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장 연정(戀情) (26/49)

25장 연정(戀情)

자경전에서 상궁이 찾아온 후, 황제는 지체 없이 자리를 비웠다. 잠시 다녀오겠다고 말씀하시곤, 해가 지고 저녁 수라를 들 시간이 훌쩍 지났는데도 기별조차 없으셨다. 서운하다고 생각하면 아니 되는데, 부질없이 애가 탔다. 혹여 황후께 무슨 일이 생긴 것인지 걱정이 들면서도, 단번에 돌아서던 모습이 내내 가슴에 남았다. 치졸하고 부끄러운 마음이다.

“마마, 아―.”

노릇한 육전을 내미는 황자의 얼굴에 웃음이 가득했다. 온욕을 하고 돌아오니 황제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더없이 밝아진 얼굴이 귀엽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했다.

“마시쪄요?”

“응, 맛있습니다. 자, 황자도 드세요.”

야무지게 음식을 받아먹는 황자를 흐뭇하게 바라보던 기하는 하릴없이 쏟아지는 빗소리에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사람은 본디 좋은 것에는 금세 익숙해지는 모양이다. 예전에는 이렇게 황자와 단둘만 있어도 따뜻하고 좋았던 것이, 폐하께서 잠시 잠깐 다른 곳으로 가셨다고 쓸쓸해지다니. 이것은 지나친 욕심이 아니던가. 아무리 생각해도 어이가 없어 웃음이 터질 만큼 그릇된 감정이었다. 제가 뭐라고, 감히 제국의 황제 폐하를 독점하려 든단 말인가.

“내일 비가 조금 잦아들면 활을 쏘러 후원에 나갈까요?”

“예!”

“그리 좋습니까?”

“예. 마마 머시쪄요.”

“응?”

까르르 웃는 아이의 천진난만한 음성에 기하는 빙긋이 미소했다.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밥 위에 찬을 올려주니 볼이 터질 정도로 음식을 욱여넣는 모습이 어찌나 귀엽던지, 몇 번이나 입을 맞추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았더랬다.

“아바마마는요?”

“자경전에 가셨습니다.”

“황후마마 배에 원우 아우 있습니다!”

“그래요. 몇 달 후면 우리 황자도 형님이 되시지요.”

“현님? 히히, 현님이요?”

“어진 형님이 되실 것이지요?”

“예! 아우가 태어나면 잘 돌봐줄 것입니다! 꼬기도 나눠 먹고, 달리기도 하고, 그리고 음…….”

고물고물한 손가락을 하나씩 접으며 제가 하고 싶은 일들을 헤아리는 황자를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찬이 식기 전에 얼른 수라를 들라 조용히 타일렀다.

아마 그때가 되면 이 아이는 더더욱 설 곳을 잃을지도 모른다. 황제께서는 황후의 태를 빌어 난 아이에게 제위를 물려주시겠다고 하셨으니, 보이지 않는 긴 전쟁은 이미 시작되었음이 분명했다.

“소자는 머찐 현님이 될 검니다!”

“그래요, 우리 황자는 좋은 형님이 될 겁니다. 하니, 어서 드세요. 건강하게 쑥쑥 자라야 아우를 돌보지요?”

“예!”

예전처럼 허겁지겁 음식을 먹지 않고 꼭꼭 씹어 삼키는 아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면서도, 기하는 좀처럼 어두운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신첩은 이제 괜찮습니다.”

꺼져가는 듯한 황후의 음성에 황제는 좀처럼 자리를 뜨지 못했다. 저녁 수라도 물리고 줄곧 곁을 지키는 것이 못내 불편하였는지, 그녀는 연신 괜찮다는 말만 중얼거렸다.

창백한 얼굴은 당장에라도 쓰러질 듯 핏기 하나 없었다. 이제 제법 봉긋하게 솟은 배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황제를 보다 못한 황후가 상궁의 부축을 받아 몸을 일으켰다.

“왜 일어나는 거요.”

“폐하께서 그리 계시니 신첩이 너무 불편하여 그럽니다.”

갑작스러운 황후의 혼절에 발칵 뒤집혔던 자경전은 어둠이 짙게 내리고서야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잠잠해졌다. 왜 곧바로 알리지 않았느냐는 황제의 불호령에 쉬이 입을 떼지 못하고 머리만 조아리는 상궁들을 감싼 황후는 심각한 일이 아니라는 듯, 여상(如常)한 표정으로 희미하게 웃었다.

몇 번이나 태의를 다그친 끝에 알았다. 이리 혼절한 것이 처음이 아니라는 것을. 비록 복중 태아나 황후의 건강이 크게 염려되는 바는 아니나, 자주 혼절하는 것은 좋은 징조가 아니라 했다.

“수라도 들지 않으셨잖습니까. 신첩은 이제 괜찮으니, 돌아가시어 쉬셔요.”

“오늘은 그대 곁에 있겠소.”

“폐하께서 신첩 곁에 계시면, 어찌 마음껏 쉴 수 있단 말씀입니까.”

일부러 짓궂게 웃으며 농을 건네도 딱딱한 황제의 얼굴은 쉬이 펴질 줄 몰랐다.

“영빈, 미안한데 잠시 자리를 비켜주겠나.”

황후가 혼절하기 전부터 자경전을 찾아 들었던 영빈은 줄곧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자리를 지켰다. 사이가 애틋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주 나쁘지도 않은 영빈이 어쩐지 회임한 뒤로는 못내 불편한 기분이 들어, 황후는 부드럽게 미소하며 양해의 말을 건넸다.

“예, 마마. 하면 신첩은 나가 있겠사옵니다.”

오랜만에 마주한 황제를 두고 쉽게 돌아갈 그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마음을 저리 드러내니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그대가 불편하다면 출산할 때까지 아무도 자경전에 출입하지 못하게 하겠소.”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없사옵니다. 유난을 떤다 하여 곱지 않은 시선이 날아들 것입니다.”

“내 미처 그대를 신경 쓰지 못했어. 미안하오.”

“폐하께서는 충분히 마음 써주고 계시지 않습니까. 부족하고, 오갈 데 없는 신첩을 이리 끝까지 받아주신 것만으로도 그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그런 말은 하지 않기로 했지 않나. 그대에겐 항상 미안해. 그리고 고맙소.”

“그런 말씀 마십시오. 시각이 늦었습니다. 이제 그만 가시어요. 무빈이 홀로 오래 기다리다 마음 상하겠습니다.”

“그 아이, 그리 속 좁지 않아. 누구보다 그대 걱정을 많이 해.”

꽃 같은 미소를 지으며 조그마한 입술을 가리는 황후를 의아하게 바라보던 황제는 저도 모르게 밀려오는 민망함에 크흠, 하고 헛기침하곤 얼굴을 돌렸다.

“아무리 마음이 태평양 같은 사람이라도, 정인의 일이라면 속 좁게 굴 것입니다. 하니 어서 가세요.”

늘 고마운 여인이었다. 때로는 따뜻한 누이 같고, 때로는 그리운 어머니 같았던 여인. 형님의 하나뿐인 정인이자, 늘 든든하게 자신의 편이 되어 주었던 소중한 여인의 다정한 격려를 받으며, 황제는 기어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폐하.”

“응?”

“그리 웃으시니, 참으로 보기 좋으십니다.”

거대한 제국을 두 어깨에 올려둔 채, 자신만을 바라보고 기대오는 이들을 위해 앞만 보고 걷던 그가 너무도 가여웠다. 당장에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테지만, 그래도 조금은 변하지 않으셨나. 저리 따뜻하게 웃어 주시기도 하시고, 다정하게 고개를 끄덕여 주시기도 하시니 말이다. 이제는, 언젠가 이승의 강을 건너 먼저 가신 그분을 만나게 된다고 해도, 조금쯤은 떳떳하게 고개를 들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폐하, 빗줄기가 거칩니다. 연(輦)을 대령하라 이르겠습니다.”

기별도 없이 불쑥 자경전을 나온 황제의 발을 묶는 것은 불호령을 떨칠 일이었다. 평소 어지간히 성미 급한 황제였기에 어떤 타박이 날아들까 노심초사하던 상선은 순순히 그러라는 대답에 들리자 허리가 굽도록 머리를 숙였다.

주룩주룩 쏟아지는 비가 상쾌하기만 했다. 어쩔 수 없이 궁에 갇혀 지낼 수밖에 없어 황제가 유난히 싫어하는 절기였으나, 올해는 달랐다. 시간에 쫓기지도 않고 줄곧 기하의 곁에 있을 수가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었다.

황후의 걱정으로 잔뜩 일그러졌던 마음이 정인을 떠올리자마자 활짝 개는 것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그것이 솔직한 황제의 심정이었다.

“폐하.”

먼저 자리를 비웠던 영빈의 목소리가 쏟아지는 빗줄기 사이로 날아들었다. 황제는 대답 대신 고개를 돌렸다. 실로 오랜만에 마주한 영빈은 전보다 수척해져 특유의 청초한 미색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워낙에 눈치가 빠르고 입안의 혀처럼 구는 것에 능숙한 영빈을 줄곧 곁에 두었던 까닭은 그가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하여, 일황자를 곁에 두고 유난히 아끼는 것을 볼 때도 그저 외로워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대를 이을 걱정 없이 마음껏 욕정을 풀 수 있다는 점이 가장 컸다. 볼 만한 미색 또한 손색없었고.

“잠시 신첩에게 시간을 내어주셔요.”

“무슨 일이냐.”

“예서 이러실 게 아니라, 신첩의 처소가 가까우니 그리 가셔요. 따뜻하게 데운 좋은 술이 있습니다.”

“아니, 그리되면 시간을 너무 지체할 것 같아. 잠시 다녀온다고만 하였는데, 벌써 늦었구나.”

“아…, 혹…….”

“급하게 할 얘기더냐?”

대답 대신 느리게 눈을 깜박이던 영빈이 이내 입술을 바르르 떨었다. 눈치가 빨라도 총기로 가득 찬 것은 아니었기에, 영빈은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감정을 부딪치는 것을 좋아했다. 단순히 권력만을 탐했더라면 그리 오래 곁을 주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영빈 또한, 늘 그런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았지. 전에는 미처 깨닫지 못했던 무지한 감정이 이제는 하나하나 눈에 들어왔다. 마치 다시 태어난 사람처럼, 그랬다.

“신첩은 그저, 폐하를 가까이 모신 지 너무 오래되어…….”

“아아, 그렇긴 하였지.”

“예. 늘 먼발치에서 정무에 바쁘신 폐하를 바라보았습니다.”

애틋한 표정으로 수줍게 웃는 영빈의 표정에도 황제는 그저 자신의 턱을 매만질 뿐이었다. 저 멀리 황제의 연이 너울너울 춤추듯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폐하.”

용포를 붙잡는 손길이 지나치게 떨리고 있었다. 황제가 눈을 내려 그의 손을 바라보자, 가볍게 떨리는 입술은 평소보다 유난히 붉었다.

“그대 마음은 고맙게 받으마.”

“예?”

“전에는 그것이 당연한 줄 알았더랬지. 네가 짐을 보는 눈이나, 애정을 갈구하는 표정이나, 뭐 그런 것들 말이다. 누군가를 연모하는 마음이 그리 애틋한지 전에는 미처 몰랐다. 그 마음, 고맙게 받으마.”

“폐하, 그게 무슨…….”

“이만 가봐야겠어. 바람이 차니 고뿔 들기 전에 처소로 돌아가도록 해. 먼저 가마.”

어깨를 다독여주는 황제의 손은 지나치게 따뜻했다. 다정한 웃음 또한 마찬가지였다. 줄곧 곁에 있으면서, 단 한 번도 이런 손길을 받아본 적 없었던 영빈은 눈앞에서 멀어져 가는 황제를 차마 붙잡지도 못하고 손끝만 바들바들 떨었다.

번을 설 상궁에게 주의할 점을 이야기하던 현 상궁은, 갑작스러운 황제의 행차에 버선발로 뛰어나와 나붓이 절을 올렸다.

“폐하.”

“어찌 이리 조용해.”

“그것이…….”

“빈은.”

“폐하께서 금일은 다른 전각에서 머무실 것이라 하시며 일찍 침수 드시었습니다.”

당황한 듯 더듬더듬 말을 잇는 현 상궁의 전언에 황제는 왈칵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 말을 해도 또 그런다, 다른 전각은 무슨. 대체 몇 번을 말해줘야 제 본심을 알아줄 것인지, 고약한 녀석 같으니라고.

“어디 미령한 것은 아니고?”

“예, 기운은 조금 없으셨으나 달리 미령하신 곳은 없으신 줄 아옵니다.”

“그래, 알았다. 내 알아서 침수 들 것이니 따라 들어올 필요 없다.”

괜히 우르르 몰려 들어가서 곤히 잠든 이를 깨울 필요는 없지. 어차피 한 번 깊이 잠들면 옆에서 큰 소리를 내도 도통 일어나지 않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황제는 발소리까지 죽여 가며 침소로 들어갔다. 다행히 침상 옆에 조그마한 불 하나를 밝혀둔 탓에, 꼴사납게 어딘가에 걸려 넘어질 일은 없었다.

온돌을 넣어 따뜻해진 침상 안쪽에 황자를 눕히고 돌아누운 기하는 소록소록 숨소리를 내며 잠들어 있었다. 제가 돌아오지도 않았는데 벌써 잠이 들다니. 고얀 마음에 당장 코를 비틀어 잡고 싶다가도 슬그머니 잦아드는 웃음에, 황제는 용포만 대충 벗어 던지고는 제 몫으로 비워뒀을 자리에 턱 하니 걸터앉았다.

“으음…….”

약하게 코를 골며 잠든 황자 놈이 겁 없이 기하를 향해 발길질했다. 능숙하게 통통한 발목을 붙잡은 황제가 그것을 휙 던져줄까 하다가 슬쩍 내려놓으니, 또르르 반대편으로 굴러가는 모습이 볼만했다. 이리 가까이 자다가 또 저놈 발길질에 고운 얼굴에 상처라도 나면 아니 되지.

“흐음.”

단숨을 내쉬며 몸을 뒤척이던 기하가 황제를 향해 돌아누웠다. 잔뜩 웅크려 모로 누운 몸뚱이가 한없이 작게만 보여서, 일순한 가슴이 싸하게 내려앉았다. 황제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쓸어 넘겼다. 잠결에 미간을 찌푸리면서 작게 뒤척이는 그를 기어이 품 안으로 끌어안고 몇 번이나 반듯한 이마와 뺨에 입을 맞췄다.

“기하야.”

숨소리가 흐트러졌다. 느리게 눈을 움찔거리다가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리는 기하의 입술 위로 입을 맞추자, 놀라서 움찔 떠는 턱 끝을 가벼이 쥐었다.

“폐하?”

“곤하였더냐? 기다리지 않고 먼저 잠들어 섭섭하였다.”

“아니 오시는 줄 알고…….”

잠에 취한 듯 푹 잠긴 음성이 듣기 좋았다. 따끈따끈하게 데워진 몸을 끌어안자 더할 나위 없이 충만한 기분이 들어, 줄곧 이대로만 있고 싶었다. 아프지 않게, 눈물 흘리지 않게, 아무런 걱정도 하지 않게.

“아예 짐의 침전을 이리 옮길까? 응?”

일부러 소리가 날 정도로 요란하게 입을 맞춰오는 황제의 체온에, 잠에 취한 눈이 부스스 웃었다. 이리 마주 보고 있으니 한 나라의 황제가 아니라 그저 오롯한 자신의 정인인 것만 같아서, 가슴속에 작은 개미 한 마리가 둥지를 틀고 살금살금 거니는 것만 같다.

“황후마마께서는 무탈하십니까?”

“어찌 말을 돌려. 아니면 네가 수신전으로 들어올 테냐?”

“그것은 법도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아니 될 것은 없지. 어떠냐, 응?”

“폐하, 간지럽……, 하하.”

웃음소리가 컸다. 곤히 자고 있던 황자가 이리저리 뒤척거리는 모습에 얼른 제 입을 틀어막은 기하는 눈만 도로록 굴리다가, 저를 바라보는 황제의 품으로 얼른 얼굴을 감췄다. 웃지 않으려 했는데 자꾸만 웃음이 나와서 숨을 참았더니, 끅끅 하는 이상한 소리가 났다.

“황후께서는 어떠십니까, 예?”

“이제 괜찮다. 잠시 혼절하였던 모양이야.”

“하면 폐하께서 곁을 지켜주셔야 하시는 것이 아닙니까?”

기운이 쭉 빠진 얼굴로 그런 소릴 하면 누가 믿을까 싶지만, 저 말이 괜한 소리는 아니라는 걸 이제는 알고 있다.

“가지 말라는 얼굴을 하고 입만 가라고 하면 어떤 말을 믿어?”

“소인, 아니… 신첩이 부족하여 그럽니다.”

“황후는 괜찮다 하였어. 네가 기다릴 테니 어서 가보라 하더라.”

멍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다 그제야 빙긋이 웃는 기하의 뺨을 꼬집고 흔들자, 답지 않게 부끄러워하며 고개를 돌리려 한다.

“계속 그리 있을 것이냐? 말도 하지 않고?”

슬그머니 옷깃을 들추는 황제의 손길에 기하는 순순히 팔을 들었다. 상처가 많아 볼품없다 여기는 비루한 몸뚱이를 자꾸만 귀하다 해주시니, 그것이 진실로 여겨졌다. 고운 것도 아닌데 자꾸만 곱다 하여 주시고, 어여쁘지 않은데 자꾸 어여쁘다 해주시니, 마냥 믿고 좋아해야 할지 아니면 더더욱 빛나게 가꾸어야 할지 도통 모르겠다.

“저, 폐하…….”

“아직도 버릇이 들지 않았구나. 이럴 때는 어찌 부르라 했지?”

“…륜.”

“그래. 자꾸 허투루 부르면 벌을 줄 것이야.”

황제의 손은 단단하면서도 고왔다. 전장을 줄곧 누빈 사내답게 검을 잡았던 손끝엔 굳은살이 있음에도, 희고 긴 손이 어찌나 수려한지 그것으로 제 몸을 더듬을 때는 절로 열락에 사로잡혔다.

“저…, 화, 황자가…….”

“쉬잇, 오늘은 가볍게 맛만 볼 것이다.”

“하지만, 흣…….”

어깨 아래로 흘러내린 옷깃을 들추며 단숨에 말캉한 속살을 베어 문 황제가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뜨겁고 축축한 혀가 피부를 핥고 가볍게 깨물 때마다, 기하는 제 입에서 터져 나오는 못난 신음을 참으려 손을 부들부들 떨어야 했다.

“흐응, 아…….”

반듯하게 누운 기하의 위로 올라탄 황제는 흐트러진 침의 자락을 완전히 들추며 빙긋이 미소했다. 옷자락 사이를 흐트러뜨리는 손길은 거침없으면서도, 벗은 몸 여기저기에 입 맞추는 모습은 어찌나 정갈하고 경건한지. 반쯤 벌린 입술 사이로 애달픈 신음을 터질 때마다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마도 황제는 저의 어설프기 그지없는 입놀림이나 손길에 만족하지 못하셨겠지. 제가 생각해도 너무도 어설퍼 종래에는 목석처럼 굳어 버리지 않으셨던가. 어찌 그 나이가 되도록 그런 것 하나 배워놓질 못했는지 까무룩 잠이 들면서도 후회가 되어, 혹여 그것에 불만을 느낀 정인이 다른 이를 찾아가시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악몽까지 거나하게 꾸었다.

“아앗……, 폐, 흐…….”

“쉿, 가만. 가만히 있어.”

“흐…, 아, 잠깐.”

기하는 무릎 사이로 불쑥 들어오는 커다란 손에 화들짝 놀라며 다리를 움츠렸다. 제대로 흥분하기도 전에 아무리 노력해도 잊히지 않는 초야가 떠올라 다시 몸이 식으면 민망해서 어쩌나 하는 걱정이 앞섰다.

“괜찮다. 내키지 않으면 도중에 멈추어도 된다.”

따뜻한 입술이 목덜미에 내려앉았다. 뜨거운 체온에 잠시 방심한 틈을 타, 황제는 능숙하게 고의를 풀어 헤치며 만개한 꽃과 같은 미소를 지었다.

“기하야.”

“…예, 륜.”

“다른 생각일랑 전부 거두어 두고, 꽃잠 자자.”

“예, …륜.”

꽃잎처럼 내려앉은 입술이 기하의 목선을 따라 움직였다. 긴장감에 도드라진 빗장뼈를 따라 촘촘히 입을 맞추자, 단전(丹田) 아래가 간질거렸다. 울고 싶은 기분이었다. 어느새 훤히 드러난 치부(恥部)를 거침없이 어루만지는 황제의 손길에 귀 끝까지 열이 몰려들었다.

“어찌 그리 떠느냐.”

“아, 저기… 륜. 신첩, 신첩이…….”

“가만히 있어.”

참다못해 몸을 반쯤 일으키며 두 손으로 아래를 가리자, 단단한 아귀힘이 그것을 밀어냈다. 기하의 무릎을 붙잡아 넓게 벌린 황제가 그 사이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사각거리는 용포 자락은 부드럽기도 하고 거칠기도 해서, 꼭 그와 같다고 생각되었다.

“둔해빠진 것 같으니.”

바람 빠지는 듯한 웃음소리를 내며 황제가 말했다. 온 신경이 아래로만 집중되어 있던 기하는 그의 손이 위로 올라오자마자 눈에 띄게 안심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 아앗, 흣, 아…….”

봉긋 솟은 유두를 천천히 쓰다듬는 황제의 손길이 농밀했다. 뜻하지 않은 곳에서 느껴지는 찌르르한 느낌에, 안심하고 있던 기하는 완전히 얼어붙어 제 입을 틀어막기에 급급했다.

“사내가 발정하는 것이 어디 그것뿐인 줄 알았더냐.”

얄궂게 속삭이는 목소리에는 뜨거운 입김이 섞여 있었다. 그는 손가락으로 유두를 문지르며 잘 빚어진 기하의 귓불을 축축하게 핥았다.

“아, 류, 륜. 하지 마십…….”

“계집처럼 느끼는 게 싫은 거냐?”

겉으로만 다부져 보이지, 속은 말라비틀어진 인형이 따로 없었다. 황제의 총비라는 것이 어찌 이리 바싹 말랐나. 훈장처럼 새겨진 상처 하나하나에 입을 맞출 때면, 신음을 꾹꾹 눌러 삼키면서 발을 동동 구르는 것이 어찌나 귀여운지 아무도 모를 테다.

“잘 먹고 잘 자도록 해. 살이 조금 더 올라야겠다. 허리가 이게 뭐냐, 응?”

툭 튀어나온 골반을 툭툭 건드리고, 허리를 바짝 끌어안으며, 기분 좋게 문지르고 있던 유두를 한입에 넣자 싫다고 어깨를 떠는 모습이란.

“으, 흐으, 폐하, 폐…….”

고양이처럼 혓바닥으로 핥고 입술을 모아 은밀한 소리가 나도록 빨 때마다, 기하는 바르작거렸다. 차마 황제를 밀어낼 수 없어, 완전히 드러난 마른 다리를 움찔거리면서도 물러날 곳이 없음을 인지한 것인지 색색 젖은 숨만 내쉰다. 꼿꼿하게 올라붙은 유두를 이로 잘근거리니, 급기야 우는 듯한 소리를 내는 것에 흡족해진 황제는 기분 좋게 허벅지를 쓰다듬었다.

“기대앉아.”

폭신한 기수를 말아 등 뒤에 받쳐주자, 영문을 몰라 두 눈을 동그랗게 뜬다. 풀어 헤친 침의 자락은 어깨 아래에 아슬아슬 걸쳐져 입은 것도, 그렇다고 벗은 것도 아니었지만 황제는 그것을 꽤 흡족하게 바라봤다. 흘러내린 침의를 끌어올리는 것을 포기하고, 훤히 드러난 아래를 가리기에 급급한 모습 또한 귀엽고 어여뻤으니까.

“어디 보자. 나의 빈께서 얼마나 강녕한지, 내 오늘 직접 봐야겠다.”

은밀하게 파고든 황제의 손이 기하의 치부를 더듬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다리 사이를 더듬는 그의 손길은 지나치게 노골적이고 거침없었다.

“뭘 하고 있어. 어서 짐에게 입 맞춰야지.”

당장에라도 딸꾹질할 것 같은 얼굴로 황제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기하는 두 눈을 꼭 감은 채 입술을 부딪쳐 왔다. 순간의 부끄러움을 넘기려는 것인지, 아니면 그저 시키는 대로 움직이려는 것인지, 둘 중 그 어떤 이유를 대더라도 순진하기 그지없는 몸짓이었다.

“흣, 폐하…….”

그저 입술만 가만히 맞대고 있는 것이 괘씸해 손에 잡힌 성기를 꽉 누르자, 끙끙대며 앓는 소리를 낸다. 발칙하게 아래를 세우고 있으면서, 어찌 아직도 새색시처럼 입술만 맞대고 있단 말인가.

“짐은 너그러운 정인이니, 그대 잘못은 탓하지 않으마.”

“소… 신첩이 무슨, 잘못을 흣, 했습니까?”

한쪽 눈을 찡그리며 어쩔 줄 몰라 발을 동동 구르는 모습마저 귀여웠다. 황제는 애써 웃음을 참으며 기하의 왼쪽 발목을 한 손에 움켜쥐었다. 여인과는 다른, 뼈대가 굵은 발목을 허공으로 끌어당기자 꼿꼿하게 일어난 살덩이가 여실하게 드러났다.

“아둔한 머리로 기쁨을 미처 깨닫지 못하니, 이 얼마나 애석한 일이냐.”

황제는 진심으로 안타까운 듯, 괴롭게 미간을 찌푸리며 천천히 기하의 발목에 입을 맞췄다. 안쪽 복사뼈를 따라 움직이던 황제의 입술은, 도장을 찍듯 희미한 자국을 만들며 부드러운 허벅지 안쪽까지 올라갔다.

그 거침없는 모습에 기하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간헐적으로 터지는 뭉근한 숨을 참으며 황제가 직접 쌓은 기수 더미에 몸을 푹 기댈 뿐이었다.

“아주 귀여운 모양새다.”

허벅지 안쪽, 여린 살갗에 입을 맞추며 순흔을 남기던 황제가 불현듯 말했다. 어쩐지 부끄럽고도 억울한 기분에 기하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응당 어떤 반응이 있을 거라 예측했던 황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기하를 힐끗 쳐다봤다. 이제는 목덜미 아래까지 붉어진 얼굴로 달달 떠는 것이 측은지심을 자아낼 정도였다.

혹여 또 그 밤을 떠올리는 것일까. 순간 치미는 애틋함과 미안함에 황제는 쓰게 웃으며 머리를 저었다. 아니다. 안 된다. 언제까지 그 밤의 환영에 갇혀 있을 수는 없었다.

“이곳까지 이토록 귀여우니, 짐이 그대에게 졌다.”

장난처럼 내뱉어지는 황제의 말에도 기하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제아무리 정인이라도, 그것은 엄연히 사내의 자존심(물론 풍문으로 얻어들은 얘기다.)이었다. 한데 귀엽다니. 다짜고짜 귀엽다니?

“어찌 표정이 그러냐?”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그 말씀은.”

“응? 기분이 좋지 않다니? 왜, 왜 기분이 상하였어?”

은밀하게 허벅지 안쪽을 더듬던 손길이 멀어지는 듯했다.

“그거야 폐하께……, 아, 저, 폐하.”

사내의 몸이란 지나치게 솔직했다. 입으로는 안 된다고 하면서도 기쁘게 반응하며 좋다 말하는 제 몸뚱이에, 기하는 하릴없이 입술을 발발 떨었다.

“계속 말해 봐.”

성기 주위를 에워싼 음모는 적당히 매끄럽고 부드러웠다. 사내의 것 같지 않게 가느다란 것은 기분 좋을 정도로 손가락 사이사이에 휘감겼다. 황제는 짐승의 등을 쓰다듬듯 그것을 어루만지다가, 반쯤 발기한 성기를 톡톡 건드렸다. 그저 스치듯, 장난처럼, 친밀하게.

“저기, 읏, 그러니까…….”

몸을 비비 꼬는 것 따위는 허락하지 않았다. 어떻게든 오므리려는 허벅지를 무릎으로 누르고, 미끈거리는 액이 찔끔거리는 성기를 건드릴 때마다 기하는 안타까움에 발끝을 오므렸다.

그것은 퍽 괴로운 일이었다. 온몸의 열이 단전 아래로 몰려들어 발가락 끝까지 간지러운 기분이란, 그 뜨겁고도 은밀한 느낌이란.

“폐하, 아, 아아, 조금, 조금 더…….”

“조금 더?”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거기서 아주 조금만 더 손을 움직였으면 좋겠다. 스치듯 닿았다 떨어지는 손끝이 아쉽다고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흐읏, 아, 폐…….”

기하는 양손으로 제 입을 틀어막고 달달 떨리는 허리를 뒤틀었다. 낯설었다. 그리고 지나치게 기분 좋은 감촉이었다. 뜨겁고, 간지럽고, 온몸이 저릿했다.

“쉬잇. 이러다 황자가 깨겠다.”

황제의 턱이 매끄럽게 움직였다. 그는 능숙하게 기하의 성기를 입에 넣고 혀를 굴렸다. 적당히 입술을 오므려 힘 있게 빨 때마다 들썩이는 둔부를 남은 왼쪽 손으로 붙잡자, 울먹이며 헐떡거리는 숨소리가 조금씩 잦아들었다.

그는 완전히 지금 이 시간에만 집중했다. 누군가의 은밀한, 그것도 같은 사내의 성기를 애무한다는 자체가 스스로에겐 꽤 신기한 일이었다.

타인을 기쁘게 해준다. 누군가를 애타게 원한다. 끝없이 입 맞추고, 온몸에 제 흔적을 새기고, 기쁨에 떠는 모습에 함께 희열을 느낀다. 황제는 그 모두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함께하는 기쁨을 알아채 버린 몸뚱이가 본능에 움직이려 할 때마다, 살인적인 힘으로 짓누르면서 하루하루 깨달았다. 끝없는 애정을, 깊고 깊은 연정을, 그 애틋한 마음을.

“아, 읍, 흐으…….”

목구멍 깊숙이에 닿은 성기가 부피를 늘렸다. 보통 사내의 것과 다르지 않은 크기는 목구멍을 찌르며 제 존재를 드러냈다. 황제는 사내 특유의 풋풋한 냄새를 천천히 들이마셨다. 검은 수풀 사이로 날렵한 콧대를 드리우며 입술을 문지르니, 탱탱해진 고환이 그의 아래턱에 닿았다.

황제는 일부러 요란한 소리를 내며 기하의 성기를 빨았다. 여전히 두 손으로 제 얼굴을 가리고 허리만 간헐적으로 들썩거리는 매정한 정인에게 존재를 드러내기 위함이었다.

뭉글뭉글하게 올라온 액이 선단을 적셨다. 혀끝으로 요도를 톡톡 건드릴 때마다, 기하의 입에선 흐느끼는 소리가 났다. 허리가 들썩여지고, 꽉 붙잡은 엉덩이가 벌어졌다. 허공에서 나풀거리는 마른 발목은 나비처럼 춤을 췄다.

모양새 좋은 기둥을 단번에 삼키자, 불끈 솟아오른 힘줄이 세세하게 치아에 부딪쳤다. 황제는 부러 입술을 오므려 선단만을 머금고, 혀를 둥글게 말아 그것을 문질렀다.

쾌감을 어쩌지 못하고 파닥거리는 고환을 손바닥으로 쓰다듬자, 눈꼬리에 눈물을 매단 벌건 눈이 겨우 황제에게 닿았다. 신음을 참기 위해 물어뜯은 입술은 적당히 부풀어 있었다. 흐트러진 침의는 제 형태를 잃어 겨우 팔만 꿰어져 있을 뿐이었다.

“폐하, 더, 더…….”

아무것도 알지 못해 더더욱 솔직한 정인은 그렇게 보챘다. 황제의 옷자락을 붙잡고 매달리며 육욕(肉慾 : 육체에 관하여 느끼는 욕정, 성욕)을 갈구했다. 황제는 선선히 기뻐하며 그의 뺨에 입을 맞췄다.

애가 탄 기하가 황제를 그대로 끌어안았다. 서슴없이 입술을 열어 혀를 섞으며 황제의 손을 끌어당겨 제 아래를 감싸게 했다. 그것은 꽤 열렬한 반응이었다.

어느덧 하초를 풀어 헤친 황제가 아래를 맞닿게 하는데도 놀라지 않을 정도였다. 외려 다리를 벌려 완전히 서로의 것을 닿게 하니, 손에 꽉 차게 붙잡은 성기를 마찰할 때마다 누구의 것인지도 모를 액이 서로의 배에 엉겨 붙었다.

“흐으, 폐, 하, 아!”

“읏, …기하야.”

축축하게 젖은 성기는 미끈거리며 서로를 마찰했다. 황제는 힘 있게 둘을 문지르며 끝없이 기하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온몸이 달달 떨릴 만큼 좋았다. 발끝까지 저릿할 정도로 좋았다. 그대로 숨이 멈추어도 좋을 만큼, 지나친 쾌감에 머리가 이상해질 정도였다.

달콤하게 입술을 맞댔다. 헐떡이는 숨을 삼키며 혀를 맞물렸다. 기하의 다리가 황제의 허리를 감쌌다. 조금 더 아래를 밀착하며 헐떡이는 모습은 그 누구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은 본능이었다.

아무에게도 주지 않을 것이다. 그 누구에게도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오롯이 지켜주고, 아껴주며, 내내 함께할 것이다.

제 손바닥에 그대로 파정(破精)하며 달달 떠는 기하의 젖은 목덜미에 입을 맞춘 황제는 짐승처럼 이를 세웠다. 훤히 드러난 수려한 목덜미를 잘근대면서, 그의 배 위로 사정한 황제가 나른하게 웃었다. 배가 덜 찬 맹수가 다음 먹이를 위해 이를 고르는 듯한 모습에, 기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황제가 미소하며 입술 위에 숨을 불어넣었다. 간질거리는 느낌에 스르르 눈을 뜬 기하는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뭉툭한 손끝 하나하나에 입을 맞추자, 그제까지 새근새근 잠들었던 황자가 칭얼대기 시작했다.

“쉬잇.”

황제의 다독임에 아이는 이내 곧 고른 숨을 내쉬며 수마에 빠져들었다. 키득키득, 낮고 은밀한 누군가의 웃음소리가 터졌다.

나른한 감각에 몸을 내맡기고 체온이 식을 새라 서로를 끌어안았다. 몇 번이나 입을 맞추고, 뺨을 쓰다듬고, 살을 맞댔다. 달콤하고 달콤한, 애틋하고 애틋한, 뜨겁고도 뜨거운 미소였다. 연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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