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장 연(憐) (27/49)

26장 연(憐)

황제의 매무새를 가다듬는 기하의 손끝은 언제나 굼뜨고 허술했다. 옷고름을 몇 번이나 풀었다가 다시 매자, 멀리서 조아리고 있던 상궁 나인들이 초조하게 시간을 헤아렸다.

“아…….”

이미 옷고름은 구깃구깃 주름이 갔다. 여덟 번 즈음부터는 수를 헤아리지도 않고 그저 기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황제의 입가엔 흐뭇한 미소가 걸려 있었지만, 급기야 힘없이 툭 떨어지는 손끝엔 깊은 체념이 묻어났다.

“송구합니다.”

괜히 나섰다 생각하며 기하는 입술을 잘게 물었다. 바깥에선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오늘은 아침 일찍 대전으로 가신다기에 아쉬운 마음에 직접 나선 것이었는데, 역시나 괜한 짓을 한 것 같다.

“이깟 일로 풀 죽지 마라.”

가볍게 뺨을 쓰다듬어 준 황제가 지밀을 향해 손짓했다. 소리 없이 다가온 한 상궁이 그의 옷고름을 정갈하게 매는 것을 바라보던 기하는, 민망함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현 상궁을 보고 멋쩍게 웃었다.

“다녀오마.”

“예, 폐하.”

간다는 인사가 아니었다. 다녀오겠다는 그의 한마디가 어찌나 가슴을 설레게 하는지, 몇 번이나 그의 단단한 손을 쥐고 조금이라도 온기를 나누려 애썼다.

익숙하게 어깨를 끌어안는 손짓, 닿아오는 체온, 입술 위에 날아든 입맞춤에 익숙해지지 않으려 하는데도 어리석은 마음은 그러지 못했다.

“말썽부리지 말고, 편식하지 말고.”

대답 대신 슬쩍 입술을 내밀자, 경쾌한 웃음소리가 흩어진다. 궂은 날씨 때문에 유난히 어두운 방을 미련 없이 뒤돌아 나가는 황제를 배웅하고 돌아오니, 폭신해 보이는 침상이 잠을 솔솔 부르는 것 같다.

“마마, 침상을 정리하겠나이다.”

기하의 마음속을 들여다본 것만 같은 현 상궁은 그의 대답이 떨어지기도 전에 창문을 활짝 열었다. 나인을 불러 이부자리를 정리하게 하고, 기하가 갈아입을 새 옷을 꺼내와 내미는 그녀의 얼굴이 비장했다.

오늘은 또 무슨 잔소리를 하려고 눈 뜨자마자 저런 얼굴일까 싶어 슬그머니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려는데, 그녀의 흉흉한 시선은 거둬지지 않았다.

“왜, 또.”

“어제 오후에 대체 뭘 하신 것입니까?”

현 상궁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기하는 활짝 열린 방 밖에서 고개를 조아리고 있는 소현일 쳐다봤다. 그렇게 비밀이라고 일렀는데, 의리 없는 것 같으니라고.

“소현인 어찌 그리 쳐다보십니까?”

“안 쳐다봤네.”

“저 아이가 일러바친 것은 아니나, 상전의 잘못됨을 묵과(默過)하려 하였으니 그 죄가 큽니다.”

고개를 슬쩍 돌리는 소현의 눈이 조금 부은 것 같다. 저 아이가 고하지 않았다면 대체 누구란 말인가? 분명 그 시각 후원엔 저와 정연군, 그리고 소현이뿐이었는데.

“지금 다른 후궁전에선 조그마한 흠이라도 찾아 마마를 험담하려 하고 있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몸가짐을 바르게 하셔야 한다고, 소인이 그리 당부 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냥 봐도 흠투성인데, 뭘 굳이 찾으려고 해? 다들 눈이 멀었나 보네.”

생글생글 웃으며 옷을 갈아입던 기하는 점점 사납게 변하는 현 상궁 얼굴에 미소를 지우고 뒤돌아섰다.

“나무를 타시다니요. 소인은 너무도 망측스러워 도저히 고개를 들 수가 없사옵니다.”

“복숭아나무가…….”

“익지도 않은 복숭아나무는 왜 찾으십니까? 대체 황자 저하께서 뭘 보고 배우시겠습니까? 예? 폐하께서 이 일을 아시기라도 하시면―.”

“어차피 익으면 따야 하는데. 맛있는 냄새가 났단 말이네.”

“체통을 지키셔야 한다니까요. 마마께서 거기까지 올라가지 않으셔도, 복숭아 딸 사람은 널렸단 말입니다.”

기하는 부들부들 떨리는 음성을 애써 가라앉히는 그녀의 눈을 피하며, 깨끗하게 정리된 침상에 털썩 주저앉았다.

현 상궁 말이 모두 옳다 하더라도, 사람이 어찌 옳은 일만 하고 살 수 있단 말인가. 유난히 향이 좋고 과육이 실한 후원의 복숭아나무에선 해마다 어마어마한 양의 열매가 열렸다. 나무 자체가 어찌나 큰지 봄이면 꽃 냄새로 후원이 진동하고, 여름이면 과일 익는 냄새에 코가 아찔해질 정도였다.

그 커다란 나무를 타고 올라가서, 높은 곳에서 자라 볕을 많이 쪼여 달고 맛 좋은 것을 직접 따는 것은 여름내 유일한 즐거움이었다. 그깟 체통이 뭔가? 어차피 보는 사람도 없는데.

“장대로 찌르면 상처 입어 맛이 떨어진단 말이네.”

“다른 이들을 시키시면 된다지 않았습니까. 마마, 소인 이렇게 청합니다. 그러다가 다치시기라도 하시면, 소인은 폐하께 그대로 손모가지가 잘릴 것입니다.”

“설마. 우리 폐하께서 얼마나 다정하고 너그러운 분이신데.”

“마마께만 다정하시지요!”

현 상궁 목소리가 너무 큰 탓에 생글거리며 웃던 기하는 깜짝 놀라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며 눈을 깜박였다. 그냥 대충 웃어넘기려고 했는데, 현 상궁이 화가 단단히 난 모양이었다.

“어찌 이리 소인의 마음을 몰라주시는지, 정말 마마께서도 너무하십니다.”

“현 상궁?”

“다과를 내오라 할 테니 들고 계시옵소서. 소인은 잠시 수방에 다녀오겠나이다.”

혹시나 저 때문에 현 상궁이 무슨 봉변을 당한 것은 아닐까 싶어 급히 그녀를 불러 세우려던 기하는 그대로 돌아서는 등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 입을 다물었다.

요즘 폐하께서 종일 이곳에 계시니, 그녀 또한 예민한 것 같기도 하고. 괜히 쓸데없는 일을 벌였다는 생각에 머쓱해진 기하는 민망함에 달아오른 열을 식히며 주위를 둘러봤다.

기껏 꼭대기까지 올라갔는데 제대로 익은 것이 없어, 진만 빼고 황자 보기 민망했던 순간을 떠올리던 기하는 때마침 들어오는 다과상을 심드렁한 얼굴로 쳐다봤다. 줄곧 황제나 황자와 함께 있다가 현 상궁까지 자리를 비운 상태에서 혼자 다과상을 받으려니, 그것에 대한 기대감도 뚝 떨어져 입맛이 돌지 않았다.

“저…, 마마.”

“응?”

“저…….”

본래 법도라면 감히 침소 안으로 들어올 수도 없는 연금이가 제 앞에 서 있는 것을 보고, 기하는 하던 것을 멈췄다. 아무리 다정하게 대해주고 수년간 가깝게 여겼다지만, 황궁의 지엄한 법도에 따라 노비는 상전의 침소 안으론 한 발자국도 들일 수 없었다.

한데 그런 연금이가 직접 다과상을 들고 들어오다니. 게다가 평소와 다른 아이의 표정이 마음에 걸렸다.

“무슨 일이냐?”

한참 망설이던 연금이 소맷자락을 뒤적였다.

“무엇인지 노비는 잘 모르옵니다. 다만, 어느 분께서 이것을 마마께 꼭 전해드리라 하였습니다.”

“내게? 누가?”

“마마께 해가 되는 것은 절대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누가 어떤 연유로 준 것인지도 모르는데 해가 되지 않는다? 어불성설이었다. 한데, 서찰을 전하는 연금의 얼굴이 지나친 긴장감으로 덜덜 떨리고 있었다.

기하는 물끄러미 아이를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을 제게 전하지 않는다면, 누군가에게 해코지를 당할지도 모른다. 아마 아이 또한 그것을 잘 알고 있으리라.

“알았으니 나가 보거라.”

“…예, 마마.”

마치 그곳은 자신이 있을 자리가 아니라는 듯, 서둘러 몸을 낮추고 침소 밖으로 나가는 연금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기하는 화려한 비단에 싸인 것으로 시선을 돌렸다.

해가 되지 않는다. 반드시 직접 전해야 한다. 그것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얼마나 중한 일이기에 법도까지 어기며 연금이 침소에 발을 들였을까.

아이는 분명 떨고 있었다. 그것은 자신이 옳지 않은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흐음.”

침상 위로 올라가 반대로 돌아앉은 기하는 천천히 비단을 풀어 헤쳤다. 중한 물건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허술했다. 비단에 둘둘 말려 있는 것은 다른 이의 눈속임을 위한 것이던가. 혹 황제께 아첨하려는 허술한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손끝이 떨렸다. 밀봉된 서찰의 인장은 분명 눈에 익숙한 것이었다. 차마 그것을 쉬이 펼칠 수 없어 몇 번이나 숨을 고르던 기하는 큰 결심이라도 한 듯 표정을 갈무리했다.

저를 혼자 두는 법이 없는 현 상궁이 자리를 비운 사이 은밀히 서찰을 전한다? 그것만으로도 의심의 여지는 충분했다.

서찰을 넓게 펼치자 눈에 익은 수려한 필체가 보였다. 머나먼 제국으로 떠나올 때도 단 한마디만 남겨 주셨던 분께서, 그 후론 단 한 번도 연락을 취하지 않으셨던 분께서.

몇 번이나 곱씹고 또 곱씹었다. 무수히 많은 글자가 한데 뒤섞여 그 의미를 제대로 전달하기도 전, 기하는 붉어진 눈으로 밀려드는 서러움을 눌러 삼키며, 연신 제 주먹을 그러쥐었다.

행복에 겨워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더라도, 늘 마음을 짓누르는 것이 있었다. 오늘은 어찌 되었을까. 도대체 어디까지 가려 하심일까.

입 밖으로 걱정을 꺼내면 작금의 행복이 그대로 부서질까 봐, 초조하게 애만 태우는 못난 아들을 원망하고 계시는 것은 아닐까 하여 드러내지 못한 마음을 삭이기만 했는데. 아니다. 아니다. 아니다.

한참 동안 물끄러미 서찰을 내려다보던 기하는 결심이라도 한 듯, 은은하게 타오르는 촛불에 그 끝을 그을렸다. 순식간에 불이 번지는 서찰을 공중으로 휙 던지자 검은 재가 되어 훌훌 날아드는 것을 바라보는 눈동자엔 알 수 없는 감정이 깊이 번졌다.

네게 수십 번 서찰을 보냈으나, 그것은 번번이 되돌아왔다.

황제께서는 북성을 살려두지 않으실 게다. 아비는 네 걱정이 크다.

기하야, 폐하를 믿어서는 아니 된다.

그것은 아버님의 서체가 분명했다. 아버님께서 사사로운 일을 명령하실 때에 쓰시는 인장 또한 맞았다. 그것의 존재를 아는 이가 몇 있지 않으니,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왜? 그동안 연락이 닿지 않았던 것이 모두 폐하께서 수를 쓰신 것 때문이라고? 폐하의 성정이라면 드러내놓고 가족과 연을 끊으라 하실 터였다. 굳이 뒤에서 그런 번거로운 일을 하지는 않으셨을 것이다.

애초에 폐하께선 제게 관심조차 없으셨고, 곁에 두기도 끔찍하다는 듯 구시지 않으셨던가. 물론 폐하께선 늘 북성을 잊으라 하셨지만, 그 말씀을 하실 때마다 기묘하게 표정이 변하시지 않으셨던가.

분명 북성을 잊어야 산다고 하셨고, 드러내놓고 아버지를 향한 적개심을 보이셨다. 하지만 그것은 그때뿐이었다.

“마마, 정연군 저하와 약조하신 시간이 다 되어 갑니다.”

머리를 짚고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기하를 깨운 것은 누군가의 목소리였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직 현 상궁은 돌아오지 않은 것 같다.

힘없이 몸을 일으킨 기하가 문 앞에 섰다. 조용히 열리는 문 너머의 바짝 엎드린 노비들 사이로 연금의 동그란 머리통이 보였다. 저 아이는 그저 전달책에 불과한 것일까.

물끄러미 아이를 바라보자, 그 옆에서 고개를 조아리고 있던 소현이 움찔 놀라며 불안한 얼굴을 한다. 기하는 그제야 제 표정이 평소와 달리 지나치게 굳어 있음을 느꼈다.

“현 상궁은 아직인가?”

“예, 수방 상궁 나인 중 옷감을 바꿔치기하는 이들이 종종 있다는 소리에, 직접 지키고 서 있겠다 하였습니다.”

“별걸 다.”

현 상궁이 공석일 때면 곁을 지키는 김 상궁이 기하의 뒤를 따르며 그의 매무새를 정돈했다. 그녀는 완전한 황제의 사람으로 진중한 성격에 입이 무겁고 솜씨가 좋아, 수신전의 붙박이나 다름없는 여인이었다.

그런 황궁 사정에 어두운 기하는 황제께서 저를 생각해 직접 김 상궁을 보내 주신 것에도 별다른 감흥을 보이지 않았다. 어차피 입이 무겁고 솜씨가 좋은 것은 현 상궁은 물론이고, 그녀에게 가르침을 받은 태화당 내 나인 또한 모두 마찬가지였기 때문이었다.

“마마, 바람이 부는 것이 또 한바탕 비가 퍼부을 것 같사옵니다. 궁술은 다음으로 미루시는 것이 어떨는지요?”

커다란 나무 사이로 휭휭 부는 바람이 제법 거셌다. 먹구름으로 가득한 하늘을 올려다본 기하는 걸음을 늦추지 않고 제 뒤를 따르는 여인들을 돌아봤다. 워낙 춥고 날씨가 사나운 북성에서 나고 자란 저는 이런 것이 대수롭지 않았으나, 온화하고 따뜻한 제국의 기후에 익숙한 여인들에게는 이렇게 부는 바람 또한 두렵게 느껴질 게 빤했다.

“자네 말대로 동복궁에 들러 잠시 황자 얼굴을 보고 오는 편이 낫겠네. 멀리 가는 것도 아니니 모두 따를 필요 없어.”

“하오나…….”

“자네와 서 중랑이면 충분하지 않은가.”

주렁주렁 사람을 꼬리처럼 달고 다니는 것은 본디 기하의 성미에 맞지 않았다. 그리 말해두면 아마 김 상궁을 따르는 노비 두엇이 더 붙을 것이고, 모습을 드러내고 있진 않지만, 황제의 그림자 두엇도 저를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감시의 목적이 아니라 비호하기 위함이라, 그들은 기하의 행동을 낱낱이 황제께 고하지 않았다. 물론 제게는 그리 말했다. 어쩌면 황제께 은밀히 고해바칠지도 모른다.

거기까지 생각을 하던 기하는 머리를 휘휘 저었다. 어찌 폐하의 성심을 의심한단 말인가. 폐하께서 제게 어찌 해주시고 계시는데.

“마마?”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서서 머리를 짚는 기하의 모습에 화들짝 놀란 김 상궁이 그의 팔을 붙잡았다. 창백해진 얼굴빛에 놀란 그녀는 당장에라도 노비에게 의원을 부르라 호통칠 것 같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괜찮다.”

“두통이 있으십니까? 혹 다른 곳이 불편하십니까? 당장 처소로 돌아가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괜찮다는 의미로 손을 휘휘 내저으며 눈을 다시 뜬 기하가 본 것은 세찬 바람에 휘청거리는 이름 모를 나무였다. 아직 후궁전을 벗어나지도 않았는데, 도무지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김 상궁.”

“예, 마마. 하문하시옵소서.”

“황자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네. 내 여기서 있을 테니 자네가 얼른 가서 황자를 모셔오게.”

“예, 그리하겠습니다. 마마께서는 걱정하지 마시고 처소로 돌아가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괜찮네. 요즘 수련을 하지 않았더니 몸이 무거워 어지러웠을 뿐이야. 비 피할 곳도 있으니 예서 기다리고 있겠네.”

바람이 심상찮게 불고 있었지만, 기하의 고집은 웬만해선 꺾이지 않았다. 김 상궁은 시간을 끌며 그를 설득하기보다는, 재빨리 동복궁에 직접 다녀오는 것을 택했다. 어린 황자께서 얼마나 빨리 걸음 하실지는 모르겠으나, 여차하면 날씨 핑계를 대고 직접 품에 안아 달음질할 생각이었다.

“얼른 다녀오겠사옵니다.”

김 상궁 뒤를 졸졸 따르는 노비 둘을 바라보던 기하는 조용히 정자에 올랐다. 물끄러미 올려다본 하늘은 먹구름이 더욱 짙어졌다.

다른 후궁전을 이어주는 화원은 이름 모를 나무와 꽃이 가득했다. 이따금 이곳을 지나면서도 제대로 머문 적이 없어서 그 모습이 퍽 낯설었다. 온갖 진귀하고 아름다운 것만 가득한 후궁전의 먼지 같은 존재라 일컬어지던 시절을 떠올리다 하릴없이 웃으며, 정자의 나무틀 아래에 잠시 몸을 기대앉았다.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아니요.”

“고민이 가득하신 얼굴이십니다.”

아마 제 곁에서 수족 노릇을 한 이들을 모두 속일 수는 없을 것이다. 제 전각으로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김 상궁에게는 어물쩍 흘릴 수 있을지언정, 서엽이나 현 상궁은 표정만 변해도 금세 무슨 일이 있다는 걸 알아차리곤 하니 얼른 머릿속에서 생각을 덜어내야 한다.

“아닙니다.”

“폐하께서 무슨 서운한 말씀이라도 하셨습니까?”

“응?”

“그렇지 않고서야, 며칠을 꽃 피는 봄처럼 화사하시던 마마께서 갑자기 이리 기운이 없으신 게 이상하지 않습니까.”

“내가 화사해요?”

태어나 그런 말은 처음 듣는다. 그것도 저 무뚝뚝한 서엽에게.

“워낙에 씩씩하신 분이시니 기운 빼고 있으신 모습이야 얼마 뵌 적 없지만, 마음속의 답답함을 참고 숨기시는 것과 그저 좋아서 웃으시는 것은 다르지요.”

“오늘따라 말이 많습니다, 형님.”

“정말 무슨 일이 있으신가 봅니다.”

“아니라니까요.”

“고민이 있으시면 말씀을 하지 않으려 하시지 않습니까?”

심드렁한 서엽의 말에 대꾸할 거리를 찾던 기하는 슬그머니 눈을 돌리다,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작은 인영과 얼굴을 마주했다.

그리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소담한 전각에서 나오던 일황자가 저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빛이 어찌나 차갑던지, 기하는 겨우 짓고 있던 미소를 그대로 지우고 황자를 마주했다.

그러고 보니 지난번에도 저 전각에서 나오는 길이었지. 저곳은 아마 황자의 친모인 양 귀인(貴人)의 처소일 테다. 그녀는 영빈의 부친인 서남성왕 연태진의 수족 노릇을 하던 여인으로, 우연히 황제와 하룻밤을 보낸 후 일황자를 수태하여 하루아침에 신분이 바뀌었다 들었다.

몸이 약한 것도 아닌데 처소에서 칩거하며 좀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고 하였지. 일황자는 그런 친모보다 영빈을 더 따른다 했고.

“황자께서 오십니다.”

“응?”

황자가 저 멀리서 움직이지도 않고 있는데 무슨 황자가 온다는 말인지. 고개를 막 돌리던 기하는 저 멀리서 뒤뚱거리며 뛰어오는 정연군을 보고 환하게 미소했다. 저러다가 넘어질까 겁날 정도로 힘차게 뛰어오는 정연군의 뒤를 따르던 김 상궁과 권 상궁이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황자를 애타게 불렀다.

기하는 단숨에 정자 아래로 내려가 무릎을 굽히고 팔을 활짝 벌렸다. 마마, 하고 씩씩하게 외치며 달려오는 황자의 얼굴을 보니 무거웠던 가슴이 순식간에 씻겨 내려가는 것 같았다.

“황자, 그리 뛰다 넘어집니다.”

“마마!”

숨을 헥헥 몰아쉬면서도 멈추지 않던 아이가 곧 기하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달곰한 아이의 체향에 기하는 스르르 눈을 감았다. 따뜻하다. 포근하다. 행복하다. 행복하다.

황자와 영은 오랜만에 후원을 힘껏 달렸다. 곧 비가 퍼부을 것이라 예상했는데, 하늘은 그저 어둡기만 했다. 아이의 웃음소리가 후원에 가득했다.

그것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상궁들과 습관처럼 주위를 살피는 서엽이 한데 어우러진 평온한 모습에, 기하는 잠시 숨을 멈췄다.

“황자 저하께서 요즘은 울지도 않으시고 어찌나 씩씩하신지, 뭐든 알아서 척척 하십니다.”

“그런가.”

“예. 마마께서 작은 것에도 잘했다고 칭찬해 주시니, 늘 웃으십니다. 요즘은 부쩍 글공부에 재미를 붙이신 듯합니다.”

“전에는 오래 걷는 것도 싫어하시더니, 요즘은 아주 펄펄 날아다니십니다. 어찌나 빠르신지 아까 소인은 뒤따르느라 몇 번이나 넘어질 뻔하였습니다.”

권 상궁의 말에 동조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덧붙이던 김 상궁의 웃는 얼굴에 의문이 차올랐다. 줄곧 미소 지으며 황자를 바라보고 있는 줄 알았던 기하는 그저 먼 허공을 응시하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권 상궁에게 슬쩍 눈짓하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난 김 상궁은 점점 거세어지는 바람에 혹여 상전이 고뿔에 걸릴까 염려하면서도 제대로 입을 열지 못했다.

사위가 어두웠다. 불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길을 계속 걸으니 발이 점점 무거워졌다. 누군가가 발목을 잡아채는 것만 같은 느낌에 걸음을 빨리했다.

무거운 바람이 기하의 앞을 가로막았다. 비릿하고도 눅눅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지독한 악취였다. 순간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친 그의 앞에 흉물스러운 짐승이 모습을 드러냈다.

사지가 뒤틀리고, 시커먼 피를 뚝뚝 흘리는 기괴한 얼굴이었다. 눈은 구멍이 뻥 뚫려 시커멀 뿐이고, 입은 귀밑까지 찢어져 긴 혀가 날름거렸다. 기괴하게 뒤틀린 손가락이 기하를 향해 뻗어졌다. 질척하고 미끌미끌한 진액이 금세 그를 뒤덮었다.

“허억!”

꿈이었구나. 숨을 깊이 내쉬며 몸을 뒤척거리자 품에 안긴 아이가 잠투정하는 것이 느껴졌다. 가볍게 황자의 등을 다독이면서 몸을 일으킨 기하는 아직 바깥이 환한 것을 확인하고, 흐트러진 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침상 옆에 놓인 냉수를 입안에 머금자, 끊임없이 자신을 괴롭히던 잠이 단번에 달아났다. 연신 하품하는 황자를 재우려다 깜빡 잠들었던 모양이다.

불편한 자세로 웅크리고 잠들었기 때문일까. 그런 기괴한 꿈은 어릴 때도 종종 꾸었지만, 손끝이 저릿할 정도로 불쾌한 기분을 느낀 것은 처음이었다. 아마, 가슴을 짓누르고 있는 그것 때문이겠지.

아버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무엇일까. 선황께서 제위 하시던 그때, 아버님은 분명 제국에 충성해야 함을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 그리고 폐비 신 씨가 지독한 고문 끝에 도망쳤을 때, 아버님께서는…….

드르륵, 문이 열렸다. 당연히 단잠에 빠져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기하가 침상에 우두커니 앉아 있자, 현 상궁은 그녀답지 않게 당황하며 머리를 숙였다.

“깨어 계시었사옵니까.”

“막 일어난 참이네.”

낮게 잠긴 기하의 음성에 현 상궁은 가까이 다가와 그의 안색을 살폈다. 목소리에 생기가 없었다. 김 상궁 말로는 오후 내 기분이 좋지 않으셨다는데, 혹 미령하신 곳이라도 있으신 것은 아닌지 염려되었다.

“마마, 무슨 근심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니네.”

“혹 고뿔이라도 들려는 것은 아니신지요?”

“흉몽을 꾸었어.”

“흉몽 말입니까?”

“괴수가 나와 도망치느라 진을 빼고 시달렸더니, 몸이 무거워.”

덤덤하게 말하며 힘없이 미소하는 기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현 상궁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얼굴색도 좋아 보이시지 않고, 지금 이리 말씀하시는 표정 또한 어색하신데 달리 캐물을 말이 없었다.

“온욕이라도 하시겠습니까?”

“양 귀인의 환우는 차도가 없다던가?”

“달리 들은 얘기는 없사온데, 궁금하시면 한번 알아볼까요?”

“황자를 마중하러 나가는 길에 무영군을 보았는데, 표정이 좋지 않았어.”

“무영군 저하께서는 본디 잘 웃지도 않으시고, 냉랭한 성정이 아니십니까.”

“어린아이가 그런 성정이라면 문제가 있는 것이겠지. 따뜻한 차 좀 내오겠나.”

“예, 마마. 얼른 준비하겠습니다.”

무영군이라면 질색하고 입에 담기조차 불편해하던 기하가 어찌 일황자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일까. 그래 봤자 좋은 소리도 못 들으실 것인데.

문밖으로 나가는 현 상궁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기하는 습관처럼 기수를 걷어차는 황자를 다독였다. 가슴 위까지 얇은 기수를 덮어주자 잠투정을 하듯 이리저리 뒤척이던 아이는 금세 입을 오물거리며 빙긋이 미소했다. 기분 좋은 꿈이라도 꾸는 모양이었다. 다행이다, 제 흉몽이 아이에게 전염되지 않아서.

“기분이 좋지 않아 보인다.”

“아닙니다.”

수라도 반쯤 뜨고 물리고, 저녁 내내 웃질 않으면서 아니라니. 방싯거리며 품에 안기는 황자 놈을 겨우 토닥이고 있는 얼굴을 면경에 비춰줘야 할까.

“너는 언제까지 예서 있을 것이냐? 날도 저물었는데 어서 썩 일어나 네 궁으로 돌아가라.”

황제의 퉁명스러운 말에 방긋거리던 황자는 슬그머니 기하의 품에 얼굴을 감췄다. 겨우 얼굴만 숨기면 그 커다란 몸이 전부 사라지느냔 말이다, 이 곰같이 미련한 놈아.

“어서 발딱 일어나지 못해?”

“마마…….”

울먹이며 애처롭게 기하를 올려다보는 황자의 눈에 금세 눈물이 고였다. 그 모습이 어찌나 애틋하고 안쓰럽던지, 기하는 아이의 통통한 뺨을 쓰다듬으며 몇 번이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제 속으로 낳은 것도 아니고, 제 핏줄을 탄 것도 아닌데 어찌 이리 애틋할 수 있을까.

“이놈이, 정말!”

“너무 그러지 마십시오. 황자가 놀라지 않습니까.”

“당장 이리 내려놓아라. 뭐가 예쁘다고 그걸 그렇게 안고 있어?”

“어딜 보아도 어여쁘지 않은 구석이 없습니다.”

빙긋이 웃으며 황자를 폭 끌어안으니, 그제야 마음의 무거움이 덜어지는 것 같았다. 뽀얀 아기 냄새, 따뜻하고 포근한 냄새, 저를 붙잡는 작은 손, 울먹이는 음성. 어느 것 하나 어여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살아오면서 누군가에게 이토록 간절함을 느꼈던 적이 있던가. 아무리 되돌아봐도 없다. 또다시 생각해봐도, 없다.

“너 이놈, 당장 내려와라. 경을 칠 것이다.”

“마마…….”

“마마 찾지 마라. 빈이 네 것이냐? 빈은 짐의 사람이다. 어디 감히 아비의 정인을 넘봐?”

“잇…, 원우 마마입니다!”

“뭐야?”

금세 울음을 터트릴 것처럼 붉어진 얼굴이 잔뜩 일그러지는 것을 보며, 황제는 기가 막힌다는 듯 얼굴을 구겼다. 큰 소리 한 번이면 냅다 줄행랑치며 줄줄 실금이나 하던 놈이,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대들어 대들기는?

“마마는 원우가 좋다 했는데! 아바마마 밉습니다!”

우아앙, 울음을 터트리며 벌떡 일어난 황자는 뒤뚱거리며 침상 아래로 내려갔다. 놀란 기하가 아이를 붙잡으려 했지만, 솜씨 좋게 그의 허리를 낚아챈 황제는 의기양양한 얼굴을 기하의 목덜미에 묻고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울음소리를 듣고 달려온 권 상궁이 황자를 얼른 끌어안자, 제 궁으로 돌아가겠다며 꺼이꺼이 우는 아이가 어찌나 안쓰럽던지. 기하는 몇 번이나 황제의 손을 밀어내려다가 그것이 여의치 않다는 것을 깨닫고는 한숨만 푹 내쉬었다.

“어찌 이러십니까?”

“짐이 뭘.”

“기어이 아이를 울리셔야 속이 편하십니까?”

“제 자식 울리고 속 좋은 아비도 있다더냐?”

“하면 어찌 이러시는…….”

“다 네 잘못이다.”

“또 신첩 잘못입니까?”

천연덕스러운 황제의 음성에 기하는 허, 하고 바람 빠진 탄식을 내뱉었다.

“네가 저녁 내내 저놈만 끌어안고 입 맞추고, 내게는 눈길 한 번 안 주지 않았더냐. 그러니 네 잘못이지.”

“신첩이 언제…….”

“지아비를 이리 홀대하다니, 참으로 발칙한 부인이 아니냐?”

기가 막혀 더는 말을 잇지 못하고 황제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기하는 헛웃음을 툭 터트렸다. 그렇잖아도 심란한 마음을 애써 숨기고 있었는데, 어찌 이리 황당한 말씀만 하시는 것인지.

울음을 터트린 황자가 마음 쓰여 당장 달려가고 싶지만, 그리했다가는 진정 화를 내시어 괜히 아이만 잡게 되겠지.

“이제 웃는구나.”

“예?”

“그대 말이다. 목구멍에 가시 걸린 새처럼 딱딱한 표정만 짓더니, 이제 겨우 웃지 않았느냐?”

빙긋이 미소하며 손을 붙잡아 오는 황제의 얼굴은 평소처럼 해사하고 다정했다. 아무 일도 없다고 하고선, 말하지도 웃지도 않았던 제 모습을 떠올린 기하는 부끄러움에 금세 얼굴을 붉혔다.

“송구합니다.”

“짐에게 말하지 못할 일은 만들지 마라, 기하야.”

“…….”

“응?”

“신첩은 다만…….”

“알아, 걱정이 지나쳐 그렇다는 것을. 방법을 찾아보고 있다. 너무 염려하지 마.”

황제의 손은 기하의 체온보다 조금 찼다. 단단하면서도 수려한 손가락이 제 손등을 문지를 때마다, 그가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것만 같아서 위안을 얻곤 했다. 드릴 것이 아무것도 없는 정인께, 제 존재가 혹여 짐이 되진 않을까 염려도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곁에 있고 싶다. 자신의 존재로 그가 난감한 일을 겪게 되거나 위험에 처할지 모르는데도, 곁에 있고 싶다. 겨우겨우 맞닿은 손을 놓고 싶지 않다.

“폐하께 누가 될까 걱정이 됩니다.”

“그럴 일은 없어.”

“하지만 아버님께서는……. 아버님의 뜻이 뭔지 모르겠습니다. 어째서 폐하의 은혜를 원수로 갚으시려는 것인지, 정녕 신첩을 버리시려는 것인지, 왜 하필 지금에 와서 그런 무모한 일을 벌이시려는 것인지, 신첩은…….”

“누가 너를 버려, 누가. 짐의 하나뿐인 정인을 누가 감히 홀대한단 말이냐.”

등을 다독이는 손길에 위로받는다. 넓고 따뜻한 품에 안기며 안정을 취한다. 어느덧 그렇게 물들어 이제 다시는 그가 없이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어찌해야 하나. 이제 정말,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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