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8장 고(告) (29/49)

28장 고(告)

“뭐가 어째?”

황제의 잘생긴 얼굴이 단번에 찌푸려졌다. 대충 얘기 들어 알면서도 굳이 다시 사건의 개요를 묻는 표정이 어찌나 사납던지, 기하는 저도 모르게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머리는 왜, 그것들이 너한테 패악질을 부렸더냐?”

“패악질을 부리긴 누가 부립니까. 가만 있다 봉변당한 것은 그들입니다.”

수상쩍은 눈을 빛내며 황자를 돌아본 황제는 얌전히 무릎을 꿇고 앉아 눈을 깜박이고 있는 아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정연.”

“예, 아바마마?”

“네가 다시 말해보라.”

“소자와 마마가 여기 오니까 이상한 옷을 입은 삼 명이…….”

“세 명이.”

“세 명이, 마마를 꼭 붙잡고 들어온다꼬. 마마가 싫다고 했는데? 그냥 막 들어와서 현님을 욕했습니다!”

“무슨 욕을 해?”

“현님이 나쁘대요! 현님이 아파서 그런 건데, 현님 아픈 것도 욕하고. 그래서 소자가 호통을 치려고 했는데 소자를 쾅 밀었습니다!”

“감히 황자의 몸에 손을 대?”

“황자가 달려드니 놀라서 살짝 밀친 것뿐입니다.”

한숨 쉬듯 중얼거리며 기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아이가 어찌 저리 능청스럽단 말인가. 황자에게 저런 숨겨진 재능이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황자가 제게 무슨 해코지를 한다고 밀쳐, 밀치기를? 게다가 감히 누구 험담을 한단 말이냐? 현 상궁, 그대가 보기엔 어땠느냐.”

“황자 저하께서 몸이 날래시어 다행이었사옵니다. 소인은 그 순간 어찌나 놀랐는지, 하마터면 저하께서 크게 다치실 뻔하셨습니다.”

“현 상궁…….”

한숨 섞인 기하의 부름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현 상궁은 당장에라도 눈물을 떨어뜨릴 것 같은 표정으로 황제의 앞에 차가운 화차를 내려놓았다.

“폐하께서 아드님께 신경을 끊으시니, 후궁들도 황자들을 하찮게 보는 것 아닙니까.”

“너 어째, 말에 가시가 있다?”

“예, 있습니다. 폐하께서 아껴주셔야 다른 이들의 본보기가 됩니다. 자식이 많은 것도 아니고 겨우 아드님 셋에 황후마마 복중 아기씨가 전부이신데 어찌 아버지란 분이 그리 매정하십니까.”

평소보다 뾰족한 기하의 음성에 반박하려던 황제는 입을 다물었다. 그의 말이 달리 틀린 것도 없거니와, 지금 기하의 기분이 별로 좋아 보이지 않은 탓이었다. 이럴 때는 사내의 자존심과 체면은 모두 던져버리고 살살 녹는 애정으로 감싸 안아줘야 훌륭한 정인이라 했지. 물론 자식 놈 앞에서 체면을 구기기란 몹시 어려운 일이지만, 다른 이도 아니고 제 하나뿐인 정인을 위한 일이니.

“우리 아바마마가 최곤데!”

아무리 보아도 황자가 엄지손가락을 번쩍 치켜드는 것은 현 상궁에게 배운 것이 분명하다.

“동무들 아버지는 대제학, 장수교위, 좌장군인데 모두 아바마마의 부하들이라 했습니다. 소자 아바마마가 최고입니다. 그리고 아바마마는 훌륭하시고 잘생기시고 키도 크시고 후궁 마마들도 마아아안으시고…….”

마지막 것만 뺐으면 무척 좋았겠지만, 어쨌거나 계속되는 황자의 칭찬에 황제는 어깨를 으쓱했다. 저 조그마한 놈의 눈에도 제 아비가 이리 멋있다고 하니, 어쨌거나 기분이 좋은 것은 분명했다.

“사람의 훌륭함은 지위의 높고 낮음이나 생김의 좋고 나쁨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시겠습니까, 황자?”

“그치마안…….”

“후궁이 많은 것은 절대로 좋은 일이 아니니, 황자는 나중에 혼인하게 되면 일부종사하는 여인처럼 정절을 잘 지켜야 합니다. 아시겠지요?”

“너 지금 아이에게 무슨 말을 하는 거냐?”

물론 옳은 말이니 딱히 뭐라 다그칠 수는 없는데, 지나치게 뾰족한 기하의 표정에 황제는 괜히 버럭 역정을 냈다.

“어찌 큰 소리를 내십니까.”

“정연, 밤이 늦었다. 금일은 네 처소로 돌아가라.”

“예, 아바마마. 소자는 두 분께 효도할 검미다.”

“갑자기 웬 효도 타령이냐. 효도할 생각이면 밤참이나 줄여라.”

“아바마마께서 곤하실 때는 마마랑 쪽쪽 하셔야 원기를 회복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소자는 효잡니다.”

벌떡 일어나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절을 올리는 아이의 얼굴엔 잠기운이 스멀스멀 차올랐다. 당돌한 아이의 말을 곱씹으며 차마 대꾸하지 못한 기하가 열이 오른 얼굴을 제 손으로 가렸다.

“누가 그런 기특한 말을 가르쳤더냐?”

“현 상궁이 비밀이라고 했습니다.”

“오호라, 그랬구나. 그래, 사내는 비밀을 잘 지켜야지. 오늘은 잘하였다. 비록 여인의 팔을 물어뜯은 것은 잘못된 일이나, 네 형을 나쁘게 말하였으니 아비가 벌을 내릴 것이다.”

“예, 아바마마. 만수무강하시옵소서.”

예법에 어긋나는 인사를 당당히 한 아이는 생긋생긋 웃으며 권 상궁의 손을 붙잡고 처소를 나섰다. 오늘은 어쩐 일로 떼도 쓰지 않고 뭉그적거리지도 않은 것이 마음에 들었기에, 황제는 소소한 실수는 넘어가기로 했다.

“좋으십니까?”

“효자 아들 둬서 짐은 좋은데, 그대는 좋지 않은가?”

“아이 앞에서 괜한 말씀 좀 하시지 마십시오.”

“무슨 괜한 말. 그럼 제 형을 위하는 마음을 잘못했다고 탓한단 말이냐?”

“그것은 기특한 일이나 방법이 잘못되지 않았습니까.”

“차차 가르치면 된다.”

유난히 곤한 하루였다. 본격적인 여름이 시작 된 탓이기도 했다. 어디서 소문을 들었는지 북성의 긴밀한 움직임을 파악한 대신들의 주청이 이어졌다. 그들을 모두 물리느라 종일 진을 뺐더니, 머리가 다 지끈거렸다. 입맛까지 뚝 떨어져 저녁 수라를 거른 것을 빌미 삼아 승지 놈이 태화당으로 오는 내내 잔소리를 퍼부어 속에서 천불이 났다.

저를 보자마자 빙긋이 미소 짓는 정인이 아니었더라면, 아마 오늘 밤은 편히 침수조차 들지 못했으리라.

“한우(汗雨) 나셨으면 목욕물 준비하라 이를까요?”

“그대가 같이한다면 그렇게 하고.”

“싫습니다.”

“부끄러우냐?”

“남세스럽습니다.”

“새삼스럽게.”

혀를 끌끌 차며 면박을 줘도 표정 변화가 없다. 내색하지 않으려 하면 할수록 더 큰 시름에 잠길 수밖에 없는 것을 황제는 잘 알고 있었다.

“북성에 다시 사람을 보냈다.”

무심하던 기하의 눈빛이 일순간 변했다.

“언제까지 시간을 끌 수만은 없으니, 내 직접 서연을 만나볼 생각이다.”

“폐하.”

“서진하가 남하(南下)하고 있다. 이미 북성의 군대는 용병이란 이름으로 제국과 전 제후국에 흩어져 있다. 그들이 모이는 것 또한 시간문제일 거다.”

황제는 가볍게 떨리는 기하의 손을 붙잡았다. 수만 가지 감정이 한데 섞인 불안정한 눈빛이 그를 옭아매는 듯했다. 서글펐다. 삶이 어찌 이리 서글플 수 있단 말인가. 겨우 마음이 닿아 이제 조금 편해지나 했더니, 돌아보지 않아도 될 거대한 산이 와르르 무너져 숨도 못 쉬게 덮쳐 오는구나.

“만나서 어쩌시려고요?”

“사위와 장인이 만나면 무슨 말을 나누지?”

어깨를 축 늘어뜨리는 기하를 끌어안으며, 황제는 그의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불안감에 질식할 것만 같은 얼굴은 보기에 형편없었다. 좋은 것만 주고, 늘 웃게만 해주고 싶었는데.

“송구합니다, 폐하.”

“무슨 소리야.”

“폐하께 폐를 끼친 것 같습니다. 신첩만 아니었더라면 반역의 뿌리, 완전히 도려내시었을 텐데…….”

“그런 말은 하지 말자. 말만으로도 아프지 않으냐.”

가슴 위에 올라온 황제의 손을 붙잡은 기하는 가만히 고개를 숙여 그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존경과 애정을 흠뻑 담은 입맞춤에 황제는 빙긋이 미소할 뿐이었다.

기하는 더는 견딜 수 없어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온몸을 밀착해 그의 품에 안겨드니, 무게를 이기지 못한 황제가 기우뚱하다가 금세 자세를 바로잡았다. 열락에 들뜬 몸은 그대로 산화될 것만 같았다. 이 사람이 너무 좋아서, 이 사람밖에 보이지가 않아서, 마음이 들끓어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울고 싶으면 소리 내 울라 하지 않았어.”

“폐하, 안아주십시오.”

“또 짐을 애태워 죽일 작정이더냐?”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품에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는 기하는 온 힘을 다해 황제를 끌어안았다. 마치 처음부터 하나였던 것처럼, 단 한순간도 떨어진 적 없었던 것처럼.

“멈추지 마십시오. 안아주시고, 또 안아주십시오. 어여쁘다 해주시고, 사모한다 해주십시오.”

“기하야.”

“사모합니다, 폐하. 아버님도, 형님도, 북성도 소중하지만 폐하가 가장 소중합니다. 폐하를 가장 사모합니다. 신첩을 버리지 마십시오. 곁에 있어 주세요.”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제게 매달리는 정인의 고백은 애틋하면서도 가슴이 시려 마냥 좋다고 웃을 수가 없었다. 아이가 가진 근심이 너무도 깊어, 그의 번뇌(煩惱 :  마음이 시달려서 괴로워함. 또는 그런 괴로움)가 너무도 처연하여, 서럽고 애달픈 마음 달래 줄 길이 없었다.

입을 맞추었다. 평소보다 훨씬 격렬하고 뜨거운 입맞춤이었다. 한 치의 틈도 없이 맞물린 손가락 사이사이를 옭아매고, 덜덜 떨리는 서러운 숨을 받아들였다. 속절없이 흐르는 눈물을 닦아낼 새도 없었다. 오롯이 서로를 바라고, 간절하게 원하는 이 밤이 너무도 처연해서 몇 번이나 더운 숨을 토해야 했다.

기하는 침상에 등을 대고 반듯하게 누웠다. 벌써 여러 번 벗은 몸을 보였음에도, 늘 이 순간이면 긴장감에 온몸이 그대로 굳는 것만 같았다.

황제는 그것을 익숙하게 알아채며, 기하의 얼굴에 연신 입을 맞췄다. 다정하면서도 장난스러운 입맞춤에 익숙해질 때쯤, 어느새 옷고름이 풀려 서늘한 공기가 피부에 닿았다.

반쯤 풀어 헤쳐진 옷자락 사이로 들어온 황제의 손이 기하의 피부를 더듬었다. 동그란 어깨부터 긴 팔을 훑고, 수련으로 다시금 단단해진 가슴 위를 쓰다듬다가 볼록 튀어나온 유두를 문질렀다.

자연스럽게 벌어진 기하의 입술 위로 황제의 입술이 날아들었다. 나비가 꽃을 찾듯 당연한 움직임이었다. 황제는 천천히 입술을 가르고 들어와 혀를 섞었다. 질척한 소리가 날 정도로 입안을 휘저으면서 기하의 턱을 붙잡으면, 절로 황홀한 기분에 요란한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것이 부끄러워 눈꺼풀을 바르르 떨면 가벼운 흥얼거림처럼 황제의 웃음소리가 흘러들었다.

“폐, 으음…….”

맞물렸던 입술을 떼고 그 사이로 손가락을 넣어 적당히 휘젓자, 말캉한 혀가 손끝을 핥는다. 황제는 느긋하게 웃으며 조급한 마음을 갈무리했다.

모든 것을 내어줄 것처럼 굴어도 몸이 굳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니, 조급해 하지 않기로 했다. 이렇게 입 맞추고 서로의 체온을 나누는 것 또한 즐거운 일이니, 애써 몰아붙일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가장 컸다.

“싫으면 언제든 밀어내도 된다.”

판판한 배 위로 연신 입을 맞추며 황제가 말했다. 기하는 반쯤 감긴 눈꺼풀을 들어 올리고는 점점 아래로 내려가는 그의 머리카락 사이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단정하게 틀어 올렸던 머리카락이 어느새 자연스럽게 흘러내려 왔다.

기하는 성마른 숨을 내쉬며 긴장감으로 점점 굳어지는 어깨를 가볍게 떨었다. 황제의 커다란 손이 몸을 구석구석 어루만질 때마다 단전 아래가 찌르르 울리는 것은 참기 힘든 느낌이었다.

“흐으, 아, 아아…….”

황제는 이를 세워 기하의 배꼽 주위를 물었다. 입술과 혀로 매끄러운 살을 핥고 빨다가 이로 잘근대기 시작하자, 아래에서 치고 올라오는 기이한 느낌에 기하의 몸이 뒤틀렸다. 다리가 절로 벌어져 달달 떨리면서 허리가 들썩이는 기분이란, 아직은 익숙하지 않은 것이었다. 이럴 때면 배고픈 강아지처럼 끙끙대는 모습을 황제는 퍽 좋아했다.

사내의 몸이란 순수하게도 솔직했다. 황제는 능숙하게 기하의 성기를 입에 물었다. 본디 무엇이든 배움이 빠른 그는 상대에게 쾌락을 선물하는 방법을 지나치게 잘 알아챘다.

휘어짐 없이 반듯하기만 한 기하의 성기는 따뜻한 점막에 휘감기자 팽팽하게 부풀어 올랐다. 까슬까슬하면서도 축축한 혀가 가감 없이 기둥을 핥고, 선단을 빨았다. 허리를 바짝 움츠리며 다리를 벌린 기하는 눈을 단단히 감고 황제에게 손짓했다. 그의 목구멍 깊이 들어갈수록 자극은 더해져 발가락 끝까지 저릿했다.

황제는 성심성의껏 애무에 집중했다. 사내의 성기를 입에 넣고 혀를 쓰는 것에 익숙해지리라곤 감히 상상도 하지 못했는데, 어느새 주는 즐거움을 알아챈 그는 자잘한 근육이 붙어 낭창낭창하게 뻗은 허벅지를 쓰다듬으며 한계까지 다다른 기하의 표정을 감상했다.

“흐으, 폐하, 아, 나올 것, 아니…….”

목덜미까지 붉어진 몸이 배배 꼬였다. 다리를 바짝 오므린 기하는 손끝까지 떨어대며 황제를 밀어내려 했다. 이전에 한 번, 황제의 입안에 그대로 토정한 후 민망함에 눈물까지 대롱대롱 매달았었는데, 이번에도 한계에 다다른 듯했다.

사내의 비릿한 체향은 과히 맛 좋다고 하기는 무리가 있었다. 하나 다른 것도 아니고 사모하는 정인의 쾌락인데, 기쁘지 않을 것이 무어 있으랴.

황제는 다정하게 웃으며 모양이 어여쁜 귀두 끝을 깊게 머금었다. 눈을 질끈 감고 숨을 멈추는 기하의 숨소리에 울먹임이 묻어났다.

“괜찮다고 하지 않았어?”

“흐읏…….”

황제는 입술을 뗀 후, 그대로 끝을 붙잡았다. 제 손으로 얼굴을 완전히 가린 기하는 연신 몸을 비틀었다. 따뜻한 점막에서 벗어난 치부가 훤히 드러나자, 한계까지 치달았던 사정감이 조금씩 식는 것 같았다. 간사한 몸뚱이 같으니라고.

황제는 그날, 그대로 사정한 제 것을 꿀꺽 삼키고는 ‘나쁘지 않다.’고 소감을 전했다. 민망하고 황송한 기분에 끝내 울먹이던 저를 끌어안고 앞으로 평생, 이 손과 입에만 토정해야 한다며 속삭여주던 그를 떠올리자 다시금 울고 싶어졌다.

“폐하, 폐하의 것, 신첩이…….”

“짐은 따로 준비할 필요가 없는데?”

겨우 눈을 아래로 내리니 완전히 발기한 옥경이 당당하게도 제 모습을 드러냈다. 황제는 퍽 애틋한 눈으로 기하를 내려다봤다. 당황으로 얼룩진 얼굴이나 수줍게 물든 목덜미, 갈 곳을 잃어 방황하는 손끝마저 애틋했다.

“정말 괜찮겠느냐?”

그의 목소리가 지나치게 다정해서만은 아니었다. 기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손바닥으로 문지르며 입을 맞춰오는 그의 어깨를 끌어안고 다리를 조금 더 넓게 벌렸다. 완전히 맞닿은 아래에 화끈한 열기가 느껴졌다.

두렵지 않다면 거짓이었다. 그 밤은 꽤 아팠고, 상처는 퍽 오래갔다. 몸보다 더한 것은 마음이었다. 그를 이해하려 노력해도 어리석은 마음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때때로 제 의지를 배반하고 싸늘히 식어가는 아랫도리를 볼 때마다 황제는 미안한 눈을 했다. 그럴 때마다 혀를 콱 물고 싶었지.

“폐하, 어서…….”

황제는 망설임 없이 손을 뻗어 향유 병을 집어 들었다. 늘 침소 안에 비치되었음에도 제대로 쓰인 적 없는 그것을 보고 현 상궁이 보이지 않게 한숨 쉬던 것을 떠올린 기하가 스스럼없이 웃었다.

그래도 폐하께서는 초야 때도 저것을 남김없이 쏟아주셨지. 가슴에 콕콕 박히는 말씀을 하셨던 것은 반쯤은 잊은 것 같다.

“아아…….”

그대로 쏟아지리라 생각했던 향유는 황제의 손에 듬뿍 발렸다. 은은한 향으로 뒤범벅된 황제의 손이 기하의 밀부를 더듬었다. 순간 어깨를 잔뜩 움츠린 기하는 슬그머니 눈을 떠 황제를 바라봤다. 잔뜩 상처받은 그의 얼굴에 후회의 빛이 떠올랐다.

“폐하.”

“응?”

손이 쉬이 움직이지 않는 듯, 황제는 연신 망설였다. 지난날을 아무리 후회해도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는 법이었다. 기하는 그의 뺨을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그것은 위로였고, 괜찮다는 표식이었다.

황제는 기하의 대답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자신의 뺨을 감싸 안고 입술을 맞대는 기하의 속눈썹이 바르르 떨렸다. 자신이 움직이기 수월할 정도로 넓게 벌어진 다리 사이에 자리 잡으며, 황제는 손가락을 천천히 움직여 밀부 사이로 들어갔다.

“흐으…….”

미간을 찌푸리며 내뱉어진 목소리에 손가락이 굳는다. 기하는 스르르 물러나려는 황제의 손목을 붙잡았다. 조금 더, 입술을 달싹였다. 뻑뻑한 내부를 가르고 들어오는 이물감은 익숙하지 않은 것이었지만, 생각보다 불쾌하지는 않았다. 적어도 그 밤처럼, 서글프고 외롭지는 않으니 그것으로 되었다.

부드럽게 안을 휘젓는 느낌에 허리가 떨렸다. 몇 번이나 입술을 맞대고 몸을 쓸어주는 황제의 손길 때문이기도 했다. 완전히 이완된 몸은 충실하게 본능을 좇았다.

하나가 둘이 되고, 둘에 하나를 더 보태려 할 때 즈음 기하는 충분히 젖어 애가 타는 얼굴을 했다. 쾌락에 무너진 몸은 지나치게 솔직했다. 스스럼없이 몸을 일으켜 황제의 입술을 머금고, 그의 목을 끌어안으며 거친 숨을 헐떡였다.

꼿꼿하게 일어난 성기에서 묽은 액이 흐르는 것을 호기롭게 바라보던 황제는 기하의 말랑말랑한 손바닥이 주는 쾌감을 과감하게 뿌리쳤다.

그것은 삽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고통을 최소화하려는 몸부림이자 배려였다. 단박에 안으로 들어온 황제의 성기는 손가락과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굵고 뜨거웠다. 안을 뻑뻑하게 채운 탓에 향유를 쏟아부어도 움직이기는 쉽지 않을 것만 같았다.

아팠다. 솔직한 느낌은 그랬다. 그리고 뜨거웠다. 황제의 낮은 신음이 귓가에 흩어졌다. 그는 꽤 기분 좋은 소리를 냈다. 그것이 기하의 묘한 정복욕을 돋웠다. 자신에게 발정하고 신음하며 쾌락을 갈구하는 모습이란, 황제에게 시집오면서 내던졌던 사내의 순수한 마음을 뒤흔들었다.

“괜찮으냐?”

완전히 맞물린 아래는 뜨겁고 무거웠다. 기하는 흐려진 눈으로 황제를 올려다봤다. 그의 머리카락을 애무하듯 쓸어 올리고 대답 대신 입을 맞추자, 황제의 눈꼬리가 고운 호를 그렸다.

천천히 허리를 움직이는 황제를 위해 기하는 무릎을 잔뜩 구부려 몸을 최대한으로 열었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본능이었다. 묵직하게 아래를 채우는 것이 안팎으로 움직일 때마다 열상을 입은 것과 같은 뜨거움에 울고만 싶어졌다.

쾌락을 갈구하지는 못했다. 그러기에 자신은 지나치게 서툴다는 것을 기하는 스스로 인정해야 했다. 다만 줄곧 흐린 눈으로 제 위에서 발정하는 황제의 얼굴을 바라봤다. 작게 찌푸려진 눈을, 반쯤 벌어져 간간이 거친 숨을 내뱉는 입술을, 땀이 맺힌 반듯한 이마와 이따금 입을 맞출 때면 부딪히는 콧날을.

입술의 온기가 몇 번이나 더해졌다. 점점 격하게 허리를 움직이는 황제에게 매달리니, 절로 눈물이 새어 나왔다.

그는 끊임없이 정을 갈구했다. 애정과 욕정을 넘나드는 마음을 굳이 감추려 하지 않았다. 황제가 내모는 대로 몸을 맞기고, 그가 움직이는 대로 흔들렸다. 비참하지도, 슬프지도, 외롭지도 않았다. 뜨거운 쾌락을 느낄 수는 없었으나, 그것은 자신이 서툴러서라고 인정하니 마음이 뜨겁게 피어올랐다.

“읏, 하아, 하, 기하, 기하야.”

황제는 몇 번이나 기하의 이름을 불렀다. 아래가 쓸려 화끈거릴 정도로 거칠게 몰아붙이고 끝끝내 사정한 후에, 줄곧 이름을 부르며 다시 성기를 부풀렸다.

입을 맞추고, 손가락 하나하나에 깍지를 끼고, 온몸을 애무 당하면서 기하는 줄곧 웃으며 사모한다고 속삭였다. 종래에는 기억이 흐릿해져 어떤 식으로 울었는지, 무슨 말을 했는지 따위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저 긴긴밤, 그에게 안기고 또 안기면서 몇 번이나 행복을 떠올렸다.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황제는 나른한 숨을 내쉬는 기하의 등을 손가락으로 훑으며 몸을 일으켰다. 풀어 헤친 머리카락이 사방으로 너울너울 흐트러졌다. 침상 근처에 놓인 자리끼를 한 모금 머금다가 고개를 돌려 ‘마실 테냐?’ 하고 물었더니 고요하게 고개를 젓는다.

“어디 가십니까?”

바닥에 떨어진 용포 대신 대충 던져둔 침의를 걸쳐 입은 황제는 허리끈을 제대로 묶지도 않고 침상 쪽으로 걸어왔다. 혹시나 하는 불안감에 까만 눈동자를 도로록 굴리는 기하의 눈가에 입을 맞추고 손을 내미는 황제의 표정이 무척이나 개운해 보였다.

“왜 그런 표정이지?”

“허리도 아프고, 다리도 아픕니다. 한데 폐하께서는 너무도 산뜻하신 표정이시니, 이것은 너무도 불합리하지 않습니까.”

“다른 곳은 아프지 않고?”

금세 화르르 불타오르는 기하의 얼굴에 연신 입을 맞추며, 황제는 그의 어깨 위에 자신의 것보다 조금 더 화려한 침의를 둘렀다. 엎드려 꼼짝하기 싫은 듯 움직임 없는 몸을 조심스럽게 끌어안자, 목에 팔을 두르면서 작게 눈썹을 찡그린다.

“씻어야지.”

“지, 지금이요?”

“계속 있다간 배앓이 한다. 그대는 가만히 있어, 짐이 다 할 테니.”

연신 뺨에 입을 맞추며 자신을 안아 든 황제를 붙잡은 기하는 난감한 기색을 보였다. 물론 문 바로 밖에 서 있는 이들이 격렬하고 뜨거웠던 방 안 사정을 모를 것 같지는 않지만, 무턱대고 지금 이 문을 나선다면…….

“저, 폐하. 저기, 그러니까…….”

“뭘 그리 부끄러워해, 응? 자꾸 그런 표정 짓지 말란 말이다.”

점점 목덜미 쪽으로 입술을 옮기는 황제를 간신히 밀어내며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자, 슬슬 잠이 몰려왔다. 허리 아래로 찌릿하고 얼얼한 감촉만 남아 있는 상태였지만, 지금도 충분히 곤하다는 생각을 하며 눈을 감자 선선한 공기가 느껴졌다.

“온욕할 것이다. 시중은 되었으니 침상을 정리해라.”

“폐하, 소인들이 직접 할 수 있게 윤허해 주십시오.”

“짐이 할 것이다.”

이마를 기댄 황제의 목덜미에선 두근거리는 그의 숨결이 느껴졌다. 그의 뒤를 따르는 상궁들의 발소리와 깊은 밤에 날아든 바람 소리, 얼마 안 가 들리는 찰박찰박한 물소리까지. 온 신경이 예민하게 곤두서 자꾸만 수면을 방해하려 들었다.

“…더.”

“으응…….”

“잠시 움직이지 마라.”

귓가를 울리는 음성이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그 짧은 순간 까무룩 잠이 들었던지, 정신을 차리고 보니 황제에게 매달려 물에 반쯤 잠겨 있었다.

“아, 아아…….”

수치도 잊고 내지른 소리에 놀란 기하는 스스로 입을 막았다. 반쯤 쉬어버린 목소리가 제 귀에도 거슬릴 정도니, 항시 좋은 것만 보고 들으시는 정인께서 못났다 타박하실지도 모른다.

“아프냐?”

“아, 저, 폐하…….”

“그리 말했는데, 어찌 이름조차 불러주지 않는 거냐? 그대는 정말 고약한 정인이다.”

아래서 느껴지는 이물감보다 그가 손가락을 움직일 때마다 물 위로 떠오른 뿌연 것의 정체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욕탕의 절반이나 차지하고 있는 커다란 욕조는 제대로 사용한 적 없는 것이었다. 사내 너덧이 들어와 다리를 펴고 누워도 넉넉할 크기라, 물을 끌어다 나르는 이들의 수고가 지나친 까닭이었다.

“이리 온.”

잠시 그의 품을 벗어나려고 했던 움직임을 멈춘 기하는 황제의 한마디에 그대로 몸을 굳혔다. 색귀에 홀린  어린 도령처럼 뭉근하게 풀린 눈으로 황제를 바라보니, 가볍게 허리를 붙잡고 몸을 띄워 자신의 허벅지 위에 앉히는 어깨가 지나치게 넓고 탄탄해 보였다.

황제의 눈부신 미안(美顔)을 홀리듯 바라보며 조금 더 그에게 가까이 다가간 기하는 단단하게 제 몸을 끌어안는 정인의 체온에 백치처럼 웃었다. 그 모습이 마치 취기가 돈 것 같기도 했고, 색에 취한 것 같기도 했다.

“폐하께 좋은 향이 납니다.”

목덜미에 코와 입술을 묻은 채 기하가 중얼거렸다. 색사(色事)를 벌이는 내내 그는 같은 말을 했다. 처음으로 완벽하게 이뤄진 교접(交接)에 힘들 법도 하건만,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면서도 제 목덜미에 코를 박고 매달리던 모습이 떠올라, 황제는 가볍게 그의 뒷머리를 쓰다듬었다.

좋은 냄새는 제게서 더 나는데 대체 무슨 향이 난다고 이리도 매달리는지. 아마도 부끄러워 그런 모양이라는 생각을 하며 입을 맞추자, 노곤해진 몸을 폭 기대온다.

“폐하.”

“응?”

“자꾸 졸음이…….”

“괜찮다. 짐에게 기대면 돼.”

“예…, 폐하.”

까마득한 수마가 다시 정신을 뒤흔들었다.

“폐하, 소장 임승지입니다.”

몇 번이나 목청을 가다듬고 평소보다 한층 낮은 목소리로 진중하게 황제를 불렀건만, 방 안에서 들리는 대답은 없었다. 분명 조금 전에 인기척이 났거늘, 어찌 이 시간까지 침전에 머무신단 말인가.

조강은커녕 초조반도 들이지 못했다는 지밀상궁의 전언에 승지는 바싹 마른 입술을 손등으로 문지르며 문 앞을 서성였다.

“폐…….”

“거, 입 좀 다물고 물러서십시오. 절대로 분부 내리시기 전까진 아무도 들이지 말고 조용히 있으라 하셨다니까요?”

어젯밤보다 콧대가 한층 높아진 현 상궁을 빤히 쳐다보던 승지는 괜스레 헛기침을 흠흠 하고, 제 뒤에 늘어선 그림자를 향해 눈짓했다.

아무리 지엄하신 폐하의 명이 있었다곤 하나, 종일 빗발치는 대신들의 주청(奏請)을 모르는 척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대소신료들이 눈 뜬장님도 아닌데, 어찌 북성 얘기만 나오면 그리 노하시며 입 다물라 하시는지.

항간엔 선황 폐하께서 폐비 신 씨에게 홀리셨던 것처럼, 그녀를 빼닮은 무빈이 황제 폐하의 혜안(慧眼)을 흐린다는 말까지 나도는 참이었다.

“지금 폐하께서 이리 계실 때가 아니네. 자네는 아무 말 말고 뒤로 물러서. 자네가 끼어들 일이 아니야.”

“대감. 대감이야말로 사태 파악이 안 되셨나 본데, 괜히 그리 계시다 불벼락 맞지 마시고 물러나십시오. 소인이 다 대감을 위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마마께서 옥체가 미령하시면 태의 영감을 부르시게. 어찌 저리 폐하를 붙들고 계신단 말인가?”

그것은 모두 기하를 위한 마음이었다. 황제께서 유일하게 정을 주신 분께서 괜한 일로 고초를 겪으실까 하루하루가 고역스러운 나날이었다. 더는 책잡힐 일을 만들지 않아야 한다. 사태가 진정되기 전까지는 몸을 사리는 것이 마땅한 법도로…….

“조용히 하라 그리 일렀거늘, 뭐 하는 짓거리냐?”

벌컥 열린 문 사이로 황제가 모습을 드러냈다. 길게 늘어서 있던 수십 명의 상궁 나인과 황제의 그림자가 일순간 머리를 조아리며 입을 닫았다.

“기침하시었습니까, 폐하.”

“뭐냐.”

해가 중천인데도 황제는 아직 침의 차림이었다. 해가 뜨기도 전, 늘 새벽녘에 일어나 누구보다 이른 아침을 맞았던 황제가 아니던가. 단 한 번도 이런 일이 없었기에, 승지는 혹여 무빈이 아닌 황제께서 옥체가 미령하신가 저어되어 바짝 긴장하며 안색을 살폈다.

잔뜩 찌푸린 표정은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 짓는 그의 습관인데, 어쩐지 평소보다 온화한 기운이 스멀스멀 났다. 용안(龍顔)이 찌푸려졌음에도 어찌 웃고 계시는 것 같은 기분인지. 승지는 불경하게도 황제를 똑바로 바라보며 멍하게 입을 벌렸다. 그러니까, 그것이…….

“폐하…….”

“뭐냐?”

“드, 드디어!”

“시끄럽다.”

“겨, 경하드리옵니다!”

주먹 쥔 오른손으로 자신의 왼쪽 어깨를 두드리며 한쪽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이는 승지를 따라, 그의 뒤에 서 있던 금룡대가 그와 같이 무릎을 꿇었다. 갑작스러운 사내들의 행동에 상궁 나인들이 움찔 놀라 주춤하는 사이, 황제는 혀까지 끌끌 차며 제 앞에 무릎 꿇은 승지의 허벅지를 냅다 발로 찼다.

“시끄럽다, 이놈아. 아침부터 괜한 일로 소란 떨지 말고 썩 꺼져라.”

이른 아침부터 등청(登廳)해 초조하게 황제를 기다리는 신료들이 떠올랐지만, 승지는 만감이 교차하는 듯한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 그간 닿을 듯 닿지 않았던 정인의 체온을 그리워하며, 아침마다 폭언과 발길질에 당한 금룡대가 어디 한둘이던가.

이따금 너무하신 것이 아니냐는 불만이 터져 나왔지만, 한창 혈기 왕성하실 폐하께서 되지도 않은 수절 과부와 같은 생활을 하시는 것이 안타까워, 그들은 무겁게 입을 닫고 서슬 퍼런 시선을 감내해야 했다.

그런 와중에 정인께는 어찌나 다정하신지. 그저 보고 있기가 민망하고 안타까워 하루라도 빨리 동침하실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으니.

“괜한 일이라니요? 이것이 어찌 괜한 일입니까? 소장은 너무도 기뻐서, 크흑…….”

“미친놈 같으니.”

혀를 끌끌 차면서도 돌아서는 황제의 입꼬리가 흡족하게 올라가 있음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될 일이었다.

“근데 왜 안 대는데?”

고개를 갸웃하는 황자를 바라보며 현 상궁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어서 침소 문을 열라고 떼를 쓰던 황자는 승지가 목마를 태워 주겠다고 나서자, 그제야 한발 뒤로 물러선 참이었다.

“효자는 아침저녁으로 문안 인사 올려야 하는 거라고 스승님께서 그러셨는데…….”

“오늘만 거르십시오. 그래야 진정한 효자이십니다.”

“응, 알아쪄. 이히히, 재밌다.”

생전 처음 타보는 목마 덕분에 황자의 기분은 날아갈 듯 바뀌었다. 아직 이른 아침이라 해가 강하지 않아 후원을 이리 돌아다니니 풀 냄새가 상쾌했다.

“저하, 이따 맛난 떡을 보내겠사옵니다.”

“떡? 떡? 내가 좋아하는 거?”

“예, 아주 넉넉하게 했으니 마음껏 드십시오.”

“현 상궁 채고야!”

언제 또 떡까지……. 입을 반쯤 벌리고 돌아보는 승지를 향해 현 상궁이 빙긋이 미소했다.

“금룡대 전부 맛 보실 정도는 됩니다.”

잔치는 잔치구나, 여러모로. 끄응, 신음을 내쉬는 승지를 내려다보며 황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승지, 힘드로?”

“하하하하. 아닙니다, 저하. 하나도 힘들지 않습니다. 새털처럼 가벼우신 저하가 아니십니까.”

“아바마마는 내가 뚠뚠해서 안아주면 팔 아프다고 그러셨는데…….”

“폐하께서 많이 피곤하셨나 봅니다. 소장이 이대로 동복궁까지 모시겠사옵니다.”

“승지도 채고야.”

깔깔거리는 아이의 웃음소리가 빛나는 이른 아침이었다.

“왜 일어나느냐?”

“황자 목소리가 들립니다.”

“문안 인사를 왔더라. 누워 있어. 아직 움직이기 불편하지 않으냐?”

민망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것이 황제다웠다. 이렇게 늦은 시각까지 침의 차림으로 침소에 있는 그의 모습에 불안함을 느낄 새도 없이, 기하는 허리를 찌르르 울리는 통증에 낑낑거리며 몸을 모로 뉘었다.

“계속 이리 누워 있을 테냐?”

“폐하.”

“응?”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마주 보고 누우니 표정이 아주 잘 보였다. 자꾸만 입술을 달싹이며 망설이는 표정과 굳어지는 얼굴이 마뜩잖아 손가락 언저리로 볼을 쓰다듬자, 겨우겨우 짜낸 것 같은 웃음이 입술 끝에 걸린다.

“서찰을, 받았습니다.”

“응?”

“아버님께요.”

손가락이 굳어진다. 눈을 맞추지 못하고 입술을 닫은 기하는 잠시 숨을 고르듯 다음 말을 입에 담지 않았다. 짧은 침묵이 두 사람 사이를 무겁게 휘저었다. 어떻게든 피해 가려던 물웅덩이를 넘자, 거대한 진흙탕 발밑에 있었다.

“혹시나 했지만, 아버님 필체가 맞습니다. 내용 또한, 입궁할 때 아버님께서 하시던 말씀과 같았습니다.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힘없이 흐트러지는 기하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황제는 말없이 정인을 응시했다. 저 예쁜 입에서 또 무슨 말이 튀어나올까, 심장이 벌써 저릿저릿했다. 겨우 꿈에서 깨어난 듯 달고 행복한 시간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지켜내려고 안간힘 쓰던 이 시간이, 자욱한 안개처럼 힘없이 흐려지다 이내 사라져 버리는 것은 아닐까.

“폐하를 믿지 말라 하셨습니다. 신첩은 언제나 북성의 백성이고, 아버님의 자랑스러운 아들이니 이제 그만 북성으로 돌아오라 하셨습니다.”

황제가 몸을 일으켰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길고 차진 머리카락이 너울너울 춤을 췄다. 기하는 눈동자만 굴려 그 모습을 가만히 응시했다. 황제의 얼굴엔 아무런 감정이 묻어 나오지 않았다. 그는 그저, 말없이 기하를 바라보며 무거운 숨을 골랐다. 그가 느리게 눈을 깜박일 때마다 여인의 것처럼 촘촘하고 긴 속눈썹이 그림자를 만들었다.

“답신은 아직, 띄우지 않았습니다.”

“그래.”

“그전에 폐하께 여쭐 것이 있어서요.”

몸을 일으키려 하자, 익숙하게 손을 붙잡아준다. 어깨를, 등을, 허리를 다독이는 커다란 손. 그 따뜻한 손길에 울컥 서러움이 밀려온다. 이제야 겨우 잡은 이 손을, 또다시 놓아야 한다면 어쩌나. 그러면 그땐 어찌 살아야 할까.

“폐하.”

“그래.”

“처음 입궁한 이후, 아버님과 형님께 몇 차례 서찰을 띄웠습니다. 몇 번인가 답신이 왔지만, 금세 끊기고 말았습니다. 아버님께서는 그것 또한 폐하의 뜻이라…….”

점점 굳어지는 황제의 표정에 기하는 일순 입을 멈췄다. 형형한 노기가 어린 그의 표정은 상상했던 것보다 더 서늘했다.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 가슴이 지끈거렸다.

이대로 혹, 그에게 미움 받는 것은 아닐까. 처음 그가 말했던 그대로 볼모가 되는 것은 아닐까. 북성에 누가 되어서는 아니 되는데. 아버님과 형님께 폐를 끼쳐서는 아니 되는데. 그것보다 견딜 수 없는 것은, 아마 돌아서는 정인을 붙잡지도 못하는 마음일 것이다.

“…너.”

기하의 양쪽 팔을 덥석 잡은 황제는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고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의 손등 위로 드러난 푸른 힘줄이 잘게 움직이는 것을 내려다보며, 기하는 아픔도 잊고 그저 웃었다. 화가 나셨을까.

“폐…….”

“안 돼. 그리는 못 한다. 이제 와서 너를 다시 달라고? 네가 북성의 백성이라고?”

“폐하.”

“너는 내 것이다. 나의 빈이고, 이 태화당의 주인이고, 짐의… 정인이지 않으냐.”

안 된다. 못 간다. 누구에게도 내어주지 않을 것이다. 너를 외롭게 했던 시간은 내가 다 보상할 것이다. 너를 아프게 한 시간 또한 그리할 것이다. 네가 벌을 내리면 달게 받고, 그 설움 모두 잊을 때까지 하라는 대로 할 것이다. 그러니 기하야…….

“폐하.”

“너를 그토록 외롭게 했는데. 나는 또, 서연에게 너를 빼앗기기 싫어 널 어디로 숨겨야 할까 생각했다.”

“사내 몸으로 폐하께 시집까지 왔는데, 가긴 어딜 가라고 하십니까.”

짓궂은 표정을 짓던 기하가 해사한 미소를 지었다. 음울한 그림자로 가득하던 황제의 얼굴을 뭉툭한 손가락으로 쓰다듬자, 금세 손을 붙잡아온다.

“폐하께서 가라 하셔도 안 갑니다.”

“서연이 돌아오라 해도?”

“출가외인(出嫁外人)입니다.”

“서진하가 돌아오라 청해도?”

“형님께 지켜야 할 가족과 북성이 있듯이, 신첩에게도 지켜야 할 폐하와 황자, 태화당 식구들이 있습니다. 사내의 신의(信義)를 우습게 여기지 마십시오. 신첩은 죽어 귀신이 된 후에나 황궁을 나설 것입니다.”

부러 웃었다, 웃지 않으면 금세 눈물이 날 것 같아서. 제아무리 모든 것을 바쳐 마땅한 정인이라 해도, 그 앞에서 우는 것은 추한 일 같아 몇 번이나 입술을 곱씹었다.

“폐하를 믿지 말라 하셨지만…….”

“…….”

“단 한순간도, 폐하를 믿지 않았던 순간은 없습니다.”

“…….”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 신첩을 지켜주셨지 않습니까.”

“…….”

“어여쁘게 웃으면, 가장 귀한 사람이 되게 해주시겠다고…….”

“…….”

“설마 잊으셨습니까?”

그 말만 가슴 한쪽에 새기고 여기까지 왔거늘.

일순 표정을 바꾸는 기하를 향해 황제는 얼른 손을 휘저으며 어색하게 웃었다. 제가 그런 약속을 한 적이 있던가? 기억을 반추하니 얼추 그런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단지 너무 오래된 일이라 선명하지 않을 뿐, 아주 까맣게 지워버린 것은…….

“계속 그런 표정으로 볼 것이냐?”

“남아일언중천금(男兒一言重千金)이라 했습니다.”

“기하야. 어찌 그런 고약한 표정을 한단 말이냐, 응? 과인(寡人)이 잘못하였다. 하나, 아주 잊은 것은 아니다. 내 어찌 너를 처음 만난 날을 잊을 수 있겠느냐.”

“평생 가슴에 품고 산 첫정도 아닌데, 잊으실 수도 있지요.”

“어허, 어째 말에 가시가 있어. 첫정이 아니라니. 짐의 마음속에 든 것은 네가 유일한데, 어찌 첫정이 아니라는 게냐. 그리 모질게 말하지 마라, 응?”

황제는 혹여 제게 완전히 돌아앉은 기하가 불편한 몸으로 움직이다 탈이라도 날까 전전긍긍하며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분명 조금 전까지 이런 황당한 기분이 아니었는데, 어째서 이리되고 말았나. 이런 기억력으로 어찌 대(大) 수환제국을 통치한단 말인가. 그저 통탄할 뿐이다.

“기하야.”

“…….”

“기하야…….”

몇 번을 불러도 꼼짝하지 않던 정인은 슬그머니 다가가 등 뒤에서 허리를 끌어안으니 그제야 웃음을 터트렸다.

“나 좀 봐다오.”

황제가 귓가에 속삭였다. 그의 따뜻한 손과 단단한 가슴과 향긋한 체향이 온몸을 감쌌다.

멀어지지 않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을 기억할 것이다. 돌아서지 않을 것이고, 겨우 맞닿은 나의 꿈을… 놓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이제 제국의 백성이다. 이제 완전한, 황제 폐하의 사람이다.

겨우 숨긴 미소가 툭 터졌다.

* * *

금룡전에 싸늘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서로 삿대질하며 목소리를 높이던 신료들은 황제가 내팽개친 교지가 바닥에 나뒹굴자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

“그래서, 경들이 바라는 바가 뭔가.”

“폐하, 이것은 분명 역모의 증좌가 아닙니까. 북성의 서진하가 낙산으로 오가는 뱃길을 전부 틀어막았사옵니다. 낙산은 서남성의 광물과 소금이 거래되는 길입니다. 이렇게 막힌 길이 벌써 한두 군데가 아닙니다. 그들은 군사를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것은 북왕과 서남성왕이 해결해야 할 문제다. 그들은 아주 오랜 기간 사이가 원만하지 않았다. 이런 것이 한두 번도 아닌데, 서남성왕은 그때마다 이리 질질 짜며 짐에게 도움을 청할 것인가?”

노기 띤 황제의 음성에 얼굴까지 붉히며 열을 내던  총사령관인 표기장군(驃騎將軍 : 대장군(大將軍) 다음가는 무관직) 김혁선은 입을 꾹 다물고 그러쥔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

이제는 은퇴할 나이를 훌쩍 넘겨 몸이 둔해질 대로 둔해진 그가, 선황 시절부터 붙잡은 그 자리를 아직 차지하고 있을 수 있었던 것은 뒤를 봐주는 서남성왕의 입김이 가장 컸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김혁선이 모시는 것은 황제가 아니라 서남성왕 연태진이라는 말이 황궁 안에 파다했다.

“그리 북성이 마음에 들지 않거든 직접 맞서 싸우라 해라.”

“폐하,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북성의 흑마단에 맞설 군대는 수도성을 호위하는 태룡대와 폐하의 그림자인 금룡대뿐입니다.”

태위(太尉 : 국가의 대사를 맡아보는 최고 관직)의 느긋한 말투에 김혁선은 기름진 얼굴을 붉히며 머리를 조아렸다. 혹여 제게 괜한 불똥이 튈까 노심초사하는 김혁선을 향해 황제는 혀를 끌끌 찼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도대체 마음 놓고 믿을 만한 인간이 하나 없다.

“태위는 나의 그림자들 수준을 너무 낮게 평가하는군.”

“폐하의 그림자는 오직 폐하만을 위한 것, 폐하의 안위와 직결된 일이 아니고서야 어찌 그림자를 밟겠사옵니까. 소신의 미천한 식견이니 마음 쓰지 마시옵소서.”

“그러니 미천한 그대들이 답답해서 하는 말 아니냐. 북성의 움직임을 뭘 그리 주시하고 있어? 그리 할 일들이 없더냐? 내 긴밀하게 명한 일이 있다 몇 번이나 얘기했거늘, 자꾸 이리 물고 늘어지는 것은 내게 반(反)하는 것이더냐? 역모? 감히 누가 그딴 소릴 지껄여!”

일제히 바닥에 엎드린 신료들이 머리를 조아렸다. 지금껏 큰소리 한 번 없이 정사를 논하던 황제의 노호(怒號)에 놀란 그들은 숨도 크게 내쉬지 못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또다시 이 말을 꺼내는 자가 있다면, 북성과 빈을 걸고넘어져서 손에 넣으려는 것이 무엇인지 내 낱낱이 밝힐 것이다.”

“폐하,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그 입 다물어라. 금일은 짐의 기분이 아주 좋아 이 정도로 하겠다. 차후에 같은 말을 반복할 시, 입을 여는 자의 혀가 얼마나 긴지 내 직접 뽑아 그것을 확인해 볼 참이다.”

황제의 용포가 펄럭였다. 그의 뒤를 따르는 금룡대의 발소리가 묵직하게 대전을 울렸다. 이를 바드득 갈다 도저히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대제학(大提學)의 앞을 막은 것은 그림자의 검이었다.

제대로 검을 뽑지도 않은 검집이었으나, 그의 눈매가 어찌나 살벌하던지 평소 옳지 않은 일에 늘 먼저 목소리를 높이던 대제학조차 그 순간 집에 있는 처자식이 떠올라 절로 입을 다물었다.

“따라오는 놈들은 없느냐.”

“아이들에게 미리 길을 막으라 명했습니다.”

“잘했다. 너 아주 오랜만에 밥값을 하는구나.”

저를 휙 돌아보는 황제의 미소에 승지는 제 존재가 한없이 초라해짐을 느꼈다. 조금 전까지 피바람 휘몰아치듯 언성을 높이던 분의 용안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산뜻한 미소가 황제의 입가에 걸렸다.

“표기장군 얼굴이 노래지는 걸 보았느냐?”

“암만 그러셔도 혀를 뽑아 재본다는 말씀은 너무하셨습니다.”

“농인 줄 아느냐?”

“말씀만 들어도 끔찍합니다.”

생각보다 비위가 약한 승지가 가볍게 헛구역질하려 하자, 황제는 그의 무릎을 걷어차며 혀를 찼다. 저 꼴을 하고 감히 그림자의 선봉에 서다니. 평생 쓸 운을 거기에 쏟아부었으니 네놈은 이제 장가도 못 간다며 중얼거리는 황제를 향해, 승지는 너무하신다며 징징 짜는 소리를 해댔다.

“폐하께서는 어찌 소장만 그리 미워하십니까.”

“네가 미운 짓만 골라 한다는 생각은 안 하느냐? 뭘 그리 쳐다봐? 나이도 어린 놈이 노인네 시늉하는 것이냐? 어찌 그리 골골대?”

연신 어깨며 목을 툭툭 때리던 승지의 손이 멈췄다. 하도 뻐근해 제멋대로 움직인 손을 탓해봤자, 이미 물은 엎질러졌다.

“송구하옵니다, 폐하.”

“왜 그러느냐고.”

“아침에 황자 저하 목말을 태워드렸더니…….”

말하고 보니 민망하고 어색했다. 하하하하, 승지의 헛웃음 소리에 멀리 지나가던 이들조차 걸음을 멈추고 머리를 조아렸다.

“그 무거운 것을 어깨에 올렸단 말이냐?”

“폐하께서는 더 무거우신 무빈마마도 번쩍번쩍 안고 다니시면서.”

“너 어디 감히 내 빈을 비교해?”

“폐하의 아드님이십니다. 그것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으실 막내 아드님이시지 않습니까.”

“그 큰 것을 어찌 눈에 넣어?”

정말로 끔찍하다는 듯 몸서리치는 황제를 황망히 바라보던 승지가 일순간 고개를 들었다. 빙빙, 크게 호를 그리는 매의 그림자에, 그는 가볍게 손을 들어 신호를 보냈다.

“전서응(傳書鷹)이 당도했습니다.”

황제가 발을 멈췄다. 사나운 눈을 빛내며 빠르게 낙하하는 매를 향해 황제가 팔을 뻗었다. 눈 깜짝할 새에 날아든 매는 날카로운 발톱을 감추며 황제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미리 준비하고 있던 승지가 생고기 한 덩어리를 내밀자 날쌔게 낚아챈 짐승은 오랜 시간 굶주린 것 같았다. 황제는 짐승이 먹이를 다 넘길 때까지 움직이지 않았다. 겨우 고기 한 덩어리를 삼키고 날렵한 눈을 빛내는 짐승의 발에 감긴 것을 풀어내자, 그림자가 다가와 이번에는 살아 있는 작은 짐승을 보였다.

승지의 고갯짓에 매는 그림자의 손으로 옮겨 갔다. 짧게 주위를 두리번거린 그는 잘 접힌 종이를 황제에게 내밀고 지밀상궁을 향해 눈짓했다. 순간 걸음을 멈추고 등을 돌린 궁인들이 양쪽 귀를 막고 머리를 조아렸다.

“답이 왔습니까?”

“서진하의 필체가 맞는 것 같긴 한데―.”

종이를 승지에게 넘긴 황제가 다시 앞장서 걸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대전에서 태화당까지는 너무 멀었다. 차라리 제 침소인 수신전으로 기하의 처소를 옮기는 것은 어떨까. 어차피 이제는 무용지물인 수신전이 아니던가.

“이자가 정신 나간 것이 아닙니까? 어딜 감히 폐하께 오라 가라, 망령이 단단히 났습니다.”

“길령은 저자가 제법 볼 만하였지.”

“폐하.”

“빈이 좋아하겠구나.”

“폐하!”

“이놈이나 저놈이나, 못 먹을 걸 처먹었느냐. 돼지 멱따는 소리 하지 말고 준비나 제대로 해라.”

성큼성큼 앞서 나가는 황제를 뒤따르며 승지는 더 이상 불만 어린 말을 붙이지 못했다. 대전으로 향하면서 태화당에 내릴 품목을 조목조목 이르던 황제는, 산더미 같은 하사품을 받고 눈이 동그래져 크게 당황했다는 기하의 반응을 들으며 파안대소했다.

“빈이 그리 놀랐단 말이냐?”

“예, 폐하. 너무도 과하다시며 몇 개만 남기고 돌려보내라고까지 하셨습니다.”

“쯧, 욕심도 없는 것. 과하긴 뭐가 과하단 말이냐? 상선, 네가 보기에는 태화당이 총비의 처소 같더냐?”

“무빈마마께서 워낙 검소하시어, 가장 품계 낮은 상재(商才) 김 씨의 궁보다 소박한 것이 사실이옵니다.”

“그리 아무것도 없으면 사람들이 무빈을 어찌 생각하겠느냐. 짐을 어찌 생각하겠어?”

“그렇사옵니다, 폐하. 응당 그리하셨어야 합니다.”

저 말라비틀어진 매미 같은 상선은 또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는가. 한창 심각하게 앞날을 걱정하며 황제의 뒤를 따르던 승지가 이를 바드득 갈았다. 저놈의 영감탱이,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영빈의 꽁무니에 달랑거리며 붙어 있더니만.

아무리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것이 황궁이라지만, 사내가 의리는 지키지 못할망정……. 하긴, 알량한 불알 두 쪽도 먹고사는 것에 맞바꾼 삶이니 뭘 더 바라겠는가.

주변에 죄다 이런 인간뿐이니, 폐하께서 사람을 믿지 못하심은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어서 가자. 빈이 기다리겠다.”

점점 빨라지는 발걸음에 또다시 상궁 나인들이 긴장하는 것을 알 턱 없는 황제의 용포가 미지근한 바람에 펄럭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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