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7장 무영(武領) (28/49)

27장 무영(武領)

아이는 바들바들 떨며 눈도 제대로 맞추지 못했다. 그런 아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기하는 몇 번이고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빠끔거렸다.

이전과 같았다. 비단에 곱게 싸인 조그마한 서찰. 누군가 보더라도 쉬이 넘겨버리고 말, 흔하디흔한 것이었다.

“이것을 네게 전하라고 한 자가 누구냐.”

“마마…….”

“그자가 무슨 말을 하며 이것을 전하라 했지?”

“그것은, 그것은…….”

금세 눈물을 쏟을 것 같은 아이는 우물거리면서도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협박을 받았거나, 뇌물을 받았겠지. 아니면 둘 다이거나.

“이것은 나의 아버님에게서 온 서찰이다.”

“예, …예?”

“폐하께 반기를 들고 있는, 북성의 왕 말이다.”

“마, 마마.”

“그것이 무슨 뜻인지 알고 있느냐.”

두 눈이 벌게지도록 눈물을 참는다. 그러면서도 끝끝내 입을 열지 않는다. 기하는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짚었다. 아이를 닦달한들, 아무것도 얻지 못할 것이라는 건 자명한 일이었다.

“연금아. 어쩌면 나는, 끝내 너를 지켜줄 수 없을지도 모른다.”

“…마마, 흡, 송구…….”

“너 또한 피치 못할 일이 있었겠지 하고 넘기기엔, 폐하의 안위가 걸린 일이라 그리 말하지 못하겠다. 하니, 앞으로는 누구도 믿지 마라.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아듣겠니?”

“예. 예……, 마마.”

“나가 봐. 너무 오래 있으면 현 상궁 오해할라.”

담담하게 말하는 기하의 얼굴을 차마 바로 볼 수 없었는지, 연금은 얼른 눈물을 닦아내고 머리를 숙인 채 뒷걸음질 쳤다.

심란한 마음을 바로잡을 길이 없었다. 한 번으로 그칠 줄 알았던 서찰은 벌써 세 번째였다.

너는 아비를 도와야 한다. 더는 황제를 믿어서는 아니 된다.

네가 도와야 북성이 산다. 아비와 네 형, 그리고 먼저 떠난 어미를 위해서.

굶주린 북성의 백성을 모르는 척해서는 아니 된다.

이번에는 지난번과 같은 내용이었다. 구구절절 쓰인 말은 끝까지 보고 싶지도 않았다. 답신을 기다리겠다는 마지막 문장을 눈으로 훑으며, 기하는 이전처럼 서찰의 끄트머리에 불을 붙였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끼잉.

발밑에 늘어져 있던 영이 갑작스러운 불길에 놀라 얼른 기하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본디 온순한 아이였으나, 형제를 잃은 후로는 더더욱 겁이 많아졌다.

짐승의 등을 가볍게 쓰다듬으며 벌떡 일어난 기하는 창가로 걸어가 문을 활짝 열었다. 은은한 바람이 바닥에 떨어진 재를 어지럽게 흩날렸다.

현 상궁이 보면 또 잔소리하겠지만, 어쨌거나 지금은 답답함을 가시게 할 무언가가 필요했다. 생각할 시간 또한 필요했고.

무작정 이 일을 폐하께 아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비록 아버지께서는 단 한 번도 저를 드러내놓고 어여삐 여기신 적이 없었으나, 마음속으로는 분명 자랑스러워하실 거라고 생각했다.

무뚝뚝한 성정으로 이따금 어깨를 두드려 주시거나,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기도 하셨다. 애틋하게 바라보시던 눈빛이 아직도 선연하니, 애정에 굶주렸으나 천덕꾸러기로 자란 것은 아니었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제가 이해해야 하는 일이었다. 무작정 서러워할 일이 아니었다.

창문 너머를 흘려보며 영의 등을 막 쓰다듬던 기하가 숨을 멈췄다. 귓가에서 느껴지는 서늘한 인기척에 그대로 몸을 굳힌 순간, 제게 뻗어지는 손길을 쳐낸 기하는 그대로 몸을 틀어 손에 잡힌 화살촉을 상대에게 겨눴다.

“나다, 나야.”

두 손을 반쯤 들고 항복의 자세를 취하는 얼굴은 뜻밖의 정인이었다. 그제야 사나운 눈으로 상대를 응시하던 기하는 긴 한숨을 내쉬며 들고 있던 화살을 바닥으로 툭 떨어트렸다. 일간 얼마나 긴장했던지, 온몸의 근육이 잔뜩 움츠러들었다.

“어찌 인기척도 없이 들어오십니까?”

“네가 못 들은 거겠지. 깊은 생각에 빠진 것 같아 골려주려 하였더니, 민첩하기도 하지.”

“하마터면…….”

아마 반 박자만 더 빠르게 움직였더라면 그대로 화살이 황제에게 날아들었을 것이다. 아니다. 타고난 무골이신 황제께서 그것을 피하지 않으셨을 리 없지. 그것은 괜한 기우다.

“왜 말을 하다 말아?”

“고작 신첩의 힘으로 폐하를 어찌할 수는 없다는 걸 막 깨달은 참입니다.”

“그래?”

“폐하께서 가만히 계시면 모를까. 신첩이 폐하의 호적수(好敵手)가 될 수 있겠습니까.”

“난 그대가 덤벼도 피할 생각이 없는데?”

싱글싱글 웃는 황제를 밉살맞게 쳐다보다 얼른 등을 돌린 기하는 뻐근하게 저린 가슴을 쓸어내렸다. 자칫했으면 그를 향해 두고두고 후회할 큰일을 저지를 뻔하였다.

아무리 멍청한 생각을 하고 있었어도 유분수지. 서엽과 그림자들까지 호위하고 있는 처소에 누가 감히 들어오리라 예측했단 말인가. 지나치게 예민하게 굴고 있었다.

“이런 시각에 어쩐 일이십니까?”

“잠시 짬이 나서.”

“그럼 오수라도 드시지요. 금룡전에서 예까지, 오가시는 시간이 얼마입니까.”

“오수보다 네가 더 필요하다.”

일부러 황제의 시선을 피하려 처소 안을 서성이던 기하는 제 뒤로 와서 허리를 끌어안는 그의 손등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내 빈의 기분이 요즘 무척 저조한 것 같은데.”

“아닙니다.”

“도통 웃질 않잖느냐. 잠도 설치는 것 같고.”

“신첩이요?”

“요즘은 코를 골지 않던데? 그 정도면 얕은 잠에 빠진 것 아니냐?”

또 저러신다. 아무리 밉살맞게 흘겨보아도 꿈쩍하시지도 않고, 은근히 살을 더듬는 손길을 떼어내려 하면 할수록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끌어안는 황제의 힘을 이겨낼 수가 없었다.

“떨어지십시오, 덥습니다.”

“덥긴 뭐가 더워? 아직 한여름도 아닌데.”

“이 정도 날씨면 북성의 한여름보다 덥습니다.”

“이러다가 한여름 되면, 곁에도 못 오게 할 테냐?”

“그럴지도 모릅니다. 말씀하지 마세요. 벌써 더위에 지칠 것 같습니다.”

“내년부턴 가장 더운 시기는 시원한 곳에서 보내야겠구나.”

기하는 도통 떨어질 기미도 보이지 않고 딴소리만 늘어놓는 황제의 손을 가까스로 떼어내고, 그를 향해 돌아섰다. 이분을 향해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아무도 다치지 않고, 그저 지금의 행복을 잡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지 마라.”

뺨 위로 올라온 그의 손은 시원했다. 여름의 뜨거움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을 만큼, 서늘한 손이었다. 그의 체온에선 늘 바람 냄새가 났다.

“폐하.”

“그래.”

“만일, 폐하께서… 제국과 신첩 중 하나를 택하셔야 하는 순간이 오게 된다면…….”

황제가 어깨에 짊어진 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이것은 단지 마음을 다잡는 데 쓰일 말이었다. 사모하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설령 그대로 버려진다 하더라도, 어쩔 수 없었다는 이유를 되새김질하고 싶었다.

“제국의 황제이니 백성을 비롯한 수많은 이들을 외면할 수는 없겠지.”

“예. 그리 말씀하실 줄 알았습니다.”

다행이다, 그의 신념이 변하지 않아서. 마음이 아프고 쓰린 것은 어쩔 수 없으나, 혹여 그가 나를 버리게 될 날이 온다면, 그 또한 삶의 무게 때문이라고 그렇게 생각했으면 좋겠다. 미안함이나 죄책감은 그냥 지워버렸으면 좋겠다.

“웃지 마라.”

“웃는 것도 마음대로 못 합니까?”

“울 것 같은 얼굴로 억지로 웃지 말란 말이다.”

울고 싶으면 울고, 웃고 싶으면 웃어. 그렇게 애써 표정을 만들지 마라. 내게 숨기려 하지 마라.

“폐하께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진작 북성을 버렸더라면 괴롭지 않았을까요.”

“그럴 수 있을 것 같으냐?”

“그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까맣게 잊어,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태어난 나라를, 낳아준 부모를, 함께 자란 형제를 어찌 버릴 수 있겠어.”

“…….”

“버리라 하지 않겠다. 이제 잊으라고도 하지 않으마. 괜한 심술, 부리지 않을 것이다. 하니,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

“폐하께 해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폐하께서 가시는 길에 누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신첩은 다만…….”

“쉬잇, 그만.”

가슴이 맞닿았다. 그가 품에 안아줄 때마다 따뜻하고 포근해서 자꾸만 눈이 감기려 했다.

“기하야.”

“…예, 폐하.”

투박하지만 애정이 녹아든 손길이 기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잔잔하게 가라앉은 황제의 시선에 그저 머리를 숙였다. 넘치는 애정을 달리 표현할 길이 없어서였다. 그 마음을 보답할 길이 까마득해서였다. 혹여 제 연심으로 인해 그가, 제 정인이…….

“내 무슨 일이 있어도 너를 지키마. 이것은 사내의 약속이다.”

“하지만…….”

“정인 하나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황제가 어찌 만백성을 다스릴 수 있다더냐. 제국은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짐은 황제이기 전에 너의 사내니,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눈물이 차오른다. 그런데도 기하는 쉽게 울지 않았다. 몇 번이고 제 옷깃에 얼굴을 문지르며, 덜덜 떨리는 손가락을 숨겼다.

마음이 문드러져 썩어 가는데도 아프다는 소리도 내지 않는다. 미련하고, 안타까운 모습에 황제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지 마십시오.”

“…….”

“폐하께서 신첩 때문에 위험한 일에 처하신다면…….”

“잠시도 눈앞에서 사라지면 마음이 불안한데, 어찌 너를 홀로 그냥 둘 수 있겠어.”

그것은 아니 될 일이다. 네가 북성을 끊지 못하듯, 나 또한 너를 놓을 수 없다. 돌고 도는 관계 속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으니, 그저 때가 되기만을 기다림이 옳지 않겠느냐.

그러다 보면 좋은 날이 오겠지. 그러다 보면, 너 또한 마음껏 웃을 수 있는 날이 오겠지. 짐을 향해 칼을 겨누는 너의 아비 또한, 너의 그 마음을 알고 행복을 빌어줄 날도 오지 않겠느냐.

* * *

오랜만에 화창하게 날이 갰다. 새벽까지 부슬부슬 내리던 비가 그치고 해가 쨍쨍하게 내리쬐는 하늘 아래 제국민은 활기를 되찾았다.

그간 고요하던 황궁 또한 마찬가지였다. 입궐을 미루던 대소신료의 가마가 줄지었고, 그간 미뤄둔 빨래며 청소를 하는 궁녀들의 손길이 분주했다.

그런 황궁 내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오가는 전각은 단연 영빈의 처소였다. 기회를 잡기 위해 찾아든 수많은 신료와 재물을 탐하는 후궁들은, 수년간 황제의 총비 자리를 지켰던 영빈을 쉽게 외면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암암리에 나도는 북성에 대한 소문에, 이제 곧 무빈은 끈 떨어진 연이 될 것이라는 말이 더해지고 있었다. 한동안 잠잠했던 연호당이 활기를 띠기 시작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물론 황가의 적통을 회임한 황후에게 흘러들어 간 세력이 만만찮았지만, 그녀는 워낙 곧은 성품이었기에 자신의 사사로운 욕망을 드러내는 법이 없었다.

“마마.”

“아무도 들이지 말라 했다.”

“저, 무영군께서…….”

“아무도 들이지 말라 했지 않아!”

침상에서 벌떡 일어나며 손에 잡히는 것을 모조리 바닥에 내던진 영빈은 사납게 씩씩거렸다. 그는 며칠째 두문불출하며 침소에서 나오지 않았다. 화창한 여름의 초입, 긴 장마가 끝나면 가볍게 사람들을 불러 다과를 즐겼던 영빈의 갑작스러운 칩거에 흉흉한 소문이 나돌까, 연호당 나인들은 발을 동동 굴렀다.

“마마, 전하께서 금일에만 두 번이나 다녀가시었지 않습니까.”

“어지러워 앉아 있을 수가 없다. 전하께는 죄송하지만, 쾌차하면 내 직접 찾아뵙겠다고 해.”

“마마.”

“폐하는? 폐하께는 내가 몸져누웠다고 기별하였더냐? 폐하께선 어디 계시느냐? 설마, 또 그 망할 태화당에 걸음 하신 것이냐?”

“폐하께서는 금룡전에서 정무(政務)를 보고 계시옵니다. 마마, 고정하시옵소서.”

영빈은 반쯤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하룻밤에도 수십 번 패악질을 부렸다. 손에 잡히는 대로 물건을 집어 던지고 악을 쓰고 울기를 반복하다, 폐하를 찾아뵈어야겠다며 한밤중에 뛰쳐나가려는 것을 상궁들이 몇 번이나 붙잡았다.

그러다 이내 몸을 잔뜩 웅크리고 흐느끼며 황제를 애타게 불렀다. 그 모습이 어찌나 측은하던지, 연호당 상궁 나인들은 그와 함께 눈물 바람으로 까마득한 날을 지새웠다.

“폐하를 뵙고 싶다. 장 상궁, 상선을 만나 보아. 상선이라면 내 청을 쉽게 거절하지 않을 거다.”

“상선 영감께서도 애는 쓰시고 계시나, 폐하께서 워낙…….”

“그럼 어찌한단 말이냐! 폐하께서 나를 찾으실 때까지 그냥 기다리란 말이냐?”

왈칵 울음이 터질 것 같은 영빈을 마주하기 민망해 상궁은 그저 머리를 조아렸다. 어깨를 축 늘어뜨린 모습이 가련했다.

비록 제멋대로인 성정에 어린 일황자를 제 손에 쥐고 흔들었으나, 영빈은 연호당 나인들에게는 좋은 상전이었다. 패악을 떨며 못살게 구는 법도 없었고, 황실에서 내려주는 봉급 외에도 넘치는 폐물(幣物)을 서슴없이 나눠주는 정도 있었다. 심성이 모질지는 않아 제 사람들은 아낄 줄 알고, 아량 또한 넓었다.

“북성의 소문이 사실이라면, 무빈 또한 오래가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다 황후가 덜컥 아들이라도 낳으면? 무영군은 대체 뭘 하고 있기에, 폐하의 환심조차 제대로 사지 못한단 말이냐? 그 멍청한 정연이 무빈에게 달라붙어 무슨 일을 벌이고 다니는 줄이나 알아?”

“마마, 아직 무영군 전하께서 바깥에 계시옵니다. 부디 말소리를 조금 낮추시는 것이…….”

“전하는 무슨! 차라리 무영군이 아니라 정연군을 택할 걸 그랬다.”

“마마.”

“폐하께서 이러다 영영 나를 보아주지 않으시면 어쩌지? 응? 장 상궁, 무슨 묘안이 없느냐?”

술에 취한 사람처럼 제가 하고 싶은 말만 떠벌리는 영빈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상궁은 그의 손을 붙잡고 다독였다. 아무래도 수면 향이라도 피워 심신을 안정시키는 게 나을 것 같다.

바로 문밖에 서 계신 황자께서 전부 들으셨을 텐데, 그건 또 어찌 변명한다…….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을 애써 누르며 길게 늘어서 있는 나인들에게 눈짓한 장 상궁이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영빈의 손등을 다독였다.

“마마께서는 조금 전에 겨우 잠드셨사옵니다. 송구하옵니다, 전하.”

“마마께서, 많이 미령하신 것이냐.”

황자는 덤덤한 음성으로 입술을 달싹였다. 머리를 조아리는 장 상궁의 눈을 피하는 아이의 얼굴엔 표정이라곤 남아 있지 않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에 대한 말을 모두 들었음에도 내색조차 않는 아이를 바라보는 심정이 퍽 불편하여 그녀는 그저 머리를 조아릴 뿐이었다.

“궁의을 부르는 것이 좋겠다.”

“예, 전하. 마마께서 일어나시오면 꼭 궁의를 부르겠습니다.”

“그래. 그럼 나는 이만 가보마.”

스스럼없이 돌아서는 황자의 뒤를 건형당 상궁들이 따랐다. 그녀들은 몹시 분개하는 얼굴로 연호당과 영빈을 향해 이를 갈았다. 제국의 일황자가, 친모도 아닌 일개 빈에게 이런 취급을 당하는 것은 불합리한 일이었다. 당장 황제께 고한다면 영빈은 분명 벌을 받을 것이다. 물론 그것은 황자가 원하는 일이 아니었기에, 그녀들은 몇 번째 반복되는 수모에 조용히 이를 갈 뿐이었다.

“저하.”

황자는 잠시 발을 멈췄다. 겨우 연호당을 나서고서야 깊은숨을 내쉬며 제 감정을 추스르려 애썼다. 상궁들은 그런 황자의 뒤에 서서 그의 기분이 나아지기만을 기다렸다. 아직 여덟 살밖에 되지 않은 황자는 자신의 감정을 감추는 것에 지나치게 능숙했다.

혹자는 아이다운 맛이 하나도 없는, 그저 성정 사나운 황자라 칭했으나, 날 때부터 아이의 곁에 있던 그녀들이 생각하는 바는 달랐다.

아이는 단지 표현이 어색한 것뿐이었다. 제대로 웃는 법을 배우지 못했고, 어리광 한 번 부린 적이 없었다. 가지고 태어난 것을 지키기 위해, 그리고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지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썼다.

고귀한 황자의 신분임에도 부모의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했던 황자를 처음으로 품에 안아준 것이 영빈이었다. 어쩐 이유에서인지 품에 한 번 안아주지도 않았던 양 귀인 대신, 사내의 몸으로 어미처럼 황자를 돌보아준 영빈을 아이가 지독하게 따르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아직 여유가 있습니다. 귀인 마마께 문후 여쭈러 가시는 것이 어떠십니까?”

“어마마마께선 내가 찾아뵈면 불편해하셔.”

“아니옵니다, 저하. 저하는 마마의 큰 기쁨이시옵고…….”

문득 뒤를 돌아본 황자의 눈빛은 지나치게 쓸쓸했다. 한창 부모 품에서 애정을 받으며 자라야 할 아이의 표정이 아니었다. 그 얼굴을 본 순간 늘어서 있던 상궁들은 저마다 울음을 삼키며 머리를 조아렸다. 그녀들이 아무리 황자에게 애정을 퍼붓는다 한들, 그의 뻥 뚫린 가슴을 채우지는 못할 것이다.

믿었던 영빈조차 황자에게 등을 돌리려 한다. 아버지께 인정받고 황위에 올라 만백성을 보살피며 성군이 되겠다던 다짐을 그리 가슴 깊이 새기게 해놓고.

“어디서부터 잘못됐을까.”

무엇이 부족해서 이리된 것일까. 그렇게 노력했는데, 그렇게 애를 썼는데, 결국 쥐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버지의 관심, 어머니의 손길, 영빈의 애정, 제 뒤를 봐주는 많은 이들의 기대감까지.

“마음의 병?”

“예. 공식적으로는 옥체가 미령하시어 바깥출입을 하지 않으신다고 하나, 이채가 사라지신 지 오래되었다 합니다.”

기하는 현 상궁의 고요한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눈썹을 찡그렸다. 마음의 병이란 것은 무엇인가. 전쟁 통에 모든 것을 잃은 여인들이 이따금 실성하는 것은 보았어도, 제국의 황자, 그것도 황제 폐하의 장자인 무영군의 모후이신 귀인께서 어찌 마음의 병을 얻으셨단 말인가.

“언제부터?”

“그것이 꽤 오래전 일로, 서남성왕의 비호 아래 황자 저하를 출산하신 후부터라는 설도 있고―.”

그 때문에 황자의 당위성을 논하는 자들의 끊임없는 상소가 이어졌다. 황자가 입궁한 것 또한 황제께서 제위에 오르신 이후였으니, 평민 여인의 몸을 빌어 태어난 황제의 장자를 대신들은 무척 못마땅해 했다.

“메마른 성정이 괜히 그러신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긴 합니다.”

“애정이 고프다고 모두 삐뚤어진다던가.”

“황후마마께서 손수 돌보려 하시었으나, 영빈께서 한사코 나서시어…….”

일황자를 향한 영빈의 애정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핏줄에 애착을 드러내지 않던 황제조차 놀라워할 정도였다. 온갖 귀한 것을 아이에게 주고 마치 제 자식인 양 품에서 떼어놓지 않았다. 세간의 수군거림도 차츰 잦아들었고, 황자는 영빈이 제 어미인 줄 착각할 정도였더랬지.

“황자께도 그다지 나쁜 일은 아니지요. 무엇보다 뒷배가 든든한 영빈께서 모후 노릇을 하여 주신다면야, 있느니만 못한 외가 등쌀에 휘청거리시지도 않으실 테고요.”

“외척은 평민 신분이라며?”

본디 평민은 사사로이 황궁 출입을 할 수 없다. 제아무리 황제의 후궁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마찬가지였다.

“귀인 마마의 오라비 되시는 분이 어찌어찌 관직에 오르신 후, 하루가 멀다 하고 황자 저하를 찾으시니 건형당 상궁들이 말만 꺼내도 질색할 정도랍니다.”

“그래.”

“한데 무영군 저하는 갑자기 왜 물으십니까?”

“몇 번 오가는 길에 보았는데 도통 힘이 없어 보여서.”

“그러시겠지요. 판세가 기울었지 않습니까.”

흘리듯 말을 잇는 현 상궁의 음성에 의아함을 갖기도 전, 저 멀리서 어슬렁거리며 다가오는 서엽의 모습이 보였다. 요즘 들어 틈만 나면 자리를 비우는 서엽 때문에 잔뜩 성이 난 현 상궁은 체면도 잊고 성큼성큼 다가가 그를 향해 버럭 악다구니를 질렀다.

“대체 어딜 그렇게 다니시는 것입니까? 마마를 이리 홀로 두셔도 되시는 겁니까? 그러다가 마마께 큰일이라도 생기면 대감께서 책임지실 것입니까?”

“어허, 어찌 이리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거요? 고막 찢어지겠소.”

귓구멍을 후비며 심드렁한 표정을 짓는 서엽을 향해, 현 상궁은 아예 팔을 걷어붙이고 달려들려 했다. 그렇잖아도 툭 하면 사라지는 서엽 때문에 처소 바깥으로 나다니기가 영 껄끄러웠기에, 기하는 현 상궁의 씩씩함을 마음껏 감상했다.

“서 중랑!”

한창 영과 뛰어놀던 황자가 두 팔을 벌리고 서엽을 향해 뛰어왔다. 뒤뚱뒤뚱 뛰는 모습이 어찌나 귀엽던지, 기하는 하마터면 황자를 중간에서 낚아채 덥석 끌어안을 뻔한 것을 간신히 참았다.

대신 다시금 제 곁으로 돌아온 현 상궁과 함께 나무 그늘로 몸을 숨겼다. 햇볕이 어지간히 뜨거웠다. 아직 본격적인 여름도 아니라는데 어찌 이리 더운지, 숨이 턱 막힐 지경이었다. 그 와중에 저리 뛰노는 황자를 보고 있으려니, 아이는 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데 말이야.”

“예, 마마.”

“판세가 기울었다는 것은, 혹 나를 두고 하는 말인가?”

딱히 책망하는 말투도 아니었거늘, 현 상궁의 표정이 금세 머쓱해졌다.

“마마께오선 어찌 생각하실지 모르오나, 평판이 그렇습니다.”

“그런 말에 일일이 휘둘리지 마.”

“권력이야 있으면 좋은 것 아닙니까? 그간 마마께서 홀대 당하셨던 나날만 생각하면, 소인은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지경입니다. 폐하의 총애가 마마께로 향하시니, 정연군 저하께도 감히 함부로 대하지 못하고요.”

“마음은 언제든 바뀔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어쩐지 씁쓸해지는 기하의 음성에 현 상궁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봤다. 하늘의 별을 따 달라고 하면 그것도 들어주실 것 같은 폐하가 아니신가. 입속의 혀처럼 사르르 녹는 것은 바로 황제시다.

매 시진마다 기하가 뭘 하는지, 어디 불편하진 않은지, 못된 무리가 삿된 짓을 하진 않았는지를 일일이 보고까지 받으신다 했다. 그런 폐하의 성심을 어찌 의심할 수 있단 말인가.

“마마.”

“아이가 기운을 잃은 것을 보는 건, 그리 좋은 일이 아닌 것 같아.”

“예?”

“무영군 말이네. 표독스럽게 눈을 부라릴 때는 그저 미운 마음만 들었는데, 그리 어깨를 늘어뜨리고 다니는 걸 보니 자꾸 정연군 생각이 나서 마음이 안 좋아.”

“아무리 저하께서 노력하신다 해도 영빈의 마음이야 빤한 거 아닙니까. 그저 허울 좋은 핑계로 저하를 붙잡고 있을 뿐이라는 건, 이제 황궁 사람들이 전부 다 압니다.”

무언가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잔뜩 얼굴을 찌푸린 현 상궁은 괜히 불지도 않는 바람에 제 치맛자락을 툭툭 털었다. 입 밖으로 말을 꺼내고 보니 그 처지가 딱하다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래도 혹여 가엾다 생각하지 마십시오. 소인은 암만 시간이 지나도 절대로 저하를 이해하지 않을 것입니다. 영이고 달이고, 불쌍한 짐승들을 그리 해코지하시고 어찌 제대로 발을 뻗고 주무신단 말입니까?”

“그 일은 왜 또 꺼내나.”

“말 못 하는 짐승이 아닙니까. 본인도 그리 불편하신 몸을 가지셨으면 마음을 너그럽게 쓰셨어야지, 어찌 그리 독기만 가득하신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몸이 불편하다니?”

“모르셨습니까? 무영군 저하, 왼쪽 귀가 안 들리신다고 합니다.”

외롭지 않은 이 하나 없다는 폐하의 말을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했다. 나고 자란 고향을 떠나 가족과 떨어져 지내는 제 처지가 서글퍼서, 아무도 제게 손 내밀어 주지 않는 까만 밤이 너무도 무서워서, 애틋한 마음을 제대로 펼쳐보지도 못하고 그대로 접어야 하는 것이 서러워서 늘 홀로 울었다.

북성이 그립고, 아버지가 그립고, 형님이 그리웠다.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는 어머니가 보고 싶었다. 눈길 한 번 주지 않으시던 폐하를 원망하기도 했다. 그러나 내내, 가슴에서 지울 수 없었다. 그래서 더 아팠다.

황궁에서 외롭지 않은 이, 아무도 없다 했다. 드넓은 제국의 가장 빛나는 자리에 계신 폐하께서는 수많은 사람을 어깨에 짊어지고, 가슴은 텅 빈 채로 사셨다 했다.

가장 귀한 여인이어야 마땅한 황후마마께서는 아무런 힘이 없는 자신의 삶 때문에 있는 듯 없는 듯 그리 사신다 했다.

살기 위해 원하지 않는 상전을 모셔야 하고, 살아가기 위해 손에 피를 묻히며 사는 사람들이 수두룩했다. 어미 품에 한 번 제대로 안기지도 못하고, 마음의 굶주림을 제대로 표현하지도 못했던 어린 정연군과 자신을 안아주는 품이 제게 독이 됨을 알면서도 뛰어들 수밖에 없었을 무영군 또한 외롭고 아픈 아이들이었다.

내가 가장 아프고, 내가 가장 외롭고, 나 혼자만 쓸쓸한 줄 알았다. 애정을 갈구하는 것도, 못난 마음을 추스르는 것도 남몰래 눈물을 흘리는 것도, 너무도 어리석어 그런 줄로만 알았다.

모두가 눈물을 참고 외로움을 견딘다. 내 편이 되어 줄 사람과 나를 향해 칼끝을 겨누는 사람들 속에서 살아나기 위해 살아가고, 살아가기 위해 나아간다. 그것은 얼마나 슬픈 일이던가. 그것은 또 얼마나 공허한 삶인가.

“마마, 폐하께서 오십니다.”

지금 나는,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가.

입을 반쯤 내밀고 보모상궁의 손을 잡은 황자의 얼굴엔 심술이 가득했다. 물이 잘 든 푸른 빛깔의 고운 옷이 어찌나 잘 어울리는지 너무도 귀여워 절로 손이 가려는 것을 참으며 기하는 애써 웃음을 삼켰다.

“그만 되었다. 날도 더운데 어서 들어가도록 해.”

“조금 더 걸어도 괜찮습니다.”

“더위도 많이 타지 않느냐. 얼굴이 붉다.”

그렇게 말을 했는데, 잠시라도 시간이 나면 황제는 기하의 처소로 곧장 다니러 왔다. 운이 좋은 날에는 마주 앉아 낮것을 같이 들거나 제 무릎을 베고 오수에 든 황제의 잘생긴 얼굴을 가만히 앉아 바라볼 수 있었고, 어떨 때는 겨우 차 한 잔 마실 정도밖에 시간이 없어 아쉬움에 남은 하루가 더디 가기도 했다.

그리고 금일은, 차는커녕 겨우 얼굴을 마주하고 몇 마디 주고받을 시간도 빠듯했다.

“일정이 너무 고되신 것 아닙니까?”

“짐이 그리 그립더냐?”

“매일 일찍 나가시고 한밤중에나 오시잖습니까. 침수도 늦게 드시니 혹여 옥체 상하실까 저어됩니다. 이리 무리해서 오지 마십시오. 부르시면 신첩이 직접 가겠습니다.”

“이리 네 배웅도 받고 얼마나 좋으냐. 어서 들어가, 날이 덥다.”

“폐하께서 먼저 가십시오.”

깍지 낀 손가락을 떼어 내는 것이 아쉬웠다. 겨우겨우 마음을 다잡고 물끄러미 황제를 바라보자, 그의 입술 끝에 고운 웃음이 걸렸다. 부루퉁하게 입을 내밀고 있던 황자가 미처 제 두 눈을 가리기도 전, 황제는 기하의 뺨에 입을 맞추고 그의 어깨를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어서 가십시오.”

고개를 끄덕이며 금룡전으로 향하는 황제의 뒤로 많은 이들이 늘어섰다. 어느새 제 곁으로 다가와 손을 꼭 붙잡은 황자를 잠시 내려다보던 기하는 멀어지는 정인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응시했다.

황자와 나란히 손을 잡고 돌아오던 기하의 발이 멈춘 것은 그즈음이었다. 익숙하지 않은 얼굴의 여인들이 앞마당에 모여 있다가 기하의 등장에 화사하게 웃으며 자신의 치맛단을 붙잡고 우아하게 머리를 숙였다.

“무빈마마를 뵈옵니다.”

고운 분 냄새가 나는 여인들은 분명 다른 전각의 후궁들이었다. 모두 기하보다 먼저 입궁한 여인들로 신분이 한참 낮았음에도, 단 한 번도 먼저 인사를 건넨 적 없던 이들이었다.

그나마 얼굴이 익은 것은 제국 수도성 출신의 재인(才人) 윤 씨로 그녀는 후궁 중에서도 유난히 미색이 출중했다. 나머지 두 여인은 그마저도 알 수 없어서, 기하는 그저 그녀들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몇 번이나 청을 하였는데, 현 상궁이 워낙 지엄하게 법도를 따지는 여인인지라 도통 마마께 여쭙지도 않는 것 같아서 실례를 무릅쓰고 이리 찾아왔사옵니다.”

다소곳하게 머리를 숙이는 윤 재인은 반쯤 드러난 풍만한 가슴을 손으로 가리며 얇은 입술을 한껏 올렸다. 제국의 여름은 지나치게 더웠다. 그러나 그것은 북성에서 온 기하나 서엽과 같은 이들이나 못 견딜 정도였지, 제국의 따뜻한 기후에 익숙한 제국민들은 뜨거운 여름도 잠시 잠깐인지라 각자의 집안에서 내려오는 방법으로 계절을 나곤 했다.

그중 한 가지는 바로 대담한 옷차림이었는데, 화려함으로 무장한 황궁 여인들은 부끄러움도 모르고, 가슴은 반쯤 드러내고 어깨에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민망한 차림을 뽐내듯 하였다.

처음에는 그 모습이 너무도 낯설고 놀라워 기겁하며 처소 바깥으로 나가지 않던 시절도 있었다. 이제 제법 황궁의 여름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다른 후궁을 마주하니 생각이 다시 바뀌었다.

그도 그럴 것이 고상하신 황후마마나 얌전한 성격의 태화당 나인들은 그런 차림은 꿈도 꾸지 않았으니, 기하의 익숙함은 그녀들에게 맞춰졌기 때문이었다.

“실례인 줄 알면서 불쑥 찾아오는 것은 그대들이 정한 법도인가.”

“노여워하지 마시어요. 이리 기별 없이 찾아오지 않는다면, 마마께선 저희를 만나주시지도 않으시잖습니까?”

화사한 부채로 얼굴을 반쯤 가린 윤 재인의 웃음소리에 기하는 흘리듯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연유인지는 모르겠으나 작정하고 찾아온 것 같으니, 그대로 물린다면 앞으로 계속 귀찮아질 것만 같았다.

“내게 할 말이 있나?”

“일단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허락해 주시면 아니 됩니까? 신첩들 꽤 오래 기다렸더니 다리도 아프고, 날도 더워 몹시 지쳤습니다.”

손부채질을 하는 얼굴이 붉게 변한 것은 사실이었다. 물끄러미 그녀들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마침 윤 재인의 오른쪽에 서 있던 여인이 무릎을 굽혀 주저앉으며 황자를 아는 척했다.

“저하, 굉장히 오랜만에 뵙사온데 지난번보다 훌쩍 크신 것 같습니다. 어찌 이리 늠름해지셨습니까? 자라실수록 폐하의 이목구비를 쏙 빼닮으신 것 같습니다.”

“아닌데?”

손가락 하나를 입에 물고 고개를 갸웃하는 황자의 목소리에 여인은 당황한 듯 예? 하고 반문했다.

“나는 뚠뚠해서 한 개도 안 닮았다고 아바마마가 그러셨는데? 대지 같다고…….”

“예? 예, 아, 저기…….”

“누가 우리 황자에게 그런 소릴 합니까. 아바마마께서 하신 말씀은 모두 농이라 했지 않습니까.”

황자를 번쩍 안은 기하가 빙긋이 미소했다. 아이는 그것이 그저 좋은지 활짝 웃으며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갠차나요. 소자는 뚠뚠해서 귀엽다고 고모 마마랑 권 상궁 마마랑―.”

“권 상궁, 이라고 하셔야지요.”

“맞다, 히히. 권 상궁이랑 현 상궁이 그랬으니까. 소자 이제 달리기도 잘하지요, 마마?”

“그럼요. 배도 이렇게 홀쭉해졌지 않습니까?”

토실토실했던 황자의 뱃살이 줄어드는 모습은 기하에게도 큰 즐거움이었다. 제 배 위에 올라온 따뜻한 손길에 아이는 까르르 웃으며 더욱더 그의 품에 매달렸다.

“현 상궁.”

“예, 마마.”

“손님들 모시게.”

“예, 마마. 안으로 드시지요.”

현 상궁이 내온 서과 화차는 무척 시원하고 맛이 좋았다. 얼음을 동동 띄운 화차를 보고 눈이 휘둥그레진 그녀들은 서로 눈치만 보며 좀체 입을 열지 않았다.

“차가 입에 맞지 않나?”

“아닙니다, 마마. 이리 얼음이 가득 든 화차는 처음인지라…….”

여름의 얼음은 재물이 있어도 구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추운 북성에서 나고 자란 기하에게 그것은 그리 생경한 풍경이 아니었으나, 지난날을 돌이켜 보니 한여름에 얼음을 풍족하게 쓴 것은 입궁 이후 처음 있는 일 같기도 했다.

“저희 마마께서 유독 더위를 많이 타시는지라, 폐하께서 특별히 전각에 얼음을 많이 내리셨습니다. 넉넉한 양이 있으니, 드시고 부족하시면 더 말씀하십시오.”

원래 현 상궁이 저런 표정을 지을 줄 아는 사람이던가? 콧대가 하늘 높이 찌르는 듯한 오만한 그녀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기하는 제 몫의 차를 반쯤 덜어 발밑에 앉은 영에게 나눠주었다.

더위에 지쳐 헉헉거리던 짐승이 눈을 번쩍 뜨고 달려들어 날카로운 이로 얼음을 와그작 씹어 먹는 모습에, 여인 중 하나가 몸서리치며 눈살을 찌푸렸다.

“저 아이가 마마께서 일전에 거두신 스라소니지요? 참으로 용맹스럽습니다.”

한쪽 눈엔 깊은 상처가 남아 작은 인기척에도 벌벌 떠는 짐승더러 용맹스럽다니. 절로 쓴웃음이 번지는 것을 참으며 기하는 서툴게 시저(匙箸)를 들고 서과를 떠먹는 황자의 소매 단을 접었다.

“그래 보이는가.”

“예. 한데 눈은 영영 보이지 않는 것입니까?”

“남은 한쪽은 지나치게 잘 보이지.”

“너무도 가엾습니다. 불쌍한 짐승이 얼마나 놀랐을까요. 무영군께서 정말 너무하셨습니다. 본인도 불편한 몸이시면서 어찌 그런…….”

떠벌떠벌 떠들던 왼쪽 여인의 옆구리를 쿡 찌른 윤 재인은 화사하게 웃으며 기하의 안색을 살폈다. 본래 말이 없는지 아니면 기분이 좋지 않은 일이 있었는지, 그것도 아니면 총애를 받으면서 사람이 변한 것인지, 소문으로 떠돌던 다정한 표정이 아니었다.

“내게 할 말이 무언가?”

“신첩들은 단지, 앞으로 마마와 조금 더 돈독하게 지내고자 하는 뜻 외에 다른 것은 없사옵니다.”

“돈독하게라. 그래, 좋은 일이지.”

물론 외로웠던 시절 그녀들이 이런 호의를 베풀었다면 충분히 기꺼운 마음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한데, 내가 요즘 마음이 어지러워 그대들을 기꺼운 마음으로 맞이하지는 못할 것 같네. 성의는 고맙네만 당분간은 조용히 지내고 싶은데.”

“마마, 어찌 그리 말씀하십니까. 신첩들이 이리 찾아온 것이 못마땅하십니까?”

“내 방금 말한 것 같은데? 내가 요즘 마음이 어지럽다고.”

무뚝뚝한 기하의 음성에 가장 왼쪽에 앉아 있던 여인이 바르르 몸을 떨었다. 면전에 대고 모욕을 당했다는 생각을 하는 듯 얼굴이 활활 타오를 정도로 붉어지는 여인을 힐끔 쳐다본 기하는 그녀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불쾌했다면 사과하겠네.”

“아닙니다, 마마. 불쑥 찾아든 신첩들의 잘못이 큽니다. 다만 저희는, 그간 마마께 예를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는 생각에 마음이 조급하였습니다. 신첩들의 마음을 부디 헤아려 주시어요.”

윤 재인은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기품 있게 잔을 내려놓았다. 빼어난 미색에, 감정을 잘 다스릴 줄 알고, 영민하다. 기하는 흥미 가득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아마 다른 이들은 그녀의 말에 홀리듯 날아든 불나방일 뿐이렷다.

“이리 불쑥 찾아왔음에도 내치지 않으시니, 그저 마마의 넓으신 아량에 몸 둘 바를 모르겠사옵니다.”

입안의 혀처럼 구는 여인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미소 지은 기하는 어느덧 그릇을 전부 비우고 아쉬운 마음에 입술을 할짝거리는 황자의 등을 가볍게 다독였다.

“황자. 찬 것을 한 번에 너무 많이 먹으면 탈 난다 했지요.”

“하지만…….”

“조금 후에 또 먹으면 됩니다. 날씬해진 배가 또 볼록 나오면 어찌합니까?”

헙, 하고 숨을 들이쉬는 황자는 마냥 귀여웠다. 요즘 서엽과 열심히 수련하고 후원을 뛰어다니더니, 키도 크고 살이 빠진 자신의 모습에 매우 만족한 듯, 먹는 것도 자제하는 아이가 기특하기만 했다.

이대로 무탈하게만 잘 자라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즈음, 네 사람이 나란히 모여 앉아 있던 상이 쿵 하는 소리와 함께 흔들렸다. 상다리에 머리를 처박은 영이 끼잉 하고 울었다. 다행히 무언가가 떨어지거나 한 것은 아니었으나, 갑작스러운 소란에 후궁들은 놀란 가슴을 부여잡았다.

“미안하네. 아이가 눈이 불편해서 가끔 저런 실수를 하곤 해.”

“참으로 딱합니다. 평생 저리 살아야 한다니요. 얼마나 아팠을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무영군께선 성정이 너무 포악하신 것 같습니다. 외숙부이신 시어사(侍御史 : 감찰을 맡아보던 관직으로서, 법에 어긋난 자를 적발 탄핵하는 것을 임무로 하였다.) 대감도 성정이 그렇게 차갑고 사납다지요?”

“자네는 말을 아끼시게.”

민망한 낯을 하고 옆에 앉은 여인을 쿡쿡 찌르는 윤 재인의 얼굴이 붉어졌다. 제게 잘 보이려 함인지, 아니면 정말로 무영군을 그리 좋아하지 않은지, 그들은 틈만 나면 일황자의 험담을 늘어놓으려 했다.

기하는 그것 자체가 몹시 불편하고, 피곤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자신 또한 무영군에게 그다지 좋은 감정이 있는 것은 아니었으나, 아무리 그렇더라도 황자의 장애나 그의 외숙부의 성정까지 들먹이며 아이를 욕보일 생각은 없었다.

“신첩이 틀린 말이라도 했습니까? 무빈마마께서도 무영군 저하의 성정은 익히 아시지 않으십니까? 연치도 어리신 분이 어찌나 그리 냉정하신지, 신첩은 때론 오금이 저릴 정도로…….”

“현님 나쁜 사람 아니야!”

버럭 소리를 지른 황자는 의자에서 풀쩍 내려와 후궁을 향해 달려들었다. 작은 주먹을 어찌나 차지게 휘두르는지, 놀라고 당황한 여인이 아이를 민 것은 어디까지나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온 본능이었을 것이다.

갑작스러운 소란에 문이 열렸다. 우르르 상궁들이 몰려 들어왔다. 발치에 얌전히 앉아 있던 영이 벌떡 일어나 후궁을 향해 달려들려 했고, 기하는 넘어진 아이를 일으키려다 짐승을 붙잡아 더 큰 사고를 막아야 했다.

그러나 그들 중 가장 날래고 빠른 것은 황자였다. 씩씩거리며 다시 일어난 정연은 단번에 후궁의 뽀얀 팔을 물고 통통한 몸을 버둥거렸다.

당황한 상궁들이 아이와 후궁을 양쪽에서 붙잡았다. 권 상궁의 품에 안겨 뒤로 물러나면서도 어찌나 세차게 몸부림치던지, 유순하기만 하던 황자의 처음 보는 난폭함에 놀란 이들은 쉽사리 입을 열지도 못했다.

“왜 우리 현님 욕해! 원우 형님 욕하지 마!”

선명하게 남은 황자의 잇자국을 내려다보던 후궁은 기어이 울음을 터트렸다. 금세 시퍼런 멍이 차오르는 것을 보니 흉터가 남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나마 피를 보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며, 기하는 찌푸린 얼굴을 쉬이 펴지 못했다.

황자가 후궁을 향해 주먹질에 물어뜯기까지 한 것은 분명 잘못된 일이었으나, 아이는 감정에 지나치게 솔직했다. 더군다나 그녀는 어린 황자를 밀었고, 그 전에 일황자에 대한 험담까지 늘어놓았으니 원인 규명을 한다면 분명 벌을 면치 못할 것이다.

“우아아앙, 마마, 엉더니 아파요.”

저를 향해 두 팔을 뻗고 울음을 터트리는 황자를 품에 안으며 기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오늘은 폐하께서 오시기 전에 홀로 생각을 정리하려 하였더니, 불쑥 찾아든 불청객 때문에 자신만의 시간이 깡그리 날아가 버렸다.

“황자, 뚝 하세요. 사내는 아픈 것도 참아야 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흐어어엉, 마마, 혼내주세요. 황후마마께 이를 꼬야! 아바마마께 이를 꼬야! 우리 현님한테도 이를 꼬야!”

두려움에 울음을 뚝 그친 후궁이 부들부들 떨며 몸을 일으켰다. 몇 번이나 머리를 조아리며 잘못했다 비는 그녀의 모습에, 기하는 난감해 하며 현 상궁을 향해 눈짓했다. 얼른 저 여인을 데리고 나가라는 뜻이었는데, 평소에는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던 현 상궁이 오늘따라 눈만 껌뻑거리며 도통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거, 그만 되었으니 오늘은 이만 물러나시게. 저이의 처소에 의원을 불러 상처를 보게 하고.”

“예, 마마.”

기어이 제 입으로 그녀들에게 축객령을 내린 후에야 처소 안은 잠잠해졌다. 날도 더운데 갑작스러운 소란에 진이 다 빠진 것 같았다. 눈물 콧물을 흘리며 울어대던 황자의 등을 다독이던 기하는 훌쩍이는 아이에게 칭찬을 해야 할지, 벌을 줘야 할지 난감해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일단 제 형제를 보호하려 했던 것은 잘한 일이었으나, 그렇다고 무턱대고 후궁의 팔을 문 것은 크게 야단맞을 일이었다.

“황자.”

“마마, 아포.”

“이리 앉아 보세요.”

그제야 품에서 떨어진 황자의 얼굴은 지나치게 말끔했다. 이상하다. 분명 눈물 콧물이 범벅되어 퉁퉁 부어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눈물 흘린 흔적을 제 손등으로 문지르고 나니 방싯거리는 것이 마치…….

“마마, 황자 잘해찌요? 마마 괴롭히는 사람들은 원우가 혼내줄 검미다!”

“황자…….”

“마마도 괴롭히고 현님도 욕하고. 아바마마께 이를 검미다!”

“군자(君子)는 그리 입을 가볍게 놀리는 것이 아닙니다. 종일 정사를 보시느라 곤하실 아바마마께 걱정을 끼치실 것입니까?”

“아바마마는 마마가 쪽 해주면 괜찮다 하셨는데?”

두 눈을 말똥말똥하게 뜨고 저를 바라보는 황자의 말에 말문이 막히고, 머리가 지끈거렸다. 바깥이 잠잠한 것이 아마 객은 모두 돌아간 것 같다.

때맞춰 안으로 들어온 현 상궁은 특유의 심드렁한 표정을 지우고는 웃음을 참지 못해 일그러진 얼굴로 황자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척 들었다. 그 모습에 놀란 권 상궁은 기함하며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자네까지 이러긴가?”

“어찌 가만 있는 소인더러 역정이십니까?”

“아이들 입단속이나 단단히 하게. 폐하께서 아시면 또…….”

“폐하께 말씀 올리지 않으실 작정이십니까? 그 못생긴 마마께서 우리 황자 저하를 바닥에 패대기치셨습니다!”

“…내가 잘못 본 것인가. 내 분명 그냥 살짝 뒤로 민 것은 보았네만?”

“살짝이라니요! 어디 우리 저하 옥체가 살짝 민다고 밀리실 무게십니까?”

“응? 나 뚠뚠하다고?”

“아닙니다, 저하. 저하께선 딱 보기 좋으십니다. 얼마나 귀여우십니까. 나날이 잘생겨지시고, 영민하시고, 우리 저하 최고십니다.”

다시 한 번 엄지손가락을 치켜드는 현 상궁을 따라 황자가 까르르 웃었다. 민망함에 얼굴도 들지 못하는 권 상궁이 현 상궁의 손을 붙잡으려 하면 할수록, 그녀는 뿌듯하게 어깨를 폈다.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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