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장 인(認) (25/49)

24장 인(認)

해가 중천인데도 도무지 소리가 나지 않는 침소 앞을 기웃거리며, 현 상궁은 몇 번이나 제 가슴을 두드렸다. 어젯밤, 황제께서 모두 침소 바깥으로 나가라고 명하신 덕에 얌전히 물러났으나, 그 후로 감감무소식이니 대체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것은 현 상궁 옆에 나란히 선 지밀상궁 또한 마찬가지였으나, 그녀는 특유의 냉랭한 얼굴로 장승처럼 서서 도통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한 상궁 마마.”

“왜 그러시나.”

“저희 마마께서야 워낙에 아침잠이 많으시다지만, 폐하께서는 아니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기침(起枕)하셔도 열두 번은 하셨을 시각에 아무 소리가 없으시니, 슬쩍 기별을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폐하께서 윤허하시기 전엔 절대 침소 문을 열지 말라 하셨네.”

그거야 같이 있을 때 들은 소리지만, 사람이 어찌 이리 융통성이 없단 말인가. 물론 뼈와 살이 녹는 밤을 방해받으실까 봐 그러신 것일 텐데. 비가 아무리 주룩주룩 내린다 한들, 이렇게 날이 밝아 아침 수라를 받으실 시각이 가까워지고 있지 않은가.

“혹, 저희 마마께서 부끄러워 그러실 수도 있으시니 소인이라도 슬쩍…….”

“아니 된다지 않아.”

아니 이 양반이 대체 누굴 닮아 이리 대쪽 같으신가? 설마 대나무밭에서 나고 자라셨나. 이렇게 딱딱하게 굴지 않아도 될 텐데, 인간미가 없어도 너무 없지 않은가!

폐하께서야 기분 좋게 푹 주무셨겠지만, 우리 마마께서는 얼마나 힘들고, 아프고(물론 좋은 점도 있으셨겠지만), 질척질척하고, 꿉꿉한 밤을 보내셨겠는가. 얼른 기침하시어 따뜻한 물로 씻으시고, 어여쁘게 단장도 하고 싶으실 것인데.

“한 상궁 밖에 있느냐.”

얼굴 근육이 어찌 되었는지 도무지 변하지 않는 한 상궁의 표정을 유심히 살피던 현 상궁은 안에서 들려오는 황제의 목소리에 그제야 정신을 퍼뜩 차렸다.

“예, 폐하.”

마치 문 너머의 황제를 대면하기라도 한 것처럼 깍듯하게 머리를 숙인 지밀상궁이 자연스럽게 문 앞에 섰다. 이 문을 한 발자국만 넘어도 바로 기하의 침소였다. 저도 모르게 침을 꼴깍 넘긴 현 상궁은 부득불 지밀상궁의 곁에 섰다. 황제가 그녀까지 직접 부른 것은 아니었으나, 합궁한 후 상전의 뒤를 돕는 것은 수발 상궁의 몫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찾아계시옵나이까.”

“쉿, 조용히.”

환하게 불을 밝히고 있을 거라 예상했던 바와 달리, 침전은 지나치게 어두웠다. 거기에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비스듬히 침상에 누워 있던 황제가 제 입술 위에 손가락을 올리는 모습은, 익숙한 듯하면서도 낯선 것이었다.

“빈이 일어나면 초조반부터 들여라. 적당히 요기한 후에 온욕할 것이니, 다른 채비는 하지 않아도 된다.”

“예, 폐하.”

“빈이 눈뜨면 바로 먹을 수 있도록 준비해라.”

“예.”

단정하게 머리를 숙이는 한 상궁의 곁에 선 현 상궁은 완전히 황제의 팔을 베고 누워 잠들어 있는 기하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저 정도로 곤히 잠에 빠지실 정도면, 분명 뼈와 살이 녹는 뜨거운 밤을 보내셨을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당장에 기수부터 바꾸었어야 했거늘. 정갈하지 못한 곳에서 상전을 침수 들게 했다는 죄책감에 아랫입술을 곱씹던 현 상궁은 기묘한 위화감에 얼굴을 찡그렸다. 대체 뭐지, 이 숨 막히게 찝찝한 기분이란.

“현 상궁, 앞으로 빈의 욕조에는 꽃잎을 띄우지 마라.”

“예?”

다른 생각을 하고 있던 탓이다. 꼬리에 꼬리가 물리는 생각에 정신이 팔려 있던 현 상궁은 난데없는 황제의 명에, 저도 모르게 큰 소리로 반문하고서 혀를 씹었다. 다행히 황제는 그녀의 사사로운 잘못을 탓하지 않았다. 이리도 너그러워지신 것을 보면, 분명 뭔가 변화가 있었음인데.

“저, 그것이 무슨 말씀이시온지…….”

“빈의 체향이 흐려져 기분이 나쁘다.”

“아… 예. 그리하겠습니다, 폐하.”

잠투정을 하며 몸을 반대로 돌아눕는 기하를 애타게 바라보던 현 상궁은 등 뒤에서 포근하게 그를 끌어안으며 목덜미에 코를 박고 깊은숨을 내쉬는 황제를 바라보다 정신이 팔려, 뒤늦게 허둥지둥 발을 내디뎠다. 분명 달라지셨다. 한데 어찌 이리 찝찝한가.

“예?”

함께 온욕하겠다는 황제를 겨우 뿌리치고 홀로 탕 안에 들어온 기하는 정성스럽게 제 등을 닦는 현 상궁의 음성에 어깨를 움찔 떨었다. 슬쩍 뒤를 돌아보니 입을 벌린 채 멍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역시, 옳지 않은 밤을 보낸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 좀처럼 큰 소리 내는 법이 없던 현 상궁이 할 말을 잃었겠지.

“이건 필시 병이 아닐까?”

잔뜩 풀 죽은 기하의 음성에 화들짝 놀란 현 상궁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는 부드러운 천으로 그의 등을 닦았다. 걸으시는 모습이 평소와 크게 다르시지 않아 혹시나 하였는데, 이것이야말로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폐하께 기쁨을 드리지 못하는 후궁은 어찌 된다 하였지?”

“마마, 어찌 그런 소리를 하십니까. 기쁨을 드리지 못하신다니요.”

“물론 폐하께서는 나의 존재 자체가 기쁨이시라 하셨지만…….”

예전엔 미처 몰랐다. 황실에서 그 누구보다 수려하고 빛나는 용모로 늘 북풍한설에 견줄 차디찬 말씀만 입에 올리시던 폐하께서 저리 봄꽃처럼 다정한 언사로 정인의 마음을 녹여 주시다니.

황궁 안 모든 여인이, 감히 상상하지도 못했던 황제 폐하의 달라진 모습에 매일 밤 한탄의 눈물을 쏟아낸다는 것을 마마께서는 아시려나 모르겠다.

“입을 맞춰주시고 여기저기 만져주실 때는 분명 기분이 좋은데, 어느 순간부터 몸이 굳어 움직일 수도 없단 말이네.”

“흥분도 덜 하시고요?”

“응.”

다시 뒤를 돌아본 기하의 얼굴이 붉었다. 뜨거운 물 때문에 열이 오른 것일 테지만, 저리 붉게 변한 얼굴을 보고 있으니 근래의 청초하고 단아한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이토록 어여쁘신데. 폐하께선 눈앞에 마마님을 두고 긴긴밤을 홀로 어찌 보내셨을꼬.

“폐하께서 괜찮다고 하셨으니, 괜찮으실 것입니다.”

“어찌 괜찮으실 수가 있어. 사내란 욕망에 한없이 가까운 이들이거늘. 이러다가 다른 후궁에게 눈길을 주시면 어쩌지?”

“별걱정을 다 하십니다.”

웃음기 가득한 현 상궁의 음성에도 기하는 좀처럼 표정을 풀지 못했다. 세상 물정 모르고 곱게 자란 왕자님께서 어린 나이에 시집와 아무것도 모르신다 하더라도, 그런 말은 함부로 입에 올리는 것이 아니었다. 설령 폐하께서 다른 후궁, 아니 유곽의 기녀를 취한다 하시더라도, 후궁은 그것을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다.

물론 그것은 법도에 어긋나는 것이었기에 기하를 적당히 달랠 필요는 있으나, 현 상궁이 보기에 황제께서는 쉬이 마음을 내주시는 분도, 또 그 마음을 함부로 거두시는 분도 아니시었다.

“아니야. 사내란 그래.”

“우리 마마님께서 그리 색에 밝으신 분이신 줄은, 소인 몰랐습니다.”

짓궂은 현 상궁의 말에도 기하는 그저 몸을 움츠릴 뿐이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얼마나 놀랐던가. 코앞까지 와 있는 황제의 얼굴이야 이제 익숙해진 것이지만, 어젯밤 일이 떠오르자 고개를 제대로 들 수도 없었다.

분명 기세 좋게 덤빈 것까지는 좋았는데, 만족은커녕 서툴기 그지없는 저 때문에 불편한 기억까지 덤으로 떠올리셨지 않은가.

“그런 것만이 아니고…….”

하고 싶은 말이 무척 많았다. 그 전에 묻고 싶은 것도 많았다. 현 상궁은 그 모든 것을 현명하게 집어삼켰다. 상전의 근심 어린 표정을 보니 목구멍까지 치솟은 말들이 쑥 가라앉았다. 일단은, 아직 나이 어린 상전의 얼룩진 마음을 달래야 함이 먼저였다.

“마마, 폐하를 믿지 못하십니까?”

“그런 것은 아니네만, 열 여인 마다하는 사내는 없다 했어. 색을 밝히지 않는 사내 또한 없다 하였고. 폐하께서 전장을 누비실 때는, 하룻밤에 여인 서넛도 너끈히 안으셨다면서?”

“대체 어느 잡놈이 그딴 소릴 입에 올린답니까? 이상한 소문이나 듣고 다니지 마시고, 얼른 귀 씻으십시오!”

단정하고 온화하기만 하던 현 상궁의 고함에 움찔 놀란 기하는 저도 모르게 그녀가 하라는 대로 귀를 박박 문질러 닦았다.

여인에 대한 것이라면, 형님과 함께 전장에 나갔을 때 수없이 들었다. 열악한 환경에서 거처를 따로 만들어 호화롭게 지낼 수는 없었기에 늘 장수들이나 병사들과 함께 어울렸는데, 지친 일과를 마무리할 때마다 그들 입에 오르내리는 것은 영락없이 계집 이야기였다.

전장에서 승리하고 난 후, 허기를 달래고 술로 목을 축인 후에 취향에 맞게 계집이나 사내를 품으러 가는 자들이 대부분이었고.

“정력이 좋은 사내는 여인의 사랑을 듬뿍 받는다고…….”

“마마!”

얼굴이 붉어진 채 괜히 주위를 살피며 몸을 낮춘 현 상궁은 말똥말똥한 눈으로 저를 바라보는 기하를 향해 깊게 숨을 내쉬며 가슴을 탕탕 쳤다. 정숙하셔야 할 마마께서 어찌 이런 시정잡배들이나 할 법한 얘기를 아무렇지 않게 입에 올리신단 말인가. 설마 이 말을 황제 폐하 앞에서도 하시진 않으셨겠지?

“마마, 그런 말씀은 쉽게 입에 올리시는 것이 아닙니다. 정숙하지 못하십니다.”

“뭐 어떤가. 여기는 자네와 나뿐이고, 또 나는 여인도 아닌데.”

“하지만 폐하의 정인이시자 총비십니다. 혹여…….”

“폐하께 누가 되는 것일까?”

천진한 얼굴로 되묻는 기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현 상궁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의외로 고집이 센 상전을 달래기에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황제였다.

황제 폐하께 누가 된다, 황제 폐하께서 싫어하실지도 모른다, 황제 폐하께서 좋아하실 것이다. 아무리 귀찮고 하기 싫은 일이라도, 그 말만 하면 금세 말 잘 듣는 착한 아이가 된다는 것을 폐하께서 아시면 얼마나 기꺼워하실까.

“남세스러우니 절대로 그런 얘긴 입에 올리시면 아니 됩니다?”

“응…….”

야단치는 것이 아닌데도 금세 풀이 죽은 기하의 어깨를 다독이던 현 상궁은 그의 머리카락에 물을 끼얹었다. 뜨거운 물이 식기 전에 얼른 온욕을 마치고 맛 좋은 수라를 드시게 해야지. 그나저나, 이런 얘기를 대체 누구와 의논해야 한단 말인가.

황제는 종일 상소문을 확인했다. 제 곁에 앉은 기하의 손을 붙잡고, 이따금 그의 의견을 묻기도 하며 사소한 말을 나누었다.

현 상궁이 부지런히 내오는 다과나 주전부리를 입에 물고 추적추적 내리는 빗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도, 기하는 줄곧 황제를 응시했다. 너무 잘나서 빛나는 용안이 가까이 있으니 현실감이 없었다. 수려한 얼굴과 강건한 어깨, 단단한 가슴과 고운 손가락, 거기에 낮고 그윽한 음성까지. 어느 하나 모자람 없이 빚어놓은 것 같은 이분이 진정 저의 정인이라니.

타오르는 듯한 가슴을 간신히 진정시키고 나면, 그 후에 이어지는 것은 씁쓸한 기분이었다. 이리 잘나신 분께 비루한 몸뚱이 하나 제대로 내어드리지 못하다니, 정녕 불충한 후궁이 아닐 수 없었다.

“기분이 좋지 않으냐?”

“예?”

“표정이 어둡다.”

“그냥, 종일 처소에만 있으려니 답답해서 그렇습니다.”

“적림(積霖 : 계속해서 내리는 장마)이 이제 시작인데 벌써 그리 답답해?”

달리 타박하는 음성이 아닌데도, 기하는 황제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혹여나 황제가 저 때문에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 것은 싫었다.

아무리 장마철이라도 홀로 수신전을 지키시며 눈코 뜰 새 없이 정사에 매진하셔야 할 분이 이리 종일 제 처소에 와 계시는 것에 임승지마저 난색을 보였으니, 태화당 바깥의 흉흉한 소문이 머리 위로 둥둥 뜨는 것 같았다.

“이것만 보고 놀아주마.”

빙긋이 미소하는 황제의 얼굴을 홀린 듯 바라보던 기하는 저도 모르게 무릎걸음으로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응?”

그의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의아해하던 황제가 겁 없이 제게 달려드는 정인을 능숙하게 끌어안으니, 수줍게 입을 맞추는 모습에 웃음이 터졌다. 한 치도 예측할 수 없는 정인이로다. 어찌 이리 발칙한 짓만 골라 하는지, 아마 지밀이나 현 상궁이 이 모습을 보았다면 단정치 못하다며 기함하고 눈을 부릅떴을 테지.

“벌써 이리 달려들기에는 너무 이르다만?”

“소, 송구…….”

그제야 제가 한 행동을 깨달은 것인지 얼굴을 벌겋게 물들인 기하는 얼른 고개를 돌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저도 모르게 한 행동이라고 하기에는, 술을 마신 것도 아니고 잠에 취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말간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 귀여워 모르는 척하고 있었더니, 이런 깜찍한 짓을 서슴지 않는 모습이 그대로 두기엔 못 견딜 정도로 애틋했다.

“너 그런 것은 누구에게 배웠어?”

“예?”

“너 설마, 짐에게 시집오기 전에 다른 여인에게 그리 깜찍하게 굴었던 것은 아니겠지?”

“아닙니다!”

발끈하는 목청이 어찌나 컸던지, 바깥에 서 있던 지밀상궁이 무슨 일이 있는 것은 아닌지 조용히 고했다. 가까스로 터지는 웃음을 삼킨 황제는 아니라는 대답을 겨우 하고는, 얼굴이 활활 타오르는 기하의 양팔을 덥석 붙잡았다. 아무래도 이리 두면 귀여운 후궁께서 단단히 뿔을 낼 것 같으니, 이것은 잠시 미뤄두는 편이 좋겠다.

“폐하께선 정말 너무하십니다.”

“짐이? 짐이 뭘 했다고?”

“어찌 소인의 마음을 의심하십니까? 소인은 폐하께 첫눈에 반해, 일생 폐하만 가슴에 담고 살다 시집온 것인데요.”

날이면 날마다 황제만을 생각하며 애끓는 연심을 태운 것은 아니었지만, 가슴속에 언제나 소중하게 담겨 있는 이는 그뿐이었다. 황제의 명이 떨어졌으나 원치 않으면 가지 않아도 된다는 아버님의 말씀도, 절대로 가선 안 된다던 형님의 말씀도 못 들은 척하고 고집을 부려 이 먼 제국까지 오지 않았던가.

다섯 해 동안 태화당에 갇혀 그리움에 젖어 살 때도, 단 한순간도 황제를 원망한 적은 없었다. 그런데 그런 의심이라니, 이건 정말 너무 억울한 일이었다.

“어찌 눈에 눈물이 고여.”

“소인의 마음이 그리 헤프게 보이셨습니까?”

“아니, 누가 그렇다 하였더냐. 네가 너무 열렬하고 깜찍하니 내 너무 당황하고 기뻐 그리 말했던 것뿐인데. 농이다, 농이라니까.”

이따금 눈물을 보일 때도 있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가 심적으로 약해졌을 때뿐이었다. 씩씩하기만 한 아이가 갑작스럽게 눈물을 보이니, 황제는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몰라 몇 번이나 마른 입술을 혀로 쓸었다.

“기하야, 나 좀 봐라. 응? 어찌 그리 돌아앉아.”

“싫습니다.”

“어허, 왜 토라져 그러느냐.”

“소인이 지금 토라졌습니까? 소인은 지금 충격과 비탄에 빠진 것입니다. 폐하께서 소인의 연심을 의심하셨지 않습니까.”

그 목소리가 어찌나 차고 냉랭하던지, 눈물이 가득하던 얼굴을 가리니 괜스레 마음이 벌벌 떨렸다. 마음이 다친 것인가. 그저 사소하게 내뱉은 농지거리일 뿐이었는데.

하긴, 제가 그간 정인에게 얼마나 못나게 굴었던가. 외면하고, 모른 척하고, 만나기만 하면 못된 말로 상처를 주고, 저만 보고 시집온 아이를 홀로 궁에 처박아두고 돌아보지도 않았다. 더더군다나 끔찍했던 초야로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었고,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기게까지 했다.

“기하야.”

축 늘어진 어깨가 미동도 하지 않는다.

“기하야, 짐이 잘못하였다.”

한 번 고집을 부리면 좀체 당할 이가 없다는 현 상궁의 귀띔을 떠올린 황제가 다정하게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 순간, 꿈쩍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정인은 스르르 몸을 돌려 쭈뼛거리며 제게 다가왔다.

“못났다고 타박하실 것이지요?”

“못나지 않았는데 어찌 타박해. 마음이 상하였더냐?”

“타박하셔도 됩니다. 속도 좁고 못난 후궁이라고 하셔도 소인은 할 말이 없습니다.”

순순히 잘못을 시인하는 풀죽은 얼굴을 가벼이 쓰다듬자, 슬그머니 품으로 안겨드는 기하에게서 좋은 냄새가 난다. 보드랍고 뽀얀 분 냄새를 풍기는 여인도 아닌 것이 어찌 이리 품 안에 잘 안기는지. 단단한 어깨와 청초한 향기가 마음을 평온하게 한다.

“누가 속 좁고 못난 후궁이라고 해. 이리 어여쁘기만 한 것을.”

“사내는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하였는데…….”

“아까 그것은 농이었고, 지금은 진심이다. 어찌 농과 진심을 구별 못 해?”

빗소리가 잦아들었다. 아마 얼마 안 가 또다시 퍼부을 테지만, 잔잔한 평온함에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함을 느꼈다. 지금은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제국의 안위도, 지켜야 할 이들도, 백성의 평온도. 모든 것을 내던지고 오직 제 품에 있는 이 아이 하나만을 생각하고 싶었다.

“아무리 마음 상해 토라진다고 해도, 그리 야멸차게 등을 돌리는 법이 어디 있느냐.”

“야멸찼습니까?”

“그래. 네가 그리 등을 돌리고 있으니 어찌나 놀랐는지. 이것 봐라, 심장이 아직도 이리 뛴다.”

기하의 손목을 붙잡아 제 가슴 위로 올린 황제가 너스레를 떨었다. 확실히 평소보다 조금 빠르게 뛰긴 하였지만, 그것보다는 잔뜩 찡그린 그의 얼굴이 더 크게 느껴진다.

“한데―.”

“예?”

“너, 그간 그리 애틋하게 짐만을 바라고 마음에 품었더냐?”

“예?”

“쪼끄만 것이 연심이 뭔지는 알고 짐을 마음에 품었던 것이야? 충신이 된다더니, 본래 시집올 목적이었구나?”

커다란 눈을 반쯤 감고 그윽하게 바라보는 황제의 얼굴을 마주 보면서, 기하는 할 말을 잃고 연신 입술만 뻥긋거렸다. 물론 내내 마음에 품고 그리워한 것은 맞으나, 사내로 태어나 달리 그에게 시집올 생각 같은 것을 품었을 리는 없지 않은가.

그것이 동경인지, 애정인지도 확실치 않은 감정이었다. 혼인이 결정된 후, 훈육 상궁에게 교육받는 그 순간부터 화르르 타오른 마음이라는 것은 아마도 몰래 감추어 두어야 할 것 같다.

“북성에서 내내 쫄래쫄래 쫓아다닐 때 알아보았지.”

“그때 일은 잊으십시오.”

“어찌 잊어? 통통하던 얼굴이 아직도 선연하다. 그러고 보니 우리 빈께서도 어릴 때 식탐이 굉장하였다지?”

“먹는 것이 좋았습니다.”

살림이 곤궁하여 먹을 것이 풍족하지 못했다. 왕자라고 하여도 매일 기름지고 좋은 음식을 먹을 수는 없었다. 세끼 밥을 모두 먹는 것만으로도 여유롭다 느꼈으니, 유난히 식탐이 많은 왕자는 눈총 받기 일쑤였다.

그럴 때마다 형님께선 늘 자신 몫의 주전부리를 양보해 주셨다. 숨도 쉬지 않고 먹으면 체한다고 물도 챙겨주시고, 잘 먹어서 기특하다며 머리도 쓰다듬어 주셨다. 비록 부모님의 애정을 풍족하게 받은 것은 아니었으나, 형님께서 계시어 다행이었다.

“그래서 정연에게도 그리 너그러운 것이냐?”

“소인은 많이 먹는다고 타박 받진 않았습니다. 형님께서도 잘 챙겨 주시었고, 아버님께서도 별다른 말씀은 하지 않으셨습니다. 정연군은 너무 가엾지 않습니까? 누구 하나 관심을 주는 사람도 없었고요.”

황자를 본 지 오래된 것 같다. 황제와 늘 함께 있으니, 다른 것은 좋았으나 아이가 마음에 걸렸다. 그나마 영이 동복궁에서 함께 황자와 지내고 있다니 다행이었지만, 워낙에 정에 굶주린 아이가 아니던가. 혹여 또다시 욕심껏 음식을 먹다 탈이나 나지 않을까 걱정되었다.

“네가 있지 않으냐.”

“예, 이제는 소인이 황자를 돌볼 것입니다.”

“그래도 짐에게 줄 애정을 나누는 것은 아니 된다.”

“황자는 아이가 아닙니까.”

“그래도 안 돼. 너는 내 것이니까.”

단호한 황제의 음성에 기하는 부스스 미소했다. 기쁘다. 너무도 기뻐서 스스럼없이 황제를 끌어안은 기하는 제 등을 단단하게 안고 다독이는 손길에 안도했다.

“한데―.”

“예?”

“언제까지 소인, 소인 할 것이냐?”

황제의 두 눈이 가느다랗게 변했다. 반쯤 매달린 웃음을 거두며 지그시 바라보는 시선이 좋아 입을 벌리고 황제를 응시하던 기하는 제 뺨을 톡톡 건드리는 손길에 화들짝 놀라며 눈을 끔뻑였다.

“소인이 아니라 신첩이라 해야지.”

“아…….”

어쩐지 낯간지러운 기분이 들에 머리를 긁적이며 어색하게 웃는 기하를 황제는 말없이 응시했다.

“하긴, 아무리 법도라도 그런 말이 쉽게 나올 리가 없지. 처음 볼 때부터 꼬박 예를 갖춘 영빈이…….”

“싫습니다.”

“응?”

“싫습니다. 앞으로 꼬박꼬박 신첩이라 할 테니, 그런 말씀은 거두어 주십시오.”

꽤 단호해 보이는 기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황제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도무지 예측할 수 없는 아이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몽롱한 눈으로 애정을 철철 흘리더니, 금세 단단하게 감정을 갈무리하고 바라보지 않는가.

“샘이 나 그럽니다. 소…, 아니 신첩의 소갈머리가 손바닥보다 작은 것을 어찌합니까. 폐하께서 다른 이의 이름을 부르시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따끔거립니다. 못났다 하셔도 어쩔 수 없습니다. 폐하께 거짓을 고할 수는…….”

아아, 어쩌면 이 아이는…….

“폐하?”

황제는 품 안 가득 기하를 끌어안고 눈을 감았다. 놀란 듯 몸을 굳히는 등을 다독이자, 금세 경계를 거두고 스르르 기대 오는 모습이 애틋했다. 너무도 안타까워 손가락이 덜덜 떨릴 정도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마음이 깊어져, 스스로 겁이 날 지경이었다.

“앞으로는 그러지 마라. 그 작은 머리통에 다른 생각은 담지 마. 오래 돌아 겨우 마음이 닿았으니, 그런 사소한 것에 낭비할 시간이 없다.”

옷깃을 그러쥐는 손길이 가련하게도 떨린다. 아직 어린아이처럼, 당장 눈앞의 일이라곤 아무것도 알 필요 없다는 듯이 구는 순진무구한 아이처럼.

“예. 예, 폐하.”

“솔직하니 어여쁘다. 하니, 무슨 일이 있어도 거짓은 고하지 마라. 짐도 그리하마.”

활짝 웃던 것을 멈추고 그대로 황제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기하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그것이 완벽한 진실이든, 찰나의 진심이든 상관없었다.

지금 이 순간은 아무것도 필요치 않았다.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이 온기만, 그저 이 마음만, 이 순간만이 계속되기만을 바랐다.

초조한 얼굴로 뒤를 따르는 현 상궁을 힐끗 돌아본 기하가 해사하게 웃었다. 몹시도 못마땅한 얼굴로 끙끙대는 그녀의 표정이 재밌었다.

“그리 걱정되나?”

“폐하께 말씀도 없이 나오시면 어찌합니까.”

“멀리 가는 것도 아닌걸.”

잠시 비가 잦아든 틈을 타서 처소에서 나온 기하는 절대로 안 된다고 만류하는 현 상궁을 밀어내며 동복궁으로 향했다. 나른하게 누워 있던 황제를 찾은 금룡대장 임승지가 몹시 어렵고 불편한 얼굴을 내비쳐, 적당히 자리를 비키는 것이 나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물론 황자와 영이 보고 싶기도 했고.

“폐하께서 아시면 크게 역정 내실 것입니다.”

“임 대장이 돌아가기 전에 가면 된다니까. 서 중랑, 빨리 좀 걸으십시오.”

답지 않게 느릿느릿 걸으며 하품이나 하는 서엽은 귀찮은 태가 역력했다. 한때는 북성에서 가장 날랜 소년 장수였던 그가 어찌 몇 년 사이에 저렇게 게으름뱅이가 되었는지, 혀를 끌끌 차던 기하는 그의 단단한 팔을 붙들고 어서 빨리 걸으라며 잔소리를 퍼부었다.

“마마, 그 손 좀 놓으십시오. 누가 보면 어찌합니까?”

“보면 어때서? 형님은 내 사촌인데.”

말이 좋아 호위 무사지, 실상 처소에만 처박혀 있는 기하를 보호하고 나설 일은 거의 없었다. 때문에 서엽은 홀로 후원에 나가 두어 시진 검을 휘두르는 것이 일과의 전부였다. 늘 말을 타고 초원을 누비던 장수가 갑갑한 궁에 갇혀 있는 것이 못내 미안하면서도, 기하는 그에게 퍽 많이 의지하고 있었다. 아무리 현 상궁과 궁녀들이 제게 잘해준다 해도, 그들과는 차마 나눌 수 없는 마음을 애써 숨기고 있었으니까.

“그리 걸으시면 넘어지십니다.”

느릿느릿한 서엽의 말에 기하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빨리 걷기 싫으니 핑계는! 유난히 꿈지럭거리는 서엽의 표정이 수상쩍었지만, 지금은 그것을 일일이 따져 물을 시간이 없었다.

또다시 한바탕 비가 퍼붓는다면 태화당으로 돌아갈 길이 막막했다. 혹여 비를 맞으면 폐하께서 야단을 치실 것이고, 아무 죄 없는 황자에게도 좋은 소리가 돌아가지 못할 것 같으니까.

“빨리 오십시오, 어서요.”

평소보다 훨씬 빠른 기하를 따라 현 상궁과 나인들은 뛰듯이 걸어야 했다. 황자에게 주겠다고 몰래 숨겨놓은 꽃사탕을 품에 안으며 기분 좋게 웃던 그는, 멀리 보이는 동복궁 모습에 기어이 옷자락을 붙잡고 뛰기 시작했다.

“마마, 마마! 넘어지십니다!”

“마마!”

호들갑을 떨며 뒤따르는 이들의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동복궁 안으로 들어서자, 궁 안이 유난히 적막하게 느껴졌다. 아무리 비가 왔었다 한들 정원에 나와 있는 이가 하나도 없다니.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며 발을 내디딘 순간, 희미하게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마마…….”

“쉿.”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원망 어린 눈으로 바라보던 현 상궁과 나인들에게서 등을 돌린 기하는 천천히 처소 안으로 들어가며 발소리를 죽였다.

“이것이 벌써 몇 번째입니까?”

“내가 안 그럴라구 했는데에…….”

“그리 많이 드시고, 조갈 난다고 물을 하염없이 들이켜시니 자꾸 실금하시는 것 아닙니까.”

쌀쌀맞은 상궁의 목소리에 훌쩍거리던 황자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입을 다물었다. 반쯤 열린 문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기하를 발견한 것은 상궁 주변에 모여들었던 나인들이 먼저였다.

그녀들은 몹시 놀란 얼굴로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제 상전에게 고하려 하였으나, 싸늘한 기하의 표정에 덜덜 떨며 입을 다물었다. 황자는 침상 끄트머리에 겨우 서서 고개를 푹 숙이고, 연신 손등으로 제 눈을 문질렀다. 침상 아래에 숨어든 영 또한 기가 죽어 끼잉, 하는 소리를 내다 호되게 야단을 맞았다.

그 모습을 빠짐없이 바라보고 있자, 앞을 막아선 현 상궁이 문 앞에 서 있는 이들에게 상전의 행차를 알리라 명했다.

“태화당 무빈마마 듭시옵니다.”

궁녀의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문이 활짝 열렸다. 순간 고개를 퍼뜩 든 황자가 환하게 웃으며 기하를 향해 달려왔다. 침상 아래에 숨어들어 있던 영 또한 마찬가지였다. 난색을 보인 것은 황자의 앞에 앉아 있던 처음 보는 얼굴의 상궁과 그녀 주위를 에워싸고 있던 나인들뿐이었다.

“마마!”

언제 울었느냐는 듯 환하게 웃으며 품 안으로 달려드는 황자를 번쩍 안고, 아직 젖내가 나는 뽀얀 얼굴에 입을 맞추었다. 누군가가 보았다면 경박하다며 수군거릴 것이 분명하였으나, 오랜만에 본 아이 앞에서 격식에 얽매이고 싶지는 않았다.

“황자, 잘 있었습니까?”

“마마, 마마.”

“황자가 보고 싶어서 왔습니다. 우리 며칠이나 못 봤지요?”

금세 눈물이 그렁그렁해진 정연의 뺨을 연신 쓰다듬으며 안으로 들어간 기하는 길을 터주고 물러나려는 상궁 나인들을 눈짓으로 머물게 한 후, 침상에 걸터앉았다.

“마마, 보고시퍼써요.”

“그리 보고 싶었으면 태화당에 들르지 그랬습니까.”

“갔었는데에…, 상선 할배가 들어가면 이놈 한다꼬.”

“누가 감히 우리 황자를 이놈 합니까?”

연신 웃으면서도 길게 늘어선 상궁 나인을 사납게 쳐다보던 기하는 아이의 통통한 뺨을 쓰다듬다가 양쪽 귀를 슬그머니 두 손으로 막았다.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아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기하를 빤히 올려다봤다. 황자가 놀라지 않게 이마에 입을 맞춰주자, 그제야 다시 빙긋이 미소하는 얼굴은 더할 나위 없이 천진하고 어여뻤다.

“못 보던 이들이 아닌가. 권 상궁은 어딜 갔느냐.”

“사가에 일이 있어 다니러 갔나이다.”

“자네는.”

“조 상궁이라 하옵니다, 마마.”

“처음 보는 얼굴인데?”

“권 상궁과 함께 황자 저하를 모시고 있사옵니다.”

단정하게 허리를 굽히는 얼굴은 무뚝뚝하기만 했다. 본디 궁 안 여인들은 대부분 상전 앞에서 저런 얼굴이었으나, 나이 어린 황자와 함께하기엔 지나치게 서늘한 표정이었다.

“그래, 자네가 수고가 많구나. 황자께서 아직 어리시니 특별히 다정하게 보살펴 드려야 한다.”

“예, 마마. 명심하겠나이다.”

“권 상궁은 언제 돌아온다든가?”

“익일 미시(未時)까지 환궁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래. 내 오늘은 황자와 함께 태화당에서 보낼 것이다. 게서 침수 들 테니, 그리 알아.”

“예, 마마.”

권 상궁은 황제의 사람으로, 무뚝뚝한 성정일지언정 황자를 따뜻하게 보살피는 여인이었다. 그런 그녀가 자리를 비운 틈을 타서 아직 사리분별이 능하지 못한 어린아이를 핍박하는 저들은 분명, 다른 속뜻이 있을 것이다.

황자는 유난히 큰 소리에 약했다. 감히 제게 그리 따져 물을 신분이 아님에도, 힘없고 어린 아이는 그런 변별력도 갖추지 못했다. 너무도 오랜 시간 눈물과 외로움에 허덕이며 자란 탓이었다.

“정연.”

“예?”

“태화당으로 갑시다.”

“진짜요? 가도 됨미까?”

“그럼요. 영아, 우리 영이도 황자와 잘 지내고 있었구나. 가자, 폐하께서 기다리시겠다. 자네들은 황자를 따를 것 없으니 예서 머물도록 하게.”

배시시 웃는 황자를 그대로 품에 안고 일어서자, 영이 낑낑거리며 따라나섰다. 흉흉한 기세로 조 상궁을 쏘아보던 현 상궁이 황자를 향해 나붓이 절을 올렸다.

가지고 온 꽃사탕 하나를 입에 넣어주자 금세 환하게 웃은 황자는 혹여나 기하가 자신을 떨어뜨릴까 봐, 그의 목을 꼭 끌어안고 연신 뺨에 입을 맞췄다.

“조 상궁, 나 가.”

“예, 저하. 다녀오십시오.”

조금 전까지 자신을 혼내던 조 상궁에게 손까지 흔들며 천연덕스럽게 웃는 황자의 해사한 미소에, 기하는 싸늘하게 굳어지는 얼굴을 금세 숨기며 천천히 동복궁을 나섰다.

“권 상궁은 잘해 주지요?”

“예! 권 상궁은 큰 소리도 안 내고, 밥 먹을 때도 맛있는 거 많이 주고, 또…….”

“조 상궁은요?”

“조 상궁은…….”

붉은 입술을 쭉 내밀고 말을 잇지 못하는 아이는 금세 시무룩한 얼굴이 되었다. 황자를 다시 고쳐 안을 때마다 뒤따르던 현 상궁이 슬그머니 다가서 그만 걷게 하심이 어떻겠냐고 고했지만, 기하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며칠 못 본 새에 훌쩍 자란 것 같은 황자가 홀로 훌쩍이던 모습이 자꾸만 눈에 아른거려, 가슴이 부글부글 끓었다. 못된 계집 같으니라고.

“황자?”

“대장부는 입이 무거워야 한다꼬…….”

“누가 말입니까?”

“조 상궁이…….”

“그것은 맞는 말이나, 우리는 비밀을 만들지 않기로 하였지요?”

“예! 마마한테는 숨기는 거 엄써.”

“조 상궁이 잘해 주었습니까?”

“조 상궁은 무서워써요.”

꽃사탕을 오독오독 씹어 먹던 황자가 불현듯 기하의 목을 폭 끌어안았다. 무심결에 나온 아이의 행동에 그는 한숨을 푹 내쉬고, 복잡해진 머리를 지그시 눌렀다.

그녀가 어느 쪽 사람인지 정도는 현 상궁을 통해 알아보아도 충분하다. 그런데 그 후에는? 이런 일이 일어날 때마다 폐하께 의논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제게는 힘이 없었다. 복잡하고 어지러운 황궁 내의 정치와 담을 쌓고 산 탓이었다. 더욱이 아무리 잘라내고 또 잘라낸다 한들, 쉽게 그들을 막아서기란 역부족이 아닌가.

“어어?”

“왜 그럽니까?”

“현님이다. 마마, 현님이에요.”

기하의 귓가에 속삭이는 황자의 목소리는 이전처럼 겁에 질려 있지 않았다. 호기심과 반가움, 그리고 어색함이 뒤섞인, 다듬어지지 않는 감정의 부유물이 한꺼번에 차올랐다.

기하는 황자가 가리키는 곳으로 몸을 틀어 발을 멈췄다. 후궁전 초입, 그다지 화려하지 않은 소박한 전각에서 막 걸어 나온 일황자는 어깨가 늘어질 정도로 길게 한숨을 내쉬며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봤다. 금세 비가 쏟아질 것만 같은 흐린 하늘을 올려다보는 아이의 얼굴은 지나치게 근심이 짙어, 뒤를 따르던 상궁들조차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바람이 제법 거세게 분다. 또다시 비가 퍼부을 것만 같아, 기하는 황자를 다시 고쳐 안았다. 무거운 습기를 머금은 눅눅한 바람은 생각보다 차고 시려서, 마냥 쐬고 있다간 아이가 고뿔에 걸릴 것 같았다.

“이만 가자.”

고작 어린아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두 눈 가득 독기를 품은 일황자는 어쩐지 상대하기가 껄끄러웠다. 여덟 살밖에 되지 않은 아이라고 하기엔 두 눈이 지나치게 메말랐고, 표정은 싸늘했으며, 오만하고 무감각한 얼굴엔 비웃음이 덧씌워져 있었다.

그런 얼굴로 못된 술수를 부려 사람들의 눈을 돌리고, 가엾은 아이를 죽음에 이르게 했지. 이해하고 싶지도 않고, 용서해줄 마음 또한 절대로 없었다.

“현님…….”

점점 멀어지는 일황자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정연군이 중얼거렸다. 정에 고픈 아이는 유난히 제 형제를 그리워했다. 늘 괴롭히고, 업신여기고, 울리기만 하였는데도 그랬다. 황궁 안 모든 이들이 정연을 그림자 취급 할 때도, 일황자만은 아이를 잊지 않고 못된 짓으로라도 상대해 주었기 때문일까. 그리 못살게 굴었는데도, 피가 끌리는 탓일까.

“황자는 형님이 좋습니까?”

“무서운데…, 그래도 좋아요. 근데 마마가 제일 좋아!”

품에서 버둥거리는 황자는 꽤 무거웠다. 오래 안고 있으려니 팔이 저릿한데도, 그런 아이가 못내 애틋해서 차마 내려놓겠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후궁전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하고 있는 태화당까지는 제법 거리가 되었다. 마음이 무겁다. 힘없는 자신 때문에 혹여 아이가 해를 입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스멀스멀 기어올랐다.

발이 무거웠다, 당장에라도 고꾸라질 것처럼. 금세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아무런 힘이 없다는 것이 이리도 슬픈 일이었던가. 그것이 이토록 무기력한 마음을 들게 하였던가.

황제는 몹시도 불편한 얼굴로 황자를 쳐다봤다. 황제께서 태화당에 행차하셨다는 얘기에, 황자는 처소 문 앞에 서서 자꾸만 울먹였다. 결국 비가 쏟아지기 직전까지 후원에서 황자와 시간을 보낸 기하는 참다못해 바깥으로 나온 황제가 역정을 내고 나서야 해가 뉘엿뉘엿 기울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폐하…….”

보고를 마친 승지와 사담을 나눌 때까지만 해도 어련히 알아서 돌아올 것이라 여겨 기하를 기다리던 그는, 빗방울이 후두둑 떨어지는 소리에 기어이 역정을 내며 그림자를 닦달했다.

눈치껏 자리를 피하는 영특함까지는 어여삐 여기겠다만, 어째 나가서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느냐는 말이다. 게다가 말도 없이 백돼지 같은 놈을 덜컥 데리고 오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이리 역정 내시면 황자가 무안해 합니다.”

“그놈이 무안해 할 눈치라도 있더냐?”

“겁이 많지 않습니까.”

“사내놈이.”

“폐하…….”

용포 자락을 붙잡고 슬그머니 기대 오는 기하를 매몰차게 뿌리칠 생각 따위는 없었다. 황제는 부러 시큰둥한 표정을 짓고 기하를 돌아봤다. 방긋 웃는 얼굴이 어찌나 어여쁘던지, 하마터면 그대로 입술을 들이밀고 농밀하게 입을 맞출 뻔하였다.

망아지 같은 아들놈만 없더라도 충분히 그리했을 텐데.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 저만치 물러나서 짐승과 노닥거리고 있는 꼴을 보니 속이 터진다. 아비를 보고도 인사조차 제대로 올리지 못하는 천하의 못된 놈 같으니라고.

“너, 이리 와 봐라.”

황제의 칭호가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기하는 애써 웃으며 다정하게 황자를 불렀다. 무턱대고 손짓하며 자신을 부르는 황제의 모습에 잔뜩 겁을 집어먹은 황자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쭈뼛거리며 그 앞으로 슬금슬금 걸어왔다.

“사내놈이 어찌 이리 기백이 없어!”

“폐하, 황자가 놀랍니다.”

기어이 커다란 눈에 눈물을 매단 황자를 사납게 째려보며 혀를 차던 황제는 이 와중에도 저를 타박하는 기하를 향해 눈을 돌렸다.

아니 대체 이것이, 지금 누구 역성을 든단 말인가? 응? 천지가 개벽해도 세상에서 가장 좋은 이는 짐이라 말해놓고, 그 맹세가 얼마나 지났다고?

“황자, 아바마마께서는 화내시는 것이 아닙니다. 놀라지 마세요.”

“게 앉아라.”

턱짓하며 심드렁한 얼굴로 연죽을 물던 황제는 무언가 못마땅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기하의 표정에 가슴을 찔린 기분이었다.

아니 대체 뭔가? 제가 뭘 그리 잘못했다고 저런 눈으로 보는 것이야? 저 얼굴이 대체 어디 정인을 바라보는 눈빛이란 말인가?

“황자도 있는데, 연죽은 나중에 태우시면 아니 됩니까?”

“황자랑 연죽이 무슨 상관이냐.”

“연죽 연기가 매워 황자에겐 좋지 않다 들었습니다. 폐하의 성후(聖候 : 왕의 신체 안위)에도 그리 도움 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리 성후를 걱정하는 것이, 지금까지는 한마디도 없다가 황자 앞이라고 말을 꺼내는 저의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이냐.

“정연은 욕탕에 가서 온욕이나 하고 오너라.”

“…예에.”

온욕을 끔찍하게 싫어하면서도 차마 황제의 명을 거스를 수 없었기에, 아이는 꾸벅 머리를 숙이고는 느릿느릿 침소를 걸어 나갔다. 그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보던 기하의 팔을 불쑥 낚아챈 황제는 흉흉한 표정으로 그를 향해 얼굴을 들이밀었다.

“폐…….”

“너 솔직히 말해라. 분명 저놈보다 짐이 더 좋다 했어?”

“예?”

“제대로 말해. 짐과 저놈이 강물에 빠지면 누굴 먼저 구할 것이냐?”

“예?”

그것은 아주 사소한 물음이었다. 누가 더 좋으냐는 질문을 에둘러 표현한 것으로, 정인들 사이에선 으레 묻고 답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대답은커녕 눈만 껌뻑거리고 있는 기하의 표정에, 황제는 씩씩거리다가 기어이 연죽을 바닥에 내팽개쳤다.

“아니, 어찌 이러십니까?”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황당한 듯 묻는 목소리에 속이 터졌다. 가슴이 절절 끓는 얼굴로 저를 바라볼 때는 언제고, 어째서 황자만 사이에 끼면 저렇게 표정이 돌변하느냔 말이다.

“짐과 황자가 강물에 빠지면 누굴 구할 것이냐고 물었잖느냐.”

“그걸 지금 말씀이라고 하십니까?”

“말이니 묻지! 너 어째 황자한테만 그리 너그러워? 뭐? 연죽이 황자에게 해로우니 태우지 말라고? 황자에게 해로운 것은 그리 잘도 말하면서, 어찌 지금껏 짐이 태울 때는 얌전히 있었느냐? 짐의 성후가 정녕 걱정되기는 하느냐?”

“아니, 그것은…….”

“이것 보아라. 너는 짐과 황자가 물에 빠지면 분명 저놈부터 구하려 들 것 아니냐?”

“그야 황자는 아직 어린아이고…….”

“짐을 사모(思慕)한다지 않았어!”

버럭 고함치는 황제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기하는 할 말을 잃은 듯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아무래도 너무 오랜 시간 자리를 비운 탓에 역정이 나셔서 저러시는 거겠지.

“어딜 가느냐?”

“연죽을 이리 던져 놓았다가 불이라도 붙으면 어찌합니까?”

기하는 침상 아래로 내려와 황제가 바닥에 패대기친 연죽을 주우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씩씩거리는 황제의 숨소리가 등 뒤에서 다시 들렸다. 그새를 참지 못하고 기하를 따라 내려온 황제는 그의 어깨를 붙잡으며 빛나는 얼굴을 잔뜩 일그러트렸다.

“너, 정말―.”

“그런 끔찍한 말씀은 다신 하지 마십시오. 그럴 일은 일어나지도 않을 것이나, 혹여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날쌔고 냉정한 폐하의 그림자들이 더 빨리 물에 뛰어들 것입니다.”

“지금 그 말이!”

“더욱이, 신첩은 헤엄도 못 칩니다. 잊으셨습니까? 물에 들어가면 그대로 가라앉는단 말입니다.”

잘 닦은 연죽을 다시 황제에게 내밀고 물끄러미 바라보던 기하는 그의 허리를 다정하게 끌어안았다. 애정에 굶주린 것은 어린 황자뿐만이 아닌 것 같다. 제국의 가장 높은 자리에 계신 분이, 만백성이 우러러보며 수많은 이들의 존경과 신망(信望)을 받으시는 분이, 어찌 이리 아이 같으실까.

“그래도 폐하께서 원하시면 기꺼이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누가 너더러 그러라고 했나. 말이 그렇다는 거지.”

“몇 번을 말해도 믿어주지 않으시잖아요.”

“내 언제 믿지 못한다고 했더냐?”

기하는 답지 않게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홱 돌리는 황제를 올려다보며 웃었다. 안타깝고, 안쓰럽고, 미안한 마음이 엉망진창으로 휘감긴다. 그것 위로 커다란 애정이 덧씌워져 가슴이 뜨겁게 파동한다.

“연죽 연기가 매워서 입을 맞추면 기침이 난단 말입니다.”

“그랬으면 진작 말을 할 것이지.”

“견딜 정도는 됩니다. 폐하께서 하시는 것이니까요.”

“네가 싫다면 하지 않겠다.”

“폐하께서 원하시면 싫어도 참을 것입니다.”

스스럼없이 입을 맞춰 오는 기하를 끌어안으며, 황제는 한껏 달아올랐던 열기에 멋쩍어 웃고 말았다. 자신보다 체온이 낮은 기하의 푸른 냄새에 불쾌한 감정이 씻은 듯 사라지는 것이 신기하기만 했다.

“저놈은 오늘만 예서 재우는 것이다. 다음엔 안 돼.”

“예, 폐하.”

슬쩍 닿았다 떨어지는 입술이 아쉬워 몇 번이나 입을 맞추니, 달뜨게 웃는 얼굴이 눈앞에서 아련하게 번진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