다 지난번처럼 또 울고 지리면 어떡하려고. 재미없어.”
“왜, 재밌지 않냐? 난 재밌던데.”
“오줌이나 질질 싸는 게 재밌냐? 냄새나 나지. 게다가 요즘엔 말도 곧잘 하잖아. 그러다 누구한테 이르면 어떡해?”
“아무 소리 말라고 하면 말 안 하잖아. 아니면 먹을 거로 꾀던가. 돼지 같은 것이 먹을 것만 보면 좋아서…….”
나무로 땅을 긁던 좌장군의 늦둥이가 바닥에 고꾸라진 것은 순간이었다. 철퍼덕 소리와 함께 그대로 앞으로 넘어진 아이는 흙바닥에 얼굴을 처박는 순간, 사납게 고개를 돌렸다. 바닥에 턱을 찧은 것보다 등으로 날아온 발길질에 더 놀랐다. 태어나 이런 취급을 받은 것은 처음이었다.
“저, 저하…….”
그리고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서슬 퍼런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일황자 무영군의 얼굴이었다.
“왜 그러세요?”
“현님!”
뒤뚱거리며 뛰어오던 정연군은 무영군 앞에 서자마자 온순한 얼굴로 머리를 숙였다.
“현님, 아우 정연 인사 올리옵니다. 그간 간녕…….”
“강녕.”
“강녕하셨사옵니까?”
제 눈치를 살피는 정연을 모르는 척 외면한 무영군은 아직 꼴사납게 널브러져 있는 발칙한 두 놈을 싸늘한 눈으로 응시했다. 감히 뚫린 주둥이라고, 함부로 입을 놀렸다 그것이지.
“저하, 어찌 무턱대고 발길질이십니까? 아무리 황자 저하라 하시더라도 이러시는 것은…….”
“감히 누구 험담을 늘어놓아?”
“억울합니다! 저희가 언제 험담하였다고…….”
“어린 것이 거짓을 늘어놓는 재주가 탁월하구나.”
싸늘한 무영군의 음성에 아이들은 서로 눈치를 살폈다.
“황족을 능멸한 죄를 어찌 받을 것이냐?”
“아닙니다! 오해십니다!”
“현님…….”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제 팔을 붙잡는 정연을 뿌리친 무영군은 우물쭈물하며 대답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아이들의 어깨를 냅다 발로 걷어찼다. 아쿠쿠, 소리를 내며 넘어진 좌장군의 아들이 기어이 바닥을 구르며 코피를 줄줄 흘리기 시작했다.
“이 머저리 같은 놈아, 황족 망신은 네가 다 시키느냐? 황자씩이나 되어서 아랫것들이 험담하는 것을 그냥 듣고만 있어? 아바마마 용안에 먹칠하여도 유분수지, 이 곰 같은 놈아!”
“현님, 잘못해쯥니다…….”
“저깟 놈들이 뭘 잘했다고 먹을 것까지 챙겨줘? 넌 사내가 자존심도 없느냐? 네가 이처럼 멍청하게 구니 저놈들이 널 만만하게 보는 것이 아니냐!”
“현님…….”
“형님 소리 집어치워!”
옷깃을 붙잡는 정연을 뒤로 밀고 반대쪽으로 몸을 돌린 무영은 코피를 줄줄 흘리고 있는 아이를 내려다봤다. 눈물과 코피로 엉망이 된 얼굴을 하고도 감히 한마디 대꾸도 하지 못하는 아이와는 달리, 장수교위 민영환의 장자는 독기 가득한 눈으로 무영을 똑바로 바라봤다.
“감히 어디서 눈을 부라려? 죽고 싶으냐?”
“황자 저하께서는 선량한 백성을 이리 대하셔도 되는 것입니까?”
“뭐? 선량해? 황족의 면전에 입에 담지도 못할 말을 해대는 것들이 뭐라고 지껄이는 것이냐?”
“증좌도 없는 일로 이러시다니, 정말 너무하십니다. 소인은 너무도 억울합니다. 또한, 소인과 소인의 친우 아버님들도 억울하게 생각하실 것입니다.”
“그래?”
“예.”
누군가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아주 먼 곳에서부터 들리는 소리였다. 무영군은 놀란 얼굴로 저를 올려다보는 정연에게 먼저 손을 내밀었다.
“네 아비 또한 황족을 능멸한 죄를 면치 못할 것이다. 아직 어린 너희가 그리 편협한 생각을 하지는 않았을 터, 이는 분명 누군가에게 사주를 받았음이겠지.”
“아닙니다!”
“감히 나의 아우를 능멸하고, 황가를 욕되게 한 죄. 너희뿐만 아니라 너희 아비에게도 반드시 물을 것이다.”
눈물을 몇 번이나 닦아냈는지 꼬질꼬질해진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정연은 잔뜩 겁에 질려 있었다. 미련한 것, 그렇게 당하고도 또 제 손을 붙잡다니.
“마마!”
후원 초입에 나타난 이는 다름 아닌 무빈이었다. 솔직히 그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으나, 듣자 듣자 하니 어이가 없어 저도 모르게 발길질한 것을 무영은 후회하지 않았다.
어쨌거나 저것들은 황족을 능멸한 것들이다. 뒤에서 은밀히 행한 것도 아닌, 면전에서 상스러운 말을 퍼붓는 방자한 것들을 그대로 둘 만큼 무영군의 성정이 따뜻하진 않았다.
차라리 저것들의 아비였다면 나았을 것을. 그랬다면 그것을 빌미 삼아 은밀한 제안 같은 걸 할 수도 있을 텐데. 물론 저 스스로 당장 행하지는 못할 테니, 그와 같은 일로 영빈을 만날 빌미가 생길지도 모르고.
“저하, 일단 저 아이들을 의원에게 보이겠사옵니다.”
“의원이 아니라 금룡대에 끌고 가라. 저것들은 황족을 능멸한 죄가 크다.”
금룡대라는 말에 아이들이 벌벌 떨었다.
“저하, 충분히 알아들었을 것입니다. 금일은 이쯤 하시고…….”
“이 상궁 눈에는, 내가 지금 단순히 저것들에게 겁을 주려는 것 같은가? 잘못했음에도 아직 저 입에선 용서를 구하는 말이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그것이 무슨 뜻이더냐? 제 잘못을 뉘우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더냐?”
“아니, 이게 다 무슨 일입니까?”
굵직한 사내의 음성에 무영군이 등을 돌렸다. 정연군을 품에 안은 채 후원 입구에 오도카니 서 있던 기하는 제 뒤쪽에서 들려온 좌장군의 고함에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다. 어지간히 소란스러운 자다.
“윤아! 대체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이 피는 대체 무엇이고? 저하, 이것이 어찌 된 일입니까? 왜 제 자식이 이 꼴로 있는 것입니까?”
“장군은 아들 교육에 제대로 힘써야 할 듯싶소. 감히 황족을 능멸한 죄가 얼마나 큰지 아직 잘 모르는 것 같은데.”
“그것이 무슨 말씀이십니까?”
“경의 아들이 내 아우를 욕보였단 말이오. 아직 어린아이라 하나, 명색이 황자인데 어찌 정연에게 짐승 운운하며 밀치기까지 한단 말이오? 경의 아들, 혹 어디가 부족한 것 아니오?”
“뭔가 오해가 있으신 것이 아닙니까? 이 아이가 그럴 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설령 그런 일이 있어도 말입니다! 저하, 어찌 저하보다 어린아이를 이리 대하십니까?”
성격이 괄괄하기로 유명한 좌장군은 제 아들을 일으키며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기어이 울음이 터진 아이의 얼굴은 피가 흥건해 기괴한 모습이었다.
“그럼 경의 아들이 정연에게 한 짓은 옳다고 보는 거요? 그대가 아이를 그리 가르친 것인가? 뒷배 없는 황자는 버러지만도 못한 취급을 하라고?”
“저하!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저하께서 아우님을 소중하게 생각하시는 마음은 알겠사오나, 아무리 그렇다 해도 어찌 아이를 이리 만드셨습니까? 소장이 아이를 그리 가르치다니요! 설마 지금 소장의 충정을 의심하시는 것입니까?”
좌장군은 점점 열을 내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것이 어찌나 쩌렁쩌렁한지, 가까이 서 있던 상궁 나인들은 그가 소리칠 때마다 놀라며 벌벌 떨었다. 좌장군은 유독 감정에 충실하고, 앞뒤 잴 것 없이 무조건 행동하는 사내였다.
“저하께선 대체 무슨 생각으로 소장의 아들을 이리 곤죽으로 만들어 놓으셨습니까?”
좌장군의 거대한 그림자가 무영군을 덮쳤다. 거구의 사내에게 가리어진 아이는 기가 죽을 법도 한데, 전혀 그런 표정을 짓지 않았다. 오히려 좌장군이 목소리를 높일 때마다 무영군의 눈빛은 사나워졌다.
“하면 내 아우를 짐승이라 칭하고, 어디에 가두고 놀려 주자는 계획 따위나 세우다가 그 아이를 밀치기까지 한 경의 아들을 어찌 대해야 했을까?”
“저하께선 참으로 독하십니다.”
“좌장군,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품에 안고 있던 정연군을 현 상궁에게로 넘겨준 기하는 잠시 무영군을 내려다보다 아이의 앞을 막아섰다. 물론 무영군 혼자서도 좌장군에게 절대로 뒤지지 않을 기백을 갖추었으나, 아이는 어디까지나 아이일 뿐이었다. 제 아들의 피를 보고 잔뜩 흥분한 거구의 사내는 자존심 센 황자에게 충분히 위협이 되는 존재였다.
“아직 연치 어리신 황자시나, 경위의 밝음을 모르지 않는데 황자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습니까? 경의 아이가 그리 다친 것은 가슴 아픈 일입니다만, 어찌 황자께 함부로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마마, 이번 일은 마마께서 나서시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딱히 마마께서 나서실 일이 아니십니다. 자식에게 자초지종을 묻고 정연군 저하께 잘못한 일이 있다면 벌을 받고 용서를 구할 것입니다. 하나, 그것은 지금 이 문제가 해결된 후에…….”
“나는 지금 무영군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좌장군.”
아이의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아이는 지나치게 이성적이었고, 철저하게 자신의 감정을 숨길 줄 알았다. 그것이 가여웠다. 비록 이 아이의 성정이 메마르고 거칠어 아주 작은 일에도 발끈하며 화를 내고, 툭하면 저보다 어린 아우를 괴롭힌 일이 비일비재하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마음에 차지 않았다. 아직 아이가 미웠다. 이 아이를 보고 있으면, 괴롭게 세상을 떠난 달이가 생각났다. 그래, 이 아이는 역시 그 후로 사과 한마디 하지 않았지.
“정연군은 아직 어려 사리 분별이 어렵습니다. 하나 무영군은 아니지 않습니까. 무영군이 아우를 괴롭히는 이들을 벌하였습니다. 그것이 뭐가 문제입니까?”
“하지만, 방법이―.”
“방법이 잘못된 것은 무영군이 아니라 경의 아들이오. 황자에게 듣기로 매번 이렇게 시간만 허투루 보내고, 면전에 대고 폭언도 서슴지 않았다 하던데.”
“마마! 어찌 그리 불경한 말씀을 하십니까? 그런 일이 있을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필시 황자 저하께서 잘못된…….”
“정연이 거짓을 고했다는 거요?”
“나 거짓말 안 해써! 아바마마께서 거짓말하면 혼꾸녕 낸다고 하셔써!”
콧김을 훅훅 뱉으며 씩씩대는 좌장군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기하는 무영군의 앞을 완전히 막았다. 절로 뒤로 밀린 무영이 불만 어린 말을 쏟아내며 자신의 앞으로 나오려 하기 전, 기하는 다시 한 번 작은 손을 붙잡아 아이를 제 등 뒤로 완전히 숨겼다.
“아이에게 위협이 될 법한 행동은 자중하시오.”
“마마! 이것은 정말 너무하신 처사가 아니십니까?”
“너무한 것은 내가 아니라 좌장군 그대요. 자식을 무조건 두둔하는 것이 옳은 일이오? 그대는 어린 아들 앞에서 부끄럽지도 않습니까?”
“마마께서 하실 말씀은 아니시지요. 마마께서도 지금 두 황자 저하만 두둔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제 아들의 코에서 나온 피가 꾸덕꾸덕하게 말라가는 모습에 절로 피가 거꾸로 솟은 좌장군은 눈에서 불을 내뿜으며 씩씩거렸다. 귀하디귀하게 키운, 저도 아까워서 회초리 한 번 들지 못했던 아들을 이리 막대하다니.
오죽하면 충격에 놀란 아이가 넘어져 제대로 일어서지도 못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자, 황족이고 뭐고 저 두 어린 것들을 당장에 바닥으로 패대기치고 싶은 욕구가 일었다.
“뭐가 이렇게 시끄러우냐?”
기하를 향해 다시 한 번 달려들려던 좌장군의 입이 멈췄다. 각자 아이들을 하나씩 끼고 감정을 추스르고 있던 두 사람은 낭패라는 듯 제각기 얼굴을 구겼다.
“무슨 일이냐고 묻지 않았느냐.”
황제의 싸늘한 음성이 고요한 침묵 속에 내려앉았다.
“네가 시정잡배라도 되느냐?”
좌장군은 황제에게 있어 중요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었다. 융통성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자였으나, 그는 황제를 전적으로 따랐다. 폐비 신 씨가 후비에 오르기 전부터 황제의 정보원이었고, 그가 지금의 금룡대를 이끌고 황성을 포위하였을 때 직접 황궁 문을 열어준 장본인이기도 했다.
“그 포악한 성정부터 다스리라 그리 일렀거늘!”
그런 좌장군의 보물이 정연군의 예동으로 들인 막내아들 윤이었다. 비록 아직 철이 없으나, 그 또래 아이들은 무릇 그러했다.
특히 애정만 잔뜩 받고 자란 사대부가 아이들은 다소 버릇이 없고 제멋대로 하기 일쑤였으니, 조금 답답하고 무지해 보이는 어린 황자에게 못되게 구는 것 정도는 (속이 탈지라도 훗날을 기약하며) 너그럽게 타이르고 넘어갈 수 있었다.
“입이 붙었느냐!”
“폐하, 어찌 황자에게만 그러십니까? 그럼 그 상황에서 무영군이 모르는 척했어야 옳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대는 가만히 있어.”
“무영군의 방법이 비록 과격하기는 하였으나, 잘못하지는 않았습니다.”
“빈.”
할 말은 무척 많았으나, 기하는 현명하게 입을 다물었다. 아마 그 순간 황제께서 당도하지 않으셨다면 좌장군 그자와 체통도 잊고 멱살잡이라도 할 뻔했다. 차마 일이 그렇게까지 돌아가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 괘씸한 녀석에게 꿀밤 한 대 때려주지 못한 것이 두고두고 후회될 것 같았다.
“무영, 종아리를 걷고 이리 서라.”
황제의 지엄한 음성에 정연이 훌쩍이기 시작했다. 기하는 망연자실한 얼굴로 울먹이며 품에 안기는 정연의 등을 다독였다.
무영군은 아무 대꾸 없이 꼿꼿하게 머리를 들고 황제 앞에 섰다. 황제가 시키는 대로 종아리를 걷어 올리는 모습이 너무도 태연하여, 보는 기하마저 기가 질릴 정도였다.
날카로운 회초리가 공기를 가로지르는 소리가 매서웠다. 그렇게 다섯 번. 길지도, 그렇다고 짧지도 않은 시간 동안 정연군은 목 놓아 꺼이꺼이 울었다. 아마 저 또한 저렇게 회초리 찜질을 당할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무엇을 잘못하였느냐.”
“소자보다 어리고 힘없는 아이를 가차 없이 발길질하였습니다.”
“반성하느냐?”
“예, 아바마마. 반성하고 있습니다.”
제아무리 황제가 힘을 조절하였다곤 하나, 잘 벼른 회초리가 할퀴고 지나간 상처에서는 금세 피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러나 아이는 여전히 덤덤한 얼굴로 흔들림 없이 눈을 빛냈다.
“네 표정은 말과는 다른 것 같다. 진정 반성하고 있느냐?”
“소자가 다시 그 순간으로 돌아간다면, 좌장군이 오기 전까지 그 녀석을 흠씬 두드려 패줬을 것입니다.”
“뭐라? 이놈이 대체! 너 뭐가 되려고 그러느냐? 어찌 이리 성정이 메마르고 사나워!”
“잘못한 자는 벌을 받아야 한다고 아바마마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리 황제의 아들로 태어났다 해도 잘못을 했으면 벌을 받고 매를 맞고 반성해야 한다고 그리 배웠습니다. 한데, 그 아이는 벌을 받지 않습니다. 아우를 가두고 놀리려 하였습니다. 모자란다고 손가락질했습니다. 그것은 어느 나라의 법도입니까?”
뿌옇게 차오르는 눈물을 닦아내며 무영은 침을 꼴깍 삼켰다. 너무도 수치스러워 혀를 깨물고 싶은 심정이었다.
회초리 따위는 종아리가 터질 때까지라도 맞을 수 있다. 힘없고 약한 자를 괴롭힌 벌을 받으라면 받을 수 있다. 자신의 잘못은, 누가 말하지 않아도 너무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
“좌장군 그자가 소자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것쯤은 알고 있습니다.”
“감히 누가 너를 탐탁지 않게 생각한다는 것이냐? 감히 누가!”
“그만하십시오, 폐하.”
보다 못한 기하가 황제의 앞을 막아서며 그의 손을 붙잡았다. 끓어오르는 화를 참지 못한 황제는 벌겋게 변한 얼굴로 들고 있던 회초리를 바닥에 패대기쳤다.
아이는 아이였다. 결국 서러움을 견디지 못한 무영군이 울음을 터트리자, 기하는 곁에 서 있던 현 상궁에게 눈짓하며 황자를 다독이게 했다. 한 번 터진 울음은 쉬이 그쳐지지 않았다.
현 상궁 손에 이끌려 전각을 나서는 무영군의 작은 등에서 시선을 떼어낸 황제는 연신 훌쩍이며 주섬주섬 종아리를 걷어 올리고 제 앞에 선 정연을 어이없는 눈으로 바라봤다.
“넌 또 뭐냐?”
“아바마마……, 훌쩍. 현님 혼내지 마세요.”
황제는 숨이 넘어가도록 꺼이꺼이 우는 정연을 허망하게 바라보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었다. 당장에 저것부터 어떻게 하라고 주위를 둘러보는데, 응당 곁에 있어야 할 기하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빈은 어딨느냐?”
“무영군 저하를 따라 나가셨사옵니다.”
“시끄러우니 당장 정연을 데리고 나가라.”
손을 휘휘 저으며 눈을 감자, 아이의 울음소리가 잦아들었다. 하나는 지나치게 사납고, 하나는 지나치게 무르다. 다른 하나는 병색이 짙어 늘 골골하며 자리보전하고 있으니, 아들 셋을 두어도 든든하기는커녕 저것들을 어찌해야 하나 앞일이 캄캄하기만 했다.
“수신전으로 가겠다. 빈에게는 저녁에 올 테니, 얌전히 처소에 있으라고 전해라.”
“예, 폐하.”
“좌장군과 그의 막내아들을 수신전으로 불러들여. 지금쯤이면 그리 멀리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혹, 쓸데없는 핑계를 대고 입궁을 미루려 하면 사지를 틀어서라도 끌고 와라.”
황제의 명을 받은 그림자가 명을 행하려 빠르게 모습을 감췄다. 길게 한숨을 내쉰 황제의 미안이 사납게 찌푸려졌다. 결국, 이러니저러니 해도 팔이 안으로 굽는 걸 보니 저도 아비는 아비인가 보다.
황제의 처소인 수신전은 금룡전을 압도하는 장엄한 분위기가 있었다. 그것은 모두 황제의 강렬한 기(氣) 때문이라고 사람들은 입을 모았는데, 그곳에 발을 들일 수 있는 외부인은 한정되었기에 좌장군은 평생 처음 접한 광경에 주눅이 들어 머리를 깊이 낮췄다.
“그대답지 않게 유난히 조용하군.”
황금으로 뒤덮인 높은 의자에 몸을 기대앉은 황제의 주위는 온통 검었다. 이렇게 많은 수의 그림자를 곁에 둔 황제의 모습은 수년 전, 찬탈당한 황위를 되찾던 그날 밤 외에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림자는 말 그대로 그림자. 그들은 평소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황제를 호위하는 이들이었다. 전례에는 없는 일이었으나, 주위가 번잡스러운 것을 지독하게 싫어하는 황제의 명에 의한 일이었다.
“경에게 몇 가지 묻고 싶은 일이 있어 불렀다.”
“하문하시옵소서, 폐하.”
“짐은 단 한 번도 그대의 충정을 의심한 적 없다.”
“황공하옵나이다, 폐하.”
“한데, 문득 그런 의문이 들었다. 짐에게는 그리 충성하는 그대가 어찌 오늘 낮에 그러한 일을 벌였을까.”
“폐하, 그것은…….”
“아아, 물론 짐은 그대의 불같은 성정을 매우 잘 알고 있다. 한데, 그대는 짐에게 단 한 번도 그런 모습을 보인 적이 없다. 틀렸느냐.”
좌장군은 머리를 납작 엎드렸다. 바깥에서 죄인처럼 떨고 있을 어린 아들놈 얼굴이 문득 떠올랐다. 궁 밖을 나서면서 그제야 정신이 퍼뜩 나, 집으로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 아들놈을 흠씬 두들겨 패던 차에 불려 왔으니 더할 나위 없이 마음이 무거웠다.
“무영의 말로는 경(卿)이 무영을 탐탁지 않게 여긴다 하던데.”
“황공하옵게도, 그것은 사실이옵니다.”
“이해가 되지 않는군. 감히 짐의 장자를, 탐탁지 않게 여긴다?”
“저하께서는 자신의 그릇에 맞지 않는 길을 꿈꾸시지 않습니까.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영빈께서 황자 저하를 바르게 교육하지 않으심은 황궁 내 모든 이들이 알 것입니다. 미천한 소장은 그저, 저하께서 지나친 욕심을 부리시는 것이 탐탁지 않을 뿐입니다.”
“그것은 그대가 드러낼 감정이 아니다.”
황제에게 충성하는 대다수의 신하는 영빈을 지나치게 싫어했다. 사가에서 태어난 황자가 입궁하던 그날부터, 제 자식처럼 곁에 끼고 키운 무영군에게 그런 감정이 전이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긴 전쟁으로 오랜 시간 황궁을 비운 황제가 환궁했을 때는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일들이 너무도 많았다. 무영의 사나운 성정이나 켜켜이 쌓인 영빈과의 정, 제 것이 아님에도 발버둥 치는 부조리한 욕심까지.
“그 아이가 그리된 것은 짐의 탓이다.”
“폐하,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그러니 그대 또한, 이번 일을 쉽게 넘어가지 마라. 짐 또한 그럴 생각이다.”
“예, 폐하. 이미 각오하였사옵니다.”
그는 공손하게 두 손을 모으고, 머리를 조아렸다. 황제는 물끄러미 좌장군을 내려다봤다. 어느새 머리가 희끗희끗해진 사내는 변함없이 충직한 눈으로 황제를 응시했다.
“그대는 운이 나빴다.”
“소장의 불찰일 뿐입니다. 소장이 경솔하였습니다. 자식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죄, 달게 받겠사옵니다.”
“울컥하는 그놈의 성질머리부터 제대로 다스려라.”
“명심하겠사옵니다, 폐하.”
피식 웃는 황제의 목소리에 좌장군은 그제야 허리를 반듯하게 세우며 빙긋이 미소했다. 눈가에 깊게 팬 주름이 호를 그리자, 황제는 덩달아 미소했다.
“그대는 좋은 장수였다.”
“폐하를 곁에서 모시게 되어 영광이었나이다.”
드넓은 제국을 발아래 두기에, 황제는 지나치게 젊고 자유로웠으며 욕심이 없었다.
“좌장군 한수열과 그의 아들 한윤은, 감히 황가를 기만하고 황자는 물론 무빈까지 욕보였으니 그 죄가 실로 크다. 황족을 능멸한 죄는 죽음을 면치 못할 만큼 깊으나, 제국에 대한 깊은 충성을 내 알고 있으니 다른 죄로 다스리겠다.”
황제의 충신들은 그것이 늘 안타까웠다. 자신들의 황제께서는 떠나간 가족과 백성만을 어깨에 짊어지시느라 너무도 외로워 보이셨다. 자신의 사사로운 감정을 제대로 드러내는 법이 없는 황제께서 관심조차 두지 않으시는 어린 황자들의 입지가 좁아지는 것은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좌장군 한수열을 파직하고 3년간 고진으로 유배(流配)에 처한다. 그의 아들 한윤 또한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으니, 아비와 함께 유배한다.”
아들 윤이 지은 죄는 실로 크고 무거웠다. 그 죄를 감추기 위해 스스로 했던 행동이 부끄러워 한수열은 쉬이 머리를 들지 못했다.
“황제 폐하의 크신 은혜, 영원히 가슴에 새기겠나이다.”
“3년 후 가을에 보겠다. 그대가 그리 어여삐 여기는 막내, 그때는 정연의 훌륭한 예동이 되기를 바란다. 정연 또한, 부끄럽지 않은 황자로 장성할 것이다.”
한수열이 황제를 향해 사배(四拜)했다. 절을 올리는 내내, 그는 진심으로 황제의 성은을 가슴 깊이 새겼다. 모든 것은 한순간이라 했다. 화려하게 피어오르다 물거품처럼 사라지는 것이 우리의 인생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강녕(康寧)하시기를 빌겠습니다, 폐하.”
“그대를 잊지 않겠다.”
파직되었던 한수열이 유배지인 고진에서 돌아온 뒤, 시영(施領)제께서 그를 황궁으로 다시 불러들이신 것은 푸른 하늘이 아름다운, 어느 청명한 가을날이었다.
“훌륭한 처우(處遇)이셨사옵니다, 폐하.”
마주앉은 상시는 이전보다 훨씬 혈색이 좋아 보였다. 지병이 깊어 겨우 목숨을 연맹하고 있으니, 하루빨리 파직하여 달라고 끊임없이 주청하는 자의 얼굴이 반질반질했다.
“그대가 그리 입에 발린 소리를 하니, 내 무엇을 크게 잘못한 것만 같은 기분이 드는군.”
껄껄, 웃음을 터트린 상시 영감은 기어이 몇 차례 기침을 토해내고는 송구하다며 머리를 조아렸다.
“정연군께서는 너무도 무르시고, 무영군께서는 너무도 꼿꼿하시지요.”
“아이들은 잘못이 없지. 모두 짐의 탓이다.”
“진심으로 품어줄 이가 곁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지 않습니까. 폐하께서는 오랜 시간 황궁을 비우셨으니, 어쩔 도리가 없으셨지요. 물론, 폐하께서 그리 다정하신 아버지는 아니십니다.”
짓궂은 말을 서슴지 않는 상시를 바라보며 황제는 얼굴을 구겼다. 능구렁이 같은 영감, 한 번을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다.
“폐하께서 인정하지 않으시는 아드님들을, 폐하의 백성이라고 가슴으로 받아들이겠습니까. 좌장군은 아까운 사내이나, 폐하의 충신이니만큼 좋은 본보기가 되겠지요.”
“하고 싶은 말이나 얼른 하고 나가라.”
황제의 상실감은 꽤 커 보였다. 그러나 그는 제 감정을 능숙하게 숨기는 데 도가 텄기에, 짐짓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귀찮다는 표정만 지을 뿐이었다.
“폐비 신 씨가 입궁한 날부터 죽는 날까지 그녀의 행적을 기록한 것입니다.”
손때 묻은 서책을 내미는 상시의 표정은 제대로 가늠할 수 없었다. 황제는 그것이 늘 궁금했다. 이 영감이 무엇을 바라는지, 그가 정녕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
“나는 아직도 그대를 모르겠다. 그대가 짐을 돕기 위해 이렇게 움직일 것 같지는 않아서 말이야.”
“원수는 물에 새기고, 은혜는 돌에 새기란 말도 있지 않습니까?”
또 수수께끼 같은 말이다. 그는 늘 그랬다. 언제나 제 뜻을 제대로 입에 담는 법이 없었다. 교묘하게 술수를 써 빠져나갈 구멍을 만드니, 그 덕분에 그 나이가 되도록 자리를 꿰차고 있음이 분명했다.
“원수도 돌에 새기지 않는다니 그건 참 다행이군.”
“하면, 소신은 이만 물러나겠사옵니다.”
낡은 서책 귀퉁이를 손끝으로 쓸며 황제는 상시를 응시했다. 천천히 머리를 숙이고 이내 뒤돌아서는 그의 느린 걸음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서책을 어루만지는 황제의 손끝이 미비하게 떨렸다.
“늦으셨습니다.”
“그래.”
밤이 늦어 사위가 고요했다. 하루 새에 너무도 많은 일이 일어난 황궁엔 어수선한 분위기가 맴돌았다. 특히 황제의 충신으로 이름난 좌장군의 파직은 지나친 처사라는 주청이 쏟아졌다.
황제는 단칼에 그들의 말을 자르며, 다시 한 번 이 같은 일이 일어날 시에는 그 누구도 용서하지 않겠다고 명했다. 그제야 온전히 사태 파악에 들어간 대신들이 입을 다물었으나, 황제의 불편한 심기는 제대로 가시지 않았다.
“폐하.”
그대로 침소 안으로 들어가던 황제가 발을 멈췄다.
“폐하?”
뒤돌아 그대로 기하를 끌어안는 황제의 모습에, 따라 들어오던 이들이 모두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제야 오롯이 둘만의 시간을 갖게 되자, 기하는 머뭇거리던 손을 들어 정인의 강건한 어깨를 어루만졌다.
“곤하구나.”
“어서 침수 드십시오.”
“네가 있어 다행이다.”
“…….”
“정말로 다행이야.”
아마 그가 없었더라면 주위를 돌아보는 일 따위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가족의 정을 잊고, 저만을 바라보고 있는 어린 아들들을 모르는 척 외면했을 거다. 한 번 마음을 쓰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을 것만 같아, 부러 쳐다보지도 않았던 아이들이 그리 상처받고 외면받고 제대로 설 수조차 없었다는 것을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못난 아비이고, 모자란 정인이다.
“기하야.”
“예, 폐하.”
겨우 마주 보고 선 황제의 얼굴은 퍽 지쳐 보였다. 자신의 뺨을 쓰다듬는 커다란 손이 오늘따라 더욱 차디찼다. 기하는 급히 양손으로 황제의 손을 어루만졌다. 제 온기를 나눠줄 수만 있다면, 제 마음을 보일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네가 황자들에게 마음 쓰는 것이 싫었다.”
“말씀 올리지 않았습니까. 신첩이 아무리 정연군을 어여삐 여긴다 한들, 폐하가 가장 먼저라고요.”
“어린 아들에게 강샘(질투) 부리는 옹졸한 사내라 욕해도 상관없다.”
“그리 생각하지 않습니다.”
“네게 미안했다.”
기하는 자신의 손목을 단단하게 움켜쥐는 익숙한 감촉에 소담스럽게 웃었다.
“부족한 짐과 말썽만 부리는 아들들까지 떠안으려는 네게 미안해서…….”
“폐하, 그런 말씀 마십시오.”
“그랬다. 가족과 떨어져 홀로 있는 네가, 사내의 몸으로 내게 시집와 평생 네 아이 한 번 품에 안지 못할 네가, 혹여 연정이 식어 돌아서기라도 할까 봐 짐은 늘 미안하고 불안했다.”
그런 생각을 하고 계시었나. 단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던 문제인데. 가슴을 치던 외로움도, 매번 느껴야 했던 깊은 절망도, 언젠가 내쳐질지 모른다는 두려움도, 이제는 모두 사라지고 없는데.
“관심을 두지 않았던 아이들의 마음이 깊이 병들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아마 그 아이들이 커 갈수록, 그것은 더 깊어지겠지.”
“그렇지 않습니다. 폐하께서는 훌륭한 아버지이시고…….”
“짐을 도와주겠느냐? 귀찮은 자식놈들까지……, 짐에게 그랬던 것처럼.”
“아직, 무영군을 온전히 마음에 들이지는 못했습니다.”
옹졸하다 느낄지도 모르겠으나, 그것이 사실이었다. 아이의 상처를 이해하면서도 그 마음까지는 이해할 수 없었다. 설령, 아이와의 관계가 원만히 해결된다 하더라도 상처를 모두 지울 수는 없을 것만 같았다. 모두 용서하고 잊어버리면, 먼저 떠난 그 아이가 너무도 가여워 차마 그렇게는…….
“단지 표현하는 방법의 차이일 뿐이겠지요. 겁이 많은 정연은 제 감정을 속으로 삭이는 아이이고, 솔직한 무영군은 그것이 양날의 검인 줄 알면서도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그리했을 것입니다.”
기하는 지친 황제를 다독이며 그를 침상으로 이끌었다. 다정하게 황제의 등을 다독이고, 그의 메마른 입술 위로 입을 맞추며, 자연스럽게 침상 위로 몸을 뉘인 정인의 곁에 누웠다.
“그래도 기특하지 않습니까? 형님이라고 아우를 생각하는 마음이요.”
“괴롭혀도 제가 괴롭히겠다는 못된 심보다.”
“그래서 정연이 그렇게 무영군을 좋아하고 따르나 봅니다. 늘 제게도 무영군 얘길 합니다.”
“그랬더냐.”
아이의 성정이 삐뚤어지긴 했으나, 태생이 악하지는 않았다. 물론 그것이 잘못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행하는 것은 걱정되었으나, 언젠간 차차 나아지리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상처에 바를 약을 전해주러 따라 나갔을 때도 아이는 눈물을 거두고 꾸벅 머리를 숙였지.
“금일은 일찍 침수 들자. 푹 자둬야 한다.”
귓가에 입을 맞추며 속삭이는 황제의 음성이 나른하게 변했다. 일찍 침수 들자시면서 어찌 옷고름은 슬금슬금 풀어 헤치시는 것인지, 요령껏 그의 손을 피하려 해도 빠져나갈 곳이 없었다.
“말과 행동이 다르십니다, 폐하.”
“그대가 더울까 봐 그래.”
“폐하께서 그리 만지시면 더 더워집니다.”
“내 말하지 않았느냐, 푹 자둬야 한다고.”
“폐하.”
“아직은 익숙하지 않으니 무리하지는 않아야겠지.”
황제와의 잠자리는 확실히 무리가 따랐다. 원래도 잠이 많은 기하는 황제와 밤을 보내면 오전이 다 가도록 침상에서 일어나지도 못했다.
체력의 문제가 아니었다. 황제는 지나치게 강건했고, 기하를 향한 연정 또한 몹시 뜨거웠다. 새벽 늦게까지 집요하리만치 자신을 괴롭힌 후에, 몹시 흡족한 미소를 띠며 침소를 나가는 정인의 뒷모습을 멍한 눈으로 바라보다 정신을 잃듯 까무룩 잠든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물론 익숙하지 않을 뿐이지, 좋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오늘은 기분 좋을 정도로만 어여뻐해 주마.”
올곧이 황제를 믿는 기하가 유일하게 그를 믿지 않을 때는 침상에서 하는 말이었다. 딱 한 번만, 마지막으로, 조금만 더. 그런 말을 숫제 입에 달면서 제대로 멈춘 적이 없었다. 부아가 치밀어 그것을 따져 물으면 네가 너무 어여뻐 그랬는데 뭐가 잘못되었느냐며 외려 적반하장이었다.
“진심이시지요?”
“짐이 언제 농을 했더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낭패감으로 일그러진 정인의 얼굴을 보면서도 황제는 부지런히 손을 놀렸다. 어깨에 입을 맞추며 허술하게 묶인 허리끈을 풀자, 딱 보기 좋을 정도로 발달된 단단한 몸이 가감 없이 드러났다.
아마 오늘 밤도 곤히 자긴 글렀다는 생각을 하기도 전, 황제의 뜨거운 혀가 입속으로 밀려 들어왔다. 열락에 들떠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 밤이었다. 황제는 오래도록, 끈질기게 기하를 괴롭혔다. 모든 것이 그렇게 평온하게 흘렀다.
“기하야.”
황제의 낮은 음성이 귓가에서 울렸다. 깊은 수마에 빠져들었던 기하가 겨우 눈을 뜬 것은 아직 해도 제대로 뜨지 않은 캄캄한 새벽이었다.
유독 아침잠이 많은 것을 이해해주며, 늘 홀로 잠들어 있는 저를 우두커니 앉아 바라보다 조용히 조강에 나가신다던 황제께서 어찌 오늘은 이런 시각에 굳이 잠을 깨우려 드시는 것인지. 궁금한 마음 반, 야속한 마음이 반이었다.
“일어났느냐?”
완전히 몸을 일으키지 못하고 겨우 눈을 반쯤 뜨자, 황제의 얼굴이 뿌옇게 보였다. 이것은 혹시 꿈일까. 제대로 정신이 나지 않아 몇 번이나 눈을 깜박이자, 커다란 손이 부드럽게 뺨을 쓸었다.
“금일은 잘 수 있을 때까지 푹 자둬라. 일어나면 따끈하게 온욕하고, 배도 든든하게 채워. 그 후에 부를 테니, 움직이는 것이 힘들더라도 취영루(取榮樓)까지는 나와야 한다?”
“예, 폐하.”
“더 자거라.”
이마에 황제의 입술이 내려앉았다. 마음 같아서는 벌떡 일어나 대전으로 향하는 황제를 배웅하고 싶었으나, 지친 몸에 열이 올라 자꾸 눈이 감겼다. 한데, 오늘은 이상한 명을 내리신다. 무언가 뜻이 있으시겠지만, 취영루라……. 일단은 푹 자고 일어나 생각해야겠다.
황제는 가벼운 무복 차림이었다. 시원하고 얇은 옷감은 황제에게 지나치게 잘 어울렸기에, 궁녀들은 지엄한 법도도 무시하고 그를 힐끔거리기에 바빴다. 저마다 얼굴을 붉힌 여인들을 무감각한 얼굴로 지나치는 황제의 발이 유난히 빨랐다.
“준비는 잘 되었느냐.”
“예, 폐하. 하명하신 대로 준비하였사옵니다.”
곧 날이 저물 것이다. 해가 질 때 즈음이면 노을이 예쁘게 물들어, 취영루에 올라서서 보는 절경은 눈을 황홀하게 했다. 지금쯤이면 바람을 쐬러 나온 이들도 꽤 있을 것이니,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장소이기도 했다.
“뒷일을 잘 부탁한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폐하. 분부하신 대로 처신하겠나이다.”
믿음직스러운 지밀상궁의 말에 황제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녀만큼 믿을 만한 자는 궁내에 없었다. 아마 그녀와 현 상궁이 합심하면, 그 어떤 위기도 잘 넘길 수 있을 테지.
“폐하.”
유난히 화려한 옷차림의 상재(商才) 이 씨가 예를 갖추며 인사를 올렸다. 몇 번인가 그녀의 처소를 찾은 적은 있으나, 그것은 아주 오래전의 일로 얼굴이 가물가물할 지경에 이른 여인에게 내어줄 시간이 없었다.
“그래. 오랜만에 보는 것 같구나.”
“예, 그렇사옵니다. 신첩은 먼발치에서 폐하의 강녕함을 바라고 지켜보았습니다.”
“그랬더냐.”
“예, 폐하.”
“하면, 난 급한 용무가 있어 가보마.”
“예? 폐하, 그것이…….”
실망감이 가득 찬 얼굴로 손짓하는 여인을 모르는 척 뒤로하고 돌아서자, 멀리 취영루 한가운데에 서 있는 기하의 모습이 보였다.
현 상궁에게 명한 대로 유난히 하늘거리는 하얀 옷이 그에게 무척 잘 어울렸다. 평소에는 늘 단정하게 하나로 묶어 올렸던 머리카락도 어깨 아래로 잘 늘어뜨렸고, 태화당 아이들을 모두 데리고 나온 듯한 긴 행렬 또한 명한 대로 제대로 이행하였다.
“빈.”
등을 돌려 뒤를 돌아보는 기하의 낯빛이 창백했다. 오전이 다 가도록 침상에서 도통 일어나지 못하다가 민망함에 얼굴도 제대로 들지 못했다는 전언을 들었다. 과연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든 모양으로, 황제를 바라보는 두 눈에 원망이 가득했다.
“안색이 좋지 않다.”
“그걸 아시는 분이 이리 부르신 것입니까?”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중얼거리면서 소소하게 투정을 늘어놓는 얼굴이 유난히 애틋했다. 황제의 명이라니 뜻이 있겠거니 군말 않고 따르면서도, 내내 궁금하였던 듯 어깨를 감싸 안자 이내 얌전히 안겨온다.
“종일 앓았다고 들었다. 몸은 괜찮은 것이냐?”
“폐하, 어찌 이리 목소리를 높이십니까.”
먼발치에 후궁이 보였다. 제 궁으로 가려면 취영루를 지나야 하는데, 그 가운데에 황제께서 총비를 마주 안고 계시니 지나치지도 머물지도 못하고 서성이는 중이었다.
그것은 반대쪽에 서 있는 이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대부분의 황궁 안 상전들이 수라를 들 시간으로, 오가는 이들의 눈길이 유난히 많이 머물렀다. 제 어미를 만나고 온 것인지, 작은 전각에서 나온 무영군이 발을 멈추고 상궁을 향해 무언가를 묻는다.
“수라도 제대로 들지 않았다 하던데, 열이 있느냐? 어디 보자.”
걱정 가득한 황제의 목소리는 익숙한 것이었으나, 이곳은 지나치게 보는 이가 많았다. 부러운 듯 머물러 간 시선에 민망해하기도 전, 황제의 다정한 손이 이마에 올라왔다. 열을 재듯 이마며 목덜미를 짚어보는 황제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열이 절절 끓는구나. 너희는 대체 상전을 어찌 모신 게냐! 빈이 이리 편치 않음을 왜 진작 고하지 않았어!”
황제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당황한 태화당 식구들이 바닥에 납작 엎드려 황제께 잘못을 빌었다. 갑작스러운 소란함에 모여든 시선은 더더욱 많아졌다.
“저, 폐…….”
순간 목이 따끔했다. 뭔가에 찔린 것처럼 찌릿한 통증이 느껴져 기하는 가벼이 입술을 뻐끔거렸다.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아 말을 멈춘 사이, 눈앞이 뿌옇게 흐려지며 몸이 천천히 기울어졌다. 넘어진다고 생각하는 순간, 자신을 안아 든 황제가 귓가에 입술을 갖다 붙였다.
“무서워하지 말고 잠시만 자고 있어. 짐이 곁을 지킬 것이다.”
차마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 짧은 순간에 의식이 뿌옇게 흐려졌다.
“빈? 빈!”
“마마, 마마! 마마, 정신 차리시옵소서!”
“비켜라.”
“폐하, 소장이 하겠사옵니다.”
“어서 태의를 불러라.”
완전히 의식을 잃은 기하를 번쩍 안아 든 황제가 몸을 돌렸다. 급하게 길을 트며 그를 뒤따르는 태화당 식구들은 발을 동동 굴렀다. 부러움으로 가득했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순간 황망하게 흩어졌다.
<화양연화> 5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