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장 적림(積霖)(4권) (24/49)

23장 적림(積霖)

오후부터 비가 퍼부었다. 더위에 앞선 보름여 간의 장마 기간에는 제국의 모든 것이 멈추었다. 우장을 쓰고 우산을 드리운다 한들 쏟아지는 빗줄기를 피할 수는 없었기에, 백성들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는 이 시기를 대부분 칩거(蟄居)하며 보냈다.

그것은 황궁 또한 마찬가지였다. 대다수의 신료가 입궁하지 않은 탓에 오랜만에 느긋하게 하루를 시작한 황제는 임승지가 직접 가져온 중요 서류만을 대충 훑어보며, 기하의 무릎을 베고 누워 시간을 보냈다.

“정녕 이리 계셔도 되시는 것입니까?”

“아무도 입궁하지 않았다니까.”

너무도 바빠 아침저녁으로 겨우 얼굴을 맞댈 뿐이던 황제가 종일 곁에 붙어 있으니 뭔가 신기하기도 하고 걱정도 돼서, 기하는 같은 질문을 몇 번이나 물었다.

황궁 생활이 벌써 다섯 해째인데, 어째 올해 처음 입궁한 것처럼 모든 것이 낯설었다. 물론 그전에는 황제께서 궁을 비우셨던 탓이 크기도 했지만, 미묘하게 달라진 사람들의 시선이라든가, 저를 대하는 태도가 어색하고 쑥스러워 태화당 밖으로 나가기가 부끄러웠다.

“하면…….”

“또 무슨 말을 하려고.”

“자경전에는…….”

“황후가 그리 궁금하면 그대가 잠깐 다녀오든가.”

“소인이 어찌 갑니까.”

“왜, 못 갈 이유라도 있느냐?”

달리 그런 것은 아니었으나, 자경전에 쉽게 발을 들이기가 뭔가 불편하고 껄끄러웠다. 아무리 황후께서 다정하시고 또 다정하신 분이시라지만, 지금은 회임 중이시지 않은가.

더욱이 이렇게 황제 폐하를 독차지하는 것이 마땅한 도리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다른 후궁들과 그를 나누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다만, 외롭고 힘든 황궁 생활에서 유일하게 제 편이 되어 주었던 황후를 향한 무거운 마음을 쉽게 떨칠 수가 없었다.

“황후의 태를 빌어 나온 아이에게 황위를 물려줄 것이다.”

“예? 아… 예.”

“황태자가 나온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공주라고 해도 나쁘진 않을 거다.”

빙긋이 미소하는 황제의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기하는 슬쩍 입을 다물었다. 서슴없이 복중 태아에 대해 말을 꺼내는 그의 모습이 유난히 즐거워 보였다. 오래 기다리셨으니 당연한 일이겠지만, 아이를 생각하면 마음이 무거웠다.

“그대는 표정이 너무 잘 보여.”

톡톡. 뺨을 다독여주는 황제의 손길에 퍼뜩 정신을 차리자, 눈앞이 아득해질 정도로 깊고 깊은 입맞춤이 이어진다. 어느덧 반쯤 몸을 일으킨 황제가 기하의 목을 끌어당겼다. 아쉽게 닿았다가 떨어지던 입술을 다시 찾아들어 혀를 섞고 숨을 나누면, 금세 눈앞이 어지러워지고, 뜨거운 열기가 치밀어 오른다.

“하…….”

긴 숨을 뱉어내는 기하의 뺨을 어루만지며, 황제는 근사하게 웃었다. 약에 취한 사람처럼 그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명백한 의도가 담긴 손길이 여기저기를 노골적으로 쓰다듬는다.

“황후는 현명한 여인이니, 황태자건 공주건 잘 키울 것이다. 누구보다 반듯하고 어진 황제가 될 테지. 그 아이가 건강하게 자라 부족함 없는 어른이 된다면, 기꺼이 황위를 물려주고 짐은 하야(下野)할 것이다.”

“폐하.”

“더는 누구에게도 자식을 보지 않을 거다. 그러니 이제 그런 표정은 짓지 마.”

“예?”

“뭐냐 그 표정은. 혹, 짐이 다른 후궁을 찾아가 아이를 만드는 것을 두고 보고만 있을 셈이냐?”

“하지만…….”

“하지만?”

“투기(妬忌)를 부려서는 아니 된다고…….”

우물우물 답하다가 기어이 입을 다무는 얼굴이 금세 시무룩해진다. 말로는 아니 된다고 하면서도 표정에 역력하게 드러내는 깜찍함에, 황제는 기어이 웃음을 터트렸다. 완전히 몸을 일으켜 고개를 푹 떨어뜨린 기하의 얼굴을 들여다보자, 민망함에 붉어진 얼굴이 활활 타오른다.

“뭐든 네가 좋은 대로 하라지 않았어.”

“마음이 못났다고 소인이 미워지시면 어찌합니까?”

“못나지 않았다는 거 알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고 하고 싶은 대로 해라. 살랑살랑 애교 부리는 것까지는 바라지 않을 테니, 솔직하게만 말해.”

거세게 퍼붓는 비 때문에 방 안은 눅눅하고 서늘했다. 전장에 나가 있을 때 접한 다른 지방의 장마는 그저 습한 기운뿐이었는데, 제국의 장마철은 서늘하게 내려간 온도 때문에 고뿔 들기 일쑤였다. 현 상궁 또한 작년 이맘때쯤 크게 앓아누웠던 기억이 있어, 기하는 짧게 숨을 내쉬며 제 뺨을 긁적였다.

“어찌 그러느냐.”

“이럴 줄 알았으면 정연군을 부를 걸 그랬습니다.”

“그놈은 또 왜.”

“황자도 장떡을 좋아합니다.”

“그놈이 싫어하는 것도 있더냐?”

먹는 것이라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드는 황자를 떠올리며 황제는 혀를 끌끌 찼다. 어찌 저리 먹보에게만 마음이 약해지는지. 예쁘지도 영민하지도 않은 황자에게 연민을 가지는 것을 어여쁘게 여겨야 할지 어리석다 해야 할지 고민이었다.

“부르면 아니 됩니까?”

“안 돼. 며칠간 너와 둘이서만 보낼 거다.”

“황자도 외로울 텐데.”

시무룩해지는 기하의 음성에 황제가 잘생긴 눈썹을 꿈틀거렸다. 황자도? 황자도? 그렇다면 지금, 저도 외롭다는 뜻인가? 이렇게 단둘이 오붓하게 보내고 있는데?

“마마, 다과 들여갑니다.”

“응, 들어오게.”

따뜻한 차와 모양은 그저 그렇지만 맛은 일품인 꿀타래, 그리고 황제가 특별히 내오라 이른 장떡에서 고소한 냄새가 났다. 현 상궁과 함께 들어온 지밀상궁이 직접 차를 우리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기하는, 문득 제 어깨 위에 벗어둔 용포를 둘러주는 황제의 손길에 놀라 입을 벌렸다.

“비가 퍼부으니 날이 춥다.”

“온돌을 넣었으니 곧 따뜻해질 것입니다. 일단 차부터 드시지요.”

“빈의 몸이 아직 완전히 회복된 것이 아니니, 특별히 신경 써라.”

“예, 폐하.”

찻잔을 조용히 내려두고 뒤로 물러나는 지밀상궁의 곁에 서 있던 현 상궁의 얼굴에 화사한 웃음이 번졌다. 현 상궁, 요즘 저리 자주 웃는 것 같은데 혹 무슨 좋은 일이 있는 건가.

조용히 물러서는 그녀들을 바라보다 시선을 거둔 기하는 조그맣게 찢은 장떡을 직접 입에 넣어주는 황제를 향해 수줍게 미소했다.

“맛이 좋습니다.”

“어릴 때 이렇게 비가 오면 자주 먹었다.”

“폐하도 어서 드십시오.”

“어마마마께서 장떡을 좋아하셨거든.”

이따금 추억을 떠올리는 황제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편안하면서도 쓸쓸해 보였다. 추억이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과 그것을 겨우 추억으로밖에 기억할 수 없는 현실의 씁쓸함에……. 그럴 때마다 뭐라 말을 이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꿀타래도 먹어 보아.”

“이건 너무 귀한 음식입니다.”

“손이 많이 가는 만큼 맛이 좋다. 단걸 너무 먹으면 해롭다만, 그것은 은근히 달곰하니(감칠맛 있게 달다) 천천히 먹을 수 있어 좋다. 어서 먹어 봐.”

“예.”

얇은 실을 촘촘하게 꼬아 만든 것 같은 꿀타래는 입에 넣으면 은은한 단맛에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손이 많이 가고 만들기가 고되어 특별한 날이 아니고서는 쉽게 먹을 수 없는 것이었기에, 기하는 다시금 혼자 우울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을 황자를 떠올렸다.

“동복궁에도 보내라 일렀다.”

“정말이십니까?”

“너 분명 정연보다 짐이 더 좋다 했다?”

“예.”

장난스럽게 던진 말에도 스스럼없이 진심을 고백하며 활짝 웃는 기하를 못 말리겠다는 듯 바라보던 황제는 단정하게 젓가락을 움직여 노릇하게 구워진 장떡을 입에 넣고 씹었다. 한동안 수더분하면서도 기름진 이 음식을 맛보지 못했다. 비가 오면 늘 어머니 곁에서 형님과 함께 나눠 먹었던 소탈한 음식이었다.

쉽사리 그 추억을 꺼낼 수 없었던 이유는 그리움에 허덕이다, 이내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대로 넘어질 것만 같아서였다.

“북성에 사람을 보냈다.”

“…예?”

그대로 포기하고 도망칠까, 두려워서였다.

“북왕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들어봐야지.”

“폐하.”

“응?”

“폐하께 해가 되는 일이라면―.”

이제는 도망칠 수 없다는 걸 안다. 지켜야 할 이가 있고, 함께 나아가야 할 미래가 있고, 지나온 시간이 마냥 아프지만은 않다는 걸 깨달았다.

“기하야.”

들고 있던 꿀타래를 손에서 내려놓고 머리를 숙이는 기하의 손을 붙잡았다. 찬 공기 때문인지 손끝이 유난히 차가운 그를 가볍게 끌어당기자, 어두운 표정과 어울리지 않는 어색한 웃음이 걸린다. 억지로 웃지 않아도 돼. 고요한 황제의 음성에도 기하는 거짓 미소를 쉬이 거두지 못했다.

“설령 북성이 반란을 일으킨다 해도, 짐은 그대를 탓하지 않을 것이다. 그 누구도 그대를 탓할 수 없을 거다.”

“…….”

“하지만 그리된다면, 너는 괴로울 테지.”

“소인을…, 아무 의심 없이 믿으시는 것입니까?”

“그대를 믿지 못할 이유는 없지 않으냐? 그런 의심은 하지 않아. 다만, 네 마음이 다칠까 염려된다. 그러니 더 큰일이 벌어지기 전에, 그가 그만 멈추었으면 좋겠구나.”

“폐하, 허락하신다면 소인이 직접 북성으로 가서 아버님께…….”

“아니.”

그럴 수는 없다. 믿는 것은 오직 이 아이뿐이다. 그의 마음을 믿는다. 진실된 두 눈을 믿는다. 열렬한 고백과 따뜻한 체온을 믿는다. 그것뿐이다, 오직 그것뿐이다. 그 외엔 그 어떤 누구도 믿지 않는다.

“그대를 보낼 수는 없다.”

“아버님께서는 어찌하실지 모르겠으나, 형님께 말씀을 잘 드리면…….”

“이미 한 차례 은밀히 사신을 보냈다. 잘린 손과 함께 서찰이 당도하였지. 반역의 무리 선두에 선 것은 서연이 아니라 서진하다.”

그럴 리가 없는데. 아버님께서는 어떠실지 모르겠지만, 형님께서 이런 일을 벌이시지는 않으셨을 거다. 누구보다 제국을 향한 충심이 가득하셨던 형님이시다. 이모님의 일을 가장 수치스럽게 여기셨던 것도 형님이셨다. 아버님께서는 폐하를 믿지 말라고 하셨지만, 형님께서는 훌륭하신 분이시니 그저 몸 건강히 잘 지내면 된다고만 하셨다.

“폐하, 그것은…….”

덜덜 떨리는 기하의 손끝을 황제는 가벼이 그러쥐었다.

“최선을 다하마. 너의 아비와 형제가 다치지 않도록, 그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아보마.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라.”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얼굴이 금세 어두워졌다. 겨우 끌어올린 입술 끝이 바르르 떨렸다. 그런데도 기하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흐린 얼굴로 희미하게 웃으며 황제의 손을 붙잡았다. 자신보다 조금 서늘하고 커다란 손은, 처음보다 훨씬 다정하고 든든했다.

“소인 때문에 폐하께서 곤경에 처하시는 것은 원치 않습니다.”

“짐이 알아서 잘하마.”

“예, 걱정하지 않겠습니다.”

빙긋이 웃는 미소 속에 녹아든 마음을 잘 알고 있다. 어찌나 어여쁘게 웃는지, 바라보는 것만으로 마음이 지끈거린다.

가족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생살이 찢겨 나가는 것 같은 아픔에 때때로 멍해져, 사리분별을 잃고 날뛰기도 하였다. 못나게 일그러진 마음을 그대로 감싸주었던 이 아이가 또다시 상처를 받게 되는 일은 만들고 싶지 않았다.

“더는 먹지 않을 테냐?”

“소인이 전부 다 먹을 것입니다.”

부러 밝은 음성으로 말하며 활짝 웃는 기하를 끌어안자 달콤한 꿀타래가 입속으로 들어온다.

“짐은 이깟 것보다 네 입맞춤이 더 좋다.”

“소인은 꿀타래가 더 좋습니다?”

“뭐야?”

“농, 농입니다, 폐하.”

“둘이만 있을 때는 뭐라 부르라 했지?”

은밀한 눈으로 내려다보며 기세 좋게 기하의 허리를 끌어안아 제 무릎 위에 앉힌 황제가 그의 단단한 어깨를 감싸 쥐었다.

빗소리가 좋다. 순식간에 미소를 지우고 얼굴을 붉히는 품 안의 정인은 더 좋고. 부디, 이 마음이 즐거운 이 시간이 금세 시들지 않았으면 좋겠다.

“응?”

“류…….”

“다시, 제대로.”

“…륜.”

“더 크게.”

“륜.”

“그래, 잘하였다. 앞으로는 그리 부르는 것이다.”

고개를 끄덕이다 이내 목을 끌어안는 발칙함에, 황제는 기꺼이 웃으며 그의 등을 다독였다.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의 열기를 식히려 스스로 날아든 나비를 일부러 쫓을 필요는 없을 터.

“정말로 폐하의 정인이 된 것만 같아서 좋습니다.”

“틀렸다.”

“틀렸…습니까?”

“정인이 된 것만 같은 것이 아니라, 짐의 하나뿐인 정인이라 하지 않았어.”

자꾸만 얼굴을 보려 드는 황제의 품에 대롱대롱 매달린 기하는 눈을 질끈 감았다. 가슴이 너무 세차게 뛰어 제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지, 환상을 겪는지 모르겠다. 조금 전까지 불안하게 흔들리던 마음이 이렇게 부질없이 지워지다니. 서기하는 정말이지, 불효막심한 아들이다.

“기하야.”

“예, 륜.”

“연모(戀慕)한다.”

쏟아지는 빗소리에도 유난히 크게 울리는 황제의 음성에 기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몇 번이고 다시, 또다시 속삭여주는 음성에 겨우 깨달았다.

이것은 꿈이 아니다. 이것은 환상도 아니다. 나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다.

저녁 수라를 함께 든 후, 황제는 급한 보고가 있다며 휴식을 방해하는 임승지에게 한차례 욕을 퍼부은 후 자리를 물렸다. 함께 있어도 상관없다는 황제의 말에도 기하는 슬그머니 일어났다. 바깥에서는 여전히 비가 퍼붓고 있었고, 우장이 시원찮았는지 옷깃이 젖은 승지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향해 머리를 숙였다.

침소 바깥에는 전보다 많은 궁인이 늘어서 있었다. 황제의 그림자인 금룡대 최정예는 복면을 쓴 채 문 앞을 막아서고 있었고, 그 옆으로 무표정한 얼굴의 서엽이 보였다. 제 처소가 좁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데, 빽빽하게 서 있는 사람들을 보니 민망함에 실소가 터졌다.

“현 상궁.”

“예, 마마.”

“좁은 곳에 이리 많은 사람이 서 있을 이유가 뭐 있나. 필요한 사람만 두고 그만 자리를 물리게.”

“하오나…….”

“밤바람이 차네. 여인들은 몸을 따뜻하게 해야지.”

다정한 미소를 그리며 기하는 천천히 욕탕 쪽으로 걸음을 돌렸다. 늘 황제의 뒤를 따르던 수신전 상궁 나인들은 기하의 다정함에 그의 뒷모습을 멍하게 바라보다, 저마다 얼굴을 붉히며 목소리를 낮춰 저희끼리 수군거렸다.

“물 온도는 맞으십니까?”

“응.”

굳이 목욕 시중을 들겠다고 안으로 들어온 현 상궁은 색이 고운 꽃잎을 가득 띄운 탕 안으로 기하를 밀어 넣었다. 최고급 향유를 섞은 물에서는 달고 고운 냄새가 났다. 그러나 그것은 여인의 분 냄새처럼 향이 짙어 두통이 일 것만 같았다.

“번거롭게 이런 건 하지 않아도 돼.”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것이 피부에 얼마나 좋은 것인데요. 벌써 보들보들 윤이 나지 않습니까? 목욕을 다 하신 후에도 촉촉하면서 좋은 향이 난다고 합니다.”

제 팔을 들어 킁킁 냄새를 맡는 기하의 젖은 머리카락을 빗질하며 현 상궁은 소리 내지 않고 미소 지었다. 임 대장이 무슨 급한 용무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것은 정말로 잘된 일이었다.

매사 영민하시고 뭐든 알아서 척척 잘하시는 마마님이신데, 아무리 생각해도 색사(色事)에는 지나치게 무지하신 듯하니, 물 들어올 때 노 젓는다고 이럴 때일수록 더더욱 부부의 정을 끈끈히 다져놓아야 하지 않겠는가.

“마마.”

“응?”

“폐하께서 앞으로 며칠간 예서 머무신다 하셨지요?”

“응, 급한 일이 없으시다면. 원래 이맘때는 대신들도 입궐하지 않는다고 하시던데?”

“예, 비가 많이 오는 탓에 다들 피해가 없도록 가족과 친지를 돌아보는 시기입니다.”

천천히 빗질하다 멈춘 현 상궁은 이제는 완전하게 아문 기하의 머릿속 상처를 들여다보면서 그의 목덜미 위로 따뜻한 물을 끼얹었다. 보통의 사내보다는 피부가 흰 편이었지만, 상전의 몸엔 유난히 상처가 많았다. 전장에 나가 크고 작은 전투를 치르고 훈련을 받았으니 당연한 것인데도, 그것을 볼 때마다 안타까움과 속상함에 입이 마르는 것만 같았다.

“폐하께서 이리 다정하신 분이신지 몰랐습니다. 황궁 내에 온통 폐하와 마마 얘기뿐입니다.”

“응? 내 얘기?”

“예. 폐하께서 어찌나 애틋하게 마마를 바라보시는지,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니까요.”

기하의 표정이 저녁 내내 어두웠던 것을 떠올리며, 현 상궁은 일부러 씩씩하게 목소리를 높였다. 물론 황궁 담벼락을 타고 넘나드는 소문이란 남의 말 하기 좋아하는 부류의 투기 어린 소리뿐이었지만, 아무렴 어떠랴. 사람의 본성이란 더 많이 가진 자를 시샘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니 마마께서는 다른 건 신경 쓰지 마시고, 폐하만 생각하십시오. 폐하께서 아껴주실수록 몸가짐도 단정하게 하시고요.”

“그래야 하나?”

“그렇고말고요. 한데…….”

등을 밀다 말고 말끝을 흐리는 현 상궁을 슬쩍 돌아보자, 그녀답지 않게 말을 잇지 못한다. 물끄러미 바라보다 고개를 갸웃하니, 멋쩍은 듯 미소를 띠면서 입술만 연신 달싹이는 모습이 평소와 달랐다.

“왜, 무슨 말이 하고 싶은데?”

“그… 혹시, 마마께서…….”

“뭔데 그리 뜸을 들여.”

“혹시나 해서 감히 여쭙는 것이니 솔직히 말씀해 주셔야 합니다?”

“알았으니 얘기나 해보게.”

“혹시, 마마. 일부러 폐하와 합궁하지 않으시는 것입니까?”

“응?”

“그간 마마께서 마음고생이 심하시기는 하시었지요. 한데, 아무리 그렇다고는 해도…….”

다시 말끝을 흐리던 현 상궁은 기하의 목덜미를 천으로 문지르다가 귀 끝이 붉게 달아오른 그의 뒷모습에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바라보니, 아니나 다를까 민망함에 얼굴도 제대로 들지 못하고 입술을 덜덜 떨고 있었다.

“마마.”

한숨이 푹 터져 나오려는 것을 가까스로 참은 현 상궁은 어울리지도 않는 억지웃음을 지으며, 기하의 동그란 어깨를 가볍게 다독였다. 아무리 왕자의 신분으로 귀하게 자라셨다고는 하나, 어찌 이리 무지하신지. 그래도 명색이 전장도 나갔다 오시고 군영 생활도 하셨다는 분이, 숙맥이 따로 없으시다.

“그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당연한 일이고, 중요한 문제입니다.”

“뭐, 뭐가…….”

“소인에게 속 시원히 말씀해 보십시오. 정녕, 마마께서 폐하를 거부하고 계시는 것입니까?”

“아니야.”

“예?”

“아니라고.”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기하는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창피하고 부끄러운 일임이 분명하지만,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었다.

“합궁하시려는 기미도 없으셨고요?”

“…응.”

절로 어깨가 웅크려졌다. 기하는 금세 풀죽은 얼굴로 입술을 쭉 내밀었다. 이따금 열에 들떠 황제를 바라보면서 느꼈던 감정이 한꺼번에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애정이 가득한 눈빛과 다정한 손길에 저도 모르게 마음이 들떠 긴장하고 있으면, 황제는 이내 등을 토닥여주거나 짧게 입을 맞춰줄 뿐이었다. 뭔가 마음이 간질거리고, 피부에 열이 오르고, 조금 더한 것을 원하게 되는데도 황제께서는…….

“현 상궁.”

“예, 마마.”

“혹, 내가 너무 음탕(淫蕩)한 것일까?”

풍덩. 들고 있던 비단을 그대로 물에 떨어뜨린 현 상궁이 어버버, 입술을 떨었다. 음탕이라니, 어디 그것이 고매한 후궁 마마의 입에서 나올 소리던가.

“마, 마마. 저기, 그러니까…….”

“폐하께서는 전혀 그럴 마음이 없어 보이시는데 말이야. 나는 자꾸 뭔가 폐하를 뵈면 가슴이 간질간질하고, 심장도 빨리 뛰고, 열도 나고, 다리에 힘도 풀리는데…….”

시무룩한 얼굴로 중얼거리는 말은 점점 기괴해진다. 이대로 두었다간 더한 말이 나올 것만 같아서, 현 상궁은 급히 기하의 앞으로 다가와 쉿, 하고 제 입을 가리며 신호를 했다.

바로 문밖에 서엽을 비롯한 황제의 그림자가 있다. 혹여 그들 중 누구라도 이런 말을 듣는다면, 그것은 그대로 황제의 귀에 전해질 거다. 혹여 누군가의 입을 타고 흘러가기라도 한다면, 황궁 내에서 웃음거리가 될 것이 분명하고.

“마마. 그것은 너무도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니 절대로 그런 생각은 하지 마옵시고, 또한 이런 얘기는 아무한테도 하시면 안 됩니다?”

“이런 얘길 내가 누구한테 하겠나, 창피하게. 자네니까 하는 얘기지.”

“예, 소인에게는 괜찮습니다. 다만…….”

현 상궁은 부러 목소리와 몸을 낮추며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 하였다.

“폐하께서, 그러니까 전혀 그런 기미를 보이시지 않으셨습니까?”

“무슨 기미?”

“저기, 그러니까… 합궁하자시거나…….”

“입만 맞추시는걸.”

잔뜩 기가 죽은 얼굴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답답해진 그녀는 애써 미소 지으며, 기하의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빗어 넘겼다. 폴폴 김이 나오던 물이 반쯤 식은 탓에 더운물을 조금 더 부었더니, 주변이 뿌옇게 흐려졌다.

“아마 폐하께서 마마를 배려하시는 듯합니다. 하니, 너무 심려치 마셔요.”

“사모하는 마음과 색사(色事)를 나누고 싶은 욕구는 다른 걸까.”

“그, 그럴 리가 있습니까.”

“하긴, 분내 나는 고운 여인도 아니고…….”

“고우십니다. 마마께서는 누구보다…….”

“입바른 소리란 걸 아는데도 기분은 좋네? 한데 나는 폐하만 보면 자꾸 입도 맞추고 싶고, 안기고도 싶고, 안아드리고도 싶고, 더한 것도 하고 싶…….”

“마마!”

“깜짝이야.”

그대로 두었다간 어디까지 갈지 몰라 일단 기하의 입을 막은 현 상궁은 급히 영견을 가져와 그의 머리카락을 탈탈 털기 시작했다. 목 끝까지 순식간에 달아오른 현 상궁을 이상하게 여기면서도, 기하는 더 이상 그녀에게 마음에 담긴 말을 하지 않았다.

과연 정상이 아니었던 거다. 현 상궁이 궁금해서 물어볼 정도면, 정말로 이상한 일인 것이 맞다.

덜 마른 머리카락을 늘어뜨리며 침소 안으로 들어서자, 나른한 얼굴로 반쯤 드러누워 있는 황제가 보였다. 침소를 벗어나기 전만 해도 승지의 긴밀한 보고를 받고 있던 그는, 어느새 용포를 말끔하게 벗어 던지고 가벼운 침의 차림으로 연죽을 물고 있었다.

“벌써 씻으셨습니까?”

“그대가 너무 굼뜬 탓이다. 무슨 목욕을 그리 오래 해.”

“비가 와서 그런지 탕에서 나오기가 싫었습니다.”

“너무 오래 하면 열이 나지 않느냐. 한데 좋은 냄새가 나는구나.”

물고 있던 연죽을 한 손에 쥐고 손가락을 까딱까딱하는 황제에게 다가가니, 다정하게 허리를 끌어안는다.

“이것은 무슨 향이더냐.”

“잘 모르겠습니다.”

“꽃 냄새 같기도 하고.”

목덜미에 코를 박고 크게 숨을 들이쉬는 황제의 체온에 기하는 가볍게 어깨를 움츠렸다. 간지러우면서도 긴장이 되어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현 상궁은 괜히 그런 소릴 해서는. 쓸데없이 폐하의 손짓에 예민하게 반응하게 된다.

“달콤한 향이구나.”

“향유를 발랐습니다.”

“피부에 좋긴 하겠지. 한데, 그대 냄새가 나지 않는다.”

“예? 제 냄새요? 무슨 냄새요?”

팔을 들어 킁킁 숨을 들이쉬는 기하의 엉뚱한 모습에 황제가 파안대소(破顔大笑 : 매우 즐거운 표정으로 활짝 웃는 모습)했다. 놀란 얼굴로 급히 여기저기 냄새를 맡는 모습이라니, 귀여워도 어찌 이리 귀여울 수 있단 말인가.

“네 향기 말이다, 서기하 냄새. 짐은 그것이 더 좋은데, 향유 때문에 그대 향이 나지 않아.”

목덜미에 다시 코를 묻고 크게 숨을 들이쉬는 황제의 입술이 살결에 닿았다. 자신보다 조금 더 서늘한 황제의 체온은 언제 느껴도 기분 좋은 것이었다. 한데 오늘은 기분이 조금 묘했다. 그저 좋기만 한 것이 아니라, 들뜨고 긴장되면서 뺨이 화끈거렸다.

“저기…, 폐하.”

“응?”

연죽을 길게 들이마시며 기하를 품에 안은 황제는 그대로 잠들 것처럼 나른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그윽한 눈매를 마주하려니 자꾸만 입이 마르고, 숨이 가쁘고, 다리에 힘이 풀렸다. 현 상궁은 그것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라 했지만, 황제께서는 절대로 비밀을 만들어서는 아니 된다 하셨다.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말해 보아.”

“폐하께서는…….”

비밀을 만들지 말라 하셨지만, 역시 조금 망설여진다. 혹여 색을 밝히는 후궁이라고 싫어하시면 어쩌나. 정숙하지 않아 실망이라도 하시면 그때는 어떡해야 하지.

“뭔데 그리 뜸을 들이느냐.”

“폐하께서는 혹… 매일 다른 후궁을 안으십니까?”

“뭐?”

“그러니까, 밤이 아니더라도 혹시 다른 후궁이나 상궁 나인을 안으시는 것이온지…….”

“무슨 말을 하는 거냐? 누가 무슨 소릴 하였는데?”

“말씀하여 주십시오.”

“너, 짐이 하는 말은 어디로 들었어? 내 분명, 다른 후궁은 돌아보지 않겠다고 네게 다짐했거늘.”

사내가 열에 들떠 하는 말은 전부 믿어서는 안 된다고 현 상궁이 말했다. 반 정도만 믿어도 충분하다고 하였으니, 그 당시를 떠올리면서 기하는 절대로 다른 후궁을 찾지 않겠다는 황제의 말을 딱 반만 믿었다.

사실 말이 나와 하는 말이지만, 제국의 황제께서 수많은 후궁을 그대로 두실 수가 있겠느냐는 말이다.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투기를 하더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니 잘 이해하고 넘어가자고 몇 번이나 다짐하였는데. 비밀이 있으면 아니 된다 하셔놓고……. 이것은 비밀이 아닌 거짓이니 괜찮다는 것인가?

“무슨 말이 하고 싶어서 그런 표정을 짓는 것이냐?”

“아닙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솔직하게 말해라. 왜 갑자기 그런 말을 꺼냈는지.”

“아니…….”

“어허! 바른대로 말하지 못해?”

버럭 역정을 내는 황제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기하는 이내 입을 다물고는 그의 손을 슬그머니 밀어냈다. 이 와중에도 끊임없이 손등과 뺨, 다리를 쓰다듬던 황제의 손이 순식간에 갈 곳을 잃고 허공에서 멈췄다.

이것이 왜 갑자기 안 하던 투정을 다 하고 그래?

“하루 열 여인도 마다치 않으시던 폐하께서 갑자기 다른 후궁전에 발길을 딱 끊으시고 태화당에만 머무르신다며, 대체 무빈의 방중술(房中術 : 방사(房事)(성적으로 관계를 맺는 일)의 방법과 기술)이 얼마나 뛰어나기에 폐하께서 태화당만 찾으시느냐는 소문에 낯이 뜨겁습니다.”

“과연 낯 뜨거울 소리긴 하다. 방중술이 다 무어냐. 네가 유곽(遊廓)의 기녀도 아닌데, 어디 감히 그딴 말을 지껄여? 내 당장 주둥이를 함부로 나불거린 연놈들을 잡아다 입을 찢을 것이다.”

“그만두십시오.”

팔을 붙잡고 눈을 내리깐 기하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것아, 지금 한숨 내쉬고 싶은 사람은 네가 아니라 짐이다. 방중술? 기가 막혀 웃음도 안 나온다. 방중술이고 뭐고, 뭐라도 제대로 시작했으면 억울하지나 않지. 날이면 날마다 그저 끌어안고 잠들다가, 손이라도 한 번 대려 하면 잠에 취해 발길질이나 하는 발칙한 후궁을 둔 속을 누가 알아줄 테냐.

“폐하를 의심하는 것은 아니나…….”

“그러니까 네 말은―.”

연죽을 저 멀리 던져둔 황제는 제 무릎 위에 기하를 앉히고, 그의 허리를 단단하게 끌어안으며, 습관처럼 어깨를 더듬었다. 멍해진 얼굴에 떠오른 의문을 모르는 척하며 동그란 어깨를 부드럽게 쓰다듬자, 부르르 떨리는 몸이 나긋나긋해서 더더욱 어여뻤다.

“이제 완전히 그대를 내게 주겠다, 그것이냐?”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소인은 진즉 폐하의 것인데요.”

“귀여운 입으로 발칙한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잘하는구나.”

슬쩍 손을 움직이자 완전히 드러난 어깨에 입을 맞춘 황제는 천천히 손바닥으로 보들보들한 피부를 쓰다듬었다. 평소에도 열이 많았지만, 오늘은 피부가 유난히 뜨거웠다. 좋은 향기도 폴폴 났다. 물론 기하의 냄새는 덜했지만, 지금은 그마저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다 하다, 이제 서툴게나마 먼저 도발하려 드는 모습도 보이다니.

“어찌 웃으십니까?”

“어여뻐서.”

“괜히 그러시는 것이지요? 소인 민망하지 말라고.”

“새삼 민망할 것이 뭐가 있느냐? 왜, 너 스스로 싫다고 거부하더니 슬슬 후회되었더냐?”

아마 민망했을 테지, 쉽게 말을 바꿀 수는 없었을 테고. 고얀 것 같으니라고. 며칠간 얼마나 끔찍하게 참고 또 참았는지, 몇 번이나 손이 가려는 것을 참으며 이를 악물었는지 알기나 하냔 말이다. 이리 태연하게 말할 요량이었다면, 입을 맞출 때 조금 더 몸을 열기만 했어도 충분했을 것이다.

“그러게 책임지지도 못할 말을 왜 하느냔 말이다. 너, 짐을 골탕 먹이려고 일부러 그랬느냐?”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까?”

“시치미 떼도 소용없어. 이제 안 통한다. 또 취한 척 눈물 짜내기만 해봐라.”

“취해요? 소인이요? 언제 말입니까?”

고개를 갸웃하더니 눈을 깜박이는 기하를 황제는 넋 빠진 얼굴로 바라봤다. 또다시 언제 그랬냐며 물어오는 기하의 얼굴엔 웃음 한 점 없었다.

“너 설마…….”

“……?”

“정말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것이냐?”

“혹, 며칠 전에 술 마시고 취했던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그때 폐하께 무슨 말씀을 드렸습니까?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하셔서, 그런 줄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난처함으로 일그러진 기하의 얼굴을 멍하게 바라보던 황제는 이내 머리를 휘휘 저었다. 아니다. 단호한 음성에 놀란 기하가 황제의 팔을 붙들었다.

“말씀해 주십시오.”

“아니라니까.”

기억하지도 못하는 일을 꺼내 무엇하느냔 말이다. 그런데 기억에 없는 것이면 단순한 주정인가, 아니면 가슴에 담아둔 진심인가?

“소인이, 폐하를 싫다 하였습니까?”

“그럴 리가 있겠느냐. 너, 짐 없인 못 산다며.”

“예. 폐하께서 연심(戀心)을 거두시면 콱 혀 깨물고 죽을 것입니다.”

“웃기지도 않은 소린 그만 거두고, 이리 가까이 와. 입 좀 맞추자.”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빛은 모르는 체하고 싶었다. 아무렴 어떠랴. 마음이 닿아 있다는 것이 이리도 잘 느껴지는데. 술에 취했으면 어떻고, 기억하지 못하면 어떤가. 어차피 그 마음, 언젠가는 서로 다 내보이며 단단한 미래를 기약할 것인데.

지금은 그저 기다리는 것이다. 상처가 완전히 아물어 새살이 뒤덮인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만약 그럴 수 없다면 최소한 지나간 상처로 인해 똑같이 아프진 않길 바랐다.

“폐하.”

“응?”

“…오늘, 안아주시면 아니 됩니까?”

“안고 있지 않으냐.”

“아니요. 그것 말고……. 품에 이리 안아주시는 것 말고, 그러니까…….”

기세 좋게 말을 꺼냈으면 얼굴이나 붉히지 말든지. 지나치게 붉어진 얼굴로 더듬더듬 말을 잇는 기하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황제가 단단히 그의 두 어깨를 쥐었다.

그대로 기하에게 달려든 황제는 입술 위를 혀로 덧그리며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성마른 음성이었다, 그것은. 여느 때보다 뜨겁게 달아오른 체온에 눈앞에 불꽃이 피기 시작했다.

급할 것은 없었다. 밤은 길고, 황제는 맛있는 음식을 천천히 오래오래 음미하는 사람 중 하나였다. 여유롭게 미소하며 기하의 옷깃을 풀어 헤치자, 답지 않게 부끄러워하며 붉어진 얼굴을 가리는 정인은 더없이 애틋하였다.

평소 천진난만하기만 하던 얼굴에 열락이 드리우는 것까지 몹시 어여뻐 황제는 몇 번이나 그의 뺨과 입술,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 아무도 들어오지 말라는 명을 내리고서 가벼운 공력을 일으켜 등불을 모두 끄자, 은은한 달빛 아래 기하의 얼굴이 희미하게 보였다.

“폐…….”

“뭐라 부르라 했지?”

“읏, 흐…, 륜.”

“옳지.”

뺨을 더듬는 손가락을 그러쥔 기하는 제 입술을 매만지는 손끝에 입을 맞췄다. 제 허리를 단단하게 받쳐주는 황제에게 몸을 맡긴 채 그의 탄탄한 어깨와 가슴을 더듬다가, 완전히 침상 위로 몸을 누이고서야 제 손이 달달 떨리고 있음을 느꼈다.

“떨고 있구나, 가엾게도.”

옷깃을 들추는 황제의 손이 유난히 차가웠다. 아니, 제 몸이 절절 끓어올라 상대적으로 지나치게 차다고 느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얇고 하늘하늘한 침의 자락이 그의 손에 풀어 헤쳐져 마르고 볼품없는 상체가 가감 없이 드러나자, 기하는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왜 이렇게 덜덜 떨리는지, 바보 천지가 따로 없었다. 곱고 매끄러운 살결을 지닌 어여쁜 여인도 아닌 것이 대담하지도 못하다면, 무슨 맛으로 딱딱한 저를 안으신단 말인가.

“기하야.”

“으…, 흣.”

저도 모르게 툭 튀어나온 신음에 놀라 얼른 입을 틀어막았다. 자신을 빤히 내려다보고 있는 황제 또한 가슴이 훤히 드러나 맨살이 보였다. 기하는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손을 뻗었다. 혹여 그 잠깐 사이에 또 이상한 소리가 새어 나오진 않겠지.

이제는 지워지면 좋으련만, 도저히 지워지지 않는 초야 때는 그의 이런 모습을 볼 새도 없었다. 벌써 몇 번이나 그의 벗은 몸을 보았지만, 오늘은 이상하게 자꾸만 손이 갔다. 적당히 그을린 피부색이나 잘 다듬어진 근육들이 세세하게 꿈틀거리는 것에 입이 말랐다.

“긴장할 것 없어.”

귓가에서 속삭이는 목소리는 그 여느 때보다 달콤했다. 그런데도 판판한 가슴부터 납작한 배까지 한 번에 쓰다듬는 그의 손길에 절로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목구멍은 간질거리고, 자꾸 식은땀이 나려 하고, 입을 아무리 틀어막아도 신음이 터질 것 같아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기분 좋게 해주마.”

빙긋이 미소하는 황제의 얼굴이 보인 것도 같다.

“폐하…….”

그 순간 거칠게 입 맞춰오는 황제에 의해 입술을 벌린 기하는 예민한 입천장을 간질이는 미끈한 혀의 감촉에 몸을 바르르 떨었다. 부드럽게 휘감다가 거칠게 문질러질 때마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끙끙 앓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꽉 움켜쥔 손을 어쩌지 못하고 고르지 못한 숨을 내쉬는 기하의 몸 위로 완전히 올라탄 황제는 단단하게 틀어 올렸던 자신의 머리카락을 단숨에 풀었다. 나풀거리는, 유난히 결이 좋고 찰랑거리는 검은 머리카락이 파도처럼 넘실거렸다.

“으읏… 폐하, 아픕…….”

기하의 왼쪽 목덜미에 이를 박듯이 입을 맞추고 작정이라도 한 듯 깨물기 시작하는 황제의 눈동자가 뜨겁게 타올랐다. 한 번, 다시 또 한 번. 연신 입을 맞출 때마다 도장이라도 찍힌 듯 짙은 자국이 남았다.

흰 목덜미에 어울리는 절경이라 생각하며 빗장뼈 위까지 입술 도장을 찍은 황제는 아프다며 울상을 짓는 기하의 뺨을 톡톡 쓰다듬었다.

“그만두십시오.”

“어째서?”

“망측합니다.”

“그대가 짐의 것이라는 뜻으로 남긴 것인데, 뭐가 망측하단 말이냐?”

“하지만…….”

“쉿. 한 번 더 그런 소릴 하면 아예 얼굴에 찍어줄 것이다.”

슬그머니 제 입을 가리는 얼굴을 보아하니, 곧 울음이 터질 기세였다. 황자 앞에서는 현명한 어미라도 된 양 굴다가, 제 앞에만 서면 이렇게 귀여운 표정을 지어 보이는 기하가 어찌나 잔망스럽게 느껴지는지. 황제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완전히 옷고름을 풀자, 단박에 표정이 변한다.

“아프면 아프다고 말하고, 좋으면 좋다고 해야 한다. 알겠니?”

“예.”

“네가 아픈 건 하지 않을 거다. 싫은 것도 하지 않을 것이야. 하나, 좋은데도 싫다고 하는 것은 그냥 무시할 것이다.”

“좋은데 어찌 싫다고 합니까?”

천진난만한 표정을 짓는 기하의 목덜미에 연신 입을 맞춘 황제는 날씬한 그의 복부를 쓰다듬다가 봉긋하게 솟아오른 유두를 가볍게 눌렀다.

“조금 있으면 알게 될 것이다.”

단 한 번도 다른 이의 손을 탄 흔적이 없는 깨끗한 피부가 열락으로 물들었다. 성마르게 찾아들었던 초야를 다시 떠올린 황제는 머리를 휘휘 저었다. 백번을 후회해도 되돌릴 수 없다면, 새로운 기억으로 덧씌워주는 편이 낫겠지.

물론 그것을 받아들이는 기하가 기꺼워해야만 그 의미를 찾을 것인데, 제 옷자락을 움켜쥐고 바르르 떠는 주제에 안간힘을 쓰며 웃고 있는 얼굴을 보아하니 쉽지만은 않을 것 같다.

“폐, 폐하?”

“틀렸어.”

“류… 흣, 륜. 아, 잠깐…….”

민감한 몸이다. 몇 번 힘을 가하자 금세 봉긋하게 솟아오른 유두를 희롱하며, 황제는 열기 가득한 눈으로 기하를 내려다봤다.

“흥…, 흡.”

황제는 두 손을 겹쳐 제 입을 틀어막는 기하를 심술궂은 얼굴로 바라보며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어찌 자꾸만 입을 가리고 소리를 내지 않으려 하는지. 낯설어서인가 아니면 수치스러워서인가.

손이 오갈 때마다 자연스럽게 터져 나오는 신음이 얼마나 듣기 좋은지 모르는 순진한 모습이 어여뻤으나, 이것은 확실히 해둘 필요가 있었다.

“입 가리지 마라. 입술도 물지 말고.”

얼마나 질끈 물었는지 그새 잇자국이 나 통통하게 부은 입술을 엄지손가락으로 쓰다듬으며 황제는 얼굴을 찌푸렸다. 연약한 살갗에 금세 생채기가 나, 그대로 입을 맞추면 비릿한 피 맛이 날 것만 같았다.

“나쁜 습관이다.”

“하지만…….”

“견디기 힘들어서 그래? 자연스러운 일이다. 부끄러워할 것 없어.”

다정하게 얼굴을 쓰다듬어도 기하는 말이 없었다. 눈을 피하는 얼굴은 잔뜩 시무룩했고,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조급함이 일었다. 뭐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인가. 혹여 제 생각과 다르지 않음에 후회라도 하는 것은 아닌가. 아니면―.

“합궁 때는 소리를 내어선 안 된다고…….”

“누가 그런 소릴 해?”

“그리 배웠습니다. 그리고…….”

“그리고?”

눈동자를 데구루루 굴린 기하는 한참을 망설이다 무언가 결심이라도 한 듯 입을 열었다.

“초야 때, 폐하께서도 그리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

“사내의 음성은 나던 흥도 깨지게 하니, 얌전히 입을 다물고…….”

아아, 이를 어쩌면 좋단 말인가.

“기하야.”

물끄러미 저를 바라보는 기하의 어깨를 부여잡은 황제는 말을 쉽게 잇지 못했다.

“그러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까?”

“…….”

“폐하.”

“응.”

“왜 그런 표정을 하십니까. 소인은 괜찮습니다.”

뽀얗게 번진 웃음은 처음 보았던 그 어린 날처럼 수줍었다. 상처라곤 받은 적도 없는 것처럼 마냥 희고 어여쁜 얼굴을 내려다보자, 불현듯 눈물이 날 것만 같아서 황제는 얼른 기하를 끌어안았다.

“짐이 잘못했다.”

“괜찮습니다.”

“…….”

“그때는 소인을 기꺼워하지 않으셨지 않습니까. 미우셨을 테니까, 당연합니다.”

“그리 말하지 마라.”

그렇게, 모든 걸 다 이해한다는 듯 말하지 마. 상처받은 마음이 아직 그대로인 주제에, 혼자 괜찮은 척하지도 마라. 아프면 아프다고 말하고, 울고 싶다면 그리해도 돼. 태연하게 웃지 마라. 홀로 상처를 곱씹지 마라. 나를 원망해도 좋다. 그러니, 기하야.

“륜.”

“…….”

“이리 안아주시니, 정말로 행복합니다. 날마다 꿈인 것만 같아서, 몇 번이나 살을 꼬집어봅니다.”

담담한 목소리가 바늘이 되어 심장을 콕콕 찌른다. 몇 번이나 끌어안고, 몇 번이나 마음을 추슬러도 서러움이 각인된 마음이 불안정하게 뛰는 것이 느껴진다.

“그러니 자책하지 마십시오. 소인, 정말로 괜찮다니까요.”

다정하게 등을 다독여주는 기하의 손길에 황제는 가만히 숨을 들이쉬고 내쉬기만 반복했다. 따뜻한 체온에 이제는 익숙한 체향까지 더해지자, 더는 견딜 수가 없었다.

그때부터였다. 폭풍우 같은, 짙고 깊은 입맞춤이 시작된 것은. 차마 숨을 쉴 겨를도 없이 몰아치는 황제의 손길에, 기하는 몇 번이나 숨을 멈추고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몸을 떨었다.

단번에 옷 사이를 가르고 들어온 커다란 손은 지체 없이 기하의 마른 몸을 쓰다듬었다. 제 목을 끌어안은 그의 등을 따라 길게 돋아난 척추뼈를 매만지다 고의(袴衣 : 속옷) 안으로 손을 넣어 통통하게 살집이 오른 둔부를 쓰다듬자, 그제야 푸들푸들 어깨를 떠는 모습이 가련하기만 했다.

괜찮다고 그리 말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어쩌면 스스로를 향한 세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자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응…, 으응.”

반쯤 입을 틀어막고 코로 숨을 쉬며 내뱉는 소리가 유난히 나른했다. 눈을 겨우 뜨고 발그스름하게 물들인 볼을 자신의 목덜미에 비비는 기하를 바싹 끌어안자, 명백한 욕망을 서슴없이 드러내는 살덩이가 느껴졌다. 다리를 오므렸다가 몸을 비비 꼬며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그의 무릎을 벌리게 하자, 눈을 질끈 감고 입술을 몇 번이나 달싹인다.

“괜찮아.”

“흐응, 아…….”

반쯤 벌어진 다리를 완전히 열기 전, 황제는 얇은 고의를 쭉 내리며 기하의 입술 위로 짧게 입을 맞췄다.

그사이 겁먹은 눈동자에 비친 제 모습은 의연한 척하면서도 초조한 빛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괜찮다고, 그렇게 기하의 어깨를 다독이던 손끝이 무안해진 순간이었다. 들끓던 욕망이, 주체하지 못하고 넘실거리던 욕구가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륜, 저기…….”

난처한 빛을 띠는 기하를 그대로 끌어안은 황제는 그의 머리 아래로 제 팔을 밀어 넣었다. 완전히 벌어진 다리 사이로 훤히 드러난 그의 치부를 용포로 덮어주면서, 황제는 몇 번이나 기하의 뺨에 입을 맞췄다.

“저기…….”

“괜찮다.”

손이 닿자마자 싸늘하게 식어버린 사내의 욕망을 모르는 척 무시할 순 없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정염에 끓던 몸이 그렇게 변해버린 것은 순전히 자신의 탓이었다. 그 누구를 원망할 수도, 아쉬운 소리를 할 수도 없었다.

“폐하, 소인은 괜찮습니다. 단지 너무 긴장되어…….”

더듬더듬 말을 이으면서 연신 눈동자를 굴리는 기하의 버릇은 익히 알고 있다. 제 정인은 지나치게 솔직하여 입바른 말은 물론이고, 거짓을 고하지도 못한다. 선의의 거짓을 고할 때조차도 쉬이 눈을 맞추지 못하는 습관을 깨닫지 못했을 리가.

“적당한 긴장은 상관없다만, 네가 제대로 기쁨을 알지 못하면 그것은 의미 없지 않으냐.”

“아닙니다. 소인은 정말로…….”

“괜찮아.”

“안 괜찮습니다. 그러니까, 그러니까요. 소인은 상관없지만, 그… 륜은…….”

저도 모르게 내려가는 시선에 화들짝 놀란 기하가 얼른 고개를 돌렸다. 흐트러진 차림 그대로 얼굴을 붉히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황제가 가볍게 머리를 저었다.

“하면 소인 뜻대로 할 것입니다.”

“괜찮다니까.”

“소인이 괜찮지 않습니다. 사내가 되어 그것을 어찌 모른 척합니까?”

급기야 황제를 밀어내고 몸을 벌떡 일으킨 기하는 흐트러진 옷깃을 추스르지도 않고, 의미심장하게 얼굴을 굳혔다. 그의 손길이 닿는 순간, 몸이 너무 딱딱하게 반응한 탓이다. 싫어서도 아니고, 무서워서도 아니었다. 어찌 된 영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제는 기억에서 희미하게 바래진 나날을 황제와의 관계에 걸림돌로 삼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기하…….”

“가만히 계십시오.”

손끝이 덜덜 떨렸다. 아마 서툴게 옷깃을 풀어 헤치는 기하는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 같지만, 단호함 속에 녹아든 긴장감 어린 손길이 어찌나 떨리는지. 황제는 그가 시키는 대로 얌전히 입을 다물고 동그란 머리꼭지를 내려다봤다.

“애쓸 거 없다.”

바르르 떨리는 손은 좀처럼 갈피를 잡지 못했다. 황제는 그를 다정하게 격려하며 검은 머리를 쓰다듬었다. 까만 눈이 황제를 향했다. 올곧은 마음은 끈끈한 애정으로 뒤범벅되어 용기를 얻은 듯,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기하…….”

망설이는 듯한 입술이 열린 것은 순간이었다. 황제는 느긋하게 몸을 뉘이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빤히 바라보고 있으면 더 부끄러워할 테지. 어색하고 서툰 것은 귀여우나, 부끄럼을 타며 도망치는 일은 이제 아니 된다.

“아니 됩니다.”

기하가 제 피부에 닿은 황제의 손을 밀어내며 반쯤 일어선 그의 옥경(玉莖)을 붙잡고 천천히 손바닥으로 열을 가하자, 나른한 숨소리가 터졌다. 기하는 아직 완전히 단단해지지 않은 살덩이를 천천히 문질렀다.

엉거주춤하던 허리를 굽히고 막 태어난 강아지처럼 혀를 내밀다가, 입술을 오므려 살덩이를 머금었다. 그것은 뜨겁고 단단했으며, 독특한 향이 나는 것도 같았다. 그대로 오른쪽 손을 내밀어 그의 배꼽 주위를 어루만지자,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황제는 기하가 쉽게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다리를 넓게 벌렸다. 새끼 새가 어미의 품을 찾듯, 그의 다리 사이로 몸을 뉘인 기하는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한쪽으로 넘기고는, 작정이라도 한 듯 입술을 크게 벌렸다.

무작정 한입에 머금은 것은 꽤 용기 낸 일이었으나, 그 후가 문제였다. 이에 그대로 닿은 살덩이는 움찔거리며 부피를 늘렸고, 황제는 손이 기하의 귓불을 꾹 눌렀다.

“그리 물면 아프다.”

어린 짐승처럼 낑낑거리는 기하의 목소리에 황제는 웃던 것을 멈추고 기어이 눈을 떴다. 애처로워서 봐주려 했더니, 이대로 있다간 밤이 하얗게 새어도 끝나지 않겠다.

“아흐시니아?”

겨우 이런 자극에 발기하는 제 모습이 낯설고 우스워, 황제는 어깨를 들썩이며 웃고 말았다. 그것이 못마땅한지 잔뜩 찌푸려진 얼굴의 눈매가 사나워진다. 순둥이 서기하가 저런 표정도 지을 줄 알았던가. 그 와중에도 입술을 연신 오물거리는 것이, 어디서 뭘 어떻게 배운 것인지 모를 노릇이었다.

“뭐라는 거냐?”

눈꼬리를 작게 찌푸리더니 한숨을 폭 내쉬고는 입에 물고 있던 것을 뱉으니, 그것은 또 나름대로 아쉬웠다. 어느새 침으로 반질반질해진 입술은 전보다 더 붉고, 보기 좋을 만치 부풀어 있었다.

“아프시냐고 여쭈었습니다.”

“입에만 넣고 있다고 좋다더냐? 그리 이를 세우니 당연히 아프지. 초야 생각에 억울해 물어뜯을 셈이었다면 성공했다만?”

매끈한 턱을 손끝으로 쓰다듬는 황제의 손길은 지나치게 농염했다. 반질반질해진 입술을 엄지손가락으로 문지르다 낮은 웃음을 흘리며 입술을 맞대자, 잠시 그 모습을 홀린 듯 바라보던 기하가 번개를 맞은 것처럼 뒤로 물러서며 급히 도리질했다.

“으응?”

적당히 얼러줄 셈이었다. 어설프게 배우는 것보다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는 편이 낫다. 서툰 것도 귀여웠고, 영리한 아이니 잘 가르치면 된다는 생각이 먼저였다. 한데 어찌 이렇게 깜찍하게 빠져나가려 한단 말인가. 발칙하게 말이다.

“이리 와.”

“입 맞추시려고요?”

“왜, 일일이 네게 허락받고 입 맞춰야 하느냐?”

“이것이 먼접니다.”

“응?”

복잡한 표정을 쉬이 읽을 수가 없다. 저것은 과연 무슨 표정이란 말인가. 억울한 것도 같고, 아쉬운 것도 같고, 분해 보이기도 하는 기하의 두 눈을 말없이 응시하자, 다시 작정이라도 한 것처럼 달려든다.

아직 힘을 잃지 않은 옥경을 손에 쥐고 가볍게 위아래로 흔들자, 보들보들한 손바닥 감촉에 열기가 피어오른다. 고작 서툰 손짓 몇 번에 정(精)을 토해내는 것은 사내의 자존심이 걸린 일이었다.

“그만 되었어. 이리 온.”

“소인 뜻대로 한다고 했지 않습니까?”

어쩐지 고집스러운 음성은 평소 알던 서기하의 것이 아니었다. 황제는 물끄러미 고집스러운 머리꼭지를 바라보다가 이내 체념한 듯 침상에 비스듬히 기댔다. 아무렴 어떠랴. 편안하게 누워 귀여운 모습을 지켜보는 것도 꽤 즐거운 일이니, 맛있는 식사는 조금 미뤄도 괜찮을 테지.

그것은 달리 생경한 느낌도 아니었다. 흔히 일어나는 욕정을 분출하기 위한 몸짓에 지나지 않는, 서툰 자극일 뿐이었다. 다만 황제는 지나치게 예민했고, 또 뜨겁게 흥분했다.

사내치고 작은 입술이 오므라질 때마다, 예민한 표피에 닿는 미끈한 혀가 그의 감각을 뒤흔들었다. 이따금 스치는 날카로운 이의 감촉도 새로운 자극이 되는 것 같아, 자신도 모르게 기하의 머리카락을 쥐고 낮은 신음을 토했다.

기하는 아주 천천히 입술을 벌렸다. 어느덧 완전히 발기한 옥경 끄트머리가 그의 목구멍에 닿았다. 아직 완전히 들어오지도 않은 것이 목젖을 누를 때마다, 저도 모르게 구역감이 일었다.

기하는 얼얼한 목덜미를 손가락으로 긁으며 최대한 이를 세우지 않기 위해 입술을 더 크게 벌렸다. 턱이 뻐근하게 아팠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핏줄이 불거진 기둥을 핥거나, 미적지근한 액이 찔끔찔끔 새어 나오는 선단을 소리 내 빠는 것뿐이었다.

혀끝에 끈끈한 액체가 맴돌자, 비릿한 맛이 느껴졌다. 달지도 쓰지도 않은 밍밍한 맛에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자, 어렴풋이 황제가 웃는 것이 느껴졌다.

기하가 옥경을 머금을 때마다 표피가 길게 늘어졌다 달라붙었다. 완전히 올라붙은 고환을 쓰다듬는 손길마저 조심스러웠다. 한계까지 입안에 넣으면, 듣기 좋은 소리가 심장을 울렸다. 단단한 허벅지를 손바닥으로 짚고 일어나려 하자, 양쪽 관자놀이를 붙잡은 손에서 악력이 느껴졌다.

“아흣…….”

어째서 그런 소리가 터진 것인지는 모르겠다. 붉게 열이 오른 황제의 표정 때문이었는지, 서툴기 그지없는 제 몸짓에 그의 정염이 녹아내리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는지, 아니면 그저 본능적인 욕구였는지.

“기하야.”

목소리가 달았다. 기하는 그 한마디에 귀신에 홀린 사람처럼 반쯤 풀린 눈으로 황제를 올려다봤다. 완전히 벌어진 입술 사이로, 물고 있던 옥경이 빠져나왔다.

황제는 망설이지 않고 기하의 겨드랑이 사이로 손을 넣어 그를 끌어당겼다. 비릿한 액으로 젖은 입술을 손등으로 문질러 닦아주자, 화들짝 놀라며 제 입술을 가리는 모습이 못내 귀여웠다.

“그리 쳐다보니 토끼 같구나.”

황제는 다정했다. 세상에 더할 나위 없이 따뜻하고 다정한 눈으로 기하를 바라보며 그의 뺨을 쓰다듬었다.

“폐하, 저기…….”

“서툴러서 귀여우니, 오늘은 이걸로 대신하자.”

황제의 커다란 눈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그는 기하의 손을 포개 잡고, 침과 액으로 젖은 옥경에 직접 가져다 댔다. 그의 얼굴이 가까웠다. 숨소리는 더더욱 그랬다. 더운 입김이 몇 번이나 내쉬어졌고, 입술이 닿을 듯한 거리에서 그는 속삭이듯 기하의 이름을 불렀다.

손바닥에 닿은 황제의 옥경은 뜨겁고, 단단하고, 질척였다. 맞잡고 있는 그의 손 때문에 쉬이 벗어나지도, 물러나지도 못하는 탓에 영락없이 맹수에게 뒤쫓기는 토끼 같은 모양새가 되었다.

기둥을 위아래로 훑을 때마다, 돋아난 옥경의 맥이 느껴졌다. 한없이 흐트러진 황제의 모습 따위는 인지되지 않았다. 다만, 그처럼 아래로 열기가 몰리려다가도 요령껏 눈치 채고 손을 대려 할 때마다 금세 시들어버리는 무정한 제 몸뚱이에 화가 날 것만 같았다.

“큿…….”

황제의 절정은 길었다. 기하의 손을 포개어 잡고 그 안에서 파정한 그는, 허리를 잘게 떨며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완전히 열기가 가시지 않은 살덩이가 기하의 것과 맞부딪쳤다.

“흐, 폐하. 폐…….”

“쉬잇, 짐이 누구라 했지?”

“으, 응, 류…….”

두려웠다. 무서웠다. 좋았고, 또 싫었다. 온몸에 돋아난 예민한 감각이 살갗을 찔렀다. 이제는 희미해진 기억이 기하의 발목을 움켜쥐었다. 그 순간 싸늘해진 감각에 겨우 눈을 떠 아래를 살피니, 축 늘어진 제 살덩이가 보였다.

황제의 기다란 손이 아무리 자극을 해도, 그것은 도무지 살아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참담함에 눈물이 나려 했다.

“폐하, 소…인은…….”

“나의 빈에겐 가르쳐야 할 것도, 깨닫게 해야 할 기쁨도 넘치는구나.”

“송구합니다.”

“그것은 나의 기쁨이 될 테니, 그댄 아무 걱정 하지 마. 오늘은 그대로 인해 충분히 뜨거웠으니까.”

처음처럼 다정하셨다. 그리고 처음처럼, 난폭하지 않았다.

황제의 손이 기하의 머리를 쓸어 넘겼다. 반듯하게 드러난 이마에 입을 맞추고 품 안으로 그를 잡아당기자, 스스럼없이 제 몸 위로 허물어지는 몸뚱이는 시원하고 단 향이 났다.

“하나하나 가르쳐 주마.”

“…예.”

“하나하나, 새겨주고.”

“예, 폐하.”

“하나하나, 용서를 빌겠다.”

“폐하, 그것은…….”

“그러니 그대, 오늘은 이대로가 좋겠다.”

깨끗하게 지웠다고 생각했는데, 아닌 모양이다.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상처로 남았는지도 모르겠다. 사모하는 마음으로 가릴 수 있다고 자신했는데, 그 마음이 보잘것없었는지도 모른다.

“소인은 괜찮습니다.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그만 꼼지락거려. 계속 그러면 더는 참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솔솔 밀려드는 잠에 취한 사람처럼 황제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완전히 맞닿은 하초를 문지르는 몸짓은 한낮 유희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면 편할 것 같은데, 딱딱하게 굳은 몸뚱이는 바보처럼 꿈쩍하지 않았다.

“폐하, 소인은…….”

“쉿, 곤하다. 이제 이만 자자.”

온화한 숨소리, 뜨거운 체온, 채 나누지 못한 절정이 서러운 밤. 어쩌면 또 다른 아픔으로 후회만 남을지도 모를 그 밤이 아쉬워 몇 번이나 그를 불러도, 황제는 굳게 감은 눈을 뜨지 않았다.

그것이 두렵고 또 무서워서… 그러다가 이내 불안해져서… 기하는 그 후로 오랫동안 쉬이 잠들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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